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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나절

등록일 2021-07-22 17:57 게재일 2021-07-2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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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고가철로가 지나가면서 그 밑으로 길게 그늘을 지운다. 더위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한낮에 그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아 피서를 한다. 들판 한가운데는 사방이 틔어 있어서 어느 쪽에서 부는 바람도 다 맞을 수가 있다. 아무리 찌는 더위라도 웃통을 벗고 앉아서 부채질을 하면 견딜 만한 것이 들판의 그늘이다.

들판에는 벼들만 사는 게 아니라 바람도 산다. 날마다 들판을 거닐면 무엇보다 바람과 친밀해진다. 사계절이 온통 바람의 계절이다. 미풍에서 태풍까지, 열풍에서 삭풍까지 무수한 바람의 스펙트럼에 민감해진다. 사람의 마음결을 느끼듯이 바람의 숨결을 느끼게 된다. 바람에 몸과 마음을 열어놓고 있으면 우주의, 생명의 세세한 기미까지 감지하는 감성이 살아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한 폴 발레리의 시구도 아마 그런 감성의 일단에서 나왔을 것이다.

철로 그늘에 앉아서 바라보는 시야의 절반은 들판과 그 끝의 산이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이다. 하늘과 땅이 반반인 이런 구도가 더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평생 들판을 거닐며 살아오다 보니 아무리 명승절경이라도 시야가 막혀 있으면 나는 답답함을 느낀다. 이 들판은 분지라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들판 한가운데서는 어느 쪽을 봐도 시계의 절반 이상이 하늘이어서 좋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머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직립보행 하는 거라고 했던가, 비록 땅에 발을 딛고 땅에서 먹이를 구하지만 수시로 하늘을 쳐다보며 살아야 인간다운 거라는 생각이다.

여름 들판은 키가 자란 벼들로 진초록 물결이 넘실댄다. 작열하는 햇빛을 뭇 생명의 양식인 유기물로 합성하는 역할이어서 그런지 벼들의 초록은 삼복더위를 압도하는 기세다. 이 들판에는 벼들 말고도 내가 앉아 있는 주변에 개망초꽃도 피어있고 토끼풀과 강아지풀도 있다. 개망초꽃과 토끼풀꽃에는 벌과 나비가 날아든다. 가만히 보면 꿀벌과 나비는 생태가 사뭇 다르다. 꿀벌이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며 부지런히 꿀을 모으는 반면 나비들은 먹이활동 보다는 춤추며 날아다니는 게 더 일인 것 같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개미와 베짱이를 닮았다. 나풀거리며 초록 들판을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들은 무대 위의 발레리나를 연상케 한다. 잠자리도 나비와 베짱이의 생태를 닮았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유유히 날고 있는 잠자리들의 비행에는 별다른 목적이 없어 보인다. 날기 위해서 태어나서 나는 게 곧 삶인 모양이다.

들판에서는 심심하지가 않다. 나비와 잠자리뿐 아니라 이따금 백로도 우아한 날갯짓으로 너울너울 무대를 가로지르고 청둥오리나 산비둘기가 잠깐씩 등장하기도 한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갖가지 형상으로 배경을 바꾼다. 여름들판에서는 아쉬운 것도 없다. 인간사회의 일쯤은 사소한 것이 된다. 물론 그 사소한 것들에 목을 매는 사람도 많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다. 이 여름 나에게 가장 큰 행운은 이 철로의 그늘을 무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어느 재벌의 호화별장과도 바꿀 마음이 없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누가 믿거나 말거나 이 들판의 여름 한가운데서 나는 더 바라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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