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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생명예찬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오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비록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신록의 오월이면 떠올리게 되는 이양하의 ‘신록예찬’ 한 대목이다. 민태원의 ‘청춘예찬’과 함께 교과서에 실리는 바람에 널리 알려진 수필이다. 그렇다. 오월은 온 땅에 신록의 광휘와 함성이 가득한 계절이다. 눈을 돌려 어디를 봐도 길이나 건물 따위 인공구조물을 빼 놓고는 모두가 신록이다. 신생의 신록이 산과 들을 뒤덮고 생기를 뿜어내고 있다. 절망도 좌절도 회한도 비애도 모두 신생의 기운에 묻혀버렸다. 이따금 내리는 빗물과 눈부신 햇빛, 방향을 바꾸어 부는 바람이 신록과 더불어 천지에 가득 생기의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다.높은 산 위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사는 동네는 초록 피부에 돋아난 부스럼딱지에 불과하다. 큰 도시라 한들 조금 더 큰 종양일 뿐이다. 그렇듯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란 대부분이 자연이다. 자연생태계야말로 우리 삶의 절대적 조건이고 부와 권세, 명예 따위 인위적인 조건이란 사소한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인위적 조건을 마치 인생의 전부인 양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 때문에 일희일비하고 때로는 목숨을 걸기도 한다.우리나라는 옛날에 비해 엄청나게 경제사정이 좋아졌는데도 행복지수는 오히려 낮고 자살률은 높아졌다는 통계다. 하루 세 끼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던 시절과는 생각이 너무 달라진 것이다. 아마도 자신보다 형편이 더 나은 남들과 비교를 해서 생긴 상대적인 결핍감이나 열등의식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되는 행불행이란 대부분 그런 것이다. 목숨이 걸린 절대적인 조건이기보다는 마음먹기에 달린 것들이 훨씬 많다는 말이다.생명을 경시하는 현상도 도처에 불거지고 있다. 생태계의 파괴는 물론 사람의 목숨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행태가 자행된다. 부모형제나 제 자식까지 해치는 일도 적지 않으며 제 목숨을 쉽사리 내던지기도 한다.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끼친다. 너무 인간중심적이고 문명 예속적이다. 인류가 만든 문명에 인류가 갇혀버린 형국이다. 루소의 말처럼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세상과 우주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오월은 생명의 계절이다. 생명의 에너지로 충만한 오월의 신록 앞에서는 좌절이나 비관 따위가 침입할 여지가 없다. 우리 생명의 조건 대부분이 자연일진대, 굶어죽지 않을 정도만 되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오월이다. 천지 가득 폭죽처럼 터지는 생명의 예찬이다.

2021-05-13

가정의 달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5월은 가정의 달이라 한다. 유엔에서는 가정의 역할과 책임의 중요성에 대해 정부와 민간의 인식을 재고할 목적으로 매년 5월 15일을 ‘세계 가정의 날’로 제정했다. 우리나라도 1994년부터 같은 날에 ‘가정의 날’ 기념행사를 열어오다 2004년부터는 5월을 ‘가정의 달’로 공식화했다.농경사회에서 가족과 가정은 삶의 근간이었다. 3, 4대가 한 집안에서 생활하는 대가족제도에서는 출산과 양육은 물론 교육, 경제, 문화 등의 활동이 대부분 가정 안에서 이루어졌다.우리나라는 수천 년 이어오던 농경사회가 반세기 전쯤에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돈독하던 가족제도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몇 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에서 부부와 한두 자녀의 핵가족으로 분화된데 이어 자식이 없는 부부나 한부모와 자녀, 독거노인이나 혼자 사는 미혼 남녀의 비율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니 전통적인 가족이나 가정의 개념도 따라서 변질될 수밖에 없다.20대 남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자식이 아버지의 성(姓)을 따라야 한다는 경우는 22%에 불과하고 부모 중 어느 한 쪽의 성을 따라도 괜찮다가 47%, 굳이 부모의 성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경우도 31%나 된다고 한다. 족보나 조상을 따지는 일 따위는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일본인 사유리가 결혼을 하지 않고 기증받은 정자로 아이를 낳아서 화제와 논란이 되고 있다. 입양이나 미혼모들에 이어 또 다른 가족의 형태가 생겨난 셈이다. 심지어는 개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남녀가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 기르는 가족의 형태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가정과 가족의 붕괴를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기보다는 우려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 가정의 달이 생겨난 이유일 것이다.초식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일어서서 걷지만 사람은 출생해서 저 혼자 걷는데 일 년이 넘게 걸린다. 거기다가 성인이 되어 자립하기까지는 2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만큼 가족에 의존하는 기간이 길다는 얘기다. 앞으로는 또 어떤 세상이 올지 모르지만, 아직은 결혼한 부모로 인해 태어나고 양육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대다수이고 그렇게 형성된 유대관계가 인간관계의 기본을 이루는 사회다.아무튼 전통적인 가정의 붕괴가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사회구조적인 측면도 있지만 가치관의 변화도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다. 인습에만 묶여 옛것을 고집하는 것도 문제지만, 개인적 편익이나 경제적 이해 때문에 가족이 불화하고 가정이 와해되는 것은 사회의 윤리적 기반을 흔드는 일이 된다. 돈이나 권력, 학벌이나 명예의 고위층에 올랐던 사람들이 가족의 문제로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바꾸어 말하면 돈이나 권력, 학벌이나 명예 따위로는 살 수 없는 더 근본적이고 소중한 것이 가정에는 있다는 얘기가 된다. 가족 간의 사랑과 헌신, 건강한 가정에서 비롯되는 올바른 심성과 가치관이 바람직한 세상을 만드는 바탕이 된다는 걸 되새기는 오월이다.

2021-05-06

미국과 중국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일제의 식민지가 되기 직전인 조선말기는 지리멸렬한 정국이었다. 오랜 당파싸움으로 만신창이가 된데다 국제정세에 무지몽매한 조정은 불어 닥친 외세의 바람에 갈팡질팡하고,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19세기 말에 네 차례나 조선을 방문한 영국인 비숍 여사는 조선인들의 가난과 불결, 게으름에 놀랐다고 한다. 조선의 백성들이 가난한 것은 노동의 의욕이 낮고 따라서 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인데 이는 부패한 관리들의 수탈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일을 해도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절망과 체념이 백성들을 무기력하고 게으르게 만든 거라는 결론이었다. 거기다 상류층은 사치와 방탕에 절어 있었다고 한다. 맹자에 나오는 ‘國必自伐然後人伐之(나라는 스스로 망할 짓을 한 후에 다른 사람이 멸망시킨다)’는 말처럼 조선은 이미 곳곳에 패망의 징조를 보이는 나라였다.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이 된 것은 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때문이었다. 타력에 의해 불시에 해방은 되었지만, 막상 나라를 다시 일으킬 준비는 되어 있질 않았다. 당연히 좌왕우왕하고 중구난방일 수밖에 없었다. 식자층의 과반수가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고 국민의 70%가 사회주의를 찬성한다는 실정에 남쪽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수립된 것에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의지와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미국과 동맹을 맺고 비호와 원조를 받은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데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혜택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김일성이 도발한 6·25전쟁에 미국을 위시한 유엔의 도움이었다. 미국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 때 대한민국은 없어지고 우리는 지금 김정은을 절대 존엄으로 떠받들어 모시고 사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이 비록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을 도운 것이라 한들 그것이 우리나라를 살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일이다. 반면에 중공군의 개입이 없었으면 남북은 통일이 되었을 것이다. 압록강까지 진격을 해서 한반도의 통일은 눈앞에 둔 순간 중공군의 침입으로 무산이 된 것은 천추의 한으로 남을 일이었다. 전쟁의 발발에서 병력투입까지 중공은 명백히 대한민국의 적국이었다.지금 대한민국 정부의 요직을 장악한 주사파들 중에는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 것이 못마땅할 뿐만 아니라, 6·25전쟁에 미군이 참전해서 적화통일을 막은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미군을 몰아내고 대한민국을 사회주의국가로 만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노선이 반미친중 정책이다.반대쪽 국민들의 반발을 의식해서 겉으로는 아닌 척 위장을 하더니 차츰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대한민국의 근간을 부정하고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의도가 분명한데도 경각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한사코 엇길로만 가는 정권에 불안하기 짝이 없다.

2021-04-29

세계 책의 날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매년 4월 23일은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이다. 국제출판인협회가 스페인 정부를 통해 유네스코에 제안한 ‘책의 날’에 러시아 공화국이 제안한 ‘저작권’의 개념을 포함하여 28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제정하였다. ‘역사적으로 인류의 지식을 전달하고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존하는데 큰 역할을 해온 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도서의 보급이 직접적인 독자뿐 아니라 문화적 전통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발전시키고 이해, 관용, 대화를 기초로 한 사람들의 행동을 고무시킨다는 점을 인정하여서’라는 취지다. 이를 계기로 유네스코는 전 세계적으로 독서, 출판을 장려하고 저작권제도를 통해 지적소유권을 보장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지금이야 각종 지식과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여러 수단들이 획기적으로 발전했지만, 유사 이래 수천 년 동안은 책(문자)이 그 역할을 전담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책이 없었으면 인류의 문명은 수천 년 간 답보상태를 면치 못 했을 것이다. 나 역시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 일반화되기 전까진 지식과 정보의 대부분을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달력을 보다가 23일이 ‘세계 책의 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서가를 둘러보며 이런 저런 감회에 젖게 된다.서재로 쓰는 작은 방을 가득 채운 책들 중에서 희귀본이나 값나가는 책은 하나도 없지만 대부분 손때가 묻어 정이 가는 것들이다. 세계대백과사전과 한국어대사전, 세계의 명화 전집을 비롯하여 동서고금의 사상전집과 문학전집 같은 전집류가 절반가량이고 나머지는 수시로 사 모은 단행본들이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여섯 권짜리 한국수상문학전집이 있다. 당시엔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 여간 큰맘을 먹은 게 아닐 터이다. 권당 단가가 650원이니 전질의 값은 그때 내가 살던 골방의 일 년치 방세와 맞먹는 금액이었다. 결국엔 포기를 하고 말았지만 본격적으로 소설공부를 해 보겠다는 각오가 제법 굳었던가 보다.비좁은 방에 다 들여놓을 수 없어 종이 박스에 담아 베란다에 쌓아둔 책도 적지 않다. 오래된 문예지가 대부분인데 이사할 때 버리려다가 차마 그러지를 못하고 가져온 것이다. 누렇게 색이 바랜 책들 어느 페이지나 군데군데 밑줄이 쳐져 있어 마치 내 삶의 흔적들을 보는 것 같아 가슴에 아릿한 것이 치밀곤 한다. 현대문학, 문학사상, 한국문학. 시문학, 심상, 실천문학,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 소설문학, 문예중앙 같은 월간지나 계간지들이다. 정기구독을 하지 않고 서점에 가서 직접 구입을 한 것은 달마다 한 번씩 서점 나들이를 해서 이것저것 둘러보기 위해서였다.어느 책이나 뽑아서 펼치면 지은이의 생각과 감정, 의지와 열정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날마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철인, 문인, 예술가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어찌 섣불리 어쭙잖은 편견이나 아집 따위에 빠져들 수 있겠는가. 책을 뒤지기보다는 인터넷 검색을 하는 편이 훨씬 쉽고 효율적인 세상이지만, 비좁고 불편한대로 죽을 때까지 책과 함께 살 생각이다. 나에겐 나날이 책의 날이다.

2021-04-22

민들레, 제비꽃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이 땅 어디나 민들레의 영토 아닌 곳이 없다. 갓털(冠毛)을 달고 날아올라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정착해 꽃 피우는 민들레는 누가 뭐래도 이 땅 이 봄의 주인이다. 만화방창 온갖 꽃들과 신록이 저마다 제 영토임을 주장하지만 민들레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시멘트 옹벽 틈새든 시궁창 옆이든 가리지 않고 환하게 꽃을 피운다. 해바라기처럼 큰 키를 갖지 못한 앉은뱅이 꽃이지만 해바라기보다 더 꼿꼿이 해를 쳐다보며 피는 꽃이다. 흔하디흔한 꽃이지만 세상 어떤 꽃보다 밝고 확실한 존재감으로 자족하는 꽃이다.제비꽃은 이름도 많고 종류도 여러 가지지만, 자주색 꽃이 제일 많고 제비꽃이란 이름과도 잘 어울린다. 민들레처럼 씨앗을 바람에 날려 보낼 수도 없고 누가 옮겨 심는 것도 아닌데 널리 퍼져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놀랍다. 작고 흔한 야생화지만 시골 학교에 전학 온 도시 계집애처럼 어딘가 새초롬한 데가 있다. 꽃이 지고 씨방이 여물면 그 안에 자잘한 씨알이 들어있다. “ - 덜 여문 건 하얀 쌀밥/ 다 여문 건 누런 보리밥/ 배고파 칭얼대는 어린 동생 풀밭에 내려놓고/ 아홉 살 누이가 보여주던 제비꽃 도시락” - 졸시 ‘제비꽃’중에서비싼 돌과 나무로 조경을 하고 잔디를 깐 정원에는 민들레도 제비꽃도 골칫거리 불청객 잡초일 뿐이다. 방치를 했다간 얼마 못 가서 그들이 제 영토를 주장할 터이니 품삯을 주고서라도 일삼아 뽑아낸다. 그러나 여기, 민지네 집에는 그런 차별이 없다.“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을 비비고 일어나/ 말없이 손을 잡아끄는 것이었다/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정희성 시인의 ‘민지의 꽃’이라는 시다. “꽃이야”하는 다섯 살 배기의 한 마디가 40여 년 시를 써온 시인의 입을 다물게 한다. 언어의 달인이라 할 시인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시인은 그것을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라고 한다. 시란 이렇듯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도 감동시키는 말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온갖 현란한 말재간도 이 한 마디 앞에서는 무색한 군더더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꽃과 잡초를 구별하는 따위의 분별지(分別智)로는 천지와 소통할 수가 없다. 인간들이 언어로 쌓아올린 온갖 인식체계가 실은 유치원 어린아이의 수준에도 영 못 미치는 예를 흔하게 본다. 예수님도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아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다. 난삽하고 황당한 허위의식으로 점철된 비문(非文)들을 마치 고도한 정신세계의 표출인 양 호도하는 논리들에 현혹되는 세태에도 민지의 말이 필요할 것 같다. “꽃이야!”

2021-04-15

이율배반(二律背反)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기독교 성서의 세례요한은 예수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난 유대의 선지자였다. 제사장 스가랴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요르단 지역의 광야에서 낙타가죽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다. 서른 살이 되던 해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며 갈릴리 요단강 가에서 세례를 베풀고 설교를 하였다. 예수도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과 부유한 상류층인 사두개인들까지 세례를 받으러 오자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가져오라’고 거침없이 독설을 퍼부었다. 그는 헤롯왕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에 대해서도 준열하게 질책하다 감옥에 갇혔다. 헤롯은 그를 죽이고 싶었지만 따르는 무리가 많아 민란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 죽이지를 못하다가,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춤을 춘 의붓딸 살로메가 제 어미가 시키는 대로 요한의 목을 요구하자 쟁반에 담아 선물로 주었다.문익환은 1918년 중국에서 태어난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다. 목회일 뿐만 아니라 신학대학의 교수이자 사회운동가, 통일운동가, 참여시인으로도 활동했다. 친구이자 사회운동가인 장준하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여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등 반독재 운동을 하다 수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재야 민주세력 결집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통일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당시 진보 기독교인들의 인식에 따라 김일성과 회담하고자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방북을 결행했다.문익환 목사의 방북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문득 세례요한을 떠올리며 일말의 기대를 했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투신해온 그의 전력을 감안할 때 헤롯왕을 꾸짖은 세례요한처럼 동족살상 전쟁의 원흉이자 북한주민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종신 집권하는 희대의 독재자 김일성에게 준열한 질책이 있을 거라는 기대였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순교의 자리를 찾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참으로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는 평양도착성명에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일방적으로 한국정부를 비난하는 말만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김일성을 만나 얼싸안고 감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배신과 분노를 넘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어떤 논리나 변명으로도 합리화 할 수 없는, 이율배반이고 자가당착이자 정신상태를 의심케 하는 일이었다.북한은 세계최악의 세습독재 국가다. 그래서 유엔은 2003년부터 해마다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해왔다. 고문, 공개처형, 정치범수용소, 매춘, 영아살해, 외국인 납치 등 인권문제에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는 한편 북한 주민의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의 보장을 촉구하는 것이 그 결의안의 주요 내용이다. 한국의 현 정권은 3년 연속 공동제안국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정의를 위한 촛불혁명으로 탄생했다는 정부가, 민주화 운동권 출신들이 장악한 정권이 정작 동족인 북한의 인권을 외면한다는 건 참으로 해괴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것은 상식과 정상의 회복이다.

2021-04-08

헌신짝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오래 신어서 낡아빠진 신발 한 짝을 헌신짝이라 한다. 요즘은 재활용도 안 되는 골칫거리 쓰레기가 헌신짝이지만, 한때는 낡고 떨어져 못 신게 된 고무신도 엿을 바꾸어 먹는데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다. 달콤한 엿 맛의 유혹을 못 이겨 아직 덜 떨어진 신발을 일부러 돌에 문질러 못 신게 만들어서 엿을 바꾸어 먹는 덜떨어진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헌신짝 버리듯 한다’는 속담은 아마도 그런 고무신을 두고 한 말은 아닐 터이다.고무신이 선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도 있었다. 선거철마다 시골사람들에게 고무신을 한 켤레씩 나누어 주고 표를 부탁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고마워서 찍어주었다. 당시엔 무얼 받고도 모른 척 한다는 건 양심상 도리도 아니고 시골인심도 아니었다. 그런 인심이 요즘이라고 없어진 게 아니라는 걸 지난번 총선에서 보여 주었다.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이란 명목으로 돈을 푼 것이 여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는 데 톡톡히 한 몫을 했을 거라는 얘기다. 더 고약한 것은 옛날에는 후보자가 사비를 털어 고무신을 돌렸는데 요즘은 국민의 혈세를 퍼주고 저들이 생색을 낸다는 것이다. 현 정권의 임기가 끝날 때쯤에는 나라 부채가 천조를 넘을 거라고 하니 더 이상 정권을 연장하게 했다가는 베네수엘라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며칠 앞으로 다가온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는 단연 해외토픽 깜이다. 한 나라의 수도와 제2 도시의 시장들이 나란히 성추행 범죄를 저질러 보궐선거를 하게 된 것이 어느 나라에 또 있는 일인가. 거기다가 전 서울시장은 극단적인 선택까지 했으니 세계의 이목을 끌 쇼킹한 뉴스거리로 손색이 없을 터이다. 그들이 속했던 더불어민주당은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사건 등 중대한 잘못으로 그 직위를 상실하여 재·보궐 선거를 실시하게 된 경우 후보자를 추천하지 아니한다’는 조항을 당헌에 넣고 있다.문재인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의 대표였던 시절에 만든 거였다. 그 당헌에 따르면 이번 보궐선거에는 당연히 두 곳 다 후보를 낼 수가 없었다. 두 시장이 모두 자기네 당 소속인데다 수백억 원의 국고까지 축내게 됐으니 백배 사죄를 하고 후보를 내지 말아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당헌 따위 헌신짝을 팽개치듯 바꿔버리고 뻔뻔스럽게 후보를 내었으니 누구더러 표를 달라는 것인가. 정당의 당헌이란 국민을 향한 약속이기도 하다. 그런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다는 것은 국민을 헌신짝 취급한다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또 그 당 후보에게 표를 주겠다는 사람들은 자청해서 헌신짝이 되겠다는 것이니 누가 말리겠는가.대통령을 향해 신발 한 짝을 던진 국민은 감옥살이를 시키면서, 이 정권과 여당은 수도 없이 헌신짝을 국민들 앞에 던지고 있다. 선거공약과 대통령 취임사로 거듭 다짐한 모든 약속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롭게 하겠다는 대국민 약속들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는 짓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행해온 정권이다. 여태껏 정권과 여당이 국민을 헌신짝 취급했으니, 이번 선거에는 국민이 그들을 헌신짝 취급할 차례다.

2021-04-01

대통령 사저(私邸)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이정규 스웨덴 주재 대사가 SNS에 올린 타게 엘란데르 전 총리에 대한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운동권 출신이었지만 23년간 총리를 하면서 각계각층의 인물들과 스스럼없이 만나 대화와 타협을 했다. …. 총리 관저에서는 공식 집무만 보고 거주는 임대주택에서 했다. 막상 총리에서 퇴임하자 살 집이 없었다. 이를 안 국민들이 한적한 시골 마을에 별장을 지어주었다. …. 55년간 해로한 부인 아이나도 검소했다. 남편이 총리였지만 고등학교 화학교사를 계속했다. 그녀는 남편이 퇴임한 후 한 뭉치의 볼펜을 들고 총무 담당 장관을 찾아가 건네주었다. 볼펜에는 ‘스웨덴 정부’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총리 때 쓰던 볼펜인데 이제 정부에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했다. …. ” 엘란데르 전 총리는 관용차 대신 부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출근했으며, 총리시절 입었던 양복은 색이 바랜 것이었고 신발은 여러 겹의 밑창을 대고 신었다. 그런 검소함은 부인도 닮아서 23년 동안 국회 개원식 때 입은 정장은 한 벌뿐이었다.#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불린다. 노타이에 낡은 통바지, 싸구려 운동화, 헝클어진 머리칼로 유명한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월급의 90%를 기부했고, 관저는 노숙자에게, 별장은 시리아 난민 고아들에게 내주었다. 정작 대통령 자신은 쓰러져가는 시골 농가에 살며 낡은 차를 직접 몰고 출퇴근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재임 기간에도, 또 퇴임 후에도 평범한 농부의 삶을 살고 있다. 물은 우물에서 길어다 쓰고, 빨래도 직접 한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자신의 프로필에 ‘농부’라고 적었다는데 마당에는 무히카 부부가 오랜 기간 가꾼 꽃과 화초가 무성하다. 이런 그를 아는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고 부르지만, 그는 그렇게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고“나는 가난한 것이 아니라 절제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에 거처할 사저를 짓기 위해 경남 양산에 부지를 매입한 과정에 석연치 못한 점이 있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그 중 일부가 농지라서 농사를 지을 목적이 아니라면 살 수 없다는 것과, 9개월 만에 대지로 형질을 변경한 것이 특혜가 아니냐는 것이다. 농지법 6조에는 ‘농지는 자기의 농업경영에 이용하거나 이용할 자가 아니면 소유하지 못 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처음부터 형질을 변경해 사저를 지을 목적이었으니 명백히 농지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는 문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해 마지않는 부동산 대책과도 맞지 않는, 누가 보아도 공정한 과정이나 정의로운 결과로 볼 수는 없는 처사인데, 정작 본인은 사과는커녕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좀스럽고 민망한’ 짓을 그만하라고 나무라는 글을 올려서 논란을 증폭시켰다. 타게 엘란데르나 호세 무히카 같은 세계가 칭송하는 청렴하고 소박한 지도자는 아닐지라도, 불법과 편법까지 동원한 퇴임 후 대책은 부끄러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문재인 보유국’인 것이 자랑스럽다는 소위 ‘대깨문’이라는 자들이 적지 않은 것은 여간 씁쓸한 노릇이 아니다.

2021-03-25

승자독식(勝者獨食)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들 중에는 가장 강한 수컷이 모든 암컷을 독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바다코끼리나 엘크사슴 수컷들이 번식을 위해 벌이는 싸움은 치열하다. 심하게 상처를 입고 패한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하니 죽음을 무릅쓴 경쟁인 셈이다. 가장 우수한 유전자로 번식을 해서 종의 진화를 꾀하려는 본능이라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동물들이 무슨 생각이나 의지로 하는 일은 아닐 터이니 자연이 섭리가 그렇게 작동하도록 되어 있는 것 같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원앙이나 기러기처럼 일부일처를 고수하는 동물도 없지 않다.문명화된 인류사회는 지금 대다수가 일부일처제를 택하고 있지만 다른 측면의 승자독식은 갈수록 더 심해지는 형국이다. 경제는 물론 정치와 문화의 영역까지 경쟁에서 이기는 자가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독차지하는 구조가 일반화 되어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체제에서 승자독식의 무한경쟁은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현상을 가속화하게 마련이다. 소득 상위 10%가 전체소득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불균형이 여러 가지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현실이다.경제논리가 지배하는 경쟁사회에서 승자독식은 당연한 일이 된다. 스타급의 운동선수나 연예인들에게 많은 것을 몰아줄수록 더 상업적 효과가 있다는 계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타들은 돈과 명예를 다 거머쥐는 반면에 2군으로 밀려난 선수들이나 무명의 연예인들은 생계조차 어려운 형편이라고 한다. 심지어 진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학계나 예술계까지 승자독식의 상업적 논리가 통용되고 있다. 거액을 건 현상모집에서 오로지 일등에게만 전액을 지급하는 경우가 그 예다. 사실 일등과 이등의 차이는 거의 없거나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오히려 순서가 바뀔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런 사정쯤은 무시하는 게 상업적 마인드다.정치권의 승자독식은 곧 독재를 부른다. 지난 총선에서 압도적 다수의석을 차지한 여당의 전횡은 바로 그 승자독식의 폐해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공석인 정보위원장 자리를 빼고 국회 17개 상임위원장 자리를 독식한 것에서부터 야당의 비토권마저 빼앗고 공수처법을 가결한 것, 5·18역사왜곡처벌법과 대북전단살포금지법 역시 야권의 반발을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인 것, 검찰의 힘을 빼고 경찰의 권한을 높여주는 검·경수사권조정에 이어 검찰의 수사·기소권 분리, 중대범죄수사청법, 심지어는 판검사는 선거 일 년 전에 사퇴하지 않으면 출마할 수 없게 하는 속칭 ‘윤석열출마제한법’까지 발의를 해 놓고 있다. 이 모두가 적폐청산이니 검찰개혁이니 허울 좋은 명분을 갖다 붙이지만 오로지 권력의 안위와 정권 연장을 위한 입법농단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짓들이다. 승자독식은 결국 문명사회를 위협하는 야만이요 재앙일 수밖에 없다. 권력의 속성이 그렇고 상업주의 속성 또한 그런 것은 우리의 뇌리에 승자독식을 용인하거나 미화하는 사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긴 자들에게 박수치고 환호하는 심리가 그런 사회를 조장한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일말의 책임은 있는 것이고.

2021-03-18

봄갈이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날마다 산책을 하는 들판이 말끔히 봄단장을 했다. 겨우내 굳어있던 논바닥을 갈아놓은 것이다. 쟁기로 논을 갈던 시절에는 이른 봄이면 여기저기 소모는 소리가 온종일 들판을 울렸는데, 요새는 트랙터가 참 쉽게도 갈아엎는다. 논을 갈아 놓으면 공기에 노출된 속흙에 미생물의 번식이 왕성해져서 지력이 좋아진다. 식량이 모자라 이모작으로 논에도 보리를 심었던 지난날엔 모내기철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보리를 베어내고 논갈이를 했지만, 지금은 미리 논을 갈아 놓은 채로 봄철 내내 바람과 햇볕을 쐬고 눈비를 맞게 한다.논밭은 한 해만 묵혀 두어도 온갖 잡초가 길길이 자라서 묵정밭이 되고 만다. 쑥대와 억새와 망초 같은 거친 풀들을 베어내고 쟁기로 깊숙이 갈아엎어야 다시 옥토가 된다. 물론 농사를 짓는 일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듯이 논밭은 수시로 돌보지 않으면 금방 잡풀이 우거진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안다.농작물을 잘 키우려면 물을 대고 거름을 주는 것보다 풀과의 전쟁이 더 큰일이라는 것을. 요즘은 아예 잡풀이 나오지 못하도록 비닐로 멀칭을 해서 김매는 일손을 대신한다.사람의 마음 밭도 수시로 갈지 않으면 황폐해진다. 편견이나 고정관념, 맹신 따위로 굳어진 마음 밭에 탐욕과 거짓, 적개심 같은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묵밭이 된다. 심지어는 그렇게 무성한 잡초를 오히려 풍성한 농작물로 여기는 사람들도 적지가 않은 것 같다. 재물이나 권력, 명예 따위의 열매는 바로 그런 잡초들에 열린다는 믿음이다. 저 혼자 그렇게 살다 죽겠다는 걸 말릴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그것이 곧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이 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마음이 황폐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란 삭막하고 패역한 황무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봄맞이를 위해서 논갈이를 하듯이 사람들 마음 밭도 봄갈이를 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오래 돌보지 않아서 묵정밭이 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고요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은 늘 무엇에 쫓기듯 사느라 차분히 자기성찰을 할 겨를이 없다고 한다. 일이 많아서 바쁜 사람도 있겠지만 시간이 있어도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왠지 제 마음을 들여다보기 거북하고 싫어서 일부러 외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슨 이유로든 오래 살피지 않고 묵혀둔 마음 밭은 굳어지고 잡초가 우거지게 마련이다. 우거진 잡초를 제거하고 갈아엎기 위해선 위해서는 낫과 쟁기가 필요하다. 철저한 자기성찰로 낫을 벼리고 종교의 경전이나 성인들의 금언으로 마음을 가는 보습을 삼아도 좋을 것이다. 좋은 책이나 강의를 통한 공부나 돈독한 신앙생활, 명상수련 등이 낫과 쟁기가 될 수도 있을 터이고.나라 역시 갈지 않으면 온갖 비리와 부정이 우거진 묵정밭이 된다. 도무지 자기성찰이라곤 없는 후안무치, 적반하장, 내로남불로 철갑을 두른 자들이 정권을 잡고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다. 다가오는 선거에서는 반드시 갈아엎어야 하는 이유다.

2021-03-11

경칩(驚蟄)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땅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벌레들이 놀란다는 경칩이다. 양력으로는 삼월 초순이니 실지로 봄이 시작되는 절기다. 흔히들 개구리가 놀라서 잠을 깨고 나온다고 하는데 개구리는 물론 벌레가 아니다. 벌레들은 대부분 알이나 번데기로 월동을 하고 애벌레나 성충으로 겨울잠을 자는 것은 장수풍뎅이, 무당벌레, 노린재 등이다. 24절기가 처음 만들어진 중국의 화북지방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선 그런 벌레들은 물론 개구리가 나오기에도 이른 때이다.벌레든 개구리든 놀란다는 표현이 좀 의아하다. 봄기운이 돌아서 얼었던 땅이 풀리면 동면하던 벌레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잠에서 깬다고 해야 더 적절하지 않겠는가. 놀라서 잠을 깬다는 건 갑자기 어떤 충격을 받았을 때나 어울리는 표현이다. 봄비의 차가움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얼었던 땅을 녹이는 봄비라면 새삼스럽게 차가움을 느낄 정도는 아닐 터이다. 물리적 충격 때문이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놀라움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총욕약경(寵辱若驚)이란 말이 있다. 노자 도덕경의 한 구절로, 사랑(寵)을 받든 수치(辱)를 당하든 놀란(驚) 것처럼 하라는 것이다. 얼핏 들어서는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다. 그보다는 총애를 받든 수모를 당하든 담담하고 초연하라는 말이 더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런 일에 놀라기까지 한다는 것은 어딘가 군자답지 못하고 경망스러워 보일 터이다. 도덕경의 해설서에는 ‘경계하라’는 의미로 풀고 있지만 왠지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알아차림’의 상태를 가장 바람직한 경지로 본다. ‘마음 챙김’이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알아차림은 시시각각 자신과 세상을 깨어있는 의식으로 지각한다는 뜻이다. 둔감하게 지나치거나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 오해 따위로 사물이나 현상을 여실하게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온갖 괴로움과 불화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살아 숨 쉬는 것에서부터 생각, 감정, 오감으로 부딪치는 모든 것에 각성의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함부로 판단하거나 추측하지 말고 과장이나 흥분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자명한 진리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말도 있지만, 세상만사에 놀란 것 같은(若驚)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가장 천진무구하고 생기로운 삶의 모습일 것이다. 미세한 봄의 기미에도 놀란 것 같이 하고, 보잘 것 없는 풀꽃 하나에도 경이로움을 갖는 것에 생명의 참뜻이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은 그저 사소하고 미미한 것이 아니라 우주와 생명의 본질과 에너지에 닿아있는 것이기 때문에.벌레와 개구리뿐 아니라 나무와 풀도 동면에서 깨어나는 계절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기운을 시시각각 놀랍게 느끼며 살 일이다. 그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고 소통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실한 사람은 큰 것에도 충실하기 마련이다. 작은 것에도 불충한 사람에게 어찌 큰 것을 맡길 수가 있으랴. 불통과 비리와 파렴치가 판을 치는 정치판을 바꾸는 일도 국민 각자의 사소한 자각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2021-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