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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다섯 명의 죽음, 피하기만 할 건가

김진국 고문 “앞이 깜깜했다.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2009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은 정상문 비서관으로부터 부인 권양숙 여사가 돈을 받아 수사받게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심정을 자서전 ‘운명이다’에 이렇게 기록해놨다.그는 곧바로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혹시 정 비서관이 자신이 한 일로 진술하지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그 혐의는 정 비서관의 것이 아니고 저희들의 것입니다. 저희 집(권 여사)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한 것입니다.” 자서전에서 그는 “의혹 제기 차원을 넘어 실제 수사가 시작된 만큼 이제 사실을 밝히고 국민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고 밝혔다.그 뒤에 특수활동비 횡령 혐의 수사도 진행됐다. 노 전 대통령은 다시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이 죽어, 자기 부하와 진보 진영을 살리려 했다.김대중 전 대통령도 사실인정으로 위기를 넘겼다.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지 한 달째였다. 중국을 방문 중이던 김대중 총재에게 노태우 전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을 수사한다는 보고가 날아왔다. 김총재는 몹시 당황했다. 그렇지만 그는 사실을 시인하기로 결심했다. 공식회견을 통해 20억 원을 받았다고 공개했다. 결국 그는 다음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길은 전혀 다르다. 그의 혐의에 연루된 사람 다섯 명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지난 9일에도 이 대표가 경기도 지사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전형수씨(64)가 또 극단적 선택을 했다.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은 “(이 대표) 본인이 책임질 건 책임져야 하는데 항상 뒤로 물러나 있어 그렇다”라며 “그분도 책임질 건 책임져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이 모두 떠안았지만, 이 대표는 혼자 빠져나간다.전 씨는 이 대표가 성남 시장일 때부터 측근이었다. 그러나 그의 혐의는 이 대표의 지시를 이행한 게 전부다. 그는 성남시 행정기획국장 시절 네이버 관계자들로부터 성남FC 후원금 40억 원을 받아낸 혐의를 받았다. 경기도지사 비서실장으로 쌍방울그룹의 대북 송금에 관여했고, 경기도주택도시공사 경영기획본부장 시절에는 이 대표 바로 옆집을 위장 합숙소로 임차한 혐의를 받고 있다.이재명 대표는 “검찰의 미친 칼질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라고 분개했다. 그러나 그가 받는 혐의는 유죄를 인정하더라도 극단적 선택을 할 정도로 보기는 어렵다. 주변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할 때마다 이 대표는 “고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위직이라 몰랐다”라고 선을 그었다. 유동규 씨는 자신에게 모두 떠넘긴다는 배신감에 이 대표와 결별을 선언했다. 적어도 극단 선택을 한측근들은 이 대표의 혐의를 없는 사실이라고 방어하기 어렵다고 인정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부하 직원의 잘못까지 떠안지는 못하더라도 본인의 혐의를 해명하고, 잘못이 있다면 국민에게 사과하는 것이 정치지도자의 도리다.이 문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 불거졌다. 지난달 말 이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도 체포 찬성(139표)이 반대(138표)보다 더 많았다. 기권 9표와 무효 11표도 찬성에 가까운 의사 표시라고 봐야 한다. 전체 의원 299명 가운데 민주당 소속이 169명이고, 무소속 의원 7명도 모두 민주당 색이다. 이 대표의 결백을 민주당 의원들조차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의미다. 이 대표는 법원의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는 방법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이 무엇을 어떻게 믿으라는 건가.전형수 씨는 유서에서 이 대표에게 “이제 정치를 내려놓으라”라고 말했다고한다. 또 “현재 진행되는 검찰 수사 관련 본인 책임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말도 남겼다고 한다. 정치지도자는 법적으로 유죄만 피하면 되는 게 아니다. O.J. 심슨이 아니다. 더구나 그는 대통령이 되려던 사람 아닌가.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3-12

땃벌떼에 포위당한 국회

김진국 고문 1995년 7월 1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 복귀와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92년 12월 정계 은퇴를 선언한 지 2년 7개월 만이다. 민주당 의원 95명 가운데 65명이 탈당했다. 은밀한 작업 끝에 신당 창당이 공개되자 민주당은 어수선했다.다수 의원이 빠져나간 국회 민주당 의원실 소파에서 노무현 최고위원과 유인태·원혜영 의원이 바둑을 두며 개탄하는 말을 들었다. 정당이 한 사람에 좌지우지되는 꼴에 한숨을 쉬었다. 이들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만들어 독자적 길을 모색했지만 실패했다.그때만 해도 그들은 3김 정치 타파를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3김의 대권욕이 민주화운동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집권 야망 탓에 지역할거 정치를 주도해, 민주화를 왜곡한다고 생각했다. 조순형·제정구·유인태·원혜영·김부겸 등이 88년 한겨레민주당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다. 양김씨(김영삼·김대중)가 후보단일화에 실패해 정권 교체를 실패한 직후다. 대권욕에 사로잡힌 한 사람의 정당 장악을 저지하려던 이들이 만든 민주당에 민주주의는 남아 있는가.요즘 민주당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의 개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과 관련해 ‘배신자’ 색출이 거세다. 이낙연 전 대표 영구 제명 청원은 게시 나흘째인 3일 오후 동의자가 6만 명이 넘었다. 민주당혁신위원회는 총선과 전당대회 등 당내 경선에서 ‘개딸’(개혁의 딸이란 이름의 이재명 친위세력)들의 목소리를 크게 반영하도록 규정들을 고치려 한다. 이 대표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 현역의원들을 물갈이하겠다는 것이다.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 ‘개××’라느니 ‘수박(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라는 뜻) 깨기’라는 말로 공공연히 선동한다. 이상민 민주당 의원은 “나치 시대에 기독교 신자를 색출하려고 십자가 밟기를 강요”한 것과 같은 짓이라고 개탄했다.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도 갈등이 심한 정당을 버리고 나간 적이 있다. 신민당을 버리고 나가 민추협과 통일민주당을 만들었다. 그때는 독재정권의 공작정치에 맞서기 위해 야권 세력을 결집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지금은 당이 가진 재산이 아깝고, 선거에서 거저먹기인 제1야당의 간판이 아까워 나갈 생각은 못 한다. 그때는 민주화라는 명분이 있었다. 지금은 사법 심판 회피 이외에 무슨 명분이 있나. 정치는 명분이다. 명분이 없으면 양아치나 다름없다.1971년 10월 2일 공화당의 4인 체제는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통과시켰다. 화가 난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정보부장을 시켜 김성곤 의원의 코털을 뽑고, 의원직에서 쫓아냈다. 민주당이 50년 전의 공화당처럼 절대자 1인의 정당인가.이승만 전 대통령은 2대 국회를 야당이 압도해 간선제로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국회에서는 의원 내각제 개헌을 시도했다. 그러자 이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 의원들을 의사당에서 연행했다. 백골단, 땃벌떼 등 정치 깡패집단, 마차·우마차에 마의(馬意)·우의(牛意)를 실어 날라 국회를 포위하고, 공개투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수박 깨기’ 한다며 투표 내용을 공개하라고 압박한다. 또 체포동의안이 오면 불참하는 방식으로 의사 표시를 드러나게 만들려 한다. 문자 폭탄을 날리고, 청원압력을 가하는 ‘개딸’은 ‘땃벌떼’와 다를 게 없다.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보이고,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일부 과격분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만 과잉 대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험한 적이다. 소수파였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는 선동정치 과정이 그러했다.국민의힘이 흘러가는 꼴도 비슷하다. ‘친윤’을 선언하지 않으면 모두 배신자로 낙인찍는다. 물갈이가 거론된다. 통신 기술의 발달로, 정제된 소식만 전달하던 시대와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누구나 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 가짜뉴스가 범람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보다 자극적인 선동이 더 잘 먹히는 시대다. 민주주의가 위태롭다. 당 대표와 다른 의견에는 침묵을 강요하는 것도 명백한 민주주의 파괴다.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3-05

껍질을 벗어야 나비가 난다

김진국 고문 요정 정치가 한창이던 시절 잘 나가던 마담은 한눈에 손님의 신상을 꿰뚫어 봤다. 범죄자는 경찰을 알아봐야 단속을 피한다. 보통 사람도 첫인상으로 다른 사람의 직업을 짐작한다. “저 사람은 군인 같다”라거나 “교사 같다”라는 말을 한다.사람이 날 때부터 그 직업을 갖고 나오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오랜 직업적 연륜이 독특한 집단적 성향을 만든다고 믿는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기자의 특성으로만 보면 다른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보다 의심하고, 확인하려 한다. 사실 확인이 직업적 의무다. 말하는 대로 받아쓰다가는 이용당하기에 십상이다. 혹은 구악(舊惡) 기자의 나쁜 추억을 직업적 특성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25일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한 지 하루 만에 정순신 국가수사본부장 임명을 취소했다. 윤 대통령이 24일 임명장을 줬지만, 정 본부장의 임기는 26일부터다. 임기도 시작하기 전에 임명을 취소한 것이다. 정 전 본부장은 아들의 ‘학폭’과 관련해 논란이 커져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다며 사표를 냈다고 밝혔다.정 전 본부장은 20년 이상 검사로 일했다. 특수분야에서 많이 근무했고, 중앙지검 형사부장도 역임했다. 경력상으로 보면 수사 능력이 충분해 보인다. 검찰의 수사권을 경찰로 대폭 이양한 뒤 두 조직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정상화하고, 경찰 수사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그러나 아들 문제와 관련한 그의 처신을 보면 ‘구악 기자’를 보는 듯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보도에 따르면 정 전 본부장은 아들의 ‘학폭’에 대해 피해자의 입장을 외면하고, 아들의 이익을 위해 법을 철저히 이용했다고 한다. 법전문가로서 온갖 제도를 동원했다고 한다. 학폭 문제를 드물게 대법원까지 끌고 가 패소할 때까지 해결을 미루었다. ‘법대로’가 모든 것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보통 아버지라면 할 수 있는 일이라 해도 공인의 자세는 아니다. 그는 당시 서울중앙지검의 인권감독관이었다.하루 만에 뒤집을 인사를 걸러내지 못한 인사 검증 시스템이 정말 걱정스럽다. 원인은 분명하다. 인사 검증 과정에 경찰이 가족의 학폭 관련 내용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경찰이 이런 이유로 부적격 의견을 제시했다면 조국 법무부 장관을 반대한 윤석열 검찰총장 꼴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아도 윤 대통령의 주장이 강하고, 그 앞에서 반대 의견을 피력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인사와 검증을 검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대통령실의 인사기획관, 인사비서관, 법률비서관, 공직기강비서관 등이 모두 검사 출신이다. 과거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맡아온 인사 검증도 지난해 6월부터 법무부에 신설한 인사정보관리단이 맡고 있다. 정 본부장 인사를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취소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실수가 발생한 원인을 바로 잡지 않으면 언제든 반복할 수 있다.윤 대통령의 인사를 보면 TV 드라마에 나온 강화도령 철종이 떠오른다. 강화도 유배 시절 알던 친구와 친형, 두 사람을 데리고 세도정치에 맞선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다. 윤 대통령은 검사를 너무 많이 기용한다. 다른 자리에는 선거 때 도와준 사람들을 밀어 넣느라 무리한다는 인상을 준다. 윤 대통령은 강화도령과 다르다. 세도정치에 숨도 못 쉬는 허수아비 왕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인재를 다 데려다 쓸 수 있는 대통령이다. 공이 있으면 상을 주고, 능력이 있으면 자리를 주라고 했다. 공신을 쓰더라도 그럴만하다는 공감은 얻어야 하지않나. 후보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의 예를 들면서까지 그렇게 약속했다.비슷한 사람끼리만 모이면 어이없는 착각과 정책 실패를 할 수 있다. ‘집단사고의 오류’다. 우리보다 나은 집단은 없다는 오만, 우리가 정의라는 과신,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폐쇄성이 이런 오류로 이끈다. 검사는 인재들이다. 현 정부의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가 적폐 척결이고, 윤 대통령이 박수받는 부분도 그것이다. 그렇지만 과유불급이다. 나비도 과거의 껍질을 벗어야 날 수 있다.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2-26

‘그깟 5년 정권이… 겁이 없나’

김진국 고문 사는 과정이 아귀다툼이다. 그런데도 사회가 유지되는 건 탐욕을 규제할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지배한다. 특히 힘있는 사람들의 절제가 필요하다. 힘이 세다고 거들먹거리면 더 센 사람에게 굴욕을 당한다. 군주민수(君舟民水)다. ‘군(君)’은 딱히 최고 권력자뿐 아니다. 권력 집단 모두에 해당한다. 그나마 법이 힘없는 사람의 권리를 대등하게 보호한다.‘탈진실’(post-truth)의 시대라고 한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대안적 진실’을 받아들인다. 우리 사회도 전형적인 탈진실의 경향을 보인다. 진영으로 쪼개져 다투기만 할 뿐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다. 진영의 이익을 위해 대안적 진실을 끌어안는다. ‘뻔뻔한 진실’이다. 그러니 대화도, 통합도 어렵다.그런데도 진실은 필요하다. 진실이 무너지면 사회도 무너진다. 법 집행과 정의도 사라진다. 그러면 무엇으로 진실을 가려야 하나. 힘으로 진실을 결정할 수는 없다. 그건 ‘뻔뻔한 진실’이다. 상식에 맞아야 한다. 법으로 가릴 수밖에 없다.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이 있다. 바둑에서 큰 말은 잘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힘 있는 사람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정치 거물이라고 처벌받지 않는다면 그건 민주주의도 아니고, 정의로운 사회도 아니다. 진실은 힘이 아니라 법과 상식으로 가려져야 한다.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의 아들이 퇴직금이란 이름을 붙여 50억 원을 받았는데, 1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다. 30대 초반 평범한 직장인이 6년간 근무하고,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았다. 터무니없는 돈이다. 누가 봐도 뇌물이다. 곽 의원이 50억 원을 달라고 조른다는 녹음도 있다. 그런데도 증거가 없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경제단위란다. 증여세 없이 자식에게 재산을 넘겨 주려고 온갖 편법을 쓰는 게 우리 현실이다. 이걸 완전히 외면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최순실 씨와 ‘경제공동체’라고 묶어 뇌물죄를 적용한 검찰과 법원은 어디 갔나.검찰이 제대로 수사를 했다고 믿기 어렵다. ‘50억 클럽’의 다른 혐의자들은 손도 대지 않고 있다. 명백히 돈이 전달된 곽 전 의원이 무죄라면 나머지는 안 봐도 뻔하다. 법은 어렵다. 일반인은 겁부터 난다. 서민들도 ‘높은 분들’과 같은 대우를 받고 싶다. 법 논리를 아무리 정교하게 세워도 평범한 우리 입에서는 “놀고 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7일 “그깟 5년 정권 뭐 그리 대수라고 이렇게 겁이 없나”라며 검찰을 비난했다. ‘그깟 5년’이라니. 겁이 나면 검찰이 수사하지 말아야 하나. ‘5년 뒤 내가 집권하면 어쩌려고 겁도 없이 감히 나를 수사하느냐’는 말로 들린다.힘으로 진실을 가릴 수 없다. 그는 민주당 지역위원장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수사의 대상이 된 피의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거나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헌법상, 법률상 권리를 조목조목 열거했다.이 대표도 법률에 허용된 권리를 충분히 행사할 수 있다. 그러려면 국회 1당 대표로서 검찰을 위협하지 않고, 보통 사람처럼 수사받아야 한다. 더군다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섰던 정치인이다. 침묵을 지키는 권리 행사에 앞서 자신을 지지해준 국민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도리다. 일반인으로서 권리는 다 찾아 누리고, 정치 지도자로서 도덕적 의무는커녕 힘으로 검찰수사를 방해하려는 것은 부끄러운 행동이다.서울중앙지방법원은 17일 이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 요구서를 발부했다. 이 요구서는 정부를 거쳐 국회에 전달되고, 국회가 동의하면 구속 영장이 발부된다. 또 이때 법원이 영장실질심사를 하게 된다. 검찰이 일방적으로 구속하는 게 아니다. 법원이 동의서 발부, 영장실질심사를 한다.더군다나 최종적인 진실은 법원이 가린다. ‘감히 나를…’이 아니라 당당하게 진실을 가리고, 법 해석으로 다투는 것이 정도다. 국민은 진실을 원한다. 또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부터 솔직한 고백을 듣고 싶다.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2-19

쪼개지면 망한다

김진국 고문 2000년 연말.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차기 권력’ 후보들의 정치 발언을 단속했다. 김 대통령은 그해 6월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을 했다. 12월에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1년 1월부터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받은 구제금융을 상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잘 달리던 그가 ‘차기’가 부상하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블랙홀’이었던 개헌처럼 ‘차기’라는 단어는 역대 대통령의 역린이었다.그런데 노무현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은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당적 이탈’을 언급했다. 노 장관의 정치 발언은 처음이 아니었다. 한광옥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노 장관을 불러 “제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게 더 중요하다”라는 김 대통령의 경고를 전달했다.그렇지만 질책받으러 호출됐다는 노 장관의 표정은 당당했다. 청와대 비서실을 여기저기 인사하며 돌아다녔다. 그때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여권 차기 주자로서 노 장관은 5~7번째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다.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3당 합당하며 합의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김영삼 당 대표는 ‘노란 봉투’를 던지고, 눈 덮인 지리산을 오르며, 노 대통령을 굴복시켰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현재 권력’과 동거했던 대표적 ‘미래 권력’이다.‘레임덕’이란 단어는 역대 정부에서 금기어였다. 그런데 집권 세력 안에서 ‘레임덕’과 ‘탈당’을 먼저 끄집어내는 건 의외다. 김기현 당 대표 후보의 후원 회장을 맡았던 신평 변호사는 ‘미래 권력’인 안철수 의원이 당 대표가 되면 윤석열 대통령이 레임덕에 빠질 수 있고, ‘탈당’해 신당을 창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멘토라는 그의 발언은 당 대표 경선에 얼마나 목을 매는지를 말해준다. 그래도 너무 거칠다. 금도가 필요하다.차기 대권 도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당 대표가 된다고 바로 ‘미래 권력’이 되는 건 아니다. 차기 후보는 당 대표가 되기보다 훨씬 어렵다. 대통령이 지명해서 끝날 문제도 아니다. 스스로 존재감을 보여야 한다. 대통령제에서 임기 마지막까지 남는 과제가 정권 재창출이다. 정권이 넘어가면 5년 치적이 모두 뒤집힐 수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정권 재창출을 위해 차기 후보에게 굴복하는 모양까지 연출했다. 그래도 ‘말 잘 듣는 후계자’는 환상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그랬다.준비하지 않은 후보는 이기지 못한다. 임기 초반부터 ‘현재 권력’과 대립할 수는 없다. 하지만 후보가 될만한 사람의 손발을 모두 묶어 버리면 차기 경쟁에서 고전할 수밖에 없다. 자칫 정권을 넘겨줄 수 있다. 2007년 대통령 선거는 열린우리당이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한나라당의 이명박-박근혜 경선이 결선보다 더 치열했고, 정작 본선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문재인 대통령과 경선 이후 줄곧 ‘문빠’의 공격 대상이었다 후보가 되었지만 실패했다.물론 ‘현재 권력’이 실패하면 정권 재창출이 없다. IMF 사태가 벌어진 김영삼 정부, 집권당이 쪼개지고, 탄핵에 시달리고, 국론 분열됐던 노무현 정부 뒤에는 정권이 넘어갔다. 조그만 이견마저 ‘배신자’로 낙인찍고, 공천 파동이 벌어진 박근혜 정부도 결국 정권을 넘겨줬다. 바닥을 치는 ‘현재 정권’ 아래서는 정권을 재창출할 ‘미래 권력’도 없었다. 문제는 권력 주변 인사들이다. 현재 권력도, 미래 권력도 쪼개면 망한다. 현재 권력이라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쪼개지면 아무것도 못 한다.지지 정당을 쪼개놓고 당선될 미래 권력도 없다. 권력 주변 인사들은 다르다. 자리는 언제나 모자란다. 공직은 한정돼 있고, 지역구는 오히려 줄어든다. 앉힐 사람은 넘친다. 경쟁자를 줄일수록 자기 패거리 몫이 커진다. 당과 나라의 미래보다 패거리가 먹을 게 급하다. 이런 자들의 말에 현혹되면 현재 권력도, 미래 권력도 망하는 길로 간다. 집권당이 혼란하면 국민도 불행하다. 더이상 무리해선 안 된다. 전당대회 이후를 생각하면, 금도가 필요하다.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2-12

양파 까듯, 윤핵관만 남길 건가

김진국 고문 중국 왕조를 보면 대개 스스로 무너진다. 외침으로 멸망한 나라도 먼저 안에서부터 곪아갔다. 조선 시대 당쟁을 변명하는 주장에 솔깃하다가도 반성하게되는 이유다. 외세에 휘둘리던 구한말 정세도 숨이 막힌다. 어찌 그리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권력다툼에 눈이 멀었을까.지금 우리 정치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자기가 잘해서 당선되는 정치인보다 경쟁 후보 실수로 당선되는 후보가 더 많다. 윤석열 대통령도 문재인 정부의 실패 덕을 크게 봤다. ‘내로남불’과 조국 사태로 공정 가치를 갈망하고, 엄정한 법 집행을 요구하는 여론에 업혀 당선됐다.2016년 12월 9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회가 탄핵 소추하려면 재적 의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하는데, 당시 야권과 무소속 의원은 172명. 이들만으론 탄핵소추가 불가능했다. 재적 의원 300명 가운데 234명이 찬성해 가결됐으니,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 가운데 적어도 62명이 힘을 보탰다.탄핵의 첫 번째 이유는 박 전 대통령의 실정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집권당의 분열이 결정적이다. 그해 4월 13일 실시된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 누가 진짜 친박인지 가리는 ‘진박 감별사’가 설쳤다. 당 대표가 공천장 날인을 거부하고, 부산으로 도피하는 희극이 벌어졌다. 선거에 지고 한 달 만에 당이 두 쪽 났다.2004년 3월 12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도 비슷하다. 대선 뒤 친노 의원들이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 노 전 대통령도 탈당해 17대 총선 직전 열린우리당을 지지했다.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 하고 싶다”라고 말한 것이 탄핵 사유가 됐다.‘버려진’ 새천년민주당 의원들을 자극했다. 이들이 한나라당과 손을 잡고, 탄핵을 추진했다. 재적 271명 중 193명이 찬성했다. 노 대통령이 스스로 집권당을 쪼개 탄핵 사태를 초래한 셈이다.국민의힘 전당대회가 시끄럽다. 다음 총선 공천을 좌우할 당 대표를 뽑는 경쟁이니 치열할 수밖에 없다. 과열되면 조금 지나친 말이 오갈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행태는 유치하기 짝이 없고, 다시는 안 볼 사람들 같다.‘윤핵관’들이 경쟁후보를 집단 린치하고 있다. 이철규 의원은 안철수 후보를 ‘반윤’으로 규정하고, “스스로 정체성을 밝히고 심판받으라”라고 했다. “대통령의 인사와 국정 수행에 태클을 걸었다”라느니 “대통령이 한 번도 밥도 차도 안 마셨다”라고 비난했다. 경쟁을 하더라도 유력후보를 모두 ‘반윤’으로 몰아세우는 건 지나치다. 전당대회가 분당대회는 아니다.윤핵관들은 그동안 대표 경쟁 후보가 될만한 이준석 전 대표, 유승민 전 의원, 나경원 전 의원을 차례로 주저앉혔다. 모두 ‘반윤’, ‘악당’으로 낙인찍었다.이제 안철수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앞서니, 또다시 그를 표적으로 삼았다. 본인들에게 그럴만한 빌미가 없었던 건 아니라 해도, 선거를 함께 치러야 할 동지아닌가. ‘탈당이라도 할 거야? 나가주면 우리만 좋지.’ 이런 배짱마저 느껴진다.더구나 대통령은 왜 끌어들이나. 대통령은 국민 통합의 상징이다. 국정을 이끌어가려면 ‘비윤’은 물론 야당의 협조까지 필요한 처지다. 그런데 청와대 참모까지 나서서 대표 후보들을 모욕하고, 적으로 만든다. 나 전 의원을 저출산 고령화위원회 부위원장직에서 해임해 주저앉게 하더니, 안철수 후보 선거대책 위원장을 맡은 김영우 전 의원은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직에서 해촉했다. 익명으로 “안 의원은 윤심이 아니다”, “윤 대통령이 안 의원을 불신하고 있다”라고 흘리고 있다.윤 대통령과 누가 더 가까운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게 우리 집권당의 수준이다. 양파 까듯 다 까서 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다음 총선에서는 윤핵관만 공천하겠다는 건가. 공산당도 아니고 어떻게 단일 색이길 바라고, 충성심 경쟁만하나. 돈과 시간 들여 당을 쪼개고, 지지율 떨어뜨리는 어리석은 일이다. 대통령의 정치 경험이 부족하다고 그를 호해로 만들어선 안 된다.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2-05

공천권은 지역주민에게 돌아가야

김진국 고문 국민의힘이 조금은 정리됐다. 대진표도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다. 3월 전당대회를 마치면 집권당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전당대회를 하게된 건 이준석 전 대표가 대표직을 상실해서다. 그 이후 끊임없이 점수를 까먹는 일만 해왔다. 윤석열 정부 초반을 그렇게 다 보냈다.이 전 대표가 물러난 뒤 여러 여론조사에서 유승민 전 의원이 선두를 달렸다. 당원 여론은 일반 시민과 달랐다. 친윤계 후보들을 지지했다. 유 전 의원은 한참 뒤로 처졌다. 대표 선출 방식에서 당원 투표만 남기고, 일반 여론조사는 없애버렸다. 야당 지지자의 역선택 가능성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유 전 의원을 배제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조치를 더 했다. 하나는 결선투표제 도입이다. 친윤 후보가 여러 명 나와도 표를 모을 수 있게 했다. 그러고도 친윤 후보를 단일화했다. 앞서가던 권성동 의원이 사퇴했다. ‘김-장 연대’를 내세우며 장제원 의원이 김기현 의원을 지원했다. 이 정도면 김기현 의원의 당선을 굳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경원 전 의원이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관망하던 나 전 의원이 출마채비를 차렸다. 그러자 청와대가 나서 제동을 걸었다. 비서실장까지 나서서 윤석열 대통령의 불쾌감을 전달했다. ‘윤심’을 분명히 드러냈다. 결국 나 전 의원이 주저앉았다.관상용 나무처럼 가지치기를 계속했다. 이렇게 되짚어보면 윤 대통령의 분명한 의지가 보인다. 총선 승리다. 전당대회뿐 아니라 윤 대통령의 중대선거구제 제안도 같은 맥락이다. 중대선거구제는 복잡하다. 그 안에서도 많은 변형이 가능하다. 한 선거구에서 당선될 의원을 몇 명으로 할지에 따라 정치 지형이 달라진다. 농촌 지역과 대도시 지역을 어떻게 다르게 구획할지도 판세를 바꿀 수 있다.일부 소선거구를 남겨놓을 수도 있다. 같은 크기의 선거구라도 구획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당락이 갈린다. 게리멘더링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차피 선거법은 고쳐야 한다. 21대 총선은 위성정당이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남겼다. 그것을 반복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선거법 협상은 쉬운 일이 아니다.법을 지키려면 적어도 3월 초에는 선거법 개정을 마쳐야 한다. 국회의원 지역구를 선거일 전 1년까지 확정하게 돼 있다. 다음 총선이 내년 4월 10일이다. 한 달 만에 선거구 획정을 끝낸다 해도 3월 10일까지는 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21대 총선 때는 선거 두 달 전에 선거법을 고치고, 선거구는 선거 한 달 전 겨우 확정했다. 이번에도 법정 시한을 지키기는 어렵다. 집권당 내부 갈등만이 아니다. 국회 절대다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에 대한 검찰수사로 어수선하다. 더구나 선거법은 의원마다 이해관계가 다 다르다.선거제도에 대해 윤 대통령의 구체적인 구상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도 중대선거구제를 던진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내년 총선은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의지다. 모든 대통령이 집권당 승리를 바라겠지만, 윤 대통령은 절박하다. 압도적인 여소야대(與小野大)로 황금 같은 시간을 낭비했다. 내년 총선에서 뒤집지 못하면 바로 레임덕 신세다.또 한 가지는 물갈이다. 이준석 사태의 트라우마가 크다. 검사 시절 정치권 수사를 하면서 기성 정치인에 대한 불신도 쌓였다. 총선을 기해 판을 바꾸려는 생각이다. 뺄셈의 정치를 밀고 가는 것도 마음이 이미 거기에 가 있기 때문이다. 선거제도 변화는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을 흔들게 된다. 이때 공천권을 행사하는 것이 대표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다.그러나 정치는 검찰조직과는 다르다. 상대는 적이 아니다. 처벌 대상도 아니다. 승패보다 협상과 협치가 먼저다. 정치는 원래 의원이 중심이다. 선택은 지역 주민이 한다. 우리도 그랬다. 그러나 5·16 이후 공화당을 조직하면서 중앙당 사무처가 중심이 됐다. 군조직처럼 일사불란하게 됐다. 지역 주민 투표보다 공천이 중요하게 됐다. 야당도 닮아갔다. 민주화는 했지만, 정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그래도 중앙당이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공천권은 지역 주민에게 돌아가야 한다.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1-29

당 대표를 임명하려 하나

김진국 고문 국정이 비틀거린 지 한참 됐다. 절대다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의 압박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힘겹다. 법안 처리가 어렵고, 예산도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국정을 정상화하려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 수사와 내년 총선을 잘 넘어야 한다. 임기 중반 총선은 중간평가다. 패배하면 국회 주도권만 놓치는 게 아니다. 대통령 임기 전반기의 실패를 의미하고, 레임덕을 앞당길 각오를 해야 한다.총선을 지나면 당내 세력 판도가 완전히 바뀐다. 이기려면 좋은 후보를 내야 하지만, 정파적 이해는 좋은 후보보다 ‘내 편 후보’다. 그러니 공천권을 쥔 당대표에 목을 맨다.그런데 윤 대통령의 당무 개입이 불안하다. 취임 이후 줄곧 ‘배제의 정치’를 한다. 국정 지지도가 조금 올랐다고 만족할 일이 아니다. 기존 지지층을 조금 회복한 정도다. 그것만으로는 총선 승리가 불확실하다. 물론 이준석 전 대표의 ‘내부 총질’은 참기 힘들었으리라.유승민 의원이 또 그 길을 갈까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그렇더라도 최근의 행보는 지나치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이준석 전 대표를 밀어냈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유승민 전 의원을 겨냥해 선출 방식을 바꿨다. 그것도 부족해 이제 당내 지지율이 가장 높은 나경원 전 의원을 주저앉히려 한다.지난 11일 한길리서치 조사에서 전체 유권자 지지 1위는 유승민 의원, 국민의힘 지지층에서 1위는 나경원 전 의원이었다. 다른 조사도 대부분 비슷하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참조)결국 윤 대통령이 원하는 사람을 대표로 만들겠다는 말이다. 대통령이 총재를 겸하고, 당 대표를 임명하던 민정당 시절을 떠올린다.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나 전 의원 처신이 옳다는 건 아니다. 당 대표로 나서려면, 석 달 만에 물러날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를 맡지 않았어야 했다. 당헌을 바꾼 뒤 지지율이 앞서가자 갑자기 욕심이 생겼겠지만, 저출산 고령화는 그렇게 가볍게 다룰 문제가 아니다.그렇더라도 나 전 의원을 대놓고 저격하는 대통령실 언행은 이해가 안 된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가 중앙일보에 “나 전 의원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애정이 여전히 크다. 사의를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다”라고 말한 지 이틀 만에 나 전 부위원장을 전격 해임했다. 애정을 가졌는데, 나 전 의원이 자기 구상을 내놓자마자 공개 반박하나. 그런데도 그 일을 계속하라는 건 뭐며, 그만둔다고 발끈해 해임하는 건 또 뭔가. 공개적인 모욕 대신 윤 대통령이 직접 만날 수는 없었나.이중재 평민당 수석부총재는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실패한 양김씨(김영삼·김대중)의 통합을 추진했다. 평민당 회의 도중 쫓겨난 이 부총재가 당료들의 구타와 야유를 받으며 9층에서 옥외 비상계단으로 쫓겨 내려가던 장면이 떠오른다. 6대 국회에서부터 무려 25년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한 정치적 동지였다.박근혜 대통령 시절 ‘친박’, ‘진박’은 어디로 갔나. 위기의 순간 어떤 역할을 했나. 가진 것이 많을 때는 쉽게 버린다. 그러다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된다.정치에서는 51대 49에서 49대 51로 바뀌는 건 쉽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잃는다. 건강한 정당은 여러 가지 의견을 품는다. (和而不同) 다른 의견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이 정치다.이준석 사태의 충격이 정치 초보 윤 대통령에게 힘겨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걸 손아귀에 쥐려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쪼개고 버리면 ‘윤핵관’만 남는다. 의견이 조금 다르다고 ‘반윤’으로 만들 이유가 뭔가. 안아야 한다.나 부위원장은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위하여, 절대 화합”을 공개적으로 외쳤다. 굳이 사정이 있다면 ‘제2의 이준석’으로 낙인찍을 게 아니라 대화로 풀었어야 한다. 그게 정치다. 자신이 낙점한 사람 이외에는 모두 적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다.당장 껄끄러워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지도자다. 경쟁자를 다 쫓아내고 낙점받은 후보가 당 대표가 된다면 그 모양은 또 어떻게 되나.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본사고문

2023-01-15

선거법 개정, 국민의 소리 들어라

김진국 고문 윤석열 대통령이 선거법 개정을 제기했다. 연초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대표성을 좀 더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선거법은 헌법보다 개정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선거법을 개정할 국회의원들의 당락에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2020년 4·15총선에 적용된 준연동형비례대표제의 실패도 의원들의 기득권 탓이다.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은 처음부터 반대했다. 연동형이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위성정당을 만들어 기득권을 지키려 했다. 그렇지만 민주당의 압승만 거들었다.선거법을 개정할 때 의원들은 정당보다 자기 이해부터 생각한다. 의원직을 걸고 당의 이익을 챙기려는 의원은 없다. 연동형은 지역구 의석을 줄여 비례대표 의원을 늘려야 제대로 작동한다. 다수인 지역구 의원들이 반대다.민주당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처리에 정의당을 이용했다. 선거법을 미끼로 이용했다. 그런 뒤에 자기들도 위성정당을 만들어 정의당의 뒤통수를 쳤다. 미래통합당을 핑계로 삼았지만, 욕심이 지나쳤다. 배신의 정치로 정치적 신뢰를 팽개쳤다.현행 제도는 실패했다. 연동형이 잘못이 아니다. 의원들 욕심 때문이다. 위성정당을 막지 못했다. 어설픈 반쪽 연동형을 했다. 이대로 다음 선거를 치를 수는 없다. 다음 총선은 내년 4월 10일이다.소선거구제의 문제점은 분명히 드러났다. 21대 총선을 보자. 서울에서 민주당은 유효투표의 53.5%를 얻었다. 그런데 의석은 83.7%인 41석을 가져갔다. 미래통합당은 41.9%를 얻었지만, 의석은 16.3%인 8석에 불과했다. 경기도에서도 53.9%를 얻은 민주당이 51석(86.4%)을, 41.1%를 얻은 미래통합당이 7석(13.7%)을 가져갔다. 그런데도 비례성을 보완하기는커녕 ‘부익부’(富益富)로 법 취지와 거꾸로 갔다.20대 총선 서울에서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이 각각 12석, 35석, 2석을 얻었다. 정당 투표 비율대로라면 16석, 14석, 15석에 정의당 4석으로 바뀐다. 민주당 40석, 국민의당 0석이었던 경기도도 득표 비율대로라면 두 당이 각각 17석을 얻었어야 했다. 수도권만 보면 비례성을 강화하는 것이 국민의힘에 절대 유리하다.그런데도 국민의힘이 선거법 개정에 더 부정적이었다. 정권을 민주당에 넘기고, 대통령 선거에 이기고도 민주당의 절대다수 의석에 발목이 잡혀 맥을 못 추면서 개별 의원의 당선만 생각한다.윤 대통령이 말한 중대선거구제도 해결해야 할 약점이 있다. 2인 선거구에서는 양대 정당 후보자가 나눠 먹을 가능성이 크다. 유권자보다 정당이 당선을 결정한다. 유신 체제에서 경험해봤다. 몇 인(3~5)선거구로, 어떻게 획정하느냐가 의석수를 좌우한다. 정치적 구획이 될 소지가 크다. 지역별 차이도 있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3~5인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를 시험 시행했다. 9명을 뽑는 광주 시범지역에서 민주당 6명, 진보당 2명, 정의당 1명이 당선됐다. 대구에서는 국민의힘 7명, 민주당 2명이 당선됐다. 민주당은 영남지역에 진출했지만, 국민의힘은 호남으로 가지 못했다.유인태 전 민주당 의원은 과거 농촌지역은 소선거구제, 도시 지역은 중대선거구제로 하는 도농복합형을 주장했다. 한나라당(국민의힘)을 설득하고, 지역 대표성도 살리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하면 영호남 지역 갈등 해소에는 한계가 있다.기존 선거 제도에 대한 문제 인식은 분명하다. 승자독식에 따른 사표(死票)와 의석 분포의 극단적인 널뛰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지역주의를 완화하고, 중간층과 소수 목소리도 정당하게 반영돼야 한다. 위성정당을 막고, 유권자가 당선 순서를 정하는 개방형으로 하면 연동형비례대표제가 가장 적합하다.그렇지만 정파적 이해가 얽힌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중대선거구제도 좋은 대안이다. 표의 등가성을 높이고, 유권자의 뜻에 맞춰 국회를 구성한다는 원칙만 지킨다면 어느 쪽이든 진전이다. 문제는 현행 제도에서 당선된 의원들 손에 결정권이 있다. 정치적 담합이 아니라 국회 밖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더 기울여야 한다.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본사고문

2023-01-08

검은 토끼의 도약을 기다리며

김진국 고문 해가 떠올랐다. 검푸른 동해를 뚫고 2023년의 해가 떠올랐다. 이 해에 우리의 꿈이 담겼다. 우리의 희망이 새겨져 있다. 지난 3년 동안 우리는 코로나19에 시달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세계 경제를 흔들어놓았다. 금리·환율·물가가 한꺼번에 오르는 ‘3고 현상’에 무역수지 적자와 가계부채 증가까지 더한 불황이 덮쳤다. 그렇지만 주변 여건이 어렵다고 좌절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를 단련시키는 자양분으로 삼아 미래를 개척해나가야 한다.이제 그 긴 터널의 끝에 이를 때가 됐다. 개구리가 뛰어오르려면 움츠려야 하듯, 지난 3년을 발판 삼아 이제 토끼처럼 새로 도약할 때다. 전쟁의 폐허에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발전시킨 DNA가 우리에게 있다.계묘년(癸卯年)은 ‘검은 토끼의 해’다. 토끼는 영리하다. 우리는 안팎으로 어려움을 맞고 있다. 힘으로만 밀어붙여 풀릴 형편이 아니다. 좀 더 현명하게 풀어나가야 한다. 꾀 많은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교토삼굴·狡兎三窟)고 한다. 간을 산에 두고 왔다고 속이고 살아난 토끼처럼 지혜를 짜내야 한다. 해답의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판을 뒤집는 창의력이 필요하다.토끼는 온순하고, 평화의 상징이다. 지난 한 해는 무한 대결의 시간이었다. 안으로는 정치가 실종됐다. 대통령은 야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다. 야당 대표와 밥 한번 먹은 적이 없다. 마주 앉아 대화해본 일도 없다. 야당은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았다. 취임 직후부터 사사건건 발목만 잡았다. 스토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통령 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비틀고, 비아냥대고, 시빗거리로 삼았다. 한나라 두 정부의 내전 상황을 연상케 했다.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둘러싼 의혹 수사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정치적 이유로 혐의를 덮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서둘러 결론을 내고,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은, 불법적인 침략과 인명피해를 용납할 수 없다. 더구나 국제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너무 심각하다. 국제 공조가 조기에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기를 기원한다.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발사에 매달리는 북한 정권의 무모한 도발을 끝내는 것도 올해 이루어야 할 목표다.토끼는 겁이 많고, 온순하다. 분에 넘치게 욕심내지 않는 것이 토끼의 미덕이다. 정의가 실현되는 공정한 사회에 대한 기대를 안고 윤석열 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렇게 움직일 때 지지율도 올라갔다. 윤석열 정부는 빚이 적다. 정치를 오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정부가 좁은 인재 풀에 갇혀 ‘윤핵관’ 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문을 좀 더 넓게 열어야 한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고, 모든 자리를 내 사람으로 채우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토끼가 마음 놓고 풀을 뜯는 안전한 나라를 원한다. 북한의 도발로부터 안전한 나라, 핵으로 위협해도 안심하고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나라를 원한다. 미사일을 거꾸로 쏘고, 드론이 서울 상공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모습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노동이 안전해야 한다. 자본도 노조도 노동자의 안전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 인권과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고, 튼튼한 사회안전망으로 굶주림으로부터 안전해야 한다. 거북이가 전령으로 일하는 게 공정이 아니다. 전령은 발 빠른 토끼가 맡아 역할을 잘해 내야 모두 안전해진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공정하다.권력자의 성질대로 휘두르는 정치가 아니라 정치적 경쟁자의 손을 잡고, 상생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틀을 다시 짜야 한다. 현행 선거법은 위성정당을 낳은 법이다. 선거법과 헌법을 10여 년째 만지고 있다. 이제는 매듭을 지을 때다.토끼는 생명력이 뛰어나다. 임신기간이 30일에 불과하다. 한배에 새끼 4~12마리를 낳는다. 새끼는 6~7개월만 자라면 임신할 수 있다. 놀라운 번식력이다. 지혜와 생존력은 현 정세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토끼의 기운을 빌려 어려운 국내외 환경을 이겨내고, 경제가 부활하고 재도약하는 기회의 해로 만들자.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본사고문

2023-01-01

잘못을 고치는 데 주저하지 마라

김진국 고문 2022년 마지막 주가 시작됐다. 정말 큰 일이 많았다.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가 있었고, 정권이 바뀌었다. 북한은 도발을 계속하며 미국을 사정권에 넣었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국제 정세를 흔들어놓았다. 여기에 코로나 후유증까지 겹쳐 세계 경제가 불안하다.어제는 크리스마스다. 기쁨과 희망의 축제다. 그런데 여느 해보다 침울하다. 천주교에서는 크리스마스 전 4주가 대림 시기다. 회개와 속죄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기간이다. 종교가 있든 없든, 무엇이든 간에, 해가 가기 전에 한해를 돌아보고 반성할 시간이다.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를 ‘과이불개’(過而不改)로 선정했다. 『논어』에 나오는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잘못이라고 한다’라는 뜻이다. 같은 책에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라는 말도 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마라’는 말이다.돌아보면 올 한해도 후회투성이다. 잘못인 줄 알면서 저지르고, 같은 잘못을 반복해 저질렀다. 교만해서다. 번번이 후회하면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집권당을 돌아봐도 올 한해는 내분으로 얼룩졌다. ‘윤핵관’이란 단어부터 배타적이지만, 윤석열 대통령과 이준석 전 당 대표 사이의 갈등은 집권 세력에 대한 신뢰를 바닥으로 던져버렸다.탐욕이 넘쳤다. 나라도, 국민도 보이지 않는 탐욕스러운 정치인들이 설쳐댔다. 재판까지 해봐야겠지만 쏟아지는 비리 혐의들이 기가 막힌다. 집권당은 야당을 정당한 국정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야당은 허니문 기간도 주지 않고 새 정부 발목을 잡았다. 자신들이 주장한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도 다수 의석을 내세워 예산 배정을 거부했다. 선거 기간 국민의 심판을 받은 소득주도성장이나 탈원전, ‘검수완박’도 낙선자 공약대로 고수했다. 법안도 밀어붙였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머리가 둘 달린 괴물이 됐다. 어느 쪽으로도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표류 국가가 됐다. 권력을 독점하려 하고, 선거가 끝나면 숨 쉴 틈도 없이 다음 선거 전략을 밀어붙이는 타락한 정치다.핼러윈 참사는 고통을 키우고 있다. 민주당은 유족을 위로하고, 재발 방지책을 찾기보다, 집권 세력을 곤경에 몰아넣으려고 안간힘이다. 집권 세력은 정치 역학만 따지며 무엇이 무서운지 방어적으로 움직인다. 법적 책임만 주장하고, 사과 한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 진심 어린 사과가 그렇게 어렵나. 법의 한계를 뛰어넘은 틈새까지 책임지는 것이 정치인이다. 정무직은 법적 책임만 지는 게 아니다. 정치적 책임도 져야 한다.공자는 ‘신독’(愼獨·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감) 하라고 가르쳤다. 혼자 있을 때마저 긴장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말이 편해지고, 수위를 넘나들 수 있다. 그렇더라도 대통령이 외교 행사 직후 공개 장소에서 품위를 잃은 말을 뱉은 건 분명히 실수다. 사과하고 넘어가면 된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다. 자신의 실수에는 입을 다물고, 언론의 책임 문제만 따지는 것은 옹졸하다.장관은 행정부의 일원이다. 국회의원이 질의하는 것은 국민을 대신해 정부 권력을 견제하는 일이다. 의원의 질의를 본질은 외면하고, 말꼬투리만 잡고 반격하는 것은 정부와 국회의 관계 설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김의겸 민주당 대변인이 번번이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반성하지 않는 것 역시 ‘과이불개’다.올해 대통령 선거 결과는 지난 정부의 ‘내로남불’에 대한 반성이다. 그런데 국민만 후회하고, 반성했을 뿐, 정치권은 오히려 상대를 공격하는 칼날로만 이용한다. 집권당은 ‘너희 정권 때는 더 심했다’라며 자기 잘못을 변명하고, 야당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표를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반박한다. 대화도 타협도 없다. 어정쩡하게 합의한 예산안은 시간에 쫓겨 양쪽 주장을 한 조각씩 떼어 붙여 던져놓았다. 나라 살림인데 철학도, 비전도, 희망도 없다. 며칠 남은 시간만이라도 되돌아보자. 그리고 새해에는 다시 희망을 그려보자./본사고문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2-12-25

당심과 민심 사이, 양당제의 그늘

김진국 고문 국민의힘이 전당대회 규칙을 놓고, 논란이다. 당 대표를 선출하는데 일반 시민 여론을 얼마나 반영하느냐가 문제다. 현행 당헌 26조는 ‘선거인단의 유효투표 결과를 70%, 여론조사 결과를 30% 반영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여론조사 비중을 10%로 줄이거나 없애자는 것이다. 일반 시민의 생각과 상관없이 당원이 원하는 대표를 뽑자는 주장이다.정당은 ‘정치적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집단’이다. 일반 사회단체도 회원들의 의견으로 대표를 뽑는다. 그렇게 보면 정당도 당원의 뜻을 모아 대표를 선출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여론조사를 포함한 건 선거 때 더 많은 지지를 얻기 위해서다. 선거에서 이기는 게 정당의 목표다.물론 당원이 선택한 사람은 중도층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거나, 국민 여론을 반영하면 중도층의 지지를 더 끌어온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당원 투표만 하면 아무래도 후보들이 당원들이 좋아할 주장을 더 많이 하게 된다. 당의 노선이 강성으로 흐를 수 있다.국민의힘이나 민주당 모두 당원 투표로만 대표를 선출해왔다. 여기에 여론조사를 처음 도입한 건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이다. 2004년 탄핵과 차떼기 후폭풍으로 총선에서 참패한 뒤 당원 외에 국민여론조사 50%를 반영하도록 바꾸고, 2년 뒤 30%로 줄인 뒤 지금까지 유지했다. 민주당은 2013년에야 국민여론조사를 도입했다. 이재명 대표를 선출한 지난 전당대회를 앞두고도 여론조사 비중이 논란이었다.“경기 도중 골대를 옮기느냐”는 지적이 옳다. 경기 규칙은 여유 있게 미리 고쳐야 공정하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는 물론 정당 내부 선거도 초읽기로 규정을 고치는 나쁜 습관이 우리 정치권에 있다. 후보들 윤곽이 드러난 뒤 규칙을 바꾸는 건 위인설법(爲人設法)이 될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도 선거 막판에 후보자에 맞춰 게리맨더링 하는 게 버릇처럼 됐다.굳이 내년 3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대표 선출 규칙을 바꾸려는 국민의힘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답답한 심정은 이해는 간다. 미디어토마토가 지난주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 적합도를 물은 결과 유승민 전 의원이 37.5%로 압도적 1등이고, 안철수 의원 10.2%, 나경원 전 의원 9.3% 순으로 나왔다. 그런데 국민의힘 지지층에서는 나 전 의원이 18.0%, 한동훈 법무부 장관 16.0%,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14.2%, 안철수 의원 13.6%, 김기현 의원 11.0%였고, 유 전 의원은 8.7%로 6등이다. 반대로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유 전 의원이 60.0%로 압도적 1위다. 다른 조사도 대체로 비슷하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중도층 확장도 좋고, 민심 반영도 필요하다. 특히 선거에 나갈 후보는 중도층 확장성이 당락을 가른다. 그렇지만 당원에게는 비호감 대상이면서 경쟁 정당 지지층이 열광해 당 대표가 된다면 문제가 있지 않은가. 극심한 진영정치, 팬덤 정치, 증오 정치가 낳은 부산물이다.국민의힘 안에도 문제가 많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이제껏 여야 협치는커녕 당내 갈등도 계속되고 있다. 잊을만하면 ‘윤핵관’ 논란이 반복된다. 이러다가는 거수기가 되기에 십상이다. 차기 정권 재창출을 위한 기반은 어림도 없다. 당심-민심 논란도 국민의 마음을 얻을 카리스마 있는 후보가 없기 때문이다.그런데 여론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은 왜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당원들이 모인 그런 정당에서 대표가 되려 할까. 왜 정치적 견해가 같은 동지들과 따로 정당을 만들지 않을까. 문제는 한국에서 양대 정당 이외에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점이다. 제3정당을 만들어 성공한 예가 없다. 유 전 의원도 경험이 있다. 제3정당은 고생길이다. 선거제도를 포함해 모든 규정이 양대 정당에 지나치게 유리하다.정상적인 정치에서 당심과 민심이 다르면 다른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민주당도 갈등과 분열 요인을 안고 있다. 억지로 양당으로 묶는 건 부당한 특혜다. 정치적 견해에 따라 정당을 만들고, 연대할 수 있도록 선거법부터 고쳐야 한다. 정치적 자유의 기본이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본사고문

2022-12-18

대북 관계로 재미 볼 때는 지났다

김진국 고문 쌍방울이 북한에 수백만 달러를 몰래 전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경기도 지사 시절 쌍방울이 북한과의 통로 역할을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지난달에는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이것을 ‘문재인 정부 차원의 대북 송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윤건영 민주당 의원은 “문재인 정부는 북한에 1원 한 장 준 적이 없다”라면서 “백번 천번 양보해 쌍방울이 검찰 주장대로 북한에 정말 돈을 줬다 하더라도, 그게 대체 왜 문재인 정부 차원의 ‘공작’이란 말이냐”라고 반박했다. 이재명 대표의 문제에 문재인 전 대통령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항변으로 들린다.진실은 재판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쌍방울이 아니라도 북한으로 달러가 흘러 들어가는 문제는 심각하다. 핵과 미사일이 되는 자금이기 때문이다. 한때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권이 북한과의 우호 관계를 경쟁하던 시절이 있었다. 대통령 후보가 되기 전 북한을 다녀오는 걸 통과의례로 여겼다. 대통령의 업적으로 가장 욕심을 낸 것도 남북관계다. 그럴수록 북한은 대가를 요구했다. 정치인뿐 아니다. 민간 접촉에도 돈을 요구했다. 북한 입국 비자가 달러였다.남북 화해의 상징인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도 북한의 달러박스였다. 김대중 정부 때 ‘햇볕정책’ 세례를 받았다. 조건 없이 포용하면 상대도 우리 손을 잡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북한은 화해 정책을 이용해 핵 개발에 몰두했다. 입으로는 ‘비핵화’를 외치면서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이 됐다. 미사일은 미국 전역을 위협할 정도로 발전했다.북한의 핵무기는 누구를 위협하나. 정말 자위용으로 갖고만 있겠다는 건가. 지난 4월 김정은은 “우리의 핵이 전쟁 방지라는 하나의 사명에만 속박돼 있을 수 없다”라고 천명했다. 체제 방어용이 아니라 한국을 향한 공격용이고, 적화통일의 수단이라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북한 핵무기는 우리를 겨냥한 게 아니라거나, 통일되면 우리 것이라는 주장은 순진하고 어리석은 몽상에 불과했다.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따지기는 어렵다. 그때는 그 당시의 정세가 있었다. 북방정책은 우리의 외교 관계를 튼튼하게 했고, 화해 정책으로 대북 관계의 주도권을 쥐었다. 선의를 악용한 건 북한 정권이다. 화해 제의를 핵 개발 자금과 시간을 버는 데 이용했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다. 생존을 위해서도 북한의 전쟁 준비 자금은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 정파를 뛰어넘어 생존의 문제다.올 한해 북한이 쏜 미사일과 핵 실험 비용을 1조 원 정도로 추정한다. 한국은행 기준 지난해 북한의 예산이 91.2억 달러다. 전체 예산의 10분의 1을 미사일로 쏜 셈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전용할 수 있는 전략물자 수입 의존도가 2018년 96%에 이르렀다는 한국국방연구원 보고가 있다.유엔 제재의 가장 큰 구멍은 중국이다. 니키 헤일리 전 유엔주재 미국대사는 중국과 러시아는 대북 제재 해제를, 한국은 예외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유엔 제재의 구멍이 중국·러시아 다음으로 우리라는 의미다. 물론 남북 대화를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정치적 계산과 개인적 탐욕을 위해 우리를 겨냥한 총알을 제공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유엔이 금지한 일이 계속됐다. 한국 유조선이 북한에 매각됐다. 해상에서 북한 배에 석유를 옮겨 실어준 한국 배, 북한 석탄과 선철을 바다에서 몰래 옮겨 실은 한국 배가 적발됐다.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거액의 통행세를 지급하고, 컴퓨터 등 수출금지 품목을 휴대 물품으로 들고 가 ‘분실’하고 나오는 일이 허다했다. 코인의 해킹과 자금 세탁의 통로로 한국이 이용된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최근에는 10조 원에 이르는 수상한 해외 송금이 수사받고 있다. 북한이 연루된 건 아닌지 조사해야 한다.대북 관계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무분별한 돈벌이 수단이 되어선 곤란하다. 남북관계로 재미 볼 때는 지났다. 생존의 문제다. 우리 생명과 재산을 위협할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돕는 것은 이적행위다. 달러는 전용될 게 뻔하다. 물품도 확실한 검증이 필요하다. 정치적 이해를 뛰어넘어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할 때다. /본사 고문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2-12-11

서해 공무원 피살, 인권 혹은 정쟁

김진국 고문 문재인 전 대통령이 “도를 넘지 마라”고 했다. 검찰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조작 여부를 수사하는 데 대해 지난 1일 입장문을 내고 불만을 표시했다. 언뜻 보기에 문 전 대통령이 부하를 보호하고,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대인배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니 그런 첫인상에 의심이 생긴다.2020년 9월 21일 실종된 어업지도원, 이대준 씨를 하루 뒤 북한군이 사살, 소각했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이 씨가 월북했다가 사살됐다고 발표했다. 발표대로라면 그는 대한민국이 싫어서 달아났고, 우리와 대치 중인 북한에 귀순했다. 죽었어도 동정의 여지가 없다. 자기 의지로 죽을 곳을 찾아갔다. 이 씨 가족도 죄인이다. 연좌제가 없어졌다고 하지만 월북자 가족이 겪는 고통은 여전하다.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국방부가 “실종 공무원의 자진 월북을 입증할 증거는 없다”라고 발표했다. 해경도 “수사했지만, 월북 의도를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뒤집었다. 간단한 문제 같지만, 당사자에게는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 적국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는 많은 죄를 저지른 인간쓰레기, 부역자로 낙인이 찍힐뻔한 이 씨가 정부의 부실 대응 탓에 희생된 억울한 국민이라고 인정받는다. 가족도 손가락질이 아니라 사과와 위로, 보호와 보상을 받게 된다.이 사건은 정쟁의 대상이면서 인권 문제다. 두 가지 성격을 다 담고 있다. 하지만 국가 공권력과 힘없는 개인이 얽혀 있다면, 국민의 인권, 생명 문제를 먼저 살펴보는 게 순서다. 국민 옆에서,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도 문 전 대통령이 이 씨와 그 가족에게 사과부터 하지 않고, “도를 넘지 말라”며 정치적 반격을 한 것은 실망스럽다.문 전 대통령은 입장문에서 “사실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사실을 추정”했다고 한다. 이 씨가 월북했는지, 표류한 것인지 단정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단정할 수 없다면 억울한 누명은 쓰지 않게 하는 게 형사법의 원칙이다.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일부 보도를 보면 단순히 부족한 정보로 추정만 한 것인지도 의문이 생긴다. 조작 가능성이다. 당시 조사 당국은 이 씨가 한자가 적힌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는 정보를 애써 무시했다. 자진 월북이 아니라는 다른 정황들도 모두 외면했다. 관련 첩보를 삭제한 흔적도 있다. 채무 등 이 씨 형편도 과장됐다. 미리 방향을 정해놓고 ‘월북’으로 몰아갔다고 의심된다. 국가 공권력이 힘없는 하위 공무원이 살해되도록 방치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범죄자를 만들었다면 중대한 인권 범죄다.문 전 대통령은 자신이 ‘월북’이라는 판단을 ‘최종승인’, ‘수용했다’라고 밝혔다. 판단을 잘못하고, 조작했다면 자기 책임이라는 말인가. 아니다. 교묘한 말장난이 숨어 있다. 그는 자신이 ‘판단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보고와 판단을 ‘수용했다’라고 했다. 조작이나 오판은 부하들 책임이라는 말이다. 자신은 잘못된 보고를 받고 ‘수용’한 책임밖에 없다.문 전 대통령은 “다른 가능성은 제시하지 못하면서 발표가 조작되었다는 비난만 한다”라고 주장했다. 다른 가능성이나, 다른 증거를 확인하려면 수사가 필요하다. 그 증거가 어디 있나. 문 대통령은 ‘대통령 기록물’로 지정해 15년간 볼 수 없게 봉인했다. 유족에게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해놓고, 확인조차 못 하게 만들었다. 풀어줄 수 있는 건 본인이다. 그런데 감사원의 서명 조사 요구에도 그는 “무례하다”라고 발끈했다.문 전 대통령은 “오랜 세월 국가 안보에 헌신해온 공직자들의 자부심을 짓밟는다”라고 비난했다. 증거를 조작하고, 불가능한 판단을 억지로 내려 인권을 짓밟은 ‘공직자의 자부심’은 강조하면서, 확인하지도 못한 혐의를 씌워 고통받은 피해자에게는 사과도 하지 않았다. 무례하고, 도를 넘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감히 전직 대통령을 건드린다는 말인가. 법 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 황제라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는 게 민주국가다. 국민의 편, 인권의 눈으로 이 사안을 바라볼 때 국민도 전직 대통령으로 예우할 것이다. /본사 고문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2-12-04

정치가 국운을 가로막지 않게

김진국 고문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의 관심 사업 예산을 모두 없애고 있다. 국회에서 169석이라는 절대다수를 장악한 힘이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새 정부가 일을 못 하게 하라는 ‘정부완박’ 횡포”라고 분개했다. 그렇지만 속수무책이다.영빈관 신축 예산 497억4천600만 원 등 대통령실 이전과 관련한 예산을 없애버렸다. 새 정부가 만든 법무부 내 경찰국의 기본경비와 인건비, 공직자 인사 검증을 담당하는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의 기본경비도 잘라버렸다. 문재인 정부 때처럼 민정수석을 부활하고, 청와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업무를 포기해야 할 판이다. 이런 식으로 윤 대통령의 관심 사업만 골라 칼을 들이대 1조2천억 원을 삭감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공약했던 사업은 8조6천억 원가량 예산을 늘렸다.물론 아직은 예비심사단계다. 민주당이 원하는 사업비를 받아내기 위해 협상카드일 수 있다. 그렇지만 국민의힘은 답답하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수석부대표는 “윤석열 정부가 제출한 82개 법안은 하나도 통과시키지 않는 입법 발목잡기에 이은 예산 발목잡기는 대선 불복에 가깝다”라고 주장했다. 선거로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쪽 정부다.대통령은 국민의힘에서 나왔어도, 돈과 관련 법률은 민주당이 휘두르고, 정부와 공기업 곳곳에 민주당 사람이 알박기해 있다. 국정은 안 움직이고, 책임은 서로 떠넘긴다. 죽어나는 건 국민이다. 이런 무책임한 정치가 어디 있나.여소야대(與小野大)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처음 여소야대 국회가 됐다. 그러나 그때 가장 많은 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법안 처리도, 청문회도, 과거에 없던 새로운 정국을 슬기롭게 풀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많이 참고, 많이 양보했다. 야당 지도자 3김씨는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다. 첫 야대(野大)였지만 요즘 정치인과 달리 절제할 줄 알았다. 지금은 정치력도 없고, 대화도 없다. 쓰레기 같은 천박한 말을 쏟아내며 이기려고만 한다. 국정이 안중에 없다. 87년 체제가 수명을 다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정치가 실종된 상태에서 여소야대는 자칫 재앙일 수 있다. 언제든 국정이 마비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고 여대야소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국회가 거수기로 전락할 또 다른 위험이 있다. 정부·여당이 한패가 되어 국정을 몰아가고, 다른 의견은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정치인에게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제도로 강제해야 한다. 극단적인 진영 대결과 국정 마비의 위험은 줄일 장치를 찾아야 한다. 그동안에도 이런 위험이 수없이 지적됐다. 특히 내각제론자들의 지적이다. 내각제라면 의회의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해, 정부와 국회가 극한 대립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면 연립정권을 구성해야 한다. 대화와 타협과 관용과 상생의 정치를 할 수밖에 없다. 소수 정당의 목소리도 무시할 수 없다. 일단 국정 운영을 맡게 되면 책임 소재가 분명하다. 국민의 신뢰가 무너지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는 대규모 감세로 파운드화가 폭락하자 취임한 지 45일 만에 사임했다. 신뢰만 얻는다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나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처럼 대통령 이상으로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나라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그렇지만 국민 여론은 내각제에 부정적이다.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행태를 보면 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는다. 유권자들도 좋아하는 스타 정치인에게 연예인을 향한 팬덤 같은 지지를, 경쟁자에게는 비난을 보낸다. 새로운 정치문화다. 권력을 분산한 국회의원보다 한 명의 ‘정도령’을 원한다.대통령제에서도 임기나 권한을 조정하는 방법이 있다. 4년 중임제도 거론된다. 정치권의 부패를 감시할 독립적인 사법제도도 중요하다. 신뢰를 높이는 길이다. 선거에서 무슨 짓을 해도 당선만 되면 끝이라는 낡은 생각을 부술 수 있다. 지금 정치를 보면 해낼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갈 길이 멀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본사 고문

2022-11-27

김진국의 '정치 풍향계' 법률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주 귀국하면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고생 많았다”라고 격려했다. 윤 대통령은 동남아시아 순방을 떠나면서 이 장관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돌아오는 길에도 특별한 애정을 표시한 것이다.해외 순방으로 며칠씩 나라를 비우면서 내치 담당 장관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158명의 아까운 젊은이가 희생된 이태원 참사의 책임 문제가 불거진 시점이라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윤 대통령이 이 장관을 안고 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라는 해석이 분분하다.윤 대통령은 법률적 책임론에 치우쳐 있다. 법적으로 잘못이 없는데 책임을 묻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다. 지난 7일 국가안전 시스템 점검 회의에서도 그는 “이번 참사와 관련해 진상규명이 철저히 이뤄지도록 하겠다”라면서 “그 결과에 따라 책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엄정히 그 책임을 묻겠다”라고 말했다.윤 대통령은 평생 검사로 살아왔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고, 결백하다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게 법적으로야 당연하다. 그러나 예로부터 비가 안 와도 임금님 탓이었다. 홍수가 나고, 전염병이 돌아도 임금님이 부덕해서라고 생각했다. 천재지변을 나라님 탓한 것은 미신에 가깝다고 해도, 수자원 관리나 보건 위생은 정부가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일이다.책임 소관을 따지기 힘든 일이 무수히 많다. 천재지변이 아니라도 그렇다. 그런 문제는 당한 사람만 억울한가. 사회의 그런 빈 곳을 찾아 메우고, 대비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인명 피해가 생기고, 바람이 불고, 가물어 농작물이 타들어 가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병원균이 우리 목숨을 위협하는 일도 유능한 정부라면 대비해야 한다. 하물며 군중이 몰려 교통이 마비되고, 막대한 인명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하는 일을 정부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법 조항이 있든 없든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정부다. 대비가 안 돼 문제가 생기면 정부 책임이다. 정부 조직을 정비하지 못한 잘못이다. 체제가 돼 있었다면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실무자는 물론 관리·감독을 잘못한 사람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더구나 이런 큰 참사를 빚어놓고 일선 파출소에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면 어느 국민이 이해하겠나. 이번 참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재다. 윤 대통령도 경찰을 향해 흥분하며 질타했다. 그 어이없는 행정력의 최고 책임자는 대통령이다. 안전 문제의 최고 행정책임자인 이 장관이 정치적 책임을 떠안아야 윤 대통령의 짐이 덜어진다. 야당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아니라 국민을 설득하는 길이다.이 장관은 여론에 불을 지른 책임도 있다. 참사 직후 그는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라고 말해 기겁하게 했다. 사퇴 여론이 높아지자 그는 또 “누군들 폼나게 사표 던지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겠나”라고 말해 다시 여론에 불을 질렀다. 참담한 사고의 책임자로서 사퇴하는 것을 어떻게 ‘폼나게’라고 표현할 수 있나.윤 대통령은 ‘의리’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품이다. 사법시험 직전에도 조문을 가고, 친구 함 팔이를 갈 정도다. 검찰총장 시절에도 자신에 대한 징계위원회가 열리는데 조문을 거르지 않았다. 이 장관 같은 가까운 지인에 대한 윤 대통령의 신뢰는 이 의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왜 무너졌는지 생각해야 한다. 수많은 논란을 외면하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지키려다 정권을 넘겨줬다. 사적 의리에 얽매이면 공적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다.조 전 장관 파문 때도 법률적 유무죄에 매달렸다. 그러나 고위공직자는 법률적으로 죄를 묻기 어려워도 도덕적·정치적 책임이 더 무거운 때가 있다. 이번 논란의 가장 핵심 인물인 용산경찰서장이 “보고를 못 받았다” “기동대 추가 파견을 요청했었다”라고 말하는 것도 법적 책임을 의식한 말이다. 형사사건으로만 보면 책임을 떠넘기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더 큰 부담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앞장서서 처리하지 않으면 밀려서 하게 된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 필요하다. 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본사 고문

2022-11-20

지난 정부와 비교, 그만하라

김진국 고문 퇴임한 뒤에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자주 소환된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여권 인사들은 조건반사처럼 문 전 대통령을 거론한다. “그때는 더했다.” 윤 대통령을 변호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논리다.윤 대통령도 조각(組閣)할 때부터 이 방법을 썼다. 도어스테핑에서 기자가 비판 여론을 전하자 “전 정권에 지명된 장관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어요? 다른 정권 때하고 한번 비교를 해보세요”라고 반박했다. 국회에서 청문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은 장관 임명에 대해서도 권성동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문재인 정부는 그렇게 임명한 장관이 31명”이라고 반박했다. 윤 대통령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민주당이 홀대 논란을 제기하자, 국민의힘은 문 전 대통령의 베이징 ‘혼밥’ 논란을 들어 반격했다.김건희 여사의 의상과 액세서리가 논란이 되자 김정숙 여사의 의상으로 맞불을 놓았고, 김건희 여사의 대통령 동행과 지인의 전용기 동승을 비판하자 김정숙 여사의 인도 방문 등 ‘버킷리스트’, 지인인 디자이너 딸의 청와대 근무를 꼬집었다. 알박기 인사에 대한 압박 감사·수사 논란에도 “문 정부는 청와대 캐비닛까지 뒤져 수사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 문제가 된 일을 어떻게 하는 게 옳은지는 처음부터 논외다. 너도 한 일이니 입을 다물라니, 유치한 어린애들 싸움 같다.비판하는 사람에 아무래도 민주당 지지자가 많다. 그러니 조건반사적으로 그런 논박이 튀어나오는 게 이해는 된다. ‘× 묻은 개’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하지만 국정을 책임진 사람의 말은 사사로운 언쟁과 다르다. 언쟁 당사자가 아니라 국민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이런 대응이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태원 참사처럼 거대한 비극을 두고 이런 입씨름은 더더욱 곤란하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경찰 간부들을 지목해 “문재인 정권 퇴임 3개월 전 알박기 인사에서 영전된 인물”이라고 떠미는 식이다. 취임한 그 날부터 국정의 모든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설령 실제로 알박기였다 해도 바로 잡지 않고, 지휘·감독을 제대로 못 한 윤 정부 책임이다.정권마다 업적도 있지만, 잘못도 있다. 집권하겠다고 표를 구하는 것은 그 모든 짐을 떠맡겠다는 약속이다. 영광의 역사, 오욕의 역사를 모두 짊어지겠다고 나선 것이다.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역사의 한 토막을 잘라낼 수는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 정부 탓만 하면 국정은 누가 이끌고, 책임을 지나.지난 8일 국회 운영위에서 주호영 위원장이 김은혜 대통령 홍보수석과 강승규 시민사회수석을 퇴장시켰다. ‘웃기고 있네’라는 필담에 민주당이 반발했기 때문이다. 한 언론은 윤 대통령도 이 일에 대해 ‘역정을 냈다’라고 보도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의 “소설을 쓰시네” “어이가 없다”라는 발언을 소환하며 일부 여권 인사들도 주 위원장을 비판했다.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민주당 행태를 보면 이런 반박도 나무라기가 조심스럽다. 특히 ‘처럼회’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지만, 번번이 되잡혔다. 김의겸 의원의 청담동 술집 이야기는 젊은 남녀의 알리바이 만들기에 놀아난 것으로 보여 어이가 없다. 정말 국정을 걱정한 비판인지 꼬투리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건지 모르겠다.격투기를 보듯 내가 응원하는 사람이 이기면 보는 사람도 신이 날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이 아니라 국정이다. 때려 부수고, 망가뜨려도 리셋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 정부를 따라 한다고 무조건 용인될 수 없다. 유치한 입씨름일 뿐, 국민에게 할 말이 아니다. 지난 정부가 한 일이라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사과부터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내로남불’을 지겨워 한 유권자가 만들었다. 같은 꼴을 보려고 정권을 바꾼 게 아니다. 당장은 미운 놈 혼내는 것만으로도 손뼉을 치겠지만, 결국은 불만이 되어 돌아온다. 욕하면서 배운다. 과거 정부를 소환하고, 비교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국정을 맡은 사람이 할 말이 아니다. 과거의 적폐로, 누적된 부채로 힘들어도 그것을 해결할 책임은 현 정부에 있다.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본사 고문

2022-11-13

땀 흘린 훈련이 생명을 지킨다

김진국 고문 북한이 연일 미사일을 쏘아댄다. 대포는 수백 발씩 쏘고, 군용기 180대를 출동시켰다. 곧 제7차 핵실험이 예상된다. 한·미 안보협의회의(SCM)는 공동성명에서 ‘김정은 정권 종말’을 거론하며 경고했다. 공포로 주저앉을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남의 일처럼 여기는 터무니없는 낙관론은 안 된다.지난 2일 울릉도에 공습경보가 울렸다. 하루 미사일 25발을 쏜 날이다. 북한이 6·25 이후 처음으로 북방한계선(NLL) 너머 울릉도 방향으로 탄도미사일을 쏘았다. 다행히 미사일은 속초 앞 바다에서 더 비행하지 않고 떨어졌다. 그렇지만 실전 경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설마 하는 마음에 민방위 훈련이거나 이태원 참사 추모 사이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니 대피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수업을 계속하는 학교도 있었다. 울릉군도 우왕좌왕했다. 공습경보를 발령한 지 24분이 지나서야 대피하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재난 주관방송사인 KBS는 100분이 넘어서야 공습경보 자막을 내보냈다. 정해진 매뉴얼을 지키지 않았다. 미사일이 실제로 육지까지 날아왔다고 상상하면 아찔하다. 2010년 연평도 포격에서 보았듯이 ‘설마’는 없다.북한이 처음 핵실험을 했을 때는 화들짝 놀랐다. 그런데 실전 배치 단계에 와서는 무신경하다. 북한이 연일 도발해도 전쟁은 없다고 믿는다. 왜 위기를 조장하느냐며 방어체계 구축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서울 이태원에서는 아까운 젊은이 156명이 사망했다. 어처구니없는 참사다. 여기서도 ‘설마’ 하고 안이했다. 경찰은 훈련 없는 울릉도 주민만도 못했다. 관할지인 용산경찰서장은 사고가 발생한 지 50분이 지난 밤 11시 5분 이태원 파출소에 도착했다. 소방 당국은 사고 발생 직후부터 경찰에 15번이나 지원을 요청했다. 요청한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기동대 배치 지시가 떨어졌다. 사전 예방은커녕 사후 긴급 요청에도 먹통이었다. 나사가 풀렸다.112치안종합상황실에는 사고 3시간 전부터 시민 신고가 들어왔다. 그런데 상황실장은 참사가 난 뒤에도 1시간 24분이나 상황실을 비웠다. 집에 있던 서울경찰청장은 이때 상황실장으로부터 처음 보고받았다. 경찰청장은 서울이 아닌 제천에서 지인들과 저녁을 먹고 전화도, 문자도 연락이 되지 않다 다음날 0시15분에야 전화를 받았다. 용산구청장은 참사 당일 고향인 의령 축제에 갔다 돌아와 이태원에 인파가 많다고 걱정하면서도 지역구 의원인 권영세 통일부 장관 등에게 알렸다. 구청이나 경찰, 소방 같은 공식 조직에 연락하고, 사고 예방에 나서지 않고, 집으로 갔다. 같은 당파끼리만 놀던 조선시대도 아니고….군의 준비 태세도 불안하다. 북한이 미사일 25발을 쏜 2일 대응 사격한 미사일 3발 중 2발이 실패했다. 패트리엇 1발은 발사에 실패했다. 천궁은 날아가다 자폭했다. 지난달 4일 밤에 대응 발사한 현무-2C 탄도미사일은 뒤로 날아가 군부대에 떨어졌다. 그다음 날 쏜 에이태큼스 미사일 2발 중 1발은 표적으로 가지 못하고 추적 신호가 끊어졌다.북한은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하라고 요구한다. 아무리 시뮬레이션이 훌륭해도 실전연습만 못 하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해 수도 키이우에 핵 공격용 특별방공호 425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대피 훈련의 땀이 국민의 생명을 지킨다. 심폐소생술(CPR)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쓰러진 사람을 방치할 수는 없다. 적어도 공습경보가 울릴 때 내가 어디로 피해야 하는지, 화생방 상황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아야 한다.경북 봉화 광산에 매몰됐던 광부 두 명이 무사히 구조됐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최선의 조치를 하며 구조를 기다렸다. 평소 매뉴얼을 잘 익히고, 그대로 한 덕분이다. ‘징비록’에 일본 사신이 기생을 동원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준 상주 목사를 이렇게 조롱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늙은이는 여러 해 전쟁을 치르느라 수염과 머리가 다 하얘졌지만, 귀공은 기생들의 춤과 노래 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지냈는데 머리칼이 왜 하얘졌소?” 서애(西厓)가 남긴 충고대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본사 고문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2-11-06

과거 청산, 오래 끌지 마라

정치가 얼어붙었다. 여야 협조를 기대하기는 당분간 어려울 듯하다. 검찰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문재인 전 대통령을 거침없이 몰아가고 있다. 민주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에 불참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야당탄압, 보복 수사 중단하라’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했다.민주 정치의 기본은 대화와 타협이다. 민주당은 국회 의석 299석 가운데 169석을 차지한 절대다수 정당이다. 민주당 협조가 없으면 임기 절반을 허송세월할 수도 있다. 대통령으로선 어떻게든 여야 관계를 풀어야 할 처지다. 그렇다고 이미 드러난 혐의를 덮으라고 하는 것도 부당한 수사 개입이다. 윤 대통령이 어려운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지난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직무 수행 긍정률이 6주 만에 30%를 넘었다. 아직 지지율이 심각하게 바닥이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회복 조짐을 보이는 건 윤 대통령에게 고무적이다. 지지 이유에 대해 ‘국방·안보’(10%) 외에 ‘공정·정의·원칙’(9%)과 ‘부정부패·비리 척결’(5%) 등을 꼽았고, ‘공정·정의·원칙’은 지난주보다 6%포인트나 올랐다. 특히 보수층에서 지지가 오른 것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 수사를 지지한 결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윤 대통령이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국민의 기대다. 그는 검사 이외에 다른 경험이라고는 없다. 문재인 정부가 검찰총장에 임명할 때도 외골수라며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다. 정치력이 없다는 말이다. 좋게 보면 수사에 내 편, 네 편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잘하는 것은 바로 이 범죄 수사다. 그를 선택한 사람들이 기대한 것도 그것이다.그는 박근혜 정부 시절 대통령의 정통성을 건드리는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을 맡아 수사 외압을 폭로하며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박근혜·최순실 사건 수사팀장도 맡았다. 문재인 정부에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비리 수사로 정권과 부딪쳐 검찰총장에서 쫓겨났다. 이 바람에 이념과 관계없이 수사에 엄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평가가 대선 당시 국민의 불만과 맞아떨어졌다. 민주당 지지자들도 ‘조국의 강’을 건너지 못해 정권을 내놨다고 뒤늦게 반성했다. 그만큼 ‘내로남불’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컸다. 공정사회에 대한 열망이다. 그게 윤 대통령에게 맡겨진 소명이다. 경제나 다른 분야는 전문가에게 맡기더라도 그 일은 잘할 것이라는 기대다. 물론 다른 분야를 맡긴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무엇보다 권력자가 겸손해야 하고, 제대로 된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정적을 수사한다고 무조건 정치보복은 아니다. 이재명 대표의 혐의는 민주당 내부에서 먼저 제기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은 법을 정치 탄압 수단으로 이용했다. 정치자금도 집권 세력이 독점했다. 그러나 이제 다르다. 정치인 범죄라고 눈 감으면 권력형 부패를 막을 수 없다. 진실을 밝혀야 정치보복인지 가릴 수 있다. 지금 거론되는 혐의들만 보면 지방정부의 전형적인 권력형 비리다. 여야를 떠나 척결해야 할 대상이다.대통령 중심제에서 임기 초는 중요하다. 이때를 놓치면 어려운 일을 처리하기 힘들다. 그 황금기를 여야 대치로 허비하고 있다. 그 힘을 국가 비전이 아니라 과거 청산에 쏟는 것도 안타깝다. 굳이 피할 수 없는 수사라면 속전속결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빨리 반전을 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혐의가 명확한 것만 손대는 게 옳다. 사소한 트집 잡기나 부풀리기, 견강부회는 피해야 한다. 대통령이 하지 않아도 될 정치권 논란까지 끼어들거나, 전선을 확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내년 경제가 매우 어둡다. 야당 협조가 없으면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다. 어차피 지지율이 바닥이니 눈치 보지 말고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내년 총선까지 수사를 끌고 가자는 유혹도 있다. 국민이 바보가 아니다. 정치적으로 계산하는 순간 수사는 역풍을 맞는다. 문재인 정부 5년간 계속된 ‘적폐 청산’만으로도 지겹다. 확실하게 혐의가 입증되는 것만으로 빨리 끝내지 않으면 박수가 야유로 변할 수 있다. 김진국 고문 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본사고문

2022-10-30

또 조국의 늪에 빠질 건가

김진국 고문 지난 주말 서울 중심가. 광화문에서 대통령실이 있는 삼각지까지 중심 도로가 인파로 꽉 막혔다. 윤석열 대통령 퇴진과 특검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와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문재인 전 대통령 구속을 요구하는 맞불집회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시내 교통은 마비됐다. 필자의 시내 중심가 사무실 창문 너머로 함성이 탱크 소리처럼 몰려온다.한국 정치에서 지역갈등이 망국병이라고 했다. 옳고 그른 합리적인 판단보다 우리 지역 출신이냐 아니냐로 편을 갈랐다. 지역감정만 극복하면 국민 통합이 될 거라고 믿었다. 김 전 대통령은 “춘향이의 한(恨)은 이 도령을 만나면 풀어진다”라고 말했다. 호남 출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여야의 국정 경험으로 책임정치를 하리라 기대했다.기대는 기대에 그쳤다. 집권의 단맛을 본 뒤 선거 불복을 반복했다. 대선이 끝난 지 5개월 반.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고성능 스피커 소리가 서울 하늘을 찢어놓았다. 수만 명이 촛불을 흔들었다. 국회 절대다수를 차지한 제1야당 소속 국회의원 일부도 참석했다. 반대쪽 집회에는 더 많이 모였다. 나라가 완전히 두 쪽이다. 합리적인 이성은 사라졌다.불과 3년 전, 비슷한 풍경이 있었다. 조국 사태 때다. ‘조국 수호, 검찰 개혁’을 내건 집권당 지지 세력은 서초동에, 그 반대 세력은 광화문에 모여 세 대결을 벌였다. 옳은 것도 없고, 틀린 것도 없다. 진실은 진흙탕 속에 내팽개쳐지고, 진영의 구호를 복창하는 깃발과 완장만 가득하다. 객관성이 생명인 언론사 사장마저 “딱 보니 100만 명”이라고 흥분했다.진실은 무시되고, 공정은 무너졌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화려한 수사는 공허했다. 그 대가는 분명했다. 배신감을 느낀 젊은이들이 돌아섰다. 20년 집권론이 무너지고, 10년 주기 정권 교체의 흐름도 끊어졌다. 조국의 짐을 민주당이 대신 짊어지고 자멸했다.이제 다시 민주당이 이재명 수호대가 됐다. 당 대표이기 때문이다. 대표 경선 때부터 이런 우려가 제기됐다. 민주당 안에는 불만이 있다. 조국 사태의 전철을 밟는다는 것이다. 김해영 전 의원은 “이재명 대표님, 그만하면 되었다.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와 주시라”라고 직설적으로 요구했다. 이런 의견이 소수가 아니다. 한 중진 의원은 “이 대표가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압수 수색하도록) 민주당을 풀어줘야 한다”라며 “이런 생각이 민주당 의원의 절반을 넘을 것”이라고 자신했다.2016년 10월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주말마다 서울 시내에서는 태극기 집회가 열렸다. 2020년 총선까지 매주 계속했다. 그렇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을 보호하지도 못했고, 민심으로부터 멀어져갔다. 소수 시위 세력끼리만 동질감을 느끼고, 위로했다. 선거 결과는 허망했다. 태극기 세력이 참패했다. 집권당에 5분의 3 의석을 허용했다. 국민의힘이 무너지는 데도 일조했다.박 전 대통령이 받은 22년 형 가운데 15년은 뇌물죄다. 대기업이 공익스포츠 재단 출연하고, 최순실 씨의 딸이 대기업 소유로 등기된 말을 탄 것을 뇌물이라고 인정했다. 국민 다수가 그것까지 권력형 범죄라고 생각했다. 태극기 집회가 고립된 이유다.이재명 대표는 그보다 나은가.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과 김용 부원장 혐의는 최순실 씨의 혐의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사업권과 허가라는 명확한 이권 관계가 있다. 금전 거래가 있었다면 범죄 혐의가 더 분명하다. 박 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이면서 탄핵당하고, 수사받았다. 없는 죄로 야당 정치인을 탄압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야당 대표라는 것이 무조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닉슨 미국 대통령이나 다나카 일본 총리의 사례를 거론할 필요도 없다.민주당은 이번에도 대신 싸울 건가. 정치 탄압이라고 주장하려면 결백을 밝혀야 한다. 진실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면 수긍하기 어렵다. 조국 사태 때 의문을 품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도 강경파의 선동에 휘말려 늪에 빠졌다. 선거를 치른 뒤에야 후회했다. 이제 대선에 이어 총선마저 망칠 수 있는 기로에 섰다. /본사고문

2022-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