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대통령이 나서도록 외교부는 무얼 했나

등록일 2023-06-18 20:20 게재일 2023-06-19 3면
스크랩버튼
김진국 고문
김진국 고문

겸손이 늘 좋은 것일까. 성경은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고 가르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아랫사람이 억지로 밀려 윗자리에 앉는다면 불편하지 않을까. 유교에서는 장유유서(長幼有序)라고 한다. 아무리 위아래가 없어진 세상이지만 격(格)을 무너뜨릴 때 생기는 문제도 적지 않다.

각국 정상이 사진을 찍을 때도 서로 가운데 서려 한다. 이런 다툼을 피하려고 의전 순서를 정한다. 정부 내에서도 의전 서열이 있다. 대통령-국회의장-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국무총리 순이다. 나라 간 이런 다툼이 더 치열한 때가 있다. 자칫 국민 정서를 자극하고, 국내 정치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대사를 교환할 때도 신경전을 벌인다.

나라의 비중과 대사의 레벨이 접촉 범위를 좌우한다. 도널드 그레그 주한 미국대사는 회고록, ‘역사의 파편들’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골프와 테니스를 자주 쳤다고 밝혔다. 그는 “나보다 골프 실력이 훨씬 뛰어났던 노 전 대통령이 실수할 때면 난 웃으면서 놀렸고, 노 전 대통령도 내가 실수하면 웃으면서 놀렸다”라면서 “진짜 친구처럼 잘 지냈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한 외교관은 이런 관계에 대해 필자에게 불만을 표시했었다. 외교부가 대사관과 여러 통로로 협상하고 있는데, 대사가 직접 대통령을 통해 해결해 버리니 외교부가 협상력을 잃어버리고, 대사관이 무시한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테니스를 좋아했다. 자주 만나면 공(公)과 사(私)를 구별하는 게 쉽지 않다.

주한미국대사는 오래전부터 예외적인 역할을 해왔다. 미군정을 거친 탓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수시로 주한 미국대사를 경무대로 불러들였다. 4·19혁명 때 월터 매카나기 대사는 경무대를 찾아가 이 전 대통령의 하야를 설득했다. 제임스 릴리 대사는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군 동원을 막았다.

대통령이 나서 어려운 문제를 풀 때가 있다. 그렇지만, 자칫 잘못하면 우리 협상 카드는 다 보여주고, 무를 수도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질 수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5년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라고 말해 한·일 관계가 굉장히 어려워졌다. 외환위기의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2년 8월 독도를 직접 방문해 일본이 독도 문제를 노골적으로 제기하는 계기가 됐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 때의 위안부 문제 합의를 번복해서 한·일 관계를 최악으로 몰아갔다. 얻은 게 없다. 국익보다는 정치적 이익을 노린 경우가 많았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면 돌이킬 수 없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8일 중국 대사관저를 방문했다. 그런데 싱하이밍(邢海明) 대사가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라며 윤석열 정부를 대놓고 비판해 파문이 일고 있다. 대사는 자기 정부 입장을 상대국에 설득해야 하는 자리다. 굳이 갑·을로 따지면 을의 위치다. 그런 대사가 주재국 정부를 대놓고 비판하는 일은 드물다. 이 대표가 찾아가 만난 것도 격에 맞지 않다는 비판이 나온다. 모두 양보해도 싱 대사의 발언에는 바로 반박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선 것도 의외다. 윤 대통령은 싱 대사를 위안스카이에게 비유하면서 “국민이 불쾌해한다”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실은 중국 정부의‘적절한 조치’를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싱 대사의 발언은 도저히 묵과할 수없다. 이 대표도 사과해야 옳다.

그렇지만 싱 대사는 외교부의 국장과 과장 사이에 있는 심의관급이다. 아무리 대사가 정부 대표라고는 하나 제1정당 대표가 찾아가고, 국회의원이 ‘말씀’을 받아적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했나. 중국 정부가 싱 대사를 교체해도, 대통령 말을 무시해도, 모양이 안 서게 됐다. 이런 상황을 막아줄 참모는 없었나. 윤 대통령이 나설 때까지 외교부는 또 무얼 하고 있었나. 참 답답한 정부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김진국의 ‘정치 풍향계’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