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그 아부지 머 하시노?”
배우 김광규는 이 대사로 떴다. 부산 조폭들을 그린 영화 ‘친구’에서 고교 교사로 나와 이 대사를 날리며 학생들을 구타했다. 옛날에는 학교에서 학생 신상을 탈탈 털었다. 아버지 직업은 물론 말하자면 숟가락 개수까지 조사했다.
유오성이 (우리 아버지는) “건달”이라고 대답한 뒤, 선생님의 매질에 발끈해 뛰쳐나가자 김 씨가 당황하는 장면이 나온다. 교복을 입은 학생은 다 똑같았다. 학부모는 달랐다. 직업이 다르고, 재산이 달랐다. 부모를 살피면 학생은 뒷전이 된다.
가계도에서 그 사람의 많은 부분을 엿볼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본데없다’라는 말이 큰 욕인 것도 그런 맥락이다. 책보다는 경험으로 배우던 시절 가족과 친구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했다. 그러나 편견이 더 많다. 한 배에 난 동기 간에도 다른 구석이 많다. 부모 직업이라는 안경으로 학생을 보면, 공정하게 평가하기 어렵다.
소설 ‘빨치산의 딸’을 쓴 정지아 씨는 같은 반 친구로부터 “느그 아부지가 빨갱이람서?”라는 말을 들은 뒤로 ‘천형(天刑)’처럼 외톨이로 살았다고 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부모가 ‘빨갱이’ 노릇한 것을 본 적도 없다. 그런데도 나면서부터 낙인이 찍혔다. 혈통을 무시할 건 아니지만, 개인의 노력이 더 중요하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절이다.
고려와 조선에는 음서(蔭敍)제도가 있었다. 5품 이상 고위 관리 자제는 시험을 보지 않고도 하급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고관이면 ‘빽’으로 관직을 얻었다는 말이다. ‘뼈대’가 있다느니, ‘씨’가 훌륭하다느니 하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시험을 쳐서 합격하지, 왜 몰래 뒷구멍으로 들어가나.
검찰총장 출신인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된 건 ‘공정’이라는 시대정신을 업은 덕분이다. 야당 내에도 정권 교체의 1등 공신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많다. 조 전 장관이 한 일은 오히려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무슨 문제냐고 핏대를 올리는 통에 그 부담을 몽땅 민주당이 떠안았다.
조 전 장관 말마따나 모두 개천의 용이 될 필요는 없다.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가 행복한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그렇지만 내 자식은 부모 힘으로 용을 만들려고 하면서, ‘너희들은 가붕개로 살아라’라고 하면, 그걸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결정적 방아쇠도 정유라 씨의 ‘엄마 찬스’다. 정 씨가 페이스북에 “능력이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고 올리면서 민심이 폭발했다.
자녀 문제는 영원한 약점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필부야 그 본능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 공직을 맡은 사람도 자식 문제에는 눈이 멀어버리는 모양이다. 인사청문회에서 두들겨 맞는 문제 대부분이 자녀 욕심이다. 정권이 뒤집히는 일을 두 번씩이나 겪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 2022년 교육부가 조사한 결과 대학 교원과 미성년 자녀가 공동 저자로 등재된 논문이 1천33편이나 된다. 새 정부가 발탁한 사람도 줄줄이 ‘아빠 찬스’ 의혹으로 물러났다. 정호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는 자녀 의대 편입, 김인철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자녀 장학금 수령에 발목이 잡혔다. 부모야 자기가 지은 죄니까 책임을 져야 하지만, 자식은 왜 죄인을 만드나.
선관위 고위직들이 자녀 채용과 승진에 ‘아빠 찬스’를 썼다는 의심을 받았다. 지난해 김세환 전 사무총장에 이어 박찬진 사무총장과 송봉섭 사무차장이 지난달 말 자녀 채용 부정 의혹으로 퇴진했다. 채용 6개월, 1년 만에 승진도 했다. 사무와 감사를 총괄하는 사람들이 모두 연루됐다. 선관위 자체 조사에서 드러난 의심 사례만 10건이다. 아빠 찬스, 세습 채용이란 말까지 나온다. 외부조사를 하면 얼마나 더 많을지 알 수 없다. 감시받지 않은 조직인 탓이다.
어디 선관위뿐이겠나. ‘아빠 찬스’는 이념과 여야,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자동차 노조는 고용세습 단체협약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일부가 특혜를 받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고용 기회를 박탈당한다.
사회 전반을 뒤져 불공정 채용과 승진은 뿌리 뽑아야 한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