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슬로우 라이프, 길에서 찾은 자유

카메라 가방을 메고 나서는 게 일상이 된 사람에게 물음을 하나 던져본다. 그에게는 여행이 먼저일까 사진이 먼저일까.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기가 고스란히 시와 사진집으로 환원되는 사진작가 류형우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그를 만났다. 그는 길에서 찾은 길 위의 행복을 위해 세속적인 관계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의사였던 사람이 진료실을 나왔고, 예총 회장직도 단임으로 내려놓았고, 열의가 많아서 40여 개의 단체에 개입되어 있던 사회활동을 하나씩 접었다. 에너지가 고갈된 느낌이었다던가. ‘지진지퇴(知进知退)’라고, 일만 하다 죽고 싶지 않더라고 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이 있다. 사진기를 메고 온 산야를 헤매는 게 즐거움이었는데 어느 날 허리를 다쳤다. 허리의 통증으로 걷지 못하는 동안 별 상심이 다 들었는데, 정상적으로 걸을 수만 있으면 정말 좋은 마음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간절한 바람 탓일까. 아주 천천히 건강이 회복되었다. 아기걸음마를 떼듯이 조금씩 움직였다. 류 작가가 건강을 회복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였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의사가 아직 무리라고 하는데도 그냥 길을 나섰다. 오로지 걷기 위한 여행이었다. 성 야고보가 걸었던 길을 따라 하루에 20~30㎞씩 걸었다. 프랑스 북부의 생장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 산티아고로 이어지는 총 800㎞를 걷는 길이었다.첫날 걸으며 배낭이 지나치게 무겁다는 것을 알았다. 긴 행군에 필요한 간식을 시작으로, 일상의 필수 도구라는 생각으로 꽉꽉 채워 넣었던 짐들이 육신을 너무 힘들게 했다. 배낭에서 짐을 좀 내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욕심을 버려야 무념무상도 이루어지고, 비워야 또 채워지는 것이니.걷는 동안 한껏 단순해진 머리로 살아온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았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이후 자신감이 붙어서 희말라야 ABC를 포함한 여러 산들도 다녀오고, 드디어 높이 5,895m의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등정에 도전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고, 지구온난화로 정상의 빙하가 녹고 있는 산이었다. 등산객 한 사람당 가이드와 포터, 셰프를 포함한 세 명이 공식적으로 배정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그 나라만의 일자리 창출 수단이라고 했다.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 대부분인데 그들은 바비 맥퍼린의 ‘Don‘t Worry, Be Happy’나 ‘하쿠나마타타’ 같은 노래를 부르며 등산객들에게 용기와 즐거움을 주더라고 했다. 그들이 의외로 참 많은 걸 갖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고.“고산증이 심각했을 텐데 그나마 괴로움을 조금 덜어주었겠어요.”“걱정 마, 문제없어, 힘든 산행으로 어렵게 살면서도 다 잘 될 거라는 노랫말처럼 청년들이 늘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그들 덕분에 고산증을 이겨내고 정상에 갈 수 있었어요.”류 작가는 가난하지만 운명에 순응하는 심성과 자연만으로 풍요로운 나라 아프리카를 그렇게 만났다. 여행은 이렇듯 각 나라의 문화와 풍속, 삶의 일부분을 알게 해준다. 그 힘든 여정 속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건 그들의 의식이 그 만큼 건강하고 긍정적이란 말일 것이다. 류 작가는 거기서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삶의 풍요로움은 재물이나 권력 같은 물질적인 풍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탐욕스럽지 않은 상태에서 오는 의식의 지향성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집어넣어서 배낭이 무거웠던 것처럼 그의 삶 역시 너무 많이 지니고 산다는 반성도 했다.“의사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병원을 그만둔 이유가 뭘까요?”“일만 하다 죽고 싶지 않았어요.”누구나 부러워하는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은 지금 그는 다만 전직 의사일 뿐이고 전 예총 회장일 뿐이다. 평소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역할이나 참여에 대한 고민을 늘 해왔기 때문에 사회단체를 직접 만들기도 하고 참여도 하며 많은 단체에 몸담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적을 둔 병원이 지역민의 도움으로 성장한 터여서, 나누는 마음으로 지역민을 위한 문화공간 ‘예지앙’을 열었고 그곳을 모태로 ‘수성문화원’을 만들기도 했다. 사회에 돌려드릴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단체에 기여하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했다. 어느 날 부친이 ‘나아갈 줄 알면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며 ‘지진지퇴(知进知退)’라는 액자를 만들어주셨는데 그것이 그의 좌우명이 되었다. 앞만 보고 돌진하는 아들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류 작가가 예총 직무를 시작하기 전에 병원 일을 정리한 것도 그런 마음이었다. 병원 일을 해가며 예총 회장직에 앉아 있는 건 예술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총 일을 하는 동안에는 오로지 예총만 생각하기로 했다.“일을 열심히 하셨는데, 예총 회장직을 단임으로 끝내셨네요.”“호랑이 등에 올라타면 내리고 싶어도 못 내려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자리에 대한 탐욕은 인간을 추하게 만든다.’는 자각이 단임으로 일을 놓게 만들었다. 자신의 한계는 본인이 더 잘 안다며 그가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평소에 매우 건강하셔서 백수 할 줄 알았던 부친이 일흔세 살에 돌아가셨다. 잦은 화재와 사업 실패로 고생만 하셨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가실 줄 몰랐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바쁜 사회생활을 핑계로 소홀했던 아쉬움이 노환으로 편찮으신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형식적인 모자관계가 아닌 진정한 가족과 행복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가치가 가족 사랑이고 행복이어서, 이후 모자 사이의 관계는 물론이고 가족을 생각하고 표현하는 방법까지 달라졌다. 사회적 역할에 함몰되고 보여주기 위한 삶에 치중하는 동안 잃어버린 소중한 삶의 가치를 그렇게 되찾았다.“지난해에 첫 개인전을 가지셨는데 어떤 작품들인가요?”“삶의 가치와 생명의 기쁨을 주제로 한 50여점의 작품을 선보였어요. ‘길 위에서 길을 찾다’라는 주제로 트레킹에서 찍은 사진을 담은 전시회였어요.”주중에는 안동 하회의 시골집에서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아간다. 아내와 함께 산에도 다니고 사진도 찍으며. 항상성을 유지하되 하루하루를 주도적으로, 쫒기는 삶이 아닌 진정한 자기만의 슬로우 라이프를 실천한다고.“혹시 어떤 새로운 계획을 갖고 계세요?”“지금 이대로가 좋지만 혹 시간이 허락하면 하회마을의 사계를 사진집에 담아보고 싶어요. 코로나가 풀리면 세계 곳곳의 오지 트레킹도 가고.”류 작가는 삶이 비누거품 같다고 한다. 허상을 좇으며 열심히 달리다 녹슨 기차처럼 어느 순간에 멈추고 마는 것이 인생이니, 남은 시간이라도 가치 중심으로 자신의 주관적 의지대로 살며, 등에 진 짐을 조금 내려놓고 슬로우 라이프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한다.“성공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돈이나 부귀영화, 권력 같은 부유함보다 세상을 마감할 때 가족들로부터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글을 쓰는 사람들이 거미줄처럼 제 속의 문장을 뽑아 쓰듯이 사진작가 역시 끝이 없는 길을 걸으며 자연과 사물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카메라에 담는다. 예술의 완성도를 위해서 일상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천천히 자신의 템포대로 걸으며 슬로우 라이프를 실행하는 것이다. 내려놓아야 살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 자체가 나름 의미 있는 삶의 이력이지만 혹 과유불급으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고.류 작가는 대구수성문화원 초대원장과 파티마여성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10대 대구예총 회장을 역임하며 대구문화예술 발전과 지역의 문화예술 행사를 주도했고 대구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예총 예술문화상을 수상했다. 왕성한 사회 참여와 역할로 대통령상과 보사부장관상, 통일부장관상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끝

2021-06-29

보는 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아름다움에도 각도가 있다. 신천을 걷다 보면 물을 거슬러 오를 때와 물길을 따라 내려올 때의 느낌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물을 거슬러 오를 때는 돌과 풀을 헤치다 폭포에서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의 속살을 훤히 볼 수 있는데 반해서, 물길을 따라 내려올 때는 다만 물의 겉모습만 보게 되므로 거슬러 오를 때의 감흥을 그대로 느끼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것도 그와 같다. 좋은 영화를 한눈에 알아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물길을 거슬러 오르듯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게 된다. 좋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것을 나는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행위와 같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처음 볼 때와 두 번 볼 때의 감흥이 다른 것은 보는 각도가 달라서이고, 물의 속살과 상처를 바라보듯이 영화를 더 깊이 느끼기 때문이다. 대구에 세 개의 큰 영화제가 있다는 사실을 오오극장의 서성희 대표와 인터뷰를 하고서야 알았다.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가 주최하는 대구단편영화제가 있고, 전국 최초로 지역 시민사회와 복지단체, 노동조합 등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운영되는 대구사회복지영화제가 있고, 또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구여성영화제가 있다.대구단편영화제는 올해 스물두 돌을 맞았고, 대구사회복지영화제는 열한 돌이고,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세상을 위하여!’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대구여성영화제는 2012년에 출범해서 올해 아홉 돌을 맞는다. 대구에는 또 예술영화관으로 널리 알려진 동성아트홀과 독립영화관으로 유일한 오오극장이 있어서 영화애호가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름난 영화제가 셋이나 되고 예술영화를 걸 수 있는 공간까지 준비되어 있어서 매년 젊은 영화인들이 대구로 몰려온다. 서 대표는 독립영화제로서 대구단편영화제가 전국 최고의 수준을 자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단편소설 단편영화. 단편이란 어휘의 밀집성과 꽉 찬 작품성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녀를 만난 김에 독립영화에 관한 얘기를 들어본다.“독립극장의 개념부터 말씀해주세요.”“독립영화는 상업 영화 자본에 의지하지 않고 제작되는 영화를 말하며, 대기업화된 제작사의 종속에서 벗어나 자본시스템으로의 독립, 정치로부터의 자유로운 독립을 포함합니다.”독립영화는 우선 자본으로부터의 독립과 상업 영화의 지배적인 내러티브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한다. 자본이 대기업화 되는 상업영화의 투자 규모가 평균 총제작비 100억 정도라면 독립영화는 4억~10억 미만의 저예산으로 만드는 영화를 말한다고 매우 구체적으로 내용을 일러준다. 대구·경북 단편영화제 출품작이 1000여 편인데 그 중에서 30편~ 50편을 뽑는다고 한다.“단편영화제의 의미가 뭐예요.”“서사구조와 영화미학의 완성을 익히는 단거리경주라고 할까요? 지역에서 영화제는 전국 영화인과의 교류를 위해서도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봐요.”대구독립영화제도 21회나 되는 연식이 쌓여 매년 200여 명의 감독들과 스태프들이 대구를 찾고 있다며, 서 이사장은 단편영화를 찍은 감독이 결국은 장편영화를 찍더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인다. 봉준호 감독도 단편영화를 찍었다고. 단편영화를 한 편 찍으려면 인적 네트워크가 최소한 10여 명이 함께 해야 하는 작업이라 자본이 많이 들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그 마저도 확보하기 어려운 처지라며 영화인들의 고충을 슬쩍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하겠다는 청년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는 긍정적인 변화를 언급하며, 서 대표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대구영상미디어센터에서 영화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시간과 공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고 한다. 예술이란 게 본래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것 아닌가. 아름다움에 취해서 가까이 가면 너무 뜨겁고, 거리를 두면 안타깝고, 그렇다고 외면하면 영원히 꺼져버리는 것. 예술은 늘 예술가들의 피와 땀을 먹으며 표가 나지 않게 천천히 자라다 어느 순간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불꽃같은 것이지.영화를 가르치는 학교도 없는 대구가 질적으로 수준 높은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놀랍다. 슬며시 궁금해진다. 대구가 영화학교 하나 갖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우리들의 시네마 천국’ 잡지를 읽어 보면 이름만으로도 뜨르르한 대구 출신의 영화감독들이 많다. 그 이름을 잠깐 언급해 보면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한 이규환 감독을 비롯해서 선산 김씨의 김유영 감독, 한국 전쟁기의 유일한 작품을 남긴 민경식 감독, 성악과 출신의 조긍하 감독, 경북 하양의 딸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인 박남옥 감독이 있고, 대구상고 출신의 박철수 감독, 그 유명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찍은 배용균 감독, 경북대 출신의 교사 출신 이창동 감독까지 모두 전후 한국영화의 부흥을 이끈 분들이다.내게 있어서 영화는 그저 재미있게 보면 되는 것이어서, 그 흥미로운 장르의 뒤편에 이토록 고생스러운 누군가의 노력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이 사이좋게 지낸다던가. 서 대표는 대구영화계가 꼭 그렇다고 한다. 형편이 어렵다 보니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희들끼리 똘똘 뭉쳐서 서로 협력하기 때문에 발전하는 거라고, 대구영화계의 성과를 다소 시니컬하게 피력한다. 그 세계에 오래 몸담고 있다 보니 속사정을 너무 잘 알아서 그럴 것이다. 그러면서 서 대표는 영화가 프로젝트형 예술이어서 인력과 기반 인프라가 구축되기 쉽지 않다고 한다. 인재를 키우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빠듯하고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과 세 개의 대구영화제가 각자의 자리에서 꿋꿋하게 자라주었으니 지역의 한 사람으로서, 그 동안 참여해준 많은 영화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영화를 어떻게 시작했어요?”“고등학교 때에 무용을 했는데 남경주의 뮤지컬을 보고 감동 받아서 연극영화과에 지원했어요. 연극영화과에 갔다가 나중에 영화로 전공을 바꾼 것이 인생을 탈바꿈한 계기가 되었어요.”졸업하자마자 영화사 기획실에 입사했다. 감독이 되려면 영화 연출부 막내로 현장에 나가야 하는데, 부모님의 지원 없이 서울에서 혼자 지내는 게 겁이 나더라고 한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기획이 적성에 맞아 재밌게 서울생활을 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영화 마케팅공부를 해보려고 미국 유학 준비를 하던 중에 IMF가 터졌다. 연극을 하다 배우가 되고 싶었고 영화를 찍고 싶기도 했는데, 어쩌다 보니 공부를 하게 되었다면서 박사과정도 늦었고 결혼도 늦었다. 나중에는 공부가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두했다며 서 대표가 예쁘게 웃는다. 모든 게 늦은 편이라고. 무대에 세워도 해낼 것 같은 얼굴이다.“오오극장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 얘기 좀 해주세요.”“어쩌다 보니 쓰게 된 감투가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인데, 저의 첫 번째 사업이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을 맡은 일이에요.” 영화관이 생긴 지 6년이고, 대구시에서 위탁받아 운영하는 대구영상미디어센터장은 3년차다. 서 대표는 대구에서 영화를 기획하고 만들고 제작하고 상영하는 일까지 지원해주고 있다. 상업 영화가 97%를 차지하고 있는 불합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영화의 뿌리는 약해지고 줄기는 말라버리는 기현상이 발생한다고 염려를 한다. 정책적으로 독립영화 지원이 열악하다는 말일 터이다. ‘검은 사제들’도 단편영화를 확장한 영화라고 귀띔해준다. 엘리트를 성장시키기 위한 전문 영화교육기관도 만들어져야 한다고 전문가다운 의견을 피력한다.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의로 꽉 찬 청년 감독들을 배양하는 독립영화 지원이 시급하다며, 대구가 영화를 가장 잘 만드는 지역으로 손꼽힐 정도가 되고, 슬슬 전망이 보인다고 한다. 대구·경북에 영화과가 전무했다. 2022년 3월에 영남이공대가 ‘시네마스쿨(YNC Cinema School)’을 개원한다. 대구·경북 최초로 정규 대학과정에 영화과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대구시 교육청에서 2022년 3월에 ‘대구학교미디어교육센터’가 예술융합창작지원을 목적으로 문을 연다. 대구 최초로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한 예술 창작 미디어 센터로 영화 관련 예술 미디어 기초 교육이 다져지는 역사적인 순간이다.서 대표는 영화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경영학과 (영화)마케팅으로 논문을 쓴 이후, 지금까지 영화 아닌 일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오로지 한 길을 걸어온 영화인이다.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6-15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든 옷

이노센스의 일층 매장에서 천상두 디자이너를 만났다. 매장에서 얘기를 나누다 패션쇼 동영상을 보기 위해 이층 카페로 올라갔다. 가수를 알려면 노래를 들어봐야 하고, 화가를 알려면 그림을 봐야 하고, 디자이너의 진면목을 알려면 그가 만든 옷을 보는 게 가장 빠르다. 천 대표도 그런 예술의 속성을 알기 때문에 패션쇼를 보여주겠다고 했을 것이다. 물론 매장에 옷이 가득하지만 그냥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과 모델이 입은 옷은 차원이 다르니.밤이 되면 명망 있는 지인들이 모여들어 화려하게 부상할 공간이지만 낮이어서 카페에 불이 꺼져 있고, 긴 탁자에 침전된 고요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재즈가 흐를 것 같은 어둑한 그대로, 가볍게 실내등 하나만 켠 채로 커피부터 따라준다. 어둠 속에서 찬연히 빛나는 흰색 커피잔의 유니크한 모습에 매료되었다. 특이한 모양의 흰색 손잡이를 살피고 있노라니, 천 대표가 ‘내가 만든 거예요.’ 한다. 신은 참 짓궂다. 어쩌자고 재능덩어리에게 여러 개의 달란트를 한꺼번에 주셨는지.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나는 커피 잔에 감탄하고 있을 짬도 없이 천 대표가 패션쇼 동영상을 열어준다. 2014 대구패션페어에서 프랑스의 모자 디자이너이자 무형문화재 셀린 로베르트(Cenline Robert)와 컬래버레이션으로 이루어진 바잉 쇼 영상이었다. 인터뷰 중에 그녀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게 궁금해서 물었다. “선생님에게 저 패션쇼의 의미는 무엇인가요?”“제 인생에서 가장 기록적인 일이라고 할까요. 지금까지는 그래요.”누구나 자신의 일생 중 기억에 남는 사람 한 명쯤 마음에 품고 있기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든 한 개인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할까. 어려운 시기에 발돋움할 계기가 되어주었다거나, 아무 것도 보여줄 수 없는 상황인데도 무작정 믿어주었다거나, 또는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거나. 그런 사람을 마음에 둔 사람은 행복하다. 천 대표에게 셀린 로베르트가 그런 사람이었던가 보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155년 전통의 3대째 이어져 온 모자디자이너였다. 파리에 갔을 때 그녀가 먼저 패션쇼를 해보자고 제의를 하더란다. 프랑스 최고의 모자디자이너가 천 대표의 작품을 알아봐주었다는 말이다. 아파트 한 채는 털어 넣어야 할 것 같은 파리에서의 큰 쇼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사절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천 대표는 경제적 사정으로 물리친 파리 패션쇼 대신에 한국에서 쇼를 준비했다. 무대에 올릴 작품을 사진에 담아서 보냈더니 셀린 로베르트가 흔쾌히 호응하며 모자를 한 상자 가득 담아서 보내주었다. 그 모자로 즐겁게 쇼를 진행할 수 있었다. 패션쇼를 위해 한국에 온 셀린 로베르트에게 천 대표는 직접 만든 옷을 선물했다. 그 옷을 입고 무대 인사를 하는 그녀를 보며 천 대표의 가슴이 얼마나 벅찼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혹시 모자를 잃어버리면 어쩌나 걱정되어 패션쇼가 끝나자마자 모자를 돌려보냈다며, 나중에 모자를 모두 구입해서 홍콩 바이어들에게 옷과 함께 팔았다고 한다. 지난날을 즐겁게 회상하는 천 대표를 보며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사람보다 더 큰 부자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패션쇼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육 개월 정도?”작품의 영감을 얻기 위해 따로 여행을 하느냐고 물으니 영감은 예고 없이 다가오는 것이어서 집안이나 화장실, 길을 걷다 일상에서 잘 얻는다고 한다. 그 예를 보여주듯이 천 대표가 패션쇼의 한 장면을 가리킨다. 한 모델이 쓰고 있는 장미꽃 화관이 길에서 주운 조화였다고 한다. 은행을 다녀오던 중에 장미꽃 조화를 주워서 머리띠로 만들었다며, 그렇게 영감을 길에서 자주 만난다고 한다.“언제 어떻게 해서 옷을 하게 되었어요?”“중학교 때에 어머니께 재봉틀 사용법을 배운 게 시작이었어요.”나일론 소재의 청바지 다리를 반으로 잘랐다. 자른 부분에 메탈 반짝이를 풀로 붙여 재봉틀로 박아서 자기만의 옷을 만들었다. 친구에게 자랑을 했더니 말광대 같다고 놀리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만든 옷을 자랑하고 싶은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서 서운했다. 음악선생님은 그에게 성악을 전공하라고 하셨지만 그의 가슴에 이미 옷에 대한 관심이 자라고 있었다. 평범한 걸 거부하는 것부터 남달랐다. 옷을 맞출 때도 일일이 디자인을 일러준 탓에 특이하게 입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제대하고 진로를 고민할 때, 친구들이 옷을 만들어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옷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무작정 남성복을 만드는 가게를 차렸다. 서문시장의 장인급 재단사에게 옷을 맡겼다.“그 무모함을 젊음이라고 해야 할까요?”“자신을 믿어주는 용기라고 해야겠죠.”스스로를 믿는 용기로 대구백화점 앞 사루비아 양화점 옆에 가게를 열었다. 남성복 가게인데 특이한 디자인 탓인지 여자 손님이 더 많았다. 여성복 매장으로 종목을 바꾸고, 아서 펜 감독의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Bonnie and Clyde)’의 제목을 따서 가게 이름을 지었다. 독일군 야전점퍼에서 힌트를 얻어 남녀 구별 없이 입을 수 있는 유니섹스 모드로 옷을 만들었다. 마네킹도 직접 만들었다. 낚싯줄을 천장에 매달고 바가지에 얼굴을 그려서 허수아비처럼 흐늘거리게 디스플레이해서 옷을 걸었다. 무엇이든 남달라야 했다. 얼김에 여성복으로 종목을 바꾸었지만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여성복을 하려면 용어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옷 만드는 공장의 직원을 채용해서 그들에게 하나하나 용어를 배웠다. 그러다 패션 트렌드가 정장으로 바뀌며 또 한 번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정장을 하려면 먼저 옷 만드는 법부터 배워야겠기에 일본으로 갔다. 세계적인 최고급 상품을 보며 신의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정장을 한 벌 사라는 하용수 형의 권유대로 조르지오 아르마니 정장을 23만엔에 샀다. 그때만 해도 큰돈이었다. 그 옷을 가져와서 분리하는데 이틀 걸렸다. 돋보기로 봉재선 하나하나 핀으로 꽂아가며 패턴을 익혔다. 완벽하게 재생하고서야 정장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대구에서 정장만은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욕망과 실제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체형이 달라서 아르마니 정장이 제 가치를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 옷을 한국 여성들의 패턴에 맞게 구성하는데 5년이 걸렸다. 정장에 맞게 매장의 상호도 바꾸었다. 디자이너이자 영화배우인 하용수 씨가 지어준 이름이 바로 ‘이노센스(INNOCENCE)’였다. 유니섹스의 최초 발생지인 삼일고가도로의 광교에서 하용수 씨가 음악카페 ‘유혹’을 운영하며 ‘대블 바이 익스프레서’라는 케주얼 매장을 운영할 때였다. 오사카에서 처음 만나 친해졌지만 하용수 씨도 대구 향촌동이 고향이었다.“혹시 살며 후회스러웠던 적이 있으세요?”“오사카 미나미에서 이노센스 매장을 열었던 적이 있어요.”국내와 일본을 드나들며 운영했는데 불경기 때문에 성급하게 매장을 철수한 것이 후회스러웠다고 회상한다. 경기가 나쁘면 여자들이 지갑부터 닫는다는 의견에 귀를 기울인 탓이었다. 실패가 두려웠다. 그때 마음 약하게 먹지 않고 견뎠으면 지금쯤 오사카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고, 세계시장과 교류하기도 한층 쉬웠을 텐데. 그 후 그는 중국시장을 개척해서 일 년에 두 번 내지 세 번 꾸준히 패션쇼를 하고 있다. 대련, 베이징, 상하이, 연길, 칭다오, 온주, 정저우, 충칭 외 중국 전역에서 패션쇼를 했다. 옷을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코로나가 닥쳐 모든 행사가 멈추었다. 그래도 지난해 11월 5일에 엑스코에서 패션쇼를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대구에서 활동하시는 디자이너는 어떤 분들이세요?”“고급 옷을 만들던 미스 김텔라, 코코 박동준을 가장 먼저 손꼽지만 두 분 모두 돌아가셨어요.”지금은 패션 아카데미 회원으로 최복호, 전상진, 김용만, 이응도, 변상일, 최태용, 김서룡 등이 있고, 90년대 크리에이터 디자이너 그룹에 소속된 박항치, 하용수, 김영세, 신장경, 이상봉, 박윤수, 장광효, 선미수 등과 활동했다며 천 대표는 영원히 디자이너로 남고 싶다는 바람을 펼친다. 어느 소속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옷을 만들고 싶은 고집이 올곧다. 그가 말한다. 10년을 입어도 어제 만든 것처럼 변하지 않는 옷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또 어떤 세계로 나아가게 될지 알 수 없지만 항상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둔다고 한다.대구광역시장 표창장과 광저우 패션협회 최우수디자이너상,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표창을 받았고, 미국독립기념 초청 패션쇼, 프랑스 후즈 넥스트, 중국 대련패션쇼·상하이 패션쇼,·청도 패션쇼 등, 난치병 어린이 돕기 자선 패션쇼와 불우이웃돕기 패션쇼로 수많은 업적을 쌓았다./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6-08

몸의 요구를 알아채는 일

김민정 원장이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상자 속에 국화꽃 모양의 들깨타르트와 흑임자 다식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궁중 잔치 기록서에 의하면 다식에는 황률다식, 송화다식, 흑임자다식, 녹말다식, 강분다식, 계강다식, 청태다식, 신감초말다식 외에 오곡다식과 산약다식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차에 곁들여 먹는 음식’이라는 뜻의 다식은 오색의 전통문양을 다식판으로 찍어내기도 하고, 김 원장처럼 손으로 정성껏 매만져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차를 마시며 국화꽃 모양의 흑임자다식을 먼저 맛보았다. 검정깨의 고소함에 어우러지는 조청 맛이 은근한 미감으로 다식의 풍미를 더했다. “발효음식에 눈을 뜬 계기가 있나요?”“2010년도에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어요. 면역성에 도움이 될까 하고 약용식물을 연구하다 발효음식을 만났어요.”인진쑥과 아카시아 꽃, 솔잎 오디, 산야초를 채집해서 발효시켜 먹으며 건강을 회복했다. 발효요리를 시작한 초기에는 누구나 다 아는 대로 설탕물과 산야초를 1 : 1 비율로 담그다 차츰 설탕을 줄이고 올리고당과 꿀 조청을 넣는다거나 배를 섞어서 버무리거나, 재료를 달리하며 전통방식의 발효를 변화해 나갔다. 첨가물을 넣을 때도 산야초 성분 속에 있는 좋은 성분을 빼내도록 프락토 올리고당과 같이 좋은 재료를 사용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효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갔다. 정답은 아니지만 수십 년의 실전으로 경험을 쌓아가며 개발하고 찾아낸 연구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며 삶에 이익이 되도록 널리 알리는데 힘썼고, 단맛을 줄이는 일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요리연구를 하던 중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한 기억이었어요.”어머니가 제사음식을 한다거나 다른 요리를 할 때마다 딸을 곁에 앉혀두고 제사음식과 묵나물 같은 여러 가지 산나물 다듬는 법을 가르쳤다.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서 요리로 제 몫을 할 싹수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고향이 청송이고 송소고택 있는 덕천마을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많이 아팠다. 시골에 살아도 농토가 없어서 어머니가 멀리까지 행상을 하러 다니셨다. 어린 그녀가 어머니의 빈자리를 맡아서 집안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토속음식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문학소녀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문예대회에서 상도 받았지만 몸이 아픈 아버지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꿈을 접었다. 86년도에 문화센터에서 요리강의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식 일을 한 이후로 37년이 흘렀다. 출장요리부터 집들이 요리 등, 불러주는 대로 가서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다며 소탈하게 웃는다. 그녀의 웃음이 갓 다듬은 산나물처럼 건강하다.“발효요리와 함께 식용곤충요리를 하신다고 들었어요.”“흰점박이꽃무지, 장수풍뎅이애벌레, 메뚜기, 백강잠, 번데기, 귀뚜라미, 밀웜 등 7가지를 정식으로 식용곤충요리로 허가받았어요.”김 원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식용곤충요리연구협회를 창립했다.  잘 키운 농가의 식용곤충을 선택해서 단백질이 풍부한 곤충요리를 연구한다. 코로나가 오기 전까지 대경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곤충요리 수업을 했다. 맨 처음 식용곤충요리를 알리기 위해 시식회를 한 적이 있다며 그때의 얘기를 들려준다. 식용곤충요리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대구광역시 농업기술센터를 찾아갔다. 식용곤충요리 전시회와 시식회를 겸하도록 장소 제공을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흔쾌히 자리를 내주더라고 했다. 그다지 큰 기대를 갖지 않고 시작한 행사가 음식이 모자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을 때 모두 놀랐다. 처음의 성공을 시작으로 2회 전시회를 겸한 시식회가 성공하자, 대구광역시의 도시농업박람회에서 요리대회를 해달라는 제의를 했다. 그렇게 요리라이브로 열 배 이상의 효과를 거두며 매스컴의 관심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성공을 예상했어요?”“메뚜기 잡으러 다니던 생각을 하며 벌인 일이었어요.”그렇게 큰 성공을 거둘 줄 몰랐다고 한다. 굼벵이, 메뚜기, 밀웜 모두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식용으로 먹어오던 것이었다.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고, 없는 것을 만들어낸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주어서 너무 기뻤다며 김 원장이 함빡 웃음을 지었다. 솔직한 담론과 매순간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적극적인 용기까지 속속들이 건강한 에너지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녀는 요리에 관한 것이면 저절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에너지가 샘솟는 다고 한다. 어처구니없도록 일을 못했는데도 용감하게 뛰어다닌 걸 보면 의욕이 왕성했던 걸 알겠더란다. 돼지고기와 미삼을 활용한 음식과 애피타이저로 요리왕 선발대회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았다며, 미삼으로 샐러드를 만들고 양파 링 속에 미삼을 넣어 수삼샐러드를 만들었다고 한다.“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하나만 들려주세요.”“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던 얘기 하나 할게요.”2007년도에 중국 광저우의 ‘삼청각’이라는 한식당을 호텔 이층에 오픈하는데 와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직 요리를 한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데도 망설이지 않고 달려간 용기가 오늘의 그녀를 만들었다. 호텔 한식당에서 넉 달 동안 일을 했던 그 시간이 김 원장에게는 한식에 대해 적극적으로 연구 실습하는 계기가 되었다. 직원들과 의사가 통하지 않아서 밤마다 그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쳤다. 중국인 직원들을 앉혀놓고 자신은 바빠서 중국말을 배울 시간이 없으니 너희들이 우리말을 배우라고 했다. 광저우 호텔에서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이 더 많이 배웠다며 그녀는 낯선 곳으로 겁 없이 달려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우리나라 밥상에서 기본적인 반찬이 되는 음식들이 중국에서는 반찬 하나하나가 모두 메뉴구성이 되고 돈으로 환산되는 것이 한국과 다르더라고 꼬집었다. 언제 어느 때고 푸짐하게 내놓는 우리네 밥상의 정겨움이 돈의 가치로 바뀌는 영업방식이 낯설었나 보다.“코로나로 인한 변화를 꼽는다면?”“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가 없어서 발효식품의 메뉴개발을 시작했어요.”역시 적극적이다. 잠시도 두 손 놓지 못하고 움직이는 것이 그녀의 에너지를 확인시킨다. 강의와 모임이 중단된 한가한 틈을 이용해서 고추장이나 된장, 간장을 재래의 방식에서 벗어나 즉석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현대적 방식을 연구했다고 한다. 제대로 된 자연발효간장을 맛있게 먹으려면 3년이 걸린다. 발효는 기다림이다. 기다림 속에서 사람도 성숙해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연유로 김 원장은 코로나로 여유로워진 시간을 이용해서 버려야 할 것과 권장해야 할 것을 찾아내고 세세하게 기록해서 치유음식으로 발전시키는 연구를 한다. 그 시작이 빙초산 대신에 레몬을 넣어서 초장을 만드는 건강한 음식 개발이다.그녀는 또 신체 각 기관별 치유 음식으로 다섯 가지 맛과 색으로 음양오행과 오장육부에 도움 되는 음식도 연구 중이다. 간은 녹색에 신맛이고, 심장은 붉은색에 쓴맛이고, 비장은 노란색에 단맛이고, 폐장은 흰색에 매운맛, 신장은 검은색에 짠맛이 도움을 준다. 폐가 좋아하는 흰색 음식으로 무와 양파, 율무, 배가 있고, 심장에 좋은 적색 음식으로 쑥, 익모초, 도라지, 커피, 작설차처럼 쓴맛을 내며, 위와 췌장 같은 소화기에 좋은 황색 음식으로 인삼, 고구마, 호박 등의 참외가 있고, 신장과 방광, 관절 에 좋은 흑색 음식으로 검은콩, 다시마, 멸치 등의 해조류가 있다. 그 밖에 동물의 간과 쓸개에 좋은 녹색 음식으로 메밀, 팥, 견과류가 간의 활성화를 돕는다.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단맛 짠맛 신맛 쓴맛 매운맛을 골고루 적절하게 섭취하는 것이 건강한 식생활의 기본이다. 음식에는 정확한 답이 없고, 자기 방식이 옳다고 함부로 주장할 일도 아니다. 현명하게 몸의 요구를 알아채는 게 중요한 것일 뿐. 김 원장은 자신이 연구한 것을 누군가 공유한다면, 그것은 그분과 자신의 방식이 맞아서 그런 거라며 알고 보면 몸의 요구는 그렇게 쉬운 거라고 한다. 정보를 나누어 가지며 몸의 요구를 알아채는 것.김 원장은 향토음식 식문화대전 요리대회 통일부 장관상, 재능나눔 공헌대상, 대한민국문화교육대상 등의 포상 경력에 더하여, 대한민국 요리명인으로서 발효요리와 식용곤충요리연구로 사회에 재능기부도 하고, 국민건강에 이바지하며 나누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6-01

널리 이로운 세상을 펼치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여유당전서 500여 권을 집필했다. 다산으로 하여금 유배지의 길고 긴 외로움과 고통을 견디며 집필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차(茶)였다. 다산이 살았던 초당 가까이에 백련사가 있었다. 그 백련사에 다산을 다도의 길로 인도한 혜장선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차 동무가 되어 함께 차를 마시며 주역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혜장선사는 다산으로 하여금 길고 긴 유배의 외로움을 견디며 집필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팔공산 자락에 보이차를 연구하시는 분이 있다고 해서 찾아 나섰다. 차방의 문을 밀고 들어가자 옹기종기 놓여 있는 다기가 눈길을 끌었다. 말갛게 머리를 깎은 여승이 두 손을 합장하며 맞아주었다. 그녀는 부처님에 귀의한 스님이 아니라 차에 온 생을 맡긴 사람이었다. 말갛게 깎은 머리와 잿빛 승복이 어떤 마음으로 차 생활에 임하는지 알게 해주었다. 김경순 위원에게 보이차의 정의가 뭐냐고 물으니 햇볕에 말린 운남대엽종 쇄청차를 건조와 증압을 거쳐 자연 발효한 차라고 한다. 마주앉기 바쁘게 물 끓는 소리가 들리고, 김 위원이 흰색 다기에 갈색차를 따라주었다. 그 갈색이 바로 체지방 흡수를 막아주는 갈산지방이라던가.“차를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예요?”“사십아홉 살인가? 차를 제대로 알고 싶어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어요.”김 위원이 원광대 차문화학과에 진학한 것이 49세 때였다고 한다. 비교적 늦은 출발이었지만 흔한 말로 그녀에게는 나이가 숫자에 불과했고, 오래 마음에 품었던 염원을 향해 거침없는 발길을 내딛었다. 차 문화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석사 박사 과정을 거친 후 다학연구소의 연구위원이 되기까지 운남성 6대 차산지를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대설산, 양패, 용춘, 명랑, 반잡, 승강, 반잡 등의 품질 좋은 고수차를 만들기에 온 시간을 다 바쳤다. 모차를 사서 자신만의 브랜드로 만들어서 ‘홍익차문화연구중심 고수순록’으로 완성시킨 것이 2014년이라며 그날의 감회를 돌아보는 듯 그녀는 시선을 멀리 둔다.“보이차도 종류가 다양할 텐데요.”“운남성 보이차의 조례법 품평사에 의하면, 운남성에서 생산되어야 하고, 대엽차 고수차여야 하고, 햇볕에 말려야 진짜 보이차라고 합니다.”보이차의 네 가지 진위판별법을 보면 생산 원료를 속인다거나, 대엽종 고수차가 아닌 밭차를 사용한다거나, 생차를 자연 발효시키지 않고 반생 반숙 같은 악퇴법으로 빨리 발효시킨다거나, 발효 방법을 속이고 저장날짜를 속이는 것은 모두 가짜라고 못을 박는다. 가장 중요한 것이 차의 저장 날짜인데, 압병한 차에 발효한 날짜를 정확하게 기록해야 하고, 차를 사는 사람도 4월 20일 전에 딴 것으로 골라야 진짜 보이차를 마실 수 있다며, 차 정보를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고 재삼 강조했다.“좋은 차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좋은 차는 잎 모양이 균일하고 흑갈색의 색상과 윤기를 유지하고 있어요.”차 품평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좋은 차를 널리 알게 해주는 것이라며, 김 위원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차를 마시도록 돕기 위해 영상 강의로 진짜 차와 가짜 차의 분별법을 일러준다고 한다. 흔히 골동경매에서 산 싸구려 차를 보이차라고 선물로 주는 현실이 너무 황당해서 유튜브 강의로 보이차 진위 판별 4계명을 목이 아프게 설명한다며, 자신이 먹지 않는 차를 선물로도 주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선물은 귀한 사람에게 주는 귀한 마음이라며, 나쁜 차를 선물할 거면 차라리 참외를 사가는 게 낫다며, 나쁜 차를 진짜인 것처럼 속이면 안된다고. 예를 들어서 생산일 12월12일 채취했다고 표기되어 있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차가 아니라 가지치기로 만든 독이라고 한다. 그런 차는 먹어서도 안되고 선물로 줘서도 안된다고.“녹차와 보이차의 차이를 말해주세요.”“녹차와 보이차는 발효과정으로 구분됩니다. 녹차가 잎을 따는 즉시 솥에 덖어서 발효가 안되게 하는 덖음차라면 보이차는 잎을 말려 효소발효시키는 것이 녹차와 다르다고 보면 됩니다.”그러면서 김 위원은 물의 온도와 다례법의 차이에서도 구별된다고 한다. 녹차를 쪄서 증차로 만들면 물 온도 80도로 우려도 되지만, 우리나라는 녹차를 솥에 덖어서 만들기 때문에 잎차에 카페인이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다. 녹차 다례법을 보면 차를 우려낼 때 다완에 부어서 일차적으로 물을 부어서 식힌 다음에 붓기 때문에 카페인이 그대로 남지만, 100도 이상의 온도로 끓인 보이차는 카페인으로 인해 밤에 잠 못 드는 법은 없다고 한다. 김 위원은 중국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사온 모차를 엄격한 공정 과정을 거쳐 ‘홍익고수보이차’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냈다.찻잎을 딸 때 차청이 맑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누렇게 변한 잎이 많으면 거칠고 찻잎이 맑지 않다. 좋은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찻잎이 까맣게 발효한 대엽차의 맑고 크고 균일한 잎을 판별할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고수 보이차 나무는 아주 큰 나무다. 녹차나무는 관목이라 나무가 작다. 중국의 동백나무라고 하는 차나무 ‘카멜리아 시넨신스’는 기후에 따라서 다르게 자란다. 대엽종과 중엽종, 소엽종, 변의종이 있다. 소엽종에서 딴 잎차는 생차가 되고 대엽종에서 딴 잎차만 보이차라고 운남 조례법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엽종이 잘 자라지 않고 찻잎이 소엽종이어서 초청 녹차만 생산될 뿐, 보이차를 만들지 못한다. 그 대신 우전 녹차는 보이차보다 비싸다. 중국에는 500년 된 고수차나무가 있고, 기네스북에 오른 수령 2천700년 된 나무도 있다. 오래된 나무에서 딴 잎만 모은 것을 ‘단주’라고 하는데, 그런 차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고 한다.“보이차의 좋은 점이 뭐예요?”“첫째 보이차는 물을 많이 마실 수 있어요.”갈색으로 변한 차의 갈산성분이 체지방의 흡수를 막아줘서 지방흡수를 도와주고, 다이어트 식품으로서의 효과를 발휘한다. 카테킨과 펩틴은 변비를 막아주고 핏속의 콜레스테롤을 막아서 피를 맑게 해준다. 폴리페놀 성분이 염증발생 억제, 암 발생을 막아주는가 하면 탄닌의 떫은 성분은 철분을 함유하고 있어서 피로회복을 도와주기도 한다. 카페인을 많이 먹으면 심장이 뛰는데 데아민이 이를 억제해주는 길항작용을 하기 때문에 마음이 평온해져서 피로회복에 도움이 된다. 보이차를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오래된 차나무에서 딴 잎을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2003년도 보이차 매장을 열던 해에 맹해 차장 하던 사람에게서 차를 산 뒤 차방을 열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무모한 시절이었다고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차를 제대로 알기 위해 힘들게 공부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차방을 열 수 있었고, 대설산 차산지에 가서 직접 찻잎을 사서 정통방식의 발효과정을 거쳐 ‘홍익고수보이차’ 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갖게 되었다고 감회 어린 시선으로 차방을 둘러본다.‘삼국지’에 유비가, 적군에게 100년 된 차를 빼앗길 뻔한 지경에 이르자 옹기에 차를 넣어 물에 띄워 지켰다는 내용이 있다며, 100년 된 보이차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기운을 가졌다고 한다. 또한 보이차는 눈병도 치료해준다며, 제갈공명이 운남성 차산지를 지나다 병사들의 눈병을 낫게 해준 이야기를 해준다. 제갈공명이 고대 6대 차산지를 지나치다 지팡이를 꽂았더니 큰 차나무가 자랐는데 그 잎을 따서 달여 먹게 했더니 병사들의 눈병이 나았다는 얘기였다. 그 찻잎이 바로 오늘의 보이차라고. 그런 연유로 김 위원은 한국차연합회에서 제갈공명의 옷과 모자를 쓰고 차 자리에 참석해서 시연한 적이 있다며, 그날 사람들이 공감해줘서 기쁘고 즐거웠다고 지난 시간을 추억했다.차를 마시는 이유가 뭘까?김 위원은 ‘홍익’이라는 이름대로 널리 이로운 세상을 펼친다는 의미를 언급하며 함께 마시고, 함께 건강하고,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 약용 효과를 지니고 있는 차를 즐겨 마시는 거라며,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것은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정의를 내렸다.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5-25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꽃은 자신을 위해 향기를 퍼뜨리지 않습니다.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났습니다.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가 좋습니다.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안종수 대구광역시태권도협회장을 만나며 그 문장을 다시 한 번 음미했다. 안 회장은 드물게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 동안 인터뷰를 위해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과묵하다고 할까. 말을 끌어낼 수 있는 질문을 하라지만 판에 박힌 질문이 싫어서 그냥 나눔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인터뷰가 뻔한 질문을 하기 위한 자리도 아니고, 꼭 많은 말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닌 터여서.안 회장의 왼쪽 가슴에 빨간 사랑의 열매가 꽂혀 있었다. 그 열매가 안 회장의 정체성을 말해주었다. 그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 원 이상 개인 고액기부자클럽인 대구아너소사이어티(Honor Society)클럽 153호 회원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는 모임의 일원임을 그 사랑의 열매가 인증해준다. 가슴에 그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달고도 별로 할 말이 없다는 듯 말을 아끼는 중후함이 그를 더욱 빛나게 한다. 아무에게나 주는 열매도 아니고 아무나 달 수 있는 열매는 더욱 아니지만, 자신의 것을 떼어줄 수 있는 용기만 있으면 누구나 달아볼 수 있는 열매이기도 하다. 작은 나눔은 작은 대로 큰 나눔은 큰 대로, 꼭 그릇크기 만큼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열매의 가치가 빛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이름으로 존재하는 ‘나눔’의 실체를 세 부류로 구분해본다. 말없이 나눔을 실천하는 부류와 입으로 생색을 내는 부류, 나눔을 전혀 모르고 사는 부류. 자신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나눔은 물질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녀서 생수 한 병부터 마스크 하나, 따뜻한 말 한 마디의 위로라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생각해볼 때, 나눔은 어쩌면 아주 쉬워 보이기도 하고,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때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는 점에서 매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나눔!생각해보니 경계가 참으로 모호한 말이다. 가진 것을 나눈다? 남는 것을 나눈다? 어떤 식으로든 내 것을 나눈다는 뜻의 ‘나눔’은 참으로 숭고한 의미가 깃든 말이다. 생수 한 병이라도 남을 위해 내놓는 것을 지속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예사로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어야지. 그런 난해함으로 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을 나는 특별히 사랑을 아는 분이라고, 신의 사랑을 타고 난 분이라고 분류해둔다. 가진 자는 하늘의 별처럼 많지만 제 것을 나누어주는 선의는 보통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녀서 안종수 회장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은 더욱 빛나고 아름답다. 나눔을 생활화하는 삶. 아너소사이어티(Honor Society)의 가치가 바로 그것이고, 이는 곧 안 회장의 정체성이기도 해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나눔을 실천하고 사신 게 언제부터였어요?”“첫 아이가 태어난 후부터요.”그는 부모님을 일찍 잃었다. 고향이 안동이고 고향집이 임하댐에 잠겨버렸다. 그는 7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수몰지역인 고향을 떠나 대구로 나왔다. 중2때에 어머니마저 잃고 대구에서 혼자 생활하며 외로운 시절을 방황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 외로움이 안 회장을 과묵한 사람으로 만든 듯하다. 사람 좋아하는 천성이 그를 태권도협회로 이끌었다. 시작은 두 아이가 태권도를 시작하면서였다. 태권도 선수로 활동하는 두 아이를 보며 청년시절의 방황을 접고 새 삶을 시작했다. 첫 아이를 낳고, 천사처럼 눈을 반짝이는 아들을 보는 순간 자신이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면 막 살아서 안 되겠더라고. 두 아이를 따라 태권도 도장을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협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인연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두 아이가 아버지를 변하게 했고, 아버지는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세상을 돕는 일에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IMF로 인해서 회사가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경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며 그 고마움이 그를 봉사의 삶에 힘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그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녔다.“안 회장님께 태권도는 어떤 것입니까?”“아들에게서 느낀 사랑이고, 잘 살아보고 싶은 용기라고 할까요.”아들을 태권도 도장에 보내며 자연스럽게 태권도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어온 인연으로 2009년부터 8년간 대구시태권도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게 되었고 2016년 회장으로 취임 이후, 한국법무보호공단 대구경북지부 체육인 회장까지 맡게 되었다. 사내아이가 있는 집이면 흰 도복에 검은 띠를 매고 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자녀들이 신체적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 자신을 방어할 능력을 갖추길 바라며 태권도 도장에 보내지만 정작 아이들이 배워오는 건 품새와 겨루기보다 더 중요한 운동정신과 인성, 예절 교육이다. 안 회장 말로는 대구 태권도협회에 소속되어 있는 식구들이 4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종주국다운 관심과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사회봉사를 어떤 식으로 시작했어요?”“출발은 아주 소소하고 미미했어요.”협회 차원에서 연탄 삼천 장, 오천 장으로 시작한 봉사가 회사 차원으로 발전해서 쌀 100포대 150포대가 되었고, 대구교도소에 생수 일만 병을 기증하는 등, 한 해에 다섯 번 이상의 사랑 나눔 봉사로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연탄, 생수, 쌀, 외에 사회에서 기증받은 물품으로 봉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결혼을 못하고 있는 재소자들을 합동결혼으로 맺어준다거나 면담으로 개개인의 어려운 사정을 들어주고, 일자리를 창출해주기도 한다고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봉사의 삶이, 기상학자 에드워드 N. 로렌츠의 말대로 ‘나비효과’를 일으켜 먼 태평양에서 파도가 일고 카오스를 일으켜, 마침내는 태권도협회와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아름다운 바람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고 귀띔해준다. 그 아름다운 미풍이 더 큰 나비효과를 일으켜 주위로 널리 퍼져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안 회장은 건설회사를 운영하며 협회 일까지 맡고 있으며, 대구광역시태권도협회와 대구경찰청의 공동치안 확대를 위한 업무 체결로 지역사회의 안전과 범죄예방에 앞장서고 있다. 2013년부턴 한국법무보호공단 대구경북지부 체육인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는가 하면 2009년부터 8년간 대구시 태권도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2016년 회장으로 취임 이후 제97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종합 2위라는 우수한 성적을 내기도 했다. 전국에 태권도 도장이 만이천 개나 되고, 대구시에 속한 도장이 육백 개라고 한다. 외국인 스포츠 선수단의 전지훈련을 유치하고, 대구태권도협회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에 따라 훈련을 시키며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뽐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코로나19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태권도인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서기도 한다.“임기 내에 이루고 싶은 꿈이 있으세요?”“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싶습니다.”안 회장은 임기 4년 동안 어려움에 처한 태권도인들과 어린이들의 진학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줄 수 있는 장학재단을 설립하고픈 커다란 염원을 펼친다. 태권도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자라는 꿈나무들이 희망찬 미래를 열어갈 수 있도록 이 땅에 진정한 태권도 정신이 바로 서도록 힘을 기울이고, 세계무대에 진출한 꿈나무들이 종주국의 위상을 자랑스럽게 펼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중요한 것은 나눔을 실천하려는 마음이다. 강은 제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제 열매를 먹지 않으며 바람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하늘은 다만 그 넓은 품을 열어줄 뿐 아무 것도 욕심내지 않는다. 물, 나무, 바람 모두 빈 몸으로 간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5-11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사방무인(四方無人)!그는 어둠의 벽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버리고 만오천 여점의 그림을 태우며. 그가 선택한 어둠은 태고의 고요인가 과학의 암전인가. 시간의 블랙홀을 연상케 하는 검은 캔버스 앞에서 일상의 분주함과 소음이 가라앉고 작가는 자기만의 세계에 깊이 침잠한다.자신이 왜 그림을 그리는지 생각해보았다. 멋있게 자기만의 그림을 그릴 자신이 있는데 겉돌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종이와 붓 한 자루, 까만색 물감 하나로 그림을 시작했다. 블랙 페이퍼의 시작이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물감도 없고 돈도 없으면 다른 무엇을 구해서라도 그림을 그려야 하고, 작가는 어떠한 순간에도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왜 검은색이죠? 검은색으로 무엇을 드러내려 하셨어요?”“무한대라고 할까요? 검은색에 블랙홀 같은 우주의 본질을 담고 싶었어요.”실을 꿴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실을 꿰다 보면 나중에서 오로지 실을 궤는 행위만 남는다. 자신과 실을 꿰는 행위가 하나 되는 물아일체. ‘나’라는 자아는 빠지고 오로지 실을 꿰는 순수한 경지만 남는다. 작품 속에서 자신을 빼내려고 애썼다. 작가가 개입되면 생각과 고집과 강요가 남고 작품이 식상해진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산이 자신을 산이라 말하지 않고 물이 자신을 물이라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순수성이 산과 물을 아름답게 한다. 후설의 관점에서, 사물을 존재의 본질 그대로 바라본 현상학적 환원이자 선험적 태도이다.작품 속에는 오로지 영혼만 존재해야 한다. 자크 데리다는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경이로움을 맞는 순간 때문이라고 했다. 예술가는 인간에게 그 경이로움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아름다움을 전하려면 초월적인 경지에 이르러야 하고, 그 결과물에 영혼이 담겨야 한다. 자크 데리다가 죽으려고 해도 자연이 너무 아름다워서 죽을 수 없었다고 한 것처럼 좋은 작품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나오고 작가가 보이지 않는다.“작품에 담기는 그 영혼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구름에 가려진 산신령.”실을 꿰는 동안 영혼이 삼매에 경지에 이르듯이 객관과 주관이 일치하는 초자아의 순간에 자신은 없고 영원만 존재한다. 삼매(三昧)의 경지란 현상학적으로 보자면 선험적인 물아일체며 초월적 세계에 이르는 통로다. 그 세계는 어둡고 긴 좁은 통로를 건너 밝고 드넓은 공터에 이르듯이, 시야에 보이지 않던 산이 바람에 의해 구름이 걷히고 수천 미터의 빛이 보이는 순간에 펼쳐진다. 그 순간 사람들은 구름에 가려져 있던 산신령을 마주하게 된다.“예술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끝없는 빚쟁이.”예술가는 세상에 빚을 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예술가가 존경을 받는 것은 세상에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감동이 없는 예술은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감동적인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선험적 물아일체의 자세로 작품 활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예술가의 삶이 무거운 것은 그 때문이다.“중국까지 활동의 폭을 넓히게 된 배경을 좀 들려주세요.”“아트사이트에서 북경 전시회를 해보자는 요청이 왔어요.”북경으로 건너갔다. 인구가 14억인데 나 한 사람 말을 못한다고 무슨 문제가 될까, 사지 멀쩡한 내가 못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용기를 냈다. 더 큰 세상에 가서 이름을 날리고 싶었고,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마호메트는 산을 불러서 기도를 하겠다고 했다. 산을 어떻게 부르는지 궁금해서 사람들이 모였다. “산이여 오라!” 아무리 기다려도 산이 오지 않으니 마호메트는 “산이 오지 않으면 내가 가리라”하며 사람들을 이끌고 산으로 갔다. 김 작가는 그런 마음으로 북경에 갔다고 한다. 북경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문화특구지역에서 중국작가들과 왕성한 교류를 하며 그는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김 작가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는 주제로 동서 융합의 새로운 회화 장르를 모색하고 있다. 중국 전통 동양화의 일필휘지가 재현을 위한 수단이었다면 김 작가의 일필은 인간의 깊은 감성을 담아내는 표현주의적 요소가 강하다.한국미술평론가협회 최형순 위원장이 “김길후의 강력함은 거침없는 필선의 속도에서 나온다. 그는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 지구에 한정된 시각과 인간사의 인식만으로 갈 수 없는 세계”라고 평했듯이, 그는 ‘인간의 인식만으로 가닿을 수 없는 세계’를 그리는 작가가 되려 한다.“가장 인상에 남는 전시회의 에피소드를 말씀해주세요.”“이틀 만에 200호 다섯 점을 그린 적이 있어요.”2004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회에 초대하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작품이 마음에 든다며 캠퍼스로 200호 정도 되는 작품을 원했다. 그려본 적이 없는 그림이지만 무조건 작품이 있다고 했다.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하는 걸 사흘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림이 없어서 전시회를 못하나 졸작이 나와서 못하나 똑같으니 일단 그려보자고 마음먹었다. 캔버스를 펼 곳이 없어서 길에서 그림을 그렸다.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지만 이틀 만에 200호 다섯 점을 그렸고, 다섯 점 모두 전시회를 했다. 두 점의 그림이 지금 서울에 소장되어 있다. 2008년 보건대학 임당박물관인당박물관에서 개인전을 한 이후, 김 작가는 활동 영역을 넓히기 위해 2009년 파주로 작업실을 옮기고 여러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2010년에 북경의 작업실을 열고 한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 중이다.“전시회를 하면 그림이 좀 팔리나요?”“전시를 하고 나면 생각하지 않았던 소장가들에게 다수의 작품을 판매하는 결과는 늘 있었습니다. 예술은 파는데 목적을 두지 않지만 작가로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타협이라고 해야겠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 제작에 임하는 나 자신의 태도입니다.”전시회에 임하려면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림을 팔거나 아니면 명예로운 전시회를 하거나 무엇이든 하나는 만족이 되어야 한다. 2018년 북경 송좡당대문헌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했다. 이 미술관은 중국 유일한 비영리 아카이브 미술관이다. 전시회를 제의한 우홍 관장이 8000자나 되는 긴 비평을 써주었다. 기록을 영원히 보관하겠다고 했다. 그 결과 아카이브 미술관에 김 작가의 기록이 영원히 남게 되었다. 사라지지 않을 기록이다. 2019년, 서울에 있는 대안공간 Emu gallery에서 개인전을 했고, 그 전시를 통한 포럼에서 그림에 대한 평소 생각들을 기록으로 남겨 책자를 발간했다.“어린 시절 얘기 좀 해보세요.”별명이 스마일이었고 작은 피카소였다. 수채화 파스텔 그림을 잘 그려서 동네 형들 그림 숙제를 다 해줬다. 그림을 잘 그렸지만 당시에 그는 화가가 아닌 원예사의 꿈을 갖고 있었다. 씨를 받아서 번식시키며 꽃을 가꾸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가족회의 끝에 재주를 살려 직업을 가지라는 작은 아버지의 말대로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최고의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연필과 붓을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끝없는 경지에 다다르지 않을까 하는 욕망으로 그림을 그리다 갑작스러운 허무주의에 빠져서 4년간 다양한 경험을 하며 방황했다. 어느 날 나 자신의 꿈으로부터 너무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서른세 살에 다시 대학원에 진학했다. 김길후의 새로운 예술 세계가 펼쳐지는 출발점이었다.“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 생각인지.”“일필휘지의 속도감 있는 붓질로 인간의 깊은 고뇌와 철학을 담고 싶어요.”예술은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찰나의 순간에 저쪽 세계를 보는 거라고 사르트르가 말했다. 김 작가는 58살에 사르트르가 본 그 초월적 세계를 보았다. 좋은 건 누가 봐도 좋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작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환갑 이후로 그는 동서양의 융합적인 모습을 이룬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로 서구주의 이성적 방식을 해체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나갈 생각이라고.김 작가는 2010년 북경아트사이드갤러리 초대전으로 북경과 인연을 맺고, 북경과 한국에 작업실을 두고 있다. 2014년 북경 화이트박스아트센터에서 왕충천(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감독, 북경중앙미술학원 교수) 기획으로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2016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했고, 2018년 한국문화관광부 후원으로 송좡당대문헌미술관에서 전관 전시를 했다. 2020년 창원조각비엔날레 본 전시에서 해체주의적 조각을 선보였고, 2020년도 2021년 제11회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작가상을 받았다.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4-27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

한국예술문화단체 경상북도 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병국 회장을 만났다. 안동미술협회 지부장과 경북미술협회 지회장, 경북예총 회장 3선으로 21년째 예술단체를 맡고 있으며 현재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부회장과 한국미술협회 수석 부이사장까지, 사회활동 경력이 화려하다. 경력의 화려함이 예술인에게 덕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잘 모르겠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사회단체의 협회장으로 20여 년을 보냈다는 건 그만큼 주변인들의 두둑한 신임을 얻었다는 말이 되겠다. 예술보다 단체 활동에 더 열심이었다고 오해받을 만하지만 작품 활동이 그런 오해를 불식시켜줄지 어떨지 얘기하다 보면 알겠지.“예총 회장님은 어떤 일을 하세요?”“다섯 개의 공연협회와 세 개의 전시협회를 합쳐서 여덟 개 협회가 대내외 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어떤 단체든 일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룹이 형성되지 않는다. 경북 예총에 소속된 예술인들이 7천400여 명이라고 한다. 그 많은 인원이 각자의 파트에서 고군분투하며 예술 활동을 하고, 협회는 그들의 사회적 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지역에 큰 행사가 벌어져 시낭송과 음악, 무용이 합쳐서 행사를 진행한다고 가정하면, 예총연합회는 행사에 참여한 세 개 파트의 협회와 행사를 계획해서 필요한 예산을 공평하게 분배한다.“미술을 하신다고요?”“미술 하는 사람 같지 않죠? 다들 사업가나 야구 구단주 같다고.”이 회장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허허 웃는다. 경북 8개 협회에 소속된 예술인 7천400여 명 중에서 미술협회 회원이 가장 많고, 활동도 가장 활발하다고 한다. 미술협회에 소속된 이 회장은 초등학교 4학년부터 미술을 했다. 중학교 때에는 학년에서 혼자만 미술부로 활동했다고. 중고등학교가 같은 마당을 사용하고 있을 때여서 고등학교 선배들과 함께 미술부 활동을 했는데 바케스 두 개로 물을 떠놓고 청소하는 잡일을 도맡았다. 후배가 잡일을 하는 그런 관례를 당연하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에 사생대회를 앞두고 어머니를 졸라서 처음으로 화구박스와 이젤을 가졌다. 너무 좋아서 사생대회 날만 기다리던 게 생각난다며 이 회장은 아련한 추억을 되살린다.30년 6개월 동안 미술선생님으로 근무하고 퇴직한 지 6년 되었다고 한다. 교직생활하면서 폐교 교실 한 칸을 얻어서 작업실로 쓰다 퇴직 후 집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어떤 그림을 그렸느냐고 물으니 구상 쪽이라고 한다. 첫 개인전시회의 수채화를 시작으로 네 번째 전시회부터 수채화와 유화작품으로, 다섯 번째부터는 아크릴 작품을 그리며 지금까지 일곱 번 개인전시회를 가졌다.넓게 펼쳐진 풍경을 그리다 요점을 잡아서 그려보자는 생각으로 고목의 한 포인트를 잡아서 부분만 그리고 있다. 전창욱 사진작가의 소나무 사진처럼 큰 나무를 통째로 화폭에 담지 못하니 포인트를 잡아서 디테일을 살린다는 말이다. 빨리 마르는 게 좋아서 수채화를 그렸고, 유화를 그리다 지금은 수채화와 유화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는 아크릴로 그린다며, 빨리 마른다는 점에서 아크릴이 수채화의 특성을 닮았다고 한다.“결과를 왜 그렇게 조급하게 서둘렀어요?”“협회일도 해야지, 애들도 가르쳐야지, 그림도 그려야지, 집에 가면 가장 노릇도 해야 하니 일이 많아서 마음이 바빴어요.”늘 시간에 쫓겼기 때문에 그림도 빨리 마르기를 바랐고, 그림에 대한 갈망이 깊어서 퇴직을 앞당겼다고 한다. 정상대로 퇴직하려면 아직 2년이 남아 있다. 퇴직을 하고 나니 비로소 시간적인 공간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학교생활을 그만두고부터 예총협회 사무실과 작업실로 출근하며, 어둠 속에서 빛나는 인공적인 불빛의 야경을 많이 그린다고.아트 페어 네 번, 개인전시회 여섯 번. 서울까지 뛰어다니며 그룹전과 개인전에 참여하며 열심히 뛰어다녔다. 예술단체의 리더가 되려면 예술적 정체성이 분명해야 하고 신뢰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예술단체 회원들이 인정할 만큼 실력을 쌓으려고 이 회장은 지금도 노력 중이다. 예술단체에 소속되어 있으니만큼 적어도 작가는 작품으로 실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며 그는 리더로서의 입장과 예술가의 정체성을 작품 활동으로 보여주고 싶어 한다. 어떤 단체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작품을 향한 순수파와 단체 활동에 더 열심인 사람이 두루두루 섞여 있는 곳이 예술단체라며, 이 회장은 여담으로 청송 야송전시관의 주인이었던 이원좌(李元佐) 화백의 예술혼에 대한 추억담을 들려준다.“개인전시회를 해서 좋은 점이 뭔가요?”“전시실에 40여 점의 작품을 걸어놓고 한꺼번에 볼 수 있어서 좋아요.”작가들도 자기 작품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손님이 없는 조용한 시간에 전시장에 걸린 작품을 꼼꼼히 살피다 보면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기도 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럴 때 느낌이 어떠냐고 물으니 “내가 이렇게까지 그림을 그렸구나. 참 애를 많이 썼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면 감회가 새롭다. 그 동안 힘든 과정이 있었고, 그 노력의 결과물을 무대에 올렸고,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주어졌으니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세부적으로는 작품을 살피다 보면 문제점이나 부족한 점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작품에 쏟은 수고로움을 칭찬해주고, 다음 작품을 그릴 때 참고로 삼아서 완성도를 높이는데 중점을 둔다고.“앞으로의 계획이 뭐예요?”“지역성을 좀 벗어볼까, 생각 중입니다.”예술 활동에는 지역성이 별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몸을 움직여서 밖으로 나간다는 건 둥지 안에 갇혀 있는 의식을 넓히고 외적 자극을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타 지역 작가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주고받은 대화가 뜻밖에도 동기부여가 되어서 작품 세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이 회장은 ‘내 것을 가지고 고민할 건 작품뿐이더라.’며 웃는다. 봉사하는 일을 오래 하다 보니 고립된 시간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기만의, 작품 활동을 위한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서울로 간 작가들이 많다며 창작세계는 탄력을 받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냐고 한다. 이 회장은 더 넓은 세계로 나가서 많은 자극을 받고 작품의 질을 높이고 싶은 욕구를 비쳤다.“작품 중에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어요?”“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습니다. 전 굳이 그런 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작업실에서는 완전히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밤늦게까지 작업을 한다며 이 회장은 작품이 수백 점이지만 하나같이 기억한다고 했다. 자신의 손을 거친 그림이 모두 아낌없는 열정을 쏟은 자식 같아서 더하고 덜하고 없이 모두 귀하다고. 그런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 작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말해준다. 40여 점을 걸어놓고 차근차근 살피는 화가의 등이 보인다.“찾아낸 결점을 전시회 후에 보완하세요?”“부족한 그대로 두고, 다음 작품을 그릴 때 참고합니다.”머릿속에 담아놓은 기억은 오래 간다며, 수정보다 더 바쁜 것이 다음 작품 구상이고 뭔가 새로운 방식이 없는지, 어떻게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나, 작품에 어떤 메시지를 채워 넣을까, 캔버스를 좀 뚫어서 빛이 새어들게 하면 어떨까, 하는 등의 새로운 고민이라고 한다. 모든 작가와 작품이 그렇듯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을 갖고 있기 마련이니 부족한 그 자체로도 소중하다고.“화폭에 그림을 많이 담는 편이세요?”“그림에 따라서 다르긴 한데, 여백을 많이 남기고 오리 두 마리만 그려서 물의 흐름을 그린다거나, 포인트를 잡아서 부분을 크게 그린다거나, 여러 가지 방식을 도입합니다.”착상을 얻기 위해 여러 지역과 도심의 중심지를 돌아본다고 한다. 돌멩이 하나라도 유심히 바라보고 의미를 부여하면 달리 보인다고. 어떤 사물에 관심을 가지면 작품을 만들어내기까지 오래 관찰한다며, 전시회에서는 작품이 말을 한단다.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니 안동대 이수창 화백을 거론한다. 대학시절의 스승님이라며, 밝으면서도 무게가 주어지도록 층을 많이 쌓는 것도 그분의 영향이라고 한다.작품 활동도 중요하지만 협회의 리더 역할도 소홀히 할 수 없어서, 올해는 문화 활동에 취약한 지역민들을 육성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서 경북을 문화예술 중심도시로 발전시키고 싶다는 야망을 펼친다.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4-20

내 심연 속의 나, 너는 누구인가?

악수를 하려는데 작가의 손이 얼른 눈에 들어온다. 덩치에 비해서 작아 보이는 그 손이 지금껏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김 작가의 작품을 실물로 보기 전에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작품에 꼭꼭 숨겨져 있는 그림자와 실물의 관계를. 그 이해 못함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듯, 김 작가가 차에 싣고 온 작품을 직접 들고 왔다. 하얀 프레임에 담긴 작품을 직접 보게 될 줄 몰랐다. 인터뷰 한 꼭지를 위해 차에 작품까지 싣고 왔다는 사실이 작가를 다시 보게 했다. 작품을 직접 들고 온 것은 올해부터 작업하기 시작한 ‘반영’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거울에 작품의 그림자가 비친다는데 실물을 보고도 잘 모르겠다. 무엇을 두고 그림자라고 하는지. 그냥 철로 만든 추상화 같은 작품이 있고, 손가락 두 마디쯤 떨어진 바탕에 바깥의 입방체와 똑같은 모형이 빨간색으로 그려져 있을 뿐. 김 화백이 프레임 속의 빨간 그림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저 빨간 그림을 어떻게 그렸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더군요.”얼른 아는 척을 했다. 스테인리스로 빗은 입방체의 모형을 바탕에 붙여 본을 뜬 다음 색칠부터 하고, 그 앞에 실물을 세운 거 아니냐고. 그러자 김 작가가 작품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실물의 뒤에 손가락을 댔다. 그러자 거울에 손가락이 비친 만큼 바탕의 그림이 없어졌다. 그제야 아! 하고 조각품의 비밀과 그림자의 존재를 확실히 알아보았다. 바탕의 빨간색 그림의 출처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빨간 그림자를 만들어낸 것이 거울인 것을 너무 늦게 알아챘다.“아! 거울의 조화였군요.”“모형 뒷면이 비친 거죠.”김 작가의 조각에 그런 비밀이 숨어 있다. 더 큰 비밀은 ‘큐빅(Cubic)’이라는 작품을 책상 위로 자리를 옮겨놓으니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움직이며 좀 전에 보았던 형상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엄연히 존재하면서도 실체가 없는 것의 입방체. ‘큐빅’은 하나의 형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어디로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작품이 달라진다.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조각이 저렇게 추상적인 요소를 지닌 줄 처음 알았다. 그림자의 조화가 방향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며 색다른 형상을 연출한다는 사실을.“대학시절의 가장 큰 관심이 뭐였어요?”“소리였어요.”김 작가는 소리를 형상화시켜보고 싶더란다. 사고가 엉뚱한 방향하게 튀어 오른다. 동성로 소리와 칠성시장의 소리, 학교 운동장에서 들리는 소리, 강물이 흐르는 소리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서 누가 봐도 소리가 느낌으로 나타난다는 걸 알게 해주고 싶었는데 아직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소리를 조각 작품으로 만들면 어떤 것이 될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작가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그림자를 언제 어떻게 만났어요?”“1986년 겨울 군 복무 중에 폭설이 내렸어요. 눈이 그치고 해가 떴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날이 맑았어요.”그 자신도 몰랐던 그를 알아보게 한 것은 눈 위에 떠오른 그림자였다. 고요한 설경을 보며 눈길을 걸어가는데 햇살에 비친 그의 그림자가 눈길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가 가는 곳마다 조용히 따라다니는데도 한 번도 알아보지 못했던 그것이 가시광선에 훤히 떠오른 것이다.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고민이 많을 때였는데 김 작가는 그림자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그 그림자가 바로 자신이고 죽을 때 관에 함께 묻히게 될 존재라는 사실을. 작품을 시작할 때부터 줄곧 다루어온 테마가 바로 실존적인 의미로서의 ‘그림자’였다.“그때는 그림자가 평생을 함께 할 화두가 될 줄 몰랐어요.”자코메티의 작품에 가늘고 긴 팔 다리를 가진 실존적인 형상의 인물이 있다면 김 작가의 작품에는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물상의 또 다른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는 물상. 또는 그늘에 숨겨져 있는 음영으로서의 존재. 그것은 여러 겹의 자아를 가진 인간의 이면과 같다. 인간의 이면에는 수많은 자아가 있다. 빛을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존재.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나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것은 반드시 양(陽)에서만 존재하는 음(蔭)의 모습을 드러낸다.‘그림자, 그는 누구일까?’칼 융에 의하면 페르소나에 의해 억압된 자아가 그림자이다. 페르소나가 보여 지고 싶은 그림자로서의 ‘나’라면 자아는 보여 지는 그대로의 본질적인 ‘나’다. 페르소나는 자아와 분리되어 있다. 그림자는 내 속에 억압된 자아이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를 거듭하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페르소나이기도 하다.김 작가가 그림자와 함께 한 시간이 33년이다. 1998년도에 첫 전시회를 했는데 도록에 담긴 아카이브가 모두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다. 김 작가는 사람의 형상으로 뚫려나간 구멍, 그 여백을 작품으로 활용했다. 여백이야 말로 그림자를 드러내기 좋은 물성이다. 그러고 보니 사람 모양의 그 구멍이 정말 그림자 같다. 기이하다는 생각과 함께 궁금증이 인다. 조각은 두뇌의 예술인가 손의 예술인가. 바위에 추사의 부작란을 심고, 허공에다 집을 짓고, 그림자에 영혼을 싣는 사람. 그림자는 자신과 함께 관에 들어가 영원을 함께 한다. 해를 등지고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김 작가가 묻는다.“나는 누구인가?”해가 비치면 그림자가 생긴다. 아침에는 내 뒤에서 놀고, 한낮에는 발밑에서 놀다 오후 4시가 되면 그의 발치에 길게 늘어서서 함께 걷는다. 늘 소유하고 있지만 그림자는 만질 수도 보듬을 수도 없다. 대상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하고, 물성이 인식될 때 그림자도 인식되고 실존한다. 장 주네가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에 언급한 대로 ‘개개의 대상은 홀로 있을 수 있기에 아름답다.’는 말이 조형예술의 미학을 말해준다.23회나 되는 김 작가의 전시회 테마가 모두 ‘그림자’를 주제로 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철판을 그림대로 자르고 오려내는 선적인 작업, 면적인 작업, 다양한 색채의 도입까지 많은 변화를 거쳤다. 2015년부터 사군자(四君子)의 그림자 작업이 시작되었다.처음에는 몰골법으로 작품을 그렸는데, 이즈음에는 그릴 대상의 면이 아닌 윤곽선으로 표현하는 백묘법을 차용한다. 백묘법과 몰골법의 혼합으로 작업하는 사군자를 예로 든다면, 꽃잎은 백묘법으로 선만 살리고 잎이나 가지, 둥치 등은 몰골법으로 면을 사용한다. 까다롭고 힘든 작업이지만 변화를 추구하는 그만의 방식이다. 진화는 거듭된다.김 화백은 철을 다루는 작가다. 철과 알루미늄, 스테인리스스틸, 자연석 등의 재료를 레이저커팅 작업으로 입체화시켜 색까지 입힌다. 물상의 환원작업이다. 달 항아리와 매화, 소나무, 국화, 대나무가 그의 손에서 비틀어지고 기울어지며 입체화된다. 입체화된 물성은 공간에 실루엣을 만들고 여백의 미를 만들어낸다. 지금까지 전시회를 23회나 했지만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고 사군자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17회 전시회부터다.“철로 작품을 만드는 것은 공간에 대한 재해석인가요?”“개념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여백을 만들기 위해 프레임을 만들었으니 공간에 대한 사유라고 할까요?”올해는 ‘반영’이란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림자에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담았다.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함이다. 허상에 불과하지만 실체보다 더 많은 말을 함유하고 있다. 그림자는 자아가 내뱉지 못한 많은 말을 품고 있다. 그림자가 슬퍼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반영은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라며, 김 작가는 지금까지 해온 작품 활동의 기저가 자신이 누구냐는 물음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한다. 자신을 .아는 것보다 큰 깨달음은 없다는 결론 같다.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김 작가는 경북대 예술대 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교직생활을 했다. 경북대 미술교육학 석사 논문으로 ‘자코메티의 인체조각에 나타난 시지각적 특성’ 을 썼고, 박사과정에서 ‘한국 실존주의 조각연구’를 썼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4-06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못할 일이 없다

상공회의소는 동대구역 부근을 지나칠 때면 문득 보게 되는 건물이다.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있을 것이 있다는 느낌 외에는 별다른 끌림이 없는 건물이라고 할까. 인터뷰가 아니면 영영 인연을 쌓을 일이 없을 것 같던 곳이기도 하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그런 이질적인 곳에 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연임하신 이재하 회장님을 만나러 갔다. 상공회의소 회장은 지역의 상공인은 물론이고 국내외적으로 지역의 경제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명함을 주고받는 것으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회장님께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다.“상공회의소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상공인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제도개선을 통한 규제를 완화시켜줍니다. 기업인들의 시장개척과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주기도 하죠.”수출기업의 판로 개척과 일자리 창출 지원사업, 지역 인적자원개발 등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는 소기업과 착한소비운동을 지원해주고, 1000억 이상을 배출하는 지역 리딩기업인들을 모셔서 격려한다. 그런가 하면 원로기업인들의 힘을 북돋워주고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여주는 다양한 일을 추진한다고 자상하게 설명해주신다. 상공회의소는 전 세계 어디에나 다 있고, 전국 시가지에 73개의 상공회의소가 있다며, 대구상공회의소가 서울 부산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한다. 이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직도 맡고 있다.“상공회의소와 지역의 기업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까요?”“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공생관계라고 봅니다.”기업이란 매년 새로운 어려움이 산적하는 것이어서 10년 단위로 1차 오일쇼크, 2차 오일쇼크, IMF 금융위기, 코로나 등의 경제적 대란이 한 번씩 찾아오고, 또 5년 단위로 환율 파동과 원자재 파동으로 기업이 위기를 맞기 일쑤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매년 변화하는 트렌드를 예견하고 기업의 견인차 역할을 한시도 게을리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기업과 상공인들이 서로 당겨주고 밀어주며 대구상공회의소가 올해 창립 115주년을 맞았다. 국채보상운동과 금 모으기 운동을 할 때 대구 상공인들이 나라의 위기에 큰 힘을 보태기도 했다.“상공인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예로 들며 시대가 바뀌어서 지금은 기업이 모든 소비와 생산, 수출의 중심에서 축을 이룬다고 한다. 대기업, 중소기업, 소기업 할 것 없이 가장 좋은 일자리는 기업이 만든다며 40년 넘게 기업에 투신해온 기업인답게 이 회장은 기업이 살아야 국가도 산다고 단언한다. 기업이 좋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의욕을 북돋워줘야 기업이 살 수 있고. 노사문화가 잘 이루어져야 기업도 잘 된다며 이 회장은 노조와 노동자, 기업이 서로 협조의 관계여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상공회의소 들어오시기 전에 어떤 일을 하셨어요?”“교직에 있었어요, 미술선생을 하다 우연히 자동차 부속공장을 시작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어요.”이 회장은 기업을 한 지 40년이 넘었고 지금도 여전히 기업을 하고 있다. 교직에 그대로 있었으면 먹고 살 걱정은 없었을 테지만 뜻이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자동차 부품에 손을 댔다고 한다. 직원 다섯 명으로 시작한 기업이 지금은 삼천 명으로 불었다고. 매년 절벽을 걷는 아찔아찔한 기분으로 살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어떤 날은 베개가 첨벙 젖어 있을 정도로 긴장 속에 살았다며, 기업과 함께 살아온 지난한 시간을 어떻게 말로 다 하겠느냐며 말을 줄인다. 이 회장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인이 그렇게 절벽을 걷는 기분으로 살고 있다는 말이 터이다. 코로나의 위기를 맞은 현실의 가혹함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지금은 방식이 조금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어음이 잘못되면 줄줄이 도산하기 때문에 수시로 위기에 몰렸다고 한다. 매달 들어오는 어음을 막지 못하면 그대로 부도를 맞게 되는 위험을 안고 산 것이 40년이라며, 그런 위기에 몰린 기업인을 구해주고 도움을 주는 곳이 상공회의소라고 한다.“그냥 학교에 있을 걸 하고 후회하지 않으셨어요?”“한 번쯤 후회를 하긴 했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어요.”후회하지 않으려고 더욱 일에 매달렸다는 말이 강한 여운을 준다. 우연히 주어진 성공은 없다는 말일 것이다. 학교에 있었으면 65세에 퇴직을 했겠지만, 기업을 하고 있으니 아직도 현역이라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하고 싶은 일을 했고 그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말이다. 자리와 위치가 사회적 책임감을 안겨준다며, 작게는 기업에 소속된 식구들을 챙기게 해주고 크게는 지역의 기업을 챙기게 되더라는 말이 한 집안의 가장을 연상하게 한다.“가장 어려웠던 시절의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주세요.”“1979년도에 기계를 도입하려고 일본에 갔어요.”일본 돈과 우리나라 돈의 차이가 3:1일 때여서 기계를 구입할 염을 못 내고 돌아왔다. 기계의 사진을 못 찍게 해서 꼼꼼하게 살핀 후 밖으로 나와서 머릿속에 담아온 기계를 직접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 공부를 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그려온 그림을 들고 설계하는 사람에게 갔다.“비행기가 둥실 떠오르자 손오공이 된 느낌이었어요.”이 회장은 일본으로 가며 비행기를 처음 탔다. 손오공이 되어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느낌이 드는 순간, 사람이란 것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재의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IQ 150 정도이고 머리가 나쁜 사람 역시 IQ 90 정도이다. 60의 차이가 크긴 하지만, 보통 사람의 두 머리를 합치면 좋은 머리 하나를 능가한다. 기업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여러 사람이 합쳐서 이루어내는 것이고,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자동차 역시 그와 같다. 2만여 개의 부품이 모여야 자동차 한 대가 이루어진다. 사람이 아무리 똑똑해도 여러 명의 힘을 합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이뤄내지 못한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면 발전이 없다. 자만심은 버리고 자신의 길을 가려는 고집이나 의지는 갖고 있어야 한다며, 이 회장은 기업철학으로 주일무적(主一無適)을 내놓으신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마음이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퇴계 이황의 경(敬)사상을 이르는 말이다. 심기일전해서 한 길로 매진할 때 이르고자 하는 목적지에 가까워질 수 있음은 기업이나 예술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다.“바쁘실 텐데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세요?”“아무리 바빠도 꼭 해야 할 일을 위해서는 시간을 내야죠.”텔레비전을 보며 자전거와 러닝머신 보약을 마신다고 한다. 주량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술도 약하고 정에도 약하다고 슬쩍 농담을 던진다.“임기 중에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으신지.”“대구에 연구소가 필요해요.”RBD센터에 기업연구소와 연구기관 분원을 유치해서 벤처타운을 만들 계획을 3년 전부터 구상했다고 한다. 연구소가 주어지고 연구 분위기가 살아나면 밀라노가 형성되는 날이 오지 않겠느냐며 그 꿈을 실현시킬 방법을 찾는 중이라고 한다. 기업이 살아야 대구시의 경제도 살아난다고. 다산 정약용이 백성을 위하여 목민관이 있다고 한 것처럼 근로자 중 누구도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게 기업과 국가가 명심해야 할 것이 바로 애민정신과 민본사상이 아닐지. 국민이 있어야 기업도 있고 국가도 있다.“어려운 일이 있으면 의논을 하세요?”“의논도 하고 정보도 찾죠. 의논보다 중요한 것이 의지예요.”이 회장은 사회적 역할이 주어졌을 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의지라고 한다. 사람은 희망을 갖고 있는 한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 사업가에게는 의지도 필요하고 책임감도 필요하다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알게 하는 것이 의지라고 재삼 강조한다. 자동차 부품 한 가지를 잡고 40년 넘도록 묵묵히 걸어올 수 있었던 힘이 의지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3-30

왜 문화예술인가?

계명대 특임교수 이상길 전 대구행정부시장을 만났다. 대구의 정치행정을 오래 맡았던 사람을 만났으니 도시행정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했다. 그가 진심으로 대구를 걱정하는 사람인지, 다만 표가 필요한 기러기 정치인인지. 대구 토박이로서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대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이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지금 대구는 진정으로 지역을 걱정하고 대구의 역사와 시대정신에 밝은 안목을 가진 정치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생전 대구에 얼씬도 않다가 투표할 때가 되면 나타나서 ‘보수’를 들먹이는 기러기 정치인이 아니라 텃새처럼 제 텃밭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정치인을 말하는 것이다.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정치인들이 아닌가. 선거 때마다 대구공항을 공약으로 걸었던 사람들이 몇 명인데 그 공약이 아직도 미정이고, 향후 십 년은 더 우려먹을 태세다.“행정부시장으로 계시기 전에 어떤 일을 하셨어요?”“대구시에서 22년 근무하고 중앙행정부에서 8년 근무했습니다.”정치를 하려 했는데 공천도 못 받았다고 웃는다. 이 교수 역시 당선이 필요한 수많은 보수꼴통 중의 한 명이 아닐까 살짝 의심이 들며, 대화가 끝나기 전에 내 시니컬한 선입견을 걷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보수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진보를 지향하는 진정한 보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보수가 대구의 정치일선에 서 주기를 바랄 뿐이다. 기업이 들어오고 일자리를 창출할 방안이 거론되어야 할 즈음에, 흉물 같은 아파트만 끝없이 늘어나고 있으니 이제는 도시를 살릴 인재가 나타나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도시가 온통 주거전용화 되고 사방 콘크리트 절벽으로 둘러싸이게 된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도시를 살게 하는 것은 문화예술이지 아파트가 아닙니다. 대구의 도심은 창조적 에너지의 발원지로 24시간 살아 움직여야 하는 대구의 심장입니다. 지식 노동자와 예술가, 청년들이 활기찬 문화적 창조활동으로 열린 공간을 만들어 가야 하는 곳입니다.”국민을 하나로 묶는 프레임과 시대정신이 절박하다며 시카고가 건축으로 미국의 역사를 이끌어가고 파리의 패션이 프랑스를 대변하듯이 대구를 이끌어갈 강한 자부심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 교수는 문예부흥만이 청년들을 붙잡을 수 있다며, 시민들이 문화예술이라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갖고 도시이미지를 바꾸어 나감으로서 청년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온통 주거지로 고착된 도시는 청년들에게 일자리도 문화도 줄 수 없다. 휴대폰 성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눈에 들어오는 디자인이 아름답지 않으면 손이 가지 않는다며, 이 교수는 그 디테일한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문화예술이라고 한다. 도시의 이미지 변신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문화를 소비하게 만드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시민들이 자부심을 갖지 못하면 그 도시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날카로운 지적을 한다.“교수님이 행정부시장으로 계실 때 도시 전체를 아파트화 시킬 프레임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 아닙니까?”“파리 시민들이 불편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기에 파리가 유지될 수 있듯이, 저는 시민들이 불편을 즐겨야 도심이 살고 대구가 산다고 생각합니다. 도심에서 발생하는 불편에 대한 비용을 재정이 부담해야 합니다.”도시 건설에도 미적 규범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영국에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지은 세인트 판크라스역이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이 교수는 도시 중심이 활성화되어야 에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데, 온통 주거지가 되어 조용하고 움직이지 않는 곳으로 가라앉아서는 도시 발전은커녕 인적자원조차 키워낼 수 없다고 걱정한다. 이 도시에 르네상스의 문화가 부흥하길 바란다면 이렇게 주거를 위한 고층건물이 밀집되면 안된다고 성토를 한다. 도심은 일상의 위로와 안정을 위한 기능보다, 에너지 넘치는 열정과 사회적 진정성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활기차게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곳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이 교수는 도시를 관통하는 고속도로와 철로를 지하로 넣어야 토지 이용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고, 합리적이고 사회통합적인 도시발전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대구는 일제식민지를 거친 근대기의 어려운 시국에도 찬란하게 문화의 불씨를 일구었던 도시다. 그 문화의 중심에 화가 이중섭과 이인성, 이쾌대를 비롯한 화가들이 있었고 시인 이상화와 이장희, 소설가 현진건 외에도 이상정 장군과 서병오, 이일후 등, 대구 근대기에 예술의 꽃을 피웠던 분들이 대한민국의 문화와 정신이 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대구의 도시행정은 근대기에 그들 문인들의 사랑방이 되어주었던 도심 중앙의 의미 있는 공간까지 높디높은 아파트에 묻어버렸다. 누구를 위한 행정인지 모르겠다.“이 도시의 정신이 뭘까요?”“학문을 숭상하고 사물의 본질과 명분, 의리를 중시하는 선비정신입니다.”이 교수는 임진왜란 때 항일 의병 43%가 경상도 의병들이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정신의 대표적인 예로 국채보상운동을 언급하며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2천만 민중이 담배를 끊어 나라의 빚을 갚았고,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동력이 된 새마을운동과 한국정신문화의 초석이 된 2.28 민주화운동의 바탕이 바로 대구·경북의 선비들이 계승한 성리학이었다고 정의를 내린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의를 실천하며 어려운 시대를 이겨낸 학문의 중심에 퇴계 이황(李滉)이 있었다고. 매암 이숙량과 계동 전경창이 퇴계의 학문과 덕행을 이어 건립한 연경서원이 대구 북구에 있었다. 명종 때에 생사당(生祠堂)을 창건하고, 후에 연경서원(硏經書院)으로 개편되었지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졌다. ’고을 사람들이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강학하는 장소로 삼기 위해서 세운 것이고, 또 도의를 강마하고 풍속을 격려하기 위해서 둔 것이기도 하니 어찌 조금의 도움이 된다고 하겠는가?‘ 매암 이숙량 선생의 ’연경서원기‘의 한 부분이다.“정치일선에 계셨던 분으로서 청년들이 졸업과 동시에 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총체적 난국을 어떻게 보세요?”“저는 아직 정치를 제대로 시작도 못했지만, 도시는 인재를 끌어들이고 사람과 일자리를 연결하며, 혁신과 경제성장을 위한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개방성, 포용성, 다양성을 존중하는 도시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4차 산업혁명시대에 문화적 창조력이 풍부한 인재를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대구가 근대의 문화유산을 창출한 도시임을 증명하듯이 이 교수는 책을 한 권 내놓았다. ‘선비, 그 위대한 뿌리’라는 책이었다. 퇴계 이황의 얼이 서린 연경서원과 도산서원을 비롯해서 도동서원, 옥산서원 등,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근교의 모든 서원과 문화 고적을 한자리에 모은 여행답사의 기록물이었다. 대구시와 중앙정부에서 공무원 생활 틈틈이 대구정신을 되찾자는 대의명분과 실천정신으로 서원을 찾아다니고, 인사동을 비롯한 역사적 유적지를 많이 찾아다녔다고 한다.“행정부시장을 지낸 분으로서 대구의 두드러진 문제점을 꼬집는다면?”“대구가 부정적인 의미의 보수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대구는 김굉필선생의 도학, 퇴계 이황 선생의 경(敬)사상, 남명 조식 선생의 의(義)사상을 통합한 경의협지(敬義夾持)가 면면히 이어진 학문화 사상의 용광로였습니다.”이 교수는 대구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끌고 가면 미래를 보장하기 어렵다고 한다. 자칫 정치에 매몰될 위험이 있다며, 대구를 중심으로 부흥한 근대문학과 근대음악, 근대미술을 했던 인물들이 대한민국 문화의 정신으로 자리 잡은 것을 기억해야 한다며, 학문을 바탕으로 문화가 형성되어야 손에 잡히는 문화에서 손에 잡히지 않는 문화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존 마이어 말대로 문화가 살아야 도시도 살아난다고.“첨단의료산업 육성은 어떻게 되어 있나요?”“첨단의료복합단지 조성 계획은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되었고, 출범 당시엔 세계적인 의료연구개발의 중심지로 육성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였어요.”국내용 신약·의료기기 개발과 세계적인 신약 및 의료기기 개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특별법까지 제정하며 야심차게 출범했지만 지금 첨단복지는 정체되어 있다. 로봇산업도 마찬가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 4차 산업혁명시대, 창의·창조사회에서의 경쟁력은 문화예술의 토양이 얼마나 풍부한가에 달려 있다.대구의 근대문화예술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근대역사가 공백기로 남았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대구는 근대예술의 요람이었고 전국문화예술인들의 창작활동 본거지이자 토양이었다. 문화예술만이 대구를 살릴 수 있고, 창조계급인 예술인과 더불어 대구가 대한민국의 중심에 서는 날을 기대하며, 이 교수와의 대화로 모처럼 속이 확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3-23

초자아를 만나는 시간

빛명상의 ‘그림찻방’에서 정광호 회장을 만났다. 정 회장은 명상을 말하기 전에 그림을 한 장 펼쳐놓았다. 눈 내리는 겨울밤에 아이들이 사랑채에 모여앉아 할머니의 얘기를 듣는 그림이었다. 쌀가루 같은 눈이 푸짐하게 쌓인 길목에 찹쌀떡 장수가 어깨에 목도를 메고 간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기나긴 겨울밤에 ‘찹싸알~ 떠억~’ 하는 외침이 골목에 울려 퍼진다. 정 회장은 소싯적의 추억으로 아름다운 나눔을 떠올린다. 감나무집 광호가 찹쌀떡 장수를 부른다. 그 소리에 동네 아이들이 잠옷 바람으로 뛰어와 찹쌀떡으로 반짝 잔치를 벌인다. 나눔은 가진 게 많은 이가 베푸는 선의라기보다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처럼 마음이 넉넉하고 풍요로운 사람이 풀어놓을 수 있는 정성어린 소박함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 만물의 모든 물질이 흙, 공기, 불,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70%의 원소가 물이고, 숨결마다 들이마시는 것이 공기이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두 발로 딛고 서 있는 것이 흙이니 사람을 이루는 4대 원소가 곧 우주 만물을 이루는 물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면 불은? 불은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정 회장이 풀어주신다.“빛명상이라고 하셨는데, 그 빛의 근원이 무엇입니까?”“초월적인 우주의 힘이죠. 일반적인 태양의 빛이나 초능력과는 다른 우주의 힘이라고 해야 할 초광력(超光力) 에너지입니다.”정 회장은 어릴 때부터 20년 동안 복사생활을 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그런 그가 빛의 능력으로, 죽어가던 성소국장 신부님과 위암말기로 위독한 상태에 있던 수녀님을 일으켰다. 그것도 범인(凡人)은 눈으로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초광력 에너지의 힘으로.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신 일이라는 사실에 귀가 솔깃했다.“그 얘기 좀 해주세요.”“추기경님이 비행기를 예약해두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무슨 일인가 하고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갔어요.”빛으로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김수환 추기경님이 정 회장을 부른 이유를 말했다. 의학적으로 한계가 온 사람이 있다며 추기경님 앞에서 직접 기적을 행해보라고 하셨다. 방으로 들어가니 시체에 가까운 사람이 누워 있었다. 안되면 그냥 가도 괜찮다고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기도를 한다거나 이상한 의식을 행하는 일련의 과정도 없이 정 회장은 환자에게 다가가서 ‘일어나라!’ 하고 어깨를 탁 쳤다. 그리곤 다 끝났다며 일어서서 집으로 왔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김수환 추기경님의 전화를 받았다. 부랴부랴 올라갔더니 죽었던 사람이 깨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서 어둠의 터널을 걷던 중에 누군가 어깨를 탁 치며 일어나라는 말이 들려서 깨어났다고. 그러자 눈앞이 환해지며 깨어나게 되더라고. 정 회장은 그 기적을 책에 올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그런 기적이 실제로 가능한가요?”“사람은 누구나 빛을 타고 납니다. 빛의 마음으로 세상에 오는 가장 순수한 상태, 그게 바로 빛마음입니다.”정 회장은 다만 인간의 심부에 깃들어 있는 빛마음을 빛의 도움으로 일깨워주는 거라고 했다. 빛마음과 빛의 길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삶을 살아가는 동안 세속적인 욕심과 탐욕에 가려진 인간의 원초적인 마음의 빛을 찾아내고, 거기에 또 다른 빛을 더함으로서 인간 본연의 순수함을 찾아가게 도와주는 것이 명상이라고 했다. 정 회장이 행한 기적은 ‘빛’의 힘이고 우주의 신비인 초광력의 힘이라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빛은 공기처럼 세상 곳곳에 스며들어 만물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성소국장 신부님을 일으킨 기적을 ‘그분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성총’이라고 하셨다. 고통 받는 사람들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위해 아낌없이 쓰고 오라는 그분의 당부라고 확신하시며. 김수환 추기경님이 정 회장에게 오래 간직하고 계시던 로사리오(묵주)를 주신 건 그런 의미이리라. 그 묵주에 추기경님의 문장이 새겨져 있고, 마더테레사 수녀님에게 받은 타원형의 푸른 성모패가 달려 있었다. 추기경님이 정 회장에게 그 소중한 성물을 주신 건 좋은 일을 더 많이 하며 나눔을 실천하라는 부탁일 것이다. 신이 어떤 이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신 건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두루 도우라는 진언이다. 재물 역시 마찬가지다. 하느님이 세상 곳곳을 일일이 살필 수 없어서 당신을 닮은 사람에게 능력을 주어서 세상을 도우라 하신 거라 여겨진다.“빛을 언제 어떻게 만나셨어요?”“1986년도에 호텔 지배인으로 승진하고 직원들과 화왕산에 갔어요.”등산을 하려던 중에 정 회장은 활활 타오르는 산불을 보았다. 분명히 산불이 났는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 불이 보이지 않았다. 긴가민가하며 산을 오르던 중에 다시 불이 보였다. 생각다 못해서 정 회장은 일행과 헤어져 다른 방향으로 산을 오르다 마침내 빛을 만났다. 그것은 일반적인 불이 아니라 태양이 바위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끓는 것 같은 커다란 빛의 덩어리였다. 온 산에 향기가 감돌며 빛이 반짝거렸다. 그는 바위 위의 빛 속에 올라앉았다. 한 시간쯤 앉아 있었던 것 같았는데 불과 오 분도 걸리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빛을 만나고 난 후, 신기하게도 과거와 현재, 미래가 슬라이드처럼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게 시작이었다. 정 회장이 빛을 행하기 시작한 것이.“빛만남이 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까요?”“빛명상은 종교나 과학과 별 연관성이 없고 교리도 없습니다. 내게 있어서 빛은 생명의 근원이고 창조의 원천일 뿐입니다.”실은 자신도 그 빛이 초월적인 우주의 힘을 뜻하는 ‘초광력’이라는 것밖에 더 아는 것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그 초광력은 인간의 유한한 인식 밖에 존재하는 무한의 힘이고, 자신은 그저 빛의 힘을 전달하는 안테나에 불과하다고. 그러면서 정 회장은 도로의 신호등을 예로 든다. 신호등이 기존의 질서에서 이탈하면 도로가 엉켜서 혼돈이 일어난다며 빛의 섭리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우주의 순환에는 그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다. 선과 악, 사랑과 자비를 넘어선 순수 그 자체의 무한한 힘이 생명 근원의 빛이라 했다. 우주의 무한함이 바로 창조의 힘이고, 인간의 내면에 내재된 그 힘을 끌어내는 빛이자 초광력이라고.“선생님은 빛명상의 궁극적인 목적을 어디에 두십니까?”“인간의 본질 속에 내재된 순수함을 회복하고,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데 목적을 둡니다.”땅 속에 묻혀 있는 다이아몬드를 캐듯이 영혼과 육체의 불순함을 걷어내고 태초의 순수함을 회복하며 초자아적인 우주의 섭리를 찾아가는 행위라고 할까. 빛명상으로 건강을 잃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며, 우연히 받게 된 빛의 은혜를 통해 나눔을 실행한다는 그 겸허한 실천이 아름답다.정 회장은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제안한 부귀영화의 유혹을 거절했다. 그저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서 빛이라는 초자연적인 우주의 섭리를 만나고 심신의 건강을 되찾는 것이 기쁘다고 한다. 살아가며 욕심과 탐욕, 이기심의 때가 낀 내면을 빛명상으로 갈고 닦아서 마음의 원형을 되찾게 하는 것이 바로 빛명상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한다. 초자아적인 우주의 섭리를 깨달아가는 명상의 과정은 부모에 대한 감사를 시작으로 자연을 비롯한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을 찾아가는 길이며, 인간이 뿌리를 찾는 일이라고 했다. 참새도 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하늘을 올려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고.명상으로 불안의 뿌리를 완전히 걷어낼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일이 술술 풀릴 때도 인간은 알게 모르게 불안의 추격을 받지 않는가. 그것은 어둠처럼 음의 기운으로 인간 속에 스며들어 자신감을 잃게 하고 곧잘 후들거리게 만든다. 명상으로 초자아를 만나서 자신을 돌아본다면 불안의 원인을 알 수 있고,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 출간한 명상 에세이 ‘빛향기와 차명상이 있는 그림찻방’ 책에 씌어 있는 대로 인터넷 빛명상을 열어놓고 빛명상의 자세를 갖추고 나도 모르는 초자아를 찾아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자기 속의 또 다른 자기를 찾아서 대화를 나눈다면? 하늘을 향하도록 손바닥을 펼치고 양쪽 무릎 위로 손을 살짝 들어 올린다. 코끝을 바라보듯 두 눈을 천천히 감는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명상을 시작한다.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와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해주신 부모님과 선조들에 대한 감사를 시작으로 숨을 깊숙이 들이마시면 ‘경천애인(敬天愛人)’의 길이 보인다.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3-16

천년을 사는 사람

나무는 살아서 천 년을 살고 죽어서 또 천년을 산다. 살아서 그 푸르름으로 사람들에게 맑은 공기와 그늘을 주고 죽어서는 주택의 기둥과 마루, 장롱 혹은 반닫이가 되어 또 그렇게 도움을 준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 선한 숨결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며 나무는 수호신처럼 인류와 생을 함께 한다.흔히 나무를 다루는 장인을 목수(木手)라고 한다. 14살부터 곤궁한 살림을 도우려 목수 일을 배운 사람이 소목장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어 60여 년을 나무와 함께 살았다. 엄태조 명인을 팔공산 자락에서 만났다. 당초문 통영반, 오동 의걸이장, 먹감약장, 반닫이, 권수정업왕생첩경, 대명다라니경 등, 이름도 생소한 전통목공예를 만들며 한 생애를 보낸 분을 만나면 가장 먼저 손을 보겠다고 생각했는데 얘기를 듣느라 잊었다. 명인은 나무를 만지고 사는 목수도 대목장(大木匠)과 소목장(小木匠)으로 구분된다며 말문을 열었다.“대목장과 소목장의 차이가 뭐예요?”“건물의 전체를 짓는 장인을 대목장이라 하고, 건축물의 치장이나 실내 디자인, 창호나 장롱, 궤함 등의 세간들과 가마, 수레처럼 생활도구를 만드는 장인을 소목장이라고 합니다.”요즈음에는 모든 기능이 기계화 되고 분업화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소목장이 잔일까지 다 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전통가구가 장인들에 의해 여전히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통이 요구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우리의 나무로, 온전히 우리나라 전통의 공법으로 수작업을 해야 것이기 때문이다. 무형문화재전수관 없는 곳이 전국에 세 곳인데 그 속에 대구가 포함되어 있다고 명인이 한탄을 하신다. 무형문화재 전수관을 만들어달라고 청와대에 청원서까지 넣었는데, 정부에서는 지원을 해주겠다고 응답했건만 정작 시에서는 예산이 없어서 못한다고 잡아떼더란다. 전국에 세 명뿐인 소목장 인간문화재가 대구에 있는데도 사정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다.“언제 어떻게 이 일을 시작했는지 살아온 얘기 좀 해주세요.”“아버지가 맞춰준 지게를 지고 천수답을 오르내리며 농사를 짓다 집안사람을 따라 가서 목공소에 취직했어요.”일을 가르치던 목수가 그에게 빗자루를 주며 마당을 쓸라고 했다. 흙의 이음새가 없도록 반듯하게 쓸어야 한다는 말에 몇 달 동안 마당만 쓸었다. 왜 마당만 쓸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목수는 대패질을 비롯한 모든 일이 반듯해야 한다며 빗자루 자국을 지우고 마당을 한 폭의 천인 듯 쓸어보라고 했다. 그 목수는 어린 제자를 자식처럼 먹여주고 재워주며 목수의 마음가짐을 먼저 가르친 것 같다. 소년은 만 3년을 거기 머물다 다른 가구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돈을 조금 벌어서 귀향한 후, 대구의 골동품 가게로 옮겨 일을 배웠다. 골동품을 수리해서 수출하는 건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 같은 방식으로 새 물건을 만들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국전 급에 해당하는 ‘전수공예’라는 대회에 작품을 출품하는 길이 있다는 걸 알고 다시 서울로 갔다. 전통기법을 제대로 익히면 인간문화재도 되고 무형문화재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꿈과 희망을 주었다.소목장 인간문화재 55호 강대규 명인을 만난 것이 그 즈음이었다. 강대규 명인 밑에서 소목장의 전통기법을 전승 받으며 차근차근 일을 배웠다. 전수공예전에 작품을 출품하려니 디자인을 그려 오라고 했다. 디자인을 어떻게 그려야 할까 고민하며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나무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자가 꼭 가구디자인 같다고 느낀 순간 ‘아! 바로 저거다.’ 하는 혜안이 열렸다. 눈 감고 소나무를 생각하며 그리니까 죄다 그려졌다. 그때부터 명인은 사진을 보며 디자인 그리는 연습을 했다.전수공예전 작품 출품을 앞두고 날마다 갓바위를 오르내렸다.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에 전념한 정성이 통했는지 마침내 ‘전수공예전’에서 입선했다. 대구의 첫 번째 소목장 전수 입상자가 되었다. 인간문화재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소목장 인간문화재가 되는 과정이 궁금해요.”“대구, 전주, 서울에 소목장 인간문화재가 한 명씩 있습니다. 세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 죽어야 다시 인간문화재를 뽑는데, 3년 동안 피 마르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어째서 인간문화재가 3명뿐이냐고 물으니, 예산이 없어서 인간문화재 관리가 어렵다며 겨우 전통의 맥만 잇는 정도로 유지한다고 한다. 말이 좋아서 전통이고 인간문화재이지 경제적으로 곤궁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한탄을 했다.“전통공예에 필요한 나무가 따로 있어요?”“소나무, 오동나무, 느릅나무, 느티나무, 괴목 등을 주로 많이 쓰는데, 원목이 지닌 나뭇결의 자연미를 살리는 게 특징입니다.”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서 나무의 문양이 아름답고, 특히 소나무는 기름성분이 많아서 따로 칠을 하지 않아도 자주 만지면 반들반들해진다고 한다. 예전 고가구를 보면 특히 소나무 오동나무가 많다. 소나무도 무늬결이 있고 곧은결이 있는데, 예전 선비들이 화려한 것보다 주로 곧은결을 선호했더란다. 소나무는 향기만 좋은 게 아니라 무늬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 느티나무도 무늬결이 아름답다. 명인은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무로 우리나라의 소나무를 손꼽는다. 그러면서 나무가 저렇게 좋으니 흙은 또 얼마나 좋겠느냐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산 도처에 보약이 깔려 있다고 허허허 웃으신다.“나무는 오래 마르면 틀어지는데 고가구는 어떤가요?”“전통가구는 원목으로 못 하나 없이 짜 맞추기 때문에 대를 이어 쓸 수 있어요. 백 년이 지나도 풀어서 다듬으면 새것처럼 쓸 수 있어요.”외국 사람들은 우리의 전통가구를 예술품으로 본다며, 그것은 우리 가구가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같은 물건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무는 아무리 건조해도 계절 따라 늘어나고 줄어들기 마련인데 못 없이 짜 맞춘 전통가구는 스스로 늘어나고 줄어드는 속도에 몸을 맞추기 때문에 백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고 한다.“전통목공예 외에 어떤 일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국보이자 세계문화유산인 문화재 보수를 많이 하고 있어요.”엄태조 명인은 해인사 팔만대장경 보수를 13년째 계속하고 있으며, 용문사 대장전 윤장대를 해체 보수하고, 은혜사 백흥암 극란전 수미단 보수, 장춘사 대웅전 수미단 제작, 북지상사 비로전 수미단 제작 등, 국가지정 보물의 보수공사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 외에 종갓집 보수공사를 맡기도 한다. 이름만으로도 위엄이 주어지는 일을, 대구경북이 낳은 인간문화재 엄태조 명인이 만지고 다듬는다고 생각하니 무한정 믿음이 간다.“팔만대장경 판각보수의 경험을 좀 들려주세요.”“목판 선반을 판각이라고 하는데 요즘 말로 하면 책꽂이 같은 것입니다.”판전 안에는 벌레도 없고 습기도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지렁이나 벌레가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정밀한 공법을 거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판각 아래를 1미터 깊이로 파고 맨 아래 숯을 깔고 그 위에 소금을 뿌려서 강회를 하는데, 그 과정을 세 번 거듭한다고 했다. 맨 위에 마사토를 섞어서 강회를 해두는데, 다음날 보면 표면에 하얗게 분이 덮여 있다며 스님들이 아침마다 그 분을 쓸어낸다고 했다.강회에는 벌레를 방지하는 성분이 있어서 수백 년이 지나도 깨끗하다고. 흙도 먹고 싶은 영양분이 있는데 800년이 지났으니 흙이 허벅허벅 할 거 아니냐며, 파내고 새 흙을 넣어서 똑같은 방법으로 복원한다고 했다. 판각 역시 못 하나 없이 짜 맞추었는데도 팔만대장경의 육중한 무게를 이고도 끄떡없다는 명인의 설명에 자랑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나무와 나무를 잇는 방법은 어느 나라도 따라할 수 없는 우리 전통의 방식이라고 기꺼워했다. 판각의 부서진 부분은 보수를 하고, 휘어진 부분은 똑바로 만들고, 없는 것은 채워 넣으며 원형대로 복원을 한다고. 흙을 다지는 방식도 기계로 하면 층이 생겨 매끈하지 않기 때문에 방망이로 일일이 두들긴다고 한다. 방망이로 두들겨야 매끈하고 단단해진다는 보수 공법까지 그야말로 수작업이었다.60여 년간 목공예의 전통을 지켜온 엄태조 명인은 800평이나 되는 영천목공예사업협동조합에서 제자들을 키우고 있다. 기능인들이 제대로 일할 여건을 만들고 싶다며, 장인들과 후학들이 한자리에 모여 작업하고 기술을 전수하는 발판이 중요하다고 했다. 전통문화를 살리는 길은 전통의 맥을 잇고 기능인을 발굴 양성할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이 주어져야 하고, 전승자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야 전통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고, 명인이 따끔하게 한마디 한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3-09

느낌대로 그린 은유의 세계

작품을 구상할 때 작가는 간혹 심상에 떠오른 이미지를 따라가기도 한다. 그럴 때 작가는 눈으로 확인되는 실체보다 심상에 떠오른 이미지를 더 믿게 된다. 그것은 이미지가 품고 있는 여백이, 실체가 갖지 못한 환상으로 상상의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본을 따라 그리듯 모든 물상을 꼭 사실적으로 그려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너무 단조롭다. 밤에 쓴 문장을 다음날 아침에 지우는 일이 있더라도 작가는 환상을 따라가는 모험을 망설이지 않는다. 물상이 재창조 되는 은유의 과정은 창작에 종사하는 모든 예술가들이 아프게 겪어야 하는 일이다. 문상직 화백의 양 그림이 그런 변이의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는 것은 기억해둘만한 일이다.화백의 양 그림을 보며 문득 시대정신을 떠올렸다. 위로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마치 부름을 받고 온 듯 구름을 닮은 양 무리가 풍요롭고 온유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코로나 19가 시작된 것이 일 년 전 이맘때쯤이었다. 그날 이후로 세상의 모든 가치관과 문화가 바뀌고, 사람들은 격리에 익숙해져야 했다. 갑작스러운 홀로서기에 혼돈이 일었다. 밖에서 안으로, 물상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다수에서 개인으로 분화를 거듭하며, 시대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정체성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인간을 고독한 지경으로 몰아넣는 범상치 않은 시대에, 양 그림을 보고 위로를 받았다면 감정과잉이라고 해야 할까? 화백이 어떤 마음으로 그렸건, 양 그림은 그 특유의 치유와 위로의 능력으로 그림을 보는 사람의 감정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아름다운 감화를 준다.“양을 그리게 된 계기가 뭐예요?”화백이 비 오는 날의 안개를 말했다. 해평 도리사에 갔다가 비를 만났다고 한다. 우산을 갖고 가지 않아서 비를 조금 맞았고, 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다. 역사의 더께가 덮인 부도(浮屠)를 보고 능선을 걷는데, 멀리 낙동강 줄기와 능선으로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바람 따라 흐르는 안개의 무리가 양떼의 모습으로 보였어요. 그날 집에 와서 세 살배기 딸을 위해서 50호짜리 양 그림을 그렸어요.”그게 시작이었다. 화백은 세 살 된 딸을 위해서 첫 번째 양 그림을 그렸고, 그 작업이 매우 재미있었다. 그 의미 있는 그림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딸이 사십 살이 된 지금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다. 마음에 품은 어떤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 고귀한 일이다.양 그림을 그리기 전에 화백은 꽃과 해바라기, 수녀, 소녀와 같은 맑은 소재의 그림을 그렸다. 전시회 팸플릿을 보고 있으려니 그림이 곧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물은 보는 사람의 마음만큼 보이는 것인데, 그 맑음이 부럽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다. 화백은 대구여고 근무할 때 소녀시리즈를 많이 그렸다고 한다. 너무도 맑아 보이는 아이들의 영혼을 그대로 그림에 담았다. 소녀시리즈가 ‘야망의 세월’ 외의 드라마 세 편에 세팅되기도 했다. 문제는 소재의 한계였다. 소녀시리즈와 수녀시리즈로 전시회 초대를 받으면 소재의 한계 때문에 공포가 찾아오더라고 했다. 소녀를 그만 그리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만난 것이 도리사의 안개였고, 양떼의 모습이었다. 신의 한수였다. 꽃과 수녀, 소녀의 소재가 양으로 변화를 거듭하며 소재에 대한 공포가 없어졌다. 화백의 인생에 굵은 획을 긋게 해준 양 그림이 그렇게 탄생했다.“그림에 모가 없네요. 그림이 구름처럼 부드럽고 몽상적이기까지 한 이유가 뭘까요?”“작업하며 느낀 건데 그림에 선이 있으면 너무 강해서 부드러움이 없어집니다. 선은 서로 끌어당기려는 힘을 갖고 있거든요. 선을 빼버리니까 소재가 부드러워졌어요. 우리 얼굴이 그런 것처럼.”선과 각을 없애고 구성과 색채까지 단순화하며 양 그림은 보는 이를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적 세계로 이끈다. 저녁 해를 받으며 무리 지어 노니는 양떼의 평화로움을 보며 위로를 받는 건 고요함으로 인한 치유의 느낌 때문이다.“소재를 단순화된 구성에서 세상의 모든 위악적인 요소가 제거되어 있는데 위안을 의도하신 건가요?”“그림은 보고 느끼는 사람의 마음에 따르는 것입니다.”신부님도, 스님도, 산부인과 의사도 양 그림을 보고 편안함을 느꼈다 하더란다. 그림만 보고 감상하는 것과 작가를 알고 감상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화백은 작가를 알고 그림을 보면 왠지 한 꺼풀이 덮이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양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양이 무리지어 있는 모습에서 인간의 삶을 보고, 가족의 개념을 보는 것은 그림을 보는 이의 마음이다. 자기 느낌에 충실한 것이 곧 그림을 보는 궁극적인 목적이고 순수함이고 자연스러움이다.“전체적인 구성과 색채를 최소의 단위로 단순화 시킨 이유가 있으신지.”“나는 양을 본 적이 없어요. 실제의 양은 환상처럼 아름답지 않아요.”실체를 보고 그렸으면 뿔도 그리고 암수 구별도 했을 텐데, 보지 않고 심상을 따라가다 보니 선이 없어지고 소재에 맞게 색채가 단순화되더라고 한다. 색채가 많으면 혼란하다. 그림도 버릴 수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를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 남기느냐 하는 것은 작업할 때 느끼는 감정대로 결정한다.“자연친화적인 소재를 위해 여행을 많이 다니시는지.”“아침저녁으로 드라이브를 잘 나가요. 해가 뜨고 질 때 느끼는 기분과 보이는 풍경에서 내 나름대로 양을 그려요.”아침 해와 저녁 해가 다르다. 황혼이 쏟아질 때면 색채의 단순화가 이루어지고 색깔이 확연히 정리된다. 색채가 많으면 그림이 혼란하다. 전체적인 기분을 느끼고 오면 그대로 그린다.“양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그림에 사인이 들어가면 그 그림은 작가와 멀어져요.”그림은 보는 사람이 느끼는 것인데 사인이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작가는 그림을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 머물게 된다며, 화백은 자기인식에서 머물지 않기 위해 그림을 완성하면 모두 포장을 해둔다고 한다. 그림을 작업실에 펼쳐두면 자신도 모르게 끌려가게 된다고. 자기 복제와 스스로 만든 사인에 갇히는 것을 경계하는 것 같다. 화백은 언제부턴가 그림을 두껍게 그리더라고 했다. 소녀시리즈 수녀시리즈가 두껍게 그린 그림이라고. 양 그림을 그리며 그 두꺼움에서 벗어났다고 한다.“비슷한 풍광을 보고도 심상을 흔드는 어떤 영감을 받으시나요?”“산과 들이 모두 비슷하지만 늘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달리 느껴지고 뭉클하게 감화를 받을 때가 있어요. 해질녘에 특히 그런 감화를 많이 받아요.”한낮에는 못 느끼지만 해가 뜰 때와 해가 질 때의 감정이 다르다고 한다. 황혼 같은 커다란 분위기에 젖어 있으면 그 색채 속에 모든 것이 묻혀간다고 한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황혼이 쏟아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때그때 심상에 와닿는 느낌을 화폭에 담는다고.“색채를 서너 가지 색상으로 단순화 하신 배경을 들려주세요.”“거제 해금강에서 갈매기 섬으로 알려진 홍도에 갔던 적이 있어요.”그날 화백은 무인도로 가는 배를 탔는데, 뱃전에 수녀 두 분이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정겨워 보인다고 느낀 순간 검은 수녀복과 두건의 흰 띠, 바다의 푸르름이 너무도 깨끗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고, 그 단순한 색채를 의식한 순간 ‘바로 저거다!’ 하는 생각이 들더란다. 그리 많은 색이 없어도 되겠다는 느낌으로 색채가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거기서 화백은 색깔을 없애는 것으로 욕심을 버렸다.“그림을 시작하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요?”“그림쟁이는 영혼이 맑아야 해요.”그림은 창조 작업이다. 사실대로 그리는 것은 연습 과정에 거쳐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베끼는 것도 따라 그리는 것도 하나의 과정일 뿐 거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작가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확보하려면 먼저 자연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일러주신다. 양 그림을 통해서 화백은 단순화된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무리 지은 양떼 속에 가족이 있고 이웃들의 군상이 있다. 양의 숫자는 구도에 따라 많아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한다. 양의 본질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어떤 대결도 반목도 없다. 꽃과 소녀, 수녀를 거쳐 양 그림에 이른 변화를 통해 화백은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에 이르렀다. 화백이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 느낌대로 그리는 것이라고.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3-02

북소리와 ‘뫼아리’ 파장이 주는 에너지

일중 황보영 회장으로 하여금 전통생활민속예술에 관심을 갖게 한 것은 상여소리였다. 시골 장례식에서 상갓집 일을 돕다 구성지게 울려 퍼지는 상여소리에 감화를 받아서 황보 회장은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별의 슬픔과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담아 부르던 상여소리는 우리네 농경사회의 장례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식이었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친구들이나 가족모임, 교수들 퇴임식장 같은 소단위의 행사를 다니며 놀이 삼아서 소리를 했다. 자신이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신명에 겨워 소리를 하고 다니다 민요병창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황보 회장은 거기서 진짜 소리꾼들의 노래를 듣고 비로소 자신의 우매함을 깨달았다.이후에도 전통생활민속예술에 대한 애착은 여전해서 기악, 타악 같은 악기를 배웠지만 어느 것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김수배 선생님에게 날뫼북 장단을 배웠다. ‘날뫼’는 날아온 산이라는 대구 비산동만의 ‘비산농악, 날뫼북춤’을 이르는 말이고, 정월 보름날마다 행해오던 ‘천왕메기굿’에서 파생된 관행이었다. 비산농악에 있던 북춤을 따로 분리해서 날뫼라는 이름을 붙이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황보 회장이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런 유서 깊은 날뫼북춤에 대한 흥미도 그의 마음을 오래 붙잡지 못했다.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밀양백중놀이 보유자이고 중요무형문화재 68호인 하보경 선생님의 북춤을 보던 날부터였다. 그의 북춤을 보고 난 후, 오래 더듬어오던 모든 취미 편력을 멈추었다. 무거운 북을 메고도 가벼운 몸짓으로 춤의 삼매경에 빠진 하보경 선생님의 모습은 학이 춤을 추는 듯했다. 황보 회장은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농부의 욕심 없는 순박함과 풍요로움이 배어 있는 북춤에 매료되었다. 사람이 한 가지 이상을 품기까지 얼마나 많은 길을 둘러가야 하는지, 황보 회장은 그 이상이란 것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북춤을 만나고 온전히 깨달았다. 소리와 기악, 춤까지 모두 해봤지만 그 중 북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날부터 그는 북춤에만 매달렸다. 새천년에 처음으로 입춤과 할량무를 추며 본격적으로 춤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북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일까요?”“북은 사람이 만든 최초의 악기라고 볼 수 있어요. 신을 부르는 소리라고 할까요? 원시시대에부터 제천의식에서 쓰던 악기였어요.”신을 부르는 영매. 북은 텅 비어 있음으로써 제 속을 길어 올려 소리를 만들고, 그 소리를 크고 넓게, 멀리 보내어 신을 부른다. 하늘과 땅 사이가 비어 있는 것처럼 북이 가진 공간도 하나의 커다란 우주를 뜻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보는 것처럼 정말 텅 비어 있기만 할까? 늘 비어 있는 것 같지만 하늘이라는 변화무쌍하고 광활한 세계는 또 얼마나 많은 것을 품고 있는가. 그 허공에 바람이 있고 비가 있고, 별이 있고, 끝을 모르는 우주가 있다. 하늘이 그렇듯이 북도 제 속에 우리가 짐작 못할 세계를 품고, 때로는 크게 때로는 부드럽게 가없는 울림을 보내지 않는가.그 동안 갈고 닦은 실력도 점검할 겸해서 대회에 나가보라는 주위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회에 나갔다. 오래도록 북춤에 매료되어 살다보니 2007년도 첫 대회에서 문화체육부장관상 받은 것을 시작으로 전국 국악 경연대회 국무총리상, 2008년에는 ‘달구벌북춤’으로 대통령상을 받는 행운까지 누렸다.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대통령상을 받고 나니 밥을 사라는 사람이 있고, 밥을 사주는 사람도 있더라며 웃었다.“왜 그렇게 전통생활민속예술에 매달렸어요?”“사람은 죽을 때까지 무슨 일이든 끊임없이 일을 하고 살죠.”그 많은 일 중에는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한다. 해야 할 일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입원이고 하고 싶은 일은 북춤처럼 영혼을 매료시키는 행위예술이다. 살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꼭 일만 하고 살 수 없어서 취미생활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과 인연을 만들기 위해 배우기 시작한 전통생활민속놀이가 북춤에 이르고서야 그게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었던 걸 깨달았다.황보 회장의 본업은 인쇄업이다. 1976년도에 책 만드는 후가공으로 시작한 인쇄업을 45년째 이끌어오고 있다. 참고서와 문제집을 비롯해서 학원에 들어가는 책을 많이 만들었다. 평생 해오던 일이어서 인쇄업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있다. 한문을 한글처럼 쓸 수 있게 획과 변으로 된 자판을 만들려고 7년째 연구 중이다. 일중(一中)자판으로 2018년 9 월에 3일간 열린 국제대만특허박람회 출품하여 은상과 금상 ‘스페셜 어워드’를 받았으며 동년 12월 서울국제박람회에서도 금상을 받았고, 2019년 1월 대구시장상과 5월 벤처기업부장관상까지 받았다. 인쇄, 출판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제는 후대의 사람들이 편하게 쓸 수 있도록 반드시 그 작업을 성공시켜야겠다는 욕심이 생긴다.50살을 넘기며 삶의 기대가 자꾸 커졌다. 나이가 들어서 돌아보니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이 가 있는 걸 알겠더라고 한다. 꿈을 갖고 살지는 않았는데 살다 보니 이상이 높아지며 꿈이 생기더라고. 각 지역마다 전통문화가 있다. 전라도는 판소리, 경기도는 경기민요, 북한은 서도소리, 경상도는 기악과 춤이 있지만 특히 북 놀음과 북춤이 뛰어나며 북 장단도 다양하다. 달구벌북춤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고 자기소개를 하고 다니다 보니 북춤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할 기회가 자주 생겼다. 더 깊고 구체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북춤에 관련된 책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눈에 띄는 책도 개괄적인 부분만 언급해둔 터라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북은 장단에 맞춰 박자를 두드리는 것만도 한 장단에 열여덟 박자가 나온다며, 황보 회장은 전문적인 북춤에 관한 책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북의 장단에 대한 세세한 정보는 고사하고 북춤이 백중놀이의 한 장르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결심했다. 대구무형문화재인 ‘날뫼북춤’과 밀양백중놀이북춤 중 밀양북춤, 진도북춤, 장고춤, 소고춤 등, 민속놀이마당에서 신명을 돋우는데 빠지지 않는 북소리와 달구벌북춤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예술의 힘, 북춤에 빠지다’를 출간했다. 황보 회장의 도전은 멈출 줄 모른다. 지금은 농경사회에서 경험한 일을 중심으로 월간지에 칼럼을 쓴다. 5년이나 해온 일이었다. 매사에 열정을 갖고 일을 하다 보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개인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며, 힘닿는 데까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할 거라고 한다.“전통예술을 하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하나만 들려주세요.”“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관계자를 찾아갔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식전행사에 대구광역시 시도무형문화재 제2호인 날뫼북을 넣어서 세계 각국에서 온 귀빈을 비롯한 많은 관객들에게 우리의 전통을 알려주면 좋지 않겠느냐고, 서면을 만들어서 건의했는데 이렇다 저렇다 하는 대답이 없었다. 일부러 돈 들여서 만든 서면이었다. 황보 회장은 서면을 들고 행사 담당자를 찾아갔다. 대구문화제가 국제행사에 밑질 이유가 없다며 대구만의 브랜드를 만들면 좋지 않겠느냐고 건의했지만, 국제적인 행사에 걸맞은 공연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묵살되었다.이제는 전국심사위원으로 초빙되고, 예술을 하며 만나는 사람이 많아서 어딜 가든지 당당하게 국악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한다. 전국국악경연대회 심사위원들이 숙소에서 일박을 할 때면, 중요무형문화재와 전공교수, 명인 등 전국에서 40여 명의 심사위원을 비롯한 대가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그런 자리에서는 곧잘 공연 아닌 공연이 벌어지고, 달구벌북춤을 보여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그럴 때 황보 회장은 달구벌북춤에 이른 피나는 노력의 과정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고, 달구벌북춤에 대한 명분과 의미를 다듬어갈 수 있어서 기쁘다고 했다.인쇄업과 달구벌북춤 외에 황보 회장이 한 일이 또 있다. 그것은 개인의 사비를 들여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에 맞추어 발간한 서각집이다. 군위 삼국유사면의 도곡 장상태, 소남 신태옥 부부가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 기증하려고 사비를 들여서 휘호 150점을 서각으로 만들었는데, 황보 회장이 개인 사비를 들여서 그것을 책에 담았다.“적은 연세도 아닌데, 여러 가지 일이 힘겹지 않으세요?”“아직 반밖에 살지 않은 걸요.”일사천리로 147살까지 산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많은 세월이 남아 있고, 자신이 그만큼 젊게 느껴진다고 한다. 그 말은 곧 사는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남은 시간 역시 용기 있게 열정적으로 살겠다는 말일 터이다.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2-23

빛으로 담아낸 영감의 세계

기도로 시작하는 삶!인간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은 기도뿐이다. 사방이 고요히 어둠에 가라앉은 새벽의 어둠 속에서 그는 기도를 한다. 지금은 곁에 없지만 큰 스님의 가르침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생전에 큰 스님은 자신이 죽고 나면 금강경에 의존하라고 했다. 기도와 촬영삼매경을 통하여 지혜를 터득하였다. 그 지혜는 앞날을 미리 내다볼 수 있게 하고,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결정적 순간을 예측하여 사진에 담아내게 했다. 설악산으로 갔다. 소나무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잡으려고 밤 2시에 산을 올라가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며 두 달을 보내고 돌아와 사흘을 앓았다. 팔공산을 종주하다 영양실조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파티마병원에서 여영환 신부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았다. 그날부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다.사진작가 장국현은 기도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그에게 기도는 하느님과 교유하는 시간이고, 신의 계시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불현듯 영감이 다가오면 그는 시간에 아랑곳하지 않고 카메라를 들고 나간다. 한밤중에 산을 올라가면서도 큰 벗을 함께 하는 듯 두려움을 모른다. 오로지 혼자가 되어야 하는 그 순간의 외로움은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다. 찰나의 신비를 포착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 작가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나’를 잊어야 만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위해서 작가는 길을 떠나기 전에 자신을 내려놓는다. 아침마다 신에게로 다가가는 그 기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기도는 영혼의 일이고, 사람은 누구나 간절히 원하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따를 뿐이다.방송국에서 설중 대왕송을 찍자고 할 때도 그가 날을 잡았다. 산속에 텐트를 치고 사흘 동안 야영을 했다. 산을 오를 때는 눈이 오지 않았다. 대왕송 가까운 곳에서 텐트를 쳤는데, 밤 세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타이밍이 절묘했다. 사람들이 그를 ‘영적인 작가, 신들린 작가’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타이밍을 잘 잡아내기 때문이다. 텐트생활 사흘 내내 눈이 내려 60cm나 쌓였다. 사진을 찍는 동안 나무에 덮여 있던 눈이 얼고 상고대가 맺혔다. 소나무는 다른 나무와 달리 상고대가 잘 맺히지 않는다. 높은 산의 강추위만이 거목의 소나무에 서리꽃을 만들 수 있다. 눈 속에서 사진을 찍는 그를 방송국 사람들이 또 카메라에 담았다. 추위에 눈물이 나고, 콧물이 흘러 고드름이 맺혔다. 그런 추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신들린 듯 사진을 찍어대는 그의 옆에서 방송국 사람들이 추위에 벌벌 떨었지만 촬영삼매경에 들어간 그는 아무런 고통도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그런 신목을 찾아 산을 오른 게 몇 년인가. 신목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쉽게 보여주지 않고 ‘바로 이거다!’ 하는 찰나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무의 진짜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사진을 찍는 사람과 나무가 삼위일체를 이루는 계시의 순간이 주어져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는 철저히 믿고 있다. ‘사진은 티이밍의 예술이다.’ 작가는 단 한 장의 사진을 위해 그 절대 절명의 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사진이 되려면 구름도 적당히 있어야 하고, 각도까지 맞아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다.생애 단 한 장의 사진을 건지기 위해 백두산 정상에서 두 달간 머물렀다. 자연이 보여주는 극적인 찰나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동안 몸무게가 12kg이나 빠졌다. 그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아서 마침내 장백폭포에서 구름이 밀려왔다. 맑은 하늘을 바탕으로 구름이 바람을 따라 흐르다 천지를 감싸듯이 가득 덮었고 산은 티 없이 맑았다.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그 순간을 위해 17년 동안 백두산을 오르내렸지만 그런 만남은 처음이었다. 그는 신들린 듯 셔터를 누르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오랜 기다림과 기도가 없었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었다. 바람과 구름은 움직이는 것이고, 자연은 쉬지 않고 변화를 보여준다. 작가는 그것을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여겼다. 신이 천지를 중심으로 천당과 극락을 재현해서 보여주었다고.“어째서 전체가 아니고 나무의 부분을 찍는지 설명해주세요.”“나무의 아름다움을 실감나게 보여주려면 실물크기와 같이 보여줘야 해요. 나무 전체를 보여줄 수 없으니 부분의 디테일함을 살려서 그 생생함을 그대로 전달하는 거죠.”실물이 주는 감동을 완벽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가장 단순하고 함축되고 디테일한 부분으로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라며, 나무를 작가의 주관이 아니라 사진을 보는 사람의 주관으로 찍어야 한다고 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실물을 보고 있기 때문에 자칫 사람들이 알고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만, 사진은 작가만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며 자기도취에 빠지면 실물이 주는 감동을 전하기 어렵다고 한다. 작가가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백두산 천지의 아름다움과 거목의 신비로운 모습을 담은 영상이 차례로 펼쳐졌다. 동영상에 흐르는 바탕음악이 대한민국 남성 재즈 보컬 1세대인 김준 씨가 장국현 선생님에게 헌정한 노래 ‘고송의 길’인데, 국악인 김용우 씨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대관령 제왕산에 산다는 신목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그 나무 한 본을 두고 8년이나 좇아다녔어요.”수령 900년이나 되는 소나무인데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높이가 10m 넘고 밑둥치에 지름 1m의 큰 혹이 달려 있으며 나무둘레가 3m 넘는다는, 그 신목을 찍으려고 작가는 동상에 걸릴 각오를 하고 산에 올라갔다. 영화 30도의 칼바람이 뺨에 면도날을 긋는 것 같은 아픔을 남기는 데도 얼어 죽지 않고, 동상에 걸리지도 않은 것은 완벽하게 촬영삼매경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며, 스스로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영적인 상태여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좋은 나무와 좋은 사진을 찾아서 산을 헤매고 다닌 지 벌써 52년째라고 한다.“소나무를 보면 바로 저거다 하는 영감이 오는지요?”“가까이 가면 벌써 서늘한 기운이 뻗칩니다.”그는 나무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한다. 오래 나무와 교류하며 살아온 결과일 것이다. 강원도 높은 산의 고사목은 죽고도 썩지 않고 산 나무와 생을 함께 한다며, 그렇게 영령한 기운을 뿜는 나무는 보통 산에서는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깊은 산을 찾아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사진작가가 알아두어야 할 여러 가지 덕목을 언급했다. 안개가 끼어 있을 때 상고대를 가장 아름답게 담을 수 있다거나, 별도 색깔이 있다거나, 안개로 농담이 투명해지면 실체가 분명해지는 반면에 뒤에 있는 부분은 희미해진다는 얘기 역시 오랜 경험이 일러준 가르침이었다. 눈이 올 때는 사진을 멀리서 찍어야 한다며 가까이 가면 그 아름다움이 줄어든다고도 했다. 밑둥치가 새카맣도록 큰 번개를 맞은 거목이 끄떡없이 살아서 잎을 피운다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높은 산에서는 산 아래서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조화로움이 실현된다는 말이 여운을 준다. 그간의 작업 결과를 담은 동영상에서 나는 잠깐 거대한 자연의 신비를 엿보았다. 그를 보고 있으면 작가는 하늘의 보호를 받는 존재라는 확신이 명확해진다. 촬영삼매경에 들어가서 자신을 잊은 그 순간, 작가는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도 위기를 못 느끼니 보다 못한 신이 그를 보호해줄 수밖에.“사진의 의미가 무엇일까요?”“사진은 기록성을 가진 예술입니다.”작가의 영상에 담긴 수만 점의 거목들도 한 세대만 넘어가면 다 죽고 말 거라며, 작가가 죽음의 위기를 넘겨가며 작업에 매달리는 것도 사라지는 아름다움을 기록해두기 위해서라고 한다.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면 붉은 주목 같은 아름다운 나무들이 가장 먼저 죽고 다음이 소나무라고 한다. 동영상에 담아둔 작품 중에 이미 죽은 나무가 많다며, 사진의 의미는 사라지는 것의 오묘한 아름다움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주 만물 중에 죽지 않는 것이 없고, 나무 역시 때가 되면 그렇게 사라진다고.자연은 인간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지만 무서운 피해를 주기도 한다. 암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를 찍기 위해 바위에 매달려 죽을지 살지 모르고 셔터를 누를 때마다 그는 하늘에 자신을 맡긴다. 깊고 깊은 산을 헤치고 다니며 찍은 사진들이 모두 그 결과물이다. 그 동안 찍은 사진이 수십만 장이고, 필름도 큰 것으로만 찍는다.학은 지혜의 상징이고 원앙새는 사랑의 상징이다. 사랑이 완성되면 지혜가 되고, 지혜는 가슴에서 나온다.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하신 분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지혜가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기까지 70년이 걸렸다고 하셨다. 산과 소나무가 주는 에너지가 그에게는 모두 빛이고 성령이며,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지혜로 인한 깨달음이라고 믿고 있다. 참 예수님은 자신의 가슴에 있고, 소나무와 자연이 그에게는 신의 기운이라며 사진을 찍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몸속에서 움직이는 생명의 기운을 느낀다고 한다. 자신이 죽지 않는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죽음이 두렵지 않고 내일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2-16

새생명을얻고태어나는헌옷사랑

60년대 70년대만 해도 집집마다 아이들이 대여섯 명 이상이었다. 칠 남매, 팔 남매, 아이가 더 많은 집은 십남매도 예사로웠으니 그야말로 베이비붐 시대였다. 온 나라가 가난에 허덕이는 것이 마치 아이들 때문이라는 듯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을 내세우며 ‘둘만 낳아서 잘 기르자’는 캠페인을 벌이기에 앞장섰다. 나중에는 둘도 많다며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고 외치는 사이, 사회 전반에 아이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먹을 입이 많아서 생활은 곤궁하고 옷차림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엄마들은 틈만 나면 양말 꿰매는 게 일이었고 첫째가 입던 옷을 둘째와 셋째가 물려받는 게 예사였다. 오죽하면 옷 도둑이 다 설치고 다녔을까.헌옷 수거업체를 찾았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한 김재원 대표님이 따끈한 믹스커피를 주었다. 아파트나 주택, 혹은 의류상가와 공장에서 밀려나온 옷들이 넓은 공장에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롤러가 돌아가며 헌옷을 실어 나르자 헌옷을 종류별로 분류하는 직원들이 바지는 바지대로, 점퍼는 점퍼대로, 가방은 가방대로 골라내어 제각각의 박스에 나누어 담았다. 종류별로 분류된 의류들이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포장되어 지게차에 실려 가고, 공장 한편에 포장된 물건들이 블록처럼 차곡차곡 쌓였다.믹스커피를 마시며 언제부터 그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대표님은 헌옷수거만 15년이라며, 소줏잔 기울여가며 해야 할 얘기를 맨숭맨숭한 정신으로 하자니 말문이 막힌다며 웃었다. 양복 만드는 기술을 배우겠다고 해동라사를 찾아갔던 스무 살의 청년이 파란만장한 인생의 고비를 다 넘기고 재활용업체에 앉아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옷으로 시작된 삶이 이순에 이르도록 옷을 만지고 있다는 얘기다. 15년 동안 마시고 산 먼지가 얼마일까. 옷 도둑이 설치고 형제들의 옷을 물려받아 입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데 이제는 옷이 가장 싼 시대가 되었다. 옷이 떨어져서 못 입는 게 아니라 싫증나고 유행이 지나서, 작아서 못 입게 된 옷이 멀쩡한 채로 버려진다. 이런 변화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서?“우리 주위에 헌옷수거함이 생긴 게 언제예요?”“1997년에 외환위기를 맞으며 주위에 어려운 사람이 많이 생겼고, 헌옷이라도 모아서 불우이웃을 돕자고 시작한 것이 헌옷수거였어요.”아파트와 주택가에 철판으로 만든 사각형 수거함이 놓이고, 주부들은 아이들이 자라서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옷과 장롱을 비좁게 하는 헌옷을 정리해서 비닐에 차곡차곡 담아냈다. 어차피 버려야 할 옷이 재활용되어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니 멀쩡한 옷을 버려도 흰밥을 버리는 것처럼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그렇게 아 름다운 취지로 시작된 헌옷수거가 민간업체로 넘어가며 재활용업체가 생기고 헌옷을 외국으로 수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었다. 이제 헌옷은 다른 나라로 가서 새 주인을 만나 새롭게 태어나고, 외화를 벌어들이는 주요한 물자가 되었다. 옷을 나눠 입는다는 아름다운 취지가 글로벌화 되어 가난한 나라를 돕는다는 얘기가 될 것 같다. 먼지가 풀풀 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자원을 재생산하는 일이고, 사람들은 자신이 입다 버린 옷이 재활용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자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니.“어떤 연유로 헌옷에 눈을 돌리게 되었어요?”“유아용 의료총판을 하다 부도를 맞았어요.”김재원 대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곡절 많은 삶의 여정을 들려주었다. 고급 양복을 만들겠다고 해동라사를 찾았던 꿈 많은 청년이 기성복에 눈을 뜨며 유아복 의류판매를 하게 되었고, 대구 경북 총판의 일을 하다 보니 대리점이 40여 개로 불어나 있더란다. 인생이 무난하게 만 흘러가는 게 아녀서 본사가 부도를 맞으며 그에게도 직접적인 피해가 들이닥치더라고 했다. 40여 개의 대리점에서 반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오래 거래를 해오던 대리점 점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반품을 받다 보니 나중에 빚이 산더미처럼 불어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더라고 했다. 그때 대리점에서 받아야 할 외상값도 많았는데 대표님은 수금 장부를 찢어 없앴다고 한다.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 서로가 어려운 시점이어서 차마 점주들에게 외상값 내놓으라는 말을 못 하겠더라고 했다. 부도를 낸 본사 잘못이지 대리점 점주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어려운 지경에 처하고도 남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그 마음이 세상을 살고 싶은 곳으로 만들지만, 정작 그가 짊어진 어려움은 누가 구해줄지.“빚도 많고 일자리도 잃고, 난감했겠어요.”“기가 막혔죠. 생각다 못해서 의류업체인 동해섬유를 찾아갔어요.”생전 처음 가는 곳이었고, 동해섬유의 사장님도 처음 본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초면의 사장님에게 부도를 맞고 다 털어먹었는데 재고라도 있으면 팔아보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사장님이 8톤 트럭을 부르더니 차량 가득 물건을 싣고는 가져가서 팔아보라 하더란다. 남자 사각 팬티를 수입했는데 팔지 못하고 쌓아둔 물건이라며. 이름도 모르고 물건값도 없는 사람인데 뭘 믿고 물건을 주느냐고 물으니 사장님 하시는 말씀이, 다 털어먹었으니 물건값 줄 여력도 없지 않느냐며 팔아서 갚으라고 하더란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외상 장부를 찢어버린 사람의 심성을 알아보신 것인지.김재원 대표는 동해섬유 사장님이 아무 조건 없이 내준 물건을 싣고 시장으로 갔더란다. 다행히 장사 물을 먹고 산 관록이 있어서 대표님은 사각팬티 한 차를 일주일 만에 다 팔았다. 사람이 죽으란 법이 없는지,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방법을 찾을 수 있는지. 동해섬유 사장님의 배려로 사각팬티를 두 차나 더 팔고 나서야 겨우 물건값을 치르고 생활비가 생기더라고 했다. 놀라운 실적이었다.“일자리가 안정된 것이 그때부터인가요?”“고군분투하며 뛰어다니다 보니 표 안 나게 조금씩 나아지더군요.”사각팬티를 팔던 중, 일을 도와달라는 지인의 부탁을 받고 보루 공장으로 갔더란다. 보루를 만지며 내내 했던 생각이 헌옷이었는데, 장사를 하던 기질과 다져진 바탕이 있어서 김재원 대표는 작게나마 독립해서 자신만의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외국으로 수출을 하면 헌옷장사도 해봄직한 사업이 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는 구청과 시청, 부녀회의 모임을 찾아다녔다. 부녀회 회원들에게 외국으로 수출한다며 헌옷을 자신에게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진심 어린 호소가 통했던지 부녀회의 승낙을 받고 헌옷을 수거하게 되었다. 헌옷 수거함인 철통을 살 돈이 없어서 번개시장에서 얻어온 냉장고 박스에 헌옷을 모았다. 수출의 길을 열려니 자본이 필요했다. 가까이 지내는 형이 대출을 받아와서 동업을 하다 나중에 각자 독립하게 되었다.그 숱한 어려움을 겪고도 고난이 끝나지 않았던지 재활용업체의 일이 겨우 안정될 무렵에, 대표님은 너무도 큰 슬픔을 겪고 말았다. 여섯 살배기 막내가 짐을 운반하는 지게차에 부딪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고를 낸 사람이 직원이어서 대표님은 막내 잃은 슬픔을 뒤로 하고 그 사람을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 탄원서를 썼다. 자신이 읽어도 눈물이 흐르더라는 그 마음의 아픔을 누가 알까.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대표님의 진실함이 여러 번의 좌절을 겪으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삶이 제 아무리 고단한 역경을 안겨준다 해도 열심히 살려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니.“이제는 위기를 다 건넌 셈인가요?”“아직도 불안하죠. 나라의 정책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폐기물에 해당하는 헌옷을 상품화시켜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옷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수출을 하니까 세계정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고 긴장을 살짝 드러냈다. 사는 게 늘 그렇지.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고, 간혹 삶은 잔인할 정도로 가혹하게 사람을 몰아붙이기도 하니 사회의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고말고. 이 시대의 혼돈이 그렇지 않은가. 가게를 얻어서 장사를 시작한 소상공인들이 설마하니 코로나가 덮쳐서 그들을 초토화시켜버릴 거라고 짐작이나 했을라고.대표님의 얘기를 듣고 있으려니, 인간의 삶이란 게 도무지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있나 보다는 생각이 든다. 해동라사에서 시작된 옷에 대한 인연이 유아복 총판으로 이어지고, 걸레를 취급하는 보루 공장에서 동해섬유 사장님이 내주신 사각팬티를 파는 상황에 이르다 헌옷 수거업체로 정착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중심에 옷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 기이한 운명 같다. 옷과 맺어진 그 질기고도 기막힌 인연을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필연이라고 해야 할까.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2-09

무지갯빛 연연(鳶鳶)마다 희망을 싣고…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 ‘연을 쫓는 아이’에 연싸움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집 아들인 아미르가 연을 날리고 하인의 아들 하산은 수십 리 길을 달려가서 줄이 끊긴 연을 찾아온다. 하산은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연을 찾아올 수 있다고 한다. 아미르에게 있어서 하산은 친구이면서 하인이고, 하산에게는 아미르가 도련님이면서 친구다. 신분의 차이가 사람의 입장을 만드는 교훈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마을에 연 날리기 대회가 열리고 아미르와 하산이 한 조가 되어서 참가한다. 바람을 따라 연이 새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하산의 기지로 그들은 연싸움에서 승리한다. 어느 날 실이 끊긴 연을 찾으러 간 하산이 아쉐프 일당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숨어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아미르는 두려움에 질려 곤경에 빠진 하산을 모른 척하고 자리를 피한다. 그 일이 두고두고 아미르를 괴롭히며 죄책감을 갖게 한다. 아미르는 죄책감을 벗어던지기 위해 생일선물로 받은 시계를 하산의 침대에 감추고 모함을 한다. 그 일로 하산과 그의 아버지가 쫓겨나고, 그 일이 아미르에게 영원히 씻지 못할 고통과 죄의식으로 각인된다.연 날리기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세시풍속이다. 식구들과 둘러앉아 연을 만들어서 천변이나 강가의 모래밭 같은 넓은 곳으로 나가서 연싸움을 벌이거나 연 묘기를 선보이며 가족들의 건강과 꿈, 희망을 기원하며 소망을 빌었다.이렇듯 우리 민족의 정서를 아름답게 수놓은 ‘연(鳶)’을 만드는 명인이 있다. 세계 연 날리기 대회를 통해서 한국 전통 연의 우수성을 알리고 세계 각국의 연을 소개하는 일에 앞장서는 그의 사무실에는 연을 보관한 방이 따로 있다. 그 방에는 태극무늬와 나비문양이 그려진 연과 달구벌의 시조인 독수리연 등, 여러 형태의 문양이 담긴 많은 방패연이 걸려 있다. 댓살과 한지를 이용하여 전통 기법으로 만든 연이었다. 탁자에 놓인 독수리연의 한가운데 둥근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특이하게 방패연에만 있는 방구멍이라고 했다.“저 구멍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해주세요.”“방구멍은 바람의 저항을 줄여서 연을 잘 날게 하는 우리나라만의 과학적인 기법입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연이 바람과 잘 융화되어 가볍게 날 수 있는 것도 그 방구멍이 바람의 길을 내주기 때문입니다.”연 한가운데 자리 잡은 방구멍이 바람에게 길을 내주며 맞바람의 저항을 줄이기 때문에 강풍에서도 연이 상하지 않고 유연하게 날 수 있다던가. 유선형으로 휘어진 머릿살과 바람이 잘 타는 한지, 댓살의 탄성이 바람의 강약을 조절해서 연을 자유롭게 날도록 해준다며, 명인은 방패연이 매우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연놀이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전해온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이다. 고려시대 백운거사 이규보의 한시에 ‘유월의 염천에는 연을 보기 어렵더니/가을에 접어든 지 사흘 만에 쌀쌀해졌네/이웃 아이들 모여서 부산하게 떠들며/좋아라 하늘 높이 지연을 날리네.’ 연놀이는 군사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는데, 이순신 장군이 섬과 육지를 잇는 통신 수단으로 비연을 이용했다고 한다. 장군이 들쭉바지기연을 날리면 군수품 조달을 뜻하고, 까만 외당가리연을 날리면 새벽 공격명령을 알리고, 삼봉산의 문양이 있는 연을 날리면 삼봉산에 집결하라는 명령이라고 한다. 통영은 물론이고 연날리기 고수들이 그 방법을 많이 응용한다고 전한다.“연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일까요?”“연에 실은 꿈과 희망을 하늘 높이 띄워서 자연에게 물어보는 것이죠.”그러면서 명인은 “날아라 훨훨, 하늘 높이 훨훨 날아라, 연실에 매달려 양귀 휘날리며 날으는 방패연아~” 하고 동심 어린 노래를 불렀다. 직접 작시를 했기 때문에 저작권료도 나온다고 슬쩍 자랑을 한다.연은 일 년의 무사고를 비는 액막이나 풍요의 기원과 복을 불러들이는 기복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 명인의 저서 ‘한국전통 지연(紙鳶)’에 의하면, 액막이연의 유래가 특히 재미있다.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연놀이를 하다 열나흗날 밤에 액막이연을 띄우는데, 연에 ‘액(厄)’자를 쓰거나 주소와 성명, 생년월일, 혹은 송액의 한시를 쓰기도 하고, 동전이나 솜뭉치를 매달아서 불을 붙여 띄우는 것으로 나쁜 액을 날려 보내며 한해의 풍요를 빌었다. 이는 달집태우기와 같은 맥락이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외세의 침입에 시달리면서도 연놀이 같은 민속놀이로 복을 빌 줄 아는 낭만을 간직하고 있었다.“대구는 연놀이 행사를 어디서 합니까?”“금호강변으로 가야죠. 대구는 연 날릴 곳이 없으니.”황의습 명인은 대구가 분지이고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여 있어서 연 날릴 곳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연 날리기 세계대회를 들판이 넓은 의성에서 치른다고. 연간 300-400개의 연을 만들어 학교 교육을 통하여 전통지연의 유래를 알리는 것과 동시에 각종 연 날리기 행사 시연과 전시회 등, 다양한 활동으로 지연 전승자들을 배출한다.“연을 만들며 어떤 기원을 담으시는지 궁금합니다.”“연 날리기를 통해서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의 얼을 되살리고 계승 발전시켜서, 후세대대로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습니다.”자라나는 세대들이 우리의 전통지연에 관심을 갖고 호연지기를 키웠으면 하는 마음을 방패연에 담아서 하늘 높이 띄우는 명인에게는 연 날리기만큼 열심히 해온 일이 또 있다. 그게 바로 교도소 교정교화 활동이다. 명인은 연을 만드는 장인임과 동시에 재소자와 출소자들의 교화와 봉사에 힘쓰는 법무부 교정 자문위원장이고, 대구가톨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산학협력 교수이기도 하다. 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 회장으로 자원봉사를 했다. 연과 쉽게 연결되지 않는 교도소라는 공간성이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거기서 어떤 일을 하세요?”“법무부 교정위원, 교정자문위원, 징벌위원, 교정옴부즈만 활동을 했어요. 재소자들과 상담도 하고, 정신교육도 하고 대구, 경주, 청송 안동교도소 등, 재소자들이 필수적으로 받게 되어 있는 교육 과정에서 강의도 하고, 수용자를 위한 문화공연을 합니다.”교도소로 친구 면허를 갔다가 우연히 시작한 일이 무려 30여 년간 일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전통지연 명인이 되면서 촉박한 시간 때문에 교도소 활동을 줄이고 ‘보은의 집’만 운영하고 있다. 무연고 출소자들이 머물 수 있는 ‘보은의 집’은 형량을 마치고 사회에 나온 이들을 잠시 머물게 해주는 곳이다. 단순하고 순수해서 사회성이 더 어두웠던 그들이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취업을 알선하고, 정신교육도 한다던가. 대학에서 교정학을 전공했고 재소자들을 위한 봉사가 본업이었던 명인의 삶이, 전승자들과 아이들에게 연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연을 만난 게 언제였어요?”“1981년입니다.”일본인이 쓴 책을 읽고 연을 만났다. 세계적인 석학인 그 작가는 21세기가 오면 그 나라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서 성장해야만 국제경쟁력이 생긴다며 한국을 문화적인 은혜의 나라이고, 스승의 나라라고 표현했더란다. 그 말에 감화를 받아서 명인은 연을 만들게 되었다. 명인은 오방색을 갖춘 호랑나비와 우주로 음양의 조화를 이룬 연을 만들어서 한국예술문화 전통지연 1호의 명인으로 인정받았다.“연을 하나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열흘에서 보름쯤.”한지를 먼저 다듬질해서 연을 만들어 그림을 그리는데, 수십 번 반복해서 색칠을 한 후에야 연이 완성된다. 형태적 분류에 따라 호랑나비 태극방패연과 송액영복 가오리연, 호랑나비 줄연과 같은 창작연이 있고, 문양적 분류에 따라 꼭지연과 반달연, 치마연, 동이연, 초연, 박이연, 발연, 방패연이 있다. 연 날리기 대회에서는 줄연을 많이 날린다. 조선 후기 학자인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연싸움을 위해 비단실과 무명실로 만든 연줄에 돌가루와 구리가루로 가미를 먹였다는 기록이 있다.문방구에서 산 가오리연에 공책이나 만화책을 오려서 꼬리를 잇던 날이 있었다. 연을 높이 들고 뛰어간다. 꼬리가 길어서 날아오르지 못하나 해서 꼬리를 떼어버린다. 그러자 연이 기다렸다는 듯 사뿐 떠오른다. 연은 풍속 5m의 바람만 있어도 날아오른다고 한다. 연이 그렇게 가벼운 바람으로도 높이 날 수 있는 것은 제 몸이 그만큼 가볍기 때문일 것이다. 연이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제 몸을 가벼이 하라는 말없는 가르침일지도 모른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2-02

“유도와 기업, 당연히 유도가 먼저죠”

예전에 내가 살던 반고개에는 통근차가 많았다. 반고개는 성서로 가는 길목이고, 성서에는 섬유공장이 많았다. 아침마다 동네의 언니 오빠들이 도시락 가방을 들고 구두소리 또각또각 울리며 섬유공장으로 출근했다. 요란하게 구두소리 울리는 언니 오빠들의 싱그러운 젊음으로 골목이 온통 수다스럽고 생기가 펄펄 넘쳤다. 한 사람이 뛰면 덩달아서 너도나도 뛰기 시작하는데, 구두 뒤축소리가 골목 가득 울려 퍼졌다. 숨을 헐떡이며 반고개에 이르면 통근차가 줄 지어 서 있었다. 식구들이 문 밖까지 나와서‘잘 갔다 온나~’하고 배웅하던 아침 풍경이 정겨웠다. 아이도, 노인도, 출근하는 청년도 많을 때였다. 1970년대 80년대의 골목 풍경이다.그저께 만난‘기풍섬유’와 김진도 회장님이 그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섬유공장 마당에 발을 딛는 순간, 또각거리며 골목을 울리던 구두소리가 들렸다. 아침마다 직물공장으로 출근한 형제가 있었다. 예전에는 2교대였는데 지금은 4교대라는 회장님의 말씀을 들으며 밤일하고 와서 해가 기울도록 고단한 잠에 빠져 있던 형제를 생각했다. 시간은, 너나없이 궁핍했던 그 서글픈 추억조차 애틋한 그리움으로 돌아보게 한다. 배운 사람보다 못 배운 사람들이 더 많았고, 직물공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도 많았고, 집 가진 사람보다 셋방에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때였다. 누구나 가난했던 시대의 중심에 섬유산업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기업인과 유도인, 두 가지의 막강한 레벨을 보유하고 있는 김진도 회장님을 진량공단에서 만났다. 기풍섬유를 창업한 것이 1977년이었으니, 무려 45년 동안 꿋꿋하게 한 길을 걸어오신 셈이다. 기업을 인수하자마자 쓰나미처럼 들이닥친 2차 에너지 파동으로 지게꾼과 막일꾼들이 부러울 정도로 심각한 경영난을 겪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쌓은 실전경험이 있다고 하나, 섬유시장의 동향을 읽는 사회적 안목이 어두워서 하청이 중단되고 자금 압박을 받는 심각한 상황에 몰렸다고.“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어요?”“경영학 공부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걸 깨닫고 용인대학교 경영학 박사 과정에 등록했어요. 배우지 않고는 알 수 없으니까요.”회장님은 올바른 기업운영을 위하여 용인대학교 경영학 박사 과정에 등록하고 ‘기업의 조직문화가 조직 유효성과 노사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졸업했다. 자승자강(自勝者强)이라던가.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역사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던 과도기여서 어려움이 무시로 들이닥쳤지만 회장님은 문(文)과 무(武)를 겸비하는 것으로 위기를 이겨냈다. 에너지 파동, 10. 26 사태, 5.16 민주화 운동 등, 굵직굵직한 사건으로 사회가 지진을 만난 듯 통째로 흔들렸고 경제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던 섬유산업조차 맥없이 휘청거렸다. 회장님은 위기에 봉착한 사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워터제트와 에어제트 같은 최신형 직기를 도입하는 과감한 설비투자로 맞섰다.기적 같은 회생 능력을 발휘한 덕분에 생산성을 높이고 고용을 창출하는 놀라운 효과로 기업의 발전은 물론이고, 산업에 종사한 근로자들의 정신적 경제적 안정과 국가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회장님은 기업을 살리고 흑자를 끌어올린 공로를 인정받아서 제 24회 섬유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 밖에도 1977년 수출의 날에 ‘2000만 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고, 2003년 납세의 날에 재정경제부 장관 표창까지 받는 기염을 토했다.“참된 기업인의 길을 걸어오신 삶의 역사가 45년인데도 회장님을 검색하면 유도인이 더 부각됩니다. 유도와 기업 중 어느 쪽이 먼저였어요?”“당연히 유도가 먼저죠. 허허허!”유도와 기업이 모두 회장님에게 천직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기업은 삶의 터전을 닦는 발판이어서 죽을 때까지 함께 가야 할 일이고, 유도는 온 마음을 기울여 맡은바 책임을 다 해야 하는 일이었다고 명확하게 구분한다. 더구나 이제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할 시점이라며 세월의 무상함을 솔직히 인정했다. 젊은 시절에 회장님은 미국으로 가는 것이 꿈이었다. 미국의 프로모션 모자회사에 고종형이 있어서 미국으로 가려고 했는데 ‘섬유를 사랑하는 모임’의 초대회장이신 이지철 텍스밀 회장님의 부탁으로 3년 동안 공장장이 되었다. 77년 3월에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서 독립하며 본격적으로 섬유산업에 뛰어들었다. 섬유산업의 위기를 탈피하려고 기계업에도 뛰어들었지만 직접 설계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분야인 것을 깨닫고 일찌감치 정리했다. 지금은 주식회사 기풍산업과 기풍섬유 두 곳만 운영하고 있다.45년간 외길을 걸어온 기업인이어서 줄곧 사업만 하고 산 것 같지만, 놀랍게도 회장님은 용인대학교 유도학을 전공한 공인 유도 9단의 입신이다. 입신이란 지혜나 기예 등이 뛰어나 신묘한 경지에 들어감을 이르는 말이다. 9단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긴 세월 오랜 단련의 과정을 필요로 함은 물론이고, 단순한 기예만 닦는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실력으로 인정받아야만 입신이 가능하다. 그에게는 기업 외에도 유도가 삶의 근간이었다.“결코 쉽지 않은 두 길을 걸어오셨는데, 어떤 각오로 살아오셨어요?”“그저 묵묵히 저만의 방식으로 살아왔을 뿐입니다.”회장님은 어려운 시절에 망설이지 않고 최첨단 기계를 도입해서 질 좋은 제품 생산 능력을 키움과 동시에 국제적인 경쟁력과 튼튼한 자본 능력으로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 세웠다. 그와 동시에 고단자다운 책임감으로 우리나라 유도의 경쟁력을 키우는데 앞장섰다. 미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유도를 전공한 꿈나무가 대한유도회의 수석부회장이 되어 전국의 세계대회란 대회를 빠짐없이 다녔는가 하면 부회장 18년, 직무대행 두 번, 36대 37대 대한유도회 회장으로 봉사를 하고 이제 명예회장으로 넘어갈 시점에 있다. 그 동안 유도선수들과 함께 세계대회를 누비며 유도 활성화에 힘쓴 이력이 화려하고 충실하다. 그에게 유도는 기업인으로 살아온 유구한 세월만큼이나 창대해서 삶의 역사와 맞먹는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쯤 되면 고향 영덕에서도 자랑스러운 영덕인으로 칭송을 받을 것 같다.“고향 후배들 중에도 유도를 하는 사람이 여러 명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얘기 좀 해주세요.”“대한민국 유도회에 입문하고 보니 저절로 고향 후배들을 만나게 되더군요.” 지도자의 자리는 스포츠 정신처럼 공명정대해야 하는 것이어서 고향 까마귀가 아무리 좋아도 실력이 안 되면 키워주고 싶어도 키워줄 수가 없다고 한다. 지도자는 어떠한 순간에도 편협해서 안 된다는 철칙을 부러지게 지켜왔다고 자신한다. 그런 와중에 고향 후배 권용달과 최창석, 조수희 같은 몇몇 후배는 당당하게 제 실력으로 등극해서 인정받았다. 후배 조수희는 아시안게임 여자 유도 국가회장으로 나가서 금메달을 땄고, 지금은 국제심판 국가회장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계명대학교 감독이었던 권용달은 유니버시아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국제심판 BA를 받았고, 대학연맹에서 심판 위원장과 부회장을 지냈고, 또 다른 후배인 최창석은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대한유도회 감독도 하고, 선수보호 위원장과 중고교 연맹 부회장을 했다고 몹시 자랑스러워한다. 이제 그 후배들도 나이가 들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회장님과 연결된 소중한 인맥이고 자원이다. 유도인으로서 고향에 유도를 보급하자는 정통영 선생의 취지 아래 유도인 양성에 힘을 쓴 결과였다.대한유도회에 몸담고 있는 동안 회장님은 일 년에 전국대회가 25번, 세계대회까지 35번이나 되는 그 많은 대회를 빠짐없이 다녔다. 외국으로 나가면 일주일이나 열흘쯤, 지방으로 가도 사나흘이 걸리는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회장을 맡고 있는 동안 유니버시아대회에서 금메달 8개를 땄고, 아시안게임 때에 금메달 6개, 브라질올림픽 결승에서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를 땄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36대 37대 두 번의 회장을 지내는 동안 유니버시아드, 아시안게임, 브라질올림픽의 그랜드슬램을 이루었는데, 동경올림픽을 치르지 못한 것과 올림픽에 심판을 한 명도 올리지 못한 것을 몹시 아쉬워한다. 두툼한 양장표지의 ‘유도백년사’를 내놓으며 회장님은 자랑할 거라곤 이것 하나뿐이라고 겸손해하신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도 100년사’이고, 우리나라 유도의 역사가 알알이 담긴 책의 가치 앞에 저절로 숙연해졌다. 책은 단순한 기록의 차원을 넘어 후세대대로 전해질 보물이어서 그 가치를 더한다. ‘유도백년사’를 출간한 것으로 회장님의 유도 역사는 완벽하게 마무리 된 듯하다. 할 일을 다 하고 뒤로 물러앉는 사람에게 우리는 아름답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어떤 분야에서 ‘자리’의 가치는 이렇듯 참된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일을 하라고 주어지는 것임을 회장님은 말을 아끼는 신중함으로 대신한다.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1-26

삶의 언어에서, 언어의삶으로

시조시인이신 문무학 선생님을 만났다. 가끔 출판사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독대는 처음이었다. 시인은 책이 가득 담긴 종이가방을 주었다. 그 중 반려도서 시리즈 두 권에 사인을 받았다. 시인은 반려도서 두 권을 마음에 담고 있던 사람 40명에게 보냈다고 했다. 시인의 마음에 담긴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누군가의 마음에 담긴 사람이 되는 것도,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쩌면 삶의 최종목적일지도 모르는데 더러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잊고 산다. 마음을 잊으면 일상의 모든 과정이 단순한 습관으로 굳어지고 마는데. 책을 내는 건 오랜 고군분투 끝의 결실이어서 책을 나누어주는 일에도 마음을 담는 게 지극히 당연한데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단어인 듯 ‘마음’이 낯설다.시인이 문예지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 1981년이니, 시조시인으로 글밥을 드신 지 40년이다. 글이 불혹을 넘기면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글의 사회적 기능도 제 길을 찾아가는지 궁금해진 건 선생님이 그 동안 출간하신 작품집의 제목이 범상치 않은 탓이 크다. ‘낱말’ ‘홑’ ‘가나다라마바사’ 등의 작품집이 모두 한글 자모를 바탕으로 한 시집이다. 색다른 작품의 소재에 일관된 실용주의의 시작이 어디일까? 우리가 날마다 읽고 쓰는 ‘한글’을 주축으로 한 글쓰기 방식의 근저를 물어본다.“국어사전 같은 시를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내 평생 한글 하나로 먹고 살았어요. 오로지 한글 하나로 교사도 했고, 신문기자도 했고, 시도 썼어요.”사람들이 시를 어려워하더란다. 시를 읽지 않는 이유를 물으면 어렵고 재미없다는 이유가 가장 많더라고. 시인은 시를 재미있게 쓰고 싶어서 한글을 선택했고, 그것이 한글 사랑의 시작이었다. 자칫 몽상적이기 쉬운 ‘시’라는 장르를 실용주의적인 글쓰기를 통해서 독자 사이의 간극을 지우려 한 것이 한글 자모 시집이 나오게 된 동기라고 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토니 모리슨의 말을 예로 들며 ‘정말로 내가 읽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아직 쓰이지 않았다면 읽고 싶은 사람이 그것을 써야 한다’는 말에 용기를 얻어서 지금껏 없었던 한글 자모 시로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시인은 한글의 품사와 문장부호를 시로 썼다. 한글 자모가 시로 환치되는 과정을 살필 겸 시를 한 편 읽어본다.‘물음표는 사람의 귀 귀를 닮아 있다 / 물어놓고 들으려면 귀 있어야 된다는 듯 / 보이지 않는 쪽으로 / 열려 있다…’이렇듯 시인은 누구도 생각지 않은 소재로 시를 썼다. ‘낱말’ 시집이 시인에게 큰 보람을 안겨주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 자습서 등에 시 열두 편이 실려 있다며 저작권료를 받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고 털어놓으신다. 남다른 것을 써서 작품화시켰다는 점에서 시인의 글쓰기는 매우 독창적이다. 시를 시 같지 않게, 문법에 접근하기 쉽게, 이해하기 쉽게, 흥미까지 부추기고 있으니 시인의 바람대로 새로움에 더한 즐거운 시 쓰기는 성공적이다. 시인만의 말맛이 담긴 시 중에서 ‘낱말 새로 읽기 ? 13’ -바다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는 시를 읽어본다.‘바다’가 ‘바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받아’주기 때문이다. / ‘괜찮다’ / 그 말 한 마디로 / 어머닌 바다가 되었다시인은 근래에 발표한 문예지의 자서에 ‘삶의 언어에서, 언어의 삶으로’라는 제목을 붙였다. 삶에 근저를 둔 글쓰기. 한글에 대한 사랑 없이는 결코 이뤄낼 수 없는 글쓰기. 시인은 시를 ‘삶의 문자적 표현’이라고 표현했다. 독특한 언어배열 방식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낸 서술법이, ‘차이’를 바탕으로 한 구조주의 철학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닌지 시인의 심연을 슬쩍 짚어본다.“독서아카데미를 하고 계신 걸로 아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인지 들려주세요.”“그 마저도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 활동만 하고 있어요.”세상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해보니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글쓰기와 책읽기였다. 한글이 시인을 먹여 살렸기 때문에, 한글을 빚내고 보존하고 정화시키는 일에 기여하는 것으로 미약하나마 사회에 환원하고 싶었다. 대구문협 회장, 대구예총 회장, 대구문화재단 대표 역임 등, 여러 직위를 거쳐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하던 시인이 사회적 독서권장의 일환으로 KBS에서 책 소개를 8년이나 했고, 일간지에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고시조 연재도 했다. 그렇듯 책을 읽으라고만 했지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우리나라 독서의 폐단을 깨달은 시인이 늘그막에 애정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독서아카데미였다. 사람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 싶었다. 책도 읽지 않으면서 노벨상을 바라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야 한다고.그러면서 시인은 독서를 완성하는데 다섯 단계가 있다며 구체적인 예를 들었다. 많이 읽는 건 휘발성 독서에 불과하기 때문에 남는 독서를 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는 책을 천천히 읽는 것이다. 둘째는 읽은 책에 대해 토론을 해야 한다. 토론을 하면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 된다. 셋째, 읽고 토론한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걸으면서 생각을 하면 좋다. 넷째, 자기 생각을 글로 쓴다. 글로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째, 읽은 책의 내용이나 얻은 지식을 활용하고 실천해야 한다. 단순히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독서의 완성 단계이다. 내가 없는 삶이 너무 많다. 책 읽기는 ‘내가 있는 삶을 위한‘ 첫걸음이다. 인터넷 카페를 통해서 독서토론을 하고, 90여 명의 회원들이 온라인으로 토론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 독서아카데미의 존재 이유이다.김형석 교수의 에세이집 서문에서 뼈를 치는 한 마디를 읽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50대 이상의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라는 문장이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간이 많아지는데 남아도는 시간을 가치 있게 쓰는 방법이 바로 책을 읽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애국하는 길인 것을. 함께 책을 읽는 모임인 학이사 독서아카데미에서 서평집을 6권이나 발행했고, 서평쓰기 공모전을 개최하여 매년 독서 인구를 늘여가고 있다. 이런 일로 2020 대구 수성 한국지역도서전 조직위원장을 맡게 되었고, 주위의 사람들이 책을 읽는데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문득 대구문화재단 대표 시절에 시인이 펼친 ‘청바지론’이 생각난다.“청바지론이라는 낯선 말을 들었는데, 설명 좀 해주세요.”“대구문화재단 대표로 취임하면서 ‘대구문화에 청바지를 입히자’는 슬로건을 걸었는데 그 의도는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내닫자는 것입니다.”청바지는 젊은이들의 표현수단이고 청년문화의 상징이다. 새로운 생각의 모색과 땀으로 연결된 노동, 저항의식, 자유로움, 성별을 가리지 않는 유니섹스를 상징하며, 청바지는 인간을 달리게 하는 열정이기도 하다. 열정을 바탕으로 할 때 사회는 깨어나고 새로워질 수 있다. 넓은 세상을 향해 거침없는 발길을 내딛을 때 비로소 자유로움을 쟁취할 수 있고, 그 열정의 주체인 청바지는 하나의 상징이 된다. 시인은 지역의 출판문화가 살아나서 활기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지역을 기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대한민국 헌법 제 3조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온통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출판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에서만 책이 나오는 것이 아닌데 지역에서 나오는 책은 무시된다는 시인의 분개 어린 말을 들으며, 그의 실험적인 시 ‘중장을 쓰지 못한 시조 반도는’을 읽어 본다.‘내쳐서 삼천리를 다 못 가고 마는 땅 / ????/가다가 뚝 끊긴 길 끝에 이념만이 선명한’ 중장을 없애는 것으로 시인은 분단된 한반도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코로나를 맞고 보니까 참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 한다. 거리두기만 잘 해도 사회에 기여한다고 여겼는데, 어떤 이는 다른 사람을 찾아다니며 기쁨을 주려 애쓰고, 또 어떤 이는 마스크를 보내기도 하는데, 시인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나쁜 삶을 살고 있더란다.“나쁜 삶이 어떤 거예요?”“나뿐인 삶이 나쁜 삶이죠.”위기 속에서 위인이 나타난다며, 시인이 의문을 던진다. ‘내가 보낸 오늘은 산 것인가 사라진 것인가’ 한낱 기호였던 낱말이 시어가 되고 삶이 되다 마침내 상징이 되기도 하는, 시인의 유희 같기도 한 언어놀이는 지금도 계속된다. ‘예술은 즐기는 것이다.’ 시인의 마지막 말이 여운을 남긴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