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시간이 스승… 대구 교육계를 이끌어 온 팔순의 대모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의외로 소박한 경우가 많다. 일정 궤도에 올라서면 그들은 궤도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순응하며 달려간다. 그러다 보니 더이상 자신을 포장해야 할 일도, 일부러 드러내야 할 일도 줄어든다.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간은 인정 투쟁을 하며 살아간다고 설파했다.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는 말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서 인간의 삶은 바로 이 인정 투쟁의 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종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이 인정 투쟁의 장에서 이탈하여 고유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대구의 랜드마크로 발돋움한 수성못가의 수성호텔에서 흔히들 대구의 대모라고-250만 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구에서 특정인을 대모라고 불러도 되는지의 문제는 제쳐두고- 불리는 문신자 이사장을 만나 지금까지의 삶 중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물어보았더니 초등학교 교장을 하던 때였다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팔순이 넘었지만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 문 이사장은 오래전에 그만두었을 초등학교 교장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기운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초등학교 교장 할 때가 가장 보람 있었지요. 그때는 아직 우리나라가 그렇게 잘 살지 못할 때였고, 부모들이 먹고살기 바빠서 지금처럼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할 때였어요. 나는 아이들에게 인사 하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그들의 생활을 바꿔 보고자 했어요. 자신이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인사말로 하라고 했어요. 예를 들어 숙제를 잘해 오지 않는 아이는 선생님을 만나면 ‘숙제를 잘해 오는 OOO가 되겠습니다.’라는 식이었죠. 처음에는 아이들이 쑥스러워 했지만 그 인사말로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숙제를 안 해오던 아이는 그 인사말을 늘 하다 보니 숙제를 해오게 되는 식이었죠.”아이들이 그렇게 인사를 하면 문 이사장은 칠성시장에서 사 온 사탕을 나눠 주었는데 그 사탕을 받기 위해 아이들이 운동장까지 줄을 섰다고 한다. “나는 효자가 되겠습니다. 나는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겠습니다. 나는 밥을 잘 먹겠습니다”라는 인사말들은 사소하면서도 파급력이 컸다고 했다.아이들의 부족한 부분을 인사말로 하도록 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소리에는 생명이 있어서 상대의 가슴에 남는다. 그러므로 소리를 낼 때는 잘 생각해서 내야 하는데 그렇게 반복적으로 소리를 내는 인사를 하다 보면 그 말의 생명이 아이를 바꾼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집념은 기적을 낳고 노력은 천재를 만든다고 문 이사장은 믿고 있는데 특히 초등학교 때는 가르치는 대로 행동이 바뀌는 것이 눈에 보여서 보람이 있었다고 했다.“인사말을 통해 아이들의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도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뀝니다.”그리고 아이들에게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토론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토론문화가 부족한데 당시에는 너무나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토론 교육을 시키면서 토론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문 이사장은 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교직에서 은퇴하고 가톨릭대학에서 미래지식포럼이라는 사회교육원을 개설해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대구의 정·재계, 행정인, 법조인들이 등록했는데 그들 각자는 자기 분야의 리더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일괄적인 관리가 어려웠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육계에 있었던 경험을 살려 그들의 개성과 분야를 존중하면서 포럼을 성공적으로 끌고 갔다. 미래지식포럼이 성공적으로 운영되면서 경북과학대 사회교육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문 이사장은 거기서 미래지식포럼과 비슷한 최고지도자과정을 운영했다. 미래지식포럼과 경북과학대 사회교육원은 지역 리더들의 사교모임 장이 되었다.문 이사장은 그렇게 초등학교 교장에서 대학의 사회교육원 원장으로 생활을 바꾸면서 사회에서 맡는 직책도 늘어갔다. 힘든 일이었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회를 위한 봉사라는 마음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서서히 삶을 정리해 가는 나이를 살고 있는 문 이사장에게 요즘의 관심사에 대해 물어 보았다.“남의 말 좋게 하기입니다. 손가락으로 남을 가리켜 보세요. 손가락 하나가 남을 향하면 셋이 나를 향합니다. 남의 흉이 하나면 내 흉이 셋이라는 뜻이지요. 말은 산울림과 같은 것입니다. 말이 총칼보다 무서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선을 베풀면 선이 오고 악을 행하면 악이 오는 법입니다. 말도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인데 바른말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 합니다. 바른말이 남에게 상처 주는 경우도 많거든요. 남을 흉보는 사람이 있으면 껌을 씹더라도 남을 씹지 말라고 합니다.”‘봉사가 개천 나무란다’고 남의 탓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책임감이 높은 사람은 남 탓보다 내 탓을 더 한다고 했다. 가톨릭 기도문 중에 ‘내 탓이로소이다. 내 탓이로소이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어떤 일이 닥쳐도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남을 탓할 일이 줄어들고 흉을 볼 일도 줄어든다는 것이다.현재 한류문화인진흥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문 이사장은 문화예술인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촉발된 경제효과는 엄청났다. 문화예술이 문화예술의 영역에서만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상승시키면서 경제적인 영역에까지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한류 문화 스타가 대를 이어 가기 위해서는 어린 문화예술인들의 성장을 지원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현실상 그렇지는 못하다. 개인적으로 성공하면 나라가 그 덕을 보는 셈이다. 재능과 끼는 타고 났지만 어려운 환경 때문에 그 재능과 끼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차세대 아이들이 너무나 많다. 대중문화, 예술 체육 등 차세대를 이끌어갈 꿈나무들을 지원하는 것이 이 재단의 사업인데 문 이사장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재단을 이끌고 있다. 초등학교 교육의 현장에서는 벗어났지만 지금도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지원하는 일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그와 더불어 한국·우즈베키스탄과의 문화교류 및 경제지원사업을 14년째 계속하고 있다. 대구시는 35개국과 교류를 위한 국제교류협회를 조직하고 있는데 문 이사장은 그중에서 우즈베키스탄과의 국제교류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르네상스 이후 인류는 휴머니즘의 시대로 들어섰지만 진정한 휴머니즘 시대가 도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1세기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때 그 기술을 이용하는 사람의 인간관계 기술까지 기계적인 환경을 인간 환경에 맞게 제작하는 시대다. 기계가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게 당연한 시대인데 그럴수록 휴머니즘이 강조되어야 한다. 인간관계까지 기계적으로 변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산다. 2차 세계대전과 6·25를 겪은 문 이사장은 급변하는 시대 상황을 지나면서 그래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휴머니즘이라고 강조했다. 휴머니즘은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정신이고 그러자면 먼저 말부터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타인과의 관계의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니 진정한 배려는 타인을 배려하는 말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살아보니 시간이 스승입디다. 어제의 시간이 내일의 스승이더라고요.”팔십 년을 넘게 살아온 문 이사장에게서는 여전히 강한 삶의 의욕이 보였다. 어제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문 이사장에게 내일은 또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수많은 사회단체장을 하면서 봉사를 해오고 사회의 리더 역할을 해 온 문 이사장은 여전히 강인하고 삶의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글 천영애

2020-08-12

대구의 사랑채를 짓는 사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건설회사라니 어수선하고 다소 거칠거라고 예상했던 사무실은 마치 학교의 연구실에 간 듯 했다. 테이블 위에 가득 쌓인 서류들과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는 다기(茶器)들이 묘하게 어울려 상상의 사무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풀비체라는 로고가 여기저기 보이고 건설 중인 건물의 조감도가 벽에 붙어 있는 사무실에서 장세철 회장은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무실이 마치 연구실 같다는 내 말에 장 회장이 웃었다.“나는 공부하는 걸 좋아해요. 대학원에서 도시재생을 공부했는데 아마 지역에서는 이 분야의 박사 1호일 걸요. 아, 그건 쓰지 마세요. 혹시나 틀릴 수도 있으니까.”몇 호라는 그 순서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의 그런 자부심이 보기에 좋았다. 장 회장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술을 마시면 저녁 시간이 그대로 낭비되는데 그 시간에 집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부단히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도 술을 마시기 않고 버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도시재생이라는 건 도시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명이 다한 도시를 재생하는 분야죠. 흔히 건설회사라면 산을 깎고 들판을 밀어서 건물을 지으면서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가는 것만 생각하는데 이미 있는 도시를 재생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도시가 많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도시재생도 건설회사에서는 중요한 사업 분야거든요.”‘배움과 도전 그리고 나눔’이 고려건설의 슬로건이라고 했다. 배움이 없는 회사는 전문성을 갖추지 못하고 도전이 없으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며, 나눔이 없으면 이익만 추구하는 수준 낮은 회사밖에 되지 못하니 회사의 이런 슬로건은 ‘기부왕’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장 회장에게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고려건설에는 ‘모티’라는 IT디자인 연구소가 있다. ‘모티’라는 것은 모퉁이라는 의미의 경상도 사투리로 중심이 아닌 모퉁이에서 새롭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이름을 선택했다고 했다. 건설회사에서 연구소라는 것도 이색적이었지만 IT연구소라는 것은 더 이색적이었다.내가 인문학을 공부한 작가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장 회장은 IT에 대한 설명부터 이어갔다.“IT라는건 ICT와 IOT를 합쳐서 부르는 말입니다. 정보통신기술인 ICT는 우리나라에서 150년 역사를 가진 KT가 담당하고 있고, IOT는 사물인터넷을 말하죠.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 회사 연구소는 사물인터넷 연구소입니다.”사물인터넷에 관심을 보이자 장 회장은 오히려 작가가 그런 것에 흥미를 가지는 것이 더 신기하다고 말했다. 작가는 세상의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데 어찌 사물인터넷에 관심이 없겠는가. 이미 아파트에 일부 도입되어 있는 사물인터넷을 우리 집에서는 강아지가 가장 잘 활용한다. 인터폰으로 차 들어오는 신호가 오면 쪼르르 현관으로 달려가 사람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데 들어오는 사람은 이미 준비된 강아지의 환대를 받는 것이다. 나는 그 신호를 받고 밥상을 차리고 어떨 때는 엘리베이터를 지하로 내려보내 준다.“지금은 차가 들어오면 엘리베이터가 감지해서 차가 멈추는 층에 먼저 내려가 있는 수준입니다.”지금 사물인터넷의 수준이 어디까지 도달해 있느냐의 질문에 장 회장은 흥미로운 대답을 내놓았다. “로봇이 사람과 대화할 때 사람이 말하지 않는 감정도 읽어서 대화가 가능하죠. 아이가 혼자 있을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겁니다.”입력된 것만 출력이 가능한 기계가 입력되지 않은 것을 유추해서 출력할 수 있다면 이미 고전적인 의미의 기계를 넘어선 것이다. 추론능력을 갖추었으니 기계와 인공지능의 결합이 주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고려건설이 짓고 있다는 풀비체의 사물인터넷의 수준이 궁금했다. IT 디자인 연구소를 가지고 있는 지역의 건설회사라니 얼마나 흥미로운가. 잠깐이었지만 최고 수준의 사물인터넷이 구현되어 있을 풀비체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풀비체의 의미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새벽이슬에 비치는 햇살의 영롱한 반짝임 같은 것입니다.”그는 그렇게 사회에서 풀비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일체유심조’라는 좌우명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강한 의지와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샤프하면서 예의 바른 그는 스스로 사차원적이고 돈키호테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런 기질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끝없이 도전하는 지금의 회사를 일구어 냈을 것이다.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는 그의 말을 시작으로 봉사에 대한 말이 이어졌다.“예전에는 집에 사랑채가 있었잖아요.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죠. 집 주인은 거기에 머무는 손님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손님들을 통해 자신의 일을 구상하고 살림을 불려 나갈 수 있었죠.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찾아내기도 하고, 또 사랑채에 몰려드는 예술인들을 후원하기도 했어요.”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풀비체 문화대학을 5년째 운영하고 있다는 그는 인생의 마지막 계획을 털어놓았다.“대구와 경기도에 헬스케어센터를 건설하고 싶어요. 자급자족이 가능한 고품격 실버타운이죠. 역모기지로 운영할 계획입니다. 그래야 노년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죠.”장 회장은 사회사업가이면서 기업가이고 싶어했다. 스스로를 ‘투잡 인생’이라고 표현하는 그는 사람들은 운이 좋아 사업을 이렇게 일구어 가는 줄 알지만 운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부단한 노력의 대가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노력 없이는 운이 다가와도 잡을 수가 없다.수많은 단체의 대표를 맡고 끝없이 기부를 하는 그에게 기부란 어떤 의미인지를 물어보았다.“기부를 많이 하면 회사의 이미지도 좋아지고, 또 지역과 친해지는 묘약이기도 하죠. 앞산에는 12개의 등산코스가 있는데 시간이 나면 매주 그 길을 오르내립니다. 올라갈 때는 지난 한 주의 일을 반성하고 내려올 때는 다가올 한 주의 일을 계획하죠. 스님들이 포행(布行)하듯이 천천히 그 길을 걸으면 머리가 맑아지면서 해야 할 일들이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오너가 좀 더 부지런하고 전문적으로 직접 일을 챙기면 더 많은 이익을 실현할 수 있죠. 전 그런 이익을 기부하는데 쓰려고 합니다.”장 회장이 기부하는 곳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수많은 사회단체의 대표 자리는 곧 기부를 하는 단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대학교에 장학금을 주거나 풀비체 문화대학 등에 많은 기부를 한다. 최근에 맡은 한국생활예총은 특히 운영이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예술인들은 개성이 강해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어렵지만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기도 하다.장 회장은 스스로가 대구의 사랑채 역할을 하고 싶어 했다. 자신의 사랑채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고 그 아이디어를 통해 기업을 운영하면서 이익을 실현하고, 그 이익을 다시 사회로 환원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인드다.끝없이 연구하고 도전하는 기업인인 그는 뜻밖에도 스리랑카 왕립대학으로부터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비록 명예이긴 하지만 건설회사 회장의 철학박사 학위는 다소 뜬금없었다.“이래 보여도 제가 사색과 명상을 엄청 좋아합니다. 기업 운영에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데 유연한 사고를 하려면 여유가 필요하죠. 쉼이 있어야 도전도 있습니다. 쉬지 않고 가다보면 직진만 하게 됩니다. 돌아가는 길에서 많은 걸 얻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돌아가는 길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죠. 전 돌아가기를 즐깁니다. 그래서 동화사 신도회장도 맡았는지 몰라요. 절에 가면 여유가 생기고 많은 걸 얻어오죠.”소문으로 듣던 장 회장은 기업운영과 기부의 대명사였지만 막상 만나본 그는 공부하는 기업인이고 나눔의 미학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처럼 고려건설이 대구의 대표적인 건설회사였던 청구와 우방의 맥을 잇기를 기대한다./글 천영애

2020-08-05

도전적이고 개척적인 정신과 열린 마음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는다

덕산코트랜 강환수 대표에 주목한 이유는 한 장의 그림 때문이었다. 그림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사장님요, 부족한 아들을 거둬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림의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덕산코트랜을 방문한 날은 오랜 장마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위로 열어놓은 창문에는 빗소리가 요란했고, 인상 좋게 생긴 강 대표와의 인터뷰는 참으로 힘들게 이어졌다. 하나를 질문하면 하나만 답하면서 입을 다물고 또 하나를 질문하면 또 하나만 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보기보다는 참 과묵하다는 느낌이었다. 영업이 천직이라는 사람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법도 하건만 그에게서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어버이날이 되면 사장인 나는 고향 집에 가는데 직원들은 못 그러잖아요. 미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직원들의 부모님께 우체환을 보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까 습관화되어서 아무런 감동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편지쓰기를 시작했죠. 부모님께 편지 쓰는 직원에게만 우체환을 보내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직원들이 어버이날이 되면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전 거기에 우체환을 동봉해서 보냈죠. 어른이 되고 나면 부모님께 편지 쓰기가 어렵거든요. 그런데 직원들의 부모님들이 자식에게서 편지를 받고는 감사의 편지를 회사로 보내오시는 거예요.”그 그림의 내막은 그랬다. 작은 일이었지만 파급 효과는 컸다. 강 대표는 가정 내에서 인성이 좋은 사람이 직장에서 일도 잘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런 믿음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직원의 부모님께로 퍼져 나가고 지금은 덕산코트랜의 특별한 문화가 되어 있었다.보통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은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모두가 다르다. 강 대표는 직원들의 인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좋은 사고 좋은 제품 좋은 신뢰’라는 사훈에는 회사의 이익에 대한 것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더 많이 드러나 있다.강 대표는 효 문화를 정착시키면서 사내에서 칭찬릴레이게임을 시작했다. 사람은 다면성을 가지는데 많은 모습 중에서 하나만 보면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칭찬릴레이게임을 하면서 직원 서로간에 더 잘 알게 되고 그들이 가진 장점이 더 부각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매주 2명씩 칭찬하기로 했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1달에 1명씩 칭찬하는 것으로 줄어들었다. 장기근속하는 직원들이 늘어나면서 서로에게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이다.강 대표는 기업문화의 하나로 ‘상경여빈’의 정신을 강조했다. 상경여빈이란 서로 공경하고 늘 손님처럼 대하라는 말인데 항상 보는 사람이라고 만만해지면 예의가 없어지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서로를 존중해주고 손님처럼 대하다 보면 갈등은 필연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생산성 향상이라든가 좋은 제품을 개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사람 중심의 기업문화는 중소기업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덕산코트랜은 2013년에 여성가족부 가족친화인증 국무총리 표창을 받게 되었다.어떻게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는지 궁금했다.“대학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죠. 그런데 동신유압이라는 기계회사에 영업직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어요. 기계에 대해서 아는 게 뭐 있어야지. 그래서 기계 공부를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영업을 해보니 이 영업이라는 것이 내 적성에 딱 맞는 거야. 천직을 찾은 거죠.”강 대표는 그렇게 기계 공부를 하면서 영업을 배워 나갔다.“나는 제품을 파는 것보다 인간관계를 먼저 맺어 나갔어요. 영업은 사람 중심이거든요. 아무리 내가 기계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더라도 인간관계에서 실패하면 영업도 실패예요. 그 다음은 서비스죠. 직접 나가서 서비스를 해줍니다. 수십 년 전의 기계를 지금도 쓰는 업체가 있어요. 우리도 깜짝 놀란다니까요.”강 대표는 청년들이 직장을 구할 때 1순위에 두어야 할 것으로 회사의 비전을 꼽았다. 회사는 사람과 함께 가고 사람은 회사와 함께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당장의 급여나 복리후생보다는 그 회사가 얼마나 비전이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중소기업은 인재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회사가 인재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교육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데 특히 외부교육 수료의 기회를 많이 준다고 했다. 백 명의 직원 중에서 한 명의 직원이 회사를 살린다는 철학이 강 대표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는 덕을 베풀면 외롭지 않다는 신념으로 사람들을 대한다고 했다. 지금 부자들은 상속이나 증여 등의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지만 아무리 아껴봤자 어차피 50% 정도는 세금으로 국가에 바쳐야 하니까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색하게 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그런 그에게 봉사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대답은 간결했다.“기억나는 게 없어요.” 봉사를 하지 않아서 기억나는 게 없는 것이 아니라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강 대표는 봉사라는 말이 나오자 웃음을 지으며 자꾸만 감추려 들었다. 쑥스럽다는 것이다. 그는 봉사를 하면서 봉사를 배우기 때문에 굳이 말할 만한 봉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급식 봉사를 나가보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와서 음식을 담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정말로 급식이 필요한 사람들임을 알아본다고도 했다. 그냥 집에 있기가 심심해서 나온 김에 급식 봉사를 받는 사람도 있고, 정말로 절실해서 급식 봉사를 받는 사람도 있는데 절실한 사람들은 다음 끼니를 위해서 음식을 봉지에 담아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담아 주면서 다음에도 꼭 오시라고 당부하는데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 복지의 그늘을 읽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보다 봉사나 기부를 얼마나 했는지가 중요한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봉사나 기부를 할 줄 모르는 부자는 진정한 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아직 5일제 근무가 정착되기 전에 직원들로부터 그런 요구가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머리를 썼죠. 전 직원이 한 달에 한 번 봉사를 하면 5일제 근무를 하겠다고요. 그런데 막상 봉사를 하려 해도 어렵더라고요. 단체에는 학생들이 전부 와 있고, 그래서 지속하지 못했어요. 마음 있는 직원들은 개별적으로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장애인 단체에 가보면 장애인이 오히려 비장애인에게 장애를 가졌다고 해요. 마음에 장애가 있다는 뜻이죠. 인정 안 할 도리가 없어요.”덕산코트랜은 대구의 스타 기업에 선정되면서 대구시로부터 이런저런 지원을 받았다. 코로나 사태가 터졌을 때 강 대표는 대구시로부터 받은 혜택을 돌려주기로 했다. 받았으니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대구시에 기부의 손길을 보태고 여기저기 기부를 늘려나갔다. 어려운 사람이 손을 내밀기 전에 자신이 먼저 주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독자적인 방식으로 영업을 하고 싶어서 창업한 회사는 어느덧 강소기업으로 떠올랐다. 덕산코트랜은 해외 유럽CE 인증 2건 추가 획득 등 다수의 우수특허인증서 및 특허를 30개나 보유하고 있다. 그는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였지만 사업에서만은 추진력이 있고 창조적인 마인드를 드러냈다. 강 대표는 부유하게 살았던 부친이 보증을 서주면서 가세가 기울었는데 오히려 그런 부친에게 고맙다고 했다. 대구의 기업가들을 보면 90% 정도가 자수성가한 사람인데 만약 부친이 계속 부유하고 자신이 그 그늘에서 살았다면 덕산코트랜을 창립할 생각이나 했겠느냐는 것이다. 길은 무수하고 어느 길을 가느냐는 본인의 선택에 달렸지만 성공의 길을 가려면 도전적이고 개척적인 정신과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사무실에는 ‘작은 것부터 신용을 얻고 더 큰 신용을 얻자’라는 글귀가 쓰여진 액자가 있었는데 자신의 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행보가 눈에 보였다. ‘운칠기삼’이라고 하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는다는 그의 말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날이었다. /글 천영애

2020-07-29

도전하는 자만이 성공… ‘경영·봉사’ 두 토끼를 잡다

정영만 제이아그로(주) 대표의 인생을 바꾼 것은 농우바이오라는 회사에 취직을 하면서였다. 이 회사는 종자 육종 및 육성연구를 하는 회사로 우리나라에서는 이 분야에서 굴지의 회사이다. 경남 의령에서 한지협동조합을 설립해서 한지를 생산하고 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생각했던 그의 인생은 이 회사에 취직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농우바이오에서는 그를 기업체 간부 및 사회적 리더를 양성하는 일본의 후즈노미야 양성학교에 유학을 보내 주었다. 그에게서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37살 때 농우바이오의 총괄본부장으로 취임했다. 그 회사에 다니는 동안 그는 외국의 선진문물을 견학하면서 안목을 넓혔고, 후즈노미야 양성학교에서 배운 리더십을 통해 빠르게 리더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그러다가 사업을 하기 위해 그 회사를 퇴직했다. 농우바이오와 겹치는 종자육종 사업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였다. 자신을 키운 회사의 기술을 이용해 자신의 회사를 차린다는 것은 그로서도 허용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는 윤리였다. 그러나 농사를 떠난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가 그때까지 배워 온 것도 농사와 관련된 일이었다. 고민을 하던 그는 시골의 땅이 농약과 화학비료 때문에 생명을 잃어가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 땅을 되살릴 결심을 했다. 땅이 살아야 지속가능한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농업인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정부나 농업인은 생산의 극대화에만 치우쳐 땅이 죽어가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친환경에 주목했다.식물영양물질과 특수기능성 식물 생장 및 보호물질을 공급하는 기능성 농업제제 전문기업인 제이아그로(주)는 그렇게 창업되었다. 농업 생산량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던 해충들을 농약으로 손쉽게 해결하던 처방학이 만연해 있던 기존의 풍토에서 식물을 어릴 때부터 강하고 단단하게 키워 병 발생을 줄이고 수확량까지 늘릴 수 있는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예방학이 필요했다. 화학비료와 인체에 위험한 농약을 줄이는 것은 우선 땅을 살리고 농업인을 살리는 일이었다. 화학비료는 식물을 부쩍부쩍 자라게 해주고 농약은 온갖 해충을 박멸해 주었지만 그 대신 땅과 농업인은 병들어 가고 있었다.제이아그로(주)는 미국의 스톨러사, 이탈리아의 발아그로사, 일본의 하야시사 등 세계를 대표하는 농업제제 회사들과 기술 협력관계를 맺으면서 친환경 최첨단의 제제들을 농업인들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농업인들의 삶과 가까이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비록 회사에서 생산한 제품을 팔아야 하지만 당장 눈앞의 매출에만 신경 쓰기보다는 진정으로 농업인에게 도움이 되는 제품을 개발하고 공급해야 하는 것은 이미 농우바이오에서 배운 철학이었다. 정 대표 역시 그때 배운 마인드로 농업인이 먼저 사는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했다. 그 결과 그의 회사는 우리나라 농업회사 중에서 특허를 가장 많이 보유한 회사가 되었다. 농업인들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미네랄이 풍부한 기능성 고급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은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수입농산물을 이겨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러한 실천 가능한 친환경농업 이론을 개발한 공로로 2011년 친환경 농업유공자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또한 지식경영인 대상과 대한민국사회봉사대상을 수상하면서 정 대표는 선도적인 농업전문경영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회사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정 대표는 사회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농대학생과 다문화가정을 지원하기 위한 재단을 설립했다. 정 대표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스톨러제이 재단에서도 지원을 해왔다.“봉사가 계속되면서 제일 걱정되는 게 봉사의 진실성을 잃고 겉멋에 빠져 들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하면 그 멋 때문에 원래의 의미를 잃게 되거든요.”그리고 그는 회사 직원과의 나눔에 나섰다. 회사는 자신 혼자 키운 것이 아니라 직원 모두의 힘으로 키운 것이기 때문에 성과도 나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자식이 회사를 물려받았을 때를 대비해 회사 사규를 개정했다. 농업 분야의 회사를 둘러보면 창업주의 2세가 회사를 물려받아 성공한 회사는 거의 없었다. 이것을 보면서 그는 회사 사규를 아예 개정해 버렸다.“내 자식들은 내가 제시하는 조건에 동의해야만 주식을 받을 수 있어요.”어떤 조건인지 궁금했지만 회사의 운영에 대한 문제라서 그것까지는 묻지 않았다. 다만 그의 표정으로 봐서 자식이 그 회사를 쉽게 물려받아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주와 직원의 관계 또한 사규 개정을 통해 보완했다. 정 대표는 주주와 직원이 평등한 관계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를 원했다. 그는 회사 안에서 작은 혁명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이면서 직원 모두의 회사여야 한다는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대화 도중 그가 말한 인디언 스틱은 흥미로웠다.“인디언들은 부족회의를 할 때 스틱을 받은 1인만 발언을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권위주의 문화가 강하고 토론문화가 발달되지 않아서 남의 발언 도중에 끼어드는 경우가 흔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회의 때 이 인디언 스틱을 활용합니다. 인디언 스틱을 가진 사람이 발언하는 도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일체 끼어들 수가 없어요. 어떠한 불평도, 항의도,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 거죠. 인디언 스틱은 말하는 사람의 권리를 보장해 주고, 다른 사람들은 듣는 훈련을 하는 거죠. 그러면 인디언 스틱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나는 이 제도가 참 좋다고 생각해요.”회사나 단체는 윗사람의 발언이 길어지고 아랫사람의 발언은 종종 중간에서 제지를 당하는데, 그러다보면 충분한 의견 개진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말만으로 그가 얼마나 직원들이나 단체 구성원들을 존중하는지 알 수 있었다.정 대표는 젊은 시절부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현지에서 100여 차례 이상 체류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그 안목은 회사 경영에서도 드러나지만 그의 사회생활 이력에서도 드러난다. 대구경찰청 외사자문위원장을 하면서 다문화가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은 부모의 모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사용 가능하기 때문에 앞으로 이 부분에서 두각을 드러낼 것이라고 본다.정 대표는 경찰청 외사협력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알게 된 지인들을 통해 2014년 자유총연맹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자유총연맹은 건전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정치적 중립을 선언한 단체로 그는 수석부회장을 맡으면서 이 단체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2019년 12월 대구지부 회장으로 취임하게 된 정 대표는 지부의 재정적인 안정과 회원들의 고령화 탈피를 최우선 과제로 꼽으며 조직 개편을 통해 ‘다문화가정 끌어안기 사업’과 회원들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유튜브 아카데미’를 개설해 평생 교육의 장을 마련하였다.이미 봉사에는 어느 정도 이력이 쌓인지라 자유총연맹 회장의 역할도 그는 무겁게 받아들인다.“통일 준비는 인적, 물적 준비가 함께 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 작은 일부터 실천할 수 있어야 해요. 국가기념일이 되면 태극기 달기 캠페인부터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마중물 사업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안보와 통일에 대한 작은 일을 하려고 해요.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취미교실, 장학사업, 김장 나눔, 고추장 나눔사업 등은 굳이 국가가 아니라도 시민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이죠. 한반도 숲 가꾸기 운동도 추진하고 있는데 남북한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 좀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사업의 성공과 사회단체장의 역할은 맥을 같이한다. 한 번 성공해 본 사람이 다른 성공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가 자유총연맹에 가진 애착을 보면서 머지않아 그 단체 또한 그의 회사처럼 비약적인 성과를 거두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졌다. ‘도전하는 자만이 성취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격언이 생각난다. /글 천영애

2020-07-22

울릉도의 소녀, 대구서 의료 예술의 장을 펼치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면 친구가 두엇 보이지 않았다. 울릉도의 거센 파도에 배가 제때 뜨지 않아 패혈증이나 맹장염으로 죽은 친구들이었다. 파도가 치는 날이면 울릉도는 무엇이나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은 늘 이 파도에 저당 잡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살아남는 방법은 아프지 않는 것뿐이었다. 후에 대학을 결정할 때 박언휘(박언휘 종합내과 원장)는 주저 없이 의과대학을 선택했다. 어릴 때 죽어갔던 친구들과 이웃들을 보면서 박 원장이 생각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박 원장의 어머니는 법대에 가기를 원했지만 옳은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라도 이기면 유능한 변호사가 되는 것이 싫었다. 옳지 않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변호해야 하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당시 박 원장이 다녔던 대구여고는 경북대병원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의사와 병원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머리가 좋았던 그녀에게 의사의 길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박 원장이 어릴 적에 읽었던 위인전 중에 퀴리부인이라는 책이 있었다. 그걸 보면서 자신도 과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자연과학을 해서는 세상이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박 원장은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어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하고 싶었다. 환경이 열악했던 울릉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늘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그런 박 원장에게 봉사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첫 번째는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일이죠. 나는 내 직업이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아픈 환자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통증에서 구해주는 일보다 더 큰 봉사는 없다고 생각하죠. 전 병원을 일요일에도 열어둡니다. 일요일이라고 아픈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그 다음이 주변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병원의 간호사들은 거의 장기근속을 해요. 17년씩이나 근무한 사람도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해지죠. 세 번째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청소년들을 돌보는 것이에요. 나도 어릴 땐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청소년들에게 멘토 역할을 해주고 싶어요.”박 원장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직이다. 미국에서 10년 동안 생활하면서 배운 것이다. 그런데 의사가 정직을 강조하니 이상해 보였다. 이미 그 직업만으로 충분히 그들은 정직한 사람들이지 않은가.“그렇지 않아요. 같은 병에 쓰는 약이 많게는 수십 종이나 되는데 나는 가장 효과가 좋은 약을 쓰려고 하죠. 같은 병에 쓰는 약은 성분이 모두 같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다르죠. 환자들에게 좋은 약을 쓰고, 꼭 해야만 하는 치료를 하는 것이 의사의 정직입니다. 의사가 정직하지 않으면 환자는 좋은 약을 두고도 쓰지 못하죠. 다른 직업의 정직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나는 주사 약이나 일반 약이나 가장 좋은 것을 쓰려고 합니다. 그게 내가 미국에서 배운 정직입니다.”박 원장의 말을 듣고 나니 새삼 의사라는 직업이 새롭게 보였다. 사람의 아픈 몸을 치료하는 의사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해야 할 직업 같았다.그녀는 지난 13년 동안 무려 15억 원어치의 백신을 요양원이나 독거노인에게 제공해 왔다. 노인들은 폐렴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폐렴백신이나 독감백신은 꼭 맞아야 하는 백신 중 하나다. 그녀는 그 일로 2018년 대구시민대상을 수상했다. 그 봉사를 어쩌다 한 해 쉬게 되었는데 그해 노인들의 사망률이 더 높아지는 걸 보면서 그녀는 다시 봉사를 시작했다. 백신은 종류가 많지만 박 원장은 평생에 한 번만 맞으면 되는 폐렴백신을 제공하고 독감백신도 최고로 좋은 것을 제공했다. 정직한 의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정직함도 중요하지만 봉사 정신도 중요하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봉사란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이루어진다. 의사는 늘 타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어야 했다.그렇게 의사 생활을 하면서 박 원장은 점자 약봉지를 개발해 특허 신청을 해놓았다. 시각장애인들이 약을 바꿔먹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부작용이 심각해지면서 시각장애인 환자, 컴퓨터 전문가와 머리를 맞대고 점자 약봉지 개발에 성공했다. 이제 정부 지원을 받아 각 지역마다 공급되면 시각장애인들이 약을 잘못 먹어 죽음에까지 이르는 일이 없어질 것이라고 본다.박 원장은 ‘돈 나오는 곳은 피눈물 나는 곳’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늘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몇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들은 말은 돈을 많이 벌어야 봉사도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버는 만큼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지금도 물만 보면 바다를 생각하고 고향을 떠올린다는 박 원장에게 울릉도는 꿈이 있던 섬이면서 눈물 나는 섬이었다. 어떤 때는 울릉도 해안까지 온 배가 파도 때문에 접안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고, 열두 시간이나 배를 타고 가다가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울릉도는 아이를 낳으려면 육지로 나와야 하는 서글픈 섬이기도 했다. 그 섬은 박 원장에게 마음의 정처였지만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배가 뜨지 못하면 내일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박 원장은 섬에 잘 가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몸에 스민 섬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내과 의사인 그녀는 의학 이외에도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시 전문 잡지 ‘시인시대’ 발행인으로 있는 그녀는 문학이 치료의 또 다른 방법이라고 말했다.“엄마가 돌아가시고 6개월 정도 우울증이 왔었어요. 그때 글을 썼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문학이 치유가 되더라고요. 의사의 존재 이유는 환자의 치료입니다. 그런데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문학으로 치유하는 것도 치료죠. 나는 치유의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환자를 치료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한의대에서 10년 정도 강의도 했어요. 한의학이나 문학이나 양방이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환자에게 가장 적절한 치료 방법을 찾으려고 해요.”문학의 치유를 경험하면서 박 원장은 전국의사시인협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시인시대’를 발행함으로써 시인들에게 발표의 장도 마련해 주고 싶었다.박 원장은 의학의 기본은 예술이라고 했다. 예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데 고통에서의 해방은 보이지 않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의사의 긍정적인 말과 사랑이 예술의 힘이라고 본다는 것.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는지 그대로 느껴지는 부분이었다.박 원장이 마음의 고향 울릉도를 통해 배운 것은 거센 파도를 타는 법이다. 파도를 이기려면 파도를 절대 거스르지 않고 순응해야 한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파도와 싸우며 파도 타는 법을 익힌 박 원장은 파도에서 얻은 지혜로 어떤 일이라도 극복해 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 힘은 정직과 실력, 사랑, 기도의 힘이다. 박 원장의 입에서 자주 흘러나오던 정직과 봉사, 사랑이라는 말이 헤어지고 나서도 오래 머리에 남았다. 박 원장은 현재 ‘슈바이처 나눔 봉사회’ 이사장을 맡아 의료봉사를 펼치는 한편 대구 봉사단체 참길회에서 소록도 봉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며,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아너소사이어티 54호 회원으로 가입했다. 가입 후 자신이 미처 몰랐던 분야의 봉사를 새롭게 할 수 있어 즐겁다고 했다. 대구의 ‘얼굴 없는 천사’라는 그녀의 별칭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울릉도의 소녀가 대구에서 봉사의 마당을 펼친 것이다.  /대담정리 천영애

2020-07-01

화가 꿈꾸던 소년, 대구 예술계의 ‘키다리아저씨’로

그를 만나기 위해 한국의 집으로 찾아간 날, 잔디가 깔린 마당에는 분홍빛 차양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강렬한 여름 햇살을 거르기 위해 쳐진 차양 사이로 키 큰 은행나무 이파리가 흔들렸고, 마당은 한바탕 잔치를 벌일 듯 흥겨워 보였다. 저렇게 분홍빛으로 차양을 드리우기가 쉽지 않은데 역시 미적 감각이 탁월한 그의 안목이 돋보였다. 그 차양 아래 앉아 집을 둘러보니 한옥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에 눈길이 갔다. 글씨는 마치 춤을 추듯 한옥의 기둥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대구의 중심인 종로에 품격을 더하며 날아갈 듯한 처마를 올린 한옥인 ‘한국의 집’을 지은 이는 대구 예술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하는 신홍식씨였다. 그에게 주련에 대해서 물어보았다.“추사의 글씨지요. 글씨를 모방하기는 쉽지만 저 글씨 한번 보세요. 저건 추사 아니면 누구도 쓸 수 없는 거예요. 추사는 세 번이나 유배를 갔는데 그때마다 글씨가 많이 달라졌어요. 저 주련은 여덟자 병풍으로 된 한시를 가지고 만든 거예요. 이 종로 골목에 전각을 잘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각자를 했어요.”한국의 집에는 주련 말고도 소소하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많다. 근대골목투어 제2길인 진골목은 대구의 거부였던 정병국의 집이었던 정소아과를 비롯하여 달성 서씨들이 세거(世居)하던 곳이다. 정병국의 사촌인 서재균이 약 100여 년 전에 지은 한국의 집 안채는 살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살려서 리모델링을 했다. 당시만 해도 귀하던 실내 화장실과 굵은 대들보, 아궁이, 마당의 우물 등은 그대로 두었다. 진골목을 낀 담장에는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수원)현륭원으로 장엄한 행차를 하는 모습을 그린 ‘정조대왕 화성반차도’가 있다. 퇴색을 막기 위해 1300도의 고열에 두 번씩 구워 67장의 도자기에 전사(轉寫)한 이 그림에는 약 1천500여 명의 사람과 570마리의 말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모습이 전부 달라 가치를 더한다. 이 힘들고 어려운 작업을 해서 골목 담에 전시한 내력을 그에게 물었다.“우리 역사에서 문화가 가장 융숭했던 게 영·정조 시대잖아요. 이 그림은 그때의 화려한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지금은 박물관 수장고에 들어 있으니 일반 사람들이 접하기가 무척 어렵죠. 전 세계적으로 돌아봐도 이 그림처럼 화려한 그림이 없어요. 이런 대작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죠.”한참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던 그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작은 박스 하나를 들고 왔다. 박스를 열자 동그란 접시에 화성반차도 그림 한 부분이 그려져 있었다. 화성반차도가 그려진 컵과 함께 기념품으로 만든 것이었다. 갑자기 그림이 내 안으로 훅 들어오는 느낌이었다.사업을 잘 하던 그가 갑자기 예술 쪽으로 인생을 바꾼 것은 평생 돈벌이에 매이기 싫어서였다. 마침 그가 납품하던 금성사와 오리온 전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던 무렵 그도 하던 사업을 정리했다. 뭘 할까 궁리하던 그에게 공장이 있던 대구 달서구의 어려운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우선 매달 20kg짜리 쌀 10포를 사서 이웃돕기에 나섰다. IMF 때라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질 때였다. 그렇게 시작한 쌀 기부는 현재 매달 80포까지 늘어나며 그에게 ‘쌀 배달 아저씨’라는 별명을 선사했고, 그 공로로 2017년 대한민국 자원봉사상 대상인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그는 어릴 때 화가를 꿈꿨다. 그러나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다른 길로 가서 가지 못한 길을 그리워하며 산다. 그도 사업을 그만두고 불우이웃돕기를 시작하면서 어릴 적의 꿈으로 눈을 돌렸다. 새롭게 화가의 길을 걷기는 어려웠고, 화가들을 돕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작업실이 필요했지만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더 이상 기계가 돌아가지 않는 공장을 비워줬다. 그러나 공장을 작업실로 쓰기에는 환경이 녹록치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성안오피스텔의 한 층을 통째로 구입하게 되었고 그곳을 화가들을 위해서 무료로 내놓았다. 20개의 방이 있는 560평의 공간이었다. 작업실이 필요했던 화가들이 그곳으로 모여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대구 예술계의 후원자가 되어가고 있었다.그러면서 그는 그림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화가의 꿈은 후원자와 컬렉터로 변형되어 이루어가고 있었다. 현재 그가 소장한 그림은 이응노의 작품을 비롯하여 장욱진, 김창열, 이대원 등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가 100년이 넘은 한옥을 구입했을 때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한옥미술관을 지을 구상을 했었다. 그러나 막상 건축을 시작하자 예상치도 못했던 것들이 발목을 잡았다. 건물 지하에 넓은 미술관을 짓고자 했던 그의 꿈은 무산되었지만 언젠가는 한옥에서 상설전시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예술작품은 그늘에 있을 것이 아니라 밝은 바깥으로 나와야 가치를 더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동시에도 애착을 가지고 있다. 현재 대구의 대표적인 아동문학회인 혜암아동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2019년에 동시 전문 계간지 ‘동시발전소’를 발행했다. 전국에서 동시 전문지는 ‘동시마중’과 ‘동시먹는 달팽이’, ‘동시발전소’ 3개뿐으로 대구라는 지방 도시에서 동시 전문지를 발행하기가 쉽지 않은데 동시에 대한 애정이 이 일을 이루게 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 작가이기도 한 그는 다른 지역에 비해 특히 동시가 활성화된 대구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그도 그랬지만 지금 어른 세대들은 어릴 때 변변한 공연 문화를 접하기가 어려웠다. 고작해야 영화를 보는 것이 문화생활의 전부였고, 그마저도 도시에 살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문화예술을 접하고 자란 사람은 악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지역에서 조금만 후원해 주면 문화예술이 활성화될 수 있는데 신씨는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평생 업으로 알고 힘닿는 데까지 후원할 생각입니다.”100년은 넘었을 듯한 은행나무 아래에서 동시를 말하는 그는 행복해 보였다.“대구는 우리나라 동시의 태동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동시가 발전해 왔죠.”어쩌다 보니 이런저런 후원도 하고 자리도 맡게 되었지만 그는 역시 동시 작가였다. 문화예술계의 후원을 업으로 생각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고 잘 살기에만 골몰하는 세태임에도 신씨는 그런 욕망에서 한걸음 비켜나 있는 듯이 보였다.은행나무가 한옥의 처마와 어울려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허공의 분홍 차양이 한들한들 바람을 만들어내는 동안 마당에는 시민들이 차츰 들어와 앉았다. 카페를 하는 안채의 손길도 덩달아 분주해졌다. 안채 옆에는 전통혼례 때 사용하는 가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아궁이가 있는 처마 아래에는 목조건물의 화재를 막기 위한 드무가 녹이 슨 채 놓여 있었다. 현재와 과거가 묘하게 공존하는 공간, 그가 만들고 싶은 삶인지도 모른다.천영애시인“이제 우리나라도 잘 살잖아요. 나도 나이가 들고, 언제까지 쌀 봉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앞으로는 청소년들에게 문화로 봉사하는 길을 찾아보고 싶어요. 문화는 지금 심각해져 가는 사회적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이라도 문화적 환경을 조성할 여건을 만들어가야 해요. 그러면 사람들의 인성도 좋아질 거고, 사회적 갈등도 해소될 거라고 생각해요.”은행나무 아래에는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공예작품이 놓여 있었다. ‘I LOVE’를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아버지가 석물 공장을 했는데 나도 아버지 솜씨를 이어받았는지 저 정도는 만들 줄 알아요.” 수줍게 웃는 그의 눈가에 자잘하게 주름이 잡히면서 천진스러운 아이의 표정 같은 웃음이 묻어났다. 예술가로 살지는 못했지만 예술컬렉터로, 예술후원자로, 대구의 기부자로 살아가는 삶이 그를 만족스럽게 하는듯했다.본지가 창간 30주년을 맞아 새롭게 연재할 ‘시인 천영애의 대구·경북人’은 ‘사람’을 중심으로 지역의 문화와 예술, 사회와 경제를 밀도 있게 들여다보고자 기획됐다. 필자인 천영애 시인은 대구문학상 수상자로 ‘무간을 건너다’ ‘나무는 기다린다’ 등의 시집을 냈고, 다양한 매체에 문화예술과 관련된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20-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