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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아름다운 목단꽃의 혼수함이 나의 보물 1호”

먼 산에 눈이 하얗게 덮여 있다. 겨울 같지 않게 포근하던 날이 간밤에 내린 눈으로 갑자기 추워졌다. 뺨에 닿는 눈바람이 매섭도록 차갑다. 시원하게 뚫린 월드컵로를 달려 골목에 자리 잡은 갤러리에 닿았다. 찻집을 겸한 규방 공예의 갤러리였다. 자동문이 활짝 열리자 갤러리 곳곳에 자리 잡은 한지공예품의 고고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장롱과 뒤주, 찻상 등, 예술성과 실용성을 겸하여 우리의 삶 속 깊숙이 자리 잡은 물품들이 눈 가는 곳마다 품위 있는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실내 가득 은은한 차향이 감돌았다. 이층으로 가는 계단 곳곳이 공예품이었다. 안순금 명인이 진홍빛 히비스커스 차를 가져왔다. 새콤한 맛이 살짝 감도는 히비스커스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한지공예와 전통차? 고전적이라는 점에서 조합이 잘 맞는 만남이다. 전통차와 한지공예 중 어느 쪽이 먼저였느냐고 물으니 한지공예가 먼저라고 했다.“공방을 운영하며 찻집을 연 이유가 뭔가요?”“사람들이 서먹해하며 공방에 들어오지 못하는 거예요.”공방을 해나가려면 사람을 모아야 하고, 누구나 편안히 들어와서 한지공예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공방만으로는 사람들을 불러들이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생각다 못해 명인은 한지공예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공방에 선뜻 발을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출입을 위해 전통차를 생각해냈다. 전통차가 사람을 편안한 마음으로 오게 해주는 구실이 되었다. 공방을 운영해온 것이 30년이란다.“한지공예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뭐예요?”갓 결혼한 새댁 시절에, 일반 공예를 비롯한 여러 가지 강좌를 배우러 다니다 우연히 인사동에 들렀다가 장독 모양의 쌀독을 발견한 것이 한지공예의 시작이라고 했다. 쌀독의 재질이 한지라는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단다. 장독 모양의 풍성한 쌀독을 집안에 들여놓으면 복이 가득 담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시작한 것이 한지공예였다고. 처음 그 느낌이 맞아 떨어져서 명인은 지금까지 행복한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세련된 도시풍의 차림새가 한지공예와 전통차에 대한 인식을 현대화시키는 느낌이었다.쌀독을 만난 이후 명인은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다니며 한지공예를 배웠다. 사범자격증을 따고 난 후에 남편과 의논했다. 공방을 열고 싶다는 말에 남편은 손님이 오든지 안 오든지, 잘 되든지 안 되든지, 스트레스 받지 말고 공방을 놀이터로 생각하라며 허락해주더란다. 명인은 그렇게 해서 눈여겨 봐둔 자리에 공방을 열었다. 솜씨도 서툴고 가게도 처음이지만 생각 외로 사람들이 호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기소침해졌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기운이 빠질 때도 있었지만, 손님이 없어도 실망하지 말고 공방을 놀이터로 생각하라는 남편의 말에 힘을 얻었다. 명인은 누가 공방을 찾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날마다 공방에 출근해서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었다. 혼자 노는 시간이 많아지며 공예품이 늘어나고 덩달아 자신감도 생겼다.“남편이 적극적으로 지지를 해주셨네요.”“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라고 해야겠죠.”서울에서 재료를 사오고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고, 밤을 새워가며 작품을 만드는데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남편이 조용히 지켜봐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명인의 의식이 매우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었다. 명인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일을 할 사람과 하지 않을 사람의 차이가 또렷해진다. 일을 할 사람은 매개체를 받아들이는 자세와 하고자 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의욕이 남다르다. 그 강한 의욕으로 그녀는 대한민국 명인 자격증을 따고, 아시아 웍 페스티벌과 미국 LA 월드페스티벌에서 우수상과 대상까지 따냈다.공방을 연 후 명인은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스피치 교육까지 받으며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했다. 한지공예 강의를 하려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야 했다. 아무런 확신이 없는 시기인데도 그녀가 흔들리지 않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해도 성과 없이 혼자 노는 휴지기를 견디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았다.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명인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언젠가는 내가 하는 일을 사람들이 알아줄 거라고 믿었어요.”공방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기 위해 먼 지방까지 강의를 하러 다녔다. 강의를 할 곳이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서슴지 않고 찾아다니다 보니 그게 삶이 되더라는 말을 듣고,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믿어주는 자신감이라고 확신했다. 가끔 전시회에 내놓을 공예품을 의뢰받을 때마다 스승이 있어서 의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혼자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게 익숙한 터라 두려움이 없었다고 한다.“두 시간 강의로 만들 수 있는 작품이 뭐예요?”“부채나 지갑, 휴지케이스 정도?”소품이라고 해도 하루 만에 작품을 완성하기 어려울 텐데,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느냐고 물으니 체계적으로 강의를 이끌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작품을 완성하는 게 관건이어서 재료를 미리 자르고 재단해두는 것을 시작으로, 실기강의를 차질 없이 해나가기 위해 강의 내용을 머릿속에 훤히 숙지한다고.“청송 농협기술센터에서 강의한 적이 있어요.”딸의 산후 구완을 하러 왔던 부인이 어느 날 공방에 온 적이 있는데, 그 부인이 조심스레 가게 문을 열고는 들어가도 되느냐고 묻더란다. 명인은 편안하게 들어와서 구경하라며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날 공방에 한참 머물다 간 부인이 청송에 와서 강의를 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농업시술센터 관계자와 의논한 후 강의시간을 잡았다며, 청송 강의가 고리처럼 연결이 되어 명인을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게 해주더란다.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실기강의여서 자칫 분위기가 흐트러지면 소품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명인은 미리 치밀한 계획을 짜두었다. 준비한 재료를 앞자리의 몇 명에게 나누어주게 했다며, 수강생이 120명이어서 체계적으로 일을 추진하지 않으면 재료를 나누다 시간이 다 가고 만다는 말에 공감했다. 한 명이라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으면 안되도록 마이크만으로 강의를 했는데도 실수 없이 마칠 수 있었던 게 기적 같았다고 했다. 강의를 마치고 청송 노귀재를 넘어오며 깔끔하게 일을 끝냈다는 자존감으로 너무나 행복해서, 돌아오는 내내 부처님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노귀재를 넘어오던 추억을 되새기며 명인이 잠시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가장 아끼는 작품이 뭐예요?”“혼수함이요.”명인이 가리키는 곳에 삼단으로 포개어 놓은 혼수함이 있었다. 아들을 가진 사람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라며, 명인은 혼수함이 준비되어 있으면 그게 걸맞은 며느리가 들어온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고 했다. 혼수함은 조상의 얼이 깃든 물품 중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3단 혼수함을 만드는데 두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혼수함에 착색되어 있는 목단꽃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혼수함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목단꽃을 찢어 붙이는 것이라던가.“꽃을 찢어 붙여요?”공예품에 한지를 꽃잎처럼 찢어 붙이는 건 예사로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숙련의 기간이 필요한 부분이라며 빙긋 웃는다. 쉬워 보여도 어렵다고. 모든 예술 작품이 그렇듯이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은 작가의 다양성에서 새롭게 재창조되기 때문이다. 문화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데서 성장한다. 작가의 손을 거쳐 새롭게 태어나는 규방 공예품의 아름다운 재창조 역시, 완성도 높은 작품을 위해 끝없이 노력을 기울이는 작가의 열정이 끓고 있는 한 계속된다. 자신의 작품이 새로움을 추구한 순수 창작품이라는 사실에 강한 자부심을 느낀다는 그녀의 꼿꼿한 자존심과 용기가 아름답다./글 장정옥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1-12

우리네 삶과 같이 굴곡지고 회한이 깊은 소의 눈물

2021년 신축년(辛丑年) 새해는 흰 소의 해이다. 소를 그리는 화백이 있다. 소의 해를 맞아 안우(安友) 김동욱 화백을 만났다. ‘등댓불 그리고 인생’이라는 주제로 작품 전시 중이었다. 갤러리의 흰 벽에서 소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安友 화백은 소만 그린 것이 아니라 노을과 기도의 주제도 그렸다.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소재들이 ‘소와 노을과 기도’라는 세 가지 주제를 담고 있었다. ‘소 그리고 인생’이라는 첫 번째 주제에 소의 눈물이 있었다. 어머니 소의 눈물과 아버지 소의 눈물이 서로 다른 감정을 비추었다. 지켜주지 못한 아픔과 회한으로 얼룩진 후회를 말하는가 하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가시지 않는 절절한 아픔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림의 리얼리티가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주었다.화백이 소를 만난 것은 1975년이었다. 1981년 대학 졸업 작품전에 코뚜레 쓴 소를 처음으로 발표했다. 인생의 슬픔을 그리고자 했던 첫 시도였다. 코뚜레를 쓴 소는 평생 밭을 갈고, 짐을 지고, 일을 하다 죽고 난 후에야 코뚜레에서 해방된다. 코뚜레는 소의 굴레이고, 눈물이고, 고단한 삶의 고통이다. 코뚜레는 소를 그리는 작가에게도 고통이어서 그가 울 때 소도 울고, 그가 웃을 때 소도 웃는다. 첫 번째 작품 이후 화백은 더 이상 소의 코뚜레를 그리지 않았다. 소를 코뚜레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소를 그리게 된 계기가 있을 텐데요.”“난 한 번도 소를 그린 적이 없어요.”눈앞에 코뚜레를 한 소와 울고 있는 소, 웃고 있는 소, 어린 송아지를 거느린 소, 황혼을 배경으로 조용히 쉬고 있는 소의 그림이 갤러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데도 화백은 소를 그린 적이 없다고 한다. 그에게 소는 사람과 다름없고, 소 이야기의 역사는 그대로 사람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이어서 소를 그린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닐지. 화백은 소를 통해서 거짓과 편법이 가득하고, 상식과 정의가 무시되고, 부정부패가 얼룩지고, 배신과 싸움으로 얼룩진 인생사의 갈망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소의 눈물이 우리네 삶의 역사만큼이나 굴곡지고 회한이 깊다. 소의 형상을 빌려 인생을 이야기한 지 40여 년이란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자신이 소인 듯, 소 아닌 듯, 소 같았다고 한다. 메시지대로 그림이 완성되는 동안, 소재의 내면으로 완벽하게 감정이 이입된 화백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함께 앓는다.安友 화백은 ‘노을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어린 손주가 울고 있는 소 그림을 보고 무서워했다고 한다. 화백은 소의 모습이 아이의 생각 속에 슬프고 무서운 모습으로 각인되면 어쩌나 염려가 되어서, 이미지 전환을 위해 웃는 소를 그렸다고 했다. 웃는 소는 아이의 천진난만하고 행복한 웃음이었다.두 번째 주제는 ‘노을, 그리고 인생’이었다. 화백은 노을에 관한 영감을 얻기 위해 제주도로 갔다. 화백은 매일 노을을 마주하며 얻은 영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노을이 화백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노을을 보고 있으면 앞만 보고 살아온 삶이 보이고, 희로애락의 삶이 그려지고, 함께 있어주지 못한 모든 이들과 지나간 시간이 보였다. 인생의 황혼과 접목된 노을 시리즈도 그렸다. 화백에게 노을은 그리움이고 퇴직 이후 살아가는 제 3의 인생을 뜻한다. 자기중심으로 살아오는 동안 소홀히 했고, 함께 있어주지 못했고, 그로 인해서 아픔을 겪은 이들을 등댓불처럼 지켜주고 보듬어주는 은퇴 후의 삶을 화백은 제 3의 인생이라고 말했다. 화백은 저녁노을과 마주하며 치유와 평온을 느끼고, 아침노을은 소망과 함께 영혼이 맑아지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노을 중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보았던 녹색의 아침노을이 있고 제주도 애월의 고내폭포에서 보았던 용틀임의 저녁노을이 있다. 나그네의 가슴에 형언할 수 없는 색조로 다가온 노을이었다.노을을 배경으로 한 그림 중에 손이 있다. ‘노을 그리고 아름다운 황혼’의 연작으로 생의 희로애락이 담긴 주름진 손과 기도하는 손이 있다. 화백은 노을을 배경으로 한평생 헌신과 희생으로 살아오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이 보여주는 디테일한 삶을 그렸다. 기도하는 손과 생의 굴곡을 보여주는 주름진 손의 처연함이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가슴이 뭉클하다. 노동으로 쇠퇴된 손의 주름과 굵은 마디, 두드러지는 정맥까지, 화백은 이 땅에서 곡진하게 살아온 어버이들의 삶을 손의 형상으로 생생하게 그려냈다.“손의 모델이 누구신가요?”“제주도에 노을을 그리러 갔다가 생각하는 정원에서 만난 성범영 원장의 손에서 아버지의 인생 그림에 대한 영감을 얻었어요.”제주도의 거친 바람으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돌담을 쌓고, 분재를 가꾸며 최상의 정원을 만든 사람. 화백은 폭포와 연못, 돌다리를 만들어 국가지정 민간정원 1호의 아름다운 정원을 만든 농부 성범영 원장을 언급했다. 주름으로 삶을 보여준 손의 주인이었다. 깍지를 끼고 있는 손의 침묵이, 그 실체가 보여주는 이상의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손은 잠시 머물다 가는 노을처럼 침묵으로 수많은 말을 했다.安友 화백이 추구하는 세 번째 주제는 ‘기도 그리고 인생’이었다. 부모의 기도, 자식의 기도, 신을 향한 기도를 담은 그림에 색채가 없다. 기도 시리즈의 특이한 점이 바로 색채를 빼버린 거라고 했다. 색채가 들어가니까 현란하더라며, 메시지 전달을 위해 오로지 목탄만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화백은 예전에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언급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 기도하는 사람은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한 사람이다. 늘 기도하는 사람은 담대하고 평온하다. 너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라.” 기도 시리즈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거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죽은 예수를 안고 통곡하는 피에타의 성모 그림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산다면서도 사실은 제 뜻대로 산다며, 화백은 기도 시리즈에 인간의 편협한 이기심과 간절한 기도를 동시에 담았다고 했다. 눈물에 슬픔의 눈물이 있고 감격과 은혜의 눈물이 있듯이 기도 역시 제각각의 색채를 담은 여러 가지 기원이 담겨 있다.죽은 아들을 안고 절규하는 성모의 그림 앞에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화백은 영성으로 승화된 고결한 마리아의 모습보다 아들의 죽음을 마주한 인간적인 어머니로서 절규하는 성모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어머니. 미켈란젤로 이후 수많은 화가들이 여러 가지 형상의 피에타를 만들어냈지만,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다. 고통과 부활! 그림 속의 성모는 인간답게 괴로운 울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화백은 어쩌면 가장 외로운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게 되는 절대적인 순간의 간절함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손때 묻은 성경처럼 인간의 역사에 남는 하나의 현상인 듯.미술학도 시절에,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목장에서 노니는 소를 보았다고 했다 특별한 자기만의 주제를 갖고 싶었고, 일생 동안 어떤 주제를 표현할까 고민하던 때에 소의 어진 눈망울을 보았다고. 그날 소의 일생을 생각하며 교감하다 소를 통해 인생을 이야기하는 주제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린 첫 번째 작품이 ‘인생은 코뚜레의 슬픔 같은 것’이라는 일하는 소의 그림이었다. 일하는 소는 코뚜레를 씌운다. 코뚜레를 쓴 소는 일생 동안 노동의 고통에 시달리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코뚜레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인간의 생애 또한 온 힘으로 일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멍에 쓴 소의 슬픔과 뭐가 다를까. 코뚜레를 쓴 소의 그림이 ‘소 그리고 인생’을 그리게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그 후로 화백은 코뚜레를 씌운 소를 두 번 다시 그리지 않았다. 소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긴 생의 여정을 돌아보듯 갤러리를 한 바퀴 돌아온 끝에 만난 작품이 ‘소 그리고 웃음’이었다. ‘소 그리고 인생’의 시작이 코뚜레를 쓴 소와 ‘아버지의 눈물’이었다면 갤러리를 한 바퀴 돌아와 만난 작품은 웃고 있는 소였다. 다분히 의도적일 테지만 작품의 배열이 고단한 인생 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벙긋 미소를 짓는 소가 앞서 보았던 노동의 고단함과 어버이의 슬픔, 기도와 절규와 같은 삶의 고단함을 말끔히 걷어주었다. 화백과 인사를 나누고 갤러리를 나오며, 인생의 마지막에 활짝 웃는 것이 바로 모두의 바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글 장정옥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1-01-05

붓으로 풀어내는 시나위자유로움의 한계를 깨다

타필비묵(打筆飛墨).대구에 기인이 있다. 일필휘지로 먹을 치고, 서예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훨훨 날게 한 사람. 그가 바로 붓으로 먹을 친다는 ‘타필비묵’의 타묵 퍼포먼스로 명성이 높은 율산 리홍재 명인이다. 대구 경북의 명인을 찾아 인터뷰를 하며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지역 각계각처의 예술 방면에 기인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율산을 만난 첫 느낌은 진짜 광대를 만났다는 신선한 놀라움이었다. 그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행위예술의 범주를 예측할 수 없고, 그 자유로움의 한계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는 내가 그 동안 인터뷰로 만난 여러 아름다운 광대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온몸에 가시를 담은 밤산. 그 내면에 숨어 있는 진정성을 알리는 방법은 밤산을 이루는 알을 깨뜨릴 수밖에 없고, 알을 깨뜨리는 방법으로 그는 타묵 퍼포먼스를 택했다.말과 글을 굵은 획에 담아 그림인 듯 붓을 치며 자연의 매개물을 화선지에 생생하게 담아내는 방식이 율산에게는 알을 깨뜨리는 행위나 다름없다. 서예를 단순히 사각 프레임에 가두는 전통을 뛰어넘어 세상으로 끌어낸 것은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지만 두터운 자기만의 세계를 깨고 세상으로 걸어 나오는 과정이기도 하다. 진정성을 향한 그의 행보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언제부터 서예를 하셨어요?”“어릴 때부터. 초등학교 5학년?”어릴 때부터 한자를 좋아해서 한자사전을 갖고 놀았다. 한자를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할아버지가 서당을 하셨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의 공부는 완전한 독학이다. 학과공부보다 글씨 쓰기가 좋았고, 그 유별난 취미생활이 그대로 그의 인생이 되었다. 1976년 죽헌 선생의 사숙에서 안진경 서체로 시작으로 모든 서체를 두루 섭렵하고 전각과 문인화 등, 붓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독학으로 갈고 닦은 그에게는 꺼내지 못할 영역이 없다 하겠다.부모님이 혹시 서예를 하셨느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한다. 그에게는 먹물 유전자가 없다. 어릴 때부터 글을 쓰는 것이 좋았고, 한자가 좋아서 반복해서 쓴 것이 전부다. 나무꼬챙이로 한자사전에 있는 글귀를 땅바닥에 옮겨 적을 때 이미 서예의 길은 시작되었다는 말인데, 독학서생이어서 그의 예술 세계가 더 자유롭고 독창적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김천시 감문면 구야리의 평범했던 소년은 자기만의 서체를 찾아 끊임없는 연습을 반복했다. 의도하지 않았던 즐김이 훈련이 되어 오늘의 율산을 만들긴 했지만, 혼자 힘으로 자기 세계를 일궈 나가다 보면 더러 한계에 부딪치기도 했을 것이다.“열정만으로는 힘들었을 텐데요. 한계를 어떻게 극복했어요?”“서예를 버리는 것으로 나를 찾았어요.”서예는 단순히 글을 쓴다는 개념을 초월해서 예술로 진입한 지 오래다. 담뱃갑 포장지와 편백나무 알갱이, 포도 씨, 앵두 씨 같은 자연의 재료를 서예에 활용하며 그의 예술 세계는 새롭게 태어난다. 남다른 그의 생은 한지를 사러 다니던 필방에서 시작되었다. 그를 눈여겨보던 필방 주인 김진구 씨를 만난 것이 1976년이고, 1979년에 그의 주도 아래 반 타의적으로 ‘율림서도원’의 원장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 약관 23세였다. 그는 배우면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작품생활에 심취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타묵’의 삶이 시작되었다. 24세에 첫 개인 전시회를 갖고 일흔일곱 점의 작품을 꽤 높은 가격으로 팔았다고 한다. 그 후 불혹에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가 되었다. 본격적인 타묵 퍼포먼스는 1997년 울산에서 초대형 붓을 휘호할 사람을 찾으며 시작되었다. 그 후 2000년 봉정사 법요식에서 삭발을 하고 휘호하는 모습이 전국에 중계되면서 본격적으로 타묵 퍼포먼스의 작가로 입지를 굳혔다.자고전(自古展). 나로부터 옛 것을 짓는다는 뜻을 지닌 自古展 전시회의 팸플릿을 펼치자 그림 같은 글씨가 살아 꿈틀거릴 듯 생기 있는 모습을 드러냈다. 자세히 보니 여러 팸플릿에 담긴 작품이 모두 큰 글씨와 작은 글씨의 조합이다. 한달음에 써 내린 큰 글씨 주위로 깨알 같이 작은 글씨가 여백을 가득 채우고 있다.“이게 만자행(萬字行)입니다.”만자행은 율산이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일궈낸 작품들의 연작이라고 한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한 자씩 정성 들인 글씨를 얼마나 많이 써야 할까. 오래 전에 서예를 배우러 다니며 雙鶴銘(쌍학명) 144자를 전지 한 장에 담은 적이 있어서 서예를 할 때의 그 지고지순한 인고의 과정을 조금은 알고 있다. 깨알 같은 글자 수천만 개보다 일필휘지로 써 내린 큰 글씨가 차라리 편하게 여겨지는 건 글씨가 작다고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만자행의 ‘萬’은 많음을 뜻한다고 했다. 붓으로 쓸 수 있는 가장 작은 글씨로 화폭을 가득 채우는 방식의 만자행을 보고 있자니 세상사의 한 모습이 보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큰 산이 있고 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런 모습.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림 같기도 한 그 글씨는 분명히 우리네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율산이 만자행을 처음 접한 것은 아버지 회갑잔치 때에 壽자와 福자로 병풍을 만들어 드린 순간부터였다. 천 개의 壽와 천 개의 福으로 이루어진 병풍을 받은 아버지 마음이 어땠을지. 세필로 쓴 작은 글자의 수를 일일이 세어가며 많은 시간을 들여 딱 천 자씩 완성하였다. 아스팔트에 콩을 심듯이 큰 글씨 주위로 작은 글자를 새기며 아버지의 천수를 빌고 복을 빌었을 그 마음이 충분히 짐작된다. 일자일획으로 千壽千福(천수천복)을 써서 오래 살고 만복을 누리라는 뜻의 생애 첫 번째 만자행은 거의 일 년에 걸친 작업이었다. 그 작품으로 병풍을 만들어 아버지의 회갑 기념으로 드렸다. 서예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 그때부터였다.“작품을 구상할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이 뭔가요?”“자연입니다. 물과 불, 바람과 구름, 나무와 돌을 비롯한 자연의 모든 것이 작품의 소재가 됩니다.”그에게는 자연의 흐름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대로 작품으로 환원된다. 자연을 닮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게 바로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까 싶다. 소설가가 소설을 구상하며 인간의 삶을 생각하고 자연의 흐름과 그 놀라운 변화에 귀를 기울이듯이 율산 역시 인류의 바탕이 된 자연이 그를 이루는 실체임을 온전히 인식하고 있다. 글씨도 음악처럼 빠르고 느리고, 길고 짧은 붓의 움직임대로 흐르는 리듬을 갖고 있다며, 서예는 춤과 리듬이 있는 음악이고 회화는 경음악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 선율은 글이 가진 흐름이나 속도에서 나타난다고 한다.필방 주인 김진구 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시작된 율림서도원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글씨로 의미를 전달하는 예술의 생을 일구며 30년을 보냈다. 그가 평소에 제자들에게 이르는 말은 ‘네 것을 만들어라!’는 가르침이었다. 자기 것을 만드는 것은 알을 깨는 행위이다.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 인고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고, 그것은 모든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운명임과 동시에 의무이고 고통이다. 예술가들에게 피해갈 수 없는 단 하나를 들라면 바로 그 말일 것이다. 자기 것을 만드는 것. 율산서도원에서 봉산문화거리의 도심방산장으로 옮겨 앉으며 율산의 생은 굴곡 많은 격동기를 지나 타묵 인생의 절정에 이른다. 서까래와 흰 회벽이 그대로인 한옥에 갤러리와 작업실이 함께 하고 있어서 그의 작품을 가득 담고 있다.“인생철학이 뭔가요?”“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고 할까요?”쓸모없는 것을 아는 자라야 무엇이 참으로 쓸모 있는지 말할 수 있고, 광야를 걷는 자에게는 두 발 둘 곳만 있으면 된다지만, 그렇다고 발 둘 곳만 남기고 주위를 천 길 낭떠러지로 판다면 사람이 그 길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는 그 말은, 주변의 쓸모없는 땅이 있기에 두 발이 딛을 땅이 쓸모 있게 된다는 말에서 유래된 無用之用이다. 장자의 ‘외물편’에 나오는 얘기이다. 율산은 쓸모없는 듯싶은 작은 티끌 하나도 흘려버리지 않고 쓸모 있음으로 만든다. 살아온 모든 순간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처럼 그에게는 삶의 매순간이 소중하고, 자연 속의 씨알 하나조차도 그가 이뤄낸 예술처럼 귀하고 귀하다.율산의 타묵 퍼포먼스는 서예 인구의 저변 확대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인들은 서예를 모른다. 서예는 그저 붓으로 한문을 옮겨 쓴 글씨일 뿐, 그것을 예술로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각 프레임 속에서 잠을 자는 서예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사람들에게 서예는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주는 것으로 율산 리홍재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서예의 실체를 보여준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2-30

뚝심으로 만든 한국형 벨벳, 세계무대를 주름잡다

벨벳 갤러리 ‘영도다움’에 들어서자 붉은 커튼과 초록색 벽지가 시선을 끌었다. 실내장식이 모두 벨벳으로 이루어졌다. 의자의 안감은 물론이고 전시되어 있는 핸드백과 여권케이스를 비롯한 홈퍼니싱의 소품이 온통 벨벳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이 초록색 벽지였다. 의자의 부드러운 안감처럼 벽지 역시 벨벳이었다. 그 초록색이 스칼렛 오하라를 생각나게 했다.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불후의 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비안 리가 역을 맡은 스칼렛 오하라는 영화를 대작으로 만드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전쟁으로 삶의 궁지에 처한 스칼렛이 돈 많은 남자 레트 바틀러를 만나러 간다. 돈을 빌리러 가는 곤궁한 상황이지만 결코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저택의 창을 가린 초록색 커튼을 떼어냈다. 스칼렛의 드레스가 되어준 초록색 커튼의 소재가 바로 벨벳이었다.“벨벳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신 것 같은데. 언제 어떻게 인연을 맺었어요?”“결혼 전부터 남편이 국제 고무공장의 방한화에 쓰이는 털을 납품했어요. 털이 박힌 섬유가 벨벳의 시작이었어요. 비로드가 밀수로 들어올 때였어요.”어느 날 창업주이신 고 이원화 회장이 외국인은 머리를 둘 가졌느냐며, 그들이 만든 것을 우리가 못 만들 이유가 없다면서 벨벳의 조직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벨벳의 소재 개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독일제 벨벳 조각을 들고 우리나라 과학연구소를 다 찾아다녔지만 끝내 조직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어서 이 회장이 벨벳의 조직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 기계의 1미터가 한 폭이면 1:1 조직, 2:2 조직으로 변형을 거듭하며 수많은 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합당한 조직을 찾아내게 되었다. 조직을 성공시켜서 천을 짜냈으니 염색을 해야 했다. 가마솥에 불을 때서 직접 염색할 때였는데, 어렵게 짠 벨벳 한 필을 제대로 염색할 곳이 없었다. 은행에도 돈이 없을 때여서 이 회장은 가공공장을 만들어야 한다며 집안의 사돈 팔촌까지 동원해서 돈을 긁어모았다. 막상 염색을 해보니 솥마다 색이 달랐다. 옷 한 벌을 지으려면 세 마 일곱 치가 필요한데, 한 필에 옷 세 벌이 채 나오지 않는가 하면 물이 빠지고 앉았다 일어서면 털이 눕는 부작용까지 잇따랐다.“소재를 수입하지 않고 고생하며 개발한 이유가 뭘까요?”“수입하면 일은 쉽게 하지만 우리 것을 갖지 못하잖아요.”언제까지나 수입에 의존할 수 없으니 우리 것을 가져야 한다는 이 회장의 절실한 바람이 있었기에 오늘날 벨벳을 세계시장으로 보내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우리 것을 갖는다는 건 그렇듯 누군가가 온 생애를 바쳐야 가능한 일이고, 뼈를 깎는 노력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소재 개발에 매달리며 연구를 거듭한 창업주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영도다움의 오늘이 있다고 여겨진다.영도다움의 ‘다움’이란 말이 재미있다. 자기다움, 아름다움, 사람다움에서 따온 ‘다움’을 브랜드의 이름으로 삼은 창의력이 돋보인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자기다움으로 빛날 때 비로소 진정성을 가지는 것이니. 이는 세계 일류를 향한 영도다움의 열정을 대변하며 그 가치를 더한다. 게다가 이원화 회장이 원단에 새겨 넣으신 세 마리의 독수리 문양으로 ‘쓰리 이글’이라는 브랜드 네임을 얻었다. 날개를 펼친 독수리의 모습을 자카드에 새겨서 영도의 첫음절 Y를 상징한 발상은 독특함을 넘어 브랜드의 자존심을 돋보이게도 한다.이원화 회장은 또 영도벨벳을 견제하는 일본에 맞서서 1980년에 일본산 아세테이트 원사 대신에 국산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쓰는 신제품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영도벨벳은 1996년에 국산 벨벳을 개발해내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분지도시 대구에서 이루어낸 영도다움의 신화는 끝이 없다. 앉았다 일어서면 털이 눕는 약점을 보완하는가 하면, 물세탁을 가능하게 함으로서 벨벳의 접근을 쉽게 하는 것으로 상품의 품질을 최고급으로 끌어올려 우리의 벨벳을 당당하게 세계무대에 서게 했다.IMF라는 외환위기를 맞아서 몸집 줄이기에 나서야 했던 때를 떠올리며 류병선 회장은 잠깐 회한에 잠겼다. 직원을 줄여야 했고 밤늦도록 잔업까지 해가며 워크아웃을 탈출하기에 온 전력을 기울일 때였다, 그 위기의 순간에 외친 말이 바로 ‘하면 된다’였다. 류 회장은 벨벳으로 못할 것이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어려울 일에 부딪칠 때마다 ‘해봤나?’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예전에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한 말이었다. 일을 해보지도 않고 미리 못한다고 물러앉는 것은 류 회장의 방식이 아녔다. 그녀는 일을 시작하던 처음에 빈손이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했다. 처음부터 있어서 일을 시작한 것이 아녔다. 다 잃어도 본전이라고 생각하면 두려울 게 없었을 터.“장학금이라던가, 좋은 일도 많이 하시던데요.”“돈을 쓰긴 하지만 방향도 모르고 쓰지는 않아요.”경제인연합회에서 이혼한 여성을 돕자는 건의가 나왔는데, 류 회장은 못 도운다고 딱 잘랐다. 여성이 되어서 자기가 낳은 아이도 책임지지 못하면서 이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일갈했다. 차라리 미혼부·미혼모는 도운다고 했다. 아이를 버리지 않고 책임지는 마음이 예쁘다고. 개개인 사정이야 있겠지만 자기 가정 하나 못 다스리고 이혼한 여성은 도울 필요가 없다며, 이 사회는 한 남자나 자기가 낳은 아이, 혹은 가정 속의 식구 몇 명을 다스리는 것에 비교할 수 없도록 살벌하다고 한다. 이혼녀와 미혼모를 통해서 류 회장은 작은 비유로 보다 큰 것을 말해주었다.“벨벳의 원조가 어느 나라일까요?”“프랑스 파리라고 해야겠죠.”벨벳은 ‘털투성이의’라는 뜻을 지닌 중세 프랑스어 ‘블뤼’(velu)에서 왔다고 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왕실의 카펫과 커튼, 의자 안감이 모두 벨벳으로 이루어진 상상을 해본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파리 사교계를 몹시 그리워하던 시절, 프랑스의 최고급 원단 역시 벨벳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 역시. 밀수와 수입에 의존하던 벨벳을 우리나라에서 직접 생산해낸 영도다움의 역사는 1960년대에 시작되어 1972년에 수출을 시작하고, 1988년에 1천만 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벨벳 특허만 14종이라니 놀랄 만하지 않은가. 벨벳의 조직을 찾아내고 자재 생산까지 해낸 것이 모두 ‘하면 된다’는 정신이 이루어낸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류 회장은 돈을 벌고 일을 한 것이 행복한 가정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했다.한국에 옳은 벨벳공장 하나 만들겠다며 이원화 회장이 500억을 투자했다. 기계를 리스로 가져온 터라 환율 차이 때문에 폭탄 같은 빚에 떠밀려 부도를 내야 할 입장이 될 즈음, 부부가 다짐한 것이 바로 부도를 낸 부모로 남지 말자는 것이었다. 구조조정을 시작으로 공장을 옮기며 회사의 몸집 줄이기에 나섰다. 그런 어려움을 견딘 끝에 마침내 워크아웃에서 탈출했고 직원들에게 30%의 성과금을 나누어줄 수 있게 되었다.“그때 어떤 마음이었어요?”“너무 기뻐서 직원들에게 큰 절을 했어요. 고맙다.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성과금을 가져갈 수 있게 된 거라고.”때로는 할 말이 없어서 만세 삼창을 부르기도 했단다. 그때 직원들과 함께 외쳤던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해냈다’는 그 말이 바로 류 회장의 철학이다. 그녀는 직원들을 가족이라고 표현한다. 단순히 비위를 맞추기 위한 말이 아니라 진심 어린 마음이어서 직원들에게 큰 절을 할 수 있는 거라며 가족들의 고초를 진심으로 공감했다. 굳은 땅에 물이 고이는 법이다.“어떤 마음으로 사세요?”“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옛말에 ‘열심히 하면 뒷골 야시가 돌본다’는 말이 있어요. 직원들을 가족으로 여기며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가다 보면 어려움을 헤쳐 나가게 되어 있어요.”벽에 걸려 있는 사훈에 ‘머리에는 지혜를, 얼굴에는 미소를, 가슴에는 사랑을, 손에는 늘 일이 함께 하게 하소서’라고 씌어 있다.“코로나의 위기를 맞은 소상공인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드리고 싶으세요?”“위기는 어떤 곳이든 다 있어요. 코로나19 사태를 가족의 중요함을 깨닫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 같아요.”돈이 있다고 다 행복한 것도 아니고, 작게는 가정이고 크게는 직장이 되는 그 ‘가족’의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며, 다시 한 번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남을 나무라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며 말 매듭을 짓는다.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2-23

풍자와 해학으로 관객과 어우러지다

탈놀이의 신명이 전통이 된 마을에 경사가 났다. 1999년 4월 21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국에 와서 73세 생일을 맞았다.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안동 하회마을 담연재에서 여왕과 함께 생일잔치를 할 사람을 뽑기로 영국대사관과 안동시가 협의를 했다. 여왕과 생일이 같은 사람 다섯 명을 담연재로 초대했는데 그 중에서 하회마을에 살고, 탈춤공연도 하고, 장승목각까지 하는 김종흥 목석원 원장이 여왕과 함께 축배를 드는 사람으로 내정되었다. 세계의 시선이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이었다.그 역사적 현장에서 여왕과 함께 축배를 든 김종흥 명인을 만났다. 그가 준 명함에 백발을 날리며 나무를 쪼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 국가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 이수자, 대한민국 장승명인’이라는 이력이 씌어 있었다. 하회마을 입구에서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는 장승들이 모두 그의 작품들이고, 목석원은 명인이 한평생을 보낸 삶의 현장인 동시에 작업장이었다.“하회마을이 고향이세요?”“하회마을 등 너머 중리에서 살았어요. 중리의 살림을 정리하고 다락 논을 사들여 하회마을에 들어와서 장승을 깎고 탈춤을 추었어요.”하회별신굿탈놀이의 인간문화재이신 이상호 선생의 권유로 탈춤을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흥으로 시작한 탈춤이 어느 새 3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지역적인 특성이라고 해야 할까. 안동 특유의 문물과 풍습이라고 할 수 있는 농악과 탈춤이 그를 국보적인 광대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즐겨 쓴 것이 중탈이고 양반탈이었다.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된 것이 1965년인데 그때 이미 마을에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관이 있었고, 공연장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1세대 장인께서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복원해놓으셨다고.하회별신굿탈놀이의 유래는 먼 고려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다. 800년 전에 만든 하회탈의 원형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하회별신굿탈놀이이의 전통 역시 꾸준히 맥을 잇고 있다니 그 뿌리 깊은 탈춤의 역사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코로나 때문에 침체되긴 했지만 지금도 탈춤 공연을 매일하고 있다며, 평일에는 17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고 주말에는 직장인을 포함해서 25명 정도가 출연한다고 일러준다.“탈놀이를 할 때 혹시 그날그날 대사나 춤사위에 변화를 줍니까?“국보로 지정된 탈놀이가 13개나 됩니다. 13개 중에서 탈이 국보로 지정된 것은 하회탈뿐입니다. 마당놀이의 특성대로 간혹 즉흥적인 재담을 곁들이기도 하지만 대사 한 줄 춤사위 하나 바꾸지 않고, 문화재에 등록이 된 그대로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마당놀이를 연상하면 당장 넓은 마당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모습과 둥그렇게 비어 있는 마당에서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이들의 춤사위가 얼른 떠오른다.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며 관객과 재담을 주고받는 마당놀이의 장면은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한두 번은 보았음직한 장면이다. 예전에 남사당패가 그렇게 놀았고, 그 전통을 이어받아 열린 공간에서 관객과 하나가 되는 우리만의 문화가 바로 놀이마당이다. 예로부터 끊임없이 외세의 침입을 받아온 우리 민족은 삶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활짝 열린 마당에 모여 덩실덩실 춤을 추며 액을 막고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 어려울수록, 힘들수록, 흥을 되살려 노래와 춤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던 민족. 마당놀이는 우리에게 삶의 에너지였다.“장승도 깎고 탈춤도 추시는데 어느 쪽이 먼저였어요?”“장승이 먼저였죠. 분재를 하며 나무를 만진 것이 40년인데, 하회탈은 30년입니다. 목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회탈까지 깎게 되었어요.”그 동안 깎은 장승이 육백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그 중 외국으로 나간 것이 이백여 점이라며 탈춤 해외공연의 역사도 그쯤 된다고 했다. 장승과 하회탈의 목재가 같은 종류냐고 물으니, 장승은 소나무로 깎고 하회탈은 오리나무로 깎는다고 한다. 소나무와 오리나무의 쓰임새가 다르다. 소나무는 우리네 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이고,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뒷산 언덕바지에 뿌리를 내려 오래도록 마을을 내려다보는 터줏대감 같은 나무다. 소나무의 친숙한 향과 질긴 생명력 때문에 장승을 깎을 때 주로 소나무를 많이 쓴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하회탈은 오리나무로 깎는다고 한다. 겨울 숲을 둘러보면 나뭇가지 끝에 작은 아기 솔방 같은 열매가 달린 나무가 있다며, 그게 바로 하회탈의 재료가 되는 오리나무라고 한다. 소나무처럼 단단하고 재질이 균일해서 틀어지거나 갈라짐이 적어서 하회탈을 만들기에 적절하다고 한다.“어떻게 해서 나무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까?”“일찍부터 정원을 가꾸고 조형물 만드는 것을 좋아했어요.”어릴 때 집 가까운 주막에 장승이 서 있었다고 한다. 왕방울 같은 눈과 주먹코, 뻐드렁니의 단순한 얼굴에 표정이 있다는 걸 알고는, 소나무에 밑그림을 그려서 깎아나가다 보니 투박하나마 표정을 가진 얼굴이 나오더라고 했다. 한낱 나무에 불과한 것이 한 쌍의 장승으로 완성된 순간, 의미를 가진 존재로 등극했다. 초례를 치른 신혼부부가 그러하듯이 한 쌍의 장승 역시 고운 옷을 입혀 합궁을 치르게 한 후에야 마을입구에 세웠다던가. 끌 자국까지 생생한 장승이 투박한 매력의 자유로움을 뜻한다면 하회탈은 주름 하나까지 섬세하게 그려야만 표정이 나올 정도로 정교한 작업이라고 한다. 장승은 못 생긴 얼굴 그대로 민중들의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하회탈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예술로 여겨진다. 이즈음에는 해학적인 요소로 창의적인 작업을 곁들여 전통대로 만드는 지겨움을 덜어낸다며, 장승도 지역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고 귀띔해준다.“탈춤을 출 때 어떤 역을 맡으세요?”“양반과 파계승을 골고루 맡지만 파계승을 더 많이 합니다.”왜 파계승일까? 체격과 표정의 전달 면에서 파계승이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힘들게 나무를 깎아서 장승을 만드는 것처럼 탈춤을 추는 그의 춤사위 역시 온몸으로 살아온 사람만의 풍부하고도 곡진한 삶이 배어있기 때문에 공연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게 아닌지. 파계승의 탈을 쓰고 불교와 승려의 타락을 풍자로 꼬집는가 하면 양반탈을 쓰고 양반계급의 위선과 독선을 풍자로 조롱하며.어릴 때 동네 풍물놀이에 끼어들던 그 흥을 어쩌지 못하고 김종흥 명인은 30년 동안 탈춤을 추며 살고 있다. 여왕이 탈춤을 보며 발로 장단을 맞추고 어깨를 들썩이며 흥을 돋우더라며 웃는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일 테니 오래 기억할 만하다. 여왕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 같다.“탈춤이 안동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것이 언제부터예요?”“고려 중엽 때부터 당제를 지내며 마을을 지키던 전통이 식민지 시대에 잠깐 맥이 끊겼다가 해방이 되고 복원되었어요.”명함에 씌어 있지 않지만 자신이 당제를 지낼 때 제사장에 해당하는 산주라고 귀띔해준다.“산주는 어떤 일을 하죠?”마을에 궂은 일이 있을 때, 혹은 정원대보름 동제를 지낼 때 산주는 보름 전부터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제사를 준비한다. 산주가 주산에서 성황신의 내림을 받아야 탈놀이를 시작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하회별신굿놀이가 벌어지면 산주는 제를 올리며 신이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신이 무동을 타고 내려오면 집안에 액이 있는 사람이 재물을 건네며 소망을 비는 것으로 하회별신굿탈놀이의 10마당이 시작된다.산주로 지정되면 죽을 때까지 그 직함을 가지고 마을을 지켜야 한단다. 마을에 큰 재앙이 닥쳤을 때 산주를 중심으로 광대들이 모여 하회별신굿탈놀이를 한다고. 그날만은 하회탈을 쓴 광대들이 피지배층의 입장이 되어 풍자와 해학으로 지배계층의 잘못을 맘껏 꼬집으며 할 말을 다 한다며, 지배계층의 양반들 역시 그 탈놀이를 보며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계층 간의 불화와 갈등을 씻는다고 한다.오늘날까지 관광 상품화된 탈춤은 고려시대 이후 줄기차게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탈춤은 그대로 관객들과 한판 어우러지는 재담이라며, 김종흥 명인은 현대적 감성으로는 다소 괴리감이 느껴질지 모르지만 우리 선조가 살아온 토속적인 풍습으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고 한다.뒤를 이을 제자를 키우고 있느냐는 물음에 명인은 민속학과를 전공한 아들을 가르친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가까이에서 보고 자란 사람만큼 잘 배운 사람이 있을까. 한길을 걸어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미래가 훤히 보인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2-16

연극이 끝나고 홀로 객석에 남아

때로는 나무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권도훈 대표가 처음 이상화 생가터를 발견했을 때, 그 집은 4년 동안이나 거주자가 없는 상태로 버려져 있었다. 그 집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는 광고대행사 대표인 동시에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강의를 하던 시각디자이너였다. 동업을 하던 선배의 자살과 사랑하는 동생까지 잃은 이중고를 겪으며 정신적 공항으로 사업체와 강의를 모두 내려놓은 상태였다. 이전할 사무실을 찾아다니던 그가 우연히 그 집 마당에 발을 들였는데 그때 그를 사로잡은 것이 바로 권 대표가 ‘상화나무’라고 이름 지은 한 그루의 라일락나무였다. 온통 뒤틀린 상태로 비스듬히 누운 나무를 보며 그는 충격과 감동으로 얼어붙었다. 4년 동안이나 버려져 폐허나 다름없는 집에 감도는 어떤 기운이 그를 감쌌다.정신이 얼얼한 상태로 그 집을 보고 나오던 중 골목어귀에 붙어 있는 ‘이상화 생가터’라는 팻말을 발견했다. 그 순간 그는 와! 하고 함성을 울렸다. 그날부터 그의 생몸살이 시작되었다. 집은 갖고 싶은데 주머니는 텅 비었고, 그 집에 다가설 방법을 찾다 호된 몸살을 앓았다. 경제적 절벽에 부딪친 그가 찾아낸 것은 국토부 산하의 도시재생 사업의 방편이었던 분양보증 ‘허그(HUG)’를 통한 재생사업 프로그램이었다.“이 집이 온전한 이상화생가 그대로인가요?”“안타깝게도 생가는 허물어졌고, 라일락뜨락은 1956년에 새로 지은 한옥입니다.”상화생가의 자료를 찾던 중 400평이 넘던 상화 생가터(서문로 2가 11번지)가 1956년에 4필지로 나눠진 것을 알았다. 웃방망치길을 끼고 있는 11-1번지는 상화의 사랑채 ‘담교장’이었고, 11-3번지가 바로 지금의 ‘라일락뜨락’이었다. 독립운동의 주역들이 모여서 나랏일을 도모하던 상화의 생가. 19세의 이상화 시인이 독립선언서를 만들어서 웃방망치길로 빠져나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상화 시인이 ‘담교장’이라고 이름 붙인 사랑채였다.이미 땅이 나눠지고 본가가 허물어져 주인이 바뀐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권 대표는 이상화 시인이 시를 쓰고 독립선언문을 작성하던 생가터에 그를 지켜보던 200여 살의 라일락나무가 살아있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상화생가를 모델로 도시재생 프로그램에 응모해서 당당하게 당선이 되었다. 그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그는 마침내 집을 갖게 되었고, 사면초가였던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세가 기울어져 생가를 처분하고 여러 번 이사한 끝에 이상화 시인이 마지막 4년을 보낸 곳이 지금의 이상화 고택이었다. 이상화 시인이 돌아가신 날이 4월 23일인데, 공교롭게도 그날 한 날 한 시에 빙허 현진건 선생님도 세상을 떠났다. 4월에 태어난 이상화 시인은 4월에 그렇게 떠났다. 처음 상화생가에서 라일락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권 대표는 4월에 돌아가신 이상화 시인이 꽃으로 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시각디자이너의 감성이 매우 문학적이다.“본업과 전혀 다른 길인데, 어떻게 카페를 생각하게 되었어요?”“커피를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카페는 사람들과 쉽게 조우할 수 있는 곳입니다. 조앤 k 롤링이 엘리펀트라는 카페에서 ‘마법사의 돌’을 써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듯이, 저도 다양한 분들과 문화교류를 하고 싶었어요.”카페에 한 무리의 손님들이 들어왔다. 권 대표가 손님들을 위해 커피를 내릴 때 카페 안팎을 둘러보았다. 마당에 비스듬히 누운 라일락나무는 언제 봐도 정겹다. 카페테리어의 한편에 그림을 그리는 책상이 있고 책상에 대나무로 짠 등이 밝혀져 있다. 이안 맥밀런이 찍은 비틀즈의 ‘애비 로드’ 재킷 사진이 벽에 붙어 있었다. 상화생가의 주인답게 마스크를 끼거나 학생모를 쓴 이상화 시인의 초상화가 카페 곳곳을 지킨다. 권 대표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어서 이상화 시인의 초상화도 직접 그렸다. 사진인 듯 컷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상화 시인과 권 대표가 서로를 살리는 듯,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친근감이 감돌았다.사업 실패와 막냇동생을 잃은 슬픔으로 생의 바닥까지 내려앉은 권 대표는 상화나무를 보며 다시 살아볼 꿈을 가졌다. 가장 낮은 곳에 내려앉은 그에게 이상화 생가가 운명 같은 끌림으로 그를 당겼다고 여겨진다. 그는 그 끌림에 이끌려 4년간 버려져 있던 폐허에 안겨 자기만의 희망을 일구었다. 이상화 시인과 관련된 서적에서 문서상의 오류까지 찾아낼 정도로 그는 시인의 역사 찾기에 열중했다. 그러라고 권 대표를 그 자리로 불러들인 것인지.“상화생가를 중심으로 대표님의 인생이 바뀐 느낌이에요. 어떠세요?”“사람들이 이상화 시인과 어떤 관계냐고 물을 때마다 존경하는 시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 외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어요. 그분은 목숨을 바쳐 시대의 불운과 싸웠고, 저는 그 시인의 정신에 고무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이상화 시인을 증명하는 일. 권 대표는 그 집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며, 그저 사람들이 쉬고 싶을 때 와서 쉬었다 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시각디자이너였던 그가 강한 운명적 끌림에 의해 그 집에 머물게 된 것 역시 그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엔 어떠한 계산도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이 우연히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만남일 뿐이라고 한다.“대구의 중심에 이런 문학적 공간이 생긴 걸 저는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문학을 생각하셨나요?”“조앤 k 롤링이 자주 가던 카페를 생각한 건 사실이지만 저는 문학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곳이 본래 생가터였던 만큼 이상화 시인이 문학적 구심점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그의 웃음이 소탈하다. 문학과 동떨어진 방외인이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조용히 다가와서 머물다 가는 사람들이 작가들이라면, 그보다 자연스러운 만남이 어딨을까. 달리 말이 필요치 않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에 젊은 목숨을 바쳐 저항시를 읊던 이상화 시인의 생가터이고,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라던 나무가 저렇게 의연히 버티고 있는 데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실은 작가들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따져보면 작가들보다 외로운 이들이 있을라고. 누가 고립시킨 것도 아니고, 제 운명대로 스스로를 옭매는 자발적 고립자들. 그들이 조용히 머무를 곳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2년 동안 혼자 놀았다면서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어요?”“죽을 정도로 괴로운 순간에 저 나무가 저를 구해주었어요. 저 나무를 보는 순간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어요. 시인이 시로 시대의 불운에 항거했다면 나무는 몸으로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4년간 집이 비어 있었는데도 나무는 저 홀로 꽃을 피우며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커피장사도 처음이었고, 정신적 공항 상태가 깊을 때여서 이 집에 머무른 지난 2년간 너무나 평화로웠다고 했다. 손님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울 지경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얼마간 문을 닫고 있는 동안 혼자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적응할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많은 위안을 받았다.“코로나가 덮쳤을 때 병원으로 커피폭탄을 나르셨죠? 그 얘기 좀 해줘요.”“마스크를 낀 이상화시인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손님 중 한 분이 전화로 커피를 살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의료진들이 커피 마실 곳이 없다고.”그 얘기를 듣고 그는 더치커피를 내려 폭탄처럼 생긴 작은 용기에 담았다. 한 방울씩 내린 커피를 용기에 담아서 병원으로 가져갔다. 밀려드는 환자들에게 치여 의료인들이 영안실에서 쪽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권 대표는 100인분의 커피폭탄을 2~3일에 한 번씩 코로나 거점병원으로 열 번쯤 날렸다. 커피 한 방울이 죽음과 싸우는 의료진들에게 위로가 되어 주기를 바랐다.막냇동생이 마지막을 보낸 병원으로 커피를 나르며, 그는 살아서 장례식을 치른 동생을 생각했다. 사경을 헤매는 동생을 보며 그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동생이 딱 한 번만 깨어나게 해달라고. 기적처럼 동생의 의식이 돌아왔다. 그는 동생에게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동생은 보고 싶은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새벽에 조용히 떠났다. 동생의 죽음을 경험할 탓일까. 동산병원에 커피를 나를 때의 마음이 그랬다. 사람이 살고 죽는 문제에 비하면 살아가며 겪게 되는 크고 작은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어떨 때는 나무 같아요, 카페를 지키는 제 자신이.” 사람들이 다녀간 후, 텅 빈 가게에 앉아 나무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나무처럼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는 것 같다고 했다. 아무도 묶는 사람이 없지만 그는 스스로 그 달가운 형벌을 감당한다. 기꺼이./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2-09

리듬있는 삶의 공간을 짓다

복합시설, 도시계획, 재개발계획, 공동주택은 물론이고 도서관, 평생학습관, 체육관, 공연장 같은 공공시설까지, 도시가 필요로 하는 전반적인 프로젝트를 설계하시는 건축공학박사 이창환 씨를 토담건축사사무소 아래의 카페에서 만났다. 어떤 건물을 설계했는지 물으려는데 먼저 말씀해주신다. 누구나 익히 알 수 있는 건축물로 아양아트센터와 포항 뱃머리마을 평생교육원, 안동하회별신굿놀이공연장을 비롯해서 대구대, 금오공대, 영남이공대 등의 도서관과 체육관 기숙사, 대구대학교 경산캠퍼스 외의 다수 건축물을 이 건축사가 설계했다고 한다. 건축물은 한 번 짓고 나면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며 주변 환경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라며, 항상 프로젝트마다 최선을 다 한다며 탁자에 두꺼운 책자를 내놓았다. 제목이 ‘콘셉트(concept)’인데 책장을 들추자 디자인이 돋보이는 건물의 위엄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책자 안에 있는 건물이 모두 이 건축사가 설계한 건물들이었다.“그림으로 봐서 그런지 건물이 화려해 보이네요.”“공모전 중심으로 설계한 건물이어서 그럴 겁니다. 시대와 소통하면서도 지속성을 지닌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 모든 건축가들의 염원인데, 공모전은 그 프로젝트만의 특별함으로 인정받아야 하고, 우선 실용적인 기능과 디자인이 두드러져야 하거든요. 설계경기에 치중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외양이 화려해졌어요.”“그 동안 지으신 건물 중에서 특별히 손꼽을 수 있는 건물이 무엇인가요?”“내 손으로 지은 건물이면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 인상이 깊은 건물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포항 뱃머리마을 평생학습원과 아양아트센터를 들 수 있겠어요.”연꽃 봉우리 같기도 하고 상모돌리기를 연상하게도 하는 뱃머리마을 학습관은, 문화의 장으로 지어진 공간 같지 않게 우아하면서도 내면이 실용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지역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어진 점을 높이 들었다. 그런가 하면 아양아트센터는 적은 비용으로 다양한 공간을 담은 공공시설로서 실용적인 면에서나 기능적인 면에서 보나 체육과 문화를 함께 공유할 수 있게 잘 지은 건물이라고 했다. 뱃머리마을의 평생학습관이 외유내강의 건물이라면 아양아트센터는 내유외강의 건물이라고 할까.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다. 뱃머리마을의 학습관이 아름다운 외양으로 주목을 끌었다면 아양아트센터는 주변 환경 과 잘 어우러지고 내부시설 또한 수영장까지 빠짐없이 갖춘 실용성이 높은 건물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아양아트센터라면 팔공산이나 공항 가는 길에 동부의 랜드마크처럼 서 있는 건물이 아닌가. 친구가 거기서 날마다 수영을 하고 있으니.“큰 건물을 한 점 설계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건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아양아트센터는 거의 일 년 걸렸습니다.”이 건축사는 건축가이면서 의료재단 이사 또는 장학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대구 영광학원 특수학교의 장애인을 위해서 꾸준하게 기부를 해오고 있다. 설계사무실 운영과 대학교 건축학 학도를 위해 20년 이상 강의를 한 분이시다. 책자를 보니 함께 일하는 직원이 열댓 명이나 된다.“사무실 직원을 뽑을 때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저는 경력사원채용보다는 건축학과 5년을 졸업하고 3년 실무경력을 쌓아야 시험 칠 자격이 주어지는 졸업예정인 건축학도를 우선적으로 채용하고 있습니다.”그는 자신이 짓는 건물만큼이나 실용적인 그릇이다. 장래가 보이는 제자들이나 신입생들을 가르쳐서 크게 쓰려는 의식은 아무나 쉽게 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 그러지 않는가. 잘 가르쳐서 일 좀 하겠다 싶으면 높은 임금을 찾아서 점프하는 것이 다반사이거늘. 아예 그렇게 하라고 자리까지 깔아주니 배우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스승이다. 이런 사람이 더 많은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돈의 논리 앞에 자신의 이익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렇게 배워서 나간 인재들 중에 큰 회사나 건축설계 분야로 진출해서 잘된 제자들이 많다니 내가 다 고맙다.“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아름다운 건물은 어떤 것입니까?”“건축은 종합예술입니다. 건축을 제대로 알려면 팔십쯤, 한 생애를 살고 난 후에야 진정한 건축물을 알까 말까인데, 우리나라는 건축가들이 너무 일찍 피고 너무 일찍 시드는 경향이 있어요. 아까운 인재들이 너무 일찍 사라지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젊을 때는 우선 봐서 형상이 특이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형태를 좋은 건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좋은 건축은 기능이 중요하기 때문에 생활하는 사람이 안락감을 느끼며 편해야 한다고. 이 건축사의 말씀에 의하면, 자기 집을 세 번만 지어보면 진정한 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머무는 사무실을 짓는데 계획 기간만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자기 입장에서 집을 지어보면 모든 면에서 심사숙고의 시간을 거치기 때문에 비로소 건물다운 건물이 완성되는 과정을 실감할 수 있다. 건축은 사람과 같다는 말씀이 마음에 쏙 들어온다. 덕지덕지 화장을 한 모습보다 본래의 모습이 아름다운 건물이 진정한 건축물이라고. 계명아트센터를 짓기 전에 외국에 나가서 수많은 건물을 보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붉은 벽돌과 흰색 벽돌의 조화로움으로 지어진 클래식한 건물이 눈앞에 훤히 떠오른다. 그곳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뮤지컬의 선율과 율동까지 생생하다. 건물을 지을 때 외관도 단정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기능성이 뛰어나야 하기 때문에 대학교육시설과 도시공간이 맞닿는 부분까지 생각하고 설계를 했는데, 나중에 건축물이 현상설계 당선작의 원안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필요에 의해, 외관이 변형되는 걸 보며 마음이 안 좋았다고 속내를 살짝 비추었다.“집값이 무섭게 치솟는 현상이 우리나라만의 것인지 아니면 전 세계적인 형상인지 궁급합니다.”“집값이 오르는 건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봐야 합니다. 복합적인 문제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주택이 자본주의의 또 다른 권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 현세대에, 집의 재산적 가치와 둥지로서의 가치 중에서 어디에 더 큰 의미를 둬야 할지 모르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요즘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은 부동산이 있으면 일단 사들이고 봅니다. 몇 층이고 환경이 어떤지에 대한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들은 투자적 가치로서 부동산을 바라볼 뿐입니다.”오늘날 도시의 불균형이 극심한 것은 애초에 도시계획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온 나라가 아파트화 되는 비정상적인 현상이 불안한 미래를 예고하지만 이제는 너무 나가버려서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말았다.“건축에 대한 선생님만의 철학은 무엇입니까?”“건축물이 곧 사람입니다. 건축을 할 때 가장 먼저 그 집에서 살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건축물은 그 안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며, 자칫 건축가의 기호대로 건축물을 지을 우려가 있는데, 가장 조심해야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남에게 보여주기보다 건축물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패턴에 맞추어서 지어야 한다고. 그 집에서 살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사는 사람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집을 짓겠다는 마음이어야 한다고 귀띔해주신다.“건축을 할 때 혹시 전통을 생각하시는지요.”“영천시립도서관은 건물을 지을 때 전통을 의식하고 지었어요. 우리 전통 가옥의 서까래를 재해석해서 건축물에 인용하고, 그것을 새로운 기법으로 만들었고. 그런가 하면 뱃머리마을의 평생학습관은 우리 전통의 상모돌리기에서 착상을 가져왔는데, 부포를 세워 고갯짓을 할 때 연꽃 봉오리처럼 보이는 상모돌리기의 동작을 가져왔기 때문에,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건축물이 사물놀이 형태를 띱니다. 남쪽으로 형산강이 흐르고 있는 모습까지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어떤 건축을 남기고 싶으세요?”“일반인은 자기 집을 평생에 한 번 짓습니다. 한 번이기 때문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 세밀하게 설계해야 합니다. 의사는 의료사고가 나면 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만 건축가는 그 속에 사는 사람 모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의사들보다 더 조심해야 합니다. 가족 전부의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점심시간이 되며 카페에 손님이 많아졌다. 의자소리, 말소리, 쟁반소리.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천장이 이층 높이 뚫려 있고,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식탁이 놓여 있는 카페 천장 위로 토담설계사무실의 모습이 살짝 비친다. 어쩌면 사무실 직원들이 카페로 점심을 먹으러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를 떴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2-02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곳서 최선 다하리

의외로 담담했다. 지난 4월 총선 대구경북에서 미래통합당 공천을 받은 후보자 중 유일하게 낙선한 이인선 전 경북도경제부지사를 만나러 갈 때만 하더라도 아직은 낙담이 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막상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눠보니 여유로움이 넘쳤다.대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와 석사·박사 과정까지, ‘식품미생물학과’라는 실용학문으로 이학박사를 취득한 후에 계명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이 전 부지사는 여성으로서 대구경북에서 적잖은 자취를 남겨 회자되는 얘기가 많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ST) 원장을 거쳐 계명대학교 부총장을 지냈으며, 2011년 경상북도 정무부지사에 취임하고 4년 동안 정무와 경제부지사를 역임했다. 학계와 정계에 몸담는 동안 열정적으로 도전, ‘일벌레’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지금 어떤 일을 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교수와 미생물학 면역학 연구자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지역에 국가기관을 만들어서 기업과 학생들을 지원하고 자원을 키우는 일을 하고 있어요.”기업이 잘 되어야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 지역에서 둥지를 틀고 살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의지가 그녀만의 아우라를 내뿜는다. 학생들을 가르치던 학자로서의 면모와 정계 일선에서 쌓아온 내공이 그녀의 전체적인 커리어를 형성해 준 느낌이었다. 지역협력연구소장으로 10년간 나라 일을 하고 대구과학기술원 원장을 지내며 대구시와 기업, 학교의 컨소시엄으로 전방위적인 일을 하며 늘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려고 애썼던 그녀다.그 노력을 평가받아 2011년에 과학기술유공훈장을 수상했다. 할아버지 고(故) 이준석 지사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며, 나라 일에 헌신하라는 운명을 타고났나 보다고 한다. 국제소화기암학회 젊은 과학자상과 제1회 대구시 여성대상, 여성공학인 공공부문 대상, 한국지방자치경영대상 지역공헌특별상 등 수상 경력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장, 제4대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장 등 이력도 화려하다.제21대 총선에 출마, 역전된 결과로 좌절하고 말았지만 그녀는 언제든 불러주면 국민을 위해 일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당찬 결의를 보였다. 2019년에는 산업부에서 주관한 전국경제자유구역 성과 평가에서 개청 이래 처음으로 최우수 등급을 달성하고, 한국지방자치경영대상에서 지역공헌특별상을 수상하는 등 대구·경북 경제자유구역 발전에 기여한 것을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소회를 피력했다.-좌우명이 무엇인가요“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있죠. 중국 당나라 임제선사의 언행을 담은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말인데, 수처작주는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뜻이고, 입처개진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모두 진리의 자리이니,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겠다는 뜻입니다.”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지역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경제 부지사를 지낸 관록의 이 전 부지사는 아직도 에너지가 넘쳤다. 대구·경북민들이 맡기는 것이면 무슨 일이든 다 해낼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당찬 의지를 내보였다. 대학과 공직에서의 오랜 경험을 지역구와 국가를 위해 더 낮고 뜨거운 가슴으로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는 뜻도 숨기지 않고 쏟아낸다. 서로 성격이 다른 구미의 창조경제핵심센터와 포항의 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히든챔피언벤처가 탄생하기를 기대하며 청년들에게 많은 일자리를 주려는 꿈을 안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그녀의 꿈은 아직 유효하다.-자신의 꿈에 이르기 위해 청년들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이 전 부지사는 현대의 청년들 사이에 맴돌고 있는 ‘3포’를 무척 걱정했다. 3포란 취업을 포기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까지 포기하는 심각한 상황을 이르는 말인데, 지금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취업이고 경제적인 바탕으로 홀로 설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코로나19로 어려움과 곤궁함에 빠진 청년들을 진심으로 염려하기도 했다. 이 부지사는 말한다. 자신이 스스로를 일으켜야 한다고, 세상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살얼음판인 것을 한시도 잊으면 안 된다고. 자식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던지고 싶지만 어머니 아버지도 대신 살아줄 수가 없는 게 삶이라고 조언한다. 삶이 모질고 가혹한 것은 대타를 허용하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라고 거듭 역설한 그녀는 목표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매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특히 여성들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했다. 자신 역시 여성이어서 받았던 불합리한 면을 언급하며, 이 사회는 아직도 여성에게 불신을 갖고 있으며, 여자와 남자 사이의 차이를 100%라고 꼬집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들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삶 자체가 생존경쟁의 연속이고, 세상은 가차 없는 전쟁터이니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서는 여성이 가일층 스스로를 가꾸고 키워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어떻게 해서 지역사업과 정치 쪽에 발을 들이게 되었나요.“의과대학 면역학 연구원을 맡은 것이 시작이었어요.”이 전 부지사는 이과 학문이 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책적으로 연결돼 공직에 들어서게 되었다. 식품가공학과 교수였던 그녀는 대구과학관 유치, 생산기술연구원, 기계연구원, 정보통신연구원 등 수목원에서 테크노폴리스까지 13km의 긴 터널을 뚫으며 20년간 공직 관련 길을 걷게 된다. 그 과정에서 지역을 위해 헌신하고 사는 게 자신의 일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레 접목됐다. 그런 마음가짐이 그녀를 여성 최초의 전통미생물자원연구센터장과 계명대학교 대외협력부총장을 지내게 했다. 또 여성 최초의 대구경북과학기술원장과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장으로 일하며 매순간마다 온 힘을 다했다.-총선에서 홍준표 의원에게 졌는데 그때 어떤 마음이었어요.“부족했기에 패배했을 거라 생각했어요. 운도 없었고… 여성이어서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총선에서 졌다는 원망을 들을 때는 솔직히 약간 섭섭했었지요.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대구 선거 지형이 아직은 여성을 약하다고 판단하는 인식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제 바뀌었으면 합니다.”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되면 다 받아주는, 기준 없는 당권의 체제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 그녀는 말 속에 총선 패배의 아쉬움이 묻어났다.-교수직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정치인이 아니라 미생물학을 연구하며 학자로 살다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는지요.“그렇게 살 수도 있었는데, 운명의 흐름이 나를 정계로 이끌었어요.”-지금 다시 연구자로 돌아간다면.“다시 그쪽으로 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학생들이 벤처 창업이나 기업에 취업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지역에서 헌신하는 겁니다. 그 분야는 다른 일보다 더 잘 할 자신도 있구요.”내강외유(內剛外柔)! 그녀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 말이 서너 번 떠올랐다. 최초의 여성 부지사로 테크노폴리스 터널을 뚫는데 필요한 예산타당성을 따낼 수 있었던 것도 내면에서 조용히 끓고 있는 강한 힘의 작용으로 여겨졌다. 온유하면서도 차분하게 한 걸음씩 내디디며 먼 일까지 내다보는 직관으로.-자신의 자리에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으세요.“요즘 그간의 발자취를 자주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직은 모자라지만 정말 지역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잘 살았다는 말을 들어야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대구 경북도 이제 지역에서 평생을 부대끼며 산 인사들을 좀 더 포용해 줬으면 합니다.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은 임기 동안 머물다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지역 출신 일꾼들은 다르잖아요. 우선 눈에 보이는 화려한 스펙이나 배경만을 주목하기보다 정말 제대로 일을 하는 사람을 불러서 아낌없이 능력을 활용하고 발휘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지역사회 전반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제대로 된 일꾼을 놓치지 않는 지역사회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인선 전 부지사. 그녀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면역학교실 연구원으로 있을 때 암 예방 연구와 장기이식의 조직적합성을 10년간 연구했다. 함황식물인 브로콜리, 양배추에서 추출한 예방 물질을 췌장암에 걸린 햄스터에 먹여서 암 예방 효과를 살피는 연구였고, 현재 캐비신이란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어떤 식품이 암으로 표식되기까지 8년이 걸리는데 1992년에 우리나라와 일본재단에서 15명을 각 분야별로 선정한 선진연구 교류에 선발돼 암 예방 연구에 18개월을 보낸 그녀가 자신만의 연구를 계속했더라면 어땠을까.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면서 그런 생각이 문득 든 것은 그녀가 지역사회와 정치에 쏟은 열정이었더라면 암 연구 분야에서 더 큰 업적을 쌓았고 빛났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1-25

오케스트라 선율로 아웃사이더의 손을 잡다

1999년에 사단법인 그랜드심포니오케스트라를 창단한(전문예술인 2호) 박향희 단장을 만났다. 그녀를 만난 곳은 문화파출소이다. 그녀는 경찰들이 떠난 빈 파출소를 지역 주민들의 문화향유공간으로 바꾼 문화보안관이기도 하다. 파출소를 문화공간으로 활용했다는 발상이 대단히 창의적이다. 2016년 문화체육 관광부와 경찰청이 협업을 통해 도원치안센터를 문화예술치유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 변화 과정의 중심에 박향희 소장이 있다. 그랜드오케스트라의 단장이라는 막강한 지위가 있지만 문화파출소에서만은 ‘소장’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린다.5년 전에 그녀는 문화예술 교육이라는 아이템에 대한 공모를 통해 막강한 지원 인파의 벽을 뚫고 문화보안관으로 낙점이 되었다.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오케스트라 단장으로 교육활동에 오래도록 몸 담아오는 동안 문화예술 강의는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 자신감이 그녀를 그 자리에 우뚝 서게 했다.“문화파출소는 어떤 곳인가요? 올바른 개념을 일러주시겠어요?”“문화예술교육 인구 저변확대를 위한 공간입니다. 클래식 악기강좌와 서예, 꽃꽂이, 캘리그래피, 다도 수업 등의 다양한 문화강좌로 코로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주민들의 심리적 안정을 돕고 목공예와 바리스타 교육, 각 나라별 특별한 요리강좌로 일상의 새로움을 추구하기도 합니다.”시민의 안전을 지키던 경찰 대신에 예술 강사들이 와서 주민들을 위한 강의를 하고, 사무실과 당직실, 민원실로 쓰던 방을 강의실 삼아서 어린이들에게 바이올린과 첼로를 가르치고, 어린이 명예 연주단을 발족해서 합주도 한다. 파출소의 원주인이었던 경찰이 주민들의 생활안전을 도왔다면 문화파출소는 음악으로 지역 주민들의 심리적 안정을 돕는 점이 조금 다르다. 공권력이 음악으로 바뀌었을 뿐, 주민들의 치안본부센터라는 본래의 의미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5년이면 어느 정도 성과를 타진해봄직 한데, 어떤가요?”“처음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성과를 내고 있어요.”그녀는 문화지킴이가 되면서 달서구로 이사를 오고, 주민자치위원회와 환경단체에 참여하며 함께 활동을 했다. 그분들에게 문화파출소가 어떤 곳인지 알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어느 때고 자신은 잠시 경영을 하다 훌쩍 떠나면 그만이지만, 나중에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문화파출소를 운영해나갈 때를 대비해서 기초를 단단하게 다져놓을 필요가 있다며, 그녀는 문화파출소 초대 소장으로서의 굳은 의지를 내보였다.“교육지침이 뭔가요.”“문화 저변 인구를 확대한다는 생각으로 클래식을 비롯한 모든 문화예술을 가르치고 있어요. 어릴 때 접촉한 문화가 어른의 인성을 만들어 가니까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문화를 접촉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게 바람직합니다.”공예, 치유, 우울증을 앓는 사람을 위해 심리치료, 다도 수업을 하고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얼굴을 익히며 활동하다 스스로도 몰랐던 재능을 발굴해서 주민강사가 되기도 한다. 재능 활용은 참으로 바람직한 방안이다. 문화파출소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적 출구가 되어 그 활용도를 높인다면, 문화의 저변확대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 되니 개인적으로도 보람이 클 것 같다. 사람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어느 누구든 자신의 재능을 내보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소득을 떠나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계기가 될 터이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고 사는 건 자신의 삶에 가치를 더함과 동시에 지역주민을 돕는 충만감을 얻게 될 것이다.“문화파출소를 지키는 인원이 몇 명이에요?”“저를 포함한 예술 강사가 30명이지만 간혹 외국인 예술가를 초빙하기도 하고, 지역 주민들이 강사로 참여하기도 해요.”“교육의 효과나 성과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시는지요.”“저의 오랜 예술 활동과 교육 경험을 살려 한·일 교류음악회도 열고, 국내는 물론 유럽 정상급 음악가들을 초청해서 공연기획도 합니다. 올해는 2020년 대한민국 어린이 청소년 페스티벌을 경주에서 개최했어요.”삶에 음악을 가까이 하는 문화저변 확대를 위하여 경찰청과 협력해서 어린이 명예경찰 연주단을 만들고 음악으로 사회경험을 하게 해준다. 3호선 모노레일에서 연주회를 갖고, 버스킹으로 거리음악회를 열기도 했는데, 이즈음에는 어린이 연주단의 초청공연이 많은 편이라고 한다.어릴 때 접촉한 문화는 곧 인성이 된다.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문화 접촉의 다양한 기회를 주자고 말하는 박향희 단장.“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회가 있을 텐데요.”“녹향 헌정 음악회, 전국투어, 베르디 페스티벌 초청공연 등 큰 보람과 사명감을 느끼게 해준 연주가 많았죠. 매년 연말마다 가족 연주회를 가지는데, 27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공연을 했어요. 최고의 연주를 위해 대성그룹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셨어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올해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히 공연을 했다고 그녀가 슬쩍 자랑스러움을 내비친다. 열 번 중에 한 번만 실패해도 나머지 아홉 번의 수고가 날아가기 때문에 마지막 공연을 마치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지 못한다. 꽉 짜인 연주 일정에, 문화파출소까지 운영하고 있는 박 단장이 큰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많은 일을 하자면 예산이 필요할 텐데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물으니 대구시에서 주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틈만 나면 협연을 위해 뛰어나간다. 그녀에게는 책상이 따로 없다. 보안관 일을 하며 기획과 섭외 메세나 운동으로, 무에서 유를 만드는 운영에 바빠서 책상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어떤 철학으로 일을 하세요?”“내가 가진 재능이 음악이고, 그 재능을 활용하는 게 음악을 하는 저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궁극적인 목표는 질적 삶의 가치를 높이는 거예요.”음악은 인간이 함께 할 수 있는 최고의 문화자산이고 그걸 최대한 활용하는 게 그녀가 해야 할 일이라며, 사회를 위해 봉사를 한다는 마음으로 오케스트라와 문화파출소 일을 한다고 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고 가장 행복해 하는 일을 하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며, 경제적 출혈이 심해서 어려움도 많지만 그녀는 스폰서의 지원만 바라보기보다 뛰어다니는 쪽을 택한다. 그게 음악가로서의 자존심이기도 하다.“대구의 음악 수준이 어떤가요?”“낮아요. 지역성이 너무 강한 게 방해가 되고 있어요. 더 좋은 음악회를 열어서 누구나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시장을 개방하는 것이 중요해요.”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그녀는 단조로 된 음악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뒤늦게 어려움을 많이 겪다 보니 자신의 감성에 한이 많은 걸 느낄 때마다 음악을 들으며 심리적 슬픔을 달랜다며 쓸쓸히 웃는다. 개인적으로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좋아한단다.“어떻게 해서 오케스트라 단장을 하게 되었어요?”“제자들과 한 달에 한 번씩 실내악 공부하듯이 시작했어요. 하다 보니 단원들이 많아지게 되어 지금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되었어요. 할아버지가 많이 응원해주셨고 기를 살려주셨어요.”경험 부족으로 마흔이 넘어서 삶의 위기에 부닥쳤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손을 잡아준 지인들이 많았다. 지금까지 음악적 철학과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녀를 끊임없이 응원해준 지인들이다. 언젠가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음악회를 열고 싶다고 한다. 기존의 음악계에서 보면 그녀는 분명히 아웃사이더이고, 기댈 곳 없이 혼자 처리해야 할 일을 산더미처럼 앞두고 있으니 그 외로움을 더 말해 무엇하랴.그렇다 해도 그녀는 문화파출소를 운영하며 세상이 점점 맑아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아직도 그들만의 음악회가 되어 있는 게 안타깝다며, 타성에 젖어 있는 부분을 떨치고 새로운 인물과 능력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한다. 너무 무난하게 안정권에 머물려 하다 보니 좀처럼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다는 지적이 따갑다. 예술뿐만 아니라 모든 방면에 문호가 개방되어야 인재가 자랄 수 있고, 문화를 접촉하는 사회적 안목도 바뀐다고 한다. 그녀는 오너로 활동하고 있지만 자신도 보호받고 싶고, 기대고 싶다며, 스스로 기운을 북돋워주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을 칭찬해준단다.“박향희, 너 정말 잘하고 있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니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야.”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1-18

“설백자에 달을 향한 흰빛 염원 담아냈죠”

설백자!설백자의 청아한 살빛에 달이 비친다. 눈처럼 희고 맑아서 설백자인가. 달을 닮은 둥근 선, 백자기의 완만한 곡선과 흰 눈빛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옛 어른들이 달을 보며 마음의 혼탁함을 걷어냈던 것처럼 설백자는 그 존재감만으로도 바라보는 이의 가슴에 이는 풍파를 재우기에 충분하다. 설백자에 담긴 창백한 매화, 살얼음 낀 연못의 잉어. 눈 위에 길고 처연한 목을 드리운 연밥 같은 그림이 백자의 흰빛을 더 빛나게 한다. 흰 빛을 가진 물체가 어디 달 뿐인가. 아기의 배내옷에서 맑은 한지, 흰 우유, 사람의 흰 눈자위, 하얀 달빛, 푸른 기운을 띤 해질녘의 청백색 이내까지, 많고 많은 흰빛 중에서 유독 겨울 눈송이의 흰 속살을 도자기에 담는 사람이 있다.지난해 5월에 백자의 맑고 고귀한 가치를 재해석한 공로로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재단의 초대작가상을 받은 경일대 이점찬 교수(대구미술협회장)를 만났다. 유순한 눈빛과 순연한 미소에 희디 흰 흙내가 묻어 있다. 노벨재단이 후원한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 평화상 수상 기념 특별초대전’에서 이 교수는 500여 년간 이어져 온 조선시대 백자의 전통적 아름다움과 여백, 절제의 미를 계승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또 올해 10월에는 ‘고만경 후원회’ 회장직을 수행하며, 자칫 역사의 어둠에 묻힐 위기에 처한 청송백자의 원형과 가치를 복원하는데 전심전력을 기울였고, 지역 도자기 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공로로 ‘2020년 경상북도 문화상’ 조형예술부문의 포상을 받으셨다. 20년이 넘도록 도예가의 외길을 묵묵히 걸어온 공로와 실력을 한꺼번에 인정받았으니 그 기쁨을 어디에 비유하랴. 포상이 마냥 좋기만 하겠냐마는 ‘그 동안 수고했다’는 다독임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크고 깊을 것 같다.수성못이 보이는 12층 라운지로 교수님을 모셨으면 기사를 쓰기 위한 질문을 해야 하는데, 도자기를 모르니 뭐라고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질문은 답변에 대한 답변까지 준비되어 있는 순간이어야 가능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선생님께서 도자기를 구우며 느낀 감정이나 에피소드, 그 일에 생을 바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알아서 차근차근 들려달라고 말하고 싶다. 차라리 도자기를 ‘소설’이라는 수식어로 바꿔서 얘기해보면 어떨까. 소설을 언제, 어떤 계기로 쓰기 시작하셨어요? 소설에 어떤 얘기를 담고 싶으세요? 혹시 소설의 소재를 구하러 외국까지 답사여행을 다니기도 하세요? 여러 나라를 다녀본 중에 어느 나라의 소설이 가장 인상 깊고 마음에 드셨어요? 신기하게도 도자기를 소설로 바꾸어도 질문에 전혀 그르침이 없다.“도자기를 하시게 된 동기가 뭐예요?”“구미 선산이 고향인데 우리 논 옆에 굴이 하나 있었어요. 굴 전체가 조대흙이었는데 거기서 흙을 만지고 노는 동안 자연스럽게 흙과 친해졌어요.”조대흙으로 탱크를 만들고, 사람을 만들고, 구슬을 만들던 아이가 백토로 눈꽃송이처럼 희고 맑은 설백자를 굽는 도자기 장인이 되었다. 흙을 굽고 살라는 자연의 계시이고 선물이었던 것 같다.“교수님께서 선호하시는 도자기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주로 백자를 만듭니다.”조선 500년 동안 끊이지 않고 계승 발전되어온 한문화는 백자뿐이라고 설명해주신다. 지금도 백자를 만들며 우리 시대에 맞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고. 초가집에서 아파트로 주택문화가 바뀌는 것처럼 시대에 맞는 미감도 그 문화에 맞게 바뀌어가고, 도자기 역시 모양과 장식, 채색을 달리하며 변화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그 아름다움이 실현된다고 귀띔해주신다. 둥근 달을 날마다 볼 수 없으니 집안에 달 항아리를 올려두면 한 번씩 껴안기도 하고 소원을 빌 수도 있다는 말에 공감했다.“달 항아리는 채색을 하지 않고 비워두는 것이 더 아름다울까요?”“채색이 오히려 백자의 흰빛을 강조하는 극적인 대비 효과를 줍니다.”비워두기보다 그림을 그려 넣음으로써 달 항아리의 흰색을 더 강조하는 효과를 나타낸다는 말이 매우 인상 깊게 들렸다. 나무, 꽃, 새, 붕어의 전체를 그릴 수도 있고 형체만 그릴 수도 있다고. 마음에 흡족한 작품을 만들어냈느냐고 물으니 웃으시며, 전시가 끝나면 마음에 드는 작품을 집으로 가져와서 바라본다고 하신다. 다른 예술은 시간이 가면 어떻게든 완성이 되지만, 도자기는 마지막까지 지엄한 불의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한다며, 1천300도의 고온이 가져다주는 혹독함을 견뎌야 비로소 예술품으로 탄생을 한다는 말이 매우 비장하게 들린다.자료를 찾아본 바에 의하면 백자도 종류가 다양하다. 백자를 무광만 쓰는 게 아녀서 안료의 빛깔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코발트빛의 청화백자, 흑갈회빛이 생생한 철화백자, 산화구리의 적갈색을 담은 진사백자, 눈빛처럼 차갑게 빛나는 순백자 등, 다양한 백자 중에서 이 교수는 흰색을 사랑하는 백의민족의 얼을 담은 설백자를 즐겨 굽는다. 집안 장식장에 달 항아리를 올려두고 매일 아침 두 팔을 벌려 한 아름 안아준다는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깎아지른 차가운 달의 곡선에 이마를 대고 있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이 교수에게 달 항아리는 어떤 의미일까. 풍요로움? 어쩐지 백자기의 둥근 선이 가을 들판을 가득 채운 풍요로움 같기도 하고, 만삭에 이른 여인의 둥근 배와 같은 존엄성과 여유로움 같기도 한다. 돌을 갈아서 만든다는 백토가 물과 불이라는 극단적인 재료를 만나 아름다운 달 항아리로 환생한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달이 여럿이었다. 대추나무 우듬지로 가볍게 솟아오르는 보름달과 안방 장식장에서 자태를 뽐내는 달 항아리, 장독대의 정화수(井華水)에 뜬 달까지, 같은 듯 다른 얼굴을 한 달이 그렇게 여럿이었다.설백자는 단순한 사물의 의미를 넘어서서, 유난히 흰색을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얼과 기원을 담고 있어서 더 귀하다. 옛 어머니들은 하늘에 뜬 달과 정화수에 뜬 달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먼 길 떠난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집안 대를 이을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과년한 딸이 좋은 짝을 만나서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 외에도 한 많고 설움 많았던 우리 민족들에게는 오래된 당산나무나 큰 바위, 혹은 태양과 달을 보며 비손할 일이 많았다. 달 항아리는 그 많은 바람을 담은 소망의 실체였다.이 교수는 도자기가 사람의 몸과 같다고 한다. 사람의 몸이 그렇듯이 도자기도 뼈의 역할, 살의 역할, 피의 역할, 이렇게 세 가지 역할을 하는 성분이 흙 속에 섞여 있어서 도자기가 만들어진다고. 그러고 보니 사람의 뼈도 백토처럼 흰색이다. 하얀 뼈를 생각하자니 황순원의 소설 ‘독 짓는 늙은이’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병이 들어 더 이상 어린 아들을 키울 수 없게 된 송 영감은 방물장수에게 아이를 딸려 보내고 가마 안쪽 깊숙이 기어들어간다. 자신의 터져나간 독을 대신하려는 듯 송 영감은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는다. 생각난 김에 교수님께 물어보았다.“사람의 뼈가 도자기 흙에 섞이면 어떨까요?”“발색에 영향을 주죠.”그러면서 이 교수는 인 성분이 들어가면 발광이 다르다고 하신다. 사람의 뼈도 오랜 세월을 거쳐 흙이 되고 말듯이 세상 모든 흙의 원형은 돌이었다. 흰 암석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돌은 사람의 뼈처럼 오랜 풍화작용을 거쳐 흙이 된다. 흙은 우리 땅에서 먼저 살다 간 선조들의 뼈와 살이고, 혼이다. 변하지 않는 것, 변할 수 없는 땅의 살이었던 그런 것.이 교수의 도예연구원이 남산면 흥정길에 있다. 학교에서 30분 거리라며, 처음 작업실을 얻을 때의 추억담을 들려준다. 4월 어느 날에 흥정리에 들어가니 사방이 온통 복사꽃이더란다. 그때가 1996년이었다고. 산에 잇따른 언덕바지 가득 복사꽃이 핀 절경은 봄이 주는 놀라운 환희다. 복사꽃이 만든 무릉도원 그 어디쯤에서 이 교수는 선대에서 물려받은 일도 아닌 도예를 위해, 스스로 일구고 가꾼 자기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백자의 부신 흰빛을 향해.유럽이 채우는 문화라면 동양은 비우는 문화라고 한다. 서예나 사군자, 도자기 등의 우리 문화가 모두 비움을 중요시한다며, 가장 완벽하게 비운 것이 달 항아리라고. 흰색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반면에 뭔가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충동을 받을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멈추는 것’이라는 말씀이 서늘한 여운을 준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1-11

희망 없음의 희망을 깨우는 일이 바로 우리가 할 일

문화재단은 아파트 마당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 오시는 분들이 건물을 찾느라 더러 헤맬 수도 있겠다. 지원금 신청할 때 서류 넣기가 어려워서 딱 한 번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주차공간을 가진 도로의 어떤 건물을 상상하고 온다면, 더부살이 하는 자취생 같은 문화재단의 위치에 다소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까.올해 7월초에 첫 출근 하셨다는 대구문화재단 이승익 대표님을 만났다. 인상이 좋으시다. 무슨 얘기든 다 들어줄 테니 편안히 해보라는 얼굴이다. 따끈한 커피부터 마시고 인터뷰를 시작했다.“문화재단에 대한 소개 말씀 부탁드립니다.”“문화재단은 2009년에 대구시 문화예술 플랫폼 기능을 표방하며 출범했습니다. 찾아가는 예술행정에 포커스를 맞추고 예술인 진흥사업과 예술인 교육사업, 생활문화지원 외에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구 예술인을 위한 지원도 하고 있습니다. 생활문화의 비중이 높아지고 ‘시민 문화 본부’라는 조직이 만들어져서 일반인들의 생활문화육성도 돕습니다. 운영하는 시설로는 KTG를 리모델링해서 영국의 테이트 모던과 비슷한 예술창작공간을 만들어낸 예술발전소와 범어 아트 스트리트, 가창창작스튜디오, 대명공연예술 연습 공간 등이 있습니다.”예술인들에게는 경제적 창출도 중요하지만 작업을 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경제적 효과를 더한 고객과 소통할 수 있는 레지던스 사업은 모든 작가들의 생활을 돕는 방안이기도 하다. 지원할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레지던스 입주를 원하는 사람은 다수여서 경쟁이 치열한 것이 문제다. 작가의 방 같은 작업공간만 주어져도 좋겠다.“대구 문화계의 발전을 위해서 어떤 변화가 주어져야 할까요?”“코로나로 인해서 문화가 많이 위축되어 있는데 단계적 과제로 예술인들이 안정된 기반 속에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지원 사업이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문화예술의 생산 유통 전 과정에서 막힘 현상이 없도록 예술인과 생활문화인을 연결하고, 예술인과 시민을 연결하고, 기업과 매칭해서 창작활동에 도움이 되도록 출연금 확보 노력과 동시에 문화 메세나 운동이나 기부활동 등 여러 가지 운동을 진행할 예정입니다.”예술인 지원 사업의 공정성을 위해 심사 결과를 오픈하고, 탈락자를 대상으로 멘토링을 진행하는 등, 추가재원을 확보하려 애쓰고 있다는 말씀에 신뢰가 간다. 어려운 자리에 앉아 있어서 어깨도 무거울 것 같다. 어두울수록 더 무거운 법이니.“문화인재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려는지 궁금합니다.”“대학졸업 예정자나 청년작가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이 많이 있어서 문화 예술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각종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창작지원 공연지원으로 홀로서기와 중견작가 중견예술인을 위한 생애 주기별 지원도 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 해외네트워크를 통하여 외국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대구와 베를린을 잇는 ‘다베 네트워크사업(DaBe Net work)’입니다. 그동안 두 도시간 교류로 많은 성과를 거뒀지만, 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교류가 잠정 중단되어 아쉽습니다.”다베(DaBe)는 대구와 베를린의 합성어로 아트 허브의 도시 베를린에서 예술 활동을 하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라고 귀띔해주신다. 그 외에 ‘멘티멘토’로 원로작가들이 청년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도 확대하려 하신다.“기관장으로서의 포부가 있다면?”“대구는 교육과 문화의 도시입니다. 근대예술인의 근거가 많이 남아 있고, 6·25 때에는 예술수도 기능도 했어요. 국립극단의 본부와 임시행정 수도가 대구에 있었거든요. 대구를 보는 외부의 시각이 곱지 않아요. 문화가 낙후되어 있고 우리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문화적으로 정체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최근에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이어받자는 얘기가 나오며 2·28운동의 자랑스러운 민주화 정신과 K방역으로 자부심이 깨어나고 있어요. 풍성한 문화 활동으로 시민들의 자긍심을 깨어주는 것이 문화재단이 해야 할 일입니다.”어려움에 처해 있는 동안 상처 받고 기죽은 자긍심을 깨우는 일, 루쉰은 그것을 희망 없음의 희망을 부르짖는 애타는 포효라고 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대에 목이 아프게 외친 희망, 그게 바로 루쉰의 ‘납함’이다. 문화재단이 국채보상운동이라든가 2·28 민주화 운동으로 보여준 ‘대구의 정신’을 살리고 지역예술인들에게 기를 불어넣어주면서 대구시민과 소통하는 기관으로 나아간다면 20년을 향한 문화재단의 역할로 충분하고말고. 향후 계획은 문화재단과 예총의 협약으로 뭘 수행하고 무엇을 고민해야할지 논의하고 있다니까, 다 잘 될 거라고 믿어본다.“대구문화계에 소속된 예술인이 얼마나 되나요?”“예술인 활동증명 등록 인원이 2천600여 명이고 일 년 사이에 1천여 명 늘었습니다. 대구의 문화산업 사업체 비중은 전국 5.5% 가량이고, 예술 인원은 전체의 3.3%인데 문화산업 매출액 비중은 1.7% 밖에 안 된다는 점으로 볼 때 문화예술계가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지, 예총만 해도 10개 단체가 있는데 실제로 그들이 창출하는 매출이 얼마나 저조하고 열악한지 알 수 있습니다.”“문화재단에 오기 전에 어떤 일을 하셨어요?”“언론계에 30년 동안 근무하며 글 쓰고, 방송하고, 방송토론회 사회도 봤어요. 언론인의 출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언론인의 균형감각과 소통능력으로 문화재단의 변화를 추구할 생각입니다. 수성문화재단과 국채보상공원 기념사업회, 여성가족재단 등과 같은 기관에서 이사로 활동하며 경험을 쌓았고 문화가 경쟁력이 되는 문화재단의 중요성을 깨달았어요.”“혹시 임기 중에 꼭 이루고 싶은 계획이 있으신지.”“문화예술도 일자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합니다. 예술인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구체화해 나갈 생각이고, 예술학교처럼 예술인이 창업하고 창작의욕을 발판 삼아서 홀로서기를 하도록 단계별 컨설팅을 구상 중입니다. 현재 대구시 재정과 일부기업에 의존해서 충당해나가고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예술인의 자율과 홀로서기를 지원하기에 턱없이 부족해서 문화기부 운동에 앞장 서 보려고 해요. 대구시민에게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DNA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예총회장님과 소액기부로라도 먼저 릴레이를 시작해서 문화기부 챌린지를 정착시키자고 협약했습니다.”일자리와 문화기부운동이 활성화되고 플랫폼이 형성되면 기부 매체로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을 거라며,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만약 다른 사옥으로 옮기게 되면 기부의 전당을 만들어서 거액기부자의 초상화도 그려주고, 기부를 자랑스러워하는 범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겠다고 하신다. 침체된 예술인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기부의 씨앗을 뿌리고 싶다고. 임기를 마치고 나서 누가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왔느냐?’고 물으면 문화기부의 씨앗을 뿌렸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신다.“학부 때 얘기 좀 해주세요.”“경북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중국을 알기 위해 중국학 공부를 해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사회복지학 공부로 공공에 대한 봉사의 소양도 키웠고. 오랜 방송생활의 경험이 공공의 눈으로 이웃을 보게 해주었어요. 여러 가지 공부를 하며 혼자 즐기는 밀실문화가 아닌 거시 분야, 다시 말해 공동체와 공공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건강을 위해 어떤 운동을 하세요?”“날마다 걸어서 출퇴근하고 30여 년간 수영과 헬스를 하며 건강을 다지고 있습니다. 해발고도 8611m의 K2 히말라야까지 갈 정도로 산을 좋아했어요. 무릎에 무리가 오며 수영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실내에서도 아령 등으로 근육 운동을 하고 있어요.”“대구예술인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세요.”“야외에서 만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코로나 블루로 심리적인 부담을 느끼는 분들에게는 예술인들의 멘토 한 마디가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해요. 그 사실을 기억하고 예술인들이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어려운 때일수록 선후배가 함께 하는 영역발굴과 세대를 연결하는 노력으로 문화생태계를 살아 있게 이끌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어느 시인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예술가는 하늘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고. 코로나19로 침체에 빠진 시민들에게 빛이 될 수 있도록, 예술인들의 몸짓이 문학으로, 그림으로, 무용으로 별빛처럼 활활 타오르기를 기다려봅니다.”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1-04

만경창파 너른 물에 배 띄워놓고…

아리랑이 무엇일까?아리랑은 우리 민족에게 민중의 비애와 한을 담은 삶과 죽음의 대서사시이다. 권력에 대한 개인적 집단적 저항의지의 발현체이기도 하다. 아리랑은 삶의 마디마다 우리네 서러운 민중을 달래며 가슴 흥건히 고인 한의 정서를 삭이고 풀어준 소리였다. 그 아리랑이 2012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고, 2015년 국가무형문화재 제 125호로 지정되었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곡으로 강원도아리랑, 경기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외에 무려 3600여 곡의 아리랑이 선조들의 사랑과 이별, 삶의 애환을 노래하며 전달되고 있다.영남민요연구회 영남아리랑 연구회 회장이기도 한 배경숙 선생님을 만났다. 양손에 들고 온 꾸러미가 무거워 보였다. 보자기를 풀자 민요와 아리랑에 관한 책과 공연 프로그램을 비롯한 자료가 한 보따리였다. 꼼꼼하게 자료까지 챙겨온 성의가 놀라웠다. 연구 자료를 듬뿍 안고 온 그녀가 아리랑전승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학자인가 하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예전에는 민요 속에 아리랑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아리랑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며 민요에서 분리되어 아리랑만의 독립 체제로 우뚝 서게 되었다고 설명해주었다. 아리랑은 전설이나 설화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특성을 띠고 있어서 기록이 남아 있기 어려운데, 영남전래민요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줌치타령’을 비롯한 370여 곡의 영남민요아리랑이 전해지게 되었다. 배경숙 선생님이 보자기로 곱게 싸둔 책자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것이 바로 이재욱 선생님이 쓰신 ‘영남전래민요’의 필사본이었다.경성제국대학 시절에 이재욱 선생님은 영호남 지역을 직접 다니며 민요를 채집했다. 자칫 사라질 뻔한 그 민요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된 것도 이재욱 선생님의 필사본을 통해서였다. 배경숙 선생님은 ‘영남민요연구’라는 이름으로 석박사 논문을 쓰면서 이재욱 연구에 매달렸다. 국문학자였고 민요연구가였던 그분의 자료를 찾아서 도서관을 뒤지고 다녔다. 그분이 납북되면서 이름이 지워지고 자료가 흩어진 것이 안타까워 그것을 한곳으로 모으는 작업에 매달린 것이 20년이었다.우리나라 최초의 민요연구 학자였던 그분은 고월 이장희 시인의 조카였다. 1931년 조선어문학회 발기인으로 참가해서 해방 후 국립도서관장으로 위촉받아 ‘초대 관장’으로 취임했다. 우현서루의 초대 국립도서관장을 지내기도 했던 이재욱 선생님은 ‘영남민요’를 주제로 학위까지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요전공자이시다. 그런데도 정작 자료 조사를 시작해보니 그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그 안타까움이 배경숙 선생님으로 하여금 그분을 연구하게 만들었다.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채집하고 연구한 자료가 ‘영남전래민요집’으로 묶여 나올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분은 배경숙 선생님이 영남민요연구에 매달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영남아리랑기행’이라는 주제로 대구일보에 칼럼을 쓰며 필사본에 실려 있는 가사에 곡을 붙여 작창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서예로 담은 아리랑 일만 수’를 통해 배경숙 창작의 아리랑을 여러 편 소개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배경숙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라는 제목의 앨범 시리즈를 주셨다.“제가 가사를 쓴 곡으로 팔공산 아리랑과 구미아리랑, 경산아리랑, 의병아리랑, 봉화 아리랑, 청송 아리랑, 압량아리랑과 같은 창작아리랑과 이재욱 채록 전래민요를 포함한 재발견 영남민요 23수가 들어 있어요.”앨범 표지에 흰색 한복을 차려 입은 단아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연주회 때 어떤 식으로 곡을 전달하는지 들려달라고 했다.“스무 명 정도가 돌아가며 창과 군무로 이야기가 있는 무대를 꾸며요. 예전 어머니들이 해오던 것처럼 실제로 디딜방아를 구해서 방아를 찧기도 하고, 직접 물레를 돌리거나, 모심기를 하고 빨래 다다미질을 하며, 스토리텔링을 만들어서 창을 불러요.”화전놀이를 할 때는 직접 진달래꽃을 따와서 무대에서 화전을 구우며 공연을 한다는 얘기가 너무도 생동감 있게 들렸다. 창과 군무를 곁들여 스토리텔링으로 전달하니 이야기가 풍성하게 살아날 것 같았다. 아리랑이라는 곡에 맞춰 무대에 맞게 스토리를 구성하고, 인물과 사건을 만들고, 스토리에 삶을 담아내는 과정이 소설 쓰기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그녀의 이러한 아리랑 작창과 전형화 활동은 아리랑의 가치와 특성을 드높이기에 이른다.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라고. 신명의 소리인가 하면 한풀이이고, 옛것이면서 오늘의 소리라고 하신다.“가장 좋아하는 아리랑이 어떤 곡이에요?”“헐버트 박사의 ‘구 아리랑’을 좋아합니다.”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았다는 호머 헐버트 박사. 그는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며 순 한글로 세계정보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여러 지역의 정보를 담은 ‘사면필지’를 쓰기도 했다. 그는 선교사로서 한성중학교와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경기민요 ‘군밤타령’에 음계를 붙이는 등, 그는 입으로만 전해온 아리랑을 악보에 기록했다. 그가 말한다.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들이고 아리랑은 한국인들에게 쌀과 같은 주식이라고. 문경세재에 그의 아리랑비가 서 있다. 예전에는 아리랑을 아라령 아라리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렀지만 ‘구 아리랑’ 이후 아리랑으로 전형화되었다.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아리랑에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사랑하는 님을 떠난다거나,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거나, 아랑낭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한 노래에서 나왔다거나, 구음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노동요의 성격을 띠며 두레노래로 불렸으며 구술과 암기에 의한 전승 또는 자연적 습득이라는 민속성을 띠기도 한다.“아리랑 연구로 20년을 보내셨으니 감회가 남다르겠어요.”배경숙 선생님이 민요를 시작한 것은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갖자는 취지에서였다. 전주대사습에 빠져있던 남편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어 국악학원에 등록했고, 정은하 선생님과 이춘희 선생님, 서정화 선생님의 사사를 받았다. ‘영남민요의 재발견’과 201B영남의 소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배경숙의 영남아리랑’을 대구일보에 연재하며 영남민요를 널리 알리게 되었다. 모든 역사는 이렇게 숨은 조력자의 땀과 고통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의 노력이 있어서 역사에 선조들의 삶의 기록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한민족 모두에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래를 손꼽으라면 백 명 중의 아흔아홉 명이 ‘아리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국제경기 남북단일팀 공식 노래도 아리랑이고, 고종이 궁중에서 아리랑을 즐겼다는 얘기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기록되어 전해지는가 하면, 밀양 ‘아랑의 전설’에서 전해진다는 설도 있고, 어느 수필가의 설명에 의하면 아리랑의 ‘랑’이 고개 령(嶺)의 변음이어서 아리랑은 긴 고개를 뜻한다는 설명도 있고, 고려 말 백두대간과 동해안 일대 음악권 메나리조를 중심으로 전파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도 한다.그 유래가 어디서 시작이 되었건, 개인적으로 나는 떠돌아다니는 소리꾼들이 힘든 고개를 넘을 때마다 흥얼거렸던 구전이 널리 전해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에 가장 마음이 간다. 민족의 얼이 서려 있는 이 노래는 고단한 삶을 살아온 우리 민족의 가슴에 맺힌 한과 설움을 토하며 불렀던 노래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그렇기에 먼 타국에 사는 우리 민족들은 좋은 일 힘든 일에 맞닥뜨릴 때마다 함께 입을 모아 아리랑을 부르곤 했다.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음악, 그게 바로 아리랑이다.‘아리랑’이라고 하면 나운규 감독의 무성영화 ‘아리랑’이 생각난다. 주인공 영진은 3·1운동 때 잡혀서 일제의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된 민족청년이다 작품의 주제를 민족항일투쟁에 맞추고 전통 민요인 '아리랑’과 연결해서 승화시킨 영화였다. 우리 농촌의 생생한 현장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묘사했다는 평가와 함께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좋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평소에 생활철학이 뭔가요?”“감동을 주며 살자고 늘 얘기해요.”그 자신만만한 의지가 선생님을 무대에 서게 하고, 민요집 발간에 뛰어들게 하고, 책을 쓰게 만든다. 단순히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가지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민요가 ‘아리랑’ 연구에 일생을 보내게 될 줄 몰랐다며 웃는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0-28

“피아노 조율은 물리공학” 명품소리 찾기 한길을 걷다

조율을 마친 스타인웨이가 우아한 모습으로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주를 듣기 위해서 찾아가던 문예예술회관 팔공홀의 무대에 올라서고 보니 그 장엄하면서도 고즈넉한 적요에 위압감을 느꼈다. 비어 있는 객석을 보며 피아노가 어떤 소리로 홀을 가득 채울지 상상했다.조율사 박상효 씨가 그랜드 피아노의 뚜껑을 열었다. 기다란 버팀봉으로 뚜껑을 고정시키자 갈비뼈처럼 질서정연한 프레임과 아우터 링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연주용 피아노의 속살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건 처음이었다. 저기서 모차르트와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쇼팽 녹턴의 선율이 쏟아진다고 생각하니 피아노를 함부로 만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대구에 있는 스타인웨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피아노예요그의 목소리에 강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평생이라고 해도 좋을 47년이라는 시간을 오로지 피아노 조율만 하고 살았단다. 예술회관에 드나든 시간도 그에 못잖아서 스타인웨이가 그에게는 또 다른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조율할 때 무슨 음에서 시작하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a음이죠. 국제 표준음이고, 가장 안정적인 음이에요.조율사가 a음을 눌렀다. 연주회 시작 전에 악장이 누르던 그 소리. 연주회 시작 전에 악장이 오보에 수석을 쳐다보며 누르는 건반, 그게 바로 a음이다. 오보에가 a음을 울림과 동시에 오케스트라 전 단원이 그 음에 맞춰 조율을 한다. 조율을 마치고 연주가 시작되기 전의 짧은 침묵. 지휘자가 지휘봉을 드는 것과 동시에 연주가 시작된다. a음은 악기의 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첫 음이고, 아기의 첫울음만큼이나 의미 있는 음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a음으로 음정을 맞추듯이 조율사 역시 a음으로 피아노 음을 고른다. 리허설을 위해 사전 조율을 두 번 하고, 연주 당일 아침에 다시 한 번 음을 가다듬는다. 조율의 목적은 일정한 음높이를 맞추어 청중들이 가장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안정적인 평균율의 음계를 만들어내는데 있다. 조수미 씨는 연주 시작하기 전에 살짝 부탁을 한다던가. 440헤르츠로 맞춰둔 소리를 442헤르츠로 높여달라고, 작은 체구에 비해 음폭이 어찌나 넓은지 그녀가 노래를 하면 홀이 쩌렁쩌렁 울린다고 했다. 조수미 씨의 음량이야 충분히 짐작이 되고말고.- 피아노 조율은 언제부터 하셨어요?대학 시험을 쳤다가 떨어지고 기술이나 배우겠다고 오르간 만드는 곳에 근무하다 예술단 공보실로 자리를 옮겼다던가. 선배가 편한 일을 두고 힘든 곳으로 가겠다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더란다.예술회관 무대의 나무 벽이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박씨가 둥글게 휘어진 나무판을 통통 두드리며 앞자리 뒷자리 어느 곳에서나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음향판이라고 했다. 예술회관은 객석으로 좋은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벽에 붙이는 음향판의 모양까지 과학의 힘으로 분석하고 연구를 한다고 했다. 소리가 울리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닥에 카펫을 깐 적도 있는데, 지금은 소리를 흡수하는 카펫 대신에 마루를 깔아서 소리를 뱉어내게 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예술회관을 오래 드나든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나이에도 꼬박꼬박 찾아주는 사람이 있어요.조지 윈스턴이 한국에 연주를 하러 오면 대행사에서 와달라는 팩스를 보낸다고 했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더욱 책임감 있게 일할 수 있다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조율사가 책임감을 갖고 일하면 피아노도 언제까지나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다며, 대구의 스타인웨이만 아직 한 각도 갈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혼자 일을 하는 시간이 많겠어요?- 늘 혼자죠. 조율하며 정교한 소리를 들어야 하니까.대부분 혼자 일을 하지만 큰 수리를 할 때는 무대 감독 하는 친구도 불러서 함께 일한다며, 자라섬에서 재즈공연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일어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한꺼번에 천만 원을 벌었어요.모처럼 친구들과 외국여행 가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재즈연주회에서 급한 일이 생겨 여행경비를 돌려받았다. 떠날 날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스프링클러 작동으로 피아노가 물벼락을 맞았다는 전화가 온 것이다. 박씨는 스텝의 전화를 받자마자 무대감독 하는 친구를 불러서 현장으로 달려갔다. 자신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해준 스텝이 너무나 고마웠다. 사람에게만 골든타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도 마찬가지다. 나무가 물을 먹기 전에 분해해서 닦고 말렸기에 망정이지, 그때 스텝이 박씨가 아니라 윗사람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면 여러 절차를 거치는 동안 스타인웨이는 골든타임을 놓쳐 영원히 회생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랜드 피아노는 부속을 풀어놓으면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관객을 다 내보내고 부속을 무대에 널어서 말렸단다.- 가장 감명 깊었던 연주회를 혹시 기억하세요?- 흑인 영가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뉴욕 할렘가의 예술학교 학생 여섯 명의 보컬로 이루어진 ‘뉴욕 할렘싱어즈’의 공연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 중에는 가스펠송도 있지만 휘트니 휴스턴의 명곡도 섞여 있어서 울림이 더 컸다며, 박씨는 흑인영가의 감동적인 공연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밖에도 레스토랑에서 조율을 마치고 들었던 재즈싱어의 음악과 대봉성당 이층에서 들었던 여섯 명의 수녀님들이 부른 합창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음악실이 이층에 자리 잡고 있어서 피아노 소리는 물론이고 성당 곳곳으로 울려 퍼지는 성가가 온몸에 소름이 돋도록 감동적이었다고 했다.-표정이 참 밝고 평화로워 보여요.내 말에 그는 마음을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다고 했다. 무슨 일이든 자기 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선 먼저 자기 일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피아노를 옮기면 직접 가서 봅니다.피아노가 제자리에 앉는 걸 봐야 마음을 놓는 그의 극성에 일하는 사람들이 불편해 할 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피아노 소리가 달라진다며 온습도가 적절할 때 피아노가 맑은 소리를 낸다고 했다. 피아노 탑보드를 닫아놓고 예술회관을 나오며 조율이 절대음감을 필요로 하는 일이냐고 물었다.- 조율은 물리공학이어서 절대음감으로 조율할 수 있는 게 아녀요.일을 하는 동안 오랜 숙련의 과정을 거쳐 체득된 것일 뿐, 자신에게는 절대음감 같은 건 없다고 했다. 박씨는 장인(匠人)들의 느낌이나 감은 오랜 숙련 끝에 가꾸어지는 기능이고 감각이어서 하루아침에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 사회가 인재와 기술자를 홀대하는 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고 토로했다. 예전에는 피아노 부속을 일일이 수제로 깎아서 만들었는데 지금은 기계로 찍어낸다며, 점점 사람이 필요 없는 세상으로 변하는 게 슬프다고 했다.- 장인(匠人)을 장인답게 하는 것은 직업에 대한 긍지와 소신이죠.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기 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 진짜 장인이다. 옻칠 장인이나 도자기 장인 같은 각계각층의 장인들을 만나 보면 모두 그 나름대로의 집념과 긍지를 갖고 있다며, 박씨는 그 고집스러움이 한 길을 걷게 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자기 일에 대한 소신이고 사랑이었다.- 젊은 기술자들이 직업에 대한 긍지와 소신을 가졌으면 좋겠어요.스타인웨이가 세계 최고의 명품이 된 것은 오로지 피아노를 위해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나라와 국민이 다 함께 고급 기술을 가진 인재를 아껴줄 때 최고의 상품을 만들 수 있다며, 박씨는 최고의 기술자들이 생활고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찾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프다고 했다.- 스타인웨이가 최고의 음악가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이유를 빨리 깨달아야 우리도 명품을 가질 수 있어요.베테랑 기술자를 일용직 일꾼 취급하고 고급인력을 예사로 자르는 그릇된 풍토가 문제라고 박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나라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정치인이 아니라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인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하루하루를 노동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만은 스타인웨이의 위엄을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고./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0-21

나눌수록 자라나는 것이 사랑의 기쁨입니다

목요일이다. 대원각 반점의 주인이자 셰프인 조정태 씨의 손길이 바빠지는 날이다. 사랑의 급식을 위해 300명에서 500명분의 식사를 준비해둔다. 일찍 일어나 재료를 준비하는 동안 SNS 봉사단과 천사후원회 회원들이 들이닥쳤다. 무료급식 날마다 달려와서 수고해주고 봉덕동, 대명동, 중구 남산동 일대의 독거노인을 비롯한 어려운 가정에 사랑의 연탄배달도 하는 봉사 단체다. 반점 주인 조정태 씨도 그 봉사단체의 일원이다. 이 투박한 사나이는 봉사가 필요한 곳마다 끼지 않는 곳이 없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고 전염성이 강해서 하나둘 개입하다 보니 봉사단체가 여럿이다. 많을수록 좋은 게 있다면 그게 바로 어려운 이를 돕고 사는 봉사 단체일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음지를 비추는 햇살이다. 그 햇살은 따사롭고 공평해서 어둡고 차가운 구석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비춘다. 우리 사회도 햇살이 비치는 대지처럼 따사롭고 공평했으면 좋겠다.10시가 가까워오니 반점에서 시작된 줄이 점점 더 길어진다. 음식이 나가기 시작하자 가게가 분주해지고 봉사단 회원들의 움직임도 부산스러워진다. 매월마다 날짜를 잊지 않고 찾아주는 SNS 봉사단과 천사후원회 회원들이 고맙다. 점심 드시러 오시는 분들이 많아서 도움이 필요한 시점에 알맞게 찾아와 주었다. 짜장면 한 그릇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조정태 씨는 그 한 그릇이 어르신들에게 하루의 기쁨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경제적으로 큰 지출을 감당해야 하는 일인데요.”“힘들지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명쾌한 대답이다. ‘마음만 먹으면.’ 봉사하는 시간이 열한 시부터 한 시까지인데 열 시 전부터 와서 기다린다고 한다. 사도의 집을 운영하시는 수녀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점심 한 그릇 먹기 위해 새벽 여섯 시부터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그럴 때 마음이 몹시 아프다고 하셨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러니 밥 한 그릇이라고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그 한 그릇이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기다림이 될 수 있으니.“곱빼기 네 그릇까지 챙겨 가시는 분이 있어요.”그렇겠지. 저녁까지 챙겨야 할지도 모르고, 다리 아파서 못 오는 사람을 위해 여분의 식사를 받아가기도 하니 예상보다 그릇 수가 늘어나는 건 당연하다. 앞으로도 계속 봉사를 할 거냐고 물었다.“음식 장사를 하는 동안은 계속할 겁니다.”경비는 나가지만 그 정도의 지출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 큰 나무의 속삭임처럼 든든하다. 사랑의 봉사는 자석처럼 마음의 끌어당김에서 시작되는 행위이고 전염성도 강하다. 코로나19 사회거리두기 2.5단계에서 2단계로 겨우 내려온 시점이어서 적잖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다. 밥 한 그릇으로 마음의 구김살을 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그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산용불량자가 되고, 신장암 선고를 받고 한쪽 신장을 떼어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간을 삼분의 일 떼어냈고 교통사고로 죽을 뻔 했던 적도 있다. 명이 길었던지 지금껏 안 죽고 살아 있다. 여분의 삶을 사는 듯 시작한 봉사가 어느새 13년이다. 감사의 마음은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조정태 씨는 무료급식으로 밥 한 그릇 나누는 일이 바로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한다.“정말 별 거 아닌데.”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가진 것을 조금씩 떼어서 나누고 사는 거지. 세상은 큰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작고 사소한 것이 모여서 전체를 지탱한다. 내가 무슨 도움이 될까, 부끄러워하는 소박한 마음이 모여서 세상의 전체를 이룬다.무료급식을 위해 줄지어 서 있는 어르신들을 보면 공원에서 멋진 풍광을 이루는 노목을 보는 듯하다. 일평생 땀 흘리며 노력해서 거두고, 또 거두어서, 잘 익은 열매를 아낌없이 생산해내고는 고요히 저물어가는 노목. 그들이 언덕에서 굳건히 버티며 사방팔방의 바람을 막아주어서 들녘의 평화가 유지된다. 들녘이 아름다운 건 황혼의 아름다움이 비치기 때문이다.봉사단이 빵과 야쿠르트, 아이스콘 같은 간식을 나눠주면 어르신들은 아이처럼 좋아한다. 얘기를 하다 보니 시조시인이신 문무학 선생님이 조정태 씨의 초등학교 은사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과 통화도 했다. 이래서 세상을 한마당이라는 게지.2002년 반점을 시작하기 전에 조정태 씨는 가스장수, 족발장수, 택시운전까지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신용불량자로 하루를 힘들게 견디고 있을 즈음, 선배의 권유로 그는 중국집을 하게 되었다. 용기 있게 달려든 새 삶이 그를 살렸다. 그저 가족을 굶기지 않고 자식들 공부나 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욕심을 버리니 마음도 가벼워지고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삶의 어려움을 겪어본 이가 어디 그 한 사람 뿐일까만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 나누며 살 수 있는 것이 아닐지.코로나19로 소상공인의 시름이 깊어지는 이즈음, 그들의 한숨소리가 나날이 드높아지는데 무심하게도 코로나19는 그 기세를 멈출 줄 모른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지만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셋째 목요일 어르신들을 가게로 모시던 무료급식도 코로나 때문에 잠시 멈추었다. 그 대신 그는 넷째 목요일에 재료를 준비해서 수성구 상동으로 국제사랑나눔회를 찾아가고, 대구장애인부모협회 사랑의 집 남구센터에 한 달에 마지막 주 수요일 한 번씩 짜장면을 볶아서 갖다 주기도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 짜장에 밥을 비벼먹는다. 우리가 어릴 때 짜장면을 건져먹고 거기 밥을 비볐던 것처럼. 처음에는 가게로 오게 해서 봉사를 했는데 장애인들이 움직이는 걸 힘들어 해서 그가 직접 갖다 주게 되었다.“사회에 봉사하게 된 동기가 뭡니까?”“신용불량자였던 제가 동네 어르신들 덕분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게 되었으니 그 고마움을 십분의 일이라도 되돌려 주겠다는 생각으로 지역사회 봉사에 나서게 되었습니다.”온갖 어려움을 다 겪고 살았지만 하늘의 도우심으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고마워서 그는 자신이 받은 고마움을 사회에 돌려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만 3년이 되었다. 남부경찰서 기동순찰대 새마을 협의회, 지역사회보장협의회와 같은 여러 봉사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자랑하라고 멍석을 갈아주는 데도 입이 무거운 그는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 봉사를 시작할 때는 그저 짜장면 한 그릇을 나누자는 단순한 마음이었는데 횟수가 거듭할수록 그 역시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사랑은 땅콩줄기 같아서 땅 속에 얼마나 많은 열매를 갖고 있는지 뿌리를 뽑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모든 일은 시작이 중요하고 봉사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과감하게 시작하면 또 다른 이들이 도움을 주기 마련이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것이어서 이인삼각 경기처럼 서로 발을 맞춰 걸을 때에 게임이 원만해진다.밥 한 그릇으로 누군가의 희망이 되는 삶. 나무가 크면 그늘도 넓고 깊다. 누가 먼저 하자고 했느냐니까 조정태 씨는 자신이 먼저 해보자는 말을 꺼냈다고 한다. 아내의 호응이 있어서 봉사가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며 공덕을 슬쩍 넘긴다. 고등학교 때에 아내를 만났고, 스물한 살에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람.“신문에 크게 날 일은 아닌데 부끄럽고 민망합니다.”이 투박한 사나이, 겸손하기까지 하니 더욱 마음에 든다. 상투적이지만 그의 봉사는 한 알의 밀알이라고 말해주었다. 그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가 맺힌다고. 기사를 읽고 누군가의 가슴에 밀알의 싹이 돋으면 그것으로 그의 노력은 아름답게 승화한다. 글이란 사실을 전달하는 데도 쓰이지만 그보다는 응원의 메시지가 더 크게 작용한다. 읽는 사람에게나 글감을 제공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고맙다고, 잘 하고 있다며 등을 두드려주는 토닥임이기도 하다, 코로나로 인해서 자신의 발등에 난 불을 끄기도 바쁜 시국에 봉사가 그리 쉬운 말이어야지.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0-14

광대는 죽는 날까지 광대라지요 소리로 전해지는 삶에 감사할 뿐입니다

민요경창대회에서 명창부 대통령상을 받은 이은자 명창을 만났다. 연구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장구를 앞에 놓고 연구생들에게 민요를 가르치는 중이었다.‘백구야 날지 마라 너를 잡을 내 아니로다. 성상이 버리심에 너를 좇아 예 왔노라~.’ 물 흐르듯이 쉽게 가자는 멘트와 함께 명창이 창부타령 한 소절을 부르면 연구생들이 따라하는데, 한 소절의 실수로 전체를 망칠 수 있으니 집중하라고 주의를 준다. 구성진 마디마디를 연결해서 숨 쉴 곳에서 숨 쉬고 내릴 곳은 내려서 소리를 묶고 눌러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판소리와 경기민요가 어떻게 달라요?판소리가 뱃속에서 한을 끌어올려 긴 얘기를 엮어나가는 것이라면 경기민요는 민중들의 입으로 구전되어온 노래이며, 소리를 굴리고 던지듯이 말하는 소박한 음악이라는 점이 다르다고 한다. 말을 던지는 부분에 비성이 들어가면 콧소리가 되기 전에 얼른 소리를 놓아야 하는데 숙련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란다.- 자기만의 소리를 찾은 게 언제예요?불과 십여 년쯤 되었다며, 이은자 명창은 인간의 음성이 성대에서 결정되고 식도의 입구인 후두에서 생성된다고 일러주신다. 소리의 형상을 기호로 표현하면 동그라미가 된다. 그이는 항상 소리를 둥글게 하려고 애쓴다. 소리가 공명강을 거쳐 부드럽게 울려 퍼지도록 둥근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래서인지 그이의 민요는 구르는 듯 부드럽고 감칠맛이 있다.- 민요가 무엇일까요?민요는 민중들의 삶을 소리로 표현한 음악이며, 소리로 삶을 전하는 민중음악이다. 일찍이 민요는 힘든 농사일부터 고기잡이는 물론이고, 사랑의 이별을 노래하며 우리네 삶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은자 명창은 남다른 걸 좋아해서 민요를 주어진 대로 부르지 않고 편곡해서 부르기도 했다. 전통을 허물어뜨린다는 욕을 먹기도 했지만 그 별스러운 각색이 창극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새로운 것이 묵은 것 위에 생성된다고 볼 때, 새로운 걸 추구하는 욕구 강한 이단아가 항상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데 앞장서게 마련이다.- 어째서 판소리가 아니고 경기민요였어요?이은자 명창은 경기민요가 자신에게 맞더라고 했다. 민요는 민중들의 삶을 반영하고 표현하기에 적합한 음악이기도 하지만, 짧으면서도 빠른 시간에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고 금방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판소리가 겹겹의 한을 담은 음악이라면 경기민요는 민중의 애환에 노랫가락의 흥겨움을 더한 것이 다른 점이랄까.- 어떤 곡으로 대통령상을 받으셨어요?유산가로 예선을 통과하고 제비가로 본선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며, 명창대회에서 불렀다는 ‘유산가’ 한 대목을 부른다. “화란춘성(花爛春城)하고 만화방창(萬化方暢)이라. 때 좋다 벗님네야 산천(山川) 죽장망혜(竹杖芒鞋) 단표자(單瓢子)로 천리 강산을 들어가니….” ‘유산가’에 이어 12잡가 중에서 가장 긴 소리라는 ‘적벽가’를 곁들여주니, 둘러앉아 있던 제자들도 목소리를 맞춘다.민중의 삶을 전하는 경기민요 12잡가를 직접 듣고 있으려니 ‘아! 저게 바로 우리 민요구나.’ 하는 감동이 절로 우러나왔다.명창의 소리를 듣는 동안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품을 팔던 유봉과 그의 딸 송화가 소리를 하며 소릿재를 넘어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에 한(恨)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화자의 어미가 소리꾼인 의붓아비를 만난 후 딸을 낳다 죽는다. 어미가 죽고 아들은 의붓아비 곁을 떠난다. 어른이 되어 소릿재를 찾은 그는 주막 여자에게서 소리꾼 아비가 잠든 딸의 눈에 청강수를 넣어서 멀게 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좋은 소리를 가꾸자면 소리를 지니는 사람 가슴에다 말 못할 한을 심어줘야 하는가 보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사람의 한은 그렇게 심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며,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동안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거라고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만약 딸이 아비를 용서하지 못했다면 그건 원한이지 소리를 위한 한은 될 수 없을 거라며, 아마도 그 아비는 소리보다 딸이 당신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해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12잡가가 민중의 낮은 소리를 대변하며 외세에 시달려온 우리 민족을 위로해 주었듯이, 판소리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민요가 한에서 비롯되는 가락이다. 사설이 길다고 하여 ‘긴 잡가’로 불리는 열두 곡의 잡가는 ‘유산가, 제비가, 소춘향가, 십장가, 적벽가, 출인가, 선유가, 방물가, 집장가, 형장가, 평양가, 달거리’까지 이름만으로도 곡절 많은 인생 열두 고개의 진미가 한자리에 모인 느낌이다.이은자 명창이 경기민요를 시작한 것은 서른 즈음이었다. 결혼 직후, 경기민요를 배우기 위해 서울까지 새마을열차와 비행기를 타고 다녔다.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며 경기민요를 안 배우면 죽을 것 같다고 했다.경기민요 예능보유자이신 이춘희 선생님께 민요 창극을 배우며 경상도 사투리로 각색한 ‘이춘풍전’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 열정적으로 해냈던 창극은 ‘이춘풍전’ ‘미얄할미뎐’ ‘달구벌 효자원님’ ‘삼정골의 전설’ 네 작품이었다. 그중에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35호 효자 ‘강순항 정려각’ 을 토대로 각색한 ‘달구벌 효자원님’이 가장 기억이 남는 작품이다.열 살 무렵에 풍물놀이 명인이신 이정자 선생님을 만났다. 설장고, 오고무, 무용을 익히며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선생님을 따라 국악공연에 참여했다. 무용복을 마련하지 못한 명창에게 선생님이 옷을 한 벌 해주셨는데 그 감동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더라고 한다.- 발성연습을 어떻게 하셨어요?젊은 객기로 목을 아끼지 않고 무작정 내지르다 목을 다쳐 수술까지 했다. 소리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아픔이지만 한 번 목을 다치고 나면 소리가 예전 같지 않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목이 아플 때는 쉬는 것보다 좋은 약이 없어서 푹 쉬며 소리가 다시 흘러나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과음 과식을 삼가고 충분한 수면에 더하여 입안을 항상 청결하게 하며, 소리를 하기 전에는 음식물 섭취도 삼간다. ㅅ의 발음에 쇳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한다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대통령상을 받으셨는데, 감회가 새로웠겠어요.나 이런 사람이라고, 상이 대신해서 말해주는 것이 너무 고마워요.인정받는다는 건 오랜 세월을 소리에 묻혀 살아온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니 기쁘고말고. 고희를 수 년 앞둔 나이여서 이쯤 되면 이은자 명창에게도 노년에 대한 계획이 있을 법하다.- 노년을 어떻게 보내실지.나이가 들면 자신만의 전수관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논다는 생각으로 살고 싶다고 한다. 남은 바람이 있다면 경기민요 12잡가 중 몇 곡을 선정해서 ‘이은자 소리길’이라는 타이틀로 단독 공연을 하는 것인데,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소리 중심의 공연이 될 것이라고 한다.- 갑작스런 인터뷰로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셨을 텐데, 어떤 마음이세요?광대는 죽는 날까지 광대라고 한다. 광대는 제 속에 있는 열정의 끼를 죄다 뱉어내고 빈 껍질이 되어서 떠난다. 이은자 명창은 소리를 하는 동안 자기 속에 있는 광기를 끄집어내는 느낌이었다며 길을 걷다가도 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춘다고 한다. 소리로 전해지는 광대의 삶에 감사를 바친다.- 여러 인연들이 나를 키웠어요.故 안비취 선생님, 전숙희 선생님, 이춘희 선생님, 가야금 최금란 선생님, 가야금 병창 경주 故 장월중순 선생님, 故 임이조 선생님까지 여러 선생님을 모시며 알게 된 것은 명창을 만들어내기 위해 온 우주가 돕는다는 것이었다. 일평생 노래로 시조를 읊고 산 이은자 명창의 얘기를 들으며 민요는 들을수록 물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노랫가락에 실은 시가 민요로 환생하는 순간 소리는 살아 있는 물이 된다. 물이 되어 흐른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10-07

해골, 멜랑콜리를 위한 오브제로 생명을 얻다

대구에 세계적인 화백이 계신다. ‘메이드 인 대구’라는 큰 전시회를 앞두고 참여 작가 8인 중 한 분이신 권정호 화백을 만났다. 뉴욕과 상해미술관, 인도, 일본 등 국제적으로 활동해온 화백의 작품을 대구미술관에서 보게 된 것은 지역의 큰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회가 권정호 화백의 예술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전시회가 될 것으로 예감한다.대구 출신이고 대구에 거주하는 화백의 작업실은 오층 건물 맨 위층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서 문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왈칵 다가오는 해골과 맞닥뜨렸다. 닥종이로 만든 수많은 해골 모형이 상자에 가득 담겨 있었다. 화백은 그 중 하나를 집어 가는 붓으로 색을 칠하고 있었다. 커다란 통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그 통을 가득 채운 희고 노랗고 파랗고 붉은 닥종이 해골이 화백의 오랜 작업과정을 짐작하게 했다. 해골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강렬한 두드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단 낯설다.’ 평면 그림이 아닌 조형예술이고 내용이 해골이어서 더욱 그렇다. 그 해골 모형에서 얼른 ‘죽음’을 떠올린 건 내 선입견일지도 모른다.화백은 그 많은 두개골 모양의 형이상학적인 조형물을 대구미술관 전시실 천장에 낚싯줄로 매달 거라고 했다. 길고 짧게 드리워진 물상들이 만들어내는 카타콤 같은 비밀스러움이 상상된다. 3060개의 두개골 모형이 천장에서 내려와 사각형 큐브를 이룬다는 상상만으로 충분히 그로테스크하다. 그 신선한 충격이 내게 예술과 원시적 형이상학 사이의 간극과 죽음의 형상을 떠올리게 했다.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를 그린 작품 앞에서 찍은 화백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불에 탄 열차와 검고 흰 선들이 지하철 안에 있었던 원혼들의 말없는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모든 예술이 그런 것 아닌가. 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각자의 의식에 적재된 심상에 비추어 사물을 보게 되는 그런 것.“해골 형상으로 말하고자 하신 바가 무엇입니까?”“반성적 거울 이미지라고 할까요?”화백은 인간의 정서를 대신한 상징적인 두개골 형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유한하고 불안한 존재인 현대인들의 억압된 갈등과 근원적 죽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해골의 형상 속에 깃든 철학적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을 대면시키고자 했다고 언급한다. 형식 속에 정신을 심고 정신 속에 형식을 만들며.화백은 계명대 미술대를 졸업하고, 대구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에 미국의 프랫인스티튜드 대학원 회화과에 입학했다. 예술 창작이 하나의 정신적 활동이며 시간과 공간, 영원성에 관계한다고 말씀하신다. 화백의 작품 세계를 검색하다 아주 인상적인 영상을 하나 보았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이루어진 ‘파이어 아트페스타 2018 헌화가(獻火歌)’ 행사였다. 거기서 화백은‘염원 - 헌화가’라는 제목으로, 가로 410㎝ 세로 600㎝ 높이 600㎝ 크기의 나무로 만든 작품을 내놓았다.“헌화가의 착상을 어디서 얻으셨어요?”“신라 향가 헌화가(獻花歌)에서 착안한 작품인데, 제목이 일러준 대로 꽃을 들고 비녀를 한 여인의 형상입니다.”파이어가 실행되며 작품에 불을 붙였다. 작품이 활활 타올랐다. 마지막까지 깨끗이 타버리는 것으로 화려하게 승화한 여인의 형상이 재로 남는 과정으로 예술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했다. 마침내 사라지는 무(無)의 세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우주적 시간이 그러하고, 인간의 삶이 그러하고, 예술가가 피땀 흘려 이뤄낸 작품이 그러하고, 불꽃으로 스러진 헌화가가 그렇게 無로 남았다. 그럼 無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일까? 無는 사라진다기보다 승화하는 것이다. 화백은 그 작품으로 평창올림픽 개최를 축하하고, 세계의 평화와 새로운 창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권정호 화백은 죽음의 과정과 순환의 의미를 닥종이 해골이라는 추상적인 매개체에 담아서, 예술의 본질적인 요소를 탐구하는 미니멀리즘을 뛰어넘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인간성을 회복하는 신표현주의를 지향한다. 화백의 작품 세계는 끊임없이 진화하며 또 다른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메이드 인 대구’라는 전시제명으로 대구미술관에서 대구 출신 작가 곽훈, 권정호, 김영진, 박두영, 박철호, 서옥순, 손광익, 최병소 8명의 작품을 전시한다. 거기서 화백은 3060개의 해골 형상으로 이루어지는 사각형 큐브 한 점과 작은 작품 네 점을 포함한 다섯 점의 작품을 전시한다.“전시할 주요 작품의 제목이 뭐예요?”“언타이틀 - 무제.”여백을 주고자 함인지.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낄 자유를 억압하지 않겠다는 의도일지도 모르고. 생각해보니 두개골과 매우 어울리는 제목이다. 카타콤이나 현대인의 정신적 무덤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3060개의 해골이 만들어내는 미로를 상상해본다. 아무리 가도 똑같은 길이어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미로. 아리아드네는 미로에 들어가는 테세우스에게 실 뭉치를 준다. 테세우스는 그녀가 시킨 대로 문고리에 실을 묶어놓고 미궁에 들어가서 괴물을 처치하고 무사히 살아나온다. 사각형 큐브 속의 해골은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군상들일 수 있고, 해골 사이의 간격은 끊임없이 인간들을 헤매게 하는 생의 미로일지도 모른다.권정호 화백은 해골 형상으로 사회현상을 다루는 작가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1960년대에 미대에 들어간 1세대이고, 세계적인 명문미술대학원에 입학한 유학 1세대이기도 하다. 백남준, 김구림, 전수천 작가를 비롯한 재미작가들과 전시회 활동을 함께 한 이력은 대구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메이드 인 대구’는 대구의 문화를 알리는 운동이다. 그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 ‘무제’는 지금 마무리 작업 중이다. 화백은 뉴욕 MONA PX1과 같이 작가들이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도움을 주는 큐비컬을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가창분교를 창작스튜디오로 만들었다. 화백은 문화 활동에 참여하는 것 역시 작품 세계의 연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번 출품작 역시 화백이 꾸준히 지향해온 바와 같이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기대가 된다.“왜 해골입니까?”권 화백이 사람의 두개골에 관심을 가진 것은 고교시절부터이며, 영국의 설치미술가 데미안 허스트보다 훨씬 먼저라고 한다. 아버지가 대구역 부근에 있었던 칠성의원의 공의였고 형이 의대생이었다. 형이 두개골의 외형 조직과 짜임새, 구조를 배우려고 책상에 두개골을 갖다 놓았는데, 고교 2학년이었던 화백은 사람의 두개골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부정맥이 심해서 2군사령부까지 실려 가고, 폐렴으로 밀양 위양에서 요양을 하는 혹독한 과정을 겪으며 형이상학적인 죽음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두개골에 대한 충격이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이어지며, 식육점 진열장의 빨간 불처럼 해골에 대한 관심에 불이 켜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인으로 모델이 되었던 적이 있는 뉴욕 자연사박물관 뉴기니아관에서 화백은 인간의 뼈로 장식물을 만드는 뼈의 사용법을 배웠다. 해골을 작품화하는 것이 운명의 지침을 따르는 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두개골의 시작은 죽음의 의미였으나 작품 활동이 계속되며 해골의 의미가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다. 화백은 해골을 죽은 시체로서의 해골로만 이해하기보다 멜랑콜리의 원리로 해석하길 바란다. 해골은 오브제이고, 대상이고, 자연이라고. 자연을 두고 다양하게 느끼고 다르게 보는 것이 바로 창의라고. 그렇듯이 두개골은 전달의 의미를 다양하게 표현하며 색다른 것을 보게 한다. 작가는 해골로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며 어떻게 새로운 걸 보고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가, 하는 멜랑콜리의 원리와 의미를 깨닫게 한다. 그릇이라는 의미로서의 해골을 어떻게 볼 것인지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작가는 해골로 사회현상을 보는데, 관객은 그것을 어떻게 보고 어떤 새로움으로 느낄지 묻게 된다.화백에게 있어서 두개골은 시체로서의 물상이 아니라 이 세상의 문화를 발전시킨 인간의 두상이다. 해골은 단지 외형의 껍질일 뿐이다. 화백은 해골이라고 할 때가 있고, 두개골이라고 할 때가 있다. 두 가지의 의미가 다르다. 내용에 따라서 단어가 달라지는 문장의 구조와 같다. 두개골의 구조 조각 또한 내용에 따라서 단어가 달라지는 문장과 같다. 화백은 구조에 관한 분석철학을 곁들인다. 언어가 갖고 있는 의미가 문장 구조에 따라 변화하듯이 해골설치작업 역시 전달이라는 구조에 의거하여 사물을 다양하게 보는 것. 행위예술의 언어가 갖고 있는 의미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지.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09-23

자연으로 채우는 삶과 예술은 하늘이 준 축복

파계로를 따라 가면 자연염색박물관 표지판이 보인다. 좁은 샛길로 접어들어 푸른 들녘과 밭고랑 사이의 질서정연한 간격을 보며 길 끝까지 간다. 박물관은 인근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김지희 자연염색 명인이 나와서 반겨주신다. 체험실 입구에 노랗게 마른 홍화가 평상에 가지런히 누워 있다. 홍화 꽃을 보고 싶으면 두어 가지 들고 가서 씨를 털어보라는 말에 체면 차리지 않고 꽃망울이 선명한 가지 하나를 골랐다. 아름다운 홍화의 개화가 기대된다.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흰옷을 즐겨 입었다. 끊임없이 일손을 요구하는 흰옷을 감당 못한 여인들이 승복에 잿물을 들이듯 염료를 생각해내기에 이르렀다. 여인들은 자연에서 얻은 염료에 흰 천을 담가 색을 들인 후에 옷을 지어 평상복으로 입었다. 옷을 입다 색이 희석되면 뜯어서 염색한 후에 다시 옷을 지었다. 옛 여인들은 자연에서 찾아낸 염료를 옷감에도 입히고 음식에도 입히는 지혜를 발휘했다. 진달래 꽃잎으로 화전을 굽고 뿌리와 가지로 염료를 내는 비법을 어떻게 찾았을까. 치자의 노란 물을 음식에 사용하는 법은 또 어떻게 알아냈는지.“박물관을 언제 열었어요?”“2005년에 대구가톨릭대 교수직에서 퇴임하고 사재를 털어서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염색박물관을 지었어요.”명인은 열악한 한국의 염료세계를 넓게 확장하고, 평생을 기울여 배우고 연구해온 염료의 지식과 경험을 후학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박물관을 지었다고 했다. 직접 뛰어다니며 배우고 익힌 것을 후학들에게 넘겨주고 싶다는 말씀이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온 이의 삶을 대변하고 있었다.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밭이었다고 한다.“여기다 쪽씨와 홍화씨를 뿌려 가꾸었어요.”일년초는 그때그때 심지 않으면 단절된다며 그 연세에도 밭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 우리의 어머니들이 살아오신 것처럼 명인의 어머니도 누에를 길러서 명주실을 뽑고, 길쌈으로 명주를 짜내고 염색까지 할 때, 명인은 옆에서 거들고 배우며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고 했다. 어머니가 하얀 천에 쪽물을 들이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며, 풀물에 담갔다 꺼내면 하얀 천이 놀랍게도 초록으로 물든 후 파랗게 변하는 모습이 너무나 신비로웠다고 한다. 어머니와 길쌈하던 노인들이 모두 명인의 스승님이셨다.“어린 시절을 어디서 보냈어요?”“오사카에서 태어나 여덟 살까지 살았어요.”일본에서 여덟 살까지 살다 창원 덕산에서 살았다며, 숲이 가깝고 들판에 온통 야생초가 자라고 있어서 일찍부터 자연을 가까이 하고 살았고, 공예과 염색 담당교수로 연구소에 계시며 우리 것에 대한 탐구와 연구를 하고 산 덕분에 자연염료의 세계에서도 토속적인 분위기를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코로나 때문에 활동도 못 하시고, 시간을 어떻게 보내세요?”“그림을 그려요.”초등학생일 때 수채화를 그려 유네스코 상을 받았고, 고등학교에서 미술실기대회에 나갔고, 서울대학교에서 응용미술학을 전공했으니 그림에 애착을 가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자연염색 명인으로 살아온 과정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평생 연구해본 학문과 경험을 살려 후진들이 자연염색의 세계를 길이 보전할 수 있도록 연구의 사료를 남기는 일도 중요하다며, 자연염색 명인 ‘김지희’만의 책을 낼 의지를 내보인다.1979년에 김지희 명인은 석사를 마치고 일본 동경대학교 대학원 연구원으로 염직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올 때 쪽씨 다섯 알을 가져왔다. 본래 우리 것이었던 쪽씨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나라가 온갖 풍파를 다 겪느라 남아 있는 게 없었네요.”“일제식민지와 6·25 같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전통은 무너지고 아름다운 우리 것이 정체성을 잃으며 사라졌어요.”험난한 세월은 고전 대대로 이어져오던 길쌈 문화와 자연염색의 세계까지 파괴시켰다. 민중의 삶이나 다름없었던 토속적인 문화가 사라지면서 쪽씨조차 말라버려 존재를 찾기가 어려운 점을 생각하고 명인은 자연염색만이라도 우리의 것, 우리나라만의 색상을 되찾기로 했다. 쪽씨와 홍화씨를 땅에 묻고 가꾸며 명인은 본격적으로 염료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정성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염색이 뭐예요?”“홍화의 붉은 색과 푸른 쪽빛이 가장 예민하고 정성이 많이 들어가요.”김지희 명인은 자연염색박물관에 사각문교힐, 만자 초화문교힐, 기하문과 호접문의 교힐 재현이라는 이름의 쪽빛 무늬 천을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었다. 홍화와 쪽은 염료가 고와서 자연염색을 하시는 분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한다며 매염제에 따라서 다양한 색상으로 추출되는 자연염색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조곤조곤 들려주신다.명인은 교직생활을 할 때의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세계 염색가와 말레이시아 학자들과 교류를 많이 했다며, 세계대회 중에 명인은 대나무 잎을 동시에 준비해서 연구를 해보자고 제의했다. 대나무 잎 염색은 신월대의 큰 잎을 사용하는데 동매염을 한다며, 구리가루를 매염제로 사용하면 고운 연두색이 나온다고 한다. 두 나라가 똑같이 대나무 잎에서 염색을 추출한 후 두 번 염색해서 비교 분석하게 되었다. 실험 결과가 어떻게 나왔느냐고 물었다. 연두색의 고운 염료가 추출되었는데 우리 땅에서 자란 대나무 잎이 훨씬 색이 진하고 아름다웠다고 명인이 자랑스러워했다.그 밖에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에서 염료를 추출하는 과정에 대한 많은 얘기를 들었다. 이끼를 암모니아수에 담가서 색을 추출하면 보라색이 나오고, 억새에서 국방색이 나온다거나, 진달래의 뿌리를 태운 재로 비둘기색이나 회색의 염료를 추출해서 스님이 입으시는 승복을 만든다는 마술 같은 얘기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명인은 자연에서 받은 것은 자연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일러주신다. 색을 추출하고 난 찌꺼기를 땅에 묻어주고, 진달래나무의 뿌리를 뽑는 대신 꽃을 보고 난 후에 잘라낸 나뭇가지로 염료를 추출한다거나, 화공약품이 들어간 매염제는 따로 모아두었다가 수거해가는 사람들에게 보내야 한다는 등, 자연에 대한 사랑이 애틋하다.“염색을 하며 가장 중심에 둔 철학이 뭐예요?”“거듭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우리만의 것, 자신만의 것이에요. 제자들이 그걸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명인이 된 것도 하늘의 뜻이라며, 자신이 알고 있는 좋은 기술을 후학들에게 모두 가르쳐주고 가야 한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자연염료를 복원하며, 제자를 길러내고, 명인 아카데미를 열어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덧붙여 주신다. 사회에 기여할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 명인이라고. 책에 나오지 않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이 필요하다며 문헌이나 책을 참고로 하면 실수가 없는 반면, 새로운 연구와 창의적인 연구에는 실패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하신다. 자기만의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런 실험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말씀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자연염색이 제대로 정착되려면 각 분야별로 역할이 있어야 하고, 네트워크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사회적인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지 않아 연구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허가와 인증을 받지 못하는 애로사항을 겪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하신다. 무엇보다도 네트워크가 이루어져야 소통이 쉽고 연구 과정이 지연된다거나 뜻하지 않게 번거로운 과정으로 인한 좌절을 방지할 수 있고, 학자들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수 있다고 말 매듭을 지으신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09-16

평화로운 일상 사라진상실의 시대에희망을 노래하라

코로나의 기세가 꺾일 줄 모른다. 사람들이 질병의 고통으로 조용히 숨죽이고 있을 때, 지구는 태풍과 이상 기온, 지금까지 없었던 폭우로 홍수를 일으켜 온몸으로 고통의 단말마를 내지른다. 이 와중에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력파 퓨전음악그룹 ‘에스피아르떼’의 리더이기도 한 정성진 대표를 만났다. 팀명의 내력을 물었다. ‘SP Arte’는 이탈리아어로 희망을 이르는 스페란짜(speranza)의 sp와 아르떼를 합쳐서 ‘희망예술’을 의미한다며 팀명을 자세히 풀어준다. 그 말은 곧 음악을 하는 사람이 먼저 희망을 가져야 행복 바이러스를 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음악은 연주를 하는 사람이 먼저 즐겨야 듣는 사람도 즐겁게 들을 수 있다고.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에 ‘공주는 잠 못 이루고’ 가사를 보면 “Guardi le stelle che tremano d‘amore e di speranza! 사랑과 희망에 떨고 있는 저 별들을 보는구나!”라는 대목이 있다. 이들의 sp는 거기서 왔다.코로나19의 발발로 온 나라가 최고 단계의 거리두기를 하던 지난 4월, 음악창의도시인 대구에 참 의미 있는 공연이 있었다. 관람객 없이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한 라이브 중계로 진행되는 콘텐츠인 ‘DAC on Live’ 공연이 무대에 올랐다. 문화예술회관 소속 4개 시립예술 단체 중 한 팀으로 참가했던 ‘에스피아르떼’도 비어 있는 객석을 보며 관객 없는 연주를 했다. 혼잣말을 하는 듯 쓸쓸한 연주였지만 그렇게라도 공연을 한다는 사실이 기뻐서 온 열정을 다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그때는 여름만 지나면 코로나의 기세가 꺾이고 금방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을 줄 알았다.바이올린·퍼커션·피아노·베이스기타 등4인조 앙상블로 2017년 크로스오버팀 기획싱글곡 첫 앨범 ‘희망’·싱글앨범 ‘미라클’ 발표대구문예회관 시립예술단체로 연 160회 공연-멤버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어요?△에스피아르떼는 바이올린(노윤지), 퍼커션(김찬양), 피아노(이연희), 베이스기타(김제윤)의 4인조 앙상블 팀이다. 성악을 전공한 정성진 대표를 더한 다섯 명 모두 클래식과 실용음악을 전공한 흔치 않은 구성으로, 장르를 구분하지 않는 크로스오버로 작곡과 연주, 편곡을 겸하며 에스피아르떼만의 색깔을 만들어내고 있다.-창단 초기의 얘기를 좀 해주세요.△에스피 아르떼는 2017년에 창단되었다. 연습실이 없어서 레스토랑을 빌리는가 하면 지인의 이층집에서 연습을 하기도 하고, 지금의 작업실을 얻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2018년 제 1주년 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르며 본격적으로 연주활동을 시작했고 2019년에 2주년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3주년 공연을 준비하던 중에 모든 활동이 정지되었다. 갑자기 일을 잃은 이들이 에스피아르떼뿐일까. 모든 음악인들과 극단 관계자들, 하다못해 야외 행사까지 취소된 터라 심각한 삶의 정체 현상이 길어질 조짐까지 보이며 연주자들의 초조함을 더하고 있다. 연극도 영화관도 음악연주회도 관객이 없으면 현실적으로 존재하기가 어렵다.-다섯 명이 어떻게 만났어요?△로마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오페라 공연까지 했는데, 순수음악 만으로는 관객을 만나기가 어렵고 현실적으로 지탱하기가 쉽지 않아서 크로스오버를 기획했다. 바이올린 연주자와 퍼커션, 베이스 기타 연주자를 만나 함께 해보자는 제의를 하며 연주 인원이 갖춰지게 되었다. 클래식에서 벗어나며 연주해달라는 부탁이 많이 들어왔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많은 뮤지션들이 음악 대신에 택배를 한다거나 아르바이트로 지탱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급 인력들이 재능을 썩히고 있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경제적인 여건을 어떻게 극복하시나요?△연간 160회 정도의 연주를 하는데, 코로나가 확산되며 활동을 멈추고 있다. 언제 연주 기회가 생길지 몰라서 항상 스탠바이를 준비하고 있지만 기다리는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하다. 에스피아르떼 뿐만 아니라 지구촌의 모든 연주자들이 똑같은 입장이겠지만 멈춰버린 시간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국가의 의식이 높아질수록 음악의 가치도 올라간다.’정성진 대표는 음악을 가장 즐겨야 하는 사람들이 현실적인 문제로 맘껏 즐기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음악가는 음악을 연주할 때 가장 행복하다. 그것을 위해 평소 수많은 연습을 반복하는 게 음악인의 일상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여건 등 많은 제약과 부담을 극복하고 올해 안으로 3주년 공연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지난 4월 라이브중계 ‘DAC on Live’ 공연 후유튜브 통한 랜선 음악회로 팬들과 소통해 와“코로나로 많은 뮤지션들이 힘든 시기더 많은 연습으로 실력 쌓을 기회 삼을 터”-음악의 사회적 기능이 뭐라고 생각하세요?△중세 말에 야생 설치류로 인한 흑사병(黑死病)이 돌아서 유럽 인구를 5분의 1로 줄여놓았던 적이 있다. 300년간 주기적으로 유럽 인구를 줄여나갔던 흑사병으로 인해 백년전쟁이 중단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흑사병으로 유럽이 죽어갈 때 피렌체에서는 르네상스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바로크문화가 융성해진 아이러니가 발생한 걸 보면 어려운 시절이 인간의 삶에 약이 될 수도 있겠다는 묘한 생각이 든다.가장 어려운 시기에 예술이 아름답게 피어난 것은 상심에 빠진 인간을 위로해주는 기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슬픔을 견디며 예술을 창조해낸다. 그들을 살게 해주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가가 먼저 행복해야 관객들에게도 행복바이러스를 전달할 수 있다. 유명한 음악가들도 많지만 무명의 음악가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아서, 돈도 못 벌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굴욕을 참으며 예술을 한다. 다만 좋아서. 예술은 예술가의 영혼을 먹으며 자라는 악의 꽃인가! 아무리 어려워도 예술을 버리지 못하는 걸 보면. 예술은 자신을 이겨야 할 수 있는 것이니, 시역과의(是亦過矣) 라고 하지 않던가.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마니아 층만 즐기는 음악이기보다 계층을 떠나 소상공인을 비롯한 서민층에서 충분히 즐길 때 음악의 사회적 기능도 살아난다. 싱글곡 첫 앨범 ‘희망’을 발표하고, 싱글앨범 ‘미라클’이라는 자작곡을 또 만들었다. 희망과 기적은 그들 음악의 모토이기도 하다. 앨범을 발표하고도 연주를 하러 다닐 수 없어서 그들은 유튜브를 통한 랜선 음악회로 팬들을 만나고 있다.-언제부터 음악을 하셨어요?△중학교 때 “시민회관에 음악 들으러 갈래?” 하는 담임선생님의 제의를 받고 따라갔는데, 시향의 연주 끝에 애국가가 흐르는데 심벌즈가 짱 하고 울렸다. 그 소리에 온몸에 전율이 일며 음악에 대한 인식의 눈을 뜨게 되었다. 성악가로서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나부꼬 역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기억에 남는 연주를 꼽자면?△1주년 창단기념 콘서트가 가장 마음에 남는다. 추운 겨울에 수성아트피아 용지홀에서 공연을 했는데, 칼바람을 헤치고 오신 관객을 다 받지 못하고 돌려보내는 사태가 생긴 것이 지금도 미안하다. 한 달 후에 문화예술회관에서 그때 공연장에 들어오지 못한 분들을 모셔서 앵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앵콜 공연에 꼭 와달라며 티켓에 사인까지 해주던 죄송스러움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2주년 기념콘서트 때는 알맞게 자리를 채워주셨다.코로나가 터지며 연주회를 못 하고 있어서 팀원들의 사기가 많이 저하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더 많은 연습으로 실력을 쌓아서 다음 연주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연주자는 항상 스텐바이를 준비하고 있다. 르네상스는 그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대변하는 시대의 요구이다. 코로나19가 또 다른 르네상스를 준비하고 있다고 믿어본다./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20-09-09

사람이 온다는 건… 결혼 전문가의 삶 이야기

그 어느 때보다 비가 많고 태양의 열기마저 뜨겁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가을은 결혼도 많이 하고 여행지를 검색하는 손길도 바빠지는 계절인데 코로나19의 위협이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있다. 결혼식을 하며 마스크를 껴야 하고 식사를 답례품으로 대신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치르는 가장 큰 행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자란 두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가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세상에서 유일한 내 편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대구에서 23년간 결혼정보회사를 운영해온 이현숙 대표를 방문했다. 딸의 결혼식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던 것이 떠올랐다.비혼과 미혼의 비율이 높아지며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결혼은 여전히 우리네 삶에서 가장 큰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결혼은 등가교환방식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맞선을 통해 외모와 배경 같은 외향적인 조건을 먼저 알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다소 편리한 점도 있을 것 같다. 이현숙 대표는 남녀가 만나서 결혼에 이르기까지 짧게는 육 개월 길게는 일 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여러 번의 만남을 갖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탐색하는 과정을 거치며 다른 문화와 다른 가정에서 자란 낯설음을 극복하는 마음의 준비기간이랄 수도 있겠다. 마침내 마음이 통해 결혼한다는 연락을 받게 되면 얼마나 기쁘고 보람이 있을까.이현숙 대표는 결혼 상담하는 과정을 자세히 일러준다. 우선 서로가 이상형을 피력하고 어떤 공통분모가 형성되면 만남을 주선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나이, 학력, 직업, 경제력, 가족관계, 키, 몸무게, 취미 등의 정보를 상대에게 제공함으로써 서로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취향이나 이상으로 상대에 대한 신뢰감과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언제부터 이 일을 하셨어요?”서른아홉 살 무렵에 돈도 벌고 사회에 기여하는 보람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 신문에서 우연히 결혼정보회사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미국인 커플 매니저가 바쁜 사람들을 위해서 화상 채팅으로 만남을 주선하고 결혼이 성사되는 기사를 읽으며 머리에 전류가 이는 충동을 느꼈다. 저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 결혼정보 회사를 찾아갔다. 큰 회사에 들어가서 두 달 동안 일을 배운 다음 독립을 했는데 고향 구미에서 40평 넓이의 사무실을 열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 1998년이었다.‘결혼정보회사’라는 광고를 띄우고 관리를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사무실을 연 곳이 공단 지역이어서 남녀 성비율이 맞지 않았다. 돌파구를 찾다 눈을 돌리게 된 것이 국제결혼이었는데, 언어문제, 위장결혼 등의 국제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오래도록 일을 피했다. 그러다 베트남 현지인을 통해 한 사람을 소개받았는데, 그가 착하고 온순한 베트남 여인을 만나고 왔다. 너무나 좋은 인상을 갖고 온 터라 이현숙 대표도 국제결혼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이후부터 농촌이나 공단 지역 청년들의 결혼이 늦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결혼과 함께 국제결혼도 주선하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다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 석사·박사과정을 밟으며 제대로 된 커플 매니저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 역시 직업에 대한 강한 자의식 때문이기도 하고 자기 일을 더 잘해보겠다는 욕망이기도 했다. 시대가 바뀌어서 예전에 가난 때문에 국제결혼을 하던 외국여성들도 이제는 조건을 따지게 되고 사랑을 바탕으로 결혼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남성이 여성을 선택하던 시대에서 여성이 남성을 선택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난달에는 결혼이 세 건이나 성사되었다.이 일은 사회적인 참여로 보람을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여성들이 결혼을 회피하고 아기를 낳지 않으니 사회의 미래가 염려스러운 이즈음 커플 매니저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시 되고 있다. 만혼의 경우 부모에게 떠밀려서 맞선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들이 마음을 열고 상대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것 또한 커플 매니저의 능력이 아닐까.“제가 좋아하는 시가 있는데 잠시만 소개를 해볼게요.”이현숙 대표가 말을 멈추고 시를 읽는다. 대학에서 다문화와 결혼문화에 대한 강의를 할 때 청강생들에게 읽어주는 시라고 한다.사람이 온다는 건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그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의 ‘위대한 인연’시는 묘한 힘을 갖고 있다.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긴장을 풀어주는 힘. 낯선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며 이현숙 대표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읊조렸을 것 같다. 두 사람의 일생이 마침내 한 자리에 모였다고. 자신을 온통 맡긴다는 의식으로 결혼을 하는 시대는 지났다. 고학력과 매스미디어의 발전으로 남녀 모두 일을 갖고 있는 것이 다반사고, 동등한 입장에서 생활하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할 말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서로 의견이 부딪친다고 해서 예전처럼 여성들이 더 참고 견디란 법도 없고 할 말을 다 하는 그녀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 생각의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현숙 대표는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필요한 것이 유튜브 강의나 따뜻하고 훈훈한 프로그램으로 마음의 벽을 넘어 서로 어려움을 헤쳐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한다. 지각 있는 기성세대들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갑자기 든 생각이지만.”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 아이들이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는 어른도 좋은 부모가 되는 공부가 필요하다. 단과대학에서 결혼대학이란 코스를 만들면 결혼을 앞둔 사람들이 강의를 들으며 어른이 되는 준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결혼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고 서툴고 미숙해서 저지르게 되는 오류를 그만큼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현숙 대표가 웃는다. 내가 보기엔 급하게 해낸 생각이라기보다 서툰 어른들을 보며 느낀 진심 어린 마음 같다. 지나고 난 후에야 무지로 저지른 과오를 깨닫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특히 육아문제에 한해서. 육체적으로 성숙하고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이 아녀서 가정 폭력이 벌어지고 아이를 버리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 아닌지. 실은 어른이 되는 공부가 밥상머리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부모들이 너무나 바쁜 시대가 되었다.“저는 프로가 아름답다는 말을 참 좋아해요.”일하랴, 강의하랴, 글 쓰랴 일 분 일 초도 버릴 것 없이 열심히 살고 있는 그이. 이현숙 대표는 자기 분야에서 진정한 프로가 되고 싶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는 개념의 프로가 아니다. 일을 하는 도중에 석사 박사 과정을 밟으며 논문을 쓰고, 짬짬이 신문에 짧은 글도 발표하고, 결혼행복정보 채널 리스토리TV 유튜브 방송 진행자로 결혼을 장려하기도 하는 이 대표.그 모든 에너지가 자신의 가치관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거나 인정받고 싶다기보다 자신의 일을 그만큼 사랑하며 달려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한다. 온 마음으로 진정성 있게 대했는데 상대가 단순한 이해타산으로 대하거나 성혼이 되었는데도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직업인으로 봐 넘길 때 조금 서운하기도 하지만 아기를 낳았다거나 돌잔치를 한다는 연락을 받으면 그 모든 회의를 다 잊는다.“언제까지 이 일을 할 생각이세요?”한 번도 일을 그만둔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건강이 허락하면 90세가 되어도 일을 할 생각이다. 이 대표는 신문에 결혼칼럼 연재한 글을 모아 책으로 출판할 예정이다. 현장 사례를 담은 글이어서 은근히 기다려진다. 그 에너지와 열정은 그이의 숨은 저력이기도 하지만 자아실현의 모토이기도 하다.이 대표는 하루도 잊은 적 없다. 자신이 온 청춘을 바쳐 이 일을 하는 것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보람을 느끼고 있음을. 외로운 청년들을 결혼이라는 성스러운 궁전으로 이끌고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해주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글 장정옥

2020-09-02

아버지에서 아들로… 8대째 맥 잇는 조선백자의 장인

“군대 다녀오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가업을 이어받아야겠다고 생각했죠.당연한 결정입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또 그 위의 할아버지들이 해 오신 일이니까요.제 아들도 지금 학교에서 도자기를 배우고 있는데 또 그렇게 대를 이어 가겠죠.”늙수그레한 사람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생각은 여지없이 깨어져 젊은 사람이 조선요 박물관의 문을 열고 나왔다. 박물관 뒤로 보이는 하늘재 너머로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넓은 전시관 지붕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하늘재는 경상도와 수도 간의 문물이 유통되던 물류의 중심지였다. 여기에서 생산되던 풍부한 도자 원료는 문경을 전통도자문화의 산실로 자리 잡게 해주었다. 하늘재 아래에서 8대째 조선요의 맥을 이어가는 문경 조선요 대표 김영식씨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망댕이가마 소장자로 경북 민속자료 135호인 망댕이사기가마를 보존하며 조선요를 만들고 있었다.망댕이란 사람 장딴지와 같은 모양의 길이 20∼25cm의 진흙덩어리를 말한다. 이 망댕이를 촘촘히 박아 반구형의 가마칸 3∼8개를 나란히 연결한 우리나라 특유의 칸 가마를 망댕이가마라 한다. 칸마다 통풍장치인 살창구멍이 있어 불길의 흐름을 부드럽게 하고 벽돌로 만들어진 가마와는 다르게 가마 안에서 불을 지피면 그릇이 더 견고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김 대표가 보존하고 있는 이 망댕이가마는 하늘재의 산허리에 있는데 여기에 가면 가마뿐만 아니라 당시 살던 집과 작업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김 대표는 여기서 나고 자라 아버지의 일을 돕곤 했는데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대로 재현할 수 있게 된 원천이라고 했다.누구에게 조선요를 배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냥 아버지가 하시던 일이고 어릴 때부터 그 일을 도우며 자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더 많이 배우지 못해서 아쉽지만 그런 대로 어릴 때 보았던 것을 기억하며 재현하다보니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망댕이가마 오르는 길은 좁고 가팔랐다. 이 길을 김 대표의 아버지와 그 할아버지들은 지게로 도자기를 져 나르며 살았을 것이다. 그 힘들고 어려웠던 삶이 길과 가마터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모든 도공들이 그런 삶 속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불이 타오르지 않는 망댕이가마를 보며 선조들의 삶을 잠시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문경 조선요는 경주김씨 계림군파의 13대인 김취정으로부터 이어져 20대 김영식에까지 이른다. 3대였던 김영수가 1843년 망댕이요를 축조했고, 5대였던 김운희가 왕실자기 생산을 전담하던 경기도 분원에 발탁되어 경기도 광주 분원으로 이주해 1903년 분원의 가마를 제작했다. 이때 김운희는 백자항아리와 병 제작에 큰 명성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하재일기’ 제8권에 보면 문경사람 김비안이 1903년 망댕이가마를 축조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김비안은 김운희의 다른 이름으로 문경의 망댕이가마가 분원에도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운희는 가마축조기술 및 자기 성형기술이 뛰어나 광주분원에서 김문경으로 통하였다고 전해진다. 김운희의 아들 김교수는 아버지의 분원 활동 양상을 지켜보다가 문경으로 돌아와 가업을 이끌었다. 해방 이후 도자 수공업의 명맥이 끊어져 가고 있을 때라서 김교수의 귀향은 의미가 컸다. 그로부터 문경 지역이 전통도자문화의 산실로 자리 잡게 되었다. 김교수는 조선요에서 무문의 백자 발, 대접, 잔, 항아리, 병과 같은 일상 기명(器皿)을 제작했는데 고졸한 아름다움과 정치한 세련미가 일품이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항아리, 병과 같은 중형 기명에서 고졸미와 세련미가 도드라져 조선 도자의 품격이 그대로 살아있다.김교수의 아들 김천만은 부친의 뜻을 따라 묵묵히 조선요를 만들었다. 김천만은 특히 청화백자의 멋스러움을 현대적으로 재현하고 나아가 조선전기 분청사기의 재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도식화된 포도 문양이 특징인 청화백자를 제작하여 명맥이 끊길 수도 있었던 청화백자기술을 조선요에서 지켜냈다.김천만은 본격적으로 일본 도자기 시장에 진출하여 문경의 도자가 일본에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70년 당시 조선요에 들어와 있던 고바야시 도고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도자기의 대중화와 자연의 질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섬세한 제작과정을 설명함으로써 우수한 도자기 제작기술을 일본에 보여줄 수 있었다. 김천만이 일본으로 진출한 때에는 문경 지역 가마의 대부분이 특별한 상호가 없어 ‘호암요’ 또는 ‘관음요’라는 상호를 이용하였다. 관음요는 동네 이름을 딴 것이고, 호암요는 망댕이가마 뒤편의 바위가 호랑이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지었다는데, 지금도 그 바위는 가마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김천만은 미술품은 특수한 애호가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도 널리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질 좋은 도자기를 생산하기 위해 근교의 흙을 사용하고 유약은 목탄이나 장석 등의 자연 유약을 사용하며 구울 때는 소나무를 주로 사용했다. 자연 유약은 좋은 흙과 고온으로 굽는 두 가지 조건이 맞지 않으면 좋은 도자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매일 사용함으로써 색이 변하며 그로써 가치가 드러난다고 했다. 도자의 일상화가 시작된 것이다.김천만의 아들이자 현재의 조선요 대표인 김영식은 8대째 170여 년간 이어온 문경 망댕이가마의 정통 계승자이다. 2019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한 그의 조선요에 대한 자부심은 남달랐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사기장이기도 한 그는 자비로 망댕이박물관을 짓고 조선요를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일본 등 국내외에 도자기 전시회를 수차례 열어 문경백자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이다.“문경백자는 다른 지방 도자기와 달리 흙을 쓰는 방법이 질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문경백자는 흙 배합률이 달라 색상에서 차이가 나죠. 저는 문경백자만의 색을 구현하려 하는데 이 노력이 인정을 받아 경북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고 봐요. 전통방식을 그대로 계승해서 후대에 물려주고 싶어요.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저라도 전통을 이어받아 그대로 물려줘야죠.”문경이 왜 도자기가 유명하냐는 뻔한 질문에 그는 당연하게도 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문경백자는 여주나 이천 등 다른 지방 백자와 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문경백자는 문경에서 수십 년 전부터 만들어온 청색을 가미한 색상을 구현해 내죠. 문경 흙을 전부 사용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흙 채취 과정이라든가, 항아리를 만들 때의 점육이라든가, 열의 화도가 좀 떨어지는 면에서 차이가 있죠.”흙이 좋으니 도자 문화가 번성했겠지만 실제로 문경 흙을 본 적은 없었다. 도자기 장인들이나 볼 수 있을 흙일 것이다.그렇다면 8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김영식 대표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오고 있을 것인데 그것은 무엇일까.“무엇보다 빛깔이죠. 문경 도자기는 푸른색이 약간 가미된 청백색 도자기입니다. 흰 매화에도 여러 가지 색이 있듯이 도자기도 그렇죠. 흰색이라고 모두 같은 흰색이 아닙니다. 관조백자는 회백색도 있고 설백색도 있지만 문경백자라면 뭐니뭐니 해도 청백색이죠. 제가 현재 구현해 내고 있는 것도 청백색 도자기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죠.”젊어서 그런지 그의 꿈은 크고 조선요에 대한 열망도 가득했다.“대통령 표창도 받고 경북 무형문화재도 됐으니 이제 문경백자의 전통 기법을 열심히 연구해서 국가무형문화재에 올라야죠. 국가무형문화재에 오른다는 것은 개인의 영광을 넘어 조선요가 인정받는 것이니까요.”/글 천영애

2020-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