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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닭은 벼슬을 자랑하지 않는다

이창훈경북도청본사 취재본부장중세 말기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는 영국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칼레 사람들은 시민군을 조직해 맞서 싸웠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파격적인 항복 조건을 내걸었다. “시민들 중 6명을 뽑아 와라. 그러면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해 처형하고 나머지는 사면하겠다”는 내용이었다.칼레의 갑부 생 피에르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부유층 인사 6명이 자원했다. 이들은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에 자루 옷을 입고 영국왕 앞으로 나왔다. 사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임신 중이던 영국왕의 왕비가 처형을 만류했다. 이들을 죽이면 태아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왕은 고심 끝에 이들을 풀어 주었고 6명의 시민은 칼레의 영웅이 됐다. 이것이 가진 자의 의무를 상징하는 ‘노블레스(귀족) 오블리주(의무)’가 탄생된 배경이다. 원래 노블레스는 닭의 벼슬을 의미하고, 오블리주는 달걀의 노른자라는 뜻이다. 이 두 단어를 합성해 만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닭의 사명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 데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작금의 현실을 보면 우리나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요즘 언론의 화두는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당선자의 거취다. 그는 정의기억연대를 이끌다 최근 국회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여러 가지 문제로 검찰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 중심에 위안부 피해자로 오랫동안 활동한 이용수 할머니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는 사회적 통념이나 법으로 다뤄 바로잡으면 된다. 법의 심판은 법원에서 받고, 사회적 정서와 국민의 감정 등을 고려한 의원직 면탈은 자신이 소속한 당에서 결정하면 끝이다.그러나 이 사건의 본질이 왜곡되면서 당리당략적 정쟁으로 흐르고 있다. 지난 30년간 일본군 ‘위안부’ 운동 방향을 돌아보자는 이용수 할머니가 요구한 본질은 간데없고 인신공격만 난무하는 등 본말이 전도되고 있다. 이 가운데 다선 국회의원들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호위무사로 방어벽을 치고 있다.국회의원들은 국민의 대표로 ‘선량(選良)‘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하지만 선량은 간데없고 ‘노블레스 말라드(Noblesse Malade)’, 즉 욕심에 가득찬 귀족만 가득하다는 생각이다.경북도의회도 다음달이면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된다. 오랫동안 일당중심으로 오다 2년전부터 여·야당이 함께 동고동락해오고 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불협화음도 있었지만 모두 다 시도민을 위한 업무 중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다수당은 좀 더 아량을 베풀고, 소수당은 억지보다는 실리에 방점을 찍는 실사구시를 추구, 협치로 나가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프랑스의 작은 지방에서 싹텄듯 경북도의회가 타시도의 모범이 됐으면 한다.단 6명의 지도자가 칼레를 구한 것처럼 세상을 밝히는 등불은 아주 작은 불빛에서 시작된다. 희생과 나눔을 의무로 여긴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밝아질 것이다.

2020-06-02

대구독립운동기념관

올 초 대구에서도 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자는 뜻있는 인사들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지난 2월에는 대구광복회와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등이 중심이 돼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위를 발족시켰다.지난 4월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두 차례나 무기선고를 받았던 독립운동가 백산 우재룡 지사의 장남 우대현씨가 동구 용수동 소재 땅 4만7천㎡를 기증하면서 건립 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그러나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발기인 대회 및 학술대회 등 추가적인 건립운동에 대한 제동이 걸리면서 아직은 건립운동이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추진위 측이 밝힌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에 대한 당위성은 여러 가지다. 국채보상운동의 중심도시이자 일제하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립운동이 펼쳐진 곳이라는 점이다. 대구는 15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해 인구비례로 볼 때 서울의 1.6배, 부산의 3배, 인천의 5배가 된다고 한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독립운동가 묘원인 국립 신암선열공원이 있다는 것도 건립의 배경이다.서울과 부산, 광주뿐 아니라 김포, 밀양, 나주 같은 중소도시에도 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돼 있다는 현실에 비춰볼 때 대구의 건립은 당연하다. 인구 250만 명 도시에서 일어난 국난극복의 정신을 알리고 대구시민의 자긍심을 키운다는 면에서 당위성은 충분하다.대구와 경북은 독립운동의 성지다. 다른 도시에서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역사적 사료가 이를 입증한다. 독립유공 포상자만으로도 압도적이다.안동에 있는 경북 독립운동기념관과 함께 대구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된다면 국난극복의 중심도시로서 우리지역의 위상은 더 높아질 수 있다. 호국보훈의 달이라서 기념관 건립의 성공적 추진이 더 간절해진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06-02

코로나19,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김재욱대구본부“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야구계 명언이 있다.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의 전설인 요기 베라가 한 말이다.1973년 베라는 뉴욕 메츠의 감독이었고 팀은 지구 선두인 시카고 컵스에 9.5게임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기자는 베라 감독에게 “시즌이 끝난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베라 감독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고 답했다.이후 베라 감독이 이끄는 메츠는 달라진 팀이 돼 점수를 쌓아 나갔고, 기적 같은 대역전극을 펼치며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그해 메츠는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했고,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준우승을 거뒀다.이후 이 말은 야구계의 명언이 됐고, 우리 일상에서도 자주 쓰는 말이 됐다.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 역시 다를 바 없다.지난 2월 18일 신천지발 코로나19 감염자 확산으로 2개월 동안 혼란에 빠졌던 우리사회는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성숙한 ‘시민 의식’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듯 했다.4월 말부터는 코로나19 확진자가 한자릿 수까지 줄어들면서 정부는 5월 초부터 방역 정책을 ‘생활 속 거리두기’로 완화하기까지 이르렀다.하지만 ‘4말 5초’ 황금 연휴기간 이태원발 집단감염을 시작으로 ‘N차 감염’이 이어지면서 부천 쿠팡 물류센터에서 확진자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말았다.특히, 이들 중 무증상 감염자가 많아 역학조사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이런 상황이다보니 시민들은 다시금 불안감에 휩쌓이고 있다.불안한 감정과는 반대로 긴장감이 풀린 모습들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최근 들어 대구지역의 유흥가를 살펴보면 젊은 청년들이 식당과 술집에 가득 차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코로나19로 인해 감염에 대한 공포와 실내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등을 지인,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 해소하려는 것이다.문제는 절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대구시민들은 자체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습관화하고 있다.한 순간의 방심이 지금까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경각심이 필요하다.코로나19는 언제든 다시 확산할 수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kimjw@kbmaeil.com

2020-06-01

정의(正義)와 앵벌이

강희룡 서예가한국사회에서 7~80년대 만해도 어린아이들이 시장바닥이나 버스 정류장, 지하철, 번화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구걸을 하거나 껌 같은 것을 파는 행위를, 어린아이들이 앵앵 울면서 돈벌이를 구걸한다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가 ‘앵벌이’다.이러한 행위는 법적으로는 ‘구걸부당이득’이라 하여 다른 사람의 구걸을 통하여 이익을 얻은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경범죄처벌법에서 다루고 있다. 과거에는 전쟁고아 등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앵벌이 아동을 자주 볼 수 있었고, 90년대 중반까지도 인신매매와 유괴가 심각했던지라 앵벌이 아동이 제법 많았으나 요즘은 거의 사라졌다.또 다른 유형의 앵벌이는 카지노에서 가진 돈을 모두 탕진하고 허드렛일이나 대리도박, 자리 맡아주기, 구걸 등으로 카지노에 기생하면서 푼돈을 벌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앵벌이도 잘 하면 수입이 괜찮다하지만 애당초 도박중독 때문에 그 지경이 됐으니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다시 도박으로 탕진하고 앵벌이로 돌아가고는 한다.지난달 25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이용수 할머니께서 오랜 세월 함께한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 할머니들을 30년 동안이나 이용했다고 폭로하며 울분을 토했다.2008년에 별세한 고(故) 심미자 할머니의 자필 일기장에서도 정대협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앞세워 윤미향 대표의 재산축적을 위해 돈을 모금한다고 그 이유를 적고 있다. 이어서 정대협은 고양이고, 할머니들은 생선이며 할머니들을 물고 뜯고 할퀴는 쥐새끼 같은 단체라고 비판하며, 할머니들의 피를 빠는 거머리라고 질타했다.심 할머니는 생존 시에도 정대협을 ‘당신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역사의 무대에 앵벌이로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이라고 주장했다. 정대협에서 정의연으로 이름을 바꾼 이 단체는 회계관리 부실부터 윤미향 대표 개인계좌를 통해 받은 후원금이나 모금 등 수많은 의혹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할머니들의 말씀처럼 정의연이 저지른 부정행위가 사실이라면 개인의 돈벌이를 위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이용한 ‘추악한 현대판 앵벌이’를 한 것이다.정의기억연대의 정관에 명시된 목적은 국가권력 감시이며, 주요 임무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함이다. 이 과정에서 이 단체는 친일, 반일 프레임을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권력화가 됐다. 이 권력화를 이용해 정의연 간부들은 요소요소에서 그들이 바라던 영욕의 자리를 꿰찼다. 윤 대표 역시 제 21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국회로 진출했다. 결국 겉은 할머니들의 얼굴로 포장하고 뒤로는 그들의 골수를 뽑는 앵벌이를 통해 부와 명예를 제 몫으로 돌린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의를 앞세워 대중의 관심을 끌고 난 뒤, 한 건 터뜨려 개인의 영욕을 충족시키는 몰염치한 사례가 극에 달한다. 최소한의 부끄러움과 도덕성도 없는 세계에 유례없이 특이한 시민운동을 한국인들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정의(正義)라는 단어 뜻을 바꿔야 할 현실이다.

2020-06-01

예술지원과 공짜문화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은 ‘코로나사태’가 기존의 가치체계를 많은 부분 뒤집어 놓았다.이 사태는 전 인류를 혼란에 빠트렸고, 경제를 불황의 늪으로 떠밀어 세계적인 부자들은 몇 조, 몇 십조의 손해를 입었다고 한다. 가난한 예술가 주제에 그들을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고, 예술인들에게 닥친 불황이 매우 걱정스럽다. 특히 대면활동을 주로 하거나 대중이 모여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예술장르에 코로나는 치명상을 입혔다. 무대를 만들 수도 없고, 장을 열어도 사람이 없고, 함부로 사람을 부를 수도 없어 내상이 깊어만 가고 있는 실정이니 답답한 노릇이다.인류의 삶에서 문화예술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술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당연히 예술가를 우대해야 되고, 창작활동이 삶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예술활동의 대가를 주장하면 순수성을 의심받는다. 예술의 지고한 정신세계와 물질이라는 현실세계의 서로 상반된 요소가 빚어내는 이중주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후원아래 불후의 명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미켈란젤로의 경우에서 보듯이 훌륭한 예술적 성과를 위해서는 경제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 성과는 도시나 국가의 미래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스위스 연방의 바젤은 포항과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은 도시다.세계적 제약산업의 중심이기도 한 바젤에 투자한 유명 제약회사가 포항에 투자를 고민하면서 “포항과 바젤은 여러모로 비슷하지만 포항에는 아트가 없다.”라 했다.포항을 세세히 다 알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행히 최근에는 예술인에 대한 지원이 활발해지고 있으며, 예술인 고용보험이 법제화되는 등 예술인에 대한 사회안전망도 정비되고 있기는 하다.그러나 예술인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누리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보조금의 정산 규정이 지나치게 까다롭고, 고용보험은 수급조건이 문제다.진짜로 춥고 배고픈 예술인들은 제대로 고용된 적이 없으니 고용보험의 실업급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공공예산의 지원이 행사를 만드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만, 지원받는 공연은 유료화 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다. 공짜문화를 양산하는 공공예산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예술문화의 진정한 발전은 입장권 한 장의 대가를 기꺼이 지출할 줄 아는 문화시민의 호주머니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소설가 신아연 선생이 매일 아침 공짜로 보내오는 칼럼의 일부다.“제가 대가 없이 글을 쓸 때는 비영리 단체 등 공익성이 있는 곳이거나, 아니면 살림이 매우 어려워 도저히 원고료를 지급할 수 없는 곳에 한한다는 나름의 원칙이 있습니다. 전자는 살면서 사회에 진 빚을 갚는 의미에서, 후자는 내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눈다는 뜻에서입니다. 글쟁이로서 돈을 먼저 생각하고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정신노동이나 문화예술의 가치에 대해 몰염치한 우리 사회가 걱정스럽고 더러는 분노케 합니다.”

2020-06-01

태극나비를 본 적이 있는가… 밀양 무봉사(舞鳳寺)

이름만으로도 끌리는 도시 밀양, 영남루 바로 옆에 무봉사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불리는 영남루에는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로 어수선한데, 그곳에서 살짝 돌아 앉은 무봉사 가는 길은 대숲이 밀양강을 막아주어 아늑하고 호젓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가파른 계단 위로 해탈문을 대신하는 무량문(無量門)이 보이고 작은 문안으로 하늘을 나는 봉황 모형이 선명하게 카메라에 잡힌다.무봉사는 신라 혜공왕 9년(773년) 법조(法照)가 세운 절이다. 지금의 영남루 자리에는 영남사라는 절이 있었지만 절이 타고 없어지자, 당시 무봉암이었던 절을 무봉사로 승격시키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여러 차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무봉사는 봉황이 춤추는 모습인 이곳 지형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무봉사에는 재미있는 전설도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기 나라가 힘들 때, 날개에 태극무늬가 있는 나비가 무봉사가 있는 아동산을 날아다니다 사라진 후 고려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 후 나비가 나타날 때마다 경사스러운 일들이 생겨나, 지금도 태극나비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무봉사를 참배한다고 한다.일주문에서부터 가파른 계단이 이어지지만 우측으로 밀양강변 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절은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다. 정갈하고 고요하다. 대웅전에서 피부가 맑고 고운 비구니스님이 예불을 끝내고 막 나오실 것만 같은데, 아름드리나무들이 사찰을 지키고 봉황 두 마리가 방문객을 맞고 있다. 나비를 보지 않아도 길한 기운들이 내게로 전해져 올 것만 같다.참배는 되도록 짧게 끝내라는 안내문이 대웅전 법당 앞에 선 나를 주춤거리게 만든다. 매 주 산사를 찾아 백팔 배 하겠노라는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아 남편과 나란히 백팔 배를 시작한다. 손 소독제를 비치하고 참배자들이 직접 연락처를 기입하도록 방명록을 준비해 둔 세심함까지, 대웅전 법당 마루도 유난히 정갈하여 구석구석 여성성이 느껴지는 사찰이다.화강암으로 만든 보물 제 493호 무봉사 석조여래좌상과 5구의 화불이 장식된 광배는 조각솜씨가 뛰어나고 화려하다. 법당 앞에는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당당히 푸르고, 지장전 가는 모퉁이길 쪽에서 바라보는 절의 풍경도 멋스럽다. 무엇보다 절과 이어지는 두 갈래의 오솔길이 유혹하지만, 가보지 않은 길을 저만큼 걷다 돌아서고 말았다.운이 좋게 포행을 가시려던 스님과 마주친다. 비구니 스님이 아니라 평온한 인상의 비구 스님이다. 인사를 나누고 스님과 함께 둘레길을 걷는다. 스님은 아동산과 무봉사의 역사, 밀양읍성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작은 절이지만 종각이 따로 있어 무봉사의 봉황이 날아가 알을 품을 수 있도록 아침저녁으로 타종을 하신다는 말씀까지 친절히 들려주신다.둘레길은 약간의 가파름을 숨기고 아동산 허리를 감고 이어진다. 초록은 녹음으로 변해 햇살을 차단하고 푸른 그늘을 드리운 오솔길을 만들고 있었다. 인적 없는 낯선 숲길이 스님이 계셔 든든하다. 벌걸음이 빠른 스님은 저만치 앞서 걷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마치 태극무늬 나비 한 마리 왔다가 사라진 것처럼.모처럼 둘레길을 걸을 수 있는 이 시간을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 둘만의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은 요즘, 함께 다녔던 절과 숲, 도시를 떠난 일 년간의 삶을 돌아본다. 전원생활을 반대하던 남편이 쉽게 적응해 준 것도, 번번이 절 기행에 동참해주며 낮고 겸허한 자세로 법당에 들어서는 점도 고맙다. 그로 인해 공통의 관심거리가 생겼으며 대화도 많아졌다.이따금씩 알 수 없는 향기가 날아와 대화는 자주 멈춰야 했다.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고 돌아보게 만든 것은 백화등 향기였다. 나무들을 감고 울창하게 정글을 이루는 백화등 꽃무리에 탄성을 쏟아낸다. 수백 마리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황홀하다. 적어도 백화등 덩굴에 감겨 질식할 것만 같은 나무들의 창백한 표정이 내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둠을 지닌 안쓰러운 생동감과 저 아득한 몸짓들, 내 안에서 한 마리 나비가 파닥거린다.조낭희 수필가밀양읍성 동문이 보일 무렵 우리는 성곽을 밟으며 다시 무봉사 쪽으로 향한다. 산책길 초입 쉼터에서 움츠리고 있던 한 남자가 생각났다. 햇빛 하나 들지 않은 어둠을 벗 삼아 강물의 소용돌이에 쓸려버릴 듯 작은 체구의 그가 떠오른다. 그는 어쩌면 태극나비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나는 왜 우리와 함께 걷자고 말하지 못했을까. 선택은 그의 몫이지만. 일상에서 만난 작고 소소한 즐거움이 지친 날개에 힘을 실어 줄 때가 많다. 운이 좋아 무봉사 타종 소리가 그의 가슴에 스며들고 젖어들어 그의 어둠을 털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행운이란 그렇게 아무도 몰래 조용히 가슴을 흔들고 가는 것이리라.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그가 날개 꺾인 한 마리 태극나비였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찾아 이곳까지 날아온 전설 속의 나비를 나는 마음이 어두워 보지 못했던 건 아닐까. 백화등 향기는 더 이상 따라 오지 않았고, 무봉사는 말없이 밀양강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2020-06-01

미술사학의 아버지 조르조 바사리

오랫동안 미술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미술작품과 미술가들의 이야기만 전해왔을 뿐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나, 개별 미술가와 작품에 대한 단편적인 평가는 고대로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역사인식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르네상스가 무르익었던 16세기 이탈리아, 그것도 르네상스의 본고장 피렌체에서였다.메디치 가문의 연출가로 활동했던 미술가 조르조 바사리는 1550년 ‘치마부에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는 가장 탁월한 이탈리아의 건축가, 화가, 조각가 생애’라는 긴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줄여서 ‘미술가 열전’으로 불리는 책이다. 토스카나어로 쓰인 이 책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위대한 미술가들의 생애가 집대성되어 있다. 13세기에 활동한 치마부에(Cimabue)로부터 그의 제자였던 조토 디 본도네, 마사초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거쳐 미켈란젤로에 이르기까지,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활동한 주요 미술가들의 방대한 정보가 담긴 놀라운 책이다. 이 한 권의 책으로 훗날 미술사 연구자들은 바사리에게 ‘미술사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선사했다. 19세기 역사학자로 미술사의 학문적 체계를 완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바사리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칭송하기도 했다. “바사리의 빛나는 저작이 없었더라면 유럽의 미술사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사리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평가는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 그의 저서를 통해 비소로 단편적인 기록에서 벗어나 미술이 역사의 얼개를 통해 유기적으로 작용하며 흐름을 형성해 왔다는 인식이 생겨났다.고딕이나 매너리즘 혹은 르네상스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 리나시타 등과 같은 미술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도 바사리였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미술가 열전’ 서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역사관에 따른 미술 전개과정의 서술이다. 바사리는 고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를 꽃피운 15세기 콰트로첸토(Quattrocento)에 이르는 미술의 발달과정을 특정한 역사해석의 틀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탈리아인들의 선조 고대로마인들의 찬란했던 미술을 ‘정점’으로 보았고, 야만적인 양식이 지배한 중세를 ‘몰락’ 그리고 고대를 모방해 찬란한 재건을 꿈꾼 15세기 콰트로첸토를 ‘리나시타’(Rinascita), 소생으로 해석했다. 여기서 르네상스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완전했던 고대의 미술이 중세에 이르러 죽음을 맞이했고, 15세기에 다시금 부활한 것으로 보고 있는 바사리의 이러한 사관(史觀)에는 다분히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가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바사리는 르네상스를 시기에 따라 세 단계로 세분화했다. 첫 번째 시기인 14세기 트레첸토(Trecento)를 발전 초기단계인 유아기, 두 번째 시기인 콰트로첸토를 청년기 그리고 세 번째 시기인 16세기 친퀘첸토(Cinquecento)를 성숙기로 규정했고, 그 최고의 정점에 조각가 미켈란젤로를 올려놓았다. 이렇게 짜인 틀 안에 각 시기에 속한 주요 미술가들을 위치시키고 그 생애를 서술해 나갔다. 바사리의 목적은 개별 미술가들의 방대한 정보를 수록한 백과사전이 아니었다. 자신의 시대를 고대의 부활로 규정하고,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술가들을 저서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태평성대가 아니라 대혼란의 시대였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1517)으로 유럽은 구교와 신교로 나뉘었고, 이탈리아 반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그리고 교황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게다가 1527년 5월 신성로마제국의 용병들이 로마를 급습해 영원한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불안과 공포, 패배의식이 지배하던 절망의 시대에 바사리는 콰트로첸토 천재 미술가들의 찬란한 업적을 찬양하여 미술의 부활과 함께 시대 부활의 염원을 담았던 것이다.바사리 개인과 그가 살았던 시대의 관계성 속에서 ‘미술가 열전’의 집필 동기와 목적을 추적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미술사의 역사에서 그의 저서가 가지는 더욱 중요한 의미는 미술가 개인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에서 벗어나 미술의 흐름을 역사적 틀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는데 있다. /미술사학자

2020-06-01

온라인 공채시험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풍속도로 새롭게 온라인 공채시험이 떠오르고 있다. 대한민국 1위 재벌그룹인 삼성그룹이 지난달 30·31일 양일간 온라인으로 공채시험을 치르면서 온란인공채시험이 뉴노멀로 우리 사회에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방증이 되고 있다.학교고사장을 빌려 대규모로 시험을 봤던 과거와 달리 응시생들은 집에서 컴퓨터로 문제를 풀면서 시험보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삼성은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삼성SDS의 최신화상회의솔루션 시스템을 도입, 감독관 한명이 응시생 9명을 스마트폰으로 감시해 부정행위를 차단했다.삼성은 온라인 시험응시자들을 대상으로 개인정보보호용 신분증 가리개와 스마트폰 거치대, 영역별 문제 메모지 등 시험에 필요한 도구들을 담은 꾸러미(키트)를 제공했고, 응시자들은 지원회사의 시험날짜에 맞춰 응시프로그램에 접속해 시험을 치렀다. 이틀간 4회로 나눠 치러진 온라인 시험은 일부 전문가들과 응시생들이 우려했던 서버오류나 부정행위 등의 말썽없이 마무리됐다는 평가다.이미 코로나 여파로 면접만큼은 화상으로 진행하고 있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최근 응시자들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 화상으로 면접을 치렀다. CJ는 이번 상반기 그룹 공채에서 코로나예방을 위해 웹캠을 통한 비대면 면접을 추진하기로 했다.SK이노베이션도 코로나 여파로 잠정중단했던 채용을 시작하면서 화상면접을 도입했고, LG전자와 카카오 등도 경력직 또는 상시채용 지원자에 대해 화상면접을 진행했다. 삼성의 온라인공채시험은 면접뿐 아니라 대규모 필기시험도 온라인으로 치를 수 있다는 성과를 보여준 것으로 머지않아 온라인 필기시험이 기업채용에 새로운 트렌드가 될 것이란 분석이 유력하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6-01

코로나19, 우리의 삶에 주는 교훈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우리의 삶에서 코로나19는 ‘위기이자 기회’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은 무심히 살아온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코로나 사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축복된 삶의 계기로 전환시킬 수도 있고, 유사한 재앙이 반복될 수도 있다.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일상화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가치이다. 코로나의 확산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감염의 위험 때문에 일상적 대면접촉은 극도로 제한된 반면, 원격의료·원격교육·원격비즈니스가 급속히 활성화되고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인간을 멀리하고 경계하게 된 것’은 비극이지만, 일상의 소통과 업무가 비대면·온라인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자기성찰의 시간과 공간이 생겨나고 있다.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온 일상을 잠시 멈추고 사색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면 삶의 질은 그만큼 향상될 수 있다. 코로나는 ‘빨리 빨리’를 재촉하면서 살아온 우리에게 ‘천천히 생각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나아가 코로나는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의무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다. 감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는 것은 본인은 물론 타인의 건강에 대한 배려행위이다. 이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시민정신이며, 민주주의체제에서 시민정신의 실종은 곧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한다. 의료인들의 고귀한 희생과 봉사정신이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정치인·경제인·교육자 등 각 영역의 행위주체들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때 비로소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다. 특히 코로나로 고통 받는 경제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지원은 공동체의 중요한 기반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자연친화적인 삶의 중요성’ 역시 코로나의 가르침이다. 코로나의 공격으로 공장이 멈추고 사람과 자동차의 이동이 제한되었지만, 지구환경에는 오히려 축복이 되었다. 공기의 질이 나아지고 생태계도 조금씩 복원되고 있다. 자연환경이 좋은 곳에는 코로나의 위험이 없다. 코로나의 공격은 도시의 밀집된 공간에서 숨 막히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가능하다면 ‘자연과 가까이 하라는 메시지’이다. 대자연의 꽃과 숲이 말하는 ‘정신이 건강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 속의 정신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도시인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이처럼 코로나는 ‘우리 자신’과 ‘공동체’ 그리고 ‘자연’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가치 있는 삶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코로나 사태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멀지 않아 더욱 심각한 재앙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타성에 젖어 살아온 ‘구태의연한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개척자적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2020-06-01

월성원전 맥스터 증설, 의견수렴 거쳐 결정하면 될 일

황성호 경북부경주 월성원자력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시설(맥스터) 증설여부에 대한 찬반여론이 뜨겁다.맥스터 건설과 관련, 원자력안전위원회의 허가는 이미 득한 상태인데다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의 지역의견 수렴을 위한 공론화 절차 및 경주시의 공작물 축조신고 과정이 남아있는 상태다. 지역공론화를 위해 정부기관인 재검토위원회의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지역실행기구가 출범한 가운데 현재 주민설명회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맥스터 증설 관련 경주지역 주민설명회가 환경단체 등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다.월성 지역실행기구는 지난 5월 28일 오후 경주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지역주민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설명회를 열었다. 하지만 김남용 실행기구위원장이 인사말을 시작하자 경주환경운동연합 관계자 및 민주노총 경주지부 회원 등이 맥스터 증설 반대와 설명회 중단을 촉구해 주최측이 설명회 종료를 선언했다. 이들은 “공론화는 맥스터 증설이 아니라 사용후핵연료 반출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정부가약속한 2016년 사용후핵연료 반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날 설명회는 이윤석 재검토관리위원회 대변인이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 추진현황 및 향후 계획, 조사기관인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의 김현기 본부장이 ‘월성원전 지역 의견수렴 방안, 한국수력원자력의 김재원 월성 제1발전소 운영실장이 ‘월성원전 임시저장시설 운영현황’ 등을 발표할 예정이었다.맥스터는 월성원자력 부지내에 기존에 있던 임시저장시설을 추가적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이전에 없던 어떤 시설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랜 시간 우리나라의 전기생산량의 일정부분을 담당했고 아직 수명기간이 남아있는 발전소 부지 내 지어지는 발전소 운영에 직결된 관계시설일 뿐이다.또한 시민단체는 월성원자력발전소가 담당하는 전력생산량이나 이를 통한 지역 지원금의 규모 및 맥스터 건설 불발에 따른 월성원전의 정지가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 등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는가.특히 지난달 29일 한수원 노조는 “월성원자력 2·3·4호기는 중수로형 발전소로 경수로형 발전소와 달리 매일 소규모의 연료교체가 이뤄지는 원자로 노형이다”고 밝혔다. 노조는 운영과정에서 사용후핵연료의 발생은 당연한 것이며, 이를 위한 임시저장소는 필수설비로 이러한 시설을 증설하지 말자는 것은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강조했다.현재 논의 중인 맥스터 증설 문제는 정부의 정책으로 공론화 위원회를 구성해 사전설명회를 시행하고 숙려기간을 거쳐 합법적으로 결정하려고 한다. 이렇게 중요 국책사업 과정마다 합법적인 과정을 만들고 거기에 따라 의견수렴을 거쳐 결정하면 될 일이다. 이러한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반기를 들어 압력을 행사한다면 정부는 아무런 정책도 시행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대안도 없는 발목잡기식의 투정으로 국가 발전은 물론 지역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한다./hsh@kbmaeil.com

2020-05-31

‘민주당 시계’, 또 거꾸로 돈다

안재휘 논설위원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대개가 ‘승자의 역사’다. 길고 긴 야만 시절 이긴 자들은 어김없이 패자의 진실을 철저하게 말살하고 왜곡해왔다. 역사 기록에 남은 옳고 그름은 치명적인 조작 여지가 내재돼 있다. 단지 힘으로 이겼다는 이유로 승자가 언제나 ‘참’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이치는 조금만 고민해봐도 다 알 법한 진실 아닌가.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대부 오자서(伍子胥)는 사사로운 원한을 풀고자 한때 자기가 모시던 초평왕의 주검을 끄집어내어 목을 끊고 구리 채찍으로 300대의 매질을 가했다. 이른바 굴묘편시(掘墓鞭屍)의 고사다. 우리 역사에서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어 다시 목을 자르는 잔혹한 부관참시(剖棺斬屍) 형벌을 일삼은 폭군은 연산군이었다. 생모인 폐비 윤 씨의 사사(賜死) 비극에 원한을 품은 연산군은 김종직·송흠·한명회·정여창·남효온·성현 등 여러 명에게 끔찍한 한풀이를 했다.지난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이 있었는지, 회담록을 수정하거나 폐기했는지의 공방이 벌어졌을 때, 민주당은 ‘부관참시’라며 반발했었다. 일부 극우 인사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 훼손을 시도하고, 국립현충원 앞에서 묘소를 파헤치는 퍼포먼스까지 벌여 시끄러웠던 일도 기억난다.유례를 찾기 힘든 총선 대승으로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 나왔다. 1987년 북한 공작원들에 의한 KAL 858기 폭파 사건 진상 조사 결과를 재검증하자는 주장도 다시 불거졌다.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현충원에 있는 친일파 무덤을 파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그동안 진보 일각에서는 ‘친일 인명사전’을 기준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된 60여 명을 계속 문제 삼아 왔다. 여권 내에서는 여수·순천 사건 재조명, 동학농민혁명의 명예회복 등도 추진되고 있다. 이 같은 무분별한 과거지향 행태에 대해서 일부 네티즌들은 “살수대첩도 재조사하자고 할 거냐”는 비아냥을 퍼붓기도 한다.민주당이 왜 또 과거사 뒤집기에 나서고 있는지를 놓고 여러 해석이 나돈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분석은 ‘2022년 대선 준비’다. 민주당의 정치전략은 철저하게 과거사를 이슈화해 한(恨)을 끄집어내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을 수구꼴통 불의세력 프레임에 가두는 선동기법에서 출발한다. 지난 선거에서 연전연승한 결정적인 비결이기도 하다.그러나 이제 이런 ‘갈등 재생산’ 방식의 정치는 삼가야 한다. 코로나19라는 악마적 바이러스 발톱에 무참히 할퀴어 생존 여부를 놓고 전전긍긍하는 국민 앞에 매머드 여당이 혐오를 퍼뜨리는 정치공작만을 궁구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모처럼 건강한 정책 야당이 되고자 몸부림치는 제1야당과 함께 미래를 겨루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냄새나는 쓰레기통 엎어놓고 선동질에 몰두하는 정치로는 위기의 대한민국을 살릴 수 없다.

2020-05-31

홍콩 엑소더스

탈출이라는 뜻의 엑소더스(Exodus)는 많은 사람이 동시에 특정장소를 떠나는 상황일 때 사용하는 용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한 내용의 출애굽기에 나온 표현이다. 요즘은 증권가에서도 투자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갈 때 엑소더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홍콩 대탈출이 시작됐다는 외신이다. 중국이 홍콩보안법을 통과시키면서 홍콩 전역에서 홍콩을 떠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홍콩의 환전소에는 홍콩 달러를 미국 달러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연일 줄을 잇고 있다 한다.홍콩에서 반중시위가 격화된 작년 6월 이후 대만으로 이주한 홍콩사람은 전년보다 41%나 늘었다. 대만은 아예 홍콩시민의 이주를 돕겠다고 나서는 분위기다. 영국도 홍콩 내 영국의 해외 시민여권을 보유한 31만 명의 홍콩인에 대해서 이주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싱가포르 등지에도 홍콩인의 이민 문의가 느는 등 바야흐로 홍콩인의 엑소더스가 세계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 동양의 진주로 불리며 에너지 넘쳤던 홍콩의 앞날에 짙은 안개가 드리운 셈이다. 중국의 홍콩보안법 통과로 일국양제(한나라 내 두 체제)가 흔들리고 자유와 민주의 가치가 크게 훼손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면서 홍콩을 떠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미국도 홍콩에 부여했던 특별지위권을 박탈하겠다고 나섰다. 아시아 금융허브인 홍콩의 경제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다.19세기 아편전쟁을 통해 영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홍콩의 얄궂은 운명이 또한번 역사적 시련기를 맞고 있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싸울 것인지 사회주의 체제인 중국에 굴복하고 말 것인지 결정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5-31

소중한 포항의 6월 역사를 살리자

작년까지 매년 6월이 되면 그 전 달부터 매우 바쁜 일정을 보냈었다. 이는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한국은행이 1950년 6월 12일 창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매년 6월에는 창립기념 지역경제 세미나를 개최하여왔다. 하지만 올해에는 다소 느낌이 다른 6월을 맞이하였다. 코로나19로 인해 각 기관들도 행사를 취소 내지는 연기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밀집되어 함께 호흡하는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천과도 배치되기 때문이다.그런데 6월은 한국은행만 기념하는 날이 있는 것은 아니다. 포항시민들에게도 6월 12일은 매우 특별한 날로 기억되고 있다. ‘시민의 날’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계기는 1962년 6월 12일 포항항이 국제무역항으로서 지정된 것과도 관련된다. 국제무역항으로의 지정은 포항시민들이 오랫동안 고대하였던 것이기에 당시 포항시에서 이날을 ‘시민의 날’로 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의미에서 포항항이 외국과의 무역선이 오갈 수 있게 개항한 것은 이미 100년 전인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지정항으로서 일본과의 교역을 개시한 때부터다. 해방된 이후 포항시가 적극적으로 지정항 선정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었지만 의외로 국제무역항 지정은 생각보다 늦어졌다.또 6월 12일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포항의 대표적인 축제인 ‘국제불빛축제’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잘 모르는 사람은 다른 지역에서 벌이는 것은 ‘불꽃축제’인데 왜 포항은 ‘불빛축제’라고 할까 궁금해하기도 한다. 필자도 처음에는 잘못 적은 것이라 여겼었다. 2004년 포스코가 포항시민의 날을 기념하여 영일만을 상징하는 ‘빛’과 제철소의 용광로를 상징하는 ‘불’을 주제로 불꽃 쇼를 기획한 것이 지금까지 ‘불빛’ 축제로 이어져 온 것이다.내친김에 일제 강점기 시절까지 거슬러 과연 6월에는 포항에 어떠한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을지를 조사해 보았다. 다양한 단체가 있지만 6월과 관련이 깊은 곳으로는 포항우체국을 제일 먼저 꼽고 싶다. 포항에 우체국이 들어서게 된 것은 1905년 6월 9일 연일에 ‘임시우체소’가 설치된 것이 최초다. 그리고 4년 뒤인 1909년 6월 1일에는 포항의 연일 우편취급소에서 처음으로 전신업무를 개시하면서 이름도 ‘포항우편전신사무취급소’로 개칭되었다. 포항우체국과 6월은 연이 깊다고 할 수 있다. 포항시민들의 우체국 사랑도 남달랐던 것 같다. 6·25전쟁 기간 동안 폭격으로 파괴되었던 포항우체국(지금의 중앙동 우체국)을 재건하기 위해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던 1952년 4월 포항시민들은 1천만 원의 성금을 모아 당시 체신국에 포항의 우체국과 통신 시설을 재건해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여 결국 성사시켰다.이외에 6월에 벌어졌던 사건들은 수없이 많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한국통감부 시절인 1908년 6월 11일에는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영구지배할 목적으로 동해안에 대한 해류조사를 위해 영일만 동쪽 15리 해상(위도 36.8도, 경도 129.45도)에서 위치를 기록한 병 10개를 처음으로 바다에 투입하기도 하였다. 이후 해류조사는 계속되어 1922년 종합보고서가 간행되기도 하였는데 그만큼 영일만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이미 그들은 알았던 것 같다. 110년 전인 1910년 6월 10일에는 지금의 청하초등학교 전신인 사립 천일학교가 개교하기도 하였다. 포항의 교육열이 최근 높아진 것이 아니다. 교통 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사건들이 있었다. 1919년 6월 25일에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학산역이 영업을 개시한 날이며, 1945년 6월 10일에는 포항과 부산진 간 동해남부선 철도가 개통되어 영업을 개시하기도 하였다. 그에 앞서 1924년 6월에는 포항과 구룡포 간, 포항과 영덕 간 자동차 여객노선이 정기 운행을 개시하기도 하였다.한편, 1920년 6월 10일에는 대한제국 순종황제가 서거하면서 학생조직을 중심으로 6·10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달 30일에는 박문찬 목사가 흥해 예수교 예배당에서 흥해청년회를 발족시킨 후 본격적인 애국 계몽운동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24년 6월 4일에는 포항청년단이 창립되었으며, 1933년 6월 4일에는 포항체육회 주관으로 당시 남빈동에 있었던 공설운동장에서 포항시민 대운동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지난해 3·1만세운동은 100주년을 맞이하였지만 80년 전인 1940년 6월에는 조선총독부가 우리 민족의 뿌리를 흔들고 전쟁에 필요한 많은 조선인을 강제동원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던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추진하였던 달이기도 하다.하지만 올해 포항에서 맞는 6월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동안 사실 6월 첫 주가 되면 여지없이 찾아오는 6일 현충일은 국기를 조기로 거는 날 정도로 여겼다. 정부가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삼은 것은 6·25전쟁으로 인한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의 호국ㆍ보훈의식, 애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크게 통감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올해의 6월은 조금 달라졌다. 지난 수개월 동안 6·25전쟁 기간 동안 포항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와 희생들에 대한 사료와 기록들을 모아 다른 세 사람과 함께 포항의 6·25전쟁사(포항 6·25)를 집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료수집을 위해 지금도 생존해 계신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노병의 눈물과 생생한 육성 증언을 통해 지금까지 지식으로만 존재하였던 6·25전쟁이 심장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여전히 한반도는 국제법상으로는 평화지대가 아닌 전쟁이 일시 휴전상태인 채로 70년이 지났다. 올해의 6월은 그런 달이다. 특히 포항시의 경우에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한두 달 만에 대한민국의 마지막 영토를 수호해야 하는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의 보루로서 형산강을 남북으로 두고 북한군과 대치하면서 형산강 이북에는 공중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인해 교회 건물 하나 외에는 모두 사라져 버리는 엄청난 희생을 겪었다. 그러하기에 포항인들에게 6월은 단순히 현충일이 있는 달이 아니라 지금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고 고통을 느끼기에 가급적 6월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분들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우리 후손들은 역사를 통해 미래를 준비해야만 한다.포항은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도시다. 아예 산 이름조차 ‘탑산’이라 바꾸어 부를 정도로 6·25 전쟁과 관련한 전적비, 충혼비, 충혼탑들이 들어서 있는 도시인 것이다. 포항시민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분이 당시의 흔적들을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는데 그쳐서도 안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포항만이 가진 소중한 유적이고 유산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전국의 지자체마다 온갖 산책로를 만들며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풍광이 좋은 길이거나 둘레길일 뿐이다. 전국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길의 하나일 뿐이다. 6·25전쟁에서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의 보루였고, 다시 북진하는 대반격의 출발지였기에 ‘혈산강(血山江)’이라 불렸던 형산강은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 있다. 포항시민들이 자부할 수 있는 증거들이 탑산을 비롯한 도시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다. 포항은 당당하게 다크투어리즘으로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 이러한 유적들을 서로 연결하여 탐방하고 생각하며 호국 영령을 기릴 수 있는 그 ‘길’이야말로 어느 지자체도 따라 할 수 없는 포항 고유의 ‘길’일 것이다./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김진홍

2020-05-31

경주 산책

김현욱 시인2004년에 출간된 강석경 작가의 ‘경주 산책’을 어렵게 구했다. 지금은 품절이라 온라인 중고서점을 뒤졌다. 그중 한 곳에서 이상하게도 정상가보다 비싸게 팔고 있었다. 유심히 보니 ‘저자의 사인’이 있는 책이라서 그랬다. 얼른 신청했더니, 중고서점 사장에게서 문자가 왔다.“받는 사람 이름도 있는데 구입하시겠습니까?” 잠깐 망설였지만, 흔쾌히 구입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하루 만에 책이 왔는데 첫 장에 초록색 색연필로 받는 사람과 작가의 사인이 쓰여 있었다. 아무렴. 작가의 손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었다. 강석경이 누군가. 1985년 제10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숲속의 방’ 작가가 아닌가. 한창 예민했던 문학청년 시절에 강석경의 소설 ‘숲속의 방’은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케 해주었다.내 인생 소설의 작가가 가까운 경주에 산다는 것만으로 ‘경주’는 더 특별해졌다.‘내가 경주로 돌아온 것은 나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온 회귀이다.’ 사실 강석경 작가의 고향은 대구다. 그런 그녀가 경주에 자리 잡은 건 무슨 이유일까? 책에서 그녀는 말한다. “존재의 불확실성에 방황하면서 성년의 세월을 보내고, 세계도 돌아보고 뒤늦게 경주에 터를 잡은 것은 그야말로 뿌리로의 귀환이 아닐까. 내 근원의 고향인 자연으로, 25년간 살았지만 뿌리내리지 못한 서울이 연옥처럼 떠오르는 것은, 자연과 분리된 삶 때문이리라. 도시의 삶은 늘 나를 허기지게 했다. 온갖 현세적인 욕망을 추구하느라 입에 거품을 무는 도시의 생리. 나도 알아볼 수 없으리만치 변해버린 대구도 고향같이 생각되지 않는다.내게 고향이란 육신이 태어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장소이다.”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곳이 고향이다. 경주가 그녀에게 그런 곳이다. ‘황룡사지에서’라는 글에서 수많은 장소 중에 왜 하필 ‘경주’인지를 밝힌다. “근원적인 것을 보여주기에 능이 있는 고도의 풍경은 아름답다. 산 자와 죽은 자,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경주는 늘 나를 매료시키고, 내게 영감을 준다. 환상과 영감의 샘물인 경주와의 조우는 작가로서 행운이지만 정신의 고향을 갖게 되었으므로 한 자연인으로서도 행복한 일이다. 누구와의 만남이 내 인생에서 필연이었는지는 말하기 힘들지만, 경주와의 만남은 그래서 필연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내게 경주는 청마 백일장과 목월 백일장이 열렸던 곳이다. 까까머리 학창 시절에 포항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주역에 내려 의기양양하게 백일장에 참가하곤 했다. 요즘엔 불국사가 좋아졌다. 특히, 비에 젖은 석가탑과 크고 작은 돌탑들을 좋아한다. 황남동에 ‘소소밀밀’ 그림책방과 서악동에서 ‘시인의 뜨락’을 운영하는 부부 시인을 좋아한다. 동리목월문학관 특강에서 만난 경주의 엄마, 아빠들과 아이들을 좋아한다. 월포, 칠포, 구룡포, 양포도 좋지만 경주 감포를 더 좋아한다. 경주 남산 능비봉 오층석탑을 좋아한다. 적다 보니, 내게도 경주는 필연적인 장소다.내년에 직장을 옮기는데,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나는 경주로 갈 운명인가보다.

2020-05-31

태극기 안녕하십니까?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보훈의 달이다. 호국영령들에 대해 머리를 숙인다. 그들의 넋을 기리며 애국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의무감은 산자들의 몫이다. 애국하면 떠오르는 상징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목청껏 부른다. 끓는 심장을 싸고 있는 유니폼 상의 태극마크를 감싸 쥔다. 대형 태극기가 물결처럼 출렁이고 관중석 함성은 하늘을 찌른다. 국가 간 축구대항전 식전의식이다. 군악대 팡파레가 울려 퍼진다. 양국 국기를 곧추 세운 의장기수단 옆을 지나간다. 태극기를 향해 방문 귀빈이 왼쪽가슴에 손을 올려 경의를 표한다. 순국한 국군장병의 관(棺)을 붙들고 오열하는 유족을 바라보는 동료장병들의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그의 남은 체온을 조금이라도 더 지키려는듯 관을 감싼 태극기의 작은 몸부림이 함께 한다. 캐네디 공항 상공을 휘감아 대한민국 대통령 전용기가 활주로를 따라 움직인다. 환영인파를 향하여 기체를 돌리는 대통령 전용기 태극마크가 이국땅에서 점점 더 크게 보인다. 반도강점 원흉들을 향하여 도시락 수류탄을 투척한다. 가슴 속에 숨겨둔 태극기를 꺼내 펼쳐든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대한민국의 상징, 태극기 활약상이다. 나라의 상징인 국기의 의미는 구구절절 얘기하지 않아도 모두들 잘 알고 있다. 학창시절 태극기 그리기 숙제는 지루하고 힘든 일이었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애국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다른 숙제는 빠뜨리더라도 놓치지 않고 했던 것 같다. 주입식 애국교육 탓인지 아직도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노라면 가슴 한 곳이 찡해진다. ‘국뽕’(애국심 발현을 마약에 취한 것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다) 꼰대라고 빈정거림을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세대다.학교에서 제대로 된 태극기 교육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건국시기를 두고 이념의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뒷받침하는 상징물에 대한 재해석 의견들이 분분하다. 광화문 광장을 매주 메꾸며 집회를 하시는 분들의 단체명에 태극기가 들어갔다. 특정 부류로부터 태극기가 마치 혐오도구로 기피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든다. 일부 극단적인 부류에서는 태극기를 분단의 상징물로 여기는 것 같다. 그 자리를 한반도 지도가 새겨진 ‘한반도기’가 통일 대한민국 국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듯하다. 하지만 아직도 155마일 휴전선을 두고 남북의 총구는 서로를 겨누고 있다. 군사분계선을 지키는 국군장병의 팔뚝엔 태극기 휘장이 그의 조국수호 의지를 받쳐주고 있다. 이념의 갈래 속에 태극기가 애증의 대상물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다. 코로나로 광화문 집회에 등장했던 태극기가 장롱 속으로 잠시 들어갔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다시 장롱 속 태극기가 나올지 모른다. 장롱 속에서 그의 마음이 안녕했을지 모르겠다. 현충일은 조기 게양 날이다. 마치 일제강점과 분단 조국의 슬픔에 겨워 깃대 맨 끝까지 못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산자들이 더이상 태극기의 안녕을 흩트리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 초대형 태극기가 하늘을 찌를듯 국기봉에 매달려 힘차게 휘날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0-05-31

국민을 위한 적극 행정…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곽용환고령군수올해 본격 추진되고 있는 정부의 ‘적극행정 정책’이 공직사회에 자발적 자세와능동적 사고의 바람이 되어 다가오고 있다. 창의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공공복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행정문화를 지칭하는‘적극행정’은 공직자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 소양이나, 아직까지도 복지부동(伏地不動)으로 대표되는 공직사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우리 스스로 겸허히 반성하고 풀어가야 할 과제로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소극행정 혁파, 적극행정 공무원 책임 면책, 우수 공무원 선발 및 인사상 우대조치를 담고 있는 적극행정은 시대적 소명으로서 국민 모두가 체감할 수 있도록 공직사회 구석구석, 국민의 삶 곳곳에 퍼져 나가야 하며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다가와야 하는 순리와 같은 일이기도 하다.우리 고령군에서도 정부정책 추진을 기회로 삼아 적극행정 추진 계획을 수립하고 다양한 정책을 시행·보완하여 공직사회에‘적극행정’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나가고 있으며,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적극행정은 우리 국민의 아픔을 보듬어 안고 함께 나누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우리군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 상황을 맞아 경제 살리기 비상대책 TF 팀을 구성하여 군민 생계 안정을 위한 적극적인 지원대책을 시행하고 있으며, 예비비 등을 포함한 예산 92억원을 신속 투입하여 중소기업·소상공인 정책자금 지원, 피해업종 긴급지원, 취약계층 긴급 복지 등의 정책을 차질없이 수행해 나가고 있다. 또한 코로나19 특집판 대가야소식지 발행, 경제활성화를 위한 긴급 제안 실시 및 선정, 전국 최초 드라이브 스루 농산물 판매, 전 군민에게 마스크 및 손소독제 배부, 대구·경북 최초 제로페이 연계 모바일상품권 도입 등 우리사회에 어둡고 짙게 드리운 코로나19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규제를 개선하고 절차를 간소화하여 업무를 처리하는 적극행정 정책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아직 긴장의 끈을 놓을 단계는 아니지만 우리군 인접도시에서 신천지 사태 등으로 확진자가 수백수천 단위로 늘어날 때 집단시설의 신속한 코호트 격리 조치와 관리직 직원 200명 전원에 대해 군비를 투입하여 검사를 진행하는 등 선제적 방어망을 구축하고 코로나 확산 차단에 적극 매진한 결과 현재 우리군에서는 지난 4월 2일 미국 유학생을 마지막으로 확진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그동안 정부의‘사회적 거리두기’방역체계에서‘생활 속 거리두기’체계로 일부 완화되고 어느정도 정점을 찍었다고 판단되는 현 상황에서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우리 국민의 삶을, 그리고 군민 모두의 경제적 어려움을 절실히 느끼며 철저한 방역체계를 유지한 채 경제를 살리는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 도출되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구체적인 방안의 중심에는 적극적인 공직자의 자세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우리 마음속 소명의식처럼 공직자 모두가 선봉에 서 주기를 주문해 본다.분명, 아직까지 코로나19가 드리운 지역경기 침체의 그늘이 깊은 것이 사실이나 “구내식당 운영을 중단한 채 외부식당을 이용하여 외식업 살리기에 앞장서고 급여 일부를 떼 고령사랑상품권을 구입하여 관내 농산물 소비 등에 적극 앞장서고 있는 고령군 공무원의 모습은 모범적인 지역경제 활성화 사례”라는 어느 군민의 고마운 말씀처럼 우리 공직자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국민들에게는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어두운 터널일수록 그 끝에는 언제나 밝게 빛나는 햇살을 머금고 있기에 고령군정을 책임지는 군수이자 공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군민 행복을 위한 적극적인 행정 추진의 선두에 서고자 한다. 아울러, 오늘 우리가 뿌린 새로운 희망과 도약의 씨앗이 행복의 열매로 다가 올 그날을 위해 600여 고령군청 공직자들과 함께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갈 것을 약속드린다. 고령군의 내일을 위한 약속! 적극행정은 시대적 소명으로서, 우리 공직자 모두의 삶에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다가와야 하는 순리와 같은 명제임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하며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2020-05-31

기억의 향기

한 자리에서 몇 십 년 음식 장사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골이 많이 생길 때까지 지치지 않아야 하고, 제대로 된 맛을 유지해야 하고, 무엇보다 주인장이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그 자리를 지켜야 가능하기 때문이다.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초심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30년 동안 커피를 내려온 가게가 있다. 포항 죽도시장 가까이 상가들이 어깨를 맞댄 거리에 아담한 양옥 한 채가 얌전히 앉았다. 붉은 장미넝쿨을 울타리에 얹고 ‘아라비카’라는 동그란 명찰을 마당가에 세워놓지 않았다면 손끝이 매운 주인이 정원을 잘 꾸며 놓은 가정집으로 보일 뿐이다.가게로 오르는 계단참에는 분홍낮달맞이가 도란거리고, 한 발 올라서니 벌이 열심히 꿀을 따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문지기처럼 지키고 섰다. 하얀 꽃이 미리 진 곳엔 작은 열매가 달렸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 열매가 빨갛게 익은 또 한 그루가 손님을 맞는다. 커피나무였다. 나무를 보고 예뻐서 카운터에 선 주인장에게 직접 키운 것이냐 여쭈니 ‘저 혼자 컸지요.’ 한다. 1991년에 카페를 시작할 때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냐는 질문에도 ‘그냥 먹고 살려고 했지요 무슨 큰 뜻이 있었을까요, 하다 보니 좀 더 좋은 맛을 내려고 커피에 대해 공부하게 되고 원두도 직접 골라서 로스팅 하는 법도 배우다보니 지금껏 하고 있다’고 했다.실내는 30년 전 처음 찾았을 때 그대로다. 살림집으로 지은 지 10년 된 건물에 유리창만 달아내 가게를 열었다. 그 후 30년이 지나도록 벽지만 가끔 새로 할 뿐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벽지도 다시 찾아온 손님이 생경해하지 않도록 비슷한 분위기로 한다는 말에 아,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쓰고 있었구나싶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카운터 옆 박스형 코너에는 커피를 드립 하는 남자 그림이 걸렸다. 주인장을 그린 그림 같다고 했더니, 서울에 사는 여대생이 잡지에 인터뷰한 모습을 보고 커피로 그림을 그려 보내왔더란다. 마음이 담긴 선물이라 걸어두고 본단다. 그러면서 ‘이 박스가 뭔지 아시죠?’라며 되묻는다. 자세히 보니 지역번호가 표시된 전국지도가 붙었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공중전화박스였다. 머지않은 과거에 이곳에 줄을 서서 오지 않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8282라고 삐삐를 쳤었다. 공중전화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없애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어서 우리를 그 기억속의 그날로 데려간다.마침 스피커에서 ‘I love coffee, I love tea’가 울려 퍼졌다. 갈색 진한 커피향기도 따라 울렸다.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예쁜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자릴 잡았다. 안주인이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몇 쪽이나 될 만큼 다양한 커피와 티 종류라 취향에 맞는 커피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카페인에 약한 나는 순한 맛으로 골랐다. 요즈음 대부분의 카페와 달리 이집에서 손님은 마냥 제자리에서 수다만 떨어도 커피를 가져다준다. 아주 매력적이다.김순희수필가커피를 내리는 사이 추억여행을 했다. 오래전 같은 자리에서 소개팅을 했다는 L양, 서울에서 포항으로 출장 온 아가씨를 이곳으로 데려와 점수를 딴 K군. O양은 늘 커피 값을 내고 거스름돈으로 교회헌금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빳빳한 새 돈을 은행에서 바꿔와 나가는 손님에게 봉투에 고이 넣어 건네주는 이집만의 좋은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되도록 새 돈으로 거슬러주려고 한다며 금고에서 꺼내 보여주는 모습에 변함없는 친구를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다.안주인이 내려 준 커피 맛도 변함없다. 나오는 길에 박물관을 방문한 듯 로스팅한 ‘브라질 파젠다 프로그래소’ 알갱이를 기념 굿즈로 샀다. 천장까지 닿아 붉은 커피콩을 한껏 달고 있는 나무가 부러워 묘목 한 그루도 샀다. 다 익은 콩을 심어서 50여일이 지나야 싹이 튼다는데 2년의 시간을 간직한 녀석으로 골라 업어 왔다. 한 잔의 커피와 한 그루의 나무를 안겨준 카페 아라비카는 우리의 청춘이 묻어있는 곳이다.

2020-05-31

코로나 인재상

얼마 전 미국 고교에 재학 중인 한인 여학생이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인 프린스턴대와 하버드대에 동시에 합격해 교민사회에 화제가 됐다. 그 여학생이 특별하게 공부도 잘했지만 뉴스의 초점이 된 이유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항상 안내견을 데리고 다니는 그녀는 주변의 축하 소식에 대해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에 ‘긍정의 힘’을 전파하고 싶다”고 말했다.그녀에게 긍정의 힘이란 시각 장애라는 신체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룬 성과를 말한다. 긍정이란 말은 “사실대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말은 시각장애를 불평등하다거나 차별로 인식 않고 있는 대로 받아들이면서 극복했다는 뜻이다.사람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컵 반잔의 물을 보고 ‘물이 반 컵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람이 있나하면 ‘반 컵이나 남았네’ 하는 사람도 있다.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다. 현실을 희망적으로 바라볼 때 우리의 삶도 좋은 쪽으로 흐르게 된다는 것이 긍정적으로 보는 삶의 관점이다.긍정이 나쁜 것도 무조건 좋게 받아들이자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긍정은 나에게 일어난 상황을 수긍하고 다른 방법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다. ‘긍정적 사고방식’의 저자 노먼 빈센트 필은 “작은 생각의 차이가 성공적인 인생과 행복을 약속한다”고 했다.한 취업 포털에서 불황기에 필요로 하는 인재상에 대한 조사를 벌였더니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은 ‘긍정적 인재상’을 최우선으로 손꼽았다. 평소 가장 많이 선호했던 ‘성실한 인재상’보다 앞섰다고 한다.코로나19로 기업이 어려움에 처하자 기업의 인재상도 불황 극복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5-28

끝나지 않은 대통령의 비극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이나라에서 대통령을 지낸 이들의 운명은 왜들 이럴까. 정치부 기자로 30여년을 지냈지만 이런 생각이 들때면 마냥 서글픈 마음이 든다.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은 광복 이후 11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내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 농지개혁, 초등교육 의무교육,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대대적인 학교 건립, 평화선 선포 등과 같은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동시에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독재 권력을 추구해 반발을 샀고, 결국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돼 4·19 혁명이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이후 윤보선 대통령이 잠시 대통령을 맡았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관권·금권선거, 3선 개헌과 10월 유신으로 장기집권을 획책해 독재자의 길을 걸었으며,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생을 마감했다.최규하 대통령은 국무총리로 재직하다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케이스이고, 전두환 등 신군부의 압력으로 8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10·26 사태 이후 하나회를 통한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았고, 1980년에는 5·17 내란을 일으키고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전 대통령은 퇴임 후 1995년 후임인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구속 기소됐으며, 반란 수괴죄 및 살인, 뇌물 수수 등으로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오랜 야당 생활끝에 정권을 잡은 김영삼 대통령도 차남 김현철이 구속되는 등 끝은 그리 좋지 못했고, 김대중 대통령 역시 정권 말기에는‘홍삼 트리오’로 불린 세 아들이 모두 권력형 게이트에 휘말리면서 구속되며 큰 곤욕을 치렀다.노무현 대통령은 퇴임한 뒤 고향 봉하마을에 귀향했으나 2008년에서 2009년까지 친형 노건평 등 친인척 비리로 조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봉하마을 사저 뒷산의 부엉이 바위에서 스스로 투신하는 비극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퇴임 후 5년이 지난 2018년 뇌물수수 및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됐고,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임기 중 탄핵된 뒤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강요 등 18개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이리저리 따져보니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은 모두 옥고를 치렀거나 옥고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생각해보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직 대통령과 주변사람들의 비리를 캐는 데 권력의 힘을 투사한다면 어떤 사람이 버텨낼 수 있을까. 명백한 개인비리는 당연히 처벌대상이 돼야겠지만 정치판에서 벌어진 잘못은 정치적인 승부 자체로 마무리짓는 것이 좋다. 그래야 대통령마다 예외없이 불행해지는 ‘대통령의 비극’을 끝낼 수 있다.현재 정치권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사면주장도 아마 그런 배경에서 일게다. 문재인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한 대목이다.

2020-05-28

코로나19 마스크

그냥 근처에나 돌아다니려던 것이 나도 모르게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습관은 무섭다. 하기는 뭘 쓰려 해도, 읽으려 해도 전철 타고 철커덩거리며 앉아 가는 맛이 나쁘지 않다.그런데, 참, 마스크가 없다. 없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약국으로 향한다. 오늘은 내 주민등록번호 끝자리 날은 아니다. 그래도 요즘에는 급히 살 수도 있다고 했다.과연, 약국에서는 컴퓨터인가에 무슨 기록을 하고 마스크를 선뜻 내어준다. 사천오백 원, 세 장짜리 한 묶음이다. 다행이면서도 약간은 서운한 느낌, 왜냐하면 한 장, 한 장 따로 포장한 마스크 여는 맛이 보통 아닌 것을, 이건 세 장을 하나로 포장한 상품이다.아쉬운 대로 마스크를 확보했다. 전철 역으로 들어서며 내 심각한 건망증을 잠시 탓해 본다. 학교 연구실 책상에도 두 장이 널려 있고 집에도 또 두어 장 걸려 있고 자동차 안에도 있고 가방 안에도 있는데, 또 사버린 것이다.지하철 안은 자못 한산하다. 책을 읽으려 했는데 정작 앉고 보니 책이 유튜브를 이겨내지 못한다. 휴대폰 이어폰을 꽂고 일본 코로나19 상황에 관한 뉴스를 듣는다. 전철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없고 모두 마스크를 엄숙히들 쓰고 앉아 있다.마스크도 참 제각각이군, 하는 재밌는 생각이 난다. 연예인 마스크라나, 얼굴 전체를 복면을 쓰듯 까맣게 가린 마스크도 있고 하얀 것도 있고 하늘색 것도 있다. 헝겊 마스크 안에 필터를 갈아 끼울 수 있도록 한 제법 비싼 마스크도 있고, 한 장에 오백 원씩 그냥 마스크 흉내만 낸 것 같은 마스크도 있다.오늘인가, 어젠가부터 마스크 안 쓴 사람은 버스나 택시, 전철조차 탈 수 없게 되었다. 승차 거부가 가능하다니 말이다. 비행기도 곧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 한다던가.그래도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정은경 씨의 질병관리본부가 살신하고 있지만 어제는 쿠팡과 마켓컬리 물류센터에서도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학생들이 등교하면 더 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바야흐로 무산된 도쿄 올림픽 대신 코로나19 올림픽 시절. 어느 나라가 더 잘 막느냐 ‘게임’이다. 한국은 지금 수위를 달리는 중. 일본의 아베와 나팔수 언론들처럼 요행수를 바라고, 민족이 우수해서 덜 걸리고 있다는 식으로 안심할 수는 없다.다들 마스크를 썼다고 생각하니 뭔가 든든한 느낌이다. 더구나 오늘의 내 마스크는 KF94다. KF라는 말은 ‘Korea Filter’의 약자란다. 이 필터 등급은 KF80, KF94, KF99 등이 있고, KF94 마스크는 0.4μm 크기 미세입자를 94% 이상 차단해 준다는 뜻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5-28

현대와 삼성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70년대 현대건설이 중동시장을 개척할 때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사원조회 때 단골로 하던 말이 있다.“사나이로 태어나서”라는 군대에서 많이 부르는 노래를 인용하여 “건설, 조선, 자동차 같은 중장대 산업에만 현대는 집중한다. 설탕, 모직 같은 경공업은 삼성에 맡긴다”는 식으로 어떻게 들으면 삼성을 낮게 보는 발언이었다.필자가 현대건설 사원 시절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던 정 회장의 모습이 생각난다. 사원들과 씨름을 할 정도로 소탈하고 전용 엘리베이터 없이 사원들과 어울렸다.반면 만난 적은 없지만 삼성 이병철 회장은 소탈한 느낌의 정 회장과 달리 깔끔한 귀족적 인상을 주었다. 삼성의 업종도 힘든 업종 보다는 쉽게 이익을 산출하는 소비자 밀착형 업종이 주를 이루었다. 그 당시에도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들었다.당시 경영학계에서는 두 그룹의 운영방식을 아주 대조적으로 평가했다.소위 ‘막 밀어대는 식’의 경영과 ‘치밀한 기획’이 수반되는 경영방식이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두 그룹이 모두 성공적이긴 해도 운영방식은 달랐고 그 원인은 총수의 성격과 그리고 업종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석되었다. 실제로 현대 정 회장은 공장 후보부지를 헬리콥터를 타고 돌아본 후 장소를 헬리콥터 안에서 정했다는 후문도 있다. 반면 삼성의 이 회장은 이런 경우 치밀하고도 꼼꼼하게 손익계산서를 작성하였다고 한다.그런데 이런 세상이 바뀌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았다.약 10년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90년대 초 귀국하여 보니 현대도 현대전자, 반도체 등에 투자하고 삼성은 중공업, 자동차를 만드는 상황이 되었다. 90년대 이후는 사반세기를 사업구분으로 분할되던 현대와 삼성의 역할은 사업분야로는 두 그룹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두 그룹은 다방면에 진출했다.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업무용 차량으로 현대자동차 제네시스 G90(사진)을 이용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고 한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이 업무 차량으로 현대차를 쓰는 것은 삼성과 현대차의 협력을 강화하는 상징을 보여 준다고 평한다.이에 발맞추어 이재용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최근 차세대 전기 자동차(EV) 사업 협력을 위해 사상 처음으로 단독 비즈니스 미팅을 했다고 한다. 양 재계 3세대의 랑데부이다. 각 그룹의 두 총수가 비즈니스 목적으로 회동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향후 양사 간 협력이 크게 기대되는 대목이다.한국재계 1, 2위인 현대 삼성의 협력은 오랫동안의 바람이다. 사실상 일본, 미국에서도 그룹의 협력은 쉽지 않은 현실에서 두 그룹의 협력은 코로나 사태로 경제적 위기를 맡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 시의적절하다.포카전이나 연고전처럼 현삼전을 매년 하면 어떨까? 뭐 그런 엉뚱한 생각도 들어간다.

2020-05-28

찔레꽃이 피어서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찔레꽃이 한창이다. 입춘 무렵 매화에서 출발한 꽃들의 릴레이가 진달래, 벚꽃, 복사꽃, 아카시아꽃에 이어 찔레꽃이 배턴을 받았다. 밤꽃과 싸리꽃이 저만치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같이 피는 다른 꽃들도 많지만,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지만 내겐 아무래도 앞에서 꼽은 꽃들이 대표주자 인 것 같다. 흔히들 이맘때를 장미의 계절이라고도 하지만 내게는 그보다 찔레의 계절이다. 꽃의 여왕이라는 장미의 화사함보다 찔레꽃의 소박함이 더 내 정서에 친근하게 와 닿는다.찔레꽃이 필 때쯤이면 뻐꾸기가 울기 시작한다. 봄부터 울던 산비둘기가 목이 쉴 때, 초여름 숲의 침묵을 깨뜨리고 뻐꾸기소리가 터진다. 이른 봄부터 숲이 품어온 적막의 유정란이 마침내 부화를 한 것이랄까, 뻐꾸기소리에는 어딘가 적막의 유전자가 들어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이맘때쯤 뻐꾸기소리가 없다면 초여름의 숲이 아무리 무성해도 무성영화처럼 답답하고 찔레꽃 향기조차 숨 막힐 것이다. 뻐꾸기소리와 찔레꽃은 한 쌍인듯 잘 어울린다. 초여름의 짙어가는 녹음 아래서 찔레꽃 향기를 맡으며 뻐꾸기 소리를 듣노라면, 슬픔도 아픔도 그리움도 한 줄기 아련한 강물이 되어 흘러가곤 한다.찔레꽃은 우리네 누이들을 닮았다. 보릿고개 막바지에 피는 찔레꽃에는 먼저 간 누이의 냄새와 미소가 들어 있다. 찔레꽃 향기가 너무 슬퍼서 목 놓아 울었다는 소리꾼 장사익에게도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가난의 굴레를 벗기 위해 도시로 나간 우리네 누이들은 가발공장이나 봉제공장의 공순이가 되거나 시내버스 안내양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유흥업소에 팔리기도 했다. 하루 열 몇 시간의 고된 노동의 대가로 받은 몇 푼의 돈을 아끼고 아껴 고향집으로 부치면 그것이 동생들의 학비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찔레꽃 핀 길을 누나는 떠났네/ 동생들 남들처럼 공부시키겠다고/ 서울로 떠나간 지 석 달 만에/‘좋은데 취직해서 몸성히 잘있단다’/ 적어 보낸 편지에도 소액환에도/ 찔레꽃 냄새가 묻어있었네//중략//고등학교를 마치던 해 어느 봄날,/ 작은 보퉁이 하나로 돌아온 누나는/ 철지난 꽃잎처럼 시들어 갔네/ 기미와 황달로 누렇게 뜬 얼굴에/ 아침마다 새하얗게 분화장을 하고는/ 나를 보고 쓸쓸히 웃어주던 누나// 누나가 묻혀있는 뒷산 언덕엔/ 해마다 오월이면 꿈결처럼 새하얗게/ 분화장한 얼굴로 찔레꽃이 피어/ 흐드러지게 흐드러지게 분냄새를 날리고/ 저승의 기별인 양 적막하게/ 온종일 뻐꾸기가 울고 있었네” - 졸시 ‘찔레꽃’꽃과 잎에 가려진 가시처럼 아픈 기억은 속으로 감추고, 오늘은 환하게 찔레꽃이 피었다. 활짝 핀 찔레꽃 덤불 가득 벌들이 잉잉거려 한바탕 흥겨운 잔치마당이다. 상다리 휘도록 흐드러지게 차려놓고 바람 편에 사방으로 향기 전단 뿌리고 뻐꾸기 악사가 벌써 흥을 돋우고 있다. 삶이란 한바탕 축제가 아니냐고, 벌 나비 모여들어 무르익은 잔치 마당에 초대를 받고 가서 나도 그득하게 한 상을 받는다.

2020-05-28

인간적인 붓다

탄탄 스님 포항 운제산 자장암 감원 중앙승가대 강사유럽의 불교학자들은 역사적 붓다를 인간적 존재로 보는 경향이 농후했다.붓다가 되기 전 고타마는 그의 재세 시대에서 무한하면서 초월적인 존재로 체현된다.신화와 우상화가 아닌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참답고 실다운 인간미 넘치는 분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완벽한 분이었고 절대적 경지에 이른 성인을 인간적 관점의 붓다로 조명하려는 까닭은 신과 인간이 종속적 관계인 주종관계임을 철저하게 부정하기 때문이다.그리하여 신의 노예인 인간이 해탈하여 신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상세하게 일러주신다.세상의 모든 지식이 눈깜짝할 찰나의 시간이면, 검색이 가능하며 인공지능을 삽입한 로봇에게 인간능력의 수백배를 부여하고 그 역할을 주어 기능하게 하는 것을 보면, 눈부신 과학문명 사회에서 이제는 인간이 거의 신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였다.그러나 이렇게 최첨단 문명 속에서 살던 인류가 어느날 창궐한 전염병이 난무하는 세상에서는 속수무책이다.역시 인간은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돌파하고자 죽음 앞에서는 늘 두렵고, 내세를 기약할 수밖에….깨달음을 이루어 중생을 제도하는 삶을 곧 완성된 인간인 붓다라고 한다.미완성의 인간이 중생이라면 자기 절제와 수행을 바탕으로 완성된 붓다를 이루는 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다.초기불교의 관점에서 초월적이고 절대적 존재로 붓다를 부각했고 이후 대승불교권에서는 붓다를 더욱 신격화 하는 경향이 농후했다.붓다재세 시 그 이후에도 무한하고 초월적인 것을 선례가 없는 방법으로 체현했고 붓다 설화에서 주목하는 것은 언제나 ‘진실’이었다.무조건적인 신격화 보다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이었던 붓다의 삶에서 인류가 신과 인간의 종속적인 관계에서 해방되고 인류사에서 가장 휴머니즘에 입각한 종교를 창시한 것이 불교이다.중생이 살고 있는 이땅은 오염된 ‘예토’이다.중생의 업보로 정결치 못한 예토에서 정결한 정토를 지향하는 불자는 늘 나무 아미타불을 염송하기도 하는데, 이는 ‘정토’라 하여 아미타불의 주불인 서방정토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서방정토를 포함해 타방(他方)에 존재하는 모든 불국토를 포괄하고 있기에 죽어서 가는 극락이 결코 아니다.현세의 예토를 정토로 바꾸고 금생의 지극한 환희와 기쁨의 세계가 극락이며 불교도 믿음을 출발점으로 하지만 이교도에 비하면 객관적인 진리를 추구할 뿐.절대적인 신과 주종관계이고 죽어야만 가는 천국의 세계가 아닌, 현세의 극락을 지향하여 금생의 예토를 현세에 정토화 하는 것이 불자의 당면과제이다.

2020-05-27

하얀 오월

강길수수필가마르첼리노….오월을 어떻게 지내고 있나. 삼월인가 했더니 눈 깜짝할 새 사월이 가고, 오월도 하순에 접어들고 있다. 연녹색 나무가 순식간에 신록으로 변해 눈앞에 넘실댄다. 자연은 예나 다름없이 묵묵히 제 길을 가고 있다. 그런데 나의 오월은 어디를 걷고 있는지 헷갈린다.가만히 올봄을 되돌아본다. 내 봄은 별과의 만남으로 시작되었지 싶다. 춘분이 한 달가량 남은 날이었지. 가로수 보호대 사이를 비집고 올라와, 사뿐히 내려앉는 별을 보듬고 세상을 비추는 새 생명을 만난 거야. 대낮 땅바닥에서 하얀 별빛을 온 누리에 비추는 앙증스러운 존재, 바로 별꽃 말이야. 삼월이 되자 벚꽃에게 자리를 양보한 듯 보였지만, 낮은 곳에서 여전히 반짝이는 별이었다.마르첼리노.환하게 거리를 밝힌 벚꽃을 사열(査閱)하는 멋도, 그 아래 보도를 걸어보는 행복도 올핸 누리지 못했다. 코로나19의 위력에 짓눌려, 엄두도 못 내다 드라이브 스루 한 번으로 만족해야 했거든. 화무십일홍이라 하듯 벚꽃의 화사함도 요정처럼 사라져 버리더구나. 뒤이어 줄 서서 피어난 조팝나무꽃이 사월을 밝히기 시작했지. 공조팝나무에 탐스러운 등불이 켜지고 덩달아 산조팝나무도 신록 사이에서 등대같이 빛났다. 하지만 무심한 나는 별빛도, 등불도, 등댓불도 느끼려 하지 않았다. 그사이 계절의 수레는 나를 두고 오월로 도망치고 말았지. 사람들이 마스크를 낀 채, 다른 이를 피하며 총총 지나가는 출근길 모습을 만나며 걷던 오월 어느 아침이었어. 문득, 하늘을 쳐다본 내 눈에 이팝꽃이 하얀 신부(新婦)처럼 달려드는 게 아니겠나. ‘아, 벌써 이렇게 되었어!’ 혼잣말을 되뇌며 반갑게 쳐다보았지. 그러고 보니 ‘하루에 한 번은 하늘을 바라보자’던 그 옛날, 한 문우와의 다짐도 잊고 살아온 게야.마르첼리노.하얀 오월이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이팝꽃 앞에서 하얀 오월을 알아채게 된 게야. 삼월에 활짝 핀 하얀 별꽃에 이어 조팝꽃들과 이름 모르는 꽃들이 하얀 사월을 밝게 비추어주었지. 하지만, 내 눈엔 사람들의 하얀 마스크만 들어 올 뿐이었어. 무딘 마음이 하얀 삼, 사월을 외면한 게지. 왜 한눈에 모든 것을 알아보지 못할까. 정말 육신의 눈은 마음이 함께 하지 않으면,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인가.올봄, 이곳엔 줄곧 하얀 이팝꽃이 유난히도 많고 탐스럽게 피어났다. 철길 숲은 물론, 고속도로 진입 가로, 터널 앞의 고속도로 분리 화단, 고향 가는 국도변에도 하얀 꽃들이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어. 그 옛날 보릿고개 시절, 사람들은 이팝꽃을 보며 배고픔을 달랬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간직한 꽃. 아이러니하게도 보릿고개를 물리친 지금, 사람들은 더 많은 이팝꽃을 만난다.마르첼리노.하얀 방호복의 전사(戰士)로 무장한 방역진과 의료진…. 코로나19 방역과 치료의 전선(戰線)에 출전하여, 고군분투하는 그들 모습이 일상으로 스며든 봄을 살아온 우리들. 왜 올봄은 하얀 오월이 끝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보일까. 백의민족이라도 다시 일깨우려 함인가. 혹시, 우리가 백의민족의 혼을 잃기라도 한다는 하늘의 계시란 말인가. 거짓과 선동에 찌들어, 불의와 정의를 식별하지 못하고 생활의 불안에 내몰려 사는 동안, 조상들이 섬겨온 하늘과 땅을 멀리한 것은 아닌가. 나, 너 할 것 없이 우리 사회는 하얀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는 두려운 생각이 가슴을 짓누른다.곳곳에 장미꽃이 붉은 얼굴을 한껏 열어젖히고, ‘그대 내게 와서 사랑의 오월을 누려보라’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삼월과 사월을 관통한 하얀 오월은 침묵과 외면, 무시와 강행의 카르텔을 덮어쓴 장미의 유혹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물러서지도 않는다. 뒤이어 피는 하얀 찔레꽃과 하얀 꽃들이 쏘는 푸른 레이저광선이, 장미 아가씨의 삿된 유혹에 취할 때가 아니라고 일깨워 주고 있기에…….하얀 오월은, 잃을 수 없는 너와 나의 희망이다.하얀 오월은, 잃을 수 없는 너와 나의 희망이다.

2020-05-27

사념이 없어야

아침마다 음악과 시를 전송해주는 지인이 있어요. 연세도 많은 분이 어쩜 그리 한결 같으신지. 처음엔 송구한 맘에 의무적으로 클릭을 했지만, 요즘은 늦잠을 완벽히 깨우는 마법의 음료수로 삼고 있어요. 눈을 뜨면 습관처럼 찾곤 하지요. 누군가의 수고로 제 하루의 시작이 신선합니다.오늘은 황지우 시인의 ‘겨울산’이 배달되었어요.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몸은 부스스한데 정신이 버쩍 듭니다. 짧은 시지만 통렬하게 뜨끔합니다. 칼럼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습니다. 시인의 일갈처럼 인간은 사색이 많아 괴로운 기회주의자들이죠. 그 출발점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어요. 평범한 우리들에게 욕망 없는 만족이 있기나 할까요? 욕망은 인간의 숙명적 굴레예요. 하느님이 그렇게 만들었으니 욕망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에요. 거기에서 파생하는 수많은 ‘사색’이 문제인 거지요. 사념덩어리는 욕망하는 행위의 필수불가결한 부산물이에요. 그것을 줄이고자 하는 노력이 욕망을 좀 더 건전하게 가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상념, 그러니까 어떤 판단이나 계산 같은 것들은 욕망이 누는 똥이에요. 그것은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수반하지요. 내가 기회주의자일 때 파생된 잡념들이니까요. 사색만 버릴 수 있다면 욕망 자체는 부끄러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사념이 많다는 건 유리에 갇힌 파도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휘몰아치고 넘실대지만 자연스러운 게 아니니 제 안을 넘지 못합니다. 신선하지도 그렇다고 파란을 일으키지 못하지요. 끝내 해안선에 닿지 못하고 번뇌의 유리통만 되풀이해서 철썩일 뿐이지요.순수하니 몰염치해도 사랑스럽고 간절하니 맹렬해져도 용서가 되는 게 욕망이에요. 나아가 성취하면 오만해지는 것도 욕망의 속성이에요. 군자가 못 되는 대다수의 우리는 그렇게 욕망하면서 살아가지요. 욕망의 인간적인 면모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한 바퀴만 돌리면 다음과 같은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완벽하게 성숙하면 겸허해지는 것 또한 욕망이라는 것에요. 성숙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 사색을 버리는 일이 은밀하게 자리 잡고 있지요.쓸데없는 사색을 부려 놓기 위해 길을 나섰어요. 외곽지에서 폐차장을 만났습니다. 층층이 쌓인 껍데기들이 허공 속에 누워 있습니다. 차를 세우고 한 컷을 얻습니다. 탐욕의 끝자락이 저 쨍한 하늘자리에 걸려 있습니다. 한 때 도로를 누비던 부질없었던 영광이 낡고 부스러진 사념덩어리로 켜켜이 쟁여져 있습니다. 위태로운 사색의 끝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마음의 짐을 덜려다 더한 마음의 짐이 생깁니다. 사특한 욕망이야말로 끝내 허망의 탑 쌓기와 다르지 않음을 알겠습니다.인간은 근본적으로 ‘홀로쟁이’입니다. 어느 프로파일러의 말이 생각납니다. 사람에게서는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고. 그래서 매체로는 동물의 왕국만 본다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생각에 동조할 때가 있습니다. 쌉싸름한 희망보다 달콤한 비관이 가슴을 지배하는 그런 날이 가끔 있잖아요. 그래서 누구나 외롭고 누군가는 고독을 즐긴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외로움과 고독 구별법, 사전적 의미와는 무관하게 저만의 풀이를 달아봅니다. 감성적 에너지로 자신을 갉으면 외로움이에요. 한마디로 괴롭지요. 그 자리에 창조적 에너지를 쏟으면 고독이 되는 거지요. 견딜만한 희열이지요. 어차피 무에서 시작하는 유는 없어요. 있는 유를 파괴한 찌꺼기가 신선한 창조물이 되는 거지요. 완벽에서 새로움이 생길 리 없잖아요. 새로움이야말로 기존의 새로웠음을 밟고 일어나는 뭉근한 혁명이니까요.지인의 전화기 퍼스나콘에서 이런 뉘앙스의 문구를 본 적이 있어요. ‘징징대거나 불평하지 말아요. 열심히 나아가요. 더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요. 나는 나예요. 이유를 찾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가만 읽어 내리면서 욕망이나 고독은 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거니까요.김살로메소설가여전히 혼자 또는 소수를 강권하는 나날이에요. 코로나가 친숙한 친구가 되어가는 동안 건강한 욕망을 꿈꿔도 좋을 것 같아요. 외로움을 고독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연습도 괜찮구요. 주변을 챙기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더라도, 더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는 게 결코 견디지 못할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가만 자문자답해봅니다. 외로운가요? 욕망해서 그래요. 하지만 괜찮아요. 욕망은 나쁜 게 아니니까요. 다만 명심하세요. 욕망의 똥덩어리인 사념을 버려야 건강한 고독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번드르르하거나 번잡함 뒤의 공허한 잔해. 삶의 실체적 진실이 자명할수록 우리는 잘 견뎌내야 하니까요. 더한 사색이 쌓이기 전, 빨리 집으로 가야겠어요.※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0-05-27

이번엔 잘 하려는지

장규열한동대 교수국민의 기억 속에 좋은 국회는 없다. 파행과 성토, 반목과 단절로만 회상되는 국회가 있을 뿐이다. 회기가 끝날 때마다 ‘최악의 국회’를 돌아보아야 하는 국민이 아닌가. 제헌의회가 선 지 72년이면 무르익어야 할 경륜이 아닐까. 우리는 언제쯤 안심하며 국정을 맡길 만한 국회를 가질 수 있을까. 국민은 일하는 국회를 간절히 원하는데, 당신들은 당선의 영광에만 취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힘부리는 권력국회를 원하지 않는다. 압도하는 파워국회를 바라지 않는다. 군림하는 제왕국회를 그리지 않는다. 국민의 마음이 반영되길 원하고, 나라의 앞길을 밝혀가길 기대할 뿐이다.21대 국회가 문을 연다. ‘일하는 국회’를 통해서 국민은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의회의 주인은 국민이다. 링컨 대통령(Abraham Lincoln)도 ‘국민은 의회의 주인이 될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서 ‘국민의 목소리를 따르지 않는 의원은 언제라도 물러서야 한다’고 하였다. 힘없고 소외된 나라의 그늘진 곳에 어떤 기대와 소망이 존재하는지 살펴야 한다. 권력자의 오만함와 태도가 아니라 ‘친구의 마음’과 ‘가족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목소리가 없었을 국민을 챙겨야 하고 당신이 함께하여 희망이 생길 국민을 돌아보아야 한다. 오늘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하면 당신은 이미 자격이 없다. 일상 가운데 국민이 겪는 어려움을 헤아려야 한다. ‘민생국회’가 되어야 한다.세상이 바뀌었다. 지난 국회는 서 있었다. 아니 오히려 뒤로 가고 있었다.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에 앞서가는 국회가 되어주시라. 권력에 도취되어 태만한 당신은 그만 만났으면 한다. 누구보다 변화에 민감하여 오히려 새길을 만드는 국회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 국회에는 상상력과 창의가 필요하다. 기발한 생각이 넘치고 풍성한 토론이 가득한 국회를 만나보고 싶다. 변화를 읽지 못하면 혁신을 이끌어낼 수가 없다. 바뀌지 않고는 존재하기도 버겁다. 구태와 폐습을 아예 허락하지 않는 국회여야 한다. 국민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당신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있음도 명심하시라. 당신의 일상이 국민을 위한 일상임을 확인하고 싶다. ‘공부하는 국회’가 되어야 한다.국회는 다투는 곳이다. 생각을 겨루고 정책을 견주며 법과 제도를 가다듬어야 한다. 의견과 주장이 넘실거려야 하고 타협과 토론이 가득해야 한다. 생각의 힘이 부딪히는 마당이며 더 좋은 결론을 찾아야 하는 터전이다. 이성과 지성을 발휘해야 하며, 폭력과 고집은 내려놓아야 한다. 지난 국회에서 보았던 볼썽사나운 모습은 이제 그만 만나고 싶다. ‘품위있는 국회’가 되어야 한다.국민은 목마르다. 우리의 생각과 목소리가 정당하게 전달되는 국회를 만나고 싶다. 민생국회, 공부하는 국회, 품위있는 국회가 되어 국민이 안심하는 국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새 국회에 높은 기대를 건다.

2020-05-27

인슈어테크(InsureTech)

인슈어테크는 ‘보험(Insurance)’과 ‘기술(Tech)’을 결합한 신조어로 보험산업에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정보기술(IT)을 접목해 상품 개발, 계약 체결, 고객 관리 등 보험업무 전반에 정보기술(IT)을 융합하는 것을 뜻한다.인슈어테크가 도입되면 전체 가입자에게 동일하게 적용하던 보험료율을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다르게 적용하거나 사고 후 보상 개념인 기존 보험과 달리 사고 전 위험관리 차원으로 접근하는 서비스가 가능하다.또 보험 상담 업무도 로봇이 대행할 수 있고, 빅데이터 관리를 통한 보다 효과적인 영업과 블록체인 등을 이용한 안전한 결제 시스템 등을 구축할 수 있다.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보험사가 도입한 인슈어테크는 크게 △IoT △빅데이터 △AI △블록체인 등으로 나뉜다.우선 보험 가입자들에게 가장 친숙한 인슈어테크 기술은 IoT다. 스마트기기로 사용자 정보를 실시간 수집·전송해 보험료 할인 등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자동차보험에서 많이 볼 수 있는‘운전습관 연계보험(UBI)’이 대표적 사례다.빅데이터를 마케팅과 계약 심사 등에 활용하는 보험사도 늘고 있다. 소비자에게 비슷한 연령·직업·소득 수준에서 많이 가입한 상품을 추천하고, 신규 계약의 사고 발생 위험을 예측해 위험이 낮으면 자동으로 계약을 받아들인다.1 대 1 채팅 방식의 AI 기반 챗봇(채팅 로봇)을 도입한 보험사도 늘고 있다. 삼성생명, 라이나생명 등은 AI 기반 챗봇으로 계약 조회, 대출 접수·상환, 보험금 청구·조회 등 업무를 연중무휴 24시간 처리한다.인슈어테크 시대의 본격화는 4차 산업혁명이 우리 사회에 가져온 변화상의 한 단면일 수 있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5-27

인연에 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까까머리 학창시절 피천득의 ‘인연’은 언제나 가슴 통증으로 다가왔다. 몇 번을 읽어도 그와 아사코의 가슴 시린 사연은 익숙해지지 않는 생채기였다. 어린 아사코와 대학생 아사코, 그리고 점령군의 아내가 되어버린 아사코. 피천득에게 영화 ‘쉘부르의 우산’을 좋아하게 해준 연두색이 고왔던 우산 이야기는 지금도 코끝을 시큰하게 한다. 그와 아사코의 세 번에 걸친 만남은 악수도 없이 절만 하는 것으로 끝난다.뾰족한 지붕에 뾰족한 창문이 달린 집에서 함께 살자 했던 아사코. 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허망하고 황망하다. 인연처럼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 불가(佛家)에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緣)을 묶어서 인연이라 한다. 대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이 관계 맺는 것을 인연이라 말한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설정과 진행 그리고 결과를 통칭해서 인연이라 한다.인터넷에 올라온 어느 무녀(巫女)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신내림으로 강신무가 된 그녀의 글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데가 있었다. 무엇보다 전생과 이생 그리고 후생에 대한 말이 그러했다. 원수지간의 전생이 부부의 인연으로 이생에서 구현된다는 말. 왜 하필 전생의 원수가 서로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해로(偕老)를 함께 하는 것일까?!붙잡아도 떠날 인연은 작별을 고하고, 아무리 험하게 대해도 남을 사람은 옆에 남는다는 글을 읽으면서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진다. 그래서 그녀는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고 한다. 문제는 거기서 출발한다. 가려는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내가 싫은 사람 막아서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 아닌가. 마치 대각(大覺)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무연(無緣)하게 생각을 전달하는 무녀의 심사가 문득 궁금하기도 하다.사람 하나 보내는 일은 세상 하나와 작별하는 것과 같다. 사랑을 잃은 기형도가 ‘빈집’에서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하고 울먹이는 것은 공감이 간다. 그녀가 떠난 빈집의 문을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잠그는, 홀로 남겨진 시인의 고독과 황량한 내면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사내의 어깨 주위로 켜켜이 내리는 어둠이 눈에 밟히는 듯하다.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필시 거기까지였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의지나 욕망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충돌하고 파찰음을 낼 때, 그리하여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난파할 때 인연은 작별을 고한다.하나의 인연이 혹은 사랑이 또는 관계가 지나가면 크고 작은 흔적이 나이테처럼 생겨난다. 말 못 할 마음으로 흔적과 상처를 돌이키다 보면 그래도 다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을 채우기 시작한다. 영원한 작별 후에도 어디선가 새로운 생은 시작되는 법이므로.인연이 다한 사람 하나 보내고 한밤중 어둑한 방 그늘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 문득 ‘인연’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 여기까지야! 어디서 무얼 하든 부디부디 행복하기를!

2020-05-27

6월 전에는 국민교육헌장을 읽자!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들판마다 논물이 가득이다. 자연은 인간들을 배불리 먹일 양식을 짓기 위해 마른 봄에도 물을 모았다. 물을 들인 논은 마치 정화수가 담긴 그릇 같다.이제부터 자연은 시간을 두고 그 물에 해와 달을 녹인다. 그리고 해, 달, 흙, 물이 서로를 인정하고 하나가 되는 시간을 기다려 별을 닮은 벼를 심고 지극 정성으로 기를 것이다.자연은 때를 알고 때에 맞는 일을 하기에 자연에는 억지가 없다. 자연이 제일 잘하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다. 자연은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기다림이 있기에 자연이 주는 결실은 부실하지 않다.자연의 시계는 소만(小滿)을 지나 망종(芒種)으로 향하고 있다.소만은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의미로 본격적인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이다. 망종은 “벼, 보리 같이 수염이 있는 곡식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이다.“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되니 망종이요”라는 속담이 있다. 지금 들판을 보면 이들 속담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농부들은 절기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순리(順利)’를 들판에서 실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섭리(攝理)요, 이치(理致)이다.교육에도 이런 절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코로나19는 무원칙, 혼돈, 혼란 등과 같은 우리 교육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교육의 순리’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럼 교육의 섭리와 이치라는 말은? 필자는 순리, 섭리, 이치의 뜻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 말과 우리 교육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안다. 왜 그렇게 단정 짓느냐고 물으면 한마디로 답할 수 있다. “이 나라 교육 정책은 그때그때 달라요.”아 참, 필자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이 나라 교육에도 원칙이 있기는 있다, 그것도 절대적인 원칙이! 그것은 바로 성적 지상주의이다. 성적이 최고인 세상, 학생들을 시험의 노예로 만드는 학교, 그것이 이 나라 교육의 제일 원칙이다. 그 원칙이 실현되는 달이 온다. 6월이다.우리 교육도 자세히 찾아보면 교육의 순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민교육헌장이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대한민국 교사들이여, 코로나보다 학교가 더 무섭다는 학생들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6월이 오기 전에 국민교육헌장을 마음으로 읽어보자! 그리고 제발 죽은 시험으로 학생을 괴롭히지 말자!

2020-05-27

사회자본과 KBS

박혁준KBS포항방송국장학창 시절에 영어 어휘를 공부할 때만 해도 그리스어로 ‘지역 혹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demic이라는 단어에 접두사 pan(모든)이 결합되어 지금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공포스럽게 다가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전 세계적으로 550만 명이 넘는 확진자와 34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초래하고 있는 이 전염병으로 인해 우리나라 또한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지만 국민들과 정부의 단단한 신뢰의 기반 위에 그 어떤 선진국보다도 신속하고 정확한 조치로 초기 대응함으로써 물적자본과 인적자본 등의 총체적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 해외 유수 언론들의 대체적인 평가이다.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저서 ‘트러스트(Trust)’에서 신뢰가 정착하여 생성된 무형의 자본을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칭하며 집단 내의 관계에 깔려있는 협동의 규범으로 번영과 경쟁력의 원천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코로나로 인한 전 세계적인 위기가 종식되면 적지 않은 물적, 인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 생성된 사회자본은 대한민국을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게 하는데 있어 공공재의 역할을 중추적으로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1961년에 개국한 KBS 포항방송국은 지역사회의 방송과 문화 발전에 매진하고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보도함으로써 공적책무를 다하는데 최선을 다해왔다. 시청자들과 KBS 사이에 형성된 신뢰 기반의 사회자본 또한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이와 같은 공적책무를 과거와는 비교불가하게 다변화된 미디어 환경 하에서 지역사회 맞춤 방송서비스로 확장하여 제공하기 위해서는 혁신과 분권의 단위를 지금보다 광역화해서 접근하고 능동적으로 알릴 수 있도록 대처하는 ‘지역방송 활성화 정책’의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미디어정책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러한 분권화를 통해 KBS지역총국을 거점으로 지역 뉴스 역량과 디지털 미디어 서비스를 강화하고 지역사회의 공론장 역할을 확대하며 지역 문화행사 및 미디어교육을 심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현재 방통위의 사업계획 변경 허가 심사를 앞두고 있다.이에 대해 결국 포항과 안동을 포함한 7개 지역국 폐지 수순의 일환이 아니냐는 지역사회와 시민단체의 우려의 목소리와 애정 어린 질책을 KBS는 엄중히 듣고 긍정적으로 응답하고자 본사 정책결정회의를 통해 ‘뉴스7’ 등의 참여를 위한 TV 제작기능을 지역국에 유지하는 것으로 며칠 전에 결정한 바 있는데, 이에 따라 지역방송 활성화 정책이 형해화(形骸化)되지 않고 그 진정성과 미래지향적 가치가 제도적으로 수용되기를 염원하고 있다.KBS 한국방송은 공적책무 완수를 위한 이와 같은 헤라클레스적인 노력이 시지프스적인 과업으로 끝나지 않도록 앞으로도 맡은 바 소임을 성실히 다함으로써 신뢰 기반의 지역 사회자본 형성과 유지에 기여하고, 시청자들과 인생의 동반자로서 희로애락을 함께 할 것이라는 점을 약속드린다.

2020-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