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다. 농협에서 발행하는 12장짜리 달력의 마지막 장이다. 새해 첫날, 새 달력을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담고 있는 큼직큼직한 고딕체 숫자들이 마치 부화를 기다리는 유정란(有精卵)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매년 서른 개나 서른 한 개들이 유정란 열두 판을 선물로 받은 셈이다. 물론 겨우 몇 개나 한두 판밖에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받은 것을 중도에 파기하고 가버린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올해 내가 받은 삼백 육십 여섯 개 중에 이제 스물 한 개가 남았다. 나는 지금까지 몇 개나 부화시켜 날려 보낸 것일까. 갓 깨어난 병아리처럼 새롭고 생기로운 날이 며칠이나 되었던가. 현자(賢者)들은 하나같이 지나간 것에 연연하거나 날을 앞당겨 걱정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 충실하라고 한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보통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이 지금에 충실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기 마련이고.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달마다 저들의 환경과 생활에 관련된 이름들을 붙였다. 가령 크리크족은 12월을‘침묵하는 달’이라 했고, 수우족은 ‘나뭇가지 뚝뚝 부러지는 달’, 샤이엔 족은 ‘늑대가 달리는 달’, 위네바고족은 ‘큰곰의 달’ , 퐁카족은 ‘아무것도 갖지 않은 달’ 등으로 불렀다. 나는 12월을 ‘돌아보는 달’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 해의 마지막 한 달은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성찰하고 정리하는 기간으로 삼는 게 바람직할 거라는 생각이다. 자신의 삶의 궤적을 돌아본다는 것은 곧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 알기 위해서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삶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지난 한 해 우리나라 정국(政局)은 한 편의 막장드라마요, 소위 망나니 춤의 난장판이었다. 일 년 내내 숨 가쁘게 이어져온 광기어린 ‘망나니 춤’은 국민들의 뇌리에 한 장의 캐리캐쳐를 또렷하게 각인시켜 놓았다. 검찰총장이란 명패를 단 사내를 결박해놓고 법무장관이란 이름표를 붙인 여자가 봉두난발하고 권력이라는 칼을 휘둘러대는 장면이다. 둘러선 군중들도 두 편으로 갈라져서 서로 핏대를 세우고 삿대질을 하며 싸우고 있는, 이 한 장의 그림이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풍자화가 아닐 수 없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일일삼성(一日三省)이란 말도 있다. 공자의 제자 증자가 하루에 세 번씩 자기성찰을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자신을 몰각하고 반성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다. 철면피, 파렴치, 몰지각, 적반하장, 후안무치, 막가파, 내로남불…. 이런 패륜의 말들을 날마다 곱씹어야 하는 한 해였다. 한 나라의 살림을 맡은 위정자들이 도무지 반성할 줄을 모른다면, 그 해악은 얼마 못 가서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는 한 해였다. 누구든 나라의 녹을 먹는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이맘때쯤 제발 자신을 좀 돌아보라고 간청하고 싶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서고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