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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북한의 수령 우상화는 종식되기 어렵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수령은 북한의 최고 존엄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북한의 3대 수령승계는 봉건 왕조의 세습구조와 같다. 북한 당국은 1956년 8월 최창익·박창옥의 종파 사건 후 김일성 수령의 권위를 절대화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1959년 발간된 ‘항일 빨치산들의 회상기’에는 김일성이 항일 투쟁 시 축지법(縮地法)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1970년 북한의 초등교과서 ‘김일성 원수님의 어린 시절’에도 ‘솔방울로 수류탄’을 ‘모래로 쌀’을 만들고 ‘가량 잎 타고 강 건너’는 모습이 나타난다. 수령은 축지법까지 쓰면서 시공을 초월하여 활동한다는 허구이다.6월 20일 노동신문은 ‘축지법의 비결’에서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축지법을 이제 쓰지 않겠다.’고 선포하였다. ‘사람이 땅을 주름잡아 다닐 수 없다’고 고백한 것이다. 지난해 하노이 회담 결렬 후 김정은은 ‘수령을 신비화하면 진실을 가리게 된다.’는 발언의 후속 탄이다. 30대 후반의 김정은은 10대 후반 스위스 베른 국제학교에서 2년 유학하였다. 이번 그의 발언은 수령에 대한 상징조작이 이제 과거처럼 먹혀 들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는 정보화 초기 단계인 북한 땅에서 이제 사라질 것인가.그러나 이번 조치만으로 북한의 수령 우상화는 쉽게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북한 곳곳에 수령의 우상화 정책이 뿌리내려 있기 때문이다. 북한 주요 광장에 세워진 수령 부자의 동상, 주요 명승지 바위마다 새겨진 김일성 어록, 심지어 가정집에도 수령의 사진은 걸려 있다. 평양 곳곳에는 ‘위대한 수령은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표어가 나부낀다. 아직도 수령의 양대 생일 태양절과 광명성절은 국경일이 되어 있다. 하노이 회담 후 김정은의 귀국 행사시 도로변에서 열광하던 시민들의 모습은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수령 우상화 정책은 아직도 당의 핵심적 지도 이념이 되고 있다. 수령은 인민의 ‘뇌수’이므로 당, 군대, 인민은 수령을 절대 옹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인민들의 육체적 생명은 부모로부터 받지만 수령과 결합해야 ‘정치 사회적 생명체’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이 ‘어버이 수령님’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북한 주민이 수령을 직접 보는 것은 남한의 기독교 신자가 예수님을 뵙는 것과 같다. 이러한 수령론과 수령 승계론이 폐기되지 않는 한 북한사회의 수령숭배는 계속될 것이다.이렇게 볼 때 축지법은 사라져도 수령의 우상화는 계속될 전망이다. 세계 사회주의 어느 국가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수령론이 유지되는 한 수령 우상화는 계속 될 수밖에 없다. 중국의 학자들까지 북한의 세습 왕조체제를 비판하고 있다. 아직도 북한 세습체제까지 옹호하는 주사파들은 시대에 역행하는 군상들이다. 다행히 북한은 이미 초기 시장 경제에 편입되었다. 시장화의 진전에 따라 수령 우상화 정책은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 주민 1/3이 휴대전화를 소지하게 되었다. 정보화 사회 역시 북한의 일인수령제를 거부할 것이다. 북한의 수령제가 폐기 될 때 우상화 현상은 훨씬 약화될 것이다.

2020-05-26

비슷하나 같지 않은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어, 이상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구절인데….? 이 시구는 박인환이 1956년 봄에 지은 ‘세월이 가면’의 한 구절이다. 그런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는 박인환과 이름도 비슷한 가수 박인희가 부른 노래 ‘세월이 가면’의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다.훤칠한 키, 잘생긴 얼굴의 박인환은 당대 문인 가운데서 최고의 멋쟁이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서울에서 줄곧 자라고 살았던 ‘명동 댄디보이’ 박인환의 문학관이 강원도 인제 산골에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그가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났기에 인제군이 연고권을 주장하고 문학관을 지은 근거는 충분하겠다.)1926년에 태어난 그는 1956년 3월에 서른을 갓 넘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출중한 외모에다 20대 초반인 1949년에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았던 박인환의 요절은 문단을 포함한 당대 예술계에 큰 울림이 있었나 보다. 그가 세상을 뜨기 일주일 전 쯤 썼다는 시 ‘세월이 가면’은 곧바로 노래가 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박인희의 노래로 알려진 ‘세월이 가면’은 박인희가 처음 부른 노래가 아니다. 1956년 여름 신신레코드사에서 발매된 나애심의 음반을 시작으로 현인, 현미, 조용필에서 박인희까지 이 노래는 당대 최고 가수들의 목소리로 이어졌다.노래로 불리면서 처음 시의 ‘사랑은 가고’가 ‘사랑은 가도’로 바뀌었고, ‘과거’가 ‘옛날’로 달라졌다. 시와 노랫말이 똑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노래의 운율에 맞추어 몇 구절이 빠질 수도 있고, 조사나 어미 한 두 개쯤은 바뀔 수도 있다. 문제는 바뀐 노랫말이 마치 원래의 시인양 전도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데에 있다.‘사랑은 가고’를 ‘사랑은 가도’라고 바꾸어 노래를 불러도 되지만, 원래의 시는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가고’와 ‘가도’는 확연한 의미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김소월은 그의 시 ‘왕십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여드레 스무 날엔 / 온다고 하고 /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이 시에서 ‘가도 가도’를 ‘가고 가고’로 바꾼다면 소월이 노래하고자 했던 왕십리의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과거’와 ‘옛날’도 그렇다. 지나간 시간이라는 큰 테두리는 같을지언정 풍기는 뉘앙스, 그 느낌은 같을 수 없다. 2002년 공쿠르 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옛날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사랑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소설을 쓰거나 읽을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과거는 바꿀 수 있지만 옛날은 바꾸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과거와 옛날은 다르다는 말이다.시간이 가면서 사람들의 기억은 점점 흐릿해진다. 기록으로 남겨놓아도 그 기록을 옮기고 전하는 과정에서 변형과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 다반사이다. 역사의 정확한 기록은 그래서 중요하다.사이비(似而非)에 주의하자. 종교에만 사이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비슷하다고 같은 것은 아니다.

2020-05-26

뉴욕타임즈

‘뉴욕타임즈’는 뉴욕에서 발행되는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다, 1851년 창간된 이 신문은 세계적으로도 전통 깊은 유력지로 손꼽힌다. 뉴욕타임즈에 실린 기사와 논평 등은 지금도 많은 외신들이 인용, 보도하고 있다.신문 산업이 첨단 미디어 산업의 발달로 그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세평에도 신문의 전통을 꾸준히 이어가는 세계적 유력지란 점에서 주목받는 신문이다. 신문 산업의 쇠퇴 속에서 뉴욕타임즈가 명성을 이어가는 이유는 다름 아닌 뛰어난 취재력과 정확한 보도 때문이다.1912년 4월 타이타닉호 침몰사건 때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다각적인 취재보도를 해 신문사의 권위를 높였던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또 세계대전 때도 신속 정확한 보도로 명성을 날렸다. 강대국 미국 내 최고 일간지라는 이유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신문사 자체의 보도내용만 놓고 보아도 권위가 있을 만하다.주로 미국인에게 수여되지만 퓰리처상만 100회 이상 수상했다. “인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뉴스다”는 사시에서도 신문 매체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최근 뉴욕타임즈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망자 1천명의 이름과 짤막한 부고로 가득채운 기발한 내용의 1면 기사를 내보내 화제를 일으켰다. “미국 사망자 10만 명 육박 막대한 손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숨진 그들이 바로 우리였다”는 말로 코로나 희생자 추모와 코로나 피해의 심각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알리려 했다.빌게이츠는 지구가 망할 때까지 살아남을 유산 중 하나로 신문을 손꼽았다. 비록 뉴미디어의 공세에 떠밀리고 있지만 신문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을 기획한 뉴욕타임즈의 기자정신이 놀랍다. 우리 언론이 본받을 타산지석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5-26

잘 회복하는 아이로 키우기

이수원계명대 교수·유아교육과인생을 사는 동안 한번쯤은 좌절이나 트라우마를 경험할 수 있다. 부모는 자녀가 좌절이나 트라우마를 피할 수 없어서 겪더라도 쉽게 이겨내고 회복하기를 바랄 것이다. 본 지면에서 잘 회복하는 아이로 키우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탄력성이라고 한다. 선천적으로 낙천적인 성격이거나 유전인자 때문에 탄력성을 갖춘 경우도 있지만 후천적으로도 기를 수 있다. 탄력성을 키우는 방법 중 하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아이들이 해결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문제가 생겼을 때 직접 문제를 해결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과 정보를 찾아보고, 문제를 해결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결과에 책임지는 경험을 하다보면, 훗날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더라도 효율적으로 문제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장난감을 두고 싸움이 생겼다면 어른이 그 장난감을 제거해버리는 것보다 어떻게 장난감을 갖고 놀 것인지 아이들과 함께 대안을 찾고 실행해보며 그 대안을 아이들과 함께 평가해보길 권한다. 문제 해결의 경험이 쌓이다 보면 아이들은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낙관성 훈련도 필요하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괜찮아. 나도 처음에는 잘하지 못했어.”, “뜻대로 안되어 속상하구나. 다시 천천히 해볼까?” 등 상황에 적절한 해석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예전 칼럼에서도 강조한 바, 언어는 습관이어서 우리 어른들도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미국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하와이주 카우아이섬에서 열악한 상황의 아이들 201명을 추적조사를 해보니 삼분의 일이 잘 적응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들이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잘 적응하는가?”가 궁금하여 살펴보니, 아이 인생에서 아이를 이해하고 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어른이 부모일 수도 있지만 조부모나 기타 친지, 선생님일 수도 있다. 탄력성은 아이가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내용이다.아이 인생 전체에 걸쳐 필요한 자산인 탄력성을 키워 주자.내게는 결코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있다. 인생이 책이라면 그 페이지만큼은 찢어버리고 싶은 시간도 있다. 종교에 의지해서 인생의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나왔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배운 것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완전무결한 선(善)이라는 것과 앞으로 남은 삶은 이전의 삶보다는 더 나빠질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심리학자 에미 워너의 연구처럼, 나 역시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기대 덕에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독자들도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어려움을 잘 견뎌왔고, 잘 견뎌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어려움을 잘 극복할 것이다.코로나로 인해 힘든 요즈음 이 글을 보는 독자들이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견뎌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본 지면에 담아본다.

2020-05-25

영욕에 본성을 잃은 위정자들

강희룡 서예가이규보(1168~1241)에 대해서는 극명하게 상반되는 두 가지 평가가 있다. 13세기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극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인 정권 아래의 기능적 지식인으로 권력에 아부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이규보가 태어나고 2년 후인 1170년 무신난이 일어난 난세였다. 천부적인 문재(文才)를 지니고 어려서부터 중국 고전을 익힌 지식인이 살아가기에는 녹록치 않은 시대였을 것이다. 이규보는 아홉 살에 이미 신동이라 일컬어질 정도의 시재(詩才)를 보여 주었고, 성격 또한 자유분방했다. 시대와 어울리기 어려운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청년 이규보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과거에 세 번을 낙방하고 네 번째로 응시한 사마시에서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오랫동안 관직은 주어지지 않았다. 방황하며 술을 마셨고 장자사상에 심취하여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을 동경하기도 했다. 무신정권과 화합하지 못하고 현실 정치에서 벗어나 시와 술을 즐기며 고담(高談)을 일삼던 죽림칠현 같은 이들의 눈에 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한동안 그들의 시회(詩會)에 출입하며 함께 하자는 권유를 받기도 했으나 이규보는 그들의 제의를 거절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택한다. 서른 즈음 정권의 요직에 있는 이에게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호소하고 관직을 구하는 편지를 쓴다. 그러다 최충헌의 시회에 초청받아 그를 칭송하는 시를 쓴 덕분에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본인으로서는 현실적인 선택이었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실망스러운 처신이었을 수도 있겠으며, 변절자란 지목도 있었을 법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규보는 내면세계의 갈등을 돌을 내세워 스스로 문답을 적었다.‘동국이상국문집 후집, 돌의 물음에 답하다(答石問)’의 내용을 살펴보면, 큰 돌이 이규보에게 ‘(중략) 사람은 만물의 영장인데 어째서 몸과 마음을 자유자재하지 못하고 언제나 외물에 부림을 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떠밀리는가. 외물이 유혹하면 거기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외물이 다가오지 않으면 우울하여 즐겁지 못하며, 남이 인정해 주면 기를 펴고, 남이 배척하면 기가 꺾이니, 그대처럼 본래의 참모습을 잃고 지조 없는 존재도 없네. 만물의 영장이 이런 것인가!’이규보가 답하길, ‘너란 물건은 불서(佛書)에 우둔하고 미련한 것들의 정신이 목석으로 환생한다, 라고 했으니 너는 이미 정기와 광명을 잃고 돌덩이로 타락한 것이다. (중략) 내가 죽어 땅에 묻히면 너는 나의 비석이 되기 위해 깎여서 상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사물에 의해 움직여지고 본성을 손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도리어 나를 비웃는가?’ 여기서 돌은 자신의 선택을 비난하는 다른 사람들일 수도 있고 자기 내면의 또 다른 자아일 수도 있다. 어느 길로 가느냐에 따라 영욕이 갈리고 궁달(窮達)이 판가름 나는 선택이다.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있다. 어쩌면 삶의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선택 앞에서 고뇌하고 해명이라도 하는 이규보의 인격이 오늘날의 위정자들에게 비춰보면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2020-05-25

시간이 무서워질 때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며칠 전 전화기가 울린다. “선생님, 열무김치 담갔는데 갖다드릴게요.” “어머나, 아니에요. 제가 가야죠.” 내게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시는 이 분은 사실은 열 살 정도 언니뻘 되는 분이다. 집으로 가니, 곧 태어날 손주를 위해 뜨개 인형을 100개 정도 만들었다며 보여주신다.“선생님은 아직 시간이 무서운 거 모르죠? 내 나이 되면 시간이 제일 무서워. 시간 보내느라고 뜨는 거야.” 하시지만, 사실은 봉사 활동도 하고, 공부도 꾸준히 하는 분이다. 오래 기다린 손자라서 기쁜 마음에 열심히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무섭다’는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자녀들이 장성해서 분가를 하면 집이 휑해진다. 그만큼 할 일도 줄어든다. 그렇다고 돈을 벌거나 봉사활동 하기도 쉽지 않다. 친구와 수다 떠는 것으로 일상을 채우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지난 삶을 돌아보고 남은 삶을 잘 살고 싶은 자아실현의 욕구가 절실하게 올라오기 때문이다.요즘에는 50세 이상의 중장년들을 위한 사회교육기관이 생겨서 이런 욕구를 많이 채워준다. 이런 곳에서 인생이모작, 삼모작을 준비하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나이듦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공부와 일상 나누기를 같이 하는 것이 좋다. 정서적 연대감 형성에는 소소한 일상 나누기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 방문한 공방도 그런 곳이었다. 주인장은 출자자를 모아 사무실을 얻어 그들이 하고 싶은 강좌와 모임을 스스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오늘 갈비를 많이 쟀어요. 나눠 가실 분!” 하고 밴드에 올리면 “저요”, “저요” 금세 마감된다. 그렇게 공부와 일상 나누기가 함께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모임으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의욕은 없어 보인다.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무모한 것만은 아니지만, 인생 후반기에는 아무래도 버거워진다. 체력도 받쳐주지 못하지만, 나이듦을 수용하는 일이 시급해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자식만 바라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배우자와 지혜롭게 같이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죽음을 의연하게 준비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이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적 통찰과 정서적 지지가 필요하다. 그런 과제는 이웃과 함께 할 때 힘을 얻는다.이웃에게 손을 내밀지만 일방적 헌신은 아니다. 지나친 열정과 헌신 뒤에는 인정욕구와 보상심리가 숨어 있다는 것도 알아챈다. 나이가 들면 현실감각이 생겨서 시행착오가 줄어든다. 수익과 헌신 그 중간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잘 잡을 수 있게 된다.내게도 시간이 무서워지는 시기가 곧 다가올 것이다. 그동안 해온 인문학 공부와 생협 소모임 활동을 밑거름 삼아 지속가능한 ‘공부와 일상’의 이웃공동체를 꿈꾼다. 지적 허영도 쏙 빼고, 거창한 대의도 쏙 빼고, 밀실도 잃지 않으면서 광장도 만들어가고 싶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2020-05-25

융합가전 열풍

융합형 가전제품은 개별 제품을 한데 묶어 시너지를 내거나, 각기 다른 기능의 제품을 하나의 제품으로 새롭게 만든 가전제품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세탁과 건조를 함께 하는 세탁건조기, 정수기와 냉장고를 합친 정수기 냉장고, 가습기와 공기청정기를 합친 가습공기청정기 등이다.세탁건조기는 최근 아파트 주방과 발코니가 확장되면서 세탁과 건조를 위한 공간이 줄어드는 현상에 주목해 개발됐다. 보통 건조기와 세탁기를 위아래로 설치하는데, 이를 일체형 제품으로 만들어 공간 활용도를 높였다. 별도 받침대 없이 세탁물을 넣고 뺄 수 있고 필터도 손쉽게 관리 가능하게 만들어져 인기를 끌고있다.정수기 냉장고도 대표적 융합 가전이다. 삼성전자, LG전자, 위니아딤채는 일제히 올해 신제품 정수기 냉장고를 출시했다. 정수기와 냉장고를 따로 두기 보단 한 개 제품에서 구현해 주방 공간 활용성을 높인 게 특징이다. 가습기와 공기청정기 기능을 한데 합친 가습 공기청정기도 인기다. 대표적으로 LG전자, 다이슨 등이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로봇쿠커 역시 밥솥, 죽마스터같은 자동조리기 기능의 핵심들을 융합해 탄생한 새로운 융합형 가전이다. 쿠첸과 쿠쿠·휴롬·신일산업 등이 선보인 멀티쿠커도 대표 융합 가전이다융합 가전제품은 수익성도 높다. 일반 가전 제품보다 가격이 비싸 가전업체의 프리미엄 전략에 활용된다. 융합 가전 시장은 앞으로도 꾸준히 수요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소비자 라이프 스타일이 다양해지면서 보다 섬세한 기능과 편의성을 융합 제품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늘어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란 격언이 그대로 적용되는 분야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5-25

관계에서 보다 자유로워지기를… 청송 주왕암(周王庵)

거대한 바위와 가파른 절벽, 기암 단애라 불리는 바위 7개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서 석병산(石屛山)이라고도 불리는 주왕산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다. 불과 물, 시간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합작품으로 경관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가치도 높다.신비스런 계곡을 따라 걷는 탐방로는 완만하고 볼거리가 많아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다. 대전사에서 10여분 쯤 걷다 갈림길에서 우측 자하교를 지나면 운치 있는 돌계단이 나타나고 호젓한 오솔길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길은 아쉬울 만큼 짧게 끝이 나고, 바위협곡이 시작되는 지점에 주왕암이 보인다.대한불교 조계종 대전사의 부속암자 주왕암은 919년(태조 2년)에 눌옹이 대전사와 함께 창건했다는 설과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다. 이곳에 은거하였던 주왕을 기리기 위하여 주왕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창건 이후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기왓장으로 쌓아올린 담장 위 작은 돌멩이들이 운치를 더하는 오솔길은 가학루 앞에서 멈추고 만다. 끌리듯 가학루를 들어서면 우람한 바위 절벽 아래 아늑하게 절이 앉아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띤 건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석불좌상이다. 미소가 넉넉해 보이는 석불 앞에서 두 손을 모으지만, 목에 걸린 금빛 목걸이가 자꾸 눈에 거슬린다. 어울리지 않은 세속적인 장신구로 인해 석불의 신성함은 사라지고 호객하듯 격이 떨어져 보인다.착잡한 마음으로 높은 축대 위에 자리 잡은 나한전으로 오른다. 계단 주변을 금낭화가 허리 굽혀 불자들를 맞는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꽃말처럼 다소곳하며 지고지순한 자태에 암자는 환하다. 금낭화가 없었더라면 비탈진 계곡에 위치한 암자는 훨씬 음습하고 쓸쓸해 보였으리라. 금낭화로 인해 가파른 돌계단은 수미산을 오르듯 경건해진다.요사채에서 나오던 비구니 스님이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먼저 인사를 건네신다. 외진 암자를 지키는 바위 같은 분이시리라. 스님은 나한전을 들러 이내 주왕굴로 총총히 사라지고 그 뒷모습을 금낭화가 배웅을 한다. 짧지만 따뜻한 일련의 풍경들이 내 마음까지 밝힌다.적막한 산속에 비구니 스님과 금낭화의 아름다운 동거를 상상한다. 이른 새벽 법당에 불이 켜지면 금낭화도 눈을 뜨고 주왕암의 하루가 시작되리라. 날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깨달음을 얻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혼자서 가는 길이 멀고 힘들 때, 한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보듬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바위산에 앉아 있는 전각들처럼 진부한 삶을 택하지 않은 스님의 길 또한 고단했으리라. 쓸쓸한 바람벽에 피어나는, 귀밑 하얀 금낭화의 오염되지 않은 모습에서 스님은 서방의 정토를 보았을지 모르고, 금낭화는 아침저녁 스님의 예불 소리 들으며 순결한 꽃빛을 피워냈을지 모른다.인생은 수많은 관계와 관계의 연속이다. 관계 속에서 상처를 안게 되면 영혼은 고독해지기 마련이며, 그 상처 난 마음을 제대로 치유해주는 것도 역시 관계이다. 높다랗게 앉아 있는 산신각과 칠성각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내 주변을 돌아본다. 좋은 사람들도 많지만 요즘은 자연을 가장 든든한 벗으로 삼고 있다. 아무리 캄캄해도 자연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진분홍 복주머니 모양의 꽃을 단 금낭화가 허리 굽혀 사랑을 전하는데 느닷없이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무벤치에 앉아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불자가 아닌데도 자식들을 위해 난생처음 불전을 놓고 절을 했노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책무처럼 한평생 쏟아 붓고도, 어쩌면 제대로 쏟아 붓지 못해서 늘 미진하기만 한 그의 부정(父情)이 애틋하다.문도 없이 오두막처럼 짜여진 산신각과 한 사람만 받아줄 만큼 협소한 칠성각은 욕심이 없는데 인간의 마음은 끝이 없다. 내려오는 길에 나한전에 들러 백팔 배를 시작한다. 조선 후기 작품인 석가여래 삼존불과 영험하다는 나한들, 색감 고운 영산회상도까지 작은 법당에는 그윽한 시선들로 가득하다. 나 스스로 짊어지고 가는 관계에서 좀더 자유로워지길 기도한다.조낭희 수필가법당을 나설 때 절은 한결 편안하고 따뜻하게 보인다. 주왕굴에 가기 위해 협곡 사이로 난 철제 계단을 오르는데 스님의 독경소리가 낭랑하게 마중을 나온다. 당나라 때 주도라는 사람이 스스로 주왕이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패하자 주왕산으로 숨어 들어온 뒤, 주왕굴에 은거하다 굴 입구에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다 발각되어 신라의 마장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조금 전 인사를 나누었던 비구니 스님의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뒷모습이 보인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수를 닮은 스님 뒤에서 여성 불자 한 분이 쉬지 않고 절을 한다. 당신을 따르겠다는 금낭화가 다시 보이고, 더러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연민으로 다가올 때가 있어 나도 절을 시작한다.다리가 후들거린다. 스님은 꽤 긴 시간 예불을 드리고 폭포수는 하염없이 떨어진다. 협곡을 빠져나오는 등 뒤로 스님의 독경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2020-05-25

다가올 질문의순례길에 나선 이의쓸쓸한 뒷모습

“자 어디로 갈까…. 네트는 광대해”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1995년 영화 ‘공각기동대’에서 인형사와 합체한 쿠사나기 소좌는 의체만을 남긴채 광활한 네트(일종의 네트워크) 속으로 사라진다. 작품 속 2029년의 일이다.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회. 인간의 생애는 타고난 육체의 노화와 함께 그 속에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는 정보의 네트워크 접속으로 연명된다. 즉, 죽는 것이 아니라 잠시 사라질 뿐 네트로 사라졌던 정보가 언제 어디서 어떤 의체를 통해 돌아올지 모른다.부활과 재탄생이 아닌 등장과 퇴장의 삶(?)을 반복하는 세상. 전세계 각국의 정보망을 오가며 주가조작, 정보조작, 정치공작과 테러 등을 일삼던 해커 ‘인형사’를 제거하기 위해 임무에 뛰어들었던 공안9과 ‘공각기동대’의 사이보그 쿠사나기는 인형사와 합체 후 광대한 네트 속으로 ‘퇴장’해 버린다.일부러 공각기동대에 체포된 인형사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다”고 말한다. 무엇이 그를 생명체로 규정할 수 있으며, 경계없는 네트의 세상 속에서 정치적 망명은 어떻게 규정되어 질 수 있는가. 근원을 알 수 없는 정보의 바다에서 생성된 정보의 집합체를 ‘생명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2029년 쿠사나기 소좌의 퇴은 존재에 대한 물음과 생명체의 규정이라는 의문을 남긴채 끝을 맺었다.쿠사나기가 퇴장한 2032년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영화 ‘이노센스’에서 형사 바토(대부분의 신체를 기계화한 사이보그)는 온전한 인간(?)인 도그사와 파트너를 이뤄 공안 9과에서 각종 사이버 테러와 로봇과 관련한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신체의 대부분을 기계화한 바토가 인간이라는 증거는 뇌의 일부분과 3년 전 네트 속으로 사라진 쿠사나기에 대한 기억뿐이다.바토에게 고스트(영혼)가 없는 인형(로봇)이 주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배당되고, 인형은 “도와줘요, 도와줘요”라고 속삭이다가 자살을 택한다. 인형의 ‘자살’은 극한에 몰린 인간의 최종 의지의 표현이라는 생각에 충격을 던진다. ‘공각기동대’에서 질문을 던지고 끝을 맺었던 영화는 ‘이노센스’에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그 질문들이 향하는 곳은 한 지점이다. 가까운 미래,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정보’와 ‘영혼’ ‘기억’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에 탄생하게될 ‘존재’를 어떻게 규정지을 것이며, 삶과 죽음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나는 나의 의지로 쌓아 올린 정보의 온전한 상태인가, 아니면 어느 순간 조작되고 오염된 정보를 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인간의 희미한 기억만을 간직한 사이보그 쿠사나기와 바토는 각각 두 편의 영화에서 최종적인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다다른다. 퇴장할 것인가 남을 것인가, 퇴장 후 다시 등장할 것인가. 쿠사나기가 퇴장 후 무대에 남은 바토는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말처럼 “인간이라는 존재를 묻는, 지옥 순례의 여행에 나서는 인물”이 되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무대에 서게 된다.바토의 여정을 담은 ‘이노센스’는 ‘공각기동대’보다 화려하고 풍성하며 친절해졌다. ‘공각기동대’의 차갑고 냉정했던 분위기는 ‘이노센스’에서 ‘상실’과 퇴장하지 못한 자의 ‘쓸쓸함’이라는 감정을 담아 전개된다. 친절이라고 하지만 전작에 비해 ‘다소’일뿐 전개와 그 속에 담긴 질문들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바토, 잊지마! 당신이 네트에 접속할 때마다 내가 반드시 당신 곁에 있다는 걸” 잠시 의체를 빌려 등장했던 쿠사나기가 다시 퇴장하며 던진 말이다. ‘다소’ 위안과 상실을 지울 수는 있겠지만 전편에서부터 계속해서 이어졌던 질문으로 향하는 직접적인 열쇠가 되지 못한다. 여전히 ‘지옥의 순례’는 퇴장하지 못하고 남은 자의 몫이고, 그 순례의 여정에 ‘그리움’만 더해질 뿐이다.인간의 뇌에 담긴 정보를 디지털화해 컴퓨터 저장파일처럼 다룰 수 있을 때, 영화처럼 ‘전뇌화 기술’을 통해 고스트의 과정이 가능한 시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리’울지 모른다. 내 안에 있는 이가, 나를 흔드는 누군가가 그대인지, 0과 1의 신호일 뿐인지. 퇴장하지 못한 이의 질문이 가득한 쓸쓸한 생이다.*영화 ‘이노센스’는 네이버와 구글플레이, IPTV에서 감상할 수 있다./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2020-05-25

인고의 계절을 함께 나누며 견디자

미국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8만 명을 넘어섰다. 이번 사태로 3천300만 명이 실업보험급여를 신청하였고 4월 실업률은 14.7%를 기록하였다. 이는 공장에서 감염이 발생하거나 소비자 수요가 감소하고 공급망이 단절되는 등 다양한 사유로 미국 생산활동이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4월 광공업생산은 전월보다 11.2%가 감소하였는데 이는 통계를 시작한 1919년 이후 101년 만의 최대 낙폭이다. 철강이 20.4%가 감소하는 등 전 업종이 타격을 입었지만 그중 자동차는 무려 71.7%나 감소하였다. 미국의 생산활동 전반을 파악할 수 있는 제조업 설비가동률은 61.1%에 그쳤다. 이는 1948년 통계작성 이래 72년 만의 최저수준이다. 앞으로 미국 생산활동은 코로나19의 확산 방지를 위한 규제조치가 5월 이후 단계적으로 완화될 경우 조금씩 회복은 될 것이다. 하지만 안전한 치료제나 백신이 개발되고 충분한 물량이 생산되어 팬데믹이 종식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결국, 상당 기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경제활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생산, 고용, 소비의 회복도 생각만큼 빠르게 진행되기는 어려울 공산이다.미국만이 아니라 지금 전 세계가 비슷한 상황이다. 문제는 코로나19 사태로 급증한 실업이 먼저 소비를 냉각시키고, 기업의 매출과 수익성이 격감하면서 이와 연동되는 금융시장에서 해당 기업 주가가 하락함에 따른 금융 경색이 다시 이와 관련된 다양한 균형들을 무너뜨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위기의 영향이 미국의 생산통계에서도 나타났듯이 20세기 전반의 대공황수준 이상일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금융부문의 위기는 재정출동 등을 통해 시장이 안정화되면 그때까지 전혀 문제가 없던 실물경제가 곧바로 정상화 단계를 밟아 위기를 수습시켰던 당시 상황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당장 실물경제에서 촉발된 실업이 수요증발을 일으키고 생산이 정체되면서 원활하게 흐르던 자금을 경색시키고 금융시스템까지 영향을 미쳐 신용을 경직시키고 다시 그것이 실물경제를 냉각시키는 악순환을 일으키는 위기인 것이다.세계 각국의 정상들은 누구나 V자 회복을 기도하고 있겠지만 앞으로 제2, 제3의 감염이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서는 지금 열기 시작한 문을 또 닫았다가 여는 것을 반복할 가능성도 있다. 적어도 강력한 백신이 등장하여 이번 전염병 사태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는 한 지금 전 세계 정부가 V자 회복을 위해 엄청난 돈을 뿌리고는 있으나 이 사태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거의 동시에 재택근무와 공장, 사업장의 조업 정지 조치가 이루어지게 되면 경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된다. 무엇보다도 앞날이 불투명한 이유는 현재 과연 어느 나라, 어느 산업이 심신미약에 걸린 세계 경제를 이끌고 나갈 엔진이 될 것인지 모른다는 데 있다.당장 미국만 하더라도 공장 가동부터 시급한 실정이다. 중국도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와 같은 대규모 인프라 투자는 기대하기 어렵다. 일례로 중국의 경우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추진하는 동안 해당 노선 주변국에 대한 대출액이 약 1천35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여기에서도 문제 발생의 소지가 없지는 않다는 지적이다. 특히 지부티는 중국에 대한 채무가 GDP 대비 80% 수준에 이르며, 에티오피아는 20%, 파키스탄은 7%, 남아프리카공화국은 4% 등 작은 규모는 아니다. 지난번 G20에서 이번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하여 가난한 나라들의 채무상환을 2020년 말까지 연기시켜 주기로 조정하였지만, 당시 중국은 일대일로와 관련한 채무상환은 그 조치에서 빠지길 원했다. 그만큼 중국도 사정이 만만치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일본이나 유럽이 대체 엔진이 될만한 힘을 가지고 있을 리도 없다. 신흥국인 터키,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도 달러화 표시 민간채무의 원리금 상환이 늦춰지는 상황이다. 이번 코로나 위기로 전 세계가 동시다발적인 몸살을 앓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중국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미국에 대해 이미 지난번 일시적이나마 휴전에 합의하였던 미중 무역전쟁의 불씨를 다시 지피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굳이 미국에 양보할 필요가 없었다는 강경파가 이번 사태로 힘을 얻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양국 간에 무역전쟁이 재개된다면 그 영향권에 놓일 우리로서는 한순간도 방심할 틈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올해 11월 재선을 목표로 101년 만의 최대 하락 폭을 기록한 자국의 생산 특히 자동차, 철강 등의 회복을 위해 강력한 조치를 발동할 수도 있다. 미국의 생산활동을 재개시켜 실업률을 낮추고 공장을 정상화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처방전은 수입 자동차, 수입 철강 등에 대한 방화벽 설치다. 이미 지난 수년간 관세장벽, 쿼터 물량축소 등으로 힘들었던 우리 지역의 수출시장은 미국이 나서고 유럽 등지가 뒤따른다면 더욱 그 문이 좁혀질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그동안 인내해왔지만, 이제부터는 그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인내를 감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포항경제는 철강으로 시작해서 철강으로 끝난다. 포항경제를 끌고 갈 엔진은 철강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최근 지역 철강 대기업이 감산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부에서는 대기업이 그러면 지역경제에는 큰일이니까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지역 기업들은 위기경영 아니 전시경영체제에 돌입해야만 한다. 아직은 여력이 있다고 방심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인고의 시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상황인 만큼 미래의 도약을 위해 지금부터 선제적으로 감량하고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데 힘써야만 한다. 지역 대기업은 해외의 정치 경제 정세에 대한 정보수집도 가능할 것이기에 사실 큰 걱정은 없다. 문제는 해외시장까지 살필 수 없어 자기 주변만 보게 되는 지역 중소기업이다. 혹시라도 중소기업 경영자들 가운데, 우리나라가 안정화된 것만 보고 곧 예년 수준으로 돌아갈 것이라 낙관할까 걱정이다. 일자리를 잃은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무작정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행동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수도권이라고 일자리가 넘치지는 않는다. 잘못하면 부모의 경제적 부담만 높여 정작 필요할 때 손을 벌릴 수 있는 자신의 기반마저 어렵게 할 가능성이 크다. 집에서 자기계발에 정진하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비상사태에서는 인내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이런 때일수록 노사 간 대화와 소통은 큰 힘을 발휘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여 정부 정책, 금융 행태, 기업 행동, 소비 수요, 노동 수급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음을 지역의 경제주체 모두 주시해야만 한다.결국, 가장 중요한 점은 지역 전체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나부터 양보하려는 생각, 옆집이 죽고 나만 살아났을 때와 옆집도 겨우 나도 겨우 살아났을 때 지역 전체의 이익은 후자가 크다는 점을 서로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 되는 해다. 마치 6·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포항이 다시 일어났을 때처럼 우리 모두 앞은 불투명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옆 사람, 옆 기업과 손잡고 같이 걸으면 불안감은 나눌 수 있다. 앞으로 다가올 인고의 계절을 함께 하며 나누고, 견디자./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김진홍

2020-05-24

재난생존에서 살아남는 우리집 안전대책

최미경동화작가열어둔 창으로 이른 아침의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선다. 희미하게 새소리가 들리고 나는 커피를 끓인다. 첫째 아이는 소파에 푹 파묻혀 어제 읽다 접어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뒤적이며 사랑에 대한 몽상에 빠져들고 있다. 거실 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려있던 둘째는 팔이 저린지 천장을 향해 바로 누워선 무언가 읊조리리는 듯 하다. 그러다 기억이 나질 않는지 머리 위에 올려진 A4용지를 끌어와 그 안에 적힌 김용택의 동시‘선생님도 울었다’를 다시 가만가만 읽어 내려간다. 첫째 발치 근처에 있던 셋째가 손에 들고 있던 트리나 폴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을 덮고 좌탁 앞에 앉아 길고 뚱뚱한 원을 스케치북에 그리고는 그 안을 노오랗게 채운다. 그 길고 뚱뚱하고 노오란 원은 줄무늬 애벌레가 만난 노랑 애벌레인 듯하다. 나는 한 손에는 커피가 담긴 머그잔과 다른 한 손에는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을 들고 햇살이 내려앉은 1인용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리고 오롯이 탐독한다. 읽는다. 읽어낸다. 아, 책장이 소리 없이 넘어간다.“엄마, 배고파.”돌아보니 어제저녁 먹었던 짜장면 자국이 아직 입가에 남아 있는 둘째가 식탁을 닦고 있는 나를 흔들고 있었다. 그렇다. 그렇게 나의 상상놀이는 끝났다.우리 집엔 괴테를 아는 첫째도 동시를 외우는 둘째도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셋째도 없다. 그리고 나를 위한 커피타임은 더욱 없다. 대신 눈만 뜨면 컴퓨터를 켜는 첫째와 눈 뜨고 있는 모든 순간 먹을 것을 찾는 둘째와 잠들기 전까지는 뭘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셋째가 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그동안 함께 하지 못했던 미안함의 시간들을 사랑과 애정으로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보이지 않았던 것을 속속들이 지켜보게 되면서 미안한 마음은 분통 터지는 마음으로 변해 갔다. 조그만 일에도 목소리가 커지고 쉽게 짜증을 내는 나는 그런 엄마였다. 아니다, 나는 본래 일하는 엄마 그래서 늘 바쁜 엄마였다.항상 아이들에게 고마웠고 언제나 아이들 편이었다. 그런 나의 엄마 가면이 벗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동안 내가 가꾸어왔던 엄마 가면에는 아이들이 바라봐주길 바라는 얼굴도 있고 남편이 나를 바라봐주길 바라는 얼굴도 있고 남자아이 셋을 키우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라고 바라봐주길 바라는 사회적 얼굴도 있다. 그것뿐이겠는가. 알면서도 숨기거나 알지못하는 사이 포장 되었던 가면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 중 하나의 가면이 벗겨졌을 뿐인데 내 민낯에 내가 더 당혹스러웠다.“엄마, 배고파.”다시 돌아보니 셋째도 둘째 옆에 서서 나를 흔들고 있다. 그렇다. 나의 실전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라면 하나를 끓여내도 “엄마는 어떻게 라면도 이렇게 맛있게 만들어?”라는 둘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엄마는 대체 못 하는 게 뭐야?”라고 덧붙이던 셋째, “엄마니까 이 모든 게 가능하지.”라고 마무리를 짓던 첫째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집안전대책 엄마메뉴얼이 시급하다.

2020-05-24

사람경찰, 기계경찰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코로나이후 4차 산업의 기재들이 대폭 늘어날 것 같다. AI, 블록체인, 로봇, 드론 등등. 세상이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다. 재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면 디지털 장애인이 될까 걱정이다.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면 컴맹이라고 했다. 디지털 기기가 도처에서 사람의 일상을 제어하는 오늘날엔 자칫하다간 ‘디지맹(디지털장애)’이 될 지도 모른다. 햄버거 가게에서 겪은 일. 종전처럼 주문을 하러 종업원에게 갔다가 기계한테 가라는 타박 아닌 타박을 당했다. 키오스크를 이용하라는 거다. 사람에게 거절당하고 기계를 상대하게 되었다. 얇은 널빤지 같은 화면 가득 형형색색의 상품사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앞서 줄지어 선 젊은이들이 빠른 눈 놀림으로 상품사진을 선택하고 이어지는 기계의 지시사항을 컴퓨터게임 하듯이 빛의 속도로 손가락터치를 하며 주문을 했다.어정쩡하게 줄선 상태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지 고민하는 사이 차례가 돌아와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하는 눈빛으로 화면의 사진과 글자를 읽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진 뒤 연인의 손을 처음 잡는 것처럼 긴장과 설렘으로 뜨덤뜨덤 기계에 손가락을 갖다 될 즈음. “아저씨! 좀 빨리 하세요. 제가 해드릴까요?” 라고 훅 치고 들어오는 젊은이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귓구멍을 막았다. 놀람과 무안함에 흠칫 뒤로 물러섰다. 이후 주문한 햄버거가 어떻게 내 앞에 놓였는지, 목구멍으로 넘어갔는지 알거나 느끼지도 못한 채 허둥거리다 서둘러 햄버거 가게를 나왔다. 허겁지겁 먹은 탓인지 아니면 빛의 속도로 변해가는 시대의 ‘부적응자’가 된 기분 탓인지 그날 오후 내내 속이 쓰리고 마음이 불편했다. 인간을 위해 개발되고 발전하는 4차 산업시스템이 혹시 나같이 소외되는 인간을 양산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4차 산업혁명의 결과물이 치안활동에도 획기적인 효율성을 이끌 것 같다. 장난감 비행기놀이 같았던 것이 ‘치안드론’이라는 이름으로 실종자수색, 행사경비, 심지어 테러범저격 같은 활동까지 하고 있다. 안전을 위한 기계의 발전은 인류에 유익한 것임은 자명하다. 머지않은 장래에 기계경찰도 등장할 것 같다. 최고성능 인공지능으로 작동하는 로봇경찰, 충전과 업그레이드만 시키면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이 시민의 안전을 완벽하게 책임질 것 같다. 감히 인간경찰이 경쟁할 엄두가 안 날 것이다. 시민은 기계경찰로 인한 최고의 만족감을 기대하며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기계경찰의 경쟁력에 밀릴지 모를 인간경찰의 일자리가 걱정이다. 인간경찰의 생존비법이 시급하다. 주문이 어려워 우물쭈물 거리는 디지맹에게 “제가 직접 주문받을게요.” 라고 따뜻하게 다가오는 종업원이 있다면 디지맹도 햄버그 가게에 가는 일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다시 그 가게를 찾고 싶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쭐되는 기계경찰을 이기는 방법은 햄버그 가게 종업원 말과 같은 사람의 온기가 아닐까?“ 범인 1시간 내 잡는다! 디비디비…. 띠띠, 철커덕 철커덕….”(기계강력형사)“ 아이구 할머니, 얼마나 놀라셨어요!. 이놈의 소매치기 놈들 그냥….(사람강력형사)”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2020-05-24

기부문화의 위기

미국 최초의 근대 자본가로 손꼽히는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는 미국 기부문화의 선구자로 통한다. 그는 “인생의 전반기는 부를 획득하는 시기이고 후반기는 부를 나누는 시기여야 한다”고 말한 인물이다. 그는 실제로 그의 말대로 실천한 기업가로 기억되고 있다.미국과 영국에 3천개의 도서관을 건립하고 미국의 과학발전을 위해 카네기 연구원을 설립했고 박물관 등도 지었다.미국은 세계에서 기부문화가 가장 발달한 나라다. 2017년 한해 미국인이 기부한 금액이 4천100억 달러(약 462조원)로 당시 우리나라 예산보다 많았다. 빌 게이츠나 마크 저그버그, 워렌 버핏 등 세계적인 기부천사가 수두룩하다.미국의 기부문화가 발달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특히 기부금 운용의 투명성을 우선 손꼽을 수 있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에서 고소득층은 기부의 이유로 자선단체에 대한 신뢰를 최우선으로 들었다 한다. 미국의 자선단체는 남이 준 돈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통감, 모든 돈의 사용에는 반드시 사회적 동의를 얻는다.이에 반해 우리나라 사람은 기부를 안 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로 기부단체에 대한 불신을 손꼽고 있다. 2016년 어금니 아빠 사건과 2017년 새희망 씨앗 기부 사기사건 등으로 드러난 기부금의 횡령은 불신의 골을 키웠다. 통계청에 의하면 2019년 1년간 기부경험이 있다고 조사된 사람의 비중이 25.6%로 8년 전(36.4%)보다 되레 낮아졌다.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돕기 위해 설립된 정의기억연대와 그 단체의 윤미향 전 이사장을 둘러싼 기부금 횡령의혹이 점입가경이다. 기부금 용처만 밝혀도 끝날 문제가 불필요한 정치적 소모전으로 치달아 국민을 짜증나게 한다. 논란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기부문화는 후퇴할 뿐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05-24

통합당, ‘국민’ 편에 서라

안재휘 논설위원“개념이란 우리가 이것을 실천적으로 검증할 수 있을 경우에만 옳은 것이고, 행동의 결과로 나타낼 수 없으면 무의미하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 창시자인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정의다. 실용주의 정신은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능동적인 실천을 통해 미래를 지향해 가는 하나의 원동력으로서 극대화된다는 논리다. 실용주의란 투철한 ‘현실 인식’과 ‘실천력’, ‘미래비전’을 함께 수반할 때 가치가 있다는 얘기쯤으로 의역될 수 있을 것이다.이틀간의 21대 총선 당선자 워크숍을 마친 미래통합당이 ‘실용정당’을 표방했다. 총선 참패로 최악의 위기 상황을 맞고 있는 통합당은 긴 논란 끝에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기로 하고, 머뭇대던 미래한국당과의 통합도 29일까지 매듭짓는 것으로 결정했다. 주호영 원내대표가 발로 뛰고, 다수의 초재선 당선자들이 힘을 합쳐 밀어준 결과로 해석된다.워크숍이 끝난 뒤 배현진 원내대변인이 발표한 성명에는 중요한 대목이 많다. 우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눈에 띈다. “언제나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해 싸우겠다”는 선언도 시원하게 들린다. “익숙했던 과거와의 결별 선언을 한다. 오직 국민만 있고 국민 눈높이에 맞는 실용 대안 정당을 만들겠다. 대안과 혁신으로 가득한 미래만 있다”는 맹세도 뜻 깊이 들린다.실용주의 창시자 퍼스가 말한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일단 첫 번째 항목인 ‘현실 인식’ 측면에서는 꽤 많은 성찰이 이뤄진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동안 좀처럼 탈출하지 못했던 ‘꼴통보수 감옥’에서 비로소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든다. 부디 선언문의 약속 조목조목처럼 확 달라지기를 성원한다. 하지만 통합당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리 다사롭지 않다. 형편없이 기울어진 운동장 아래쪽에서 정말 그 모든 걸 실천해낼까 하는 의심도 깊다.실천력을 담보해낼 응집력과 지혜는 튼튼한 기초체력에서 나온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히딩크는 모든 파벌의 넝쿨들부터 한칼에 잘라냈다. 한동안 기술훈련 대신 기초체력을 키우는 고강도 훈련만 시켰다. 경기에 거듭 대패해 ‘오대빵’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그래도 히딩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프로그램대로 밀고 나갔다.월드컵 본선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진가는 드러났고, 전무후무의 ‘4강 신화’를 기어이 이룩해냈다.통합당은 히딩크의 한국축구 월드컵 4강 신화에서 힌트를 찾을 필요가 있다.권력자들끼리만 주고받는 게임의 법칙부터 깨부숴야 한다. 이제 더이상 낡은 ‘권력’ 편에 서면 안 된다. ‘국민’ 편에 서서 국민이 듣고자 하는 목소리로 국민을 설득하는 기초능력부터 키워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공리공론의 늪에서 탈출해야 한다. ‘실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현실 인식’은 실용이 아니다. ‘미래비전’이 없는 ‘실천력’ 또한 실용의 범주 바깥에 있다. 통합당의 미래는 비로소 실험실에 있다.

2020-05-24

도시 기능 재활성화·도시 경쟁력 강화

김학동 예천군수예천은 지금 활기찬 원도심으로 변모하기 위해 지금까지 이색조형물과 6070을 테마로 한 벽화가 있는 예천 맛고을 문화의 거리, 한천 고향의 강, 시가지 주차장 확보, 상가 간판정비, 남산공원 폭포 및 산책로 등 문화와 쉼이 공존하는 도시로 변화를 꾀했다.하지만 도청 신도시로 인구가 몰리면서 예천읍 원도심에는 경기가 위축되고 있어 오랜 역사와 전통 먹거리 등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예천읍을 활기 넘치는 거리, 사람이 찾아오는 곳으로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남겼다.이에 쇠퇴한 구도심을 혁신 거점공간으로 변모를 위해 주차환경 개선을 위한 공영주차장 확보, 예천읍 원도심 일방통행 교통체계 구축 기본구상, 도시재생 뉴딜사업 등 3대 핵심과제로 정하고 도시기능 재활성화와 도시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첫째, 주차환경개선을 위한 공영주차장 확보이다. 부족한 주차공간으로 인해 생활불편이 증가하고 불법 주·정차로 차량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며 교통사고 발생으로 주민 불안이 가중되는 등 군민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부정적 지역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예천읍 시가지 예천교육지원청 인근 외 2개소, 상설시장 주변 3개소 총 6개소 150면 정도를 조성해 주차여건 개선으로 맛고을 문화의 거리 및 전통시장 이용객의 접근성을 높이고 주차난 해소를 위해 예천교육지원청 주변 주차장을 포함한 3개소는 보상 등 진행 중이고 상설시장 주변 주차장 외 2개소는 행정절차를 진행해 추진한다.특히, 지난해 한천길주차장(예천교~동본교 구간)조성을 위해 한천 제방사면에 구조물을 설치해서 주차공간을 만들어 기존 59면이던 주차구역을 164면으로 조성해 예산절감 및 효율화 사례로 2019 시민단체 선정 최우수 지방자치단체 예산효율화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둘째, 예천읍 원도심 일방통행 구축이다. 원도심의 불법주차로 인한 주차난이 가중되고 교통 혼잡이 심해 안전한 보행 여건조성, 주차공간 확보 등 교통환경 개선뿐만 아니라 지역경제 활력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한다.일방통행 구상안은 예천읍 원도심 동서 간선가로축 전구간인 시장로와 효자로 구간(굴머리~한전앞 삼거리) 2개 도로 2.8㎞를 일방통행 도로로 변경해 인도확장 및 주차공간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른 효과는 혼잡구간의 원활한 차량소통과 주차 및 보행 공간을 확대해 교통안전은 물론 가로경관 개선으로 군민 편익을 최대로 하는 사람중심 교통정책의 실현이다.원도심 일방통행체계 기본구상 용역을 추진중이며 향후 교통정책 전문가 토론회, 주민설명회, 관련기관 협의 등 주민의견을 다각적으로 수렴해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 최상의 일방통행 체계를 구축해 나간다.셋째, 원도심 도시재생 뉴딜사업 공모 준비다. 신도시 조성으로 교육여건과 주거환경이 좋은 신도시로 젊은층이 빠져나가면서 상권도 이동하고 예천의 심장이었던 원도심은 활기를 잃고 지역경기가 침체되는 등 공동화현상이 심각한 상황에 처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침체된 원도심의 기능을 되살리고 지역 내 유·무형의 자원을 활용한 특색 있고 경쟁력 있는 도시로 변모하기 위한 도시재생사업을 군정 최우선 과제로 정하고 공모 준비로 국비확보에 전력을 쏟고 있다.도시재생대학을 꾸준히 열어 지역주민의 관심과 자발적 참여 기회를 확대해 나가면서 주민과 행정의 중간에서 도시재생 전반을 지원하는 도시재생지원센터를 운영 중이고 행정협의회가 협업을 통해 사업 연계 및 조정, 결정 등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시재생 활성화계획(안)은 역사·문화 전시관과 도시재생지원센터를 설치하고 남본시장은 진입로 개설과 이용객 쉼터, 농산물 전시·판매시설을 마련하는 한편 상설시장 인근 공공임대상가와 복합공영주차장 등 지역특화 거점시설을 설치하고 구)119안전센터 주변에는 장난감도서관 및 돌봄센터, 문화쉼터 등 부족한 생활SOC 시설을 확충한다는 계획이다.예천군은 원도심 공동화 현상을 극복하고 신도시와 상생 발전할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도시재생 뉴딜사업, 시가지 주차난 해소를 위한 주차장 확보, 일방통행 교통체계 구축 등 지역경기 활성화의 돌파구를 찾아 지속가능한 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한 도전은 오늘도 진행형이다.

2020-05-24

내 삶의 밀푀유

사십 년 넘게 일기를 썼다. 매일매일 성경 한 장을 읽고, 한 구절을 기록하고 잠시 기도하는 걸 몇 년째 계속 했다. 오래 쌓은 시간은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지진이 났을 때 무엇을 챙겨서 나가야 하나? 친구는 두 아이의 어릴 적 앨범을 들고 뛰쳐나갈 거라고 했다. 가까운 경주에 경고장처럼 지진이 나고 다음 해 빚쟁이 쳐들어오듯 포항에 큰 지진이 났다. 그 순간에 집에 머물지 않아서 무얼 챙겨야 하나 고민도 필요 없었지만 이제는 친구처럼 나도 대피용 작은 배낭을 챙기기로 하고, 무얼 넣어야 하나 생각했다. 어릴 적 아이들 사진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이니 몇 장 골랐다. 그 다음은 뭘까, 차곡차곡 모아 간직해온 일기장이 떠올랐다.40년 전에 쓴 일기장을 꺼냈다. 표지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꽃바구니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새마을 일기’ 라는 제목이 시대가 언제쯤인지 짐작하게 만든다. 6학년 2반 42번이었던 내 일기장이다.1981년 6월 27일 토요일 날씨 흐림. 아침인사(0), 저녁인사(0)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했는지도 기록에 남겨야 했나보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썼다. 같은 반 친구 수미가 쓴 쪽지편지로 인해 찬호, 시열이, 세광이와 벌어진 사건과 아이들 표정을 자세히 묘사했다. 국어, 자연, 사회, 산수 시험을 치던 날, 인숙이네 토마토 밭에 갔던 일, 국사 시간에 선생님이 예습 검사를 하셨고 숙제를 하지 않았던 나와 친구들을 때렸고 다 한 아이들의 이름은 칠판에 적으셨다. 언니가 수박을 좋아해 내가 수박돼지라 불렀고, 남학생과 여학생으로 나눠 야구경기를 해서 진 것이 억울해 강가에서 몇 날을 연습을 하기도 했다.지금은 빨간 날이 아니지만 그 해 제헌절은 공휴일이어서 외갓집에 다녀왔고, 성의 상품화라는 이유로 중계하지 않는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를 그때는 텔레비전에서 중계하기도 했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들이 누렇게 변한 일기장을 타고 2020년 봄으로 시간 여행을 왔다.초등학교부터 사춘기 중학생의 방황과 여고생의 고민이 한 장 한 장 포개져 있다. 대학노트에 적은 일기장은 아르바이트하며 어려웠던 시절에 마음을 털어놓던 친구였다. 일기장마다 첫 페이지에는 무슨 날에 누가 선물한 것인지, 마지막 장에는 친구들의 주소록과 생일을 음력으로 또박또박 기록했고, 그 옆 장에는 소망을 적는 곳도 있어서 해마다 바뀌는 내 꿈의 변천사도 알 수 있다.오래된 일기장을 넘기다 보니 손에 세월의 먼지가 까맣게 묻어나온다. 살며시 넘기는데도 출판사 이름이 적힌 겉지가 바스러져 아치럽다. 스물네 권의 책으로 묶인 추억의 밀푀유, 사이사이에 쪽지 편지가 껴 있기도 하고 그 시절의 영수증이 해사하게 웃으며 튀어나와 자꾸만 내 손목을 끌어 그 시절로 데려 갔다.김순희수필가그 일기 중 어느 날에는 선생님이 빨간 볼펜으로 한 문장에 밑줄을 긋고 빨간 도장도 찍혔다. 숙제장과 시험지에 선생님이 그려준 빨간 동그라미를 받으려고 억지로 착하게 굴었던 내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선생님은 그날 자신은 모르겠지만 중요한 일을 하나 해내고 있었다. 일기장에 ‘참 잘 했어요’라는 메모로, 또 선생님 이름의 목도장으로 내 삶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준 거였다.일기장은 내 어린 시절 기록부터 차곡차곡 쌓아 온 천장이 넘는 시간의 이파리들이다. 천 겹의 잎사귀라는 뜻의 ‘밀푀유’는 밀가루반죽을 여러 겹으로 층층이 쌓아 바삭하게 구운 프랑스식 과자이다. 밀푀유처럼 바스락거리는 일기장을 넘기며 추억을 씹다보니 온몸이 녹진해진다.지금은 종이가 아닌 컴퓨터에다 오늘의 흔적을 남긴다. 블로그에 사진까지 더해 8년 동안 쓰다가 스마트폰을 장만한 후에는 카카오스토리로 일기를 쓴다. 이렇게 무엇을 써서 간직하는 것은 미래에 나를 위한 빨간 동그라미를 크게 그리는 작업이다.

2020-05-24

한국 때리면 저절로 방역 되나?

코로나19가 대유행을 하면서 ‘U 선생’들 가운데 한일 관계를 말하는 채널이 부쩍 늘었다. ‘애국주의’에 호소하는 방송들이다. 나라 사랑 열정에 불을 붙이는 데 일본 비판만큼 쉬운 방법이 없다. 누구라도 쉽게 ‘구독’과 ‘좋아요’에 손이 가 닿을 테다.덕분에 요즘 일본의 코로나19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다. 이 U선생들이 마치 올림픽 경기를 중계하듯 한일 간의 코로나19 상황을 비교해 주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렇게 자주 일본 사정을 접하다보니 아베라는 일본 아저씨를 자꾸 만나게 됐고, 이윽고는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버렸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고나 할까.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라는 자가 이웃 나라와 국민을 향해 대놓고 온갖 마타도어를 일삼다니 말이다.일본 방역에는 한없이 게으르고 무능력할 뿐 아니라 온갖 은폐, 축소를 밥먹듯 하는 아베 아니던가. 그런 주제에 티비 앞에 나와서는, 긴급사태를 해제하더라도 일본은 한국처럼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자기 국민들을 점잖게 ‘훈계’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경솔한 저들과는 다르지 않냐고 말이다. 이태원 집단 감염 사태가 그렇게도 반가웠던 모양이다. ‘친절한 금자 씨’가 뭐라고 했던가. 아저씨, 너나 잘하세요. 그 넓은 안면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그 마스크나 좀 어떻게 해보시죠.그 자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참 그렇게 약속도 안 지키는 족속인 모양인데, 그런 한국인들이 2011년 3월 11일 도호쿠 대지진 때는 재난 당한 일본인들을 위해 천억 원이나 성금을 보냈더란다. 정말 그랬었나? 그렇다면 이런 바보천치들이 있나. 사실을 말하면 그때 유튜브로 지진, 해일 장면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일본인들 또한 다 귀한 생명을 받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니던가.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일본 가 있던 조선인들은 살육 당하고 살육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 어둡고 괴로워라, 그 캄캄한 어둠 나날.이제 나도 아베와는 다른 도그마를 하나 넌지시 제출해 보련다. 한국인들은 약한 이들을 보면 돕지만 일본인들은 아예 짓밟으려 드는 족속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 좋은가? 진실이라고 생각되나?사실, 우리는 아베의 마타도어를 논박할 수 있는 근거를 역사적으로 정말 얼마든지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인들은 아베 류의 식민주의적 거짓말을 논박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아베 씨, 우리는 당신들 얘기 따윈 아무 관심도 없소. 어디 그 비뚤어진 입으로 맘대로 떠들어 보시구랴. 그리고 말한다. ‘좋은’ 일본인들과 함께. 아베 씨, 한국을 때리면 일본은 저절로 방역이 됩니까? 그 시간에 뭔가 그럴 듯한 대책을 좀 마련해 보시지요.아베, 침묵. 그의 마스크가 성능이 너무 좋은 모양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5-21

미래의 기대치를 높여야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포스텍 교수였다가 아주대 총장으로 가신 박형주 아주대 총장 칼럼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현재까지 업적과 미래의 성공확률과를 비교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A와 B가 만원씩을 내고 동전 던지기 게임을 한다고 상상해 보라. 동전 앞면이 나오면 A가 1점을, 뒷면이 나오면 B가 1점을 얻는다. 총 7점을 먼저 획득하면 상금을 다 가지고 가는 게임이다. 운이 좋다면 내리 7번을 이기고 주어진 상금을 가지고 갈 수도 있다. 두 사람이 경쟁하면서 A가 5점을 얻었고 B가 3점을 얻었는데, 귀가할 시간이 돼서 게임을 중단하게 되면 복잡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상금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까? 회계학의 대가인 파치올리는 현재까지 얻은 점수대로 5대3의 비율로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이것이 공정한 배분일까? 지금까지의 업적을 중심으로 배분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그러나 과학자이며 수학자인 파스칼과 페르마는 서신 교환을 통해서 확률과 기댓값의 개념에 다다랐다. 그들의 돌파구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자는, 즉 ‘현 상태에서 중단 없이 게임을 계속한다면 어떻게 될까’였다. A가 이길 확률은 16분의 13이고 B가 이길 확률은 16분의 3이 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업적 중심인 5:3 이 아니다. 이게 기댓값의 개념이다. 이 경우는 기댓값이 업적보다 더 우월한 경우이지만 이 반대의 경우도 존재할 수 있다.이 에피소드의 교훈은 현재까지의 업적보다 더 중요한 건 미래의 기대치라는 사실이다.또 하나의 예가 있다. 전자업계의 신화 소니는 1950년대 초반 전자제품의 기반 기술이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이전하는 변곡점에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워크맨과 콤팩트디스크(CD)로 이어지는 혁신을 주도하면서 아날로그 시대에 세계 음향가전 시장의 절대 지존으로 군림했다.그러나 소니의 성공신화는 디지털 혁명의 풍랑을 만나면서 좌초했다. 하드웨어의 시장 지배력을 소프트웨어 분야로 확장·결합시키려는 전략 방향은 타당했지만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융합시대의 주연 자리를 애플에 내주고 조연으로 전락했다.소니의 실패는 워크맨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성공에 의존하여 미래의 성공확률에 눈을 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래의 기대치를 높이기 위한 준비와 자세가 부족했기 때문이다.대학의 수시모집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포스텍은 정시모집을 늘리라는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수시모집을 고수하고 있다.대학의 수시모집은 정시모집이나 과거의 대학입시와는 달리 지금까지 보다는 미래의 잠재력을 보는 모집방법이다. 수시모집의 미래 가능성을 보는 창의력 중심의 선발 방식은 미래의 기대치를 높이려는 노력이다.아마도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지금까지 과거사 문제로 서로를 공격하고 헐뜯는 과거 지향적 보다는 미래의 기대치를 높이는 일에 정치인들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미래의 기대치를 높이는 일은 교육, 경제, 산업, 정치 어디에서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일들이다.

2020-05-21

팬덤 신드롬

김병래시조시인신(神)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이었다.왕과 제사장은 물론 로마 총독까지 엄존하는 당시의 유대 땅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심지어는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같은 경건주의자들보다도 세리나 창녀 같은 하층민들이 오히려 구원받기 쉽다는 말까지 했으니 어찌 무사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한 생명으로서의 가치가 평등하다는 것이지 세상의 부나 권력의 평등을 말하는 건 물론 아니었다.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 간에도 서열이 있다. 무리의 질서를 유지하고 우수한 형질을 유전하는 등의 종족보존본능에 따른 것이다. 인류도 처음에는 거기서 출발했으나 문명의 축적에 따라 우두머리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온갖 수단이 동원되어 종교나 정치의 지도자를 신격화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그 권세를 옹위하고 떠받치는 무리들이 있게 마련이고, 일반 백성들은 권력자를 추앙하고 숭배하는 것으로 심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 했다.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 ‘절대존엄’이라고 통치자를 우상화하는 집단도 있지만 대다수 국가들은 민주주의를 표방해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다. 선출된 지도자들은 국민의 계속적인 지지와 호응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할 것이고, 개중에는 포퓰리즘이나 프로파간다 같은 극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 히틀러나 스탈린은 물론 대다수 독재자들이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로 정권을 장악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듯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패망으로 몰고 가는 지도자를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어떤 대상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을 팬덤(Fandom)이라 한다. 유명 운동선수나 인기 연예인이 주로 팬덤의 대상이 되는데, 팬덤을 형성하는 심리적인 이유나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특정 정치인에 대한 팬덤이 기세를 떨치고 있다. 나라가 좌우로 나뉘어 반목하고 대립하는 가운데 자기들이 지지하는 정치성향의 인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가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온갖 비리와 부정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거나 고발을 당한 자들을 지지하는 무리들이 자행하는 맹목과 광기에 가까운 행태는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름께나 있는 인사들까지 앞장서서 불법과 비리와 파렴치를 옹호하고 나서면 같은 편의 패거리들이 벌떼 같이 달려들어 반대편이나 사법체계를 조롱하고 위협하는 무법천지를 연출하고 있다.조국일가의 비리나 울산시장 부정선거 혐의자들, 최근에 불거진 정의기억연대의 비리의혹 등은 일말의 상식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진상을 철저히 밝혀야 할 일이지 무조건 편들고 두둔할 일이 아니라는 걸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팬덤의 무리들에겐 법치도 상식도 윤리의식도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유일한 판단 기준일 뿐이다. 더구나 저들이 지지하는 인물과 세력이 정권과 함께 사법부와 입법부, 언론과 교육과 문화계까지 장악을 하게 되었으니, 나라의 장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시국이다.

2020-05-21

장미꽃 등교

불가리아 카잔루크에서는 매년 5월말∼6월초에 걸쳐 장미축제가 열린다. 1903년 지역축제로 출발한 이 축제는 지금은 전세계인이 즐겨 찾는 장미축제로 성장했다. 불가리아 대통령이 참석하는 최고의 축제이자 최고의 관광자원이기도 하다.이곳의 장미 생산량은 세계의 80%를 차지한다. 행사장에 마련된 1만5천종의 장미 전시회는 놀라운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전통적 방법으로 추출한 세계 최고 수준의 장미오일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장미꽃으로 기획한 다양한 이벤트가 장미축제의 화려함을 더 빛내주는 행사다.계절의 여왕 5월은 장미의 계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맘때쯤이면 전국 각지에서 장미축제가 열린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전국 장미축제 대부분이 취소돼 많은 사람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5∼6월에 피는 장미는 야생종만 200여종에 이른다. 원예종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장미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장미만큼 꽃말이 많은 꽃도 없다. 색깔과 개수에 따라 꽃말도 서로 다르다.붉은 장미는 열정적 사랑, 흰색 장미는 순결, 분홍색 장미는 우아함, 검은색 장미는 이별 등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 장미 한 송이에도 의미를 따로 붙였다. 붉은장미 한 송이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뜻이고 노란색 장미 한 송이는 “당신을 향한 나의 감정은 순수하다”는 뜻이다. 만약 붉은장미 여섯 송이를 누군가에 주었다면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졌다”는 뜻이라 한다.코로나19로 80일 만에 등교하는 학생들의 장미꽃 등교에 온 국민의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등교 첫날 32명의 확진자가 나오면서 학생들의 등굣길이 마치 살얼음판 같아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학생들의 안전한 등교, 온 국민의 바람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5-21

아쉬운 20대 국회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린 지난 20일, 국회는 여야가 합의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을 비롯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법안, n번방 방지법, 공인인증서제도 폐지를 위한 전자서명법 개정안 등 100여 건의 법안을 통과시켰다.이날 기준으로 계류된 20대 국회 법률안 1만5천262건은 20대 국회 임기만료일인 29일 기점으로 모두 폐기된다. 통과된 법안 가운데는 논란거리도 있고, 박수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이날 본회의에서 통과된 법안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민식이법이었다. 지난해 9월 학교 앞 어린이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초등학생 김민식 군 사건 이후 국민적 관심 속에 어린이보호구역 내 교통사고 처벌을 강화한 이른바 ‘민식이법’은 기준 속도보다 천천히 달려도 사고가 나면 무조건 운전자를 형사처벌하도록 규정해 과잉 처벌이란 논란을 불렀다. 결국 법 개정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이어져 30만명이 넘게 동참했고, 청와대가 해명에 나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또 텔레그램 등의 메신저 앱으로 ‘스폰 알바 모집’같은 글을 게시해 중학생 등 미성년자들을 유인한 다음, 성착취물을 찍게 하고 이를 유포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인 ‘n번방’사건을 막기위해 ‘n번방 방지법’역시 실효성 논란을 빚고 있다. 관련업계에서는 n번방 방지법이 국민의 사생활 영역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해왔다. 더구나 방송통신위원회의 해명처럼 이 법이 공개정보에만 적용된다면 텔레그램에서 발생된 n번방 사건도 막을 수 없어 n번방 방지법 자체가 의미 없다는 지적도 있어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다만 이날 통과된 과거사법 개정안과 김관홍법은 때늦었지만 국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우선 과거사법으로 인해 2010년 임기만료로 해산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새로 출범하고, 형제복지원 사건과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등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권위주의 통치 시기에 발생한 국가 인권유린 사건들에 대해 진상을 조사할 수 있게 됐다. 4·16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에 나섰다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민간 잠수사를 피해 구제 범위에 포함하는 법안인 ‘김관홍 잠수사법’ 역시 시대의 아픔을 보듬은 법안으로 평가된다.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 잠수사들은 3개월여 사투를 벌여 희생자 235명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으나 골괴사 등 잠수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지방의회 사무처 직원 인사권독립 및 정책지원 전문인력 확충, 자치단체 부단체장 증원, 특례시 제도운영 등에 관한 내용들이 포함돼 있는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과 자치경찰 보강을 통한 자치기능확대를 보장하는 통합경찰법개정안 등이 또 다시 폐기되고 말았다는 점이다.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한 ‘분권형 개헌’이 무산된 후 국가균형발전정책의 후퇴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당초의 국정목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지방자치법 개정안에 대한 국회의 관심을 촉구한다.

2020-05-21

마늘과 어머니

이순영수필가마늘을 얻었다. 김장철도 지났고 햇마늘이 날 때도 아닌지라 잠시 망설이다가 받았다. 한손으로 들어도 빈 바구니 같았다. 푸석푸석 먼지가 나는 마늘 한 접을 집으로 가져와 베란다에다 두고 며칠 밤을 지냈다. 빨래를 널고 청소를 하면서 눈에 띌 때마다 근심덩어리였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갈무리를 해 두어야만 될 것 같았다. 미루어두면 버려야 할 형편이 될 일은 뻔했다. 친정어머니가 생각났다.어머니는 김장철이 되면 집에서 가꾼 마늘을 틈이 날 때마다 햇살이 잘 드는 마루에 앉아 장만하셨다. 깐 마늘을 수북하게 모아 두었다가 김장양념장을 만들 때쯤이면 마당 귀퉁이 감나무 아래에 있는 돌절구에 마늘을 찧으셨다. 지난 초겨울에도 어머니의 마늘 까는 일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그 양이 줄어든 것과 방안에 앉아서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통에 마늘을 찧는 것만 달라졌을 뿐이다. 어머니의 성품은 때로는 온화하셨고, 때로는 매우 강직하셨다. 이런저런 모습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신문지를 활짝 펼치고 마늘을 깔 준비를 했다.두고 보니 이 많은 마늘을 언제 다 손질할까. 긴 한숨이 나왔다. 받아오지 말걸, 식구도 적은데, 곧 햇마늘이 나올 터인데…. 친정에 가지고 가서 어머니께 맡길까. 그러려면 오고가는 시간과 머무는 시간을 합하면 서너 시간은 걸릴 텐데. 그 정도면 내가 혼자서 모두 손질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야, 나는 어머니를 뵙고 오는 즐거움이 있어 좋고, 어머니는 심심해하던 차에 일거리가 생겼다고 반가워하실 지도 모르지….나만의 계산법으로 나에게 돌아올 득과 실을 따지면서도 깐 마늘을 담을 그릇과 껍질을 담을 비닐봉지를 챙겨서 옆에 두었다. 어머니가 하신 것처럼 쭈그리고 앉아 마늘을 까기 시작했다. 볼품없이 말라 푸석거리던 껍질 속에서 하얀 마늘이 보석처럼 발라져 나왔다.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며 시작한 일인데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자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려왔다. 어깨와 목덜미, 손목이 뻐근해지고 눈도 따가웠다. 온몸이 뒤틀리는 것 같았지만 하얀 마늘이 통에 소복하게 모아지는 재미는 쏠쏠했다. 그릇 위에 봉긋하게 솟은 하얀 보석들을 쓰다듬으니 촉촉한 속살이 내 손바닥을 간질였다.한편 비닐봉지 속에는 흙이 묻은 뿌리와 버썩 마른 껍질들이 가득해졌다. 부풀어 오른 봉지를 손등으로 누르자 풀썩 내려앉았다. 붕긋하던 봉지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되자, 몇 해 전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벽에 기대어 가만히 앉아 계시던 어머니. 마당이며 부엌과 방, 집 안팎 어느 한 곳도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고 윤기가 흐르게 하시던 어머니의 갑작스런 변신은 믿어지지 않았다. 불러도 대답 없이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시고 사람을 보면서도 아무런 표정이 없으셨다. 때로는 한참동안 두 눈을 힘껏 감으시고 입을 꾹 다물고 계시기도 했다.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으시니 마치 그림 같았다.너무나 낯선 어머니였다. 바스라질 것만 같아 어머니를 부둥켜안을 수조차 없었다. 어머니 옆에 가만히 앉아 어머니처럼 벽과 천장을 바라보며 가슴앓이만 했다. 그러기를 몇 개월이 흐른 뒤 멈추었던 어머니의 시간은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조금씩, 아주 조금씩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어머니는 마치 아기 같기도 하고 때로는 천사 같기도 했다.삶을 온전히 바쳐서 우리들을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귀로(歸路)로 향하셨지만 나는 어머니께 해 드린 것이 없다. 오늘도 오랜 시간을 쭈그리고 앉아서 해야 하는 힘든 일을 어머니께 맡기려고 하지 않았던가.네 시간도 더 걸려서 마늘은 모두 갈무리가 되었다. 비록 껍질은 불태워지더라도 알맹이는 적재적소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마늘이 함유하고 있는 성분을 따져서 무엇 하리. 음식에 향과 맛을 더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건강에 이로움을 주면서도 그 형태를 잘 드러내지 않는 마늘, 그 품성이 꼭 어머니 같다.

2020-05-20

깔끔하게, 담백하게

수목원 나들이를 갔습니다. 변덕 앓는 제 맘과 달리 꽃 피고 지는 일은 어쩜 저리 한결 같은지요. 숲 천지 꽃 잔치, 신록이 한창입니다. 오월 동산에 취한 것도 그만인데, 운 좋게 샤스타데이지까지 만났습니다. 전망 좋은 언덕, 한울타리 가득 흰 꽃을 피워 올립니다.데이지 종류는 제가 좋아하는 꽃입니다. 경계가 분명한 꽃이지요. 뒤집어 보지 않는 한 드러나지 않는 꽃받침이며, 꽃 필 자리보다 한참 밑에 자리 잡은 이파리, 가시 없는 줄기마저 곧게 뻗어 꽃송이와 부수적인 것들이 뒤섞이지 않습니다. 심지 곧고 깔끔하며 소박한 꽃이지요.데이지와 달리, 꽃송이와 잎사귀가 뒤섞여 피는 꽃들이 화려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너저분한 인상을 주는 면이 있어요. 하지만 데이지는 꽃송이는 송이요, 줄기는 줄기요, 이파리는 이파리대로 각각 제 자리를 지켜 핍니다. 튤립이 그러하고 양귀비꽃도 비슷하긴 해요. 깔끔하기로만 따진다면 그 둘이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두 꽃은 어쩐지 고고한 느낌이 있어 부담스러운 면도 없지 않아요. 그에 비해 데이지꽃은 적당히 소박하고 알맞게 단정한 모습이지요. 산뜻하지만 가볍지 않고 소담스럽지만 격조를 잃지 않는 꽃입니다.환대의 시늉도 없고 포장의 허례도 없는 꽃. 향기 아래 가시를 박지도 않고, 미소 뒤로 우울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꽃송이보다 큰 꽃받침으로 꽃 본연을 갉아먹지도 않고, 넘치는 향기로 꽃잎을 미혹에 빠뜨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담박하게 피어 있을 뿐입니다. ‘나 이런 꽃이니 알아주시오.’ 하지도 않습니다. ‘나 그냥 이렇게 피었소.’ 하고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진중한 위엄이나 날렵한 멋을 품고 있다고나 할까요.사람도 마찬 가지예요. 데이지꽃만 보면 떠오르는 친구가 있어요. 학창 시절, 의기소침하면서도 질척댔던 저에 비해 담백한데다 넘치지 않았던 그 친구를 참 좋아했었지요. 심지가 곧으니 포장할 필요가 없고, 사심이 없으니 과장할 이유도 없는 그런 성정의 친구였어요. 얼핏 보면 그녀는 평범하다 못해 존재감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단체 미팅을 했을 때였지요. 누가 봐도 괜찮은 남학생이 있었어요.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 남학생에게 관심을 보였을 때 친구는 그저 덤덤하기만 했어요. 성격 상 호들갑을 떨거나 적극성을 비칠 친구가 아니었어요. 그것이 도리어 그 남자를 도발했나 봐요. 친구에게 꽂힌 남학생은 사흘이 멀다 하고 친구를 찾아 왔어요. 물론 친구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요. 지나치다싶을 만큼의 무덤덤함이 오히려 남학생을 울릴 만큼의 매혹이 되었다는 것을 그 친구는 알지 못했어요. 소식조차 모르는 그 친구를 지금 만난다 해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천진스럽지만 직접적이고, 단순하지만 단호했던 그 면을 제가 좋아했던 거지요. 아마 남학생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지 않나 싶어요. 복잡할수록 핵심에서 멀어지잖아요. 단순함과 깔끔함은 같은 집안 아니겠어요.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데이지꽃 같은 이미지의 글을 선호합니다. 그러려면 덜어냄의 미학이 우선 되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칼럼도 너무 기네요. 글의 본질은 주제에 있어요. 전하고 싶은 게 선명하면 말에 꼬임이 없습니다. 알면서도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제 맘이 허욕으로 들떠 있을 때입니다. 쓰레기로 가득 찬 손끝에 힘이 들어차니 글이 무거워집니다. 덕지덕지 붙이고 켜켜이 쌓는 순간 형체는 모호해지고 끝내 글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마감에 내몰릴 때면 정도는 더 심합니다. 며칠 지난 뒤 보면 버릴 것투성이입니다. 퇴고의 명약은 시간이라는 걸 느끼는 부끄러운 순간이지요.김살로메소설가써지지 않는 글 때문에 머리가 무겁고 심장이 무거운 날이면 데이지꽃을 떠올립니다. 에너지를 소진하는 잡념부터 없앱니다. 쓰잘머리 없는 곁가지 치기에 집중합니다. 더하기는 쉬워도 빼기는 왜 이리 어려운지요. 그럴수록 한 줌 덜고 두 말씀 닫는 연습을 하는 거지요.오후로 가는 수목원, 한밭으로 깔린 데이지 언덕에 오월 바람이 나부낍니다. 여백 깃든 저 꽃처럼 소담스레 피어날 글꽃들을 그려봅니다. 꽃송이와 주변부의 조화를 생각하며, 줄기는 곧게 이파리는 조금 멀리 플롯을 짜봅니다. 꽃잎 아래, 보일락 말락 배경으로 들일 꽃받침도 잊지 않지요. 덤덤한 듯 정갈한 글 꽃 한 송이, 꽃대를 올리는 상상만으로도 미소 짓는 아침입니다.

2020-05-20

사람과 사람 사이

김규종경북대 교수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인간과 인간의 격의(隔意) 없는 유대관계에 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격의 없는’이라는 어휘가 좋다. 양자가 속마음을 툭 터놓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떤 비밀이나 마음의 장벽이 없는, 문자 그대로 흉허물없이 속내를 모두 드러낼 수 있는 사이가 격의 없는 관계다. 그런 관계를 맺은 사람을 우리는 친구나 동지라고 부른다.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호락호락한가?! 현대 사회에서 격의 없는 유대관계는 희귀하며, 이런 현상은 나날이 심화하고 있다. 집단 따돌림으로 자살을 택하거나. 히키코모리로 자발적인 유폐를 선택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그러하다. 혼술과 혼밥과 혼산을 생각해도 날로 소원(疏遠)해지는 인간관계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인간을 위로하고 대화상대가 돼주는 인공지능 로봇이 나오는 세상이고 보면 그럴 법도 하다.격의 없는 사이가 아니라면 적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필수적이다.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통해 네 가지 인간관계를 조명한다. 45센티미터 이내의 친밀한 거리 (포옹과 키스), 45∼120센티미터까지 개인의 거리 (악수), 120∼360센티미터까지 사회적 거리 (모임), 360센티미터 이상 공적인 거리 (관람).우리가 누군가와 친구나 연인 혹은 지인 관계를 맺을 때 순서를 생각해보면 홀의 지적에 자연스레 동의하게 된다.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크고 작은 모임을 통해 거리를 좁히고, 악수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다가 소수의 인간은 포옹과 키스하는 친밀한 거리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런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박에 친밀한 거리로 넘어가는 경우는 영화에서만 가능하다.정보통신이 현저히 발달한 현대에서는 인터넷상의 거리도 문제가 된다. 누군가 잘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무단으로 틈입(闖入)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면서 이런저런 댓글을 달기도 하고, 무언가 충고하는 글을 남기기도 한다. 글 쓰는 본인이야 스스로가 대견하고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읽는 사람에게는 고통이자 공포가 아닐 수 없다. ‘뭐지, 또 들어왔나, 왜 저런 거야, 누구 허락을 받았나?!’본인이야 격의 없는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고 싶기도 하겠지만, 상대방은 그럴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면, 거기서 멈춰야 한다. 그것이 예의고 염치다. 격의 없는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옳다. 싫다는 사람을 끈덕지게 추적할 때 인간관계는 피로와 짜증과 분노로 아수라판이 되고 만다.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것은 옛말이다. 그렇게 해도 괜찮았던 시절은 완전히 지나갔다. ‘스토커 처벌법’이 그래서 나왔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스토커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다. 인터넷상에서 폭력적이고 살인적인 댓글로 얼마나 많은 연예인이 고통받고 있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적절한 거리를 생각했으면 한다.

2020-05-20

탁상교육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이팝나무는 나뭇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고봉으로 봄을 지었다. 이는 곧 있을 꽃궁기 전에 실컷 꽃으로 마음을 채우고 여름을 잘 이겨내라는 5월의 배려이다. 이와 더불어 5월은 사람들에게 여름을 준비할 시간을 준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은 올해가 관측 이래 가장 더운 해가 될 확률을 74.7%로 예측했다. 관련 뉴스다.“역대 가장 더웠던 해는 2016년이었는데, (중략) 올해는 강한 엘니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더울 거란 예상이 되고 있는데요. (중략) 관계자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비정상적인 상황”의 직접적인 원인은 온실가스에 의한 지구온난화이다. 더 심각한 것은 다음 내용이다. 만약 이것이 현실이 된다면 그 심각성은 코로나 19와는 비할 바가 안 된다.“이대로라면 50년 내에 전 세계 인구 3분의 1의 거주지역이 사막이 될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었는데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우리는 대책이 무엇인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그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문명의 편안함에 중독된 사람들은 이를 실천할 생각이 없다.최고의 무더위도 무더위이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탁상교육(卓上敎育)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교육 당국은 탁상교육이 만들어 낸 입시 공화국의 민낯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교육부가 고등학교 3학년의 등교수업을 고집하는 이유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학교 입시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지금까지 교육 당국은 “학생 중심 수업, 학생 역량 강화 교육, 창의융합형 인재 육성” 등 그럴싸한 말들로 입시 위주의 교육을 은폐(隱蔽)하고 있었다. 이제 교육의 실체가 드러난 이상 교육부와 교육청은 학생과 학부모를 이상적인 말로 기만해서는 안 된다.필자는 교사이면서 고등학교 3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이다. 2020년도 달력이 장을 넘길 때마다 느끼는 부담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래도 필자보다 더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를 위해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너무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독서실 갔다 올게.”등을 덮고도 남을 큰 가방을 메고 아이는 현관을 나섰다. 가방은 가방이 아니라 짐이었다. 아이의 등을 휘게 할 정도로 무거운 짐을 지운 이 사회가 싫었다. 하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스크를 챙기라는 말뿐이었다. “마스크 꼭 해!”“알았어, 그런데 하루 종일 마스크 하고 있으니까 머리가 너무 아파. 속도 안 좋고.”교육을 받을 당사자인 학생들의 고통을 교육 관료들은 알기나 할까? 책상에 앉아서도 학교 현장의 모습을 다 볼 수 있다는 탁상교육의 달인들은 그 고통을 절대 모른다. 그들은 말한다, 자신들이 계획한 대로만 하면 다 된다고. 그러니 잔말 말고 그냥 따르라고.이 나라 교육판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있다. 그것은 소통이다. 웃기는 것은 소통할 생각도 없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소통이라는 것이다. 탁상교육의 달인들, 그들의 전지전능한 능력이 참으로 부럽다.

2020-05-20

코로나19와 공유경제

코로나19가 공유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고 있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생활수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비대면접촉이 ‘함께 나누는’공유경제에는 직격탄으로 작용하고 있다.실제로 미국의 3대 공유경제 업체로 유명한 위워크, 우버, 에어비앤비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으로 나타났다. 먼저 위워크는 사무실 공유업체로 세계 여러나라에 120개 이상 도시에 진출해 800여개 이상의 대형 건물을 빌려서 수만개 스타트업체에 재임대하는 공유사업을 펼쳐왔다. 이 사업이 코로나19의 만연으로 큰 어려움에 처했다. 공유공간에 대한 불안감이 사무실 공유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면서 공유시장환경이 극도로 위축되고 있다. 우버는 차량공유업체로 기존 택시시장의 장벽을 허물고 성장가도를 달려왔다. 그러나 이 역시 코로나19가 다른 사람과의 차량공유를 꺼리게 만들면서 사업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최근 이용횟수가 70~80%까지 감소해 위기를 맞고있다. 이미 우버는 직원 14%에 해당하는 3천700명을 해고했다. 에어비앤비는 숙박시설 공유업체로 미국과 유렵에서 인기를 끌면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미국과 유럽 여러나라에서 감염자와 함께 적지않은 사망자를 내면서 타격을 입고 있다.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이 입국금지조치를 내리는 바람에 항공산업과 함께 매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역시 직원 25%인 1천900명을 해고했다. 문제는 코로나가 물러간 이후 공유경제가 다시 살아날 것인가다. 대답은 회의적이다. 사스, 메르스, 코로나19 등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바이러스가 비대면접촉을 강조하는 한 공유경제의 미래에는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울 수 밖에 없어 보인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5-20

둘이서 하나가 되어

장규열 한동대 교수삼십 년을 훌쩍 넘겼다. 달달하게 찾아왔던 사랑을 지키기로 마음먹고 함께 건너온 세월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만나고 헤어진 수많은 얼굴들 가운데 아직도 곁을 지키고 있는 우리는 어쩐 일일까. 셀 수도 없을 이야기들 가운데 늘 등장하는 당신은 내게 누구란 말인가. 살을 맞대고 살아도 속속들이 다 안다고 할 수도 없는 당신은 누구인가. 사람이 생겨난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생각할수록 오묘한 것이 부부라는 이름의 관계가 아닐까. 아이들까지 있고 보면 둘이서 만들어온 세계가 신통하기도 하다. 울고 웃으며 놀라고 분도 내지만, 얽히고설킨 사연들 가운데 만들어온 시간의 흔적은 부인할 방법이 없다. 내 탓이고 당신 덕이며 함께 걸어온 발자취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만 한가득이다.둘이서 이루지만 하나인 듯 살아야 하는 게 부부라고 한다. 부부의날이 21일인 것도 둘이서 하나를 만들라는 뜻이라는데,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박자가 맞기는커녕 갈수록 엇나가기만 하는 당신과 내가 아닌가. 솔직히 하나가 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게 아니었을까. 차라리 끝내 하나는 안 될 것이니 참고 견디며 살아가겠노라는 소박한 다짐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다. 적당히 포기하고 이제는 거울 앞에 돌아와 선 심정이 되어 체념하고 그냥 일상을 대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공연히 부딪히지 않고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며 남도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듯 그렇게 그렇게 지내는 게 서로에게 이롭지 않을까. 다치지 말고 침범하지 말고. 사랑은 아예 꺼버리고 관심도 전혀 주지 않으며 한 울타리에 사는 당신과 나는 부부인가 아닌가.‘부부’인 까닭은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아이들 탓에 억지로 산다는 건 그거야말로 억지가 아닌가. 이왕 함께 사는 김에 뭐라도 만들어가는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도 끈끈한 감정이 있지 않은가. 넘치는 열정이 식었는지 몰라도 끊임없이 샘솟는 호기심이 있지 않은가. 치열한 질투는 혹 잊었어도 잔잔히 흐르는 관심이 거기 있지 않는가. 핏대어린 싸움을 이제는 못하겠지만, 호수같이 너른 마음에 담지못할 미움도 이제는 없다. 부부가 되어 함께 바라보며 불쌍히 여길 세상이 저기 있지 않은가. 부부가 되어 마음모아 일으켜 세울 다음 세대가 거기 있지 않은가. 뜨겁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정겹게 나누어줄 넓은 아량이 이제는 생겨야 하지 않을까. 서로를 바라보기 보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마음이 되어.부부의날에 한 번씩 돌아보았으면 한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 이제 서로에게 무엇을 선사할 것인지 새겨보았으면 싶다. 받으려고만 하며 살아오지 않았는지, 나누기에는 인색하지 않았는지. 당신의 목소리를 이제는 들어주는 내가 될 수는 없겠는지. 세상에 완벽한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음을 어째서 애써 부인하며 살았는지. 어차피 부족하여 늘 도우며 살아야 했음을 왜 이제야 깨닫는지. 격려하고 북돋우며 응원하고 일으키는 당신이 되고 부부가 되시길. 부부의날, 파이팅!

2020-05-20

흑산도 공항의 황당한 울릉도 핑계

김두한경북부‘섬의 고향’ 신안이 발칵 뒤집혔다. 울릉공항이 올해 하반기 착공할 것이라는 소식이 최근 전해진 것이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뉴스였다고 중앙언론이 보도했다. 울릉공항은 비용 대비 편익이 흑산도공항보다 떨어지고, 총 비용도 훨씬 더 많이 든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흑산 공항이 안 되는 것과 울릉공항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물고 늘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비용대비 편익을 말한다면 할 말이 너무나 많지만 남 핑계를 대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울릉도는 우리나라와 러시아, 중국, 북한, 일본 해안을 아우르는 한가운데 위치하고 정점에는 독도가 있다. 우리나라 안보의 요충지라는 뜻이다. 울릉도에 군 관련 시설만 9곳이 넘는다.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육지에서 독도에 접근하려면 가장 가까운 죽변이 216.8km고 공항이 있는 포항과는 257km 떨어져 있는데, 일본과 독도는 오끼 군도에서 157.5km 거리에 있다. 오키섬에는 대형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공항이 있다. 전쟁이 난다면 선점을 일본이 먼저 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따라서 울릉공항 건설에는 국토방위의 개념도 포함돼 있다.관광적인 측면에서 봐도 흑산도, 홍도, 가거도는 모두 합쳐 연간 30만명이 방문하지만 울릉도는 단독으로 40만명이 찾는다. 인구 역시 울릉도는 1만여명으로 대흑산도 2천여명의 5배다.특히 울릉도는 동해의 깊은 수심 때문에 연간 여객선 운항이 100일 이상 통제되는 지역이다. 이런점을 염두에 둔다면, 단순히 건설하는 비용이 적게 든다고 우수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흑산도의 공항 건설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흑산도의 여건을 잘 살려 필요성을 설득하고 장점을 부각시켜 공항이 건설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울릉군민들은 흑산도 공항 이야기가 나왔을 때 같이 건설되기를 염원했다. 공조하기도 했다. 다만, 울릉도 주민들은 흑산도 주민처럼 핑계를 대지는 않았기에 이번 흑산도 공항 관련 이슈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kimdh@kbmaeil.com

2020-05-19

음악 같은 행복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녹음방초(綠陰芳草) 짙어가는 젊음의 계절 5월이다. 봄의 향연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푸르싱싱한 초목이 활개치는 여름날로 치닫고 있다. 아침나절 우짖는 멧새들의 지저귐은 맑기만 하고, 한낮의 뻐꾸기 울음소리는 한가롭기만 하다. 또한 저녁답의 어스름을 타고 흐르는 소쩍새의 독창은 올해도 풍년을 점치며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다. 초록의 캔버스에 색채와 향기를 드리우고 물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새소리의 추임새까지 더해가는 자연은 미술과 음악을 곁들인 일종의 예술 종편을 연출하는 듯하다.산이나 들, 강이나 바다 주위를 소요하며 이따금씩 접하는 자연의 소리는 무슨 음악처럼 들리기도 한다. 때에 따라선 향기가 들리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소리가 보이는 것 같으며, 가만히 몰두하면 색깔이 만져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어쩌면 자연 속에 원천적으로 내재한 종합예술을 인간이 미술과 음악의 이름으로 표현해내고 문학과 문화의 매체로 통역하며 재창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가운데 청각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음악은 인간의 매우 뛰어난 감성적인 공감능력의 한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주로 음률로 나타내는 소리예술로 정의되는 음악은 가창, 기악, 성악, 선율, 리듬, 화음 등 장르와 표현방식이 다양하다. 세계 공통언어인 음악은 일종의 ‘패턴 찾기’의 즐거움이며 반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음악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육체적, 정신적 회복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며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가령 같은 노래를 함께 부르면 힘든 상황에서 서로 돕고자 하는 유대감이 형성되고, 좋은 음악 속에는 우울증과 스트레스의 악순환을 돌파하는 힘이 존재한다. 그래서 정신과 신체건강을 유지, 복원시키며 향상시키는 음악치료라는 예술치료분야가 고대로부터 활용되지 않았을까?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온갖 소음과 잡음, 불협화음에 노출되고 시달릴 때가 많다. 그런 때일수록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취향에 맞는 음악을 들으며 심신을 달래나간다면 마음건강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는 거의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자주 듣곤 하는데, 출퇴근길이나 산악 라이딩을 하면서 즐겨 듣는 음악의 장단에 맞춰 몸을 들썩이며 페달을 밟다 보면 힘도 그다지 들이지 않고 미끄러지듯 신나게 달려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반복으로 인한 음악의 세밀한 선율과 리듬에 집중할 수 있고, 그러한 음악이 연료처럼 작용해 몸이 저절로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것 같았다.음악은 지친 일상의 고단함을 풀어주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보약같은 효능이 있다. 콘서트나 음악발표회로 햇살같은 선율이 피어나야 하는데, 코로나19 시국으로 인해 울림마저 감금당하고 있다. 그러나 침울한 마음이 치유되고, 소통하는 공감으로 상생과 화합의 메아리가 조만간 울려 퍼지리라. 작은 생의 아픔 속에도 아름다움은 살아있듯이 삶이란 그 무언가의 기다림 속에 오는 음악같은 행복이니까….

2020-05-19

Z세대들의 “라떼는 말이야….”

곽지영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인정사정없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습격에 안전지대가 있을 리 없었다. 정도나 형태에 차이가 있을 뿐 이 시대를 함께하는 모두가 엄청난 내상을 입었다. 그러나 위기마다 강했던 우리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 역시 감내하며 각자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의료진, 소상공인, 어르신들, 직장인들, 모두가 ‘덕분에’를 들어 마땅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생의 꽃인 학창시절을 하필 지금 지나고 있는 Z세대들에게 연민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칭찬과 격려의 박수를 드리고 싶다.Z세대란 밀레니얼 세대의 다음 세대로,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출생한 세대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로 학교에 가지 못했던 유치원, 초·중·고교생, 대학생까지를 포함한다.선생으로 그들 가까이 있어서일까? 코로나바이러스가 Z세대에게 유독 가혹해 보여 그들이 특히 안쓰럽다. 개학은 3차례나 연기되었고, 급기야 초유의 ‘온라인 개학’, ‘랜선 등교’라는 낯선 상황을 준비도 안된 채 경험했다. 졸업식도 입학식도 치를 수 없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들께 후배들이 드리는 꽃다발도 화면 넘어 마음으로만 나누어야 했다. 입학식은 고사하고, 담임선생님도, 새로 같은 반이 된 친구들 얼굴도 아직 보지 못했다. 수업은 모두 인터넷 강의나 원격 화상학습, 과제제출로 대체되었고, 교실에서 친구들과 왁자지껄 즐거워야 할 시간, 아이들은 집안 컴퓨터 화면 속에서만 선생님을 겨우 만난다.물론 이전에도 ‘인강’, MOOC, 사이버대학과 같이 온라인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는 수업은 있었다. 스마트 기술을 이용하는 게 어려워서도 아니다. 한창 친구가 좋아질 나이에 집에만 있어야 하는 현실이 아이들에게는 너무 가혹하다는 말이다.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꼭 필요한 선생님과의 심리적 유대감, 라포(Rapport)의 형성도 온라인 수업만으로는 기대하기 어렵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의 기지로 드라이브인 입학식이 열렸다거나, 학교에 못 나오는 아이들을 위해 교장선생님이 코믹한 동영상을 찍어 선물했다는 소식이 미담으로 알려지는 상황이 무슨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져 씁쓸할 지경이다. 준비 덜 된 상황과 불편한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Z세대들은 변화된 상황에 너무나 빠르게 잘 적응해 주었고, 여전히 밝게 웃으며 자신과 사회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듬직하게 버텨내 주고 있는 것이다.80~90년대 X세대의 학창시절에 초점을 맞추어 그 시대 사건들을 특유의 유머코드로 들려준 ‘응답하라 시리즈’는 2012년 이후 지금까지도 재방송이 계속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40대의 치열한 삶을 감내하느라 드라마에 무관심했던 X세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덕에 그들을 TV 앞으로 소환했고, 그 시대를 모를 후배들에게 소싯적 얘기를 하게 만들어 ‘라떼는 말이야….’ 신드롬도 일으켰다. 10~20년 후, ‘응답하라 2020’을 감상하며 자기 후배 세대들 앞에서 ‘라떼는 말이야….’를 외칠 중년이 된 Z세대들을 상상하며, 그들의 무용담이 멋진 해피엔딩이 되게 힘을 보태리라 다짐해 본다.

2020-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