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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탄탄 단상 / 늘 숙제였던 삶

죽음의 강을 건널 때에 마지막 남기는 글을 세간世間에서는 사세辭世라 하고 불가에서는 임종게臨終偈, 열반송涅槃頌 혹은 입적게入寂偈라고도 한다. 선승들이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소회를 짧게 압축하여 후세에게 주는 글 대부분은 한마디로 인생의 무상함이다. 인간에게서 읽고, 쓰고, 느끼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대함이다. 한낮의 태양처럼 찬란한 역사든, 깊은 밤의 달빛에 젖은 야사든, 선인들께서 남아있는 자들에게 삶에 있어서 다시금 내밀히 관조하게 하려는 마지막 가르침이며 오롯이 할喝이요 방棒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삶의 등불을 켜주는 이는 죽은 자들이지만, 그들이 마지막 남긴 글 가운데 뼈에 사무친 말 대부분이 인생이 꿈만 같고 꿈꾸다 가는 것이며, 인생 성공의 삼위일체라는 출세욕, 물욕, 명예욕 이 모든 게 부질없으니 방하착放下着하라는 말이다. 인생이 "풀 초草, 이슬 로露" 풀에 맺힌 이슬과 같다 하여 초로인생이라고도 하지를 않던가? 아침나절 풀잎에 맺혀 있는 이슬은 한낮의 햇볕이 나면 흔적도 없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하니 덧없다고도 하지를 않던가? 불교든, 노장사상이든 주된 가르침은 내가 최고라는 오만방자하고 교만한 마음을 속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내 복력에 넘치는 지나친 욕심을 지니거나 잘난척하려는 얼굴 표정도 버려야 한다. 만사를 자신의 의지나 뜻대로 관철해 보려는 욕심 역시 버려야 한다. 공孔씨 가문의 큰 선생께옵서도 죽으실 때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입을 열어 보이시며, 다 빠져버린 이빨에 유일하게 남은 혀를 보임으로써 부드러운 게 진정 강함을 비유하여 몸소 보여 주었다 하지를 않던가? 세상을 다 지닌 절대 권력자라도, 가질 것 다 가진 부자라 하여도 만족하지 아니하고 더 욕심을 낸다면 권세와 재물의 노예일 뿐이며 거리의 노숙자만도 못한 부자유한 자가 아닐는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착취하거나 압박하여 타인을 궁지에 몰고 남을 어려움에 처하게 한다면 어찌 그를 인생의 승자라 할 것인가? 아프리카의 건조기에 수만 마리의 누우 떼가 살아남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건너야 하는 극지의 강에서 먼저 몇 마리가 뛰어들어 스스로 악어의 밥이 된다고 한다. 사실 유무를 떠나 몇 마리의 숭고한 희생으로 누우 떼가 유유하게 그 강을 건너게 하는 불멸의 리더십이 아닐 수 없다. 아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을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지? 무엇을 버리고 내던져 인습의 구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어야 하는지? 평야의 어느 어두워진 초막에서 달을 바라다 보며 조급한 고뇌에 빠진다.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나 내 살아온 이야기 전부를 보여 줄거나. 한 시대를 풍미하거나 한때의 영화를 누렸던 이들이여, 십수년 후면 우리 모두는 고인이 되어 한 줌 재로 돌아갈 터이다. 모질게 가지려고만 누리려고만 하덜말고 한번쯤 되돌아 보세나. 아, 그러고 보니 나 또한 부끄럽고 치욕스럽게 지나온 삶이었네라.

2023-12-08

살아있는 깊은 밤

탄탄 스님 용인대 객원교수 죽지도 않았는데 죽었다는 헛소문이 내 인생에서 도합 세 번쯤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돌도 되기 전이었다는데 내겐 기억이 없다. 다만 자라면서 집안어른들에게서 종종 들었을 뿐이다. 그 두 번째는 스물이 훨씬 넘어서였다. 중학교 동창들 사이에서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나머지 세 번째는 미국에 살다가 귀국하여서 종적을 감추고 지인들과의 소식이 뜸했을 때였다. 나이 사십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난 여태껏 살아오면서 세 번이나 죽었던 사람이었다.죽지도 않았는데 죽었다는 소문이 어찌어찌하여서 났었는지는 통 모를 일이지만, 산 자에게 언제인가 죽을 날은 반드시 온다. 산 자가 누군가를 위해 살고 있다는 말은 한갓 말장난일 뿐이다. 삶은 그저 자기를 위한 것일 뿐이다. 산 날이 죽은 날이 되거나 죽을 날이 산 날보다 가까워져서 점점 나의 삶이 짧아짐을 느낄 때 과연 이 세상 어느 누가 기꺼이 남을 위한 행복을 빌어줄 수 있겠는가?가끔씩 나는 상상한다. 죽지 않는 불사신처럼 죽음의 강을 건너지 않고, 대학병원 입원실에서 서성이지 않고, 세상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홀로된 고독감에 몸부림치지도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해 본다. 사력을 다해 살기 위해서 사는 우리는 정말 죽음이라는 인생의 마지막 큰 숙제 앞에서 과연 얼마나 의연할 수가 있겠는가? 죽음이라는 것은 산 자들로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난제이다. 결국 죽어봐야 죽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것, 살이 썩지 않았다는 것, 죽을 병에 걸린 줄 알았는데, 돌팔이 의사의 오진으로 버젓이 살아 있는 것, 이 깊은 밤에 듣는 가장 슬픈 음악도 어쩌면 오히려 잔잔한 기쁨이 되어 행복을 선사받는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내 돈을 떼어먹은 괘씸하기 짝이 없는 자조차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세파의 험난한 이 빗줄기도 언제인가는 그칠 것이며 풍찬노숙의 날도 비껴가리라는 어줍잖은 희망을 가진 적이 있다. 그 빗속의 풍찬노숙이 나에게 위안의 말 한마디를 건넨 적이, 나를 용서한 적 있었던가.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 개똥밭을 구르고 있지만 살아 있어서, 살 수만 있다면, 살고 있으니 이토록 신명이 나는 것을…. 깊은 밤이다.

2023-07-04

통제되지 않은 세상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은행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사람의 통제를 벗어난 체제로 그 체제는 이자와 이익을 먹고 커간다. 정상참작을 고려하지 않고 대출을 갚지 못한 자의 땅을 뺏어가는데 사람들은 그런 체제를 통제하지 못한다. 이미 이 회사는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지배체제가 되어 버린다.”존 스타인백이 ‘분노의 포도’를 통해서 한 말이다. 히틀러의 나치즘도 독일 시민들의 통제권을 벗어난 악의 지배체제가 되었고, 푸틴 정권 역시 러시아 국민과 유엔도 통제할 수 없는 전쟁 지배체제가 되었다.현대사회학자 피터 블라우는 “조직이 만들어 지면 그 조직은 만든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 사람의 통제권을 벗어나게 된다”고 했다.어떤 사람은 그 원인을 인간의 타락으로 본다. 그래서 개인이 변화되면 체제도 변화된다고 한다. 하지만 라인홀드 니이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도둑연합주식회사에서 아무리 개인이 정직하게 일해도 결과적으로 도둑질을 도운 것임으로 개인의 변화가 체제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했다. 역으로 체제가 변화되면 개인이 변화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노예제도를 폐지한 미국에서 여전히 인종차별이 있고, 재산을 공동분배하는 공산주의 체제에도 개인의 탐욕을 채우는 이들이 있어 체제변화가 개인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한다. 개인과 체제가 동시에 변화되어도 여전히 악의 힘은 남는다. 이를 경험한 밀란 쿤데라는 “낙원에도 감옥이 필요하다”고 했다.세상에는 존재론적으로 악한 영적 힘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지배체제를 월터 윙크는 악한 영이 지배하는 사탄의 지배체제라고 했다. 지배체제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탓만이 아니고, 구조의 탓만도 아니며, 악한 영의 힘이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베르자예프는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전해지기를 기다릴 수 없으며 사회구조를 함께 변화시켜야 하고 동시에 선한 영이 영향력을 끼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예수는 개인구원과 동시에 사회구원을 위해 일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힘을 통해 잘못된 지배체제를 몰아내려 했다. [마]12:28에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서 사탄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었다”고 했다.성경 에베소서에도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것은 개인과 사회체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통제권을 벗어나 있는 악한 영들이라 했다. 칼 융은 오랜 세월 쌓인 전통과 문화는 영적인 힘을 보유한다고 했다.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율법과 전통에서 흘러나오는 악한 영을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몰아내었다. 오늘 인류가 직면한 통제권을 벗어난 폭력과 전쟁의 억압체제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개인과 사회의 통전적 변화와 동시에 악한 전통과 문화에서 흘러나오는 악한 영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선한 영이 영향력을 끼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22-03-16

거룩한 테러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과거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인도네시아, 인도, 태국에 쓰나미가 지나갔을 때에 한국을 대표하는 모 목사가 이들이 우상숭배를 하기 때문에 내린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설교했다.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도 일부 종교인들은 하나님이 내린 징벌이라 했다.그렇다면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의 지진과 거의 100%가 기독교인인 아이티의 지진은 왜 일어났을까에 대해 합리적인 답변을 내어놓지 못했다.자연재해가 정말 하나님의 징벌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신학자들이 모여 성경을 연구했다.그 결과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자연재앙과 하나님의 징벌은 아무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든 자율적 운동법칙에 위탁하였기에 그 자연법칙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 발표했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함으로 발생되었다고 했다. 개신교에서도 교수연합회를 통해 모든 자연재해가 하나님의 징벌은 아니라고 발표하였다.성경에 징벌이 없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보는 것을 칼 융은 합리적이고 과학적 설명을 할 수 없었던 시대의 진술 방법인 신화적 교리를 실재화 하는 근본주의 신앙이라 했다.기독교 인문학자 르네 지라르는 예수님이 원수를 징벌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고, 오른뺨을 때리면 때린 자를 징벌하지 말고 왼뺨도 내어주라고 했다면서 하나님은 징벌하는 분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분이라 했다.처음 하나님을 알기 시작할 때에는 징벌적 하나님으로 인식되었지만 점차 징벌의 하나님이라기 보다 대자대비한 사랑의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존 티한은 [신의 이름으로]라는 책에서 분별없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협박하는 언어폭력이라고 지적했다.IS가 테러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신 알라의 명령이라고 한다. 브루스 링컨은 신의 이름을 빙자한 이런 테러를 ‘거룩한 테러’라고 했고 신의 이름으로 징벌 운운하는 것 역시 ‘거룩한 테러’라고 하면서 이는 잘못된 신앙이라 지적했다.예수 당시 실로암에 있는 망대가 무너지는 사고로 열여덟 사람이 죽는 재난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예수에게 저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런 징벌을 받느냐고 물었다.이에 대해 예수는 저들이 너희보다 죄가 많아 징벌받아 죽은 것이 아니라며 신의 이름을 빙자한 언어의 테러를 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신앙을 가진 종교인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말 중에 하나가 “벌 받았다”는 말이다. 이 말을 생각 없이 하는 것은 신의 이름을 빙자한 언어폭력으로 삼가 조심해야 할 말이다.

2022-03-09

시대정신과 예수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한 시대가 공유하는 정신과 문화양식, 이념과 신앙은 그 시대의 삶의 방식이 되는 보편적 정신으로 이를 시대정신이라 한다. 역사를 평가할 때에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평가하는 내재적 접근방법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는 외부적 접근방법이 있다. 과거 역사의 인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이 이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내재적 접근법으로는 높은 점수를 받고 이승만은 외부적 접근법으로는 백 년을 내다봤다는 높은 점수를 받는다. 백 년 앞을 내다보며 산 사람을 내재적 접근법으로 평가하기 보다는 백 년이 지난 다음 외부적 접근법으로 평가를 해야 한다.역사적 인물 중에 내가 본 최고의 선구자는 예수이다. 성경은 선구자를 선지자로 표현한다. 선지자는 현재의 시대정신으로 산 사람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시대정신을 열어가는 자를 의미한다. 예수는 당시 시대정신과는 전혀 다른 앞서가는 정신을 가지고 살았다. 당시의 시대정신은 유대의 전통인 율법주의로 대변된다. 그 당시의 보편적 시대정신은 남자와 여자, 내부인과 외부인, 주인과 종, 성인과 어린이를 차별하였으며 약자에게 불공정한 성전 제사제도와 안식일 법,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분하는 정결제도와 음식을 차별하는 음식규정, 죄인, 세리, 이방인, 병자, 장애인 등과 접촉을 금하는 차별적 율법 규정들로 대표된다. 예수는 이런 시대정신을 뛰어넘어 새로운 법을 제시하면서 성전을 허물라 하고 제물을 파는 자들의 상을 엎어 버린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음식을 먹는 것을 허락하여 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안식일 법을 깨뜨린다.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정결규정도 깨어 버린다. 여성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 내부인과 이방인, 주인과 종을 차별하는 규정도 깨어 버린다. 접촉이 금지되어 있는 죄인과 세리와 이방인과도 접촉을 하고 교류를 한다.예수는 이런 차별과 불공정으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사회적 죄로 보고 이 억압구조를 깨뜨려 해방시키고자 했다. 당시의 시대정신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종교적으로는 이단이요 정치적으로는 지배체제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기에 당시 시대정신은 당연히 예수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예수의 비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예수는 수없이 “내가 가는 길을 너희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아이슬러(Eisler)는 예수가 살던 그 시대에 예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사람은 소크라테스나 피타고라스 정도라야 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예수는 영원을 관통하는 시대정신의 소유자였고 선지자요 구원자였다. 그 시대에는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의 말대로 그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는 시대정신으로 살았다.

2022-03-02

허물벗기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최근 베이징 동계올림픽 경기 중 발생한 중국 선수 봐주기 편파 판정과 관련하여 중국을 대하는 감정이 더 악화되었다. 아울러 중국의 반한정서도 더 높아졌다.“소국 주제에 나대지 말라” “나라가 작아 하는 짓도 하찮다” “중국은 한국의 아버지”라는 댓글이 대변해 주는 중국인의 한국에 대한 생각을 황희 문체부 장관은 자신들을 대국(大國)으로, 한국을 소국(小國)으로 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대국이어서 큰 생각을 하고 소국이어서 좁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중국인의 편견일 수 있다. 자신들이 가장 존경하는 등소평은 키가 150Cm 밖에 안되는 소인이지만 그들은 그를 작은 거인이라고 부르면서 아무도 그를 소인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의 스승 맹자는 이웃 나라와 관계를 맺을 때에 이렇게 하라고 했다.“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는 크고 어진 나라가 되어야 작은 나라도 예로써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으니 크다고 작은 것을 억압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작다고 큰 것을 사대(事大)함이 아닌 서로 의로써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그런 위대한 스승을 두고서도 오늘의 중국은 옹졸한 중국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다. 우리 또한 소국의 한풀이식으로 격분하거나 감정대립을 하지 말고 차분하고, 냉정하고, 지혜롭게 대해야 할 것이다. 불의한 판정을 받고서도 여유를 가지고 웃으면서 경기에 임한 선수들처럼 말이다.성경 [시]3:4에 다윗이 이런 기도를 한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유대교의 한 랍비는 이렇게 번역했다. “나는 내 옹졸한 마음으로 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은 넓은 마음으로 응답하셨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달라고 옹졸한 마음으로 내 목소리만 내는 기도를 하였지만 하나님은 나 외에도 다른 사람의 기도하는 목소리까지 듣고 그 사람들까지 배려하여 넓은 마음으로 응답하셨다는 것이다.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면서 내 목소리만 내고 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옹졸함이다. 옹졸한 마음으로 내 목소리만 내는 기도를 아무리 힘있게 하여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까지 배려하여 넓은 마음으로 응답하신다. 그것을 깨달은 다윗은 이후에 이렇게 노래했다.[시]34: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자” 비로소 다윗도 옹졸한 마음을 버리고 광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된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던 왕이 가져야 할 덕목이었다. 물리적 크기로 대국 소국을 따지면서 큰 마음 작은 마음을 논하는 자체가 옹졸함이다.진정한 대국은 광대한 마음을 가진 국민들이 사는 나라이다. 다윗과 같이 옹졸함의 기도를 버리고 광대한 마음으로 노래하자.

2022-02-23

허물벗기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교회 성장학에 있어서 두 이론이 있다. 양적성장이론과 질적성장이론이다. 피터 와그너와 맥거브란과 같은 학자는 양에서 질이 나온다면서 양적성장이론을 내세웠고 반면 독일 신학자 이말테 교수와 같은 분은 양은 질의 저하를 가져온다면서 질적 성장을 강조했다. 초기 한국교회는 양적성장이 필요하였기에 양적성장에 매달렸다. 덩치가 크면 힘도 세다는 물리적 논리를 교회론에 적용하여 교회도 몸집이 크면 힘도 세어진다고 하여 양적성장에 전념했고 성공했다. 그런데 1990년을 정점으로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하고 지금은 성장이 멈추거나 마이너스 성장 시대에 접어들었다. 질적 성장학자들이 우려한 대로 양은 질적 저하를 가져와서 교회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양적성장이론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양에서 질을 추출해내지 못하여 균형성장을 이루지 못함에 있다.이런 문제는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많은 분야에서 양적성장에 성공했다. 하지만 양에 질이 따르지 못해 수많은 부작용을 불러왔다. 각종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양적성장에 비해 질적 성장이 따라가지 못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몸은 성장했는데 머리가 따라가지 못함이고 몸은 성인이 되었는데 먹는 것은 아직 젖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 성장에는 필연적으로 성숙이 따라야 하는데 성장만 있고 성숙이 없는 미성숙의 기형 사회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성경에 예수가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게 살라”고 했다. 뱀은 중동 신화에서 지혜의 신으로 자주 나타난다. 뱀의 지혜는 허물벗음에 있다. 뱀이 허물 벗는 이유는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몸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라나는데 몸을 감싸고 있는 껍질은 자라나지 않아 그 커진 몸이 껍질에 갇혀 결국 죽게 된다. 뱀이 살려면 몸에 맞지 않은 껍질을 벗고 성장한 몸에 맞는 새로운 껍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허물벗기이다. 다른 용어로 말하자면 패러다임 쉬프트 즉 인식체계의 전환이다. 껍질은 몸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 껍질이 몸에 맞지 않을 때에는 오히려 몸을 조여 죽게 한다. 그래서 뱀은 성장 속도에 따라 몸에 맞지 않은 껍질을 벗겨내고 새로운 껍질을 입는다. 뱀의 지혜는 바로 허물벗기에 있다.우리는 지난 세월 양적성장론이라는 껍질의 보호를 받으며 몸을 키웠다. 하지만 커져 버린 몸이 양적성장이론의 껍질에 갇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죽어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은 허물벗음을 통해 커진 몸에 입힐 새로운 껍질이 필요할 때이다.

2022-02-16

정상과 비정상 사이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조지 오웰의 에세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주거 환경이 매우 열악하여 방 하나에 열 한 명이 살고, 화장실은 공용으로 사용하는데 200미터를 가야 하는 곳에서 사는 광부들에게 “주거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고 기자가 물었다. 광부가 대답했다.“심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 것 아닌가요?”기자는 이들에게 정상적인 마을의 집을 보여 주면서 다들 이런 집에서 산다고 했다. 그제야 광부는 자신이 사는 마을의 주거 환경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개선 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루주 캉길렘은 이것을 질병과 연관시켜 ‘정상과 질병’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 보면 대부분 중환자가 되는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이 병들었다는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건강한 정상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하면서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상관관계에서 질병은 자란다고 했다.예수 시대에 가장 주류가 되는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다. 누가는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라 했다. 예수는 “자기 눈에는 들보가 있어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잘 보이지도 않는 남의 눈의 티는 밝히 보는 자들”이라 했다. “병 없다 하는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이 있다고 하는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바울은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하면서 100% 정상인은 없음을 강조했다. 심지어는 남의 병을 치료해야 할 의원도 자기가 병들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 예수에게서 “의원아 너의 병부터 먼저 치료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끝까지 자신들은 정상이요 다른 사람들은 비정상이라면서 정죄하고 징벌하였다. 이스라엘의 주류를 이루는 이들이 이런 생각을 가짐으로 이스라엘의 몰락을 초래했다. 조지 오웰이나 캉길렘이나 예수가 동일하게 주장하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는 한 사회의 개선과 발전은 없다는 것이다.지금 우리는 어떤가? 내로남불 남 탓만 너무하고 있지 아니한가? 나는 정상이고 너는 비정상이라고만 공격하고 있지 않은가?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서 나는 정상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는 비정상인 사람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이라 했다. 육신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사회적 병이든, 신앙의 병이든 그 병을 치료하려면 먼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속이 썩어 있는 회칠한 무덤과 같이 되지 않으려면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나는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2022-01-19

악의 침전물

강영식 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부자(父子)가 닮고 모녀(母女)가 닮는다는 말이 있다. 한 집에서 살다보니 은연중에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몸에 배어 무의식적으로 닮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자 칼 융은 잠재의식이라 했고 인간의 행동은 의식보다 잠재의식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잠재의식은 그가 사는 곳의 전통과 문화와 관습에 의해 형성된다. 이것을 굴레이니, 유산이니, 업보이니, 맥이라고도 하지만 칼 융은 그것을 ‘집단 무의식’ 또는 ‘잠세태’라고 했고 예레미야는 그것을 ‘찌끼(침전물)’라고 했다. 의식이 작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행위는 모두 잠재의식에서 나오며 결국은 그 잠재의식이 우리의 삶을 주도한다. 의식은 가식(假飾)으로 숨기고 위장할 수 있지만 잠재의식은 꾸며 낼 수 없는 근본(根本)이다. 바닥에 잠재된 침전물이 근본이고 그 근본을 숨기기 위해서 덮는 의식은 가식이다. 가식은 언젠가는 바닥에 침전되어 있는 잠재의식의 표출로 드러나게 되어 결국 진실을 숨길 수 없게 된다.예레미야는 모압족속의 멸망이 악의 침전물 때문이라 했다. 그 악의 침전물을 쏟아버리지 않으면 멸망을 면치 못하리라고 했다. 예레미야 48장에 “모압은 겉으로 보면 맛과 향이 좋은 술 같지만 썩은 찌끼가 바닥에 침전되어 있기에 모압이 살려면 술 거르는 자들을 보내어 포도주를 모두 쏟아 버리고, 그릇들을 비우고, 항아리를 깨뜨려 악의 찌끼(침전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모압족은 시작부터 악의 침전물을 바닥에 깔았다. 롯이 타락하여 그 딸과 근친상간으로 낳은 아들이 모압이고 그 후손이 모압족이다. 이후에도 정의의 편을 버리고 발람과 같은 거짓된 자들을 발탁하여 정치를 펼쳐 나감으로 악의 침전물을 두껍게 만들었다. 이들은 악의 침전물 위에 달고 맛있고 향이 좋은 거짓 정치의 술을 담아 위장했지만 결국은 그 침전물에서 악이 배어 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악한 침전물에 기초하여 세운 모든 역사는 결국은 부패하여 망하게 된다고 경고했고 그 침전물을 쏟아내지 못한 모압은 결국 멸망했다.불행하게도 유독 우리 정치 역사에는 악의 침전물이 바닥에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하다. 악의 침전물을 쏟아부어 버리지 않은 채 그 위에 아무리 좋은 술을 부어 감춘다 할지라도 결국은 침전물 속에서 악한 것이 나오게 되므로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악의 침전물을 제거하기 보다는 그 위에 단맛과 향을 내는 술을 부어 악의 침전물을 덮으려고만 한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그 술에 취하게 하여 바닥에 있는 악의 침전물을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나라가 모압과 같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악의 침전물을 쏟아내어야 할 것이다.

2022-01-12

닭 우는 소리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프랑스가 히틀러에게 항복을 하자 독일에 사는 프랑스 사람들은 나치경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본 회퍼는 반 나치주의자 답지 않게 나치경례를 하라고 했다. 사람들이 본 회퍼를 향해 변절자라고 비난을 했다. 나치경례를 거부하던 자들은 나치의 탄압에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제 목숨 살리기 위하여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나치경례를 용납했던 본 회퍼는 히틀러에 저항하다 형무소에서 처형을 당했다. 본 회퍼에게 경례하는 일은 목숨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아껴 두었다가 정말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일이 생겼을 때 그는 도망가지 않고 용감하게 목숨을 바쳤다.예수께서 로마의 병사들에게 잡힐 때에 베드로가 칼을 빼 들고 용감하게 저항했다. 그때에 예수는 칼을 거두고 저항하지 말라고 하면서 순순히 포박을 받았다. 그렇게 목숨 바쳐 싸우려 했던 베드로는 예수가 십자가형을 선고 받고 형장으로 가자 자기 목숨 살리기 위해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거짓증언을 하면서 도망갔다. 베드로는 작은 일에는 목숨을 거는 듯 했지만 정작 큰일에는 목숨을 바치지 않았다. 반면에 예수는 작은 일에는 목숨을 걸지 않았지만 큰일에는 목숨을 바쳤다. 인간사가 그렇다. 잘 나갈 때에는 간이라도 빼어 줄듯 온갖 아부를 다하며 선봉에 서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다. 함석헌 선생이 어려운 일을 당하자 평소에 늘 주변에 알랑거리던 사람들이 다 떠나갔다. 함 선생은 “만 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맡기며/맘 놓고 갈 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하며 탄식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내 뱉는 것이 인간지사(人間之事)이고 보니 우리 사는 세상이 감탄고토(甘呑苦吐)의 기회주의 소인배들의 난장판이 될까 걱정스럽다. 공자가 말하길 “성인은 내 아직 보지 못하였지만, 군자만이라도 만나 보았으면 한다”고 했다. 성인 같은 요순임금 이후에 권력과 사리만 탐하는 소인배 임금들을 두고 한 말이다. 이 나라가 그렇게 될까 걱정이다. 바울은 “개인적인 혈과 육을 상대하여 싸우지 말고 악한 권세를 가진 통치자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싸우라”했다. 대의명분 없는 일에 제발 목숨 걸고 싸우지 말고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한 일에 목숨걸고 싸워야 하지 않을까?제 목숨 살기 위해 도망가던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에 문득 깨우치고 다시 돌아와 대의를 위하여 거꾸로 십자가를 짊어진다. 닭 우는 소리는 깨우침을 주는 은유적 표현으로 육사의 시 ‘광야’에도 나온다.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2021-12-15

푸른 풀밭, 쉴 만한 물 가

강영식 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힘겹게 우물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물을 긷는 한 노인을 보고 자공이 두레박을 사용해보라고 권면했다. 노인은 대답하길 “기계를 가진 자는 반드시 기계를 쓰게 되고 기계를 쓰다보면 언젠가는 기계의 종이 되어 버리게 된다”며 두레박의 사용을 거절했다. 두레박을 기계에 비유한 것이다. 기계에 너무 의존하다 보면 인심(人心)이 기심(機心)이 되어 인간본성을 잃어버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현대문명은 기계와 자본의 결합으로 이익을 추구하면서 편리함을 극대화 했지만 반면에 지구온난화를 불러와 자연이 파괴되고 기후변화로 인한 천재지변으로 동식물의 멸종을 가속화 시켜 지구종말 시계가 1분전으로 다가왔다고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는 경고했다. 생태학자는 이미 기계문명의 질주는 자연을 회복시킬 수 있는 터닝 포인트를 지났다고 하면서 기계와 자연의 공존을 논할 때가 아니라 이제는 자연으로 뒤돌아가야 한다고 했다.정복자적 신학이 주축인 서구신학은 자연에서 생명원리를 제거하고 물체로만 인식하려는 데카르트-뉴튼-베이컨의 기계론적 자연관을 받아들여 자연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신이 주신 권리라 주장하면서 기계문명을 가속화 시켰다.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로 초래한 기후변화의 위기에 서구기독교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자연은 인간에게 무엇일까? 최근에 학자들은 자연의 치유기능을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자연을 하루 20분 이상 대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13.4%가 줄어들고, 신체를 강화하고, 마음을 안정시켜 엄청난 치유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했다. 자연은 정신과 육체만을 치유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루소는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 때에는 불평등과 빈부의 양극화와 인간성 소외가 없었다면서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자연은 사회적 질병까지도 치유하는 기능을 한다. 하나님은 자연을 창조하면서 그 속에 치유의 속성을 넣어 두었다. 영혼이 피폐해진 다윗이 치유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을 때에 하나님이 다윗을 데려간 곳은 성전이 아니었다. 다윗은 시편에 고백하기를 “그가 나를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데려가서 거기에서 내 영혼을 소생 시키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능력이면 어디서나 영혼을 소생 시킬 수 있지만 왜 자연 속으로 데려가서 영혼을 소생 시켰을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서나 똑같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계 속에 묻혀 있으면 내가 기계의 일부라는 생각을 가지지만 자연 속에 들어가면 내가 피조세계의 일부임을 알게 되고 그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자연은 내 영혼을 소생시킬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그것이 우리가 자연을 회복하고 찾아가야 할 이유이다.

2021-11-24

존재의 용기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랍비이며 사회 운동가인 마커스는 부켄발트 강제수용소에 숨겨져 있던 904명의 아이들을 발견하고 이들을 구출하는데 힘썼다. 그때 구출 받은 아이 중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이 있었다. 위젤은 유대인들이 교수대에서 죽어갈 때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탄식소리를 듣는다. 신의 부재는 위젤이 수용소에 있는 동안 내내 던진 질문이었다. 그 순간 그는 “나는 교수대에 죽어가는 저들과 함께 있다”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신이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부재를 깨닫고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를 구출하는데 힘쓴 마커스는 아들이 소아마비로 죽자 절망 가운데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때 아인슈타인은 “아들이 더 이상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식이 불러오는 ‘착시적 망상’에 불과하며 존재의 방식을 달리할 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했다. 틸리히는 죽음이 가져오는 절망은 존재하던 것이 없어지는 ‘비존재의 충격’때문이며 만일 죽음이 비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을 달리하는 것으로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고 하면서 이를 ‘존재의 용기’라 했다. 비존재는 절망을 가져오지만 존재는 희망과 용기를 불러온다는 공통된 생각이었다.

2021-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