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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포데믹이라는 재앙

박영호 포항제일교회 담임목사“이제 선택할 때다. 공격적인 방역으로 사망률을 낮춘 한국의 길로 갈 것인지, 아니면 많은 확진자와 더 많은 사망자를 내고 있는 이탈리아의 길로 갈 것인지”미국 공중보건서비스단장인 제롬 애덤스의 말이다. 전 세계가 극찬하는 한국의 의료진들과 방역체계와 함께 칭찬 받아야 할 것은 한국국민의 높은 의식수준이다.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아직도 무분별하게 어깨를 맞대고 모이고, 마스크도 쓰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제발 한국 국민들처럼 하시오”라는 호소도 생긴다 한다.그 수준 높은 한국국민의 거의 유일한 예외가 종교집단들이다. 신천지는 기독교 입장에서 보기에 교리적으로 문제가 많을 뿐 아니라,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아도 가정을 파괴하고 삶의 기반을 허무는 반사회적 집단이다. 한국교회는 이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계속 호소해 왔지만, 사회의 여론은 냉담했다. 대형 언론사들이 앞 다투어 신천지를 홍보해 주기도 했다.이제 그 부작용의 상당부분을 교회가 떠안아야 하게 되었다. 일부 교회이긴 하지만, 공중보건 차원의 고려 없이 자신들의 종교적 열정만 중요시하는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교회들이 코로나19 전염병 극복을 위한 노력에 모범을 보여야 되려 노력했다. 의료진들을 지원하고, 이 어려운 때에 소외된 계층들을 돌보려 애를 쓴다. 그러나 백 교회, 천 교회가 조심하고 노력해도 한 두 교회가 일탈을 저지르면 교회의 위상이 심하게 흔들리는 형국이다. 수도권의 한 교회에서 감염예방 한다면서 소금물을 분무기로 뿌리는 장면은 시청자들의 눈을 의심하게 할 만큼 충격이었다.인포데믹이라는 말이 있다.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해결책이라고 내 놓는 정보들이 너무 넘쳐나서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 온다는 뜻이다. 소금물이 코로나 바이러스 퇴치에 효과가 있다는 정보들이 카톡을 중심으로 한동안 돌아다녔다. 부끄럽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가짜 정보 유통에 한 몫을 했다. 오죽하면, 어떤 이단보다 무서운 종교가 “카톡교”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근거 없는 정보로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하고, 사회갈등을 조장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마스크를 쓴 김에 내가 평소에 한 말들이 혹 남에게 상처 주지나 않았는지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이와 함께 혹 나도 모르는 사이 부정확한 정보 전달로 사회를 어지럽히는 일에 일조하지나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못지 않게 무서운 인포데믹이라는 재앙을 겪게 될 것이다.

2020-03-18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조근식 포항침례교회 담임목사암흑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한 줄기 빛 같이 산 한 분을 소개하려고 한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최초로 백악관 차관보를 지낸 고 강영우 박사다. 강 박사는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1968년 서울맹학교를 졸업하고 72년 연세대 교육학과를 차석으로 졸업한 뒤 아내 석은옥씨와 미국으로 유학해 3년 8개월 만에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 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장애인이 받은 최초의 박사학위였다.그의 어린 시절은 얼룩이 많았다. 중학교 3학년 때 골키퍼를 하다가 친구가 찬 공에 눈을 맞아 실명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8시간 만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이미 3년 전 돌아가셨다.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된 누나는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하다가 과로로 숨진다. 13세 남동생은 철물점으로, 9세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가 갈곳은 없었던 차에 맹인재활센터로 버려지듯 가야 했다.훗날 강 박사는 “제가 살아온 인생은 보통 사람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쁜 일 때문에 내 삶엔 더 좋은 일이 생겼다. 저는 나쁜 일이 생기면 미래에 더 좋은 일이 생긴다는 긍정적인 가치관, 생각으로 늘 살아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라는 말을 남겼다. 강 박사에겐 긍정의 유전자가 뼛속 깊이 박혀 있었다. 고통과 시련에 직면한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그거라고 했다.힘들 때 포기하지 않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강 박사는 긍정적인 가치관만으론 안 되고 “섬김과 나눔의 가치관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면서 미국 최고의 명문 사립고인 필립스 아카데미의 230년 전 건학 이념이 ‘Not for Self(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라며 “공부를 하는 목적과 사는 목적은 내가 가진 것을 세상에 주어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췌장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강영우 박사의 기뻐하고 긍정하는 삶의 가치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지금 온 세상이 코로나19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마치 대양에 휘몰아치는 폭풍과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갈 곳을 잃고 떠가는 돛단배의 모습이다. 지금 당장 퇴로가 보이지 않지만 곧 길이 보일 것이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격려이며 희망이다.어릴 때 동네 구석진 모퉁이에서 삼삼오오 모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노래가 들리면 모두 술래를 피해 숨었다. 잡히면 술래가 되기 때문에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라고 목을 조이기도 한다. 요즈음 코로나19와 숨바꼭질하는 기분이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기분이다. 특별히 국가 간 관계가 깨어지고 이웃의 개념이 더 흐려지는 이때 함께 뒤얽혀 즐겁게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2020-03-11

새로운 봄

정석수 신부대구가톨릭 치매센터 원장바람이 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화나무는 초록빛을 더 뿜어내고 있다.뜰의 매화나무는 이 찬바람 속에서도 꽃망울을 키우고 있다. 입춘 오기전 한참 전 어느 겨울날 나무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다. 많은 나무들은 죽은 듯이 있는데, 매화만 홀로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나날이 푸른빛을 보여주니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땅 위에 드러난 가지와 줄기의 무게와 땅속에 들어 있는 뿌리의 생체량은 거의 맞먹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겨울, 매화나무의 꽃망울만큼 땅속의 뿌리는 그만큼 더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긴긴 겨울은 나무에게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요 휴식 중에 열심히 준비하는 때라고 여겨진다.몇 해 전 이곳으로 왔을 때, 큰 화분에 소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그 다음 해 화분 밖으로 뿌리들이 나와 있는 것이 보여서 안타까운 마음에 땅에 옮겨 심었다. 그 겨울에도 그 나무는 푸른 솔잎을 보여주고 있었다. 화분 밖으로 거침없이 뻗어 나오는 뿌리의 힘은 이제 땅속에서 자리 잡고 한 해에 한 마디씩 하늘로 쑥쑥 줄기와 가지를 올리고 있었다. 소나무를 보면서 나 자신에게 너는 내면에 깊이 파고들어 가고 있는지 묻는 듯하다. 깊이 파고드는 노력이 있을 때, 변화의 힘이 드러나리라.얼마전 후배 신부님의 서약식에 참여하였다. 서약 청원서를 들으며 외견상 본 귀공자의 모습과 달리 깊은 울림을 주어서 놀라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볼 수 있어서 마음 깊은 곳에서 박수를 보냈다. “성소의 시작이 가난이었습니다”라는 첫 문장에서 엄동설한에 꽃망울을 키우는 매화나무를 연상하게 되었다. “나눔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삶에서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즉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삶에서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가톨릭교회 교리서에는 “사랑은 누군가가 잘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단순하기에 더 깊이 가슴에 와 닿는다. 자신의 삶 주변에 있는 그 누군가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삶에는 그 사랑의 열매인 기쁨과 평화와 자비가 함께 따르게 되리라. 한 사람의 호의는 상호유대를 촉진하는 따뜻한 관계를 촉진하게 된다. 청원을 하는 신부님을 통하여 선을 행하려는 몸에 밴 확고한 마음가짐인 덕을 보게 된다.추웠던 겨울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봄을 시작하는 출발점, 쉼표의 겨울. 스스로 휴식을 통해 신체적, 심리적 에너지를 회복하고 내 안에 있는 건강한 나에게 물을 주어 보이지 않는 뿌리에 활력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꽃망울에서 매실을 거두어 들이듯 삶에 결실을 보리라.

2020-03-04

불교의 지혜와 자비

효상 스님포항 운흥사 주지불교는 제법(諸法)을 있는 그대로 여실히 알아내는 지혜(般若)를 매우 존중합니다. 왜냐면 그러한 지혜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올바른 종교적 행위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믿음(信)만 있고 앎(解)이 없으면 미신에 흐르기 쉽고, 앎만 있고 믿음이 없으면 오만하게 되기 쉽습니다. 불교에서는 믿음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을 합니다.그래서 그러한 믿음과 함께 이지(理智)의 중요성을 또한 크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불교는 매우 지(智)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바탕으로 발현되는 인간애를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라고 말합니다.자(慈·maitri)는 어원적으로 ‘우인(友人·mitra)’이라는 말에서 파생한 말로, 진실한 우정·순수한 친애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비(悲·karuna)는 애련·동정 등의 뜻으로써 보통 쓰이고 있는 말입니다.따라서 자비는 ‘남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고(慈, 與樂), 불이익과 고통을 덜어 주려는(悲, 拔苦)’ 인간애를 의미합니다.불교에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는 교설이 있는데 자(慈)·비(悲)·희(喜)·사(捨)의 네 마음을 일체 중생에 대해서 무한히 가지라는 것입니다.자(慈)와 비(悲)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희(喜)는 남이 즐거움을 얻었을 때 그것을 흔연히 기뻐해 주는 것이며, 사(捨)는 다른 사람에게 애증원친(愛憎怨親)의 마음을 갖지 않고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그러면 불·보살이 이렇게 무한한 자비를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고통 받고 있는 형제자매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비록 시름과 괴로움을 여의었다고 하더라도, 무수한 중생들이 죽어가는 저 슬픈 울음을 어찌 듣고만 있겠습니까?불교 경전 중 ‘우바새계경’에 나오는 말씀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지자(智者)는 일체 중생이 생사의 고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건지고자 하므로 슬픔을 일으킨다. 사도(邪道)에 헤매는데도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재물과 처자에 얽매여 빠져 나오지 못함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또 중생들이 악업을 짓고 고계(苦界)를 받으면서도 탐착(耽着)을 하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행복을 구하면서도 그 원인을 닦지 않기에 슬픔을 일으킨다.”이와 같이 불교의 지혜와 자비는 참으로 크고 크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괴로움을 여의고, 깨달음을 얻어, 남을 위해 살고 싶은 사람에게 그 큰 지혜와 자비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2020-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