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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의존의 병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심리학자 가토 다이조는 의존심리가 강한 사회는 공포와 적대감으로 가득찬 세상을 만든다고 했다. 의존심리는 자주, 자존, 자립심의 결여로 인한 나약함과 그에 따른 불안, 공포,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힘 있는 것에 의존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발생한다. 이런 의존심리가 보편화 되면 힘 있는 것에 의존하고 기생하는 ‘의존병의 사회’가 되어 병든 세상이 되어 버린다. 이반 일리치는 스스로 고칠 수 있는 병도 병원에만 의존하는 지나친 의존심을 ‘의원병(醫原病)’이라고 했고 이 병이 보편화가 되는 ‘의원병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몸에 대한 자율권을 잃어버리고 병원과 의사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종속사회가 된다 했다. 의존병은 마음의 지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 해 줄 수 있는 것을 외부 세계에서 찾게 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이비 종교집단의 일원이 되거나 극단적인 정치사상 집단에 들어가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의존하게 된다. 하나님은 의존에만 빠지는 신앙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외세 의존적 독립과 전쟁을 치른 우리는 지금도 자율권의 침해와 그 영향을 지금도 받고 있다.예수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로마라는 거대한 지배체제가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부패한 성전신앙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두 지배체제에 의존하지 않으면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로마와 성전기득권자에 의존하여 살고자 하는 의존의 병에 걸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인 마음의 지주와 자율성을 잃어 버렸다. 이렇게 의존병에 든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던 것이 베데스다 연못의 사건이다. 베데스다 못은 간헐 온천으로 물이 끓어오를 때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을 고쳤다. 여기에 예수가 방문 하였고 38년이 되어도 병을 고치지 못한 병자를 만났다. 그는 “자신을 들어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병을 고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는 “나를 들어 못에 넣어주길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 그의 진짜 병은 의존의 병이었다. 예수는 단순히 육신의 병을 고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로마와 성전기득권자의 지배체제에 의존하며 살고자 했던 의존병을 치유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자유의지를 되찾아 자주하고 자존하는 건강한 세상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구티에레즈는 “나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고 했다. 남의 우물물에 의존하지 말고 내 우물에서 살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의존기립과 의존보행을 극복하고 자발기행, 자발보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의존병의 사회를 구원함에 있었다. 오늘 우리가 고쳐야 할 병이 아닐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2021-11-10

종교적 여흥(sideshow)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맥시코 체첸이사의 쿠쿨칸 신전근처에 후에고데펠로타(골반축구장)가 있다. 경기장 넓이는 오늘의 축구 경기장과 비슷하지만 한쪽에 10미터 높이의 벽면이 있고 그 벽면 꼭대기에 농구골대와 같은 것이 세로로 세워져 있다. 골반으로 공을 차서 그 골에 넣는 경기가 고대 마야의 골반축구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 경기의 승자는 그 심장을 신전제단에 제물로 바쳤다고 했다. 결국 골반축구의 즐거움은 제물을 뽑는 ‘여흥’에 불과하다. 이 경기의 승자는 제물이 되어 신전의 제단에서 죽어야 하는데 과연 누가 골대에 볼을 넣으려 하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당시 마야 사람들은 제물로 선택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이라 생각했기에 최선을 다해 승자가 되려 했다고 한다.여흥(餘興·sideshow)이란 서커스 등에서 손님을 끌어오기 위해 광장이나 길거리를 돌면서 따로 보여주는 소규모의 공연이다. 그러므로 여흥은 본질로 이끌기 위하여 제공하는 약간의 즐거움으로 메타포이며 예수는 이를 표적(Sign)이라 했다. 골반축구의 즐거움은 제물을 뽑기 위한 여흥일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어떤 종교이든 그 본래의 목적은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함에 있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기적을 보여 준 것은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여흥일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베드로는 만선의 기적을 체험한 후 즐거워하기 보다는 무서워하면서 무릎을 꿇고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고 말했다. 만선의 기적은 여흥이었고 여흥이 이끌고자 했던 본질은 고기잡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어부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래의 목적인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여흥만 즐기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예수는 이들을 가리켜 “너희가 나를 따른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했다. 요한은 이를 표적신앙이라 했다. 표적이 가리키는 본래의 것을 봐야 하는데 표적만 보고 따른다는 질책이었다. 예수에게서 유대인은 표적만을 구하고 로마인은 고상한 지식만을 얻으려 하였는데 그것은 여흥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바울의 지적이었다.스퐁 교수는 오늘의 기독교에는 ‘종교적 여흥’만 남아있다고 했다. 심지어는 영적인 생활까지도 변화산에서의 세 제자들처럼 여흥에 빠져 있다고 했다. 지금 내가 신앙행위를 통해서 얻는 즐거움과 기쁨과 만족이 종교적 여흥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종교까지도 여흥에 빠져 영적파산에 이르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

2021-11-03

기어가도 옳은 길을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전자제품 수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정직하게 일하는데 좀처럼 돈이 벌리지 않았다. 친구가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손님이 수리를 맡기면 고치지 않아도 될 것까지 수리하여 비용을 배로 챙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과잉수리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고객들이 발길을 돌려버렸다. 그는 크게 뉘우치고 다시 양심적으로 가게 운영을 하였다. 세월이 흘러 신뢰가 쌓이게 되고 돌아섰던 고객들이 다시 돌아와서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성공의 비결을 묻자 ‘정직과 신뢰’라고 했다.자공이 공자에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 법을 물었다. 공자는 먹을 것이 풍족하고 군사를 넉넉히 두면 백성이 나라를 믿을 것이라고 했다. 자공이 또 묻기를 그 중에서 하나씩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하느냐고 했다. 하나씩 버려야 한다면 첫째는 군사요, 둘째는 먹을 것이요,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백성들 간의 믿음이라 했다. 국방, 경제가 든든하다 하더라도 백성들 간에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허물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이라는 것이었다.대장동사건으로 연일 세상이 뒤끓는다. 누구의 잘못인지를 차치하고서라도 배분과 관련하여 경제정의는 아님이 분명하다. 작은 것을 투자하여 상식 밖의 큰 이익을 챙겨가는 것과 상상하기 힘든 퇴직금은 경제정의와 거리가 멀고 국민들 간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불의한 방법으로 많이 벌기 보다는 적게 벌더라도 정직하고 정의롭게 버는 것이 우선이다.성경 잠언 16:8에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낫다”고 했다. 대장동 개발 사업과 관련하여 과연 그 엄청난 소득이 단 한 건이라도 불의하지 않고 한 점 부끄럼 없는 공의로운 소득이었을까? 대선의 과정에서 보이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가 승리하기 위해서 같은 편 끼리도 불의를 행한다. 나라의 지도자가 될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은가? 우리 역시 성공을 위하여 불의한 방법을 반칙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는가? 우리 사회가 반칙이 난무하고, 반칙이 일상이 되고, 반칙이 통용되는 것을 방치하면 우리 사회는 반칙사회가 되고 결국은 정의를 믿고 사는 국민들의 신뢰가 무너져서 파국을 불러온다. 우리는 지금 경제와 국방은 어느 정도 든든한 편이다. 다만 국민들 간에 신뢰는 바닥이지 않을까? 어거스틴은 “잘못된 길에서 달려가는 것보다 옳은 길에서 기어가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기어가더라도 옳은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

2021-10-27

인명 구조소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배의 침몰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해안 지역에 보잘 것 없는 인명구조소가 있었다. 몇 밖에 없는 구조원들은 밤낮으로 쉴 새 없이 자신들의 몸을 돌보지 않고 구조활동을 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건졌다. 세월이 흐르고 이들이 구조사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후원회를 조직하고 후원을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후원자들을 관리하고 친목하는 일이 구조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었다. 급기야 구조소는 후원회원들의 친목회관으로 전락하게 되고 구조소는 그 본래적 목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뜻있는 사람이 다시 구조소 본래적 사명으로 돌아가 구조만을 위한 새로운 구조소를 세웠다.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건지게 되었고 생명을 구조 받은 이들은 이 구조소의 후원자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자 이 구조소 역시 회원들의 친목회관으로 전락하였다. 이런 일은 이후에도 계속 반복되었다. 웨델의 ‘인명구조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넷플릭스의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세 명의 기독교인이 나오는데 모두가 다 기독교를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부정적 내용으로 채워졌다. 80∼90년대 이전의 기독교 대중문화는 영화 ‘낮은 대로 임하소서’와 ‘사랑의 원자탄’ 등에서 보듯 대중들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는 대중문화 속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교회학자는 한국교회가 양적인 성장을 통해 물질주의신앙에 빠지면서 본래적 사명을 잃어버린 겉만 화려한 무덤교회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야웨신앙에서 가장 경계했던 신앙은 바알종교였다. 바알종교는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당시에 노동력의 확보를 위한 다산과 농사와 축산을 풍요롭게 하는 부의 신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바알종교를 함께 섬기는 혼합신앙에 급속히 빠져 들었고 점차적으로 물질만능과 물질풍요만을 쫓는 신앙이 되어 버렸다. 엘리야는 천박한 물질자본주의 바알종교를 개혁하기 위하여 목숨을 건 대결을 벌여 공의와 도덕과 자비와 믿음을 상실한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본래의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했다.한국교회의 첫 시작은 비록 보잘것없는 오두막집에서 시작했으나 인명구조를 위한 본래적 사명에 충실하였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양적성장과 함께 바알종교화 되어 구조소라기 보다 회원들의 친목회관으로 변질되고 우리 사회 역시 바알종교에 물들어 버렸다. 무엇이든 확장되고 비대해지면 본질을 잃고 변질되기 쉽다는 것을 잊지 말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2021-10-20

한 몸 살기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한 번도 교육을 받지 않은 아프리카에 원주민들 아이들에게 1+1=2가 된다는 덧셈을 가르쳤는데 한사코 원주민 아이들은 1+1=1이라고 고집하였다. 진흙 두 덩어리를 합치면 한 덩어리가 되니 하나에 하나를 더하더라도 하나라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설명한 말이다. 머리가 둘인데 몸이 하나인 사람을 썀 쌍둥이라 한다. 이란에 썀 쌍둥이인 ‘비자니’ 자매는 두 머리가 자꾸 싸워서 한 몸살기를 거부하고 각자의 삶을 살고 싶어 분리수술을 하였는데 결국은 둘 다 죽었다. 반면에 태국의 썀 쌍둥이인 ‘창’과 ‘엥’은 한 몸 살기를 원했다. 생각이 다른 두 개체가 한 몸 살기 하기는 참으로 어렵지만 양보와 타협으로 몸을 공유하는 한 몸 살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서커스로 큰 돈을 벌고 농장을 구입하여 공동운영을 했다. 이후 각자 결혼을 하여 삼일은 이 집에서, 삼일은 저 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63세를 살았고 세 시간 간격으로 운명했다. 그들이 늘 했던 말은 “우리 둘은 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었다”는 말이었다.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어라”였다. 한 몸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소마’인데 개별적 특성을 그대로 지닌 개체적 몸을 뜻한다. 이런 몸은 하나로 묶어도 비자니 자매처럼 갈등과 분열과 분쟁뿐이다. 몸을 의미하는 다른 하나는 ‘사르크스’인데 창과 엥처럼 마음과 생각과 뜻을 하나로 결합한 큰 몸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생각과 마음과 뜻을 가진 몸이지만 그 다른 것이 유기적이고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큰 생각, 큰 마음, 큰 뜻을 이루는 큰 한의 거대한 한 몸이 사르크스이다. ‘소마’는 하나(one)의 한 몸이지만 ‘사르크스’는 큰 한(grand)의 한 몸이다.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어라”는 그 한 몸은 ‘소마’의 한 몸이 아니라 ‘사르크스’의 한 몸으로 큰 한 몸을 말한다. 아담의 원뜻은 인류라는 뜻이다. 인류가 큰 한 몸으로 살기를 명령한 것이다. 한(grand)몸을 이루고 공생해야 할 세상은 지금은 한(one)몸에만 머물러 있어 갈등과 분열과 분쟁과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태극기의 ‘태극’은 서로 다른 양극이 큰 원에서 한 몸 이룸을 의미하고, 대한의 ‘한’은 무한히 큰 한(grand)으로 한 몸을 이룬다는 뜻이다. 그런 국호를 가진 우리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있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하나에 하나를 더해 큰 하나가 되고, 합하여 둘이 큰 한 몸을 이루는 한 몸살기로 살아보자.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어라”

2021-10-13

매듭풀기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얼마 전 조용기 목사가 작고하였다. 그는 단일 교회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자가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켜 기네스북에 올랐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모든 일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요한의 기도문을 교리화 하여 영혼관리만 잘 하면 모든 일이 잘되고 육신도 건강해 진다는 삼박자 축복교리를 주창했다. 이는 매우 간단명료한 신앙방식으로 순식간에 교회를 급성장 시켰다.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매듭이 생기면 당사자를 만나 술 한잔 하면서 매듭을 풀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당사자를 만나 풀려고 하지 않고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 매듭을 풀려고 한다. 모든 문제를 오직 하나님을 만나 해결하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를 영화화 한 ‘밀양’에서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범죄자가 자신에게 사죄의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은 이미 하나님을 만나 회개하고 용서 받은 것으로 모든 문제는 끝났다고 하는 뻔뻔한 신앙을 보고 극노광분(極怒狂忿)한다. 하나님과의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삼박자축복신앙의 부작용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삼박자축복교리의 근거가 된 요한의 메시지는 영지주의에 빠진 자들을 바로 잡기 위해 쓴 편지이다. 영지주의는 하늘과 영에 속한 것은 선하고, 땅과 육에 속한 것은 악하다고 보고 오직 하늘과 영에 관련된 영혼만 거룩하게 유지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는 신앙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유입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준 요한의 메시지로 하나님과의 문제를 잘 해결하려는 것처럼 사람과의 일도 잘 해결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오히려 영지주의적 삼박자축복교리로 왜곡 변형되었다. 그 결과 사람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어도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 가지면 된다는 신행(信行)불일치의 획일주의적 만사형통 신앙에 빠지게 되는 부작용이 생기게 된 것이다.예수는 “나를 예배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부터 하라”했고 “사람에게 한 일이 곧 하나님께 한 일이요 사람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하나님께 하지 않을 일이라”하였으며 율법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했을 때에 경천애인(敬天愛人) 즉 하나님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면서 사람과의 매듭풀기 없이는 하나님과 매듭풀기도 없다고 했다. 그동안 기독교 신앙은 이웃과의 매듭풀기를 외면 해 왔다. 그렇게 된 것은 땅의 일을 외면하고 하늘의 일에만 몰두하는 영지주의적 삼박자축복 신앙의 영향이 적지 않다. 영지주의적 삼박자축복 신앙은 이제 고인의 떠남과 함께 같이 떠나보내고 왜곡된 신앙을 바로 잡아야 할 때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2021-10-06

보물찾기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제천에 가면 청풍호 주변에 금월봉이라는 곳이 있다. 아세아 시멘트 영월공장에서 시멘트 제조에 필요한 흙을 공급하기 위한 땅이었는데 흙은 없고 온통 바위 뿐이어서 헐값에 팔아버렸다. 이 땅을 산 사람이 평토 작업을 하려고 흙을 파내다 보니 그 바위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물을 뿌려가며 흙만 걷어 내었더니 기암괴석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모양이 마치 금강산에 달이 뜬 봉우리 같아서 이름을 ‘금월봉’이라 지었다. 이를 제천시가 수십억원에 사들여 관광지로 조성하여 지금의 국민 관광지가 되었다. 땅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처음 소유자는 땅을 치고 통곡을 하였다. 아무리 내 속에 보물이 있어도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 보물찾기와 같다.예수님 비유이야기에 보물찾기 이야기가 있다. 남의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 보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그 밭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노력하는 자가 보물을 얻는다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밭은 세상이요 심어놓은 보물(씨앗)은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하면서 “너희들은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심어놓은 천국의 보물”이라고 했다. 내가 노력해서 찾아 가져갈 보물이 아니라 내 자신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 보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오해하여서 사람들은 그 보물을 사유화하려는 일에 몰두해 왔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예수는 이렇게 당부한다. 그 보물은 네가 가져갈 보물이 아니라 곳간을 열어 나누어 주어야 할 보물이라고 했다. (마태 13장 52절)보물찾기가 보물 나누기로 이어지지 않으면 좋은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 속에는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을까? 좋은 세상을 만들 보물이 내 안에 어디 숨겨져 있을까?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나무는 보이지 않게 심겨진 작은 씨앗에서, 빵의 재료가 되는 가루를 부풀게 하는 것 역시 보이지 않게 숨겨진 누룩에서, 많은 열매도 보이지 않게 심겨진 한 알의 밀알에서 비롯된 것이라 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대천바닷가는 진토라서 쓸모없는 땅이었지만 그 진토에 나트륨, 마그네슘, 칼슘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노폐물배설을 촉진 시키고,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 피부를 곱게 하는 성분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머드 축제를 통해 한 해에 600억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보물 해수욕장이 되었다. 보물은 없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었을 뿐이다. 예수의 보물찾기 이야기는 없다고 생각하는 보물 곳간을 찾아서 그 보물을 꺼내어 나누어 줌으로 세상을 천국과 같은 좋은 세상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 보물찾기에 나서야 되지 않을까?

2021-09-29

하물숭배(荷物崇拜)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1890년대 유럽이 남태평양 도서(島嶼)를 식민지로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원주민들에 하물숭배(荷物崇拜)라는 종교가 생겼다. 생전 처음 보는 화물선에서 필요한 모든 물건을 내려 쓰는 것을 보고 화물선을 모든 것을 내려 주는 신으로 생각하여 하물숭배의 제의를 드렸다. 1999년 이를 취재하러 간 토론토스타의 기자가 “어찌하여 어리석게도 하물숭배를 하느냐?”고 묻자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우리는 불과 60년을 숭배하고 있지만 그러는 당신들은 어찌하여 2천년 동안이나 하물숭배를 하느냐?”고 되물었다.베드로는 밤새 그물질을 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다. 날이 새고 해가 중천에 떠 그물질을 그만둘 시간에 예수님이 오셔서 뜬금없이 다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한다. 고기가 활동하지 않은 시간이라 허탕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서 그물을 던졌더니 두 배 가득 고기를 잡았다. 역사학자 플루타르크가 쓴 책에 의하면 생선 한 수레 가격이 양 백마리와 맞먹는다고 했으니 놀랍게도 그때 잡은 고기의 값은 지금의 돈으로 3억 정도가 된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면 큰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예수를 하물신으로 추앙했다. 이들은 나중에 예수에게 책망을 듣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표적이란 무엇을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보여주는 사인(sign)이다. 그들은 그 사건을 깨우침을 위한 표적으로 보지 않고 예수를 하물신으로 여겨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경험을 한 후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면서 예수를 떠나겠다고 한다. 예수를 섬기면 엄청난 하물이 따르는데 떠나겠다는 것은 더이상 예수를 하물신으로는 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가 말한다. “이제 너는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구하는 어부가 되리라.” 더 이상 떡을 먹고 배를 채우기 위한 하물신 숭배자가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제자가 되라는 것이다.도강불고선(渡江不顧船·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고), 득어경망전(得魚更忘筌·고기를 잡은 후엔 그물을 버리라)이라 했다. 베드로는 하물숭배의 배와 그물을 버리고 사람을 구원하는 어부로서의 새로운 길을 갔다. 기독교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오늘의 기독교가 하물숭배의 번영과 축복의 신앙에 빠져있다고 한다. 어디 기독교뿐이랴. 우리 모두가 떡을 먹고 배를 채우기 위한 하물숭배에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2021-09-22

원 플러스 원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벌써부터 모든 뉴스의 관심이 대선에 있는 듯하다. 각 당의 대선 후보가 된 사람이 어떤 구호를 들고 나올지 궁금하다. 잊혀지지 않는 대선구호의 고전이 있다면 3대 대통령선거 때인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못 살겠다 갈아보자’이다. 이에 맞서 당시 여당인 자유당은 ‘갈아봤자 소용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로 대응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국민은 정권을 바꾸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약간의 바뀐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갈아봐도 별 소용없었다’는 느낌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적폐청산을 외치지만 그 적폐청산이 정치 보복이라는 의구심을 받기도 했다. 정치보복이 반복되는 것은 “너희들이 그렇게 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한다”는 1:1의 보상 또는 보복원리가 작용되고 있다. 철학자 세네카는 “정복한 자들은 정복당한 자들에게 율법을 배운다”고 했고 마틴 루터 킹 2세는 “승자는 패자와 똑 같은 것을 생산해낸다”고 했다. 조지 윌리엄 러셀도 “승자는 패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재창조 한다”고 했고 히틀러의 홍보장관 괴벨스까지도 “우리가 패배해도 저들은 우리의 것을 배우게 될 것이기에 결국은 우리가 승자이다”고 했다.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이 없이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이유는 패자의 것을 답습하면서 1:1의 보복적 원리로 살기 때문이다.예수이전의 유대인의 삶은 1:1의 원리였다. 함무라비법전에도 나오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다”는 동태보상법은 범죄를 막고자 했던 1:1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보복의 반복을 불러 왔다. 이런 동태보상법의 정치로는 국민을 감동케 하는 정치가 되지 못한다. 예수는 1:1의 동태보상법을 깨고 원 플러스 원(1+1)의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왼편 뺨을 치거든 오른편 뺨도 대어주라. 속옷을 뺏어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도 주어라.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리동행을 하여라” 하나를 달라 하면 하나에 하나를 더하여 원 플러스 원으로 살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갈아봤자 소용없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진정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면 1:1의 원리로는 안 된다. 1+1의 제3의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 이를 비현실적이고 실천불가한 가르침이라 했지만 간디는 이를 실천함으로 제3의 길을 보여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차치하더라도 신앙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만이라도 이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받은대로 보복하는 1:1의 삶을 버리고 1+1원리로 살아간다면 모두가 행복해 지리라.

2021-09-15

십리동행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강제 동원되어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일을 하였다. 특히 군인들이 전장으로 이동할 때에 자신의 배낭을 짊어지게 하여 운반하게 했는데 법령으로는 1마일 즉 오리까지만 허용했다. 간간히 이 법을 어긴 병사들이 있었는데 감봉과 명예전역, 매질로 다스렸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이 있다. 강제하는 법은 오리까지만 허용하였다. 피 지배계급이 되어 버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억울하게 강제노역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만일 점령군의 한 사람이 그의 배낭을 지고 오리를 가자고 강요하거든 십리를 가 주어라”(성경영역본)고 했다. 그것은 개인에게는 선을 베푸는 행위이지만 한 편으로는 지배자의 정복전쟁을 도우는 악행이기도 하다. 라인홀드 니버는 “불의한 사회 속에서 행한 선한 행위는 불의한 일을 도운 것이 되기에 무효”라고 했다. 에밀 부루너도 “잘못 탄 기차 안에서의 선행은 무효다”라고 했다. 그런데 왜 예수는 십리동행을 하라고 했을까? 예수는 로마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힘으로 강제하여 평화를 이루는 이른바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를 추구하였다. 로마는 평화를 이루는 길은 전쟁으로 세상을 정복하여 하나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해서 ‘벨룸로마눔-로마의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의 대동아전쟁의 목적을 동북아평화라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예수는 평화는 끝없이 베푸는 선행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로마와는 다른 길을 제시했다. 한때 이스라엘도 로마와 같은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평화를 되찾기 위하여 마카비는 창칼을 들고 반란을 일으켜 잠시 독립을 쟁취하고 평화를 얻는다. 그러나 폭력의 힘으로 얻는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고 기원후 70년 이스라엘은 더 큰 로마의 폭력에 의해 완전 멸망한다. 예수는 이 일을 예견하여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했다.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한 로마는 세월이 흘러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고 이후에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죽기 전 했던 말로 알려진 “나는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는데 저 청년 예수는 사랑으로 세계를 정복하였다”는 말과 같이 로마 황제가 사랑의 힘에 굴복한 것이다. 십리동행을 말한 예수의 가르침은 물리적 힘이 강제하려는 세상을 향해 다른 길을 제시한 것이다.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이었다. 강제하는 힘과 힘의 대결로 결코 세상의 평화가 오지 않음을 우리는 다 경험하였고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제3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2021-09-08

겉옷도 줘 버리라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예수 시대에 어떤 사람이 속옷을 담보로 하여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여 속옷을 빼앗기게 되었다. 유대인은 두 가지 옷을 입고 다녔는데 속옷은 알몸을 가리기 위한 옷이고 겉옷은 덮고 자는 이불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옷이 흔하지만 당시에 옷도 담보물이 되거나 전당물이 되는 품목 중에 하나였다. 이에 대한 율법의 규정은 극빈자의 옷이 전당물이면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그 옷을 돌려주라고 되어 있다. 알몸을 가리고 덮고 자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의한 자들은 옷을 돌려주지 않았고 오히려 벌금으로 농산물 중에 포도주를 받아갔다. 정의사회를 구현하려 했던 아모스는 당시 사회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불의한 자들은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워자고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신다.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지 말고 공의를 쓴 쑥으로 바꾸지 말며,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했다. 극빈자에 대한 담보물을 돌려주는 것이 사회통합을 위한 일이기에 율법으로 까지 규정하였는데 그들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이런 일은 예수 시대에 까지 지속되었다. 속옷을 전당 잡았다가 갚지 못해 고발당하고 속옷을 빼앗기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당연히 율법대로라면 해가 지기 전에 그 옷을 돌려받아야 할 것인데 예수는 채무자에게 황당한 말을 한다. “겉옷도 줘 버려라” 예수의 말대로 겉옷을 줘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채권자는 한 손에 속옷을, 한 손엔 겉옷을 들고 멋적게 서 있을 것이다. 채무자는 알몸을 가리지 못한 수치스런 몸을 사람들 앞에 보여주면서 이제 남은 것은 벌거벗은 몸뚱아리 뿐이니 다음에는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하는 표정으로 서 있다. 이런 장면에서 방청객들은 뭐라고 말할까? “아무리 그래도 옷까지 가져가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율법에는 저당물을 돌려주며 심지어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라고 했는데.”유대인들의 전통에는 벌거벗은 자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벌거벗게 한 자가 부끄럽다고 했다. 앗수르의 공격으로 아스돗 사람이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고 피난 갔는데 애굽은 오히려 이들을 벌거벗겨 엉덩이를 드러내게 하여 앗수르로 돌려보냈다. 성경에는 벌거벗은 아스돗 사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이들을 벌거벗겨 사지로 몰아내는 애굽이 수치스럽고 부끄럽다고 기록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 일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삼년동안 벌거벗은 몸으로 정의를 외치며 다녔다. 겉옷도 줘 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서 있으라고 한 예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만하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정말 부끄러워 해야 할 사람이 누구일까?

2021-09-01

그림자 노동

강영식 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요즘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진동벨을 주는데 그 벨이 울리면 가서 커피 잔을 받아 오고 나갈 때도 커피 잔을 직접 반납해야 한다.이런 일은 과거에 종업원들이 했던 일인데 고객이 직접하게 되었으니 고객이 왕이라는 시대는 지나가고 소비자가 종업원이 되었다가 고객이 되었다 하는 종객(從客)의 시대가 되어 버린듯하다.노동을 하고도 그 대가를 받지 못하는 일을 이반 일리치는 그림자노동(Shadow work)이라 했다. 내 나름대로 그림자노동을 두 가지로 분류해 본다면 첫째는 상업적 그림자노동(Commercal Shadow Work)이다. 판매자가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하여 직원을 줄이고 그 일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때 그 소비자의 노동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봉사적 그림자노동(Voluntary Shadow work)이다. 자원봉사는 무상노동으로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는다. 이에 대한 보상이 있다면 비 물질적인 보람과 기쁨으로 봉사적 그림자노동에 속한다.성경에 포도원의 품꾼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농사를 위하여 일꾼들을 찾아 포도원에 보낸다. 오전 6시에 온 일꾼이 있고, 오전 9시와 낮 12시, 오후 3시에 온 일꾼이 있고, 일이 끝나가는 저녁 5시에 온 일꾼도 있었다. 주인은 이들에게 품삯을 지불하였다.일찍 와서 종일 일한 사람이나 늦게 와서 단 한 시간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하루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그러자 일찍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평을 하였다. 잉여 노동에 공정한 대가를 받지 않은 노동을 그림자 노동으로 보고 그 노동에 대하여 정당한 보상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주인은 약속한 하루 품삯을 공정하게 지불하였고 늦게 온 사람에게는 내가 선을 베푼 것인데 그것을 당신은 악하다고 보는 것이냐 하면서 반문하였다. 늦게 온 사람에게 비하면 그림자노동을 한 셈이지만 약속된 하루 품삯을 받았으니 그림자노동이라 볼 수도 없다.이 이야기의 요점은 노동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말함이다. 일꾼들은 자신이 행한 일을 상업적 그림자노동으로 생각하였고 주인은 봉사적 그림자노동으로 생각했다. 그 이유는 이야기 서두에 이 이야기는 천국을 위한 일이라고 전제하기 때문이다.천국은 상업적 그림자노동으로는 만들어 지지 않고 오직 봉사적 그림자노동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림자노동의 대표가 되는 가사노동을 상업적 그림자노동으로 생각하여 대가를 바란다면 가정의 천국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대가를 바라지 않고 가정을 위해 봉사하는 그림자노동이라 생각하면서 할 때에 비로소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봉사적 그림자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질 때에 천국과 같은 곳이 되어가지 않을까?

2021-08-18

왼 뺨도 돌려 대어라고?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잘 알려진 예수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비실제적이고, 피학적이고 자멸적이다. 이것을 비폭력무저항주의라고 하기도 하고, 무한히 양보하는 사랑이라고도 한다. 이 가르침의 해석을 위한 배경을 미쉬나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가르침은 불의한 지배자와 피지배자와의 관계를 상정한다.미쉬나에는 동급신분에서 손바닥으로 상대방의 뺨을 때리면 200일에 해당하는 품삯을, 손등으로 때리면 400일에 해당되는 품삯을 벌금으로 물어야 한다고 했다. 손등으로 치는 행위는 모멸감과 수치를 주기 위한 것으로 육신의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를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에 손등으로 뺨을 치는 행위는 노예나 아내나 자녀나 여자나 피지배국의 사람에게 모욕과 수치를 주는 행위로 지배자의 차별적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이 경우에는 벌금이 주어지지 않았다. 예수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피지배국이었고 이들은 계급, 인종, 성별, 연령, 신분의 차별을 받고 종종 지배권력자들에 의해 손등으로 뺨을 맞고 멸시와 수치를 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상대방의 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치려면 왼손을 사용해야 한다. 당시 왼손은 불결한 일을 할 때만 사용하였다. 쿰란 공동체 생활규칙에는 왼손으로 손짓만 해도 열흘간 속죄 고행을 처벌로 받았다.결국 오른손을 사용해야 하는데 오른 뺨을 오른손으로 치려면 손등으로 칠 수밖에 없기에 오른 뺨을 치는 행위는 주로 피지배자에게 굴욕감을 주려 할 때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 뺨을 맞은 뒤 오른 뺨을 한 번 더 대어 주어라고 하지 않고 왼 뺨을 대어 주라고 했다. 왼손 사용이 금지되어 있기에 왼 뺨을 치려면 오른 손바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미쉬나에는 손바닥으로 치는 행위는 같은 신분의 경우일 때이다. 결국 왼 뺨을 치는 행위는 피지배자를 동등한 관계로 인정하는 셈이니 결국 왼 뺨을 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왼 뺨을 대어 주는 행위는 계급, 인종, 성별, 연령, 신분의 차별을 고발하고 동등함을 주장하는 약자의 비폭력무저항 운동이다.간디는 비폭력항의에 대해 “모든 굴욕감을 주려는 것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이라 했다. 피지배자인 인도인들이 끝없이 줄을 지어 맞고 쓰러지고 또 맞고 쓰러지는 행위를 보고 지배국의 영국기자는 오히려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했다.결국 왼 뺨을 돌려대는 행위는 지배자들의 차별에 대한 저항이요 불의한 지배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비폭력무저항운동이다. 갑질과 언어폭력이 난무한 우리 사회에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2021-08-04

사소한 일은 없다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느냐 소금에 찍어 먹느냐는 사소한 문제로 다투다가 급기야 감정이 격화되어 큰 싸움이 되고 결국 이혼하게 된 부부가 있다. 커피에 설탕을 탈까 소금을 탈까 그 문제로 싸우다가 이혼한 부부도 있다고 한다. 심리학자 리처드 칼슨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의 대부분은 이처럼 사소한 문제라고 하면서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말라”고 했다. 따져보면 목숨을 걸만한 중대한 일은 없으니 목숨 걸고 싸우지 말고 초연하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목숨 걸고 싸우는 일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면 사소한 일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닌 것이 된다. 그래서 테레사 수녀는 “사소한 일은 없다. 모든 일은 다 소중하다”고 하면서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말고 충실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했다.보험회사의 관리자였던 하인리히는 7만5천 건의 산업재해를 분석한 결과 하나의 대형사고가 일어나기까지 29건의 작은 사고가 먼저 일어나고, 29건의 작은 사고들은 또 다시 300건의 경미한 사고가 겹쳐 누적되면서 발생한다는 1:29:300이라는 하인리히 법칙을 발표했다. 사소한 문제를 무시하여 그대로 놔두면 그것이 누적되어 돌이킬 수 없는 대형 사고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도 숱한 작은 징후들이 포착되었는데 사소한 문제로 무시한 결과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로 이어졌고 미국의 9·11테러 사건 역시 수많은 테러의 조짐이 있다는 경고가 있었는데 역시 이를 사소한 일로 무시하여 발생하였다.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이 멸절 시키라고 했던 가나안 땅의 가사, 가드, 아스돗이라는 작은 마을을 사소하다고 여겨 멸절 시키지 않자 후에 골리앗과 들릴라가 이 마을에서 나와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손상을 이스라엘에 입힌다. 성경 아가서에는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했다. 보잘 것 없는 작은 여우가 나무를 손상시키지는 못할 것으로 여겨 무시해 버리면 그 여우가 봄에 꽃잎을 따 먹어 버리기 때문에 결국은 과수농사를 망하게 한다는 것이다.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2014년 세월호 침몰, 2020년 이천 물류센터 화재, 최근에 쿠팡물류센터 화재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생명을 앗아간 대형사고가 적지 않다. 이런 대형사고가 반복되는 것은 업무태만, 안전교육 및 훈련 미비, 정비 불량 등을 사소한 일로 여겨 무시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고 싸워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사소한 일을 무시하거나 방치하지 말며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이다.

2021-07-14

행복을 담는 그릇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그날에 잡을 고기를 잡아 놓고 여유롭게 누워 쉬고 있는 어부를 보고 한 부자가 말하길 “더 많은 고기를 잡으면 더 큰 배를 살 수 있고 그러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큰 부자가 되면 뭐하느냐?”고 어부가 물으니 자기처럼 평안히 삶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어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당신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나는 지금 평안히 삶을 즐기고 있는 중이요”했다. 소확행을 생각나게 하는 앤소니 드 멜로의 글이다.얼마 전부터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작은 것에서 확실한 행복을 얻는다는 뜻이다. 사회학자들은 미래가 없는 절망적인 청년들이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아 나서면서 이 말이 생겼다고 한다. 청년들이 큰 꿈을 가지지 않고 현실 도피적 이기주의, 꿈과 이상을 쟁취할 진취성이 없는 나약한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다면서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미래가 암울한 칠포세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는 현실적인 생존전략으로 이를 부정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미국의 신경생리학자 애넛 비튼과 이스라엘의 루드 그로스 이서로프라는 사람이 자살하여 죽은 시체와 자연사 하여 죽은 시체를 놓고 뇌의 구조를 정밀 분석해 보았더니 사람의 뇌 속에는 행복을 담는 그릇이 있는데 자살한 사람의 경우 보통 사람보다 아홉 배가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의학적인 용어로는 ‘엔도르핀에 대한 반응인자’이다. 행복한 사람은 뇌 속에 행복을 담는 그릇이 작아서 사소한 일에도 행복을 느끼지만 자살자의 경우는 행복의 그릇이 너무 커서 왠만한 것으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은 뇌 속에 행복을 담는 그릇의 크기에 달렸다는 것이 뇌 과학자들의 연구결과이다.옛날보다 더 살기 좋아졌는데 왜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더 잃어버리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일까? 왜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뒤지는 나라 방글라데시나 부탄 같은 나라의 행복지수가 우리보다 더 높을까? 그들의 뇌에는 우리의 뇌 보다 행복을 담는 그릇이 작기 때문이라고 뇌 과학자는 말한다.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 있었는데도 행복하지 못하여 또 다른 남편을 두고 있다고 했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또 다른 남편에게서 부족함을 채우려 하지 말고 하나만으로도 그 속에서 마르지 않는 생수를 찾으라 했다. 이는 행복의 그릇을 크게 하지 말고 사소한 것으로도 채울 수 있는 작은 행복의 그릇을 만들라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뇌 속에 행복을 담는 너무 큰 그릇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21-06-23

당신의 등불은 빛나고 있습니까?

조근식포항침례교회담임목사 남유럽 어느 조그만 마을에 해가 지고 어두움이 짙어 오면 하얀 집들에 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다. 다만 마을을 굽어보며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당만은 어둠을 지키듯 깜깜한 채 우뚝 서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교회를 ‘많은 등불의 집’이라고 불렀는데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400년 전 이 교회를 지은 공작에게는 10명의 예쁜 딸이 있었다. 공작은 어린 딸들이 정원에서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딸들이 성장한 다음에는 바느질하는 모습, 궁전을 장식하려고 꽃다발을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살았다. 그런데 딸들이 하나씩 결혼을 하게 되자 공작은 매우 슬퍼졌다.사람들이 위로해 줄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집안에 딸들의 자리가 제각기 있는데 어느 한구석이 비면 집안은 어둡고 쓸쓸하오.”그런 중에 크리스마스가 되면 시집간 딸들이 모두 돌아와 잔치를 베풀고 공작을 기쁘게 해 주곤 했다. 그런데 어느 해 먼 나라의 왕비가 된 딸이 오지 못해 매우 슬퍼했다. 나머지 딸들은 악사를 동원하여 아름다운 음악으로 아버지를 위로하였지만 아름다운 딸의 노랫소리를 대신하지 못했다.나이가 많아지자 공작은 후세에 남길만한 무엇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생각 끝에 아름다운 교회당을 하나 짓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위로를 얻게 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교회당이 완성되었을 때 공작은 딸들에게 보여주었다. 건물의 아름다운 선, 성스러운 내부 장식, 조각품, 색유리, 어느 것 하나 감탄하지 않을 것이 없었다.교회당을 돌아본 딸들이 “그런데 아버지, 등불은 어디다 걸죠? 교회당 안에 등불이 없어요?”라고 물었다.공작은 기다렸다는듯 미소를 띠며 이렇게 설명했다. “그건 말이다. 이 늙은 아버지의 특별한 계획이란다. 등불을 거는 데가 없지? 교회당에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등불을 들고 올 거야. 마을 사람들에게 각자 하나씩 나누어 줄 멋진 놋쇠 등을 준비해 두었단다.” 그리고 말을 잠시 끊었다가 이었다. “정한 시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집의 어느 한구석은 어둡고 쓸쓸할 거야.”그로부터 400년, 그 조그만 놋쇠 등불은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져 내려왔다. 누구나 그것을 고이 간직했다. 이 오래된 교회에서 종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지면 마을 사람들은 제각기 등불을 가지고 언덕 위 교회당으로 올라간다. 교회당은 늘 마을 사람들로 가득 메워진다. 아무도 자기 자리가 어둡고 쓸쓸한 구석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2021-06-09

선한 영향력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인류의 위대한 발견 중에 하나가 항생제의 시초가 된 페니실린이다. 페니실린의 발견으로 인류의 평균수명이 늘고 폐렴과 같은 세균성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했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플레밍은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고 이에 대한 감사를 처칠과 그의 부모에게 돌렸다. 처칠이 어렸을 때에 물에 빠져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플레밍이 물에 뛰어 들어 처칠을 구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처칠의 부모는 플레밍이 의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결국 페니실린을 만들게 되었다. 처칠과 플레밍이 서로에게 끼친 영향력이 인류를 구한 셈인데 당시에는 아무도 이런 결과가 올 줄을 예측하지 못했다.서정주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치고, 무서리가 내리고, 잠을 자지 못하는 밤을 보낸다고 했다. 국화와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는 개체의 활동이 서로 영향력을 주어 한 송이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자연만물은 개별적으로 존립하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이 연결되어 생성되고 존재한다는 가이아 이론과 연기설은 닐스 보어의 양자역학에 따른 거리초월현상실험에서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아원자의 미립자 하나를 쪼개면 두 개가 서로 반대쪽으로 수십 수백㎞로 달아나면서 회전하는데 그 중 하나가 회전 방향을 바꾸면 신기하게도 반대편에 있는 입자도 같이 방향전환을 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라이언 왓슨은 따로 떨어져 사는 같은 종의 원숭이 중 한쪽이 학습한 기술을 다른 곳에 사는 원숭이에게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대로 답습한다는 실험결과를 발표하였고 셀드레이크도 비슷한 연구에서 같은 형태의 종에게서는 학습이 되지 않아도 시공간을 초월해서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는 실험결과를 얻어 그것을 형태공명이라 명명했다. 삼라만상의 개별적인 활동이 타자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을 헤겔은 자각적 정신 또는 세계정신이라 했고 이런 정신으로 사는 개인을 보편적 개체라 했다.이렇듯 개체인 나 한 사람의 사소한 언행과 생각은 언제 어디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파괴적 영향력을 지니는 보편적 개체로 각자의 삶을 자각하게 하고 세계정신으로 이끌게 된다. 내 뱉는 숨 하나, 표정 하나, 손짓 하나, 말 한마디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타자에게 생과 사의 영향력을 끼치는 자각정신이요 세계정신임을 생각하면 그 무엇 하나라도 무심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다. 한 송이 국화도 삼라만상이 연합하여 피울진데 이런 나의 개별적이고 개체적인 삶이 우주전체에 선한 영향력이 되어 한 송이 평화의 꽃을 피웠으면 좋겠다.

2021-06-02

보이면 먼저 섬겨라

조근식포항침례교회담임목사필리핀의 유명한 부자 사업가의 아들 카풍카우라는 청년이 신학교에 들어갔다.학교에 가 보니 화장실과 욕실이 더럽고 냄새가 나는 등 너무 불결해서 불만을 품고 학장에게 갔다.“학장님,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 좀 치워주십시오. 깨끗하게 해주세요.”“알았네. 내가 다 알아서 조치할 테니 가 있게.”조금 뒤에 이 학생이 그 화장실에 가 보았다.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씻는 소리, 닦는 소리가 들렸다. 청소부를 데려다가 청소하는 줄 알고 들어가 보니 학장님이 직접 청소하고 있었다.“학장님, 청소부 데려다가 시키면 될 텐데 왜 직접 화장실 청소를 하십니까?”“천국은 그런 곳이 아니라네. 교회나 신학교는 일을 보는 사람이 먼저 하는 걸세.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네.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니네.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잘못됐다고 보는 사람, 쓰레기를 보는 사람 하나하나가 청소할 때 우리 삶의 주변은 깨끗해질 수 있는 걸세. 자네가 부잣집 아들로 여기 와서 보니까 좀 불결하게 보이지 다른 사람은 별로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네. 그러니 느끼는 사람이 일하면 이 학교는 깨끗해질 수 있는 거라네.”“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에제 18,31, 복음 환호송).예수님을 본받아 하느님을 닮아야 할 우리에게 위의 복음 말씀은 매우 전형적이다. 즉,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라는 권고다.그 죄악의 실상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 행태를 들어 그 죄악의 실상을 고발하셨다. 이를테면 본래는 성냥갑 크기의 상자에 중요한 성경 구절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기도하기 위해 고안된 성구갑을 본 크기보다 더 넓게 만들어서는 이를 담는 옷자락 술까지 더 길게 늘여서 많은 성경 메모를 가지고 다니며 열심히 기도하는 척 한다든지, 잔칫집에서나 회당에서 높은 사람들이나 앉는 윗자리를 좋아한다든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거나 사람들에게서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버릇 등이었다.이러한 위선의 죄악상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새 마음과 새 영으로 겸손하게 서로 섬기는 태도를 주문하셨다.아름다운 섬김의 비밀을 깨닫고 섬기다 보면 여러분의 주위가 180도로 바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보는 사람이 그것을 고치고 바꾸고 줍고 쓸 때, 나 하나가 회개하고 나 한 사람이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나눌 때 우리의 삶, 우리의 주변, 이 나라 모두가 행복하고 밝은 날이 올 것이다.

2021-05-26

빈자의 미학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1968년 같은 해에 ‘이재용’씨와 ‘김기환’씨가 태어났다. 이재용씨는 일류 가정교사를 통해 학업에 도움을 받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아버지의 회사에 입사하고 삼정전자 부회장이 된다. 같은 해에 태어난 김기환은 학교 다닐 때에 반장도 하고 성적도 우수하여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그럴 즈음인 1993년 대학입시 부정사건이 터진다. 부자들이 고액을 주고 대학입학 대리시험을 치게 하고 학력고사 성적을 조작하는 사건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가난하여 대학도 들어가지 못하는 김기환은 부정한 일을 저지르는 부자들의 불공정 횡포에 대한 반감이 극도에 이르게 된다. 결국 지존파를 조직하여 부자들을 골라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 사형에 처해졌다. 만일 이재용과 김기환이 바뀌어 태어났다면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예수는 “가난한 자가 복되고 부자는 천국가기 어렵다”고 가르쳤다. 물질을 초월한 디오게네스와 같은 심오한 철학자가 아닌 한 가난을 복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부자가 천국 가기 어렵다고 해서 부자 되길 포기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예수가 말한 가난한 자의 원어는 ‘프토코스’인데 이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외부적 힘에 의하여 재산과 노동력을 상실하여 가난해 진 자를 뜻한다. 이를 성경에는 ‘오클로스’라 했다. 대표적으로 잦은 전쟁으로 인하여 생긴 고아와 과부가 이에 속한다. 원래는 고아와 과부를 형제나 친척 그리고 지파공동체가 돌보게 되어 있지만 이들은 오히려 가난한 자의 가산을 삼키는 자가 되어 버렸다. 잉여자본을 억압과 착취에 사용하고 불공정 경쟁의 도구로 사용하면 불의한 부자요 천박한 자본주의가 된다. 예수는 이런 부자가 천국가기 어렵다고 했다. 반면에 아무리 가난하여도 세리와 창녀가 되거나 도적이나 강도가 되지 않고 의롭게 산다면 행복할 것이라 했다. 성경에 나오는 부잣집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더라도 도적이나 강도, 세리나 창녀가 되지 않은 거지 나사로가 바로 그이다. 예수는 이가 죽어 천국에 들어갔다고 했다. 예수가 말한 복된 빈자는 의로운 일을 하다가 가난하게 되었거나, 가난하게 되어도 의를 잃지 않고 살아간 사람이다. 아무리 어렵고 억울한 상황에서도 김기환과 같이 살인강도가 되지 않고 의롭게 사는 자를 향해 예수는 “행복하여라 너희 가난한 자여”라고 했다. 그 말은 위로의 말이 아니라 이들을 행복하게 하라는 실천적 선언으로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빈자의 미학이다.

2021-05-19

바른 선택으로 운명을 바꾸어라

조근식포항침례교회담임목사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외적 사태가 해결하기 힘든 커다란 고통을 야기할 때 우리는 그 사태를 역경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사태가 왜 우리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그 사태로 인한 고통의 이유와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을 때 역경은 우리의 정신을 약화시키고 삶을 파괴하는 ‘삶의 총체적 위기’로 지각된다.사전에서 역경(逆境)은 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사전적 정의를 통해 역경을 살펴보면, 첫째, 역경은 고통과 결부된 사태로, 고통을 촉발한 사건뿐만 아니라 그 사건으로부터 촉발되어 일어나는 일련의 고통스러운 경험들까지 포함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역경은 순경(順境)의 상대어로 현 사태가 순조롭지 않다는 사고에 근거한다.아프리카에 가면 결혼을 앞둔 처녀들에게 행하는 한가지 행사가 있다고 한다.그것은 많은 처녀들이 옥수수밭에 한고랑씩 맡아 그 고랑에서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 한 개씩을 따는 일인데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를 딴 처녀가 그날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규칙이 있는데 한번 지나친 것은 다시 돌아볼 수도 없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앞만 보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옥수수 하나만을 따야한다. 한 번 땄으면 도중에 좋은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고 다시 딸 수도 없었다.그런데 기이한 일은 제일 좋은 옥수수를 따러 들어간 처녀들은 한결같이 풀이 죽은 모습으로 제일 못나고 형편없는 옥수수를 들고 나온다는 것이다.왜 그럴까?이것이다 싶으면 저 앞에 더 좋은 것이 눈에 띠고, 저거다 싶으면 그 앞에 더 좋아보이는 것이 눈에 띠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고랑에 이르게 되고, 그제서야 비로소 “아까 마음에 드는 것 그냥 그것 다 가지고 나올 걸”하는 마음 때문에 속이 상하고, 할 수 없이 아무 것이나 따가지고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시집갈 처녀들의 마음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한 행사이다.제나라에 시집갈 딸을 두고 고민하는 아버지가 계셨다. 사윗감 둘을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아버지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딸이 아버지에게 물었다.“아버지 무슨 고민을 그리하십니까?”아버지 대답이 “너의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데, 동쪽에 사는 총각은 부자이긴 하지만 인물이 볼품없고, 서쪽에 사는 총각은 인물은 훌륭한데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단다.”고 대답하자, 딸이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동쪽에 가서 먹고 잠은 서쪽에 가서 잔다)하면 되지요”라고 하였다.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선택하셨습니까? 아니면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겠습니까?

2021-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