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강제 동원되어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일을 하였다. 특히 군인들이 전장으로 이동할 때에 자신의 배낭을 짊어지게 하여 운반하게 했는데 법령으로는 1마일 즉 오리까지만 허용했다. 간간히 이 법을 어긴 병사들이 있었는데 감봉과 명예전역, 매질로 다스렸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이 있다. 강제하는 법은 오리까지만 허용하였다. 피 지배계급이 되어 버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억울하게 강제노역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만일 점령군의 한 사람이 그의 배낭을 지고 오리를 가자고 강요하거든 십리를 가 주어라”(성경영역본)고 했다. 그것은 개인에게는 선을 베푸는 행위이지만 한 편으로는 지배자의 정복전쟁을 도우는 악행이기도 하다. 라인홀드 니버는 “불의한 사회 속에서 행한 선한 행위는 불의한 일을 도운 것이 되기에 무효”라고 했다. 에밀 부루너도 “잘못 탄 기차 안에서의 선행은 무효다”라고 했다. 그런데 왜 예수는 십리동행을 하라고 했을까? 예수는 로마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힘으로 강제하여 평화를 이루는 이른바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를 추구하였다. 로마는 평화를 이루는 길은 전쟁으로 세상을 정복하여 하나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해서 ‘벨룸로마눔-로마의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의 대동아전쟁의 목적을 동북아평화라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예수는 평화는 끝없이 베푸는 선행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로마와는 다른 길을 제시했다. 한때 이스라엘도 로마와 같은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평화를 되찾기 위하여 마카비는 창칼을 들고 반란을 일으켜 잠시 독립을 쟁취하고 평화를 얻는다. 그러나 폭력의 힘으로 얻는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고 기원후 70년 이스라엘은 더 큰 로마의 폭력에 의해 완전 멸망한다. 예수는 이 일을 예견하여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했다.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한 로마는 세월이 흘러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고 이후에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죽기 전 했던 말로 알려진 “나는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는데 저 청년 예수는 사랑으로 세계를 정복하였다”는 말과 같이 로마 황제가 사랑의 힘에 굴복한 것이다. 십리동행을 말한 예수의 가르침은 물리적 힘이 강제하려는 세상을 향해 다른 길을 제시한 것이다.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이었다. 강제하는 힘과 힘의 대결로 결코 세상의 평화가 오지 않음을 우리는 다 경험하였고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제3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