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강을 건널 때에 마지막 남기는 글을 세간世間에서는 사세辭世라 하고 불가에서는 임종게臨終偈, 열반송涅槃頌 혹은 입적게入寂偈라고도 한다.
선승들이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소회를 짧게 압축하여 후세에게 주는 글 대부분은 한마디로 인생의 무상함이다.
인간에게서 읽고, 쓰고, 느끼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대함이다.
한낮의 태양처럼 찬란한 역사든, 깊은 밤의 달빛에 젖은 야사든, 선인들께서 남아있는 자들에게 삶에 있어서 다시금 내밀히 관조하게 하려는 마지막 가르침이며 오롯이 할喝이요 방棒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삶의 등불을 켜주는 이는 죽은 자들이지만, 그들이 마지막 남긴 글 가운데 뼈에 사무친 말 대부분이 인생이 꿈만 같고 꿈꾸다 가는 것이며, 인생 성공의 삼위일체라는 출세욕, 물욕, 명예욕 이 모든 게 부질없으니 방하착放下着하라는 말이다.
인생이 "풀 초草, 이슬 로露" 풀에 맺힌 이슬과 같다 하여 초로인생이라고도 하지를 않던가?
아침나절 풀잎에 맺혀 있는 이슬은 한낮의 햇볕이 나면 흔적도 없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하니 덧없다고도 하지를 않던가?
불교든, 노장사상이든 주된 가르침은 내가 최고라는 오만방자하고 교만한 마음을 속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내 복력에 넘치는 지나친 욕심을 지니거나 잘난척하려는 얼굴 표정도 버려야 한다.
만사를 자신의 의지나 뜻대로 관철해 보려는 욕심 역시 버려야 한다.
공孔씨 가문의 큰 선생께옵서도 죽으실 때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입을 열어 보이시며, 다 빠져버린 이빨에 유일하게 남은 혀를 보임으로써 부드러운 게 진정 강함을 비유하여 몸소 보여 주었다 하지를 않던가?
세상을 다 지닌 절대 권력자라도, 가질 것 다 가진 부자라 하여도 만족하지 아니하고 더 욕심을 낸다면 권세와 재물의 노예일 뿐이며 거리의 노숙자만도 못한 부자유한 자가 아닐는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착취하거나 압박하여 타인을 궁지에 몰고 남을 어려움에 처하게 한다면 어찌 그를 인생의 승자라 할 것인가?
아프리카의 건조기에 수만 마리의 누우 떼가 살아남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건너야 하는 극지의 강에서 먼저 몇 마리가 뛰어들어 스스로 악어의 밥이 된다고 한다.
사실 유무를 떠나 몇 마리의 숭고한 희생으로 누우 떼가 유유하게 그 강을 건너게 하는 불멸의 리더십이 아닐 수 없다.
아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을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지?
무엇을 버리고 내던져 인습의 구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어야 하는지?
평야의 어느 어두워진 초막에서 달을 바라다 보며 조급한 고뇌에 빠진다.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나 내 살아온 이야기 전부를 보여 줄거나.
한 시대를 풍미하거나 한때의 영화를 누렸던 이들이여, 십수년 후면 우리 모두는 고인이 되어 한 줌 재로 돌아갈 터이다.
모질게 가지려고만 누리려고만 하덜말고 한번쯤 되돌아 보세나.
아, 그러고 보니 나 또한 부끄럽고 치욕스럽게 지나온 삶이었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