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부터 모든 뉴스의 관심이 대선에 있는 듯하다. 각 당의 대선 후보가 된 사람이 어떤 구호를 들고 나올지 궁금하다. 잊혀지지 않는 대선구호의 고전이 있다면 3대 대통령선거 때인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못 살겠다 갈아보자’이다. 이에 맞서 당시 여당인 자유당은 ‘갈아봤자 소용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로 대응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국민은 정권을 바꾸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약간의 바뀐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갈아봐도 별 소용없었다’는 느낌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적폐청산을 외치지만 그 적폐청산이 정치 보복이라는 의구심을 받기도 했다. 정치보복이 반복되는 것은 “너희들이 그렇게 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한다”는 1:1의 보상 또는 보복원리가 작용되고 있다. 철학자 세네카는 “정복한 자들은 정복당한 자들에게 율법을 배운다”고 했고 마틴 루터 킹 2세는 “승자는 패자와 똑 같은 것을 생산해낸다”고 했다. 조지 윌리엄 러셀도 “승자는 패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재창조 한다”고 했고 히틀러의 홍보장관 괴벨스까지도 “우리가 패배해도 저들은 우리의 것을 배우게 될 것이기에 결국은 우리가 승자이다”고 했다.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이 없이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이유는 패자의 것을 답습하면서 1:1의 보복적 원리로 살기 때문이다.
예수이전의 유대인의 삶은 1:1의 원리였다. 함무라비법전에도 나오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다”는 동태보상법은 범죄를 막고자 했던 1:1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보복의 반복을 불러 왔다. 이런 동태보상법의 정치로는 국민을 감동케 하는 정치가 되지 못한다. 예수는 1:1의 동태보상법을 깨고 원 플러스 원(1+1)의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왼편 뺨을 치거든 오른편 뺨도 대어주라. 속옷을 뺏어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도 주어라.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리동행을 하여라” 하나를 달라 하면 하나에 하나를 더하여 원 플러스 원으로 살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갈아봤자 소용없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진정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면 1:1의 원리로는 안 된다. 1+1의 제3의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 이를 비현실적이고 실천불가한 가르침이라 했지만 간디는 이를 실천함으로 제3의 길을 보여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차치하더라도 신앙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만이라도 이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받은대로 보복하는 1:1의 삶을 버리고 1+1원리로 살아간다면 모두가 행복해 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