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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달동네 같은 교회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한국 건축의 아버지 김수근씨는 “우리 선조들은 집을 건축할 때에 집 없는 이들이 묵어갈 사랑방을 두었다”면서 건축에는 반드시 이웃과 함께할 공간이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제자 승효상은 “무엇이 진정한 건축인가?”하는 문제로 고민하던 시기에 우연히 달동네를 방문하게 되었다. 달동네는 가난한 이들이 사는 곳이라 서로 필요한 자원을 나누며 살았다. 단칸방이라 집에서 모일 수 없어 지형을 따라 생성된 좁고 굽은 길에서 모였는데 그 길은 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 놀이터요, 치유가 이루어지는 병원이요, 물자를 나누는 시장이요, 삶을 공유하는 만남의 광장이었다. 이 길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재활의지를 다지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갈 힘을 얻었다. 승효상은 달동네의 길에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건축의 길을 찾았다.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교회란 무엇인가?”하고 묻자 교황은 “교회는 야전병원과 같은 곳”이라 했다. 야전병원은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치료해서 다시 전쟁터로 돌려보내는 재활의 장소이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상처입은 사람이 치료받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도록 도와주는 곳이 교회라는 뜻이다. 도시건축학자들은 야전병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 달동네라고 했다. 달동네는 인생의 낙오자들이 잠시 머물러 살면서 재활의 의지를 다지고 다시 나갈 준비를 하는 곳이다. 미관을 해친다는 명분으로 달동네를 없애려 하지만 달동네가 사회에 기능하는 가치는 값으로 매길 수 없기에 선진국가에서는 하나 이상의 달동네를 존속 시키고 있다. 미국의 할렘, 영국의 이스트런던, 프랑스의 아롱디스망이 그것이다.나사렛은 로마에 의해 파괴된 세포리스라는 도시에서 시오리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그 마을은 멸시받고 천대받은 인생의 낙오자들이 사는 달동네와 같은 곳이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속담이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철저히 버림받은 달동네였다. 그곳이 바로 예수의 고향이었다. 그곳에서 예수는 버려지고 상처입은 자들의 재활 치유자였고, 삶을 공유하는 희망의 예언자였고, 생명의 길을 제공하는 자였다. 당시 성공한 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축제를 즐겼지만 실패한 낙오자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성전출입이 금지 되었다. 예수는 이들을 위한 축제를 갈릴리 빈들에서 열었다. 그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불러온 달동네의 축제이다. 이 축제 정신이 모든 것을 공유하는 초대교회로 이어졌고 오늘의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프란치스코가 말한 야전병원은 오늘의 달동네이며 오늘의 교회는 달동네와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2021-04-28

간디가 던진 신발 한 짝

조근식 포항침례교회담임목사인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모한다스 간디는 인도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정신적 지도자다. 당시 인도는 영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간디가 있었다. 간디는 폭력을 쓰지 않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면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어느 날, 간디가 달리는 기차에 급히 올라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만 발을 잘못 올려놓는 실수로 신고 있던 신발 한 짝을 철길에 떨어뜨리고 기차를 탔다. 놀라운 것은 간디의 그다음 행동이었다. 간디는 기차에 오르자마자 얼른 신고 있던 다른 쪽 신발을 벗어서 차창 밖으로 던지는 것이었다.이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은 간디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선생님, 왜 남은 신발까지 길에 버리신 건가요?”그 말에 간디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어떤 길 가던 사람이 그 신발 한 짝만 주우면 무엇에 쓰겠나? 그러니 다른 짝까지 던져주면 그 신을 주운 사람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게 아닌가!”사람들은 그제야 간디의 배려심 깊은 행동을 이해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이러한 간디의 따뜻한 성품은 인도 국민을 넘어 세계인의 존경을 받았다.참으로 넉넉한 마음이며 작은 것도 나누려는 배려의 마음이다. 바로 그런 마음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지도자로 신뢰하였다. 참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아름답고 정이 풍기는 폭 넓은 마음과 생각을 느끼게 한다.어떤 사람은 어려운 삶의 현실을 한탄하며 세상이 왜 이러냐고 테스형을 부르며 묻고 있지만 테스형도 모른다고 말한다. 코로나19의 끝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들의 눈앞에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수없이 많겠지만 닫혀있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자. 누구에겐가 손을 펼쳐야 할 때 남아 있는 한 짝 신이라도 벗어 던지는 자들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혹시 아무 쓸데 없는 한 짝 신을 부둥켜안고 살지는 않는지?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가운데 사랑의 사도로 알려진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러한 말씀을 전하고 있다.“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2021-04-21

부활의 달에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 한다. 인간이 가지는 최고의 불안과 두려움은 죽음이다. 틸리히는 죽음을 있다가 없어지는 비존재라 했고 비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비존재의 충격’이라 했다.프로이드는 동식물은 비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없는데 오직 인간만이 비존재를 의식하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을 ‘자의식의 충격’이라 했다. 이런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인간은 세속적 방법에 의존한다.스퐁은 오늘날 카페인음료와 알코올음료가 확산되어 있는 것은 문화의 현상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비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서 안전을 산출하기 위한 화학적 방법으로 오히려 사회적 자살을 불러오는 슬로우 블릿이 될 뿐이라 했다.나의 삶을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반대파에 대한 학살과 정치 세력들을 제거하는 테러와 폭력, 인종차별 등 안전을 위한 물리적 방법 역시 공멸을 불러온다고 했다. 이런 세속적 방법으로는 두려움과 불안을 해결할 수 없음을 안 인간은 초월적 신만이 비존재로부터 오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부터 평안을 준다고 믿어 신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이 종교의 양식이 되었다고 프로이드는 주장한다.반면에 틸리히는 그 신은 만들어진 신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신으로 보았다. 모든 종교의 양식에 영생이 있음은 비존재의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기독교의 부활 역시 비존재가 다시 존재로 돌아옴을 의미한다.종교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세속적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종교마저도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본 회퍼는 히틀러의 불안 히스테리가 대량학살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교회가 침묵하는 것을 보고 탄식하면서 “신 없이 신 앞에”를 외쳤다. 본 회퍼가 바라본 교회는 교회가 아니었고 그들이 섬기는 신은 신이 아니었다.그래서 그는 “거짓된 신 없이 참된 신 앞에 서야 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신을 찾았을 때에 대변인 아론은 거짓 신인 금송아지 신을 만들어 숭배케 했던 것처럼 비존재의 충격으로부터 오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거짓 신을 만들어 섬기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봐야 한다. 니체는 그런 신을 죽은 신이라 했다.오늘의 종교인들 역시 불안에서 안전을 산출하기 위한 만들어진 거짓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닐까? 부활의 달 4월에 거짓된 신의 종교와 신앙이 죽고 참된 종교와 신앙이 부활되어 비존재의 두려움과 불안에서 자유하기를 소망한다.

2021-04-14

When life hands you a lemon, Make lemonade

조근식포항침례교회담임목사미국 사람들은 자동차 범퍼에다 여러 가지 종류의 스티커를 많이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많은 범퍼 스티커 가운데 이런 스티커 하나를 본 적이 있다.“아주 쓰고 신 레몬을 주거든 그것을 레모네이드 차로 만들어라(When life hands you a lemon, Make lemonade).”이 말은 쓰디쓴 인생의 경험이 오히려 달콤하고 아름다운 인생의 축복으로 변모할 수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신 레몬을 달콤한 레몬차로 만들어 마시라는 말이다.인생 여정 가운데 때때로 생각밖에 어려움을 통해서 근방이라도 낙심되고 절망스러워서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에서 포기하지 않고 딛고 일어설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그 고난은 결코 인생을 파괴하지 못할 것이다.신약성경에서 세상적인 모든 스펙을 쌓고 출세 가도를 달리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의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는 늘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래서 항상 고난도 즐거워하고 고통도 기뻐한다’라고 고백하였다.한자로 된 사자성어로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의 뜻은 쓴 것이 다하면 달콤한 맛이 찾아온다는 말이다. 순수한 우리말로는 ‘고생(苦生)끝에 낙이 온다’라는 속담과 상통된다고 볼 수 있다.우리는 인생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가 있고, 즐겁다고 느낄 때도 있으며, 고생스럽다고 느낄 때도 있다. 바꾸어 애기하면 낙(樂)을 찾거나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어렵고 힘든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는 뜻이다.세상 일은 돌고 도는 것인 만큼 힘든 고비를 참고 넘으면 평탄한 길이 열리기 마련이다. 영국 속담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모든 구름의 뒤는 은빛으로 빛난다)’도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전 세계가 코로나19로 몸살을 앓고 내일에 대한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이 시대를 살면서 우리 앞에 놓인 크고 작은 고난의 현장에서 지금 무진장 쓰고 시어서 입에 댈 수도 없는 레몬이지만 지혜를 구하며 수고를 아끼지 않고 시큼 달콤한 맛있는 레몬차로 바꾸어 마실 수 있다면 고난이 유익이며 축복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이 삶의 비밀을 알고 나면 엄청난 시험과 고난의 폭풍우 속에서도 우리는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울면서도 찬양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더 달콤한 차 한잔의 여유를 만끽하며 내일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2021-04-07

황소의 반란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몇 년 전에 멕시코의 투우장에 이런 일이 있었다. 투우경기를 하는 도중 황소 한 마리가 관중석으로 뛰어들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다치는 등 대 혼란이 일어났다. 언론은 이 사건에 ‘황소의 반란’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실었다. 모든 경기에는 공정한 룰이 있어야 하는데 투우는 그 룰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선 투우에 사용되는 황소는 송아지 때부터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 오직 붉은 천만 공격하도록 길들인다. 그리고 경기 전에 ‘삐까도르’라는 무사들이 창으로 소의 목 부위 운동신경을 절단하여 방향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결국 황소는 경기 내내 붉은 천만 공격하다가 힘을 다 소진하고 투우사의 칼을 맞고 숨을 거둔다. 알고 보면 투우는 비겁하고, 비열한 불공정한 경기이다. 황소의 반란은 바로 이 불공정에 대한 항의였다는 것이다.최근에 인간의 삶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의 대반란이다. 지구가 존속하고 지구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으려면 지구 온도가 지금의 온도에서 최대 1.5도 이상은 상승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IPP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의 보고에 의하면 2040년이 되면 지구 온도가 1.5도 이상 상승하여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멸종한다고 한다. 생태학자 리프킨은 이러한 자연의 대 반란은 ‘엔클로저운동’ 즉 인간이 자연을 사유화하는 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엔클로저’란 인간이 목축이나 농사 등 기타 영리의 목적으로 동물들과 공존하던 땅을 울타리를 치고 통제하여 사유화 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모든 생명체가 공유해야 할 땅을 조각내고 울타리를 쳐서 통제하고 사유화함으로 지구가 엔클로저화 되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생명체들이 인간을 향해 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된 자연을 공유하고 공존하는 땅으로 잘 관리하라는 사명을 인간에게 주었는데 인간은 관리자가 아니라 통제자가 되어 엔클로저화 했다. 스웨덴의 어린소녀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와 그 일행은 엔클로저화 된 기성세대를 향하여 이런 말을 했다. “지구는 당신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우리의 땅입니다.”코로나19 바이러스의 침공을 깊이 들여다보면 엔클로저화 된 인간을 향한 자연의 반란 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코로나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화학백신과 행동백신에 의존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더 중요한 백신이 있어야 한다. 그 백신이 생태백신이다. 생태계에 주어진 창조질서를 회복하여 생태계를 복원하는 길만이 모든 반란을 막고 모든 생명체가 공존해 가는 길이 될 것이다.

2021-03-31

부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정석수 신부​​​​​​​대구가톨릭 요양원장코로나19는 우리의 삶에 많은 변화를 주고 있다. 서로의 안전을 위하여 거리두기를 하게 됨으로써 단절의 아픔을 겪고 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정부는 다양한 백신을 제공하고 있다. 요양원에 생활하고 있어서 일차 백신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통증과 오한의 아픔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길고긴 밤을 느끼며 참을 수 있었다.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독일 철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현대사회를 산업화와 근대화로 인하여 물질적 풍요를 가져 왔으나 다양한 재앙과 위험이 따르는 위험사회라고 하였다. 환경파괴에 의한 생태학적 재앙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일회용품의 피해는 바다의 생물이 고스란히 겪는 뉴스를 접하게 된다. 코로나시대에 더욱 증가하는 일회용품의 사용은 이제 바다생물만이 아니라 인간생태계를 되돌아보게 한다.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연한 사건처럼 다가온 코로나는 역사상 흑사병 이래로 인간 삶의 환경을 흔들어 놓고 있다. 이럴 때 전환의 기회가 필요로 하다. 한 청년이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성인전을 읽으며 삶의 전환을 이룬 로욜라의 이냐시오처럼. 아씨시 지역의 부잣집 한 청년이 흥청망청 젊음을 불태웠고, 기사가 되고자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부상을 겪고 돌아와 병을 앓았고 이 시간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드러낸 프란치스코처럼 각자가 겪고 있는 위험에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찾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본다.이냐시오와 프란치스코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예수님을 새로운 삶의 희망과 의미로 찾는다. 그리스도인이 따르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에서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위험 앞에서 적극적으로 마주하였다. 아울러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고난 앞에서 용기를 내도록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대로 세상을 이겼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대로 새로운 길을 완성하셨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당신의 생명을 바쳐서 우리가 새롭게 걸어갈 수 있도록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완성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길, 부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고난 가운데서 용기를 내도록 격려를 받고 있다. 그래서 다시금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거리두기를 하면서도 삶의 친밀도를 높일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찾게 된다.

2021-03-24

꽃샘바람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삼월이면 어김없이 불어오는 꽃샘바람이 있다. 봄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 겨울을 밀어내니 물러나는 겨울이 다가오는 봄을 시샘하여 차갑고 매서운 바람을 일으킨다하여 꽃샘바람이라 한다. 하지만 이 바람은 반드시 불어야 하는 자연의 순리이고 섭리이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모든 것들이 봄이 오면 녹기 시작하고 잠자던 뿌리가 제일 먼저 깨어나 수분을 빨아들인다. 눈은 순을 틔워야 하는데 줄기와 가지가 아직 녹지 않고 얼어있어 공급로가 차단되니 꽃을 피우지 못한다. 수분을 줄기와 가지로 끌어올리려면 나무를 흔들어 삼투압 작용이 일어나게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람이 필요하다. 바람이 가지와 줄기를 흔들면 뿌리의 수분이 가지 끝마디까지 공급되고 눈은 순을 틔우고 꽃을 피우게 된다. 식물의 성장과 결실에는 반드시 꽃샘바람이 불어야 하는 것이 자연의 순환법칙이다.역사는 발생과 성장과 쇠퇴와 해체가 반복적으로 순환한다고 토인비가 말했다. 그 모든 과정에 도전의 바람이 불고 그 바람에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 역사발전이 있다고 했다. 헤겔도 역사는 변증법적 발전순환이라 하면서 正(정)이 있으면 反(반)의 도전이 있고 정과 반이 잘 융합하여 合(합)이 되는 반복순환을 통해 발전한다고 했다. 응전에 실패하거나 합에 도달하지 못하면 더 이상 역사는 나아가지 못하고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역사이든 인간역사이든 역사는 순환의 그 과정마다 물러남과 다가옴의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따라 흥망성쇠가 결정되고 존재냐 비존재냐가 결정된다. 자연과 역사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도 이 과정을 경험하게 되고 그 과정에 불어오는 바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따라 존재와 가치가 달라진다.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의해 파괴되자 에스겔은 그 상황을 마른 뼈들의 무덤으로 표현했다. 그는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비전을 제시한다. “내가 너희 속에 바람을 불어 넣으면, 너희가 살아날 것이다. 그 바람이 마른 뼈에 힘줄을 뻗치게 하고, 살을 입히고, 살갗으로 덮고,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되리라. 바람아 사방에서 불어라” 이스라엘은 그 바람을 맞고 되살아나서 이스라엘은 재건하였다.이해인 시인은 ‘꽃샘바람’이라는 시에 “꽃을 피우기 위해선 쌀쌀한 냉랭함도 꼭 필요한 것이라”했다. 그러기에 꽃샘바람은 시샘의 바람이 아니라 샘물의 바람이다. 순간 순간 우리에게 불어오는 꽃샘바람을 피하지 말고 온몸으로 맞아들일 때에 비로소 온 몸이 생명의 에너지로 꽃을 피우고, 이 사회가 활력이 넘치게 되고, 죽었던 모든 것이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바람아 사방에서 불어라!”

2021-03-17

당신의 작은 두 손을 내밀어 보세요

조근식포항침례교회담임목사빅토리아(1819∼1901)는 영국의 여왕으로서 가장 오랜 기간인 64년 동안 재위하였고 그 기간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제국의 최고 전성기이었다. 여왕은 1877년에는 영국의 군주 중 최초로 인도 황제가 되기도 했다. 그녀는 남편을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였으며 1861년 남편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고 한동안 두문불출하기도 하였다. 남편과의 사이에 4남 5녀를 두었으며 대부분 자녀가 유럽의 주요 왕족과 결혼하여 말년에는 유럽의 할머니로 불렸다.빅토리아 여왕은 입헌 군주로서 현실 정치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였으나 그녀의 정절과 화목한 가정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도덕주의의 상징이 되었으며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군주들 가운데 하나였다.여왕은 어느 평범한 농부의 아내가 아기를 잃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여왕은 남편을 잃은 깊은 슬픔을 겪은 적이 있었기에 농부의 아내가 슬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여왕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서 그리 멀지 않은 농부의 아내를 찾아갔다.불시에 찾아온 여왕 때문에 농부의 아내는 무척이나 당황하고 놀랐다. 그러나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대하는 여왕의 태도에 마음이 놓여 곧 평안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여왕은 얼마 동안 농부의 아내와 함께 머물다가 왕궁으로 돌아갔다. 여왕이 떠나고 나자 이웃 사람들이 몰려와서 농부의 아내에게 물었다.“여왕님이 무슨 말씀을 하던가요?” 그러자 농부의 아내가 말했다. “여왕님은 내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저 내 손을 끌어다 두 손으로 잡아 주셨을 뿐입니다. 그리고서 우리는 서로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라고 대답했다.빅토리아 여왕이 농부의 아내에게 한 것이라고는 두 손을 잡아 준 것뿐이었지만 그 농부의 아내는 빅토리아 여왕의 그 따뜻한 마음을 평생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여왕이 농부의 아내 마음을 헤아려 준 따뜻한 마음이 농부의 아내에게는 얼마나 큰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감동들이 모여 빅토리아 여왕은 가장 훌륭한 영국의 여왕으로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고 있다.두 손을 잡아 준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는 감동이라 할 것이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의 봄이 왔다. 우리 곁에 상처 입은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살펴보시기 바란다. 누군가 다가와 우리들의 따뜻한 작은 두 손을 기다리는 이웃에게 조용히 다가가서 따스한 손을 내밀어 보자. 그곳에 작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이다.

2021-03-10

동파육(東坡肉)과 성계육(成桂肉)

탄탄 스님불교중앙박물관 관장용인대 객원교수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혀 근접한 동남아조차 여행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여행이란 호기심을 충족하고, 여행하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뿐만 아니라, 그 나라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간혹 여행국의 음식을 이해하는 것도 인문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중국의 항저우를 가면 당송 팔대가이며 북송의 대문장가인 소식(1037~1101)의 호(號)를 붙인 ‘동파육(東坡肉)’이라는 이름난 요리가 있다. 소동파가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황저우의 단련부사로 좌천되었을 때 그가 개발하여 유명해진 음식이다.손수 음식을 해 먹으며 궁핍하게 지내던 그에게 어느 날 오랜 친구 마정경이 찾아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바둑에 정신이 팔려 그를 대접하려 불 위에 올려놓은 돼지고기를 깜빡 잊고 있었다. 나중에 졸아 버린 돼지고기가 오히려 더 맛있게 변해 일품요리가 되었다는 것이다.동파는 돼지고기를 예찬하는 ‘식저육(食猪肉)’이라는 시를 남긴다. 서호의 둑이 무너져 범람할 위험에 처하자 조정에 상소하여 서호를 재정비 하였는데, 이때 항저우의 백성들이 감사의 표시로 돼지고기를 바쳤다. 동파는 자신이 개발한 방식으로 정성껏 요리하여 백성들과 나누어 먹으니 모두들 그 맛에 탄복하였으며, 이후 그의 호인 ‘동파’를 붙인 ‘동파육’이라는 항저우의 유명한 향토음식이 탄생하게 되었다. 바로 항저우에서 값싸게 구할 수 있는 돼지고기를 오래도록 졸여 즐긴 요리가 ‘동파육’의 원형이다.식저육이란 시 후반부에 요리법까지 일러준 것을 보면 동파의 돼지고기 사랑은 유별난 듯하다. 어찌 되었거나 가진 자들이 즐기지 않고 가난한 이들은 요리를 할 줄 몰랐던 값싸고 맛있는 돼지고기를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먹고 그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한 그의 애민 정신이 돋보인다.우리 나라에서도 돼지고기 요리에 인명을 붙인 ‘성계육(成桂肉)’이 있다. 이는 개성의 무당들에 의하여 전국 각지에 전파된 것이다. 당제(堂祭)에 올린 돼지고기를 음복할 때 칼로 마구잡이 난도질하고, 혹은 머리를 내치기도 하며, 배를 가르고 살점을 뭉텅뭉텅 썰어 고기를 마구 씹어 먹는다.이 험한 표정은 이성계에 대한 복수를 하는 듯하다. 이는 최영 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무당들이 장군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성계육’을 씹는 것이다. 민중은 원한을 삭이며 오래도록 성계육을 씹었다고 전해진다.이렇게 ‘동파육’과 ‘성계육’은 감사와 복수의 뜻을 담고 있으며 그 의미는 다르지만, 돼지 고기요리에 인명을 붙인 스토리를 품은 텔링의 음식이다.

2021-03-03

독락(獨樂)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포항에서 가까운 옥산서원 근처에 회재 이언적이 기거했던 독락당이 있다. 이언적이 당파싸움의 정치적 분쟁 속에서 파면당해 귀향하면서 옥산의 독락당으로 갔다. 그가 본가가 있는 양동으로 가지 않고 독락당으로 가서 살았던 것은 정파적으로 죽고 죽이는 사람들이 싫어졌기 때문이다. 넓은 반석 위로 흐르는 자계천과 계곡, 숲과 나무와 개울이 변치 않는 벗이 될 수 있는 생각에 청산유수의 옥산으로 가게 했던 것이다. 이언적은 ‘무위’라는 시의 마지막에 “장대청산불부시(長對靑山不賦詩)”라고 읊었는데 의역하자면 “이제껏 세상일에 쫒기다 보니 좋은 청산 옆에 두고 시 한번 못 읊었소”이다. 이제라도 이 좋은 청산이 주는 낙을 홀로 누리며 살자는 뜻에서 자신이 기거하는 집을 ‘독락당’이라 이름 하였다.최근에 여기저기서 독락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독신과 졸혼도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코로나 이전부터 부쩍 늘어난 남의 간섭을 피해 홀로 낙을 누리는 나홀로 족들을 일본에서는 소확행족, 스웨덴에서는 ‘라곰’, 덴마크에서는 ‘휘게’, 프랑스에서는 ‘오캄’이라 하고 이를 통틀어서 ‘라운징족’이라 부른다. 이런 나홀로 독락을 추구하는 라운징족의 증가는 이웃과의 관계를 끊고 이웃의 삶을 외면하면서 혼자만의 낙을 즐기는 비사회적 삶을 유발한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그래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서 독락이 확산되고 보편화가 되어 버린다면 사회적 큰 문제가 되므로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해서 세상일을 내려놓고 이제 자신의 삶을 즐기며 독락을 권유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그렇다면 청산을 옆에 두고 홀로 즐기려 했던 이언적의 독락은 무엇이었을까? 이언적의 독락은 세상을 외면하고 피하여 홀로 즐기려고 했던 독락이 아니다. “닫히면 홀로 마음을 세정하고 열리면 세상을 세정한다”는 맹자의 글을 좋아한 이언적의 독락은 더러워진 세상을 피하여 홀로 낙을 누리기 위한 독락이 아니라 지금은 귀향 온 닫힌 세상이니 어쩔 수 없이 홀로 마음을 세정하는데 힘써야 한다는 독락이었다. 언젠가 길이 열리면 세상을 세정하는 일을 위하여 자기 삶을 완성해 가는 독락인 셈이다. 놀이에 道(도)를 더함이 풍류도가 되듯이 이언적은 독락을 풍류도로 승화시켰다.나이가 들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이제 하고 싶은 일하면서 독락을 누려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독락이 단순히 나홀로 즐기는 독락이라면 어쩌면 솔로몬이 허망한 것이라고 했던 오락에 불과할지 모른다. 진정한 독락은 길이 열리면 온 세상을 즐겁게 할 독락이 되어야 하고 이언적의 독락은 바로 그런 독락이었다.

2021-02-24

내게 가장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조근식포항침례교회담임목사결혼 10년을 맞이한 부부가 있었다. 이들은 부부 사이가 매우 좋아서 겉으로는 매우 행복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되는 사람이 랍비를 찾아와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랍비도 그 부부를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설마 이들 부부 사이가 불편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이혼의 이유인즉, 이들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어 친척들로부터 이혼할 것을 강요받아왔다는 것이었다. 유태의 전통에 의하면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도 아이를 얻지 못하면 이혼 조건이 성립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헤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가족들과 친척들이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어 남편은 어쩔 수 없이 랍비를 찾아와 의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두 부부가 함께 찾아왔을 때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랍비들은 이혼 건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들이다. 왜냐하면, 한 번 결혼에 실패한 사람은 다시 재혼하여도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착한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와 이혼을 하더라도 아내에게만은 굴욕감을 주지 않고 평온한 가운데 헤어지기를 바라고 지혜를 구하기에 랍비가 ‘탈무드’에서의 지혜를 가르쳐 주었다.먼저 아내를 위한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거기에서 지금까지 함께 살아오면서 보여준 아내의 훌륭했던 점을 자랑하고 아내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직접 인사말을 하도록 하였다. 이들 부부는 서로 싫어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정을 명백하게 밝히려는 뜻이었다. 랍비는 그에게 해야 할 말을 귀띔해주어 도와주었다.남편은 이제 헤어져야 할 아내에게 무엇인가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 선물은 아내가 헤어지고 난 후에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어 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랍비는 남편에게 잔치가 끝나면 아내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청중 앞에 약속하게 하였고, 아내에게도 똑같이 그 약속을 믿고 가장 귀한 것을 구하도록 권유하였다. 잔치가 끝나자 남편이 아내에게 가장 귀하게 간직하고 싶은 것을 하나만 말하라고 하였다.그때 아내는 남편에게 원하는 것을 한 가지만 요구하게 되었다. 아내의 요구는 자신이 평생 가장 귀하게 간직하고 싶은 것은 곧 ‘남편’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헤어지지 않았고, 그 후 아이까지도 낳게 되었다고 한다.지금 당신의 삶에 주어진 가장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대부분 그 귀중함을 모른채 어리석게 있다가도 없어질 것에 맘을 두고 때론 목숨을 걸고 살지는 않습니까?

2021-02-17

설, 복덕방, 제관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우리 조상들은 설이 되면 세배를 하고, 그림을 주고받고, 새해에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나누었다. 설날에 주고 받은 그림을 ‘세화’라고 하는데 복을 기원하고, 잡귀를 쫓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설날이 되면 이런 그림들을 출입문에 붙여 놓았다.또 우리 조상들은 유달리 제사를 많이 지냈다. 개별적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지만 부락 단위로 제사를 지내는 일도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부락제’라는 책에 의하면 전국의 부락제가 522개가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부락제가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비는 당제였는데 설날에 이 당제를 빼놓지 않았다. 특히 설날에는 떡과 술을 빚어 온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 그때 나누어 먹었던 음식을 ‘복덕’이라 했고, 복덕을 나누던 집을 ‘복덕방’이라 했다.이 제사의 특이한 점은 제관을 뽑는 일이었다. 보통 가정 제사의 제관은 가장 높으신 어른이 맡아서 했다. 그리고 풍어제나 기후제와 같은 제사는 무속인들이 담당했다. 그런데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비는 제사의 제관은 무속인도 아니고, 마을 이장도 아니고, 마을의 가장 덕망이 높은 어른도 아니었다. 한 해 동안 마을에서 가장 죄 짓지 않고, 부정한 짓을 하지 않고, 가장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을 뽑아서 제관으로 삼았다. 복을 기원하는 당제의 제관은 반드시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우리 조상들의 마음속에는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죄 없는 사람, 가장 선한 사람, 가장 부정한 짓을 하지 않은 사람이 복을 나누어 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 했다. 그런 사람을 뽑아서 제관으로 삼고,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제사가 끝나면 복덕을 나누는 일을 하게 했다. 그래야만 그 마을에 한 해 동안 복이 있는 마을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결국 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것은 그 마을에 죄 없는 제관이 있으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성경 시편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이라 했다. 우리로 치면 당제의 제관이다. 설날에 가장 자주 듣고 자주 하는 말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덕담을 하기에 약간 쑥스럽다. 왜냐면 이 말은 원래 복덕방에서 복덕을 나누어 주면서 제관이 하던 말인데 나는 그런 제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의 설을 맞이 하면서 내년 설날에는 당제의 제관이 되어 복덕방에서 복덕을 나누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을 쑥스럽지 않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1-02-09

그들이 왔다

조근식포항침례교회담임목사제2차 세계대전 때에 포로가 되어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영국의 군인 맥도널드(Murdo Macdonald) 목사는 어느 날 새벽의 감격을 이렇게 고백하였다고 합니다.그의 가까운 친구가 전기 기술자인데 그 친구가 비밀리에 라디오를 조립하여 영국의 BBC 방송을 듣고 전쟁의 상황을 수용소 내에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그 친구가 제일 먼저 맥도널드 목사를 흔들어 깨웠습니다.여보게 친구야! “그들이 왔어(They have come!)”라고 흥분된 얼굴로 엄청난 감격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친구가 전하여 준 말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이 왔어(They have come!)”라는 이 희망의 소식이 퍼지자 온 수용소 안에 있던 포로들은 너무 너무 기뻐서 수용소 마당으로 나가 춤을 추며 서로 부둥켜안고 “그들이 왔다(They have come!)”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그러나 연합군 상륙 뉴스를 아직 모르던 수용소 독일군 감시병들은 이 사람들이 집단으로 미치지 않았나 해서 총부리를 겨누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 수용소 포로들에게 외부적인 조건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수용소의 벽은 여전히 높고 그 위에 철조망도 여전히 두꺼웠으며 독일군의 총부리와 기관총도 여전히 그들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갇혀서 고통받는 포로들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의 세계가 달라졌습니다.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연합군인 아군이 그 땅에 도착했고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들이 이미 자신들을 향해 전진해 오고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그들이 왔다”라는 소식에 희망이 솟고 기쁨이 넘치며 용기가 생기고 삶에 확신이 온 것입니다. 오늘날 코로나19로 온 세계가 우울해지고 죽음의 공포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런 삶의 현장에 우리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소식은 없을까요? 성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상륙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죄악이 흉용하고 핍박과 고통이 내 곁에 있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상륙 사건입니다.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우리 지구촌에 상륙하신 사건이 바로 예수 탄생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구름 속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과 기쁨으로 기다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금년 흰 소의 해 신축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고 우리 인류를 죄의 자리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상륙하신 일을 기억하고 모두가 행복한 신축년 새해 맞으시길 소망합니다.

2021-01-27

세례의 신비를 살아가는 삶

정석수 신부대구가톨릭 치매센터 원장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인간이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를 간단하게 계시(啓示)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내 주셨는데, 그 모습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스승의 참 모습을 간략하게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을 때 성부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듣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로써 성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요 성부의 마음에 드는 아들로서 온 천하에 선포되었습니다.세례를 받은 예수님은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제자들에게도 허용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허용된 세례는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하여 먼저 자신을 버리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를 깨닫고 지고 스승을 따르는 삶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던 의로움을 우리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의로움에 이르는 길에는 인간적인 고뇌가 따를 것입니다.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일에는 하느님의 영, 성령의 도움이 필요로 합니다. 성령의 도움에 힘입어 사람은 공정을 펴고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보듬어 주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고 되살릴 희망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시골처녀 마리아는 천사를 통해 성령께서 자신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덮어 줄 것이라는 천사의 아룀을 듣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된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은 잉태의 순간에서부터 성령을 충만하게 지니셨고, 그 성령께서 세례 때 예수님께 머무르심을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한 성령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담의 죄로 닫혔던 하늘이 열렸고, 마침내 물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새로운 창조의 서막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 교리서 536항에 보면,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빠스카의 그리스도와 성사적으로 닮게 됩니다. 따라서 삶에서 빠스카의 삶을 이루기 위하여 겸손하게 낮추고 속죄하는 신비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됩니다.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은 새로운 삶,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삶의 첫 일성은 회개와 하늘나라의 다가옴입니다. 그리고 그 사업에 함께 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삶의 태도를 통하여 배우고 성장합니다. 그 첫걸음마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젤 먼저 하신 일은 광야에서 기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들기까지 기도를 합니다.

2021-01-13

코스믹 댄스(the cosmic dance)

강영식포항 하울교회 목사아이들이 어릴 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아빠, 하나님이 왜 모기와 같은 해충을 만드셨어요?” 정말 모기는 해만 끼치는 해충일까? 수많은 모기의 유충들은 곤충들의 양식으로 모기가 없으면 먹이사슬의 체계가 무너지고 결국 인간의 삶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해만 끼치는 것은 아니다. 더러운 물이 고여 있는 작은 웅덩이들이 있는데 걸음을 방해하고 옷을 더럽히는 무용한 웅덩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구상에 수많은 이 작은 웅덩이들은 물을 담수하고, 주변의 생물들에게 수분을 공급하고 기온과 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나에게는 해로운 것일지는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생명을 살리는 각자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자연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생태계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요 생명체들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만물을 연계하여 상생케 하는 우주 생명의 기운이다. 나비의 날갯짓으로 생겨난 작은 바람이 태풍에 영향을 끼친다는 ‘나비효과’도 모든 만물의 작은 움직임이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서로 영향을 끼치는 합연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내가 내 쉬고 흡입하는 숨 하나하나가 우주생명과 연합하는 생명의 기운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우주의 모든 생명은 성령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했고 그 성령을 ‘숨(호흡)’이라고 했다. 내 가 내 쉬는 한 숨 한 숨이 생명의 기운으로 성령이라는 것이다. 온 우주는 그 생명의 숨으로 가득 찼고 그 상태를 신학적 용어로 ‘성령충만’이라 한다.J.E.러브룩은 우주의 모든 생명체들은 각기 독립된 개별체가 아니라 서로의 생명을 연계하는 ‘하나의 생명체’라고 했다. 우주의 모든 생명체들은 하나의 몸을 이루면서 그 움직임 하나하나는 생명의 춤을 추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토머스 머튼은 ‘우주적인 춤(the cosmic dance)’이라고 했는데 곧 성령의 춤이다.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와 풀들의 움직임, 파도의 출렁임, 별들의 반짝임, 나비의 나풀거림 등등 이 모든 것이 생명의 힘으로 가득 찬 환희는 ‘코스믹 댄스’이다.팬데믹은 공생하며 살던 바이러스가 인간의 생태파괴로 인하여 거주지 잃어버리고 인간을 숙주로 택한 것에서 생긴 것이다. 이런 생태파괴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공존하려는 우주적 춤을 거부하고 인간만이 홀로 추는 춤, 독무(a solo dance)에서 비롯되었다. 팬데믹의 근본적 해결책은 더 이상 독무하지 않고 우주적인 춤을 함께 추는데 있다. 예수께서 하신 말 “너희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았다”는 말의 더 큰 뜻은 우주만물의 생명을 살리는 우주적 춤을 추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 모두가 코스믹 댄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2021-01-06

2021년, 더 큰 희망을 품고

정석수신부·대구가톨릭 요양원 원장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발걸음을 내딛는 이는 희망을 품은 사람입니다. 2020년을 지나며 우리 모두는 간절한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것은 서로의 안전에 대한 것이요 코로나로 인하여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는 노력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의 한 인물, 마타디아스는 죽음의 나날이 다가오자 자녀들에게 선조들의 삶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일을 열거하며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대대로 명심하여라. 그분께 희망을 두는 이는 아무도 약해지지 않는다.”(1마카2,61)하지만 성경에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희망이 꺾인 고백도 있습니다.“도대체 어디에 내 희망이 있으리오? 나의 희망? 누가 그것을 볼 수 있으리오?”(욥기17,15)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일상의 삶이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연말연시에 확산을 우려하여 정부는 더 강한 조치를 내렸습니다. 희망의 뉴스가 보도 되지만 아직도 코로나19의 백신에 대하여 설왕설래하고 있습니다.그렇지만 시편의 저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품고 살아가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 마음을 굳세게 가져라.”(31장25절) 또 “내 영혼아, 오직 하느님의 향해 말없이 기다려라. 그분께서 나의 희망이 오느니!”(시편62,6절)코로나19로 인한 전환기의 위기(危機)를 겪고 있습니다. 위기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라는 요소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기능을 사용하며 화상회의를 하게 되어 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상의 삶이 정지된 시기에 우리는 기회를 만들고 더 큰 희망을 세워야겠습니다. 2020년은 온 세상이 치유의 손길이 더욱 필요하였고, 대구로 한걸음에 달려온 이들로 인하여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직접 현장에 투입될 수는 없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수도권의 위기가 벗어날 수 있도록 십시일반 공동모금회의 통장을 살찌우는데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IMF시대에도 준 적 없는 모금액이 하향 조정되었다는 뉴스입니다. 어려울수록 더 저력을 발휘하는 근성이 필요로 합니다. 오늘의 위기에서 고통과 아픔을 넘어 희망의 사다리를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무엇보다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1베드4,8.10)베드로 사도의 이 말씀은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여 희망을 더욱 키워라는 말씀입니다.

2020-12-29

경이로운 나날들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어떤 친구가 나에게 “너는 사는 것이 재미있나?”고 물었다. “재미로 사느냐? 재미가 있든 없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했더니 그 친구 대답이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겨워서 못 살겠다”고 한다. 매일 똑같이 회사 출근하여,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집에 와도 그렇고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못 살겠다는 것이다. 웨인 왕 감독의 ‘스모크’라는 영화가 있다. 아마추어 사진작가가 가게 앞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무려 4천장을 찍어 앨범에 담아 놓았다. 이 앨범을 보던 사람이 물었다. “어째서 똑같은 사진을 4천장이나 촬영하여 보관하고 있나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똑같은 사진이 아닙니다. 장소는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진마다 빛이 다르고, 색조가 다르고, 계절이 다르고, 날씨가 다르고, 분위기가 다릅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찬찬히 관조(觀照)하여 보니 그야말로 한 장 한 장이 다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다른 모습의 사진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깜짝 놀라운 한 장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몇 해 전에 죽은 아내가 가게 앞을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놀랍고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그 날 이후로 그는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매일 반복되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똑같은 일상이 매일 매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경이롭고 놀라운 일상이 되었다.로고테라피를 창시한 빅터 프랑클은 절망적이고 반복적으로 흘러가는 아우슈비츠의 자살적 일상을 살다가 어느 날 이런 고난의 날들에도 삶의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일상의 의미를 찾다 보니 하루 하루가 달리 보이고 드디어 그 일상이 경이롭고 놀라운 날들로 다가왔다. 그는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후에 일상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 이른바 의미요법으로 불리는 로고테라피를 창시하게 된 것이다.기원후 60년대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 저항하다가 수십 만 명이 학살당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등 절망적인 삶을 살게 된다. 매일 매일의 삶이 비통과 고난의 날들이었다. 이를 본 유대의 현자들은 어떻게 하면 이 절망적인 일상을 희망찬 날로 변화시킬까를 생각하다가 매일 매일 읽고 묵상할 수 있는 예배 캘린더를 만들어 그 날 그 날 성경을 읽고 묵상 하였다. 그렇게 한 결과 하루 하루의 삶이 놀랍고도 경이로운 날들로 바뀌게 되었다. 그들은 그 예배력을 ‘경이로운 나날들(Day of Awe)’이라 이름 하였다.지루하다고 여겨지는 일상을 마음을 달리하여 깊이 관조하여 보면 어제의 날이 오늘 다르게 보이고, 어제 봤던 사람이 오늘 다르게 보이는, 하루 하루가 다르고 새로운 놀랍고 경이로운 나날들이 될 것이다.

2020-12-22

‘줄탁동시(啐啄同時)’ 들어본 적 있나요

조근식포항침례교회담임목사‘줄탁동시(啐啄同時)’. 이 말은 안과 밖에서 함께 일이 이루어진다는 말로서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게 되는데 이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닭이 그 소리에 반응해서 바깥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줄탁’은 어느 한 쪽의 힘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야만 세상 밖으로 새 생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껍질 안의 병아리가 힘이 부족하거나, 반대로 껍질 바깥 어미 닭의 노력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병아리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껍질을 경계로 두 존재의 힘이 하나로 모아졌을 때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이 비유는 결국 이 세상은 혼자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타인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국태민안은 여야나 정부와 국민이 줄탁동시 할 때 가능하고, 행복한 가정은 부부(夫婦)가 줄탁동시 할 때 이루어지고 훌륭한 인재는 사제(師弟)가 줄탁동시의 노력을 할 때 탄생하며 세계적인 기업은 노사(勞使)가 줄탁동시 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관계개념의 줄탁동시의 신비로운 변화의 체험을 위해서는 몇 가지 깊이 새겨야 할 묵상이 요구된다.첫째는 줄(啐)을 통해 ‘내가 먼저’라는 이치다. 즉, 받고 주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원리, 그것은 물질도, 사랑도, 섬김도, 용서도 다 마찬가지다. 내가 할 수 있는 자리에서 먼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줄’의 지혜이다. 둘째는 탁(啄)을 통해 경청의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병아리가 안에서 어떤 부위를 공략하여 쪼고 있을 때 밖에서 어미 닭은 어느 부위인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병아리의 쪼는 것을 잘 듣고 있어야 하듯 인간관계도 탁(啄)의 이치는 경청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들을 줄 알되 바로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셋째는 줄(啐)을 인지할 때 탁(啄)의 타이밍이다. 즉 때를 놓치면 안 된다. 배고플 때 밥 한 그릇, 목마를 때 물 한 사발, 어떤 것이 필요할 때 채움의 타이밍이 절실한 것이다.코로나19로 어두워진 현실 앞에 정치적인 오리무중의 상황이 하루하루 힘든 씨름에 혼 힘을 다 빼앗긴 모든 백성들이 다시 여와 야, 안과 밖, 어두움과 밝음, 너와 나의 줄탁동시를 통해 우리는 생명처럼 신비로운 감동을 다시 경험하며 새해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할 때다.

2020-12-15

길과 인생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서양에서는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고 동양에서는 인생을 길을 가는 나그네로 비유한다. 이백은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백대의 과객이라”하면서 인생을 여행길에 비유했다. 동양적 사고에서 길은 단순히 교통수단을 말하지 않고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마음가짐이나 행위를 의미한다.길에는 바른 길로 지칭되는 큰 길과 바르지 않은 길로 지칭되는 갓 길이 있다. “군자대로행”이라는 말에서 대로는 바른 길을 의미한다. 어떤 길이 바른 길이고 어떤 길이 바르지 않은 길일까? 또 그 길을 누가 만들었을까?루쉰은 “본래 땅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고 했다. 지금 내가 편히 가고 있는 길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누군가 돌과 바위를 치우고, 가시덤불을 헤치며,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만든 길이며, 그 거친 길을 뒤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다듬어 지고, 그 길을 여러 사람이 함께 감으로 넓어져 비로소 길이 된 것이다. 그렇게 생긴 길을 사람들은 제 길 인양 걷는다. 길이 손상 되었거나 불편하다고 여겨지면 왜 길을 보수하지 않고 만들지 않느냐고 불평한다. 만들어진 길을 가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모든 길은 누군가가 없던 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생긴 것인데 이에 대해 고마움과 감사를 잊은 듯하다. 그렇게 보면 세상에는 만들어진 길을 가는 사람과 없던 길을 만드는 사람으로 나누어진다. 없던 길을 만든 사람을 우리는 선구자라 하고 성인이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길들을 만들었지만 그 길이 가치를 상실하여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 않게 되고 그래서 대부분 소멸된다. 소수의 길만이 남아 지금도 사람들이 따르는 길이 된다.길은 고전과도 같다. 고전은 지역과 시대를 불문하여 과거에 지닌 가치가 현재에도 남아 그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길이 고전과 같은 길일까? 그 길은 과거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은 죽임의 길이 아니라 우주만물에 생명을 공급하는 살림의 길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다. 내가 가는 길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변함이 없는 진리의 길이고 우주만물에 생명을 공급하는 살 길이라는 것이다. 그 길을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갔기 때문에 오늘의 길이 되었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간다.지금 내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일까?나는 만들어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일까? 없던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일까? 나는 뭔가를 받기만 하는 수혜적 사람일까, 뭔가를 주려고 하는 호혜적 사람일까? 길은 만든 사람이 없이는 길이 있을 수가 없고, 그 길을 함께 가며 다듬은 사람이 없이는 길이 될 수 없다. 나는 누구에겐가 단 한번이라도 그 길을 만들어 주었거나 그 길이 되어 준 적이 있었을까?

2020-12-01

가을 상념(想念)

탄탄 스님포항 운제산자장암 감원중앙승가대 강사하루하루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아니한, 무료하고 지루한 삶을 견뎌내며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게 우리네 인생사다. 가끔은 짜증나고 속상하고 우울하고 또 극도의 분노스러운 일도 있지만, 때로는 그리운 사람도 있었고 만나면 반갑고 다정한 그 누구도 있기 마련이다.어느덧 세월을 무심히 살아가노라면 가끔은 뿌듯했고 따듯했으며 마음을 녹여준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입을 내밀며 화를 내고 지껄이며 남의 흉을 보기도 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떨 때는 일상에서 생기는 평범한 일들을 겸허히 잔잔하게 바라보게도 되고 패배적이고 비관적인 삶도 누군가의 응원에 힘입어 용기백배하여 다시 용을 써보기도 했다.인간 군상들의 사는 모습은 다 오십보백보라지만 희망조차 없다면, 꿈이 없다면, 더욱 팍팍하고 건조한 삶이리라. 더구나 요즈음처럼 팬데믹 시대에 우리네 삶의 미래는 현재보다 나아질 거라는 자기 암시나, 현재의 고달픔도 잠시라며 스스로 위안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선책이 아닐 수 없다.차분하게 저물어 가는 이 가을에 이 세상 어떠한 것이든 견고한 것은 없다는 진리를 체험한다. 모든 것은 허물어지기 마련이듯이 인생의 아름다운 청춘의 날도 덧없이 흘러가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일 뿐이며 인생에서 열렬히 추구했던 그 어떠한 것도 결국 영원한 것은 없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이 우주도 언제인가는 허물어지는데, 고작 백 년도 살 수 없는 인생에서 그 무엇이 영원할 텐가.과학적 사고에 의하면 우주는 빅뱅으로 이루어져 우주 성립 초기에는 시계 제로의 혼돈 그 자체였다. 빅뱅이 시작되고 우주가 생긴 지 1초쯤 지나 우주의 모든 별과 공간은 작은 땅콩 크기로 집결되어 있었지만, 폭발에 이어 팽창은 계속되었다.음양 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팽창하고 그 힘은 양이며 양이란 끊임없이 팽창하는 존재이다. 반대급부로 끊임없이 축소해지는 것은 음이라 할 수 있다. 고대의 그리스 철학자들이 우주의 초기 상태를 카오스(혼돈)라고 했다. 우주는 혼돈에서 시작된 것이다. 모든 존재가 혼돈 속에서 정리된다. 세상은 갈수록 혼돈스러운 상황이다. 더욱 불투명해진 미래는 암울하고 예측 불가능하지만 어두움 속에서 밝은 미래를 개척하고자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이 인생의 단계다.몇 철이 지나도록 창궐하는 코로나19 전염병 속에서 모든 인류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 중이다. 오직 백신의 출현만을 학수고대할 뿐이다. 나날이 감염병 확진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니 인간이 인간을 접촉하지 못하는 비대면의 시대가 되어 고독감과 외로움 그리고 불투명한 내일은 혼돈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반드시 헤쳐나가 동트는 신 새벽의 붉은 태양의 장엄한 일출을 마주해야 하리라.

2020-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