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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일본의 대표적 군사도시였던 히로시마

4월 26일 아침, 이 날의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 호텔 로비에 내려갔을 때 그곳은 수많은 외국인들로 북적였습니다. 특히 백인들이 무척이나 많았는데요. 그래서일까요? 조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마저 전통 일식 식당과 양식 위주의 식당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으로 상징되는 평화도시로서의 국제적 위상이 수많은 외국인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걸로 보였습니다. 이렇듯 평화도시로 널리 알려진 히로시마지만, 한때 히로시마가 일본의 대표적인 육군도시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날의 일정은 히로시마가 제국주의 시절 가졌던 군사도시로서의 성격을 알아보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히로시마는 근대 일본의 군사화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성장한 도시입니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지 3년 후인 1871년에는 진제이 진대 제1분영이 설치되었고, 1888년에는 제5사단 사령부가 설치되었습니다. 특히 육군도시 히로시마의 역할은 청일전쟁 시기에 가장 크게 발휘되었는데요. 당시 히로시마는 거의 일본의 수도 역할을 할 정도로 중요한 위상을 차지했습니다.청일전쟁(1894.7.~1895.4.)의 발발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9월 8일에, 일본 군부는 도쿄에 있던 대본영(육군과 해군을 모두 통솔하던 최고군통수기관)을 히로시마로 옮깁니다. 보급거점과 사령부는 전선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전쟁상식에 비춰볼 때, 도쿄는 전쟁터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수많은 도시 중에 히로시마가 대본영 자리로 선정된 이유는 ‘전쟁터로부터 가까워야 한다’, ‘병력을 전쟁터로 보내기 위한 항구가 있어야 한다’, ‘병력을 이동할 수 있는 철도망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에 모두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가지 조건을 갖춘 도시는 여러 곳이 있었지만, 마지막 조건까지 갖춘 곳은 당시 일본에서는 히로시마가 유일했습니다.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두 달 전에, 히로시마에는 일본 혼슈의 최북단인 아오모리까지 연결된 산요(山陽)철도가 완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894년 9월 13일에는 대본영이 도쿄로부터 히로시마로 이전했으며, 그로부터 이틀 후에는 메이지 천황이 히로시마로 옮겨와 이듬해 4월 27일까지 머물렀습니다. 메이지 천황은 청일전쟁의 거의 전과정을 히로시마에 머물며 지켜보았던 것인데요. 제7회 제국의회도 히로시마에서 소집되었고, 총리대신을 비롯한 정부의 고위관료도 모두 히로시마에 모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히로시마는 명실상부하게 청일전쟁 기간 내내 일본의 수도였던 것입니다. 청일전쟁 당시 히로시마를 거쳐 대륙과 한반도로 간 일본군은 무려 17만 1098명에 이른다고 합니다.청일전쟁은 일본 입장에서는 거의 횡재에 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청으로부터 무려 은화 2억냥에 이르는 배상금을 받았는데, 이 액수는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4년치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이 돈으로 일본은 철도, 전화, 금융과 같은 인프라를 완비하고, 수많은 기업에 사업자금을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이익도 결코 경제적 이익에 모자라지 않았는데요. 천년 이상 패권을 쥐고 있던 중국을 무릎 꿇리며, 자신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임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일본은 요동 반도(삼국간섭으로 곧 반납)와 타이완을 식민지로 만들었으니, 바야흐로 청일전쟁은 일본을 식민지까지 거느린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만들어주었던 것이네요.그렇기에 청일전쟁의 침략적 성격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은 당시 히로시마를 비롯한 일본 어디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895년 4월 21일 청일전쟁의 종결에 따라 히로시마 대본영은 해산되었지만, 이후에도 히로시마는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군사도시로 계속 성장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원폭의 비극을 겪게 되기까지 히로시마는 침략의 병참기지이자 파병기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난 시절 히로시마가 체험한 군사도시로서의 놀라운 성장은, 동시에 전대미문의 비극을 향해 가던 거대한 아이러니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저희 일행이 청일전쟁 당시 대본영을 비롯한 많은 군사시설이 설치되었던 히로시마 성을 방문했을 때는 오전 10시가 막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본래 히로시마 대본영은 2층짜리 목조건물로 서양식의 웅장한 자태를 자랑했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원폭으로 인해 전소되고 앙상한 기초석과 초라한 안내비만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평일의 이른 시간이어서일까요?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이 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것과 달리, 이 곳은 방문객도 거의 없어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습니다. 전쟁이 한때의 번영과 영광을 가져다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결코 영원할 수는 없다는 진리를 말없이 웅변해주는 듯한 풍경이었습니다. 현재 히로시마시에는 어떠한 군사시설도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평화의 히로시마’가 언제까지나 계속되길 바라며, 우리 일행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다음 행선지인 구레시로 향했습니다.

2024-07-22

기억의 나누어 갖기

2024년 4월 25일부터 4월 28일까지 제가 근무하는 대학의 HK+사업단에서는, 근대 일본을 이해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기획의 일환으로 히로시마 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히로시마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우리에게 가장 먼저 원자폭탄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 ‘리틀 보이(little boy)’는 무려 20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대미문의 비극이었습니다. 히로시마에 도착한 우리 일행이 가장 먼저 찾은 곳도, 그 날의 ‘원폭’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이었는데요, 평화기념자료관, 원폭돔, 추도기념관, 그리고 각종 위령비로 이루어진 평화공원은 무려 12만㎡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초대형 시설이었습니다.수많은 구미(歐美) 관광객들과 곳곳에 설치된 위령비로 가득한 평화공원을 조금만 걸어도, 누구나 핵의 비극과 평화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텐데요. 그럼에도 저에게는 이 공간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원폭으로 인한 피해와 고통이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어 충분히 공유되고 있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찜찜함은 얼마 전 장혜령의 ‘당신의 히로시마’(문학과사회, 2021년 겨울호)를 읽으며 느꼈던 것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히로시마’는 히로시마를 방문한 아흔 살의 김정순(金貞順, 일본명 가네모토 테이준)이 자신의 첫사랑인 하라 다미키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 서간체 소설인데요. 하라 다미키는 히로시마에서 나고 자랐으며, 원폭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도쿄로 건너온 소설가입니다. 정순은 하라 다미키와 “평생에 한 번뿐일 사랑”을 나누었는데요. 그러나 그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며, 존재의 벽을 뛰어넘지도 못했습니다. 이유는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 때문에, “당신은 이제 죽어도 되잖아요. 뭘 더 머뭇거리는 거죠”라는 냉소의 말을 스스로에게 던지고는 했던 하라 다미키가 원폭의 기억에 갇힌 수인(囚人)이기 때문입니다. 하라 다미키는 ‘나’와 대화를 나눌 때면, 늘 “당신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죠. 결국 히로시마의 상처로 혼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던 하라 다미키는 자살하고 맙니다.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던 정순은 비록 연인이기는 했지만, 하라 다미키를 괴롭힌 원폭의 기억으로부터는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정순은 귀국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원폭의 기억과 관련하여 정순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하라 다미키의 모습은, 히로시마의 원폭을 다루는 일본의 태도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일본은 원폭 피해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한순간에 수만 명의 삶이 사라진 원폭 피해는 일본만이 경험했으며, 그 때의 끔찍함과 잔인함은 그 어떤 폭력과도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인 거죠. 이처럼 ‘원폭의 피해’를 유일한 것으로 절대화하게 되면, 원폭을 둘러싼 수많은 맥락과 사람들이 배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테면 원폭 이전의 침략전쟁으로 수많은 인류가 사망했다는 사실이나, 일본인 이외에도 20개국에 이르는 사람들이 히로시마에서 피폭되었다는 점 등이 충분히 사유될 수 없는 것이죠.이와 관련해 ‘당신의 히로시마’에 등장하는 “조선인 박화자”의 존재는 참으로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박화자는 히로시마에 살다가 피폭되었으며, 이후 ‘원폭병’을 얻고 귀환하여 다른 피폭자들과 함께 합천의 요양소에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삶의 끝자락에 이른 박화자는 “히로시마를 한 번은 다시 보고 싶다”며, 아픈 자기 대신 정순을 히로시마에 보낸 것입니다. 히로시마의 원폭은 하라 다미키와 같은 일본인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히로시마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도 향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히로시마는 결코 하라 다미키, ‘당신의 히로시마’일 수만은 없는 거겠죠. 그런데 ‘당신의 히로시마’는 또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가 원폭이 남긴 고통의 기억을 ‘일본인의 것’으로만 독점하는 것을 의미했다면, 두 번째 의미는 원폭에 담긴 응보의 의미를 ‘일본인의 것’으로만 되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평생 일본을 미워했던 정순의 아버지가, 히로시마 원폭 소식을 듣고서는 “몹쓸 인간들이 천벌을 받은 게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드러나죠. 그러나 이 말은 “그 몹쓸 인간들 속에 우리와 같은 조선인들이 있었음”을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실제로 히로시마 전체 희생자 중 10%가 재일조선인이었으며, 그들의 후손이 여전히 고통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히로시마는 결코, ‘당신의 히로시마’일 수는 없으며 히로시마에 살았던 ‘모든 이들의 히로시마’일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당신의 히로시마’를 넘어 ‘우리의 히로시마’가 될 때, ‘히로시마의 기억’은 망각의 어둠 속에 사라지지 않고, 모두의 가슴에 남아 세계평화의 등불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이런 맥락에서 평화기념공원 안에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데요. 높이 5미터에 이르는 이 한국식 위령비는 197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는 평화공원 바깥에 놓여 있다가 1999년에 이르러서야 재일한인과 여러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평화공원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원의 중심에서는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한 이 위령비는 역사적 기억을 나누어 갖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없이 웅변하는 듯 보였습니다.

2024-07-08

떠난 자들과 남은 자들

지난 번에는 니가타항을 떠나 북한으로 간 재일교포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10만여 명에 이르는 이들은 북한행 편도 표만을 가지고 니가타항을 떠난 사람들인데요. 일본에는 왕복표를 가지고 니가타항과 북한을 오고간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귀국 교포’의 가족이 그 주인공입니다. 양영희는 ‘귀국 교포’의 가족이라는 정체성을 창작 원천으로 삼아 활동해 온 영화감독입니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김일성주의자로서, 아버지 양공선은 조총련 오사카 본부의 부위원장과 오사카조선학원의 이사장까지 역임한 정치적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제주 4.3의 처절한 비극을 피해 오사카로 밀항하여 조총련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양영희의 부모는 세 명의 아들 모두를 ‘귀국 교포’로 북한에 보냈는데요. 이 때 오빠들의 나이는 각각 만 열네 살(중학생), 열여섯 살(고등학생), 열여덟 살(대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양영희도 ‘조선인 부락’으로 유명한 오사카 이카이노(현 이쿠노구)에서 태어나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랐으며, 이후 도쿄에 있는 조선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양영희의 다큐멘터리 3부작(‘디어 평양’(2005), ‘굿바이, 평양’(2009),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극영화 ‘가족의 나라’(2012), 장편소설 ‘조선대학교 이야기’(2018), 산문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2022)는 모두 이러한 자신의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그녀는 니가타항에서 북송선에 오른 오빠들을 배웅한 이후에도, 여러 번 만경봉호를 타고 니가타항과 북한의 원산항을 오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렇기에 ‘귀국 교포’와 그 가족의 삶에 대한 재현에 있어, ‘당사자 서사’에 가장 가까운 서사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양영희입니다.최근에 발표된 산문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는 ‘귀국 교포’의 북한 생활이나 일본에 남겨진 가족들의 삶이 매우 밀도 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귀국 교포’의 삶은 결코 만만치 않았는데요. 이와 관련해 이 산문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북한에 간 아들들의 사진을 처음 받아보고 어머니가 보이는 반응입니다. 오빠들은 처음 평양과 원산에 위치한 ‘총련 간부 자녀 합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합니다. 오빠들은 처음부터 편지에 음식을 보내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했는데요, 정치적으로 신실한 어머니는 “되도록 현지인과 같은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라”며 음식 대신 약품이나 학용품 정도만을 보냅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한 오빠들의 빼빼 마른 사진을 본 엄마는, 너무나 놀라 그 사진을 찢어 버리고는 소리 죽여 흐느낍니다. 이후에는 음식이 될 만한 것은 뭐든지 가리지 않고 소포에 꾹꾹 눌러 담아서 보내기 시작하는군요.무엇보다 ‘귀국 교포’들의 안타까운 삶은 큰오빠의 삶에 가장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님의 환갑에 바치는 청년 축하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간 큰오빠는 클래식 음악과 해외 명작들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비판을 받고, 자기비판을 강요당하고, 감시당하고, 미행당했으며, 결국에는 우울증과 조울증에 시달리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죽고 맙니다.그런데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는 ‘귀국자’라는 신분이 북한 사회에서 반드시 핍박과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 드러나 흥미롭습니다. 둘째 오빠는 아들 둘을 낳은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곧 새로운 아내 정순과 결혼하여 딸 선화를 낳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내는 병으로 선화가 다섯 살일 때 죽고 맙니다. 둘째 오빠는 “당분간 재혼하고 싶지 않다. 정순이 같은 멋진 여자는 다시 없을 거다”라고 공언하지만, 오빠의 바람(?)과는 달리 정순이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혼담은 물밀 듯이 들어오는군요. 이러한 인기는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정기적으로 생활비와 애정이 가득 담긴 소포가 온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실제로 어머니의 평생 과업은 북한에 있는 세 아들과 그 가족들에게 온갖 방법으로 물건과 돈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정신이 온전치 않게 되어서야 비로소 “송금 걱정”에서 해방됩니다.또한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는 재일교포들이 북한에 갈 수밖에 없었던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드러나 있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양영희에게 몇 번이나 해준 이야기에는 젊은 시절 당한 테러의 경험도 있습니다. 젊은 어머니는 외할머니와 하얀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오사카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요. 이때 모르는 남자가 갑자기 다가와 잉크를 온몸에 뿌립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외할머니가 분노에 몸을 떨며 호통을 치지만 그 범인은, 오히려 “조선인이 건방지게!”라는 말을 내뱉고는 사라져버리는군요. ‘조선인’을 차별하는 이러한 분위기는 양영희 세대에도 여전한 것으로 그려집니다. 양영희의 아버지는 멀쩡한 교사일을 그만두고 예술가가 되겠다는 딸을 향해, “일본에서 조선인이 어떻게 예술을 하니. 라디오나 TV에 나갈 수나 있다니? 꿈같은 소리 마라. 동네 사람들, 우리 딸이 미쳤어요!”라고 소리치기도 합니다.이처럼 인간적인 대우도 받지 못하고, 사회적 성공도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수많은 재일교포들은 북송선을 탔던 것입니다. 영화감독 박찬욱은 어디에선가 양영희는 가족 이야기를 “계속 우려먹고 우리는 계속 곱씹어야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양영희의 가족 이야기에 식민지와 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의 현대사는 물론이고, 가족, 개인, 이데올로기, 국가 등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모두 담겨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박찬욱의 ‘계속 우려먹고 계속 곱씹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양영희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보다도 북에 남은 두 명의 오빠와 그 가족은 안녕한지, 그들의 후일담이 너무나 궁긍합니다.

2024-06-24

니가타항을 떠난 사람들

2024년 2월 23일 니가타현립대학에서 한국근대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발표와 토론으로 녹초가 되다시피 한 저희 일행은, 저녁에 니가타 시내로 이동하여 만찬에 참석했습니다. 이날의 만찬은 이광수 연구의 권위자인 하타노 세츠코 선생님이 주최하신 것인데요. 니가타 전통 요리를 파는 그곳의 음식은 하나같이 정성스럽고 맛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한밤중까지 이어진 심포지엄 뒷담화로 2월 23일의 밤은 그렇게 조용히 저물어 갔습니다.24일은 오전 11시에 비즈니스 호텔 로비에서 만나 해산하는 것이 유일한 일정일 정도로, 여유로운 날이었는데요. 아침 일찍 조식을 먹은 저는 니가타 시내와 바닷가를 산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침 연구년을 맞아 도쿄의 센슈대학에 와 있는 K대학의 A교수가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었는데요. 저희는 일본에서 가장 긴 강인 시나노가와의 강변을 걷기도 하고, 그 강 위에 놓인 아치 여섯 개의 아름다운 반다이바시를 건너기도 했습니다.니가타가 한국문학 전공자에게 문제적으로 다가오는 대목 중의 하나는, 니가타가 북·일간의 교류에 있어 일본측 창구였다는 사실입니다. 재일교포 북송사업 당시 수많은 재일교포들이 ‘지상낙원의 부푼 꿈’을 안고 북송선을 탔던 곳이 바로 니가타입니다. 오늘날 북송사업은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려던 북한의 이해와, 재일교포를 부담스러워하던 일본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그러나 2006년 7월 북한의 장거리 로켓 시험 발사를 이유로 북한 선박의 일본 입항이 금지된 이후에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니가타항과 북한을 오고 가는 배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그래서일까요? 북송사업의 현장지휘소 역할을 하던 조총련 니가타현 본부 및 조국왕래기념관을 찾아갔을 때, 그곳은 셔터가 내려진 채 거의 폐건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을씨년스러운 그 풍경은 현재 북·일간의 삭막한 관계를 대변하는 듯 보였는데요. 1959년부터 시작된 북송사업은 1984년까지 총 186차례에 걸쳐 9만3340명이 이주한 그야말로 대사업이었습니다. 과연 ‘사회주의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겠다는 벅찬 꿈을 안고, 니가타항을 떠났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북한에서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경재 숭실대 교수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한 이경자의 장편 ‘세번째 집’(문학동네, 2013)은 북송교포들의 후일담을 전해주는 귀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김성옥으로 이어지는 김씨 3대의 이야기를 통해, 지난 100여 년에 걸친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펼쳐낸 역작인데요. 할아버지(정남), 아버지(대건), 성옥의 삶을 대표하는 단어는 각각 ‘조센징’, ‘귀국자’, ‘탈북자’입니다. 정남은 징용을 당해 후쿠오카 탄광에 보내졌는데요. 해방 이후 일본에 남아 가정을 이뤄 대건을 낳습니다. 대건(가네다 다이켄)은 와세다대까지 졸업한 엘리트지만 일본 사회가 부과한 ‘조센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 1967년 니가타항에서 북송선을 타는데요. 안타깝게도 김대건은 북한에서 ‘조센징’이라는 굴레를 벗는 대신 ‘귀국자’라는 새로운 굴레를 뒤집어쓰고 맙니다. 대건의 딸로 북한에서 태어난 성옥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탈북하여 남한에서 ‘탈북자’로 살아갑니다.‘세번째 집’에서는 성옥 가족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콧김을 쐰 경험”을 의미하는 ‘귀국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북한 사회에서 받는 고통과 차별이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실수로 동네에 불이 났을 때도, 성옥은 보위부에 끌려가 “토대가 나빠서, 성분이 안 좋아서 어린아이가 남의 소먹이를 다 태운 거”라는 얼토당토 한 이야기를 들어야 할 정도입니다. 성옥은 “귀국자라는 말이 얼마나 지독한 덫인가를” 인민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귀국자’라는 말만 들어도 지겨울 지경에 이릅니다.대건은 평소에 “오리는 오리끼리 만나야 한다”며, 성옥에게 연애 상대로 “귀국자를 만나라”는 말을 습관처럼 해왔는데요. 실제로 보위부장의 아들인 철이와 성옥은 연애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결국 철이 부모의 반대로 둘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이후에도 성옥은 도자기 공장 작업반에 다닐 때, 아버지가 비행군관학교 교수인 토대 좋은 남자의 청혼을 받기도 하는데요.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찾아온 남자에게 대건은 “자네 아버지에게 허락받고 와. 그럼 내가 허락해주지”라고 냉소적으로 대답합니다. 대건의 예상대로 그 남자의 아버지는 “귀국자에 비당원의 자녀와는 혼인할 수 없다”며 성옥과의 결혼을 분명하게 반대하는군요. 결국 북한에 온 초기에는 ‘사회주의 조국 건설’을 위해 성실하게 생활하던 대건도, 귀국자에 대한 차별로 인하여 술만 찾는 냉소적인 인물로 변하고 맙니다. 물론 대건과 그 가족의 삶이 10만 여명에 이르는 모든 북송교포들의 삶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수많은 자료와 증언들은 북송교포들의 삶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00여 명의 동포를 싣고 북한의 청진항을 향해 니가타항을 떠났던 1959년 12월 14일의 바다는 무척이나 소란스러웠을 테지만, 그로부터 65년이 지난 이날의 바다는 너무나 조용하여 쓸쓸하기까지 했습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6-10

니가타의 손창섭

니가타현립대학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연구자들이, 본행사를 앞두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손창섭의 묘입니다. 손창섭(1922~2010)은 장용학과 더불어 대표적인 전후문학 작가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1950년대는 불구적 인물을 통해 전후의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를 탁월하게 형상화했다면, 1960년대에는 당대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세태소설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랬던 손창섭은 1973년 돌연 일본인 아내와 일본으로 떠난 뒤, 공식적으로는 한국사회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손창섭의 일본 내 행적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형편입니다.도쿄 인근에 살았던 손창섭의 묘가 니가타현에 있는 이유는, 유일한 혈육인 딸이 이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손창섭의 묘는 니가타현의 카쿠타산(角田山) 묘코우지(妙光寺)에 있는 묘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손창섭의 묘비에는 ‘손창섭’이라는 한국 이름도, ‘우에노 마사루(上野昌涉)’라는 일본 이름도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곳에는 한자로 ‘道’(도)라는 한 글자만이 새겨져 있었을 뿐인데요. 인기 작가의 온갖 명예를 거부하고, 타국에 가서 은둔자로 살다 죽은 손창섭의 수수께끼 같은 삶과 더불어, ‘道’라는 묘비명은 하나의 화두처럼 제게는 다가왔습니다.묘비에 한국 이름도 일본 이름도 아닌 ‘道’라는 글자만을 남긴, 손창섭의 내면 풍경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우리에게는 다행히 손창섭의 ‘유맹’(한국일보, 1976.1.1.-10.28.)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초점화자인 ‘나’는 손창섭이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해방 이후 북한 생활까지 경험하였으며, 현재는 남한에 본사를 둔 회사의 일본 연락사무소 소장으로 지냅니다. ‘나’의 관찰을 통해 보여지는 1970년대 ‘유맹’의 재일한국인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데요. 겉으로 보기에 물질적 풍족함을 누리는 다카무라 고이치(고광일)조차도 정신적으로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충분한 역사적 개연성을 가진 설정인데요. 식민지 시절 불평등한 다민족 국가였던 일본은 패전 후 새로운 국가를 만들 때, 단일민족 국가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때 과거에는 같은 ‘국민’이었던 다른 민족은 배제의 대상으로 규정되었으며, 이러한 일본의 태도로 인해 재일한국인은 “일본 사회에서 오랫동안 비가시적인(invisible) 소수자로 존재하기를 강요받아”(권숙인, ‘일본의 ‘다민족·다문화화’와 일본 연구’, 다문화사회 일본과 정체성 정치, 권숙인 엮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23면)왔다고 합니다.‘유맹’에서 손창섭의 내면풍경을 보여주는 인물은 ‘유맹’의 초점화자인 ‘나’입니다. ‘나’는 심층심리 차원에서는 한국을 무조건적으로 지향하지만, 표층심리 차원에서 한국을 비판적으로 생각합니다. 반대로 일본문화는 이성적인 차원에서는 긍정적으로 여기지만, 심층 심리나 본능적인 차원에서는 거부의 대상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한국과 일본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 주변화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나’의 모습에 자꾸만 손창섭이 어른거립니다. 실제로 일본에 건너간 손창섭은 별다른 사회적 활동 없이 그야말로 은둔자로 생을 마감했으니까요. 손창섭 역시 본능 차원에서는 ‘한민족적인 것’에 대한 열렬한 지향을 가졌으나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한국적인 것’에 비판적이었으며, 그 사이에서의 분열은 끝까지 해소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러한 제 생각의 타당성 여부는 손창섭이 말년에 남긴 시조를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얼’(1995.3)이라는 시조에서 손창섭은 “나라꼴 어찌됐던 그 世情 어떠하든/내 비록 故國山川 등지고 살더라도/韓나라 얼이야말로 가실줄이 있으랴”라고 하여, 세태와 인정을 떠난 무조건적인 ‘韓나라 얼’에 대한 지향을 보여줍니다. 이에 반해 ‘은둔(隱遁)’(1993.10)에서는 “이몸은 약삭빠른 재간군이 아니어서/名利에 새고지는 俗世間이 지겨워서/사람과 因緣을 끊고 숨어서만 사옵네”라고 하여, 한국이라고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약삭빠른 재간군’과 ‘명리’를 앞세우는 세상에 대한 염오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조들은 손창섭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이면서도 끝내, “사람과 因緣을 끊고 숨어서만” 살았던 이유를 밝힌 것으로 보입니다.‘유맹’의 ‘나’에게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손창섭에게는 평생 ‘한민족적인 것’에 대한 본원적인 지향과 ‘한국적인 것’에 대한 조건적인 거부가 공존했습니다. 그렇기에 작가 손창섭은 끝내 어디에도 귀속될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리타국의 조용한 묘원에 묻힐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길’을 의미하기도 하는 ‘道’라는 묘비명은, 끝내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걷기만 해야 했던 손창섭의 ‘인생길’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5-27

탐미와 감각 그리고 허무

2024년 2월 23일에는 니가타현립대학에서 ‘한국근대문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언어·이동·미디어’라는 주제로 국제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이 행사에는 한국근대문학을 공부하는 연구자들이 동아시아 각지에서 모였는데요. 학계의 말석에 있는 저도 발표자의 한 명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들뜬 마음으로 2월 22일 아침에 인천공항으로 향했던 저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전날 밤부터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인천공항에도 많은 눈이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비행기는 날아 오르지 못했고, 제가 타기로 했던 니가타행 비행기도 활주로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예정된 시간보다 무려 5시간이 지나서야 인천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이미 니가타에서는 사전행사가 진행중이었기에, 공항에서나 비행기에서나 제 마음은 불안하기 그지 없었습니다.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니가타 공항에 도착한 저는 요금이 비싸기로 소문난 일본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로 향했는데요. 공항에서 오랫동안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중요한 일정에도 참여할 수 없었기에 제 마음은 소금밭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이 새로운 즐거움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요. 이유는 택시를 타고 가면서 니가타현의 맨살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니가타현은 쌀로 너무나 유명한 곳이죠. 생산량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고시히카리처럼 맛이 좋은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시내를 벗어나자부터 나타난 넓은 논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던 1시간 남짓한 시간은, 단 하나의 표지판도 없이 왜 니가타가 쌀 생산량 일본 1위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맛있는 쌀과 깨끗한 물이 풍부한 니가타현의 자연조건은 일본의 전통주인 사케를 만들기에도 적합해서, 니가타현에는 일본에서 가장 많은 양조장이 존재합니다. 그래서인지 니가타의 번화가에는 폰슈칸이라는 주류판매점이 있어, 사케 자판기에 동전만 넣으면 100여 종류가 넘는 사케들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해가 다 져서야 도착한 숙소는 야히코 신사 옆에 있는 오래된 료칸이었는데요. 삼나무가 가득한 신사와 눈에 쌓인 주변 풍경은 저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속 세계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 유명한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나라였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夜の底が白くなった。)”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설국’의 배경인 ‘눈의 나라(雪國)’가 바로 니가타현인 것입니다.제가 머물던 미노야 료칸과 그 주변의 풍경은 소설 ‘설국’의 실사판 같았는데요. 물론 ‘설국’의 무대는 니가타현의 에치고유자와 온천이지만, 제 마음에는 ‘설국’에 나오는 “산골짜기는 어두워지는 것도 빨라서 벌써 으스스하게 황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흐릿한 어둠으로 아직도 서쪽 해가 눈에 반사되면서 먼 산들이 소리 없이 다가오는 듯했다”나 “마을의 강기슭, 스키장, 신사 할 것 없이 곳곳에 흩어진 삼나무 그루들이 거뭇거뭇하게 눈에 띄기 시작했다”와 같은 문장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야히코 신사와 그 주변을 둘러싼 커다란 삼나무, 그리고 2024년의 마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너무나도 조용하여 쓸쓸하기까지 한 마을의 풍경이 저를 ‘설국’의 세계로 데려간 것입니다.‘설국’에서 부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글이나 끄적이며 사는 시마무라는 눈의 나라에서 게이샤 고마코와 소녀 요코를 만납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통과하여 만난 사람들인 만큼, 두 여인은 이승에는 있을 것같지 않은 신성과 모성과 여성을 체현한 신비스러운 존재인데요. 시마무라는 이들 여인과 조용하지만 농밀한 감정의 드라마를 펼쳐 나가지만, 결국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인해 그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하얀 순백의 공간에 펼쳐진 새빨간 불의 이미지로 가득한 마지막 장면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펼쳐 보인 탐미의 절정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는데요. 그 섬세한 감각의 아름다움 속에서는 죽음마저도 새로운 느낌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저는 ‘설국’을 읽을 때마다,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시마무라도 고마코도 요코도 아닌 ‘눈(雪)’이라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유년기에 부모, 누나, 조부모의 죽음을 겪으며 천애고아로 성장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이 세계란,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천변만화하는 인간의 삶이란 결국 무라는 허무에 불과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기에 가와바타가 그려내는 세계의 주인공은 언젠가는 ‘녹아 없어질 눈’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설국’이 창작되던 시기(1935년 연재를 시작하여 1948년 완성)가 일본의 무한확장을 추구하던 천황제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니가타현을 배경으로 펼쳐진 탐미와 감각의 세계는 시대를 향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식의 절규는 아니었을까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5-13

시코쿠헨로를 아시나요?

1월 28일부터 1월 31일까지 이루어진 이번 마쓰야마 학술기행은, 일본고전문학을 전공한 Y교수가 자신의 전공과 밀접하게 관련된 시코쿠헨로(四国遍路) 학술답사를 계획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흔히 오헨로(お遍路)라 불리기도 하는 시코쿠헨로는 시코쿠섬에 위치한 88개 사찰을 참배하는 순례길을 말하는데요. 전체 거리는 1450㎞에 이르며, 보통 걸어서는 40일 정도가 걸리는 그야말로 길고 긴 순례길입니다.88개의 사찰은 모두 일본의 고승인 고보다이시(弘法大師, 774-835년)와 관련돼 있는데요. 고보다이시는 시코쿠에 있는 지금의 가가와현에서 태어나 장래가 보장된 엘리트 코스를 밟아 나가다가, 어느 날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합니다. 그는 이후 당나라에 유학하여 2년간 불교를 더욱 깊이 있게 공부하고 돌아와 전설적인 고승이 되는데요. 진언종을 창시한 고보다이시는 수많은 사람들을 제도하다 고야산에서 입적합니다.저와 C교수는 미리 시코쿠에 도착하여 88개 사찰을 답사하던 Y교수와 1월 28일에 마쓰야마 공항에서 만난 것입니다. 우리 일행은 마쓰야마의 여러 곳을 돌아보던 중, 시코쿠헨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미를 지닌 이시테지(石水寺)를 함께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이시테지는 728년에 쇼무 천황의 요청에 따라 창건되었으며, 오랜 역사를 가진 진언종의 대표 사찰입니다. 1318년에 지어진 니오몬(仁王門)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이외에도 본당, 삼층탑, 종루 등의 국가중요문화재가 산재한 명찰인데요. 시코쿠 88개 사찰 중에서는 51번째에 해당하는 사찰이기도 합니다.시코쿠헨로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요, 그 중의 하나는 헤이안 시대 오늘날 에히메현의 호족이었던 에몬 사부로가 순례길을 떠난 것에서 시작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전설은 저희 일행이 방문했던 이시테지(石水寺)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에몬 사부로는 부자이며 권세도 있었지만, 탐욕스럽고 포악했다고 하는데요. 어느 날 자신의 집을 찾아온 승려에게 자선을 베풀기는커녕, 그만 대나무 빗자루로 승려의 발우를 여덟 조각으로 부숴 버렸다고 하는데요. 그날 이후로 사부로가 애지중지하던 여덟 명의 자식들은 차례로 죽어나갔고, 뒤늦게 사부로는 자신이 박대했던 승려가 바로 고보다이시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큰 충격을 받은 사부로는 대사에게 사죄하고자 시코쿠헨로를 시작합니다. 다행히도 사부로는 순례길에서 대사를 만나지만, 이미 중병에 걸린 사부로는 “다음 생애에는 고노 가문에 태어나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뜻을 대사에게 밝히고 죽습니다. 이에 대사는 돌을 주워 거기에 ‘에몬 사부로’라 새겨 사부로의 손에 쥐어주었다고 하는데요. 이듬해 그 지역의 부유한 집안인 고노 가문에 한 남자아이가 태어나고, 신기하게도 그 아이는 꽉 쥔 오른손을 펴지 않습니다. 당황한 아이의 부모는 안요지(安養寺)를 찾아가 기도를 올린 후에야 아이의 손을 펼 수 있었는데요. 거기에는 ‘에몬 사부로’가 선명하게 새겨진 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인요지라는 절은 에몬 사부로 이야기에 따라 ‘돌의 손’이라는 뜻을 가진 이시테지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는데요. 이시테지에는 이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절 입구에서부터 에몬 사부로의 석상이 세워져 있고, 절의 박물관에는 설화 속의 돌이 전시돼 있습니다. 시코쿠헨로를 대표하는 슬로건은 ‘동행이인(同行二人)’입니다. 1450㎞의 길을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의미인데요. 이 때 누군가는 말할 것도 없이 고보다이시입니다. 이와 관련해 이시테지에서는 멀리서부터 사람들의 눈을 한눈에 사로잡는 거대한 조형물이 하나 있었는데요. 이경재 숭실대 교수 절이 자리한 뒷산 정상에 있는 고보다이시의 석상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놀랍게도 이 조형물은 전체 높이가 16m이며, 얼굴 길이만 2.4m, 붓 길이는 3m에 이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산의 정상에 있기에 더욱 웅장하게 보이는데요. 고보다이시의 몸은 그가 유학했던 중국의 시안(西安)을, 얼굴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향해 있다고 합니다. 이 거대한 고보다이시 석상은 이시테지로부터 3㎞ 떨어진 마쓰야마성에서도 선명하게 보였습니다.요즘 전세계적으로 순례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오늘 소개한 시코쿠헨로 이외에도 일본의 구마노고도, 포르투갈의 파티마, 스페인의 산티아고, 미국의 세도나 등에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사람들이 영혼의 갈증에 시달린다는 증거겠지요. 본래 여행이란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갔다가, 그 곳에서 새로운 힘을 얻어 다시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는 인간의 오래된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일상의 질서와는 확연히 다른 신성과 신비로 가득한 성지를 다녀오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는 궁극의 여행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4-04-29

목숨 걸고 쓰다 그리고 죽다

마쓰야마에는 나쓰메 소세끼의 흔적도 곳곳에 있지만, 마쓰야마에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문인은 단연 마쓰야마에서 나고 자란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1867-1902)입니다. 마쓰야마 시립 시키기념박물관에는 마사오카 시키의 생애와 문학에 관한 온갖 자료들이 알뜰하게 모아져 있었는데요. 대충 훑어보는 데만 한나절이 걸릴 정도였습니다. 마사오카 시키는 언론인, 수필가, 평론가 등으로도 활약했지만, 그의 가장 큰 활약은 단연 일본의 전통 시가인 하이쿠를 혁신한 겁니다. 심지어 시키의 하이쿠 혁신 운동이 없었다면, 일본이 자랑하는 하이쿠는 이미 사라졌을 거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니까요.시키는 당시 유행하던 하이쿠가 발상이 신선하지 않고, 사용하는 언어가 상투적인 것 등을 비판하며, 새로운 하이쿠를 주장했는데요. 새로운 하이쿠가 갖춰야 할 요소로 시키는 당시 일본에 들어온 서양화에서 비롯된 ‘사생(寫生)’이라는 개념을 내세웠습니다. 사생이란 “실제로 있는 그대로를 그린다”는 의미인데요. 시키는 자연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하이쿠야말로 새로운 세상에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 믿었던 겁니다. 그러한 시키의 생각은 그대로 적중하여 하이쿠는 오늘날에도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 시가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습니다.시키기념박물관을 둘러볼 때, 저의 시선을 잡아끄는 강렬한 모형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듯 초췌해 보이는 시키가, 한 여성이 들고 있는 화판에다 붓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는 모형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시키의 죽음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시키의 창작을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모형 옆에 놓여 있는 안내판에는, 시키가 죽기 하루 전날 가족과 지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절필삼구(絶筆三句)’를 쓰는 장면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절필삼구’는 시키가 병상에서 보이는 수세미외를 읊은 세 편의 시가인데요. 시키는 목숨이 경각에 걸린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키기념관을 나온 후에도, 기괴하게까지 느껴지던 이 모형은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도대체 무엇이 한 인간으로 하여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것인지 너무나 궁금했던 것입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저는 시키가 보여준 ‘목숨을 건 글쓰기’가 일본의 무사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나라에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간상과 정신이 있는데요. 일본인이 내세우는 이상적인 인간형과 정신은 말할 것도 없이 무사(사무라이)와 무사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사도의 핵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사도의 고전으로 꼽히는 ‘하가쿠레(葉隱)’(1716년)에서 야마모토 쓰네토모는 반복해서 무사란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은 “무사도란 ‘죽음’을 깨닫는 것이다. 생과 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죽음을 선택하면 된다”로 시작합니다. 또 하나의 무사도에 대한 고전인 다이도지 유잔의 ‘부도쇼신슈(武道初心集)’(1720년)도 “무사는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생활해야 하는 것이 숙명”임을 반복해서 강조하는데요. 오늘날 세계인들에게 일본의 무사도를 알린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Bushido)’(1899) 역시 사무라이의 제1계율을 “죽음을 각오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말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무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던 것이죠. 이경재 숭실대 교수 문인과 무인을 구분하는 문화에 익숙한 우리는 일본의 사무라이를 ‘칼을 찬 무인’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요. 우리와 달리 일본의 사무라이는 기본적으로 ‘칼을 찬 무인’이지만, 동시에 ‘붓을 든 문인’이기도 했습니다. 사무라이는 전쟁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에 필요한 일체의 활동을 담당했으니까요. 일본 문화에서는 애당초 문인과 무인은 일체화된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붓을 든 자’ 역시 ‘칼을 찬 자’와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내면화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는, 조금은 기괴하게까지 느껴지는 시키의 최후 모습은 아마도 이러한 전통 속에서 가능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마쓰야마시에는 시키기념박물관 이에에도 시 중심부에는 시키가 살던 집을 본떠 지은 시키도(子規堂)가 있고, 도고 온천역 근처에는 야구 배트를 든 시키상이 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문인이 야구 배트를 들고 있다는 것에 의아해 할 분도 있으실 텐데요. 시키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야구용어, 일테면 1루수, 2루수, 우익수, 포수와 같은 말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안다면, 붓 대신 야구 배트를 든 시키도 그렇게 어색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2024-04-15

(비)일상의 공간 온천

지난 1월 29일 저희 일행이 향한 곳은 마쓰야마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명소인 도고온천입니다. 도고온천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유바바 온천장의 실제 모델로도 널리 알려져있지요. 일본 최초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도 등장하는 도고온천은 무려 3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최고의 온천입니다. 이토록 유서 깊은 도고 온천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1894년 서구식과 일본식을 절충한 양식의 도고온천본관이 건설된 이후인데요.이 건물은 2차 대전 당시 미군의 공습으로 마쓰야마시 전체 가옥의 55%가 파괴되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희 일행이 방문했을 때는 도고온천본관이 내부공사 중이어서 근처의 별관인 아스카오유에서 온천을 즐길 수 있었는데요. 다리를 다친 백로가 도고온천에서 상처를 치유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두 건물의 꼭대기에는 모두 백로 조형물이 있었습니다.흥미로운 것은 도고 온천가에 일본의 문호인 나쓰메 소세키(1864~1916)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복원된 도고온천역에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坊っちゃん, 봇짱)’(1906)에도 등장하는 봇짱 열차 실물이 전시돼 있었으며, 근처에는 8시부터 22시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도련님’의 등장인물이 나와 움직이는 ‘봇짱가라쿠리시계탑’이 있었고, 도고온천 상점가에서는 ‘도련님’과 관련된 각종 미니어처와 봇짱 당고를 팔기도 했습니다.이것은 마쓰야마와 나쓰메 소세키가 맺은 인연의 결과입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28세이던 1895년 마쓰야마의 보통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이곳에서 1년간 생활했는데요. 이때 고교 동창이자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와 교류를 나누었으며, 무엇보다도 소세키의 명작 ‘도련님’을 낳는 여러 가지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도련님’은 에돗코(江戸っ子, 도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 봇짱(도련님)이 마쓰야마의 학교에 부임해 장난이 심한 학생들과 도덕성이 결여된 선생님들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다시 도쿄로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마쓰야마 지역의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짓궂고 음험한 면도 있지만, 봇짱 역시 무조건 자기만 옳다고 여기기에 마쓰야마 사람들이 더욱 부정적으로 보인 것인지도 모릅니다.이 작품의 첫 번째 문장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나는 손해만 봐왔다(親譲りの無鉄砲で子供の時から損ばかりしている.)”는 것인데요. 봇짱의 무모하고 저돌적인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가 바로, 그 유명한 ‘무대포(無鉄砲, むてっぽう)’입니다. 결국 봇짱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교감에게 복수를 하고 도쿄로 돌아갑니다. 어쩌면 무대포인 봇짱이 살 수 있는 곳은 언제나 “도련님은 올곧고 고운 성품을 지녔어요”라고 칭찬만 해주며, 자신을 “끔찍이 귀여워해” 주는 기요가 사는 도쿄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도련님’의 봇짱을 생각할 때면, 늘 나쓰메 소세키의 강연 ‘나의 개인주의’(1914)가 떠오릅니다. 이 강연에서 소세키는 남의 흉내나 내는 ‘타인본위’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개인주의를 주장했는데요. 이때의 개인주의는 “당파심이 없고 옳고 그름만 있는 주의”로서, 국가주의가 대세이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주목할 것은 소세키가 개인주의는 필연적으로 남들이 모르는 외로움을 낳는다고 경고한 점입니다. 실제로 ‘도련님’의 봇짱은 불평불만으로 가득했던 마쓰야마를 떠나 도쿄로 돌아오지만, 곧 자신의 유일한 하인이자 친구이며 부모이기도 한 기요가 죽어 진정한 혼자가 되어 버립니다. 철저히 ‘자기본위’로만 생활했던 봇짱에게는 안타깝지만 당연한 결말이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이경재 숭실대 교수 ‘도련님’에서도 도고 온천가는 매우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합니다. 봇짱은 “다른 곳은 뭘 보나 도쿄의 발뒤꿈치에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온천만은 근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나 온천이 맘에 들었는지, 봇짱은 하루라도 온천에 가지 않으면 “왠지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그토록 혐오하는 집과 학교와는 구분되는 비일상적인 장소가 아니었음이 곧 밝혀집니다. 사실 이곳에도 수많은 눈들이 있어, 봇짱이 경단이나 메밀국수를 먹거나, 욕탕에서 헤엄을 쳤다는 등의 사소한 사실까지도 낱낱이 감시당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기에 ‘도련님’에 등장하는 도고온천은 일상의 괴로움과 모자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일상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일상의 자유로움과 홀가분함과는 거리가 먼 일상의 공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하긴 일본에는 활화산만 70여 개에 이르며, 공식적으로 지정된 온천만 3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또한 고온다습한 기후의 특성상 일본인에게 목욕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일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도련님’이 잘 보여주듯이, 일본인에게 온천은 극락과도 같은 별세계이면서, 동시에 가장 친숙한 삶의 공간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24-04-01

일본 성터에서 발견한 러시아 금화

마쓰야마성에서 내려다본 마쓰야마 시내. 일본이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인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습니다.실제로 2024년 1월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268만8100명) 가운데 한국인은 가장 많은 85만7000명을 기록했다고 하는데요. 이런 추세로 가면, 올해에는 일본 방문 한국인 관광객 수가 역대 최대인 1000만 명을 넘길지도 모른다고 합니다.최근에 유명 관광지인 오사카의 도톤보리나 도쿄의 센소지 등에서는 한국어가 일본어만큼이나 많이 들린다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제가 실제로 한국인의 뜨거운 일본 관광열을 확인한 것은, 2024년 1월 28일 한국과 일본의 고전문학을 전공한 C·Y교수와 마쓰야마(松山) 공항을 나왔을 때입니다. 공항을 나선 저희 일행 앞에는, 무려 세 대의 대형버스가 한국인 관광객을 마쓰야마 각지로 실어 나르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에히메현(愛媛県)의 대표도시인 마쓰야마 시내로 들어서자, 가츠산(勝山) 산정에 자리 잡은 마쓰야마성의 혼마루(本丸, 성의 중심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숙소인 비즈니스 호텔의 욕탕에서도 보이던 마쓰야마성은, 마쓰야마 시내 어디를 가든 보였는데요. 3박 4일 내내 마쓰야마성을 보며,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판옵티콘(panopticon, 일망감시체제)이 떠올랐습니다. 판옵티콘은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고안된 원형 감옥을 말합니다. 이곳에서 모든 죄수들은 감시자가 머무는 중앙을 바라보지만, 감시자가 머무는 곳은 늘 어둡게 처리하여 죄수들은 감시자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죄수들은 자신들이 늘 감시받는다고 느끼게 되며, 그 결과 나중에는 감시자들이 원하는 규율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게 된다는 것인데요. 어쩌면 일본에서 성은 외적을 방어하는 목적보다도 영지에 사는 평민들에게 웅장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영주의 권력을 각인시키는 목적이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목적에서라면 세토나이해(瀬戸內海)까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마쓰야마성은 참으로 빼어난 성임에 분명합니다.이름난 무장이었던 가토 요시아키가 1602년에 축성을 시작한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완성된 마쓰야마성은 일본의 3대 연립식 평산성(산성과 평지성의 중간쯤으로 구릉지와 평지를 각각 일부씩 포함한 성곽) 중의 하나입니다. 마쓰야마성은 매우 큰 규모를 자랑하는데요, 해발 132m의 가츠산 정상에는 혼마루가, 산기슭에는 니노마루(二の丸, 영주의 거주공간)와 산노마루(三の丸, 가신들의 저택)가 짜임새 있게 펼쳐져 있습니다.우리 일행은 에도 시대에 건축된 천수각으로 유명한 혼마루을 구경한 후에, 과거의 니노마루를 복원한 니노마루사적공원을 산책했습니다. 일본 특유의 정원미가 가득한 공원을 거닐던 저는 흥미로운 안내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안내판은 거대한 우물 옆에 놓여 있었는데요.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매립되었던 우물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제정 러시아 시대의 10루블짜리 금화가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금화에 러시아인과 일본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인데요. 일본의 전통 정원에서 러시아 금화가 나온 것이나, 거기에 러시아인과 일본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 등이 모두 이해되지 않아 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제 의문은 한국에 돌아와 박삼현 교수가 쓴 ‘마쓰야마, 언덕 위의 구름’(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서해문집, 2022)이라는 글을 만나면서 비로소 해소되었는데요. 박삼현 교수에 따르면, 러일전쟁 당시 마쓰야마에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러시아군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고, 당시 마쓰야마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4천여 명의 러시아군 포로가 수용되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마쓰야마 사람들과 러시아군 포로들의 일상적 교류도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마쓰야마성의 니노마루를 복원한 공원의 우물에서 러시아 금화가 발견될 수 있었다는 것인데요. 여러 조사를 통해, 금화에 이름을 새긴 러시아인과 일본인은 각각 당시 포로가 되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러시아군 장교와 그를 간호하던 일본인 여자 간호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금화가 발견된 이후 마쓰야마의 니노마루공원은 연인들이 프러포즈를 하는 성지가 되었고, 2019년에는 금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 ‘소로킨이 본 사쿠라’까지 제작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영화는 일본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제작했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는 생각이 듭니다.니노마루공원의 바로 옆에 있는 반스이소(萬翠莊)의 곳곳에도, 반스이소에서 ‘소로킨이 본 사쿠라’가 촬영되었음을 알리는 사진이나 문구가 전시돼 있었습니다.프랑스풍 르네상스식 건물인 반스이소는 마쓰야마 영주의 자손인 히사마쓰 사다코토가 1922년에 지은 이후, 사교장으로서 그 명성을 떨쳐온 아름다운 건축물입니다. 일본 중요문화재로도 지정된 반스이소를 각계의 명사들은 물론이고 천황이 방문하기도 했지요. 일본의 성터 우물에서 발견한 러시아 금화를 보며, 어쩌면 인류는 늘 깊이 연결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24-03-18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세상

지난 1월 16일 비즈니스 호텔에서 눈을 뜬 저는 호텔 주변을 산책했습니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공기가 어찌나 맑고 투명한지 눈이 부실 정도였는데요. 이날은 작가 오시로 사다토시 선생님이 우리를 안내해 주셨습니다. 오시로 사다토시는 1949년 오키나와에서 태어나 시 창작으로 시작해, 이후에는 소설로 장르를 확대하며 지금까지도 맹렬하게 활동하는 오키나와의 대표적 문인입니다. ‘저승의 목소리’ ‘게라마는 보이지만’ ‘1945년 비통한 오키나와’ 등의 소설은 환상적인 기법을 통해 오키나와전의 비극을 표현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지요.그의 소설에는 늘 전쟁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는 정신, 억울한 망자들의 못다한 말을 담아내는 마음, 사라져가는 오키나와 말(시마고토바)을 쓰려는 의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오키나와 소바를 파는 식당에서, 오키나와전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는 말씀을 드리자, 선생님은 바로 제 손을 잡으며, 우리는 ‘친구’라고 뜨겁게 말씀해주시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진정한 문학에는 국경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오시로 선생은 우리 일행을 오키나와의 대표 언론사인 ‘오키나와 타임즈’로 안내했는데요. 오키나와는 인구 150만 정도의 섬이지만, ‘오키나와 타임즈’의 규모는 한국의 그 어떤 언론사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습니다.이런 언론사가 나하시에 하나 더 있다는 말을 들으며, 오키나와가 차지하는 사회·역사적 위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키나와 타임즈’에서는 시로마 아리 기자가 안내를 해주었는데요, 시로마 기자는 류쿠 대학 시절 오시로 선생님의 제자였으며, 현재는 ‘오키나와 타임즈’의 출판콘텐츠부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저희에게 ‘일본 복귀’ 50주년을 기념하여 2022년에 출판한 ‘반복귀론을 다시 읽다(‘反復帰論’を再び読む)‘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 책은 ‘오키나와 타임즈’가 발행했던 잡지 ‘新沖縄文学’ 18호(1970.12)와 19호(1971.3)에 수록된 ‘반복귀론(反復帰論)’ 관련 논문 8편을 수록한 것인데요. 그 중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가 쓴 ‘오키나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沖縄の友人への手紙)’도 있었습니다. 미국의 직접 통치 아래서 여러 가지 고통을 겪던 오키나와인들은 미국의 군사지배보다 일본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972년에 ‘복귀’를 쟁취하였으나, 몇몇 사람들의 우려처럼 ‘복귀’의 실제 모습은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약속한 복귀의 대전제는 오키나와에 존재하는 미군기지가 조금의 손상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그 결과 미국의 군사기지가 그대로 남은 것은 물론이고 신기지가 건설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일본 국토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는 재일미군기지 전용시설의 74%가 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기지는 섬 전체 면적의 2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지금도 오키나와 경제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은 관광과 기지 관련 수입이라고 합니다.‘오키나와 타임즈’를 나온 우리 일행은, 오시로 선생님의 안내로 1959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오키나와시사출판사’를 방문하였습니다. 오키나와의 사정을 일본 본토의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취지로 만들어진 이 출판사는, 오늘날 아동용 도서 출판으로 유명한데요. ‘오키나와시사출판사’ 견학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소학교(우리의 초등학교) 3,4학년용 교재였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소개한 것들인데요.오키나와 어린이들은 자기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학교에서 정식으로 배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키나와 아이들은 자신이 직접 발 딛고 사는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교과서로 배우며, 일본인으로 성장한다는 것인데요. 어쩌면 국가의 역사와 문화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향토에 대해서부터 배우는 것도, 올바른 세계시민이 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1월 17일에는 후텐마 기지, 헤노코 기지와 함께 오키나와의 대표 미군기지인 카데나 미 공군기지를 방문했는데요. 카데나 미 공군기지는 베트남전 당시 전략폭격기 B-52가 수시로 뜨고 내렸던 곳으로도 유명하죠. 기지 건너편에는 4층 건물의 카페나 휴게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의 전망대에서는 드넓은 기지와 3,700m에 이르는 쭉 뻗은 활주로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잠시 머무는 사이에도 미군기가 뜨고 내리기를 반복했습니다, 전망대에 설치된 소음측정기에 나타난 숫자는 무려 100데시벨을 넘어서고는 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는데요.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보통 110데시벨 정도라고 하니, 근처에 사는 오키나와인들은 경적 소리와 함께 일상을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어쩌면 평화란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소곤소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라는 소박한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2024-03-04

마타요시 에이키의 소설을 경건한 마음으로 읽는 이유

오키나와는 17세기 초부터 일본(정확히는 사쓰마번)의 침략을 받았고, 19세기에는 일본에 편입되었으며, 1945년에는 지옥과도 같았던 오키나와전을 겪었고, 이후에는 미국의 군사적 지배를 받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된 이후에는 섬의 상당 부분을 군사기지로 내주어야 했습니다.이러한 역사를 지닌 오키나와에 대한 서사는 대부분 오키나와인의 ‘피해자 의식’을 강조하고는 했는데요. 마타요시 에이키(1947~)는 이러한 ‘피해자 의식’을 넘어 오키나와인 역시 욕망과 의지가 있는 ‘인간’이며, 가해자들 역시 양심과 선의지가 있는 ‘인간’일 수 있음을 형상화하는 문제적 작가입니다. 특히 ‘긴네무집(ギンネム屋敷)’(1980)은 오키나와에 사는 조선인 남자를 통해, 오키나와인의 ‘피해자 의식’을 성찰하는 문제적 작품입니다.마을에는 긴네무로 둘러싸인 집이 하나 있습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그곳에는, 서른 전후의 조선인 남성이 혼자 살고 있는데요. 유키치는 ‘나’와 요시코의 할아버지를 꼬드겨서, 조선인 남자에게서 돈을 뜯어내려고 합니다. 실제로는 자신이 요시코를 겁탈했으면서도, 조선인 남자가 요시코를 겁탈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협박하려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할아버지나 ‘나’도 조선인을 경멸하고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그런데 미군의 엔지니어라는 직업은 조선인 남자의 위상을 애매하게 만듭니다. 조선인 남자가 미군의 엔지니어로 일하기에 ‘나’를 비롯한 유키치나 할아버지가 조선인 남자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선인 남자는 그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합니다. 남자는 다른 미군 엔지니어들이 사는 “철망 안 미군 하우징”도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현재 살고 있는 긴네무집에 대해서도 “제 것이란 느낌”은 갖지 못하니까요.‘긴네무집’에서는 조선인 남자와 그의 연인이었던 조선 여인 고샤리(コシャリ)를 통해 오키나와에 살았던 조선인의 기구한 처지가 잘 드러납니다. 본래 조선에서 남자는 고샤리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곧 징용에 끌려갑니다. 요미탄에서 비행장 건설 강제 노동을 하던 남자는, 일본군 대장(隊長)과 함께 있는 고샤리를 발견하는군요. 이후 오키나와전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남자는 미군의 포로가 되어, 연안을 따라 숨어 있는 일본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방송을 하기도 합니다.남자는 오직 오키나와에 고샤리가 살아 있다는 확신 하나로 살아왔는데요. 종전 이후 팔 년이 더 지난 후에야 남자는 매춘소에서 고샤리와 만나게 됩니다. 성병에 걸려 미군에게도 버려진 고샤리는 거지꼴을 한 오키나와 사람들이나 찾아오는 매춘소에서 꿈틀대고 있었던 겁니다. 실로 고샤리는 “일본 병사, 미군 병사, 오키나와인”에게 능욕당한 존재였던 거네요.남자는 고샤리를 낙적시켜 긴네무집에 데려오지만, 고샤리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며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고샤리에게 “한마디라도 해봐!”라고 애원하지만, 샤리는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얼굴에 침을 뱉을 뿐입니다. 결국 남자는 샤리를 목졸라 살해합니다. 남자는 언제고 죽을 기회가 있었던 전쟁 중에는 고샤리를 떠올리며 살아남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죽을 염려가 없어지자 고샤리를 간단히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샤리는 일본 병사, 미군 병사, 오키나와인에게 능욕당한 것은 물론이고, 조선인 남자에게도 능욕당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오키나와에서 나고 자라 오키나와에서 평생을 살아온 마타요시 에이키는 ‘오키나와인’과 ‘외지인’을 결코 ‘선인/악인, 약자/강자. 피해자/가해자’라는 구도에 가두지 않습니다. 그 곡절 많은 역사가 만들어낸 수많은 맥락 속에서 다양하게 펼쳐진 인간군상의 천변만화를 담담히 그려낼 뿐입니다.그렇기에 오키나와인 마타요시 에이키는 조선인 남자의, “당신들은 뼈는 오키나와 주민 것이거나, 미군 것이거나, 일본 병사의 것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지요. 그럼 수백 수천 명에 이르는 조선인은 뼈마저도 썩어 버린 것일까요.”나 “경찰은 한 번도 오지 않더군요. 아마, 피해자가 조선인 매춘부라서 일겁니다. 아니면, 가해자가 미군 엔지니어 조선인이라서 일까요?”와 같은 말을 들려줄 수 있는 것이겠죠. 결국 조선인 남자는 자살하고, 그는 모든 재산을 “친구”라는 이유로 오키나와인인 ‘나’에게 남깁니다. 아마도 작가는 오키나와인에게는 갚아야 할 조선인의 유산이 남아 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원래 인간은 자신의 피해자성과 타인의 가해자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는 합니다. 그러한 경향은 개인이 아닌 국가나 민족과 같은 공동체의 경우는 더욱 강해지는데요. 만약 자신의 피해자성만 기억하게 되면, 우리는 폭력과 복수를 정당화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스스로를 영원한 타자로 전락시킬 수도 있습니다.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이 인간, 즉 피해자이기도 하면서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역사의 상흔을 온몸으로 받아낸 오키나와인이면서도, 자신의 (비)인간성을 함께 성찰하는 마타요시 에이키의 소설은 늘 집이 아닌 절이나 교회, 혹은 성당에서 읽고 싶습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2-19

오키나와에서 만난 아리랑

평소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던 저희 일행이 오랜 준비 끝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것은 지난 1월 15일 오전이었습니다. 그날 서울의 아침 기온은 영하 7도였는데요. 2시간여의 비행을 끝내고 나하 공항에 착륙했을 때, 활주로의 곳곳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활짝 피어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1천200㎞가 떨어진 섬에 왔다는 걸 고려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풍경임에는 분명했습니다.비즈니스 호텔에 여장을 푼 일행은 오키나와의 역사를 상징하는 슈리성(首里城)으로 향했는데요. 슈리성은 1429년 오키나와 전체를 지배하는 류쿠 왕국이 탄생한 이후, 류쿠 왕국을 대표하는 최대의 성이자 왕궁이었습니다. 나하 시내 언덕 위에 위치해 전망도 빼어난 슈리성은 2019년 거의 전소된 이후, 지금도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일본 2천엔 지폐에 새겨져 있을 정도로 슈리성은 매우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인데요. 하루 빨리 복원되어 한때 조선과 중국과 일본을 연결해주던 류큐 왕국의 위용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저녁에 우리 일행은 오키나와 전통 요리점으로 이동했는데요. 그곳에서는 우미부도(바다포도)나 고야참푸르(여주, 두부, 햄 등을 함께 볶은 요리)와 같은 오키나와의 전통 요리를 맘껏 맛보았습니다. 한창 식사 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오키나와 전통 의상을 입은 한 남성이 뱀가죽으로 몸통을 두른 오키나와 전통악기 산신(三線)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참고로 오늘날 일본의 전통 현악기로 첫손에 꼽히는 샤미센(三味線)은 산신(三線)이 일본 본토에 전해져 토착화한 것입니다. 처음 그 악사는 시마우따(島唄)와 같은 오키나와 전통 음악을 들려주며 분위기를 띄웠는데요.정작 놀라운 일은 마지막에 일어났습니다. 그 악사는 갑자기 아리랑 가락을 너무나도 구슬프게 연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리랑 가락이 반갑고도 신기했던 우리 일행은 오키나와 악사에게 그 노래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리랑을 자신의 할머니에게서 배웠고, 할머니는 그것을 이웃의 조선인에게서 배웠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악사의 할머니에게 아리랑을 가르쳐 준 조선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키나와 역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라사키 모리테루의 ‘오키나와를 안다, 일본을 안다(沖縄を知る 日本を知る)’(1977)는 오키나와 입문서로 유명한 책인데요. 역사학자 김정자는 2016년 이 책을 ‘오키나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하면서, 부제로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이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늘 이 부제보다 오키나와의 특징을 정확하게 압축해 놓은 말은 아마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본래 오키나와는 류큐라는 이름으로 중개무역 등을 통해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온 독립 왕국이었죠. 그래서 류큐의 전통문화에는 중국과 조선의 흔적도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랬던 것인데, 일본은 일찍부터 류큐 왕국에 손길을 뻗쳐, 1609년에는 사쓰마번이 무력으로 침략하고, 1872년에는 류큐국을 류큐번으로 격하했으며, 1879년에는 아예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여 일본에 편입시켜 버립니다. 그러다 1945년에는 2차대전 중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지옥의 땅이 되어버리기까지 합니다.오키나와전은 참으로 끔찍한 전쟁이었는데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일본 군부는 오키나와(인)를 바둑판의 사석처럼 여겼습니다. ‘본토 결전’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고, 천황제를 지키기 위한 평화교섭의 길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사항전을 하고자 했고, 온갖 흉악한 일들을 벌여 미군으로 하여금 본토에 상륙할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만들고자 했죠.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런 일본군의 눈에 오키나와인의 생명이나 존엄 따위가 들어올 리는 없었습니다. 이런 광기 속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일본군의 (반)강제에 의해 집단자결하는 일이 속출했습니다. 어찌 보면 침략자일 수도 있는 일본 제국을 위해 수많은 오키나와인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어갔던 것입니다.그 결과 오키나와전에서는 본토 출신 군인 약 6만5천 명과 오키나와 출신 군인 약 3만 명이 희생되었고, 무려 10만 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10만이라는 희생자 수는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이때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오키나와전에서 징용 또는 종군위안부로 한반도에서 강제연행 된 만여 명의 조선인 또한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식당에서 만난 악사의 아리랑은 일제시대 오키나와에 끌려온 수많은 조선인들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아리랑보다도 그 악사의 아리랑이 더 슬프게 느껴졌던 이유는, 거기에 지난 시기 동아시아의 비극이 녹아 들어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2-05

교토(京都)의 두 얼굴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에서는 1963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년 대하역사드라마를 제작하여 방송하고 있는데요. 일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유명한 인물들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는 합니다.2023년에는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2022년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주역이었던 13인의 사무라이, 2021년에는 올해부터 일본 1만 엔 지폐의 주인공이 될 시부사와 에이이치, 2020년에는 전설적인 하극상의 주인공 아케치 미츠히데가 드라마의 주역이었습니다.올해는 시대를 훌쩍 건너 뛰어 헤이안 시대(794~1185)에 활동했던 여성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光る君へ’-빛나는 그대에게 혹은, 히카루(노)기미(히카루 겐지)에게라는 중의적 의미를 가짐-를 방영하고 있습니다.무라사키 시키부는 일본 고전문학의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源氏物語(겐지모노가타리)’를 쓴 여성 작가로서, 이 작품은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를 통해 사랑과 권력, 욕망과 허무 등을 200자 원고지 5000매가 넘는 분량으로 담아낸 고전입니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헤이안 시대는 귀족문화가 꽃을 피웠던 시기이며, 헤이안(平安)이라는 이름처럼 일본 역사에서 드물게 평화롭고도 안정되었던 시기로 알려져 있지요.많은 역사학자들은 헤이안 시대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기초가 형성되었으며, 나아가 일본인의 무의식이 형성되었다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평화롭고 귀족적인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이 바로 ‘겐지모노가타리’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겐지모노가타리’는 헤이안궁을 주무대로 한 그 시대 최고 권력자들의 이야기인 만큼 작품에 등장하는 교토의 모습은 세련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교토는 간무 천황이 천도를 한 794년부터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옮겨간 1869년까지 무려 1천1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일본의 수도였습니다. 헤이안 시대 교토의 이름은 헤이안쿄(平安京)였는데요. 널리 알려져 있듯이, 헤이안쿄는 당시 세계적 대도시였던 당나라의 장안(長安)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계획도시입니다. 북쪽 중앙에는 헤이안궁이 자리 잡았고, 헤이안궁으로부터는 폭 85m에 길이 3.8㎞의 주작대로가 도시의 남북을 가로지르고 있었지요.오늘날 과거의 헤이안쿄 지역이었던 곳에는 헤이안 시대의 건물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바둑판 모양의 거리만은 그 시절 그대로입니다. 라쇼몽(羅生門)은 주작대로의 남쪽 끝에 위치하여 헤이안쿄의 정문 구실을 했던 곳인데요.흥미롭게도 무라사키 시키부에 버금갈 만한 근대의 천재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1892~1927)는 ‘라쇼몽’(1915)에서 귀족문화가 꽃 핀 통념화된 헤이안쿄와는 거리가 먼 교토의 모습을 소설로 남겼습니다.이 작품에서 라쇼몽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서 너구리나 여우, 혹은 거두는 사람이 없는 시신이나 머무는 곳입니다. 이 라쇼몽에 주인으로부터 그만두라는 말을 들어 ‘아사(餓死)할 것이냐’, ‘도둑이 될 것이냐’의 두 가지 선택지만을 남겨 놓은 한 사내가 하룻밤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서 사내는 시체의 머리칼을 뽑고 있는 노파를 발견하고는, 정의감에 불타올라 그 노파를 붙잡습니다. 그런데 그 노파로부터 자신이 뽑고 있는 머리칼의 주인인 여자는 살아 생전에 뱀을 생선이라 속여 팔던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노파는 가발을 만들기 위해 시체에서 머리칼을 뽑는 자신이나 뱀을 생선이라 속여 판 여인이나, 모두 살기 위해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하소연하는군요. 이 말을 듣고 사내는 더 이상 “굶어 죽을 것인지 도둑이 될 것인지 망설이지 않”습니다. 방금 전의 정의감에 불타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새 노파의 옷을 벗겨 들고서는 라쇼몽 밖으로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내는 굶어죽는 대신 도둑질을 해서라도 살아가기로 한 것이겠지요.‘라쇼몽’은 ‘겐지모노가타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짧은 소설이지만, 이상과 현실, 윤리와 욕망이라는 인간의 영원한 갈등을 인상적으로 담아낸 또 하나의 명작입니다. 두 작품이 보여주는 헤이안 시대 교토의 모습은 매우 대비적인데요.이러한 차이는 ‘겐지모노가타리’가 전성기의 헤이안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반해, ‘라쇼몽’이 몰락해 가는 헤이안 시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한때 헤이안쿄의 현관 역할을 하던 라쇼몽이 폭풍우로 붕괴된 이후, 현재에는 그 터에 과거의 흔적을 알리는 비석 하나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에 비해 헤이안궁은 사라졌지만, 교토 천도 1천100주년을 기념하며 1895년에 만들어진 헤이안 신궁이 과거 헤이안궁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습니다.헤이안 신궁은 헤이안궁을 8분의5 크기로 줄여 복원한 매우 화려한 건축물로 유명하죠. 드라마 ‘光る君へ’의 많은 부분도 바로 이 헤이안 신궁에서 촬영되고 있다고 하는군요. ‘겐지모노가타리’와 ‘라쇼몽’에 그려진 헤이안쿄의 두 가지 상반된 얼굴은 오늘의 교토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1-22

낭만과 현실의 무대 홋카이도 <1>

일제강점기라는 지난 세기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경제·사회·문화의 우호적 파트너로 변화한 21세기 한·일 관계. 이경재 숭실대 교수는 학술연구를 목적으로 일본을 30차례 이상 다녀온 학자다. 올봄엔 도쿄대학에 교환교수로 간다. 그간 이 교수가 면밀하게 살펴온 일본 문화·예술의 어제와 오늘을 독자들에게 들려줄 ‘이경재의 일본을 읽다’는 2024년 본지가 준비한 주요한 기획연재 중 하나다. 독자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주홋카이도(北海道)가 떠오른 것은 연일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오랜만의 강추위가 계속되어서일까요? 어린 애들도 알다시피 일본은 네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요. 가장 북쪽에 위치한 홋카이도는 남한 면적의 80%에 이르는 아주 큰 섬입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설원의 롱테이크 영상으로 유명한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생사를 뛰어넘는 순백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무대가 바로 홋카이도였던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여주인공 나카야마 미호의 “오겡끼데스까”라는 외침이 울려퍼질 듯한, 홋카이도는 눈과 벌판과 추위와 이국적인 정서로 가득한 낭만과 꿈의 무대임에 분명합니다.홋카이도는 근대 일본의 역사적 상흔이 그 어느 곳보다 강렬하게 남겨진 곳이기도 합니다.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가 즐겨 보던 세계지도에는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대륙까지 표시돼 있지만, 오늘날의 홋카이도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메이지 이전까지 홋카이도는 일본과는 무관한 아이누의 땅이었던 것인데요.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은, 홋카이도를 일본의 지방으로 편입시켜 버립니다. 이후 제국 일본은 오키나와를, 타이완을, 조선을, 만주를 자신의 일부로 먹어치우는 침략적 야욕을 유감없이 발휘했는데요. 그렇기에 홋카이도는 근대 일본제국주의가 시작된 곳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또한 홋카이도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혹한 노동 착취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작인 고바야시 다키지(1903∼1933)의 ‘게공선’(1929)의 배경이 홋카이도인 것에서도 잘 드러나는 사실이지요. 고바야시 다키지는 홋카이도에서 성장하였으며, 그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도 다쿠쇼쿠은행 오타루 지점에서입니다. 그가 노동운동과 프롤레타리아문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홋카이도에서였고, 이런 상황에서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게공선’인 것입니다.게공선 하쿠코마루호는 홋카이도 북쪽의 거친 바다에서 게를 잡아 통조림으로 가공하는 일종의 공장선입니다. 게공선에 승선한 이들은 가난과 자본의 핍박에 몰리고 몰려 마지막 선택지로 일종의 감옥이나 마찬가지인 배에 오른 처지입니다. 이 게공선은 당시 자본주의 일본의 온갖 문제를 통조림처럼 꽉꽉 눌러 담은 공간이기도 하네요. 게공선은 일반 선박이 아닌 공장선이기에 항해법의 적용도 받지 않고, 순수한 공장이 아니기 때문에 공장법의 적용도 받지 않습니다. 일종의 무법지대인 이곳에서는 오직 성과만을 절대시하는 자본의 논리만이 힘을 발휘하는군요. 감독인 아사카와는 자본가를 대리하며 온갖 폭력을 행사합니다. 폭언이나 폭행은 애교에 가깝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라면 고문도 서슴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사카와는 근처에 있는 게공선 자치부마루호가 침몰하는 상황에서도, 이익을 위해 400여 명의 생명을 외면하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젊은이 야마다가 죽었을 때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바다에 던져질 야마다를 새 마대 자루가 아닌 헌 마대 자루에 싸서 버리게 지시할 정도입니다.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자본의 폭력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자본가를 대리하여 게공선에서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아사카와 감독은 게를 잡아 통조림을 만드는 일이 “국가적인 일”이라 강조합니다. “대일본제국의 대장부”가 되기를 강요받는 노동자들도 처음에는 일본군 구축함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하며, “일본제국을 위해서 일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게공선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파업에 나섰을 때, 게공선에 오른 일본군들은 노동자들을 도와주기는커녕 그들을 폭행하고 파업의 지도부를 끌고 갈 뿐입니다. 이를 통해 게공선의 노동자들은 ‘일본제국의 해군도 결국 자본가들과 한통속’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본래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분리 불가능한 근대의 핵심적인 두 기둥이기도 합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게공선’은 프로소설의 일반적인 문법에 걸맞게 낙관적인 전망으로 끝납니다. 한번 실패를 맛본 게공선의 노동자들은 더욱 강한 단결력과 투쟁력으로 기어이 파업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낙관적 전망은 특별고등경찰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다 요절한 고바야시 다키지의 강렬한 사회의식이 반영된 결과겠지요. 지금도 시립 오타루문학관에 가면 이념과 문학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고바야시 다키지의 삶과 문학의 향훈을 느낄 수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2008년 신초사에서 문고본으로 재발행한 ‘게공선’이 무려 50만 부 이상 팔리고 2009년에는 영화로까지 만들어지는 등 21세기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입니다.이것은 아마도 현재의 일본이 100여 년 전의 홋카이도 바다를 다시 떠올리게 할 만큼 만만치 않은 것과 관련된 것이겠지요. 일본인조차 최고의 관광지로 꼽는 눈과 낭만의 홋카이도에서 한번쯤 근대 일본의 역사적 상흔을 떠올리는 것도 분명 의미 있는 일본체험이 될 것입니다.

2024-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