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6일 아침, 이 날의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 호텔 로비에 내려갔을 때 그곳은 수많은 외국인들로 북적였습니다. 특히 백인들이 무척이나 많았는데요. 그래서일까요? 조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마저 전통 일식 식당과 양식 위주의 식당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으로 상징되는 평화도시로서의 국제적 위상이 수많은 외국인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걸로 보였습니다. 이렇듯 평화도시로 널리 알려진 히로시마지만, 한때 히로시마가 일본의 대표적인 육군도시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날의 일정은 히로시마가 제국주의 시절 가졌던 군사도시로서의 성격을 알아보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히로시마는 근대 일본의 군사화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성장한 도시입니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지 3년 후인 1871년에는 진제이 진대 제1분영이 설치되었고, 1888년에는 제5사단 사령부가 설치되었습니다. 특히 육군도시 히로시마의 역할은 청일전쟁 시기에 가장 크게 발휘되었는데요. 당시 히로시마는 거의 일본의 수도 역할을 할 정도로 중요한 위상을 차지했습니다.
청일전쟁(1894.7.~1895.4.)의 발발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9월 8일에, 일본 군부는 도쿄에 있던 대본영(육군과 해군을 모두 통솔하던 최고군통수기관)을 히로시마로 옮깁니다. 보급거점과 사령부는 전선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전쟁상식에 비춰볼 때, 도쿄는 전쟁터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수많은 도시 중에 히로시마가 대본영 자리로 선정된 이유는 ‘전쟁터로부터 가까워야 한다’, ‘병력을 전쟁터로 보내기 위한 항구가 있어야 한다’, ‘병력을 이동할 수 있는 철도망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에 모두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가지 조건을 갖춘 도시는 여러 곳이 있었지만, 마지막 조건까지 갖춘 곳은 당시 일본에서는 히로시마가 유일했습니다.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두 달 전에, 히로시마에는 일본 혼슈의 최북단인 아오모리까지 연결된 산요(山陽)철도가 완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894년 9월 13일에는 대본영이 도쿄로부터 히로시마로 이전했으며, 그로부터 이틀 후에는 메이지 천황이 히로시마로 옮겨와 이듬해 4월 27일까지 머물렀습니다. 메이지 천황은 청일전쟁의 거의 전과정을 히로시마에 머물며 지켜보았던 것인데요.
제7회 제국의회도 히로시마에서 소집되었고, 총리대신을 비롯한 정부의 고위관료도 모두 히로시마에 모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히로시마는 명실상부하게 청일전쟁 기간 내내 일본의 수도였던 것입니다. 청일전쟁 당시 히로시마를 거쳐 대륙과 한반도로 간 일본군은 무려 17만 1098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청일전쟁은 일본 입장에서는 거의 횡재에 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청으로부터 무려 은화 2억냥에 이르는 배상금을 받았는데, 이 액수는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4년치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이 돈으로 일본은 철도, 전화, 금융과 같은 인프라를 완비하고, 수많은 기업에 사업자금을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이익도 결코 경제적 이익에 모자라지 않았는데요.
천년 이상 패권을 쥐고 있던 중국을 무릎 꿇리며, 자신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임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일본은 요동 반도(삼국간섭으로 곧 반납)와 타이완을 식민지로 만들었으니, 바야흐로 청일전쟁은 일본을 식민지까지 거느린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만들어주었던 것이네요.
그렇기에 청일전쟁의 침략적 성격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은 당시 히로시마를 비롯한 일본 어디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895년 4월 21일 청일전쟁의 종결에 따라 히로시마 대본영은 해산되었지만, 이후에도 히로시마는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군사도시로 계속 성장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원폭의 비극을 겪게 되기까지 히로시마는 침략의 병참기지이자 파병기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난 시절 히로시마가 체험한 군사도시로서의 놀라운 성장은, 동시에 전대미문의 비극을 향해 가던 거대한 아이러니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 일행이 청일전쟁 당시 대본영을 비롯한 많은 군사시설이 설치되었던 히로시마 성을 방문했을 때는 오전 10시가 막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본래 히로시마 대본영은 2층짜리 목조건물로 서양식의 웅장한 자태를 자랑했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원폭으로 인해 전소되고 앙상한 기초석과 초라한 안내비만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평일의 이른 시간이어서일까요?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이 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것과 달리, 이 곳은 방문객도 거의 없어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습니다. 전쟁이 한때의 번영과 영광을 가져다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결코 영원할 수는 없다는 진리를 말없이 웅변해주는 듯한 풍경이었습니다. 현재 히로시마시에는 어떠한 군사시설도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평화의 히로시마’가 언제까지나 계속되길 바라며, 우리 일행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다음 행선지인 구레시로 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