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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타의 손창섭

등록일 2024-05-27 19:12 게재일 2024-05-2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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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섭의 유택.

니가타현립대학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연구자들이, 본행사를 앞두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손창섭의 묘입니다. 손창섭(1922~2010)은 장용학과 더불어 대표적인 전후문학 작가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1950년대는 불구적 인물을 통해 전후의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를 탁월하게 형상화했다면, 1960년대에는 당대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세태소설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랬던 손창섭은 1973년 돌연 일본인 아내와 일본으로 떠난 뒤, 공식적으로는 한국사회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손창섭의 일본 내 행적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도쿄 인근에 살았던 손창섭의 묘가 니가타현에 있는 이유는, 유일한 혈육인 딸이 이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손창섭의 묘는 니가타현의 카쿠타산(角田山) 묘코우지(妙光寺)에 있는 묘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손창섭의 묘비에는 ‘손창섭’이라는 한국 이름도, ‘우에노 마사루(上野昌涉)’라는 일본 이름도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곳에는 한자로 ‘道’(도)라는 한 글자만이 새겨져 있었을 뿐인데요. 인기 작가의 온갖 명예를 거부하고, 타국에 가서 은둔자로 살다 죽은 손창섭의 수수께끼 같은 삶과 더불어, ‘道’라는 묘비명은 하나의 화두처럼 제게는 다가왔습니다.

묘비에 한국 이름도 일본 이름도 아닌 ‘道’라는 글자만을 남긴, 손창섭의 내면 풍경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우리에게는 다행히 손창섭의 ‘유맹’(한국일보, 1976.1.1.-10.28.)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초점화자인 ‘나’는 손창섭이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해방 이후 북한 생활까지 경험하였으며, 현재는 남한에 본사를 둔 회사의 일본 연락사무소 소장으로 지냅니다. ‘나’의 관찰을 통해 보여지는 1970년대 ‘유맹’의 재일한국인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데요. 겉으로 보기에 물질적 풍족함을 누리는 다카무라 고이치(고광일)조차도 정신적으로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손창섭의 묘가 있는 묘코우지 묘원의 안내판.
손창섭의 묘가 있는 묘코우지 묘원의 안내판.

이것은 충분한 역사적 개연성을 가진 설정인데요. 식민지 시절 불평등한 다민족 국가였던 일본은 패전 후 새로운 국가를 만들 때, 단일민족 국가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때 과거에는 같은 ‘국민’이었던 다른 민족은 배제의 대상으로 규정되었으며, 이러한 일본의 태도로 인해 재일한국인은 “일본 사회에서 오랫동안 비가시적인(invisible) 소수자로 존재하기를 강요받아”(권숙인, ‘일본의 ‘다민족·다문화화’와 일본 연구’, 다문화사회 일본과 정체성 정치, 권숙인 엮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23면)왔다고 합니다.

‘유맹’에서 손창섭의 내면풍경을 보여주는 인물은 ‘유맹’의 초점화자인 ‘나’입니다. ‘나’는 심층심리 차원에서는 한국을 무조건적으로 지향하지만, 표층심리 차원에서 한국을 비판적으로 생각합니다. 반대로 일본문화는 이성적인 차원에서는 긍정적으로 여기지만, 심층 심리나 본능적인 차원에서는 거부의 대상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한국과 일본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 주변화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나’의 모습에 자꾸만 손창섭이 어른거립니다. 실제로 일본에 건너간 손창섭은 별다른 사회적 활동 없이 그야말로 은둔자로 생을 마감했으니까요. 손창섭 역시 본능 차원에서는 ‘한민족적인 것’에 대한 열렬한 지향을 가졌으나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한국적인 것’에 비판적이었으며, 그 사이에서의 분열은 끝까지 해소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러한 제 생각의 타당성 여부는 손창섭이 말년에 남긴 시조를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얼’(1995.3)이라는 시조에서 손창섭은 “나라꼴 어찌됐던 그 世情 어떠하든/내 비록 故國山川 등지고 살더라도/韓나라 얼이야말로 가실줄이 있으랴”라고 하여, 세태와 인정을 떠난 무조건적인 ‘韓나라 얼’에 대한 지향을 보여줍니다. 이에 반해 ‘은둔(隱遁)’(1993.10)에서는 “이몸은 약삭빠른 재간군이 아니어서/名利에 새고지는 俗世間이 지겨워서/사람과 因緣을 끊고 숨어서만 사옵네”라고 하여, 한국이라고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약삭빠른 재간군’과 ‘명리’를 앞세우는 세상에 대한 염오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조들은 손창섭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이면서도 끝내, “사람과 因緣을 끊고 숨어서만” 살았던 이유를 밝힌 것으로 보입니다.

‘유맹’의 ‘나’에게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손창섭에게는 평생 ‘한민족적인 것’에 대한 본원적인 지향과 ‘한국적인 것’에 대한 조건적인 거부가 공존했습니다. 그렇기에 작가 손창섭은 끝내 어디에도 귀속될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리타국의 조용한 묘원에 묻힐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길’을 의미하기도 하는 ‘道’라는 묘비명은, 끝내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걷기만 해야 했던 손창섭의 ‘인생길’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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