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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츠타야 쥬자부로를 낳고 기른 요시와라 유곽

지난번에는 에도(도쿄의 옛날 이름)의 출판왕이었던 츠타야 쥬자부로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데요. 고아같은 처지로 요시와라 유곽(吉原遊廓)에서 나고 자란 츠타쥬가 어떻게 당대 최고의 지성인과 예술가들을 거느리고 그토록 대단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츠타쥬는 다름 아닌 요시와라에서 나고 자랐기에 ‘에도의 출판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시와라는 분명 유흥가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습니다. 아사쿠사 북쪽의 밭 가운데에 흙을 쌓아 건설된 요시와라는 가로 약 360미터, 세로 약 270미터인 사각형의 인공도시였습니다. 요시와라 유곽 앞에는 新자가 붙기도 하는데요. 이유는 1617년 닌교초 부근에 처음 생겼던 요시와라 유곽이 화재로 인해 1657년 아사쿠사 북쪽으로 옮겨왔기 때문입니다. 대로에서 S자로 휘어 있는 90미터 길이의 고짓켄미치를 지나면 요시와라 정문이 나타났습니다. 요시와라에는 수천명의 유녀(遊女)를 포함해 1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았으며, 유녀와 남성들을 연결하는 찻집과 유녀들이 머무는 기루 이외에도 각종 장신구나 화장품 등을 파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요시와라는 에도에서 불야성을 이루던 유일한 곳으로서, 일종의 별천지였습니다. 이 곳에서는 각종 퍼레이드나 공연 등의 이벤트가 벌어졌고, 거리나 시설도 최고로 화려하게 꾸며졌습니다. 이 곳의 번성함은 당시 막부(무신 정권의 통치기구 또는 그 체제)가 에도에서 걷는 세수의 8%가 요시와라에서 나온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시와라에는 문학, 음악, 예능, 다도, 춤 등 에도 문화 거의 전부가 집결되어 있었으며, 그렇기에 호세이대학 총장을 지낸 다나카 유코는 ‘유곽과 일본인’(고단샤, 2021)에서 “요시와라 유곽의 소멸은 역시, 에도 문화의 소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또한 요시와라는 살롱이 없던 에도에서 살롱의 역할을 떠맡기도 했습니다. 이곳에는 다이묘, 무사, 상인, 쵸닌과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에도 시대의 엄격한 신분 질서도 엄격하게 작동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요시와라말이 따로 있을 정도의 독특한 문화적 별천지였던 것입니다. 유녀들도 단순한 창부와는 차원이 다른 문화인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전설적인 오이란(최상위 지위의 유녀)이였던 다카오를 모신 다카오이나리 신사가 지금도 도쿄에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바로 이 요시와라에서 나고 자라며, 츠타쥬는 에도의 첨단적인 유행과 감각 등을 익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화의 첨단지 요시와라가 츠타쥬를 기른 것처럼, 츠타쥬 역시 수많은 콘텐츠를 통해 요시와라의 이미지를 더욱 풍요롭게 창조했는데요. 츠타쥬는 1773년에 요시와라 정문 앞에 경서당(耕書堂)이라는 서점을 내고 처음에는 책 대여를 했지만, 곧 본격적인 출판에 나섭니다. 이 시절의 서점은 단순하게 책만 파는 곳이 아니라, 책의 출판, 유통, 판매를 모두 겸하는 일종의 출판사였습니다. 츠타쥬가 출판업에 처음 뛰어들어 만든 것은 요시와라 가이드북으로서, 츠타쥬는 이때부터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의 안내서가 정보의 전달에만 치중했던 것과 달리, 츠타쥬는 요시와라 안내서에 약도 등을 집어넣어 현장감을 극대화하였으며, 첫번째 출판하는 책에서부터 다재다능한 유명인 히라가 겐나이(1728~1780, 에도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림)의 서문을 수록해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책에서는 최고의 화가를 고용하여 유녀들을 꽃으로 표현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츠타쥬가 출판한 책으로 샤레본(洒落本)이 있는데, 샤레본은 요시와라에서의 놀이와 익살을 묘사한 풍속책이었습니다. 또한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인 우키요에가 가장 많이 제재로 삼은 것도 역시나 요시와라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요시와라가 이상적이거나 바람직한 공간일 수는 없습니다. 요시와라는 쿠가이(苦界, 괴로움이 끊임없는 세계)로 불렸으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유녀들의 삶은 화려한 만큼이나 비참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녀들의 기본적인 고용조건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나는데요. 유녀들은 일단 업주들에게 거금의 빚을 진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기에 유녀들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선지급된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유녀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경제적 조건으로도 이들은 요시와라를 벗어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요시와라를 벗어나기 어려웠숩니다. 요시와라에는 출입문으로 ‘요시와라 정문’ 하나가 있었을 뿐이며, 유곽 주변에는 높은 담과 해자까지 설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처우도 열악하여 영양실조나 성병으로 요절하는 유녀들도 많았습니다. 유녀들 사이에도 엄격한 계급이 있었으며, 화대의 차이도 아주 컸습니다. 그렇기에 유녀들은 자주 목숨을 건 방화사건을 일으켜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습니다. 츠타주는 요시와라의 이러한 어둠까지 깊이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그가 만들어낸 콘텐츠에는 사회를 향한 불만과 풍자도 적지 않습니다. 요시와라와 츠타쥬의 관계는 “야만의 흔적이 없는 문화의 기록이란 결코 없다.”는 발터 벤야민의 명제를 곱씹어 보게 합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5-13

에도의 출판왕, 츠타야 쥬자부로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일본 만화는 전세계에서 1년 동안 대략 10억 부가 출판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만화 이외에도 일본은 ‘출판 대국’이자 ‘독서 대국’으로 불릴 만큼 책으로 유명한데요. 지하철 안의 모든 이가 책을 읽고 있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지만, 여전히 출판 문화가 발달하고 독서 인구가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책과 친한 일본 문화를 낳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이로 ‘에도 시대(1603-1867) 출판왕’ 츠타야 쥬자부로(蔦屋 重三郎, 1750-1797)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NHK에서 2025년 대하역사드라마로 츠타야 쥬자부로의 일생을 다룬 ‘べらぼう-蔦重栄華乃夢噺(베라보-츠타쥬의 파란만장한 꿈 이야기)’를 방영하면서, 작년 연말부터 도쿄 시내 곳곳에는 츠타야 쥬자부로 관련 문화 행사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츠타야 쥬자부로와 관련된 우키요에나 주변 인물들에 대한 행사가 열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들이 빠짐없이 츠타야 쥬자부로에 대한 책을 출판해 놓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는 자료를 찾으러 간 일본국회도서관에서도 츠타야 쥬자부로에 대한 전시를 하고 있을 정도였는데요. 4월 22일부터 6월 15일에는 일본 최대의 박물관인 도쿄국립박물관에서도 츠타야 쥬자부로(줄여서 츠타쥬)가 유통시켰던 우키요에를 대거 전시하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에도 막부의 유일한 공인 유곽인 요시와라에서 태어나 자란 츠타쥬는 일곱 살에 부모의 이혼을 경험하고, 아무런 배경도, 재산도 없이 오직 타고난 독창성과 감각만으로 ‘에도의 출판왕’이 된 인물입니다. 에도 막부에 밉보여서 재산의 절반을 압수당하는 처분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원하고 꿈꾼 문화 콘텐츠를 끊임없이 만들어간 츠타쥬는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베라보’였던 것입니다. 츠타쥬가 활약한 18세기 후반에는 목판인쇄로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그 책들에는 대부분 그림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의 콘텐츠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작가, 화가, 조각가, 판화가가 협업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를 전체적으로 기획하고 제작하여 출판 및 판매하는 역할이 필요했으며, 이러한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수행한 이가 바로 츠타쥬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18세기 말 에도(江戸, 도쿄의 옛날 이름)는 인구 백만의 세계 최대 도시였습니다. 우에노 국립박물관 전시 포스터에는 “잠재고객은 에도사람 100만인(潜在顧客は、江戸の衆、百万人.”이라는 문구가 크게 새겨져 있는데요. 츠타쥬는 날카로운 감각과 창의적 안목으로 대중들의 욕망을 읽어내고, 그에 바탕해 수많은 문화 콘텐츠들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츠타쥬는 1773년에 요시와라 정문 앞에 고쇼도(耕書堂)라는 서점(本屋)을 내고 처음에는 책 대여를 했지만, 곧 본격적인 출판에 나섭니다. 그는 거의 모든 문화 콘텐츠를 만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요시와라 안내서, 쿄카에혼(狂歌絵本), 기뵤시(黄表紙), 우키요에(浮世絵)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대중이 읽고 싶은 책과 보고 싶은 그림을 대중보다 먼저 알아채고서는 이를 콘텐츠로 구체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츠타쥬는 최고의 연출자처럼 당대 최고의 재능들을 조합하여 멋진 무대를 만들어 냈던 것인데요. 츠타쥬의 손발이 되었던 천재들로는 산토 교덴, 기타가와 우타마로, 가쓰시카 호쿠사이, 도슈사이 샤라쿠, 교쿠테이 바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츠타야는 단순히 책만 편집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재능을 편집하여 최고의 콘텐츠와 시대를 창조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츠타쥬가 새로운 예술가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창조적 재능을 장려하고, 그들의 후원자 및 멘토 역할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미인화의 대가 기타가와 우타마로, 일본 역사에 남는 인기작인 ‘南総里見八犬伝’을 남긴 교쿠테이 바킨, 골계본이라는 장르를 낳은 ‘五十三次膝栗毛’의 짓펜샤 잇쿠처럼 무명의 재능을 발견하여 일본 문화의 상징으로 우뚝 일으켜 세우기도 했습니다. 츠타쥬는 그들에게 의식주를 보장해주었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감사의 표시로 선물과 접대 정도가 전부였던 시대에, 원고료를 지불한 것도 츠타쥬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명작은 물론이고 새로운 장르와 미디어를 낳은 츠타쥬는 새로운 유행을 창출하고 시대와 문화를 선도해나갔습니다. 이러한 츠타쥬의 활약이 오늘날 세계에서 인정받는 일본 망가나 출판의 기본적인 밑거름이 되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츠타야 쥬자부로는 채 오십이 되지 않은 1797년 5월 6일 저녁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합니다. 한 인간의 본질은 삶의 마지막 순간이나 유언에 압축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요. 츠타쥬는 연극이 끝났음을 알리는 박자목(拍子木) 소리를 기다리며 죽었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가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연기로 보며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자신을 활발하게 창조하고 또 창조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이며, 자기 삶을 대상으로 한 예술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츠타쥬는 수많은 명작과 예술가들을 낳았지만, 그가 창조한 최고의 콘텐츠는 아마도 츠타야 쥬자부로 자기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4-29

빨간 머리 ‘강백호’를 찾아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일본문화로 만화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겁니다. 수많은 일본의 만화가 세계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데요. 통계에 의하면, 전세계에서 1년 동안 출판되는 일본만화가 대략 10억 부에 이를 정도라고 합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톰’이나 ‘코난’부터 시작해 최근의 ‘귀멸의 칼날’이나 ‘단다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일본 만화가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저에게, 뻬놓을 수 없는 일본만화를 한 편만 꼽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농구만화 ‘슬램덩크’를 말하겠습니다. 한국에서는 주간 ‘소년 챔프’에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연재되었고, 단행본으로도 출판되었는데요. 당시는 신기를 펼치던 마이클 조던의 인기가 대단했고, 한국에서도 대학농구가 수많은 젊은이들을 경기장으로 끌어들이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마지막 승부’라는 농구드라마가 만들어질 정도였는데요. ‘슬램덩크’가 큰 인기를 끈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러한 농구붐도 한몫했을 겁니다. ‘슬램덩크’는 강백호라는 빨간 머리의 문제아가 한 명의 어엿한 농구선수로 성장하는 간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성장 서사의 앞과 뒤에는 강백호가 채소연에게 던지는 “좋아합니다.”라는 말이 놓여 있는데요. 첫 번째 “좋아합니다”가 이상형인 채소연이 강백호에게 건넨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면, 두 번째 “좋아합니다”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에 나가면서 채소연을 향해 하는 말입니다. 처음 ‘좋아합니다’의 목적어가 농구보다도 채소연에 가깝다면, 두 번째 ‘좋아합니다’의 목적어는 채소연보다 농구에 가깝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강백호의 성장이,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형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슬램덩크’가 일본인론의 교재로 삼아도 손색없는 텍스트로 여겨집니다. 일본에 살면서 실생활이나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듣거나 보는 단어를 하나만 고르라면, ‘간바로(힘내자!)’라는 말을 꼽고 싶은데요. 일본인들은 굳이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일에도 꼭 ‘간바로’라는 말을 해서 긴장을 불어넣고는 합니다. ‘간바로’ 의식이 더욱 강렬해지면, ‘잇쇼켄메(一所懸命)’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하는데요. 이 단어를 직역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목숨 걸고 해낸다는 의미입니다. 사무라이가 쇼군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을 목숨 걸고 지킨다는 것에서 비롯된 단어를, 일상에서 태연하게 사용한다는 것이 조금 무섭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간바로’나 ‘잇쇼켄메’같은 단어들이 흔히 사용되는 것을 보면, 일본인들은 옛날 사무라이들처럼 자신의 임무를 목숨 걸고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슬램덩크’에서 감독인 안 선생님을 영감이라 부르고, 주장인 채치수를 고릴라라 부르던 자칭 천재 강백호는 ‘잇쇼켄메’는커녕 ‘간바로’에도 어울리지 않는 미숙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백호는 차차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모든 것, 심지어는 자신의 (선수)생명까지 바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데요. 이런 모습은 해남고와의 시합에서부터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센터인 채치수가 부상으로 교체되자, 강백호는 채치수 대신 자신이 골밑을 지키겠다고 나섭니다. 그러면서 강백호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해보일 테다!”라고 각오를 다지는데요. 이 대목에서 독자는 이전과는 달리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강백호의 어른스러운 모습에 놀라게 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간바로’의 모습이, ‘목숨을 거는 수준의 노력(잇쇼켄메)’으로 발현되는 모습은 산왕고와의 경기에서입니다. 산왕고와의 경기에서 후반전 2분을 남기고 힘들게 루스볼을 건져낸 강백호는 경기장 밖으로 넘어지며 등을 다칩니다. 이후에도 강백호는 부상을 숨기고 덩크슛을 넣으며 활약하다가, 결국에는 벤치로 물러나게 됩니다. 벤치에 쓰러져 있던 강백호는 심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농구, 좋아하세요?”라고 말을 걸던 채소연의 모습과 2만 번이나 했던 슛 연습을 떠올리며, 안선생님에게 경기에 다시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합니다. 강백호의 선수생명을 걱정하는 안 선생님은 강백호의 출전을 강하게 만류하는데요. 이런 안 선생님을 향해 강백호는 “선생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전 지금입니다.”라고 외칩니다. 이 장면을 읽을 때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 몸에는 찌릿한 전기가 흐릅니다. 이러한 강백호의 투혼은 일본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잇쇼켄메’의 완성형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렇기에 누군가는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일본 역사상 최고의 무사로 꼽히는 미야모토 무사시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것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 1년간 머물게 되었을 때,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바로 ‘슬램덩크’의 배경이 된 가마쿠라 고등학교 부근이었습니다. 벚꽃이 만개한 4월 초순 드디어 답사를 나섰는데요. 다행히 도쿄에서 오다큐선을 타고 후지사와역에서 내린 후에, 쇼난 해변을 달리는 것으로 유명한 세 칸짜리 미니 전철 에노덴을 타자 1시간 반 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가마쿠라고교는 출입이 통제되어 벚꽃만 볼 수 있었지만, ‘슬램덩크’의 오프닝 장면으로 유명한 철길 건널목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였습니다. 온갖 외국어가 들려오는 틈바구니에서 에노덴과 건널목의 사진을 찍으며, ‘슬램덩크’를 비롯한 일본 만화는 21세기 일본의 정체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4-16

품격 있는 사회를 위한 조건

2025년은 일본의 고베와 오사카 지역을 강타한, 한신·아와지(阪神·淡路) 대지진이 발생한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본은 우리와 가까운 나라지만, 우리와는 달리 참으로 지진이 많은 나라인데요, 1995년 1월 17일 한신·아와지 지역에 발생한 진도 7.3의 강진으로 인해 무려 6500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오사카와 고베 지역이 일본 경제의 중심지인 만큼, 피해액도 당시까지로는 최대 규모인 약 10조엔에 이르렀습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 30주년을 맞는 일본에서는 여러 가지 행사가 펼쳐지고 있는데요. NHK의 장수 프로그램인 ‘100분 명저(100分de名著)’에서는 올해 1월 안극창(安克昌·1960-2000)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心の傷を癒すということ)’(1996)이라는 책을 다루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공동환상론’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같은 일본과 동서양의 고전을, 두 명의 진행자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나와 한 달 동안 다루는 교양 프로그램입니다. 그 권위 있는 방송에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한인 안극창의 저서가 다루어진 것인데요, 방송이 시작된 지 약 15년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 한인의 저서가 다루어진 것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이 처음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사람들의 마음에 가져온 충격과 이후 안극창이 현장에서 펼친 치료 활동을 기록한 일종의 르포르타주입니다. 이 책은 대지진이 발생한 직후, ‘피해지의 의료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31회 연재한 글들을 모은 책으로, 1996년에는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일본에서 고전의 지위를 확고히 한 것으로 보입니다. 1996년에 ‘고베 365일’이라는 부제를 달고 초판이 나온 이후, 2011년에는 ‘대재해 정신의료의 임상보고’라는 부제를 단 개정증보판이, 2019년에는 ‘대재해와 마음돌봄’이라는 부제를 단 신증보판이 계속해서 출판되고 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2020년에는 같은 제목의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이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일본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이라는 책뿐만 아니라, 안극창이라는 사람 자체가 정신과 의사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는데요. 일례로, 2022년에 일본의 대표적인 정신과 의사들을 다루는 ‘마음의 과학’이라는 학술 연구서 시리즈의 하나로, ‘안극창의 임상작법’이라는 책이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트라우마(심적 외상),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마음돌봄(心のケア) 등의 말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한신·아와지 지진이 발생한 1995년부터라고 합니다. 그러한 공론화의 한복판에 재일한인 안극창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안극창은 근무하는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담의 방문판매’라고 할 정도로 피난소 등을 열심히 찾아다니며 피해자들을 만났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겪은 일들을 신문에 연재까지 했던 겁니다. 그렇기에 그가 지진으로부터 5년밖에 지나지 않은 2000년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도, 이때의 과로가 원인이 되었을 거라고 짐작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본래 트라우마 연구로 유명했던 안극창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에서 대지진을 겪은 사람들이 PTSD에 시달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술했는데요. 피해자들이 겪는 과도한 각성, 사건의 재체험, 회피(의욕 부족), 부정적 인지나 기분 등의 증상이 대표적입니다. 이외에도 생존자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자책감, 그리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겪는 죄의식에도 주목했습니다. 피해자들이 겪는 증상 중에는, 안극창 본인도 겪은 일로서 지진 현장을 벗어나면 그곳을 현실이 아닌 환상처럼 느끼는 ‘리얼병’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안극창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사람들 사이의 연결이며, 그것은 바로 ‘함께 있다는 것’, 그리고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알아준다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는 많은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 누구도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야말로 치료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피해자가 외부의 공포와 위협으로부터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심리적 거처’입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마음돌봄은 진료실의 의사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나설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 것’, ‘심리적 거처’를 마련하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의 참여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극창은 누구도 혼자 방치되지 않고, 누구나 존중받는 사회야말로 품격 있는 사회라고 주장했습니다. 안극창이 재난을 당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토록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가 재일한인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재난은 사람을 한순간에 사회의 약소자로 만들기에, 재일한인으로 살아온 안극창은 그 누구보다 피해자들의 마음을 깊이 그리고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안극창은 자신의 출신을 숨기기 위해 ‘안(安)’이라는 본래의 성 대신 ‘安田’이란 일본 성을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사용했다고 합니다. 안극창의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헌신 뒤에는, 재일한인으로 살아온 그의 만만치 않은 삶이 놓여 있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2025-04-01

일본에 남은 ‘아버지’와 ‘할머니들’을 위한 기도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 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외국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 주인공은 바로 올해 1월 5일에 별세한 재일 한인 이회성 작가입니다. 이회성은 1935년 남과 북에 고향을 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3남으로 사할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홉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947년 일본으로 이주하여 오무라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이후 홋카이도의 삿포로시에 정착했는데요. 삿포로고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하였고, 대학교 시절에야 본명 ‘이회성’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이회성의 작품으로는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다듬이질하는 여인’(1971)도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죽은 자가 남긴 것’(1970)을 가장 좋아하는데요. ‘죽은 자가 남긴 것’은 아버지의 장례를 계기로 민단(한국 정부가 공인한 재일 한국인 단체)에 속했던 큰 형 태식과 총련(북한을 지지하는 재일 조선인 단체)에 속했던 아우 명식이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것은 양분된 재일 한인 사회의 화합과 나아가서는 민족의 통일에 대한 의지까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상가(喪家)에 모인 민단과 총련에 속한 한인들 역시 동식과 태식이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어색하게 앉아 서로 상대편의 존재를 애써 무시합니다. 동식은 그 모습에 마음이 에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한인들의 침묵이 자신과 형 사이에 흐르는 “침묵과 동질의 것이고, 아니, 그보다 더 부풀어 크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날수록 어색함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서로 하나로 뭉치게 됩니다. ‘죽은 자가 남긴 것’에서는 민단과 총련으로 나뉘었던 한인들이 친밀하게 되는 과정과 동식과 태식이 화해하는 과정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동식이 진정으로 화해하는 대상은 형 태식보다도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동식이 형인 태식에 대해 갖는 마음은 애증에 가까우며, 이러한 복합 심리의 근원에는 ‘폭력적인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식이 형을 좋아했던 이유가 아버지의 난폭함과 봉건적 사고방식에 대해 형이 강력하게 대항했기 때문이라면, 형을 싫어하게 된 이유는 세월이 흐르면서 형이 점점 아버지를 닮아갔기 때문이니까요. 동식은 수많은 재일 한인들이 장례식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가 평생 보여준 폭력과 야만 뒤에는 아버지가 감내해 온 고단한 현실이 있었음을 감지합니다. 징용이나 징병으로 낯선 땅에 끌려와 겪은 간난신고와 민족 차별, 해방 이후에도 분단으로 돌아갈 고향마저 잃어버린 상황, 일본에서 재현되는 남북 갈등 등으로 아버지의 인간성은 파괴되었던 것입니다. 동식이 아버지의 고통스런 삶을 이해하는 모습은 죽은 아버지의 복사뼈를 만져보는 모습에서 절정에 이르는데요. 이 대목을 읽을 때면, 저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복사뼈를 만지고 싶은 마음에 울컥해지고는 합니다. 오랜만에 ‘죽은 자가 남긴 것’을 다시 꺼내 읽은 저는, 동식의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았던 재일 한인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공휴일인 2월 11일(일본 건국기념일)에 도쿄 근처에서 가장 많은 재일 한인들이 모여 살았던 가와사키의 사쿠라모토 마을을 찾아가 보았는데요. 가와사키는 도쿄에서 20킬로 정도 떨어진 게이힌 공업지대(京浜工業地帯)의 중심도시로서 1920년대부터 철강, 석유화학 등의 산업이 발달한 도시입니다. 그 결과 1930년대부터 노동을 하던 한인 커뮤니티가 가와사키의 사쿠라모토 마을에 형성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않은 수많은 재일 한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면서 일본의 대표적 한인 마을이 되었던 것입니다. 가와사키의 사쿠라모토에 도착하자, 오래된 낡은 집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는데요. 오랫동안 이 곳은 무허가 판자촌이었으며, 홍수가 나면 큰 물난리를 겪는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또 당시 일본인들이 먹지 않고 버리던 소와 돼지의 내장(放るもん)을 구워 팔았다는 야키니쿠집이 여기저기 보였는데요. 그 중에서도 1967년 김도례 할머니가 창업하여 손녀사위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사쿠라엔이라는 야키니쿠집은 큰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가와사키의 사쿠라모토 마을에는 1990년대 말에 재일한인 할머니들의 모임인 ‘도라지회’가 만들어져 큰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요. ‘도라지회’에서는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평생 고통을 겪은 할머니들이 모여 향수도 달래고 글자도 배우며 여러 가지 전통문화 체험도 하던 뜻깊은 모임이었습니다. 2010년대에는 우경화되는 일본에 맞서 반전·반헤이트스피치 데모 등에 나서 뜨거운 사회적 관심을 받기도 했던 모임입니다. 할머니들의 흔적을 찾아 동분서주한 결과, 여전히 가와사키 한인교회에서 화요일마다 도라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할머니들을 만나게 되길 기대하며 돌아오는 길에, 저는 두 손 모아 ‘죽은 작가 남긴 것’에 나오는 아버지나 ‘도라지회’ 할머니들이 겪은 고통과 아픔이 사라진 세상이 되기를 기도해 보았습니다.

2025-03-18

영혼의 맹인들을 향한 윤동주의 점자

저의 앨범에는 중학교 3학년 때 소풍을 가서 찍은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관광버스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인데요. 자세히 보면 제 손에는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들려 있습니다. 어린 저는 윤동주를 읽으며, 나도 감히 문학을 한다면 윤동주처럼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제 문학의 출발에는 윤동주가 있었고, 문학이라는 길 위에 서 있는 지금도 윤동주는 변치 않는 ‘문학의 상징’입니다. 당연히 윤동주의 삶과 문학이 건네주는 감동은 저만의 것은 아닌데요. 사실 윤동주만큼 시공을 뛰어넘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문인도 드뭅니다. 윤동주의 시는 한국, 북한, 중국, 일본에서 모두 사랑받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중국, 일본에는 아름다운 시비가 세워져 있을 정도니까요. 윤동주의 그 고결한 삶을 앗아간 일본에서조차 윤동주의 문학은 수많은 일본인들의 영혼을 울리고 있습니다. 일본의 여러 곳에서는 지금도 윤동주에 대한 추모 모임이 열리고, 낭송회가 열리고, 답사 모임이 열리고는 합니다. 윤동주는 고작 27년 1개월을 이 지구별에 머물다 갔지만, 그처럼 동아시아의 다양한 공간을 두루 편력한 문인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윤동주는, 한반도의 평양과 서울에서 중학교와 전문학교를 다녔으며, 이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와 교토의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결국 후쿠오카의 차가운 형무소에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윤동주는 오늘날의 한국, 북한, 중국, 일본을 모두 중요한 삶의 공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제가 1년간 도쿄에 머물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계획한 일 중의 하나도 윤동주의 도쿄 내 행적을 따라가 보는 것이었습니다. 윤동주는 1942년에 한 학기 동안 릿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다녔는데요. 2025년 2월 16일은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2월 16일은 일요일이었기에, 저만의 조촐한 추도회를 갖는 심정으로, 이틀 앞선 2월 14일에 윤동주의 도쿄 내 흔적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윤동주가 도쿄에서 머무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다카노바바의 하숙집 터였습니다. 다카노바바에 윤동주의 하숙집이 있었다는 것을 가장 먼저 밝혀낸 이는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 야나기하라 야스코입니다. 수필가이기도 한 그녀는 윤동주의 릿교대 후배로서, 평생 동안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알리는데 헌신해 온 분인데요. 그녀의 조사에 따르면, 윤동주의 하숙집은 현재 일본점자도서관 근처에 있었다고 합니다. 과거 윤동주가 머물렀던 곳에 일본점자도서관이 생겼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단순한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윤동주가 영혼의 잉크로 써내려 간 시들은, 일제 말기 정신의 맹인들을 깨우치기 위한 점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윤동주의 작은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기대하며 한참을 서성였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건물이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윤동주가 한 학기를 다닌 릿교대학이었습니다. 윤동주의 하숙집이 있던 다카노바바에서 릿교대학은 대략 2.5킬로미터 정도가 떨어져 있었는데요. 스물여섯 살의 윤동주가 그랬던 것처럼, 릿교대학까지 직접 걸어가 보았습니다. 릿교대학에 도착했을 때, 고풍스러운 본관인 모리스관이 저를 맞아 주었는데요.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하여 자세히 보니, 담쟁이 덩굴까지 포함하여 윤동주가 공부한 연세대의 언더우드관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윤동주가 도쿄에 머물며 릿교대학에 다닌 때는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직후여서 참으로 분위기가 험악했습니다. 그것은 윤동주가 이 무렵 삭발한 모습으로 찍은 사진에서도 잘 드러나는데요. 야나기하라 야스코에 따르면, 릿교대학은 윤동주가 입학한 직후에 “전시체제에 맞추어서 질실강건(質實剛健)한 기풍을 진작하려는 목적”으로 학생들에게 삭발을 강요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릿교대학 본관 바로 옆에는 Mather Library 기념관이 있었는데요. 그 건물의 입구 바로 오른 편에는 윤동주가 릿교대학에 다니며 창작했던 다섯 편의 시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쉽게 쓰여진 시’, ‘봄’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다섯 편의 시는 친구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인데요. 이 시들은 윤동주가 지상에 남긴 마지막 작품들로서, 윤동주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편들입니다. 도쿄에서 윤동주는 조선(인)을 참으로 그리워했던 거 같습니다. “사랑하는 동무 박이여! 그리고 김이여! 자네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흐르는 거리’)라며 애타게 벗들을 불러보는가 하면, “봄은 다 가고·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사랑스런 추억’)며 애타게 과거의 자신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결국 윤동주에게 “육첩방은 남의 나라”(‘쉽게 쓰여진 시’)일 수밖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절절한 외로움 속에서 윤동주는 “홀로 침전”(‘쉽게 쓰여진 시’)하며 “슬픈 천명”(‘쉽게 쓰여진 시’)으로 주어진 시 쓰기에 열중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 속에서 윤동주는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쉽게 쓰여진 시’) 인류의 예언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세상 만물은 부서지고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맑고 투명하여 애처롭기까지 한’ 윤동주의 삶과 문학만은, 2025년 2월의 도쿄에서도 변치 않는 ‘젊음의 표상’으로 영원을 살고 있었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3-03

도쿄대 교양학부 900번 교실을 지나며

도쿄대 정문에서 왼쪽으로 50미터 정도 걸어가면 고풍스런 강당이 하나 나옵니다. 정식 명칭은 ‘도쿄대학 교양학부 900번 교실’인데요. 1969년 5월 13일, 이 곳에서는 당시 일본의 사상지형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던 미시마 유키오와 가장 왼쪽에 있던 전공투(全学共闘会議) 학생들 사이에 토론이 펼쳐졌습니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미시마 유키오는 ‘국화’와 ‘칼’을 모두 쥔 ‘절대 천황제’를 주장했던 인물인데요. 이런 미시마를 초대하여 토론을 벌인 전공투는 권위주의 대학의 해체와 발본적인 혁명을 추구한 조직이었습니다. 기시 노부스케를 퇴진하게 한 ‘1960년 안보 반대 투쟁’이 “전후 민주주의의 수호”를 명분으로 내걸었다면, 대학 봉쇄와 운동 분파 간의 격렬한 폭력을 일으킨 ‘70년 안보 반대 투쟁’은 “전후 민주주의 비판”을 전면에 내세운 운동이었는데요. 미시마와의 토론회가 벌어졌을 때는, 전공투가 바리케이드를 쌓고 도쿄대를 점거한 상황이었습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가장 오른쪽에 선 자와 가장 왼쪽에 선 자들의 만남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요. 의외로 당시 기록을 담은 ‘토론 미시마유키오 VS 도쿄대 전공투(討論 三島由紀夫 VS 東大全共闘)’(신조사, 1969)에 따르면, 이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우호적이기까지 합니다. ‘900번 교실’ 앞에는 보디빌딩으로 단련된 털복숭이 상체를 수시로 드러내곤 하던 미시마를 ‘근대 고릴라’로 소개한 입간판이 놓여 있었고, 옆에는 고릴라 사육료가 100엔 이상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걸 보며 미시마와 학생들은 서로 웃음을 나누었다는데요. 인간이 웃으면서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애당초 이 토론은 사생결단식의 대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상적 지형의 양극에 서 있는 둘을 만나게 한 공통분모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기성 체제에 대한 분노와 부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전후 민주주의(평화주의)’로 일컬어지는 ‘일본의 기성 질서’에 대한 부정이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했던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이것은 미시마가 모두 발언에서 “나는 지금까지 일본 지식인들이 사상과 지식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만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지긋지긋하게 싫었습니다.”라며, “제군이 한 일들을 전부 긍정하지는 않지만 다이쇼 교양주의로부터 유래하는, 우쭐대는 지식인의 콧대를 꺾었다는 공적은 절대적으로 인정합니다.”라고 말하자, 학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미시마와 전공투의 차이란, 미시마가 의미와 가치를 묻지 않는 기성 정치 체제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다면, 전공투 학생들은 권위적인 대학체제와 마루야마 마사오와 같은 전후 지식인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 정도겠지요. 미시마가 주장한 ‘천황 친정’과 전공투가 주장한 ‘직접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가 중간 권력 구조의 매개물을 거치지 않고 국가의지와 직결하는 것을 꿈꾼다는 점에서도 유사합니다. 일본이 고도 경제 성장의 궤도에 오르고 평화로운 국가로서 재부상하면서, 미시마와 전공투 학생들은 오히려 삶에 대한 공허함과 무의미에 괴로워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미시마의 대표작으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금각사’(1956)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특징입니다. ‘금각사’는 미조구치라는 말더듬이 청년이 금박을 입혀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금각을 불태운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소설인데요. 흔히 이 작품을 ‘미에 대한 절대적 동경과 그로부터 비롯된 왜곡된 심리’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는 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그러나 ‘금각사’를 찬찬히 읽어보면, 오히려 인간에게는 불가능도 한계도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세계를 맘대로 바꾸려고 한 근대의 근본 원리(심리)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의식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근대(미조구치)’란 결국 그 어떤 ‘위대한 전통이나 아름다움(금각)’도 파괴하고 말 것이라는 미시마의 두려움이 작품의 저류에는 강하게 흐르고 있는 겁니다. 근대의 원리나 심성만이 전면화되면 예술도 정치도 불가능하게 된다고 미시마는 믿었던 것이 아닐까요? 1969년의 도쿄대 토론으로부터 1년 후에 미시마가 할복이라는 방식으로 삶을 마감했다면, 전공투는 3년 후에 아사마 산장 집단 살인 사건으로 사회적 죽음을 당합니다. 미시마는 “이대로 간다면 ‘일본’은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날이 갈수록 깊어진다. ”(지키지 못한 약속, ‘산케이신문’, 1970년7월7일)며 할복까지 했지만, 미시마의 죽음은 자신의 우려에 대한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많은 지식인들은 1970년 미시마의 자살과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일본의 ‘좌우’가 모두 몰락했으며, 결국 현상태를 수용하는 가치 부재의 시대가 펼쳐졌다고 말하는데요. 어쩌면 1969년 미시마와 전공투가 도쿄대 교양학부 900번 교실에서 나누었던 토론은 전후 일본의 마지막 사상투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2-17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

제가 사는 숙소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고마바 공원 내에는 일본근대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일본 근대문학과 관련한 17만 점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는데요. 한국근대문학이 전공인 저는 이곳을 틈나는 대로 방문하고는 합니다. 일본근대문학관에서는 방대한 소장 자료를 바탕으로 정기적으로 기획 전시도 이루어지고, 문학전문가들이나 현역 인기 작가들의 따끈따끈한 강연회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2024년 11월 30일부터 2025년 2월 8일에 걸쳐서는 ‘미시마 유키오 탄생 100년제’가 개최되는데요. 너무나도 문제적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된 이 전시는 참으로 풍성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전시는 크게 ‘三島愛(미시마에 대한 사랑)’, ‘書物愛(책에 대한 사랑)’, ‘日本愛(일본에 대한 사랑)’의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三島愛’에서는 미시마가 지인들과 나눴던 편지, 서명이 들어간 헌정본, 명함이나 엽서 등을, ‘書物愛’에서는 아름다운 책에 대한 미시마의 관심과 그 결과로 탄생한 미시마 유키오의 멋진 책들을, ‘日本愛’에서는 미시마의 일본 사랑을 드러낸 자료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온 P대학의 K교수, K대학의 S교수와 일본근대문학관을 방문한 2025년 1월 13일에는, 전시와 함께 미시마 유키오 생의 마지막 6년 동안 너무나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시인 다카하시 무쓰로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문학관에서 다른 기획전시를 본 적이 있었지만, 다른 전시와는 달리 ‘미시마 유키오 탄생 100년제’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문학관이 꽉 찬 느낌을 줄 정도였는데요. 한국인에게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오에 겐자부로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익숙하지만, 일본에 머물면서 느끼는 실감으로는 보통의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미시마 유키오라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얼마 전 이즈반도 최남단의 시모다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갔을 때는, 미시마 유키오가 사랑했던 마들렌을 전면에 내세운 가게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작품은 물론이고, 충격적인 삶의 방식으로 정신의 광기를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사실 미시마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1925년 도쿄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황족과 귀족의 교육기관인 학습원을 수석 졸업하여 천황으로부터 직접 시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1947년에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엘리트 관료들만 간다는 대장성에서 9개월간 근무한 후에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요, 그는 숱한 명작을 발표하며, 일본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뜨거운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의 첫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미시마 유키오가 될 거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랬던 미시마 유키오가 행동의 광기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1970년 11월 25일, 할복이라는 엽기적인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 일을 말하는데요. 그는 자신이 조직한 사병단체 ‘방패회’ 회원 네 명과 자위대 총감실을 찾아가 총감을 인질로 잡고, 자위대원들을 연병장에 집합시킵니다. 그리고는 ‘절대 천황제’의 부활을 위해 자위대가 궐기할 것을 주장한 후에, 자위대 총감실에서 자살한 겁니다. 미시마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천황폐하 만세”였다고 하는데요. 이 충격적인 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한국인은 문학평론가 김윤식(1936-2018)이었습니다. 그는 도쿄대 연구원으로 일본에 도착한 3일 후에 도쿄대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TV 중계방송으로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하는데요.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김윤식은 다음 해에 곧바로 미시마의 죽음을 다룬 ‘정치적 죽음과 문학적 죽음’이라는 글을 ‘현대문학’(1971.5)에 투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이 글에서 김윤식은 미시마의 죽음이 “20여 년에 걸친 미국 점령 의식의 정신사적 극복의 의미”를 지닌다고 규정하였는데요. 이러한 ‘미시마식의 극복’이 패전 이후 경제 대국으로 새롭게 부상한 일본의 달라진 국제적 위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미시마는 2차 대전 이후 일본은 정체성을 잃고 “무기적(無機的)이고 공허하며, 중성적인 중간색의 나라”(‘지키지 못한 약속’(산케이신문, 1970.7.7.)로 변질되어 간다고 판단한 거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막는 방법으로 미시마는 ‘문화방위론’(중앙공론, 1968.7)을 비롯한 여러 글이나 강연에서 ‘절대 천황제의 부활’을 주장했는데요. 미시마의 논의가 무엇보다도 경악스러운 것은 천황에게 ‘국화(문화)’는 물론이고, ‘칼(무력)’까지 쥐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미시마의 주장대로라면 자위대도 천황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건데요. ‘천황이 직접 군대를 총괄하는 일본’이란, ‘황군(皇軍)’의 군홧발 아래서 피눈물을 흘렸던 우리에게는 상상만으로도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미시마 유키오 탄생 100년제’에 참석한 일본인들로 북적이는 일본근대문학관을 둘러보는 시간은, 과거의 일본과 2025년의 일본이 놓인 거리(차이)를 강박적으로 재어 보는 일종의 시험이기도 했습니다.

2025-02-03

화장실 청소하는 선승, 히라야마

2024년에 개봉한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한국에서 큰 관심을 불러 모았습니다. 도쿄의 청소부 히라야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에는 도쿄의 지역성이 매우 풍부하게 드러나 있는데요. 한강을 중심으로 남북이 크게 나뉘는 서울과 달리, 도쿄는 에도 시대부터 교코(쇼군이 살던 곳)를 중심으로 무사들이 주로 살던 서쪽과 서민들이 주로 살던 동쪽이 나뉘고는 했습니다. 히라야마는 도쿄의 동쪽에 살면서, 도쿄 서쪽의 시부야구로 출근해 화장실 청소를 하며 지냅니다. 그렇기에 히라야마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쿄라는 도시의 공간적 특성을 파악하게 됩니다. 히라야마가 사는 곳은 비교적 서민들이 사는 동네로, 저렴한 이자카야나 목욕탕, 낡은 아파트(우리식으로 하자면 연립주택) 등이 남아 있는데요. 이에 반해 히라야마가 화장실 청소를 하는 시부야구는 부촌의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특히 히라야마가 청소하는 화장실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더럽고 칙칙한 느낌의 공중화장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히라야마가 청소하는 곳은 비영리 단체인 일본재단과 시부야구가 깨끗하고 접근하기 좋은 공중화장실을 목표로 만든 열일곱 개의 화장실이니까요. ‘THE TOKYO TOILET’이란 이름이 붙은 이 프로젝트에는 안도 다다오나 구마 겐고 등의 세계적인 건축가들도 참여했는데요. ‘퍼펙트 데이즈’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현재 도쿄에서는 이 열일곱 개의 화장실 투어를 하는 여행 상품이 있을 정도입니다. 영화는 지루할 정도로 차분하고 정밀하게 히라야마의 하루를 따라갑니다. 그는 아침에 동네 노인의 비질하는 소리에 눈을 뜨면, 이불을 개고 간단한 세면을 한 후에, 집 앞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마시고, 청소용 미니 봉고차에 올라 올드팝을 들으며 일터로 갑니다. 점심에는 일터 근처에 있는 신사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코모레비(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빛)를 필름카메라에 담고, 퇴근 후에는 노인들이 다니는 동네 목욕탕에 몸을 담그며, 아사쿠사 지하에 있는 역시나 오래된 이자카야에서 술을 한 잔 마시고, 집에 와서는 100엔을 주고 산 헌 소설책을 읽으며 잠드는 일상을 보내는데요. 어찌 보면 너무나도 평범한 히라야마의 일상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이유는, 바로 그 평범의 지극함에 있습니다. 히라야마는 우리가 별다른 의식도 없이 행하는 일상의 그 모든 일들에, 마치 엄숙한 의식을 치르듯이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히라야마의 일상에는 동전 하나 열쇠 하나 놓는 위치까지 정확하게 정해져 있을 정도인데요. 그렇기에 히라야마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에서는 신성함마저 느껴집니다. 특히 화장실을 청소할 때, 히라야마의 정성과 집중은 최고조에 이르는데요. 그 결과 관객들은 히라야마가 닦는 것이 공중 화장실의 변기가 아니라, 사당의 제기가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입니다. 저는 히라야마가 혼신을 다하여 닦는 것이 다름 아닌 변기라는 사실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여겨집니다. 히라야마가 너무나 열심히 닦고 빛내는 변기란. 후배 타카시의 말처럼 “어차피 더러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히라야마의 화장실 청소란 그야말로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일에 해당할 텐데요. 이러한 순간에의 몰입은 그가 날마다 코모레비를 카메라에 담는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코모레비는 바람과 햇빛에 의해 늘 변하는 순간의 연속이며, 히라야마는 바로 그 ‘순간’을 카메라에 담을 정도로 소중히 하는 겁니다. 가출한 조카와 나누는 대화에서도 ‘순간’에 대한 강조는 드러납니다. 히라야마는 조카에게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데요. 나중에는 조카까지 노래를 부르듯 이 말을 따라 합니다. 이 말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가치부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토록 순간에 집중하는 히라야마의 모습에서는, 일본 사회의 심층을 형성하고 있는 불교 특히 선(禅)의 영향이 느껴집니다. 6세기에 불교가 전해진 이래, 일본인의 종교적 심성 한복판에는 늘 불교가 있었습니다.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대개의 일본인들은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사후에는 불교식 이름(戒名)을 받으며, 일본 가정 대부분에는 지금도 불단(仏壇)이 설치되어 있으니까요. 특히 일본의 지배계급이던 무사들은 선(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요. 이러한 선에서 가장 중요시한 것이, 바로 일상을 하나의 수행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선에서는 작은 것에서 위대함을 보고, 속된 것에서 성스러운 것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이니까요. 차 한 잔 마시는 것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것에도 그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면, 바로 이러한 선의 정신이 놓여 있습니다.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는 어쩌면 청소부로 변신한 우리 시대의 선승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1-20

도쿄대생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

2024년 12월 18일에는 도쿄대 18호관에서 2시간에 걸쳐 저의 조촐한 강연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학교 측으로부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주제가 ‘21세기 한국의 다문화 소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도쿄에 오기 전에, 21세기에 발표된 한국 다문화 소설과 관련하여, ‘다문화시대의 한국소설 읽기’(2015), ‘이질적인 선율들이 넘치는 세계’(2021)라는 두 권의 졸저를 출판한 바 있습니다. 제가 강연주제로 ‘한국의 다문화 소설’을 정한 이유는, 21세기에 들어와 한국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결혼이주여성이나 이주노동자들을 형상화한 소설들을 통해, 우회적으로 일본 사회 내 재일한인문제나 과거사 등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강연은 크게 ‘다문화 소설을 연구하게 된 계기’와 ‘21세기 다문화소설의 실상’이라는 두 부분으로 준비했는데요. 오늘 이 지면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문화 소설을 연구하게 된 계기’와 관련된 것입니다. 본래 저의 전공은 식민지 시대(1910-1945) 한국문학으로서, 특히 저는 식민지 시대 한반도의 핵심적인 시대적 과제에 충실했던 작가들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랬던 제가 한국의 다문화 소설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우연한 발견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당시 베스트셀러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김려령의 ‘완득이’(창비, 2008)를 읽게 되었는데요. 이 작품은 장애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반항아 도완득이 질풍노도의 고교 시절을 보내며 겪는 이야기를 그려낸 성장소설입니다. 그런데 ‘완득이’라는 작품은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활동했던 김사량의 ‘빛 속으로’(문예수도, 1939.10)와 너무나 비슷했던 것입니다. 일본의 최고문학상인 아쿠다가와상 최종심에까지 오른 ‘빛 속으로’는 일제 말기 도쿄를 배경으로 하여, 일본 출신의 아버지와 조선 출신의 어머니를 둔 국제아 야마다 하루오가 자신 안에 있던 ‘조선적인 것’을 부정하다, 南先生(남선생, 미나미 센세)을 만나 자신의 ‘조선적인 것’을 인정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완득이’에서 베트남 출신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도완득은 ‘빛 속으로’의 국제아인 야마다 하루오에 대응되며, 어둠 속에 방치된 완득이를 사회로 이끌어주는 동주 선생은 南先生에 대응됩니다. 두 소설의 어머니들은 모두 인종적·계급적·젠더적 모순이 중첩되어 고통 받는 서발턴(하위주체, subaltern)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유사성은 1939년과 2008년의 시간적 거리와 도쿄와 서울이라는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민족이나 인종이 어울려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갈등과 고통이 현재진행형이기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빛 속으로’는 일제 말기에 쓰여진 ‘완득이’이며, ‘완득이’는 21세기에 쓰여진 ‘빛 속으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사량(1914-1950)은 평양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동경제대에서 수학했는데요. ‘빛 속으로’의 南先生(남선생, 미나미센세)도 제국대학 학생으로 세틀먼트(settlement)에서 빈민가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야마다 하루오를 만나게 됩니다. “원래 S협회는 제대帝大 학생 중심의 인보사업(隣保事業) 단체로 탁아부나 아동부를 시작으로 시민교육부, 구매조합, 무료의료부 등도 있어서, 이 빈민지대에서는 친밀도가 높았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동경제대 학생들이 중심이 된 사회봉사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2017년에 몇 명의 한일 연구자들과 동경제대 세틀먼트(정식명칭은 동경제대 야나기시마 세틀먼트)가 있던 곳을 찾아간 적이 었었는데요. 그 터에는 다른 민가가 자리 잡고 대신 한 블록 떨어진 야나기시마 놀이터에 세틀먼트를 기념하는 표지판만이 남아서 그때의 일을 증언해 주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강연을 준비하며 다시 야나기시마 놀이터를 찾으니, 2024년 2월에 새로 만들어져 사진 등이 보강된 표지판이 맞아 주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빛 속으로’에서 하루오의 엄마인 정순은 일제 말기 재일조선인이 겪은 고통과 수난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정순은 남편 한베에게 끔찍한 학대와 폭행을 당합니다. 정순은 자신이 조선인이어서 학대를 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학대받는 처지를 당연시하는데요. 더욱 끔찍한 것은 정순이 아들인 하루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배척하는 일도 감내한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강의실에서 ‘빛 속으로’를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 저를 비롯한 학생들은 조선 출신이라는 이유로 정순이 겪는 고통과 그런 어머니를 부정하는 어린 하루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고는 합니다. 그런데 70년 후에 한국에서 창작된 소설에서도, 국적과 위치만 바뀐 채 이러한 고통이 반복되고 있었던 겁니다. 이전에 이 연재에서도 다룬 바 있는 재일한인들의 소설에는 정순이나 하루오가 겪은 일이 70년이 지난 일본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는데요. 제가 도쿄대생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단순한 꿈, 인종이나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일이 없는 사회를 향한 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2025-01-06

스즈란도오리에서 봉두난발의 이상을 만나다

‘대학의 거리’이자 ‘학생의 거리’이기도 한 진보초에는 일찍부터 중국인 유학생과 조선인 유학생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진보초에 모인 한국인 젊은이들 중의 하나가 이상(1910-1937)입니다. 제가 한 달에 한 번 세미나를 하기 위해 방문하는 센슈대학은 그 옛날 이상이 머물던 하숙방 근처여서, 세미나가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면 이상의 환영과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기도 하는데요. 이상은 1936년 10월 하순에 도쿄에 도착하여, 1937년 4월 17일 새벽 도쿄제대 부속병원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진보초에 머물렀습니다. 그 흔한 ‘장학금’조차 없이 도쿄에 간 이상의 하숙방은, 당시 한국 문단의 총아가 머물기에는 참으로 초라했던 것 같습니다. 이상은 ‘권태’에서 자신이 이 방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라고 썼으며, ‘실화’에서는 “12월 23일 아침 나는 진보초 누옥 속에서 공복으로 하여 발열하였다”고 고백합니다. 문우인 김기림은 이 곳을 “구단(九段) 아래 꼬부라진 뒷골목 이층 골방”이라고, 김소운은 “진보초 뒷골목, 햇살이 들지 않는 좁은 이층 방”이라고 묘사했는데요. 모두가 추위와 가난과 어둠의 폐색된 이미지로 가득 차 있네요. 변동림과 결혼한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며, 폐결핵이라는 불치병까지 앓았던 이상은 왜 진보초의 골방까지 가야만 했을까요? 1936년 시점에 도쿄란 오늘날처럼 저가 항공을 타고 2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변동림은 남편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경성에서 출발해 “열두 시간 기차를 타고 여덟 시간 연락선을 타고 또 스물네 시간 기차를 타고”서야 도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상은 작가였기에, 그의 진실은 작품을 통해 확인하는 수밖에 없는데요. 이상은 그 곤궁한 일본에서도 창작의 붓을 놓지 않고, 소설 ‘종생기’와 ‘실화’, 산문 ‘19세기식’과 ‘권태’ 그리고 몇 편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이 중에서도 도쿄를 배경으로 한 유일한 소설인 ‘실화’는 ‘진보초의 이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상의 ‘실화’를 관통하는 것은 ‘비밀’입니다. 작품에는 “사람이 비밀(秘密)이 없다는 것은 재산(財産)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라는 문장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나’는 죽음까지 약속했던 ‘연(姸)이’의 ‘비밀(불륜)’을 알고서는 강한 죽음 충동을 느끼다, 결국 진보초의 골방까지 건너갑니다. ‘비밀’은 ‘비밀’일 때만 의미가 있지만, ‘나’는 결코 연의 ‘비밀’을 ‘비밀’로 봉인할 수 없었던 겁니다. ‘내’가 ‘비밀’을 ‘비밀’로 간직할 수 없는 이유는 “슬플밖에·20세기(世紀)를 생활(生活)하는데 19세기 도덕성(道德性)밖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永遠)한 절름발이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19세기식 도덕’과 ‘20세기의 생활’ 사이에서 분열돼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러한 분열을 자신의 한계 이전에 경성의 한계로 받아들인 것이고, 그렇기에 ‘19세기식 도덕’과는 무관해 보이는 ‘20세기식 생활’을 향해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인지 ‘내’가 도쿄에서 보려고 하는 것은 오직 ‘모던’에 관련된 것들 뿐입니다. 특히 ‘20세기식 생활’에 대한 관심은 스즈란도오리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데요. 은방울꽃 모양의 가로등(すずらんとう, 鈴蘭706F)에서 유래한 스즈란도오리는, 당시 근대문명의 본산인 영국의 런던에까지 이어지는 ‘20세기 생활’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본래 스즈란도오리는 ‘환상의 차이나타운’으로 불릴 정도로 중국인들이 많이 살던 곳입니다. 진보초 근처에 중국인유학생회관 등이 생기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모였고, 그들을 상대로 한 음식점 등이 이 거리에 집중적으로 생겨난 겁니다. 이 무렵 진보초의 스즈란도오리에 머물렀던 사람 중에는 루쉰이나 주은래 등의 유명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식 생활’을 목마르게 찾는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모던’이며 ‘서양’일 뿐니다. 이러한 사정은 섣달 대목을 맞아 곱게 장식한 스즈란도오리에서 “최후의 이십 전을 던져 타임스판 상용영어 사천자라는 서적”을 사는 모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밥을 굶어가면서 마지막 남은 돈으로 영어사전을 살 정도로, ‘20세기식 생활’을 갈망했지만, ‘나’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실패의 이유는 근대도시로 발돋음하기 시작한 지 고작 반세기가 조금 지난 도쿄가 ‘20세기식 생활’만으로 가득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임종할 무렵 주변 사람들이 ‘프랑스식 코페 빵’을 구해다 줘도, ‘진짜’가 아니라며 짜증을 냈듯이, 도쿄에 진짜 ‘20세기식 생활’이 존재할 까닭이 없는 겁니다. 설령 이상이 도쿄가 아닌 파리에 간다고 해도, ‘진짜 프랑스식 코페 빵’을 찾을 수는 없겠죠. 이러한 사정은 작품 속에서 조선을 향한 향수를 달래라며 C양이 ‘나’의 양복 주머니에 꽂아준 ‘백국(白菊)을 잊어버리는 것(失花)’으로 드러납니다. 과연 저는 이상이 진보초의 골방까지 건너와 오들오들 떨다 죽어야만 했던 ‘비밀’을 풀어낸 걸까요. 이상의 삶과 작품은 밀도가 높아, 누구의 해석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요. 혹시 진보초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봉두난발의 이상을 만난다면, 당신이 영란등 아래서 그토록 찾아 헤맨 것은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2024-12-23

일본의 서재, 진보초 헌책방 거리

연구를 위해 도쿄에 머물면서, 제가 연구실 다음으로 많이 방문하는 곳은 아무래도 진보초 헌책방 거리입니다. ‘간다고서점연맹’에 가입된 서점만 127개에 이르는 진보초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헌책방 거리인데요. 이렇게 많은 헌책방이 한 곳에 모이게 된 이유는, 이 곳이 책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의 동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853년 미국의 페리가 이끄는 함대가 내항한 이후, 막부는 서양학문을 취급하는 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이로 인해 진보초 근처에 1855년 ‘요오가쿠쇼(洋学所)’가 만들어지고, 이것은 이후 ‘요오쇼시라베쇼(洋書調所)’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메이지 정부 출범 이후 도쿄의과대학과 합병하여 도쿄대학이 됩니다. 이후 근방에는 1873년에 도쿄외국어학교가 탄생하고, 뒤이어 메이지대학, 주오대학, 센슈대학, 니혼대학 등의 전신이 되는 학교가 잇달아 개교하였던 겁니다. 학생들의 동네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근처에는 공부를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서점이 밀집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세계 최대 헌책방 거리인 진보초의 탄생 배경입니다. 진보초에서는 책만 파는 것이 아니라 일년 내내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지는데요. 특히 가을이면 열리는 ‘간다헌책마츠리’는 올해로 64회를 맞이하며, 일본인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유명한 축제입니다. 올해는 10월 25일부터 11월 4일까지 열렸는데요. 이 때는 수많은 고서점들이 가판대를 설치하여, 꼭꼭 숨겨두었던 희귀본들을 싼값에 일반에 공개하고는 합니다. 축제 기간 동안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어 비장의 책을 찾는 모습은 도쿄의 명물인데요. 저도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보물같은 책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올해 제가 건진 최고의 수확은, 1970년대 초에 한국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던 ‘朝鮮文学の会(조선문학의회)’라는 단체에서 번역하여 출판한 ‘現代朝鮮文学選(현대조선문학선) 1’(創土社, 1973)입니다. 11월 23일부터 24일까지는 이틀에 걸쳐, ‘K-BOOK 페스티벌’이 펼쳐지기도 했는데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11시에 출판그룹빌딩에 도착했을 때는,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빌딩 주위로 길게 줄을 서 있을 정도로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이 행사에서는 한국문학 번역 관련 시상식도 있었고, 한국의 유명 시인 작가들의 대담 행사도 펼쳐졌습니다. 올해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인해 그 열기가 예년보다 더욱 뜨거웠는데요. 행사장의 한 쪽에는 한강 작가의 책들과 한강의 문학세계를 한국문학사의 맥락에서 짚어낸 전시물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날의 주인공은 일본에 번역된 한국문학 관련 책들이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46개 출판사가 참가하여, 한국문학 관련 서적을 판매하고 있었는데요. 어느새 한국문학도 진보초, 나아가 일본 문화의 한복판에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에는 한국에서 온 스무 명의 작가, 시인들과 함께 ‘한·일 작가 교류회’가 열리는 쇼가쿠칸(小學館) 출판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일본 문학인들과의 교류회가 있었는데요. 이 자리에서 무엇보다 저를 흥분시킨 일은 나카가미 겐지의 딸인 나카가미 노리를 만난 것입니다. 나카가미 노리는 에세이스트이자 소설가로 유명한데요. 나카가미 노리는 소설가 나카가미 겐지의 딸이기도 합니다. 마흔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나카가미 겐지는 ‘곶’이나 ‘고목탄’으로 유명하지만, 저에게는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문학적 동지라는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오는 작가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나카가미 겐지가 죽었을 때, 이제 일본근대문학은 끝났다며 본격적인 문학비평을 그만두기도 했으니까요.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면, 나카가미 겐지 이후의 일본 소설이란 로맨스에 불과하며, 심지어는 에도시대(1603-1868) 이야기로의 퇴행이라고까지 합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교류회가 끝난 이후에는, 관계자 분들의 안내를 받아 헌책방을 구경했는데요. 지금까지 여러 번 둘러본 헌책방 거리이지만, 이전에는 못 가본 귀한 곳에 가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는 가게는 1882년에 설립된 ‘오야쇼보오(大屋書房)’였습니다. 현재 창업자의 4대 후손이 운영하는 이곳에서는, 에도 시대와 메이지기의 일본 책, 오래된 지도, 우키요에 판화 등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었는데요. 강의실에서 말로만 듣던(혹은 하던) 도카이 산시의 ‘가인지기우(佳人之奇遇)’(1885-1897)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学問のすすめ)’(1872-1876)과 같은 책의 초판본을 볼 수 있었습니다. 150여 년 전의 이 책들을 직접 보니, 책이라는 물성이 내뿜는 아우라(원본에서 느껴지는 고상하고 독특한 분위기)가 만만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독서대국으로 일컬어지는 일본이지만, 현재는 서점의 수도 최전성기에 비해 3분의 2로 줄었고, 심지어는 일본인의 절반 이상은 1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책의 위기는 일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닌 모양입니다. 그러나 책이 지닌 고유한 힘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 책도 활자문화도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생각(기도)을 해봤습니다.

2024-12-09

어둠을 넘어 빛으로

2024년 10월 6일은 본격적인 제 75회 조선학회 발표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텐리역 앞에 새로 지은 비즈니스 호텔에서 간단히 조식을 먹은 저는, 동료 학자들과 함께 학회가 열리는 텐리(天理)대학으로 향했는데요. 텐리대학은 일본에서 가장 먼저 한국어 교육을 시작한 대학으로, 한국학 연구의 뿌리가 깊은 곳입니다. 이것은 텐리대학이 일본의 신흥종교인 텐리교의 해외 포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텐리외국어학교의 후신인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텐리교는 1838년 가정주부였던 나카야마 미키(中山美伎, 1798∼1887)가 계시를 받아 일본 나라현 텐리시에서 창시한 일본의 대표적인 신흥종교입니다. 텐리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인류가 즐겁게 사는 것이며, 그래서인지 기관지의 이름도 다름 아닌 ‘陽氣(양기)’입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텐리는 도시 전체가 텐리교의 교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곳곳에 텐리교 시설이 있었습니다. 이 날은 총 3개 부분(문학분야, 어학분야, 역사학·고고학·문화인류학)에서 열일곱 명의 발표가 있었고, 제가 속한 문학분야에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총 네 명의 발표가 있었는데요. 이 날 발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텐리대 구마키 츠토무 교수의 ‘김동명의 시와 검열’이었습니다. 김동명은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로 시작되는 ‘내마음’(조광, 1937.6)이라는 시로 유명하죠. 구마키 츠토무 교수는 식민지 시대 여러 자료를 치밀하게 검토한 후에, 본래 김동명이 발표하려던 시의 많은 부분이 일제의 검열로 인해 삭제되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일제가 삭제한 부분은 민족의식이나 조선의 문화를 절절하게 표현한 것들이었는데요. 구마키 교수에 의하면, 김동명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비유(특히 은유) 등의 방법을 활용하여 검열된 부분을 새롭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김동명 시의 특징으로 고평되는 부분은, 대부분 일제의 검열로 인해 탄생한 비유라는 것이었습니다. 외부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김동명의 예술혼이 불후의 명작을 낳았다는 것인데요. 김동명이라는 시인의 숭고한 정신은 물론이고, 시대와 예술의 아이러니한 관계 등을 성찰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학회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우리 일행은, 교토에 있는 우토로 마을로 향했습니다. 우토로는 2차 대전 중 ‘교토 비행장’ 건설을 위해 모집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살면서 생긴 마을입니다. 당시 ‘국책사업이라 징용에 안 가도 된다’, ‘살 곳도 있다’라는 소문을 듣 고 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이곳에 모여들었다고 하는데요. 일본의 패전으로 교토 비행장 건설공사는 중단되었고, 조선인 마을이 된 우토로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본국제항공공업의 후신인 닛산차체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우토로 마을의 조선인들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였으며, 심지어 이 곳에는 수돗물조차 공급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우토로 마을의 퇴거 재판은 역사적 배경을 무시한 채, 철저히 민간인 사이의 토지 소유권 분쟁 차원에서만 진행되었는데요. 그 결과 일본 대법원은 우토로 주민들에게 일방적으로 마을을 명도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반전은 이때부터 본격화되는데요. 이후 주민들과 지원자들은 더욱 열성적으로 노력하고, 여기에 한국 정부의 지원과 한일 양국 시민들의 모금이 더해지면서 우토로 마을의 토지 일부를 매입하게 됩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반세기가 훨씬 넘는 동안 불안한 삶을 견뎌야 했던 우토로 주민들에게도 안주할 땅이 드디어 생기게 된 것이죠. 2015년 8월에는 한국의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이 우토로 마을을 촬영하면서, 한국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제가 우토로를 찾았을 때는, 제가 일본에 머문 날 중에 가장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지난 시절 재일 한인들이 겪은 아픔을 상징하는 우토로 마을이지만, 제가 방문했을 때는 2018년 1월부터 입주가 시작된 우토로 시영주택과 2022년 4월에 개관한 ‘우토로 평화기념관’이 말끔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맞아주었습니다. ‘우토르 평화기념관’은 3층 건물인데요, 1층은 ‘교류를 위한 다목적 홀’, 2층은 ‘우토로 마을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설 전시실’, 3층은 ‘기간별로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는 기획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 평화기념관은 참으로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어, 누구라도 찬찬히 둘러보면 재일 한인의 어두웠던 역사와 그에 굴하지 않고 빛을 향해 나아갔던 뜨거운 발자취를 알 수 있을 정도였는데요.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것 같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우토로 평화기념관’을 나서며, 저는 두손 모아 한일간의 밝은 미래와 재일 한인의 행복을 기원했습니다.

2024-11-25

고색창연함과 화려함, 세련됨에 숨이 찼던 하루

10월 5일은 오후부터 조선학회의 발표가 시작되지만, 저는 나라 관광을 좀 더 하기로 했습니다. 나라(奈良)의 그 많은 관광지를 남겨두고는 학회의 발표가 귀에 들어올 거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일본에서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호류지(法隆寺)였습니다. 14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호류지는 무려 200개 가까운 국보와 중요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대표사찰이죠. 호류지의 금당, 오중탑, 중문 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기도 한데요. 전날 야쿠시지의 동탑과 금당 등을 보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면, 호류지의 오중탑과 금당을 보았을 때는 그 고색창연함으로 인해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호류지가 저를 잡아끈 이유는 고대 한반도와의 관련성 때문입니다. 이곳에는 명칭에 ‘백제’가 들어가 있는 백제관음상과 한떄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고 알려졌던 금당 벽화가 있는데요. 다행히 백제관음은 일반에 공개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반론도 많지만, 백제관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에는 분명 백제관음상이 “백제에서 온 것”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령 백제관음상이 ‘백제계 도래인이 만든 것’이거나, ‘백제의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라는 의미더라도, 이 불상이 한반도와 갚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호류지의 오중탑.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검게 변해 있는, 높이 2미터의 백제관음을 보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일본에서 보아온 불상과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의 백제관음상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간 수많은 선조들의 기대와 슬픔을 모두 품어 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겁니다. 저는 고구려 승려 담징의 흔적도 찾아보려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어디서도 그 발자취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감정을 추스르고 절을 나와 지도앱를 보았을 때 근처에 고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0분 정도를 걸어서 도착한 후지노키 고분은 전날에 본 전방후원분과는 달리 우리에게도 익숙한 원분이었습니다. 이 고분에서는 금동제 왕관이나 신발 등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곳에서 나온 유물 역시 한반도와의 관련성을 드러내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제 머리 속에서는 전날에 이어 계속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관계에 대한 상상의 날개가 한껏 펼치지고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전철을 타고 나라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사슴이 많기로 유명한 나라공원으로 향했는데요. 처음 간 곳은 연못에 비치는 높이 50미터의 오중탑으로 널리 알려진 고후쿠지(興福寺)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오중탑은 수리중이어서, 탑도 그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30개가 넘는 국보와 중요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는 국보관이 저의 아쉬움을 달래 주었습니다. 그 많은 보물 중에서도 아수라입상(阿修羅立像)과 용등귀입상(龍燈鬼立像)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는데요. 8세기 전반에 만들었다는 아수라상은, 아름다운 서양 여성의 모습으로서, 21세기 헐리우드 영화에 출연해도 어색하지 않을 거 같았습니다. 13세기 초에 제작된 용등귀입상은 악귀가 등롱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었는데요, 한껏 폼을 잡고 있지만 훈도시(일본의 남성 속옷) 차림의 악귀는 아무리 보아도 무섭다기보다는 익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자애로운 모습의 불상만 보아온 저에게는 모두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들른 도다이지(東大寺)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명제를 잠시 잊어야 할 거 같았습니다. 일단 절의 면적부터 야구장 50개가 들어갈 만큼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주불로 모셔진 비로자나불은 손바닥 크기 하나가 2.5미터에 이를 정도였으며, 그 불상을 모신 대불전 역시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었으니까요. 이 절은 크기로 승부를 보겠다는 듯이, 절의 정문인 남문도 높이 25미터가 넘는 일본 최대의 산문(山門)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이수이엔(依水園)이라는 정원에 갔는데요, 이 곳은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전원(前園)과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후원(後園)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 정원으로서, 연못 주위를 거닐며 즐기는 양식이었는데요. 인상적이었던 것은 도다이지 남문이나 와카쿠사산 같은 주변 풍경을 정원 경관의 하나로 끌어온 차경(借景)이 매우 빼어났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어디를 가나 외국인 관광객이 많고, 그 중에서도 나라(奈良)에는 더 많았지만, 그 나라(奈良)에서도 이수이엔에는 정말로 많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어쩌면 세계공용어는 영어가 아니라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수이엔을 나왔을 때는, 아직 햇빛이 뜨거운 오후 4시였는데요. 그런데도 저는 큰 전투라도 치른 군인처럼 무척이나 지쳐 있었습니다. 호류지의 고색창연함과, 고후쿠지의 화려함과, 도다이지의 거대함과, 이수이엔의 세련됨에 아마도 몹시나 숨이 찼던 모양입니다. 잠시 앉아서 쉬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기적처럼 조선 백자가 그려진 미술관의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수이엔 바로 옆에 있는 네이라쿠(寧樂)미술관의 포스터였는데요. 이 미술관은 한중일의 고미술품 수천점이 수집돼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저는 구원이라도 얻은 양, 급하게 그곳으로 가 우리의 도자기들을 찾았는데요. 그제서야 비로소 저는 고국에 있는 지인들처럼 반가운 청자와 백자의 우아함과 담백함과 영롱함과 투명함 속에서, 편안한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2024-11-11

고대의 하늘을 훨훨 날아다녔던 날

나라(奈良)현 천리시에 위치한 천리대학에서는 10월 5일부터 6일에 걸쳐 이틀간, 조선학회가 열렸습니다. 조선학회는 무려 7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있는 학회인데요. 저는 고도(古都)인 나라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학회가 열리기 하루 전에 나라로 향했습니다. 아침도 굶고 7시에 시나가와역에서 교토행 신칸센을 탔습니다. 10시 30분쯤 나라에 도착한 제가 처음 향한 곳은 스케일이 큰 궁터와 오래된 사원으로 유명한 나라의 니시노쿄 지역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처음 향한 곳은 나라 시대 왕궁이 있던 헤이죠(平城) 궁터였는데요. 예전의 건축물 중에서는 정전에 해당하는 대극전이나 정문에 해당하는 주작문 정도만이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궁터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1967년 유적이 발굴되어 1998년에 복원이 완료된 도인(東院)정원이었는데요. 제가 이 곳을 둘러볼 때는 관람객이 아무도 없어 아주 호젓했습니다. 혼자 정원을 둘러보고 있을 때, 그 곳의 관리자가 와서 자신이 한국을 여섯 번이나 방문했으며, 자신의 아내는 한국어를 배운다며 친근감을 표시했습니다. 한국의 역사에 관심이 많다던 그분은, 스마트폰을 꺼내 익산에서 찍은 미륵사지석탑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이 분은 도인정원이 일본식 정원의 원형이 되었으며, 한국으로 치자면 경주의 안압지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곳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주 핵심만 정확하게 짚어낸 좋은 설명이었습니다. 일본정원의 원형이 되어서인지, 도인정원이 일본 지폐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우지시의 뵤도인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후에는 버스를 타고 세계문화유산인 야쿠시지(藥師寺)로 이동했습니다. 야쿠시지는 국보인 동탑과 1981년에 재건된 서탑, 그리고 금당에 모셔진 약사삼존상으로 유명한데요. 처음 금당 양 옆에 있는 동탑과 서탑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목탑의 웅장함과 정교함이 정말 대단했던 것입니다. 또한 금당에 모셔진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너무나 요염하여, 불경스럽게까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가시지 않는 감흥을 안고 야쿠시지를 나와, 나라 관광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나라공원으로 향했는데요.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옆에 토쇼다이지(唐招提寺)라는 사찰이 나타났습니다. 나라와 관련한 어떤 홍보물에서도 본 적이 없는 사찰이기에 저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더 가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글쎄 고대사를 다룬 빛바랜 책갈피 속에서나 보았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전방후원분은 전면이 네모꼴이고 후면이 원형인 형태의 무덤으로, 주위에는 해자를 두른 거대한 고분입니다. 예기치도 않게 실물로 전방후원분을 보게 되니, 저는 저 먼 고대사의 하늘 속으로 날아오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의 서남부 지역에서도 집중적으로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특이한 형태의 무덤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똑같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고대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긴밀한 관계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저는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흥분하여, 그 넓은 무덤 주위를 몇 번이나 둘러보았는데요. 그 고분의 주인공은 2000년 전에 일본에 살다 간 스이닌(垂仁) 천황이었습니다. 특히 이 고분과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전설이 하나 있었는데요. 해자의 한 곳에 떠 있는 조그만 섬이, 스이닌 천황의 신하였던 다마치마모리의 무덤이라는 것이 그 전설의 내용입니다. 스이닌 천황은 ‘불로불사의 향기로운 과일(非時香果)’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다미치마모리에게 내렸고, 다미치마모리는 죽을 고생을 한 끝에 그 향과를 구해옵니다. 그러나 스이닌은 이미 죽은 후였고, 다미치마모리는 향과의 절반은 황후에게 바치고 절반은 고분에 바친 후에 자살하고 맙니다. 이후 사람들은 ‘불로불사의 향기로운 과일(非時香果)’을 귤로 생각했고, 그래서인지 고분 주위에는 감귤 나무가 곳곳에 심겨져 있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여전히 풀지 못한 고대사의 비밀을 잔뜩 가슴에 품은 채, 나라공원에 가기 위해 버스에 급하게 올랐습니다. 너무 서둘렀던 탓일까요? 버스에 오른 지 10분 정도가 지난 후에야 거꾸로 버스에 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4시가 가까워진 시간, 할 수 없이 나라공원으로의 이동은 포기하고, 그냥 지나쳤던 토쇼다이지에 가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 본 토쇼다이지는 결코 그냥 지나칠 절이 아니었습니다. 당나라의 고승 감진을 어렵게 초빙하여 세운 이 절은, 한 고승의 법력만으로 유지되는 절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세속적인 느낌이 덜했습니다. 특히 불교 계율을 가르치던 도장답게 강당이나, 교육을 위해 사용되는 경전 등을 보관한 학교 창고 등이 더욱 경건한 느낌을 주었는데요. 푸른 주단을 펼쳐 놓은 듯한 이끼 정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이토록 멋진 절이 왜 다른 절만큼 홍보가 안 되는 것인지, 혹시 절 이름에도 당(唐)이 들어가고, 감진이라는 중국 승려와 관련되어서 그런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한반도 남서부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과 당나라로부터 온 고승이 세워 수천 년을 이어온 고찰을 떠올리며, 동아시아의 고대는 어쩌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을지도 모른다는 공상의 나래를 맘껏 펼쳐본 나라 여행의 첫째 날이었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10-28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

지난 번에는 관동대진재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며칠 전 학교 구내서점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특이한 제목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이용덕(李龍德)이 쓴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あなたが私を竹槍で突き殺す前に, 河出書房新社, 2020)라는 장편소설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근대에 들어 죽창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일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관동대진재 당시 죽창으로 많은 사람을 찔러 죽인 것으로 유명하죠. 당시 유언비어에 들려 있던 자경단원들은 칼, 창, 곤봉, 도끼, 심지어는 피스톨까지 동원해 조선인을 학살했습니다. 이때 가장 많이 사용한 무기 중의 하나가 바로 죽창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재일 한인 3세인 이용덕은 다른 글에서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라는 제목이 1923년 관동대진재 당시 이웃에서 함께 생활하던 재일 조선인을 학살한 역사적 사실에 바탕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더군요. 관동대진재가 재일 한인의 비극적 과거를 보여준다면, 이 작품은 재일 한인의 비극적 미래를 보여줍니다.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는 배외주의자들이 꿈꾸던 재일 한인에 대한 차별이 완전하게 실현된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디스토피아를 살아나가는 다양한 재일 한인들의 분투기가 이 작품의 기본 서사라 할 수 있는데요. 거대한 반격을 준비하는 가시와기 다이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한국으로 가는 박이화(야마다 리카), 냉소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양선명(스기야마 노리아키), 한국행 페리에서 몸을 던지는 마수미, 완력으로 차별에 맞짱을 뜨는 다우치 마코토(윤신), 배외주의자들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김마야, 동생의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각성에 이르는 김태수(기무라 야스모리)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400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에는 으스러진 뼈와 온몸을 철철 흐르는 피,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무서운 증오와 모멸의 헤이트 스피치가 빼곡한데요. 그러나 저에게 가장 끔찍하게 다가온 차별과 폭력은 마수미의 아버지가 체험한 것입니다. 마수미의 아버지는 우수한 엔지니어로 일본에 스카우트된 한국인이지만, 끝내 일본에서 견디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혹시 차별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과 공포가 지긋지긋했기 때문인데요. 그가 느낀 의심과 공포는 지극히 사소한, 그렇기에 일상에 편재한 것이었습니다. ‘병원 대기실에서 나보다 뒤에 온 사람이 먼저 진료실에 들어간 것은 혹시 차별 때문은 아닐까?’, ‘구청 직원의 냉정한 태도는 일본인에게도 똑같은 것일까?’, ‘한국식 이름을 밝힌 후 콜센터 직원의 태도가 변했다고 느끼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재일 한인끼리 간 식당의 음식은 과연 깨끗할까?’와 같은 의심과 불안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이기에, 떨쳐낼 수 없는 끈적함과 생생함을 동반하여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의 모든 것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이 상황이야말로, 그 어떤 폭력적인 장면보다도 저에게는 더욱 아찔하게 느껴지더군요.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다이치도 “제노사이드나 강제수용소의 반복만이 디스토피아가 아니야. 디스토피아는 지금이지”라며, “독가스 대신 단지 증오를 발산해서 공기를 더럽히고, 마이너리티를 숨막히게 하는 이 방법이야말로 새로운 학살법이야”라고 강변하기도 합니다. 이용덕의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 표지. 과거라는 점과 미래라는 점을 연결하여 선을 그을 때, 그 중간쯤에 위치한 것이 현재라고 한다면, 관동대진재와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가 그려 보인 디스토피아의 중간쯤에 놓인 것이 아마도 재일 한인이 처한 현재의 상황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 현재는 결코 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을 텐데요. 이용덕은 몇몇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소설의 진정한 작가는 “시대(時代)”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가 말한 ‘시대’란 도쿄 신오쿠보 등에서 헤이트 스피치가 울려 퍼지던 2010년대 초반을 말합니다. 이러한 극우단체의 데모도 2016년 시행된 ‘헤이트 스피치 금지법’과 인종차별에 맞선 카운터 데모에 의해 현재는 극적으로 줄어든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 등에서는 재일 한인을 향한 차별적 발언이 유통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죠. 작품은 뜻밖의 상황으로 끝나며,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다이치의 계획대로 양선명, 김태수, 윤신 등이 목숨을 잃은 후에, 그 죽음과는 무관하게 갑자기 한일 해빙 무드가 연출되며 재일 한인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는 겁니다. 그것은 한일 공동의 적이 탄생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요. 서아프리카에 파견된 자위대가 습격을 받는 일이 발생하고, 이때 한국군이 자위대를 원조합니다. 이를 계기로 한일정상회담이 열리고, 대표적인 코리아타운인 오사카의 츠루하시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교류 이벤트가 성황을 이룰 정도로 화기애애한 상황이 펼쳐지는군요. 이제 헤이트 스피치는 재일 한인이 아닌 이슬람교도들을 향하게 됩니다. 거리에서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배외주의 운동이 펼쳐지고, 그 군중 속에는 태극기를 들고 있는 자와 일장기를 들고 있는 자가 공존합니다. 심지어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어깨동무를 하기도 하는군요. 한국인과 일본인이 어깨동무를 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바로 제 3의 적이었던 겁니다. 어쩌면 이용덕이 ‘당신이 죽창으로 나를 찔러 죽이기 전에’를 통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늘 적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슬픈 본성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10-14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연구년을 맞아 2025년 9월 1일부터 1년간 도쿄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출국을 앞두고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지진에 대한 염려였는데요. 모두 알다시피, 노토 반도 대지진으로 2024년을 맞이한 일본에서는 지난 8월에 지진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8월 8일 미야지마 지진을 시작으로, 9일 가나가와현에서, 10일 홋카이도에서 지진이 일어났던 겁니다. 이로 인해 난카이 해곡에서 100~150년 간격으로 발생한다는 대형 지진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습니다. 일본 정부는 지난 8일 ‘난카이 해곡 지진 주의’를 발표하기까지 했는데요. 그래서인지 저를 아끼는 많은 분들은 지진에 대한 걱정을 참 많이도 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저도 나중에는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요. 한국인에게 일본과 지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포의 대상으로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발생한 간토대지진의 참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일본에 입국한 날은 101년 전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9월 1일이었습니다. 간토대지진은 참으로 끔찍한 진재(震災, 지진에 의한 재해)였는데요.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도쿄를 비롯한 간토 일대를 강타한 지진은, 도쿄제대에 설치된 지진계가 고장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이 지진으로 수십 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요. 더욱 끔찍했던 것은 이후 계엄령이 내려지고, 일본군과 경찰들의 직접적인 가담 내지는 방조에 의해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입니다. 학살은 주로 자경단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 심지어 ‘임신부처럼 배에 폭탄을 넣고 다니며 일본인을 죽인다‘ 등의 유언비어를 빌미로 그런 만행을 저질렀던 겁니다. 시인 쓰보이 시게지는 시 ’15엔 50전(十五円五十錢)‘에서 그 날의 참상을 “나라를 빼앗기고/말을 빼앗기고/최후에 생명까지 빼앗긴 조선의 희생자여/나는 그 수를 셀 수가 없구나”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일본에서의 첫 번째 주말을 맞이한 제가 향한 곳은 스미다구에 있는 요코아미초 공원이었습니다. 요코아미초 공원은 간토대지진 당시 공터(본래는 일본 육군 피복창터)여서 많은 사람들이 피난했다가, 오히려 갑자기 닥쳐온 열폭풍으로 무려 3만8000명이 희생된 곳입니다. 여기에는 웅장한 일본풍의 도쿄도위령당이 있었는데요. 그 옆에 검은 색의 ’관동대지진조선인희생자추도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추도비 옆에는 ‘관동대진재 조선인희생자 추도행사 실행위원회‘가 1973년에 세운 비석이 하나 더 있었는데요, 그 비석에는 “1923년 9월 일어난 간토대진재의 혼란 속에서 그릇된 책동과 유언비어로 6000여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귀중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우리들은 50주년을 맞아 조선인 희생자를 마음으로부터 추도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올해도 9월 1일에 추도식이 열렸으며, 제가 이곳을 찾은 9월 7일에도 여전히 꽃과 술병들이 억울한 넋을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올해는 사이타마현 지사와 지바현 지사가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희생자 추도 행사에 처음으로 추도 메시지를 담은 조전을 보냈다고 합니다. 또한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는 9월 1일 일본 도쿄 주일한국문화원에서 열린 ‘101주년 관동대진재 한국인 순난자 추념식’에 자민당 출신 전직 총리로는 처음 참석하기도 했는데요. 행사 이후 한국 기자들과 만나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은 “역사적인 사실”이라며 ‘한·일 공동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히기까지 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간토대지진 당시 6600여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사실을 흔쾌히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전직 총리가 이를 ‘사실’로 확인한 것은 의미 있는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어떤 행보도 보이지 않았네요. 특히 2016년까지 도쿄도지사가 매년 추도문을 발표했던 것과 달리,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2017년 취임 이후 올해까지 단 한 번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희생자에 대한 추도문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본래는 요코아미초 공원 근처의 스미다가와 강변도 걷고, 아사쿠사 관광지까지도 가볼 생각이었으나, 100년 전의 그 처참한 만행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부인의 폭력 때문인지 갑자기 너무나 큰 피로를 느꼈습니다. 급하게 연구실로 돌아왔지만, 토요일이어서 연구실 건물 자체가 출입불가였습니다. 할 수 없이 중앙도서관에 갔을 때, 놀랍게도 그곳의 1층 전시 코너에서는 ‘눈앞에서 펼쳐진 학살의 기록과 시민의 대처-관동 대지진 당시 살해당했거나 살해당할 뻔한 사람들을 애도한다’는 이름의 전시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진재발생, 그리고 사람들은…’, ‘일고생이 본 관동대진재’, ‘진재 당시의 조선인 유학생’, ‘학살의 실태를 조사하다-조선인 조사단과 요시노 사쿠조’, ‘진재에 대한 끊임없는 증언과 그 후’, ‘잊지 않기 위해-시민의 활동과 추도회’라는 여섯 개의 세부 코너에 총 34개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큰 규모는 아니지만, 간토대지진과 관련한 역사적 증언들과 자료들을 살뜰하게 모아 놓은 전시였습니다. 그 전시를 보고 숙소로 걸어가면서, 어쩌면 절망도 그리고 희망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2024-09-23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8월 23일 교토국제고가 제106회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일명 고시엔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이 일은 엄청난 ‘사건’이 되어 며칠 동안 한국과 일본의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었는데요. 한 고등학교가 고교야구대회에 나가 우승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고시엔 대회’와 ‘교토국제고’에 대해 알게 된다면, 한국과 일본이 뜨겁게 반응하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효고현의 니시노미야에 있는 고시엔 구장은 갑자년에 완공되어 ‘고시엔(甲子園)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약 80개의 고교야구팀이 있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는 약 4000개의 고교야구팀이 있다는데요. 그럼에도 전국대회는 고시엔에서 봄과 여름에 열리는 두 차례의 대회밖에 없다고 합니다. 역사나 위상 등에서 모두 ’봄의 고시엔 대회‘보다는 ’여름의 고시엔 대회‘를 더 쳐주는데, 이번에 교토국제고가 우승한 대회가 바로 ’여름 고시엔 대회‘입니다. ‘여름 고시엔 대회‘에 나가는 팀은 4000여 개의 학교에서 선발된 49개 팀뿐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47개 도도부현(都道府770C)에서 도쿄와 홋카이도만 두 팀이 출전하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한 팀만 출전하는데요. 교토국제고도 총 73개 팀이 참석한 교토 예선에서 다른 팀을 모두 이기고 출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고시엔에 나가는 거야말로 어린 선수들의 꿈이며, 그렇기에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선수도 적지 않은 야구대국 일본이건만, 일본 야구 만화의 대부분은 여전히 고시엔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고시엔은 일본인에게 ‘야구 성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 대상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처음 이 대회를 만들 당시 일본인들은 고시엔을 통해 무사도의 현대적 변용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과거 새파란 젊은이들이 자기 지역을 위해 칼 한자루에 목숨을 걸었듯이, 근대의 젊은이들은 배트와 글러브에 모든 것을 걸고 모교와 지역의 명예를 위해 싸우는 모습을 연출하고자 했다는 거지요. 그렇기에 고시엔에서는 매너나 스포츠맨십과 같은 태도를 무엇보다 중요시합니다. 평소의 생활태도에까지 엄격한 규율을 부여하는데요. 일례로 2006년에는 홋카이도를 대표하여 고시엔에 나가기로 되어 있던 선수들이 술집에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출전을 포기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고시엔은 ‘감동 포르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대회에 참여하는 모두가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멋진 경기를 하면 기뻐서 울고, 졸전을 펼치면 아쉬워서 울고, 이기면 이겨서 울고, 지면 져서 우는 고시엔은 그야말로 순심으로 가득한 청춘의 눈물바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무대에서 한국계 고교가 우승을 했으니, 그것은 ‘사건’이 될 수밖에 없을 테지요.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고시엔에서 재일한인이 커다란 주목을 받은 일이 한번 있었습니다. 1981년 8월 21일 치러진 제63회 고시엔 대회의 결승에 나선 팀은 교토쇼교와 호토쿠가쿠엔이었는데요, 교토쇼교가 공격에 나섰을 때 전광판에는 ‘한유’와 ‘정소성’이라는 한국어 이름이 당당히 올라 있었던 겁니다. 이후 한 인터뷰에서 한유는 “본명으로 나와서 결승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편지를 세 박스 정도나 받았어요.”(오시마 히로시·‘재일코리안 스포츠 영웅 열전’·유임하 조은애 공역, 연립서가·2023)라고 증언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신이 1947년 재일한인들이 만든 교토조선중학교이며, 여전히 한국어 수업이 이루어지며 교가도 한국어인 학교가 아예 우승을 했으니 그 충격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더군다나 고시엔 대회는 공영방송 NHK가 일본 전역에 모든 경기를 중계하는 전통이 있는데요. 이번에는 교토국제고가 우승까지 하는 바람에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大和·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로 시작되는 한국어 교가가 자막과 함께 일본 열도에 여러 번 울려 퍼졌습니다. 수천 명에 이르는 응원단이 눈물범벅인 채 일어나 교토국제교 교가를 부르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마도 한국인으로서 감동을 받지 않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2021년 교토국제고가 처음 고시엔에 진출하여 한국어 교가가 NHK를 통해 일본 전역에 방송되었을 때는 일본 극우단체들이 협박을 하기도 했다는데요. 이번에도 일본의 야구 전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교토국제고의 한 선수는 “교가를 부를 때 ‘우리 저격당하는 거 아니야’라며 모두 걱정했다”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그러나 전광판에 한국어 이름이 올랐다는 것만으로 화제를 불러모으던 시대로부터, 한국계 학교가 아예 우승을 차지하게 된 시대로의 변모는 일본 사회 역시 적지 않게 변했다는 증거의 하나겠죠. 1999년 야구부를 창단한 교토국제고는 야구 특성화 학교라 할만한데요. 고교생 수는 138명인 이 학교에서 야구 선수는 무려 61명이라고 하네요. 한국계 학교에서 재일한인과 일본인이 함께 야구팀의 일원이 되어 고시엔에서 뛰는 모습은, 다가올 미래의 한 가지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9-02

바다 위에 떠 있는 신사(神社)를 찾아

지금까지는 히로시마와 관련해 원폭이나 전쟁에 관련한 이야기에 집중한 것 같습니다.그러나 히로시마는 아름다운 경치로도 유명한 곳인데요. 히로시마현을 일컬어 ‘일본의 축도(縮圖)’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로시마에는 일본 하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바다, 섬, 산, 평야 등이 모두 존재합니다.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인 ‘세토나이카이국립공원’(1934년 지정)의 중심지도 바로 히로시마현이며, 히로시마현에는 두 개의 세계문화유산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두 개의 유산 중 하나가 바다 위에 지어진 이쓰쿠시마신사(53B3島神社)인데요. 4월 27일 우리 일행이 향한 곳은 바로 이 신사입니다.이쓰쿠시마신사가 있는 히로시마현 남서부의 이쓰쿠시마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히로시마 시내에서 열차를 타고 35분 정도를 달려 미야지마구치역에서 내린 후에, 다시 페리로 갈아타고 10여 분 정도를 더 가야 합니다. 이 날은 미야지마구치역에서부터 수많은 일본인들로 발걸음을 떼어 놓기도 어려울 정도였는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날은 골든위크(황금연휴)로 불리는 긴 연휴의 첫 번째 날이었습니다.보통 4월 29일인 ‘쇼와의 날’부터 5월 5일 ‘어린이날’까지 이어지는 일주일이 넘는 연휴 기간을 일본인들은 ‘골든위크’라 부르며, 국내외로 여행을 떠나고는 하는데요. 2024년에는 토·일요일과 대체 공휴일까지 겹치는 바람에 골든위크가 무려 4월 27일부터 5월 6일까지 이어졌던 것입니다. 저희는 미처 그 정보까지는 확인하지 못한 채, 일본인들이 모두 여행을 떠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골든위크의 첫 번째 날, 일본 3대 절경(나머지 두 개는 교토의 아마노하시다테와 미야기현의 마쓰시마)의 하나로 꼽혀 평소에도 사람들로 붐비는 이쓰쿠시마에 간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가면 가장 이색적이면서도 가장 흔하게 접하는 것이 아마도 신사일 텐데요. 신사는 그야말로 일본인의 일상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대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초가 되면 유명 신사에는 수백만의 사람이 방문했다는 뉴스가 들려오기도 하고,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지날 때면 일본인들은 늘 신사에 가고는 하니까요. 이러한 신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사를 의미하는 옛날 단어가 ‘모리(森, 숲)’였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모든 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먼 옛날의 일본인들도 장엄하거나 아름다운 자연에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는데요. 그렇기에 사람들은 신성한 장소에 신전을 짓고 의례를 치르며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신사라고 합니다. 지금도 신사는 신성한 느낌을 주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경우가 많습니다.이쓰쿠시마의 자연은 아주 오래전부터 숭배의 대상이었는데요. 그 이유는 섬의 중앙에 자리한 해발 535m의 미센산(5F25山)이 지닌 능선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쓰쿠시마는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요, 수백만 년 동안 화강암이 풍화되며 연출된 장엄하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인하여,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은 이 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고 합니다. 그 결과 섬 전체가 ‘신의 섬’으로 신성시되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미센산의 능선이 마치 관세음보살이 누워 있는 모습에 비유되기도 했다고 하는군요.그랬던 이쓰쿠시마신사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크게 개축된 것은 1168년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의해서입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자신의 구미에 맞춰 천황을 갈아치울 정도의 막강한 실력자였는데요. 그는 당시 송나라와의 무역 거점을 하카타(후쿠오카의 일부)에서 오오다와토마리(고베의 일부)까지로 확장시켜 더욱 큰 부와 권력을 누리고자 했으며, 이 때 세토나이카이에 자리한 이쓰쿠시마신사를 해상활동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쓰쿠시마의 광장에는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지금도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페리에서 내려 이쓰쿠시마신사로 향할 때는, 수많은 관광객만큼이나 많은 사슴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는데요. 이쓰쿠시마에는 현재 약 500마리의 사슴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신사의 상징은 누가 뭐래도 바다 위에 떠 있는 붉은 색 도리이(鳥居:신사 입구에 세운 문)인데요. 무게가 60톤이나 나가며, 높이 16미터 둘레 10미터에 이르는 이 거대한 도리이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끌었습니다. 이 도리이를 제대로 촬영할 수 있는 포토 스팟에 서기 위해서는 길게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할 정도였습니다.이쓰쿠시마신사에는 일본의 신불습합(神佛習合, 일본 고유의 신앙과 불교가 융합되어 하나의 종교 체계를 이룬 것)이라는 종교적 전통을 반영하여, 수많은 불교 유산이 남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 날 우리는 점심으로 히로시마 특산의 장어덮밥을 먹었는데요. 독특하게도 이곳에서는 우나기(민물장어)가 아닌 아나고(바닷장어)를 사용하여 덮밥을 만들었습니다.가격은 우나기보다 저렴하면서도 담백한 맛은 오히려 나은 아나고덮밥과 함께, 이번 히로시마 답사는 조용히 저물어 갔습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8-19

야마토함, 스즈, 그리고 우장춘 박사

4월 26일 청일전쟁 당시 많은 군사시설이 설치되었던 히로시마 성을 떠난 우리 일행이, 히로시마의 명물 오코노미야키로 점심을 해결하고 향한 곳은 구레시(吳市)였습니다. 히로시마가 근대 일본의 육군도시로 유명한 곳이라면, 구레는 해군도시로 유명한 곳인데요. 히로시마에서 남동쪽으로 20㎞ 떨어져 있는 구레는, 히로시마에서 열차를 타고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해안가 도시입니다. 히로시마에서 구레까지 가는 열차에서 바라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의 풍경은 너무나 잔잔하여 마치 커다란 호수처럼 보였습니다.구레가 일본을 대표하는 해군도시로 성장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1889년 해군 진수부(해군 함대의 개장, 수리, 무장, 보급을 담당하는 후방사령부)가 설치되면서부터인데요. 구레에 진수부가 설치된 이유는 파도가 잔잔하고, 수심이 깊으며 입구가 넓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구레는 일본 해군과 함께 성장하였고, 일본에서 첫째가는 조선소가 건설되는 등 군사도시로서 크게 발전하는데요. 특히 구레는 일본이 본격적인 군국주의로 나아가기 시작한 만주사변(1931년) 이후부터 크게 발전합니다. 이후 수많은 함정, 항공기, 항공모함, 잠수함 등을 생산하였는데, 1937년부터 1941년 사이에는 매년 평균 일곱 척의 함정을 만들기까지 했다고 합니다.이처럼 일본의 최첨단 기술이 모였던 구레를 상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야마토함입니다. 당시 일본이 추구한 대함거포주의(大艦巨砲主義)의 상징이기도 한 야마토함은 실로 거대한 함포를 가진 큰 전함이었습니다. 야마토함의 길이는 263m이고 높이는 54m에 이르렀으며, 사정거리는 무려 42㎞에 이르렀습니다. 1941년에 완성된 야마토함은 당시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가장 큰 전함이었는데요. 일본이 국운을 걸다시피 하며 극비리에 만들었던 야마토함은 사실 그 존재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해전의 주역은 이미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옮겨가고 있었으니까요. 해전에서의 공격은 이전처럼 함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모를 떠난 비행기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야마토함의 군사적 효용은 그렇게 높을 수가 없었는데요, 더욱 허무한 것은 1945년 4월 7일 오키나와로 이동하던 도중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싸움다운 싸움도 못해보고 ‘불침함(不沈艦) 야마토’는 침몰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그러나 야마토함에 대한 일본인들의 향수는 대단한 것이어서, 구레시가 2005년에 건설한 구레시해사역사과학관(吳市海事歴史科学館)의 이름은 아예 ‘야마토 뮤지엄’일 정도입니다. 이 곳에서는 군항으로서 발전해 온 구레의 역사, 구레가 보유했던 제강과 조선 등의 기술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지만, 이곳의 주인공은 단연 야마토여서, 박물관의 현관에 해당하는 곳에는 야마토함을 10분의 1로 축소해 놓은 모형이 방문객을 맞이해 주었습니다.전쟁 당시 구레는 야마토함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대표적인 해군도시이자 공업도시이기도 했지만, 그런 이유로 해서 미군의 엄청난 공습을 받기도 했습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의 한 구석에서’는 히로시마에서 구레로 시집간 스즈라는 어린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전쟁 당시 구례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이 작품에서 스즈가 주로 하는 일은 전망 좋은 곳에서 바다 위에 떠 있는 전함을 바라보는 것과 공습경보가 울리면 대피호에 숨는 일입니다. 이러한 작품의 상황은 구레의 실제 역사적 상황에 그대로 부합되는 것인데요. 안타깝게도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조카 하루미는 즉사하고, 스즈는 오른손을 잃고 맙니다. 선량하기 이를 데 없는 스즈의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가 그림 그리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른손의 상실은 스즈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었을 겁니다. 이외에도 ‘이 세상의 한 구석에서’는 구레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데요. 스즈의 눈을 통해 바라본 구레 사람들은 대부분 해군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살아가고, 구레 시내는 당시의 군수경기로 인해 흥청망청하기도 합니다. 너무나 착하고 순박한 스즈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오른손을 잃고 수많은 가족을 잃습니다. 이런 스즈를 통해 바라본 2차 대전이란 죄없는 스즈(일본인)가 누군가(미군)에 의해 끊임없이 고통을 겪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아무리 스즈에게 감정이입을 하더라도, 이 전쟁 당시 ‘이 세상의 다른 구석’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에 의해 죽어갔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야마토 뮤지엄을 관람한 우리 일행은, 근처의 다른 해군 관련 전시관도 둘러보았는데요. 히로시마가 어떠한 군사시설도 없는 평화도시로 남은 것과 달리, 구레는 지금도 일본의 대표적인 군항도시로 남아 일본해상자위대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구레 답사를 마치고, 히로시마로 돌아오며 저는 미처 들르지 못한 곳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구레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1898-1959)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으로서, 우장춘은 구레중학교의 5회 졸업생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1857-1903)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도피한 인물이지요. 그가 1903년 고영근에게 암살된 곳도 바로 이곳 구레였으며, 우범선의 묘는 지금도 구례에 남아 있습니다. 우장춘은 말년에 홀로 귀국하여 조국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그런 공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우장춘이 죽기 3일 전에 문화포장을 수여하는데요, 우장춘은 그 훈장을 받고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우장춘의 눈물 속에는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았던 자신이 드디어 조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기쁨과 더불어, 아버지 우범선이 자신을 통해 조국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기쁨도 담겼었는지 모르겠습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