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대 정문에서 왼쪽으로 50미터 정도 걸어가면 고풍스런 강당이 하나 나옵니다. 정식 명칭은 ‘도쿄대학 교양학부 900번 교실’인데요. 1969년 5월 13일, 이 곳에서는 당시 일본의 사상지형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던 미시마 유키오와 가장 왼쪽에 있던 전공투(全学共闘会議) 학생들 사이에 토론이 펼쳐졌습니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미시마 유키오는 ‘국화’와 ‘칼’을 모두 쥔 ‘절대 천황제’를 주장했던 인물인데요. 이런 미시마를 초대하여 토론을 벌인 전공투는 권위주의 대학의 해체와 발본적인 혁명을 추구한 조직이었습니다. 기시 노부스케를 퇴진하게 한 ‘1960년 안보 반대 투쟁’이 “전후 민주주의의 수호”를 명분으로 내걸었다면, 대학 봉쇄와 운동 분파 간의 격렬한 폭력을 일으킨 ‘70년 안보 반대 투쟁’은 “전후 민주주의 비판”을 전면에 내세운 운동이었는데요. 미시마와의 토론회가 벌어졌을 때는, 전공투가 바리케이드를 쌓고 도쿄대를 점거한 상황이었습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가장 오른쪽에 선 자와 가장 왼쪽에 선 자들의 만남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요. 의외로 당시 기록을 담은 ‘토론 미시마유키오 VS 도쿄대 전공투(討論 三島由紀夫 VS 東大全共闘)’(신조사, 1969)에 따르면, 이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우호적이기까지 합니다. ‘900번 교실’ 앞에는 보디빌딩으로 단련된 털복숭이 상체를 수시로 드러내곤 하던 미시마를 ‘근대 고릴라’로 소개한 입간판이 놓여 있었고, 옆에는 고릴라 사육료가 100엔 이상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걸 보며 미시마와 학생들은 서로 웃음을 나누었다는데요. 인간이 웃으면서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애당초 이 토론은 사생결단식의 대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상적 지형의 양극에 서 있는 둘을 만나게 한 공통분모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기성 체제에 대한 분노와 부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전후 민주주의(평화주의)’로 일컬어지는 ‘일본의 기성 질서’에 대한 부정이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했던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이것은 미시마가 모두 발언에서 “나는 지금까지 일본 지식인들이 사상과 지식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만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지긋지긋하게 싫었습니다.”라며, “제군이 한 일들을 전부 긍정하지는 않지만 다이쇼 교양주의로부터 유래하는, 우쭐대는 지식인의 콧대를 꺾었다는 공적은 절대적으로 인정합니다.”라고 말하자, 학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미시마와 전공투의 차이란, 미시마가 의미와 가치를 묻지 않는 기성 정치 체제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다면, 전공투 학생들은 권위적인 대학체제와 마루야마 마사오와 같은 전후 지식인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 정도겠지요. 미시마가 주장한 ‘천황 친정’과 전공투가 주장한 ‘직접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가 중간 권력 구조의 매개물을 거치지 않고 국가의지와 직결하는 것을 꿈꾼다는 점에서도 유사합니다.
일본이 고도 경제 성장의 궤도에 오르고 평화로운 국가로서 재부상하면서, 미시마와 전공투 학생들은 오히려 삶에 대한 공허함과 무의미에 괴로워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미시마의 대표작으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금각사’(1956)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특징입니다. ‘금각사’는 미조구치라는 말더듬이 청년이 금박을 입혀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금각을 불태운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소설인데요. 흔히 이 작품을 ‘미에 대한 절대적 동경과 그로부터 비롯된 왜곡된 심리’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금각사’를 찬찬히 읽어보면, 오히려 인간에게는 불가능도 한계도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세계를 맘대로 바꾸려고 한 근대의 근본 원리(심리)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의식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근대(미조구치)’란 결국 그 어떤 ‘위대한 전통이나 아름다움(금각)’도 파괴하고 말 것이라는 미시마의 두려움이 작품의 저류에는 강하게 흐르고 있는 겁니다. 근대의 원리나 심성만이 전면화되면 예술도 정치도 불가능하게 된다고 미시마는 믿었던 것이 아닐까요?
1969년의 도쿄대 토론으로부터 1년 후에 미시마가 할복이라는 방식으로 삶을 마감했다면, 전공투는 3년 후에 아사마 산장 집단 살인 사건으로 사회적 죽음을 당합니다. 미시마는 “이대로 간다면 ‘일본’은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날이 갈수록 깊어진다. ”(지키지 못한 약속, ‘산케이신문’, 1970년7월7일)며 할복까지 했지만, 미시마의 죽음은 자신의 우려에 대한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많은 지식인들은 1970년 미시마의 자살과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일본의 ‘좌우’가 모두 몰락했으며, 결국 현상태를 수용하는 가치 부재의 시대가 펼쳐졌다고 말하는데요. 어쩌면 1969년 미시마와 전공투가 도쿄대 교양학부 900번 교실에서 나누었던 토론은 전후 일본의 마지막 사상투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