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일본의 고베와 오사카 지역을 강타한, 한신·아와지(阪神·淡路) 대지진이 발생한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본은 우리와 가까운 나라지만, 우리와는 달리 참으로 지진이 많은 나라인데요, 1995년 1월 17일 한신·아와지 지역에 발생한 진도 7.3의 강진으로 인해 무려 6500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오사카와 고베 지역이 일본 경제의 중심지인 만큼, 피해액도 당시까지로는 최대 규모인 약 10조엔에 이르렀습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 30주년을 맞는 일본에서는 여러 가지 행사가 펼쳐지고 있는데요. NHK의 장수 프로그램인 ‘100분 명저(100分de名著)’에서는 올해 1월 안극창(安克昌·1960-2000)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心の傷を癒すということ)’(1996)이라는 책을 다루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공동환상론’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같은 일본과 동서양의 고전을, 두 명의 진행자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나와 한 달 동안 다루는 교양 프로그램입니다. 그 권위 있는 방송에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한인 안극창의 저서가 다루어진 것인데요, 방송이 시작된 지 약 15년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 한인의 저서가 다루어진 것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이 처음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사람들의 마음에 가져온 충격과 이후 안극창이 현장에서 펼친 치료 활동을 기록한 일종의 르포르타주입니다. 이 책은 대지진이 발생한 직후, ‘피해지의 의료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31회 연재한 글들을 모은 책으로, 1996년에는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일본에서 고전의 지위를 확고히 한 것으로 보입니다. 1996년에 ‘고베 365일’이라는 부제를 달고 초판이 나온 이후, 2011년에는 ‘대재해 정신의료의 임상보고’라는 부제를 단 개정증보판이, 2019년에는 ‘대재해와 마음돌봄’이라는 부제를 단 신증보판이 계속해서 출판되고 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2020년에는 같은 제목의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이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일본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이라는 책뿐만 아니라, 안극창이라는 사람 자체가 정신과 의사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는데요. 일례로, 2022년에 일본의 대표적인 정신과 의사들을 다루는 ‘마음의 과학’이라는 학술 연구서 시리즈의 하나로, ‘안극창의 임상작법’이라는 책이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트라우마(심적 외상),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마음돌봄(心のケア) 등의 말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한신·아와지 지진이 발생한 1995년부터라고 합니다. 그러한 공론화의 한복판에 재일한인 안극창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안극창은 근무하는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담의 방문판매’라고 할 정도로 피난소 등을 열심히 찾아다니며 피해자들을 만났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겪은 일들을 신문에 연재까지 했던 겁니다. 그렇기에 그가 지진으로부터 5년밖에 지나지 않은 2000년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도, 이때의 과로가 원인이 되었을 거라고 짐작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본래 트라우마 연구로 유명했던 안극창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에서 대지진을 겪은 사람들이 PTSD에 시달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술했는데요. 피해자들이 겪는 과도한 각성, 사건의 재체험, 회피(의욕 부족), 부정적 인지나 기분 등의 증상이 대표적입니다. 이외에도 생존자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자책감, 그리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겪는 죄의식에도 주목했습니다. 피해자들이 겪는 증상 중에는, 안극창 본인도 겪은 일로서 지진 현장을 벗어나면 그곳을 현실이 아닌 환상처럼 느끼는 ‘리얼병’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안극창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사람들 사이의 연결이며, 그것은 바로 ‘함께 있다는 것’, 그리고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알아준다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는 많은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 누구도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야말로 치료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피해자가 외부의 공포와 위협으로부터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심리적 거처’입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마음돌봄은 진료실의 의사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나설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 것’, ‘심리적 거처’를 마련하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의 참여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극창은 누구도 혼자 방치되지 않고, 누구나 존중받는 사회야말로 품격 있는 사회라고 주장했습니다.
안극창이 재난을 당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토록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가 재일한인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재난은 사람을 한순간에 사회의 약소자로 만들기에, 재일한인으로 살아온 안극창은 그 누구보다 피해자들의 마음을 깊이 그리고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안극창은 자신의 출신을 숨기기 위해 ‘안(安)’이라는 본래의 성 대신 ‘安田’이란 일본 성을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사용했다고 합니다. 안극창의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헌신 뒤에는, 재일한인으로 살아온 그의 만만치 않은 삶이 놓여 있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