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앨범에는 중학교 3학년 때 소풍을 가서 찍은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관광버스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인데요. 자세히 보면 제 손에는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들려 있습니다. 어린 저는 윤동주를 읽으며, 나도 감히 문학을 한다면 윤동주처럼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제 문학의 출발에는 윤동주가 있었고, 문학이라는 길 위에 서 있는 지금도 윤동주는 변치 않는 ‘문학의 상징’입니다.
당연히 윤동주의 삶과 문학이 건네주는 감동은 저만의 것은 아닌데요. 사실 윤동주만큼 시공을 뛰어넘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문인도 드뭅니다. 윤동주의 시는 한국, 북한, 중국, 일본에서 모두 사랑받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중국, 일본에는 아름다운 시비가 세워져 있을 정도니까요. 윤동주의 그 고결한 삶을 앗아간 일본에서조차 윤동주의 문학은 수많은 일본인들의 영혼을 울리고 있습니다. 일본의 여러 곳에서는 지금도 윤동주에 대한 추모 모임이 열리고, 낭송회가 열리고, 답사 모임이 열리고는 합니다.
윤동주는 고작 27년 1개월을 이 지구별에 머물다 갔지만, 그처럼 동아시아의 다양한 공간을 두루 편력한 문인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윤동주는, 한반도의 평양과 서울에서 중학교와 전문학교를 다녔으며, 이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와 교토의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결국 후쿠오카의 차가운 형무소에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윤동주는 오늘날의 한국, 북한, 중국, 일본을 모두 중요한 삶의 공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제가 1년간 도쿄에 머물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계획한 일 중의 하나도 윤동주의 도쿄 내 행적을 따라가 보는 것이었습니다. 윤동주는 1942년에 한 학기 동안 릿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다녔는데요. 2025년 2월 16일은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2월 16일은 일요일이었기에, 저만의 조촐한 추도회를 갖는 심정으로, 이틀 앞선 2월 14일에 윤동주의 도쿄 내 흔적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윤동주가 도쿄에서 머무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다카노바바의 하숙집 터였습니다. 다카노바바에 윤동주의 하숙집이 있었다는 것을 가장 먼저 밝혀낸 이는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 야나기하라 야스코입니다. 수필가이기도 한 그녀는 윤동주의 릿교대 후배로서, 평생 동안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알리는데 헌신해 온 분인데요. 그녀의 조사에 따르면, 윤동주의 하숙집은 현재 일본점자도서관 근처에 있었다고 합니다. 과거 윤동주가 머물렀던 곳에 일본점자도서관이 생겼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단순한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윤동주가 영혼의 잉크로 써내려 간 시들은, 일제 말기 정신의 맹인들을 깨우치기 위한 점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윤동주의 작은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기대하며 한참을 서성였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건물이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윤동주가 한 학기를 다닌 릿교대학이었습니다. 윤동주의 하숙집이 있던 다카노바바에서 릿교대학은 대략 2.5킬로미터 정도가 떨어져 있었는데요. 스물여섯 살의 윤동주가 그랬던 것처럼, 릿교대학까지 직접 걸어가 보았습니다. 릿교대학에 도착했을 때, 고풍스러운 본관인 모리스관이 저를 맞아 주었는데요.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하여 자세히 보니, 담쟁이 덩굴까지 포함하여 윤동주가 공부한 연세대의 언더우드관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윤동주가 도쿄에 머물며 릿교대학에 다닌 때는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직후여서 참으로 분위기가 험악했습니다. 그것은 윤동주가 이 무렵 삭발한 모습으로 찍은 사진에서도 잘 드러나는데요. 야나기하라 야스코에 따르면, 릿교대학은 윤동주가 입학한 직후에 “전시체제에 맞추어서 질실강건(質實剛健)한 기풍을 진작하려는 목적”으로 학생들에게 삭발을 강요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릿교대학 본관 바로 옆에는 Mather Library 기념관이 있었는데요. 그 건물의 입구 바로 오른 편에는 윤동주가 릿교대학에 다니며 창작했던 다섯 편의 시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쉽게 쓰여진 시’, ‘봄’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다섯 편의 시는 친구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인데요. 이 시들은 윤동주가 지상에 남긴 마지막 작품들로서, 윤동주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편들입니다.
도쿄에서 윤동주는 조선(인)을 참으로 그리워했던 거 같습니다. “사랑하는 동무 박이여! 그리고 김이여! 자네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흐르는 거리’)라며 애타게 벗들을 불러보는가 하면, “봄은 다 가고·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사랑스런 추억’)며 애타게 과거의 자신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결국 윤동주에게 “육첩방은 남의 나라”(‘쉽게 쓰여진 시’)일 수밖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절절한 외로움 속에서 윤동주는 “홀로 침전”(‘쉽게 쓰여진 시’)하며 “슬픈 천명”(‘쉽게 쓰여진 시’)으로 주어진 시 쓰기에 열중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 속에서 윤동주는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쉽게 쓰여진 시’) 인류의 예언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세상 만물은 부서지고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맑고 투명하여 애처롭기까지 한’ 윤동주의 삶과 문학만은, 2025년 2월의 도쿄에서도 변치 않는 ‘젊음의 표상’으로 영원을 살고 있었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