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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

등록일 2025-02-03 18:55 게재일 2025-02-04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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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가 좋아했던 마들렌을 파는 시모다의 가게.
미시마 유키오가 좋아했던 마들렌을 파는 시모다의 가게.

제가 사는 숙소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고마바 공원 내에는 일본근대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일본 근대문학과 관련한 17만 점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는데요. 한국근대문학이 전공인 저는 이곳을 틈나는 대로 방문하고는 합니다. 일본근대문학관에서는 방대한 소장 자료를 바탕으로 정기적으로 기획 전시도 이루어지고, 문학전문가들이나 현역 인기 작가들의 따끈따끈한 강연회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2024년 11월 30일부터 2025년 2월 8일에 걸쳐서는 ‘미시마 유키오 탄생 100년제’가 개최되는데요. 너무나도 문제적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된 이 전시는 참으로 풍성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전시는 크게 ‘三島愛(미시마에 대한 사랑)’, ‘書物愛(책에 대한 사랑)’, ‘日本愛(일본에 대한 사랑)’의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三島愛’에서는 미시마가 지인들과 나눴던 편지, 서명이 들어간 헌정본, 명함이나 엽서 등을, ‘書物愛’에서는 아름다운 책에 대한 미시마의 관심과 그 결과로 탄생한 미시마 유키오의 멋진 책들을, ‘日本愛’에서는 미시마의 일본 사랑을 드러낸 자료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온 P대학의 K교수, K대학의 S교수와 일본근대문학관을 방문한 2025년 1월 13일에는, 전시와 함께 미시마 유키오 생의 마지막 6년 동안 너무나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시인 다카하시 무쓰로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문학관에서 다른 기획전시를 본 적이 있었지만, 다른 전시와는 달리 ‘미시마 유키오 탄생 100년제’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문학관이 꽉 찬 느낌을 줄 정도였는데요. 한국인에게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오에 겐자부로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익숙하지만, 일본에 머물면서 느끼는 실감으로는 보통의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미시마 유키오라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얼마 전 이즈반도 최남단의 시모다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갔을 때는, 미시마 유키오가 사랑했던 마들렌을 전면에 내세운 가게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작품은 물론이고, 충격적인 삶의 방식으로 정신의 광기를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사실 미시마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1925년 도쿄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황족과 귀족의 교육기관인 학습원을 수석 졸업하여 천황으로부터 직접 시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1947년에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엘리트 관료들만 간다는 대장성에서 9개월간 근무한 후에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요, 그는 숱한 명작을 발표하며, 일본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뜨거운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의 첫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미시마 유키오가 될 거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고 합니다.

‘미시마 유키오 탄생 100년제’를 알리는 포스터.
‘미시마 유키오 탄생 100년제’를 알리는 포스터.

이랬던 미시마 유키오가 행동의 광기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1970년 11월 25일, 할복이라는 엽기적인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 일을 말하는데요. 그는 자신이 조직한 사병단체 ‘방패회’ 회원 네 명과 자위대 총감실을 찾아가 총감을 인질로 잡고, 자위대원들을 연병장에 집합시킵니다. 그리고는 ‘절대 천황제’의 부활을 위해 자위대가 궐기할 것을 주장한 후에, 자위대 총감실에서 자살한 겁니다. 미시마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천황폐하 만세”였다고 하는데요.

이 충격적인 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한국인은 문학평론가 김윤식(1936-2018)이었습니다. 그는 도쿄대 연구원으로 일본에 도착한 3일 후에 도쿄대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TV 중계방송으로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하는데요.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김윤식은 다음 해에 곧바로 미시마의 죽음을 다룬 ‘정치적 죽음과 문학적 죽음’이라는 글을 ‘현대문학’(1971.5)에 투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이 글에서 김윤식은 미시마의 죽음이 “20여 년에 걸친 미국 점령 의식의 정신사적 극복의 의미”를 지닌다고 규정하였는데요. 이러한 ‘미시마식의 극복’이 패전 이후 경제 대국으로 새롭게 부상한 일본의 달라진 국제적 위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경재 숭실대 교수

미시마는 2차 대전 이후 일본은 정체성을 잃고 “무기적(無機的)이고 공허하며, 중성적인 중간색의 나라”(‘지키지 못한 약속’(산케이신문, 1970.7.7.)로 변질되어 간다고 판단한 거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막는 방법으로 미시마는 ‘문화방위론’(중앙공론, 1968.7)을 비롯한 여러 글이나 강연에서 ‘절대 천황제의 부활’을 주장했는데요. 미시마의 논의가 무엇보다도 경악스러운 것은 천황에게 ‘국화(문화)’는 물론이고, ‘칼(무력)’까지 쥐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미시마의 주장대로라면 자위대도 천황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건데요. ‘천황이 직접 군대를 총괄하는 일본’이란, ‘황군(皇軍)’의 군홧발 아래서 피눈물을 흘렸던 우리에게는 상상만으로도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미시마 유키오 탄생 100년제’에 참석한 일본인들로 북적이는 일본근대문학관을 둘러보는 시간은, 과거의 일본과 2025년의 일본이 놓인 거리(차이)를 강박적으로 재어 보는 일종의 시험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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