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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

등록일 2024-10-14 18:14 게재일 2024-10-15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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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본 최대의 코리아타운인 도쿄의 신오쿠보.

지난 번에는 관동대진재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며칠 전 학교 구내서점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특이한 제목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이용덕(李龍德)이 쓴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あなたが私を竹槍で突き殺す前に, 河出書房新社, 2020)라는 장편소설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근대에 들어 죽창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일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관동대진재 당시 죽창으로 많은 사람을 찔러 죽인 것으로 유명하죠. 당시 유언비어에 들려 있던 자경단원들은 칼, 창, 곤봉, 도끼, 심지어는 피스톨까지 동원해 조선인을 학살했습니다. 이때 가장 많이 사용한 무기 중의 하나가 바로 죽창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재일 한인 3세인 이용덕은 다른 글에서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라는 제목이 1923년 관동대진재 당시 이웃에서 함께 생활하던 재일 조선인을 학살한 역사적 사실에 바탕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더군요.

관동대진재가 재일 한인의 비극적 과거를 보여준다면, 이 작품은 재일 한인의 비극적 미래를 보여줍니다.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는 배외주의자들이 꿈꾸던 재일 한인에 대한 차별이 완전하게 실현된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디스토피아를 살아나가는 다양한 재일 한인들의 분투기가 이 작품의 기본 서사라 할 수 있는데요. 거대한 반격을 준비하는 가시와기 다이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한국으로 가는 박이화(야마다 리카), 냉소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양선명(스기야마 노리아키), 한국행 페리에서 몸을 던지는 마수미, 완력으로 차별에 맞짱을 뜨는 다우치 마코토(윤신), 배외주의자들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김마야, 동생의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각성에 이르는 김태수(기무라 야스모리)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400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에는 으스러진 뼈와 온몸을 철철 흐르는 피,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무서운 증오와 모멸의 헤이트 스피치가 빼곡한데요.

그러나 저에게 가장 끔찍하게 다가온 차별과 폭력은 마수미의 아버지가 체험한 것입니다. 마수미의 아버지는 우수한 엔지니어로 일본에 스카우트된 한국인이지만, 끝내 일본에서 견디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혹시 차별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과 공포가 지긋지긋했기 때문인데요. 그가 느낀 의심과 공포는 지극히 사소한, 그렇기에 일상에 편재한 것이었습니다. ‘병원 대기실에서 나보다 뒤에 온 사람이 먼저 진료실에 들어간 것은 혹시 차별 때문은 아닐까?’, ‘구청 직원의 냉정한 태도는 일본인에게도 똑같은 것일까?’, ‘한국식 이름을 밝힌 후 콜센터 직원의 태도가 변했다고 느끼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재일 한인끼리 간 식당의 음식은 과연 깨끗할까?’와 같은 의심과 불안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이기에, 떨쳐낼 수 없는 끈적함과 생생함을 동반하여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의 모든 것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이 상황이야말로, 그 어떤 폭력적인 장면보다도 저에게는 더욱 아찔하게 느껴지더군요.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다이치도 “제노사이드나 강제수용소의 반복만이 디스토피아가 아니야. 디스토피아는 지금이지”라며, “독가스 대신 단지 증오를 발산해서 공기를 더럽히고, 마이너리티를 숨막히게 하는 이 방법이야말로 새로운 학살법이야”라고 강변하기도 합니다.

이용덕의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 표지.
이용덕의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 표지.

과거라는 점과 미래라는 점을 연결하여 선을 그을 때, 그 중간쯤에 위치한 것이 현재라고 한다면, 관동대진재와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가 그려 보인 디스토피아의 중간쯤에 놓인 것이 아마도 재일 한인이 처한 현재의 상황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 현재는 결코 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을 텐데요. 이용덕은 몇몇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소설의 진정한 작가는 “시대(時代)”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가 말한 ‘시대’란 도쿄 신오쿠보 등에서 헤이트 스피치가 울려 퍼지던 2010년대 초반을 말합니다. 이러한 극우단체의 데모도 2016년 시행된 ‘헤이트 스피치 금지법’과 인종차별에 맞선 카운터 데모에 의해 현재는 극적으로 줄어든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 등에서는 재일 한인을 향한 차별적 발언이 유통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죠.

작품은 뜻밖의 상황으로 끝나며,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다이치의 계획대로 양선명, 김태수, 윤신 등이 목숨을 잃은 후에, 그 죽음과는 무관하게 갑자기 한일 해빙 무드가 연출되며 재일 한인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는 겁니다. 그것은 한일 공동의 적이 탄생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요. 서아프리카에 파견된 자위대가 습격을 받는 일이 발생하고, 이때 한국군이 자위대를 원조합니다. 이를 계기로 한일정상회담이 열리고, 대표적인 코리아타운인 오사카의 츠루하시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교류 이벤트가 성황을 이룰 정도로 화기애애한 상황이 펼쳐지는군요.

이제 헤이트 스피치는 재일 한인이 아닌 이슬람교도들을 향하게 됩니다. 거리에서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배외주의 운동이 펼쳐지고, 그 군중 속에는 태극기를 들고 있는 자와 일장기를 들고 있는 자가 공존합니다. 심지어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어깨동무를 하기도 하는군요. 한국인과 일본인이 어깨동무를 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바로 제 3의 적이었던 겁니다. 어쩌면 이용덕이 ‘당신이 죽창으로 나를 찔러 죽이기 전에’를 통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늘 적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슬픈 본성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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