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를 위해 도쿄에 머물면서, 제가 연구실 다음으로 많이 방문하는 곳은 아무래도 진보초 헌책방 거리입니다. ‘간다고서점연맹’에 가입된 서점만 127개에 이르는 진보초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헌책방 거리인데요.
이렇게 많은 헌책방이 한 곳에 모이게 된 이유는, 이 곳이 책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의 동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853년 미국의 페리가 이끄는 함대가 내항한 이후, 막부는 서양학문을 취급하는 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이로 인해 진보초 근처에 1855년 ‘요오가쿠쇼(洋学所)’가 만들어지고, 이것은 이후 ‘요오쇼시라베쇼(洋書調所)’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메이지 정부 출범 이후 도쿄의과대학과 합병하여 도쿄대학이 됩니다.
이후 근방에는 1873년에 도쿄외국어학교가 탄생하고, 뒤이어 메이지대학, 주오대학, 센슈대학, 니혼대학 등의 전신이 되는 학교가 잇달아 개교하였던 겁니다. 학생들의 동네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근처에는 공부를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서점이 밀집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세계 최대 헌책방 거리인 진보초의 탄생 배경입니다.
진보초에서는 책만 파는 것이 아니라 일년 내내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지는데요. 특히 가을이면 열리는 ‘간다헌책마츠리’는 올해로 64회를 맞이하며, 일본인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유명한 축제입니다. 올해는 10월 25일부터 11월 4일까지 열렸는데요.
이 때는 수많은 고서점들이 가판대를 설치하여, 꼭꼭 숨겨두었던 희귀본들을 싼값에 일반에 공개하고는 합니다. 축제 기간 동안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어 비장의 책을 찾는 모습은 도쿄의 명물인데요. 저도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보물같은 책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올해 제가 건진 최고의 수확은, 1970년대 초에 한국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던 ‘朝鮮文学の会(조선문학의회)’라는 단체에서 번역하여 출판한 ‘現代朝鮮文学選(현대조선문학선) 1’(創土社, 1973)입니다.
11월 23일부터 24일까지는 이틀에 걸쳐, ‘K-BOOK 페스티벌’이 펼쳐지기도 했는데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11시에 출판그룹빌딩에 도착했을 때는,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빌딩 주위로 길게 줄을 서 있을 정도로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이 행사에서는 한국문학 번역 관련 시상식도 있었고, 한국의 유명 시인 작가들의 대담 행사도 펼쳐졌습니다.
올해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인해 그 열기가 예년보다 더욱 뜨거웠는데요. 행사장의 한 쪽에는 한강 작가의 책들과 한강의 문학세계를 한국문학사의 맥락에서 짚어낸 전시물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날의 주인공은 일본에 번역된 한국문학 관련 책들이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46개 출판사가 참가하여, 한국문학 관련 서적을 판매하고 있었는데요. 어느새 한국문학도 진보초, 나아가 일본 문화의 한복판에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에는 한국에서 온 스무 명의 작가, 시인들과 함께 ‘한·일 작가 교류회’가 열리는 쇼가쿠칸(小學館) 출판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일본 문학인들과의 교류회가 있었는데요. 이 자리에서 무엇보다 저를 흥분시킨 일은 나카가미 겐지의 딸인 나카가미 노리를 만난 것입니다. 나카가미 노리는 에세이스트이자 소설가로 유명한데요.
나카가미 노리는 소설가 나카가미 겐지의 딸이기도 합니다. 마흔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나카가미 겐지는 ‘곶’이나 ‘고목탄’으로 유명하지만, 저에게는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문학적 동지라는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오는 작가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나카가미 겐지가 죽었을 때, 이제 일본근대문학은 끝났다며 본격적인 문학비평을 그만두기도 했으니까요.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면, 나카가미 겐지 이후의 일본 소설이란 로맨스에 불과하며, 심지어는 에도시대(1603-1868) 이야기로의 퇴행이라고까지 합니다.
교류회가 끝난 이후에는, 관계자 분들의 안내를 받아 헌책방을 구경했는데요. 지금까지 여러 번 둘러본 헌책방 거리이지만, 이전에는 못 가본 귀한 곳에 가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는 가게는 1882년에 설립된 ‘오야쇼보오(大屋書房)’였습니다. 현재 창업자의 4대 후손이 운영하는 이곳에서는, 에도 시대와 메이지기의 일본 책, 오래된 지도, 우키요에 판화 등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었는데요. 강의실에서 말로만 듣던(혹은 하던) 도카이 산시의 ‘가인지기우(佳人之奇遇)’(1885-1897)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学問のすすめ)’(1872-1876)과 같은 책의 초판본을 볼 수 있었습니다. 150여 년 전의 이 책들을 직접 보니, 책이라는 물성이 내뿜는 아우라(원본에서 느껴지는 고상하고 독특한 분위기)가 만만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독서대국으로 일컬어지는 일본이지만, 현재는 서점의 수도 최전성기에 비해 3분의 2로 줄었고, 심지어는 일본인의 절반 이상은 1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책의 위기는 일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닌 모양입니다. 그러나 책이 지닌 고유한 힘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 책도 활자문화도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생각(기도)을 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