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일은 오후부터 조선학회의 발표가 시작되지만, 저는 나라 관광을 좀 더 하기로 했습니다. 나라(奈良)의 그 많은 관광지를 남겨두고는 학회의 발표가 귀에 들어올 거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일본에서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호류지(法隆寺)였습니다. 14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호류지는 무려 200개 가까운 국보와 중요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대표사찰이죠. 호류지의 금당, 오중탑, 중문 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기도 한데요. 전날 야쿠시지의 동탑과 금당 등을 보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면, 호류지의 오중탑과 금당을 보았을 때는 그 고색창연함으로 인해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호류지가 저를 잡아끈 이유는 고대 한반도와의 관련성 때문입니다. 이곳에는 명칭에 ‘백제’가 들어가 있는 백제관음상과 한떄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고 알려졌던 금당 벽화가 있는데요.
다행히 백제관음은 일반에 공개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반론도 많지만, 백제관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에는 분명 백제관음상이 “백제에서 온 것”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령 백제관음상이 ‘백제계 도래인이 만든 것’이거나, ‘백제의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라는 의미더라도, 이 불상이 한반도와 갚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검게 변해 있는, 높이 2미터의 백제관음을 보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일본에서 보아온 불상과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의 백제관음상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간 수많은 선조들의 기대와 슬픔을 모두 품어 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겁니다. 저는 고구려 승려 담징의 흔적도 찾아보려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어디서도 그 발자취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감정을 추스르고 절을 나와 지도앱를 보았을 때 근처에 고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0분 정도를 걸어서 도착한 후지노키 고분은 전날에 본 전방후원분과는 달리 우리에게도 익숙한 원분이었습니다. 이 고분에서는 금동제 왕관이나 신발 등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곳에서 나온 유물 역시 한반도와의 관련성을 드러내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제 머리 속에서는 전날에 이어 계속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관계에 대한 상상의 날개가 한껏 펼치지고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전철을 타고 나라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사슴이 많기로 유명한 나라공원으로 향했는데요. 처음 간 곳은 연못에 비치는 높이 50미터의 오중탑으로 널리 알려진 고후쿠지(興福寺)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오중탑은 수리중이어서, 탑도 그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30개가 넘는 국보와 중요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는 국보관이 저의 아쉬움을 달래 주었습니다.
그 많은 보물 중에서도 아수라입상(阿修羅立像)과 용등귀입상(龍燈鬼立像)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는데요. 8세기 전반에 만들었다는 아수라상은, 아름다운 서양 여성의 모습으로서, 21세기 헐리우드 영화에 출연해도 어색하지 않을 거 같았습니다.
13세기 초에 제작된 용등귀입상은 악귀가 등롱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었는데요, 한껏 폼을 잡고 있지만 훈도시(일본의 남성 속옷) 차림의 악귀는 아무리 보아도 무섭다기보다는 익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자애로운 모습의 불상만 보아온 저에게는 모두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들른 도다이지(東大寺)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명제를 잠시 잊어야 할 거 같았습니다.
일단 절의 면적부터 야구장 50개가 들어갈 만큼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주불로 모셔진 비로자나불은 손바닥 크기 하나가 2.5미터에 이를 정도였으며, 그 불상을 모신 대불전 역시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었으니까요. 이 절은 크기로 승부를 보겠다는 듯이, 절의 정문인 남문도 높이 25미터가 넘는 일본 최대의 산문(山門)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이수이엔(依水園)이라는 정원에 갔는데요, 이 곳은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전원(前園)과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후원(後園)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 정원으로서, 연못 주위를 거닐며 즐기는 양식이었는데요.
인상적이었던 것은 도다이지 남문이나 와카쿠사산 같은 주변 풍경을 정원 경관의 하나로 끌어온 차경(借景)이 매우 빼어났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어디를 가나 외국인 관광객이 많고, 그 중에서도 나라(奈良)에는 더 많았지만, 그 나라(奈良)에서도 이수이엔에는 정말로 많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어쩌면 세계공용어는 영어가 아니라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수이엔을 나왔을 때는, 아직 햇빛이 뜨거운 오후 4시였는데요. 그런데도 저는 큰 전투라도 치른 군인처럼 무척이나 지쳐 있었습니다. 호류지의 고색창연함과, 고후쿠지의 화려함과, 도다이지의 거대함과, 이수이엔의 세련됨에 아마도 몹시나 숨이 찼던 모양입니다.
잠시 앉아서 쉬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기적처럼 조선 백자가 그려진 미술관의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수이엔 바로 옆에 있는 네이라쿠(寧樂)미술관의 포스터였는데요.
이 미술관은 한중일의 고미술품 수천점이 수집돼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저는 구원이라도 얻은 양, 급하게 그곳으로 가 우리의 도자기들을 찾았는데요. 그제서야 비로소 저는 고국에 있는 지인들처럼 반가운 청자와 백자의 우아함과 담백함과 영롱함과 투명함 속에서, 편안한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