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는 니가타항을 떠나 북한으로 간 재일교포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10만여 명에 이르는 이들은 북한행 편도 표만을 가지고 니가타항을 떠난 사람들인데요. 일본에는 왕복표를 가지고 니가타항과 북한을 오고간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귀국 교포’의 가족이 그 주인공입니다. 양영희는 ‘귀국 교포’의 가족이라는 정체성을 창작 원천으로 삼아 활동해 온 영화감독입니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김일성주의자로서, 아버지 양공선은 조총련 오사카 본부의 부위원장과 오사카조선학원의 이사장까지 역임한 정치적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제주 4.3의 처절한 비극을 피해 오사카로 밀항하여 조총련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양영희의 부모는 세 명의 아들 모두를 ‘귀국 교포’로 북한에 보냈는데요. 이 때 오빠들의 나이는 각각 만 열네 살(중학생), 열여섯 살(고등학생), 열여덟 살(대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양영희도 ‘조선인 부락’으로 유명한 오사카 이카이노(현 이쿠노구)에서 태어나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랐으며, 이후 도쿄에 있는 조선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양영희의 다큐멘터리 3부작(‘디어 평양’(2005), ‘굿바이, 평양’(2009),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극영화 ‘가족의 나라’(2012), 장편소설 ‘조선대학교 이야기’(2018), 산문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2022)는 모두 이러한 자신의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그녀는 니가타항에서 북송선에 오른 오빠들을 배웅한 이후에도, 여러 번 만경봉호를 타고 니가타항과 북한의 원산항을 오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렇기에 ‘귀국 교포’와 그 가족의 삶에 대한 재현에 있어, ‘당사자 서사’에 가장 가까운 서사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양영희입니다.
최근에 발표된 산문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는 ‘귀국 교포’의 북한 생활이나 일본에 남겨진 가족들의 삶이 매우 밀도 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귀국 교포’의 삶은 결코 만만치 않았는데요. 이와 관련해 이 산문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북한에 간 아들들의 사진을 처음 받아보고 어머니가 보이는 반응입니다. 오빠들은 처음 평양과 원산에 위치한 ‘총련 간부 자녀 합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합니다. 오빠들은 처음부터 편지에 음식을 보내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했는데요, 정치적으로 신실한 어머니는 “되도록 현지인과 같은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라”며 음식 대신 약품이나 학용품 정도만을 보냅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한 오빠들의 빼빼 마른 사진을 본 엄마는, 너무나 놀라 그 사진을 찢어 버리고는 소리 죽여 흐느낍니다. 이후에는 음식이 될 만한 것은 뭐든지 가리지 않고 소포에 꾹꾹 눌러 담아서 보내기 시작하는군요.
무엇보다 ‘귀국 교포’들의 안타까운 삶은 큰오빠의 삶에 가장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님의 환갑에 바치는 청년 축하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간 큰오빠는 클래식 음악과 해외 명작들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비판을 받고, 자기비판을 강요당하고, 감시당하고, 미행당했으며, 결국에는 우울증과 조울증에 시달리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죽고 맙니다.
그런데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는 ‘귀국자’라는 신분이 북한 사회에서 반드시 핍박과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 드러나 흥미롭습니다. 둘째 오빠는 아들 둘을 낳은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곧 새로운 아내 정순과 결혼하여 딸 선화를 낳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내는 병으로 선화가 다섯 살일 때 죽고 맙니다. 둘째 오빠는 “당분간 재혼하고 싶지 않다. 정순이 같은 멋진 여자는 다시 없을 거다”라고 공언하지만, 오빠의 바람(?)과는 달리 정순이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혼담은 물밀 듯이 들어오는군요. 이러한 인기는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정기적으로 생활비와 애정이 가득 담긴 소포가 온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실제로 어머니의 평생 과업은 북한에 있는 세 아들과 그 가족들에게 온갖 방법으로 물건과 돈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정신이 온전치 않게 되어서야 비로소 “송금 걱정”에서 해방됩니다.
또한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는 재일교포들이 북한에 갈 수밖에 없었던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드러나 있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양영희에게 몇 번이나 해준 이야기에는 젊은 시절 당한 테러의 경험도 있습니다. 젊은 어머니는 외할머니와 하얀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오사카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요. 이때 모르는 남자가 갑자기 다가와 잉크를 온몸에 뿌립니다.
외할머니가 분노에 몸을 떨며 호통을 치지만 그 범인은, 오히려 “조선인이 건방지게!”라는 말을 내뱉고는 사라져버리는군요. ‘조선인’을 차별하는 이러한 분위기는 양영희 세대에도 여전한 것으로 그려집니다. 양영희의 아버지는 멀쩡한 교사일을 그만두고 예술가가 되겠다는 딸을 향해, “일본에서 조선인이 어떻게 예술을 하니. 라디오나 TV에 나갈 수나 있다니? 꿈같은 소리 마라. 동네 사람들, 우리 딸이 미쳤어요!”라고 소리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대우도 받지 못하고, 사회적 성공도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수많은 재일교포들은 북송선을 탔던 것입니다. 영화감독 박찬욱은 어디에선가 양영희는 가족 이야기를 “계속 우려먹고 우리는 계속 곱씹어야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양영희의 가족 이야기에 식민지와 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의 현대사는 물론이고, 가족, 개인, 이데올로기, 국가 등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모두 담겨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박찬욱의 ‘계속 우려먹고 계속 곱씹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양영희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보다도 북에 남은 두 명의 오빠와 그 가족은 안녕한지, 그들의 후일담이 너무나 궁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