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히로시마와 관련해 원폭이나 전쟁에 관련한 이야기에 집중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히로시마는 아름다운 경치로도 유명한 곳인데요. 히로시마현을 일컬어 ‘일본의 축도(縮圖)’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로시마에는 일본 하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바다, 섬, 산, 평야 등이 모두 존재합니다.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인 ‘세토나이카이국립공원’(1934년 지정)의 중심지도 바로 히로시마현이며, 히로시마현에는 두 개의 세계문화유산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두 개의 유산 중 하나가 바다 위에 지어진 이쓰쿠시마신사(<53B3>島神社)인데요. 4월 27일 우리 일행이 향한 곳은 바로 이 신사입니다.
이쓰쿠시마신사가 있는 히로시마현 남서부의 이쓰쿠시마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히로시마 시내에서 열차를 타고 35분 정도를 달려 미야지마구치역에서 내린 후에, 다시 페리로 갈아타고 10여 분 정도를 더 가야 합니다. 이 날은 미야지마구치역에서부터 수많은 일본인들로 발걸음을 떼어 놓기도 어려울 정도였는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날은 골든위크(황금연휴)로 불리는 긴 연휴의 첫 번째 날이었습니다.
보통 4월 29일인 ‘쇼와의 날’부터 5월 5일 ‘어린이날’까지 이어지는 일주일이 넘는 연휴 기간을 일본인들은 ‘골든위크’라 부르며, 국내외로 여행을 떠나고는 하는데요. 2024년에는 토·일요일과 대체 공휴일까지 겹치는 바람에 골든위크가 무려 4월 27일부터 5월 6일까지 이어졌던 것입니다. 저희는 미처 그 정보까지는 확인하지 못한 채, 일본인들이 모두 여행을 떠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골든위크의 첫 번째 날, 일본 3대 절경(나머지 두 개는 교토의 아마노하시다테와 미야기현의 마쓰시마)의 하나로 꼽혀 평소에도 사람들로 붐비는 이쓰쿠시마에 간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가면 가장 이색적이면서도 가장 흔하게 접하는 것이 아마도 신사일 텐데요. 신사는 그야말로 일본인의 일상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대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초가 되면 유명 신사에는 수백만의 사람이 방문했다는 뉴스가 들려오기도 하고,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지날 때면 일본인들은 늘 신사에 가고는 하니까요. 이러한 신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사를 의미하는 옛날 단어가 ‘모리(森, 숲)’였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모든 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먼 옛날의 일본인들도 장엄하거나 아름다운 자연에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는데요. 그렇기에 사람들은 신성한 장소에 신전을 짓고 의례를 치르며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신사라고 합니다. 지금도 신사는 신성한 느낌을 주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쓰쿠시마의 자연은 아주 오래전부터 숭배의 대상이었는데요. 그 이유는 섬의 중앙에 자리한 해발 535m의 미센산(<5F25>山)이 지닌 능선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쓰쿠시마는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요, 수백만 년 동안 화강암이 풍화되며 연출된 장엄하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인하여,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은 이 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고 합니다. 그 결과 섬 전체가 ‘신의 섬’으로 신성시되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미센산의 능선이 마치 관세음보살이 누워 있는 모습에 비유되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그랬던 이쓰쿠시마신사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크게 개축된 것은 1168년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의해서입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자신의 구미에 맞춰 천황을 갈아치울 정도의 막강한 실력자였는데요. 그는 당시 송나라와의 무역 거점을 하카타(후쿠오카의 일부)에서 오오다와토마리(고베의 일부)까지로 확장시켜 더욱 큰 부와 권력을 누리고자 했으며, 이 때 세토나이카이에 자리한 이쓰쿠시마신사를 해상활동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쓰쿠시마의 광장에는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지금도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페리에서 내려 이쓰쿠시마신사로 향할 때는, 수많은 관광객만큼이나 많은 사슴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는데요. 이쓰쿠시마에는 현재 약 500마리의 사슴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신사의 상징은 누가 뭐래도 바다 위에 떠 있는 붉은 색 도리이(鳥居:신사 입구에 세운 문)인데요. 무게가 60톤이나 나가며, 높이 16미터 둘레 10미터에 이르는 이 거대한 도리이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끌었습니다. 이 도리이를 제대로 촬영할 수 있는 포토 스팟에 서기 위해서는 길게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쓰쿠시마신사에는 일본의 신불습합(神佛習合, 일본 고유의 신앙과 불교가 융합되어 하나의 종교 체계를 이룬 것)이라는 종교적 전통을 반영하여, 수많은 불교 유산이 남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 날 우리는 점심으로 히로시마 특산의 장어덮밥을 먹었는데요. 독특하게도 이곳에서는 우나기(민물장어)가 아닌 아나고(바닷장어)를 사용하여 덮밥을 만들었습니다.
가격은 우나기보다 저렴하면서도 담백한 맛은 오히려 나은 아나고덮밥과 함께, 이번 히로시마 답사는 조용히 저물어 갔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