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3일 니가타현립대학에서 한국근대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발표와 토론으로 녹초가 되다시피 한 저희 일행은, 저녁에 니가타 시내로 이동하여 만찬에 참석했습니다. 이날의 만찬은 이광수 연구의 권위자인 하타노 세츠코 선생님이 주최하신 것인데요. 니가타 전통 요리를 파는 그곳의 음식은 하나같이 정성스럽고 맛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한밤중까지 이어진 심포지엄 뒷담화로 2월 23일의 밤은 그렇게 조용히 저물어 갔습니다.
24일은 오전 11시에 비즈니스 호텔 로비에서 만나 해산하는 것이 유일한 일정일 정도로, 여유로운 날이었는데요. 아침 일찍 조식을 먹은 저는 니가타 시내와 바닷가를 산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침 연구년을 맞아 도쿄의 센슈대학에 와 있는 K대학의 A교수가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었는데요. 저희는 일본에서 가장 긴 강인 시나노가와의 강변을 걷기도 하고, 그 강 위에 놓인 아치 여섯 개의 아름다운 반다이바시를 건너기도 했습니다.
니가타가 한국문학 전공자에게 문제적으로 다가오는 대목 중의 하나는, 니가타가 북·일간의 교류에 있어 일본측 창구였다는 사실입니다. 재일교포 북송사업 당시 수많은 재일교포들이 ‘지상낙원의 부푼 꿈’을 안고 북송선을 탔던 곳이 바로 니가타입니다. 오늘날 북송사업은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려던 북한의 이해와, 재일교포를 부담스러워하던 일본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그러나 2006년 7월 북한의 장거리 로켓 시험 발사를 이유로 북한 선박의 일본 입항이 금지된 이후에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니가타항과 북한을 오고 가는 배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북송사업의 현장지휘소 역할을 하던 조총련 니가타현 본부 및 조국왕래기념관을 찾아갔을 때, 그곳은 셔터가 내려진 채 거의 폐건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을씨년스러운 그 풍경은 현재 북·일간의 삭막한 관계를 대변하는 듯 보였는데요. 1959년부터 시작된 북송사업은 1984년까지 총 186차례에 걸쳐 9만3340명이 이주한 그야말로 대사업이었습니다. 과연 ‘사회주의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겠다는 벅찬 꿈을 안고, 니가타항을 떠났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북한에서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한 이경자의 장편 ‘세번째 집’(문학동네, 2013)은 북송교포들의 후일담을 전해주는 귀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김성옥으로 이어지는 김씨 3대의 이야기를 통해, 지난 100여 년에 걸친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펼쳐낸 역작인데요. 할아버지(정남), 아버지(대건), 성옥의 삶을 대표하는 단어는 각각 ‘조센징’, ‘귀국자’, ‘탈북자’입니다. 정남은 징용을 당해 후쿠오카 탄광에 보내졌는데요. 해방 이후 일본에 남아 가정을 이뤄 대건을 낳습니다. 대건(가네다 다이켄)은 와세다대까지 졸업한 엘리트지만 일본 사회가 부과한 ‘조센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 1967년 니가타항에서 북송선을 타는데요. 안타깝게도 김대건은 북한에서 ‘조센징’이라는 굴레를 벗는 대신 ‘귀국자’라는 새로운 굴레를 뒤집어쓰고 맙니다. 대건의 딸로 북한에서 태어난 성옥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탈북하여 남한에서 ‘탈북자’로 살아갑니다.
‘세번째 집’에서는 성옥 가족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콧김을 쐰 경험”을 의미하는 ‘귀국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북한 사회에서 받는 고통과 차별이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실수로 동네에 불이 났을 때도, 성옥은 보위부에 끌려가 “토대가 나빠서, 성분이 안 좋아서 어린아이가 남의 소먹이를 다 태운 거”라는 얼토당토 한 이야기를 들어야 할 정도입니다. 성옥은 “귀국자라는 말이 얼마나 지독한 덫인가를” 인민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귀국자’라는 말만 들어도 지겨울 지경에 이릅니다.
대건은 평소에 “오리는 오리끼리 만나야 한다”며, 성옥에게 연애 상대로 “귀국자를 만나라”는 말을 습관처럼 해왔는데요. 실제로 보위부장의 아들인 철이와 성옥은 연애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결국 철이 부모의 반대로 둘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이후에도 성옥은 도자기 공장 작업반에 다닐 때, 아버지가 비행군관학교 교수인 토대 좋은 남자의 청혼을 받기도 하는데요.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찾아온 남자에게 대건은 “자네 아버지에게 허락받고 와. 그럼 내가 허락해주지”라고 냉소적으로 대답합니다. 대건의 예상대로 그 남자의 아버지는 “귀국자에 비당원의 자녀와는 혼인할 수 없다”며 성옥과의 결혼을 분명하게 반대하는군요.
결국 북한에 온 초기에는 ‘사회주의 조국 건설’을 위해 성실하게 생활하던 대건도, 귀국자에 대한 차별로 인하여 술만 찾는 냉소적인 인물로 변하고 맙니다. 물론 대건과 그 가족의 삶이 10만 여명에 이르는 모든 북송교포들의 삶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수많은 자료와 증언들은 북송교포들의 삶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00여 명의 동포를 싣고 북한의 청진항을 향해 니가타항을 떠났던 1959년 12월 14일의 바다는 무척이나 소란스러웠을 테지만, 그로부터 65년이 지난 이날의 바다는 너무나 조용하여 쓸쓸하기까지 했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