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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코쿠헨로를 아시나요?

등록일 2024-04-29 18:41 게재일 2024-04-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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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테지 뒷산에 있는 고보다이시 석상.

1월 28일부터 1월 31일까지 이루어진 이번 마쓰야마 학술기행은, 일본고전문학을 전공한 Y교수가 자신의 전공과 밀접하게 관련된 시코쿠헨로(四国遍路) 학술답사를 계획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흔히 오헨로(お遍路)라 불리기도 하는 시코쿠헨로는 시코쿠섬에 위치한 88개 사찰을 참배하는 순례길을 말하는데요. 전체 거리는 1450㎞에 이르며, 보통 걸어서는 40일 정도가 걸리는 그야말로 길고 긴 순례길입니다.

88개의 사찰은 모두 일본의 고승인 고보다이시(弘法大師, 774-835년)와 관련돼 있는데요. 고보다이시는 시코쿠에 있는 지금의 가가와현에서 태어나 장래가 보장된 엘리트 코스를 밟아 나가다가, 어느 날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합니다. 그는 이후 당나라에 유학하여 2년간 불교를 더욱 깊이 있게 공부하고 돌아와 전설적인 고승이 되는데요. 진언종을 창시한 고보다이시는 수많은 사람들을 제도하다 고야산에서 입적합니다.

저와 C교수는 미리 시코쿠에 도착하여 88개 사찰을 답사하던 Y교수와 1월 28일에 마쓰야마 공항에서 만난 것입니다. 우리 일행은 마쓰야마의 여러 곳을 돌아보던 중, 시코쿠헨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미를 지닌 이시테지(石水寺)를 함께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이시테지는 728년에 쇼무 천황의 요청에 따라 창건되었으며, 오랜 역사를 가진 진언종의 대표 사찰입니다. 1318년에 지어진 니오몬(仁王門)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이외에도 본당, 삼층탑, 종루 등의 국가중요문화재가 산재한 명찰인데요. 시코쿠 88개 사찰 중에서는 51번째에 해당하는 사찰이기도 합니다.

시코쿠헨로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요, 그 중의 하나는 헤이안 시대 오늘날 에히메현의 호족이었던 에몬 사부로가 순례길을 떠난 것에서 시작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전설은 저희 일행이 방문했던 이시테지(石水寺)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에몬 사부로는 부자이며 권세도 있었지만, 탐욕스럽고 포악했다고 하는데요. 어느 날 자신의 집을 찾아온 승려에게 자선을 베풀기는커녕, 그만 대나무 빗자루로 승려의 발우를 여덟 조각으로 부숴 버렸다고 하는데요. 그날 이후로 사부로가 애지중지하던 여덟 명의 자식들은 차례로 죽어나갔고, 뒤늦게 사부로는 자신이 박대했던 승려가 바로 고보다이시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큰 충격을 받은 사부로는 대사에게 사죄하고자 시코쿠헨로를 시작합니다. 다행히도 사부로는 순례길에서 대사를 만나지만, 이미 중병에 걸린 사부로는 “다음 생애에는 고노 가문에 태어나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뜻을 대사에게 밝히고 죽습니다. 이에 대사는 돌을 주워 거기에 ‘에몬 사부로’라 새겨 사부로의 손에 쥐어주었다고 하는데요.

절 입구의 에몬 사부로 석상.
절 입구의 에몬 사부로 석상.

이듬해 그 지역의 부유한 집안인 고노 가문에 한 남자아이가 태어나고, 신기하게도 그 아이는 꽉 쥔 오른손을 펴지 않습니다. 당황한 아이의 부모는 안요지(安養寺)를 찾아가 기도를 올린 후에야 아이의 손을 펼 수 있었는데요. 거기에는 ‘에몬 사부로’가 선명하게 새겨진 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인요지라는 절은 에몬 사부로 이야기에 따라 ‘돌의 손’이라는 뜻을 가진 이시테지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는데요.

이시테지에는 이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절 입구에서부터 에몬 사부로의 석상이 세워져 있고, 절의 박물관에는 설화 속의 돌이 전시돼 있습니다.

시코쿠헨로를 대표하는 슬로건은 ‘동행이인(同行二人)’입니다. 1450㎞의 길을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의미인데요. 이 때 누군가는 말할 것도 없이 고보다이시입니다. 이와 관련해 이시테지에서는 멀리서부터 사람들의 눈을 한눈에 사로잡는 거대한 조형물이 하나 있었는데요.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경재 숭실대 교수

절이 자리한 뒷산 정상에 있는 고보다이시의 석상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놀랍게도 이 조형물은 전체 높이가 16m이며, 얼굴 길이만 2.4m, 붓 길이는 3m에 이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산의 정상에 있기에 더욱 웅장하게 보이는데요. 고보다이시의 몸은 그가 유학했던 중국의 시안(西安)을, 얼굴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향해 있다고 합니다. 이 거대한 고보다이시 석상은 이시테지로부터 3㎞ 떨어진 마쓰야마성에서도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요즘 전세계적으로 순례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오늘 소개한 시코쿠헨로 이외에도 일본의 구마노고도, 포르투갈의 파티마, 스페인의 산티아고, 미국의 세도나 등에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사람들이 영혼의 갈증에 시달린다는 증거겠지요. 본래 여행이란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갔다가, 그 곳에서 새로운 힘을 얻어 다시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는 인간의 오래된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일상의 질서와는 확연히 다른 신성과 신비로 가득한 성지를 다녀오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는 궁극의 여행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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