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3일에는 니가타현립대학에서 ‘한국근대문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언어·이동·미디어’라는 주제로 국제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이 행사에는 한국근대문학을 공부하는 연구자들이 동아시아 각지에서 모였는데요. 학계의 말석에 있는 저도 발표자의 한 명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들뜬 마음으로 2월 22일 아침에 인천공항으로 향했던 저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전날 밤부터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인천공항에도 많은 눈이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비행기는 날아 오르지 못했고, 제가 타기로 했던 니가타행 비행기도 활주로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예정된 시간보다 무려 5시간이 지나서야 인천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이미 니가타에서는 사전행사가 진행중이었기에, 공항에서나 비행기에서나 제 마음은 불안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니가타 공항에 도착한 저는 요금이 비싸기로 소문난 일본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로 향했는데요. 공항에서 오랫동안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중요한 일정에도 참여할 수 없었기에 제 마음은 소금밭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이 새로운 즐거움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요. 이유는 택시를 타고 가면서 니가타현의 맨살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니가타현은 쌀로 너무나 유명한 곳이죠. 생산량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고시히카리처럼 맛이 좋은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시내를 벗어나자부터 나타난 넓은 논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던 1시간 남짓한 시간은, 단 하나의 표지판도 없이 왜 니가타가 쌀 생산량 일본 1위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맛있는 쌀과 깨끗한 물이 풍부한 니가타현의 자연조건은 일본의 전통주인 사케를 만들기에도 적합해서, 니가타현에는 일본에서 가장 많은 양조장이 존재합니다. 그래서인지 니가타의 번화가에는 폰슈칸이라는 주류판매점이 있어, 사케 자판기에 동전만 넣으면 100여 종류가 넘는 사케들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해가 다 져서야 도착한 숙소는 야히코 신사 옆에 있는 오래된 료칸이었는데요. 삼나무가 가득한 신사와 눈에 쌓인 주변 풍경은 저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속 세계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 유명한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나라였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夜の底が白くなった。)”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설국’의 배경인 ‘눈의 나라(雪國)’가 바로 니가타현인 것입니다.
제가 머물던 미노야 료칸과 그 주변의 풍경은 소설 ‘설국’의 실사판 같았는데요. 물론 ‘설국’의 무대는 니가타현의 에치고유자와 온천이지만, 제 마음에는 ‘설국’에 나오는 “산골짜기는 어두워지는 것도 빨라서 벌써 으스스하게 황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흐릿한 어둠으로 아직도 서쪽 해가 눈에 반사되면서 먼 산들이 소리 없이 다가오는 듯했다”나 “마을의 강기슭, 스키장, 신사 할 것 없이 곳곳에 흩어진 삼나무 그루들이 거뭇거뭇하게 눈에 띄기 시작했다”와 같은 문장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야히코 신사와 그 주변을 둘러싼 커다란 삼나무, 그리고 2024년의 마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너무나도 조용하여 쓸쓸하기까지 한 마을의 풍경이 저를 ‘설국’의 세계로 데려간 것입니다.
‘설국’에서 부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글이나 끄적이며 사는 시마무라는 눈의 나라에서 게이샤 고마코와 소녀 요코를 만납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통과하여 만난 사람들인 만큼, 두 여인은 이승에는 있을 것같지 않은 신성과 모성과 여성을 체현한 신비스러운 존재인데요. 시마무라는 이들 여인과 조용하지만 농밀한 감정의 드라마를 펼쳐 나가지만, 결국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인해 그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하얀 순백의 공간에 펼쳐진 새빨간 불의 이미지로 가득한 마지막 장면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펼쳐 보인 탐미의 절정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는데요. 그 섬세한 감각의 아름다움 속에서는 죽음마저도 새로운 느낌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저는 ‘설국’을 읽을 때마다,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시마무라도 고마코도 요코도 아닌 ‘눈(雪)’이라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유년기에 부모, 누나, 조부모의 죽음을 겪으며 천애고아로 성장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이 세계란,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천변만화하는 인간의 삶이란 결국 무라는 허무에 불과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기에 가와바타가 그려내는 세계의 주인공은 언젠가는 ‘녹아 없어질 눈’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설국’이 창작되던 시기(1935년 연재를 시작하여 1948년 완성)가 일본의 무한확장을 추구하던 천황제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니가타현을 배경으로 펼쳐진 탐미와 감각의 세계는 시대를 향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식의 절규는 아니었을까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