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 고문
여의도에서는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 옳고, 그르고, 잘잘못을 칼로 가르듯 나누는 서초동과는 다르다. 정치에서는 완승이 아니라 타협과 상생을 도모하고, 지향한다. 그런데 타협과 상생은 사라지고, 진실을 감추는 탈진실만 남았다.고(故) 장자연 씨의 동료로 알려진 윤지오 씨는 거액을 모금해 캐나다로 달아났다. 윤 씨의 말에 권위와 신뢰를 얹어준 건 안민석 민주당 의원이다. 재판 중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총선을 압승으로 이끌고,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최대의 승리를 거뒀다. 민주당의 양문석·김준혁 당선인은 당에서 거들어 줄 수 없을 정도로 논란에 휩싸였지만 너끈하게 당선됐다. 유권자에게도 진실보다 정치적으로 누구 편이냐가 중요하다.정보가 전달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이런 변화가 가속됐다. 숙고하고, 사실을 확인해 전달하는 전통 미디어는 상대적으로 느리다. 인터넷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만큼 영향력이 줄었다. 사실을 확인하지도, 책임을 지지도 않는 일인 미디어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오죽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기자회견이나, KBS나 MBC 같은 공영 방송도 아니고, 유튜브 개인 방송을 불러 인터뷰하고, 억울함을 호소했겠는가.현직 대통령이 공영 방송보다 유튜브를 찾은 것은 일대 사건이다. 대통령이 국정 장악력을 잃었다는 간접증거고, 전통 미디어가 신뢰는 물론 영향력도 잃어버렸다는 선언이다. 이미 팩트 체크는 의미가 없고, 미디어도 우리 편이냐, 아니냐부터 따진다는 말이다.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8년 전 후보로 나왔을 때 뉴욕타임스나 CNN 같은 전통적인 대표 미디어들을 ‘가짜 뉴스’라고 낙인찍었다. 그러고는 트위터(현재 X)를 통해 자기주장을 공개했다. 트럼프의 복잡한 사생활은 지금도 시빗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모두 가짜 뉴스(fake news)라고 몰아세웠다. 성공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됐다.지지자들은 열광했다. 심지어 2021년 1월에는 트럼프가 대통령 연임에 실패한 뒤, 의회가 이를 인증하지 못하도록 의회를 점령하는 난동까지 부렸다. 미국 같은 민주주의 선진국에서. 군중을 자제시키기는커녕 자극한 트럼프 책임이 크다.진실은 묻혔다. ‘트럼피언’(트럼프 지지자)의 진실과 일반 미국인의 진실이 달랐다. 트럼프의 극렬 지지자들인 ‘MAGA’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는 노골적인 거짓말이 난무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진실도, 거짓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사회로 변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2016년 올해의 단어로 ‘post-truth(탈진실)’를 선정했다.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사람들은 추측을 쏟아내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책임은 지지 않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제 다시 재선을 노린다.민주주의 선진국인 미국의 탈진실 상황은 세계 시민을 경악하게 했다. 미국이 저 지경인데, 우리는…. 그해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겪었다. 사드 배치와 관련해 민주당 의원들은 “강력한 전자파 밑에서 내 몸이 튀겨질 것 같아, 싫어”라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 후쿠시마 오염수 괴담으로 수산물시장이 된서리를 맞았다.조국 대표의 법무부 장관 임명 검증을 계기로 불거진 갈등은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각각 촛불 군중집회로 세 대결을 벌였다. 대한민국이 서로 다른 세상으로 쪼개졌음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 분열의 틈바구니에서 ‘공정’이라는 시대 정신이 선택한 사람이다. 그 역시 부인 문제에서는 진실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정치는 억지를 부린다. 결코 승복하는 법이 없다. 정치권이 논란을 벌이면 끝까지 평행선이다. 언론도 정리하지 못한다. 진실을 알아도 반론권을 줘야 한다. 정치적 적대자들에게 기계적으로 공평한 기회를 준다. 진실이나 거짓이나 꼭 같은 시간과 지면을 준다. 심지어 스스로 어느 한 진영에 서는 미디어도 있다. 이런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허상을 깬다는 게 명분이다. 정말 혼돈의 시대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