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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고요?

김진국 고문 제3지대 창당이 한창이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개혁신당’(가칭),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새로운미래’(가칭), 민주당 탈당파 의원들은 ‘신당미래대연합’(가칭)을 만든다고 한다. 빅텐트나 선거연대, 합당 등 여러 가지 시나리오도 나온다.4월 10일이 총선이다. 석 달도 안 남았다. 선거를 앞두면 신당들이 우후죽순 나온다. 그러나 이번 신당들은 선거용 뜨내기 정당이라기엔 비중이 크다. 당대표를 하던 사람들이 쫓겨나다시피 해서 새 당을 만든다.새 당이 파괴력은 있을까. 선거 판도에 미칠 영향은 크다. 몇백 표만 쪼개도 당선자가 달라진다. 그렇지만 과거 양김씨가 민한당(1980)에서 신민당(1985), 신민당에서 통일민주당(1987)을 만들어 기존 정당을 공중 분해한 사례와는 많이 다르다. 통일민주당에서 김대중 고문이 평화민주당(1987)을 만들어 분당한 것과도 비교할 수는 없다. 그만한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다.이준석 개혁신당 정강정책위원장에게 일정한 지지 세력이 있지만, 뚜렷한 지역 기반은 없다. 국회의원 선거는 특정 선거구에서 1등을 해야 선출된다. 소선거구제라서 그렇다. 비례대표 의원도 소수정당에 돌아갈 몫이 없다. 현행대로 준연동형에 위성정당이 등장하면 거대 정당이 독식한다. 그 이전의 병립형으로 돌아가도 큰 차이가 없다.이낙연 전 총리도 호남 기반을 기대할 수 있지만, 현재로선 전망이 밝지 않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과 갈라선 새천년민주당이 호남 기반이었다. 그러나 호남에서도 참패했다. 전남에서 5석, 비례대표 4석을 얻는 데그쳤다. 호남 유권자들은 전략적 투표에 익숙하다. 그나마 기대할 건 총선이 호남 안에서 민주당과의 경쟁이라는 점이다. 또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어떻게 발전하느냐다. 총선은 몰라도 차기 대선은 시간이 많다.그러나 이런 시나리오들도 나중 일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선거법이다. 선거법이 제3당의 설 자리를 결정한다. 선거법도 확정하지 않고, 예비후보를 등록하고, 공천기구도 출범했다. 앞뒤가 바뀌었다. 이런 중요한 규칙을 정리하지 않고 뭉개는 건 거대 정당의 횡포다.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서울지역 유효투표의 53.5%를 얻었는데 의석은 83.7%(41석)를 가져갔다.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은 41.9%를 얻었지만, 의석은 16.3%(8석)만 가져갔다. 경기도에서도 53.9%를 얻은 민주당이 51석(86.4%), 41.1%를 얻은 미래통합당이 7석(13.7%)을 가져갔다. 유권자의 뜻과 달리 더 이득을 보는 당과 손해를 보는 당이 생긴다. 소선거구제의 취약점이다.연동형은 이런 점을 보완하고, 각 정당이 얻은 표에 비례해 국회도 구성하려는 제도다. 소선거구제에서는 한 표라도 더 얻은 후보가 당선된다. 나머지 후보들에게 던진 표는 모두 사표(死票)다. 당선을 뒤집을 순 없지만, 비례대표 후보까지 몰아주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총선에서 거대 양당은 위성정당을 만들어 비례대표 후보까지 다 먹어 치웠다. 재벌급 부자가 위장 이혼해서, 재산이 한 푼도 없다고 주장하며 극빈자에게 돌아갈 구호 물품까지 싹쓸이 해 간 꼴이다.지난 대선 때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비례대표제를 왜곡하는 위성정당을 반드시 금지하겠다. 피해를 본 정당들에 다시 한번 깊은 유감을 표한다”라고 말했다. 위성정당 방지조항을 넣은 연동형을 공약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 연말 이 대표는 “이상적인 주장으로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거법 개정은 손 놓고 있다.지역구와 관계없이 정당투표만으로 비례대표 의석을 나누는 ‘병립형’도 아니고, 지난 총선처럼 역비례를 가져올 위성정당을 강행할 가능성을 열어놨다. 거대 양당의 ‘탐욕’이다. 정치를 어떻게 탐욕으로 하나. 정치인에게 ‘공정’은 입에 발린 말이긴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탐욕을 드러내도 되는 건가. 우리 정치가 어디까지 추락하려는 건지 걱정이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1-14

주가 조작이 아니라 명품백이 문제다

김진국 고문 ‘김건희 특검법’이 총선 쟁점으로 등장했다.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는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이던 시절부터 상대 당의 표적이었다. 정치판에서 가족은 좋은 공격 소재다. 역대 대통령들도 가족이 공격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문재인 전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는 ‘버킷 리스트’ 의혹으로 비난받았다. 옷과 장신구도 구설에 올랐다.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에 대한 수사는 참담한 비극으로 끝났다.부인이 근신해도 다른 가족이 표적이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은 ‘소통령’으로 불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임기 중 세 아들이 모두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다. 권력자 가족의 사생활은 호기심의 대상이다. 가끔 드러난 단편적인 언행이 갖은 추측과 왜곡으로 부풀려져 전파된다. 그렇다고 국민을 탓할 수는 없다. 권력자 가족의 멍에다. 더구나 그들의 언행은 자칫 국가안보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김건희 특검법’의 첫 번째 쟁점은 ‘선거용’이냐, 아니냐다.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반대해 늦어졌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특검 기간은 4·10 총선 선거운동 기간과 정확하게 겹친다. 법안대로 야당이 추천한 특검이 수사하고, 공개 브리핑을 계속하면, 특검이 선거판을 압도할 게 뻔하다.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야당 후보 정치자금 수사를 중단시켰다. 공권력의 개입이 국민 선택을 왜곡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민감한 수사 내용을 연일 발표하면 후보는 보이지 않고, 피의자만 보이게 된다. 정책은 뒷전이고, 수사에서 드러난 가십이 술안주가 될 게 뻔하다. 공정한 선거라 말하기 어렵다.더구나 민주당은 재표결을 2월 이후에 하자고 한다. 공천에서 탈락한 국민의힘 소속 의원의 동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결국 국민의힘이 물갈이 공천을 방해하는 것이고, 선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그러면 특검 수사를 받을 만한 일인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은 윤 대통령이 결혼(2012년 3월)하기 전에 일어났다. 문 정부에서 2년간 수사했다. 윤 대통령이 ‘식물 검찰총장’으로 손발이 묶인 상태라 일방적으로 봐줬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조금의 의심마저 털어내려면 특검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선거 직전이어야 하는가는 의문이다.특검 찬성 여론이 높은 건 김 여사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그렇지만 주가조작에 큰 관심이 없다. 문제는 김 여사에 대한 불신이다. 언행이 너무 가볍다. 김 여사는 대선을 앞두고 2021년 9월 서울의 소리 기자와 전화로 온갖 이야기를 다 했다. 대통령 선거 직전인 22년 1월 그 녹취록이 보도돼 윤 후보와 선거캠프를 당혹하게 했다. 21년 12월 김 여사의 대국민 사과마저 무색해졌다.김 여사는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취임한 지 4개월만인 22년 9월 또다시 서울의 소리가 쳐놓은 덫에 걸려들었다. 비열한 함정 취재다. 그렇다고 김 여사의 언행이 용서되는 건 아니다. 조작이건 아니건, 왜 명품 가방을 받았나. 더 기가 막힌 건 그자리에서 한 이야기다. “통일사업을 같이 하자”니. 영부인이 관여할 영역이 아니다. 더구나 정체도 의심스러운 사람과 사담(私談)으로 할 이야기인가.‘쥴리’라는 모욕적인 공격까지 받은 김 여사는 억울한 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김 여사의 언행은 국민에게 더 큰 실망을 안겼다. 앞으로 어떤 언행이 갑자기 튀어나올지 불안하다. 김 여사는 이미 사인이 아니다. 잘못하면 개인이나 집권당뿐만 아니라 국가에 부담을 준다. 제2부속실을 당장 만들어, 김 여사가 공적 영역에서 투명하게 움직이게 도와야 한다.특검이 선거용이라고 의심하면, 선거 뒤에 하면 된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언급했다 거둬들였지만 하나의 대안이다. 그래야 거부권 행사를 변명할 수 있다. 특별감찰관 임명도 미룰 이유가 없다. 대통령 가족을 통제하지 못하면 심각한 재난이 된다. 특히 김 여사가 스스로 자신을 던져야 길이 생긴다. 진심을 담아 사과부터 해야 한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1-07

지혜와 생명의 청룡처럼 도약하자

김진국 고문 새해 아침 동해에 해가 솟아올랐다. 갑진(甲辰)년의 시뻘건 해가 구름 낀 동해를 박차고 힘차게 떠올랐다. 2024년은 희망의 해다. 2023년까지도 절반은 코로나 팬데믹에 갇혀 있었다. 이제 답답하던 마스크를 벗은 뒤 처음으로 새해를 맞는다. 가슴을 활짝 펴고, 일출을 볼 수 있게 됐다.갑진년은 푸른 용[靑龍]의 해다. 십이지 가운데 진(辰)은 용을 나타내고, 십간에서 갑과 을은 오행 중 청색이다. 동쪽과 나무를 상징한다. 나무는 오행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생명이다. 그래서 생명이 움트는 봄을 나타낸다.용은 용감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지치지 않는 추진력을 가진 전설 속 동물이다. 그중에서도 청룡은 살아 있는 나무와 생명, 봄의 기운을 안고 있어 창조적인 생각과 아이디어,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 청룡의 기운을 받아 2024년에는 대한민국과 독자 여러분 모두 하늘 높이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물론 청룡의 기운만 믿을 수 없다. 모두 우리가 하기에 달렸다. 60갑자를 되돌려 보면, 1964년 갑진년에 한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한·일 회담 반대 시위로 전국이 들끓었다. 서울에는 계엄령이 내려졌다. 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결정된 것도 이 해다.청룡은 도전적이고, 추진력이 강하지만, 그런 점이 독선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전쟁과 갈등의 화약 냄새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60갑자를 한 번 더 되돌리면 1904년. 그해에 러·일전쟁이 터졌다.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열강의 마지막 힘겨루기였다. 청·일 전쟁에 이어 또다시 이기면서 일본은 한반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열정과 도전은 큰 성취를 가져다줄 수도 있지만, 잘못된 길을 걸으면 추락하는 원인이 된다.올해도 외부 환경이 밝기만 한 것이 아니다. 안보 위협은 여전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연말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유사시 핵무력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수단과 역량을 동원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계속 박차를 가해 나가야 하겠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핵보유국이지만, 일부 지역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할 정도로 경제는 엉망이다. 드러내놓고 연평도에 포를 쏘는 무모한 정권이 어떤 도발을 할지 알 수 없다.국제 환경도 녹록지 않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미국과 중국,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도 우리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 국내에는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개혁 과제들이 쌓여 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국가적 과제에 대한 고민과 토론은커녕 소모적인 정쟁에 몰두한다.다음 세대가 희망을 품으려면 가장 먼저 청년 취업률부터 개선해야 한다. 일자리가 더 필요하다. 세계 최저수준인 합계출산율 0.78명은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유발하는 요인이다. 인구가 소멸하고, 지방이 소멸한다. 연금 고갈 시기를 앞당긴다. 그런데도 개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다행인 것은 올해가 포스트 코로나의 경제 활기를 만들어낼 기회라는 점이다. 미국에서도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고, 고금리 기조에도 변화가 있다.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잘 살리고 기회로 만드느냐는 우리 손에 달렸다.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다. 링컨의 지적대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다. 중요한 국가 어젠다를 선정하고, 여론을 만드는 것도 국민이다. 정치가 잘 되건 못되건 일정 정도 우리 책임이다. 우리가 비난하는 정치인을 선출한 것이 바로 우리다.국민이 정치에 개입하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수단이 선거다. 선거는 포퓰리즘에 휘둘릴 위험도 크지만, 이런 과제를 해결하고, 전진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미국과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도 올해 대통령선거가 있다. 우리는 4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인기 없는 정치도 우리가 만들었다. 변화와 안정, 새로운 도약은 우리 손에 달렸다. 이번에는 정말 잘 뽑아야 한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1-01

다시 ‘이인제’를 만들 건가

신당 얘기가 계속 나온다. 집권당에서도, 야당에서도, 분당(分黨)과 신당(新黨)이 유행병처럼 퍼진다. 넉 달도 안 남은 국회의원 선거가 실감 난다. 선거를 앞두고는 정해진 순서처럼 신당 바람이 분다. 정당이 공천할 자리가 한정돼 있는데,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은 넘쳐나기 때문이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떳다방’처럼 창당 바람이 분다.요즘 신당은 그보다 심각하다. 공천장을 받기 위한 대안 정당 정도가 아니다. 내부 갈등으로 양대 정당을 쪼개려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말했지만, 선거판이 그렇다. 득표 비율로 의석을 나누는 정당 비례투표나, 연동형 선거라면 각자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소선거구제에서는 양대 정당이 의석 대부분을 차지한다.피부에 확 와닿는 사례가 있다. 이인제 전 경기지사가 출마한 1997년 15대 대통령선거다. 이 전 지사는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졌다. 그러나 그는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만들어 출마했다. 김대중 후보가 40.27%를 얻어 38.74%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39만 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때 이인제 후보는 19.20%, 492만여 표를 얻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이인제 전 지사가 경선에 승복했다면 결과는 달라졌다. 이인제 후보는 이회창 후보 표를 가져갔다.1987년 13대 대통령선거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다들 김영삼·김대중, 양 김 씨가 단일화했으면 정권 교체했다고 믿는다. 또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이재명 후보를 0.73%(24만7천77 표) 차이로 눌렀다. 이때 심상정 정의당 후보(2.37%)나 허경영 국가혁명당 후보(0.83%) 표가 이재명 후보에게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국회의원 선거는 더 하다. 특히 수도권은 1천표 이내로 승부가 갈리는 곳이 많다. 쪼개나가면 당선은 안 돼도, 떨어지게는 할 수 있다.민주당에서도 쪼개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낙연 전 대표는 지난 13일 SBS에 출연해 ‘신당 창당, 진짜로 할 거냐’라고 묻자, “예”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이 방향은 확실하다”라고 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당을 1인 체제로 굳혔다. 다음 대통령선거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지난 대선에서 경쟁한 이낙연 전 대표의 기반을 깡그리 없애고 있다. 이낙연 전 대표 쪽 사람은 총선에서 공천받기 어려울 전망이다. 오죽하면 이낙연 전 대표는 “당이 몰아낸다면 받아야지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했다.그러나 이낙연 전 대표와 가까운 의원들도 탈당은 주저하고 있다. 탈당하면 어떻게 될지 너무나 잘 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만들었을 때 일부 호남 의원들이 새천년민주당으로 독립했다. 하지만 2004년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호남에서도 참패했다. 새천년민주당은 사라졌다.호남 유권자들은 영남과 다르다. 전략적 투표에 익숙하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호남 유권자들은 안철수 대표의 국민의당을 압도적으로 밀었다. 그러나 이듬해 19대 대통령선거 때는 문재인 후보를 더 밀어 당선시켰다. 2022년 대통령선거 때도 막판까지 안철수 후보에 미련을 가졌지만 결국 이재명 후보로 몰아줬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줄곧 영남 출신 후보를 데릴사위로 삼았다. 영남 정치인을 ‘호남 후보’로 만들었다.영남 유권자들은 직선적이다. 인구가 더 많다. 선거구도 더 많다. 그러나 아주 적은 표 차로 승부가 갈리는 수도권은 다르다. 대체로 보수정당이 열세다. 그런데 여기에 전체 의석의 절반이 걸려 있다. 자기 지역에서처럼 기분대로 하려면 정권을 넘겨야 한다. 집권하고 싶으면 호남 유권자처럼 전략투표까지는 아니라도 세력을 넓히는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한다. 비주류, 중도 세력을 끌어안는 건 기본이다.이준석 전 대표도 연말에는 신당을 만들 듯이 바람을 잡고 있다. ‘싸가지없다’고 진저리치는 사람이 많다. 대체 인물을 키우지 못한 집권당의 업보다. 선거가 코앞이다. 거저먹을 순 없다. 또다시 ‘이인제’를 보지 않으려면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2-17

집권 후반기는 안정될 수 있을까

김진국 고문 국회의원 선거가 꼭 4개월 남았다. 내년 4월 10일이 22대 총선이다. 내일부터 예비후보자 등록을 할 수 있다. 예비후보가 되면 합법적인 선거운동이 가능하다. 이제 현수막이 숨이 막히게 나붙게 된다.그런데도 아직 예비후보들이 출마할 선거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난 5일 선거구획정위원회는 253개 선거구획정안을 김진표 국회의장에게 제출했다. 전체 지역구 수는 고정해놓고, 인구에 맞춰 조정한 정도다. 그런데 선거구가 줄어든 지역 의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관련 법 개정안을 내고, 법을 고쳐서라도 선거구 축소를 막겠다고 한다.선거일 1년 전에 선거구 획정 등 선거와 관련한 기본 규칙을 정하도록 공직선거법에 못 박아놨다. 그런데 소용이 없다. 선거 때마다 한 달여를 앞둔 시점에 선거법과 선거구를 확정했다. 그러니 예비후보 등록과 실제 출마 선거구가 바뀌기도 한다. 선거구는커녕 선거법의 큰 틀도 합의하지 못했다. 소선거구제로 한다는 원칙만 세웠지,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 비율을 어떻게 할지, 비례대표를 어떻게 뽑을지 논란만 벌인다.현행 선거법은 거대정당들이 국민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인 추한 경험을 안고 있다. 선거제도에서 ‘연동형’은 유권자의 투표와 정당이 차지하는 의석이 비례하도록 배분하기 위해 고안됐다. 21대 총선에서 정당 득표율은 더불어민주당 33.4%,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33.8%, 정의당 9.7%다. 그러면 국회에서 각 정당이 차지하는 의석도 득표 비율에 비례하게 나누어 갖도록 하자는 것이다.지역별로 1등과 2등의 표 차가 매우 다르다. 영호남처럼 1등과 2등의 차이가 큰 선거구가 있는가 하면, 서울·경기에서는 1천 표 이내의 적은 표 차로 당락이 갈린다. 당선자는 3분의 1 득표로 당선되고, 절반 이상의 유권자가 자기표의 가치를 얻지 못한다. 이런 경향이 비슷하다 보니 서울에서 지역구 후보가 얻은 표는 민주당 53.5%,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41.9%였지만, 실제 얻은 의석수는 민주당 41석(83.7%), 미래통합당 8석(16.3%)이었다. 경기도에서도 민주당은 53.9% 득표로 86.4%(51석)의 의석을 얻었다.이 결과를 보면 어떤가. 국민의힘이 연동형을 하자고 하는 것 아닌가. 정당투표에서 얻은 표(33.8% 대 33.4%)를 보면 국민의힘이 민주당을 이겼다. 완전한 연동형이라면 국민의힘이 원내 제1당이다. 그러나 비례 의석을 줄이고, 그 중에서도 연동되는 비례 의석은 더 줄여 ‘준연동형’으로 바꾸었다. 더구나 위성정당을 주도함으로써 사실상 제 발등을 찍었다. 탄핵을 몰아붙이는 3분의 2에 가까운 민주당 의석은 국민의힘이 만들어준 꼴이다.연동형은 군소정당이 목을 매는 제도다. 어떻게든 원내에 진출하기 위해서다. 정작 선거법에 결정권을 가진 양대 정당은 부정적이다. 자기 의석을 줄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양대 정당에서 목소리가 큰 텃밭 출신 의원들은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는 압박 요인이 있는 연동형을 싫어한다. 연동형의 효과를 높이려면 비례 의석을 늘릴 수밖에 없고, 인구가 줄어드는 지역구는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사실상 개인적인 정치적 계산들이다. 포장만 그럴듯하게 한다. 윤석열 정부가 곤욕을 치르는 건 선거법 협상에 실패한 결과다. 지금도 국민의힘 지도부는 환상을 판다. 소선거구제로, 비례 의석을 줄이고, 연동형을 배제한 병립형으로 과반수를 차지한다고 선전한다.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선거법 협상과 관련해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했다. 현행 준연동형으로 가서 위성정당을 만드는 여지도 열어뒀지만, 그보다는 국민의힘과 손잡고 병립형으로 가자는 속셈이다. 20대 총선과 같은 제도다. 국민의힘이 자체 분석한 서울 판세는 21대 총선(41곳 중 8곳 당선)보다 더 어렵다(6곳 우세).위성정당을 막지 못하면 21대 총선꼴이 된다. 그러나 위성정당만 막는다면 윤석열 정부 후반기가 더 안정될 수 있다. 국민의힘은 과반을 얻어 독주한다는 환상보다, 야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않도록 막는 게 더 다급한 현재 판세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2-10

예측 실패가 아니라 리더십 실패다

김진국 고문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실패가 충격을 주었다. 여러 나라가 경쟁하는 일을 놓치는 경우야 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충격’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는 것은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필자는 엑스포를 유치하지 못한 것은 별로 실망하지 않는다. 애초에 유치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기대를 과도하게 부풀린, 그래서 엉뚱한 예측과 외교 활동에 헛심을 쏟은 정부의 행태가 더 걱정이다. 외교적 발언이 횡행하는 국제무대에서 정확한 예측을 하는 건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이번 유치 활동은 역대급 헛발질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정부는 표결 결과가 나오는 순간까지도 박빙이라고 주장했다. 이 바람에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까지 열심히 득표 활동을 했다. 소중한 자산인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도 나섰다. 한국이 자랑할만한 문화예술인도 총동원했다. 지휘자 정명훈과 성악가 조수미, 그리고 아이돌 그룹들이 줄줄이 응원했다. 넷플릭스에서 세계적 반응을 받은 오징어게임도 이용했다. 그야말로 거국적인 캠페인을 벌인 결과는 119 대 29였다.많은 민간 기업인들은 이미 판세를 뒤집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동분서주할 때도 외교력을 낭비한다고 우려했다. 너무 힘을 쏟아 실패했을 때의 낙담을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걱정했다. 그런데도 정부 내에서는 1차 투표에서 70표 정도를 얻는다고 예측했다. 이에 따라 ‘2차 투표 전략’을 펼쳤다. 1차 투표에서 우리를 안 찍어도 2차에서는 찍어달라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러나 예측과 전혀 다른 결과였다.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자본으로 국제행사를 오염시켰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미 그런 환경을 알고 도전한 경쟁이다. 그런데도 막판 뒤집기에 의욕을 보인 정부다. 이제 와 ‘석유자본’을 비난하는 건 책임회피밖에 안 된다. 일부 국민의힘 의원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문재인 정부 탓”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반이 훨씬 넘었다. 아직도 전 정부 탓을 하는 건 염치가 없다.올해 초에는 정부도 유치 전망이 밝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그냥 포기할 수는 없으니 최선을 다하자는 정도였다고 한다. 윤 대통령이 이를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힘을 쏟은 거야 칭찬할 대목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국제박람회기구 회원 182개국 정상을 대부분 만날 정도로 유치 노력을 기울이면서 정부 내 전망도 바뀌었다. ‘초접전’, ‘역전’이란 말이 나오고, 2차 투표 전략도 언론에 거론되기 시작했다.유치교섭 일선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경제인들의 예측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이 확보한 표가 훨씬 부족하다고 부정적인 보고를 올렸다. 그러자 “왜 사기를 꺾는 보고를 하느냐”고 질책했다고 한다. 그러니 “2차 투표에서는 한국을 지지하겠다”라는 외교적 발언을 모두 한국 지지 내지 중도로 분류하면서 예측이 한참 어긋났다.엑스포는 2030년에만 열리는 게 아니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만 이기려 할 수는 없다. 엑스포를 못 연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도전하면 된다. 문제는 정부 내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드러난 오류다. 예측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오판했다면 큰 문제다. 엑스포만이 아니라 다른 외교 문제, 다른 국정 현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윤 대통령은 예측이 빗나간 데 대해 “전부 저의 부족”이라고 말했다. 사실 엑스포는 다시 도전하면 된다. 엑스포 유치를 위해 기울인 노력이 어떤 형태로 건 우리 자산이 되어 있을 것이다. 되돌아보며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은 국정 운영 흐름이다.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보고서를 왜곡하는 관리자는 위험하다. 그런 관리자는 쓰는 것도, 자신의 기대와 판단을 과도하게 앞세워 바른말을 못 하게 부담을 주는 리더십도 곤란하다. 이 기회에 그런 부분을 반성하고 바로 잡는다면 엑스포를 유치한 것보다 더 큰 소득일 수 있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2-03

이러고도 나라가 안 망하나

김진국 고문 국회만 보면 한숨이 나온다.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최강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암컷들이 설친다’라고 말해 당원권 정지 6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최 의원 발언이 최근 문제가 됐지만, 여(與)고, 야(野)고, 평소 쏟아내는 말들이 거칠기 짝이 없다. 국민대표로서의 품격을 찾아보기 어렵다.이러니 정치가 잘될 리 없다. 정치는 ‘전부냐 빈손이냐’의 싸움이 아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의원도 일정한 유권자들이 선택했다. 모두 존중받아야 할 국민대표다. 그러니 정글의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으로 국민 의견을 골고루 반영하여 정리할 의무가 있다.그런데 요즘 국회는 자신이 대변하는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의견을 가진 정치인, 심지어 국민도 짓뭉개고, 제거하는 것이 임무인 양 움직인다. 정치가 아니라 승리 지상주의가 지배하는 사이버 전쟁터 같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만 추구한다. 나라의 미래는 보지 않는다.더구나 총선을 4개월여 남겨둔 요즘 온통 선거와 자리 이야기다. 용산이나 정부에서 출마를 노리는 사람, 출마하는 사람의 빈 자리를 노리는 사람…. 대화도 하마평뿐이고, 어수선하다.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소는 정말 누가 키우나.국회 예산 심의는 더 한심하다. 민주당은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예산 심의에서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원자력발전 분야 예산 1천831억원을 깎았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했던 신재생에너지 관련 예산은 4천500억 원이나 늘렸다. 이 정부와 이 예산으로 대한민국은 어디로 갈지 걱정이다.예산안을 던져놓고, 다수당인 야당을 설득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 정부도 대책이 없고, 누가 이기나 해보자며 어깃장을 놓는 야당도 답이 없다. 아무리 야당 대표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취임한 지 1년 3개월이 지나도록 만남을 거부하는 게 말이나 되나.이 대표가 재판받고 있어도 그렇다. 국민감정이 나쁘다고, 일본 총리를 안만나고, 북한 김정은 위원장을 외면하지는 않는 것 아닌가. 좋아하는 사람만 만난다면 그게 무슨 정치인가. 국민의 이익을 최대한 반영해 국정을 이끌어야 할 수임자로서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법률안은 무조건 거부하고, 인사청문회는 무시하고 밀어붙였지만 이제 예산은 어떻게 할 건가.민주당이 깎아 놓은 예산도 기가 막힌다. 이율배반이지만 문재인 정부도 원자력 수출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문 전 대통령도 직접 세일즈에 나섰다. 그런데 원전 수출 기반 구축 예산 1천112억 원, 원전 수출 보증 예산 250억 원을 깎아 버렸다. 당장 이집트·루마니아 등에서 따낸 원전 건설사업이 위험해졌다. 폴란드·체코 등에서 추진 중인 원전 수출 협상에도 빨간불이 켜졌다.그뿐 아니다.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i-SMR)’ 기술 개발 예산 333억 원도 전액 없앴다. 민주당이 추진한 사업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원전에는 무조건 윤석열 딱지를 붙여 삭감한 결과다. 원전만이 아니다. 청년 취업 지원 사업도 윤석열 표는 모두 삭감했다. 이재명 표가 붙은 지역화폐 예산, 재생에너지 투자, 새만금사업 등은 늘려놓았다.원자력발전과 재생에너지 문제는 매우 전문적인 분야다. 원전은 많은 약점을 안고 있다. 좋기만 한 게 아니다. 재생에너지 비율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게 옳은 방향이다. 그렇지만 재생에너지만으로 필요 전력을 충당하기는 어렵다. 매우 조심스럽게 조율할 문제다. 그런데 전문가들마저 진영으로 쪼개져 있으니 이성적인 토론이 안 된다. 찬반과 상호 비난뿐이다. 자기 이익이 걸린 전문가도 많다. 국민을 분열시키는 데 앞장선다.정치권은 더하다. 대화와 타협으로 미래를 논의한다면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변화가 제한적이어야 한다. 국가 미래 전략의 큰 방향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선거 한 번 할 때마다 정책이 180도 뒤집히는 정부를 어떤 나라가 믿고, 협상하겠나. 미래를 위한 장기 전략은 외면하고, 선거를 위해 과거 정부 정책은 무조건 뒤집어버리기를 5년마다 반복한다. 적성국의 이간책이라도 이렇게 성공할 수 있을까. 유권자라도 깨어있어야 한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1-26

윤핵관, 왜 여론이 외면하나

김진국 고문 험지(險地) 출마, 퇴진이란 말이 쏟아진다. 여야가 따로 없다. 총선이 얼마 안 남았다. 그동안 다져온 지역구를 포기하고 낯선 곳에 출마하는 건 떨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니 험지 출마는 정계 은퇴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그렇지만 정치신인은 아직 선거판에 명함도 못 내밀었다. 정치인으로서 자신이 있다면 지금 시작하는 게 굳이 늦은 건 아니다. 따뜻한 온실에 있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들판에 나서려니 서러울 뿐이다. 이런 판 갈이가 낯설지는 않다. 카리스마가 있는 당 총재나 대통령이 흔히 밟아온 과정이다.선거 때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도 흔들었다. 3김 청산도 요구했다. 대통령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동안 3김이 이끄는 정당에서 다른 목소리는 파묻혔다. 조금만 다른 목소리를 내도 정(釘)을 맞았다. 지역주의에 기초한 줄 세우기, 야권 후보 단일화 실패…. 여기에 반발한 젊은 정치인들이 새로운 지도자를 요구했다.그렇지만 3김씨 가운데 두 사람은 대통령이 됐다. 다른 한 사람은 내내 이인자로서 힘을 유지했다. 이들은 지역주의 정치의 책임을 벗어나기 어렵지만, 한편으론 지역의 정서, 한(恨)을 대변하는 정치적 상징이기도 했기에 이루어낸 성과다.그들은 ‘대통령 병(病)’에 걸렸다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경쟁을 벌이느라 의정 활동을 독려하는 역할도 했다. 호남과 영남이라는 온실에서 편하게 당선된 의원들 가운데 나태하고, 지역민들의 원성을 받는 의원들은 과감하게 교체하는 카리스마도 있었다. 지역할거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이철승 전 의원처럼 지역에 뿌리가 깊은 거물 정치인들도 맥을 못 추고 쓰러졌다.물갈이의 긍정 효과와 함께 비주류는 발을 못 붙이고, 총재에게 충성경쟁을 하는 비민주적 정당 문화를 뿌려놓았다. 대통령이나 당 대표의 권위가 그때만은 못하다 해도 극심한 진영화의 영향으로 양대 정당의 공천이 당락의 필수조건처럼 작용한다. 유권자보다 공천위원이 당락을 좌우하는 것이다. 그러니 국민의힘에서 나오는 ‘윤핵관’과 영남 다선 의원의 험지 출마론, 민주당의 86정치인 용퇴론, 친명(親明) 험지 출마론이 본선보다 더 치열한 싸움판이 되고 있다. 사실 권력자와의 친소(親疏) 관계, 출신 지역이나 나이, 성별을 이유로 선거에서 불이익을 감수하라는 건 옳지 않다. 나이가 어려도 생각이 고리타분한 인사가 있는가 하면 나이가 많아도 합리적이고, 활동적이며, 사고가 자유로운 사람이 있다. 정치권을 취재하다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절감할 때가 많다.문제는 ‘윤핵관’이나 86 정치인들을 공격하는 말이 왜 여론의 호응을 얻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윤석열 정부의 문제는 모두 윤 대통령의 책임이다. 그렇지만 정치 경험이 없는 윤 대통령 가까이에서 조언을 해온 ‘윤핵관’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소통이 막히고, 독단적으로 흘러간 임기 초반의 시행착오는 사실 정치를 모르는 윤 대통령보다 조언자들의 책임이 크다. 적어도 윤 정부의 정치 향방을 좌우할 요직에서는 물러나라는 여론이 비등한 이유다.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 평민당 의원들에 대한 호남의 불만이 팽배했었다. 평민당 공천만 받으면 말뚝을 꽂아놔도 당선된다고 하던 시절이다. 나를 안 뽑으면 누구를 뽑을 거냐는 오만하고 나태한 의정 활동이 지역민의 감정을 건드렸다. 김 전 총재도 과감하게 물갈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이 되려면 더 열렬한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남도 마찬가지다. 일부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는 지역도 있지만 국민의힘 공천은 본선보다 더 어려운 관문이다. 최근 윤 대통령의 정치 행보에 변화가 생겼다. 선거가 가까워졌다는 절박감,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받은 충격, 지지부진한 여론 지지율 등 바뀌지 않을 수 없는 요인들이 많았다. 어떤 요인에 따른 것이든 바뀌는 만큼 지지율이 움직인다. 선거 전략은 따져봐야 하지만, ‘윤핵관’이건, 영남 지역 의원이건, 여론이 인요한 혁신위원장을 주목하는 이유를 새기고, 반성해야 한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1-19

사법 절차 보호해야 부패 정치 막는다

김진국 고문 민주주의는 불안한 제도다. 주권자가 맑은 눈을 가져야 제대로 작동한다. 눈을 감은 사람이 있을 수 있어도 눈이 밝은 사람이 더 많다는 믿음 위에 민주주의가 서 있다. 그래도 위험은 찾아온다. 집단적인 편견이 있다. 숫자는 적어도 목소리가 커 과대 대표되는 세력도 있다.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비극으로 끝났다. 집단 편견은 여러 형태로 우리를 덮친다. 오랜 숙제인 지역감정도 그런 것이다. 정치인을 연예인처럼 추종하는 문화의 확산도 영향을 미친다. 열성 팬은 노래가 나올 때마다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냉정하게 비교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가수는 무조건 1등이다.축구·야구팬이 1등 팀에만 몰리지는 않는다. 팬의 사랑을 받는 다양한 가수와 팀이 무대에 올라 다양성을 유지한다. 거기까지가 정상이다. 그러나 상대팀을 공격하는 훌리건으로까지 나가면 스포츠와 문화·예술을 파괴한다. 더구나 정상적인 숫자로만 비교되는 것도 아니다. 앨범 사재기가 있다. 소수라도 목소리가 큰 악착같은 세력이 있다. 억지를 부리는 세력이 과대 대표된다면 정치를 난장판으로 만든다.민주주의의 중심은 의회다. 민주주의의 요체인 대화와 타협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문제는 부패다. 가장 부패하기 쉬운 곳이 정치권이다. 주권을 위임한 것은 국민의 이익을 지켜달라는 주문이다. 그런데 이 권한을 사익을 추구하는 데 쓰는 정치인이 많다. 선출된 권력이지만 사법제도가 막아야 한다. 지난 정부에서 공수처를 만든 명분도 그런 것이다. 부패 정치인의 눈에는 이것이 눈엣가시다. 정치가 사법 질서를 흔들면 부패를 막을 길이 없다. 사법의 신뢰도도 추락한다.1976년 2월 4일 미국 상원 공청회에서 록히드사가 200만 달러(약 26억 원)를 일본 정계에 뿌린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에게 5억 엔(약 50억 원)을 준 사실도 드러났다. 그는 총리이던 74년 자기 가족 기업 땅에 건설성이 공사를 시작하면서 땅값이 수십 배 폭등하는 등 비리가 드러나 사임한 상태였다. ‘청렴한 미키’라는 별명이 붙은 후임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총리는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 그러자 다수파였던 다나카파는 ‘표적수사’, “너무 까분다”라고 비난했다.도쿄지검 특수부는 다나카를 체포해 정치부패를 막는 보루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6개월 수감됐다 보석으로 풀려난 다나카는 여전히 정계의 배후 실력자로 활동했다. 83년 1심 재판에서 다나카는 징역 4년을 선고받았지만 상고가 진행 중이던 93년 사망하면서 재판이 끝났다. 최대의 파벌을 형성한 다나카는 ‘금권정치’, 파벌정치의 한계를 보여줬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정적에 대해 불법 침입·도청을 한 ‘워터게이트사건’을 수사하던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하려 했다. 그러나 해임을 지시받은 법무부 장관과 차관이 차례로 이를 거부하며 사임했다. 결국 장관 직무대행인 차관보를 통해 특검을 해임했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비난 여론이 거세지면서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사법 방해행위는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민주당은 9일 이재명 대표 수사를 총괄하는 이정섭 수원지검 2차장검사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고, 10일 공수처에도 고발했다.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를 철회해 표결이 무산되고, 자동 폐기될 처지였는데, 이를 철회하고, 30일 본회의에서 꼼수로 재추진하겠다고 한다. 편법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사법 방해다. 이 차장검사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 헌법재판소 심판 전까지 직무가 정지된다. 헌법재판소가 탄핵 결정을 하지 않더라도 그때까지는 ‘쌍방울 대북송금 대납’ 의혹, ‘경기도청 법인카드 사적 유용 묵인’ 의혹 등 이 대표 수사가 모두 중단될 수밖에 없다. 명백한 사법 방해다. 민주당이 탄핵 이유라고 적시한 의혹을 보면 처가 고용인 범죄기록 조회, 스키장 리조트 이용 청탁, 처가 운영 골프장 부정 부킹, 위장전입 등이다. 이게 국회가 나서서 검사를 탄핵할 이유가 되나. 팬심에 매달리면 극단 정치로 갈 수밖에 없다. 유권자가 눈을 뜨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무너진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1-12

서울공화국은 곤란하다

김진국 고문 경기도 김포시의 서울 편입 문제로 정가가 어수선하다. 경기도 분도(分道) 시민공청회에서 이런 제안이 처음 나온 것은 이해할 만하다.김포시민이야 서울 편입을 원할 수 있다. 그걸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당론으로 받아들였다. 김 대표는 지난달 30일 김포골드라인 교통 대책 시민 간담회에서 김포시민이 의견을 모은다면 법률을 개정하겠다고 약속했다.김 대표는 “생활권·통학권, 직장과 주거지 간 통근 등을 봐서 서울시와 같은 생활권이라면 행정 편의가 아니라 주민 편의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다. 그는“원칙적으로 서울과 출퇴근이 공유되는 곳은 서울시에 편입하는 것을 당론으로 정하고 추진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김포뿐 아니라 고양·부천·광명·구리·하남 등 서울 인근 도시들이 모두 들썩인다.김 대표 논리대로라면 수도권 전체가 서울이다. 대구·부산·광주 등 전국에서 중환자는 서울 대형병원으로 간다. 콘크리트 아파트 한 채에 30억~40억 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속이 편치 않다. ‘서울공화국’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그렇다고 전국을 서울로 집어넣을 수는 없다. 집중도를 낮춰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경기(京畿)’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 현종(1018) 때다. 고려 초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왕도(王都) 주위 오백 리에 ‘적현(赤縣·京縣)’과 ‘기현(畿縣)’을 설치했는데, 이를 통합하면서 경기라고 부른 것이다.경기도는 원래 서울과 한덩어리다. 조선 시대 이후 서울 중심이 더 강화됐다.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낸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국토교통부 균형발전현황판을 보면 서울·인천·경기, 수도권 인구가 전체 인구의 50.6%다. 1960년 20.8% 수준이었던 수도권 인구 비중이 80년 35.5%, 90년 42.8%으로 치솟더니 2019년 말 드디어 절반을 넘어섰다. 면적은 서울이 전체 국토의 0.6%, 인천 1.1%, 경기 10.6%로, 합쳐서 11.8%, 10분에 1에 불과하다.그런데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은 서울이 4만9천680원으로 대구(2만 5천543원)의 두 배에 이른다. 수도권은 4만703원, 비수도권은 3만9천212원이다. 청년 실업률도 수도권이 4.67%인데, 비수도권은 6.36%다. 그러니 서울로 몰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 뭘 더 가져다 붙이겠다는 건가.김포의 서울 편입 정책은 선거용이라는 정황이 분명하다.내년 4월 총선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절체절명의 고비다. 레임덕이냐, 힘 있는 임기 시작이냐를 가르는 선거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를 통해 수도권 민심을 확인했다. 그대로라면 수도권에서 지난 총선 결과인 103 대 16보다 더 나을 수 없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안간힘을 쓰려 할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 대계를 좌우할 문제를 선거용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그린벨트를 설정하고, 수도 이전을 구상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면 아무리 다급해도 그런 꼼수를 부렸을까.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종시 이전 공약으로 선거 때 ‘재미 좀 봤다’라고 말했다.좋은 구상이라도 선거에 연결하면 왜곡되기 마련이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도 지역 특성과 전체 연결을 고려하지 않은 나누어 먹기가 되면서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정치적 거래, 그 이후 선거 때마다 이용되면서 표류하고 있는 새만금은 전형적인 득표 미끼가 됐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코로나 지원금도 선거 전 현금 살포에 이용됐다.선거를 계기로 기발한 정책들이 발굴된다.평소 관료 조직의 경직성을 뚫기 힘든 과감한 정책도 선거를 계기로 실현되는 일도 있다. 미국의 뉴딜정책도 선거를 통해 나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국가 미래에 대한 거대한 디자인에 맞춰져야 한다. 당장 기존의 지역 발전 구상은 어떻게 할 건가. 여야를 막론하고 비전은 없고, 잔꾀만 느는 것 같아 걱정이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1-05

정치 팬덤은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김진국 고문 정치인이 고약한 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이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의 고향이라는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는 어디로 갔나. 민주주의의 전범처럼 들먹이는 미국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미국에서 선거가 가짜뉴스에 휘둘리고, 선거 결과에 불복(不服)하고, 극렬 지지자들이 의회를 난입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한국도 뒤지지 않는다. ‘개딸’이니, ‘문빠’니, ‘태극기’니 하는 극단 세력들이 정치판을 휘젓는다. 비타협적인 ‘탈레반’ 세력이다. 무조건 자기편만 드니 지지자들은 환호한다. 그러나 대화와 타협이 빠지면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건 원시 시대부터 작동해온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원리다. 힘이 센 자가 이기고, 이기면 무조건 다 갖는 게임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사기다. 합의해놓고 뒤집고, 규칙에 따른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것 역시 민주주의라고 하기 어렵다.근본적인 대변혁이 필요하다.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당장 가능한 것 하나라도 고쳐나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여야 원내대표들이 국회 회의장에 비난 팻말을 붙이지 않기로 합의한 것은 작지만 칭찬할 만하다.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주 월요일(23일) 먼저 제안해,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적극적으로 찬성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우선 “국회가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지나치게 정쟁에 매몰된 모습을 보인다”라며 국회 회의장 분위기부터 개선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윤 대표는 의원총회에서 “본회의장과 상임위 회의장에서 팻말을 부착하거나 고성·야유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라고 공개했다.그동안 국회를 보면 기가 찼다. 국회 본회의나 상임위 모두 말이 열려 있는 공간이다. 헌법 제45조는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에 관하여 국회 외에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라고 규정돼 있다. 소위 면책특권이다.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모든 회의가 생중계된다.그런데도 회의장 책상 앞에 피켓을 줄줄이 세워놨다. 국회 참관하는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한국을 선진국으로 아는 외국인에게도 창피하다. 본회의장, 상임위 회의장을 놔두고, 국회 본관 계단에 서서 학생들처럼 팔을 흔들며 구호를 외친다. 피켓이나 집단 시위는 자기 목소리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특권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국회의원 몫이 아니다.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이 떠오른다.상대를 비난하는 팻말을 붙여놓고, 무슨 대화가 되겠는가. 처음부터 국회를 싸움판으로 만드는 짓이다. 복잡한 현안을 단순한 구호로 압축해 공영 방송에 지속해서 노출하는 것은 여론을 왜곡한다. 일부 의견을 과다 대표하고, 국정현안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헷갈리게 한다. 더구나 겨우 팻말이나 들고, 구호나 외치라고 국회로 보내준 게 아니다. 유권자에 대한 모욕이다.일부 과격파 의원은 이를 무시한다. 박주민 민주당 원내 수석 부대표는 방송인터뷰에서 “솔직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절대 없을 겁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 참 어려울 것 같다”라고 말했다. “과거에도 이런 시도가 있었지만 조금 지나서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았다”라는 것이다. 이에 앞서 국민의힘은 보궐선거에서 참패한 뒤 야당을 과도하게 비난하는 정쟁(政爭)성 현수막을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전국적으로 문제 현수막들을 철거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여기에 호응하지 않았다.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경선 때 비난성 문자 폭탄을 “민주주의를 위한 양념 같은 것”이라고 두둔한 일이 있다. 당장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민주주의 파괴를 선동해서는 안 된다. 아이돌의 열성 팬 문화에서는 지지하는 가수 외에 다른 가수는 없다. 우호 세력은 물론 반대 진영의 정치적 경쟁자마저 인정하고 의견을 조정해야 하는 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역사적으로 정치에서 가장 적극적인 팬덤은 나치였다. 팻말과 고성, 야유 등 돌출행동은 카메라의 주목을 받는다. 나쁜 짓을 즐기는 이유다. 적어도 책임 있는 언론만이라도 이런 행동을 외면하면 안 될까.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0-29

민생 현장만 다니면 소통이 될까

김진국 고문 윤석열 대통령이 반성 모드다. 그는 19일 충북대에서 “저보고 소통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분이 많아, 많이 반성하고 소통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17일 저녁에는 국민통합위원회·국민의힘 지도부 등을 청와대로 불러 “얼마나 정책집행으로 이어졌는지 저와 내각이 돌이켜보고 반성하겠다”라면서 ‘반성’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직진만 해온 윤 대통령으로선 매우 낯선 모습이다.그러면서 그는 민생을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18일 참모들에게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어떠한 비판에도 변명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19일도 다시 참모들에게 “나도 어려운 국민의 민생 현장을 더 파고들겠다”라며 “민생 현장에 파고들어 살아있는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들으라”라고 지시했다. 당 지도부와 참모만이 아니라 스스로 바뀌겠다는 각오를 밝힌 것이다.김은혜 대통령 홍보수석은 “대통령이 ‘민심은 천심이다. 국민은 왕이다’라고 늘 새기고 받드는 부분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평소 생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자칫 “선거에 졌다고 윤 대통령의 태도가 바뀐 건 아니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모습을 보이려는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말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행동이 중요하다. 과거 정치인들도 좋은 말은 많이 했다. 멋진 말, 대중에게 인기 있는 표현에 욕심을 내고, 자기 이미지를 포장하려 했다. 그러면서 행동은 거꾸로 하는 이상한 사람이 많았다. 윤 대통령은 “소통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추진하면서 소통해야 한다”라며 실행을 강조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그렇지만 평가는 아직 이르다.문재인 전 대통령은 ‘우회전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삼성전자를 방문해 투자와 고용을 부탁하면서 이재용 회장을 구속하고, “기업의 노력을 확실히 뒷받침하겠다”라며 ‘반도체 특별법’을 약속하고는 실제로 만든 법에서 ‘반도체’라는 단어를 쏙 빼버렸다. 그는 취임사에서 “공정한 대통령이 되겠다”라고 약속했지만, 조국 사태는 반전이었다.윤 대통령도 멋진 표현을 좋아하는 편이다. 실제로 앞뒤 재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있다. 취임 초에 무리하다고 주변에서 말리는 ‘도어 스테핑’을 실행한 것도 그의 용기와 결단력이다. 따라서 그의 발언이 빈말은 아니라고 믿는다.윤 대통령은 단임이다. 본인이 다시 선거에 나설 일이 없다. 그는 인기가 없는 정책을 과감하게 밀어붙였다.대일(對日) 외교나 긴축 재정 등은 박수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의대 증원 추진과 관련해서도 그는 “이런 것을 추진한다고 선거에 손해를 보지 않겠느냐고 걱정하시기도 한다”라며 “그러나 우리는 선거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 나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그러면 윤 대통령은 정권이 넘어가건 말건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걸까. 물론 아니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면 결국 민심을 얻는다는 믿음이다. 보수진영으로선 윤석열 정권의 성공 이상으로 차기 정권 창출이 중요하다. 정권이 교체되면 윤 정부에서 했던 정책이 순식간에 뒤집힐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는 국가 간 약속인데도 뒤집혔다.내년 총선이 6개월도 안 남았다. 총선에서 지면 야당은 물론 여당도 차기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공무원도 태도가 달라진다. 바로 레임덕이다. 더구나 그는 전직 대통령 두 명을 감옥에 보낸 경험이 있다. 정권을 넘겨주면 퇴임 이후도 불안하다. 윤 대통령도 남의 일일 수 없다.그런데 윤 대통령 발언에는 대통령과 측근 참모, 그리고 국민의 관계만 있다. 민생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민생 현장만 뛰어다닌다고 불통이 해소될까. 과거 독재자들은 정치적 경쟁자 대신 국민을 직접 상대하려 했다. 대통령은 민생을 위해 애쓰는데, 야당이 발목을 잡는다는 자기 생각을 증명해 보이려 했다. 요즘처럼 진영정치가 극심한 상황에서는 반쪽 소통이 될 가능성이 크다.민주주의의 본질인 관용의 정치와도 거리가 멀다. 권력자가 정성을 다해도 정치가 풀리지 않을 때 그 책임이 야당으로 넘어간다. 눈과 귀를 조금은 더 열어야 한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0-22

모두 대통령 책임이다

김진국 고문 직접 당해봐야 아는 사람은 하수(下手)다. 당하고도 모르는 사람은 하지하수(下之下手)다. 지난주 서울에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있었다. 김태우 국민의힘 후보가 진교훈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참패했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대개는 예상했던 결과다. 보수 지지자들도 “용산에 대한 여론이 매우 안 좋다”는 말을 많이 한다. 13일 한국갤럽 조사를 봐도 내년 총선에서 정부 견제론(48%)이 정부 지원론(39%)보다 9%포인트 더 많다.그런데도 국민의힘 선거 전략이나 인사청문회 대응은 따로 놀았다. 자신만만한 것을 넘어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이런 참사를 예견하였기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그렇지만 사후 수습이라도 제대로 해, 하지하수는 면해야 하지 않나.서울의 한 구청장 선거에 불과하다. 그런데 선거 결과가 던진 충격은 전국선거급이다. 서울이어서 그런 게 아니다. 여야가 모두 나서 전국적 선거로 키웠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하나의 시험대로 여겼다. 윤석열 정부를 일차 평가하는 기회이기도 했다.구청장 선거지만 진교훈 후보나 김태우 후보는 뒷전이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대결이었다. 앞장서 의미를 키운 건 윤 대통령이다. 이번 보궐선거는 김태우 후보가 유죄판결을 받아 구청장직을 잃으면서 치러졌다. 문재인 정부 시절 청와대 특별감찰관으로서 민간인 불법 사찰, 여권 인사 비리 묵인 의혹 등을 폭로한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윤 대통령은 김 후보를 사면·복권하고, 사실상 강서구청장 후보로 낙점했다. 윤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그를 공천하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보궐선거를 앞두고 복권한 그의 의도를 국민의힘 지도부가 모를 리 없다. 공익 제보에 가까운 김 후보의 폭로 야기된 억울한 피해를 구제하려는 윤 대통령의 뜻이 충분히 이해된다.하지만, 정치에서 정답과 오답이 없다. 중요한 것은 민심이다. 민심을 떠나서는 아무리 좋은 결정이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선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독선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지도자들에게 국민보다 반 발짝만 앞서가라고 한 이유다. 강서구는 국민의힘에 불리한 ‘험지(險地)’라고 한다. 그러나 역대 선거를 따져보면 험지라는 말로 털어버릴 문제는 아니다. 22년 3월 대통령선거에서 윤석열 후보는 46.97%, 이재명 후보는 49.17%였다. 이재명 후보가 이기기는 했지만 2.2%에 불과했다. 그해 6월 지방선거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는 56.09%를 얻어 송영길 민주당 후보(42.10%)를 14% 차이로, 김태우 구청장 후보는 51.3%로 김승현 민주당 후보(48.69%)를 2.61% 차이로 이긴 곳이다.이번 득표율, 56.25%(민주당)대 39.19%(국민의힘)는 20년 4월 21대 총선과 비슷하다. 당시 강서 갑·을구를 합친 득표율은 민주당이 55.40%, 미래통합당(국민의힘)이 39.95%였다. 그때 서울 49개 선거구에서 민주당이 41석, 미래통합당(국민의힘)이 8석을 차지했다. 경기도에서는 51석 대 7석, 인천에서는 11석 대 1석으로 수도권에서만 103석 대 16석으로 국민의힘이 참패했다.강서구가 험지건 아니건, 수도권 민심이 21대 총선과 비슷하다는 건 확인됐다. 그대로 대입한다면 내년 총선에서도 지역구 의석의 44.3%인 서울·인천·경기에서 103 대 16에 가깝게 국민의힘이 참패한다는 말이다. 그 뒷일은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레임덕이 시작되고, 윤 대통령은 식물 대통령이 된다. 단임 대통령은 취임 초기 가장 힘이 세다. 그런데도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에 가로막혀 쩔쩔맸다. 총선 참패 이후의 모습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뒤늦게 후회했다. 중앙일보 인터뷰를 보면 측근들의 비리를 살피지 못했다고 한다. 당 지도부가 만나려고 했다는 사실도 몰랐다고 한다. 대통령의 의지가 너무 강하고,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하면 그 눈치를 살피는 사람만 꼬이게 된다. 그러나 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없다. 모든 문제는 ‘나’로부터 시작한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0-15

줄세우기 정치의 한계

김진국 고문 더불어민주당이 쪼개지기 직전이다. 국회 의석 분포를 보면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이 통과되기 어려운 구도다. 국회의원 298명 가운데 민주당이 168명(56.4%). 무소속 9명 가운데 7명도 사실상 민주당이다. 그러니 통과된 뒤 서로 ‘네 탓’으로 폭발 직전이다.이재명 대표는 “국민을 믿고 굽힘 없이 정진하겠다”라고 말했다. 사퇴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더 개혁적인 민주당, 더 유능한 민주당, 더 민주적인 민주당이 될 수 있도록 사력을 다하겠다”라고도 했다. 친명(친이재명)계가 말해온 대로 옥중 공천까지 하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더 개혁적…’이란 자신을 더 잘 따르는 후보들을 공천하겠다는 의지다.의원총회가 난장판이 됐다.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비명계인 박광온 원내대표가 사퇴했다. 비명계 송갑석 최고위원도 쫓아냈다. 이참에 친명계가 독주하겠다는 계산이다. ‘배신자’를 색출한다고 열을 올린다. 의원들 모두 실명으로 이 대표 영장 기각 탄원서를 내라고 한다. 국회에서 가결해놓고, 그 소속인 의원들에게 반대 탄원서를 내라니 이런 희극이 없다. 공산 전체주의에서나 보던 인민재판식 양심 고문이다. 위태위태하다.‘개딸’(개혁의 딸을 줄인 말로 극렬 이재명 지지자들)들이 부결 투표를 공언하지 않은 의원, 부결 여부를 묻는 문자에 답하지 않은 의원, 지도부 책임론을 제기하는 의원, 불체포특권 포기에 참여한 의원들을 ‘배신자’라고 공격한다. 그러자 어기구 의원은 부결 투표 인증사진을 공개했다. 비밀투표에 어긋나는 어이없는 행동이다. 고민정 의원도 웃는 사진으로 공격받자 부결 표를 던졌다고 해명했다. 의정활동이 인민재판을 받고 있다.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아온 건 이재명 대표다. 자신의 짐을 민주당에 떠안기고,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특히 이 대표의 신뢰가 무너진 게 가장 큰 원인이다. 그는 지난 6월 19일 국회 대표연설에서 불체포특권 포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표결 하루 전 불체포특권을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당당하게 법원의 판단을 받겠다던 약속을 석 달 만에 뒤집었다.검찰이 체포한다고 끝이 아니다. 법원에서 구속적부심을 거쳐야 한다. 최종적인 유무죄는 법원에서 가린다. 그런데도 부결을 호소한 데서 이 대표의 두려움이 느껴진다. 법원도 검찰과 판단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겁을 먹은 행동이다.이날 부결 호소로 ‘방탄 국회’, ‘방탄 단식’이 아니라는 그의 말도 신뢰를 잃었다. 결백하다는 그의 주장을 믿던 사람들마저 흔들린다. 국회 표결이 필요없는 비회기 중에 영장을 청구하라고 요구해온 그의 의도를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그동안 그의 혐의와 관련한 모든 언행에 부정적인 색칠을 해버렸다.신뢰는 한꺼번에 무너진다. 회기, 비회기라는 잔수, 단식을 해가며까지 구속을 피하려는 안간힘…, 큰 정치 지도자의 의연함보다 잡초 같은 생존력만 보여줬다. 이 대표는 단식을 시작하며 “무능 폭력 정권을 향한 국민항쟁을 시작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단식의 이유로 정부와 윤석열 대통령의 민생 파괴와 민주주의 훼손, 일본 핵 오염수 방류, 국정 쇄신과 개각 등을 꼽았다. 그렇지만 체포동의안 통과 뒤 그런 요구는 모두 잊었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민주당의 비판마저 방탄의 핑계로 희화화했다.반란표가 나온 더 큰 원인은 공천 협박이다. 원외 친명 인사인 강위원 더민주 전국혁신회의 사무총장은 투표 이틀 전 “이번에 가결 표 던지는 의원들은 끝까지 추적, 색출해서 당원들이 그들의 정치적 생명을 끊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의 말이 아니라도 친명계의 독주를 통해 이런 압박은 계속돼왔다. 이날협박 발언이 내부 갈등에 기름을 부었다. 내년 총선 공천이 친명계 일색으로 갈 것이라고 확신하게 했다.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은 집권당의 분열로 가능했다. 이 대표의 체포동의안 처리도 결국은 민주당의 분열이 만들어냈다. 그런데도 여야 모두 강경 노선으로만 달린다. 장악력을 높이려고 욕심을 부린다. 하지만 선거의 승패는 몇십표, 심지어 한두 표로 갈린다. 선거 때마다 후회하면서도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9-24

짜깁기한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김진국 고문 부끄럽고, 부끄럽다. ‘윤석열 커피’ 보도는 명백한 잘못이다. 기자도 실수한다. 그러나 실수와 알고도 잘못 보도하는 것은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윤석열 커피’ 기사는 훈련받은 기자가 할 수 있는 실수가 아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의도가 개입했다고 의심해도 할 말이 없다.지난해 대통령 선거를 사흘 앞두고 뉴스타파는 ‘박영수-윤석열 통해 부산저축은행 사건 해결’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신학림 전 언론노조 위원장이 대장동 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김만배 씨의 녹취에서 윤석열 후보를 의심하기 좋게 짜깁기해 보도했다. 요지는 김만배 씨가 박영수 전 특검을 통해 윤석열에게 로비해 조우형 씨를 수사하지 않고 풀어주게 했다는 내용이다.검찰은 초대형 금융비리사건인 부산저축은행 사건을 조사하면서 조우형 씨를 참고인으로 조사했다. 조 씨는 뒤에 대장동 사업 자금을 조성하는 데도 관여했다. 민주당은 대선 때 윤석열 대통령이 조 씨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아 대장동사건이 터졌다며, ‘커피게이트’라고 이름 붙이고, 윤 대통령이 대장동 사건의 몸통이라고 주장했다. 이재명 후보는 대선 후보 토론에서 “조우형에게 커피는 왜 타 줬느냐”고 조롱했다.뉴스타파 기사가 보도에 인용한 한 대목을 보자.(신학림)누가? 박○○검사가?(김만배)윤석열이가 ‘니가 조우형이야?’ 이러면서….(신)윤석열한테서? 윤석열이가 보냈단 말이야?(김)응. 박○○(검사가) 커피 주면서 몇 가지를 하더니(물어보더니) 보내주더래. 그래서 사건이 없어졌어.(신)박영수 변호사가 윤석열 검사와 통했던 거야?(김)윤석열은 (박영수가) 데리고 있던 애지.(신)데리고 있었기 때문에?(김)통했지. 그냥 봐줬지. 그러고서 부산저축은행 회장만 골인(구속)시키고, 김양 부회장도 골인(구속)시키고 이랬지.이 대목을 읽어보면 어떤가? 윤 검사가 부하 검사에게 커피 타 주게 하고, 사건을 덮어버렸다고 읽히지 않는가? 그 뒤에 붙은 다음 대화는 보도에서 빼버렸다.(신)조우형은 박○○하고 커피 마시고 온 거야? 윤석열하고 마시고 온 거야?(김)아니 혼자. 타주니까 직원들이…. 어떻게 검사와 마시겠어.(신)검사? 검사 누구 만났는데?(김)박○○ 만났는데. 박○○가 얽어 넣지 않고 그냥 봐줬지….이게 뭔가. 조우형은 윤석열 검사를 만나지도 않았다. 커피를 타 준 것도 검사가 아닌 직원이라고 말한다. 정상적인 기자라면 의미가 분명하지 않으면 다시 물어 확인한다. 들었다고 그대로 보도하지도 않는다. 사건 관련자와 증거들을 교차 검증해 확인한 뒤 보도한다. 그런데 다 나와 있는 말도 자르고, 왜곡했다.JTBC는 대선 직전 두 번이나 “윤석열 후보가 검사 시절 조우형 씨에게 커피를 타 주고 대장동 관련 조사를 하지 않았다”라는 남욱 씨의 말을 보도했다.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보도 전에 조우형 씨로부터 “윤석열 검사를 만난 적이 없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그 기자는 “의혹 당사자인 조 씨보다 제삼자인 남 씨 진술이 더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라고 주장했다. 최소한 같이 보도했어야 한다. 그는 곧 뉴스타파로 옮겼다.기자는 진실이 생명이다. 사건 윤곽이 뚜렷해도 꼭 반론을 듣고, 기사에 붙인다. 이들은 녹취한 대로 보도했으니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을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하면 이미 진실이 아니다. 같은 기자로서 낯이 뜨겁다. 아니 그들을 기자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 더구나 신 씨는 인터뷰 직후 김만배 씨로부터 1억6천500만 원을 받았다. 책값으로 받았다고 한다. 돈은 정직하다. 신 씨는 책값이라고 자신을 속였는지 모르지만, 김 씨 생각은 달랐다고 확신한다.JTBC는 그나마 사과했다. 뉴스타파는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했다. 기자는 가난해도 자존심과 사명감을 먹고사는 직업이다. 진실을 포기하면 기자가 아니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9-17

민심에 길이 있다

김진국 고문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단식 농성장에서 지난 5일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방문해 극단 정치를 자제하라고 충고한 것이다. 맥락을 보면 단식을 그만두라는 말로도 들린다. 이 대표의 표정이 굳어졌다.‘개딸’이 무서워서도 이런 충고를 하는 정치인이 거의 없다. 곧 총선이다. 공천도 받아야 한다. 곰곰이 따져보면 이 대표를 비난한 게 아니다. 이 대표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조언이다. 김 의장은 민주당 출신이지만 국회를 대표하는 국회의장이자 정치원로다. 국회의장은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는 게 관례다. 그런 점에서 사심(私心) 없는 그만이 할 수 있는 고언(苦言)이다.그의 말을 길게 인용한다. 김 의장은 “정치라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이라며 “국민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하고, 잘못한다고 보질 않는다”라고 말을 꺼냈다.“벌써 두 번이나 민주당이 본회의에서 일방적으로 법안을 통과시켰고,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사전에 예고되거나 그렇게 될 것이 분명한 사안인데도,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법안) 단독 처리를 반복하는 것이 과연 민주당을 위해서도 옳은 것인가. 여당이 아예 대안을 안 내놓으면 어쩔 수 없지만, 대안이 있는 경우엔 민주당이 주장하는 10개 중 5~6개만 살릴 수 있으면, 그래서 국민의 70~80%가 ‘그만하면 됐다’고 할 수 있으면, 그것이 제대로 된 의회민주주의가 아니겠나. 그래서 어떤 것이든 일방적으로 처리하기 전에 조정 작업을 해보려고 노력한다. 민주당에서도 좀 협력해달라.”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는 불안하다. 정치인의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다수결이 원칙이다. 그렇지만 다수결로만 선택한다면 대통령 한 사람만 뽑으면 된다. 국회는 왜 구성하나. 국회의원들이 무조건 당론 투표만 하고, 대화도 타협도 없다면 정치는 극한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대통령과 국회 다수당이 같은 단점(單占) 정부에서는 국회가 거수기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분점(分占) 정부에서는 사사건건 정부와 국회가 충돌해 파국으로 갈 수 있다. 민주주의 제도를 설계한 사람들이 이 점을 간과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가면 결국 양측이 모두 손해고, 나라가 망하는 길이다. 정치인의 윤리와 소명 의식을 믿은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대화와 타협은 꼭 필요한 덕목이 다.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미리 경고한 법안을 여당과 협의 없이 단독으로 밀어 붙이면 법안이 국회로 돌아올 게 뻔하다. 그렇다고 거부권을 무력화할 만큼 재적의원 3분의 2 의석을 확보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유도하고, 그 법안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적 노림수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굳이 법안 단독 처리만이 아니다. 인사청문회도 야당은 반대, 정부는 임명 강행이 관행처럼 굳어간다. 여야의 대화가 실종됐다. 윤석열 대통령의 책임도 크다. 이재명 대표가 검찰의 수사를 받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야당과 대화를 포기하고, 야당 요구를 일체 외면하는 일방통행은 그가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다.내년 총선은 또 하나의 고비다. 지금의 여소야대(與小野大)는 떠안은 것이지만 내년 총선 결과는 윤 대통령 임기 전반기에 대한 심판이다. 선거에서 지면바로 레임덕이다.현행 헌법이 제정된 1987년 이후 대통령의 거부권이 행사된 것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7건, 노무현 전 대통령이 6건, 이명박 전 대통령이 1건, 박근혜 전 대통령이 2건, 윤 대통령이 2건이다. 여대야소였던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적은 건 당연하다. 군인 출신이고, 권위주의 정부의 관성이 남아 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횟수는 가장 많지만 가장 타협적으로 국회를 운영했다. 야당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국회에 정치가 살아 있었다. 민심이 야 3당을 지지했기 때문이다.요즘 같은 정치로는 격렬한 지지자만 동조할 뿐 중간층은 외면한다. 단식으로는 뒤집을 수 없다. 김 의장의 지적대로 양보하고, 타협하면서 얻어내려고노력할 때 민심도 얻게 된다. 중요한 것은 민심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9-10

당론으로 징계감 아니라고 말해보라

김진국 고문 가재는 게 편이었다. 국회 윤리위원회 제1 소위가 지난달 30일 거액의 암호화폐(코인) 보유와 국회 회의 중 투자로 비난받은 김남국 의원 제명안을 부결했다. 거센 여론의 비난을 받았지만, 시간을 끌다 결국 유야무야(有耶無耶) 끝나가는 셈이다. 국회 윤리위가 늘 그런 식이다.21대 국회 들어 49건의 징계안이 제출됐지만, 실제로 징계받은 사람은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하나다. 다수당인 민주당이 본회의에 직권 상정한 덕분이다. 민주당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강행 처리 때 법사위원장석을 점거했다고 징계했다. 20대 국회 47건, 19대 국회 39건도 모두 흐지부지됐다. 그 가운데 75건은 임기가 끝날 때까지 처리하지 않고 뭉개다 저절로 사라졌다.김남국 의원은 국회 상임위나 본회의 도중 수백 차례 코인 거래를 했다. 코인에는 젊은이들의 피눈물이 담겨 있다. 부동산과 취업 문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코인 열풍이 불었다. 대부분 큰 손실을 봤다. 의원들에게 백지신탁을 요구하는 건 공직을 이용한 불공정 게임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코인은 주식보다 더 불공정한 게임이다. 그것도 국정을 수행하는 중에 투자해 수십억 원의 수익을 올렸다.국회 윤리심사자문위원회는 지난 7월 20일 김 의원의 의원직 제명을 권고했다. 외부 인사 8명으로 구성돼 그런 결론을 냈다. 그러나 윤리위 소위원회는 국민의힘 3명, 민주당 3명, 6명이다. 표결 결과 3 대 3이었다. 민주당 소속 의원 3명이 모두 반대한 것이다. 김남국 의원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이었으나 코인 논란으로 지난 5월 탈당했다. 그러나 민주당 김종민 의원은 이재명 대표가 지시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남국 의원의 부도덕성은 결국 민주당의 책임, 이재명 대표의 책임이 될 수밖에 없다.김 의원이 탈당한 것도 결국 눈속임이다. ‘검수완박’ 법안을 처리하기 위해 위장 탈당했던 민형배 의원을 다시 복당시킨 데 이어 재산 축소 신고로 공직선거법 위반 유죄 선고를 받은 김홍걸 의원을 출당했다가 복당시켰다. 명분이 없다. 지금도 성추행 혐의를 받는 박완주 의원, 정대협 공금 유용과 관련한 윤미향 의원, 돈 봉투 살포와 관련한 윤관석·이성만 의원 등이 탈당해 무소속으로 있지만 모두 민주당 의원처럼 움직인다. 탈당과 제명이 민주당의 책임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것도 몇 달을 못 참고 복당시킨다. 국민의 눈만 잠시 속이자는 거다.민주당 의원들은 코인을 보유한 다른 의원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다른 사람도 문제가 있으면 처벌하면 된다. 추가로 코인 거래 조사를 하겠다던 김상희·김홍걸·전용기 의원도 문제없다며 최근 조용히 끝내버렸다. 도긴개긴이니 모두 눈감아주자는 건 결국 의원들의 짬짜미다. 분노한 국민을 또다시 속이는 일이다. 더군다나 김남국 의원은 코인 보유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태원 참사, 법무부 장관 청문회처럼 심각한 국정 논의 중에도 수백 차례 코인 거래를했다. 가난 코스프레를 하고, 진상 조사 과정에도 수없이 거짓말을 했다.또 김 의원이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는 핑계다. 민주당 의원들은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탈당과 복당을 반복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는 있나. 지금 탈당하고, 불출마 선언을 하는 것은 의원 자격이 없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임기는 왜 채우려 하나. 내년 4월 총선까지 무엇을 할 생각인가. 활동을 못 해도 억대 세비는 챙기겠다는 욕심인가.결국 국민 여론보다 의원끼리 의리가 중요하다. 다른 의원들도 그 정도 약점은 안고 있다는 고백일 수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징계감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게 정직하다. 외부 인사로 구성된 자문위는 의원직 제명을 권고했는데, 의원으로 구성된 윤리위는 아무 이유도 없이 뭉개버렸다. 무용지물인 이런 윤리위로는 부패 정치인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표결 의원들도 비공개회의에 숨어서 오물을 덮지 마라. 당당하다면 공개회의에서 자기 의견을 밝혀라. 그리고 책임을 져라.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9-03

쪼잔해 보이면 큰 정치 못한다

김진국 고문 오늘(28일)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취임 1주년이다. 1년 전 그는 대선 패배 5개월 만에 77.77%를 얻어 당 대표에 취임했다. 그러나 지난 1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내내 ‘사법 리스크’에 시달렸다. 그 사이 민주당의 지지율은 고전하고 있다. 이 대표의 ‘리스크’가 그대로 민주당에 부담을 주고 있다.대선에 패배하자마자 대표로 복귀한 건 이례적이다. 경쟁자들은 사법 리스크에 대비해 ‘갑옷’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당 대표가 아니었다면 수사의 진척이 더 빨랐을 수 있다. 그렇지만 ‘절대 방패’는 아니었다. 이 대표는 검찰 조사를 네 번 받았다. 곧 ‘쌍방울 대북 송금’ 의혹으로도 소환될 예정이다. 구속 영장 청구가 임박했다. 내년 4월 총선이라 공천을 둘러싸고 당내에서도 논란이다.검찰이 정치의 주체가 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정치가 사법의 치외법권이 되어서도 안 된다. 정치에는 부패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국민의 불만도, 걱정도 거기 있다. 분명한 증거만 있다면 정치 부패는 엄단해야 한다는 게 다수 국민의 희망이다.그런 점에서 이 대표의 대응은 적절하지 않다. 정치지도자다운 당당함보다 법의 허점을 파고들어 어떻게든 처벌을 피하려는 안간힘 같은 인상을 준다. 어떤 탤런트는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라고 말했다. 국민의 믿음을 먹고, 희망을 대변하는 지도자라면 쪼잔한 행보는 피해야 한다.검찰이 30일 소환한다고 하자 이 대표는 (이번 주에는)“일정상 도저히 제가 시간을 내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내일(24일) 오전에 바로 조사받으러 가겠다”라고 말했다. 검찰이 거부해 24일 출석은 무산됐다. 또 8월 31일까지 소집해놓은 임시국회 회기를 ‘25일까지’로 단축했다. 비회기 중 영장을 청구하라는 것이다.검찰도 소환하려면 준비해야 한다. “내일 오전 가겠다”라는 통고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사해보라는 뜻이다. 이 대표 조사에 반영해야 할 이화영 전경기도 부지사의 재판이 이 대표 지지자들의 방해로 지체되고 있다. 이 대표는‘불체포 특권’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회기 중에 구속하려면 본회의에서 투표해야 한다. 민주당이 분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불체포 특권을 포기하겠다면 민주당 의원들에게 찬성하라고 말하면 된다.당당하면 소환 날짜가 무슨 상관인가.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에서 조사받겠다고 신경전을 펼치는 것은 쪼잔해 보인다. 불체포 특권을 던지기로 했으면 부를 때 나가면 된다. 한 사람의 체포동의안 표결을 피하려고 국회의 회기를 줄이고, 날짜로 씨름하는 것 역시 좀스럽다.이 대표는 변호사다. 재판에서 유불리를 따지는 게 체질일 수 있다. 그럴수록 국민 눈에는 혐의가 짙어진다. 국민이 궁금한 것은 범죄 혐의의 사실 여부다. 대장동 개발에서 1000억 원이 넘는 이익을 삼킨 민간 업자들로부터 특혜의 대가가 없었나. 백현동 특혜의 대가는 없었나. 쌍방울의 대북 송금을 이용해 방북하려 한 것은 아닌가.이런 의혹들에 정면으로 답변해달라는 게 국민의 요구다. ‘증거를 대라’, ‘불법으로 취득한 증거는 효력이 없다’라며 ‘법비’(法匪)나 쓰는 법 기술로는 국민을 설득하지 못한다. 무죄 가능성이 1%만 있어도 일반 국민은 보호받는다. 일반 국민은 검찰 수사에 문제가 있으면 무죄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는 다르다.검찰이 어떻게 하든, 국민이 무죄라고 믿어야 한다. 더구나 출석 시기나 국회투표의 유불리를 따지는 건 국민을 답답하게 만든다. 가장 좋은 방어는 ‘진실’이다.쌍방울 김성태 전 회장과 이화영 전 부지사가 모두 쌍방울 대납을 인정했다. 김 전 회장이 조폭 출신이라고 공격한다고 뒤집을 수 없다. 더구나 경기도 법인카드로 음식을 사 먹고, 생활용품을 사들인 것을 모른다는 말로 넘어갈 수는 없다. 공무원을 머슴이나 하녀처럼 부리고도 모른다고 해서는 믿음을 주기 어렵다. 해외여행, 골프를 함께 한 부하직원을 모른다고 하면 누가 믿겠나. 설령 그렇게 재판은 넘길 수 있어도, 국민이 나라의 운명을 맡기겠나. 공직자의 가장 큰 악덕은 거짓말이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8-27

다양성을 존중해서 자유민주주의다

김진국 고문 한·미·일, 3국이 19일 ‘캠프 데이비드 합의’를 발표했다. 이로써 동북아의 신냉전 구도가 더욱 뚜렷해졌다. 북한 핵무기 등을 겨냥한 군사 안보는 물론 신흥 기술을 보호하는 경제 안보까지 3국이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선언에 그치지 않았다. 매년 정상회담을 열기로 했다. 안보실장, 외교·국방·재무·산업부 장관 사이에도 협의 틀을 만들었다. 새로운 의무를 부과하는 동맹이 아니라고 했지만, 오히려 더 굳건하게 발전할 수 있는 구조다.국제 정세와 3국의 리더십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덕분이다. 한반도는 강대국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지점이다. 게다가 적대적으로 분단 상태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위험하게 불장난한다. 중국 굴기(5D1B起)로 미·중 대결이 날카롭다. 우크라이나 침략을 계기로 미·러 갈등이 세계 경제를 흔들고 있다.북·중·러, 세 나라가 더 가까워졌다. 미국은 태평양 건너 한국과 일본의 협조가 절실하다. 북한 핵 위협이라는 당면 위기가 한국과 일본을 미국에 밀착하도록 몰아간다. 여기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외교 리더십, 윤석열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력이 돌파구를 만들었다.한·미·일 협력체제의 가장 큰 걸림돌이 한·일 관계였다. 북·중·러가 흔들기 쉬운 가장 약한 고리이기도 했다. 윤 대통령으로선 국내 정치에서 큰 부담을 각오하고, 과감한 결단을 했다. 더구나 여소야대 상황에서 집권 전반기를 마치고, 내년 4월 총선을 치러야 한다. 임기 후반의 승패가 걸려 있다. 일본 문제는 언제나 비인기 정책이다. 그런데도 정면 돌파했다.8·15 경축사에서 그 기초를 깔았다. 우리 현대사를 자유민주주의와 공산 전체주의의 대결로 압축해, 세계의 자유·평화·번영에 이바지하는 것을 국가 과제로 설정했다. 한·미 동맹 70년의 연장으로 한·미·일 3국 협력체제를 그리고 있다. 광복절 경축사로는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있었지만, 캠프 데이비드 3국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던 셈이다.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대통령의 단호한 결기를 평가한다. 그렇지만 몇 가지 짚어야 할 대목이 있다.대통령은 국민 통합의 상징이다. 자유민주주의는 포용이다. 윤 대통령은 “공산 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라고 말했다. 그말이 맞는다. 하지만 민주주의·인권·진보 가치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가치에 적대적 선을 긋는 것으로 비쳐서는 안 된다.또 그는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라면서 “속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야당과 시민단체를 반국가세력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프레임 전쟁으로 비칠 수도 있다. ‘빨갱이’, ‘종북’, ‘토착왜구’처럼 총선을 겨냥한 또 다른 ‘딱지’ 붙이기여서는 안 된다.최근 한국 외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널을 뛰고 있다. 3국 협력체제는 역내안보 질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내부 공감대를 만드는 과정 없이 밀어붙였다. 정권과 관계없이 효과를 지속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최근 윤 대통령을 조문한 노사연 씨에게 ‘개딸’들은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이철규 국민의힘 사무총장은 “멀쩡한 배에 구멍이나 내는 승객은 승선할 수 없다”라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온 사회가 양극으로 치닫고 있다. 윤 대통령과 참모들의 대화가 일방통행이고, 앞에서 입바른 소리를 못 한다는 말이 아직도 들린다.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 분들만 한 게 아니다. 실체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국제공산주의에 기대한 분들도 있다. 북한의 선동, 심리전, 통일전선 전략이 계속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모든 시민운동, 야당 활동에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윤 대통령 지지도는 30%대에 머물러 있다. 귀를 닫고 극단적인 편향성으로 스스로 고립되면, 정권 재창출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훌륭하다. 관용적이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소수파를 포용하기 때문이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8-20

“내 새끼가 아니다…”

김진국 고문 “내 아이는 왕의 DNA를 가졌기 때문에 왕자에게 말하듯 말해라.” 한 교육부 사무관이 자식의 담임교사에게 이런 메일을 보내 충격을 던졌다. 보도에 따르면 한 사설 자녀 교육 지도 단체가 부모들에게 가르친 내용과 유사하다고 한다. 장애가 있는 아이가 왕의 DNA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양육하라고 부모를 교육한 내용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도 있다.그렇지만 ‘왕의 DNA’를 가진 아이가 그 공무원의 자식만이 아니다. 그 반에 있는 아이들 모두에게 해당한다. 그런데 “또래의 갈등이 생겼을 때 철저히 편들어 달라”고 요구했다니 자기가 실천할 것을 교사에게 요구하는 난독증(難讀症)인가. 자기 아이 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새끼 지상주의’를 전파하는 건가. 그는 “나는 담임을 교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압박하고, 실제로 직전 담임교사를 직위해제 시켰다. 이런 사람이 교육부 고급공무원이라니 더 어이가 없다.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정황상 학부모의 갑질 때문이라고 교사들은 의심한다. 전국의 교사가 분노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는 영화 제목에나 써먹는 말이 됐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건 케케묵은 잔소리다. 스승에게 주먹질하는 세상이다. 버릇없는 학생을 훈계하지 못하고 참으며, “내 새끼 아니다”라고 주문을 왼다고 한다. 스승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우리 사회에 분노가 가득하다. 취업이 안 되는 사회적 원인이 크다. 휴대폰에 갇혀 가족이고, 친구고, 대면 소통이 단절된 기술적 요인도 있다. 그렇지만 의사가 치료해야 할 부분은 논외로 하더라도, 누군가는 사회 규범을 가르쳐야 할 것 아닌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개인의 쾌락만이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에 기여하고, 작은 어려움은 이겨내는 인내심도 길러야 한다. ‘왕의 DNA’를 가지고, 안하무인인 아이들만 설친다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겠나.자식 문제는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보면, 고위공직자들도 가장 큰 약점이 자식이다. 몰래 자식에게 재산을 넘기려는 사람, 자식의 교육·병역·국적·취업을 위해 편법을 쓰는 사람…. 아득바득 불법으로 재산을 불리는 것도 결국 자식을 황제로 살게 하겠다는 욕심 아닌가.대통령들도 예외가 아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아들 김현철 씨가 국정에 개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재임 중 아들을 구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 손명순 여사는 “이러려고 대통령 됐느냐”라며 울었다고 한다. 그는 회고록에서 “진작 해외에 내보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라고 썼다.김대중 전 대통령은 임기 중에 아들 삼 형제를 모두 비리 혐의로 구속했다. 그는 야당 총재 시절에도 아들에게는 엄하게 하지 못했다. 장남 홍일을 권노갑 전 의원 지역구이던 목포에 공천하면서,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서…”라며 반대 의견에 입을 막았다.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극으로 몰아간 것도 자식 문제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던 어느 날 정상문 비서관이 권양숙 여사와 돌처럼 굳어진 얼굴로 심각하게 이야기했다. ‘(아들) 건호가 관련되었다는 500만 달러, 아내가 받아 쓴 3억 원과 100만 달러’(자서전 ‘운명이다’) 문제였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 “그때만 해도 미국에 있는 아이들에게 쓴 것인지 몰랐다”라고 썼다. 역시 자식 문제였다.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집안이 풍비박산한 가장 큰 배경도 자식 사랑이다. 이미 박근혜 정부 때 최순실 씨의 딸 사랑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왔는지를 보고 배운 이후다. 그런데도 자식 문제에는 눈이 멀어버린다.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은 평생 두 딸에게 재산을 다 쏟아부었지만, 가난뱅이가 되자 외면당하는 노인 이야기다. 두 딸은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다. 뒤늦게 고리오는 “부모는 자식에게 생명을 주지만, 자식은 부모에게 죽음을 준다”라며 정곡을 찌른다.자식 사랑을 나무랄 순 없다. 하늘이 정한 본능이다. ‘딸 바보’, ‘아들 바보’가 미담일 수 있다. 그래도 내 새끼밖에 안 보이는 사람이, 사회 지도층으로 존경받아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