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 고문
영화 베테랑에서 형사역을 한 황정민이 이렇게 외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가진 것이 없어도 자존심은 있다는 말이다. 형사로서 자존심은 무엇인가.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범죄자 잡는 책무를 잊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범죄자가 돈으로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는 게 자존심이다. 범죄자가 돈으로 형사를 우롱하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기다.다른 직업에도 끝까지 지켜야 하는 이런 자존심이 있다. 하찮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그런 자존심을 지키면 존경받는다. 장인(匠人)으로 높이 평가된다.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자존심을 버리는 순간 ‘쓰레기’가 된다. 그런 쓰레기는 지위가 높은 계층에 오히려 더 많다.‘가오’(顔)는 일본말로 얼굴이라는 뜻이다. 일종의 ‘체면’ 같은 건데, ‘자존심’이 가장 가까운 말일 듯하다. 속된 표현으로 ‘쪽팔린다’라는 말이 있다. 부끄러워 체면이 깎인다는 뜻이다. 이때 ‘쪽’도 얼굴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니, ‘쪽’을 파는 건 ‘가오’를 잃어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이 속된 표현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 건달이다. 건달조차 지키고 싶어 하는 마지막 자존심이 있다. 그런데 사회 지도층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불량배도 지키려는 그 선을 넘어 창피한 짓을 거리낌 없이 하고 다니는 걸 본다. 특히 우리 정치권이 그렇다.요즘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보면 낯이 뜨겁다. 부끄러워서 보수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오죽할까. 어디 가서 국민의힘 지지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당내 경쟁이라도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당내 총질이라서 문제가 아니다. 공격하더라도 합리적이고,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억지 의혹을 막무가내로 쏟아낸다. 저 정치인이 저런 사람이었나, 실망과 개탄을 금할 수가 없다.평소 가졌던 좋은 이미지와 전혀 다른 언행에 보는 사람마저 ‘멘붕’에 빠지게 한다. 곧 비슷한 근거라도 내놓으려나. 나중에 경쟁 정당과 대결할 때를 대비한 예방주사인가. 온갖 상상을 다 해봐도, 그 사람에 대해 가졌던 기대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 악몽 같다. 더 힘있는 권력자가 꼼짝 못 할 약점을 쥐고 사주하나. 어떤 거절 못할 선물로 유혹했나…. 아무리 그래도 평생 쌓아온 ‘가오’, 자기 이름을 버려야 할 정도일까.야당으로 고개를 돌려도 다르지 않다. 국회 법사위는 정청래 위원장은 기상천외하게 독주한다. 대한민국을 지켜온 장군들을 불러놓고, 조롱하고, 모욕했다. 국민의힘이 무어라 하건 듣지 않는다. 간사도 필요 없고, 여당 추천 인사는 마음대로 잘라버린다. 저러고도 ‘법대로’를 외치면 대통령의 ‘법대로’를 무슨 낯으로 비난할까 싶다.민주당 강민구 최고위원은 “민주당의 아버지는 이재명 대표”라며, 90도 폴더인사를 했다. 최고위원으로 발탁해 줘 아무리 감읍했다 해도 그런 말이 나오나. 민주당 김준혁 의원은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과 퇴계 선생 등을 성적으로 모욕했다. 양문석 의원은 편법 대출 논란으로 선거 때 민주당 지도부조차 버린 카드 취급했다. 그런데도 당선됐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워낙 큰 탓이라고는 해도, 유권자도 ‘가오’가 있는 것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상당수 유권자가 ‘묻지마 지지’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잘해도, 못해도, 내 편만 든다. ‘가오’를 버린 유권자 탓에 정치인만 오만해진다.가수 김호중 씨가 음주 운전으로 논란을 빚었지만, 열성팬은 지지하고, 안타까워했다. 연예인은 예술적 재능이 ‘가오’다. 도덕적 결함이 있어도 응원하는 팬심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는 왜 하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인가. 거창하게 국민을 위한다고 떠들지 않나. 더러운 행동과 속임수를 써서라도 자리만 얻으면 명예는 저절로 굴러들어 오나. 얼굴에 철판을 깔고, 허공을 쳐다 보며, 성공을 위한 주문을 왼다. 체면을 내던지고, 눈을 질끈 감고, 부끄러운 말을 쏟아내는 정치인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든다. 그렇게까지 해서 무엇을 얻고 싶은가. 그게 영원히 갈 것 같은가. 아무리 욕심이 나도 쪽팔리는 짓은 하지마라.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