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튼튼한 제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당연하게 주어졌다. 민주주의는 발전만 한다고 생각한다. 경험으로 그렇게 배웠다. 후퇴나 파괴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교본처럼 생각하는 미국 민주주의의 죽음에 관해 연구한 학자들이 있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시티븐 레비츠키 교수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다. 이들은 뉴욕 타임스에 ‘트럼프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가’라는 칼럼을 기고해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이것을 발전시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라는 책에 이어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Tyranny of the Minority)라는 책을 냈다.
이들의 지적이 주목받는 건 민주주의 파괴가 군대 같은 무력이 아니라 투표장을 통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미국 같은 민주주의의 선진국에서. 그것도 많은 사람이 아니라 극렬한 소수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가 당연한 체제로 생각하고, 우리가 아무리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성으로 생각한 민주주의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원래 불안하다고 한다. 선거 결과에 대해 승복하지 않으면 균열이 생긴다고 한다. 이들의 지적을 새겨보면 한국은 더 위험한 벼랑 끝에 매달려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87년 직선제 이후 가장 큰 득표율 차(22.6%p)로 당선됐다. 그러나 야당은 승복하지 않았다. 취임 초부터 촛불집회로 흔들었다. 그것도 전임 노무현 대통령이 준비해 놓은 한미FTA의 마무리가 꼬투리였다. ‘뇌송송 구멍 탁’이라는 선동 문구가 SNS를 타고 전파됐고, 어린 학생들부터 거리로 나섰다. 동력을 받지 못하고 임기를 보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여파로 대통령직은 거저 줍다시피 했다. 역대 최대 득표 차(557만951표)다. 그러나 임기 내내 주말마다 서울 중심거리에서 ‘태극기 집회’가 열렸다.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나뉘어 세력대결을 벌였다. 반대 진영에 비해 동원 능력과 전파, 설득 능력이 떨어져 힘이 없었을 뿐, 현직 대통령에 대한 불복과 비난은 계속됐다.
윤석열 대통령도 반대 진영이 인정하지 않는다. 임기 절반도 지나지 않고 치른 총선에서 ‘탄핵’, ‘임기 단축’을 공공연히 공약으로 내걸 정도다. 국회는 국정을 논하는 곳이 아니라 전쟁터다. 선의의 비판은 없다. 전자오락처럼 오로지 상대의 힘을 빼앗아야 이기는 게임이다. 심지어 자기가 먼저 주장한 정책조차 상대측 정부가 추진하면 시비를 걸고, 방해한다.
래비츠키 교수의 지적대로 민주주의는 승복해야 굴러간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는 승복과 대화와 타협, 그리고 다시 경쟁하는 선의의 경쟁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지금처럼 누구도 승복하지 않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다음 선거를 위해 상대를 공격하는, 중단없는 정쟁 구도에서는 살아남을 길이 없다.
더구나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전파 속도가 빨라졌다. 극단적인 소수가 여론을 좌지우지한다. 전체 국민에서 차지하는 실제 비율보다 몇 배 강력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팟캐스트에서 시작해 유튜브에 이르기까지 소수파의 확성기가 점점 더 커졌다. 이 확성기들은 극단 세력의 자극적인 포퓰리즘에 더 열광한다는 특징이 있다.
김경수 전 경남지사는 ‘킹크랩’에서 실제 세력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길을 찾았다. 그 전에 유시민의 개혁국민정당(개혁당)은 온라인 대화방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 전투적 소수세력의 효용성을 입증한 원조격이다. NL계열이 민주노동당을 장악하는 과정은 소수파의 힘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이제 강력한 ‘전투적 소수’는 ‘노빠’(노무현 지지세력)에서 ‘문빠’(문재인 지지세력)로, ‘개딸’(이재명 지지세력)로 진화하면서 정치권의 공식이 됐다. 지난 총선에서는 조국신당이 새로운 ‘강력한 소수집단’으로 등장했다. 보수는 경쟁력이 비교가 안 된다. 설득력도, 확장성도 없다. 문제는 전투의 승패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존립이다. 지블랫 교수의 걱정거리가 미국보다 한국에 먼저 와 있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