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지키는 군대·경찰 없던 1953~56년까지 헌신적 수호 활동 1954년 日 전함 2척을 박격포 발사해 상륙 막은 ‘독도대첩’ 전훈 의용수비대기념관엔 1905년 패배한 러 발틱함대 유물도 보관 △울릉도 최고 부자 홍순칠의 의용수비대 석포에서는 맑은 날이면 92㎞ 거리의 독도가 한눈에 보인다. 안용복 기념관을 나서면 인근에 독도 의용수비대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2개 층에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의용수비대원 33인의 독도 수호 활동을 체계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를 지키는 군대나 경찰이 없던 1953년-1956년까지 독도 수호를 위해 울릉도 주민들이 만들었던 자경단이다. 1956년 경찰에 독도 수비 업무와 장비들을 인계할 때까지 밤낮으로 독도를 지키던 의용수비대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 이 기념관이다. 의용수비대 대장은 한국전 상이용사이자 육군 특무상사 출신의 울릉도 최고 부자 홍순칠이었으며 각각 15명으로 이루어진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 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총 45명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 3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이었다. 이후 12명이 탈퇴하면서 최종적으로 수비대에 남은 인원은 33명이 되었다. 1952년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은 세 차례나 독도를 무단 침범했다. 이때 일본은 1948년 미군의 폭격 연습으로 희생된 150여명의 한국 어부들을 기려 세운 위령비를 파괴하고 독도에 시마네현 오키군 코카무라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五箇村竹島)라는 표지판을 세웠다. 이에 대항하여 홍순칠과 울릉도 청년들이 1953년 4월 20일 결성한 것이 독도의용수비대다. 의용수비대는 전쟁의 와중에 7차례나 전투를 해 일본에 빼앗길 뻔 했던 독도를 지켜냈다. 독도를 수비할 무기들도 홍순칠 의용수비 대장이 부산으로 가 울릉도 오징어를 판 돈으로 구입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3년 6월 일본 오게(大毛) 수산고등학교 연습선 지토마루 호를 독도의 서도 150m 걸 해상에서 나포해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냈으며, 같은 해 7월 해상보안청 순시선 치마루호가 독도에 접근하자 위협 사격을 가해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 싸움이 수비대가 일본에 맞서 벌인 실질적인 첫 전투이다. △ 독도침범 일본 순시성 여러차례 격퇴 1954년 5월 23일에도 해상보안청의 1000t급 무장 순시선 즈가루호가 침범하자 격퇴했고, 5월 29일에는 일본 어업 실습선인 450t급 다이센호가 침범하자 의용수비대원들이 다에센호에 승선, 격렬하게 항의해 퇴각시켰다. 1954년 6월에는 홍순칠 대장 등이 독도의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같은 해 7월 28일에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나가라호(270t급)와 구르쥬호(270t급) 2척이 동시에 위협 사격을 가하며 독도를 침범하자 의용수비대원들이 사격을 가해 격퇴시켰다. 1954년 8월 23일에는 독도를 침략하려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450t급 무장 순시선 오키호를 향해 기관총 600발을 발사해 격퇴시켰다. 1954년 10월 2일에는 2척의 전함이 동시에 독도 영해를 침범하자 대포를 발사하며 격퇴시켰다. 일본의 독도 침공 작전은 1954년 11월 21일 아침 6시경에 시작됐다. 450톤급 헤쿠라호와 450t급 오키호 두 척의 일본 전함은 동도와 서도 방향에서 동시에 독도로 접근해 왔다. 이때 독도를 지키던 의용수비대는 박격포를 발사해 두 전함의 독도 상륙을 저지시켰다. 이 전투는 후일 독도대첩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1956년 12월 30일, 무기와 임무를 경찰에 인계할 때까지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를 지켜냈다. 경찰 인계 때 10명의 의용수비대원들은 경찰 소속으로 전환해 이후에도 독도를 지켰다. 의용대원들은 독도에 상주하며 갈매기 알로 배를 채우고 빗물을 받아 마시며 독도를 지켜냈다. 울릉도 주민들도 의용대원들에게 식량을 보급하며 헌신적으로 도왔다. 이들이 후예가 지금 독도를 방어하고 있는 독도경비대다. 울릉도와 울릉도 사람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가 애지중지 하는 독도를 지켜낼 수 있었다. 아마도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섬은 독도일 것이다. 여전히 일본이 침략하러 호시탐탐 노리는 국경의 섬, 심지어 일본은 정부의 공식 섬 통계에도 독도를 자국의 섬으로 포함시켜 놓고 있다. 그럼에도 독도가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를 받는 우리 땅임을 국민들은 모두가 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독도를 다녀왔고 누구나 생애 한번은 독도에 가는 꿈을 꾼다. 그런데 육지 사람들은 독도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울릉도란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 울릉도가 없었으면 독도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울릉도가 있어서 독도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이는 역사 시대 내내 변함없는 진리였다. 고대 국가 우산국부터,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 조선, 대한민국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소중한 우리 땅 독도를 지켜온 것은 울릉도 섬사람들이었다. 울릉도 사람들이 조각배를 타고 그 험한 바다를 건너가 독도에 거처하며 해산물을 채취해 살아갔다. 독도를 침탈하려는 왜국과 일본에 맞서 싸우고 마침내 지켜낸 것도 울릉도 사람들이다. 그 증거가 바로 독도의용수비대다. △러·일전쟁의 유물도 전시된 기념관 의용수비대 기념관에는 러일전쟁의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러시아제 청동 주전자다. 1905년 러일전쟁 막바지에 발틱 함대 소속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에서 쓰던 것이다. 한동안 보물선으로 세간의 화제가 됐던 그 배다. 돈스코이호 함장은 일본에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돈스코이호는 끝까지 일본에 항전했다. 힘에 부친 돈스코이호 함장은 결국 전함을 스스로 침몰시키기로 결정한 후 러시아 해병 570명을 울릉도에 상륙시켰다. 돈스코이호는 침몰했고 이 과정에서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의 할아버지 홍재형이 러시아 해병 구제에 나서 많은 목숨을 살렸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홍재형이 돈스코이호 함장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 금화와 청동 주전자였다. 석포 마을 경로당 옆, 밭에서 노인 한 분이 잡초 제거 작업 중이다. 오래 묵혀두었던 밭에 다시 나물 재배를 시작하려고 돼지풀 등을 뽑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30여년을 뭍으로 떠돌다 노년에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49살의 늦은 나이였지만 당시 울릉도에는 오징어도 잘 나지 않았고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먹고 살길을 찾아 뭍으로 나갔다. 뭍에서는 주로 건설 현장 ‘노가다’(막노동)를 했다. 한때는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까지 떠돌았다. 주로 대구의 건설 현장에 있으면서 ‘노가다’ 십장을 했다. 그렇게 아이들 다 키우고 결혼까지 시키다 보니 중년의 사내는 어느덧 노인이 되어버렸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거리도 없고 그래서 다시 고향 쪽으로 눈을 돌렸다. 대부분의 밭은 고향 떠날 때 팔아버렸고 아주 조금 남겨둔 밭뙈기에 참고비 나물을 재배하려고 다시 개간 중이다. “옛날에는 나물을 누가 알아주지도 않았어요. 자기 먹을 거나 했지. 요새는 판로가 있으니 돈이 되지.” 겨울에는 자식들이 사는 대구의 집으로 가서 지내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울릉도에 산다. 빈집을 빌려 지내지만 그래도 고향이라 마음은 편하다. 돌아갈 고향이 있는 이는 행복하다. 고향을 잃어버린 시대. 섬을 고향으로 가진 이들은 행복하다. /강제윤(시인·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3
△ 울릉도의 오지 중의 하나인 석포 해담길 내수전 구간이 끝나면 석포-추산 구간으로 이어진다. 이 길로 들어서기 전에서 석포 마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석포마을에는 안용복기념관과 의용수비대기념관, 석포전망대 등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일주도로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석포는 울릉도의 오지였다. 정들포, 정들께라고도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울릉도에서도 워낙 험한 산속 오지라 처음 찾아왔을 때는 막막하지만 막상 떠나려면 정이 들어서 떠나기 힘들 정도로 정이 많은 산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들포였다. 석포 일출전망대는 의용수비대 기념관과 붙어 있는데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망루 역할을 했다. 전망댕에서는 울릉도의 3대 비경인 삼선암과 관음도, 공암을 모두 볼 수 있다. 1693년 日 어부들과 조업권 실랑이 벌이다 오키섬으로 끌려가 에도 관백 앞에서 ‘독도는 조선땅’ 주장, 출어 금지 서계 받아내 1948년 美 B29 독도 해상 폭격 연습… 어민들 집단 희생 비극 안용복 기념관은 왕조가 버린 섬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안용복(安龍福. 1658~?)을 비롯한 백성들의 분투를 기념해서 지어진 건물이다. 안용복의 제1차 도일은 1693년 3월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용복은 울산 출신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호키(伯耆)주 요나코무라(米子村)에서 온 일본 어부들과 마주쳤는데 조업권을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 숫자가 적었던 탓에 안용복은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 오키(隱岐) 섬으로 끌려갔다. 여러 경로를 거처 에도(江戶) 관백의 심문을 받고 울릉도,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주장을 하고 납치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결국 “죽도(울릉도)와 자산도(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막부의 서계(書契)를 받아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인들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불법 월경을 해 울릉도 근해에서 조업을 계속했다. 안용복은 조정의 관원으로 위장한 뒤 2차 도일을 감행해 담판을 짓고 돌아오려 했으나 실패하고 송환됐다. 조선 조정은 그런 안용복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사형을 시키려다 감형해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유배 이후 안용복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지금 안용복은 장군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후대의 추대일 뿐이고 그가 살던 당시에는 전라 좌수영의 노꾼 출신이 어부였다. 국가가 못한 일을 해낸 백성. 안용복은 장군 그 이상으로 추앙받고도 남을 공적을 세웠다. 장군들도 지키지 못한 독도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 안용복기념관의 독도조난어민위령비에 서린 한 안용복 기념관에는 독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주는 전시물도 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것 말고 우리가 독도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일까? 독도에서도 미군에 의한 한국인 양민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안용복 기념관에 그 증거가 전시되어 있다. 우리 군경에 의한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시기 양민학살은 많이 밝혀졌지만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은 충북 영동군 노근리 철교 밑에서 한국인 300여명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 사건 정도만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섬 지역에서도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적지 않았다. 여수의 섬 안도에서의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도 그 중 하나다. 한국전쟁 시기 여수에서 섬으로 피난을 오던 300여명의 양민을 실은 피난선을 미군 제트기가 무차별 폭격했다. 안도의 이야포 해변이 그곳이다, 이 폭격으로 한국인 150여명이 숨졌다. 그 증거가 안용복기념관의 ‘독도조난어민위령비’에 새겨져 있다. 1948년 6월8일 미군은 사전 통보도 없이 독도를 타깃으로 폭격 연습을 시작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미 공군 제93중폭격비행단의 B29 폭격기 20대가 독도 주변 해상에 무차별 폭탄을 투하했다. 이 폭격으로 독도 앞바다에서 미역을 채취하고 조업하던 울릉도와 강원도 어민들이 집단으로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사건 발생 후 미 군정청은 어선 11척이 파괴되고 어민 1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조업 중이던 어선이 30여척이었고, 사상자도 150명이 훨씬 넘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생존 어부들은 “30여척의 동력선에 한 척당 5~8명이 승선했으니 150명 이상 숨졌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 어민들 피해에 대한 정당한 조사 이뤄져야 당시 독도는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제1778호(1947년 9월16일)에 의해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지로 지정돼 있었다. 미군정청은 의도적이 아니었다고 변명했지만 30여척이나 조업을 하는데 미군 조종사들 눈에 어선들이 보이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묻혀버릴 뻔했던 미군이 벌인 참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건 다음날인 6월9일 독도로 조업을 나온 어민들에게 구조된 장학상씨(당시 36세·1996년 사망) 등 목격자 덕분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선들은 조업하고 일부 어민들은 미역과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다 독도로 접근하는 한 무리의 비행기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이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난사했다고 한다. 모두 4차례에 걸친 폭격과 총격으로 어민들 대다수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미국은 처음 폭격 사실 자체를 부인하다 6월17일이 되어서야 폭격을 시인했다. 7월 9일 미 군정청은 소청위원회를 구성해 피해 내용을 조사했고, 1명을 제외한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완료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며 사건은 덮어지고 말았다. 진상규명도, 피해 배상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덮어지자 강원도와 울릉도 주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1950년 6월 8일, 독도 동도의 몽돌해안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세웠다. 당시 위령비 제막식에는 조재천 경상북도 도지사와 해군 의장대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참혹한 사살이 조난이라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우리는 미국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는 참혹한 시대를 살았다. 비석은 1959년 유실됐고 2005년 경상북도가 독도 동도에 다시 세웠다. 원래 비석은 2015년 바다에서 발견돼 안용복기념관에 보관되고 있다. 울릉도 주민들은 매년 6월8일 독도에서 희생 어민 위령제를 지낸다. 기상이 나빠 독도 접안이 어려우면, 안용복기념관 앞에서 위령제를 지낸다. 많이 늦었지만 정부는 이제라도 미군에 의한 독도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을 다시 규명해야 마땅하다. 조난자위령비도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비’로 다시 세워져야 한다. 수백년 전 일본의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 땅이란 문서를 받아냈던 어부 안용복의 후예인 우리 어민들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주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바로 세우고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지름길이다. 조난이 아닌 폭격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들 그들을 위한 비석을 세워야 한다.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비’. 그것만이 억울한 양민들의 죽음에 작은 위로라도 될 것 같다. 뜻하지 않게 샛길로 들어선 안용복 기념관에서 우리 역사를 새롭게 배운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2
△ 내수전 전망대 가는길 천국같은 집 한 채 내수전 전망대 가는 길, 내수전 마을 경치 좋은 곳에 홀로 들어선 집 한 채가 있다. 마당에서 앉아서도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관음도와 죽도까지 한눈에 들어오니 굳이 전망대까지 가지 않아도 그 자체로 최고의 전망대다. 노부부가 사는 집, 부부는 저동에 새집이 있지만 틈만 나면 오래 전부터 살아온 이 집에 와서 지내다 간다. 특히 여름에는 내내 이 집에서만 생활한다. 고지대라 시원하고 모기도 없기 때문이다.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틀 일이 없으니 전기세도 안 나간다. 연중 콸콸 흘러나오는 물 또한 더없이 달고 풍족하다. 천국이 따로 없다. 너른 마당은 캠핑족들에게 놀다 가라고 그냥 내준다. 그래서 해마다 텐트를 들고 와서 며칠씩 지내다 가는 이들도 많다. 어차피 산에서 쏟아지는 물 마음껏 쓰라고 한다. 사람들이 와서 지내니 말벗도 되고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그렇다고 관광객 상대로 무슨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산속이 좋다. 종일 좋아하는 노래 틀어놔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어서 더욱 좋다. 오늘도 작은 카세트에서 흘러간 옛 노래가 나온다. 노래를 들으며 할머니는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할아버지는 겨울에 땔 장작을 패고 있다. “여기 있으면 몸 안 아파요. 시내 가면 가만히 들어앉아 테레비나 보지. 공기도 좋고 앞에 훤하니 좋아요.” 내수전 전망대 가는길 외딴 집 동해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여 캠핑족들 오면 너른 마당 제공 원시림 숲속 ‘영혼의 길’ 거닐며 진객 붉은배오색딱다구리 조우 사람들 떠난 백운동엔 구름만 할머니는 이 산중 옛집이 그리도 좋을 수가 없다. 전부 다 내 것 같고 마음이 푸지다. “돈 많으면 뭐해요. 죽어서 가져가나. 살았을 때 묵고 살면 되지. 마음이 부자라야지.” 할아버지와는 동갑인데 호적에는 4살이 더 많게 올라 있다. 사촌 형 호적에 대신 오른 바람에 그리됐다. 할머니는 나물 농사를 지었고 할아버지는 배 만드는 목수가 천직이었다. 비탈밭에 나물 농사를 많이 했지만 아들이 와서 다 처내 버렸다. 부모님 고생 그만하라고. 그래서 나물 밭은 참고비 밭만 아주 쪼금 남았다. “나물 중에는 참고비가 젤 맛있어요. 고사리 증조할아버지쯤 되지.” 할아버지는 본래 포항, 제주, 부산, 울산 등지를 떠돌며 배 짓는 목수로 일하다 울릉도로 들어와서는 오징어 배 짓는 ‘도대목’을 했다. 배 짓는 목수 중에서도 우두머리를 하셨단 말씀이다. 배 목수는 집 목수보다 기술을 몇 배 위로 쳐준다. 그만큼 공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배 목수는 집을 지어도 집 목수는 배를 못 짓는다. 죽은 사람 널(관)도 많이 짰고 강고(노 젓는 배)들도 많이 만들곤 했다. FRP로 배를 만들게 되면서부터 일거리가 없어져 배 목수 일을 그만뒀다. “옛날엔 죽도 앞바다에 오징어가 바글바글했어요. 초저녁에 나가 한배 잡고 또 날 샐 때 가서 한배 잡아오고 그럴 정도였죠.” 그 시절에는 명태도 많이 났다. 처녀 시절 할머니는 땔감용 나무하러 다니고 오징어 내장 따서 돈 벌러 다니느라 학교 공부를 못했다. “학교는 문 앞에도 안 가봤어요.” 마을 사람들이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키가 안 큰다고 걱정 할 정도였다. “일 좀 그만 시키라고 시집 못 보낸다고 그랬어.” 동생들이 많아 동생들 업어 키우고 물 길러 다니라고 학교를 안 보내줬다. 7살 때부터 동생들 업어 키웠다. 명태, 오징어 손질해서 돈 벌어 동생들 가르치고 25살 때 중매로 신랑을 만나 결혼했다. “신랑을 잘 만났어요.” 저동 마을, 한동네 사는 총각이었다. 지금의 할아버지다. “봐라 세월이 얼마나 좋으냐.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요.” 기나긴 인고의 터널을 지나 비로소 찾은 안식. 그 안식의 시간이 할머니는 더없이 행복하다. 이 또한 울릉도가 주는 행복이다. 인사를 드리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귓가에 울리는 할머니의 충고 말씀이 가슴을 울린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부지런히 놀러 다니소.” 일 열심히 하지 말고 부지런히 놀러 다니라니 이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인가. 내수전 마을 삼거리에서 석포 방향으로 5분 남짓 걸으면 시멘트 도로가 끝나고 다시 숲길이 시작된다. 지금부터는 포근한 흙길에 더없이 호젓한 숲속 오솔길이다. 이 숲길에는 중간중간 저동에서 석포로 전기를 운반하는 전선과 전봇대가 눈에 띄는데 이 또한 사람이 오고 가던 옛길의 흔적이다. △ 옛 개척민 정매화가 살던 골짜기 그 외에는 내내 원시림의 숲길이다. 육지에는 사라지고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너도밤나무와 키 작은 대나무인 이대, 동백나무 들이 길을 따라 도열해 있다. 가을 숲은 더 바랄 나위 없이 고요하다. 이 고요함 속에서는 작은 시냇물 소리마저 요란하게 들린다. 이 또한 고요함의 증거다. 또 한동안 길에만 몰두해 걷는데 느닷없이 쉼터가 나타난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정매화골이다. 옛날 개척민 중에 정매화란 이가 살던 골짜기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매화가 살다 간 뒤 이곳은 1962년 9월부터 이효영씨 부부가 삼남매와 살았다. 이씨 일가는 1981년까지 19년을 이 외딴 골짜기에서 살았는데 이씨 부부의 이름이 남은 것은 그들이 이곳에 살면서 폭설, 폭우에 조난 당하거나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을 300여명이나 구조한 미담이 있기 때문이다. 1981년 11월27일 자 대구 매일신문에 기사가 실렸다. 이씨 부부는 1982년 선행군민 표창을 받았다. 다시 길을 걷는다. 숲속의 오솔길은 흙길이다. 이 흙길은 오래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다. 흙길은 발바닥이나 무릎에도 무리가 가지 않는다. 충격을 반사해내는 시멘트 길과 달리 흙바닥이 충격을 흡수해 주기 때문이다. 길가의 오래된 나무들이 뿜어내 주는 피톤치드는 내 몸 안의 나쁜 세균들만이 아니라 내 영혼을 좀먹는 병균들까지 박멸해 주는 듯하다. 어찌 영혼의 길이 아닐 수 있겠는가? 오늘은 이 숲길에서 진객을 만났다. 나무 둥치에 몸을 바짝 붙이고 먹이 사냥에 열중해 있는 새. 깃털이 아름다운 붉은배오색딱다구리. 한국에서는 번식이나 월동을 하지 않고 우연히 들르는 나그네새라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한다. 경기도 광릉, 옹진군 소청도 등에서 관찰된 기록이 있는데 봄에 북상하고 가을에 남하한다. 남쪽 먼 나라로 가다가 울릉도에 들렀다. 반갑구나! 나그네새여. 그대도 나그네 나도 나그네. 주린 배 많이 채우고 가시라. △ 구름도 쉬어가는 백운동마을 풍경 이제부터 길은 울릉읍 저동을 완전히 벗어나 북면 지역으로 들어선다. 울릉도의 북단이다. 숲속에 산장이 하나 있다. 예전에는 이 숲에도 몇 가구가 살았었지만 1960년대 말 김신조 무장간첩 사건 이후 외딴 집들은 모두 이주당했다. 이 숲의 꼭대기 산정에도 10여 가구가 살았었다. 백운동 마을이다. 그야말로 구름도 쉬어가는 산 정상에도 사람이 살았었다. 조금이라도 평지가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깃들어 살던 울릉도 사람들. 이제는 백운동도 폐촌이 되었고 그저 구름이나 가끔 쉬어가는 구름 마을, 진짜 백운동이 되었다. 화전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던 마을은 독거 가구 이주정책과 화전 금지 조치로 더이상 존립이 불가능해 졌고 백운동 주민들은 모두 뭍으로 떠나갔다. 그렇게 한 시대가 오고 갔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1
저동은 울릉도의 어업 전진 기지다. 울릉도의 어선들은 저동항으로 입항하고 저동항에 정박한다. 그래서 저동은 울릉도에서도 가장 어촌다운 정취가 묻어나는 곳이다. 울릉도 어선들뿐만 아니라 동해안에서 조업하는 모든 선박들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저동항은 동해 어업전진기지로 만들어졌다. 1977부터 1980까지 93억원의 예산으로 완공됐는데 최대 어선 1000척까지 정박 가능한 대형 어항이다. 전성기 오징어배만 200척 넘어 2000년대 초반까지 연간 1만t 방파제 위에 우뚝 솟은 촛대바위 저동마을 지키는 수호신장 역할 사방 둘러 온통 절벽에 쌓인 죽도 지금은 1가구가 더덕 농사 지어 △ 모시가 많은 바닷가 마을 저동 저동의 상징은 촛대바위다. 방파제 위에 우뚝 솟은 촛대바위는 저동항의 어둠이란 어둠은 다 몰아내고 세상을 환히 밝힐 태세다. 촛대바위는 저동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장이기도 한 것이다. 저동의 본래 이름은 모시개. 모시 잎이 많아 모시개라 했는데 한자화 과정에서 모시 저(紵) 자를 써, 저동이 됐다. 개는 바닷가를 이르는 한글 말이니 저동은 모시가 많은 바닷가 마을이란 뜻이다. 저동은 모두 세 개의 작은 마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큰 모시개, 중간 모시개, 작은 모시개다. 조선시대 말 울릉도 개척을 위해 탐사대장으로 들어왔던 이규원 검찰사의 울릉도 검찰일기에는 ‘대저포(大苧浦)’와 ‘소저포(小苧浦)’로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에서는 1902년부터 본격적인 오징어잡이가 시작됐다. 1910년대가 오징어잡이의 최전성기였다. 그 무렵 일본인들이 울릉도로 대거 이주해왔다. 1930년대 들어서는 오징어가 사라져버렸다. 그때 일본인들도 대부분 울릉도를 떠났고 그 무렵부터는 고등어와 정어리가 많이 잡혔다. 울릉도에서 오징어가 다시 잡히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부터다. 오징어잡이로 호황을 누리던 때는 ‘동네 개도 5천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번성했었다. 근래까지도 오징어잡이 철이면 불야성을 이루던 저동이 요즈음은 한산하기만 하다. 동해에 오징어 흉년이 든 까닭이다. 울릉도의 최대 산업기반이고 상징이기도 한 동해 오징어가 멸족되다 싶이 하면서 저동뿐만 아니라 울릉도 전체가 크게 위축되고 있다. △ 내수전에서 석포로 가는 아름다운 트레일길 올해도 울릉도 오징어는 흉어였다.. 오징어 배를 따서 말리는 풍경도 보기 어려웠다. 어민들뿐만 아니라 울릉도 주민들 대다수가 오징어 배 따는 일로 생계를 이어왔었다. 아쉽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울릉도는 한때 오징어잡이 어선만 200척을 넘겼고, 2000년대 초반까지는 연간 1만t을 기록했다. 하지만 2024년 말 기준 울릉도 어선은 129척인데 90% 이상이 오징어 채낚기어선이다 어획량이 급감하자 어민들은 올해만 30여 척이나 감척을 신청했다. 생업을 포기하다 싶이 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감척 확정된 어선은 13척 뿐이라 한다. 오징어가 사라진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온 변화, 동해 바다를 새까맣게 뒤덮은 중국어선들의 대량 남획, 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체 이 세계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저동 해안 도로를 따라 내수전까지 걸어간다. 길은 시멘트 차량 도로지만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어서 지루하지 않다. 내수전에서 석포에 이르는 길은 울릉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일로 꼽힌다. 내수전은 옛날 울릉도 개척 당시 제주도 대정 출신의 김내수(金內水)라는 사람이 화전을 일구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도 내수전이 표기되어 있다. 내수전은 예전에 닥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저전포’라고도 불렸다. 행정구역은 저동 3리다. △ 겨울꽃의 대명사 동백 선비들이 사랑한 꽃 11월인데 길가에는 벌써 동백꽃이 만개했다. 같은 위도상의 육지인 강원도 산간지역에는 동백이 살지 못하지만 울릉도는 해양성 기후라 겨울이 따뜻해 동백이 자생할 수 있다. 동백은 흔히 겨울꽃의 대명사로 꼽히지만 실상 개화 기간이 어느 꽃보다 길다. 늦가을부터 피기 시작해 상춘까지 물경 6개월 남짓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그래서 피는 시기에 따라 그 이름도 제각각이다. 봄에 피면 춘백, 가을에 피면 추백, 겨울에 피는 꽃이라야 비로소 동백이다. 동백은 옛날부터 매화와 함께 이 땅의 선비들에게도 한껏 사랑을 받아온 꽃이다. 이규보, 서거정, 기대승 같은 당대 최고의 문사들도 동백을 노래했다. 퇴계의 수제자였던 학봉 김성일(1538년~1593년)도 매화와 함께 동백을 고고함의 상징으로 꼽으며 지극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두 가지 동백나무 각자 다른 정 있나니/동백 춘백 그 풍도를 누가 능히 평하리오/사람들은 모두 봄철 늦게 핀 꽃 좋아하나/나는 홀로 눈 속에 핀 동백 너를 좋아하네” (학봉 김서일) 꽃에 미쳐 살았던 조선의 선비 유박(1730-1787)도 ‘화암수록(花菴隨錄)’에서 “치자와 동백은 청수(淸秀)한 꽃을 지니고 또 빛나고 윤택한 사시(四時)의 잎을 겸하였으니 화림(花林) 중에 뛰어나고 복을 갖춘 것이라” 평하며 동백이 도골선풍을 지녔다고 찬탄했다. 서양에서도 동백에 대한 사랑은 깊을 대로 깊었다. 파리 사교계의 여인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한 달 내내 밤이면 동백꽃을 가슴에 꽂고 다녔다. 25일은 흰 동백, 나머지 5일은 붉은 동백. 그래서 그녀는 카멜리아의 여인(동백꽃 여인)으로 불렸다. 알렉상드르 뒤마 필스의 소설 ‘춘희’ 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제부터 동백은 내내 울릉도의 산야를 붉게 물들일 것이다. 저동2리 방파제 끝을 돌아서면 저동3리 마을 이정표가 서 있다. 내수전 마을이 시작되는 곳이다. 경계선 건너 우뚝 솟아있는 섬이 죽도다. 1가구가 더덕 농사를 지으면 살아간다. 예전에는 7-8가구가 살았었다. 감자, 고구마, 더덕 농사도 짓고 소도 기르며 살았었다. 죽도에서는 송아지 때 올라간 소가 산채로는 못 내려왔다고 한다. 작은 송아지는 밧줄에 매달아 올렸지만 온통 절벽이라 다 자란 큰 소는 밧줄에 매달 수도 없고 달리 내려보낼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축을 해서 고기가 돼서야 내려왔다. 죽도는 물이 귀해서 울릉도 본섬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생활용수는 빗물을 받아서 사용했다. 죽도 사람들은 20여 가구가 살다가 지금은 폐촌이 된 내수전 길 아래 마을 와달리로 왕래하며 살았다. 물도 와달리에서 길어다 먹었다. 날마다 먹을 물을 구하려고 절벽을 타고 오르내리던 사람들의 심정을 우리가 만분의 일이라도 알 수 있을까. 지금은 사람들이 떠나고 농사도 덜 지으니 솔밭도 새로 생겼다. 죽도는 사방을 둘러 온통 절벽이다. 마을은 절벽 위에 들어서 있다. 절벽 위에 제법 너른 평지가 있어 농사도 짓고 집도 짓고 살아갈 수 있었다. 지금이야 계단이 만들어져 제법 쉽게 오르내릴 수 있지만 그 전에는 저 아득한 절벽을 어찌 오르내리며 살았을까 생각하니 그저 삶이 온통 아득해진다. 울릉도 본섬 또한 가파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울릉도 본토에서도 밭 한 뙈기 얻지 못해 처음 저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라 섬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그저 먹먹하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0
울릉도는 바다 한가운데 고요히 솟은 섬이다. 배가 포항을 떠나 동해의 물살을 가르기 시작하면 도시는 점점 희미해지고 바다의 숨결이 서서히 스며든다. 파도는 굽이치는 듯 부드럽고, 짙은 푸른빛은 어느새 여행자의 마음을 잠식한다. 도동항에 닿는 순간 섬은 거대한 화산의 품으로 여행자를 끌어안는다. 절벽과 숲, 그리고 안개가 어우러진 풍경은 육지의 시간과 전혀 다른 속도로 흐른다. 행남 해안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바위 틈새로 솟는 억새와 해풍에 일렁이는 파도가 묘하게 닮았다. 섬의 중심부인 나리분지는 화산분화구가 만든 평원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붉게 번지고, 여름에는 초록이 하늘을 밀어 올린다. 가을의 억새는 바람을 따라 은빛 물결을 만들고, 겨울의 고요는 섬의 시간을 멈추게 한다. 나리분지의 투박한 밥상 위에는 막걸리 향이 은은하게 감돈다. 오징어·더덕·산채로 차린 한 상은 ‘섬의 맛’ 그 자체다. 울릉도의 매력은 느림에 있다. 봉래폭포의 물안개에 젖고 관음도 앞에서 바다와 마주 앉아 있노라면 시간의 경계가 사라진다. 스마트폰의 시계 대신 파도 소리가 하루의 리듬을 만든다. 해 질 무렵 도동항의 포구에 앉으면 섬이 붉게 물든다. 오징어 배 불빛이 반짝이며 바다 위에 별을 띄우고 어느새 하루가 저문다. 울릉도는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푸르다. 최근 울릉도가 상처를 입었다. 바가지와 불친절의 표본처럼 매도당했다. 상당 부분은 사소한 오해이기도 하고 작은 부분은 반성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다는 언제나 상처 위에 푸른 빛을 덧칠한다. 해담길을 따라 걸으며 절벽 끝에서 바람이 속삭인다. 10일부터 본지 15면에서 총 25회에 걸쳐 섬연구소 소장인 강제윤 시인의 ‘해담길에서 만나는 울릉도’를 연재한다. 강제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울릉도의 숨겨진 아름다움과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
2025-11-09
울릉도 여행자들은 대부분 자동차로만 섬을 둘러보고 돌아간다. 하지만 걸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숨어 있어서 눈에 띄지 않을 뿐, 울릉도의 트레일은 실핏줄처럼 섬 곳곳에 퍼져 있다. 그래서 사실 울릉도는 ‘걷기 천국’이다. 울릉도에는 걷기 좋은 길들이 많다. 걸어야 울릉도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이 여행기는 울릉도의 트레일을 걸으면서 울릉도의 속살을 들여다 본 이야기다. 2017년 옛사람 다니던 옛길 발굴 도동~저동~천부~태하~도동 회귀 느리게 느리게 걸으며 비경 감상 여객터미널 뒤 행남해안로 시작 울릉도 초기 화산활동 특징 간직 절벽엔 2500년된 향나무가 환영 △ ‘밝은 해가 담긴 길’ 해담길 걷기 울릉도의 대표적인 길은 ‘해담길’이다. 2017년 울릉군에서 울릉도의 옛사람들이 다니던 옛길을 발굴해 만들었다. 해담길이란 ‘울릉도의 이른 아침 밝은 해가 담긴 길’이란 뜻이다. 이 길 또한 최대한 천천히 걸어야 한다. 천천히 걸을수록 울릉도에 오래 머물 수 있다. 울릉도와 더 깊이 교감할 수 있다. 빠르게 걷느라 길가의 풀과 나무와 들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새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걷는다면, 또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다의 풍경을 놓친다면, 길에 얽힌 이야기와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면, 자동차를 버리고 자연의 길을 걷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울릉도에서는 느리게 느리게 걸어야 한다. 온갖 해찰을 다 부리며 걸어야 한다. 걷는 길에서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 따위는 잊어야 한다. 목적지에 가지 못한들 어떠랴. 길을 벗어나 낯선 길로 들어선들 또 어떠랴.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 그 자체가 아닌가? 여행을 떠난 순간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울릉도를 깊이 있게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담길을 걷는 것이다. 울릉도를 온전히 걸어서 일주할 수 있는 길. 제주 올레길 만큼이나 아름다운 길이다. 해담길은 울릉도의 관문인 도동항을 출발해 저동, 천부, 태하, 옥천 등을 거친 뒤 해안 둘레를 따라 다시 도동으로 돌아오는 35㎞ 길이의 트레일이다. 모두 9개 코스로 구성됐다. 지형적 문제 때문에 길이 완벽하게 하나로 연결되지 못하고 부분 부분 단절돼 있기도 하다. 그러니 해담길을 걸으며 길에는 포함되지 않는 샛길로 빠져 마을들을 둘러본 뒤 다시 해담길로 되돌아오는 것도 좋다. 길이란 온전히 걷는 자의 몫이다.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걸을 때 길은 비로소 온전히 자신만의 길이 된다. △ 2500년된 향나무가 여행자를 반기다 해담길의 시작점은 울릉도의 도동항이다. 도동항 여객터미널 뒤 안에서부터 해담길 행남해안로가 시작된다. 이 길은 지금 공사 중이다. 하지만 중간쯤에서 우회로를 따라가면 된다. 도동 행남해안로 초입에서 가장 먼저 여행자를 환영해 주는 것은 절벽 꼭대기의 2500년 된 향나무다. 실제로는 3000~4000년쯤 됐다는 설도 있다. 향나무는 1985년 10월 5일 태풍 브랜다가 왔을 때 한쪽 가지가 부러졌고 그 부러진 가지를 울릉군에서 공개 입찰했다. 향나무 가지는 기념품 가게를 하던 서귀용씨가 낙찰 받아 용이 승천하는 모양으로 조각을 해서 소장 중이라 한다. 사람은 한 자리에 하루도 서있기 어려운데 저 향나무는 수 천 년을 한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 지독한 인고의 향이 얼마나 진할 것인지 생각만으로 아찔하다. 울릉도는 한국 최초의 국가 지질공원이다. 2012년 12월 27일 인증됐는데 울릉도 19개소, 독도 4개소가 지질 공원의 관할 영역이다. 울릉도의 도동 해안산책로, 저동 해안산책로, 봉래폭포, 죽도, 향나무자생지, 황토굴, 대풍감, 노인봉, 송곳봉, 코끼리바위, 삼선암, 관음도, 성인봉 원시림, 용출소, 알봉 등과 독도의 숫돌바위, 천장굴, 삼형제굴바위, 독립문바위가 지질 공원으로 지정된 곳들이다. 지질 공원은 지구과학적으로 중요하고 경관이 우수한 지역 중에서 지정된다. 도동에서 행남마을에 이르는 도동 해안 산책로도 국가 지질공원의 일부다. 섬의 크기는 울릉도에 비해 독도가 훨씬 작지만, 탄생 년도는 독도가 한참을 앞서는 형이다. 독도는 460만 년 전 수중화산으로 탄생했고 250만 년 전 화산활동을 멈췄다. 울릉도는 약 14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 5단계에 걸친 화산활동으로 탄생했다. 마지막 화산활동은 9300~6300년 전 쯤으로 알려져 있다. 울릉도와 독도는 화산 분화시기가 다르지만 주요 암석이 알칼리 계열 조면암이고 화학적 구성도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다. 울릉도는 수중 2300m부터 시작돼 수면 위로 986.5m가 솟아올랐다. 전체 높이 3300m에 이르는 거대한 화산체다. 독도도 해수면 밑에 2300m의 화산체가 있다. 드러난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다. 독도 수면 아래 한라산보다 높은 산이 숨어 있는 것이다. △ 도동 해안산책로 다양한 지질구조 볼 수 있어 행남 해안산책로는 도동 해안산책로와 저동 해안산책로를 합한 이름이다. 두 곳 다 지질 공원으로 지정됐다. 저동 해안 산책로는 파손되어 접근 할 수 없으니 이 길에서는 도동 산책로의 지질만 관찰이 가능하다. 도동 해안산책로에서는 울릉도 초기 화산활동의 특징을 간직한 다양한 지질구조가 관찰된다. 절벽의 하부로부터 현무암질 용암류, 산사태로 운반되어 만들어진 재퇴적쇄설암, 화산재가 뜨거운 상태에서 쌓여 생성된 이그님브라이트, 분출암의 일종인 조면암 등이 순서대로 분포한다. 그야말로 이 산책로는 지질 박물관이다. 행남 마을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길은 저동 옛길이고 또 한길은 행남해안로 저동 교량 길, 저동 해안 산책로다. 그런데 거친 파도를 견디지 못한 해상 교량이 여러 해 전 파손된 뒤 교량 구간은 통행이 차단되고 있다. 새로운 교량 공사가 진행 중인데 개통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듯하다.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저동 옛길을 지나야만 저동에 이를 수 있다. 저동 옛길을 걷기 전에 행남등대까지 다녀와도 좋다. 등대까지의 길은 평탄하고 호젓하다. 등대를 다녀온 뒤 길이 끊어진 저동 해안 산책로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본다. 완공이 되면 다시 기암괴석의 절경을 바라보며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끊긴 해안로 입구에서는 다시 행남 마을 쪽으로 조금 되돌아가야 저동마을 옛길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 비탈길이 두 마을을 연결해주는 생활의 길이었다. 산길이지만 가파르지 않아 천천히 걷다보면 금새 저동마을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옛길의 끝자락에 저동마을 당집이 있다. 신당 안 제단에는 해동대신위라 쓰인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바다의 신을 모시는 해신당이다. 이제 바다의 안전은 용왕 대신 GPS가 책임져 주는 시대가 왔지만 섬사람들은 여전히 바다가 두렵다. 아무리 인공위성이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한다 한들 순간적으로 돌변하는 파도의 변덕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전히 해신의 위력에 기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섬사람들이다. 섬사람 중에서도 어부들은 유일신 신앙을 가진 이 조차도 몰래 해신들에게 제를 지내기도 한다. 보험도 하나보다는 여러 개 들어놓는 것이 유리하다고 믿는 것과 같은 심사일 터다. 길의 끝에 문득 해상 도시가 나타난다. 저동이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