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징어 판 돈으로 무기 구입… 일본군 침범 맞서 7차례 격퇴

최병일 기자
등록일 2025-11-13 19:17 게재일 2025-11-14 15면
스크랩버튼
해담길에서 만나는 울릉도 (5)독도 지켜낸 33인의 의용수비대
울릉도 주민들이 필사적으로 지켜낸 독도 /한국관광공사 제공 

독도 지키는 군대·경찰 없던 1953~56년까지 헌신적 수호 활동
     1954년 日 전함 2척을 박격포 발사해 상륙 막은 ‘독도대첩’ 전훈
    의용수비대기념관엔 1905년 패배한 러 발틱함대 유물도 보관

 

△울릉도 최고 부자 홍순칠의 의용수비대 

석포에서는 맑은 날이면 92㎞ 거리의 독도가 한눈에 보인다. 안용복 기념관을 나서면 인근에 독도 의용수비대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2개 층에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의용수비대원 33인의 독도 수호 활동을 체계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의용수비대원들의 자료 모습.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를 지키는 군대나 경찰이 없던 1953년-1956년까지 독도 수호를 위해 울릉도 주민들이 만들었던 자경단이다. 1956년 경찰에 독도 수비 업무와 장비들을 인계할 때까지 밤낮으로 독도를 지키던 의용수비대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 이 기념관이다. 

의용수비대 대장은 한국전 상이용사이자 육군 특무상사 출신의 울릉도 최고 부자 홍순칠이었으며 각각 15명으로 이루어진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 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총 45명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 3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이었다. 이후 12명이 탈퇴하면서 최종적으로 수비대에 남은 인원은 33명이 되었다.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전경 

1952년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은 세 차례나 독도를 무단 침범했다. 이때 일본은 1948년 미군의 폭격 연습으로 희생된 150여명의 한국 어부들을 기려 세운 위령비를 파괴하고 독도에 시마네현 오키군 코카무라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五箇村竹島)라는 표지판을 세웠다. 

이에 대항하여 홍순칠과 울릉도 청년들이 1953년 4월 20일 결성한 것이 독도의용수비대다. 의용수비대는 전쟁의 와중에 7차례나 전투를 해 일본에 빼앗길 뻔 했던 독도를 지켜냈다. 독도를 수비할 무기들도 홍순칠 의용수비 대장이 부산으로 가 울릉도 오징어를 판 돈으로 구입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3년 6월 일본 오게(大毛) 수산고등학교 연습선 지토마루 호를 독도의 서도 150m 걸 해상에서 나포해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냈으며, 같은 해 7월 해상보안청 순시선 치마루호가 독도에 접근하자 위협 사격을 가해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 싸움이 수비대가 일본에 맞서 벌인 실질적인 첫 전투이다.

△ 독도침범 일본 순시성 여러차례 격퇴 

 1954년 5월 23일에도 해상보안청의 1000t급 무장 순시선 즈가루호가 침범하자 격퇴했고, 5월 29일에는 일본 어업 실습선인 450t급 다이센호가 침범하자 의용수비대원들이 다에센호에 승선, 격렬하게 항의해 퇴각시켰다. 1954년 6월에는 홍순칠 대장 등이 독도의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같은 해 7월 28일에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나가라호(270t급)와 구르쥬호(270t급) 2척이 동시에 위협 사격을 가하며 독도를 침범하자 의용수비대원들이 사격을 가해 격퇴시켰다. 1954년 8월 23일에는 독도를 침략하려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450t급 무장 순시선 오키호를 향해 기관총 600발을 발사해 격퇴시켰다.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내부 모습

1954년 10월 2일에는 2척의 전함이 동시에 독도 영해를 침범하자 대포를 발사하며 격퇴시켰다. 일본의 독도 침공 작전은 1954년 11월 21일 아침 6시경에 시작됐다. 450톤급 헤쿠라호와 450t급 오키호 두 척의 일본 전함은 동도와 서도 방향에서 동시에 독도로 접근해 왔다. 이때 독도를 지키던 의용수비대는 박격포를 발사해 두 전함의 독도 상륙을 저지시켰다. 

이 전투는 후일 독도대첩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1956년 12월 30일, 무기와 임무를 경찰에 인계할 때까지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를 지켜냈다. 경찰 인계 때 10명의 의용수비대원들은 경찰 소속으로 전환해 이후에도 독도를 지켰다. 의용대원들은 독도에 상주하며 갈매기 알로 배를 채우고 빗물을 받아 마시며 독도를 지켜냈다. 

울릉도 주민들도 의용대원들에게 식량을 보급하며 헌신적으로 도왔다. 이들이 후예가 지금 독도를 방어하고 있는 독도경비대다. 울릉도와 울릉도 사람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가 애지중지 하는 독도를 지켜낼 수 있었다.

아름다운 독도의 모습. /한국관광공사 제공 

아마도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섬은 독도일 것이다. 여전히 일본이 침략하러 호시탐탐 노리는 국경의 섬, 심지어 일본은 정부의 공식 섬 통계에도 독도를 자국의 섬으로 포함시켜 놓고 있다. 그럼에도 독도가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를 받는 우리 땅임을 국민들은 모두가 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독도를 다녀왔고 누구나 생애 한번은 독도에 가는 꿈을 꾼다. 그런데 육지 사람들은 독도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울릉도란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 울릉도가 없었으면 독도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울릉도가 있어서 독도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이는 역사 시대 내내 변함없는 진리였다. 고대 국가 우산국부터,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 조선, 대한민국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소중한 우리 땅 독도를 지켜온 것은 울릉도 섬사람들이었다. 

울릉도 사람들이 조각배를 타고 그 험한 바다를 건너가 독도에 거처하며 해산물을 채취해 살아갔다. 독도를 침탈하려는 왜국과 일본에 맞서 싸우고 마침내 지켜낸 것도 울릉도 사람들이다. 그 증거가 바로 독도의용수비대다.

△러·일전쟁의 유물도 전시된 기념관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은 독도 의용수비대원들의 모습을 재현했다. 

의용수비대 기념관에는 러일전쟁의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러시아제 청동 주전자다. 1905년 러일전쟁 막바지에 발틱 함대 소속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에서 쓰던 것이다. 한동안 보물선으로 세간의 화제가 됐던 그 배다. 돈스코이호 함장은 일본에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돈스코이호는 끝까지 일본에 항전했다. 힘에 부친 돈스코이호 함장은 결국 전함을 스스로 침몰시키기로 결정한 후 러시아 해병 570명을 울릉도에 상륙시켰다. 돈스코이호는 침몰했고 이 과정에서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의 할아버지 홍재형이 러시아 해병 구제에 나서 많은 목숨을 살렸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홍재형이 돈스코이호 함장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 금화와 청동 주전자였다.

석포 마을 경로당 옆, 밭에서 노인 한 분이 잡초 제거 작업 중이다. 오래 묵혀두었던 밭에 다시 나물 재배를 시작하려고 돼지풀 등을 뽑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30여년을 뭍으로 떠돌다 노년에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49살의 늦은 나이였지만 당시 울릉도에는 오징어도 잘 나지 않았고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먹고 살길을 찾아 뭍으로 나갔다. 뭍에서는 주로 건설 현장 ‘노가다’(막노동)를 했다. 한때는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까지 떠돌았다. 주로 대구의 건설 현장에 있으면서 ‘노가다’ 십장을 했다. 그렇게 아이들 다 키우고 결혼까지 시키다 보니 중년의 사내는 어느덧 노인이 되어버렸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거리도 없고 그래서 다시 고향 쪽으로 눈을 돌렸다. 대부분의 밭은 고향 떠날 때 팔아버렸고 아주 조금 남겨둔 밭뙈기에 참고비 나물을 재배하려고 다시 개간 중이다.

“옛날에는 나물을 누가 알아주지도 않았어요. 자기 먹을 거나 했지. 요새는 판로가 있으니 돈이 되지.”

겨울에는 자식들이 사는 대구의 집으로 가서 지내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울릉도에 산다. 빈집을 빌려 지내지만 그래도 고향이라 마음은 편하다. 돌아갈 고향이 있는 이는 행복하다. 고향을 잃어버린 시대. 섬을 고향으로 가진 이들은 행복하다.

/강제윤(시인·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해담길에서 만나는 울릉도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