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담길에서 만난 울릉도 (3)이효영씨 부부와 삼남매 살았던 정매화골
△ 내수전 전망대 가는길 천국같은 집 한 채
내수전 전망대 가는 길, 내수전 마을 경치 좋은 곳에 홀로 들어선 집 한 채가 있다. 마당에서 앉아서도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관음도와 죽도까지 한눈에 들어오니 굳이 전망대까지 가지 않아도 그 자체로 최고의 전망대다. 노부부가 사는 집, 부부는 저동에 새집이 있지만 틈만 나면 오래 전부터 살아온 이 집에 와서 지내다 간다.
특히 여름에는 내내 이 집에서만 생활한다. 고지대라 시원하고 모기도 없기 때문이다.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틀 일이 없으니 전기세도 안 나간다. 연중 콸콸 흘러나오는 물 또한 더없이 달고 풍족하다. 천국이 따로 없다.
너른 마당은 캠핑족들에게 놀다 가라고 그냥 내준다. 그래서 해마다 텐트를 들고 와서 며칠씩 지내다 가는 이들도 많다. 어차피 산에서 쏟아지는 물 마음껏 쓰라고 한다. 사람들이 와서 지내니 말벗도 되고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그렇다고 관광객 상대로 무슨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산속이 좋다.
종일 좋아하는 노래 틀어놔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어서 더욱 좋다. 오늘도 작은 카세트에서 흘러간 옛 노래가 나온다. 노래를 들으며 할머니는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할아버지는 겨울에 땔 장작을 패고 있다.
“여기 있으면 몸 안 아파요. 시내 가면 가만히 들어앉아 테레비나 보지. 공기도 좋고 앞에 훤하니 좋아요.”
내수전 전망대 가는길 외딴 집
동해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여
캠핑족들 오면 너른 마당 제공
원시림 숲속 ‘영혼의 길’ 거닐며
진객 붉은배오색딱다구리 조우
사람들 떠난 백운동엔 구름만
할머니는 이 산중 옛집이 그리도 좋을 수가 없다. 전부 다 내 것 같고 마음이 푸지다.
“돈 많으면 뭐해요. 죽어서 가져가나. 살았을 때 묵고 살면 되지. 마음이 부자라야지.” 할아버지와는 동갑인데 호적에는 4살이 더 많게 올라 있다. 사촌 형 호적에 대신 오른 바람에 그리됐다. 할머니는 나물 농사를 지었고 할아버지는 배 만드는 목수가 천직이었다. 비탈밭에 나물 농사를 많이 했지만 아들이 와서 다 처내 버렸다. 부모님 고생 그만하라고. 그래서 나물 밭은 참고비 밭만 아주 쪼금 남았다.
“나물 중에는 참고비가 젤 맛있어요. 고사리 증조할아버지쯤 되지.”
할아버지는 본래 포항, 제주, 부산, 울산 등지를 떠돌며 배 짓는 목수로 일하다 울릉도로 들어와서는 오징어 배 짓는 ‘도대목’을 했다. 배 짓는 목수 중에서도 우두머리를 하셨단 말씀이다. 배 목수는 집 목수보다 기술을 몇 배 위로 쳐준다. 그만큼 공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배 목수는 집을 지어도 집 목수는 배를 못 짓는다. 죽은 사람 널(관)도 많이 짰고 강고(노 젓는 배)들도 많이 만들곤 했다. FRP로 배를 만들게 되면서부터 일거리가 없어져 배 목수 일을 그만뒀다.
“옛날엔 죽도 앞바다에 오징어가 바글바글했어요. 초저녁에 나가 한배 잡고 또 날 샐 때 가서 한배 잡아오고 그럴 정도였죠.”
그 시절에는 명태도 많이 났다. 처녀 시절 할머니는 땔감용 나무하러 다니고 오징어 내장 따서 돈 벌러 다니느라 학교 공부를 못했다.
“학교는 문 앞에도 안 가봤어요.”
마을 사람들이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키가 안 큰다고 걱정 할 정도였다.
“일 좀 그만 시키라고 시집 못 보낸다고 그랬어.”
동생들이 많아 동생들 업어 키우고 물 길러 다니라고 학교를 안 보내줬다. 7살 때부터 동생들 업어 키웠다. 명태, 오징어 손질해서 돈 벌어 동생들 가르치고 25살 때 중매로 신랑을 만나 결혼했다.
“신랑을 잘 만났어요.” 저동 마을, 한동네 사는 총각이었다. 지금의 할아버지다.
“봐라 세월이 얼마나 좋으냐.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요.”
기나긴 인고의 터널을 지나 비로소 찾은 안식. 그 안식의 시간이 할머니는 더없이 행복하다. 이 또한 울릉도가 주는 행복이다. 인사를 드리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귓가에 울리는 할머니의 충고 말씀이 가슴을 울린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부지런히 놀러 다니소.”
일 열심히 하지 말고 부지런히 놀러 다니라니 이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인가. 내수전 마을 삼거리에서 석포 방향으로 5분 남짓 걸으면 시멘트 도로가 끝나고 다시 숲길이 시작된다. 지금부터는 포근한 흙길에 더없이 호젓한 숲속 오솔길이다. 이 숲길에는 중간중간 저동에서 석포로 전기를 운반하는 전선과 전봇대가 눈에 띄는데 이 또한 사람이 오고 가던 옛길의 흔적이다.
△ 옛 개척민 정매화가 살던 골짜기
그 외에는 내내 원시림의 숲길이다. 육지에는 사라지고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너도밤나무와 키 작은 대나무인 이대, 동백나무 들이 길을 따라 도열해 있다. 가을 숲은 더 바랄 나위 없이 고요하다. 이 고요함 속에서는 작은 시냇물 소리마저 요란하게 들린다. 이 또한 고요함의 증거다. 또 한동안 길에만 몰두해 걷는데 느닷없이 쉼터가 나타난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정매화골이다.
옛날 개척민 중에 정매화란 이가 살던 골짜기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매화가 살다 간 뒤 이곳은 1962년 9월부터 이효영씨 부부가 삼남매와 살았다. 이씨 일가는 1981년까지 19년을 이 외딴 골짜기에서 살았는데 이씨 부부의 이름이 남은 것은 그들이 이곳에 살면서 폭설, 폭우에 조난 당하거나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을 300여명이나 구조한 미담이 있기 때문이다. 1981년 11월27일 자 대구 매일신문에 기사가 실렸다. 이씨 부부는 1982년 선행군민 표창을 받았다.
다시 길을 걷는다. 숲속의 오솔길은 흙길이다. 이 흙길은 오래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다. 흙길은 발바닥이나 무릎에도 무리가 가지 않는다. 충격을 반사해내는 시멘트 길과 달리 흙바닥이 충격을 흡수해 주기 때문이다. 길가의 오래된 나무들이 뿜어내 주는 피톤치드는 내 몸 안의 나쁜 세균들만이 아니라 내 영혼을 좀먹는 병균들까지 박멸해 주는 듯하다.
어찌 영혼의 길이 아닐 수 있겠는가? 오늘은 이 숲길에서 진객을 만났다. 나무 둥치에 몸을 바짝 붙이고 먹이 사냥에 열중해 있는 새. 깃털이 아름다운 붉은배오색딱다구리. 한국에서는 번식이나 월동을 하지 않고 우연히 들르는 나그네새라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한다.
경기도 광릉, 옹진군 소청도 등에서 관찰된 기록이 있는데 봄에 북상하고 가을에 남하한다. 남쪽 먼 나라로 가다가 울릉도에 들렀다. 반갑구나! 나그네새여. 그대도 나그네 나도 나그네. 주린 배 많이 채우고 가시라.
△ 구름도 쉬어가는 백운동마을 풍경
이제부터 길은 울릉읍 저동을 완전히 벗어나 북면 지역으로 들어선다. 울릉도의 북단이다. 숲속에 산장이 하나 있다. 예전에는 이 숲에도 몇 가구가 살았었지만 1960년대 말 김신조 무장간첩 사건 이후 외딴 집들은 모두 이주당했다. 이 숲의 꼭대기 산정에도 10여 가구가 살았었다.
백운동 마을이다. 그야말로 구름도 쉬어가는 산 정상에도 사람이 살았었다. 조금이라도 평지가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깃들어 살던 울릉도 사람들. 이제는 백운동도 폐촌이 되었고 그저 구름이나 가끔 쉬어가는 구름 마을, 진짜 백운동이 되었다. 화전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던 마을은 독거 가구 이주정책과 화전 금지 조치로 더이상 존립이 불가능해 졌고 백운동 주민들은 모두 뭍으로 떠나갔다. 그렇게 한 시대가 오고 갔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