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담길에서 만난 울릉도(4)독도를 지킨 것은 양반이 아니라 어부들이었다
△ 울릉도의 오지 중의 하나인 석포
해담길 내수전 구간이 끝나면 석포-추산 구간으로 이어진다. 이 길로 들어서기 전에서 석포 마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석포마을에는 안용복기념관과 의용수비대기념관, 석포전망대 등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일주도로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석포는 울릉도의 오지였다. 정들포, 정들께라고도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울릉도에서도 워낙 험한 산속 오지라 처음 찾아왔을 때는 막막하지만 막상 떠나려면 정이 들어서 떠나기 힘들 정도로 정이 많은 산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들포였다.
석포 일출전망대는 의용수비대 기념관과 붙어 있는데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망루 역할을 했다. 전망댕에서는 울릉도의 3대 비경인 삼선암과 관음도, 공암을 모두 볼 수 있다.
1693년 日 어부들과 조업권 실랑이 벌이다 오키섬으로 끌려가
에도 관백 앞에서 ‘독도는 조선땅’ 주장, 출어 금지 서계 받아내
1948년 美 B29 독도 해상 폭격 연습… 어민들 집단 희생 비극
안용복 기념관은 왕조가 버린 섬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안용복(安龍福. 1658~?)을 비롯한 백성들의 분투를 기념해서 지어진 건물이다. 안용복의 제1차 도일은 1693년 3월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용복은 울산 출신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호키(伯耆)주 요나코무라(米子村)에서 온 일본 어부들과 마주쳤는데 조업권을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
숫자가 적었던 탓에 안용복은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 오키(隱岐) 섬으로 끌려갔다. 여러 경로를 거처 에도(江戶) 관백의 심문을 받고 울릉도,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주장을 하고 납치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결국 “죽도(울릉도)와 자산도(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막부의 서계(書契)를 받아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인들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불법 월경을 해 울릉도 근해에서 조업을 계속했다. 안용복은 조정의 관원으로 위장한 뒤 2차 도일을 감행해 담판을 짓고 돌아오려 했으나 실패하고 송환됐다.
조선 조정은 그런 안용복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사형을 시키려다 감형해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유배 이후 안용복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지금 안용복은 장군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후대의 추대일 뿐이고 그가 살던 당시에는 전라 좌수영의 노꾼 출신이 어부였다. 국가가 못한 일을 해낸 백성. 안용복은 장군 그 이상으로 추앙받고도 남을 공적을 세웠다. 장군들도 지키지 못한 독도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 안용복기념관의 독도조난어민위령비에 서린 한
안용복 기념관에는 독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주는 전시물도 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것 말고 우리가 독도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일까? 독도에서도 미군에 의한 한국인 양민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안용복 기념관에 그 증거가 전시되어 있다. 우리 군경에 의한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시기 양민학살은 많이 밝혀졌지만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은 충북 영동군 노근리 철교 밑에서 한국인 300여명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 사건 정도만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섬 지역에서도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적지 않았다. 여수의 섬 안도에서의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도 그 중 하나다. 한국전쟁 시기 여수에서 섬으로 피난을 오던 300여명의 양민을 실은 피난선을 미군 제트기가 무차별 폭격했다. 안도의 이야포 해변이 그곳이다, 이 폭격으로 한국인 150여명이 숨졌다. 그 증거가 안용복기념관의 ‘독도조난어민위령비’에 새겨져 있다.
1948년 6월8일 미군은 사전 통보도 없이 독도를 타깃으로 폭격 연습을 시작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미 공군 제93중폭격비행단의 B29 폭격기 20대가 독도 주변 해상에 무차별 폭탄을 투하했다. 이 폭격으로 독도 앞바다에서 미역을 채취하고 조업하던 울릉도와 강원도 어민들이 집단으로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사건 발생 후 미 군정청은 어선 11척이 파괴되고 어민 1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조업 중이던 어선이 30여척이었고, 사상자도 150명이 훨씬 넘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생존 어부들은 “30여척의 동력선에 한 척당 5~8명이 승선했으니 150명 이상 숨졌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 어민들 피해에 대한 정당한 조사 이뤄져야
당시 독도는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제1778호(1947년 9월16일)에 의해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지로 지정돼 있었다. 미군정청은 의도적이 아니었다고 변명했지만 30여척이나 조업을 하는데 미군 조종사들 눈에 어선들이 보이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묻혀버릴 뻔했던 미군이 벌인 참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건 다음날인 6월9일 독도로 조업을 나온 어민들에게 구조된 장학상씨(당시 36세·1996년 사망) 등 목격자 덕분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선들은 조업하고 일부 어민들은 미역과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다 독도로 접근하는 한 무리의 비행기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이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난사했다고 한다. 모두 4차례에 걸친 폭격과 총격으로 어민들 대다수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미국은 처음 폭격 사실 자체를 부인하다 6월17일이 되어서야 폭격을 시인했다. 7월 9일 미 군정청은 소청위원회를 구성해 피해 내용을 조사했고, 1명을 제외한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완료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며 사건은 덮어지고 말았다.
진상규명도, 피해 배상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덮어지자 강원도와 울릉도 주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1950년 6월 8일, 독도 동도의 몽돌해안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세웠다. 당시 위령비 제막식에는 조재천 경상북도 도지사와 해군 의장대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참혹한 사살이 조난이라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우리는 미국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는 참혹한 시대를 살았다. 비석은 1959년 유실됐고 2005년 경상북도가 독도 동도에 다시 세웠다. 원래 비석은 2015년 바다에서 발견돼 안용복기념관에 보관되고 있다.
울릉도 주민들은 매년 6월8일 독도에서 희생 어민 위령제를 지낸다. 기상이 나빠 독도 접안이 어려우면, 안용복기념관 앞에서 위령제를 지낸다. 많이 늦었지만 정부는 이제라도 미군에 의한 독도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을 다시 규명해야 마땅하다.
조난자위령비도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비’로 다시 세워져야 한다. 수백년 전 일본의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 땅이란 문서를 받아냈던 어부 안용복의 후예인 우리 어민들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주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바로 세우고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지름길이다.
조난이 아닌 폭격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들 그들을 위한 비석을 세워야 한다.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비’. 그것만이 억울한 양민들의 죽음에 작은 위로라도 될 것 같다. 뜻하지 않게 샛길로 들어선 안용복 기념관에서 우리 역사를 새롭게 배운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