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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역사 인문학] 단종의 시신을 거둔 용기, 엄흥도가 남긴 교훈

성서에서 장엄한 장면 중 하나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이 매달린 십자가 아래로 다가가는 대목이다. 처형된 이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단순한 장례를 넘어, 빌라도의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결단이었다. 이런 도덕적 저항의 서사는 중국의 사서에서도 발견된다.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중상모략에 의해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졌을 때, 백성들은 북을 치고 음식을 던지며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 그것은 억울한 죽음 앞에서 공동체가 선택한 최후의 예우였으며, 훗날 단오(端午)라는 거대한 문화적 의례로 승화되었다. 시대와 지역은 달라도, 권력이 버린 죽음을 인간이 거두는 행위는 인류 역사의 서사로 흐르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이 보편적 윤리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은 조선 영월의 민초, 엄흥도(嚴興道)다. 세조에 의해 폐위, 시해된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당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금기(禁忌)였다. 시신에 손을 대는 순간 삼족이 멸하리라는 공포가 영월 땅을 짓눌렀다. 하지만 엄흥도는 밤의 어둠을 틈타 왕의 시신을 수습했다. 칼을 든 군사도, 녹을 먹는 관료도 아닌 한 명의 민초가 왕권의 폭력이 남긴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낸 것이다. 그의 충절은 일회성 용기에 그치지 않았다. 엄흥도는 가솔을 이끌고 깊은 은거를 택했다. 족보마저 없애며 세상과 절연한 채 스스로를 지웠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마을 사람들의 태도다. 관청이 사라진 그들의 행방을 쫓았으나, 주민들은 그들이 어디에 숨었는지 짐작하면서도 끝내 함구했다. 역사 정의의 회복은 200여 년 후에 찾아왔다. 숙종 대에 이르러 단종이 복위되자 엄흥도 역시 공조판서로 추증되며 ‘충의(忠義)’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가 밤새 눈물을 흘리며 시신을 안장했던 자리는 오늘날의 ‘장릉’(莊陵)이 되었고, 그의 이름은 그 능역의 수호자로 영원히 각인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수습과 의리’의 정신이 가문의 전통을 타고 현대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엄흥도의 직계 후손 엄항섭(嚴恒燮)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의 곁을 끝까지 지키며 항일 투쟁의 중심에 섰다. 또 다른 후손 산악인 엄홍길은 히말라야의 차가운 눈 속에 갇힌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목숨을 건 ‘휴먼원정대’를 이끌었다. 가문의 윤리가 시대에 따라 항일 정신으로, 또 동료애적 인본주의로 변주되며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다. 역사는 대개 승자의 기록을 화려하게 장식하지만, 엄흥도의 선택은 패자의 마지막을 지켜낸 자가 쓴 소리 없는 기록이다. 그는 격문을 쓰지도, 창칼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다만 버려진 시신을 정성껏 거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가장 인간적인 행위가 왕권의 폭압에 맞선 가장 강력한 저항이 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 참된 충(忠)과 의(義)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6-01-24

[EBS 세계의 명화] ‘4인의 프로페셔널’ … 해결사로 나선 서부 최고의 총잡이 4인

EBS ‘세계의 명화’는 오는 24일 밤 10시 45분, 고전 서부영화의 수작으로 꼽히는 ‘4인의 프로페셔널’(The Professionals, 1966)을 방영한다. 리처드 브룩스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기존 서부영화의 선악 구도를 비틀며 장르의 지평을 넓힌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영화는 1917년 멕시코 혁명 직후를 배경으로 한다. 텍사스의 부호(富豪) 그랜트는 아내 마리아가 멕시코 혁명 지도자 라자에게 납치됐다며 서부 최고의 전투 전문가 4명을 고용한다. 혁명가 출신 전략가 리코(리 마빈), 말 다루기에 능한 에렌가드(로버트 라이언), 다이너마이트 전문가 돌워스(버트 랭카스터), 사막 지형에 밝은 제이크(우디 스트로드)는 거액의 보수를 약속받고 멕시코 사막으로 향한다. 그러나 치열한 구출 작전 끝에 이들이 마주한 진실은 예상과 다르다. 마리아는 납치된 피해자가 아니라, 소유욕 강한 남편에게서 벗어나 옛 연인 라자에게 돌아간 인물이었다. 거짓에 기반한 의뢰였음을 깨달은 ‘프로페셔널’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고, 영화는 통쾌한 반전과 함께 도덕적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은 인디언이나 멕시코인을 적으로 설정하던 전통적 서부영화에서 벗어나, 미국 자본과 탐욕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특히 과거 혁명을 함께 꿈꿨던 리코와 돌워스가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과정은 인물의 내적 갈등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와 대사 곳곳에 배어 있는 유머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에 깊이를 더한다. ‘4인의 프로페셔널’은 그의 연출 역량과 배우들의 개성이 가장 빛나는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가장 현대적인 서부영화’로 회자된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6-01-24

한강 소설, 전미 NBCC 어워즈 소설 부문 최종 후보에 이름 올려

한국 문학이 다시 한 번 미국 문학계의 중심 무대에 섰다. 작가 한강의 소설이 미국을 대표하는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CC 어워즈) 소설 부문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전미도서비평가협회(NBCC)는 20일(현지시간) 2025년 NBCC 어워즈 소설 부문 최종 후보 5편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영어 번역본이 포함됐다. 영어 제목은 We Do Not Part로, 번역은 이예원과 페이지 모리스가 맡았다. NBCC 어워즈는 미국 문학계에서 ‘비평가의 선택’으로 불린다. 출판사나 판매 성과보다 작품성 자체를 중시하는 상으로, 언론과 출판계에서 활동하는 전문 도서 비평가들이 직접 심사한다. 상금은 없지만, 한 해의 문학적 성취를 가장 엄정하게 가려낸다는 점에서 작가에게는 무엇보다 큰 명예로 여겨진다. 1974년 뉴욕에서 창설된 NBCC는 이듬해부터 매년 영어로 출간된 책 가운데 최고의 작품을 선정해왔다. 시와 소설, 논픽션, 전기 등 부문별 수상작은 곧바로 미국 문학사의 중요한 좌표로 기록된다. 수상 여부와 관계없이 최종 후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작품성과 작가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셈이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상실과 기억, 그리고 끝내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층위를 절제된 문장으로 밀도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번역본 역시 원작의 정서를 해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해외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번 후보 선정은 한강의 문학 세계가 언어의 경계를 넘어 독자와 비평가 모두에게 닿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2025년 NBCC 어워즈의 최종 수상작은 오는 3월 26일 발표된다. 결과와 상관없이, 한국 문학은 이미 조용하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세계 문학의 중심에서 다시 한 번 호명되고 있다. /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

2026-01-22

“포항의 문화유산은 시민 모두의 자산”

“조선 시대 포항의 선조들이 성리학을 토대로 나라의 미래를 고민하며 남긴 유산에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당장의 현실에 치우쳐 학문과 문화로 시대를 이끌었던 그 정신을 잇고 미래를 설계하는 일에 소홀해지고 있지는 않을까요?” 최근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선임된 김윤규 한동대 명예교수(문학박사)는 1996년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포항문화의 뿌리와 원천을 연구하고 학술적 이론을 개발하기 위해 열정을 쏟고 있는 인문학자다. 그동안 ‘죽장입암시가산책’ 등 21건의 저서와 ‘국역암재창수록’ 등 18건의 번역서를 출간하고 ‘포항고전문학사 시론’ 등 48건의 논문을 발표하며 고전 및 향토사 연구의 권위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우리 정체성의 근간이자 문화적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초석인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문화·관광 콘텐츠로 활용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인터뷰에서 밝혔다. -포항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선임되셨다. 문화원의 명실상부한 싱크탱크인 연구소를 소개해 달라. △포항문화연구소는 1996년 포항문화원 부설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어, 지역 문화의 뿌리와 정체성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온 싱크탱크다. 연구소는 학문에 머무르지 않고, 연구 성과가 시민의 삶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데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있다. 초대 배용일 교수님을 비롯해 역대 소장과 연구위원들께서 포항학의 기초를 다져오셨고, 김삼일 교수님에 이어 올해부터 제가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재 연구소에는 각 분야의 전문 연구자 열세 분이 매년 포항 관련 단행본 발간과 신규 연구, 시민 대상 연구 성과 공유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연구소의 단기·장기 목표는 무엇인가? 특히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핵심 프로젝트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포항에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시민께 알리는 일이다. 이를 위한 첫 단계로 포항의 옛 지도와 고문헌을 시민에게 직접 보여주고 설명하는 열린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포항 시민이 지역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수준 높은 문화 자료를 자연스럽게 누릴 수 있도록 연구 성과를 집적·정리하여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타 지역과의 비교 연구나 국제적 협력 계획이 있는가? △연구소는 그동안 입암 시가, 유배문학, 서원, 독립운동, 민속, 지리지 등 다양한 주제로 단행본 15권을 포함한 의미 있는 연구 성과를 축적해 왔다. 포항 문화 연구는 자연스럽게 인근 지역과의 교류는 물론 일본 학자들과의 학술 토론, 대학과의 연구 협력도 지속해 왔다. 특히 환동해 해양문화, 산업 전환 과정에서의 문화 변화는 국제적 비교 연구로도 확장 가능성이 크다. -포항만의 문화적 정체성과 후대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본래 인문적 전통이 깊은 1차 산업 중심 지역이었던 포항은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스스로의 문화적 뿌리를 돌아볼 여유를 잃어버린 측면이 있다. 포항은 지역마다 서로 다른 문화권과 전통, 산업과 장인 정신이 공존해 온 매우 다층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포항의 큰 장점이다. 이제는 산업화의 성취 위에서, 우리 삶을 문화적으로 품위 있게 누리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조상들이 누렸던 문화적 품위에 시민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시대에 문화유산을 전파하기 위한 계획은? △기술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기는 가치다. 연구소는 인간을 존중하는 문화적 내용이 디지털 기술과 만나는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다행히 포항에는 우수한 대학과 연구 인프라가 있으며, 인문학과 기술이 결합할 여건도 충분해 지역사회와 협력한다면 포항만의 인간 중심적 디지털 문화 모델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세대 참여를 위한 계획은? △포항문화연구소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는 연구 현장이다. 전통문화에 관심 있는 청소년들이 연구와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청소년이 연구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성취를 인정받는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다. 마을의 지명, 전설, 놀이를 직접 조사하고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 지역과 사람을 이해하는 경험도 제공하고 싶다. 이러한 경험이 청소년의 자존감을 높이고, 포항문화의 미래를 밝히는 토대가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포항의 문화유산은 단순한 행정 관리 대상이 아닌 시민 모두의 자산이다. 이해하고 찾고 즐기는 사람이 곧 주인이다. 우리 지역에는 서원과 정자, 문헌과 무형의 유산이 풍부하며, 그 공간들은 대부분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존재한다. 문화연구소는 언제든 시민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1-19

[EBS 세계의 명화 ‘아마겟돈‘] 인류 멸망 앞에 선 석유시추공들의 대활약

EBS ‘세계의 명화’는 17일 밤 10시45분, 마이클 베이 감독의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 ‘아마겟돈‘(Armageddon·1998)을 방영한다. 브루스 윌리스, 빌리 밥 손튼, 리브 타일러, 벤 애플렉 등 당대 할리우드 스타들이 총출동한다. 영화는 평화롭던 지구에 쏟아진 대규모 유성우(流星雨)가 뉴욕시를 초토화시키며 시작된다. 이를 분석한 나사(NASA) 과학자들은 텍사스 크기에 맞먹는 초대형 운석(隕石)이 18일 후 지구와 충돌한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충돌이 현실화될 경우 인류 멸망은 불가피한 상황. 과학자들이 제시한 유일한 해결책은 운석에 핵폭탄을 설치해 폭파하는 것이다. 이 임무를 위해 최고의 굴착 전문가 해리(브루스 윌리스)와 석유시추공들이 차출돼 두 대의 우주왕복선 ‘자유호’와 ‘독립호’를 타고 우주로 향한다. 임무는 순탄치 않다. 러시아 우주정거장에서 연료 보급 도중 대폭발 사고가 발생하고, 운석 착륙 과정에서 한 척의 우주선이 추락하는 등 위기가 이어진다. 살아남은 대원들은 지구의 운명을 걸고 극한의 환경 속에서 운석에 구멍을 뚫는 마지막 작업에 돌입한다. ‘아마겟돈’은 약 6500만년 전 공룡 멸종을 초래한 운석 충돌 가설을 바탕으로, 인류가 다시 한 번 종말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설정을 그린다. 특히 전쟁 전문가나 과학자가 아닌 석유시추공들이 인류의 구원자로 나선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같은 해 개봉한 ‘딥 임팩트’와 자주 비교되지만, ‘아마겟돈’은 압도적인 스케일과 감성적인 가족 서사, 블록버스터적 재미로 더 큰 흥행 성과를 거뒀다. 영화의 마지막, 해리가 딸과 나누는 이별 장면은 지금까지도 관객들의 기억에 남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6-01-17

[인문학 산책] ‘무사 백동수’를 통해 본 조선시대 무반의 실체

조선시대를 떠올리면 흔히 ‘문과의 나라’를 떠올린다. 이는 단순한 인상이 아니라 구조적 현실이었다. 학계의 통설을 종합하면 조선 전기부터 말기까지 무과 급제자는 약 1만7000명~1만9000명으로, 문과 급제자 약 1만5000명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많았다. 숫자만 놓고 보면 무과는 결코 주변부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그들의 처우였다. 무과 급제자들의 진로는 대체로 정해져 있었다. 중앙에서는 훈련원·오위도총부·내금위(內禁衛) 등 군사 실무 부서, 지방에서는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첨사·만호(萬戶) 등 군직이 전부였다. 정승이나 판서 같은 최고위 관직으로의 진출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병조판서조차 문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무과 급제가 곧 정치 엘리트의 길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봉록과 경제적 처우도 넉넉하지 않았다. 초임 품계는 낮았고, 전쟁이나 뚜렷한 군공(軍功)이 없으면 승진은 더뎠다. 특히 비교적 평화가 길었던 조선 중·후기에는 무인은 “할 일이 없는 존재”로 인식되기 일쑤였다. 무관 급제에는 시간과 경제력도 많이 소요되었다. 선산 출신 무관 급제자 노상추(盧尙樞, 1746-1829년)는 그의 일기(盧尙樞日記)에서 ‘24세에 무과에 뜻을 두었고 34세에 이르러서야 급제의 꿈을 이루었다’고 적고 있다. 유명 무인 가문으로는 △덕수 이씨: 이순신 가문 (무인의 상징) △수원 백씨 △광주 안씨: 조선 후기 무과 다수 배출 △청주 한씨:(문·무 병존, 무반 인맥 강함) 등이 있다. 이들 가문 공통점은 전시(戰時)에 존재감이 커졌다가 평화기에는 상대적으로 가문의 세(勢)가 위축 된다는 점. 무과 급제자들은 법적으로 분명 양반이었다. 그러나 체감되는 사회적 위상은 문과 양반과 달랐다. 혼인(婚姻) 시장에서 불리했고, 가문을 대대로 유지할 힘도 약했다. 문과 진출에 실패한 무반 가문은 점차 향촌에서 군반(軍班)이나 하위 양반으로 인식되며 주변화되었다. 역관(譯官)·의관(醫官)처럼 중인층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생활에서 느끼는 위상은 중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구조 속에서 수원 백씨는 대표적인 무반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문과 명문이 아닌, 대대로 무과와 군직을 중심으로 가문을 이어온 집안이다. 변방과 해안 방어, 전시의 실무에 강점을 가진 ‘군사 전문 가문’이었다. 이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이 바로 야뇌(野餒) 백동수(白東脩)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백동수의 무예를 보고 ‘인재(靭齋:백동수의 호)는 홀로 다른 세상에서 노니는 듯 했다’고 적고 있다. 백동수는 무과 급제자였고, 정치 엘리트는 아니었다. 그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신분이 아니라 시대적 만남이었다. 정조는 조선에서 드물게 문과 무의 균형을 고민한 군주였다. 친위 군사 장용영(壯勇營)을 강화하고, 실전 무예의 체계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백동수는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주도하며 조선 무예의 표준을 세운 인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는 구조적 변화가 아니라 예외였다. 정조 사후 장용영(壯勇營)은 약화됐고, 무예와 무반에 대한 경시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백동수 개인은 빛났지만, 무과 전체의 위상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의 인생 후반도 초라했다. 말년엔 정조의 승하 이후 노론으로부터 벼슬에서 축출되어 유배당함으로써 기록도 많이 남아있지 않다. 검(劍)은 있으나 자리는 좁았다. 조선의 무과는 숫자로는 결코 소수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걸을 수 있는 길은 좁았다. 백동수는 무인의 신분 상승을 증명한 사례라기보다, 구조 속에서 잠시 허용된 예외였다. 그 예외가 오히려 조선 사회가 얼마나 단단한 문과(文科) 중심 구조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6-01-17

조선은행 폭파 의거 장진홍 의사 항일투쟁기 소설로 출간

일제강점기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로 알려진 독립운동가 장진홍 의사의 삶을 소설로 정리한 ‘멈추지 않는 강물처럼’이 대구 도서출판 학이사에서 출간됐다. 이 책은 언론인 출신 김신곤 작가가 집필한 역사소설로,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장진홍 의사의 항일투쟁 행적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조선은행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금융과 자본을 통제하던 식민 통 기구였다. 장진홍 의사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를 감행했으며, 이는 국내 항일 무장투쟁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으로 장진홍 선생은 1929년 체포돼 1930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책은 이 의거를 중심으로 장진홍 의사가 만주와 러시아 하바롭스크, 일본 오사카와 도쿄를 거쳐 독립운동을 이어간 과정을 시간 순으로 추적한다. 1895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장진홍 의사는 한주(寒洲) 이진상 (李震相)으로 대표되는 한주학파의 사상적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한주학파 문인 겸와(謙窩) 장지필 선생에게서 항일정신을 배우며,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실천적 태도를 삶의 지표로 삼았다. 책은 이러한 사상적 배경이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비교적 차분한 시선으로 서술한다. 또한 심산(心山) 김창숙을 비롯한 유림 인사들과의 교류,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활동, 체포 이후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과정도 함께 담았다. 개인의 삶을 넘어 당시 유림 계열 독립운동의 흐름과 시대 상황을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학이사 신중현 대표는 “한 독립운동가의 선택과 행적을 통해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의 또 다른 단면을 조명한다”며 “이 책이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삶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6-01-15

포항 임허사 석조보살좌상,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지정

‘포항 임허사 석조보살좌상’이 경북도 문화유산위원회 최종 심의를 거쳐 도 지정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됐다. 북구 흥해읍에 있는 임허사가 소장한 포항 임허사 석조보살좌상은 경주 지역에서 산출되는 불석을 사용했고, 신체 비례와 의복 주름의 표현에서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의 형태적 특징이 함께 드러난다. 특히 복부의 W자형 주름과 안정된 하반신 비례는 조선 후기 석조불상의 전형적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또, 본래 보살좌상으로 조성됐다가 후대에 지장보살좌상으로 변용된 사실은 사찰 신앙의 변화와 존상의 활용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드문 사례다. 이처럼 임허사 석조보살좌상은 조선후기 불교 조각사의 양식적 전개와 신앙적 변용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역사·미술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됐다. 불상을 소장한 임허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천연기념물인 흥해향교 이팝나무 군락지 옆에 있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산령각이 있다. 이팝나무 군락지는 고려말 조성되기 시작해 현재 20여 그루가 있으며 매년 5~6월경이면 하얀 꽃이 만개해 많은 시민들이 찾는 명소다. 임허사는 국가유산청의 ‘2026년 생생 국가유산 활용사업’ 공모에 선정돼 ‘이팝나무 아래 명상과 쉼을 함께 하며(예정)’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포항시에는 이번에 지정된 ‘포항 임허사 석조보살좌상’을 포함하면 국가지정유산 29건, 도지정유산 58건, 국가등록문화유산 2건으로 총 89건의 국가유산이 있다. 달전재사, 보경사 소조비로자나삼존불좌상, 오어사 대웅전 등에 관한 국가유산 지정(승격)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배준수기자 baepro@kbmaeil.com

2026-01-15

여국현 시인 ‘한국 현대 서정시’ 출간 기념 북콘서트

포항 출신의 영문학 박사이자 시인인 여국현씨가 번역한 현대 한국 서정시 선집 ‘한국 현대 서정시’ 출간을 기념하는 북콘서트가 오는 17일 오후 3시 포항 송도동 조선소커피에서 열린다. 이번 행사는 한국 문학과 영어권의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기획됐으며, 시와 번역의 매력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자리로 기대를 모은다. ‘한국 현대 서정시’는 한국 현대시 100주년을 맞아 기획된 프로젝트로, 고두현, 김명리, 나종영, 맹문재, 이송희 등 한국 대표 시인 36명의 작품 72편을 한글 원문과 영어 번역문으로 수록했다. 번역은 여국현 박사(전 상지대 겸임교수, 현 중앙대 강사)가 맡아 시의 정서와 미학을 원어민 독자들에게도 전달하기 위해 3년간 공들여 작업했다. 2022년 3월부터 2025년 6월까지 웹 매거진 ‘시인뉴스포엠’에 연재된 번역 작품들을 재구성했으며, 일상 속 삶의 의미를 탐구하거나 생태적 상상력, 사회적 상실감 등을 주제로 한 시들이 주를 이룬다. 진행을 맡은 권양우 낭송가는 “한국 현대시의 정수를 영어권 독자들도 친숙하게 접할 수 있도록 번역된 점이 특별하다”며 “시인과 번역가가 직접 참여해 작품의 배경과 감동을 생생하게 전달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북콘서트에는 책에 표사를 통해 “가장 적절한 번역가가 가장 적합한 시인들의 작품을 번역”했다고 상찬을 한 오민석 단국대 명예교수와 번역시가 실린 포항의 서숙희·손창기·최라라 시인과 서울의 장우원 시인 등도 참석해 독자들과 함께 출간을 축하하고 소통할 예정이다. 행사는 △여국현 박사의 번역 과정 소개 △대표 시 낭독(한글·영어 병행) △참여 작가들과 청중의 Q&A 등으로 구성된다. 권양우 낭송가는 경북포항시낭송협회 대표이자 권양우의 낭독사랑방 운영자로, 시와 작가, 독자를 잇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문학을 매개로 한 나눔과 치유, 소통에 힘쓰고 있다. 여국현 시인은 “시를 번역하며 느낀 한국어의 정수가 독자들에게 오롯이 전해지길 바란다”며 “이번 콘서트가 문학으로 세대·문화의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1-11

[EBS 세계의 명화] 괴수 영화의 고전 ‘킹콩’ 10일 방영

EBS ‘세계의 명화’가 오는 10일 밤 10시 45분, 괴수 영화의 아이콘 ‘킹콩’(1976)을 방영한다. 존 길러민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1933년작 오리지널의 서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당시 최고의 특수효과와 흥행 기록을 세운 작품이다. 영화는 지도에 나오지 않는 인도네시아의 외딴 섬을 배경으로 한다. 석유회사 간부 프레드 윌슨(찰스 그로딘 분)은 섬에 매장된 유전(油田)을 찾기 위해 탐사대를 조직해 출항한다. 여기에 몰래 승선한 고생물학자 잭 프레스콧(제프 브리지스 분) 교수가 섬에 거대 동물이 살고 있다고 주장하며 갈등이 시작된다. 항해 도중 구출된 배우 지망생 드완(제시카 랭 분)이 합류하면서 탐사대는 마침내 신비의 섬에 상륙하게 된다. 하지만 무인도로 알았던 섬에는 거대 괴물을 숭배하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드완을 납치해 거대 유인원 ‘킹콩’에게 제물로 바친다. 킹콩은 제물인 드완에게 묘한 애정을 느끼며 그녀를 보호하지만, 인간들은 킹콩을 생포해 뉴욕으로 압송한다.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킹콩은 결국 도심 한복판에서 탈출하며 인간 문명을 향한 반격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1933년 흑백 영화가 보여준 ‘미녀와 야수’식의 강렬한 스토리를 계승하면서도, 197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적극 반영했다. 원작의 영화 촬영 설정 대신 ‘석유 탐사’라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내세웠다. 실물 크기 로봇과 정교한 미니어처 기술을 동원해 스펙터클한 영상을 구현했다. 특히 문명사회가 자연과 원주민의 문화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해 단순한 오락 영화 이상의 메시지를 던진다. 당시 신예였던 제프 브리지스와 제시카 랭의 풋풋한 모습은 영화의 또 다른 감상 포인트로 꼽힌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6-01-10

교황 레오 14세 즉위 후 첫 추기경 회의...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 추기경도 참석

지난해 5월8일 즉위한 레오 14세 교황이 9일(현지시간) 바티칸에서 첫 추기경 회의를 열었다. 추기경 회의는 가톨릭 교계에서 교황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성직자들인 추기경들이 부정기적으로 모여 하는 부정기적인 회의이긴 한데, 가톨릭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이날 회의에는 전 세계 추기경 245명 중 170명이 참석했는데,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인 유흥식 추기경도 참석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회의는 바티칸에서 이틀간 열렸으며 가톨릭교회의 단합이 강조됐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EFE 통신 등 외신들은 개혁·보수파로 양분된 추기경 간의 협력과 이해를 위해 열린 추기경 회의의 목적에 부합한 것이었다고 했다. 교황은 이날 추기경들에게 “개인적 혹은 집단적 의제를 홍보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라며 ‘일치‘를 촉구했다고 한다. 이어 “우리는 해법을 즉각적으로 찾을 수 없을 수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 도울 수 있을 것“이라며 교회의 협력을 당부했다. 외신들은 “교황이 이번 회의 목적이 ‘전문가 집단‘의 기능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추기경 각자의 견해를 수렴하고 고려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최정암기자 am4890@kbmaeil.com

2026-01-09

국립경주박물관, 2025년 관람객 198만명 돌파···30년 만에 최대 기록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윤상덕)은 2025년 연간 누적 관람객 수가 198만 명을 기록하며 1996년 이후 30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6일 밝혔다. 이는 전년 대비 45% 급증한 수치로 신라 금관 특별전과 APEC 정상회의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분석된다. 신라 금관 특별전에서는 6점의 신라 금관과 금허리띠를 최초로 동시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관람객들의 뜨거운 반응에 따라 전시 기간을 당초 계획보다 늘려 2026년 2월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또 APEC 정상회의 기간 중 한미·한중 정상회담이 박물관 내 특별전시실에서 개최되며 국제적 관심이 집중됐다. 특히 정상회담 장소를 포토존으로 개방해 방문객들에게 특별한 관람 기회를 제공하며 차별화된 경험을 선사했다. 월지관은 18개월 간의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2025년 10월 재개관했다. 전시 공간 재구성과 관람 환경 개선을 통해 관람객 만족도를 크게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추석 연휴 6일간(추석 당일 휴관)에는 15만여 명이 방문해 하루 최대 3만 8477명의 관람객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성덕대왕신종 타음조사 공개회에서는 22년 만에 신종의 소리를 재현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으며, 사회적 관심을 한층 확대시켰다. 관람객 증가 추세에 대응해 박물관은 온라인 예약 시스템 개편, 전시 동선 정비, 편의시설 확충 등을 통해 대규모 인원 수용 역량을 강화했다. 윤상덕 관장은 “문화유산에 대한 국민적 관심 증대를 확인했다"며 "안전한 관람 환경 조성과 고품질 전시로 국민의 신뢰에 부응하는 박물관으로 도약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1-06

한국국학진흥원, ‘웹진 담(談)’ 1월호 발행···24절기의 다각적 의미 조명

안동 소재 국학 연구기관인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전통시대의 시간 질서인 24절기가 현대 사회에서 지니는 다각적인 의미를 조명하는 ‘웹진 담(談)’ 신년호 ‘큰 시간표, 절기(節氣)’를 발행했다. 이번 1월호는 절기가 전통시대의 역법을 넘어 오늘날의 문화와 풍습을 형성해 온 원천임을 밝히며, 급변하는 미디어 산업의 흐름과 변화상을 ‘절기’라는 신선한 시각으로 분석한다. 김해인 연구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의 ‘시간의 마디를 나누다’는 해와 달의 운행을 조화시킨태음태양력의 원리를 바탕으로, 24절기가 조선 시대 생업과 국가 의례의 엄격한 기준이었음을 소개한다. 그는 “조선 시대에는 절기 중 사형 집행을 금지했으며, 동지를 ‘작은 설(亞歲)’로 삼아 종묘에 팥죽을 올리고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았다”며 절기가 국가 통치 시스템과 긴밀히 연결되었음을 강조한다. 또한 입춘을 기준으로 띠를 정하는 역법과 동지 팥죽의 벽사 의례를 음식문화사적 관점에서 흥미롭게 풀어냈다. 김나경 초빙교수(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의 ‘절기(節氣), 미디어를 읽는 또 하나의 시간’은 24절기의 순환 원리를 현대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에 대입해 분석한다. 김 교수는 숏폼 콘텐츠의 폭발적 성장을 ‘하지’의 열기에, OTT 서사의 귀환을 ‘백로’와 ‘한로’의 서늘함에 비유한다. 또한 생성형 AI 기술이 무분별한 확장을 멈추고 절제를 배우는 단계를 ‘상강의 서리로 해석하면서 현재 미디어 시장이 새로운 순환을 준비하는 ‘동지’의 상태에 와 있음을 역설한다. 이 외에도 ‘웹진 담(談)’ 신년호는 웹툰, 예술 평론, 연재소설 등 다채로운 콘텐츠로 절기의 면모를 조명한다. 서은경 작가의 웹툰 ‘독선생전’은 훈장님과 아이들의 일상을 통해 절기가 삶에 스민 해학과 풍자를 시각적으루 구현한다. 이수진 공연평론가의 ‘완벽한 한해에 대한 꿈’은 영화 ‘남한산성’을 통해 병자호란의 혹한 속에서 펼쳐진 ‘명분과 생존 사이의 갈등’을 조명하며, 인간적 가치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이문영 작가의 ‘망허촌이 얼어붙은 날’은 소한과 대한 사이 혹독한 추위를 동장군과 요괴 영노의 대결이라는 민속적 상상력으로 풀어내면서 절기의 순환생명력 계승의 상징임을 묘사한다. ‘웹진 담(談)’ 2026년 1월호는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홈페이지(https://story.ugyo.net/front/webzine/index.do)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1-05

‘대한민국 영화의 큰별’ 국민배우 안성기 별세

국민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국민 배우‘ 안성기가 5일 별세했다. 올해 74세. 안성기 배우는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배우로서 뛰어난 연기력은 물론 바른 품행으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지난달 30일 자택에서 음식물이 목에 걸린 채 쓰러져 중환자실에 긴급 후송된 지 6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안성기 배우 장례위원회는 이날 오전 9시쯤 안성기 배우가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받던 중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실에 마련됐다. 유족으로는 아내 오소영 씨와 아들 다빈·필립 씨가 있다. 장례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과 한국영화배우 협회 주관으로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원로배우 신영균이 명예위원장, 이갑성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배창호 감독·신언식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직무대행·양윤호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이 위원장을 맡는 장례위원회를 꾸렸다. 발인은 9일 오전 6시. 장지는 양평. 2019년부터 혈액암 투병을 해온 고인은 최근 회복에 전념하며 작품 복귀를 준비해왔다. 2019년 암 판정을 받았다가 수술로 이듬해 완치됐는데 재검을 받는 과정에서 재발된 사실이 알려졌다. 건강 이상설이 퍼지기는 했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다가 2022년 본인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투병 사실을 확인했는데 우려와는 달리 상당히 건강한 모습이었다. 2023년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에 박중훈, 최민식과 함께 참석해 큰 박수를 받았다. 고인은 아역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69년간 170편 넘게 출연하며 영화계를 이끌었다. 그는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로 배우로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구도자의 만행을 그린 ‘만다라‘(1981·임권택 감독), 빈민으로 나온 ‘꼬방동네 사람들‘(1982·배창호), 거지 ‘민우‘로 분한 ‘고래사냥‘(1984·배창호), 후배 박중훈과 함께 한 ‘칠수와 만수‘(1988·박광수) 등이 1980년대 안성기를 주목하게 한 작품들이다. 90년대에는 ‘남부군‘(1990·정지영)을 시작으로 안정효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하얀전쟁‘(1992·정지영), 한국 최고의 코미디 영화로 꼽히는 ‘투캅스‘(1993·강우석), ‘그대 안의 블루‘(1992·이현승), ‘태백산맥‘(1994·임권택), ‘퇴마록‘(1998·박광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이명세) 등 출연 작품마다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고인은 2000년대에도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며 영화계 맏형 역할을 했다. 인상적인 액션 연기로 첫 남우조연상을 받은 ‘무사‘(2001·김성수), 한국 최초의 천만 영화 ‘실미도‘(2003·강우석), 박중훈과 또 한 번 콤비를 이뤘던 ‘라디오스타‘(2006·이준익) 등으로 사랑을 받았다. /최정암기자 am4890@kbmaeil.com

2026-01-05

<알림>경북매일신문 신년 오피니언 지면 개편

경북매일신문은 2026년 새해를 맞아 한층 더 발전적인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오피니언 필진을 개편합니다. 이번 개편을 통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독자에게 심층적인 통찰을 제안할 예정입니다. 이번에 새롭게 합류한 신평 변호사는 법률 전문가로서의 식견과 사회 참여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격차 문제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시사단상’ 을 집필합니다. 장호병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은 문학과 역사의 교차점을 바탕으로 ‘인문학의 미래’를 탐구할 예정입니다. 윤재호 경북상공회의소 회장은 지역 경제 활성화 방안을, 전익현 포항철강공단 이사장은 산업 구조 혁신 전략을 현장 경험에 기반하여 풀어냅니다. 조관필 한동대 교수는 ‘다름과 가치를 만드는 건축도시’라는 코너에서 효율과 속도를 중심으로 하는 패러다임을 넘어 지역 정체성과 문화적 독창성에 기반하여 지속 가능한 차별화 전략을 제시합니다. 임재은 산림기술사는 ‘산림과 인간의 상생, 지속가능한 미래 전략’ 칼럼으로 기후 위기 시대에 산림 생태계를 보전하고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지속가능한 발전 방안을 모색합니다. 유성찬 포항환경연대 공동대표는 환경·ESG 분야의 통찰력을 전달하는 ‘환경과 ESG’를 격주로 연재하며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는 ‘AI와 인류의 미래’ 칼럼으로 기술 발전과 인간 사회의 조화를 모색하는 비전을 제시합니다. 주재원 한동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디지털 시대의 언론 환경 변화를 미디어 이론과 현장 경험으로 진단하고, 서득수 지속가능ESG연구소장은 SDG(지속가능발전목표) 실현을 위한 실천적 전략을 제안할 예정입니다. 또한 격주에서 매주 연재로 바뀌는 김은주 포항시의원의 ‘김은주의 공감정치’는 지역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소통 프로젝트로, 복잡한 정치 이슈를 생활 밀착형 해법으로 풀어냅니다. 정미영 수필가의 포토에세이 ‘우연한 시선’은 일상 속 순간을 사진과 산문으로 담아내어 독자들에게 삶의 여유를 선사할 것입니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 국학기반본부장은 ‘조선의 일기’ 칼럼을 통해 국학 연구를 일상의 언어로 전달해 문화유산의 가치를 독자에게 친근하게 소개할 예정입니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 또 같이 대표의 ‘문화 思랑’ 은 예술가와 시민이 함께 성장하는 지속 가능한 문화 생태계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정치·사회 이슈에 대해 인문학적 통찰을 보여주던 ‘유영희의 마주침’은 매주 월요일에서 목요일로 옮겨 독자를 계속 만납니다. 기존 필진과 더불어 새로 참여하는 경북매일의 오피니언 필진은 독자 여러분께 격변하는 대내외 환경 속에서 지속가능한 미래의 길을 제시할 것입니다.

2026-01-04

한국국학진흥원 제18기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880명모집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지난 2일부터 오는 2월 1일까지 유아교육기관을 방문해 유아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줄 제18기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880명을 공개 모집한다. 이 사업은 올해로 18년째를 맞아 현재 3000여 명의 이야기할머니가 8300여 개의 유아교육기관에서 활동 중이다. 이야기할머니는 단순한 봉사활동을 넘어 과거와 현재를 잇고 미래를 가꾸는 문화 전승의 주체로서 미래 세대인 우리 아이들에게 따뜻한 정서와 바른 인성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선발 시 학력·경력은 고려되지 않는다. 만 56세 이상 만 74세 이하의 여성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으며, 평소 자원봉사나 이야기할머니 활동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지원 가능하다. 지원 희망자는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누리집(www.storymama.kr)에서 선발 공고를 확인한 뒤 2월 1일까지 지원서를 작성해 우편 또는 온라인으로 제출하면 된다. 1차 서류심사 통과자는 이야기 구연 능력 평가를 포함한 면접 심사를 거치며, 최종 합격 시 4월부터 10월까지 약 36시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5년간 거주지 인근 유아교육기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1-04

[칼의 인문학] 중세 전쟁-식민지 패권의 ‘게임 체인저’ 톨레도검

스페인을 여행하며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장소 가운데 하나는 고도(古都) 톨레도(Toledo)다. 마드리드 남쪽 약 70km, 타호강(江)이 도시를 병풍처럼 감싼 이곳은 로마와 서고트,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이 겹겹이 쌓인 역사 공간이다. 알카사르 성채와 대성당, 미로(迷路)처럼 얽힌 중세 골목은 한때 제국의 중심이었던 시간을 말해준다. 그러나 톨레도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돌과 건축만이 아니다. 이 도시의 명성을 세계에 각인시킨 진짜 상징은 오히려 손에 쥘 수 있는 하나의 물건, ‘톨레도 검(劍)’이다. 톨레도는 특정한 형태의 검 이름이 아니라 ‘명검의 기준’으로 통했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이 지역의 강철은 유럽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톨레도 인근에서 채광된 철광석과 저탄소강·고탄소강을 반복해 접쇠하는 제강(製鋼) 방식, 그리고 독자적인 담금질과 열처리 기술은 강도와 유연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서도 휘어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 특성은 전투 현장에서 병사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안겼다. 잘 알려진 로마군의 글라디우스가 톨레도산 강철로 제작됐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도 이 같은 명성을 반영한다. 8~11세기 서고트인과 무어인들이 오랫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톨레도를 장악한 이후 확보한 강철 무기와 갑옷의 힘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군사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지배의 기반이었다. 훗날 중동에서 ‘다마스쿠스 강(鋼)’이 개발된 것 역시, 톨레도 강철에 필적할 만한 재료를 만들려는 시도에서 비롯됐다는 해석이 있다. 다마스쿠스 강이 경도에서는 뛰어났지만 유연성 면에서는 한계를 보였다는 평가가 따라붙는 이유도, 비교의 기준이 이미 톨레도에 설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명검의 진정한 ‘게임 체인저’ 역할은 16세기 신대륙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은 흔히 총과 대포의 승리로 설명되지만, 실제 현장에서 정복자들이 끝까지 의존한 무기는 철제 무기와 갑옷, 그리고 톨레도 검이었다. 화약 무기는 보급이 불안정했고 오작동도 잦았다. 반면 강철 검은 언제나 손에 쥘 수 있는 확실한 힘이었다. 흑요석과 목제 무기에 익숙했던 원주민 사회는 전금속제 무기와 방어구를 거의 경험한 적이 없었고, 강철 검의 대응법 자체를 알지 못했다. 1532년의 ‘카하마르카 사건’은 기술 격차가 전쟁의 룰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가 8000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평화 회담에 나섰을 때,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거느린 병력은 불과 168명이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톨레도 검과 철제 갑옷, 기병, 화승총과 대포를 숨긴 채 매복하고 있었다. 신호와 함께 울린 대포의 굉음, 말의 돌진, 번쩍이며 내려치는 철검이 동시에 몰아치자 잉카군은 공포에 질려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단 하루 만에 수천 명이 목숨을 잃고 황제는 생포됐다. 이 전투가 특히 참혹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일방적 살상 구조에 있다. 원주민의 무기는 철제 방어구를 거의 관통하지 못했지만, 강철 검은 면(綿) 갑옷과 신체를 동시에 절단했다. 더구나 많은 원주민 사회가 포로 확보와 의례적 전투, 무력(武力) 게임 정도로 전쟁을 인식한 반면, 스페인군은 철저한 섬멸전을 수행했다. 말과 총성, 강철 검은 단순한 무기를 넘어 초자연적 힘으로 인식되며 공포를 증폭시켰다. ‘공포는 전염된다’는 격언이 확인 되는 자리이기도 했다. 톨레도 검은 단순한 칼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이 전쟁의 양상을 어떻게 바꾸고, 문명의 격차가 패권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상징이다. 오늘날 톨레도에서 생산되는 검은 실전용이 아니라 영화 소품이나 관광 기념품이 대부분이지만, 그 칼날 위에는 중세 전쟁과 식민지 시대를 관통한 냉혹한 기억이 서려 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6-01-03

[EBS 세계의 명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EBS ‘세계의 명화’가 1월 3일 밤 10시 45분, 코엔 형제의 재기와 유머가 빛나는 작품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를 소개한다. 1930년대 미 남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탈옥수들의 방랑을 통해 인종 문제와 정치 풍자, 대중문화의 힘을 유쾌하면서도 날카롭게 풀어낸다. 영화는 쇠사슬에 묶인 채 시골 농장에서 노역(勞役)하던 죄수 율리시즈, 델마, 피트가 탈출에 성공하면서 시작된다. 리더 격인 율리시즈는 숨겨둔 보물이 있다며 동료들을 이끌지만, 사실 그의 진짜 목적은 이혼한 전처(前妻)의 재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포마드 기름 상표에 집착하는 허세 가득한 율리시즈, 세상 물정에 어두운 델마, 어딘가 엇나간 피트의 조합은 길 위에서 계속 소동을 일으킨다. 도망치는 길에서 이들은 영혼을 팔고 기타를 친다는 흑인 연주자 토미를 만나고, 단돈 10달러를 벌기 위해 라디오 방송국에서 부른 노래가 뜻밖의 히트를 기록한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경찰의 추적을 피해 달아나며 각종 괴짜 강도들과 마주친다. 현상금을 노리는 여인의 유혹, 성경을 앞세운 폭력, 소를 증오하는 무장 강도의 등장은 영화의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한층 강화한다. 이 작품의 뼈대는 고대 그리스 작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The Odyssey)다. 주인공 이름부터 ‘율리시즈’인 점에서 알 수 있듯, 코엔 형제는 고대 서사를 미국 근대사의 풍경 속으로 옮겨왔다. 세 명의 여인에게 홀려 동료가 두꺼비로 변하는 장면, 외눈박이 거구와의 대결은 고전을 재치 있게 변주(變奏)한 장면이다. 여기에 컨트리 음악을 중심으로 한 사운드트랙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이야기의 색다른 재미를 준다. 후반부 등장하는 KKK단은 웃음 뒤에 숨은 미국 사회의 어두운 얼굴을 드러내며 극적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코엔 형제는 방랑과 귀환이라는 고전적 결말을 유지하면서도, 미국적 현실과 풍자를 덧입혀 자신들만의 색깔을 완성한다. 가볍게 웃다가도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이 영화는, 새해 첫 ‘세계의 명화’로 손색없는 선택이라고 볼수 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6-01-03

[신년특집]2026년 병오년 ‘붉은 말의 해’ 띠풀이···영혼과 수호신의 승용동물

“나를 따르라!” 세계사에 있어 위대한 영웅들은 말과 운명을 함께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이라는 미증유의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동갑내기 검붉은 말 부케팔라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여포의 붉은 적토마, 위기에 처한 나폴레옹을 수차례 구해낸 아라비안 종마 마랭고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다.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 역시 평생을 말과 함께 전장을 누볐다. 2026년은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의 해다. ‘병(丙)’은 불의 기운을 갖고 있으며, ‘오(午)’는 12간지 중 일곱 번째 동물인 말을 나타낸다. 고래로부터 붉은색은 태양을 상징하며, 영원불멸의 힘, 열정 등 생명력과 재앙과 질병을 물리치는 이미지로 각인돼왔다. 말은 현대 사회의 빠른 변화에 발맞춰, 끊임없이 도전하는 상징적 힘의 이미지로 인식된다. 말은 시간으로는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방향으로는 정남(正南), 계절로는 양기(陽氣)가 왕성해지는 여름의 문턱에 해당한다. 말이 지닌 생동감과 박진감, 질주 본능은 단순한 생태적 특징을 넘어 문화적 상징으로 확장돼왔다. △영혼과 수호신의 승용동물 말, 하늘과 인간을 잇는 신성한 존재 고대 문헌과 유물 속에서 말은 신성한 동물로 그려진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왕의 탄생, 나라의 흥망을 예시하며, 죽은 자의 혼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신화 속 신라 시조 박혁거세는 백마가 남기고 간 붉은 알에서 태어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듯이 말은 속도전에 없어서는 안 될 전쟁의 무기이자 영혼을 태우고 하늘로 오르는 신성한 매개체였다. 안악3호분, 무용총, 쌍영총 등에 그려진 말은 사자의 혼을 태우고 저세상으로 향하는 ‘천마(天馬)’의 모습이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 개마총 벽화의 장식된 말은 ‘묘주가 탄 말’이라는 묵서(墨書)가 남아 있어 말 위에 영혼이 타고 있음을 상징한다. 신라의 마문·마형토기의 특수한 성장마(盛裝馬)는 등자가 달린 안장만 있고 사람은 타지 않아 말의 영매체(靈媒體) 기능을 한층 더 분명하게 나타낸다. 말 앞에 ‘총주착개마지상(塚主着鎧馬之像)’이라는 묵서가 있어 주인공이 말을 타고 있는 그림이라는 뜻이 된다. △무덤 속 말, 저세상으로 가는 탈것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마각문토기, 마형토기, 기마인물토기는 이런 관념을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항아리 어깨에 새겨진 달리는 말, 아예 말 형상으로 빚어진 토기, 사람을 태운 기마 인물 토기까지 표현 방식은 달라도 의미는 하나다. 죽은 이가 말을 타고 저세상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는 이 상징의 정점이다. 백화나무 껍질에 그려진 하늘을 나는 백마는 왕의 영혼을 태우고 천상으로 오르는 존재로 해석한다. 말은 더 이상 땅의 동물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영물로 격상된다. 이러한 사상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왕이나 왕비의 장례에 사용된 ‘죽안마’는 몸체는 대나무로, 다리는 나무로 만들고 안장까지 갖췄다. 순장의 관습이 사라진 뒤에도 영혼을 태우는 말의 관념만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생활 속으로 스며든 말의 상징 말은 교통수단이자 군사력, 농경과 생산의 중심 도구였다. 말의 갈기는 관모가 되고, 가죽은 신발과 주머니가 되며, 힘줄은 활을 만드는 재료가 됐다. 말과 관련된 지명만 해도 마장동, 마령재, 마이산, 천마산 등 전국에 740여 개가 넘는다. 대구 달성에는 마비정, 포항 구룡포의 말봉재도 있다. 민속신앙에서 말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도 등장한다. 전국 각지의 서낭당과 당산에는 목마·석마·철마가 봉안돼 있다. 어떤 곳에서는 호환(虎患)을 막기 위해, 어떤 곳에서는 풍요와 득남을 기원하기 위해 말을 모셨다. 재앙을 막고 복을 불러오는 존재로 여겨졌던 것이다. 속담과 놀이 속에서도 말이 빠지지 않는다. 윷놀이에서 ‘모’가 말에 해당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판을 바꾸는 힘이 말에 있었기 때문이다. 말과 관련된 사자성어는 50여 가지가 넘는다. 말은 우리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까닭이다. △‘말띠는 드세다’는 속설은 오해 말띠를 둘러싼 속설 역시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말띠 여자는 팔자가 세다’는 인식은 우리 고유의 전통이 아니다. 조선 왕실만 보더라도 말띠 왕비는 여럿이다. 정현왕후, 인열왕후, 인선왕후, 명성왕후, 순정효황후가 그들이다. 이 속설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민속 인식이 유입되며 굳어진 미신으로 보는 게 학계의 공통된 견해다. 오히려 말띠가 상징하는 것은 강인함과 활력, 이동성과 개척성이다. 역마살 역시 떠돌 운명이 아니라, 새로운 문물에 대한 동경과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으로 읽을 수 있다. △오늘날 말은 어디로 달릴까 말은 힘차게 달릴 때 가장 말다워진다. 고대에는 하늘과 교통하는 영물이었고, 중세에는 제국의 확장을 이끈 동력이었으며, 근대에는 산업과 교통의 상징이었다. 오늘날까지 말이 주는 생동의 이미지는 영원하다. 소통과 확산, 변혁과 도약 등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와 겹친다. 천금준마(千金駿馬)의 가치도 어떻게, 어디로 향하느냐에 달렸다. 영천혼을 태우고 하늘을 달리던 말은 이제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달릴 것인지는, 결국 말을 탄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1-01

연말에 듣는 음악, 새해를 맞는 클래식

연말은 한 해의 끝에 대한 아쉬움과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하는 시기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흥겨움 뒤에 찾아오는 고요함 속에서 자신과 마주하는 음악을 듣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때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마음을 정리하고 새 출발을 준비하는 위로가 된다. 연말에 어울리는 음악으로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사계’ 중 ‘겨울’을 떠올릴 수 있다. 황량한 자연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신의 인도를 갈구하는 모습은 노동과 성장을 넘어 성찰과 기다림의 단계로 향하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자연의 리듬 안에서 한 해를 차분히 돌아보기에 적합한 음악이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8번 b단조 미완성' 또한 연말에 추천하는 작품이다. 이 곡은 교향곡이 당연히 도달해야 할 4악장의 완결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두 악장에서 멈춘 이 음악은 ‘끝내지 못함’을 결핍이나 실패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표현해야 할 감정과 음악적 이야기를 다 했기 때문에 2악장으로 마무리했다는 평이 있다. 이 작품은 연말에 우리가 느끼는 아쉬움, 즉 ‘아직 다 끝나지 않은 삶’에게 ‘끝내지 못한 것이 실패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피아노 음악으로는 슈만의 ‘어린이 정경’ 중 ‘트로이메라이’를 추천하고 싶다. 제목은 ‘어린이의 꿈’이지만, 실제로는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가 잃어버린 감정을 돌아보게 하는 곡이다. 연말에 듣는 ‘트로이메라이’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앞으로도 지켜가야 할 마음의 방향을 조용히 일러준다. 그렇다면 새해 첫날, 1월 1일의 첫 곡은 어떤 음악을 들으면 좋을까. 새해의 음악은 결심을 강요하기보다, 새로운 시작을 잔잔히 열어주는 역할이면 충분하다. 이 역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은 베토벤 교향곡 제6번 ‘전원’ 1악장이다. 자연을 묘사한 이 음악은 거창한 승리나 극적인 전환 대신, 평온한 걸음으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게 한다. 새해의 아침, 창밖의 빛과 함께 이 음악을 듣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삶으로 걸어 들어갈 용기를 얻게 된다. 또 다른 선택으로는 클래식 현대음악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의 'Spiegel im Spiegel'을 들고 싶다. 이 곡은 거의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테마의 반복 속에서 미세한 음악의 차이를 감지하게 된다. 새해 역시 그렇다.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은 없지만, 다시 시작된 시간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해간다. 여기에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을 더한다면, 새해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비발디는 봄을 새의 노래와 얼음의 해빙, 생명의 귀환으로 묘사했다. 이는 단순한 계절 표현이 아니라,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간에 대한 음악적 선언이다. 그래서 이 곡은 새해 첫날, 오전에 듣기에 적합하다. 새해의 시작을 ‘결심’이 아니라 생명력의 회복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SNS를 통해 자신이 선택한 “새해 첫 곡”을 공유한다. 긴 설명 대신 한 곡의 제목만으로도 자신의 정서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연말과 새해를 잇는 음악의 역할은 분명하다.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다짐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 음악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우리가 잠시 멈춰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시간의 끝과 시작을 가장 깊이 연결해준다. /박정은 객원기자

2025-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