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담 스님, 청도 감나무골 어르신 400여 명 인터뷰 첫사랑·고향·가족 이야기 담은 그림 에세이 출간
경북 청도 감나무골 어르신들의 삶이 한지(韓紙) 위에 되살아났다.
연필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던 구순(九旬의 할머니와 평생 농사일만 하던 할아버지들이 붓끝으로 꺼내놓은 기억은 한 편의 그림이자, 한 시대의 자화상이다.
영담 스님이 글을 쓰고 청도지역 어르신들이 그림을 그린 그림에세이 ‘안 비도 있지, 있구말구’가 최근 출간됐다. 책은 경북 청도의 감나무골 마을에서 살아온 어르신들의 추억과 삶의 풍경을 담아낸 기록이다.
청도에서 한지미술관을 운영하는 영담 스님은 “어르신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기억이 남아 있을까”라는 궁금증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4년여 동안 청도 곳곳을 돌며 400여 명의 어르신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직접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처음에는 어르신들 대부분이 손사래를 쳤다. “그림은 못 그립니더. 연필도 잡아본 적 없심더”라며 난감해하던 어르신들은 막상 한지를 펼쳐 들자 묻혀 있던 기억을 하나둘 꺼내놓기 시작했다.
책에는 70대부터 90대까지 어르신들이 직접 그린 그림 50편이 실렸다. 살아온 집과 헛간, 소달구지와 가족들의 이름을 빼곡히 적어 넣은 그림,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식의 얼굴을 그린 그림, 운문댐 수몰 이전 고향집을 담아낸 그림 등 저마다의 사연이 담겼다.
특히 청도의 상징인 감나무는 책 전반을 관통하는 정서로 등장한다. 풍성한 감이 열린 가지를 잘라 건네주던 동네 청년과의 첫사랑, 제사상 곶감을 몰래 빼먹던 어린 시절, 감을 이고 장에 나가던 어머니의 모습까지 감나무는 곧 삶의 배경이자 기억의 뿌리였다.
책 제목이기도 한 ‘안 비도 있지, 있구말구’는 영담 스님이 한 할머니에게 “감나무 뿌리가 눈에 보이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보이지 않아도 분명 존재하는 뿌리처럼, 사람의 삶 역시 지나온 시간과 기억 위에 단단히 서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영담 스님은 “어르신들의 삶 하나하나가 꽃처럼 아름다웠다”며 “웃고 울며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오히려 내가 더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추천사를 쓴 혜민 스님은 “삶의 끝자락에서 피어난 가장 맑은 이야기들이 우리를 존재의 본향으로 이끄는 따뜻한 귀향과도 같다”고 평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