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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비극적 운명의 젊은 무장들

세조 시절, 계유정난과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신들이 있었다. 한명회와 신숙주를 중심으로 한 정난공신(구공신)들이다. 이들은 권력의 실세들로서 세조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았다. 그러다 결국 세조 말년에 북방에서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젊은 공신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병마도총사 구성군(龜城君) 이준, 병마부총사 조석문, 진북장군 강순, 좌대장 어유소, 우대장 남이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난이 끝난 후 모두 적개공신(신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이시애의 난으로 빛을 본 사람이 또 한 사람 있다. 바로 유자광이다.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고변과 음해로 정적을 숙청해 영달하다가, 결국은 자신도 유배지에서 삶을 마친 간신’ 정도로 요약 된다. 그는 서자 출신이었기에 벼슬길에 나가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시애의 난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해 세조가 어려움을 겪을 때, 대담하게 진압계책을 올렸다. 세조는 그를 불러 자질을 살펴본 뒤 전장에 투입했고, 그는 보란 듯이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유자광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벼슬도 얻게 되었다.신공신들의 등장으로 안정되어 있던 정국에는 작은 파란이 일었다. 한명회와 신숙주는 이시애의 난으로 잠시나마 옥살이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반면에 신공신들은  무골 기질의 세조에게 총애를 받음으로써, 신·구세력 간에는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게다가 1467년 9월, 요동의 여진족이 소요를 일으키자 명나라가 군대를 출동시키면서 조선에 지원 군대를 요청했다. 이때 강순(康純), 남이, 어유소 등이 출전해 여진의 소요를 진압함으로써 또 한 번 개가를 올렸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통해 강순이 영의정에 올랐다. 조석문은 좌의정이 되었고, 화려한 가문적 배경과 뛰어난 무인적 기질을 가진 남이가 나이 스물여섯에 병조판서에 등용되었다. 바야흐로 신공신들이 정국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영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이들을 그토록 아꼈던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예종이 즉위했기 때문이었다. 즉위 당시 열아홉이었던 예종은 세조의 둘째아들이자 한명회의 사위였다. 이제 구공신인 한명회와 신숙주가 정권을 좌지우지하게 될 무대가 꾸며졌다. 세조의 죽음으로 그 유일한 지지대마저 사라져 버린 신공신들은 속절없이 구공신들에게 당해야만 했다. 신공신의 중심이었던 구성군과 남이는 왕실의 종친이었다. 구공신들은 이런 왕실 인척들이 세력을 키우는 것을 견제하면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공신들은 경험이 많고 교활한 구공신들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신공신들은 대부분 이시애의 난 진압 이후 급성장한 무장들이었고, 구성군과 남이는 20대의 동갑내기였다. 특히 구성군은 정치적인 야심이 없던 인물로, 야심이 컸던 남이와는 어울리기 힘들었다. 그렇다 보니 뭉치기는커녕, 자신들끼리도 알력을 빚었다. 그중에서도 유자광은 모사에 능하고 계략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사랑을 더 받는 것을 늘 시기했었다. 설상가상으로 예종도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남이에 비하면, 자신은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으며, 아버지인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468년 9월 7일, 예종이 즉위하던 바로 그날 조회(朝會)때였다. 한명회가 임금에게 “남이는 병조판서로 있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예종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에서 남이를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발령을 내버렸다. 병조의 우두머리를 궁궐 경비대장인 겸사복장(종2품 무관직)으로 깔아뭉개 버린 것이다. 예종이 임금으로서 행했던 첫 업무가 남이의 좌천이었던 것을 보면, 그동안 구공신들과 예종이 얼마나 남이를 미워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남이는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는 기개와 인맥을 갖추고 있었다. 구공신과 예종이 그를 두려워한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남이의 세력들을 발본색원하여 축출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드디어 신공신들을 한꺼번에 제거할 기회가 포착되었다. 예종이 즉위한지 불과 한 달이 지난, 1468년 10월 24일 늦은 밤이었다. 병조참지(兵曹參知:정3품)로 있던 유자광이 예종을 찾아와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을 했다. 남이가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에 혜성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혜성이 나타난 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유자광의 고변내용은 구체적이지도 않았고 두루뭉술하여 의문투성이였으나, 예종은 이를 따져 보지 않았다. 남이가 곧 군사라도 몰고 쳐들어올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도성의 경비를 철통같이 하고는 바로 남이를 체포하게 했다. 그날 밤 주요 종친들과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종이 직접 남이를 심문을 했다. 그러나 남이는 역모사실을 부인했다. 예종은 남이에게 별다른 혐의를 찾을 수 없자. 유자광을 불러 대질을 했다. 그제야 유자광이 고변자란 사실을 알게 된 남이는 머리로 땅을 치면서 “유자광이 나를 모함한 것이다”라고 부르짖었다. 남이가 계속 부인하자 예종은 남이의 측근 무장들을 하나씩 불러들여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이 역모를 부인하는 가운데, 기껏 남이의 첩 탁문아(卓文兒)가 심한 고문에 못 이겨 ‘남이가 세조의 국상 중에 고기를 먹었다’고 자백한 것 정도가 전부였다.하지만 여진족 출신의 무장 문효량(文孝良)이 혹독한 매를 맞다가 견디지 못하고 남이에게 불리한 진술을 해버렸다.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었다. 분위기상 이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남이도 마지못해 역모혐의를 시인했다. 그러나 그는 그냥 죽으려 하지 않았다. 같은 신공신으로 영의정에 있던 강순을 물고 들어갔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온 강순은 남이에게 ‘왜 나를 끌어들였느냐’고 따졌다. 남이의 답변이 가관이었다. ‘영의정임에도 내가 무고를 당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한마디 구원도 해주지 않았으니, 당신도 나와 같이 원통하게 죽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결국 이들에게는 모반대역죄가 적용되었다. 예종은 1468년 10월 27일 군기감 앞 저자거리에서 남이·강순·조경치(曺敬治)·이중순(李仲淳)·변영수(卞永壽)·변자의(卞自義)·문효랑·고복로(高福老)·오치권(吳致權)·박자하(朴自河) 등을 능지처참했다. 이어 남이를 따르던 여러 무장들도 참형을 시켜 싹을 잘랐다. 남이의 심복인 조영달(趙穎達)·이지정(李之楨)·조숙(趙淑) 등 25인과, 장용대(狀勇隊)의 맹불생(孟佛生)·진소근지(陳小斤知)·이산(李山) 등이 그들이다. 이 사람들의 아버지와 자식들도 모두 죽였다. 반면에 이 일에 공을 세운 한명회, 신숙주 등 37명을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책봉했다. 한명회는 임금에게 남이·강순 등의 재산과 처첩들을 내려 달라고 주청했고, 임금은 그들의 재산과 처첩을 익대공신들에게 나누어 줬다. 옥사에 연루된 사람들의 처첩들이 마치 전리품처럼 취급되어 모두 정적(政敵)들의 하녀로 분배가 됐다.이게 남이의 옥사 전말이다. 심한 매질을 당하던 강순은 ‘공모자를 더 대라’는 예종의 심문에 “내가 만약 여기 있는 신하들도 다 공범이라고 말한다면 임금님은 믿겠습니까?”라고 항의를 했고, 남이의 종사관이었던 조숙은 “한 충신이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죽어 갔다. 이처럼 이 옥사는 처음부터 의문투성이였고, 수긍이 가지 않은 옥사였다.  화는 관련자들의 가족들에게도 미쳤다. 남이의 어머니에게는 ‘세조의 상(喪)중에 고기를 먹고, 아들인 남이와 간통을 했다’는 희한한 죄를 씌워 저자거리에서 수레에 묶어 찢어죽이고, 3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했다. 이 사건에 연좌되어 종이 되었던 처와 첩들이 70여 명이나 된다. 이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조선왕조실록’에 그 사례가 적혀있다. 거열형에 처해진 강순은 정실부인이 죽자 ‘중비(仲非)’와 혼인을 했다. 이 사건으로 처첩들이 분배될 때, 중비는 유자광의 여종이 되었다. 영의정의 아내로 정경부인이던 중비가 서얼출신 간신의 노비로 추락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남편 강순이 죽은 지 한 해가 넘지 않은 시점에 집안의 옛 종으로 있었던 막산(莫山)이란 남자에게 겁탈을 당하고 만다. 중비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막산과 살림을 차린다.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어디까지나 실록에 실려 있는 실화이다. 그런데 막산은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었다. 그 아내가 중비를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중비와 막산의 아내는 대판 싸움을 했다. 이때 막산은 중비의 편을 들었다. 결국 막산의 본처는 집에서 쫓겨났고, 그 자리를 중비가 차지하게 되었다.소문은 금세 전국에 퍼졌다. 명분에 사는 유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조선사회를 이끌었던 양반들은 “막산이 옛 주인인 중비와 간통하고 동거했다. 중비가 지금은 종의 신분이지만 옛날에는 막산을 종으로 데리고 있던 양반집 규수였다. 이는 일반적인 간통이 아니라 종이 주인의 처를 간통한 법률(奴奸家長妻律)로써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자종이 여주인과 간통을 하면 참형(斬刑)에 처하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다. 사건은 의금부로 넘어갔다. 의금부 관리들은 최종심에서 오히려 중비가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막산에게 처음에는 강간을 당했을 수도 있지만, 피해자가 적극적인 항거를 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또 정조를 잃은 뒤 막산의 아내가 되기로 작정하고, 막산의 처를 때려서 쫓아낸 것은 음탕함의 증거이므로 중비와 막산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1471년 3월 17일, 당시 임금 성종은 의금부 건의대로 막산과 중비를 참형에 처했다. 명분은 풍속(風俗)을 바로잡는다는 것이었다.조선시대 양반들의 이중적인 잣대는 여성들과 서얼들에게는 참으로 가혹했다. 동료  부인을 자신의 여종으로 삼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게 노비가 된 부인이 궁여지책으로 남자노비와 결혼하는 것은 또 용서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서얼은 아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해 놓았다. 이들은 가정에서도 천하게 취급되어 재산 상속권마저도 박탈되었다.그런데도 형벌을 받는 데는 이들을 자신들과 똑같이 연좌시켰다. 좋은 것은 자기들끼리 차지하고, 자기들이 나쁜 짓을 한 행위에는 이들까지 동참시켜 처벌받게 하는 양반사회의 이중성. 성리학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자리를 잡았던 그 모순투성이의 조선사회에서 살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중앙에서 이런 큰 옥사가 벌어지자 바닷가에 한적하기만 했던 경상도 장기 고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1469년 2월 3일부터 그해 12월 24일까지 이 난에 연좌되었다며 일곱 명이 장기로 유배를 왔다. 강순의 친동생인 강선(康繕)), 조경치의 계모(繼母) 종금(終今)과 서얼 형 조중생(曺仲生)·조계생(曺繼生)·조말생(曺末生), 이중순의 아우 이숙순(李叔淳), 이영산(李永山)등이 그들이다.이때 장기로 온 강선은 약 2년간 이곳에서 머물다가 1471년(성종2년) 2월에 보령(保寧) 근처로 옮겨갔다. 이중순, 그리고 조경치의 계모 종금은 장기로 왔다는 기록만 있고, 옮겨가거나 방면했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 중간에 이곳에서 사망한 듯하다. 이영산은 장기현의 관노로 5년간 있다가, 1474년 4월 7일에야 방면되어 돌아갔다.남이가 실제 역모를 획책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 사건에 대해 임진왜란 전까지는 남이를 난신(亂臣)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란 이후 일부 야사(野史)에서는 남이의 옥사가 유자광의 모함으로 인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그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남이의 억울함은 1818년(순조 18)이 되어서야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풀려,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후에 충무공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창녕의 구봉서원,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성동의 충민사에 배향되었다.이것 외에도 남이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당들이 꽤 많다. 전통 무당들은 각자 자신의 신을 모시는데, 역사 인물 중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영웅들이 곧잘 무당의 신으로 등장한다. 이는 한을 품고 죽은 영혼이 신령으로서의 영험이 크다는 믿음 때문이기도 하고, 백성들이 이들의 영혼을 달래준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일까. 춘천 남이섬에는 가짜 남이장군의 묘도 생겨났다. 경남 창녕에는 남이장군을 기리는 충무사가 있고, 경북 영양의 ‘남이포’처럼 남이와 관련된 지명들도 생겨났다.사내대장부의 기개를 웅장하게 뽐내다 혜성과 함께 사라진 남이에 대한 흔적들이  바로 우리주변, 장기에도 있었다는 게 새삼스럽다. /향토사학자

2019-08-13

경주에서 천년을 사랑하고 그리워할,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우현 고유섭의 수필 제목이다. 모든 것은 이 한 문장에서 시작됐다. 지난밤의 불면도, 이른 아침부터 종일 나를 달뜨게 한 황홀감도, 대뜸 두 눈에 차오르던 파도도 다 저 한 문장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양양, 강릉, 삼척, 울진이 다 보암 직한 곳일 것이로되, 이 사람이 사모하는 곳은 세상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무명(無名)인 듯한 장기(長9B10) 남쪽, 지금 행정구역으로 치자면 경주군 양북면 용당리에 속하는 땅에서 보이는 바다, 이곳이 잊히지 못하는 바다이다. (….) 이곳은 경주 석굴암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이 다른 세류(細流)와 합쳐서 대종천(大鐘川)이 바로 바다로 들어가는 그 어귀에 용당산 대본리란 곳이 있고, 그 포구 밖에는 오직 한 그루의 암산(岩山)인 대왕암(大王岩)이란 돌섬이 있을 뿐이다.”(고유섭,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중에서)고유섭은 인천 사람이다. 1905년에 태어나 경성제국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대학에서 조선미술사를 공부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경성제대 졸업 후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취임해 수많은 연구와 집필 활동으로 한국미술사학의 토대를 쌓아 올렸다. 한국미술의 근대적 학문 체계를 이룬 이 위대한 학자는 짧았지만 영원히 기억될 마흔 해의 불꽃같은 삶을 남겨두곤 1944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생전에 ‘잊히지 못하는 바다’로 호명한 곳이 바로 경주 용당리, 문무대왕릉이 있는 감포 바다다.경주를 떠올리면 언제나 대왕암이 나를 짓누른다. 문무왕이 동해의 용으로 잠들어 있는 수중릉, 어깨가 뻐근하고 정수리가 날카롭게 아프다. 미지는 때로 고통이다. 내게 경주는 문무대왕릉과 감은사, 그리고 ‘잊히지 못하는 바다’인 ‘동해구’로 늘 기억된다. 동해구는 감포의 옛 이름으로 추정된다. 대종천 하구, 감포가 보이는 언덕에 동해구 표지석이 서 있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동해의 문, 동해의 입이라는 뜻이다.지난밤, 바쁜 취재 일정으로 혓바늘이 돋을 만큼 피곤한 침대 위에서 문득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떠오른 바람에, 잠을 저만치 밀쳐둔 내 생각은 문무왕과 대왕암, 만파식적, 감은사와 송재학, 박목월, 서정주의 시, 진지왕과 도화녀, 비형랑, 미실, 선덕여왕과 지귀, 수로부인, 처용과 역신, 화랑세기 필사본 진위 논란 등을 이리저리 널뛰며 어지러웠다. 소설가 김별아가 연재한 ‘경주 월성을 걷는 시간’ 20꼭지를 내리 읽고는 1999년 KBS 역사스페셜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를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다 보니 새벽 다섯 시, 이상한 황홀감과 신비감을 이불로 덮고 잤다.하루 묵는 데 100만원 한다는 포항 구룡포 럭셔리 풀빌라를 취재하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경주에, 아니 신라에 가 있었다. “이처럼 막막한 지역에서/ 하룻밤을 가면/ 그 안존하고 잔잔한/ 영혼의 나라에 이르는 것을”(박목월, ‘사향가’) 나는 이미 알았을까. 구룡포를 벗어나 16년 만에 문무왕릉 앞에 섰을 땐 눈물인지 파도인지 두 눈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어 있었다. 무당 몇이 굿판을 벌이고, 젊은 연인이 허공에 새우깡을 던지는 풍경 너머로 나는 입 벌린 대왕암을 봤다.“경주에 가거든 문무왕(文武王)의 위적(偉蹟)을 찾으라. 구경거리로 경주를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아라. (….)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경주의 유적(遺跡)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이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 (….) 무엇보다도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大王岩)을 찾으라.”(고유섭, ‘경주기행의 일절’ 중에서)경주 용당리 사람들은 대왕암을 대왕바위의 줄임말인 ‘댕바’, ‘댕바위’로 불렀다. 1967년 한국일보 보도로 문무왕릉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이곳은 어린아이들이 헤엄쳐 가 놀고, 마을 사람들이 미역을 따는 갯바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옛날부터 문무대왕의 유해가 뿌려진 산골처(散骨處)로 알려져 있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신화의 한 대목일 뿐 고증된 바는 아니었다. 대왕암이 문무대왕릉이라는 전설을 역사적 진실로 밝혀낸 건 고유섭의 제자인 미술사학자 황수영 박사다. 황수영 박사를 축으로 한 신라오악조사단은 1967년 뗏목을 타고 대왕암에 상륙해 대왕암의 내부 모습이 고문헌에 기록된 ‘수중릉’의 구조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혀냈다.문무왕은 죽어서 용이 되어 왜구를 막고, 고유섭은 사멸되어가는 민족문화를 지키기 위해 미술사학을 연구, 학문으로 일제에 항거했다. ‘대왕암’이라는 시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수필을 남겼는데, 황수영과 신라오악조사단은 스승이 쓴 글을 등불 삼아 풍문과 설화의 안개로만 자욱하던 미지 세계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대왕(大王)의 우국성령(憂國聖靈)은/ 소신(燒身) 후 용왕(龍王) 되사/ 저 바위 저 길목에/ 숨어 들어 계셨다가/ 해천(海天)을 덮고 나는/ 적귀(賊鬼)를 조복(調伏)하시”(고유섭, ‘대왕암’)던 감포에는 이제 고유섭과 그의 제자들 넋이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다에서 솟구쳐 모습을 보였다던 이견대(利見臺)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기념비는 고유섭의 제자들이 세운 것이다. 2003년, 내가 스무 살이던 해 여름 이견대에 왔을 땐 그 글비석만 홀로 바다를 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제자인 진홍섭(2010년 작고)과 황수영(2011년 작고) 추모비가 양 옆에 서 있다.혼은 입으로 드나든다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었다. 저 수중여 입에서 빠져나온 왕의 혼이 파도가 되어 감은사를 적신다. 나는 문무대왕릉이 보이는 이견대를 내려와 대종천 물길 따라 옛 감은사터를 찾았다. 아직 뙤약볕이 되지 못한 온화한 햇살이 빈 절터를 구석구석 쓰다듬고 있었다. 절터 동쪽과 서쪽엔 감은사지삼층석탑이 멀리 대왕암을 바라보며 쌍탑으로 서 있고, 탑이 드리운 그늘 아래로 승려 하나가 천천히 걸어가며 내게 옛 감은사의 풍경을 복원시켰다. 그러나 “감은사는 없다.” “감은사 밖으로 나오면 먼 바다는 종소리 같은 저녁놀을 떠밀며 달아나 바람 소리 곁에 있다. 내 누추한 마음이 먼저 그것들을 짊어지기”(송재학, ‘감은사에 가다’) 전에 나는 서둘러 낭산으로 향했다.선덕여왕은 “푸른 령(嶺) 위의 욕계(欲界) 제2천(第二天)”에 잠들어 있다. ‘푸른 령’이란 경주 낭산을 가리킨다. 선덕여왕은 어느 날 신하들에게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 신하들이 ‘도리천’의 구체적 위치를 묻자 선덕여왕은 “낭산의 남쪽”이라고 대답했고, 사후 30년 뒤 그녀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졌다. 불교 경전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적혀 있으니 선덕여왕이 말한 대로 낭산의 남쪽이 도리천인 셈이다.도리천은 불교에서 욕계 제2천에 해당하는 세계로 신(神)들에게도 남녀의 구별이 있고, 이성에 대한 욕망이 작동하는 곳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두 명의 남자와 세 번에 걸쳐 결혼생활을 했으나 아이는 없었다”고 한다. 죽음 후에도 사랑을 꿈꿨을까. 선덕여왕은 무척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또 자애로웠다고 전해진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지나가는 그녀를 보고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미쳐버린 사내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천민 지귀(志鬼)다.어느 날 여왕이 영묘사로 기도하러 가는 행차에 지귀가 달려들었다. “아름다운 여왕이여! 사랑하는 나의 여왕이여!” 여왕은 호위병들에게 붙잡힌 지귀를 영묘사까지 따라오게 한다. 지귀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행차를 따랐다. 영묘사에 도착한 여왕이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는 동안 지귀는 그만 마당의 석탑 아래 잠이 들고 말았는데, 기도를 마친 여왕은 자신을 짝사랑하는 지귀가 안쓰러워 잠든 그에게 다가가 “살의 일로써 살의 일로써 미친 사내에게는 살 닿는 것 중 그중 빛나는 황금팔찌를 그의 가슴 위에”(서정주, ‘선덕여왕의 말씀’) 올려두었다.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품에 안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그 기쁨이 가슴속에서 불꽃으로 타더니 급기야 온몸을 활활 사르는 불덩어리가 되었다. 여왕의 향기로운 팔찌가 불씨 되어, 지귀는 미친 사랑의 불길에 영원히 타는 불귀신이 되어버린 것이다.여왕이 잠든 낭산을 내려오니 하늘에서 지귀가 사랑의 고통에 몸부림치느라 여기저기 불꽃이 뚝뚝, 저녁이 붉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뜨겁고 새빨간 석양은 이내 차분해져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 “영영 돌아오지 못한”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서정주, ‘해일’)던 여인처럼, 경주 하늘엔 바닷물 같은 구름과 볼그레한 노을이 살을 부드럽게 비볐다.그리고 곧, 비가 내렸다. 예보에 없던 비였다. 우산 없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소동으로 황리단길은 개구리 떼처럼 수런거렸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황남동을 걸었다. 비에 흠뻑 젖으니 살갗보다 가슴부터 촉촉이 서늘해졌다. 머나먼 나라에 있는 나의 선덕여왕, 그녀의 불 달군 팔찌가 지져댄 내 가슴 속 뜨거운 한 통증이 비로소 식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아, 나는 그동안 잘못 알았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도시, 신과 왕들의 도시가 아니라 영원을 넘나드는 사랑의 도시가 아닌가? 천년을 사랑하고 천년을 헤어져 그리워 할, 그 천년의 사람을 나는 만나고 싶다. 나의 잊히지 못하는 당신을.       /시인 이병철

2019-08-11

신라 발전·통일 기여한 ‘화랑 트로이카’를 만나다

보통의 사람들은 주요한 몇몇 인물들을 규정짓거나, 한 묶음으로 배열하는 걸 즐긴다. 이는 인간의 특성 중 하나다. ‘트로이카(Troika)’는 3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지칭하는 단어.삼두마차(三頭馬車)로도 번역되는 트로이카는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세 사람, 혹은 어떠한 일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3명’을 의미한다.1950년대 후반 쿠바에서의 전투가 세상을 뜨겁게 달궜을 때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턱밑에서 젊은 트로이카가 질주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1967), 피델 카스트로(1926~2016), 카밀로 시엔푸에고스(1932~1959)는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트로이카’였다.조금 가벼운 이야기로 가보자. 한국의 50~60대 중년들은 영화배우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를 한 세트로 엮어 기억한다. 이른바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였다.중앙일보 기자이자 ‘걸그룹 경제학’의 저자인 유성운(40)은 “2019년 현재 한국 걸그룹의 트로이카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트와이스(TWICE), 블랙핑크(BLACKPINK), 아이즈원(IZ*ONE)”을 지목했다.서론이 길었다. 이제 본론으로 진입하기 위한 질문을 던진다. “풍류도를 중심 이데올로기로 신라의 발전과 통일에 기여한 화랑 중 트로이카는 어떤 인물들일까?”개인의 취향과 선호는 각양각색이다. 앞서 언급한 혁명가와 연예인에 대한 평가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천양지차(天壤之差)이듯, 명멸했던 수많은 화랑에 관한 사람들의 호오(好惡)도 엇갈릴 수밖에 없다.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학자와 예술가 몇 명에게 자문을 얻어 1천500년 전 신라의 ‘화랑 트로이카’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봤다.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걸 증명한 문노(文努)풍월주(風月主)는 ‘화랑 중의 화랑’ ‘으뜸 화랑’을 일컫는다.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紀)’엔 1대 위화랑부터 32대 신공까지 32명의 풍월주가 기록돼 있다. 초등학생도 그 이름을 들어봤을 김유신도 등장하고, 삼국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김춘추도 이름을 올렸다. 이중에서 ‘트로이카’를 고르라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하지만, 역사 속 어떤 인물이 완벽하게 객관에만 근거해 평가를 받고 있나? 주관의 개입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런 차원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랑은 제8대 풍월주 문노(537∼606 추정)다.문노의 출생은 비극적으로 드라마틱하다. 아버지는 귀족이었으나 어머니가 가야에서 온 공녀였다. 순수한 신라 혈통이 아니라는 콤플렉스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내 피의 절반은 가야 사람의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가야 출신들을 규합해 화랑 내부에 또 다른 파벌을 만든 건 출생의 한계에서 오는 열등감 극복의 방편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이런저런 평가가 있지만 문노가 ‘전투 실력’에서만큼은 화랑 중 최고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드물다. 겨우 열일곱 살에 백제와의 싸움에 참전해 공을 세웠고, 열여덟엔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 고구려 장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왕의 명령이라면 모친의 고향인 가야로의 진군에도 거침이 없었다. 화랑의 군사적 편제 개편에도 적극적이었던 문노는 또 한 명의 ‘빼어난 화랑’이었던 사다함의 검술 스승이기도 했다.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일흔 살 가까이 장수한 문노는 ‘신라 역사상 최고의 맹장(猛將)’으로 추앙받는다.문노를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후배 화랑’이 있는데 바로 김흠운(金歆運)이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를 빛낸 인물들’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문노가 이끄는 화랑부대에 속했던 김흠운이 세속오계(世俗五戒) 중 ‘임전무퇴’를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서술한 것이다. 그렇다. 옛말처럼 용맹한 장수 밑에 비겁한 부하가 있을 수 없다.“김흠운은 유복한 생활이 보장된 태종무열왕의 사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순국자의 무용담에 매료돼 눈물을 흘리곤 했다. 백제의 조천성을 공략하는데 참전한 김흠운은 적군이 새벽에 신라 군영을 습격해 혼란이 일어나자, 퍼붓는 화살 속을 뚫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한다. 주위에선 ‘어둠 속에서 싸우다 죽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나서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대장부가 몸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다짐한 이상 어찌 이름 알리기만을 원할 것인가’라는 김흠운의 뜻을 꺾지 못했다. 결국 이 전투에서 김흠운은 전사한다.”◆ ‘살아있는 미륵’으로 숭배 받은 설원랑(薛原郎)소설가 김별아(50)에 의하면 설원랑(생몰연대 미상)은 “해사한 얼굴에 시와 그림에 능했던 예술적인 화랑”이었다. 또한 진흥왕 시절 신라 최초의 국선(國仙·화랑의 리더)이 된 사람이기도 하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진흥왕이 애초에 두 여성을 원화(原花)로 삼아 무리 300~400명을 이끌게 했는데, 둘 사이에 시기와 질투가 심해 문제가 생기자 원화 제도를 폐지하였다. 몇 해 뒤 다시 풍월도(風月道·풍류도와 같은 의미)를 일으키고자 좋은 가문 출신의 남성으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이름을 ‘화랑’이라고 불렀다. 설원랑은 바로 이때 처음으로 국선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앞서의 기록보다 좀 더 흥미로운 방식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백성의 존경을 받던 신라의 한 승려가 “미륵(彌勒·미래에 출현하게 될 부처)의 형상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화랑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내놓는다. 그 승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꿈에 나타난 미륵과 꼭 닮은 청년을 영묘사(靈妙寺) 앞에서 만난다.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국선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미륵과 빼닮은 청년’이 바로 설원랑이다.‘신라를 빛낸 인물들’에 따르면 화랑도가 창설되던 시기 신라사회에서 화랑은 ‘미륵불(彌勒佛)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장차 나라를 강성하게 하고,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할 유사 메시아(Messiah)로 본 것이다.설원랑은 ‘살아 움직이는 미륵’으로 서라벌 주민들의 숭배를 받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잘생긴 얼굴에 설득력 있는 목소리. 여기에 인간과 자연을 노래하는 시를 쓰고, 아름다운 풍경까지 화폭에 담아내는 탁월한 예술적 능력.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이돌’ 수준의 대접을 받지 않았을까?설원랑의 인기는 당시 왕의 인기와도 직결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의 신라사회는 “미륵은 전륜성왕(轉輪聖王·불법을 수호하는 이상적 군주)과 함께 나타나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린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흥왕=전륜성왕’ ‘설원랑=미륵’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졌을 것이다.종교사학자 유병덕의 논문 ‘풍류도(風流道)와 미륵사상(彌勒思想)’은 미륵과 화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병덕의 주장처럼 설원랑은 ‘화랑인 동시에 미륵’이었다.“한국 종교의 시원은 풍류도에 있다. 그것은 무(巫)적 전통이 아닌 선(仙)적 전통이 강한 가운데 출현했다. 한국에서 미륵신앙이 대두해 국력을 흥하게 만든 역사는 통일신라의 경우가 처음이다. 삼국통일의 기세를 잡은 화랑도는 전래의 풍류도를 주체로 하여 그 당시 불교와 잘 조화된 가운데 통일을 성취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륵신앙도 화랑의 실천적 이념 역할을 했다.이런 사조를 통해 완성된 인물을 불교 입장에서는 ‘미륵’이라 칭하고, 풍류도의 입장에선 ‘화랑’이라 칭하는 것이다.”◆ 전설로 남은 ‘요절 화랑’ 사다함(斯多含)요절(夭折)은 전설을 만든다. 록 뮤지션 짐 모리슨(28세 사망)이 그랬고, 영화배우 리버 피닉스(23세 사망)가 그랬으며, 소설가 김유정(29세 사망) 또한 그렇다. 이들의 삶은 짧지만 뜨거웠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그들은 일찍 죽어 영원히 살고 있다”고. 이 범주에 고민 없이 포함시킬 수 있는 화랑이 있으니 바로 사다함(생몰연대 미상)이다.세상을 떠도는 ‘영웅 전설’의 형태로 남은 사다함의 일대기는 간명해서 눈물겹다. “세상에 이런 10대 소년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부른다. ‘삼국사기’에 실린 사다함의 소설 같은 생애를 요약해 아래 옮겨본다.“신라의 진골이자 화랑인 사다함은 내밀왕의 7세손.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 풍채가 좋고 뜻과 기백이 높았다. 사람들의 청에 못 이겨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를 따르는 청년들이 족히 1천 명은 넘었다. 나이와 무관하게 그들 모두는 사다함을 흠모했다. 겨우 열다섯의 나이에 대가야와의 전쟁에 나가기를 왕에게 간청하니 왕은 ‘싸움터로 보내기엔 아직 어리다’며 말렸다. 하지만 사다함의 확고한 의지는 왕조차도 제지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하고 진실했다. 결국 참전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기에 왕이 노비로 쓸 수 있는 포로 300명과 적지 않은 땅을 주었는데, 노비는 자유롭게 풀어주고 땅은 극구 사양했다. 죽마고우 무관랑(武官郞)이 병사(病死)하자 ‘그와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세했으니, 나 혼자 살 수는 없다’며 일주일을 통곡하다 죽었다. 그때 사다함의 나이 불과 17세였다.”역사학자 최광식은 그의 논문 ‘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에서 이렇게 주장한다.“개방성과 포용성을 지닌 풍류도를 중심 이념으로 익히고 닦은 화랑과 국선들은 신라의 주도세력이 되어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통일전쟁 이후에는 향가(鄕歌)를 짓는 등 격조 높은 모습도 보였다.”사실 고문헌에 등장하는 화랑들의 무용담과 미담을 100퍼센트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그 에피소드들엔 ‘포상과 명성을 바라지 않고,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청년을 길러낼 시대적 필요성’이 개입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배층이 기록한 역사는 그렇게 서술·묘사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문노, 설원랑, 사다함 등 ‘화랑 트로이카’의 모습에선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여러 긍정적 가치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것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08

경주, 길을 잃고 사색에 잠기다

여행자는 알고 있다. 때로는 ‘길’을 잃는 것이 ‘또 다른 길’을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경주엔 조용히 홀로 앉아 들뜬 마음을 차분히 달랠 공간이 적지 않다. 경주 여행을 계획하는 독자들을 위해 ‘길을 벗어나’ 사색과 힐링을 즐길 수 있는 장소 몇 곳을 소개한다.너무나도 선명한 진녹색이 전해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에 ‘이곳이 과연 현실 속 공간이 맞나?’라는 의문마저 들었다.지척의 도로에선 차량이 질주하고 있음에도 그곳만은 매미와 풀벌레가 울어대는 피안(彼岸) 같았다.족히 수백 년은 자리를 지키며 살아왔을 커다란 나무가 만들어낸 시원스런 그늘. 그 아래 접이식 간이의자를 펴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선경(仙境)이 따로 없다. 자연스레 그악스러운 8월의 더위가 한풀 꺾이는 느낌이 들었다.경주시 보문동엔 신라 진평왕의 능이 자리해 있다. 널찍한 평야 한복판에 들어선 거대한 봉분. 그 풍경만으로도 돌올하지만 진평왕릉의 진가(眞價)는 주변 거대한 녹지에서 드러난다. 소나무를 비롯한 갖가지 수목과 ‘초원’이라 불러도 좋을 넓은 초록 풀밭, 여기에 고전적으로 디자인된 목조 벤치까지 그림처럼 준비돼 있었다.소음과 매연 가득한 도심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 이런 ‘사색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름이 알려진 여타 관광지와 달리 오가는 사람들이 적어 조용한 휴식이 가능해 보였다. 시원한 그늘에서 야외 독서를 원하는 이들에겐 안성맞춤.1969년 사적 제180호로 지정된 진평왕릉을 호위하고 선 것은 궁궐의 병사들이 아닌 키 큰 나무 몇 그루였다. 그럼에도 왕의 깊은 잠을 방해할 이들은 없었다. 그만큼 주위 풍광은 고요하고 평화스럽다. 1천 년 전 서라벌 사람들도 이곳에서 피크닉과 데이트를 즐겼을 법하다.기자가 능을 찾았던 날엔 대구에서 왔다는 중년 부부 한 쌍이 진평왕릉을 한 바퀴 돌아보곤 벤치에 앉아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겹고 보기 좋았다. 그들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았던 이유는 1천400년을 이어진 진평왕의 곤한 잠을 깨우기 싫어서였을까?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싶은 여행자에게 권하고픈 장소다.아르헨티나의 작가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천국은 도서관”이라고 했다.시와 소설, 평론에 두루 뛰어났던 사람이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역사와 유물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어떤 공간을 천국으로 느낄까? 아마도 박물관일 것이다.1월 1일과 설·추석을 제외하고는 1년 내내 방문객을 맞는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 역사와 불교미술, 고대 유물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과 지적 갈증을 풀어주는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은 곳.상설전시관인 신라역사관, 신라미술관, 월지관에선 신라 건국에서부터 멸망 과정, 화려했던 신라의 불교문화, 월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야외 전시장에도 적지 않은 국보와 보물이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눈을 크게 떠야 한다.운 좋게도 기자가 박물관을 찾았을 땐 특별관에서 ‘금령총 금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금령총은 경주시 노동동 고분군에 있는 신라시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1924년 진행된 조사·발굴 과정에서 기차 한 량을 가득 채울 만한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재발굴이 진행 중이다.금령총에서 출토된 금관은 천마총이나 금관총에서 나온 금관에 비해 크기가 작고(머리띠 지름 15cm), 옥(玉)으로 된 장식이 없다. 학계에선 나이 어린 왕자가 썼던 것으로 추정한다.당장 오늘이라도 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 간다면 ‘진품’ 금령총 금관과 화려한 금허리띠를 만날 수 있다. 저절로 눈길이 가는 선명한 노란색과 정교한 세공 기술이 감탄사를 부를 것이다. 신라가 ‘황금의 나라’로 불린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국립경주박물관을 찾는다는 건 ‘역사의 오솔길을 사색하며 걷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금령총 금관 전시는 31일까지 계속된다. 여기에 보너스 하나. 모든 전시장은 무료입장이다.“나라를 지키는 용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며 바다에 묻히기를 자처한 문무왕.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양북면 봉길리 대왕암을 만나고 경주 시내로 돌아가는 길.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용당리 감은사지(感恩寺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쓸쓸한 풍경 속에 우뚝 솟은 2기의 삼층석탑이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감은사는 문무왕이 일본군의 침입을 막고자 하는 뜻에서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신문왕이 ‘호국 사찰’로 완성시켰다. 여타 절과는 달리 독특하게도 지하에 용도를 추측하기 힘든 큰 공간을 만든 감은사. 신문왕은 용이 된 아버지 문무왕이 그곳에서 쉴 수 있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옛사람들의 효심은 왕족이나 평범한 백성이나 매한가지였다.사적 제31호인 감은사 터는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위치했다. 석탑과 금당(金堂) 터, 초석과 장대석 등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봄가을이면 신라 역사에 관심을 가진 중·고교생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여유롭게 절터와 삼층석탑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 하지만 푹푹 찌는 여름엔 그것도 마냥 쉬운 게 아니다. 그럴 때면 석탑 뒤편 촘촘한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는 대나무 숲으로 숨어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신라가 번창하던 시기에도 분명 감은사 대나무 숲이 있었을 터. 입이 없어 말하지는 못했겠지만, 그것들은 문무왕을 그리워하는 신문왕의 애끓는 심정을 눈앞에서 지켜봤을 것이다.푸르고 또 푸른 빛깔로 하늘을 향해 뻗은 감은사지 대나무 사이에서 바라보는 절터와 석탑은 실력 빼어난 동양화가가 그려놓은 수묵화의 형상으로 여행자에게 다가온다. 때로는 화려한 색채보다 담담한 흑백의 풍광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때가 있다. 감은사지는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짙은 대나무 그늘 아래선 서정인의 소설이나 로트레아몽(1846~1870)의 시를 읽는 게 어울린다.돗자리를 깔고 나란히 누운 젊은 연인은 기자가 다가가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서로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상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는 세심한 손길이 질투와 부러움을 불렀다. 펴놓은 돗자리가 싸구려면 어떠랴. 두 사람은 삼릉(三陵) 솔숲에서 인생의 가장 ‘값비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경주시 배동 울창한 소나무 숲속엔 신라 왕들의 유택(幽宅)으로 추정되는 3기의 능이 있다. 여기에 잠든 이들은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신덕왕과 경명왕은 신라가 기울어가던 시기의 통치자였다. 당연지사 외부의 침입이 잦았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도 극심했다. 국력이 쇠하니 영토 또한 터무니없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신라 전성기의 왕들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장식의 왕릉을 만들 여력이 없었을 터.삼릉 모두는 봉분이 낮고 능을 지키는 석상(石像)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름답다. 허물어진 역사의 폐허에 숨겨둔 보석처럼 반짝인다. 의외로 이런 비극의 현장에서 감동을 느끼는 여행자가 많다고 들었다. 아주 가끔은 번듯함보다 남루함이 빛나는 시간이 있다.삼릉을 삼릉답게 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오브제’는 주변을 둘러싼 기묘한 형상의 소나무 수백 그루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서늘한 음지는 폭염에 시달려온 여행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된다.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밀어(蜜語)를 속삭이고 싶은 아베크족들에게도 성지로 다가온다.삼릉은 경주국립공원 남산 지구의 시발점이다. 이곳을 출발해 금오봉-용장사지-용장골까지 가는 4.6km 등산 코스도 인기가 좋다. 산을 오르는 게 익숙한 사람의 경우 3시간이면 주파가 가능하다고 한다.“등산길에선 100개가 넘는 갖가지 형태의 불상과 석탑, 절터 등을 볼 수 있어 심심할 겨를이 없다”는 게 경주국립공원사무소의 설명. ‘사색’과 ‘레저’를 한 번에 맛보기 원하는 관광객들에겐 제격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07

따로 또 같이… 진심 담아 허투루가 없는 내공 맛집들

보리밥은 귀하다. 경주 ‘숙영식당’은 찰보리 밥을 내놓는다. 업력도 30년을 넘겼다. 서울 등 외지에서 업무차 경주에 오는 이들이 ‘밥집’으로 여기고 드나들었던 집이다. 가정집을 개조한 식당 안은 ‘ㄷ자’ 혹은 ‘ㅁ자’ 구조다. 밥상은 평범하다. 보리밥에 두부가 많이 들어간 된장찌개, 몇몇 나물 반찬들과 생선구이(가자미) 등이다. 정식 메뉴가 있고, ‘혼밥족’을 위한 메뉴도 별도로 있다. 수준급의 ‘장(醬)’을 사용한다. 식사는 1만1천 원대다. 한식은 장맛이다. 장맛이 좋다. 별다른 특미를 요구할 일은 아니다. 보리밥에 된장찌개 올리고, 몇몇 나물들을 얹어서 비벼 먹으면 넉넉하다. ‘털퍼덕 좌석’이라서 불편하지만, 가족 단위의 식사 공간으로는 오히려 낫다. 추천한다.인근의 ‘화림정’은 재미있는 집이다. ‘음식을 잘 퍼주는 집’이라는 표현이 맞다. ‘주인(주방)의 손이 크다’라고도 표현한다. 한 상 가득 반찬이 나오고 대부분 먹을 만하다. 전형적인 퍼주는 집, 손이 큰 집이다. 멸치젓갈을 강하게 사용한 김치, 무 김치를 한 접시 가득 내놓는다. 썰지 않고 통째로 내놓는 김치를 보면 누구나 “이렇게 퍼주고 남기는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직접 만든, 큼직한 모두부 한 모를 2인 상에 통째로 내놓는다. 국은 곰탕이다. 단일 메뉴로 내놓지만, 정식을 주문하면 먹을 만큼 넉넉하게 준다. 생선조림이나 몇몇 나물 반찬들은 남기고 나오기 십상이다.두부콩이나 반찬용 나물 등을 직접 혹은 계약 재배하여 사용한다. 인근 ‘대갓집’의 살림을 도맡았던 이가 운영하는 집이다. 음식은 계절마다 바뀌는데 경상도에서 널리 먹는 콩잎지 등도 맛볼 수 있다.이외에도 경주에는 ‘쑥부쟁이’ ‘요석궁’ 등이 한식당으로 널리 알려졌다.“설마 이런 곳에 식당이?” 싶은 생각이 든다.‘고두반’은 농가식당이다. 주변이 모두 농촌, 논밭이다. 내부는 많은 도자기로 아기자기하다. 남편은 도자기, 부인은 주방을 도맡고 있다. 일을 거드는 따님이 친절하다. 안과 밖의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음식은 ‘집밥’이다. 정성, 섬세함, 진정성이 어우러진 음식이다. 직접 담근 장을 사용하여 음식을 만든다. 콩조림, 콩잎지, 가지 등 여러 반찬이 어느 것 하나 허술하지 않다.인근에서 생산되는 채소를 사용한다. 두부 음식도 권할 만하다. 쇠고기와 두부, 콩나물 등을 넣고 끓인 두부전골이 맛이 강하지 않으면서 재료를 맛을 살렸다. 오디청 등 여러 종류의 청도 직접 만든 것이다.예약 없이 가면 재료가 소진될 경우, 밥을 못 먹고 돌아서는 수도 있다. 저녁 시간에는 일찍 문을 닫는다. 예약할 경우, 오후 7시 정도에도 식사할 수 있다.소박한 음식이지만 음식 내공은 깊다. 평범한 음식을 제대로 차려낸다. 후식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다.아쉬운 점도 있다. 전채로 나오는 샐러드가 달다. 전채의 단맛이 뒤에 나오는 음식들의 맛을 가린다. 전채를 후식인 양 먹는 것도 좋은 방법.‘달개비’는 보문단지에 있는 솥밥 전문점이다.홍합, 곤드레, 전복 등으로 솥밥을 내놓는다. 무던한 음식점이다.옛날식 쇠고기 전골이 재미있다. 파를 많이 넣은 쇠고기 전골이다. 평범, 무던하지만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장으로 맛을 다스린 음식이다. 곁들이 반찬으로 나오는 가자미구이는 제법 크기가 크다. 구색용이 아니라 정성을 기울인 음식이다.대부분 음식의 내공이 깊다. 내부 인테리어도 무던하다. 깔끔하면서도 무덤덤하다. 배가 고픈 날, 불쑥 들러 푸근하게 한 끼 먹을 수 있는 곳이다.팔우정 부근의 ‘팔우정해장국’. 5~6년 전에는 도드라진 장점이 있었다.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국물 맛은 말린 모자반으로 해결했다. 오래된 좁은 공간이다. 주인 할머니가 꼼꼼히 그릇을 씻고 잘 끓인 다음 묵해장국을 내놓았다. 대가리를 떼어낸 콩나물(두절 콩나물)과 메밀묵으로 정성스럽게 해장국을 내놓던 집이다. 연세가 드셨고, 어느 날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직접 음식을 만들지 못하고, 일을 거들던 이가 ‘메인 주방장’이 되었다.앞뒤 모르는 방송국에서 ‘먹방’을 했다. 급기야 따님이 벽에 손글씨로 “어머님 연세가 많으셔서 서비스를 제대로 못 하니 양해해달라”는 문구를 써 붙였다. 손님들은 줄을 서고, 음식은 달라졌다. ‘팔우정해장국 골목’의 원조 격인 집이다. 세월을 이기는 방법은 없다.‘삼릉고향칼국수’는 발로 디디는 족반죽과 곡물 육수(?)로 유명해진 가게다. 마치 우동 반죽을 하듯이 할머니들이 신문지, 비닐을 깔고 반죽을 디뎠다. 가난한 시절의 음식이다. 다른 가게와는 달리 국물이 뻑뻑하다. 가난한 시절, 영양과 맛을 생각해서 곡물가루를 넣은 국물을 선보였다. 더러는 들깨칼국수로 오해한다. 들깻가루 위주의 국물은 아니다. 보기 드문 곡물가루 육수다. 면발도 처음부터 툭툭 끊어지는 것이었다. 경주, 경상도 일대에서는 일상적으로 먹었던 면발이다. 외지 관광객, 젊은 세대는 이런 툭툭 끊어지는 면발이 익숙지 않다. 불평도 적잖게 나온다.경주 노동동의 ‘평양냉면집’은 3대, 65년 전통의 노포다.면발은 전분으로 뽑은 쫄깃한 것이다. 서울 등지에서 유행하는 ‘메밀 위주의 냉면’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다. 오랜 전통이 있다. 면발을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물도 마찬가지. ‘슴슴한 맛’이 평양냉면의 육수 맛이라고 평가한다. 경주 ‘평양냉면집’의 육수는 단맛, 신맛 등이 강하다. 역시 바꾸는 것은 무리수다. 손님들이 바꾸는 것을 원하는 지도 의문이다. 현지인들이 인정하고 단골손님으로 드나든다.제대로 된 커피 한 잔 만드는 일은 복잡하다. 좋은 원두, 보관, 유통, 로스팅과 그라인딩, 드립 과정까지, 전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어야 제대로 된 커피를 얻을 수 있다. 경주 성건동의 ‘카페 얀(YAN)’. 이 모든 과정을 찬찬히 제대로 해낸다. 베리에이션 커피도 좋지만 무거운 풍미의 남미 산, 과일 향이 좋은 아프리카 단일 품종 핸드 드립 커피를 권한다. 가게 안에 진열된 찻잔 등 커피 관련 용품들도 볼 만하다. 낮은 천장의 내부 분위기도 아주 좋다. 일반인, 창업자를 위한 커피 강습반도 운영 중이다. 직접 만드는 호두 파이도 많이 달지 않고 좋다.‘커피명가’는 경북, 대구 중심의 커피 전문 프랜차이즈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 가는 길에 있다. 높은 곳에 위치, 주변 조망이 좋고, 프랜차이즈점의 커피 수준을 넘어서는 커피를 내놓고 있다. 전문 핸드 드립 점과는 달리 커피 메뉴는 많지 않다. 고객 중에는 케이크, 차를 주문하는 이들도 많다. 굳이 핸드 드립 커피를 원하는 경우, 아프리카산 커피를 권한다.‘한식 브런치’는 흔하지 않다. ‘브런치’는 서구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겉모양은 서구식 브런치, 속이 한식이면 ‘한식 브런치’다.‘카페 아고’는 제대로 된 한식 브런치 전문점이다.‘장(醬)’을 솜씨 있게 사용한다. ‘쇠고기 구이+장’ 혹은 버섯볶음에도 장을 잘 섞었다.주먹밥, 두부 요리, 버섯, 밀전병 등이 단품 메뉴로 내놓아도 좋을 정도다.내부 분위기는 카페식이고 접시 위의 음식은 한식 변형이다. 경주 특산물 중의 하나인 연뿌리도 여러 가지로 솜씨 있게 조리해 낸다. 달지 않은 수수부꾸미도 강추 메뉴다. 2인이 가면 한식 브런치 메뉴 하나에 수수부꾸미를 주문하는 것도 좋다.아쉬운 점도 있다. 밥상에 국물이 없다. 한라봉과 차 등 국물은 있으나 밥상을 위한 국물이 아니라 음료수다. ‘밥과 더불어 먹는 국물음식’ 하나쯤을 곁들이면 좋겠다.공방을 동시에 운영, 내부 인테리어도 아주 좋다.‘웰빙횟집’은 ‘웃장’에 있다.경주역 바로 앞이다. 정식 명칭은 성동시장이다. 웃장에는 재미있는 초밥집(?)이 하나 있다. 미리 밝히지만, 가격이 싸다. 초밥 12점에 1만 원, 연어, 새우, 흰살생선으로 모두 12점이 1인분이다. 가격이 싸다고 음식이 허술한 것은 아니다.‘웃장’ 한쪽에 가게가 있다. 설마, 이런 곳에 초밥집이?, 싶다. 이름도 특이하다. ‘웰빙횟집’. 이름은 횟집인데 주 종목은 초밥이다.고급생선은 아니지만, 생선 손질을 잘 해낸다. 숙성도도 좋다. 1만 원 초밥에서 수준급의 밥 짓기와 ‘초대리(초배합)’를 느낄 수 있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08-07

경북동해안 텃밭에 씨 뿌려 ‘희망의 바다’ 일군다

정주학 경북도 수산자원연구원 해양수산연구사.“과도한 어획, 고수온 및 연안어장의 오염 등으로 갈수록 수산자원과 어업 생산량이 줄고 있습니다. 자원을 지속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산란기 어종에 대해 금어기를 지정하고, 어구 및 어법을 규제해 남획을 방지함과 동시에 자원이 줄어든 특정 어종에 대해서는 치어 방류사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경북도 수산자원연구원은 최근 영덕, 울진, 포항, 경주 등 4개 시군 마을어장에 가자미 치어 80만 마리(돌가자미 60, 문치가자미 20)를 방류했다. 200해리 신해양 질서에 따라 원양어장 축소를 극복하고 풍요로운 연안 어장을 조성해 어업인 소득창출을 위한 조치다. 올해 방류한 가자미 종자는 돌가자미, 문치가자미 2종으로 지난 1∼2월에 자연산 어미로부터 채란해 약 6개월간 실내 사육한 전장 5∼6㎝ 크기의 건강한 치어로, 3년 후에는 성어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가자미 치어 방류사업 실무자인 정주학 경북도 수산자원연구원 해양수산연구사를 만나 치어 종자생산 과정에 대해 들어봤다.-수산종묘방류를 쉽게 말한다면.△인공부화 또는 천연종묘를 채취하는 방법으로 특정 수산 생물의 종료를 대량 확보, 그것을 이식 방류해 직접적으로 자원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천연자원의 재생산에서 부족한 자연종묘의 가입량을 보완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어업소득의 증대와 자원관리의식 함양, 지역어촌 활성화를 통한 어촌정주권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 방류한 치어는 대략 2∼3년 후 성어로 성장해 동해안 어업인 소득 증대에 직접 기여하기도 하지만, 성장한 가자미류가 다시 산란에 참여해 어린 가자미를 재생산한다면, 자원량 증가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수산물 종자생산은 어떻게 하는가.△종자생산은 자연에서 산란기에 성숙한 어미를 확보한 후, 인위적으로 채란·수정해 부화한 어린 가자미류를 방류 가능한 크기까지(전체 길이 5㎝ 정도) 키운다. 사육환경 관리, 먹이 생물 공급, 성장에 따른 배합사료 공급, 크기별 선별 및 질병 예방 등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방류에 적합한 크기가 되면 질병검사를 거친 후 건강한 우량종자만을 내보낸다.어린 물고기는 수온, 용존산소 등 환경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하지만 어린 가자미의 주 사육기간인 봄철에는 동해안에 냉수대가 빈번히 발생하고, 여름철에는 고수온 등 이상 해황으로 종자생산시 좋은 사육환경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종자생산은 살아있는 생물을 돌보는 것으로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거나 관리에 실패하면 대량폐사가 발생하기 때문에 방류가 끝나는 날까지 휴일도 없이 철저한 사육관리가 이뤄져야 한다.-기술적 어려움은 어떤 것인가.△가자미류는 오랜 기간 진화와 성장을 한다. 눈이 몸의 한쪽으로 이동해 눈이 없는 몸쪽을 바닥에 붙여 생활한다. 이 과정에서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눈이 있는쪽(유안측)은 보호색을 띠기 위해 주변 환경과 비슷한 짙은 갈색으로, 눈이 없는쪽(무안측)은 흰색을 띠도록 진화했다. 이런 가자미류를 인위적으로 종자생산 할 때는 유안측과 무안측의 체색에 이상이 생기는 체색이상 개체가 많이 발생한다. 또한 한정된 공간에서 고밀도로 사육하기 때문에 질병 발생의 위험이 매우 높다. 한번 질병이 발생하면 급속도로 번지기 때문에 사육수조에 유입되는 해수의 질병 원인 미생물을 철저히 거르고 살균해야 한다. 각종 사육기구 등도 소독해 사용하는 등 방역조치에 어려움이 많다.2012년에 우리 연구원에서 돌가자미 종자생산 연구에 돌입한 첫해에 시험적으로 어린 돌가자미를 3만마리 정도 생산했는데, 전체의 99% 이상 유안측이 흰색이 되는 체색이상(백화) 개체가 발생한 사례가 있었다. 이후 먹이생물의 영양개선, 사육환경 등을 개선해 체색 이상 개체의 발생을 줄였지만, 여전히 돌가자미를 비롯한 넙치와 가자미류 종자생산시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또 애써 기른 어린 가자미류를 방류하려는데, 적조나 고수온 등으로 바다 환경이 방류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한 달 이상 연구원에서 밤낮 없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육했던 기억이 있다. 어렵게 기른 어린 가자미류를 넓고, 푸른 바다에 방류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어업인들이 “고기가 많이 잡힌다”또는“자원이 많이 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보람을 느낀다.-바다에 치어 방류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일반적으로 어류의 번식 생태는 다산다사(多産多死)형으로 많은 수의 알을 생산하지만 수정란 중 소수의 개체만이 성체가 된다. 초기 생활단계에서 많은 수가 죽게 된다. 치어 방류사업은 어류의 생존이 취약한 시기를 인위적으로 관리해 어느 정도 생존율이 높은 단계까지 성장시킨 후 자연에 방류해 수산자원 회복 및 어촌 소득 증대를 노린다. 경북도 수산자원연구원에서는 1998년부터 지속적으로 어류를 비롯한 각종 어패류의 종자를 생산 및 방류하고 있다.-왜 가자미류인가?△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가자미류는 30여 종으로 이중 20여 종이 동해역에 분포하고 있고, 고급 수산물이다. 동해안은 저질이 모래로 돼 있어 가자미류가 서식하기에 적합한 지역이다. 연구원에서는 타 해역의 연구소와 차별화해 가자미류의 특화 연구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넙치, 강도다리, 찰가자미, 돌가자미, 문치가자미 등 가자미류 종자생산 연구를 수행해 왔다.-앞으로의 연구원의 계획은.△우리 연구원은 1998년부터 넙치를 비롯한 강도다리, 찰가자미, 돌가자미, 문치가자미의 종자생산 기술을 개발해 매년 100만 마리 이상의 가자미류를 방류하고 있다. 동해안의 대표 양식 품종인 넙치 및 강도다리를 대체할 양식 대상종으로 개발하기 위한 시험 양식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동해안에 서식하는 최고급 가자미류인 줄가자미(이시가리)의 종자생산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도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도 연구원은 어업인 선호도가 높은 어종의 종자방류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현장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 줄가자미, 도화새우(독도새우), 대문어 등 고부가 동해안 특산어종의 종자생산 기술개발을 연구하고 있다.영덕/이동구기자 dglee@kbmaeil.com

2019-08-07

포항 오천지역 가뭄·홍수 예방할 다목적 ‘항사댐 건설’ 필요

포항시가 남구 오천읍 항사리 일원에 추진하고 있는 ‘항사댐 건설 사업’의 필요성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해마다 집중호우와 강풍을 동반한 태풍이 포항지역을 통과하면서 형산강을 비롯한 지역의 크고 작은 하천들 수위가 높아지는 가운데, 남구 오천읍의 냉천 역시 물이 불어나는 일이 잦아 홍수 피해예방과 장기적인 치수 안정성 확보를 위해서는 댐 건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오천지역이 어떠한 문제를 겪고 있는지 진단해 보고 이와 함께 항사댐의 필요성 역시 다뤄본다.□ 오천지역의 홍수·가뭄 문제 얼마나 심각한가오천 도심지를 관통하는 급류하천인 냉천은 태풍 및 호우로 인한 피해를 해마다 겪고 있다.반면 갈수기에는 물 부족으로 인해 주민생활에 큰 불편이 발생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오천지역의 이런 문제는 기본적으로 ‘치수’를 담당할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가뭄과 관련해 오천 지역은 진전지(170만t 규모)를 상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진전지 자체가 워낙 작은 규모라 비가 조금만 오지 않더라도 금세 말라버리는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 경우 농업용수지인 농어촌공사 관할 오어지로부터 비상용수 지원을 해마다 받고 있다.그러나 오어지 역시 저수율이 50% 미만이 될 경우 농업용수 확보 차원에서 비상용수로의 지원을 중단해버려 오천 일대에는 해마다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물 부족을 반영하듯 2013년부터 2017년까지 해마다 진전지 저수율 저하로 농업용수 댐 비상용수 지원을 실시했고, 2016년에는 가뭄 정도가 더욱 심각해 공단 정수장 및 급수구역 수계변경 등을 통해 타지역의 물을 끌어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농어촌공사 담당 오어지 생활용수 구입비만 연간 평균 1억5천만원에서 2억원에 달한다.홍수 관련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실제로 지난 2011년 7월 집중호우 시 오천읍 냉천 수위가 상승해 잠수교 침수로 차량이 통제됐고, 이듬해인 2012년 9월 태풍 산바가 내습했을 당시에도 오천읍 소하천이 범람함은 물론 냉천마저 범람 위기에 닥쳐 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비교적 최근인 2016년 10월 태풍 차바가 왔을 때에도 오천읍 일대에 220㎜ 이상의 폭우가 쏟아져 냉천이 범람했고, 이로 인해 냉천교 인근 차량 20여대가 침수되고 냉천둑 일부가 유실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태풍 콩레이 때에도 냉천 수위가 상승하며 범람 위기에 직면했고 시설물 피해액도 약 18억원 정도로 집계됐다.□ 홍수·가뭄 문제 해결 위해 항사댐은 필수가뭄과 홍수에 시달리는 오천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포항시는 지난 2016년 10월, 당시 국토교통부가 ‘댐 희망지 신청제’를 도입하자 항사댐 건설 추진에 나섰다.항사댐은 오어지(吾魚池) 상류지점인 포항시 남구 오천읍 항사리 일원에 807억원(국비 90%, 726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총 저수량 476만㎥, 높이 50m, 길이 140m에 유역면적 6.8㎞, 저수면적 0.286㎢으로 건설이 계획됐다. 포항시는 항사댐이 건설되면 오천읍과 동해면 일대의 주민 8만여명에게 식수를 공급할 수 있어 포항시 전체 식수의 14% 정도를 담당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용수공급, 홍수 및 가뭄에 대한 대처와 냉천 건천화 방지 등의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이 밖에도 항사댐 건설 시 친수공간 조성으로 오어사와 연계해 둘레길, 생태공원 조성 등 관광명소로 개발할 수 있으며, 댐 건설공사로 인한 지역 일자리 창출 등 경제적 파급 효과도 기대된다.포항시는 지자체가 원하면 정부에서 댐 건설을 검토할 수 있는데다 주민들도 댐 건설을 희망하고 있는 만큼 항사댐 건설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일례로 지난 2018년 12월 오천 항사댐 건설사업 추진 촉구를 위한 주민건의서가 업부를 담당하는 환경부에 전달되기도 했다. 이 건의서에는 오천읍 개발자문위원장 외 1만2천388명의 찬성 서명이 담겼다.□ 환경적으로 문제 없나일부에서는 포항지역은 홍수보다 가뭄이 심한 곳인데 항사댐 건설을 통해 홍수예방을 하겠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다며 댐 건설을 반대하고 있다.또한 “기존 오어지가 있는데 상류에 다시 비슷한 규모의 댐을 건설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논리와 함께 오어지 일대가 활성단층과 양산단층이 직각으로 놓인 지점이라는 환경 외적인 문제까지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오어지는 유역면적 대비 저수용량이 작다고 지적한다.가뭄의 경우, 오어지의 저수율이 50% 미만 시에는 용수 지원이 불가능한데다 오천읍과 동해면의 수원지인 진전지의 경우도 저수율 저하로 일부 지역의 단수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따라서 연평균 용수공급량이 144만㎥인 항사댐은 가뭄에 대비해 포항의 자체수원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또한 태풍과 같은 집중호우 등으로 인한 홍수피해도 동시에 예방이 가능하다는 지적이다.전문가들은 태풍 및 호우로 인한 피해예방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치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도분담 홍수량 저감대책이 절실하다고 전제하고, 항사댐의 경우 홍수조절용량이 76만㎥에 이르기 때문에 이 같은 기능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이와 함께 환경단체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포항지역이 가뭄이 많은 지역이라고 하지만 지난 2001년부터 2015년까지 홍수로 인해 사망 18명, 이재민 1천254명, 재산피해 1천239억 원 등이 발생한 점을 감안한다면 가뭄과 홍수를 동시에 예방할 수 있는 다목적 댐의 건설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입장이다.그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은 갈수기 유량부족으로 냉천을 비롯한 하천 생태계의 유지가 곤란한 하천 건천화를 예방하기 위해서도 항사댐은 유용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항사댐이 건설될 경우, 연평균 139만㎥ 규모의 하천유지유량이 공급되기 때문에 ‘냉천 친환경 생태공원’(고향의 강 정비사업)과 연계한다면 하천 유지수량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하천 생태계 복원은 물론 수질개선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전문가들의 이같은 평가에도 일부 지역의 환경단체의 주장하는 근거는 환경훼손 등과 관련한 세부적인 지적이라기보다는 두루뭉술한 원론적인 문제제기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 댐 건설을 찬성하고 있는 대부분 주민의 주장이다.게다가 환경문제와는 전혀 다른 활성단층을 들고 나온 것은 일단 지자체에서 하는 사업은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보자는 식의 움직임이 아닌가 하는 여론도 일부에서 돌고 있다. 실제로 국내·외에는 활성단층 등이 있는 지역에 지어진 댐들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으며, 각종 첨단 보강공법 등을 통해 충분히 보완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시민 식수원 마련을 위한 항사댐 건설을 놓고 포항시와 환경단체 간의 엇갈린 주장이 시민을 위하고 지역이 발전하는 방향으로 빨리 결론나기를 바란다.□ 항사댐 언제 지어지나현재 항사댐 건설 사업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국토부가 담당했던 당시에는 비교적 사업 추진이 빠르게 이뤄졌으나, 지난 2018년 물관리 업무가 환경부로 이관된 후 4대강 보철거 논란 등의 악재가 겹치며 항사댐을 떠나 모든 댐 건설 사업 자체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주민이 원하는 소규모 댐 건설은 분명 대규모 댐과는 차이가 있다.주민들이 항사댐 건설 촉구 건의서를 전달한 것도 이러한 답답한 상황을 빨리 해결하기 위함이다. 포항시 역시 오천 지역 주민들의 숙원 사업인 항사댐 건설을 위해 환경부를 방문해 사업의 필요성과 관련 업무 협의 등을 논의하는 등 지속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올 하반기에는 예비타당성 조사와 실시설계 등이 진행될 계획이며, 2020년 이후에는 건설 사업의 착공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지역 주민들의 간절한 바람이 한시라도 빨리 이뤄지도록 환경부를 비롯한 관련 부서의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할 때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2019-08-07

역적의 굴레

세조가 왕권을 잡은 지 13년이 되는 해였다. 북쪽 변방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다. 전 회령부사 이시애가 절도사 강효문(康孝文)과 그 일행들을 참살하고,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일대를 장악한 것이다. 이 난은 약 3개월간 지속되었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이 한양에서 700여리 떨어진 경상도 장기 땅에도 전해질 무렵, 한 무리의 유배객들이 우르르 이곳으로 몰려왔다. 이 난에 연좌된 사람들이었다. 그 숫자는 무려 십 수 명이나 되었는데,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이후에도 잊을만하면 여기에 연좌됐던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장기로 왔다.이시애는 함길도의 토호로 그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이원경(李原景)은 원래 평안도 출신으로 고려 말기에 원나라의 장수로 있다가, 이성계가 동녕부를 정벌할 때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에 항복한 장수였다. 그는 조선 건국 이후에는 삭방도 첨절제사 등을 역임하며 함길도에서 터전을 닦았다. 아버지 이인화(李仁和)도 막강했다. 그는 회령, 경원 등 북방 지역의 절제사, 도호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6진의 개척과 수비에 상당한 공을 세워 세조 즉위 후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봉되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관이 된 이시애도 회령·경흥 등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난을 일으키기 불과 3년 전까지도 회령부사로 있었다.함길도는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었고, 또 김종서의 6진 개척 때 토호들이 공을 세웠기 때문에 다른 지방에 비해 이들의 영향력이 컸다. 또 지리적으로는 여진과 가까워 세종 때는 이 지역 호족들을 우대하여 수령으로 임명하였고, 광범위한 자치권과 특혜를 주면서 백성들의 이주를 장려하기도 했다.하지만 세조는 달랐다.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한다는 구실로 함길도 출신 수령 임명을 제한하고, 한양출신 수령들로 대체시켰다. 중앙에서 내려간 관리들은 특히 유향소(留鄕所)와 큰 갈등을 빚었다. 유향소란 일종의 지방자치기구였다. 지방의 유지들이 그 지방의 풍속을 바로잡고 관리들의 횡포를 견제하는 기능도 갖고 있었기에, 원초적으로 유향소는 관리들과 마찰이 생길 여지가 있긴 했지만, 특히 함길도는 더했다. 이런 와중에 절도사로 부임 해온 강효문의 비행은 이미 도를 넘어 심각한 수준이었다. 마침 어머니의 상을 당해 고향 길주에 머물고 있었던 이시애는 피가 끓어올랐다.결국 이시애는 1467년 5월 16일, 이 지역의 유향소 세력과 힘을 합쳐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우선 강효문부터 죽이고, ‘남도의 군대가 올라와 함길도 사람을 다 죽인다’라고 선동을 하여 도민들을 끌어들였다. 한편으로는 세조에게 ‘절도사 강효문이 한양의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함길도의 군사를 끌고 한양으로 올라가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거짓보고를 올려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실제 이 보고로 세조는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한명회와 신숙주를 옥에 가두는 해프닝까지 벌였다. 그 사이 이시애는 함길도 일대의 성을 모두 장악해버렸다.조정에서는 뒤늦게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음을 파악하고,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병마도총사로 삼아 토벌군을 편성했다.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대항하였으나 3만 관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이시애는 배신한 측근들에게 잡혀 토벌군에게 인계됐고, 토벌군 진지 앞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시애의 동생 등 참여한 가족들과 평소 그를 따르던 맹숭인(孟崇仁), 최득경(崔得敬), 함여해(咸汝諧), 박진효(朴盡孝), 최옥동(崔玉同) 등의 측근 장수 수십 명이 모두 참형을 당했다.세조는 난을 계기로 북도 유향소를 폐지하고 함길도를 좌·우도로 나누어 통치책을 강화하는 동시에, 반란의 근거지가 되었던 길주는 길성현(吉城縣)으로 강등시켰다.이들과 연좌(緣坐)된 가족들에 대한 처벌은 세조가 죽고 난 다음인 1469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이루어졌다. 연좌된 사람이 워낙 많았고, 그중에는 나이가 차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장기현에는 1469년 (예종1) 2월 1일부터 1482년(성종13) 2월 5일까지, 무려 13년간에 걸쳐서 16명이 배속되었다. 이시애 첩의 딸 이비(李非)와 조카 이무산(李茂山)을 선두로 맹숭인의 첩 경원화(慶源花)와 딸 거부비(巨夫非), 최득경의 아내 옥금(玉今), 아들 벌응거(伐應巨), 동생 최민경(崔敏敬)과 최빙경(崔氷京), 조카 최여허(崔汝虛)와 최석종(崔石宗)이 그들이다. 맹숭인은 함길도 경원(慶源)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겸사복(兼司僕)이라는 관직에 있다가 난에 가담한 사람이었고, 최득경 역시 같은 곳 출신으로 조선의 공신적에 등재된 사람이었으나, 이 난에 참여하였다.그 외에도 반군의 장수로 활동한 함여해의 아내 막가(莫加). 딸 함석을장(咸石乙莊), 함구부(咸仇夫)가 왔고, 박진효의 아내 월화(月花), 최옥동의 동생 최산(崔山)도 이곳으로 왔다. 이들 중 이비, 이무산, 최산, 함석을장, 함구부, 최여허, 최석종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였음에도 예외 없이 유배의 쓰라린 맛을 봐야 했다.장기로 온 이들은 역모를 꿈꾼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단지 역모자의 가족이었다는 이유로 먼 북방에서 동해 끝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는 조선 중기에 어숙권(魚叔權)이 지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잘 나타나 있다. 홀로 되어 유배 온 여인을 관청의 백정이나 관노들이 온갖 수를 써서 자신들의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는 것이다. 전남 완도군 일대에서 전해오는 ‘처녀풍과 소금비(鹽雨)’에 관한 이야기는, 비록 고금도에 유배된 장현경(張玄慶)의 처와 자녀가 겪어야만 했던 서글픈 가족사지만, 조선시대 대부분 여성 유배인들의 실상이 어떠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게 해 준다.장현경은 여헌 장현광의 후손으로 인동부(지금의 구미·선산·칠곡)에 살았다. 1800년 6월 28일에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인산(因山)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인동부사였던 이갑회(李甲會)는 분위기 파악도 못했는지, 하필 이때 풍악을 울리면서 부친의 생신연을 마련하였다. 이에 분개한 장현경의 아버지 장시경(張時景)은 잔치에 초청을 받았으나, 국상 중에 예의에 어긋난다며 거절하였다. 이갑회는 이에 앙심을 품고 오히려 ‘장시경 형제가 정조 독살설을 유포해서 세력을 모아 서울로 진격, 노론벽파를 제거하려 한다’고 관찰사에게 고변을 했다. 졸지에 역모죄를 뒤집어 쓴 장씨 일가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이 이어졌고, 인동은 10월 도호부에서 현으로 강등되기까지 했다.이 사건으로 장현경의 처와 자식들이 1800년 8월에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유배를 온지 9년이 지난 1809년의 일이었다. 이때 큰딸은 스물두 살, 작은 딸은 열네 살, 사내애는 겨우 열 살이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진((鎭)이 있었는데, 하루는 진영의 군졸 한명이 술에 취해서 돌아가다가 울타리 구멍으로 큰딸을 엿보고 유혹하기 시작했다. 큰 딸은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으나, 군졸의 추태 행위는 계속되었다. 군졸은 ‘네가 아무리 거절해봤자 끝내는 내 여자가 될 것’이라며 겁을 줬다. 분을 참지 못한 큰 딸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곧바로 바닷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소식을 들은 그의 어미도 바다에 투신했다. 이를 보고 둘째 딸도 물에 뛰어들려고 했으나, 어미가 “너는 살아서 관가에 가 이 사실을 알려 원수를 갚고, 또 네 동생을 길러야 한다”며 만류해 죽지는 않았다.둘째 딸이 섬의 보장(堡將)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알렸다. 보장은 이 사실을 강진현에 보고했고, 현감 이건식(李健植)이 현장에 나가 검시(檢屍)를 한 후 전라도관찰사에게 수사기록 일체를 넘겼다. 민심이 뒤끓고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해남 수군사(水軍使) 권탁(權逴)도 나섰다. 관찰사에게 고금도 수장(守將)과 강진현감을 파직시켜야 한다는 장계까지 올렸다. 갑자기 파직 위기에 처한 현감은 아전과 의논하여 비장(裨將 관찰사 수행비서)에게 돈 천 냥을 뇌물로 썼다. 그러자 관찰사가 검안(檢案) 서류 일체를 현에 되돌려주고, 수영(水營)에서 올린 장계도 되돌려보냈다. 현감은 끄떡없이 살아남았고 추행을 했던 군졸과 상관의 죄도 불문에 부쳐졌다. 사건이 사장(死藏)되어 버린 것이다.그로부터 이 섬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다음해 7월 28일, 장씨 처와 큰 딸이 죽은 지 꼭 1년이 되는 기일(忌日)이었다. 큰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바다에서는 은산(銀山)이나 설악(雪嶽)과도 같은 파도가 일었다. 바람에 파도의 물거품이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산꼭대기까지 소금비를 뿌렸다. 염분을 맞은 곡식과 초목들은 모두 말라 죽어 섬 전체가 흉년이 들었다. 이듬해 같은 날도 바람의 재앙이 지난해와 같았다. 바닷가 백성들은 이 바람이 억울하게 죽은 장씨 딸의 원혼(冤魂)이라고 하여 ‘처녀풍(處女風)’이라고 불렀다. 얼마 후 암행어사로 홍대호(洪大浩)란 사람이 내려왔는데, 그도 이 기막힌 사연을 들었지만 역시 묵인하고 가버렸다.다산 정약용은 이 사실을 강진 다산초당에 있을 때 전해들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진실을 파헤쳐 탐관오리들을 처벌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없었던 것이다. 동병상련이랄까. 그는 조용히 ‘소금비(鹽雨)’란 시문(賦)을 짓고, 그 경위를 ‘고금도 장씨 딸에 대한 기사’란 제목으로 자세하게 남겼다. 그래서 다산 시문집에 그 전말이 전한다.다산은 이후 여성 유배인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목민심서’에도 여성 유배인들에 대한 처우를 거론하고 있다. 유배지에서 이루어지는 점고(點考)가 문제였다. 유배인들은 달마다 두 번씩 삭망점고(朔望點考)를 받아야만 했다.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수령에게 가서 점검을 받았던 것이다. 이외에 수시로 받는 별점고(別點考)도 있었다. 질이 좋지 않은 수령은 이런 점고를 빙자해서 딴 마음을 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이를 안 다산은 ‘여성 유배자의 거주지에는 남자들의 출입을 금하며, 여성 유배인이 점고를 받을 때는 얼굴을 가리고 관아에 들어오게 하고, 수령은 문을 닫아걸고 여자를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심문을 마친 뒤에는 관비를 시켜서 집에 호송하게 하고, 남자들이 주위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여, 여성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전도 그 이후도 다산의 이와 같은 권고가 받아들여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이시애의 난에 연좌되어 역적의 굴레를 쓰고 이곳에 온 여성들이 어디서 머물렀는지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이 ‘고금도 장씨 딸’의 경우처럼 얼마나 많은 유린과 능욕을 당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신창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성난 파돗소리와, 양포항에서 성황당고개를 넘어오는 남쪽 바람이, 당시에 겪었던 이들의 서러움과 막막함을 전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쓰릴 뿐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8-06

호미곶에 태양의 빛 엎질러지면 바다의 선물을 낚으러 간다

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일어났다. 덩달아 일찍 깬 주인 할머니께 염치도 없이 식혜 한 사발 얻어 마시고 민박집을 나섰다. 아직 보랏빛 이불을 덮었지만, 고기잡이배들이 출항을 준비하며 수런거리는 통에 삼정리 항구는 잠을 뒤척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어구를 덮어놓은 천막이 펄럭거리고, 배고픈 고양이들이 이따금 울어댔다. 김춘수의 ‘처용단장’을 빌리자면 “바다가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여행자와 어부가 부지런한 것은 모두 태양을 사랑해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태양을 사랑해서 이 새벽엔 푹푹 하품이 나는구나. 나는 해돋이를 보기 위해, 어부는 깊은 바다에서 피어오를 물고기 떼를 만나기 위해 바다로 간다. 캄캄한 수면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오를 때, 사람의 마음이 어둠에서 깨나듯 물고기들도 활발한 먹이활동을 시작한다.구룡포의 해돋이도 아름답지만 보다 가까이서 첫 태양을 보려거든 호미곶에 가야 한다. 겨울바다의 일출이 장엄해 사람을 뭉클하게 한다면 여름바다의 일출은 낭만적이어서 들뜨게 한다. 구룡포에서 호미곶까지는 차로 20분이 걸린다. 새벽 공기로 얼굴을 씻으며 삼정, 석병, 강사, 대보 해변을 지나 호미곶에 도착하니 아직 태양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얼마나 뜨거운 불덩어리를 품에 안고 오는지 하늘 장막이 벌겋게 너울지는 중이었다. 여름의 해돋이는 겨울보다 짧고, 색조가 옅다. 하지만 마침내 솟아오른 태양이 호미곶 바다 ‘상생의 손’ 위에 얹어질 때, 어느 계절이든 상관없이 가장 아름다운 일출의 장관이 완성된다. 내가 사방을 떠돌며 경험한 세상에서, 호미곶의 해돋이는 서쪽 세계의 끝, 이베리아 반도 포르투갈 호카곶의 석양과 대응한다.호미곶에 찾아온 태양이 빛을 엎질러버린 아침, 따사롭고 간질간질하며 연필심 냄새가 나는 햇살이 포항의 모든 지붕과 담장, 애기똥풀, 배롱나무, 몽돌, 과메기발, 빨랫줄에 내려앉았다. 쪽빛에서 금빛으로 바다가 표정을 바꾸는 사이 눈곱도 떼지 못한 나는 호미곶 해맞이공원 화장실에 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젖은 얼굴로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오늘은 뭘 하겠느냐고. 물어보나 마나 답은 정해져 있다. 낚시보다 더 즐거운 건 없다고, 낚시하러 당장 가자고.초여름의 포항 바다에선 다양한 낚시를 즐길 수 있다. 찌낚시로는 벵에돔, 참돔, 자리돔 등을 노려볼 만하고, 루어낚시로는 농어, 볼락, 성대, 광어, 쥐노래미, 우럭, 무늬오징어 등을 만날 수 있다. 오늘의 대상어는 볼락이다. 겨울 낚시 어종이지만 초여름까지도 심심찮게 나오는 편이며, 겨울 못지않게 봄과 초여름에도 맛이 좋다. 나는 민물에서는 쏘가리, 바다에서는 볼락을 가장 좋아한다. 손맛, 입맛, 눈맛 등 낚시의 세 가지 맛을 모두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쏘가리의 황금빛 호피무늬만큼 볼락의 맑고 큰 눈과 왕관 같은 등지느러미는 근사한 것이다. 볼락 낚시는 휨새가 부드럽고 낭창낭창한 6~7피트짜리 낚싯대에 1000~2000번 소형릴을 사용한다. 낚싯줄도 0.4~1호 정도의 가느다란 합사라인을 쓰는데, 가볍고 섬세한 채비를 쓰는 만큼 손에 전달되는 손맛도 짜릿하다. 볼락은 인조미끼(루어)로 잡는다. 밤낚시에 조과가 좋지만 해 뜰 무렵과 해 질 무렵에만 집중해서 낚시해도 하루 먹을 만큼은 넉넉히 잡을 수 있다. 조과가 보장된 배낚시 대신 오늘은 방파제에서 낚시할 생각이다. 방파제 위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즐겨야 하기 때문이다.낚시하러 가기 전 구룡포에 먼저 들렀다. 아직 오전,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해 지기 전 두어 시간만 낚시를 하면 혼자 회 뜨고 구워 먹을 만큼은 잡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해돋이를 본다고 일찍부터 일어난 탓에 허기가 졌다. 구룡포 수협과 우체국 사이, 과메기 문화거리 맞은 편 좁은 골목 어귀에 있는 ‘신대천국밥’으로 들어가 앉았다. 돼지국밥과 수육, 두루치기, 찌개류를 전문으로 하는 집인데, 숨은 ‘모리국수 맛집’으로 아는 사람만 안다. 빈속을 든든하게 채워 줄 돼지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희고 뽀얀 사골 육수에 돼지 머릿고기와 부추가 듬뿍 들어간 뚝배기에서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토렴하는 방식은 아니고 공깃밥을 따로 내 준다. 국물을 한 숟갈 떠먹으니 마치 황토방의 열기 같은 구수한 뜨거움이 몸속에 퍼지며 여기저기 땀이 맺힌다. 머릿고기 두어 점을 새우젓에 찍어 먹는 것으로 나름의 우아한 음미를 마치고, 깍두기 국물과 함께 밥을 말아 게걸스레 먹기 시작했다. 돼지국밥은 그렇게 먹어야 제 맛이다.허영만은 만화 ‘식객’에서 돼지국밥을 두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소 사골로 끓인 설렁탕이 잘 닦여진 길을 가는 모범생 같다면, 돼지국밥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반항아 같은 맛”이라고. 한 숟갈 삼킬 때마다 국밥은 목구멍을 뜨겁게 미끄러져 내려가며 나로 하여금 ‘오늘을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했다. 입천장이 데인 채 사골 육수가 펄펄 끓고 있는 솥단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먹고 사는 일의 숭고함에 대해 저절로 성찰하게 된다. ‘살아 있구나, 먹고 있구나, 먹고 힘내서 또 살아보자.’돼지국밥은 1950년대 부산에서 유래된 피난민 음식이다. 부산에서 시작돼 경상도 전역으로 널리 퍼져 누구나 즐기는 대중음식이 됐다. 맑은 국물의 부산식, 설렁탕처럼 뽀얀 국물의 밀양식으로 나뉘는데, 이곳 구룡포의 ‘신대천국밥’은 밀양식에 가깝다. 여기서 장사를 한 지는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마 다른 곳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듯하다. 국물에서 깊고도 진한 내공이 느껴졌다. 한쪽 벽에는 이 집 딸이 부모님의 칠순을 축하하며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편지를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돼지국밥은 마음까지 따듯하게 데우는 음식이다.구룡포 시장에 들렀다. 한 마리도 못 잡고 꽝을 칠 경우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낚시꾼이 가장 비참해지는 순간은 빈손으로 집에 돌아와 냄비에 라면 물을 올리는 때이다. 쫄쫄 굶는 캠핑은 캠핑이 아니라 유격훈련이므로, 뿔소라와 고등어, 돼지 앞다리살을 샀다. 구룡포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셀렉토커피’ 2층 테라스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망중한을 즐기니 시간은 어느덧 오후 세시, 하정리 방파제로 향했다. 구룡포에 와 볼락 낚시를 할 때 가장 먼저 들러 볼락의 활성도와 바다 상황을 체크하는 곳이다. 2그람짜리 가벼운 지그헤드(봉돌에 바늘이 달린 루어낚시 채비)에 멸치 새끼 모양의 웜(고무 인조미끼)을 달고 방파제 테트라포드 가까이 던졌다. 입질은 간간히 들어오는데 덥석 물지는 않는다. 잔챙이들만 덤비고 쓸 만한 씨알의 볼락은 반응하지 않는 상황, 이럴 땐 포인트를 옮겨야 한다.포항의 가장 남쪽인 장기면 양포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여섯시, 방파제 곳곳에 검은 먹물 자국이 있는 걸 보니 최근에 무늬오징어가 꽤 잡힌 모양이다. 볼락 낚싯대를 내려놓고 무늬오징어 낚싯대를 꺼내 들었다. 무늬오징어 낚시는 8~9피트의 허리힘이 강한 낚싯대에 2000~3000번 릴, 합사 0.6~1.2호 낚싯줄을 쓴다. ‘에기’라고 불리는 새우 모양 인조미끼를 사용하기 때문에 무늬오징어 낚시를 ‘에깅 낚시’라고 칭한다. 방파제 내항이나 외항, 갯바위에서 연안을 공략하면 멸치, 새우, 꼴뚜기 등을 먹기 위해 연안의 암반 지대나 수초로 접근해 온 무늬오징어를 잡아낼 수 있다.양포방파제는 ‘무늬오징어 에깅 낚시 대회’가 열릴 만큼 무늬오징어 낚시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방파제에 자리를 잡고 서서 연안으로 채비를 던졌다. 채비가 바닥에 가라앉는 느낌이 들자 살짝 채비를 들어 올린 후 살아 있는 새우처럼 보이도록 낚싯대를 흔들어 액션을 줬다. 그렇게 반복한 지 30여분쯤 됐을까, 채비를 퍽 하고 때리는 강력한 입질이 들어왔다. 지긋이 낚싯대를 당겨보니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무늬오징어가 틀림없다. 힘을 당차게 쓰던 녀석을 발 앞까지 끌어온 후 뜰채로 건져 올렸다. 1kg이 넘는 준수한 크기의 무늬오징어, 본래 이름은 흰오징어이지만 무늬가 수시로 바뀐다고 해서 무늬오징어로 통칭된다. 오징어류 중에서 가장 맛이 좋으며 오직 낚시로만 잡을 수 있어 희소성이 높다.무늬오징어는 잡았으니 이제는 볼락이다. 테트라포드와 수초 사이사이에 은신하던 볼락이 루어를 공격하는 순간, 탈탈거리는 떨림이 마치 애인에게 걸려온 전화의 진동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 짜릿한 손맛에는 중독성이 있다. 오후 일곱 시부터 한 시간 반 동안 낚시에 먹을 만한 사이즈의 볼락 여러 마리를 잡았다.먹을 만큼 잡았으므로 낚시는 접고 텐트를 펴기로 한다. 양포항에는 큰 방파제와 작은 방파제가 있는데, 작은 방파제 진입로에는 캠핑을 즐길 수 있는 공원이 있고, 방파제 끝에는 수상무대가 있다. 가끔 공연이 열리기도 하는 이 수상무대에서 포항 사람들은 낚시와 캠핑, 산책 등을 두루 즐긴다. 이날은 월요일이라선지 낚시하는 사람도, 텐트도 눈에 띄지 않았다. 호젓한 여유를 만끽하며 텐트를 치고 화로에 장작불을 붙였다. 장작이 타는 동안 무늬오징어와 볼락을 손질했다. 무늬오징어는 회와 통찜으로 요리하고, 볼락은 뼈회를 쳤다. 장작불에는 석쇠를 얹고 소라와 고등어를 구웠다. 여름밤의 총총한 별빛 아래 맛있는 냄새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밤바다 위에서 파도 소리와 향기에 귀와 코를 적시며 먹는 캠핑 음식은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심지어 그 음식이 무늬오징어 회와 통찜, 볼락 뼈회, 참소라구이라면 황제의 만찬도 부럽지 않다. 무늬오징어 회는 달고 쫄깃하며, 통찜은 바다의 맛 그 자체, 볼락 뼈회는 고소하기 그지없다. 낚시 천국 포항에서의 하루는 낚시꾼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안겨주었다. 파도 위에서 마시는 술은 숙취도 없고, 밤새 바람 불고 파도가 쳐도 꿈결만큼은 잔잔하겠지. 램프를 켜둔 텐트는 캄캄한 밤바다 위에서 마치 깡통 우주선처럼 보였다. 하룻밤 자는 사이 나는 몇 개의 별을 또 건너가게 될까? 잠은 안 오고 별빛만 오는 양포 방파제, 까닭 없는 그리움이 깊어지기 전에 파도의 자장가에 귀를 기울였다.    /시인 이병철

2019-08-04

미당 서정주와 풍류도… 세속의 무한한 자유를 꿈꾸다

시인 서정주(1915~2000)는 자유로움과 조화, 아름다움의 추구라는 ‘풍류도’의 핵심을 문학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가다. 숭실대학교 국문과 이경재 교수가 미당 작품에 스며있는 풍류도의 향기를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독자들을 위해 이를 게재한다.풍류(風流)라는 단어는 우리 생활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 즉 예술성이나 심미성을 지향하며 노는 것을 말한다. 품격의 고상함을 지닌 자유인의 생활이 풍류인 것. 그러나 도(道)라는 말이 붙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풍류에는 단순하게 정의될 수 없는 심오한 형이상학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풍류라는 말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를 보면 풍류란 한민족의 가장 종지가 되는 사상체계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흥왕조(眞興王條)에 등장하는 ‘난랑비서’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을 옮긴다.“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 가르침을 베푸는 바탕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그 실제 내용은 유·불·도 삼교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종합하여 온갖 생명을 교화한다는 것이다.”화랑도(花郞徒)의 지도이념이기도 했던 풍류도는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만이 아니라 고유 신앙을 기반으로 하면서 외래 종교인 유교와 불교 및 도교의 종지를 포함하는 거대한 사상으로서 모든 생명을 교화하였다. 이후에도 풍류에 대한 개념 규정은 최남선, 김범부, 안호상, 양주동 등의 석학들에 의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이들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풍류(도)의 핵심적인 특징으로는 ‘걸림 없는 자유로움’,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대조화(大調和)의 세계’, ‘유연하고 여유로운 삶의 자세와 이를 통한 미의 추구’라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풍류도를 가장 깊이 있게 형상화한 현대 문인으로는 미당 서정주를 손꼽을 수 있다. 서정주는 여러 산문을 통해 풍류의 의미와 가치를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를 언급하며 직접적으로 풍류를 논한 글만 정리해보아도 ‘한국 시정신의 전통’, ‘한국적 전통성의 근원’, ‘신라문화의 근본정신’, ‘신라의 영원인’, ‘풍류’, ‘전라도 풍류’ 등을 들 수 있다. ‘한국 시정신의 전통’에서는 풍류가 “우주적 무한과 시간적 영원”을 근거로 하며, “인간주의가 아니라, 우주주의적 정신의 표현이요, 현재적 현실주의가 아니라 사람을 영생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 데서 온 영원주의 정신의 나타남”이라고 규정한다. ‘한국적 전통성의 근원’에서는 풍류도를 “영통주의(靈通主義) 정신”이라고 설명한다.‘신라문화의 근본정신’에서는 풍류도의 근본정신으로 “천지전체를 불치의 등급 따로 없는 한 유기적 연관체의 현실로서 자각해 살던 우주관”과 “등급 없는 영원을 그 역사의 시간으로 삼는 것”을 들고 있으며, 전자와 후자는 각각 “우주인, 영원인으로서의 인격”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신라의 영원인’에서는 “사람의 생명이란 것을 현생에만 국한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으로서 생각하고, 또 아울러서 사람의 가치를 현실적 인간사회적 존재로서만 치중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존재로서 많이 치중해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풍류’에서는 “현실을 바닥과 구석에 닿게 가장 질기게 살 뿐만이 아니라 자손만대의 영원을 현실과 한 통속으로 하여 어떤 경우에도 이어서 안 죽고 살아가려는 정신의 요구를 따르는 길”이라고 주장한다.미당은 영원주의와 우주주의로 정리되는 풍류도가 매우 의미 있는 정신으로 오늘날에 새롭게 부활해야 한다는 입장. 그것은 ‘신라문화의 근본정신’에서 민족의 일을 경영하고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풍류도는 아직도 크게 필요한 힘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인 ‘질마재 神話’(一志社, 1975)는 미당이 그토록 강조한 풍류도가 직접적으로 형상화 된 실례다.질마재의 정식 명칭은 전북 고창군 선운리(仙雲里)이고, 이곳은 약 150호 정도의 집이 있던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서정주는 열 살 무렵 줄포로 이사할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 시집 ‘질마재 신화’는 이곳 사람들과 풍물들을 바탕으로 해서 창작되었다. 그것은 약간의 변형을 가해져 시로 수용되기도 했지만, 있는 그대로 시로 수용되기도 했다. 간통사건과 연날리기 이야기, 외할머니집에 해일이 들던 일, 도깨비집 할머니 이야기, 석녀 함물댁 이야기, 小者 이생원네 마누라 이야기 등은 시인이 어려서 실제로 보고 겪은 이야기들이다. (‘질마재’, ‘서정주 문학 전집’ 3, 일지사, 1972) 이러한 이야기들은 ‘姦通事件과 우물’, ‘紙鳶勝負’, ‘海溢’, ‘말피’, ‘石女 한물宅의 한숨’, ‘小者 李 생원네 마누라님의 오줌 기운’ 등의 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질마재 신화’에서는 인간과 인간, 나아가 인간과 자연 사이에 경계를 설정할 수 없는 대조화(大調和)의 세계가 자주 펼쳐진다. ‘海溢’에서는 수십 년 전 바다에서 죽은 외할아버지가, 때가 되면 바닷물이 되어 외할머니를 방문한다. ‘李三晩이라는 神’에서는 이삼만의 붓 기운이 시공을 뛰어넘어 뱀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습이 그려진다.‘石女 한물宅의 한숨’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해 자진해서 남편에게 소실을 얻어 주고, 언덕 위 솔밭 옆에 홀로 살던 한물宅이 자연과 감응하며 사는 모습이 잔잔하게 형상화되어 있다.인간과 자연이 우주적 차원에서 한데 어우러지기에, 인간의 생명력은 자연의 생명력으로 전환되고는 한다. ‘小者 李 생원네 마누라님의 오줌 기운’에서 이 생원네 마누라님의 오줌은 질마재 마을에서도 제일로 무성하고 밑둥거리가 굵다고 소문이 난 무밭을 만들어 내는 생명력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시인은 오줌 기운을 강조하기 위해 신라시대 지도로대왕비(智度路大王妃)의 ‘長鼓만한 똥’과 이 생원네 마누라님의 무를 비교하고 있다. 똥을 수식하는 말로 장고가 등장한 이유는 장고가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신바람을 나게 하는 악기라는 사실이 고려되었을 것이다.‘알묏집 개피떡’에 등장하는 알묏댁도 자연의 생명력을 고스란히 자기 안에 담고 있는 존재다. 그녀는 보름달이 뜰 무렵의 보름 동안은 서방질을 하고, 달이 없는 그믐께부터는 마을에 떡을 판다. 그런데, 그녀의 떡은 맵시며 맛이 너무나 뛰어나 “손가락을 식칼로 잘라 흐르는 피로 죽어가는 남편의 목을 추기었다는 이 마을 제일의 烈女 할머니”까지 알묏댁을 칭송하게 된다. 생명력을 바탕으로 미적 경지로 승화된 떡 앞에서, 열녀로 표상 되는 도덕조차 꼼짝하지 못 하고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다.‘소 X 한 놈’는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 시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수간(獸姦)이라는 어이없는 행동을 저지른 총각 놈을 묘사하는 시인의 태도다. 그는 “品行方正키로 으뜸가는 총각놈이었는데, 머리숱도 제일 짙고, 두 개 앞이빨도 사람 좋게 큼직하고, 씨름도 할라면이사 언제나 상씨름밖에는 못하던 아주 썩 좋은 놈이었는데, 거짓말도 에누리도 영 할 줄 모르는 숫하디 숫한 놈”으로 묘사되고 있다. 수간 사실이 들통나 사라진 그를 보며, 화자는 “그 발자취에서도 소똥 향내쯤 살풋이 나는 틀림없는 틀림없는 聖人 녀석이었을거야”라고 말한다.‘틀림없는’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강조하는 화자의 태도에 비꼼과 같은 부정적인 뉘앙스는 느껴지지 않는다.나아가 질마재의 사람들은 유연하고 여유로운 삶의 자세를 바탕으로 심미성을 지향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이러한 모습은 ‘소망(똥깐)’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시에서는 배설 행위조차 나름대로 운치 있는 미적 행위로 전환된다. “이것에다가는 지붕도 休紙도 두지 않는 것이 좋네, 여름 暴注하는 햇빛에 日射病이 몇 千 개 들어 있거나 말거나, 내리는 쏘내기에 벼락이 몇 萬 개 들어 있거나 말거나, 비 오면 머리에 삿갓 하나로 응뎅이 드러내고 앉아 하는, 休紙 대신으로 손에 닿는 곳의 興夫 박잎사귀로나 밑 닦아 간추리는-이 韓國 ‘소망’의 이 마지막 用便 달갑지 않나?”라는 대목에서, 용변을 보는 화장실과 그 행위는 멋진 작업실에서 이루어지는 창작 행위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예술적 아우라를 풍긴다. ‘上歌手의 소리’의 주인공도 똥오줌 항아리를 명경(明鏡)으로 몸단장을 하는 처지이지만, 그 노랫소리는 “이승 저승에 두루 무성”할 만큼 빼어나다. 주목할 것은 그러한 빼어남이 다름 아닌 “明鏡도 이만큼은 특별나고 기름”지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현실의 불우를 참된 예술의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극적 아이러니와 역설의 미학이 번뜩인다. 기존의 사회 규범이나 질서를 부정하며 내적인 가치의 완성에 골몰하는 그들이기에, 자잘한 세속의 명리나 승부 따위는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못 한다. 그것은 지상으로부터의 마지막 속박이라 할 수 있는 실마저 끊어져 아무런 걸림 없이 날아가는 연의 이미지에 응축되어 있다. ‘지연승부(紙鳶勝負)’라는 시가 바로 그것.그렇지만 選手들의 鳶 자새의 그 긴 鳶실들 끝에 매달은 鳶들을 마을에서 제일 높은 山 봉우리 우에 날리고, 막상 勝負를 겨루어 서로 걸고 재주를 다하다가, 한 쪽 鳶이 그 鳶실이 끊겨 나간다 하드래도, 敗者는 ‘졌다’는 歎息 속에 놓이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解放된 自由의 끝없는 航行 속에 비로소 들어섭니다. 山봉우리 우에서 버둥거리던 鳶이 그 끊긴 鳶실 끝을 단 채 하늘 멀리 까물거리며 사라져 가는데, 그 마음을 실어 보내면서 어디까지라도 한번 가 보자던 전 新羅 때부터의 한결 같은 悠遠感에 젖는 것입니다.그래서 그들은 마을의 生活에 실패해 한정없는 나그네 길을 떠나는 마당에도 보따리의 먼지 탈탈 털고 일어서서는 끊겨 풀려 나가는 鳶같이 가뜬히 가며, 보내는 사람들의 인사말도 ‘팔자야 네놈 팔자가 상팔자구나’ 이쯤 되는 겁니다.이 시에서 그려진 연의 모습은 질마재 사람들들이 가 닿은 마지막 세계의 모습이다. 그것은 ‘질마재’라는 수필의 마지막이 바로 이 연날리기로 끝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패배하지만 그것을 통해 사실은 더 깊은 자유와 여유를 얻게 됨을 이르는 것이다. 실이라는 물질적 질곡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아무 것에도 걸림 없는 무한한 자유를 얻고 있는 것이다. 실이 끊긴 채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은, 마지막 연에서 생활에 실패해 한정 없는 나그네길을 떠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된다.이 나그네를 향해 던지는 사람들의 인사말 “팔자가 네놈 팔자가 상팔자구나”라는 말은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것은 세속의 승부나 성공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무한한 자유, 바로 풍류도인 것이다.연실이 끊어지는 것은 현실적 패배인 동시에 현실의 여러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연실이 끊겼다는 패배의 고통 속에서 “어디까지라도 한번 가 보자던 전 新羅 때부터의 한결 같은 悠遠感”에 젖는 모습은, 현실의 고통을 유유자적함으로 승화시킨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연의 자유로운 이미지 속에 응축된 풍류도의 모습은 ‘질마재 신화’ 이후 ‘떠돌이의 시’(1976), ‘서으로 가는 달처럼’(1980), ‘노래’(1984), ‘산시’(1991) 등을 통해 표출되는 열린 세계를 소요하는 떠돌이 미당의 모습으로 변모되어 나타난다.이경재 문학평론가1976년 인천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다. 문예지 ‘문학수첩’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단독성의 박물관’ ‘끝에서 바라본 문학의 미래’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 ‘촛불과 등대 사이에서 쓰다’ ‘한국 현대 문학의 개인과 공동체’ 등의 책을 썼으며, 제29회 김환태평론문학상 수상자다.

2019-08-01

따로 또 같이… 닮았지만 자존심을 지켜낸 숨은 고수들

갈비, 쇠고기 진수를 보여주는 경주 쇠고기 집 2곳청산숯불갈비·서면식육식당‘청산숯불갈비’. 경주시 강동면에 있다. 메뉴가 간단하다. 갈빗살, 소금구이, 육회, 소고기 국밥이다. 500g 기준, 갈빗살이 65,000원, 소금구이가 38,000원(2019년 7월)이다. 소금구이 100g당 7,600원. 시쳇말로 ‘돼지고기 삼겹살’보다 싸다. 고기 질? 아주 좋다. ‘소금구이’. 메뉴 이름이 재미있다. 대부분 고깃집은 고기 부위를 메뉴로 내놓는다. 안심, 등심, 갈비살 등이다. 안창살, 가브리살, 낙엽살, 토시살, 살치살 등으로 세분한다. 이 가게, 덜렁 ‘소금구이’다. 고기가 아니라 ‘소금’ ‘구이’를 내세운다. 여러 부위를 섞었다.고기 부위를 내세우지 않고 소금구이라고 표기한 이유다. 갈빗살이나 소금구이 가격은 싸다. 고기 질을 고려하고,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상당히 싸다.  쇠고기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기술력이 자부심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손님이 주문하면 바로 고기를 준비한다. 시간이 걸린다. 그야말로 ‘준비하지 않은 고기’ 전문점이다. 전문점은 미리 고기를 썰어놓지 않는다. 지육(枝肉)이나 덩어리 고기를 공급받는다.해체를 직접 한다. 숙성 등의 과정도 직접 해낸다. 제대로 된 ‘갈비살’ ‘소금구이’가 가능한 이유다. “술잔은 채우는 맛, 고기는 씹는 맛”이다. 이 집의 소금구이, 기름기 적당하고 씹는 질감도 아주 좋다. 신선한 것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품질관리도 수준급이다. 계절 별로 고기 질이 들쑥날쑥할 수는 있다. 여름철보다는 가을, 겨울 맛이 낫다. 계절마다 원육의 질이 다르다. 계절의 맛을 넘어설 수는 없다.  직접 육가공하는 가게에서는 쇠고기 국밥을 먹는 것이 요령이다.정형 과정에서 생긴 ‘칼밥’이나 남는 자투리 고기가 넉넉하다. 맛없을 수가 없다. 숯불도 아주 좋다. 비장탄, 참숯에 가깝다. 강추.      경주시 아화의 ‘서면식육식당’ 메뉴는 얼마쯤 복잡하다. 안창살, 갈비살, 특 갈비살, 등심, 소주물럭 등이다.경주의 쇠고기 마니아들은 자주 찾는 가게다. 가게 입구에는 쇼 케이스를 설치, 식육점도 병행한다. 팔다 남으면 구워서 팔고, 굽다 남으면 식육으로 파는 식이다. 업력도 제법 길다. 한우치고 가격도 싸다. 동네 음식점으로 시작해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가게다.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돼지고기 맛집 2곳 승진식당·옥천식육식당비슷하지만 다르다. 경주 안강읍의 ‘승진식당’ ‘옥천식육식당’ 이야기다. 돼지찌개(?) 전문점들이다. 다른 지역의 돼지고기 찌개, 돼지 두루치기와 비슷하지만 다르다. 두 집을 비교해도 마찬가지. 비슷하지만 다르다. ‘따로, 또 같이’다.‘옥천식육식당’은 한식의 특장점을 모두 보여준다. 에이, 시골의 돼지고깃집을 두고 웬 호들갑?, 이라고 생각하면 큰코다친다. ‘승진식당’은 돼지찌개 전문점이다. 돼지고기, 버섯, 몇몇 채소가 재료다. 고추장 양념이다. 국물 색깔이 붉고 짙다. 이 집 국물의 특징은 간장 맛이다. 몇몇 젊은 세프들과 간 적이 있다. “재밌네요. 돼지고기 전골인데 간장 맛이 좋네요.” 1만 원대 이하의 음식이다. 고기도 넉넉하고 감칠맛 듬뿍이다. 맛있다.‘옥천식육식당’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냉장 돼지고기에 대파 등 간단한 채소, 고춧가루 조금을 얹어서 냄비에 내놓는다. 육수가 한 대접 따라온다. 육수는? 밍밍하다. 이게 ‘마법의 국물’이다. 육수를 언제, 얼마를 넣든 손님 마음이다. 고기를 볶듯이 끓이면서 따로 내온 국물을 조금씩 붓는 게 요령이다. 한꺼번에 부으라고 하지만 서너 번 나눠서 붓는 게 낫다. 제법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쐬주 한잔에 고기 몇 점을 먹다가’ 나중에 국물을 다 붓고, 끓인다. 식성대로 고춧가루를 더 넣어도 된다. 기본양념은 순하다. 전형적인 한국식 ‘국물 음식’ ‘열린 음식’이다. 손님이 불의 강도, 육수 투척 시기, 볶는 방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간단하지만 재미있다. 밥을 볶아도 되고, 끓인 다음 말아서 먹어도 된다. 국밥, 볶음밥 모두 가능하다. 가격 싸다고, 외진 곳에 있다고 낮춰 볼 일은 아니다. 두 집 모두, 호남의 유명한 ‘애호박돼지찌개’보다 한 수 위다. 아직 블로그 리뷰 100개 이하들이다. 제발 방송 타서 복작대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중국, 일본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다안압지 출토 숟가락과 젓갈 목간안압지(월지) 바닥에서 숱한 유물이 나왔다. 3만2천여 점이다. 청동 숟가락과 ‘식해(食醢)’에 대해서 기록한 목간도 나왔다. 식해는 젓갈이다. 구체적으로는 고성에서 만든 생선 젓갈이다. 목간(木簡)은 나무로 만든 두루마리 편지 같은 것이다. 종이 대용이다. 숟가락은 중국-한반도-일본으로 전래 되었다. 일찍부터 중국에서 숟가락을 사용했고, 한반도로 전래 되었으며, 곧 일본으로 건너갔다. 긴 모양의 숟가락이다.안압지 출토 숟가락에는 긴 것과 둥근 것이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숟가락을 사용했지만 이제 숟가락은 한반도에만 남았다. 모양이 둥근 숟가락도 한반도에는 남았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둥근 숟가락을 사용한다. 한반도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숟가락은 대부분 스테인리스 혹은 구리 합금이다. 금속재질이다. 중국, 일본의 작은 숟가락은 나무 혹은 자기다. 이름만 같은 숟가락이지 사용 빈도나 재질은 전혀 다르다.중국, 일본의 젓가락도 대부분 나무, 플라스틱, 상아 등으로 만든 굵은 것이다. 동남아도 마찬가지다. 한반도 젓가락은 다르다. 스텐레스 등의 금속제다. 상당히 날카롭다. 숟가락 젓가락은 한반도에서 끊임없이 발전했다. 중국, 일본에서는 거의 사라진 물건이다. 젓갈도 마찬가지. 안압지의 ‘젓갈 목간’은 상세하다. 일상적으로 널리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젓갈을 만든 지역, 옮긴 지역(동궁), 날짜를 상세히 기록했다. 중국에는 자차이, 일본에는 츠케모노[漬物, 오신코]가 있다. 넓은 의미에서 발효식품, ‘지[漬]’다. 중국, 일본의 발효식품은 한반도의 김치, 젓갈, 장아찌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숟가락과 젓갈. 비슷하지만 다르다.안압지의 목간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택배(宅配) 제도’가 있었음도 알 수 있다. 택배로 젓갈을 받았다? 흥미롭다. 경주박물관에 가면 안압지 유물관에서 젓갈을 기록한 목간과 숟가락을 꼭 보시길.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07-31

경주, 길에서 길을 묻는다

‘길’이나 ‘특정 지역’이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경우 슈테판 대성당 주위 ‘슈테판 플라츠’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1년 내내 붐빈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주변 거리와 일본의 츠키지 수산시장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녔다.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과 부산 국제시장의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골목길, 대구 중구의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등은 한국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길이다.여기에 또 하나의 ‘복병’이 얼마 전부터 주목받고 있으니 바로 경주 황리단길. 앞서 언급한 ‘길’과 ‘지역’은 이미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하나의 ‘브랜드’로 성장했다.황리단길은 곳곳에 숨어 있는 젊은 감각의 ‘맛집’과 멋진 한옥의 내부를 모던하게 개조한 ‘예쁜 카페’가 특화된 상품이다.여기에 낡았지만 정겨움을 느끼게 해주는 간판을 단 세탁소, 문구점, 한의원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 1970~80년대 풍의 클래식한 분위기까지 맛볼 수 있다. 이는 비단 20대 남녀만이 아닌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황리단길을 아끼는 이유다.기자가 이 거리를 찾았을 때는 평일 한낮. 그럼에도 전국 각처에서 경주를 찾아온 젊은 여행자들이 적지 않았다. 야외 테라스에서 차가운 커피 한 잔을 주문해놓고 사색을 즐기는 중년들도 눈에 띄었다.황리단길에는 흥미롭게도 3~4개의 점집이 있다. 여기에 들러 재미로 사주나 관상, 애정운 등을 확인하는 것도 경주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보행자가 많고 차량도 함께 통행하는 거리이니만치 황리단길에선 예쁜 옷가게와 일식집 수조를 헤엄치는 커다란 농어에만 지나치게 눈길을 줘서는 곤란하다. 언제나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게 안전이니까.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은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닦은 마을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곳이다.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들이 모여 사는 세거지(世居地)로 500년을 이어왔다. 지난 2010년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됐다.입장료 4천원을 지불하면 1~2시간 동안 조선 중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보물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무첨당, 향단, 관가정, 서백당, 심수정, 수운정의 날렵한 검은 기와와 동네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선비화(花)’ 배롱나무 꽃을 보는 것은 마음 설레는 일.기와집의 매력에 필적하는 건 잘 보존된 양동마을의 서민적인 초가(草家)들이다. 이 둘 사이를 오가노라면 더운 날씨도 잊고 야트막한 언덕을 힘 있게 오르내릴 수 있을 것이다.기자가 방문한 날도 섭씨 33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덮쳤지만, 한국 관광객은 물론 대만에서 경주를 찾은 30여 명의 단체관광객들도 얼굴에서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옛 추억을 끄집어내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는 건 분명 의미 있는 행위일 터. 양동마을엔 흐르는 땀을 식힐 커다란 나무 그늘도 부지기수다. 시간이 넉넉한 여행자라면 양동마을 체험관에 들러 전통 엿도 만들어보고, 쉬엄쉬엄 걸어 장태골까지 가보기를 권한다. 양동마을 문화관(문의 054-779-6127)도 빼놓으면 아쉽다. 시간을 맞추면 양동마을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해설사의 안내도 받을 수 있다. 경주시민과 경로우대자, 보호자와 함께 온 7세 미만 어린이와 국가유공자는 무료 입장이다.대릉원 입구와 첨성대 앞 도로변엔 삼륜 전동차, 소형 오토바이, 자전거를 빌려주는 가게가 많다. 5천~2만 원 정도를 지불하면 바람을 가르면서 교촌마을, 월정교, 국립경주박물관, 동궁과 월지를 효과적으로 돌아볼 수 있다.좋은 목재로 만든 교촌마을 초가집에선 은은한 향기가 풍겨올 듯하다. 경주 최 부자 가문이 지향했던 ‘가진 자의 긍휼’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조성된 한옥마을이 바로 교촌. 중요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 최씨 고택(古宅)과 경주교동법주 등이 볼거리. 이외에도 깔끔하게 정리된 마을 거리엔 아기자기한 찻집과 맛있는 간식을 판매하는 가게가 방문자의 발길을 붙잡는다.거기서 5분만 달리면 월정교가 나온다. 옛 이야기 속 원효대사가 요석궁을 가기 위해 건넜다는 다리다. 이어지는 요석공주와의 ‘러브 스토리’는 이미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배웠을 터. 복원된 월정교는 웅장하고 세련됐다.다시 자전거와 삼륜 전동차가 한여름 더위를 꺾어줄 바람을 일으키며 달린다. 귓가를 스치는 성하(盛夏)의 향기가 달콤했다.이때 오른편에 나타나는 게 국립경주박물관. 역사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그냥 지나치기엔 뭔가 아쉽다. 박물관 내부엔 국보와 보물이 적지 않다. ‘숨은그림찾기’ 하듯 탐험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박물관을 나와 조심스럽게 길을 건너 좌측으로 3분만 가면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에 이른다. 통일신라시대 왕자가 머물렀던 근사한 건물이다. 당시의 신라 귀족들은 월지를 바라보며 연회와 유흥을 즐겼다. 입장료 3천 원이 아깝지 않은 공간.이제 빌린 삼륜 전동차와 자전거를 반납할 시간이 가깝다. 하지만, ‘신라 천년의 역사 속을 달렸다’는 인증샷을 남기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동궁과 월지를 나와 대여점에 이르기 전에 소박한 연꽃을 만날 수 있다. 그곳에서 오래오래 간직할 추억이 될 사진 한 장 찰칵!사실 경주는 거리 전체가 ‘유적지’와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대하게 솟은 왕릉들을 보면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1천500여 년 전 조상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대릉원은 자그마치 3만8천 평의 땅에 23기의 능(陵)이 불규칙하게 들어서 신비롭고도 기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대릉원을 산책한다는 건 ‘992년 신라의 역사를 돌아본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현재는 진분홍 색채로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백일홍이 만개했다. 재론의 여지가 없다. 아름답다.심장을 흐르는 피가 뜨거운 청춘 남녀들은 더위도 잊고 손을 꼭 잡은 채 산재한 왕릉 사이를 걷는다. 가끔은 예쁜 한복을 차려 입은 여고생들도 눈에 띈다. 물론 이곳에도 외국인 여행자들이 적지 않다.대릉원을 나와 길을 건너면 첨성대가 버티고 서있다. 대릉원과 첨성대는 지척에 있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축조된 첨성대는 국보 제31호. 상상조차 하기 힘든 까마득한 시절에 하늘의 별과 달을 관찰하는 건축물을 만든 신라인들의 공학 기술이 놀랍다.첨성대 주변 너른 벌판엔 갖가지 꽃들이 경주를 찾은 이들을 저마다의 몸짓으로 유혹한다. 당연지사 ‘인생 사진’을 찍기엔 최고의 장소. 따가운 햇살은 고맙게도 ‘잘 찍힌 사진’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예약을 하면 귀여운 동물 모양의 캐릭터를 형상화한 조그만 관람차를 타고 첨성대 인근을 찬찬히 살펴볼 수도 있다.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엄마와 아빠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소리 내 웃는 걸 자주 볼 수 있었다.한국 고대 역사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라면 대릉원 내에 있는 천마총을 찾아보는 게 필수 코스다. 금관과 벽화, 신라시대 토기 등을 꼼꼼하게 살피는 ‘학구파’들이 ‘연애파’ 못지않게 많았다.검은색 교복을 입고 양은 도시락통을 달그락거리며 학교에 다닌 중년들이라면 경주의 골목길이 향수를 자극할 것이 분명하다.대릉원을 등지고 왼편으로 100m 정도만 가면 호젓한 골목이 손짓해 부른다. 정원 가득 오렌지빛 접시꽃이 반기는 오래된 집과 울퉁불퉁한 좁은 길이 잠시나마 ‘타임머신’을 탄 듯한 황홀감을 선물한다.매력적인 풍경을 보며 자동차 운전을 즐기려면 보문호를 끼고 경주 외곽으로 달려보기를 권한다.문무왕릉이 있는 감포에서 포항 구룡포를 잇는 해안도로 드라이브도 많은 이들이 추천하는 코스다. 구불구불 모퉁이를 돌면 기막힌 절경의 바닷가 마을이 손짓하고, 조금 더 가다보면 울울창창 시원스런 숲이 “어서 오라”고 인사를 건넨다.신라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감포와 경주, 장기와 경주를 이어준 ‘왕의 길’은 이름부터가 흥미롭다.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지나간 곳이고, 그의 아들인 신문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나라의 우환을 없앨 수 있다는 전설 속 피리)을 찾으러 간 길이기도 하다. 등산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용연폭포까지 3.9km 구간을 이열치열, 땀 흘리며 올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이는 독특해서 잊지 못할 경험이 될 터.기자의 경우 국내 여행이건 국외 여행이건 빼놓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재래시장이다. ‘가장 현실적인 현지 사람들의 냄새’가 가득한 공간이 바로 시장 아닐까.경주의 성동시장(윗시장)과 중앙시장(아랫시장)은 위와 같은 기대에 거의 완벽하게 부응했다. 웃음 섞인 에누리 흥정과 눈과 코가 동시에 행복해지는 저렴한 먹을거리들이 지천이었다.환한 웃음으로 손님들을 반기며 친절하게 길 안내까지 해준 두 시장 상인들이 “경상도 사람들은 딱딱한 말투에 불친절하다”는 세간의 편견을 깨끗이 지워줬다. 언제건 경주에 온다면 또 다시 찾고 싶은 시장들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7-31

슬퍼라. 사육신(死六臣)

1456년 7월 초순,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뚫고 몰골이 꾀죄죄한 두 남자가 포항 장기 땅을 밟았다. 절뚝거리는 다리에다 비에 젖은 괴나리봇짐을 지고 들어서는 그 행색이 한눈에 봐도 유배객이었다. 이름이 박용이(朴龍伊)와 박사평(朴斯枰)이라고 하는 이들은 형제지간이었는데, 능지처참 당한 박중림(朴仲林:박팽년의 아버지)의 조카들이었다. 이들은 모반대역죄의 연좌에 걸려 그해 6월 28일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이래 하루에 80리씩을 걸어서 이제 도착한 것이다.이들이 여기까지 온 비통한 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왕조의 불행한 시작인 계유정난을 알아야하고, 이것과 맞물려 신권(臣權)과 왕권의 갈등이 불러온 단종 복위운동을 살펴봐야 한다.세종의 맏아들 문종은 몸이 약해 재위 2년4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다. 죽기 전 문종은 후사가 걱정이었다. 아버지 세종이 정비(正妃)에서만 8남 2녀, 또 다섯 후궁에서도 10남 2녀의 형제를 두었으니, 이들 중 누군가가 세자를 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좌의정 정분(鄭苯)·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세자가 왕이 되었을 때 보필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문종이 죽고 12세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마저도 이미 3살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측근에서 후원해줄 세력이 없었다. 당연히 아버지의 유지(遺旨)에 따라 원로대신 김종서·황보인 등에 의존하여 정치를 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대신들은 아버지 형제 중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던 수양대군과 상당한 마찰이 있었고, 아버지가 아꼈던 집현전 출신의 젊은 유신(儒臣)들과도 정치적 대립관계에 놓여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수양대군은 집현전 출신 관료, 정치무대에서 소외당한 한명회(韓明澮)같은 하급관리, 그리고 홍달손(洪達孫)을 비롯한 무사(武士)들을 규합하여 일순간 단종을 보좌하던 황보인·김종서 등 대신들 수십 명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해버렸다. 이른바 1453년(단종1) 10월 10일에 일어났던 계유정난이다. 이것은 박팽년을 비롯한 수백 가문에 대한 비극의 서막이었다.권세에 앉은 수양대군은 강력하게 자신에게 맞선 안평대군을 강화로 축출한 뒤 독약을 내려 죽게 하고, 이어 끝까지 단종을 지키려던 금성대군마저 역모죄를 씌워 유배를 보내 버렸다. 친형제들과 원로대신들을 정리한 수양대군은 정난을 일으킨 지 1년8개월 만에 단종을 이름뿐인 상왕(上王)으로 물러 앉히고, 세조로 즉위했다.이제 세종조 말기부터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바라고 갈망해 오던 집현전 출신 유신들도 세조와 함께 자신들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었다. 세조의 정치운영은 이들의 생각과는 전혀 딴판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조는 태조가 건국 초기부터 도입하여 추진한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폐지해버렸다. 이는 최고관부인 의정부가 3정승 합의하에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도록 한 통치체제인데, 이것부터 없앤 것이다. 그 대신 판서가 나랏일을 왕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하는 6조(六曹) 직계제(直啓制)를 실시했다. 신하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국왕이 중심이 되는 전제정치를 지향한 결과였다. 집현전 출신 유신들이 극구 반대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제 정국은 세조의 독주로 진행되었고, 정치운영론을 둘러싼 신권(臣權)과 왕권의 대립은 점점 고조되어만 갔다.이런 갈등은 자연스럽게 단종 복위운동으로 이어졌다. 세조의 정치운영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출신 신하들이 세조를 왕위에서 몰아낼 궁리를 해 냈던 것이다. 이들은 거사일을 1456년(세조2) 음력 6월 1일로 잡았다. 이날은 세조가 창덕궁에서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열기로 한 날이었다. 연회에서 왕의 호위를 맡은 별운검(別雲劍)으로 이쪽편인 유응부, 박쟁을 세워두었다가 행사 중 적당한 시기를 봐서 세조와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별운검을 동반하는 것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한명회가 그날 아침에 갑자기 별운검의 시위를 폐지해버렸다. 이에 암살 계획은 실행 일보 직전에서 수포로 돌아갔다. 이들은 훗날을 기약하고 거사 계획을 미루기로 했다.그런데, 일이 꼬여 버렸다. 모의에 참여했던 성균 사예(司藝) 김질(金礩)이 거사가 실패했다고 판단해 지레 겁을 먹었던 모양이다. 그는 바로 다음 날,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사실을 고백했다. 우찬성(종1품)이었던 정찬손은 사위를 대동하고 곧바로 세조에게 쫓아가 모반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날로 관련자들이 모두 잡혀와 옥사(獄事)가 일어났다.1456년(세조2) 음력 6월 2일에 일어난 이 엄청난 옥사에는 사육신을 비롯한 70여명이 처형됐다. 집현전 학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세조는 집현전을 폐지하고 그 서책들을 예문관으로 옮겼다. 이 사건에 가담한 사람들의 여자 가족들 중에 관공서 노비로 전락한 여성이 172명이고, 공신 집에 끌려가 종이 된 부녀자가 181명이나 됐다.거론된 이들은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가리지 않고 팔과 다리를 수레에 묶어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여덟 차례나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이 가운데 41명이 거열을 당했다. 처형된 이들의 머리는 사흘 동안 거리에 효수(梟首)됐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박쟁, 권자신, 송석동, 윤영손, 이휘가 그들이다. 이후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이 더 밝혀졌는데, 심신, 이유기, 이의영, 이정상, 이지영, 이오, 황선보 등이 그들이다.이날 박팽년은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의 아버지인 박중림까지도 가담했다고 실토를 하고는 결국 형장(刑場)에서 숨을 거뒀다. 이제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심문 도중에 죽은 박팽년과 잡히기 전에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은 유성원과 허조(許慥)에 대해서도 따로 시체를 거열하고 저자에 3일 동안 효수했다. 찢긴 시체들은 모두 처형장인 새남터에 버려졌으나, 생육신 중 한 명인 김시습이 몰래 수습했다는 말이 전해진다.이때 죽음을 당한 여섯 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 부르는데,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이개, 유성원의 여섯 사람이다. 최근에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사육신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일었는데,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김문기도 사육신과 같은 충신이었음을 인정했다. 그래서 이제는 사칠신(死七臣)이라 불러야 맞다.반역 연좌인에 대한 처벌도 있었다. 사건에 참여한 이들의 친자식들은 모두 목을 매어 죽이는 교형에 처해졌다. 그 외에 어머니와 딸, 처와 첩, 할아버지와 손자, 형제자매 뿐 아니라 아들의 처와 첩들은 국경 부근 작은 고을의 노비로 보내졌다.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들은 원방잔읍(遠方殘邑:쇠하여 황폐해진 고을)으로 보내 노비로 삼았다.박용이와 박사평은 난에 참여한 박중림 형제의 자식들이었으므로, 원방잔읍인 경상도 장기로 보내졌다. 한양에서 보면 그곳에서 700여 리 떨어진 장기가 바로 ‘먼 지방의 쇠잔한 고을’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사건을 주도한 박팽년의 가문은, 세조로부터 다른 어느 가담자보다도 철저하게 응징을 당했다. 극형에 처해진 사람도 가장 많았고, 여종이 된 처와 첩도 가장 많았으며, 몰수된 전답도 제일 많았다. 그 이유는 부자(父子)가 모두 가담되었을 뿐 아니라, 잡혀온 박팽년이 세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세조를 왕이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박팽년은 1447년 과거에 급제하고, 1453년(단종1) 우승지를 거쳐 1454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집현전 학사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한 적도 있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자신을 ‘신하(臣)’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사건 당시에는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도 참여했다.박중림 역시 1427년 과거에 급제하여 1453년 예문관대제학·공조판서 겸 집현전제학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대사헌과 형조판서로 있을 때에는 국법 집행이 엄정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왕위를 빼앗아 차지하자 크게 통분해 벼슬을 내놓겠다는 뜻을 밝히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에 세조는 그에게 이조판서를 주어 회유했으나 끝내 사양했다. 이듬해 아들 팽년과 집현전 제자들이 단종 복위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가담했다가 거열형을 당한 것이다.분노한 세조는 박팽년의 가족들 중 남자는 젖먹이까지 모두 죽여 3대를 멸해버렸다. 이때 죽임을 당한 형제들은 박인년(朴引年), 박기년(朴耆年), 박대년(朴大年), 박영년(朴永年)이고, 아들들은 박헌(朴憲),박순(朴詢),박분(朴苯)이다. 이는 친자식이라도 15세 이하면 죽이지 않고 종으로 삼는다는 율문의 규정을 넘어서는 가혹한 처사였다.박팽년, 그리고 그의 형제들 아내와 딸들에게도 불행이 닥쳐왔다. 모두 임금의 종친과 대신들의 집 노비로 보내져야 하는 기구하고도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던 것이다. 특히 박팽년의 아내 옥금(玉今)은 한때 팽년과 집현전 동료 학사였던 영의정 정인지에게 종으로 보내졌다. 세조 편에 섰던 정인지는 이 사건으로 옥금 뿐 아니라 김종서의 며느리와 딸, 손녀들까지도 종으로 하사받았다. 팽년의 제수(弟嫂) 내은비(內隱非)는 태종의 사위 권공(權恭)에게, 또 다른 제수 무작지(無作只)는 익현군(翼峴君) 이곤(李璭)에게, 형수 정수(貞守)는 강성군(江城君) 봉석주(奉石柱)에게 각각 노비로 보내졌다. 팽년의 큰며느리 경비(敬非)와 둘째며느리 옥덕(玉德)은 나란히 이조 참판 구치관(具致寬)의 노비가 되었다. 박팽년 일가의 토지도 모두 분할되어 왕실종친과 대신들에게 나누어졌다. 경기도 과천 금사라기 땅은 황희 정승의 아들인 황수신(黃守身)에게 주어졌다.이처럼 집안이 풍비박산된 채 장기로 온 박용이와 박사평은 잠시 관노로 있다가 ‘난신(亂臣)에 연좌된 사람 가운데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은 안치(安置)하라’는 왕의 지시에 따라 곧 관노는 면하였지만, 12년을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468년 9월 6일에야 방면되었다.역신·난신으로 규정된 사육신에 대한 신원(伸冤)은 사건이 발생한 지 235년이 지난 1691년(숙종17)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논란들이 일었지만, 충신을 역적으로 둔갑시킨 채 역사에 그대로 둘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렵게 명예가 회복된 이후 이들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높이 추앙받는 충절의 상징으로 내세워졌다.외로운 유배의 땅에 버려진 듯 내팽개쳐졌던 박팽년의 가족들, 그들은 ‘바닷가에 쇠하고 황폐한 고을’로 여겼던 이곳 사람들에게 ‘불사이군(不事二君)’이 어떤 것인지를 본보기로 남겨놓고 떠나갔다./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7-30

“거칠고 황량한 돌로미티, 그러나 그 안은 아름답고 포근했다”

6월30일, 트레킹 4일차가 시작된다. 돌로미티산군(山群)중 최고봉인 ‘마르몰라다(Marmolada. 3천343m)’를 가까이서 조망하는 일정이라 다소 흥분도 되지만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접근하기에 그리 힘들이지 않아도 될 듯하다. 어렵기는 ‘콜디로시(Col di Rossi. 2천349m)’에서 ‘페다이아호수(Lago di Fedaia. 2천49m)’까지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돌로미티산군이 워낙 방대하고 넓은 지역(제주도 3배 면적)이라 트레킹 코스도 여러 갈래로 나눠지고 난이도에 따라 접근방식이 다르다. 우리가 트레킹하는 하이라이트코스는 동, 서 횡단루트이며 ‘알타비아(Alta Via)’루트는 남북 종단 코스로 10개 있으며 숫자가 높을수록 난이도가 높고 전문산악장비가 필요로 하는 트레킹이다.‘알타비아’는 영어로 ‘하이루트(High Route), 우리말로 ‘높은 길’이란 뜻이며 대표적인 클래식 루트가 ‘알타비아1’이다. 페다이아호수로 가는 길은 ‘알타비아2’코스로 중간지점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마지막 부분이 급경사라 조심해야 할 곳이 여럿 있다.  ‘프레달로라(Fredarola. 2천399m)’ 산장까지는 걷기가 편하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한다. 길게 뻗어 있는 능선허리를 따라 걷는 비탈면에 눈사태를 방지하는 목책과 눈을 불어 내리는 시설이 군데군데 있어 겨울에는 엄청난 눈이 내리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수까지의 급경사는 미끄럽고 위험해 모두들 조심스럽게 걷는다. 잠깐 휴식할 수 있는 큰 나무 아래서 건너 보이는 ‘마르몰라다’ 정상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고 주변 산군들이 서로 경쟁하듯 하늘을 찌르고 있다.인공호수인 페다이아호수 산장에서 점심을 먹고 ‘마르몰라다’를 오르기 위해 ‘말가 치아펠라(Malga Ciapela)’까지 이동한다. ‘말가(1천450m)’에서 세 번을 갈아타고 고도를 1천815m나 높이는 케이블카로 ‘마도나(Madona,3천265m)’까지 숨가쁘게 오른다. 돌로미티 최정상 가는 길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이 케이블카가 보여준다.중간역 ‘안터모자(Antermoja 2천350m)’에는 케이블카 건설 역사를 알리는 박물관도 있고 마리아상을 모셔놓은 동굴도 있어 케이블카 하나로도 볼거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는 발상이 대단하다. 케이블카 첫 출발지에서는 날씨가 쾌청했는데 올라올수록 구름에 가리고 전망대에서도 앞이 안보일 정도로 흐려졌다.구름 사이로 들어나는 암봉들의 모습이 더 신비롭고 고도를 실감나게 한다. 하얗게 눈 덮인 능선을 조심스레 올라 ‘마르몰라다’와 함께 서 있는 ‘푼타로카(Punta Rocca, 3천310m)’까지 올랐다. ‘마르몰라다’를 오르려면 전문장비를 착용하고 올라야 되기 때문에  여기서 만족해야만 한다.내려올 때는 우박이 쏟아지고 기상이 좋지 않아 한동안 케이블카가 중단되기도 했다. 역시 정상은 그저 내어주는 것은 아님을 또 한 번 깨달았다. 멋진 ‘마르몰라다’설경을 가슴에 묻고 돌로미티 최대 산악마을 ‘코르티나 담페로(Cortina Dampezzo. 1천224m)’에 도착했다.1956년 제7회 동계올림픽이 열린 인구 6천명 산악도시가 스키시즌에는 5만명의 관광객이 몰리는 이탈리아 최고의 스키 성지(聖地)로 70년 만인 2026년 밀라노와 함께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어 온 시가지가 축제분위기에 들떠 있는 듯하다.프랑스 ‘샤모니(Chamonix)’, 스위스 ‘체르마트(Zermatt)’와 더불어 알프스 대표적인 휴양도시로 배우 ‘오드리 헵번’이 자주 찾던 곳이며 ‘헤밍웨이’가 집필활동을 했던 곳이기도 하며 영화 촬영지(007시리즈, ‘클리프 행어’ 등)로도 유명하다고 한다.숙소인 ‘빌라블루(Vill Blue)’호텔은 담페초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어 전망이 좋다. 시내 중심가까지는 셔틀택시를 이용하여 갈 수 있지만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다.7월1일, 트레킹 5일차 날이다. 돌로미티 최고의 전망대라 불리는 ‘라가주오이(Lagazuoi.2천752m)’산장으로 가기 위해 ‘파소 팔자레고(Passo Falzarego. 2천99m)’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다.‘라가주오이’에서 독보적으로 솟아 있는 ‘토파네(Tofane. 3천244m)’는 제1차 세계대전의 현장으로 많은 흔적이 남아 있고 지금은 암벽등반의 메카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멀리 보이는 ‘톱날 능선’‘크로다 다 라고(Croda da Lago. 2천716m)’, 산(山)자 모양의 ‘펠모(pelmo.3천169m)’, 거벽 ‘시베타(Civetta. 3천220m)’ 등 돌로미티 바위산들이 겹겹이 쌓여있다.라가주오이에 있는 제1차 세계대전의 흔적으로 참호와 동굴 그리고 포진지 등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전쟁의 상흔(傷痕)을 되살리고 있다. 라가주오이 정상에는 전쟁 당시 죽은 오스트리아군(軍) 영령들을 위로하는 그리스도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 숙연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라가주오이를 내려와 ‘친퀘토리(Cinque Torri. 2천366m)’로 가기 위해 야생화 들판과 침엽수림 속으로 난 길을 1시간 여 걸어간다. 리프트로 왕복하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와 가동이 중단되어 승강장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기다린다.가까스로 운행이 재개되어 ‘친퀘토리’에 올랐다.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맞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이탈리아군 참호와 진지, 지하벙커, 동굴 포문 등 당시의 흔적들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 ‘친퀘토리’다.다섯 개의 거대한 바위봉우리들로 이뤄진 ‘친퀘토리’를 여기서는 ‘다섯 개의 탑’란 뜻으로 ‘5토리(5 Torri)‘라 부른다.‘라가주오이’와 ‘토파네’의 오스트리아군(軍)과 ‘친퀘토리’의 이탈리아군(軍)이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현장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 한 번 느껴본다. 참호(Trench)에서 군인들이 입었던 레인코트가 ‘트랜치 코트(Trench Coat)’로 전 세계인들이 즐겨 입는 옷이 되었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돌로미티의 장엄한 암봉들이 간직한 아픈 역사를 다시 한 번 새겨본다.오늘은 담페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 서둘러 돌아와 ‘담페초’ 시내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70년 만에 다시 동계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도시답게 활력이 넘친다. 대형마트에 들러 쇼핑도 하며 한때를 보냈다.이것저것 살피던 박 부회장이 어렵게 쌀(Rice)을 찾아냈다. 돼지고기와 양상치까지 구입하여 저녁만찬으로 김치찌개를 만들어 드디어 밥맛(?)을 보았다. 가지고 온 무선 멀티포트를 이용하여 기발한 방법(?)으로 밥도 하고 찌개도 만든 박 부회장에게 무한감사를 드리고 싶다.사전 양해를 구해 맛있는 우리식 요리를 만들어 먹은 일행들이 흡족한 마음으로 ‘담페초’의 밤을 보낸다.트레킹 마지막 일정(6일차)이 남은 7월2일, 쾌청한 하늘 만큼이나 기분이 상쾌하고 어쩌면 아쉬울 것 같은 묘한 기분으로 ‘빌라블루’호텔을 나선다. 오늘 코스는 돌로미티 절경의 백미(白眉)로 알려진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Trecime de Lavaredo)’를 트레킹하는 가장 핫(Hot)한 코스라 엄청 기대가 된다. ‘트레치메’산군으로 들어서기 전 아름다운 호수 ‘미주리나(Misurina. 1천752m)’를 감상한다.아침햇살을 받은 코발트색 호수가 은빛 별무리를 한가득 담고 호숫가 침엽수림과 병풍처럼 둘러싸인 바위산들이 캐나다 로키(Locky)에 온듯하다. 며칠을 거칠고 황량한 바위산들만 보다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니 딴 세상에 온 것처럼 느껴진다.  돌로미티에서는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는 ‘트레치메 코스’라 느낌이 달라지는 듯하다. 굴곡진 산악도로를 타고 첫 시작점인 ‘아우론조(Auronzo. 2천320m)’ 산장 주차장에 닿았다.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풍광의 돌로미티에서 단연 으뜸인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는 ‘가장 큰 봉우리’라는 뜻의 ‘치마 그란데(Cima Grande. 2천999m)’,‘작은 봉우리’라는 ‘치마 피콜(Cima Piccola. 2천857m)’ 그리고 ‘서쪽 봉우리’라는 뜻의 ‘치마 오베스트(Cima Ovest. 2천973m)’ 등 세 봉우리를 중심으로 5시간 정도 소요되는 돌로미티에서 가장 유명한 트레킹 코스 중 하나다.석양에 만들어지는 그림자와 황금빛 바위봉우리가 신(神)이 빚어놓은 최상의 균형미로 ‘돌로미티의 심장’으로 불러지는 풍광을 바라보며 한 잔의 맥주를 들이킬 수 있는 낭만적인 ‘로카텔리’산장이 있어 트레커들에게는 가장 추억에 남는 장면이라고 한다. 오늘 그 낭만을 즐기러 간다.‘아우론조’산장에서 시계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단체로 트레킹 온 우리나라 트레킹팀을 여기서 만났다. 우리 하고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 황량한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도 1천미터가 넘는 거대한 직벽 ‘트레치메’가 우리와 동행한다. 그림 같은 작은 산장 ‘랑가름(Langglm·2천283m)’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또 다시 트레치메를 곁에 두고 산허리 길로 걸어간다.너른 개활지에는 야생화가 만발 하였고 흘러내린  백운석 돌맹이로 무슨 의미의 글인지 군데군데 큼지막하게 새겨 놓은 게 이색적이다. 내리막은 좋았지만 오르막은 죽을 맛이다. 그래도 최상의 풍광 앞에 넋 나간 일행들이 연신 찍어대는 카메라 셔터소리가 정겹다.빤히 보이는 언덕에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를 가장 아름다운 각도에서 멋지게 조망 할 수 있다는 유명한 ‘로카텔리(Locatelli. 2천405m)‘산장이 있다. 1903년 오스트리아의 유명 산악인 ‘제프 이너코플러(Sepp Innerkofler)’가 세운 기록물과 사진, 동판 등이 산장 여러 곳에 붙어 있다.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산악부대를 이끌었던 그가 절벽을 오르다 이탈리아군이 던진 돌에 맞아 전사하자 크게 사기가 떨어진 오스트리아군이 참패를 당하고 돌로미티를 이탈리아에 내어줬다는 슬픈 역사도 있다. ‘로카텔리’는 이름값을 제대로 한다. 식사와 함께 맥주도 마시며 산악인의 사랑방다운 산장에서 세계의 트레커들과 낭만에 젖어본다. 석양에 물든 ‘트레치메’의 황홀한 아름다움을 보고 싶은데 너무 아쉽다. 어느 여행작가가 ‘트레치메’를 ‘악마가 사랑한 천국’이라고 쓴 글이 생각난다. ‘돌로미티(Dolomite)’! 악마가 사랑한 왕국처럼 거칠고 황량하지만 그러나 그 속은 진정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내려 온 일행들이 환한 웃음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6일간의 이탈리아 알프스 돌로미티 트레킹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019 경북산악연맹 이탈리아 돌로미티 트레킹’을 위해 함께한 대원들과 경북산악연맹 임원, 수고를 아끼지 않은 혜초여행사 이진영 상무에게 특별히 감사드린다.끝/김유복 경북산악연맹회장

2019-07-29

맛·분위기 ‘엄지 척’… 영일만검은돌장어 본고장이 들썩이다

“검은돌장어의 고향인 동해면에서 열린 축제여서 더욱 뜻 깊습니다.”포항시 동해면 도구해수욕장에서 열린 포항 대표 먹거리 축제 ‘제6회 영일만검은돌장어 축제’가 성황을 이루며 사흘간의 행사를 마무리했다.포항시 주최, 경북매일신문 주관, 경북도·경북도의회·포항시의회·포항수산업협동조합이 후원한 이번 축제는 지난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하루평균 5천여명에 이르는 피서객들과 동해면민, 관광객이 함께 어울려 ‘검은돌장어’에 대한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특히, 기존 축제 장소였던 영일대해수욕장에서 벗어나 영일만검은돌장어가 생산되는 본 고장인 도구해수욕장으로 옮긴 첫 시도가 훌륭한 성과를 거두며, 동해면 지역민들은 지역 이미지 상승과 경제 효과 등에 큰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27일 열린 개회식에서 김정재 국회의원은 “동해면 도구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가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것에 의미가 크다”며 “입소문 많이 내주셔서 동해안과 검은돌장어도 함께 노력해 인기아이템으로 만들자”고 이번 축제에 의미를 부여했다.박명재 국회의원도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환영하고 감사드린다. 돌장어 많이 드시고 동해와 포항 발전을 위해 힘내자”고 말했다.최연우 포항동해면향토청년회 회장 역시 “올해 축제는 검은돌장어의 원산지와 보다 가까운 지역에서 행사를 열어야 한다는 정통성에 따른 것”이라며 “원칙을 고수한 이번 시도가 되려 큰 성공을 거둬 기뻤고 경북매일신문도 지원을 아끼지 않아 많은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다.행사장을 방문했던 관광객들도 검은돌장어의 맛에 호평을 쏟아냈다.울진군 후포면에서 온 정동원(60)씨는 “검은돌장어가 부드럽고 맛이 좋다”며 “크기가 작은데도 불구하고 식감이 좋다”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검은돌장어의 저렴한 가격에도 반했다는 반응도 많았다. 포항시 양학동에서 온 나기엽(68)씨는 “동해안 지역은 바닷가 축제가 많은 편인데 가격이 비싸서 거부감이 들 때도 있다”며 “하지만 돌장어는 일반장어가 한 접시에 4만원 하는데 비해, 1만5천원으로 저렴해서 앞으로도 돌장어를 따로 사서 계속 먹을 의향이 있다”고 호평했다.단순한 먹거리 판매 외에도 축제 기간 진행됐던 각종 부대 행사 역시 방문객들의 흥을 돋웠다. 20여개가 넘는 돌장어 판매부스와 함께 품바 공연, 지역가수 공연, 시민노래자랑, 후릿그물체험, 색소폰 투유앙상블 연주 등의 행사는 축제를 더욱 다채롭게 만들었다.검은돌장어를 누가 더 길게 발음하는지를 겨루는 깜짝 이벤트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70대 어르신이 무려 92초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당당히 1등을 차지해 주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어르신은 비결로 ‘검은돌장어’를 꼽기도 했다.다양한 메뉴도 큰 관심을 끌었다. 방문객들은 장어구이, 장어탕, 장어 강정과 같은 기존에 익숙했던 요리에 더해 퓨전스타일인 칠리장어탕수육과 장어자장면 등에도 관심을 보였다. 장어 요리 외에도 멍게회, 멍게 국수, 멍게비빔밥과 같은 지역 수산물을 이용한 음식과 무더운 여름을 대비한 전통 차, 팥빙수, 꼬치구이도 인기를 끌었다.최윤채 경북매일신문 사장은 개회사에서 “축제에 많은 분이 방문해주셔서 감사드린다”며 “이번 축제가 영일대에서 도구로 옮겨서 열렸는데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고, 행사가 오히려 더 성공적으로 진행돼 기쁘다”고 참석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이어 이강덕 포항시장은 “동해안에 돌장어는 물론이고 조개도 돌아오고 있다. 동해안 지역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자”고 말했고, 서재원 포항시의회 의장은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를 제공하는 이번 축제가 새로운 지역 발전 계기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고 축하했다.한편, 임학진 포항수협 조합장은 본지 최윤채 사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며 그간 축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준 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달했다./황영우·이시라기자사진 이용선기자

2019-07-28

올여름엔 ‘역사’와 ‘체험’이 공존하는 고령으로

지루하게 반복되는 폭염과 폭우 속에서도 손꼽아 기다리던 여름 휴가철이 다가왔다. 정신없이 달려온 2019년. 그 와중에 ‘달콤한 쉼표’를 찍는 시간이 선물처럼 주어진 것이다. 이 시기가 되면 아이들을 가진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민이 많아진다. “어떤 곳에서 휴가를 보내야 우리 애들이 재미와 의미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을까?”고령군은 대가야의 역사 유적과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갖춘 농촌마을이 공존하는 관광지다. 지산동 고분군을 거닐면서 옛 사람들의 행적을 떠올려 보고, 박물관에서 귀한 유물과 만나는 것은 아이들에게 유의미한 경험이 될 것이 분명하다. 어른들은 수목원과 자연휴양림에서 편안한 휴식을 즐기며 다시 일상을 살아낼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가족이 함께 한 각종 농촌 체험은 아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터.휴가지 선택을 앞둔 독자들을 위해 흥미로운 역사 공부와 힐링(Healing), 각종 체험이 준비된 고령을 둘러봤다.◇ 주산의 보물 지산동 고분군지산동 고분군은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가야시대 최대의 고분군. 대가야읍을 감싸는 주산의 남동쪽 능선 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인 지산동 44·45호분 등을 포함한 크고 작은 700여 기의 고분이 솟아 있다. 대가야 양식의 토기와 철기, 말갖춤, 금관과 금동관, 장신구 등의 유물이 출토됐고, 이것들은 대략 5∼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최근 발견된 ‘토제 방울’은 건국신화가 유물에 투영된 최초의 사례다. 지산동 고분군을 비롯한 ‘가야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니, 가야사는 물론 한국 고대사 연구의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학계는 기대하고 있다.◇ 대가야의 역사와 만나는 대가야박물관대가야읍에 자리한 대가야박물관은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등으로 나눠져 있다. 상설전시실은 대가야 및 고령 지역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문화에 대한 설명과 유물을 전시했고, 기획전시실은 연간 1∼2회 특정 주제를 설정해 기획전을 개최한다.어린이 체험학습실은 대가야 토기 퍼즐, 탁본 및 인쇄, 민속품 체험 등을 통해 전통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박물관과 연계된 왕릉전시관은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동 44호분의 내부를 원래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관람객들은 실물 크기로 복원된 44호분 속으로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 방식, 매장 형태, 부장품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대가야박물관 전시실은 현재 개편 작업으로 휴관 중이다. 하지만, 어린이 체험교실과 왕릉전시관은 이용이 가능하다.◇ 가야금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우륵박물관대가야읍 가야금길엔 가야금을 창제한 악성 우륵과 관련된 자료를 발굴·수집·보존·전시하는 우륵박물관이 있다. “우륵과 가야금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건립한 테마박물관”이라는 게 고령군청의 설명이다. 학생들이 우리 고유 악기인 가야금과 창시자인 우륵을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살아 있는 교육장의 역할을 지향한다. 성인들에겐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전통 음악의 향기를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내부엔 우륵의 생애와 가야금의 기원에 대한 영상과 그래픽이 준비돼 있다. 가야금, 아쟁, 해금 등 전통 현악기도 전시하고 있다. 악기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코너도 마련해 ‘학습’과 ‘관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효과를 보고 있다.우륵국악기연구원에서는 매년 5월에서 10월 사이에 ‘고령 가야금 가족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때가 되면 가족 단위로 60개 팀이 참여해, 가야금 제작과 연주를 체험하는 기회를 가진다.◇ 찬란한 문화 현장 확인하는 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는 대가야의 도읍지로 토기와 철기, 가야금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운 고대 역사를 주제로 조성된 관광지다. 신비한 나라 대가야 역사문화체험, 대가야 탐방숲길, 대가야 시네마 등이 들어서 있고, 통나무로 지은 왕가마을펜션과 세미나실, 인빈관, 캠핑장 등이 함께 자리했다. 이곳에선 다양한 문화 활동을 즐길 수 있다 여름 휴가철엔 어린이 물놀이장을 개장해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물놀이장은 오전 10시에 문을 열어 오후 4시 30분까지 운영한다. 특히 대가야농촌체험특구는 30여 종의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고, 농기구 전시관과 원두막이 설치돼 어른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아이들 사이에선 고상가옥 체험도 인기가 높다.◇ 가야 시대 사람으로 살아보는 대가야생활촌대가야읍 고아리 일원의 대가야생활촌은 ‘경북 3대 문화권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돼 지난 4월 개장했다. 이곳엔 방문객을 1500년 전 대가야 시대로 안내해주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인트로 영상관 ▲대가야 의식주 생활상을 재현한 마을 ▲대가야를 대표하는 철기와 토기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불묏골과 공방촌 ▲전통 나룻배 탑승체험이 가능한 골안 마을 ▲VR 용사체험을 즐길 수 있는 메나릿골 ▲대가야 원정대 일원이 되어 원정선 하지호에 승선할 수 있는 주산성전시관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기와마을과 초가마을로 이루어진 전통한옥 숙박시설 등이 함께 있어 학습 체험은 물론 독특한 형태의 숙박도 가능하다.고령군청에 따르면 “올 여름 처음으로 개장한 물놀이장은 어린이풀, 에어바운드 등 다양한 시설이 설치돼 아이들의 환호성을 부른다”고 한다. 주말에는 ‘워터건 서바이벌 이벤트’도 열린다. 대도시 인근에 위치한 ‘도심 속 피서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것이 고령군청 관계자의 부연이다.◇ 휴양 즐기는 대가야수목원과 미숭산자연휴양림고령군 금산재는 ‘낙동강 유역 산림녹화비’가 건립된 장소다.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산림녹화의 위업을 달성해 낸 조상들의 피땀 어린 발자취가 남은 곳이 ‘산 교육장’으로 불리는 대가야수목원. 이곳엔 수목원 외에도 산림녹화기념관, 수석·분재관, 녹음분수광장 등이 갖추어져 있다. 관광객들은 이곳을 “최고의 힐링 휴양지”라며 엄지손가락을 세운다.낙동강의 관문인 대가야읍 신리마을 인근 미숭산자연휴양림은 산림문화 휴양관 1동과 숲속의 집 2동, 황토집 2동 등을 갖췄다. 친환경적인 자재를 사용한 숙박시설과 산책로, 등산로 등의 편의시설을 고루 갖추고 있어 ‘산림문화 휴양시설’로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해발 300m 높이에 위치해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울창한 숲속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가 일상에 지친 현대인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 준다.◇ 자연을 벗해 가야금 즐기는 낫질신리마을과 가얏고마을낫질신리마을은 옥담, 음지마, 낫골 3개의 부락을 이루고 있으며, 고령 제일의 오지로 오염되지 않은 푸른 산과 맑은 물이 인상적이다. 이런 청정한 자연에서 재배된 무농약 쌀은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는 것이 고령군청의 설명이다.또한 미숭산에서 나오는 산나물과 송이버섯도 유명하다. 낫질신리마을에선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다양한 농촌체험을 즐길 수 있다. 두부 만들기 체험, 벌꿀 채밀 체험, 모내기 체험, 고구마 캐기 체험, 메뚜기 잡기 체험 등이 바로 그것.가얏고마을은 대가야국 가실왕의 명을 받은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제작해 연주한 곳으로 알려졌다.당시 우륵의 가야금 연주가 정정하게 울려 ‘정정골’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12현 가야금의 아름다운 가락이 울려 퍼지는 곳으로 이름 높다.아늑하고 정겨운 환경 속에 만들어진 숙박시설, 체험시설, 문화관이 인기다. 가야금 연주, 미니가야금 만들기 등 문화체험과 더불어 딸기 따기, 밤 줍기, 김치 만들기 등의 다양한 체험이 가능해 가족 단위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 ‘전통문화 체험 1번지’로 불리는 개실마을쌍림면 개실1길에 위치한 개실마을은 조선 중기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영남 사림학파의 종조 점필재 김종직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세거지다. 마을의 80%가 한옥이며 김종직의 종택, 사당 등 고택과 점필재와 관련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 한국 전통마을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또한 개실마을은 ‘전국 최우수 체험마을’로 선정돼 3회에 걸쳐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엿 만들기, 떡 만들기, 전통혼례 체험 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맛볼 수 있다. 크고 작은 규모의 한옥에서 숙박도 가능하다.◇ ‘현대식 농촌 휴양’을 즐길 수 있는 예마을덕곡면 덕운로에 조성된 예마을에 들어서면 조형미가 느껴지는 건축물들의 아름다움이 가장 먼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유럽풍의 아늑한 건물과 넓은 잔디광장에 설레고, 동시에 한국 시골마을 특유의 아늑함도 느낄 수 있다.예마을엔 2개의 센터 건물과 숙박시설, 야외물놀이장, 잔디광장, 카라반, 오토캠핑장, 체험장, 마방 등이 고루 갖춰져 있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의 탄성도 부른다. 이곳 가족형 리조트에선 계절별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전병휴·홍성식기자

2019-07-28

삼정리 바다의 분홍빛 낙조는 노포의 애틋한 손맛을 닮았다

제주 사람들은 한라산을 기점으로 섬의 북쪽을 산북, 남쪽을 산남이라 부른다. 나는 산북의 활기참과 산남의 호젓함을 모두 사랑한다. 제주도에 일주일쯤 가게 되면 사흘은 제주시에서, 나머지 사흘은 서귀포시에서 보낸다. 포항에 올 때도 마찬가지다. 제주도처럼 북쪽과 남쪽이 서로 다른 두 매력을 뽐내는 여행지가 바로 포항이다. 포항은 북구와 남구로 나뉜다. 북구에 죽도시장과 영일대해수욕장이 있다면 남구엔 구룡포와 호미곶이 있다. 어제는 북구에서 보냈으니 오늘은 남구로 가야겠다. 포항에 온 여행객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구룡포로 가는 길엔 언제나 설렌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바다’라는 전설도 가슴 뛰게 하지만, 내게 구룡포는 아홉 가지의 보물이 있는 바다다. 과메기, 볼락, 대게, 문어, 모리국수, 찐빵, 삼정해수욕장, 근대문화역사거리, 해돋이가 그 아홉 가지 보물이다. 겨울에만 낚시하러 번질나게 다녔지 여름 구룡포는 처음이다. 아홉 가지 보물 중 비록 과메기와 대게는 제철이 아니라서 못 만나겠지만, 나머지 일곱 개의 귀중한 맛과 멋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운제산 동쪽 기슭에 있는 오어사(吾魚寺)에 먼저 들렀다. 북구의 보경사와 함께 포항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보경사에 비해 규모는 작아도 원효대사와 고승 혜공의 ‘여시오어(汝屍吾魚)’, 즉 “너는 똥을 누고 나는 물고기를 누었다”는 화두로 잘 알려졌다. 운제산 계곡에서 수행하던 원효와 혜공이 각자 물고기를 한 마리씩 삼킨 다음 대변을 누었다. 조금은 지저분한 이 일화는 삼국유사에 쓰여 있다. 누구의 것인지 법력 좋은 대변이 산 물고기가 되어 활기차게 여울을 헤엄쳐갔는데, 원효와 혜공이 서로 “내 물고기!” 외쳤다고 해서 ‘오어사’가 되었다 한다. 본래 이름은 항사사(恒沙寺),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됐다.초록 잎사귀들이 제법 세차게 부채질을 한다. 오어지 호수변을 따라 오어사로 이어진 길을 걸었다. “똥물고기를 낳은 원효와 혜공은 물이 되어 흘러갔다 처음 배운 물고기의 유영조차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오어사의 연못은 장엄하게 예뻤으니까”(이소연, ‘오어사’)라던 시구가 떠올랐다. 똥 같은 내 번민들도 물이 되어 멀리 멀리 흘러갔으면, 내 마음도 물고기처럼 속박을 벗고 자유롭게 헤엄쳤으면.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오어지 푸른 수면 위에 금빛 윤슬이 와글거리고 있었다.대웅전과 범종루, 배롱나무가 수수하게 아름다운 오어사 경내를 돌아보고는 원효교 출렁다리를 건넜다. 거기서부터 오어지 둘레길이 제대로 펼쳐진다. 7㎞ 둘레의 호수를 한 바퀴 걸으려면 두 시간이 걸린다. 지금은 숨을 쉬면 뱃속에 뜨거운 벌떼가 붕붕거리는 계절, 가을에 걸으면 참 좋겠다. 단풍 바람이 오색 물고기 되어 내 마음 속 여기저기 서늘한 빛을 산란할 테니까.구룡포에 도착하자마자 모리국수 식당부터 찾았다. 50년 넘게 장사를 해온 ‘까꾸네 모리국수’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맛집이다. 주인인 이옥순 씨가 50년 전 구룡포 수협 뒷골목에 판자때기를 얼기설기 덧대어 국숫집을 연 게 ‘까꾸네’의 시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까꿍, 까꿍” 귀여움을 받던 막내딸 별명이 ‘까꾸’여서 까꾸네가 됐다고 한다. 여러 번 가봤는데도 또 어김없이 길을 헤맨다. 미로 같은 골목 몇 개를 헷갈리는 동안 국수 생각은 더 간절해져 침이 잔뜩 고인다. 어렵사리 문을 열었다. 모리국수 한 냄비에 1만 3천원, 양은냄비가 팔팔 끓어오르면 얼큰한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겨울에 먹으면 얼어붙은 마음까지 녹여주지만 여름의 이열치열도 나쁘지 않다.어부들이 어판장에서 팔고 남은 생선으로 ‘잡탕 국수’를 끓인 게 모리국수의 시작이라고 한다. ‘모리’의 어원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뭐가 들어갔는지 ‘모린다’고 해서 모리, 이것저것 ‘모디’ 들어갔다고 해서 모리, 생선 머리가 들어갔다고 해서 모리, 이것저것 ‘몰아’ 넣었다고 해서 모리, ‘빽빽하다’는 뜻의 일본어 발음으로 ‘많다’를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어원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맛있는 음식 앞에선 사유나 이성보다 감각과 본능이 먼저 작동하기 때문이다.매운 국물 잔뜩 머금은 칼국수를 크게 한 젓가락 집어 후루룩 빨아들임과 동시에 아귀 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고난도 기술이다. 칼국수와 아귀 살을 한꺼번에 우물거리는 동안 입 안엔 바다 향기가 가득 번지고, 이마와 목덜미는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풍족하지 않던 시절, 한 냄비의 모리국수를 나눠 먹는 어부들의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을 것이다. 그 열기는 사시사철 반갑고, 국수는 사람을 들뜨게 한다. 옛 시인이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백석, ‘국수’)라고 했을 때, 그렇다. 국수는 즐거운 손님처럼 우리 일상으로 온다. 나는 모리국수를 먹으며 백석의 시를 바꿔 외운다. “이 불그스레하고 부드럽고 칼칼하고 얼큰한 것은 무엇인가”라고.입 안이 뜨겁고 울긋불긋할 때는 달큼한 디저트를 먹어야 진화가 된다. 까꾸네에서 나와 다시 골목 몇 개를 지나 구룡포 시장 뒷길로 가면 장사를 시작한 지 60년도 더 된 ‘철규분식’이 있다. 까꾸네와 마찬가지로 집안 어린아이 이름을 상호로 쓴 것인데, 그것도 60여 년 전 얘기다. ‘철규’는 이 집 주인 할머니 동생, 가게를 처음 열 땐 초등학생이었지만 지금은 칠순을 훌쩍 넘긴 어르신이다.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는 할아버지는 철규 어르신의 매형 되시겠다. 노부부는 오랜 세월 동안 한 자리에서 단팥죽과 찐빵, 그리고 잔치국수를 팔아 왔다. 이제는 입소문도 나고 또 ‘노포(老鋪)’ 식도락이 유행하면서 주말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는 집이 됐다.10분쯤 기다려 자리에 앉았다. 찐빵 여섯 개와 단팥죽 한 그릇을 시켰다. 단돈 5천원. ‘철규’ 어르신의 매형께서 정정한 걸음으로 쟁반을 날라 주셨다. 찐빵 한 입 베어 무는데 느닷없이 뭉클해져 혼났다. 팔순 노인의 손등에 구룡포 바다 물주름이 자글자글한 걸 본 탓이다. 노부부의 뒷모습에 석양이 지는 걸 훔쳐 본 탓이다. 이 집에서는 음식만 먹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을 함께 먹는다. 1952년, 학교를 마치고 온 어린 막내 동생을 위해 국수 삶고 빵 찌고 팥죽 끓이던 그 애틋한 마음이 60년 넘도록 맛의 비법이 됐다. 이 집에서 단팥죽을 먹은 사람은 누구나 ‘철규’가 된다. 얼마나 더 많은 철규들이 이 집을 찾아오게 될까? 아니,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철규가 될 수 있을까? 서둘러 단팥죽을 들이켜고 일어섰다. 미닫이문을 여는데 낡은 도어레일에서 끼익 끽, 기차 멈추는 소리가 났다. 문을 나서자 구룡포는 다시 2019년의 여름이었다.구룡포에 오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미로 같은 골목들을 지나다보면 시간의 타래도 이리저리 뒤엉킨다. 까꾸네와 철규분식 등 노포에서 나와 근대문화역사거리에 이르면 시간이 정말 거꾸로 흐르는 것 같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동해안 황금어장을 노리고 이곳에 항구를 지었는데, 어업의 호황으로 부자가 되자 여관과 술집 등을 열었다. 1945년 패망 직후 일본인들은 떠났지만, 그 흔적은 아직 남아 있다. ‘일본인 가옥거리’로 흔히 알려진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에는 일본인들이 살던 적산가옥과 일본풍의 찻집, 주점, 음식점 등이 늘어서 있다. 특히 ‘고향집’이라는 뜻의 전통 찻집 ‘후루사토야’는 1924년에 지어진 일본식 목조가옥인데, 다도(茶道)와 함께 한복, 기모노, 유카타 등 한국과 일본의 전통의상을 체험해볼 수 있다. 기모노와 유카타를 빌려 입고 1930년대 목조건물들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것은 구룡포를 찾는 젊은 여행객들의 놀이문화가 되었다. 사진 명소로 인기 있는 빨간 우체통 앞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려는 20대들로 붐볐다.근대문화역사거리에서 계단을 오르면 ‘포항구룡포과메기문화관’이 나타난다. 구룡포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이곳에서도 시간 여행은 계속된다. 과메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2016년에 개관한 과메기문화관은 체험관과 영상관, 전시실, 전망대, 카페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어 포항의 새로운 테마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제철이 아니라서 맛볼 수 없을 줄 알았던 과메기를 이곳에서 먹게 될 줄이야. 쪽파와 마늘을 곁들여 김에 싸 초장 찍어 먹는 그 과메기가 아니라 과메기빵, 과메기강정, 훈제과메기, 과메기 바질페스토 등 ‘퓨전 과메기 요리’를 맛보니 그야말로 과메기 맛의 신세계다. 과메기가 이토록 다채로운 변신을 할 수 있다니, 식재료로서 과메기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하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다시 계단을 내려와 구룡포시장에 들렀다. 죽도시장만큼 북적거리진 않지만 여전히 활기차 손님도 신이 난다. 금어기인 대게 대신 홍게 몇 마리와 참문어를 사서는 삼정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삼정 바다의 깨끗한 물빛과 고요함에 반한 게 벌써 몇 해 전이다. 매년 겨울마다 이곳에 와 단골 민박집에서 묵는데, 아침마다 주인 할머니께 얻어 마시는 식혜 한사발이 얼마나 달고 시원한지 모른다. 몸에 불이 붙은 사자가 온 하늘에 불꽃을 흩뿌리는 형상이 서해의 낙조라면 동해의 해거름은 엄지손톱에 든 봉숭아물의 색감을 지녔다. 삼정리 저녁 바다를 거니는 동안 부윰한 분홍빛이 내 마음에 꽃물을 들였다. 차르르르 밀려오는 파도에 가만 귀를 대니 돌아오지 않는 먼 시절, 사랑하는 이가 찬물에 손 씻던 소리가 들렸다.민박집 마루에 문어와 홍게로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구룡포의 아홉 가지 보물 중 볼락과 해돋이만 빼고 다 수집한 하루를 주인 할머니와 함께 알뜰히 자축했다. 볼락과 해돋이는 내일의 몫이다. 호미곶에서 장엄한 일출을 보고, 아직 연안에 볼락이 붙어 있을 양포항으로 가야겠다. 방파제 위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면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가 별처럼 빛날 것이다. 그 별에서 또 하룻밤 세상을 건너갈까 한다.

2019-07-28

‘유상곡수연’의 포석정… “화랑들을 위한 인재 발굴의 장”

국어사전을 펼쳐 ‘풍류도’라는 단어에서 ‘도’를 떼고 ‘풍류(風流)’만을 찾아보면 이렇게 서술되고 있다. “명사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 그렇다면 ‘도(道)’는 어떤 의미일까? 다시 사전을 뒤적여본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명사 종교적으로 깊이 깨친 이치. 또는 그런 경지”.결론적으로 ‘풍류’와 ‘도’라는 두 명사가 합쳐진 ‘풍류도’란 “노는 일의 멋스러움이 세속적 경지를 벗어나 어떤 도저한 깊이에 다다른 경지”가 아닌가.연재 기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시 한 번 말한다. 풍류도는 신라의 엘리트 청년들이었던 화랑의 지도 이념인 동시에 지향점. 그렇기에 이런 추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1천300년 전 화랑들은 수려한 용모와 전장(戰場)에서 물러서지 않는 용맹을 두루 갖췄으며, 노는 것 또한 화끈했다’.국문학자이자 소설가인 홍성암은 “한국인은 예부터 풍류도를 숭상해왔다”고 말한다. 논문 ‘풍류도의 이념과 문학에의 수용 양상’을 통해서다. 논문을 좀 더 읽어보자.“그러나, 풍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정리는 쉽지 않다. 우선 용어에 있어서 풍류도는 화랑도와도 혼용되고 있고, 또 풍월도란 말로도 쓰이는가 하면 문학인의 흥취를 위주로 한 풍류정신과도 혼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풍류를 ‘멋’과 통한다고도 하고 ‘신바람’이라고도 하고 ‘신선(神仙)’이 되는 길이라고도 한다.”풍류도가 고대에는 ‘신앙 체계’였다가, 현재는 문학작품에서의 ‘풍류정신’ 정도로 변용됐다고 진단한 홍성암은 ‘학문적 시스템과는 무관하게 풍류에 대한 관습적 인식은 널리 알려져 있다’고 쓰고 있다. 여기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와 같은 부연을 들려주고 있다.“우리가 어떤 사람을 가리켜 ‘풍류를 안다’라고 말하게 되면 대체로 ‘멋’을 안다는 말이 되고, 멋쟁이를 풍류객이라 한다. 멋이란 흔히 ‘하늘과 통한다’는 말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이는 곧 ‘자연스럽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라의 화랑들은 어디서 어떻게 ‘놀았을까?’그렇다면 풍류도, 혹은 풍류정신이란 사상 체계 아래서 몸과 마음을 수련했던 신라의 화랑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하늘과 통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놀았을까? 이를 추측할 수 있는 고문헌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의미를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현대식 문장으로 바꿔본다. 이렇다.“신라 제23대 법흥왕 원년에 어린 사내들 중 얼굴과 풍채가 단정한 자를 뽑아서 풍월주(風月主·화랑을 달리 이르는 말)라 부르고, 착한 선비들을 구하여 따르는 무리를 만들었다. 이들은 효(孝)와 공손함, 충성과 믿음으로 조직됐다.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이들 중 진짜 인재를 알 수 없음을 걱정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풍월주를 무리 지어 놀게 하는 가운데, 그들의 행동과 예의범절을 유심히 살펴 등용(登用)하고는 했다.”자,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풍류도는 신라사회의 최상급 이데올로기였고, 화랑의 절대다수는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풍류를 제대로 이해하고 익힌 화랑을 찾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 필요했을 터.지켜본 사람들(왕과 대신)과 놀았던 청년들의 신분을 감안할 때 이들이 매운바람 몰아치는 서라벌 공터에서 가악(歌樂)을 즐기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 또한 ‘노는 자리’에 ‘술’이 없었을 리가 없다. 취중(醉中)의 행실은 인간의 됨됨이를 살펴볼 수 있는 긴요한 기회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그렇기에 여기에 부합하는 공간으로 ‘포석정(鮑石亭)’을 지목하는 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추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알다시피 포석정은 경주시 배동에 자리한 정원의 시설물 중 하나다. 돌을 이용해 휘어진 도랑을 타원형으로 만들어 물이 흐르게 했다.◆ 포석정 ‘유상곡수연’의 풍류 속에서 진짜 인재를 찾다경상북도가 간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8권 ‘신라의 건축과 공예’에는 포석정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적혀 있다.“서거정이 쓴 ‘동국통감(東國通鑑)’에 포석정지 근처에 성남이궁(城南離宮·왕의 별궁)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포석정은 이궁에 딸린 시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설치된 정자와 수로를 모두 포함한 이름으로 생각된다. 현재 정자는 없고 수로만 존재한다. 포석정은 다듬은 돌로 축조된 전복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수로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의 울창한 느티나무 숲 속에 있는데,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수로에 술잔을 띄워 흐르게 하고 그 잔이 자기 앞을 지날 때 시를 한 수 지어 읊는 유흥)을 즐겼던 곳이다.”어렵지 않게 그때의 풍경이 그려진다. 왕이 주관하고 다수의 고관(高官)들이 함께 하는 주석(酒席). 높은 벼슬아치의 아들인 화랑 여러 명이 성남이궁 포석정에 모였다. 짙푸른 숲 속에서 들리는 새의 울음소리는 청아하고, 푸른 하늘엔 솜털처럼 부드러운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은 화랑들은 왕이 호명하며 내리는 제 몫의 술잔이 앞에 도착하기 전에 ‘멋진 시 한 편’을 생각해둬야 한다. 화랑들은 마음속으로 똑같은 혼잣말을 했을 것이다. “이번에 왕과 대신들의 눈에 든다면 궁궐로 불려가 높은 벼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술을 마시더라도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주사(酒邪)를 부려서는 안 된다. 나는 풍류도를 배워온 신라의 지식인이 아닌가.”신라시대 포석정에서의 연회(宴會)는 단순히 ‘놀고먹고 마시는 잔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직 임명의 권한을 가진 이들이 어떤 화랑이 ‘노는 일의 멋스러움이 세속적 경지를 벗어나 도저한 깊이에 올라있는 것인지’를 선별해 내는 일종의 테스트가 아니었을까?앞에서 언급한 책에 따르면 포석정은 안쪽 12개, 바깥쪽 24개의 다듬은 돌로 조립됐고, 물이 흘러드는 입수구의 양쪽은 돌 6개, 출수구 꼬리 부분은 4개의 돌로 만들어졌다. 수로의 너비는 31cm, 깊이는 21~23cm, 길이는 대략 22m쯤 된다.1991년엔 술잔이 수로를 한 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도 측정했다. 결과는 약 10분 30초. 그 짧은 시간에 왕과 대신들의 마음을 뒤흔들 시를 떠올려 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술까지 마신 상태가 아닌가…. ‘품성과 재능을 인정받는 화랑’이 된다는 건 이처럼 몹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이런 과정을 통해 ‘풍류도’를 제대로 체화(體化)한 화랑이 가려졌다면 자긍심이 높았을 수밖에 없었을 터. ‘화랑세기(花90CE世記)’는 화랑들이 가졌던 프라이드(Pride)를 이렇게 쓰고 있다.“이전에 선도(仙徒)들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권면하였음으로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선발되었고, 훌륭한 장수와 병졸이 여기에서 나왔으니 화랑의 역사는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좁은 공간을 벗어나 드넓은 명산대천으로의 유람도…‘풍류도의 이념과 문학에의 수용 양상’에서 홍성암은 “공동체적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실천적 이념”이 풍류도라 규정하며, 그 성격을 다음과 추정하고 있다. 이는 화랑도가 지향하는 목표와도 맥이 닿는다.-개인적인 것보다 집단적인 행위를 통해 수련을 쌓는다-사회적 규범으로서 덕성을 함양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산천을 유람하며 심신을 연마한다-노래와 춤으로써 서로 즐긴다-수련 과정에서 능력이 인정되면 나라의 인재로 등용된다홍성암이 요약한 4번째 항목이 ‘젊은 리더를 가려내는 포석정의 연회’를 지칭하고 있다면, 3번째 항목 ‘산천을 유람하며 심신을 연마한다’는 21세기식 문법으론 ‘여행을 통한 자아의 성장’이라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2019년 여름. 수많은 한국의 청년들이 배낭을 메고 먼 곳, 혹은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다. 1천300~1천500년 전 신라의 화랑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관련한 서술이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책 ‘신라를 빛낸 인물들’에 등장한다. 아래와 같다.“실제로 풍류, 즉 화랑도의 유래는 ‘선(仙)’에서 나왔다. ‘선’은 불교 수용 이전부터 신라에서 숭배했던 신격들을 통칭하는 말로 여겨지는데, 삼산오악(三山五岳)을 비롯한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신들이 바로 그 ‘선’에 해당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화랑도는 그 시초부터 명산대천과 밀접한 관련을 지녔던 것이며, 그들의 수련 장소로 전국의 주요 산과 강이 선택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실제로 신라시대 화랑들은 동해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금강산의 풍경과 마주하기도 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지만, 당시의 교통 환경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이라 추정된다.‘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과 감통편(感通篇)엔 요원랑, 예흔랑, 계원, 숙종랑 등이 강원도 통천 일대를 유람한 기록과 진평왕(재위 579∼632) 시대 화랑인 거열랑, 실처랑, 보동랑이 풍악(금강산) 여행을 계획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여기서 우스개 같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단상(斷想) 하나. ‘풍류도’에 기반해 성장한 신라의 청년 화랑들은 문재(文才)와 바른 주도(酒道), 여행을 통한 내적 성장까지 골고루 요구받았다. 결코 만만한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청춘이 왜 이리 버겁고 힘겨운 것이냐”라는 푸념은 당시도 있지 않았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7-25

물 맑은 낙동강의 깊은 맛을 담다

안동 민물매운탕? 의아하게 생각한다. 안동은 낙동강의 상류지역이다. 안동댐, 임하댐이 있다. 물이 맑다. 안동 건진국시 국물의 재료는 은어였다.태백산맥이 동해 가는 길을 막고 있다. 안동 간 고등어가 발달한 이유다. 바다 생선이 귀하니, 민물고기를 잡았다. 댐을 막으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민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내수면 어업 허가’를 주었다. 꾸준히 민물고기를 잡는 이들이 있다. 직접 민물고기를 잡는 이 혹은 이들에게서 공급받는 이들이 크고 작은 민물고기 매운탕 집을 운영한다.‘물고기식당’ ‘거랑애’ ‘왕고집매운탕’ 등이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매운탕 전문점이다.‘물고기식당’에는 은어찜이 돋보인다. 은어조림이다. 10여 종류의 밑반찬들도 탄탄하다. 메뉴 중 ‘피리’는 피라미다. 청국장찌개도 수준급이다. 민물고기 매운탕, 찜을 먹으러 갔다가 청국장찌개에 반하는 이들이 많다.‘거랑애’는 모자가 운영한다. 어머니가 주방을, 안동 민물고기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아들이 실내를 관리한다. 민물고기의 은은한 비린내가 거슬리지 않고 좋다. 법흥교 부근의 대로변에 가게가 있다. 인공조미료는 절제한다.‘왕고집매운탕’은 ‘댐 수몰민’이 운영하는 집이다. 주인은 원래 농부. 농지가 수몰되면서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직접 잡은 자연산만 내놓는다. 조미료도 절제한다. ‘꺾지 도리뱅뱅이’도 가능하다(예약). 안동식 어탕국수도 먹을 수 있다.“국시 없는 제사도 있니껴?”제사상에 국수를 올린다. 외지 사람들은 “제사상에 국수를 놓느냐?”라고 묻겠지만 안동이다. “종가에서는 아직도 국수 제사 모신다.” 인간은 평생 ‘관혼상제’를 거친다.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한다. 돌아가시면 상을 치르고, 매년 제사를 모신다. 제사와 결혼식에는 반드시 귀한 국수를 내놓는다. 밥(메)같이 여긴다고 ‘메국수’라 부른다. 제사에 참석한 손님들께도 국수를 내놓는다. 결혼식 국수도 마찬가지다. “결혼 언제 하느냐?”를 “언제 국수 먹여줄래?”라고 대신 묻는다. 귀한 국수는 결혼식에나 먹을 수 있었다.‘좋은 국수’에 대한 공통된 잣대도 있다. ‘부들부들하게 잘 삶은 국수’다. ‘부들부들’은 적절하게 삶아서 부드러운 식감이면서, 적당히 쫄깃한 것이다. “콩가루를 얼마나 넣느냐?”는 ‘우문’에 대한 ‘현답’은 “쪼매”다. 고명은 얼갈이배추 혹은 배추의 푸른 잎사귀다. 애호박도 사용한다.‘국시’는 건진국시와 제물국시다. 건진국시는 삶은 후 건져서 보관한다. 손님이 오면 육수를 붓고 바로 내놓는다. 흔히 시원한 육수를 더해서 여름용으로 사용한다. 제물국시는 끓는 육수에 국수를 넣은 후, 삶아서 바로 내놓는다. ‘자기 물’에 삶아서 내놓는다고 자기 물, 제물국시다.남문동의 ‘골목안손국수’가 현지인들이 인정하는 안동국시 전문점이다. 일상적으로, 집에서 먹는 국시와 가장 닮았다. 묵밥도 가능하다. 조미료를 절제하고 정성껏 육수를 만든다. 맛? 슴슴하다. 밀가루 냄새가 아주 좋다. ‘옥동손국수’도 대중적으로 인기 있다.안동에는 ‘안동소주 명인(名人)’이 있다. 조옥화 씨와 박재서 씨다. 조옥화 명인은 무형문화재(12호)이자 전통식품명인(20호)이다. 박재서 명인은 전통식품명인(6호)이다. 두 곳 모두 소주 제조 공장과 박물관을 운영 중이다. 소주 만드는 체험도 할 수 있다.안동소주는 증류(蒸溜)주다. 시중의 희석(稀釋)식 소주와는 다르다. 곡물을 발효시킨 막걸리나 청주를 증류하여 만드는 술이다. 재료는 쌀이다. 증류 소주는 대략 60~70% 정도의 알코올 도수를 지닌다. 이 술을 시중에 내놓을 때 45% 정도로 조정한다. 희석식 소주는 타피오카 등을 변성하여 100% 주정을 추출한다. 주정에 물 3배를 더하면 알코올 도수는 25%가 된다. 여기에 각종 감미료, 조미료 등을 더한다. 증류주는 뒤끝에 은은한 곡물의 단맛이 난다.경북 안동은 몽골군의 일본 침공 시, 병참기지 겸 내륙 1차 집결지였다. 아랍권에서 시작된 증류는 몽골 군대에 합류했던 기술직 색목인(色目人)을 통하여 안동 지방에 소개된다. 지금도 안동 노인들은 소주를 ‘아래기’라 부른다. ‘아라크’ ‘아라흐’에서 나온 말이다. 술은 제사를 차리는데 긴요하다. 다른 지방과 달리 제사를 챙기는 안동에 증류 소주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유다.조옥화 명인의 안동소주는 45% 단일 상품만 선보이고 있다. 직접 누룩을 제조한다. 술에서 은은한 누룩 향이 난다. 현재 며느리 배경화 씨와 아들 김연박 씨가 안동소주 제조법 등을 전수하며 공장,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박재서 명인의 안동소주는 아들 박찬관 씨가 제조법, 박물관 운영을 전수하고 있다. 45, 38, 22, 19% 등 다양한 술을 선보이고 있다. 술맛이 깔끔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오래된 소주병 등 각종 자료를 볼 수 있는 박물관과 소주 내리는 체험이 가능하다.두 곳 모두 현장 방문 시, 45% 소주를 무료 시음할 수 있다.편하게 밥 먹을 수 있는 집으로 두 집을 추천한다. ‘안동화련’과 ‘계림식당’이다.‘안동화련’은 ‘농가맛집’이다. 사과와 연잎, 연밥, 연근을 이용한 음식들이 돋보인다. 연잎에 밥을 짓고, 연근을 이용한 음식을 낸다. 연과 사과를 이용한 각종 소스도 좋다. 음식들이 짜지 않다. 인공조미료를 절제하니 밥상을 받는 순간 ‘건강식’이라는 느낌이 든다. 실내도 오밀조밀, 깔끔하다.법흥동의 ‘계림식당’은 현지인들이 찾는, 허름한 외관의 ‘밥집’이다. 냄비 밥이 수준급. 10가지의 밑반찬도 짭조름하다. 소박하지만 정성이 가득하다. 생채 비빔밥도 좋다. 어린 열무와 상추 등을 툭툭 잘라서 넣고, 냄비 밥을 퍼넣은 다음, 된장찌개로 비벼 먹는다. 평범한 ‘집밥’이다. 대단한 음식, 서비스를 기대하면 실망한다.바싹 말린 매운 고추가 눈에 띈다. 보기보다는 맵지 않다. 먹기 좋을 정도로 칼칼하다. 안동찜닭은 간장조림 닭이다. 신선한 닭에 감자, 당면 등을 넣고 간장으로 졸인다. 닭볶음탕과는 다르다. 탕이 아니라 조림이다. 국물이 많지 않다.고추장은 사용하지 않는다. 고추장은 달고 텁텁한 맛이 난다. 칼칼한 매운맛은 툭툭 분지른 마른 고추의 맛이다.시래기나 가래떡을 넣은 찜닭도 있다. 구시장에는 약 30여 곳의 찜닭 전문점이 있다. 가격, 맛은 큰 차이가 없다.‘원조안동찜닭’이 이름 그대로 안동 구시장의 노포다. 바깥에 솥을 걸어두고 연신 ‘주인 아들’이 닭을 조리고 있다. 1980년에 개업했다.안동에서 간 고등어 맛집’을 찾는 것은 어렵다. 안동사람들은, “그기 그거제? 간 고등어가 별다른 게 있니껴?”라고 되묻는다.고등어는 맛이 강하다. 등 푸른 생선이니 잘 상한다. 바닷가에서 소금을 충분히 더한 다음 내륙으로 옮겼다. 혹은 가져온 후, 소금을 더했다. ‘안동 간 고등어’의 시작이다. 간 고등어는 고등어에 소금, 바람, 세월을 더한 것이다. 발효, 숙성의 맛이다.안동사람들에게 간 고등어는 일상이다. 별다른 맛집이 없는 이유다. 식당보다는 가정에서 일상적으로 먹는다. ‘일직식당’은 ‘간 고등어 명인’ 이동삼 씨의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식당이다. ‘간잽이’ 이동삼 명인은 간 고등어를 50년 이상 만졌다. ‘명인’이다. ‘일직식당’의 간 고등어는 얼마쯤 쿰쿰한 발효, 숙성의 맛을 낸다.가 볼만한 카페 ‘396커피컴퍼니’와 ‘땡Q커피’양반고을에 커피집?어색하지만 의외로 안동에는 괜찮은 커피집이 2곳 있다.‘396커피컴퍼니’와 ‘땡Q커피’다.2곳 모두 인테리어가 아주 좋다. 단독 건물에 나무, 벽돌을 이용한 푸근한 모양새다.‘396커피컴퍼니’는 안동 현지사람, 외부 관광객에게 수준급의 커피를 내놓는 집으로 인정받고 있다.‘땡큐(ThanQ)커피’는 커피와 더불어 바질스콘, 당근케이크, 팥빙수 등도 인기 품목이다.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꾸민 앤티크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마치 동남아 휴양지에 온 것 같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07-24

품격의 도시서 맛보는 체험의 묘미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평소 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게 아닐까? 안동엔 관광객들을 위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곳곳에 마련돼 있다. 한지를 뜨고, 고택에서 한복을 입어보고, 과녁을 향해 국궁을 날리고…. 그 ‘체험의 현장’으로 기자가 직접 찾아갔다.수천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장생불사’ 귀물을 만나다한지만들기아무리 오래 살아도 백 년을 넘기지 못하는 게 99%의 인간이다. 다른 생물들의 수명은 어느 정도일까? 주목(朱木)은 “살아서 천 년, 죽어서 다시 천 년을 산다”는 말이 전한다. 이는 주목으로 만들어진 물품의 내구성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이야기.그렇다면 한지는 어떨까. 종이 전문가들은 “잘 만들어진 한지는 1천 년에서 최대 8천 년까지 원상태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한지의 내구성은 장생불사(長生不死)를 넘어서는 귀물(貴物) 수준. 안동시 풍산읍에 위치한 안동한지(회장 이영걸)는 15개쯤 남은 한국의 한지 생산업체 중 가장 큰 곳이다.업체 간부는 닥나무 채취에서 시작해 가마솥에서 찌기, 메밀을 태워 잿물을 만들고 여기에 가공한 닥나무를 넣는 과정, 표백과 티 고르기, 닥나무 반죽 두드리기와 종이 뜨기, 물 빼기와 건조를 거쳐 한 장의 고풍스런 종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안동에서 만들어지는 한지는 이탈리아 학자들이 “유럽 문화재 복원에도 사용 가능한 뛰어난 품질”이라 호평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역시 방한 때 선물 받은 안동한지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 어려운 여건에서도 안동한지 임직원이 자긍심을 가지는 이유다.안동한지에선 한지 제작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한지 뜨기 체험’을 비롯해 닥종이 인형 만들기, 한지 무드등 만들기, 한지 천연 염색 등을 직접 해볼 수 있다. 이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한지 뜨기. 한지 뜨기란 일정 과정을 거쳐 물에 섞여 죽처럼 된 닥나무 반죽을 나무로 된 발 위에 고르게 펴 종이의 형태를 만드는 것. 20~30년 경력의 숙련된 기술자가 돼야 실수 없이 할 수 있다. 하지만, 뜨기를 거쳐 말린 종이가 다소 거칠고 두껍더라도 자신이 만든 ‘한지 한 장’을 가질 수 있다는 흐뭇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 체험 비용도 3천원으로 비교적 저렴하다.전화: 054-858-7007홈페이지: http://andonghanji.com옛 기억 살리고픈 어른도, 꼬마 관광객도 다소곳이…한복체험“당신이 먹는 음식을 알려준다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음식은 개개의 인간을 유추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기에 백번 수긍할 수 있는 문장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취향, 타자와의 관계까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인의 대부분이 한복을 입었다. 하지만 이제는 두루마기, 대님, 저고리, 버선 등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세월의 흐름 속에 지난 시대의 생활문화가 속절없이 잊히고 있는 것. 일단 주위를 돌아보자. 요즘은 명절이나 제삿날에도 한복을 입은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다.안동시 민속촌길에는 몇 채의 예스러운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안동반가(대표 이태숙) 체험장도 거기에 있다. 주요 체험 프로그램 중 하나가 전문 강사의 도움 아래 격식에 맞춰 한복을 입어보는 것이다.저고리와 바지는 물론, 허리에 두르는 장신구와 한복에 맞춤한 신발까지 제대로 갖춰 입으니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 안동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준비된 갓까지 쓰고 댓돌 아래로 내려섰다.“체험을 제대로 즐기는 분들은 400년 전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 오는 월영교와 민속촌, 인근 예움터 한자마을에서 한복 입은 멋지고 예쁜 모습을 ‘인증 샷’으로 남긴다”는 것이 김은혜 체험팀장의 설명. 비가 내린 탓에 기자는 그렇게까지는 못했지만 날렵하고 미려한 한옥 처마 아래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남기는 사진 한 장도 나쁘지 않았다. 좋지 못한 날씨임에도 대만에서 방문한 여행객 20여 명이 안동반가 체험장을 바쁘게 오갔다.한복 체험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은 성인은 물론 부모의 손을 잡고 안동을 찾은 ‘꼬마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높다”고 김 팀장은 말했다. 하기야 어떤 아이가 신기해 보이는 예쁜 옷을 입고 엄마 앞에서 애교 가득한 포즈를 취하는 걸 싫어할까? 전화: 054-821-5222·841-0050홈페이지: http://andongbanga.co.kr가양주 빚고, 고추장 담그고, 국궁을 쏘다안동반가에선 고추장 만들기, 가양주 빚기, 목판 인쇄, 전통 활쏘기 등의 체험도 가능하다. 각각의 프로그램마다 강사가 배정돼 개별 체험에 관한 설명을 들려주고, 진행 과정이 매끄럽도록 도와준다.▲전통 활쏘기: 서양엔 200보 거리에서 활을 쏴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조그만 사과를 명중시켰다는 윌리엄 텔이 있다. 우리나라도 만만찮다. 고구려의 장수 양만춘은 그보다 먼 거리에서 적군의 우두머리 당 태종 이세민의 왼쪽 눈을 화살로 꿰뚫어 버린다. 국궁(國弓·한국의 전통 활)을 쏘아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 활쏘기를 만만하게 생각한 첫 경험에서 팔목 안쪽을 다친 적이 있어 조심스럽게 활과 화살을 잡았다. 이 체험 또한 전문가가 옆에서 안전수칙을 알려주고 명중의 노하우를 들려준다. 그러나 명궁(名弓)이 되겠다는 건 마음뿐. 하기야 잠시잠깐의 연습으로 아무나 양만춘이 될 수 있겠는가.▲고추장 만들기: 한국의 전통 장류(醬類) 중 하나인 고추장은 끼니마다 사용되는 중요한 양념이지만, 지금은 주부들도 직접 만드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의 가정이 공장에서 생산된 것을 구입해 먹고 있다. 기자 역시 고추장을 만들어본 것은 처음. 고춧가루와 메줏가루, 식혜와 소금 등을 섞어 주걱으로 한참을 저어주다 보면 이마에 땀이 흐른다. ‘사람 입에 들어가는 무언가를 만든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체험이 끝난 후 만들어진 고추장은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가양주 빚기: “마시는 사람 따로 있고, 빚는 사람 따로 있다”는 술. 기자는 전자에 속했다. 가양주(家釀酒)란 자신의 집을 찾는 손님에게 대접하기 위해 빚는 술이다. 고두밥, 누룩, 물이 기본 재료지만 여기에 각종 약초와 과일 등이 더해질 수도 있다. 맨손으로 물에 젖어 눅눅한 누룩과 고두밥 혼합물(?)을 주무르는 느낌이 묘했다. 거칠고 서툰 손길을 보며 강사가 웃었다. 빚은 술 역시 예쁜 통에 담아 체험자에게 준다.▲목판 인쇄: 네모반듯한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겨 그 위에 먹이나 잉크를 칠하면 여러 장의 종이에 같은 모양을 찍어낼 수 있다. 일종의 클래식한 인쇄다. 안동반가에선 ‘훈민정음 해례본’과 까치와 호랑이가 주인공인 민화를 새긴 목판을 이용해 인쇄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아이들의 경우 옷에 잉크가 묻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목판 제작에는 고로쇠나무, 박달나무, 거제수나무(자작나무의 일종) 등이 주로 사용됐다”는 게 체험을 함께 한 김영환 강사의 설명이다.소소하게 즐기는 체험거리안동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줄 체험거리는 풍천면 하회마을 입구에도 있다.잘 단장된 하회세계탈박물관은 ‘나만의 탈 만들기’ ‘바구니 탈 만들기’ ‘가방 꾸미기’ ‘탈 열쇠고리 만들기’ ‘석고 방향제 꾸미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도산면 가송리 팜카페에서는 손두부·청국장·김치·간장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기암괴석과 푸른 강물이 만들어내는 주위 경치도 아름답다. 이곳을 찾는다면 ‘농촌 체험’과 ‘눈요기’ 일거양득이 가능하다. 체험 활동이 불가능한 시기도 있으니 미리 문의(전화 054-841-7006) 해보는 게 좋다.안동민속박물관을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지척에 자리한 가죽공예 배움터를 찾아보길 권한다. 이 곳 전시관에선 전통문화 체험교실 수강생들의 다양한 가죽공예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한지로 장식한 ‘자기만의 예쁜 손거울’을 만들어보고 싶다면 풍산읍 안동한지 연화공예관이 제격이다. 양귀숙 원장을 비롯한 한지공예 전문가들이 체험객들을 친절하게 맞이한다.이밖에도 안동에선 규방공예 체험, 장승 만들기 체험 등이 가능하다. 물 맑은 안동호와 임하호에선 바나나 보트·제트스키 타기, 안동 물길 카누투어를 즐길 수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7-24

시들어가는 지역 곳곳 활력 불어넣어 ‘재생의 도시 포항’ 건설

포항이 ‘재생(再生)’하고 있다. 올해 원도심인 포항시 북구 중앙동에 ‘중심시가지형’도시재생사업이, 포항 송도구항 일원에는 ‘경제기반형’, 포항시 북구 신흥동 일원에는 ‘우리동네살리기형’ 도시재생사업이 추진된다. 사업 규모와 경제적 파급효과가 큰 3개 사업이 국가예산 공모사업에 모두 선정·추진되는 사례는 국내에서 처음인 만큼, 우리나라 도시재생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와 함께 지진피해를 입은 흥해지역에 대한 ‘특별재난형 도시재생사업’ 지정·계획도 지난해 말 정부로부터 승인 받으면서 도시 복구에 탄력을 받게 됐다. 과거 포항제철소 용광로와 함께 근대산업화의 상징이었던 ‘철의 도시’ 포항이, 도시재생사업과 함께 ‘재생의 도시’ 포항으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도시에 활력을, 지역경제에 생기를포항시 북구 중앙동 일원은 행정기관의 중심인 포항시청과 교통의 중심인 포항역 등 주요 기관이 자리하고 있었던, 전통적으로 포항의 중심이었다.주요 기관들이 이전하게 되면서 동력을 잃은 동네는 이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도심공동화로 유휴화 및 슬럼화 등이 급격하게 진행됐고, 더불어 신도시가 외곽지역에 형성되면서 젊은 층 인구가 빠져나가게 됐다. 구도심에는 고령의 주민들만 남게 돼 심각한 사회문제로 지적됐다.송도구항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과거 송림숲과 송도해수욕장 및 포항수산대학, 포스코 직원 주거지 등 관광·교육의 중심이자 주거밀집지역으로 번성했던 송도구항은 현재 포항의 대표 관광지인 영일대해수욕장(구 북부해수욕장)보다 시민들에게 더 인기가 많았을 정도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해수욕장의 백사장 유실과 함께 주요시설이 이전하게 되면서 사람의 발길도 덩달아 줄게 됐고, 구항의 말뜻처럼, 구도심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포항시는 올해 중앙동에 중심시가지형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한다. 오는 2022년까지 청년창업과 문화예술허브 및 스마트시티를 조성, 지역경제 활성화와 주민역량 강화 등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을 계획을 갖고 있다. 송도구항에는 ‘ICT 기반 해양산업 플랫폼, 포항’을 기치로 오는 2024년까지 항만재개발과 연계한 새로운 해양산업생태계 조성 및 관광산업 활성화, 주거복지 실현 등 일자리창출과 도시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이와 함께 주요시설의 외곽이전 및 개발로 인하여 주거환경이 크게 열악해지고 있는 신흥동 지역이 ‘우리동네살리기형’ 사업 대상으로 선정된 만큼 ‘함께 가꾸는 삶터, 모갈숲 안포가도 마을’을 목표로 상생하는 유쾌한 마을 조성사업을 적극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함께 다시 만드는 ‘행복도시 흥해’정부는 지난해 말 포항시가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던 ‘흥해읍 특별재생지역’에 대한 지정·계획을 승인했다. 포항시, 특히 흥해지역은 이번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행되는 특별재난형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삶터 회복과 치유를 위한 주거안정 및 희망공동체 조성, 교육과 체험이 함께하는 스마트 방재도시 구축, 활력이 넘치는 문화공간 등이 조성된다.지난 2017년 11월 15일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흥해 지역에는 주거·육아·창업·문화 등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는 ‘특별재생 거점앵커시설’과 국민체육·생활문화센터가 결합된 ‘복합커뮤니티센터’, 평상시에 체육관으로 활용이 가능한 ‘다목적 스마트대피소’를 조성할 계획이다.특히, 주거시설에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보상 대신 재건축을 희망할 경우, 환호동 피해지역과 같이 ‘주택정비사업’으로 추진하는 한편, 주민 분담금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토교통부와 협의해 주택도시기금에서 최대 6천만원까지 ‘장기 저리융자’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지역의 상황을 고려한 저리융자 방안과 ‘자율주택정비사업’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관련 법령 개정을 정부에 건의해 나갈 예정이다.□ 오랜 숙원사업 속도… 지역경제 청신호포항시는 올해부터 시작되는 도시재생사업 외에도 옛 포항역 부지에 대한 복합개발사업을 비롯해 영일대해수욕장 일대를 중심으로 한 영일만관광특구 지정, 영일만4일반산업단지 개발사업 등 그동안 숙원사업들에 대한 첫 삽을 뜨고 본격적인 사업에 들어갈 방침이다.우선 지역의 대표 관광명소인 영일대해수욕장에 해상케이블카를 설치하고 송도 일원의 항만 재개발 등을 통해 ‘설머리 물회지구’인 여남동을 시작으로 영일대해수욕장과 송도동 등 영일만 일대를 관광특구로 지정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관광특구 지정과 함께 영일대해수욕장 바다를 가로지르는 해상케이블카가 완공되면 1천억원 이상의 생산·부가가치 유발효과와 함께 약 1천400여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분석돼, 지역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또한, 지난 2015년 KTX가 개통되면서 지난 100년간 포항의 도심을 지켜왔던 포항역이 외곽으로 옮겨가면서 활력을 잃은 구 포항역사 주변으로는 ‘옛 포항역 복합개발사업’이 알차게 진행되고 있다. 포항시는 이 사업을 통해 주거공간과 사무공간, 그리고 휴식공간이 하나로 복합된 공간을 마련하는 한편, △고급아파트 건축 △공영주차장 확보 △도심 중앙공원 조성 등 3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개발 사업을 완성해 나갈 계획이다.포항시 관계자는 “관련 사업들이 지역경제의 회복을 위한 대형 프로젝트라는 경제적 측면과, 대구·경북지역의 상대적 소외감 해소라는 지역균형발전 측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추진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바름기자 bareum90@kbmaeil.com

2019-07-23

새들도 쉼 얻는 문경의 매력

본격적인 여름휴가 시즌이 다가왔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몸과 마음의 여유를 만끽 할 수 있는 기간이다. 아직 목적지를 결정하지 못했다면 국내관광지 100선 중 1위를 차지한 문경새재와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풍성한 문경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흙길 밟아 더 정겨운 옛길, 문경새재한국관광공사에서 실시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관광지 100선 중 1위를 차지한 ‘한국 관광의 별’ 문경새재. 그 옛날, 새들도 날다가 쉬어간다는 높고 험준한 새재는 가장 아름다운 옛길로 남아 있다. 1관문에서 3관문까지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7km 황톳길을 맨발로 걸을 수 있어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각광 받고 있다.문경새재 도립공원 안, 옛길 박물관 맞은편에 마련돼 있는 ‘건강 체크 부스’에는 인바디 측정기, 혈압 측정기, 스트레스 지수 및 혈관 건강 측정기 등을 365일 무료 이용이 할 수 있어 문경새재 걷기 전 후 변화된 몸 상태도 확인할 수 있다.□ 문경달빛사랑여행2005년 첫 행사를 시작한 ‘문경 달빛사랑여행’은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매월 보름 경, 문경의 아름다운 명소 곳곳에서 진행되는 체험형 관광프로그램이다. 2018년까지는 ‘문경새재 달빛사랑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문경새재 옛길 일원에서 진행됐으나 올해부터는 문경의 아름다운 명소 곳곳에서 매달 장소와 프로그램을 달리해 펼쳐진다.올해 하반기에는 7월, 9월에 고모산성, 가은에서 ‘어른이들의 트레킹 in 고모산성’, ‘별이 쏟아지는 문경 in 가은오픈세트장’이라는 테마로 각각 진행될 예정이다.□ 문경 에코랄라문경시 가은읍에 소재한 문경에코랄라는 2018년 9월 개관한 국내 최초 ‘문화·생태·영상 테마파크’이다. 주요시설로는 기존 시설인 석탄박물관, 가은오픈세트장, 모노레일, 철로자전거 등과 더불어 ‘에코타운’과 야외체험시설인 ‘자이언트 포레스트’가 있다.‘에코타운’에서는 백두대간의 생태와 영상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영상제작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에코스튜디오’에서는 영화와 드라마 제작에 필요한 기획, 촬영, 편집 등의 모든 과정을 직접 체험하고 최종 영상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장비와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미리 예약을 하면 활용할 수 있다.9개의 테마공간으로 구성돼 유아 및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야외체험시설인 ‘자이언트 포레스트’에서는 자연과 사람의 상생을 주제로 한 촬영 체험과 자연과학 체험이 가능하다. 거인을 테마로 한 거인광장, 거인숲, 거인언덕 등 창작동화 ‘거인의 숲’을 기반으로 해 이야기를 따라 숲의 주인인 거인을 깨우는 ‘AR(증강현실)’ 기반의 모험 공간이기도 하다.특히 이번 여름에는 ‘섬머 어드벤처 페스타’행사가 개최돼 어린이 물놀이광장을 무료로 즐길 수 있으며, 에코스윙, 에코서바이벌, VR스타 체험을 통해 스릴과 시원함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다. 6월 6일부터 8월 15일까지는 문경 독립운동가 사진전이 동시에 열려 피서와 역사공부도 함께 할 수 있다.□ 문경 힐링휴양촌청정자연을 자랑하는 문경새재 인근에 휴식과 체험을 통해 바쁜 현대인의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복합휴양시설이 지난 4월 문을 열었다. ‘문경힐링휴양촌’은 자연과 함께 명상과 휴양을 즐기면서 온천욕이 가능한 숙박시설이 있어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할 수 있는 복합휴양공간이다.힐링휴양촌은 숙박시설, 명상휴양시설, 체험시설, 식음시설 등을 갖춰 삶의 쉼표를 더하는 자연 속의 명상, 가족과의 휴양, 즐거운 체험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어르신과 영유아 동반 가족 등을 배려한 BF(Barrier Free) 시설로 모든 방문객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인 ‘진안성지’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선유동·용추계곡백두대간의 명산 가운데 하나인 대야산에는 충북 괴산과 문경 쪽에 각각 선유동이라는 절경이 예로부터 시인묵객과 자연을 즐기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선유동계곡은 대야산 골짜기의 맑은 물이 내려오면서 빚어낸 계곡으로 이름 그대로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선유동은 웬만한 가뭄에도 어린이들이 물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항상 맑고 풍부한 계곡물이 흐르고 바닥이 암반으로 돼 있어 여름철이면 피서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다.선유동 입구에서 대야산 쪽으로 계곡을 올라가면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암반계곡 용추 계곡이 나타난다. 암수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오른 곳이라는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용추 양쪽 거대한 화강암 바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할 때 용틀임하다 남겼다는 용비늘 흔적을 볼 수 있다. 아래 용추 폭포에 패인 소(沼)의 모양이 하트모양이어서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쌍용계곡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쌍용계곡은 골이 깊고 물이 맑아 아주 옛날 청룡 황룡 두 마리가 놀다단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 진 곳이다. 이곳은 속리산에서 발원한 계곡이 도장산과 청화산을 좌우에 거느리고 흘러 물의 맑기와 차기가 손꼽히는 곳이다. 3km를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쌍용폭포와 신원폭포를 만들었으며, 곳곳에 자리한 기암괴석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수십 명이 한꺼번에 앉아 쉬어도 비좁지 않은 넓은 바위에는 울창한 수풀 사이를 내리쬐는 햇볕이 들어 일광욕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운달계곡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운달산 아래 김용사 입구 운달 계곡은 냉골로 불려 질 만큼 여름철에도 시원한 바람과 맑은 물을 자랑하는 곳이다.골짜기마다 흐르는 계곡에는 한여름에도 손을 담그면 얼음덩어리를 띄워 놓은 듯 차가워서 냉골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그 물속에 발을 담그고 하늘을 뒤덮은 숲의 계곡바람을 맞고 있으면 뼈 속까지 서늘해지는 곳이다. 수령 300년이 넘는 전나무 숲속에는 군데군데 천수를 다한 고목들이 조각품마냥 운치를 더해주고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이 이방인의 혼을 뺏어 갈 듯한 울창한 숲의 터널을 걷다보면 우측으로, 수림으로 둘러쌓인 고찰이 나타난다.인근 김용사는 서기 588년 신라시대 창건된 고찰로 지방문화재 자료인 대웅전 등이 위용을 보이고 있으며 대성암, 양진감 등 4개 암자를 두고 있다.□ 문경 오미자테마터널경북8경 중, 1경인 문경시 마성면 진남교반과 고모산성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 속에 540m의 문경오미자테마터널이 있다. 터널의 입구는 강을 가로지르는 철로를 자연미 그대로 살려두었으며, 문경 오미자테마터널은 길이 540m, 폭 4.5m의 문경선 철도 터널인 석현터널에 만들어졌다.항상 섭씨 14~15도의 온도를 유지하는 이 터널은 요즘처럼 더운 날씨에는 입구 50m근처에만 가도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다. 터널 안에는 오미자넝쿨, 별빛터널, 오미자 조형물과 홍보판매장 및 오미자와인을 맛보고 구매할 수 있는 와인바가 있다. 또 아이들이 좋아하는 트릭아트존, 만화캐릭터존 등 많은 볼거리가 갖춰져 있다.□ 문경철로자전거문경철로자전거는 20년 전 석탄을 실어 나르던 철로를 활용한 전국 최초의 철로자전거이다. 강과 산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다양한 야생화들을 만나며 철길을 따라 운행되는 철로자전거는 구랑리역, 진남역, 가은역 등에서 운행되며, 문경의 대표 체험시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름 성수기 기간(7월~8월)에는 진남역 구간에서 한시적으로 야간운행을 시작한다. 환하게 LED불빛을 밝힌 철로자전거는 시원한 강바람을 가르며 색다른 추억을 선사한다.□ 문경관광사격장‘탕탕탕’소리와 함께 스트레스를 한방에 시원하게 날려 버릴 수 있는 문경관광사격장은 사격메니아들을 위한 첨단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클레이사격을 비롯해 권총, 공기총 사격시설을 모두 갖춘 통합사격장이다. 특히 여성이나 초보자들도 쉽고 안전하게 배우고 즐길 수 있도록 1:1지도를 하고 있다.□ 짚라인문경시 불정동 자연휴양림에 자리한 짚라인은 문경의 새로운 레포츠 시설이다. 짚라인은 높은지대에서 낮은 지대로 줄을 타고 하늘을 비행하듯 이동하며 즐기는 신개념 에코 어드벤쳐 레포츠이다. 정글지역의 원주민이 맹수나 독충 등을 피해 나무와 나무, 계곡과 계곡사이을 건너던 이동수단으로 발전해 이제는 미국, 호주, 유럽 등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지난 2월 한국에 처음 소개됐다.총길이 1.3 km 9개코스로 구성됐다. 9개 코스를 타는데 모두 소요되는 시간은 총 2시간 반정도이며 이용요금은 5만원이다. 안전모와 장갑을 반드시 착용한다면 별도의 교육훈련이 필요없을 정도로 쉽고 안전하게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짚라인 코리아 1588-5219)□ 문경활공랜드문경 고요리에 있는 문경활공랜드는 이륙장과 착륙장을 두 개씩 갖추고 있으며, 한번 날면 큰 비행을 할 수 있는 국내 최고의 활공장으로 2002년 패러월드컵대회 등 여러차례 패러글라이딩 대회를 열었다. 1998년 11월 21일 개장이후 전국의 많은 활공인들이 찾아와 비행을 즐기고 있으며, 항공레포츠의 메카로 자리 잡고 있다. 아늑한 분지로 상승기류 형성이 잘되고 서, 남, 북풍이 불어와서 안정적 기류를 유지해 주고 주변에 고압선이 전혀 없어 패러글라이딩 즐기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주위에 주흘산, 조령산, 성주봉 등 백두대간이 둘러싸고 있어 활공시 최상의 경관과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국민여가캠핑장문경새재도립공원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문경새재 국민여가캠핑장은 자연의 여유로움 속에서 휴식을 나누고, 즐거운 관광과 체험을 즐길 수 있는 테마펜션이다.만화 ‘개구쟁이 스머프’의 버섯집을 닮은 황토형 9동과, 하얀 얼음집 모양의 독특한 건축디자인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이글루형 6동은 문경새재의 비경을 가까이에서 보고 느낄 수 있다. 캠핑장에서 자연생태공원 탐방로를 따라 이어지는 새재1관문에서 3관문까지의 옛길은 천혜의 자연이 살아 숨쉬는 문경새재에서만 누릴 수 있는 맨발걷기, 힐링 산책코스이다.□ 불정자연휴양림작약산 자락 수정봉(487m)과 조봉(671m) 사이에 자리한 불정 자연휴양림은 천연 활엽수림으로 이루어진 휴양림 입구부터 산막으로 이어지는 길가에는 야생화단지의 꽃과 나무들이 뚜렷한 사계절의 향기를 담고 정겨움을 준다. 맑은 물은 산막들 사이로 흐르고, 계곡 중간 중간 보를 막아 만든 물놀이장은 길을 따라 이어져 있다. 나무그늘 아래 놓인 통나무 데크와 벤치는 시원한 산바람과 함께 여유로운 휴식을 더한다.휴양림 내 쉼터에는 숲속의 집과 카라반 시설이 있으며, 나무 사이사이 지어진 숲속의 집은 11동의 통나무집과 1동의 황토집으로 정겹기만 하다. 카라반 시설 14동을 포함한 총 26동의 쉼터는 연중 불을 밝히고 있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19-07-23

“광활한 초원과 웅장한 바위산이 한 폭의 유화가 되다”

세체다산장을 떠나 천상(天上)의 화원(花園)이 만들어 낸 꽃길을 따라 기분 좋은 워킹에 넋이 나간다. 시원한 바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감미롭고 매끄럽게 얼굴을 부비며 속삭인다. 바람과 햇볕의 화음이 이어지면서 한참을 날 듯 내려오니 ‘피에라롱기아(Pieralongia·2천291m)’ 산장이다.많은 트레커들이 삼삼오오 앉아 시원한 맥주랑 음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한 쪽에서는 상의를 벗은 채 해바라기를 하며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는 사람도 보인다. 이런 멋진 곳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이 없으면 섭섭하다. 총무를 맡은 김종익 후배가 한잔씩 돌린다. 2천m가 넘는 고지 기암절벽 바위산 아래 녹색 초원을 바라보며 들이키는 맥주 맛은 세상 어디에서도 맛 볼수 없는 황홀한 맛이다. 너른 초원에는 야생화 천지요, 뒤로는 ‘세체다’ 높은 바위 봉우리가 감싸는 천상에서 유유자적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갈 길을 잊은 듯 일어날 줄을 모른다. 뒤돌아보면 아쉬움이 남을 것같아 앞만 보고 다시 꽃 들판과 언덕배기를 오르고 내린다.이번 트레킹에 참가한 세 사람의 여성 참가자인 필자의 내자(內子)와 강석호 국회의원(경북산악연맹 명예회장)부인 추선희 여사, 박의룡 연맹 부회장 부인인 강성희 여사 모두가 야생화에 꽂혀 나아갈 줄을 모른다. ‘꽃과 나비’가 아니라 ‘꽃과 여심(女心)’을 보는 듯 험준한 산악지역에 온 트레커가 아닌 꽃동산에 놀러 나온 소녀 같다. 트레킹 중 유일하게 동양인, 그것도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 강원도 고성에 산다는 분들인데 벌써 한 달째 유럽지역을 여행 중이라니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세체다’봉을 뒤로하고 맞은편 ‘오들(Odle)’산군의 최고봉 ‘사스 리가이스(Sas Rigais·3천25m)’의 위용을 바라보며 비교적 평탄한 트레일(산속 작은 길)을 따라 3시간여 만에 ‘콜 라이저(Colraiser·2천106m)’산장에 도착했다. 꽤 넓고 큰 산장에는 많은 트레커와 관광객들이 여기저기 앉아 요리와 음료를 들며 웃고 떠들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보기에는 먹음직스럽고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는데 너무 짜서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좋다는 이탈리아 음식을 얼마 먹지 못하고 아껴둔 우리 전통술(?) 소주와 맥주를 섞어 시원하게 한잔하니 눈이 좀 뜨이는 것 같다.눈부신 오들 산군의 파노라마를 감상하며 시간을 보내다 산장 기념 스템프를 찍고 내려온다. 그런데 내자가 들고 다니던 스틱을 산장에 두고 내려와 필자가 허겁지겁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산장 한쪽에 있던 스틱을 찾아 내려오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돌로미티 트레킹의 첫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다. 저녁에는 추 여사께서 근사한 와인과 맥주를 협찬하여 맛있는 저녁만찬이 되었다. 이번 트레킹에는 앞서 밝힌 세 분의 여성참가자 외에 박의룡 도연맹부회장과 이동찬 안동시연맹 회장, 김성광 자문위원(청송), 삼일산악회 소속 세 분(배태하 전무, 박덕순 부장, 정찬호 과장), 임종석 강석호 의원보좌관 그리고 포항뿌리회 후배 김종익, 황찬규 등 13명이 함께 했다.이곳 티롤호텔의 사우나 시설이 잘 되어 있다는데 남녀 공용사우나라고 하여 선뜻 나서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도 재치 있는 몇 분은 사우나에 들렀다온 자랑(?)을 해 웃었다. 이 날 밤 필자에게 오랜 친구가 찾아 왔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며 즐거운 인생을 살아가는 친구 정명기 사장이 돌로미티 트레킹을 마치고 마침 ‘산타 크리스티나’에 머물고 있었다. 그간의 여러 트레킹 정보도 알려주고 건강하게 트레킹을 즐기라고 당부하고 헤어졌다. 먼 이국땅에서 죽마고우를 만난다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닐 것 같다.이튿날, 6월28일 2일차 일정이 시작된다.동계스포츠 성지(聖地)라고 알려진 ‘카나제이(Canazei·1천460m)’로 숙소를 옮기기 때문에 짐을 꾸려 내려놓아야 한다. 이번 트래킹의 진행과 인솔은 우리 연맹과 업무협약이 되어 있는 혜초여행사의 이진영 상무가 직접 모든 걸 가이드하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잘 아는 후배라 믿음직스럽고 돌로미티 트레킹을 여러 차례 진행한 베테랑이라 더욱 안심이 되는 친구로 워낙 산을 잘 타 ‘날 다람쥐’라는 애칭이 붙어있는 당찬 산꾼이다.오늘은 ‘알페 디 시우시(Alpe Di Sius) 코스’를 트래킹 한다. 이제부터는 전용차량으로 9인승 택시를 이용한다. ‘알페 디 시우시’까지 케이블카로 10여분을 올라 ‘콤파치(Compatsch·1천850m)’산장을 거쳐 아래쪽 리프트를 타고 ‘파노라마(Panorama·2천9m)’산장에 내려 광활한 초원을 걷는다. 야생화로 뒤덮인 초원길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까마득히 먼 곳에 솟아오른 바위봉우리가 병풍처럼 초원을 두르고 있다. 2천m 넘는 고지에 축구장 8천개 넓이로 이루어진 ‘알페 디 시우시’ 대초원이 돌로미티 알프스 최대 목초지이자 휴양지로 여름에는 등산객, 자전거, 오토바이 라이더들의 천국이며 겨울에는 수많은 스키어들이 북적이는 곳이기도 하단다.끝도 없는 들판의 초원길을 걸으며 알프스의 진면목을 느껴보기도 한다. 트레일 곳곳에 쉴 수 있는 나무의자가 있고 등받이에 이곳 산악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수많은 고산과 암벽들이 즐비한 돌로미티가 오래 전부터 유명 산악인을 배출하는 요람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1944년생)’가 이 곳 돌로미티에서 태어나 15세 때 이미 3천m급 암봉을 올랐다는 전설을 만들었고 세계 최초 ‘히말라야 8천m급 14좌 완등’이라는 신화를 창조하여 이탈리아 돌로미티를 세계에서 각광받게 한 ‘아탈리아의 영웅’이 되었다.초원의 끝은 오름이다. 아직도 녹지 않는 눈 계곡을 건너기도 하고 가파른 오름길은 가쁜 숨을 토해내게 한다. 2시간여를 올라 암릉 안부에 다다르니 돌로미티 최고봉 ‘마르몰라다(Marmorada·3천343m)’가 저 건너 하얀 눈을 뒤집어 선채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본다. 기암절벽이 온통 제멋을 뽐내고 있고 그 속으로 울긋불긋 트래커들이 쉼 없이 헤집고 들어간다. 웃통을 벗기도 한 간편한 복장에 힘들어 하지도 안은 채 성큼성큼 오르는 유럽인들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남녀노소 없이 잘도 오른다.안부에서 휴식을 취한 뒤 바위봉우리 허리로 난 트레일을 따라 1시간여를 올라 고개를 넘는다. 오른쪽 ‘테라로사(Terrarossa·2천657m)’봉이 우뚝 솟아있는 아래쪽에 빨간 지붕을 한 그림 같은 ‘티레서(Tireser·2천440m)’산장이 우리를 반긴다. 입구에 헤진 등산화와 목각으로 만든 등산화에 꽃을 심어 장식한 재미난 산장에 많은 트레커들과 라이더들이 함께 어울려 음식을 즐긴다. 풍광과 산장 분위기는 최상인데 짠 음식 때문에 방전된 체력을 보충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 아쉽다. 뒤돌아봐도 환상적인 그림인 빨간 지붕 산장과 신(神)이 조각한 기암절벽의 암릉(岩陵)과 흰 구름, 파란 하늘을 뒤로 한 채 길게 이어지는 산길을 하염없이 내려간다. ‘파노라마’산장까지 2시간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진땀을 흘린다. 케이블카를 놓치면 낭패일 수가 있어 속도를 내다보니 모두들 힘들어한다. 가까스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온다.대기하던 택시를 타고 인구 1천800명이 산다는 산악마을 ‘카나제이’에 있는 ‘아스토리아(Astoria)호텔’에 여장을 풀고 2일차 일정을 마쳤다.돌로미티 트레킹 3일차(6월29일) 시작점인 ‘사스 포르도이(Sass Pordoi·2천950m)로 가는 케이블카(700m 직벽을 4분 만에 오르는)를 타기 위해 지그재그 산악도로를 40여 분 간다. 가파른 산악도로에 싸이클 라이더들이 힘겹게 오르는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돌로미티의 테라스’라 일컫는 ‘사스 포르도이’는 포르도이 산군중 가장 높은 곳이며 360도 시야가 트여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다. 1877년에 이곳에서 태어난 ‘마리아 피아즈(Maria Piaz)‘가 아들과 함께 돌로미티 최초의 케이블카인 ‘사스 포르도이 케이블카’를 건설하여 돌로미티 관광사업에 선구자 역할을 한 그녀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 산장’이라 부르며 산장 입구에 그녀의 목각 입상이 눈에 띈다.여기서 보이는 마르몰라다, 사소롱고, 셀라, 칸타나치오봉(峰) 등은 수억년 전 바다에서 융기된 것으로 돌로미티 생성과정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마리아산장에서 ‘보에(Boe·2천871m)’산장까지 4시간 걸려 왕복하는 코스가 오늘의 일정이다. 돌로미티의 속살이 들어나는 황량한 트레일에 봄철에 내린 눈이 녹지 않은 하얀 설원을 조심스럽게 밟고 지나간다. 풀 한 포기 없는 설사면(雪斜面)을 건너 눈 녹은 물이 흐르는 곳에서 목도 축이고 소주 한 모금도 해본다. 알싸한 청량감에 정신이 맑아지고 멀리 보이는 설산들이 더욱 또렷해 보인다. 길목에 세워진 케룬(돌탑) 중앙이 둥글게 파이고 맨 위에 올려 놓은 백운석이 성모마리아나 관세음보살같기도 한 특이한 돌탑이 신기하다. 케룬 앞에서 오늘(6월29일) 회갑 생일을 맞은 박의룡 부회장을 위한 퍼레이드로 스틱을 높이 들고 모두들 축하의 환호를 한다. 세상에서 가장 풍광 좋은 곳, 돌로미티에서 생일 축하를 받은 박 부회장 부부가 감격해 하고 함께한 우리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보에’산장에서 다시 ‘마리아’산장으로 힘든 눈길을 건너 돌아왔다. 중간 경유지인 ‘포르셀라(Forcela·2천829m)’산장에서 만난 젊은 부부가 애기를 들쳐 메고 웃고 있는 모습이 생경스럽다. 급경사가 힘들게 했지만 아무도 뒤쳐지지 않고 무사히 끝맺음을 한다. 호텔로 돌아와 박 부회장 회갑잔치를 레스토랑에서 마련한 케익과 촛불 그리고 진한 레드와인으로 다함께 축하하며 즐겁게 보냈다. 아름다운 곳에서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축하연이 유별하게 멋져 보인 밤이었다./김유복 경북산악연맹 회장

2019-07-22

우리가 상납할거라곤 노루가죽 밖에 없었다오

1423년(세종 5년) 10월 초, 가을이 한창 무르익는 들판을 따라 한 선비가 장기로 유배를 왔다. 바로 그해 9월 26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최윤복(崔閏福)이란 사람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의주 판관으로 있었다.그는 개국공신의 아들이었다. 윤복의 아버지 최운해(崔雲海)는 고려말 조선초 경상도 창원 출신 무신으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원종공신(原從功臣)이었다. 그의 친형인 최윤덕(崔閏德)은 꽤 유명하다. 세종 때 김종서와 함께 평안도와 함경도에 있던 여진족을 몰아낸 뒤 4군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우리나라의 북쪽 국경선을 확정지은 인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무인 출신이었지만 정승까지 역임하고 세종으로부터 궤장(나라에서 국가에 유공한 늙은 대신에게 내려 주던 궤와 지팡이)까지 하사받았다. 괜찮은 가문의 엄격하고 인자한 형님 밑에서 자란 최윤복이었지만, 불미스럽게도 그는 ‘뇌물공여’ 사건을 저지르고 장기로 유배를 오는 신세가 되었다.세상 어디든 뇌물이 없는 사회는 없었다.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에도 뇌물은 성행했다. 조선시대의 뇌물은 ‘분경(奔競)’과 함께 따라다녔다. ‘분경’이란 ‘분주히 쫓아다니며 이익을 추구함’을 가리키는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이다. 즉 뇌물을 들고 권세가의 집으로 찾아가 청탁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관직 사냥이라고 하여 ‘엽관운동(獵官運動)’이라고도 불렀다.조선시대를 연 태조부터 적극적으로 뇌물 타파를 외치며 분경을 없애려고 했다. 태조는 뇌물로 관직을 사고파는 엽관운동이 고려 말부터 성행했던 것을 꼬집으며 이를 없애려 했지만, 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뇌물 수수가 만연했다. 정종(定宗)이 분경을 금지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는데도 실효성은 별로 없었다. 태종 때는 김점(金漸)의 뇌물비리가 조선천지를 떠들썩하게 했다.그는 후궁인 숙공궁주((肅恭宮主)의 아버지로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너무 많은 뇌물을 받아 문제를 일으켰다. 여러 고을에서 뇌물을 거둬들인 것은 물론 감형을 원하는 죄수들에게도 뇌물을 요구했다. 북경에서 사신과 함께 돌아오는 상인(商人)들에게는 뇌물을 받아야만 입국을 허락했을 정도였다. 이를 알고 김점을 문책하던 태종은 “숙공궁주가 그대로 궁중에 있으면 공정한 의(義)와 사정(私情)이 의심을 받게 될 것”이라며 후궁을 궐 밖으로 내쫓았다. 이후 태종은 분경금지를 법제화한다.하지만 분경은 그 특성상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지라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다. 지방의 관찰사나 수령들이 한양으로의 출셋길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중앙 권력자들에게 줄을 대고 노골적으로 뇌물을 바쳤던 것이다. 군대 징집이나 세금 면제, 형벌 감형을 청탁하는 뇌물도 많았다. 그렇게 주고받은 뇌물은 보편적으로는 은으로 만든 돈이나 토지문서, 노비 등이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등으로 확인해보면 특이한 뇌물도 있다. 더덕, 문어, 노루나 사슴가죽이 있는가하면 심지어는 개고기나 잡채도 뇌물로 제공되었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뇌물의 종류가 달랐던 것이다.중종 때 김안로(金安老)는 아들 김희(金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하게 되자 왕과 사돈지간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위세가 등등했던 김안로는 개고기를 무척 좋아했다. 이를 안 이팽수(李彭壽)란 사람은 봉상시(奉常寺:국가제사를 관장하는 관청) 참봉(종9품)으로 있으면서 김안로에게 개고기를 자주 상납했다. 그는 크고 살찐 개를 골라 견적(개고기 구이)을 해서 매번 김안로의 구미를 맞췄다고 한다. 이후 김안로는 그를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임금 비서실의 정7품)에 등용시켜 주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이팽수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 부르며 비아냥거렸다. 가장(家獐)은 ‘삶은 개고기(烹炙犬肉)’를 가리킨다. 결국 이팽수는 ‘개고기로 주서가 된 사람’이라는 부끄러운 별명을 조선왕조실록에 남겼다.이팽수가 개고기 뇌물로 출세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들뜬 이가 또 있었다. 바로 진복창(陳復昌)이란 인물이었다. 진복창은 한때 이팽수와 함께 봉상시 주부(정6품)로 근무한 적이 있던 직장동료였다. 그는 이팽수가 한 것처럼 개고기 구이로 김안로의 뜻을 맞추어 온갖 요사스러운 짓을 다 하는가 하면, 매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한다는 사실까지 자랑삼아 설명했다. 하지만 김안로의 입에는 진복창의 개요리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안로는 ‘이팽수의 개고기보다 맛이 없다’는 질책까지 하며 진복창의 청탁은 들어주지 않았다.실록에는 광해군 때의 ‘잡채 판서’ 그리고 ‘더덕 정승’도 기술되어있다. 광해군에게 잡채를 뇌물로 바친 사람은 이충(李沖)이라는 사람이었다. 이충은 갖은 채소를 볶아 만든 잡채를 광해군에게 올렸는데, 왕은 식사 때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 그 덕택에 이충은 호조판서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가 길에 오가면, 삼척동자도 그를 알아보고 ‘잡채 판서’라고 손가락질했다고 한다. 그를 만나면 너나없이 침을 뱉고 비루하게 여겼던 것이다.더덕 정승은 더덕으로 좌의정까지 한 한효순(韓孝純)을 일컫는다. 옛날엔 더덕을 모래밭에서 나는 인삼이라고 해서 사삼(沙蔘)이라고 했다. 한효순은 이 더덕으로 꿀떡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쳐 총애를 입고 정승이 되었다. ‘사삼 정승의 권세가 처음에 중하더니, 잡채 상서의 세력을 당할 자가 없구나’라고 이들을 조롱하는 풍자시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실록에는 세종 때 대사헌이던 신개(申槪)가 강원도 고성 수령 최치(崔値)라는 자로부터 문어 두 마리를 뇌물로 받았다가 구설에 오르자 스스로 사직 상소를 올린 기록도 보인다.이처럼 뇌물의 종류는 천차만별이지만, 최윤복이 뇌물로 쓴 물건은 노루 및 사슴가죽과 살코기였다. 조선시대 노루와 사슴고기는 왕실의 각종 제의에 중요한 제물(祭物)로 쓰였다. 사슴고기로 만든 것은 건녹포(乾鹿脯)라 하고, 노루고기로 만든 것은 건장포(乾獐脯)라 한다.최윤복은 이것들을 서울과 지방의 여러 곳에 뇌물로 쓰고, 또 졸곡(卒哭) 전에 포(脯)를 서로 증정하였다는 것이다. 졸곡제사는 사람이 죽은 지 석 달 만에 오는 첫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가려서 지내는 것인데, 마침 이때가 태종이 죽고 아직 졸곡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의주목관(義州牧官) 창고에 있던 그 노루와 사슴 고기들은 공물로 받아 둔 것들이었다. 당연히 궁중에 써야할 것들이었는데, 이를 사사로이 뇌물로 제공했으니 사건이 더 커지게 된 것이다.왕실에서 쓰는 포육(脯肉)은 공물로 받는 것 외에도 왕실의 사냥인 강무(講武) 때 잡은 노루와 사슴으로도 마련하였다. 더러는 음식 조리를 담당하는 별사옹(別司饔)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직접 만들게도 하였다. 녹포로 만들지 않은 고기는 소금에 절여 숙성 시킨 녹해를 만들어서 제례에 사용하기도 했다.하지만 최윤복이 이것들을 뇌물로 쓸 세종(世宗)대에는 인구가 늘어나 산을 개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노루와 사슴이 매우 귀했다. 그럼에도 중앙의 각 관사(官司)에서는 사용량이 줄지 않아 지방관들에게 공납을 독촉했다. 이를 조달하지 못해 숫자를 감하거나 제외해달라는 충청도 도절제사(都節制使)의 문서는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노루와 사슴 건포(乾脯)를 준비하기 위해 사냥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이 산과 들을 덮고 열흘 동안이나 사냥을 해도 잡은 짐승은 두세 마리에 불과했다. 이래서는 도저히 할당량을 조달하지 못하겠으니 공물에서 제외해 달라는 지방수령들의 다급한 상소가 빗발쳤음은 물론이다. 공급이 달렸으므로 궁중의 의료와 시약(施藥)을 관장하는 전의감(典醫監)에 바치는 녹각(鹿角)과 여러 도(道)의 군기(軍器) 장식(粧飾)에 사용되는 사슴뿔 한 척(隻) 값이 면포로는 한 필이 넘었고, 미곡으로는 20여 말(斗)에 달한다고 했다.이렇게 귀한 노루와 사슴고기가 마침 의주목 관아에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의주 목사(義州牧使)는 김을신(金乙辛)이었는데, 그도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 생각은 않고 판관과 똑 같이 권력 있는 집과 호세(豪勢)한 곳에 공공연히 뇌물보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의주는 국경지역에 있었으므로 명나라로 드나드는 고관대작들이 반드시 머물고 가는 곳이었다. 관리의 인사권을 갖고 있는 이조(吏曹)의 요직자나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정승들이 주로 사신으로 임명되어 이곳을 지나쳤다.이 사건에서 뇌물을 받은 사람은 형조판서 이발(李潑)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수(李隨)였다. 이들은 태종(太宗)이 돌아가신 것을 명나라에 알리기 위한 부고사(訃告使)와 부사(副使)가 되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목에 들렀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목사와 판관이 모두 포수(脯脩:얇게 잘라서 말린 고기)를 뇌물로 제공했던 것이다.의금부에서 관리를 파견해서 감찰을 해보니 그동안 김을신이 관청 안의 가죽과 살코기를 뇌물로 쓴 장물(贓物)이 1백 89관이었고, 최윤복이 거들낸 게 13관이나 되었다. 1423년 9월 26일, 의금부에서는 이 사건의 죄책을 물어 김을신을 경상도 안음으로, 최윤복을 경상도 장기현으로 각각 귀양을 보냈다. 그 뇌물로 쓴 물건들은 한성부로 하여금 추징하도록 했다. 하지만 뇌물을 받은 이발(李潑)과 이수(李隨)는 면직되는데 그쳤다. 요즘과 다르게 뇌물을 받는 사람보다도 주는 사람을 더 가혹하게 처벌했던 이상한 시대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언제 자신들도 같은 처지가 되어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정자(爲政者)들의 고육지책(苦肉之策)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이때 장기로 유배를 온 최윤복은 1년 4개월이 지난 1425년 1월에야 풀려났지만 바로 사망하였다. 남부럽지 않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관료 길에 들어서서 탄탄대로를 걷던 그였지만, 후회와 괴로움을 곱씹다가 인생을 마친 것이다. 사망 후인 1425년 11월 20일에야 사면이 된다. 공신의 아들임이 참작되었기 때문이다.뇌물과 청탁으로 권력을 획득하거나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한 순간 잘못된 선택들이 후대의 냉혹한 평가를 받고, 역사에 우셋거리로 남아 회자된다는 사실을 이 사건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역사는 미래라고 하지 않았나.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앞날을 예찰(豫察)하라는 귀중한 울림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7-22

계절과 날씨 구애받지 않는 ‘영양 상추’ 대세 등극

더운 여름철 본격적인 휴가철을 앞두고 많은 이들이 휴가지에 가서 먹을 음식 메뉴 선정에 고민을 한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 열에 아홉은 삼겹살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삼겹살 곁에는 늘 친구처럼 따라다니는 국민 채소, 상추를 준비하게 된다. 여름철 야외활동 시에는 빠지지 않는 필수 식재료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상추도 여름철이 되면 귀한 대접을 받게 된다. 장마와 기습적인 폭우, 혹은 폭염이 겹치면 채소류의 출하량이 급감하게 되고, 휴가철과 맞물려 수요가 급증하게 되면 상추와 같은 신선채소류의 가격이 올라 ‘금추’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비싼 가격에 판매돼 마트에 들러 상추를 구입할 때면 쉽사리 손이 가지 못하게 된다. 주저함에 상추를 대신해 깻잎에 손이 가려는 찰나 상추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결국 한 손 가득 상추를 구입한 경험, 아마 많은 이들이 겪었을 것이다.이렇듯 상추는 특히 삼겹살과 최고의 궁합을 보인다. 특히 얼마 전 식품의약품안전처 식품의약품 안전평가원에 따르면 “샐러리, 미나리, 양파, 상추, 계피, 홍차, 딸기 등 식품은 벤조피렌 체내 독성 저감률이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밝혔다. 즉, 삼겹살이나 소고기를 구워 먹을 때 상추나 마늘을 함께 먹으면 조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 발표로 삼겹살과 상추의 조합이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된 셈이다.이렇듯 우리 주변의 고깃집에 들리면 어김없이 식탁 위에 자리하거나 젊은 층에서 많이 찾는 햄버거, 샌드위치 사이에도 꼭 들어가 있는 국민채소 상추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덩달아 영양에서 상추를 재배하고 있는 농가들의 손길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영양 상추’의 비결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우리 가까이에서 함께 해 온 국민채소, 상추예로부터 ‘복을 싸 먹는다’해서 육류와 함께 먹는 쌈 채소로 활용된 상추는 우리 역사를 거슬러 문헌에서 쉽게 발견될 정도로 친근하다. 대표적으로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에 상추의 역사가 등장하는데 “고려국의 사신이 오면 수(隋)나라 사람들이 채소의 종자를 구하면서 대가를 몹시 후하게 줬다. 그래서 이름을 천금채(千金菜)라고 했다”라고 기록돼 있는데 지금의 상추를 말한다.또한 조선말기 양명학자 이건승(1858∼1924)은 “상추 잎은 손바닥 같고 된 고추장은 엿과 비슷하네. 여기에 현미밥 쌈을 싸 급하게 열 몇 쌈을 삼키니 이미 그릇이 다 비었네. 이것은 입을 속이는 법. 부른 배를 만지고 누웠으니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라고 해서 많은 이들이 즐겨먹는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최근 도시 농부 100만 시대를 맞아 도시에서 텃밭을 가꾸는 것은 전원을 꿈꾸는 도시인들의 로망에서 벗어나 대세가 됐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파트나 공동주택에 거주하는 도시의 환경에서 작은 텃밭을 가꾸려고 하면 많은 수고와 노력을 들여야 하기에 쉽게 실행에 옮기기 어려움 것이 현실이다.그렇다고 주말농장을 분양받아 본격적인 도시 농부의 삶을 시작하기에는 많은 부담이 따른다. 그런 어려움을 덜고자 자전거를 보관하거나 빨래를 말리던 베란다를 훌륭한 텃밭으로 개조해 상추며, 오이, 풋고추를 조금씩 키워 나가는 재미를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다.□ 국민 채소 대접을 받는 상추, 여름철엔 더 귀해상추는 재배시기만 지키면 비교적 잘 자라는 작물로 집에서도 누구나 손쉽게 재배할 수 있다. 상추는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특성이 있어 우리나라는 봄, 가을이 상추 재배의 적기이다. 특히 생육기간이 짧고 연작피해가 없어 비닐하우스 시설을 이용하면 사계절 재배가 가능한 품종이다. 그래서 여름재배의 경우는 보통 5월에 파종하고, 6월 상순에 옮겨심기를 한 후 7월 상순부터 수확한다.하지만 여름에는 장마와 무더위, 태풍 등이 가장 상추 재배농가의 큰 근심거리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상추 수요가 급증하지만 재해 발생으로 공급에 차질을 빚어 가격이 상승할 경우 수요가 오히려 급감해 농가의 생산계획도 틀어져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특히 생육기에 온도가 높아지면 추대가 생기고 쓴맛이 강해지는데 무더위가 오래 지속될 경우에는 시설재배의 경우 비닐하우스 지붕 위에 차광막 설치로 무더위를 피해보지만 노지 재배의 경우 마땅한 대책이 없어 자칫 기한이 장기간 이어질 경우 열에 약한 상추의 상품성이 떨어져 제 값을 받기가 어려운 고충이 있다.또한 상추는 비가 많이 내리는 장마철엔 수확과 운송 도중에 상하는 경우도 많아 여름 상추는 수확에서 유통까지 시간과 날씨와의 사투를 벌여야 하는 어려움도 감내해야 한다.□ ‘영양 상추’ 대세로… 식당에서 인기 상한가우리나라의 상추 생산량은 대략 11∼12만t 정도의 규모이다. 노지에서는 강원도 평창군이나 횡성군, 대구 북구, 충북 홍성군, 부산 기장군 등지에서 크게 재배되고, 시설상추는 주로 대도시 근교인 경기 남양주시, 광주시, 용인시, 이천시나 부산 강서구 등에서 재배되고 있다. 양상추로 통용되는 결구상추는 강원, 전남, 경남, 제주 등 전국에서 고르게 생산되는데 주산지는 남양주시와 하남시 일원을 중심으로, 비가림 하우스에서 연중 생산되는 것이 특징이다.영양군에서는 2018년 기준 노지와 시설상추를 합쳐 약 47㏊에 1천100t 정도 생산하는데 전국 생산량의 1%정도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도 수비면이 45㏊에 700t 정도를 생산하고 있어 영양 상추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있다. 수비면이 상추 재배를 많이 하게 된 이유는 상추 재배를 하기에 적합한 450m 이상의 고지대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고랭지 지대처럼 영양군의 다른 읍면보다는 상대적으로 온도가 낮고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의 영향으로 기후가 서늘해, 고온에 취약하며 낮은 온도에서 재배하는데 적합한 상추의 특성과 잘 맞아 떨어져 상추 재배를 하는 농가가 하나씩 늘면서 점차 판로가 확보되고 수익이 크게 늘어 최근 몇 년 사이에 수비면에서는 상추 재배하는 농가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특히 영양의 상추는 계절과 날씨에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생산되어 공급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여름철이면 날씨가 더워 품질을 유지시키기가 어려워 재배를 포기하는 농가가 많은 것을 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일로 여름철 고온에도 고품질 상추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농가들이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통해 터득한 뛰어난 기술력과 노하우 때문이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을 잘 견뎌 수확한 영양 상추는 장기간 유통과정에서도 타 지역 상추보다 우수해 통상 수확 후 3∼4일이 지나면 금방 시들어지는 타 지역의 상추와는 달리 영양 상추는 수확 후에도 약 1주 이상 보관을 해도 별 다른 차이가 없어, 입소문을 타고 많은 지역의 업체와 식당에서 구입 문의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수확한 대부분의 상추를 직거래를 통해 납품을 하고 있어 안정적인 소득이 보장되고, 농가에서는 안심하고 상추 재배에 나서 고수익이 보장되면서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이웃 농가들도 상추 재배에 관심이 높아져 상추 재배를 준비하는 농가가 꾸준히 늘고 있다. 이에 농가들은 기존에 납품하던 중소식당 뿐만 아니라 매출 규모가 큰 외식업체나 식품제조업체들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해 새로운 판로를 개척함으로써 매출원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상추 재배농가 올해 시세는 좀 더 지켜봐야최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KAMIS)에 따르면 상추(적상추 기준)는 1만6천원∼2만2천원(4㎏)의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한 달 전에 1만3천원대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름 휴가철을 맞아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지난해 이맘때에 3만4천원대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추 시세가 많이 하락했지만 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서는 전년도 수준까지는 가격 상승 요인이 많지 않아 큰 폭의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년도에는 긴 폭염의 지속으로 인한 무더위로 상추 수확량이 급감했지만 올해는 무더위가 덜해 상추 수확량은 최근 평년 생산량 이상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최근 납품을 한 상추 재배농가들에 따르면 대체로 1만2천원∼1만5천원(4㎏)의 가격대를 받고 납품하는데, 이는 전년도에 비해 수비면의 상추 재배농가가 2배 이상 늘었고, 재해성 피해라고 말할 수 있는 무더위가 덜해 생산량까지 늘어 올해 상추 시세는 크게 높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영양의 상추 재배농가들은 본격적인 상추 출하시기를 맞아 납품시기를 조정하며 보관기간이 상대적으로 긴 이점을 살려 기존의 부산, 울산, 포항 지역뿐만 아니라 대구와 근방 지역으로까지 확대해 늘어난 상추 생산량의 납품량을 늘리고 최대한의 가격 경쟁력도 유지할 계획이다.□ 영양에 상추 재배를 확대하기 위해서는현재 영양군에서 상추 재배 농가에 지원할 수 있는 보조사업은 ‘특산물 포장재 지원사업’뿐이다. 영양군은 전통적으로 고추와 사과를 많이 재배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상추와 같은 신선채소류 재배 농가가 많지 않아 이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실정이다.수비면에서 상추를 재배하는 농가들은 보다 많은 보조사업의 지원을 바라고 있지만 아직 현실적으로 영양군에는 상추 농가가 많지 않아 지원을 확대하는 데는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특산물 포장재 사업은 납품 시 포장재 단체명을 명시하거나 지원하는 포장 매수가 한정돼 있어 상추 재배농가에서는 자비를 들여 사용하는 경우도 많아 농가들 입장에서도 상추재배 작목반을 조직하는 방안을 통해 공동 출하·납품 방식으로 상추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에 나서고 있다. 또한 영양군에서도 영양 상추의 경쟁력이 확인된 만큼 보조사업 지원 분야를 늘려 상추 재배농가의 부담을 덜어 줄 예정이다.□ 상추를 많이 먹으면 계속 잠이 온다 ?상추는 주로 샐러드나 쌈 채소, 샐러드, 겉절이, 비빔밥 등 재료로 활용된다. 특히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해 빈혈 환자에게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상추를 많이 먹으면 잠이 온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일까? 상추 줄기에서 나오는 우윳빛 즙액에 락투세린과 락투신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이것이 진통과 최면 효과가 있어 상추를 많이 먹으면 실제 잠이 오게 된다고 한다. 이는 옛 문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에서 “상추는 먹으면 잠을 부르지만 빼놓지 않고 먹어야 할 채소”라고 했다. 거꾸로 상추 때문에 잠을 줄이는 일도 있었다. 옥담 이응희(1579∼1651)는 ‘옥담사집’에서 “상추는 들밥을 내갈 때나 손님 대접할 때 늘 준비한다. 상추 때문에 잠을 줄일 수 있는데 이른 새벽에 파종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해 상추가 잠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최근 영양군은 고추와 사과라는 전통적인 농산물에서 벗어나 다양한 작물 재배로 농가 수익 창출에 노력하고 있다. 특히 배추, 상추, 수박, 아로니아 등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등 다품종 농가 고소득 창출로 영양군 민선 7기가 지향하고 있는 농가소득 5천만 시대를 연다는 계획이다.오도창 군수는 “경제활동인구의 7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을 정도로 영양군은 농업에 기반을 둔 지역으로 농업경쟁력을 요구하는 것은 시대적인 대세인 만큼 고부가가치 농산물 생산 유통을 구축하고 스마트영농과 더불어 청년 창업농 지원 등 경쟁력 있는 농업 육성으로 영양군 농업인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며 “영양의 지형적 이점을 살려 ‘영양 상추’ 처럼 강점을 보일 수 있는 농산물 재배로 농가 고소득 창출에 기여하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장유수기자

2019-07-21

야경과 불꽃과 아귀찜이 있는 포항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포항’이라고 발음하면 군대에서 덮고 자던 모‘포’가 떠오르고, 어린 시절 마당 장독대에서 햇살과 잠자리와 배추흰나비를 불러 모으던 ‘항’아리가 생각나 이내 따뜻해진다. 포항은 내게 따스한 항구 도시, 매년 겨울마다 몸과 마음을 쉬러 즐겨 찾는 여행지다. 주로 겨울 바다의 진객인 볼락을 만나기 위해서인데, 12월부터 2월까지는 왕복 750㎞의 장거리 운전도 마다않고 거의 매주 드나들 정도다.겨울 포항에 오면 늘 정해진 코스대로 움직인다. 새벽에 도착해 방파제에서 낚시하다 동해가 쏘아올린 황홀한 해돋이를 감상한다. 볼락을 꽤 잡았으니 구룡포에서 모리국수로 속을 얼큰하게 채우거나 죽도시장 장기식당에 가 소머리곰탕을 먹는다. 낮 동안엔 영일대 해수욕장의 볕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쩡쩡 얼어붙은 오어사 계곡 구경을 가거나 구룡포에 있는 호미곶온천랜드에서 낮잠을 잔다. 때로는 ‘철규분식’ 찐빵이나 죽도시장 호떡 군것질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해거름에 다시 낚시를 하고, 밤엔 볼락 뼈회와 매운탕, 시장에서 산 대게 몇 마리 곁들여 만찬을 즐기는 식이다.그러고 보니 겨울 아닌 계절에 포항을 찾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덕 강구항에서 출발해 장사항을 지나 포항 화진해수욕장에 접어드니 공기 빛깔부터 다른 여름 포항이 생경했다. 제철 농어의 은빛 지느러미 같은 아침 햇살이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모공에 푸른 물이 들었다. 항구의 낮은 지붕들 사이로 언뜻 언뜻 비치는 초록을 보며 나는 저 무성한 신록이 내연산의 것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여름 포항의 첫 방문지는 내연산으로 정했다. 거기 보경사(寶鏡寺)가 있기 때문이다.보경사는 내연산의 관문이다. 신라 진평왕 때 승려 지명이 창건했다. 지명이 중국 진나라에서 유학할 때 어느 도인으로부터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받았는데, 그걸 이곳 내연산 연못에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웠다는 연기설화가 있다. 사방이 맑은 거울처럼 반짝이는 여름 아침, 보경사 일주문으로 들어서면서 복잡하고 괴로운 속세와 잠시 이별할 때 연기설화가 하나의 은유로 다가왔다. 거울은 곧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과 감정, 욕망들을 묻어버리는 순간 내면에서부터 평온함이 돋아난다. 외연(外延)이 아닌 내연(內延)의 세계로 향해 가는 걸음을 다람쥐와 청설모, 오색딱따구리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규모가 큰 보경사 경내, 단아하고 정갈하게 배치된 가람들 사이를 걸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동안 볼락 잡는다고 포항에 와 얼마나 많은 살생을 저질렀던가? 범종각에 걸린 커다란 목어(木魚)를 보며 속이 뜨끔했다. 두 손을 모아 참회하고 볼락들의 극락왕생과 윤회를 빌었다. 5m 높이의 보경사 오층석탑 앞에서 그 웅장함에 또 한 번 기가 죽는다. 1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린 석탑의 네 귀퉁이는 하늘을 향해 약간 들려 있는데, 겸허히 그러나 확고하게 지상 위의 천상을 소망하는 모양새다. 돌 모서리마다 햇살이 투명한 연꽃을 피우고 있었다. 다시 경내를 산책하다가 이번엔 유명한 두 그루의 탱자나무와 만났다. 한 그루는 사찰 동쪽 흙돌담 앞에 있고, 다른 한 그루는 서쪽 빈터에 서 있다. 서쪽에 있는 것은 수령이 400년 넘은 고목이다. 탱자나무가 굽이굽이 뻗어 오르며, 마치 고흐의 ‘사이프러스’처럼 무성한 초록 불꽃을 공중으로 댕겨 놓는 오전 아홉시, 반갑지 않은 손님과 만났다. 더위가 벌써 오셨다.더위를 피해 내연산의 서늘한 품속을 파고들어 본다. 청하골, 내연골, 연산골로 불리는 보경사 계곡이 땀을 식혀준다. 내연산에는 12개의 폭포가 있다. 이 폭포들은 모두 제 모습을 스스로 먼저 내보이는 일이 없다. 깊은 숲길을 헤치고 찾아온 방문객에게만 앞섶을 풀어 빛나는 살결을 보여준다. 어디선가 우레 같은 물소리가 들리는데 폭포는 보이지 않는다. 물소리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숨어사는 건 내 취미, 시원한 알몸 다 내놓고 나는 외로움을 노래처럼 불러. 언뜻 네 눈길이 나를 한번 붙잡았을 뿐, 나는 여기 왔다 간 적도 없어 내가 거기 있더라고 말하지 마, 그 순간 내 몸은 사라지고, 나는 햇빛 속에서 하얗게 타오르지”(이경교, ‘숨은 폭포’)라고. 귀가 먼저 달려간 저기 계곡 상류, 나란히 떨어져 내리는 두 물줄기가 보인다. 상생폭포다. 두 갈래 물이 몸을 합치는 폭포 아래 소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새카만 물빛, 쳐다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옛날에 어느 기생과 선비가 서로 사랑했는데, 이룰 수 없는 연을 비관하여 절벽에서 함께 폭포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상생폭포 위 절벽을 기화대(妓花臺), 물이 받치는 소를 기화담(妓花潭)이라고 부르는 연유를 알았다.“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천양희, ‘직소포에 들다’)다. 물소리를 쫓아 마음이 환해진 나는 목욕하는 선녀를 훔쳐보던 나뭇꾼처럼 보현폭포와 삼보폭포의 살빛을 겨우 엿볼 뿐이다. 두 ‘숨은 폭포’를 지나 소금강 전망대에 올랐다. 멀리 포항 바다가, 가까이는 기암절벽 위에 놓인 누각 선일대(仙逸臺)가 보인다. 골짜기가 멀리까지 손을 뻗어 바닷바람을 잡아당겼다. 등줄기에는 더운 땀이 흐르지만 마음에는 차고 맑은 이슬이 맺혔으니, 이만하면 됐다. 산을 내려가도 좋다.두 시간 남짓 산행에 꽤 지쳤다. 복날이 가까워선지 보양식에 구미가 당긴다. 하산길에 닭고기와 막걸리 생각부터 하는 나 같은 얼치기 등산객은 기를 쓰고 산에 가도 다이어트는커녕 살이 포동포동 오른다. 흥해읍 달전리의 ‘달전식당’은 내연산의 아담한 폭포처럼 ‘숨은’ 맛집이다. 방송이나 인터넷에 소개된 적 없어 아는 사람만 아는 집, 단골 장사만 해도 충분하다. 꽃나무를 가꾼 마당의 화사함이 내 허기에도 꽃물을 들인다. 단순한 배고픔이 미식에의 열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마루 아래 신발을 벗어두고 방에 들면 한옥의 고즈넉함이 고단한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주무른다. 퍼질러져 낮잠이나 자고 싶지만, 목은 이색의 후손이므로 체통을 지켰다. 잠시 후, 미리 주문해둔 옻닭백숙이 상에 올랐다. 밑반찬 담음새에 먼저 감탄할 수밖에. 초승달 모양 그릇에 담긴 장아찌와 김치를 바라보기만 해도 침이 고였다. 푹 삶은 옻닭 위에 부추를 수북하게 얹은 백숙을 한 입 뜯어 먹을 때마다 팔뚝과 종아리에 바로 근육이 붙는 느낌이 들었는데, 걷어붙인 셔츠 소매 단추가 터졌으니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석한 음식평론가 황광해 선생께서는 이 집 김치 맛에 반해 백숙이 다 사라진 후에도 김치를 향한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여름 입가심엔 역시 아이스커피가 제일이다. 칠포와 월포 바다 사이에는 젊은 여행객들에게 소문난 카페가 있다. 흥해읍 오도리의 ‘오도리오도시’는 그리스 산토리니의 타르베나(그리스 전통 레스토랑)를 연상시킨다. 하얀 외벽에 커다란 통유리가 눈길을 끄는 이곳 카페의 매력은 2층 루프탑에서 눈앞에 펼쳐진 흥해 바다를 보며 마시는 아이스커피 한 잔의 여유에 있다. 오도리오도시에서는 아이스커피를 머그잔이나 종이컵이 아닌 투명 페트 용기에 담아 캔 뚜껑으로 밀봉해 제공한다. 캔 뚜껑 손잡이를 따는 순간 톡, 하는 청량감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얼음을 이리저리 굴리며 커피를 마시는데, 곁에선 연인들의 사진 찍기 놀이가 한창이다. 동해안의 핫플레이스 카페들은 모두 젊은 연인들을 불러 모으지만 이곳이 특히 유명하다고 들었다. 보아하니 남녀가 함께 커피를 마시는 동안 수평선에 나란히 꽁꽁 묶여 ‘운명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망 좋은 자리를 혼자 차지하고 있는 게 미안해서, 반쯤 마신 커피를 들고 일어섰다. 내가 일어서자마자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커플이 부리나케 자리에 앉았다.죽도시장에 들러 멸치와 디포리, 미역을 엄마 집에 택배 부치고, 호떡 한 개 집어 먹으니 어느덧 해질녘이 가깝다. 영일대 선착장으로 갔다. 영일만 크루즈는 평일에는 낮 2시에만 운항하지만 토요일에는 저녁 7시30분, ‘야경 불꽃 음악 크루즈’라는 프로그램으로 야간 운항을 하고 있다. 90분 동안 크루즈 유람선을 타고 포항시의 야경과 함께 화려한 불꽃놀이를 감상할 수 있어 연인, 가족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미리 예매한 승선권을 제시하고 크루즈에 올랐다. 저기 포스코의 불빛들이 영일만 물결 위에 춤을 추는 동안 여름밤의 바닷바람은 재즈 음악처럼 온몸을 나른하게 했다. 잠시 후 영일만 크루즈의 하이라이트인 불꽃 쇼가 펼쳐졌다. 펑펑, 폭음과 함께 커다란 불꽃들이 포항 밤하늘에 활짝 피었다. 부풀어 오른 달은 불꽃과 바다 사이에 육중한 몸을 끼워 넣고, 어둠마다 빛이 날아가 박혀 눈부신 야경을 이루는 저녁, 나는 화려한 불빛과 차분한 물빛이 음악 속에 반짝이는 포항을 오래 바라보았다.그런데 크루즈 위에서 내 마음은 엉뚱하게도 물회와 아귀찜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저녁 메뉴 고르는 것만큼 어려운 결정도 없다. 갈피를 못 잡는 나를 음식평론가 황광해 선생께서 당신이 직접 검증한 ‘착한 식당’으로 이끌었다. 죽도동의 ‘부산아구찜’은 싱싱한 생아귀만 사용하는데, 양념이 과하지 않고 맛을 내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해산물과 야채만 곁들여 맛이 깔끔하다. 아귀찜과 아귀간수육을 주문했다. 아귀 요리가 준비되는 동안 황광해 선생께서 예찬한 물김치를 한 술 떠먹으니 시원하고 아삭아삭한 새콤달콤함이 입 안에 폭포를 열어젖혔다. 침샘이 활짝 열려 온몸이 음식 맞을 준비를 마쳤을 때, 비로소 아귀찜과 아귀간수육이 상에 올랐다. 아귀 살 한 점에 영일만 바다가 혀끝에서 파도치고, 아귀 간 한 점에 오색 불꽃이 입 안에 팡팡 터지는 행복,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노래 제목을 빌리지 않더라도 포항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야경과 불꽃과 아귀찜으로 여름 포항의 낭만은 완성된다. 밤늦도록 창밖 글썽이는 불빛을 보며 나는 스스로 밤이 되고 바다가 되다가, 영일만이 머리맡에 띄워 보내는 파도를 베고 누워 소라고둥처럼 적막한 잠에 들었다. 잠들기 전, 여름 포항에 자주 오게 되리라는 예감이 발끝에서부터 쇄골까지 부드러운 이불을 덮어주었다.      /시인 이병철

2019-07-21

풍류정신의 ‘멋·한·삶’·각각의 개성 융합한 ‘한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다

‘풍류도’라는 철학·종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육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수련했던 신라의 화랑들. 우리에겐 그들을 바라보는 선입견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문학작품과 영화에서 묘사되는 화랑은 그 유형이 비슷하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신라가 멈춤 없이 발전하고 인근 국가들과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청년 리더인 화랑이 존재한다. 그들은 왕을 충성으로 섬기는 사군이충(事君以忠)의 정신을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않았고, 전쟁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기개로 무장한 강위력한 조직의 구성원들이었다.”지난 시절. 정통성과 합법성이 부족했던 독재 정권은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효과적으로 고취시킬 필요성이 있었고, 황산벌 전투(660년)의 불리한 여건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전세(戰勢)를 뒤집은 신라의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 등을 ‘10대 애국 소년’으로 부각시키고자 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자면 20세기 중후반 한국 소설에 등장하는 화랑의 모습도 이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이쯤에서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신라의 청년 지도자들은 모두 ‘전투하는 기계(?)’에 불과했을까? 화랑이 ‘용맹’과 ‘애국심’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화랑을 지도했던 이념인 풍류도의 소프트웨어는 대체 뭘까?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2016년 발행한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은 이런 의문에 답한다. 책은 이렇게 쓰고 있다.◆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해야 진정한 화랑‘화랑도의 교육 방법, 수련 방법은 철저하게 조화적·중용적 인간상에 맞추어졌다. 삼국 정립기에 창설되고 조직화했던 만큼 화랑도가 무(武)의 수련에 치중하였을 법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무에 못지않게 문(文)을 중시하여 문무겸전한 인재를 길러냈다. 또 인간의 정신과 육신을 함께 건전하고, 조화 있고, 균형 있게 발전시켜 나가야 된다는 정신을 이 땅에 뿌리 내렸다.’이 설명처럼 화랑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용맹한 애국심’ 하나만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신적 성숙과 학문에 매진하는 태도 역시 화랑이라면 가져야 할 기본이었다. 화랑의 생활양식과 교육 방법을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기도 하고, 가악(歌樂)으로써 서로 즐기기도 하며,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아주 멀어도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를 보고 그들의 사정(邪正·그릇된 것과 올바른 것)을 알아서 그 가운데 좋은 사람을 조정에 천거하였다.”김부식의 진술처럼 화랑의 이념적 근간이었던 풍류도는 육체와 정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인간을 지향하고 있었다. ‘도의로써 연마한다’는 것이 이성적 영역의 학습이라면, ‘가악으로써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는’ 것은 감성적 범주에 해당된다. 이 둘의 조화와 균형이 신라의 화랑들을 ‘점잖고 조숙하며 피 뜨거운 청년’으로 만들었던 게 아닐까? 앞서 말한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은 이런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서술을 통해서다.“화랑들은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가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버리면서도, 인간 본래의 정감과 순수성을 잘 갈고 닦았기 때문에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화랑들은 자연환경이 빼어난 곳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하고, 가악으로써 정감을 발휘했던 것이다. 국토를 순례하면서 애국심을 높이고 개인의 정감을 문학과 예술로 승화시켰다.”◆ 풍류도는 오늘날 ‘한류(韓流)’의 뿌리?풍류도, 풍월도, 화랑도를 주제로 한 논문 여러 편을 검토하면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당수 역사학자들은 풍류도를 지도 이념으로 성장했던 화랑을 ‘흥이 넘치고 멋을 알았던 신라 청년들’로 묘사하고 있었다.이는 ‘풍류’라는 단어를 ‘신명’ 혹은, ‘신바람’이라 바꿔 사용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학계의 일부 주장과도 맞물려 있다. 이처럼 신라의 화랑도는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탁월한 줄타기’를 보여준 선진적인 조직체였다.풍류도와 화랑도의 운영 체계를 살피다가 매우 흥미로운 논문 하나를 찾아냈다. 철학자 권상우가 2007년 ‘동서철학연구’에 발표한 ‘한류의 정체성과 풍류정신’이다. 권상우는 풍류사상의 특징을 멋, 한, 삶으로 파악했고 이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부연한다.“풍류의 ‘멋’에는 외형적인 멋과 내면적인 멋이 있다. 외형적인 멋은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는 현상이며, 내면적인 멋은 창의적이고 역동적이면서 개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은 여러 개성들을 어우르는 특징이 있음을 설명한다.또, 풍류에서의 ‘삶’이란 내세적이고 초월적인 가치관이기보다는 현실의 생활세계를 강조하고 있다.”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권상우는 1990년대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돼 현재는 미국과 유럽까지 전파된 한국 대중문화의 유행 현상, 즉 ‘한류’의 뿌리를 ‘풍류정신(풍류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논문 ‘한류의 정체성과 풍류정신’은 한류가 발생할 수 있었던 요인을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기법, 열정, 활력, 다양성, 개성 등에서 찾고 있으며, 이런 특징을 한국인의 문화적 기질로 파악하고 있다.“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연출자, 배우, 관객이 하나로 어우러져 제작되는 경우가 많고, 내용에 있어서도 독자성과 우수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어우러짐’이 한과 삶을 강조하는 풍류문화의 특징과 연결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화랑은 우리 민족의 얼”풍류도와 화랑이 가졌던 위상을 높이 평가한 사학자는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다. 단재 신채호(1880~1936)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신채호는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 그리고 부흥운동까지를 담아낸 저서인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화랑을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적 문장으로 풀어서 인용한다.“화랑은 신라 발흥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후세에 한(漢)문화가 발호해 사대주의파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과 풍속, 학술계를 지배할 때 가까스로 ‘조선을 조선되게’ 한 정신이다. 어느 시기 이후 화랑의 말과 글이 연기처럼 사라져 비록 직접적으로 감화를 받은 사람은 드물지만, 그 유풍(遺風·후세로 이어지는 가르침)은 간접적으로라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朝鮮史)를 말하는 것은 골을 빼고 사람의 정신을 찾는 것처럼 우매한 일이다.”권상우는 단재의 문장에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신채호 선생은 조선을 조선되게 하는 민족의 얼을 화랑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화랑은 인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정체성으로서의 ‘화랑도’ 또는 ‘풍류도’를 말한다.” 이에 더불어 권상우는 풍류정신을 한국 문화의 원형이라 추정한다.앞서 말했듯 풍류정신의 특징은 멋, 한, 삶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름다운 외모에 창의적인 개성을 갖추고, 각각의 개성을 융합시켜 동시대가 처한 현실에서 즐거움을 찾아가려 했던 한류. 그 거센 바람이 처음으로 불기 시작한 때인 1990년대 중반. 일본과 중국, 베트남의 대중들은 한국 문화콘텐츠의 힘을 ‘명확한 테마’ ‘넘치는 활력’ ‘격렬한 율동’ ‘뜨거운 열정’ ‘개성의 강조’ 등에서 찾는다고 입을 모았다.당시 동남아의 젊은이들은 “미소년, 미소녀로 구성된 그룹이 빠른 음악에 맞춰 역동적인 춤을 추며 폭발적인 에너지와 힘을 드러내는 건 다른 어떤 나라의 가수나 그룹도 흉내 내기 어렵다”며 열광했다. 이는 고대의 풍류도가 가졌던 ‘감성의 힘’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현대 사회에서 발휘된 것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조금은 자의적 해석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신채호가 말한 바 ‘조선을 조선되게 하는 우리의 얼’인 풍류도(화랑도)가 세계 속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건 ‘한국인의 정신’이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가정(假定)이 근거 빈약한 자만이거나, 쇼비니즘(Chauvinism)이 돼서는 곤란하겠지만.◆ 풍류도 정신에선 ‘페미니즘’의 향기도….한류의 진화 과정을 이야기하자면 ‘보이 밴드(Boy band)’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걸 그룹(Girl group)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여성 아이돌(Idol)들은 이 분야에서만큼은 일찌감치 양성평등을 이뤄냈다.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적지 않은 한국 여성 가수와 배우들이 아시아 전역 소녀들의 ‘롤 모델’이 된 형국인 것.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풍류도가 ‘여성 존중 의식까지 담고 있었다’는 학설은 독자들에게 좋은 차원에서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이와 관련해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6권 ‘신라의 언어와 문학’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신라 사회의 여성 존중 의식은 (유·불·선이 융합된) 고유의 신앙 풍류도 정신과 짝하고 있다. 풍류도를 실현한 구체적 표상인 화랑제도에서도 구성원의 시작은 소녀들인 ‘원화(源花)’였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이후 소년 화랑들로 조직이 변화되었을 때도 그들에게 화장을 시켜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게 한 것은 풍류도의 정신이 여성적 세계를 지향하는 심미적 영성(靈性)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을 환기하는데 부족함이 없다.”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풍류도’는 파고들수록 그 오묘한 내적 시스템에 대한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신라의 통치 이념과 종교적 기반을 닦은 이들은 이미 1천500년 전 21세기의 ‘한류 열풍’과 바뀐 시대의 주류로 자리한 ‘페미니즘’을 예언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풍류도는 ‘미래학’의 범주에도 포함될 수 있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7-18

수백 년의 역사가 축적된 귀한 곳 종택, 그 지난한 세월과 마주하다

경북도 23개 시·군과 대구엔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관광지, 특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과 즐길거리, 맛봐야 할 요리와 특색 있는 음식점이 가득하다. 본지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기획연재 ‘경북을 하다’를 통해 기자와 맛칼럼니스트가 직접 체험하고 맛본 대구·경북의 ‘숨겨진 보물들’을 소개한다.‘종택 체험’ 100배 즐기기안동의 모든 종택과 고택이 관광객을 위해 대문을 열고 내부를 공개하는 건 아니다. 종택에서의 숙박도 마찬가지. 집 자체가 문화재급 기념물인 경우가 많기에 훼손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란 것이 개방하지 않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의 사생활 침해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 자칫 사람들의 실수로 종택의 유물이 파손될 경우 이를 보수·복원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형편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안동의 종손들이 자신의 집이 민박으로 사용되는 걸 저어하는 상황이 충분히 이해된다. 종택은 수백 년의 역사가 축적된 귀한 곳이다. 그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잘 경우엔 보통의 숙박업소에서 머무를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아래 몇 가지를 소개한다.▲젊은 층이 종택에서의 숙박을 결정할 때 가장 먼저 묻는 게 있다. “내부에 화장실과 샤워시설이 있나요?” 답을 말하자면 각각의 종택마다 다르다. 농암종택 긍구당엔 방 안쪽에 폭 1.5m 정도의 조그만 화장실이 있다. 샤워도 가능하다. 하지만, 화장실과 샤워장이 외부에 있는 종택이라도 걱정할 건 없다. 대부분 현대식 시설로 개조해 말끔하게 관리되고 있기에 크게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의 추억을 불러일으켜 재미를 느꼈다는 관광객도 있다.▲건물 앞에 출입을 자제해달라는 표지판이 세워진 경우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종택에서의 예의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살림살이 공간인 안채는 함부로 출입하지 않는 게 ‘점잖은 손님’으로 대접받는 노하우.▲종택과 고택은 단순히 돈 때문에 숙박객을 받지는 않는다. 종손과 종부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는 언행을 하지 않아야함은 당연하다. 여기에 비싸지 않은 조그만 선물 하나쯤 마련해 종부에게 슬쩍 건네는 센스를 발휘한다면, 아침 밥상의 반찬이 보다 화려해질 수도 있다. 종택을 지키는 이들도, 찾는 이들도 ‘주고받는 정’을 아는 똑같은 사람이 아닌가.▲마지막으로 자신이 묵을 종택이나 고택에 관련된 자료를 미리 읽어둔다면 안동에서의 여행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농암종택 별당 ‘긍구당’서 특별한 하룻밤을…풀벌레와 이름 모를 새의 울음만이 조용히 흐르는 강물 소리에 섞여 적요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 가득한 도시에서는 결코 경험하지 못할 농밀한 암청색 어둠. “진짜 밤은 검지 않고 푸르다”고 노래한 기형도의 시(詩)가 떠올랐다. 16세기 조선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한 농암종택(聾巖宗宅)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시내에서 30분만 차를 몰면 일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 속을 달리게 된다는 사실이 일생 번잡한 곳에서만 살아온 기자에겐 낯설고 생경했다.안동시 외곽에 자리한 농암종택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현보(1467~1555)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연산군 앞에서도 ‘바른 소리’를 할 만큼 호방담대 했고, ‘어부가’와 ‘효빈가’ 등의 시조도 썼다. 안동부사와 성주목사로 봉직할 때는 청렴함을 인정받았고, 탁월한 문장으로 자연을 노래한 문인으로도 이름 높았다.종택을 지키는 이성원 종손은 잘 마른 수건 두 장을 긍구당(肯構堂) 마루에 놓아두고 일찍 잠을 청했나 보다. 예부터 집을 찾은 손님을 맞는 별당으로 사용된 긍구당은 경북유형문화재 제32호다. 문화재에서 잠드는 드문 체험에 마음이 설렜다. 깨끗하게 정돈된 보송보송한 침구를 보니 이곳이 손님을 귀하게 모시던 반가(班家)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밝아온 다음날 아침. 종택과 분강서원, 강각, 예일당, 명농당, 농암사당까지를 천천히 돌아봤다. 옮겨와 복원한 건물들임에도 고풍스런 분위기와 드러나는 미적 감각은 만들어진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종택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깎아 세운 것 같은 청량산 적벽이 밀려온 새벽안개와 조화를 이뤄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했다. 농암이 정2품 벼슬인 ‘지중추부사’를 마다하고 고향에 머무르고자 한 이유가 짐작되는 순간이었다.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종손·종부와 마주했다. 그들은 종가와 종손으로서의 삶을 조용조용 들려줬다. 두 사람 모두 표정이 더없이 온화했다. 바로 그때다. 농암종택 사랑채 기와에서 부서지는 햇살에 놀란 까치 한 마리가 청옥빛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전화: 054-843-1202 홈페이지: http://www.nongam.com‘불천위’ 모신 학봉종택엔 보물지정 문화재만 500여점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의 15대 종손 김종길 씨 목소리는 겸손과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학봉을 포함한 선조들의 행적을 들려주던 종손은 “날이 밝으면 운장각과 사당의 불천위(不遷位)를 꼭 보라”고 조언했다.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위치한 학봉종택(鶴峯宗宅)은 들어서는 입구부터가 여타 고택과 달랐다.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와 나무, 거기에 기묘한 형상의 수석까지 즐비한 정원이 방문객을 사로잡는다. 안채와 사랑채, 별채와 사당, 학봉기념관과 유물전시관인 운장각까지 어디를 돌아봐도 먼지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권력 앞에 굴종치 않는 태도를 견지했기에 ‘조정의 호랑이’로 불렸던 학봉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한 탓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파직됐다. 이후 명예 회복을 허락한 왕의 명령으로 관군을 독려하고, 의병을 규합하는 경상도 초유사의 역할을 수행하다 전쟁 중 숨졌다. 학봉의 13대 종손인 김용한 씨는 파락호(破落戶)로 자신을 위장하면서까지 만주 독립군에게 거금을 보내는 용기를 보여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기자가 묵었던 풍뢰헌(風雷軒)은 학봉종택의 별채다. 초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음에도 바람이 자유롭게 오가는 한옥 특유의 구조 때문인지 새벽엔 이불을 덮어야 할 정도로 잠자리는 시원하고 쾌적했다. 종부가 차려준 다과상에 오른 다식은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예뻤다.묵직한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 운장각엔 학봉의 친필 원고인 ‘경연일기’ ‘해사록’을 비롯해 ‘고려사절요’ ‘사기’ 등의 오래된 책과 왕의 명령서인 교서, 민화, 벼루 등의 유물이 가득했다. “이 건물 안에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503점이 있다”는 게 김종길 종손의 설명.학봉종택 사당에선 난생처음 불천위를 눈앞에서 확인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웠거나, 학문과 인격 모두에서 유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의 위패인 불천위는 영원히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모셔 후손들이 제사 지내게 된다.학봉종택 불천위 제사에서 사용한다는 울향(蔚香). 그 내음이 아직 셔츠 깃에 남아있는 듯하다.전화: 054-852-2087 홈페이지: http://www.hakbong.co.kr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대표가 추천하는 ‘안동의 고택’ 임청각·의성 김씨 종택·수졸당·지례예술촌종택을 포함한 문화재 보호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온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대표는 꼭 방문해야 할 안동의 고택으로 임청각, 의성 김씨 종택, 수졸당, 지례예술촌(지촌종택) 등을 꼽았다.임청각은 문재인 대통령 방문 이후 더욱 유명해졌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인 이곳은 ‘독립운동의 산실’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일제강점기 철도 부설로 철거된 건물의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다. 지척엔 ‘법흥사지 칠층전탑’과 탑동종택이 자리했다. 탑동종택은 현재는 개방하지 않고 있다.의성 김씨 종택이 자리한 임하면 내앞마을은 의성 김씨들의 집성촌. 격변하는 세월 속에서도 500년을 꿋꿋이 자리를 지킨 의성 김씨 종택 역시 지금은 보수 중이다. 내앞마을에선 중요민속문화재 제267호인 귀봉종택과 독립운동가 김대락이 건축한 ‘백하구려(白下舊廬)’도 만날 수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도 내앞마을에 위치했다.퇴계의 셋째 손자 동암 이영도의 종택인 수졸당은 종부가 만드는 건진국수 맛으로 유명하다. 처마 밑에서 시래기가 말라가는 풍경이 정겨웠다.젊은이들 사이에서 ‘인생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로 회자되는 지례예술촌엔 지촌 김방걸의 종택이 있다. 임하호의 푸른 물빛과 고택의 예스러움이 어우러진 풍광이 기가 막힌다.도산면 퇴계종택은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 34칸 한옥인 지금의 건물은 퇴계 이황의 13대 후손인 이충호가 1929년 새로 지은 것이다. 종택 우측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 있다. 차로 5분 거리엔 도산서원이 자리했다. 서원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건립됐다.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연구했던 도산서당 영역과 그의 덕행을 기리는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뉜다.서후면 경당종택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장계향의 친정이다. 지난해 장성진 종손와 권순 종부가 공중파 다큐멘터리에 소개되면서 종가의 음식을 맛보려는 손님들이 부쩍 늘었다. 팔순의 종부가 가져다준 식혜 한 잔이 더위를 시원스레 날려줬다.안동 여행에 나섰다면 풍천면 하회마을도 빼놓을 수 없다.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은 보물 제414호. 제자와 자손들이 서애의 유덕을 기려 지었다. 대문에 붙은 ‘國泰民安(국태민안)’의 서체가 미려했다. ‘하회마을의 양심적인 부자’로 존경받은 북촌댁의 정식 당호는 화경당. 석류나무, 모과나무, 탱자나무가 사이좋게 늘어선 정원이 인상적이다. 현재는 화재 위험 등으로 개방하지 않고 있기에 숙박은 불가능하다.이외에도 하회마을엔 양오당, 염행당, 양진당, 하동고택, 작천고택 등이 자리하고 있다. 서애가 ‘징비록(懲毖錄)’을 쓴 옥연정사도 하회마을에 있다. 마을 입구에서 비포장길을 10여 분 달리면 서애와 그의 아들 류진을 배향한 병산서원이 나타난다.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풍경이 아름답다.이밖에도 안동엔 미처 소개하지 못한 종택과 고택이 적지 않다. 관련된 정보가 궁금하다면 안동시청이 운영하는 문화관광 홈페이지(http://www.tourandong.com/main.htm)가 도움이 될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7-17

검소하지만 누추하지는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헛제사밥은 최고의 한식이다. 헛제사밥은 ‘가짜 제삿밥’이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음식은, 제사 모시고 손님 맞는 일의 중심이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면 “차린 것은 없으나 많이 드시라”고 말한다. 겸양이다. 주인으로서는 최대한 차린 밥상이다. 제사도 마찬가지. “차린 것 없으나 정성으로 여기시고, 흠향(歆饗)하시라”고 말한다. 역시 후손의 겸양일 뿐이다. 햇과일, 햇곡식, 가장 좋은 음식을 차린다.국가의 최고 음식은 종묘 제사상 음식이다. 궁중 조상이 최고의 제사상을 받는다. 국가의 최고 손님은 외국 사절이다. 중국, 왜, 오키나와 등의 사신에게 국가는 최고의 밥상을 차린다. 만찬(晩餐)이다. 국빈만찬은 지금도 남아 있다. ‘접빈객’의 음식이다.헛제사밥을 두고, “선비들이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면서 이웃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제사 모신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이야기는 엉터리다. 조선의 선비, 유교, 한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조선의 사대부는 숨기고, 속이면서 구복(口腹)을 구하지 않았다. 제사는 엄중하다. 이웃에게 날짜를 속일 수 없었고, 속이지도 않았다. 한동네가 통째로 혈연, 지연, 학연으로 얽혀 있었다. ‘내 집안의 제삿날’은 마을이 죄다 알고 있다. 제사를 핑계로 맛있는 음식을 장만한다? 불가능하다.“차린 것 없으나 정성으로 드시라”헛제사밥이 안동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남 진주, 밀양, 경북 상주, 대구 등에도 있었다. 오래전 대도시들이다. 향교가 있고, 벼슬아치, 선비, 반가들이 있었다. 제사를 모셨으니 헛제사밥이 있었다. 전통적인 제사를 오랫동안 고집한 안동의 헛제사밥이 남았을 뿐이다. 경북 안동에는 지금도 ‘불천위(不遷位)제사’가 많다. 높이 기릴 선조를 모시는 제사다. 불천위제사는, 몇 대가 흐르더라도 위패를 내리지 않고 계속 모시는 제사다.헛제사밥은 제사상 정도로 호화로운, 일상의 밥상이다. 민간에서는 오래전부터 헛제사밥을 먹었다. 제사상은 아니되, 제사상처럼 호화로웠다. 식재료가 비싸고 호화로웠다는 뜻이 아니다. 그 정성이 놀라웠다. 재료는 일상에서 흔하게 보는 것들이었다. 차린 것은 변변치 않더라도 ‘정성을 보고 드시라’는 음식이다.1980년대 안동댐 건너편에 관광단지가 생겼다. ‘안동관광촌’이다. 몇몇 음식점들이 문을 열었다. 안동 고춧가루 식혜(食醯), 간고등어 등을 내놓는 가게들이 자리 잡았다. 그중 헛제사밥 집도 있었다. 월영교 부근 ‘까치구멍집’의 서정애 대표는 “안동시의 추천으로 관광촌에 시어머님이 헛제사밥 집을 열었다”고 전한다. 오래지 않아 서 대표는 시어머니로부터 ‘까치구멍집’을 물려받았다. 가게를 물려받을 때 시어머니가 했던 이야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번거롭더라도 음식 만드는 과정을 줄이지 마라. 헛제사밥은 편하게 만드는 음식이 아니다. 재료를 쉽게 바꾸지 마라. 음식 맛은 정성이다.”안동을 대표하는 음식인 헛제사밥이 대중화되지 못한 이유다. 인건비, 나물값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올랐다. 그래도 재료, 인건비 모두 줄이거나 바꾸지 못한다. 더하여 ‘안동사람’들은 헛제사밥 맛을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한 숟가락만 먹어보면 바로 알아차린다. 어린 시절부터 일상으로 먹었던, 익숙한 맛이기 때문이다.헛제사밥의 특징 중 하나는 ‘나물 비빔밥’이다. 생채가 아니라 숙채(熟菜)다. 숙채는 말린 나물을 물에 불린 후 다시 삶고 양념을 더한 것이다. 말리는 과정에서 나물은 숙성된 맛을 더한다. 도라지, 고사리, 콩나물, 무나물, 시금치 등이 나물의 재료다. 간고등어도 있고, 북어 보푸라기도 놓는다. ‘상어 돔베고기’, 문어도 빠트릴 수 없다. 산적(散炙)과 배추전 등 각종 전(煎)도 주요 품목이다. 중심은 밥과 국 그리고 탕(湯)이다. 탕은 고기, 무, 다시마 등이 재료의 모두다. 양념을 하지 않는 으뜸 국물, ‘대갱(大羹)’이다.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한식의 길이고, 최고의 한식인 제사 음식이다.원조의 위엄 ‘맛50년, 헛제사밥’과 ‘까치구멍집’안동댐 건너편 관광촌의 헛제사밥 전문점들은 2000년 무렵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두 집이 원조, 유명 가게다. ‘맛50년, 헛제사밥집’과 ‘까치구멍집’이다. ‘맛50년, 헛제사밥집’이 한두 해 앞선다. 음식은 대동소이하다. 밥을 비벼보면 ‘맛50년, 헛제사밥집’의 비빔밥은 물기가 더 있다. 잘 비벼진다. 개인 취향에 따라 호불호는 갈린다.고춧가루나 고추장은 사용하지 않는다. 많은 손님이 고추장을 원하니 달라고 하면 내놓는다. 헛제사밥, 나물 비빔밥의 양념은 참깨 정도를 더한 간장이다. 고추장, 고춧가루는 제사상에도 놓지 않았다. 육회와 고추장을 더한 비빔밥은 우리 시대에 시작된 음식이다.헛제사밥상에는 안동사람들이 ‘톱 반찬’이라고 부르는 ‘반찬 상’이 하나 더 놓인다. ‘톱 반찬’의 시작은 음복상(飮福床)이라고 추정한다. 제사가 끝나면 제사에 참석한 이들에게 밥상을 내놓는다. ‘봉제사’ 후 ‘접빈객’이다. 한식은 독상(獨床)이다. 혼자서 밥상을 받는다. 자연스레 생선, 고기, 전 등을 잘게 잘라서 놓는다. 문제는 그릇이다. 그릇이 귀하던 시절, 큰 그릇에 여러 가지 반찬을 모았다. 마치 ‘밥상(床)처럼’ 그릇 모양을 만들었다. 다른 그릇보다 높다. 그릇 테두리도 일반적인 그릇과 달리, 마치 밥상 같다. ‘톱 상’에는 대략 아홉 가지 반찬을 놓는다. 전 세 종류와 고기, 달걀, 생선, 두부 등의 다섯 가지다. 자반고등어, ‘상어 돔베’ 고기는 빠지지 않는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07-17

생갈비인 듯, 양념갈비인 듯… 식도락가들의 입맛 사로잡은

갈비는 두 부분이다. 갈빗살과 갈비뼈다. 뼈에 작은 고기 토막이 붙어 있다.안동 홈플러스(구 안동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 골목에 10여 곳의 ‘안동한우, 갈비’ 전문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공통점은 숯불을 사용하고, 대부분 뼈와 살코기 부분을 분리하여 내놓는다는 점이다.가격은 낮고 고기는 싱싱하다. ‘접착갈비’는 없다. 덧대서 붙이지 않으니 갈비살이 모두 짧다. 갈비뼈에 우둔살을 붙이는 엉터리는 없다.가게마다 차이점도 있다. 살코기를 발라내고 얼마쯤의 고기(?)가 붙어 있는 뼈를 취급하는 방식이 다르다. 살이 조금 붙은 뼈에 된장 물을 풀고, 우거지 등을 넣은 다음 끓인 ‘갈비우거지탕’을 내놓는 집이 있고, 뼈에 버섯, 채소, 달고 매운 양념를 더해서 ‘갈비뼈 조림(찜)’을 내놓는 집도 있다. 몇몇 가게들은 탕과 찜을 동시에 내놓는다. 어느 것이 더 좋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개취’다.이것은 양념갈비인가, 생갈비인가?다른 지역 갈비, 갈비 음식과 안동 갈비의 큰 차이점은 양념 갈비다.관광객들은 “안동의 양념갈비가 생갈비와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에 놀란다. 양념갈비를 주문하고 고기를 받아든 다음, “어, 우리는 양념갈비 주문했는데요”라고 되묻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 양념갈비는 간장 등의 조미액에 푹 담근 다음 내놓는다. 안동의 양념갈비는 겉모양이 생갈비와 흡사하다. 주문을 받은 후, 약한 양념으로 바로 버무린다. 마늘 등을 더한 흔적은 있지만 물기가 거의 없다. 생갈비라고 오인하는 이유다.맛은 아무래도 양념갈비가 생갈비보다 강하다. 고기 특유의 맛을 원하면 생갈비를, 잘 조미한 강한 맛을 원하면 양념갈비를 고르면 된다.‘구서울갈비’는 이 지역의 노포로 알려져 있다. 인근의 ‘동부숯불갈비’ ‘시골갈비’ ‘구서울갈비’ ‘거창숯불갈비’ 등도 권할 만한 안동갈비 전문점들이다.양·가격·부위·품질 속일 수 없이 신선한 고기로 승부‘안동한우’ 브랜드는 탄탄하다. 가격이 높지 않으니 지역 주민들도 자주 찾는다. 고기의 양, 가격, 부위, 품질을 속이기는 힘들다. 신선한 고기를 사용한다. 가게를 사고 팔거나, 가게에서 일하던 이들이 나가서 인근에서 창업을 했다. 음식이 비슷한 이유다. 골목 안에 제법 큰 규모의 주차장을 공유하며, 10여 곳의 가게들이 오순도순 영업한다.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안동시 길안면의 ‘백두한우’는 안동갈비가 얼마쯤 ‘진화’했다. 육가공 공장에서 지육(枝肉, 큰 덩어리 고기)을 구해서 직접 육가공 공정을 거친다. 가격은 낮아지고 신선하다. 일부는 식육점에서 팔고, 일부는 식당에서 내놓는다. 식육식당이다. 이 집의 ‘옥수수불판’이 재미있다. 불판 곁에 옥수수를 소복이 넣어 두었다. 옥수수는 저절로 불 위로 떨어진다. 옥수수 태운 향이 고기에 단맛을 더한다.안동 시내의 ‘갈비둥지’는 쇠고기가 아니라 돼지고기 전문점이다. 외지인 대구에서 시작한 브랜드다. 고기 문화가 발달한 안동에서 외지 브랜드가 뿌리를 내린 경우다. 안동에서의 업력이 이미 20년이다. 가격이 싸고 음식은 수준급이다.미슐랭이 선택한 크림치즈의 명가 빵집 ‘맘모스 제과’전국적으로 유명한 안동의 대표 빵집. 1974년 창업했다. 창업 초기, 현재의 인기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이제, 블로거들은 군산 ‘이성당’, 대전 ‘성심당’과 더불어 ‘전국 3대 빵집’으로 손꼽는다.(누가 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빵은 두 종류다.‘식사 빵’과 단맛이 강한 ‘일본식 빵’이다. 식사 빵은 서구인들의 식사용이다. 달지 않다. 고기, 채소, 버터, 치즈, 단맛의 잼 등을 더한 다음 먹는다. 일본식 빵은 달다. 주로 간식용이다.‘맘모스제과’의 대표적인 빵은 ‘크림치즈빵’이다. 맛이 달다. ‘미슐랭가이드-블루가이드’에 소개되었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