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삼국의 치열한 전쟁엔 강인한 정신력·무예 갖춘 화랑들이 있었다

신라와 신라의 역사를 ‘천일야화(千一夜話)’ 속 이야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또는 육중한 스위스 비밀 금고에 비유하자면 ‘풍류도’와 ‘화랑’은 비밀의 동굴을 여는 주문이나 정교하게 제작된 열쇠라고 할 수 있다.풍류도와 화랑이라는 2가지 핵심어는 역사학자와 철학자, 예술가와 종교학자가 1천500년 전 서라벌의 사회 구조와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 인식을 추정해볼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 돼 왔다.그렇기에 화랑과 풍류도에 관한 연구는 21세기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여러 가설과 학설들이 충돌하고 있고, 새롭게 등장하는 학문적 성과에 대한 갑론을박 역시 여전히 뜨겁다.풍류도의 정의와 성격, 화랑의 등장 배경과 역할 등이 모두 마찬가지.이런 가운데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제16권 ‘신라의 언어와 문학’은 비교적 현대적 문장으로 쉽게 ‘풍류도’에 대해 풀어 쓰고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아래와 같은 대목이다.◆ 풍류도는 무엇이고, 그 핵심 사상 어디서 왔을까“신라는 공통의 문어인 한자와 공통의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였다. 동시에 유교와 도교도 수용했다. 최치원 같은 이는 당나라 유학생으로 유·불·선 삼교를 아우른 대사상가가 됐다. 최치원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유·불·선 삼교를 담고, 나아가 더 높은 뜻을 지닌 현묘지도(玄妙之道) 풍월도의 전통이 내려온다’고 했다.”풍류도의 개념적 정의를 내린 이 책은 이어 풍류도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추측해 알려준다. 계속해서 읽어보자.“풍류도의 실천은 철학가, 종교가, 예술가, 여행가의 삶을 원융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적·인격적 수행과 음악의 절제된 조화와 몸을 움직여 떠나는 원족을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 이 이법(理法)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풍류도의 요체라고 하겠다.”위에 언급한 것들의 연장선에서 사학자 김태준의 논문 ‘화랑도와 풍류정신’도 눈여겨 살펴볼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다음에 인용하는 서술은 보다 구체적으로 풍류도의 목적과 지향점에 접근하고 있다. 동시에 화랑과 풍류도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기에 다소 길지만 그대로 옮긴다.“풍류정신(풍류도)은 복잡한 성격을 가진 개념이다. 그것은 원만하고 초탈한 인격을 향한 도의에 제일 목표가 있으면서, 가무로 서로 즐기고 산천을 노니는 예술과 순례의 훈련 목적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 종합적으로 유·불·선의 삼교를 모두 갖추어 가진 정신 개념이었다.풍류를 살린다는 화랑도의 제일 목표는 나라를 세울 도의를 가진 사람을 훈련하는데 있었고, 그 도달점은 삼교를 포함하는 민족 전통의 정신을 재건하는데 있었다. 사람은 물론 자연까지도 감동시킬 인격의 수양, 신(神)과 사람을 화합시키는 가무의 즐거움, 그리고 산천을 노닐며 먼 곳까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던 국토순례의 종교적 경지를 재건하고자 하였다.”풍류의 도(道)를 세워 전통적 민족정신을 재건하고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닦아 6~7세기 신라의 중추가 된 화랑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펴낸 책 ‘신라사 총론’에는 화랑 탄생의 전후 과정이 실려 있다.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서술이다.◆ 화랑은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맡았던 것일까“국가 운영에서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능력 있는 인재를 발굴해 양성하고, 이들이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인재 양성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라가 국학이라는 교육기관을 제도화한 것은 7세기에 들어서였다.그러나 국학 설립 이전에도 인재의 양성 작업은 이루어졌다. 그 기능을 담당한 것이 바로 화랑도(花郞徒)였다. 화랑도 창립의 목적은 지인(知人)에 있었다. 즉 능력이 있는 인재를 발굴하여 이를 관료로 등용하는 것이었다.신라는 4세기 중엽 이후 중앙 집권력을 강화해 나갔고, 6세기에 우경(牛耕·소를 이용한 농사)의 장려 등으로 생산력을 높였으며,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이 점차 해체돼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에 충성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화랑도를 만들었던 것이다.”인간이건 사물에 관해서건 ‘수단’은 ‘필요’에 의해 탄생된다. 화랑이라는 수단은 당대 신라의 정치·사회적 권력을 가진 왕과 귀족들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정황 분석만으로 화랑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을 터. 신라사와 화랑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라 이와 관련된 견해와 주장은 모두 다르다.역사학자 최광식의 경우는 논문 ‘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에서 홍순창(신라 화랑도의 연구), 이종욱(신라 화랑도의 편성과 조직·변천), 이선근(화랑도 연구) 등을 인용해 ‘화랑의 역할 변화 과정’을 아래와 같이 요약해 설명한다.“…(전략) 신라의 화랑도는 통일전쟁(7세기) 당시의 상황에선 군사력 강화가 요청된 결과 화랑집단의 군사적 기능이 중시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화랑이 개인적으로 종군한 경우는 있으나, 화랑도가 전사단으로서 조직적으로 참전한 것은 아니었다.그 이후 통일전쟁이 종식되고 인재 양성을 위한 수련 활동에 참여해 골품체제를 익히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고 보기도 했다.신라 하대에는 사회가 불안정하여 화랑제도가 해이해지기 시작해 ‘세속오계’의 이념이 망각되고,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음풍영월(吟風詠月·바람과 달을 노래하며 흥겹게 즐김)에 도취하는 유흥과 향락으로 흘러버리게 되었다고도 보았다. (이런 학설들은) 대부분 특정 시기의 특정한 측면만을 부각시켜 보았다고 할 수 있다.”아직 명확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기에 “사상, 혹은 이념 체계다” “종교의 한 형태다” “화랑도와 동일, 또는 유사한 개념의 단어라고 보는 것이 옳다”는 각종 주장들이 맞서고 있는 풍류도는 물론이거니와 화랑의 개념과 역할, 활동 영역에 관해서도 학설은 분분하다. 솔직히 말해 갈피를 잡기 어렵다.현재는 신라의 역사, 화랑, 풍류도에 궁금증을 가진 대중들을 위해 적지 않은 역사학자와 철학자들이 명료한 해석을 내놓으려 노력하고 있는 단계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신라사 총론’ 집필에 참여한 학자들 역시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제 그들이 연구·해석한 ‘화랑의 역할’ 3가지를 살펴보자.◆ 지속돼야 할 ‘풍류도’와 ‘화랑’에 대한 연구첫 번째는 화랑도가 신라의 신분 제도였던 ‘골품제’의 경직성을 완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대목이다.“화랑도는 혈연주의를 벗어나 자신들의 의사에 의해 결성된 일종의 결사체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화랑도의 중심은 진골 출신의 화랑이었지만 낭도들은 두품 출신은 물론 평민 출신 청소년도 될 수 있었다. 이 청소년들은 신분의 제약에도 공동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동고동락 하였다. 그래서 화랑도가 해산된 이후에도 이들의 유대관계는 지속되었다. 그 결과 화랑도는 신분제 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데 기여하였다.”‘신라사 총론’이 지목하는 화랑의 두 번째 역할은 풍류도와 관련된 것이다. 서술은 이렇게 이어진다.“화랑도는 풍류도를 추구하였다. 풍류도의 내용은 최치원이 ‘난랑비서(鸞郎碑序)’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교·불교·선교 삼교를 포함하였으며,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었다. 이 풍류도의 시작은 늦어도 진흥왕 시기에 이루어졌다. 진흥왕은 불교를 깊이 신앙했고, 신선을 좋아했으며,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국가를 다스리는 요체로 삼았다. 진흥왕의 사상에 유·불·선 삼교의 내용이 모두 포함돼 있는 것이다. 이는 최치원이 말한 풍류도와 동일하다. 화랑들은 신라 고유의 이 풍류도를 배우고 이의 실현을 통해 국가사회에 크게 이바지했다.”이 책이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것은 문무(文武)에 예술적 심미안까지 고루 갖춘 청년의 탄생 과정이다. 신라·백제·고구려 삼국 사이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엔 강인한 정신력과 무예를 갖춘 젊은이가 필요했다. 그 시기 화랑도가 추구한 제1의 목표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이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부연이 붙는다.“화랑들의 강인한 정신력은 유·불·선에 대한 교육, 즉 도의 연마를 통해 배양됐고, 무예와 체력 단련은 유오산수(遊娛山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가악(歌樂)을 통해 화랑과 낭도, 낭도와 낭도 사이의 결합과 단결을 도모하였다.”재차 말하는 것이지만 풍류도와 화랑에 관한 학문적 주장은 다양하고도 복잡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의 탐구’라는 후대에 맡겨진 과제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 앞으로도 보다 많은 관련 분야 학자들의 지속적인 연구와 신라사에 관심을 가진 선후배 기자들의 열정적 취재를 진심으로 기대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끝

2019-09-05

깊은 산·깊은 물이 잉태한 깊은 맛

‘영남매운탕’ ‘진남매운탕’산이 깊으면 물도 깊고, 물이 깊으면 산도 깊다. 문경에는 산이 많다. 크고 작은 물줄기도 많다. 크고 작은 개울에서 크고 작은 물고기를 잡는다. 민물고기다. 바다 생선을 즐기는 이들은 민물생선에서 흙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먹을 것도 없이 작고, 잔뼈가 많아서 굳이 찾지 않는다는 이도 있다. 그렇지는 않다. 맛있는, 민물 특유의 맛을 보여주는 식당도 있다. ‘영남매운탕’과 ‘진남매운탕’이 그러하다.‘진남매운탕’과 ‘영남매운탕’은 지척 간에 있다. 진남매운탕은 큰길 가에 있다. 일찍부터 알려졌다. 불과 200~300m. ‘영남매운탕’이 있다. 두 곳 모두 ‘현지에서 잡는 민물생선’을 사용한다고 밝힌다. 가까운 곳에 깊고 얕은 개울이 있다. 여기서 잡는 생선이다. 직접 잡는 생선을 사용하니 민물생선 특유의 맛이 살아 있다. 여름, 가을철에는 직접 잡는 자연산 민물생선을 사용한다. 겨울에는 냉동 자연산을 사용한다.굳이 한가지 메뉴를 추천한다면 ‘잡어매운탕’을 권한다. ‘잡어매운탕’에는 메기, 꺽지, 피라미 등이 들어 있다. 모두 인근에서 구한 것들이다. 메기매운탕을 별도의 메뉴로 내놓는 이유가 있다. 자연산 메기는 민물생선이 아니라 바다 생선의 쫄깃한 맛을 지니고 있다. 흙 비린내가 나는 것은, 생선이 신선하지 않거나 조리 과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진남매운탕’은 원조, 2대 전승 가게다. 두 집 모두 50~60년의 업력을 자랑한다. ‘영남매운탕’은 민물생선 고유의 맛을 살리기 위하여 일체의 ‘맛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민물새우도 피한다. 민물생선의 맛을 가리기 때문이다. 잘 즐기는 법도 있다. “가능하면 맵지 않게”로 주문하면 민물생선 고유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생선을 다 먹은 후, 라면이나 수제비를 넣고 끓여도 좋다.‘통큰짬뽕’ ‘영흥반점’‘영흥반점’ 입장에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 있다. ‘통큰짬뽕’은 ‘영흥반점’에 비길 정도의 업력은 아니다. ‘영흥반점’은 널리 알려진 전국구 맛집이다. 짬뽕과 탕수육으로 널리 알려졌다. ‘찍먹’ 탕수육은 ‘영흥반점’의 대표 메뉴다. 소스와 따로 내놓는 탕수육이 맑다. 깔끔한 탕수육 튀김에 맑은 탕수육 소스를 더한다. 튀김 색깔이 맑고 깔끔하다. 파삭하면서도 튀김 속이 촉촉하다. 소스 역시 많이 달지 않다. 수준급 탕수육이다. 블로거들로부터 ‘혼이 실린 탕수육’이라는 극찬도 듣고 있다. “탕수육 먹으러 왔다가 짬뽕 먹고 혼절했다”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짬뽕도 비교적 맑은 맛이다. 염도도 높지 않고 맛이 순하다.‘통큰짬뽕’은 새재 입구 상가 지역에 있다. 큰길 가 뒷골목에 있으니 지나치기 일쑤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다. 현재 가게 역사는 짧지만, 주인의 업력은 만만치 않다. 구미 등에서 오랫동안 중식당을 운영했다. 두 가게 모두 주인이 곧 주방장이다.‘통큰짬뽕’은 메뉴 구성이 재미있다. ‘해물짬뽕’은, 이 식당의 경우, 평범한 메뉴다. 주인도 굳이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리는 편이다. ‘해물짬뽕’을 주문하면 “해물짬뽕보다는 돼지짬뽕이 낫다”고 말한다. 돼지짬뽕은 돼지고기를 고명으로 사용한 짬뽕이다. 문경은 약돌을 먹여서 기른 소, 돼지고기가 좋다. 깊은 내륙에서 굳이 해물보다는 좋은 생돼지고기를 사용한 돼지짬봉이 낫다는 말도 이해가 된다.‘야끼우동’은 볶음우동이다. ‘야끼우동’을 내놓는 곳은 주방의 업력이 만만치 않다.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중식을 만진 이들이 내놓는 메뉴다. 맛은 순하다. 주방의 칼솜씨, 고온에서 순간적으로 볶아내는 솜씨는 좋다. 불 냄새가 깊은 볶음우동이다.‘청록숯불갈비’문경의 한우는 ‘약돌한우’다. 약돌을 먹여서 기른 한우라는 뜻이다. ‘청록숯불갈비’는 약돌한우를 사용한다.도축한 고기의 선별, 유통, 고기의 정형 과정 등을 꼼꼼히 챙긴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소의 지라 부분 등을 싱싱한 상태로 내놓는다. 간, 천엽 등도 내놓는다.고기는 식감이 좋다. 부드럽기보다는 쫄깃한 편이다. 숙성보다는 싱싱함을 선택한 고기다.문경우수농특산물직판장‘문경우수농특산물직판장’은 문경새재 입구에 있다.가게 내부에는 문경 생산 특산물들이 그득하다. 여러 곳을 다니면서 쇼핑하는 것보다는 이곳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가격도 합리적이다.두 칸으로 이뤄진 가게에는 문경 특산물인 오미자부터 여러 종류의 가공품들이 가득하다.‘모싯골맛집’ ‘새재할매집’‘40년 전통’을 내건 ‘새재할매집’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맛집이다. ‘모싯골맛집’은 업력이 ‘새재할매집’만큼 길지 않다. 두 집 모두 ‘돼지고기+양념+석쇠구이’ 전문점이다.문경 및 문경 일대의 돼지고기는 맛있다. 석쇠로 굽는다. 돼지고기구이를 주문하면 양념 돼지고기를 별도의 공간에서 연탄불로 굽는다. 양념은 고추장 위주다. 돼지고기를 고추장 양념으로 버무린 것이다. ‘고추장 양념 돼지고기’는 식당 메뉴로는 어려운 음식이다.된장이나 고추장 등으로 양념을 한 후, 직화로 굽는 경우, 고추장, 된장의 곡물 성분이 기름기와 뒤섞여 쉽게 타버린다. 직화는 고기가 익기 전 양념장을 먼저 태운다. 구운 고기에 거뭇거뭇한 점이 생기는 이유다. 일반 식당에서 손님에게 양념장 돼지고기를 맡기면 대부분 태운다.두 집 모두 넓적하게 썬 돼지고기를 구운 상태에서 내놓는다. 먹을 크기로 자르는 것은 손님 몫이다. 원하는 크기만큼 자른 다음, 곁들인 채소 혹은 반찬과 더불어 먹는다.‘새재할매집’은 배추전을 반찬으로 내놓는다. 경북지역에서는 흔한 반찬이지만 먼 곳에서 온 관광객들은 신기하게 생각한다.‘모싯골맛집’은 된장찌개가 좋다. 두 집 모두 반찬이 심심한 편이다. 새재 관광 코스는 제법 힘들다. 추천. 새재를 오르기 전, 혹은 새재 관람 후 들러도 좋다.‘문경주조’ ‘가나다라브루어리’좋은 음식은 좋은 식재료로 만든다. 좋은 식재료에 정성을 더하면 좋은 음식이다. 좋은 식재료를 고르는 것도 음식 만지는 이의 능력이다. 잘 골랐더라도 비싼 가격,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같은 지역이라도 오미자밭에 따라서 오미자의 질은 다르다. 같은 밭이라도 고랑마다 오미자의 질은 달라진다. ‘문경주조’는 이런 차이를 가리고, 비싼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마음에 드는 오미자를 구한다. 찹쌀, 오미자가 ‘문경주조’의 주요 재료다. 찹쌀로 술을 빚어, 찹쌀탁주, 오미자 탁주, 맑은 문희주를 만든다. 인근에서 생산하는 유기농 찹쌀을 구해서 사용한다. ‘문희’와 오미자가 들어간 ‘오미자탁주’, ‘맑은 문희주(청주)’ 등을 선보인다.많은 종류의 술을 빚지는 않지만 ‘문경주조’ 나름으로는 ‘다품종 소량 생산’을 지향한다. 별나게 만들었다 싶은 것은 ‘오희’다. ‘문경 오미자 스파클링 막걸리’다. 탄산이 살아 있는 막걸리다. 색깔이 붉다. 오미자를 사용했다. 인위적인 감미료, 첨가제는 사용하지 않는다. 오미자 자체 색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살렸다.‘문희(聞喜)’는 문경의 옛 이름이다. ‘문희경서(聞喜慶瑞)’ “경사스럽고 상서로운 소식을 듣고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문경주조’와 대표 술 ‘문희’는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되었다. 문경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양조장이 된 것이다.올가을에는 ‘호프를 재료로 마치 막걸리 빚듯이 만든 술’을 선보인다. “맥주 아니냐?”고 물었더니 “맥주이긴 한데 법적으로는 맥주 가공시설로 허가를 받지 않았으니 맥주가 아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들이 양조장에서 일을 돕고 있다. 일일이 수제로 술을 빚으니 손목부터 고통스럽다. ‘술 짜는 기계’를 써봤다. 술맛이 달라지니 기계로 술을 만들기도 힘들다. 아들의 합류가 힘이 되고, 고맙다.‘가나다라브루어리’는 브루어리(Brewery), 맥주 양조장이다. 공장 2층에서 공장 내부를 볼 수 있고 여러 종류의 맥주를 시음할 수 있다. ‘점촌 IPA Original’ ‘문경새재 페일에일’ ‘은하수 스타우트’ ‘주흘 바이젠’ ‘오미자 에일’ 등 이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수제 맥주를 시음하거나 소량으로 살 수 있다. 공장 내부에는 20~30대의 젊은 직원들이 10명 남짓 보인다. 젊은 직원들이 맥주 공장과 2층 시음장을 동시에 관리한다.점촌, 문경, 주흘, 오미자 등은 이 지역과 연관이 있는 이름들이다./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09-04

굽이굽이 고갯길 넘어 백두대간 품속을 찾다

“여름휴가요? 저야 도자기 만들고, 굽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니 올여름 내내 작업장에서 즐거운 휴가를 보냈다고 해야겠죠.”무형문화재 김선식(49) 도예가의 말에선 자부심과 겸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는 폭염과 폭우가 지루하게 이어지던 2019년 성하(盛夏)를 시뻘건 장작불 타오르는 뜨거운 가마 앞에서 보냈다. 작년도, 지지난해도 마찬가지였다. 여유롭게 시간을 내서 어디로 놀러 다닌다는 건 김씨의 ‘상상밖에 존재하는 일’이다.문경은 조선 초기부터 분청사기와 백자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이름이 높았다. 미려하고 다양한 형태는 물론 오묘한 빛깔로도 호평 받는 문경 도자기의 명성은 21세기에도 여전하다.수집가들 사이에서 문경은 도예 부문 무형문화재와 명장(名匠)의 ‘작품 도자기’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김선식 도예가가 운영하는 관음요(觀音窯)는 8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공간으로 적지 않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씨의 선조인 김취정(金就廷)은 조선 영조 때인 18세기 중반부터 발물레를 사용해 백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전통은 8대까지 이어져 김선식에 이르렀다. 자그마치 250년에 이르는 세월이다.그 장구한 시간 동안 김선식 씨의 윗대 사기장들 모두는 전통 도자기의 발전에 자신의 모든 정열을 쏟았다. 김 도예가가 자신의 일에 긍지와 책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내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문경에는 전통 방식의 도자기 제작법을 지켜가고 있는 장인들이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 그렇기에 해마다 ‘찻사발 축제’를 열고, 제법 큰 규모의 도자기박물관도 세웠다. ‘한국 도예의 전통을 지켜가겠다’는 지자체의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다.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보내는 작업장에서 전통 발물레로 다완(茶碗·찻사발)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 김선식 씨는 손을 씻은 후 사재를 털어 만든 ‘한국 다완 박물관’(문경읍 하리 소재)으로 기자를 데려갔다.“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한국 찻사발의 매력을 알리고, 찻사발 대중화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설립했다”는 이 박물관은 한국, 중국, 일본의 ‘작품급 다완’ 2천여 점 이상을 소장했다.전시 공간에 한계가 있어 현재는 약 700점을 관람객들에게 선보이고 있고, 나머지는 도자기 보존에 적합하도록 기온과 습도 조절이 가능한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한국 다완 박물관’은 찻사발만을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국내 최초의 박물관이라는 것이 김씨의 설명.“우리의 전통 도자기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밥그릇과 국그릇으로도 편하게 사용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한 김선식 도예가는 “내게 맡겨진 역할이 조상들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라면 웃으면서 일하는 게 좋지 않겠나”라고 덧붙였다. 그의 미소가 세상사 티끌이 묻지 않은 아이의 그것처럼 맑았다. 김씨의 아들 민찬 씨도 9대째 ‘패밀리 비즈니스’를 잇고자 현재 도예를 공부하는 중이다.‘한국 다완 박물관’에선 김선식 씨가 만들고 구운 ‘경명진사 달항아리’, ‘철화 금채항아리’, ‘청화백자 국화문 항아리’, ‘분청철화 어문 자라병’ ‘관음 댓잎 다기(茶器)’ 등도 감상할 수 있다.□ 관음요 홈페이지: http://kuy.kr한국다완박물관: 054-571-5780문경은 아나키즘(Anarchism·무정부주의)을 사상적 배경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박열(1902~1974)의 고향이다.호서남면 모전리에서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박열은 일본 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20년 넘게 옥고를 치러야했다. 그럼에도 체포와 재판 과정은 물론, 감옥에서까지 ‘조선 장부’의 기개를 꺾지 않았다.소설가 안재성(59)은 박열을 지목해 “선과 악, 정의와 불의, 투쟁과 굴종 등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은 여러 문제들을 고민하고 회의하고 또 질타하는 그의 연설문과 논문은 오늘의 현실에도 길을 안내하는 등불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일본 권력자 계급에 전한다’, ‘나의 선언’ 등에서 보이는 박열의 문장은 단호하고 장려한 선비의 결기로 가득 차 있다.박열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는 일본인임에도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의 자유’를 위해 당대의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싸웠고, 이후 사랑했던 남자의 땅 문경에 묻혔다. 둘의 이야기는 지난 2017년 이준익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 우뚝 선 박열의사기념관은 견인불발(堅忍不拔)의 태도로 조국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생애를 기억하기 위해 조성됐다. 주위 기념공원엔 ‘의사 박열 선생 추모비’와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도 자리했다.기념관 전시실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유물과 유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자료가 방문객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무정부주의와 항일 역사 사이의 시대적 상관관계에 궁금증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찾아봐야 할 곳이다.□ 박열의사기념관 홈페이지: http://www.parkyeol.com관련 문의: 054-572-3396입신양명(立身揚名)의 푸른 꿈을 안고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선비들이 넘어가던 문경새재. 백두대간의 웅장한 산세가 그대로 느껴지는 이 고개의 이름은 ‘새들도 힘에 겨워 쉬면서 넘는다’는 의미라고 한다.영남 지역과 기호 지방을 잇는 문경새재는 문물과 재화가 오가던 상업 거래의 중심지였고, 국방 분야에서도 요충지라 할 수 있었다. 1981년 일대 5.5㎢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됐고, 이듬해엔 문화재 보호구역이 됐다. 문경새재도립공원은 완만한 산길을 걸으며 여유롭게 등산을 즐기는 관광객들로 1년 내내 붐빈다. 특히 맨발로 걸을 수 있는 제3관문까지의 6.5km 구간이 방문자들에게 인기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신을 벗어 들고 흙 위를 걸어가는 모습이 재밌다. 기자 역시 이 행렬에 잠시 동참하며 그들과 즐거움을 함께 했다.문경새재도립공원 주변엔 옛길박물관, 문경 에코랄라, 사계절 썰매장, 국민 여가 캠핑장, 철로 자전거, 짚라인(Zipline) 등 관광·레저시설이 마련돼 있어 가족단위 여행객들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키고 있다. 드라마 ‘태조 왕건’, ‘불멸의 이순신’, ‘해를 품은 달’이 촬영된 장소로 유명한 ‘문경새재 오픈세트장’도 공원 입구에서 가깝다.기자가 이곳을 찾은 날도 고려와 조선시대를 실감나게 재현한 건물들 사이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 선 중년의 한 관광객은 “서울만이 아니라 문경에도 광화문이 있네”라며 환하게 웃었다.문경새재에서의 산행은 자신의 몸 상태를 감안해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제1관문에서 시작해 마당바위, 제2관문, 동화원 터를 지나 제3관문에 이르는 코스는 누구나 도전해도 좋은 산책길에 가깝다. 체력이 좋고 경험이 풍부한 등산객이라면 제1관문을 출발해 여궁폭포와 해국사를 지나는 ‘주흘산 3코스’가 제격이다.□ 문경새재 관리사무소: 054-571-0709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선 가을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축제들이 문경시 곳곳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9월과 10월에 문경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아래 소개하는 정보가 도움이 될 것이다.20일부터 22일까진 동로면 일원에서 “100세 청춘, 문경 오미자”라는 슬로건 아래 오미자축제가 열린다. 문경에서 생산되는 오미자는 해발 고도 300m 이상의 깨끗한 자연에서 친환경 방식으로 재배돼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축제에선 ‘오미자 퍼포먼스’, ‘전국 노래교실 경진대회’ 등이 펼쳐지고, 오미자를 재료로 만든 각종 요리가 마련된다.거정석(약돌)을 사료에 섞어 먹여 특유의 육질을 가진 한우를 맛볼 수 있는 문경약돌한우축제는 28일과 29일 영강체육공원에서 개최된다. “약돌한우는 육즙이 풍부하고 담백한 감칠맛을 가졌다”라는 게 축제 주최측의 설명. 행사장에선 약돌한우는 물론, 여러 종류의 문경 농·특산물이 판매될 예정이다.문경사과축제는 10월 12일에 시작돼 27일까지 16일간 이어진다. ‘백설공주가 사랑한 문경 사과’라는 홍보 문구가 재밌다. 문경 사과는 중산간 지역 비옥한 토질에서 자란다. 당도가 높고 맛과 향이 뛰어나 ‘꿀사과’라는 별칭도 있다. 문경새재 제1관문 앞 무대에서 펼쳐질 개막 퍼레이드와 축하공연, 사과 관련 체험 프로그램 등이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듯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9-04

정쟁에 희생된 불운한 군주

1628년 (인조6) 2월 4일, 인조가 반정으로 왕권을 잡은 지 6년이 될 무렵이었다. 설명절 분위기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류백수(柳栢壽)라는 낯선 사람이 고을에 들어섰다. 절충장군(정3품 무관)이었던 그는 그냥 몸만 온 것이 아니라, 최근 몇 년간 한양에서 회오리쳤던 몇 가지 역사적 사건들까지 짊어지고 왔다.이야깃거리의 실마리는 광해군이었다. 선조는 한참 동안 정비 소생의 아들이 없었다. 대신 후궁 출신 사이에서만 13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공빈김씨(恭嬪金氏)와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사람이 광해군이다. 여러 가지 여건으로 봐서 그가 왕이 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광해군을 세자로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도성과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란을 가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분노로 들끓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자신이 포기한 임금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광해군은 난중에 의병들을 모아 동분서주하며 그 소임을 다했고, 조정과 백성들의 명망을 한 몸에 받았다. 광해군의 왕위계승권은 요지부동할 것 같았고, 그 자신 또한 좋은 임금이 되기 위한 자질을 키워 나갔다.그런데 사달이 났다. 중전인 인목대비가 뒤늦게 영창대군을 낳은 것이다. 불행의 씨앗은 여기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조정에는 신하들이 어떤 왕자를 지지하느냐를 두고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다. 대북은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세자였던 광해군을 지지했으며, 소북은 유영경(柳永慶)을 중심으로 적자인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선조도 이제는 마음을 바꿔 영창대군을 왕으로 앉히려 했다. 그러나 결말을 짓지 못한 채 선조는 죽었다. 1608년(선조 41) 2월 1일, 광해군이 조선의 15대 왕이 되었다. 아무리 적자라도 겨우 두 살배기인 영창대군이 왕이 된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날개를 단 대북 정권은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칼을 빼들었다. 이들은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를 이끈 공이 있음에도 선무공신으로 책정되는 것을 방해한 것, 선조가 병이 위중해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는 것을 방해한 것 등을 이유로 유영경을 비롯한 영창대군 지지 세력들을 공격했다. 유영경은 결국 삭탈관작 되고 유배를 가서 죽었다. 이를 시작으로 소북의 여러 인사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그러나 광해군에게는 또 다른 산이 버티고 있었다. 이제는 명나라에서 즉위를 반대한 것이다. 장자인 임해군이 있는데 어떻게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를 차지했냐는 것이었다. 임해군도 이에 동조하여 동생인 광해군이 자신을 밀어내고 왕이 되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대북파들은 우선 임해군부터 모반대역죄를 씌워 강화로 귀양 보내고, 그와 관계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였다. 유배를 간 임해군은 얼마 후 유배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후에도 진릉군, 능창군 등의 왕족들이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죽어나갔다. 왕자와 왕족들이 여럿이 제거되었지만, 대북파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영창대군이었다. 적자인 영창대군이 살아 있는 한 정통성 논란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이때 일어난 것이 ‘칠서(七庶)의 옥’이다. 이 사건은 대북파가 영창대군과 그의 어머니인 인목대비까지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1613년(광해군 5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했던 강도사건이 발생했다. 이때의 범인들은 서인(西人)의 거두로서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의 서자(庶子) 박응서(朴應犀)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 달래는 상소를 올린바 있었는데 거부당했다. 이에 불만을 품고 범죄단체를 조직하여 전국을 무대로 화적질을 일삼다가, 문경새재에서 한건 하고 붙잡힌 것이었다.오늘날로 치면 이른바 특수강도 살인사건인 것인데, 대북파의 중심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꾸몄다.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은 박응서에게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연루되었다고 거짓 자백을 하면 목숨만은 건져 주겠다고 꾀었다. 결국 박응서는 김제남은 물론 영창대군과 인목대비까지 역모에 가담했다며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 파장은 대단했다.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해서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 받았던 신흠 등 7명의 대신과 이정구 등 서인(西人)세력 수십 명이 하옥됐다. 또한 이 사건의 추국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양어머니인 의인왕후의 능에다 무당을 보내 저주했던 일까지 발각되었다.곧바로 영창대군을 처단하라는 삼사와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김제남은 임금이 내린 독약으로 스스로 죽었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했다. 이제 겨우 여덟 살인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유배되었고, 곧바로 강화부사 정항(鄭沆)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임해군에 이어 영창대군까지 살해되면서 광해군은 형제들을 죽인 패륜의 멍에를 쓰게 되었다. 이게 계축년에 일어났다 하여 ‘계축옥사’라고 한다.한편, 아버지에 이어 어린 자식까지 잃고 슬픔에 빠진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홀로 남겨진 채 사실상 연금 상태로 지냈다. 그런 와중에 경운궁에서 임금을 비방하는 내용의 익명서가 발견됨으로써 인목대비 폐비와 폐모(廢母)에 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1월, 마침내 인목대비는 폐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대북은 폐비에 반대한 인사들인 서인(西人)들에게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이항복처럼 끝내 폐비·폐모론에 동조하지 않다가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이항복은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는데, 귀양 가는 길에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표현한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란 시조가 유명하다.광해군은 왕권에 대한 집착으로 이런 대북파들의 전횡을 묵과했다. 스스로 반정의 불씨를 키운 셈이었다. 그 불씨에 불이 붙은 것은 1623년 4월 11일이었다. 이서, 이귀 등을 주축으로 한 서인(西人) 반정군이 창덕궁에 들이닥쳤다. 반정의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광해군은 그제야 후원문(後苑門)을 통해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피신하였으나 곧바로 붙잡혔다. 집권세력이던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명이 처형되었고, 200여 명이 유배되었다. 이렇게 하여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끝이 났다.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능양군(綾陽君)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16대 왕 인조다. 그래서 이를 인조반정이라 한다.광해군은 문성군부인 유씨, 그리고 폐세자 이지(李祗)부부와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해 7월, 이지는 위리안치 된 집에서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인조의 명에 따라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장면을 나무위에서 목도한 며느리 폐빈 박씨도 남편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들 부부를 잃은 충격으로 폐비 유씨 또한 세상을 하직했다.혼자 남은 광해는 인조반정 이듬해인 1624년, 다시 태안으로 옮겨진다. 표면상의 이유는 그해 일어난 이괄(李适)의 반란군과의 내통에 대한 우려였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조선과 중국과의 미묘한 외교적 갈등을 살펴야 한다.명나라가 서서히 세력이 약해지자, 1616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후금(청나라)을 건국했다. 광해군 시절에는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명·후금·조선 세 나라가 아무런 마찰이 없이 지냈다. 하지만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금나라를 배척하는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표방했다. 따라서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준비하던 후금으로서는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정복해야만 후환을 없앨 수 있었다. 또한 후금은 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려 이를 조선으로부터 교역을 통해 얻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후금 태종에게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결국 1627년(인조5) 1월, 후금이 조선을 침입했다. 정묘호란이었다. 이 전쟁에서 조선은 졌다. 후금은 조선과 형제국이 된다는 맹약과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잡아가는 조건의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고 난 다음에야 철수를 했다.인조의 정묘호란 패배는 안 그래도 군적법(軍籍法)과 호패법 시행 등으로 동요하고 있던 백성들에게 실리외교를 택한 군주 광해군을 떠올리게 했다. 이때를 놓칠세라 권력에서 밀려난 대북파 잔존 세력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 중 유효립(柳孝立)은 이 기회가 광해군을 복위시키는 적기라고 판단했다. 유효립의 아버지 유희견은 광해군의 첫째 처남이었지만 일찍 죽고 없었다. 하지만 살아있던 숙부 유희분(柳希奮)과 유희발(柳希發)은 인조반정 당시 참형을 당했고, 당상관 승지로 있던 유효립은 제천으로 유배를 가 있던 유배인의 신분이었다.유효립은 궁내사람들과 짜고 궁중에 들어가 인조를 살해하고,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의 실행을 위해 그는 먼저 계룡산으로 천도하는 것과, 인성군이 왕이 되는 것이 천명이라는 비결을 유포함으로써 세력을 규합했다. 아울러 몰래 가마를 타고 서울로 가서 전 세마(洗馬) 허유(許900C) 등과 모의하고, 도감초관(都監哨官) 윤계륜(尹繼倫) 등 정권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과 결탁하는 한편, 궁궐의 내시와 대궐문의 수문장까지 포섭을 했다. 이들은 1628년(인조6) 1월 4일 대궐문을 열고 임금의 침전에 곧장 들어가기로 작전을 짜고,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몰래 잠입하려는 찰나였다.그러나 이 일은 하루 전인 1628년(인조 6) 1월 3일, 죽산에 사는 전 부사 허적의 고변으로 탄로가 나버렸다. 난을 기획한 유효립 등 관련자 50여 명은 모두 잡혀 처형되었다. 반면 공을 세운 허적 등 11명은 영사공신(寧社功臣)에 책봉되었다.비극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위 사건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역모 관련자와 광해군이 밀지를 서로 주고받았고, 광해군이 강화에서 인성군과 연락하여 집의 하인들을 모아 군사로 삼았던 사실이 탄로나게 되었다. 유배인들끼리 서로 서신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범행을 계획했던 것이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경비를 철저히 이행하지 않은 책임자들에 대한 문책이 있었다. 류백수(柳栢壽)는 당시 중추부(中樞府) 당상관(堂上官)인 첨지중추부사로서 이들의 경비를 맡은 책임자였다. 그는 경비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는 죄로 복위운동에 참여한 사람들과 똑같이 죽임을 당할 처지까지 왔다. 하지만 전에 쌓았던 공을 참작하여 인조는 그를 죽이지는 않았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보냈던 것이다.이런 경위로 장기에 온 류백수는 3년 동안 이곳에서 머물다가 1631년(인조9) 5월 22일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우리나라 역대 왕들 가운데 광해군 만큼 극과 극의 상반된 평가를 받는 제왕도 없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폐위시킬 때 열거한 죄목들을 보면, 그는 불효자였고, 왕자와 왕족들을 죽인 불목(不睦)한 왕이었다. 또 오랑캐인 후금(청)과 교류를 하였으며,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폭군으로 매도되었다. 반면 중국의 명·청 교체기의 어려운 국제적 상황에서 ‘중립외교’ 또는 ‘실리외교’의 노선을 펼쳐 국가의 안전과 이익을 도모했던 탁월한 군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인조반정의 명분이 되었던 광해군의 실리외교 노선이 실패한 정책이었는지 성공한 정책이었는지는 곧 바로 판가름이 났다. 광해군과는 달리 반정 인사들이 취한 후금배척정책은 정묘·병자호란이라는 커다란 전쟁으로 되돌아 왔고, 인조가 삼전도의 그 꽁꽁 얼어붙은 맨땅에서 오랑캐의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아홉 번이나 처박으며 항복을 해야만 했던 치욕을 낳았던 것이다. 광해군이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펼쳤으나, 당쟁의 와중에서 희생된 임금으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역사는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는 모두 과거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과거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현재의 이 상황도 설명할 수가 없다. 역사는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지배하는, 살아있는 현재인 것이다./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9-03

자랑스런 동국인 양성… 지역과 함께 발전하는 대학으로

동국대 경주캠퍼스는 2020학년도 수시모집에서 1천445명(정원 외 포함, 정원 내 1천349명)을 모집한다. 이는 전년 모집인원 1천384명보다 61명 증가한 것이다.수능 최저학력기준은 교과전형 전체 및 면접전형, 학생부종합 등에서 의학계열을 제외한 모집단위에서 폐지했으며, 학생부종합전형은 단계별 전형을 실시한다.수시모집에서 동국대 경주캠퍼스는 전형유형별 각 1회씩 총 5회까지 복수지원이 가능하며, 한의예과와 의예과를 제외한 모든 모집단위에서 교차지원이 가능하다.학생부 교과목 반영은 국어, 수학, 영어, 탐구 교과 중 학년 구분없이 교과별 상위 3개 과목 총 12개 과목을 반영하고 탐구교과는 계열에 따라 인문은 사회탐구, 자연은 과학탐구를 반영한다. 의학계열(간호제외)은 국어, 수학, 영어, 과학탐구 교과 중 전과목을 모두 반영한다.세부 전형별로 보면 학생부교과에서 학생부 성적 100%로 선발하는 교과전형은 모집인원이 전년도 373명에서 463명으로 90명 증가했다. 학생부 성적 70%와 면접 30%로 선발하는 면접전형 모집인원은 전년도 453명에서 442명으로 소폭 축소했다. 또한 학생부종합전형 모집인원 역시 전년도 364명에서 357명으로 7명 감소했다.수능 최저학력기준은 한의예과, 의예과를 제외한 모든 학과는 국어, 수학, 영어, 탐구(상위 1과목) 영역 중 2개 영역 등급의 합을 기준으로 반영한다. 또한 한의/의예과를 제외하고 수학(가)를 반영할 경우 1개 등급을 완화해 적용한다.교과전형에서 △일반학과는 국어, 수학, 영어, 탐구 영역 중 2개 영역 등급의 합 10 이내 △간호학과는 국어, 수학, 탐구 영역 중 2개영역 등급의 합 6 이내(영어 2등급 이상 필수) △한의예과는 국어, 수학(가), 과학탐구 영역 등급의 합 5 이내(영어 2등급 이상 필수) △의예과는 국어, 수학(가), 과학탐구 영역 등급 합 4 이내(영어 2등급 이상 필수)이다.면접전형에서 한의예과는 인문의 경우 국어, 수학, 탐구 영역 등급의 합 5 이내이며, 자연은 국어, 수학(가), 과학탐구 영역 등급의 합 5 이내, 의예과는 국어, 수학(가), 과학탐구 영역의 등급의 합 4 이내, 간호학과는 국어, 수학, 탐구 영역 중 2개 영역의 합 6 이내이며, 영어 2등급 이내가 공통으로 적용된다.또한 지역인재, 농어촌전형은 한의예과, 의예과, 간호학과는 교과전형의 해당학과 수능 최저학력기준과 동일하게 적용한다. 농어촌 전형의 나머지 모집단위에서는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수시모집 원서접수는 9월 6일 오전 9시부터 10일 화요일 오후 6시까지 인터넷으로 하면된다. 수시모집 최초합격자 발표는 수능 최저학력기준 미적용의 경우 11월 1일, 수능최저학력기준 적용은 12월 10일 예정이다. 자세한 일정과 전형 사항은 동국대 경주캠퍼스 입학처 홈페이지(http://ipsi.dongguk.ac.kr)를 참고하면 된다.입학 상담 문의 전화는 054-770-2031~4 이다.△교육혁신처 신설, ‘참사람’ 양성동국대 경주캠퍼스는 교육부가 실시한 ‘2018대학기본역량진단’ 평가 결과 ‘자율개선대학’에 선정돼 올해부터 2021년까지 매년 39억 원의 국고를 지원받아 교육부 대학혁신지원사업을 추진한다.이에 따라 동국대 경주캠퍼스는 대학혁신지원사업의 목표를 ‘참사람 양성을 위한 동국 DREAM 혁신모델 구축’으로 설정하고 교육혁신처를 신설해 창의적 미래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는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는 인재 양성을 위해 융합학부제를 운영한다. 과학기술대학 내에 생명신소재융합학부, 창의융합공학부, ICT·빅데이터학부, 상경대학 내에 경영학부를 융합학부로 운영하고 있다.△2020학년도 명상심리상담과 신설동국대 경주캠퍼스는 2020학년도부터 상담관련 산업 수요 증가와 실용학문에 대한 불교학부 재학생 요구를 반영해 불교문화대학 내에 명상심리상담학과를 신설하고 불교 명상심리 상담 전문가를 양성한다.또한, 동국대 경주캠퍼스는 2020학년도 학제개편에서 에너지공학전공 명칭을 에너지·전기공학전공으로 변경했다. 사회수요를 반영하고 학생 역량강화를 위해 에너지공학전공 내 전기공학 트랙을 도입한 것이다.△대학 경쟁력 강화 위해 특성화 사업 추진동국대 경주캠퍼스는 4차 산업혁명에 의한 교육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대학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특성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학문분야 특성화학과는 △호텔관광외식경영학부 △인문콘텐츠학부 고고미술사학전공 △창의융합공학부 안전공학전공이다. 3개 학과에 대해서는 교육 및 산학, 연구 분야에 우선적으로 자원을 투입해서 학문분야 특성화를 육성한다.학부교육 특성화 선도학과는 △인문콘텐츠학부 국사학전공 △생명신소재융합학부 바이오제약공학전공 △창의융합공학부 전자정보통신공학전공 △행정경찰공공학부 △경영학부 등 5개 학과로, 교육과 산학 분야에 집중 지원한다.△참사람 인재 장학 신설·인재 양성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는 2018년 기금 모금액이 44억 원을 넘었다. 2018년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는 세입 대비 기부금 순위가 전국 10위를 기록할 정도로 외부 기금이 많은 대학이다. 비수도권 대학 중에는 3위를 차지했다. 지난해에는 총 277억 원의 장학금이 지급됐다. 학생 1인당 수혜금액이 370만 원이다. 이처럼 풍부한 장학금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가 학생들을 참사람 인재로 키우기 위한 아낌없는 지원이다.△서울캠퍼스와 교류 제도 강점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는 서울캠퍼스와의 활발한 캠퍼스간 교류도 강점을 보이고 있다. 서울캠퍼스로 전과할 수 있는 캠퍼스간 이동(전과) 제도를 비롯해 1년 동안 서울캠퍼스에서 학점 취득이 가능한 캠퍼스간 학점교류 제도, 서울캠퍼스에서 추가로 전공 취득이 가능한 캠퍼스간 복수전공 제도 등 다양한 캠퍼스간 학사교류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매년 신입생의 40% 이상이 서울, 인천, 경기 지역 고교에서 입학한다. 지방에 위치한 캠퍼스이지만 전국의 다른 대학들과 비교해도 교육과 학사제도에 경쟁력이 높다는 평가다. 그 결과로 2018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비수도권 사립대학 7위를 기록하기도 했다.△기숙사 수용률 높고 교육 환경 개선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는 전국 각지에서 입학하는 학생들을 위해 1천800여명을 수용하는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도서관을 전면 리모델링했으며 학생편의시설을 확충하는 등 학생들이 공부하고 생활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최신화하고 있다.KTX를 이용하면 서울에서 경주까지 약 2시간에 도착이 가능해 수도권 지역 학생들의 접근이 더욱 편리해졌다.대구, 포항, 부산, 울산 지역으로는 학기 중 매일 다수의 통학버스를 운행하고 있어 근거리 학생들에게도 교통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스마트 강의실 구축, 스마트 수업관리시스템 도입 등 스마트 학습공간으로 캠퍼스를 변모해 나가고 있다.△취업역량 강화… 우수 대학 육성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는 대학 혁신 3대 과제로 취업역량 강화를 설정해 추진 중이다. 고용노동부 대학일자리센터에 선정되면서 경북도 동남권 거점대학으로서 지역의 고용 창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5년간 취업 지원 인력과 취·창업 기능을 강화하고 저학년 때부터 특성화된 진로지도, 취업, 창업 교과목을 운영해 학생들의 취업역량을 키운다. 이를 통해 기업체에서는 우수 인재를 채용하고 싶은 대학으로, 고교에서는 진학시키고 싶은 대학으로 인식되도록 취업 역량 우수 대학으로 육성하고 있다.△사회서 사랑받는 대학으로 부상올해 동국대학교가 건학 113년을 맞이했다. 경주캠퍼스는 설립된 지 41주년이 됐다. 경주캠퍼스에서만 6만여명의 동문을 배출했다. 이제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는 경북도 동남권 지역 거점 대학일 뿐만 아니라 전국 규모의 우수한 사립대학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는 앞으로도 내실 있는 교육으로 참사람을 키워 자랑스러운 동국인을 양성하며 지역 사회와 함께 성장하며 사랑받는 대학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경주/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2019-09-02

바닷가 카페에서는 누구나 예술가, 철학가 된다

경북의 푸른 바닷길에는 낭만과 사랑, 멋과 맛이 파도친다. 봄에는 벚꽃이 봄비처럼 내리는 해안도로를 따라 도다리들이 올라오고, 여름엔 아까시 향기를 희붐한 불빛으로 뭉쳐 던지는 등대 아래 농어들이 헤엄친다. 가을엔 단풍이 밤물결마저 오색으로 물들인 근해에 볼락과 꼴뚜기들이 뛰어놀고, 겨울엔 흰 눈이 스웨터를 짜 입힌 항구마다 대게 찌는 김이 훗훗하게 피어오른다.바다를 찾는 사람들은 북적거리는 포구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맛보고 싶어 한다. 고운 모래가 펼쳐진 해수욕장에서 일광욕과 물놀이를 즐기고 싶어 한다. 해송 군락지를 걸으며 신선한 피톤치드를 들이마시고 싶어 한다. 밤바다에 너울지는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을 보며 낭만적 분위기에 젖고 싶어 한다. 포구의 해산물 식당과 해수욕장 사이에, 해수욕장과 해송 군락지 사이에, 해송 군락지와 밤바다 사이에 ‘카페’가 있다. 카페에 가기 위해 바다를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카페는 시간과 시간 사이, 장소와 장소 사이에 잠깐 들르는 곳, 그래서 특별한 공간으로 여겨지지 않는다.그러나 사실 카페는, 정확히 말해 바닷가의 카페는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무용하며, 무용하기에 가치 있는 곳이다. 카페는 바다의 풍경을 통유리창에 담아 전시하는 화랑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다른 행성이다. 사랑의 언어들이 달콤한 노래로 흐르는 음악 감상실이다. 커피 향기와 빵 굽는 냄새가 함부로 엎질러진 부엌이다. 바다는 늘 푸르기만 한 것 같아도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다. 그런 바다의 얼굴에 다채로운 표정을 입히는 것이 해안가의 카페들이다. 카페는 바다의 낭만을 더욱 부풀린다. 카페에서 우리는 휴식하고, 생각하고, 대화하고, 상상한다. 바닷가 카페에서는 누구나 예술가가 되고, 철학가가 된다.예술가들은 카페를 사랑한다. 그들은 카페가 일상적인 장소이자 특별한 공간임을 알고 있다. 보들레르는 “우연하고 일시적인 것에서부터 영원한 무엇을 발견하는 일이 예술”이라고 말했다. 예술가들은 카페라는 일상의 공간에 하루 종일 무심하게 앉아 있다가 문득 번갯불처럼 내리꽂히는 예술적 영감을 포획한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카페 ‘누벨 아테네’를 즐겨 찾았는데, 이곳에는 보들레르 말고도 랭보, 에드가 앨런 포, 고흐, 고갱, 마네, 르누아르, 피카소 등이 동시대에, 또 시절을 달리하여 드나들었다. 이들 시인과 소설가, 화가들은 ‘누벨 아테네’에서 ‘초록요정’이라 불리는 술 ‘압생트’를 마셨다.헤밍웨이가 쿠바 아바나에 머물 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 역시 카페다. 헤밍웨이는 아바나 거리의 ‘라 보데기타’라는 카페에 가 모히또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예술가들도 카페를 사랑하기는 마찬가지, 시인 이상은 1933년 종로에 ‘제비다방’이라는 카페를 열었다. 이곳에서 그는 김유정, 박태원, 박팔양 등 동료 문인들과 커피를 마시며 토론했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초라한 ‘바그다드 카페’와 ‘호텔 캘리포니아’ 등 영화와 음악에서도 카페는 낭만적인 소재로 등장한다.울진 죽변항에서 봉평해수욕장으로 가는 해안도로변엔 ‘르 카페 말리(Le Cafe Marli)’가 있다. ‘marli’는 프랑스어로 가장자리라는 뜻, ‘죽변’이 대숲의 외곽임을 떠올려보면 ‘가장자리 카페’라는 이 집 이름은 이국 언어로 지역의 특색을 잘 담아낸 셈이다. 이곳은 파리나 리옹 같은 대도시의 카페가 아니라 마르세유나 니스 등 프랑스 남부의 한산하고 따분한 해안가 카페를 연상시킨다. 봉평해변의 고운 백사장을 바라보며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야외 테이블에는 노랗고 빨간 파라솔이 펼쳐져 있는데, 꽤나 이국적인 그림이다. 테라스와 루프탑에서도 바닷바람과 햇살과 파도소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카페 내부에는 액자 그림이 몇 점 걸려 있지만, 가장 크고 아름다운 액자는 역시 통유리창이다. 통유리창은 죽변항 방파제의 하얀 등대와 빨간 등대,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의 흰 포말, 아득하게 파랗기만 한 수평선까지 모두 담아낸다. 이 집은 커피 맛도 좋지만, 커피와 우유, 크림, 얼음을 섞어 만든 ‘프라푸치노’가 인기 메뉴다. 미숫가루 라떼는 중장년들이 좋아한다.영덕에서 유명한 바닷가 카페는 강구항 근처의 ‘카페 봄’인데, 지난 글에서 자세히 소개했으니 이번엔 다른 곳을 찾아가보자. 병곡면 고래불에서 후포로 가는 길에 백석해변을 지나게 된다. 이곳 백석해변엔 ‘블라블라(Bla bla)’라는 카페가 있다. ‘블라블라’ 역시 프랑스어, 공허한 미사여구나 장광설을 의미한다. 헛소리, 아무 말, 두서없는 수다가 모두 ‘블라블라’다. 직장이나 학교, 사회생활에서 우리는 늘 목적과 의도와 논리가 분명한 언어로 말해야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어떤 의미도, 목적도, 논리도 필요 없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말하면 그만이다. 펜션 건물 1층에 딸린 카페인데, 이곳에서는 커피 등 음료는 물론 식사와 술을 함께 즐길 수 있다. 특히 수제등심돈까스가 맛있다. 돈까스를 먹고서 아이스커피를 들고 야외 테라스 소나무 그늘 아래 앉아 병곡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호화스런 휴식이다. 테라스는 흰돌 해변으로 곧장 이어져 있어 파도가 돌을 간질이는 소리 들으며 산책도 즐길 수 있다.포항에는 근사한 카페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흥해읍 칠포리의 ‘두 낫 디스터브(Do not disturb)’를 첫손에 꼽고 싶다. ‘방해금지’라는 이름부터 맘에 든다. 여행의 가장 큰 적은 외로움도 소매치기도 저질 체력도 아닌 ‘현실’이다. 돌아가야 할 일상, 두고 온 ‘그물’이 끊임없이 손짓하면 여행은 이미 망친 것이다. 예수를 쫓아 위대한 여행길에 올랐던 베드로도 결국엔 갈릴리 해변으로 돌아갔지 않은가. 이곳에서는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한 휴식을 즐길 수 있다. 두고 온 일상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만큼, 그저 순간에 머물게 해주는 풍경과 여유, 커피가 있기 때문이다. 카페 앞 산책로와 ‘포토존’에는 그리스 산토리니나 수니온을 연상시키는 하얀색 벽돌 조형물들이 놓여 있는데 아침 바다의 푸르름, 저녁 바다의 석양과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국적 풍경은 눈에 쾌감을 선사하고, 카페 내부에 가득히 퍼지는 빵 냄새는 후각적 쾌감을 고취시킨다. 직접 구워낸 빵을 파는데 그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말차라떼와 연유브레드가 특히 잘 어울린다. 갓 구워 따뜻한 빵을 한 입 베어 물어 빵의 고소함과 연유 크림의 달콤함이 입안에 진동할 때, 시원하고 산뜻한 말차라떼 한 모금을 마시면 마침내 미각적 쾌감까지 완성된다.경주의 ‘핫’한 카페들은 죄다 ‘황리단길’에 모여 있다. 그러나 가장 근사한 낭만은 경주의 맨 끝 바다, 양남 해변의 카페 ‘이곳, 그곳’에 있다. 1층에서는 넓은 유리창 너머 바다를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고, 2층에서는 한옥 서까래의 고풍스러움 아래,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작은 창문에 담긴 바다와 은은한 조명 불빛과 감미로운 음악이 함께 빚어내는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이곳, 그곳’의 인테리어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이곳에 앉아 호퍼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고독을 즐기며, 때로는 그곳의 안부를 궁금해 하면 그곳에서도 누군가가 이곳의 나를 그리워할 것만 같다. ‘비엔나커피’로 잘못 알려진 아인슈패너와 티라미수 케이크가 ‘이곳, 그곳’의 대표 메뉴다. 메뉴판에는 “바빠서 여유가 없을 때야말로 당신이 쉬어야 할 최적의 시간”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나는 포르투갈 남부 라고스 해변의 카페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석양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리스 산토리니의 한 ‘타베르나’(그리스 전통 카페)에 앉아 대낮부터 증류주인 ‘라키’를 마신 적이 있다. 그때 카페에서 바라본 지중해는 이 세상에 없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경북 바닷길 537km를 여행하면서 지중해보다 더 아름다운 카페들과 만났다. 더 푸른 낭만을, 더 시원하게 가슴 트이는 해방감을 만끽했다. 여행이 가장 여행다워지는 순간은, 종아리가 붓도록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가 아니라 여유롭게, 조금은 게으르게 쉴 때라는 사실을 나는 경북 바닷길의 카페에서 새삼 깨달았다.       /시인 이병철

2019-09-01

서울서 안동으로 ‘세상 하나뿐인 내 것’ 찾아서 꿈 펼쳐요

최근 세상의 하나뿐인 나만의 가방, 지갑 등을 직접 만드는 핸드메이드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이런 추세에 서울 토박이 청년이 시골 안동에 내려와 핸드메이드 가죽공방을 차려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가죽공예 교실을 운영하고 직접 만든 지갑과 가방 등을 판매하고 있다.서울 도봉구에 살던 이강일(30·안동시)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직장생활도 줄곧 서울에서 해왔다고 한다. 1년전 만 해도 평범한 무역회사에 다니던 이씨가 갑자기 연고도 없는 안동에서 가죽공방을 차린 것이다. 평소 취미로 해 온 가죽공예에 푹 빠진 이씨는 이와 관련된 사업을 구상하다가 ‘도시청년 시골파견제’를 알게 돼 지원하면서 올해 초 공방을 오픈하게 됐다.공방의 이름은 ‘Chez Cuir(쉐 뀨이에)’로 ‘가죽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도시청년 시골파견제’는 경북도와 도내 23개 시·군이 지방소멸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도시 지역의 재능 있는 청년들을 지역으로 유입시키기 위해 시작하게 됐다. 청년들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고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2017년 전국 최초로 시행한 사업이다.2017년 시범사업을 통해 3개 팀 10명을 선정해 지원했다. 지난해부터는 이 사업이 행정안전부가 공모한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사업으로 채택돼 국비 지원을 받으면서 사업 규모도 커졌다.공모 분야는 지역 자원과 특산품을 활용한 창업, 청년문화예술 창작활동, 전시, 체험 공간 조성 등 청년의 도전정신 및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업과 지역 활성화를 위한 사업 등 다양하다.안동의 경우 지난해 1기 2팀(4명)이 선발돼 현재 사업을 키워나가고 있다. 당시 평균 3.8:1의 경쟁률을 보였다. 올해도 2팀(4명)이 최종 선발돼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안동시는 올해 이 사업에 3억2천500만원(국비 9천750만원, 도비 1억1천375만원, 시비 1억1천375만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최종 선발된 청년에게는 활동비 및 사업화 자금을 1인당 최대 2년간 연간 3천만원을 지원한다. 사업화에 따른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전문가 컨설팅도 제공된다. 프로그램과 컨설팅은 경북도경제진흥원이 맡았다. 1차 년도에는 기반을 닦고 2차 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다.이씨의 경우 지난해 선발된 1기로 당시 결혼을 하고 예쁜 딸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쉽게 창업을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부인 윤선미(27)씨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이씨는 “도시 생활에 지친 나에겐 평소 농촌 지역에서 살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가정을 꾸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장으로서 쉽게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마침 청년 창업과 관련해서 파격적인 지원을 하는 도시청년 시골파견제를 알게 됐고, 부인과 상의한 끝에 창업을 결정하게 됐다”고 말했다.이어 “막상 창업을 결정한 뒤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도시청년 시골파견제를 운영하는 경북도경제진흥원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큰 도움이 됐다”면서 “사업을 시작하기에 경험이 부족한 청년들에게 꼭 필요한 컨설팅을 제공해줬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분야에 대한 교육을 선택할 수 있어 좋았다”고 덧붙였다.그는 현재 중·고등학생을 비롯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원데이클레스를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는 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방과 후 활동과 직업체험 교실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온라인 쇼핑몰도 만들어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판매할 예정이다.안동에는 이씨 외에도 세계유산 안동하회마을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 중인 김민주(25·여)씨와 사촌 동생 김태완(24)씨를 비롯해 올해 2기에 선발된 2팀이 본격적인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안동 지역에서 활동할 도시청년 시골파견제 2기에는 전통가구의 재해석하는 ‘Life the 핀아’팀과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사라졌던 필름카메라를 이용한 사진공방 ‘소조’라는 팀이 선정돼 각각의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경북도와 안동시의 청년유입 정책들은 20대 초반보다는 30대 청년들의 유입에 성과를 내고 있다. 이 청년 유입 정책이 나름대로 외지에서 경험을 쌓은 청년들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소멸 위기를 맞은 농촌 마을에서 시험하는 테스트베드가 되는 셈이다. 도시청년시골파견제에 선정된 170명 청년 가운데 25세 미만은 16.4%인 데 비해 26∼30세는 35.9%, 30세 이상도 47.7%에 달했다. 게다가 30대 이상의 기혼 청년의 유입으로 가족들이 함께 정착함으로써 인구 증가 효과도 기대된다.김광수 안동시 일자리경제과장은 “청년 유입 정책뿐만 아니라 정착으로 이어질 수 있는 다양한 시책을 추진하는 한편 청년과 주민들이 서로 협력하며 소멸 위기의 마을공동체를 살려내는 다양한 모델을 만들도록 돕겠다”고 말했다.한편 ‘도시청년 시골파견제’는 이달 현재 100명 모집에 625명이 지원해 평균경쟁률 6.25 대 1을 보인 가운데 총 94명(53팀)이 최종 선발돼 사업하면서 정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선발된 팀의 사업분야는 일반창업 33팀(62.2%), 문화예술 8팀(15.1%), 농업 및 6차 산업 7팀(13.2%), 서비스업 5팀(9.4%)으로 조사됐다. 일반창업은 카페 11팀, 드론 등 체험장 운영 8팀, 숙박(게스트하우스)·유통업 각 3팀, 음식·제조업 각 2팀, 제과제빵·애견·양조장·화장품 분야 각 1팀으로 집계됐다. 선발된 94명의 출신 지역도 경북 20명(21.3%)을 제외하면 74명(78.7%)이 도시 청년이며 대구가 29명(30.1%)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서울 19명(20.2%), 경기 11명(11.7%), 인천 3명(3.2%) 등의 순으로 수도권 출신이 33명(35.1%)이나 됐다. 경북 출신이 포함된 것은 경북 청년이 타지 도시 청년과 팀을 꾸려서 창업할 수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손병현기자 why@kbmaeil.com

2019-08-29

귀족에서 평민까지… 풍류도의 힘으로 신라 발전·통일 기여한 화랑들

‘풍류도’를 중심 이데올로기(또는 복합적 신앙체계)로 학습해 활동한 화랑들은 6~7세기 신라의 발전과 통일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그렇다면 풍류도가 가진 어떤 힘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삼국사기’와 ‘화랑세기’ 등 고문헌은 “화랑 가운데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도 여기서 생겼다. 무열왕(武烈王·김춘추)과 경문왕(景文王)도 화랑 출신이었다. 신라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는 화랑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사다함과 김유신처럼 전투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고, 제사를 받들거나, 향가(鄕歌)를 짓는 등 예술적으로도 높은 성취를 이뤄냈다”고 기록하고 있다.한국민족사상학회가 발행한 정경환과 이정화의 논문 ‘풍류도의 내용과 의미에 관한 연구’는 풍류도가 “우리 민족의 뿌리 사상”이며, “단군사상을 기원으로 하여 이를 보다 체계화하고 현실화한 우리의 고유한 사상”이라고 주장한다.이에 덧붙여 풍류도의 성격을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성 △조상에 대한 신성사상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원대한 생명주의와 평화적 원융사상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무애(自由無碍)의 길 추구 등 4가지로 규정하고 있다.이 논문에선 풍류도가 신라사회의 정신을 풍요롭게 하고, 나아가 한민족의 핵심적 전통사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까지 드러난다. 아래 간략하게 요약한다.“풍류도는 우리의 시조 사상인 홍익인간을 기초로 당시 어떤 사상보다 인간을 본위로 하는 심오한 사상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대자연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인간을 넘어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원융하고 자연스러운 사상의 발로다. 상생과 조화론에 근거한 평화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도 풍류도의 특징이다. 풍류도의 근저에는 적극적 평화에의 염원이 스며있다. 덧붙여 풍류도 사상은 조화주의를 지향한다. 갈등과 긴장을 거부하고, 화해와 융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풍류도와 벗하여 탄생한 화랑들은…‘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제3권 ‘신라의 체제 정비와 영토 확장’은 “인간을 본위로 하는 심오한 사상성”을 가진 풍류도를 교육 시스템의 한 방법으로 받아들인 화랑의 탄생과 구성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화랑도는 신라사회의 독특한 청소년 조직으로서 국가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화랑도의 기원은 삼한사회의 연령집단에서 찾을 수 있는데, 화랑도의 군사 훈련과 산천 순례 활동 등이 여기서 유래하였다고 판단된다. 화랑도 창설의 목적은 당시의 시대적 과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군사 인력을 비롯한 다양한 인재의 양성과 확보에 있었다…(중략)화랑도의 구성원은 대부분 15~18세까지의 청소년들인데, 화랑과 낭도의 신분이 서로 일치하지는 않았다. 화랑집단의 중심인물인 화랑(국선·풍월주)은 낭도의 추대를 받아 선출되었으며, 진골 귀족 출신이었다는 점에는 의문이 없다…(중략)화랑도는 진골 귀족부터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왕경 안의 여러 신분·계층을 포괄한 조직체로 당시의 엄격한 신분제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갈등과 알력을 어느 정도 완화·조절해 사회통합에도 이바지했다고 판단된다.”신라의 화랑들은 ‘유교·불교·도교를 망라한 넓은 차원의 이념 체계’라 할 수 있는 풍류도의 영향 속에서 성장했다고 다수의 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논문 ‘풍류도의 내용과 의미에 관한 연구’ 역시 “원융하고 자연스러운 사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풍류도의 사상적 해석 범위가 좁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다.이 추정과 논지가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느껴진다면 화랑을 포함한 당대 청년들이 지향할 바를 구체화시킨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세속오계’는 화랑들이 신라의 발전과 통일에 기여하는 방법을 명문화한 행동지침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화랑도 교육에서는 물론이고 그것이 퍼져나가 사회생활 일반에서 요구된 기본 정신 전반은 대체로 ‘세속오계’로 말끔히 정리되었다.‘세속오계’는 진평왕대의 승려 원광(圓光)이 중국 유학을 끝낸 후 돌아와 청도의 한 사찰에 머물 때 마음을 올바르게 하고 몸 닦기를 희망하는 귀산(貴山)과 추항(7B92項)이라는 두 젊은이가 찾아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도리를 요구하자 이에 응답해서 주었던 내용이다.”◆ 신라사회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된 ‘세속오계’대부분의 독자가 알고 있겠지만, ‘세속오계’의 주요 내용은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이다. 여기엔 당시 신라의 지배층이 젊은이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요약돼 담겼다. 이 책에 따르면 ‘세속오계’는 청년들 사이에서는 물론, 신라사회 일반에서 지켜야 할 덕목으로 빠르게 확산됐다고 한다.많은 사람들이 ‘세속오계’를 화랑도 구성원들만의 실천 덕목으로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에 의하면 “화랑도 조직을 거친 성원들의 철저한 실천적 행위를 통해 (세속오계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진 탓으로 그렇게 인식되었을 따름”이라는 것.사실 화랑이 지켜야 할 덕목이 ‘세속오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기본 중 기본’으로 ‘세속오계’를 받들어야 했고, 동시에 당대의 신라가 요구하는 다른 여러 덕목도 체화(體化)했을 것으로 사학자들은 추측한다. 그처럼 기억하고 준수해야 할 것들이 많았으니, 화랑과 낭도들의 삶이란 결코 쉬운 게 아니었을 듯하다.‘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의 기록에 따르면 화랑 집단의 융성기는 진흥왕(재위 540~576)에서 문무왕(재위 661~681)에 이르는 1세기 사이였다. 화랑 제도는 신라 말기까지 이어졌고, 그 기간 화랑의 숫자도 200여 명에 이른다.김태준의 논문 ‘화랑도와 풍류정신’은 “화랑은 선택받은 젊은이의 집단이었고, 나라에 크게 쓰이도록 훈련받은 청년들의 무리(낭도)였다”며 화랑과 낭도가 중점적으로 교육 받은 게 어떤 것일지 추정하고 있다. “화랑과 그 무리는 영예에 걸맞은 교과로 훈련받았다”는 전제를 달고서다.이 논문은 3가지를 지목한다. △도의(道義)로 서로 연마한다 △노래와 춤으로 서로 즐긴다 △산천을 찾아 노닌다는 게 바로 그것. 이는 ‘삼국사기’가 풍류의 도(道)를 설명하는 방식과도 맥이 닿아 있다. 보다 상세하게 알아보자.◆ ‘풍류도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김태준은 화랑도와 풍류의 제1정신을 이렇게 설명한다.“결국 화랑의 도의, 곧 풍류의 핵심은 공자가 가르친 충효의 정신과 노자가 가르친 무위와 말없음의 정신, 아울러 석가가 가르친 선을 받들어 행하는 정신을 두루 갖추어 가진 것”이라고. 이어서 이런 부연을 내놓는다.“‘도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연마하는 것이며, 이야말로 화랑도·풍류도의 첫 번째 덕목이요, 가르침을 베푼 목표였다.”‘노래와 춤으로 서로 즐김’을 ‘도의’와 쌍벽을 이루는 화랑의 정신 교과였다고 쓰고 있는 ‘화랑도와 풍류정신’. 여기엔 다음과 같은 서술이 이어진다. 화랑들이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노래와 춤만을 즐겼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화랑의 풍류에서는 노래와 춤을 서로 즐겼다고 했지만, 상고로부터 제천의식과 국중대회(나라가 주관하는 대규모 제천행사)에서 연일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는 것은 즐기기보다 먼저 하늘에 제사하고 신과 일체를 이루는 신내림의 체험을 중시한 것이다. 그 풍속은 무속에서 보이듯이 노래와 춤으로 신에게 제사 드리고, 이를 통해 신과 인간이 하나로 일체를 이루는 체험이었을 것이다.”신라 당대의 화랑과 낭도들은 노래와 춤이라는 형식을 통해 ‘신내림’을 체험하면서 스스로가 풍류의 주체가 되는 경험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춤과 노래란 일반적인 유흥이 아니라, 신령한 것들과 교감하는 방식이었던 게 아닐까?화랑의 마지막 교과로 김태준이 제시하는 건 ‘산천을 찾아 노닒’이다. 이 역시 단순히 좋은 경치를 즐기며 희희낙락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랑들에게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란 일종의 수련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화랑도와 풍류정신’도 이를 감안한 듯 아래와 같이 덧붙이고 있다.“국토 순례는 화랑과 풍류도의 실천교과였다. 명산대천의 산신을 숭상하는 신앙적 순례이며, 자연사상과 국토사상의 수련이며, 말할 것도 없이 신체 수련의 노닒이기도 했다. 자연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신비감을 동시에 가져다줌으로써 원시적인 토속신앙이 발생·발전하는 곳이다.”신라가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형 국가로 바뀌는 과정에서 화랑들은 작지 않은 몫을 해냈다. 이들 화랑의 실천·지도 이념이었던 풍류도를 연구하는 것은 신라의 권력 이동과 사회 변화 과정을 탐색하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임이 분명해 보인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29

셀 수 없이 오래된 시간의 흔적과 만나다

잠시 존재했다가 영원히 사라진 제국은 인간의 상상력을 민감하게 자극한다.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쯤 대서양과 지중해를 가르는 지브롤터 해협에서 화려한 고대 문명을 꽃피웠다는 설화 속 섬나라 아틀란티스(Atlantis)가 그렇고, 2천500년 전 지구의 30% 이상을 지배했다가 서서히 몰락해간 페르시아(Persia) 또한 그렇다.두 왕국을 떠올릴 때면 허구와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 거대한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촛불처럼 초라하게 소멸해간 한 민족의 발자취가 자연스레 그려진다. 그걸 더듬는 행위는 쓸쓸하고 허허롭다.의성에도 삼한 시대 초기엔 강력한 제국이 존재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 등에 흔적이 남아있는 조문국(召文國)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상 의성읍 남쪽에 위치한 금성면에 조문국의 유적지가 다수 분포돼 있다. 조문국의 당시 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과 청동기로 제작된 각종 유물들. 이 두 가지는 당시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조문국을 통치했음을 알려준다. 초기 고대국가로의 발전을 지향했던 조문국 유적지 일대에선 신라의 금관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가진 금동관이 다수 출토됐다. 또한 왕족과 귀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古墳)도 존재한다. 조문국은 인접한 나라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충지에 자리했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국가의 멸망을 앞당기는 이유가 됐다는 게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삼국사기’는 이 사실을 이렇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벌휴왕 2년(185)에 파진찬 구도(仇道)와 일길찬 구수혜(仇須兮)가 조문국을 정벌했다.”사라진 제국의 한가운데 자리한 ‘의성 조문국박물관’은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역사에 관심 있는 여행자들을 반겨준다. 기자가 찾은 날도 입구를 지키는 박물관 직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2013년 문을 연 조문국박물관에선 조문국의 생성에서부터 소멸까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의성의 역사·문화유산을 보존해 전시하고, 학술 연구와 교육 프로그램까지 진행하는 곳”이라는 게 박물관측의 설명. 조문국박물관은 민속유물전시관과 고분전시관까지 갖추고 있다. 보물 제880호인 ‘정만록’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3호 ‘울릉도 사적’, 학미리 1호 고분에서 나온 은제환두대도(銀製環頭大刀), 붉은 간토기, 돌 화살촉, 탑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금동 신발, 나비 모양 관 장식 등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지금 조문국박물관을 찾는다면 특별기획전 ‘조문국의 부활’도 관람이 가능하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지도 속에 선명하게 기록된 ‘召文(조문)’이란 글자를 볼 수 있다. 이는 사라진지 2천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선 조문국이 살아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아이들과 함께 방문했다면 ‘어린이 고고 발굴 체험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보는 것도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될 듯하다. 체험을 원한다면 사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조문국박물관 홈페이지 http://jmgmuseum.usc.go.kr관련 문의: 054-830-6915조용하고 호젓해서 좋다. 번잡한 해변이나 유명 관광지의 호객 행위에 지친 사람들이라면 의성군 빙계계곡을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눈앞에서 청량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맑은 물이 답답한 도시 생활에 찌든 눈과 귀를 행복하게 해준다. ‘경북 8경’의 하나인 춘산면 빙계계곡을 찾은 날. 기묘한 형상의 바위 사이로 숨어든 젊은 남녀 몇몇이 뜨거운 여름을 더 뜨겁게 달구며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물장구치며 깔깔거리는 그들의 웃음이 보기 좋았다. 독특한 이 계곡의 이름은 한여름에는 얼음이 얼고, 추운 겨울엔 뜨거운 바람이 불어온다는 빙혈(氷穴)과 풍혈(風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유쾌하고 재밌는 작명이다. 참고로 ‘빙계 8경’은 용추, 물레방아, 바람구멍, 어진바위, 의각, 석탑, 얼음구멍, 부처막이다. 의성 중심가에서 차를 몰아 빙계계곡으로 들어서면 입구에서 빙계서원(氷溪書院)이 환하게 웃으며 여행자에게 손을 내민다. 권위적이지 않은 시원스런 처마와 널찍한 대청마루가 인상적이다. 고풍스러운 빙월루(氷月樓)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1556년 김안국과 이언적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빙계서원은 선조 때 사액서원(賜額書院·왕이 편액을 내린 서원)이 됐다. 이후 유학자인 김성일, 유성룡, 장현광을 추가로 배향(配享)했다고 한다.아직 여름휴가를 다녀오지 못한 독자들이 있다면 시원한 계곡과 조선시대의 역사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빙계계곡과 빙계서원으로의 여유로운 여행을 권하고 싶다.20세기 초반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이 묘사해놓은 풍경 같았다. 짙푸른 풀밭이 드넓게 펼쳐졌고, 그 위로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거대한 봉분 수백 기가 솟아 있다. 쏟아지는 여름 햇살 때문인지 오가는 사람은 드문데, 도도한 자태를 뽐내는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가 불어오는 바람에 고대 왕국의 귀족처럼 여유롭게 흔들렸다. 지상의 풍경처럼 보이지 않았다.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의 ‘고분군(古墳群)’은 약칭 ‘금성산 고분군’ 혹은 ‘대리리 고분군’으로 불린다. 고분이 위치한 지역은 까마득한 옛날 존재했던 조문국의 도읍지로 짐작된다. 현재의 금성면 대리리, 학미리, 탑리리 일대다. 21명의 왕이 369년간 지배권을 행사했던 조문국. 금성산 고분군은 이 왕국의 대표적 유적지다. 모두 200여 기의 고분이 높이를 달리하며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경덕왕(신라의 경덕왕이 아닌 조문국의 왕)의 능(陵)과 고분전시관 등이 방문자를 기다린다.고분전시관은 지난 2009년 발굴된 대리리 2호분의 내부를 재현했다. 출토된 여러 점의 유물을 볼 수 있고, 2천 년 전 매장 풍습 중 하나인 순장(殉葬·왕이나 귀족이 사망하면 산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장례법) 문화에 관해서도 설명해주고 있다.이곳은 분명 일종의 ‘공동묘지’임에도 앞서 말한 것처럼 주위 풍광이 빼어나 산책하는 이들은 그 사실을 깜빡깜빡 잊게 된다. 봄에는 작약이 화려한 꽃을 피워 아름다움과 운치를 더한다고 한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잠든 프랑스 파리의 묘지 ‘페르 라셰즈(Pere Lachaise)’ 못지않다. 만약 내년 5~6월쯤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 있다면 금성산 고분군의 소나무와 작약꽃을 두 사람 사랑의 증인으로 세우고 사진을 찍어보면 어떨까?약사전, 석가여래좌상 등 보물급 문화재가 몸을 숨긴 절은 물론 좋았다. 더불어 사찰로 올라가는 길 역시 매력적이었다.고운사(孤雲寺)는 신라 때 유교·불교·도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던 학자 최치원(857~?)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진 절이다. 그는 두 명의 승려와 함께 가운루와 우화루를 지었다. 681년 창건 당시엔 고운사(高雲寺)라 불렀는데, 이후 최치원의 호가 사찰의 이름이 됐다고 한다.‘명당 중 명당’이라는 반쯤 핀 연꽃을 닮은 지대에 창건된 고운사는 도도한 세월의 흐름을 뛰어넘어 의성군 단촌면에 당당한 위세를 자랑하며 우뚝 서있다.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절 아래에서부터 걸어온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수백 년 된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푸른 그늘’을 이야기했다. 고운사로 오르는 길은 시원스럽고 미려하다.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여름날, 더없이 좋은 선물이다.사찰 경내엔 진분홍 배롱나무 꽃이 한창이었다. 그 붉은색이 초록색의 수목과 잘 어울렸다. 어디선가 풍경 소리가 들려왔고, 떠들썩하고 분주했던 마음 한 켠이 물속처럼 고요해졌다.규모가 제법 큰 절이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면 곳곳에서 흥미로운 유물을 만나게 된다. 산을 내려온 청설모도 한두 마리 눈에 띄었다.동승(童僧)의 순정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고 싶은 관광객이라면 고운사 주변 풍광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것이 분명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28

‘마늘 인문학’으로 진화, 세계로 뻗어 나갈 의성 마늘

의성은 마늘이다. ‘의성마늘 최고!’는 팩트다.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생산량, 가격 모두 전국 최고다.의성은 마늘 왕국이다. “조선 11대 중종 21년(1526년, 약 470여 년 전)에 현 의성읍 치선리(선암부락)에 경주 최씨와 김해 김씨 두 성씨가 터전을 잡게 되면서 재배되었다”고 한다. 의문은 남는다. 중종 21년 무렵 재배한 마늘은 어떤 것일까?단군신화에도 마늘은 등장한다. 가장 오래된 ‘마늘’이다.“(전략)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한 굴에서 살며 늘 환웅에게 사람되기를 빌었는데, 한번은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줄기[艾 一炷, 애 일주]와 마늘 20개[蒜 二十枚, 산 이십매]를 주면서 이르기를, (후략)”마늘은 ‘산(蒜)’이다. ‘산’은 오늘날의 마늘과 다르다. 산은 마늘이면서 ‘달래’다. 단군신화를 전한 ‘삼국유사’의 ‘산(蒜)’은 마늘이 아니다. 달래 혹은 산마늘(명이나물)이 아닐까, 라고 추정한다. ‘마늘 20개’는 ‘산 20매(枚)’의 번역이다. 20줄기인지, 쪽으로 따져서 마늘 20쪽인지도 불분명하다.조선 중기까지의 마늘[蒜, 산]은 오늘날의 ‘쪽’이 있는 마늘과는 다르다. ‘삼국유사’를 기록한 고려 시대에도 오늘날의 ‘쪽 마늘’은 없었다.조선 후기부터 마늘은 더 혼란스럽다. 마늘 종류(?)가 넷으로 늘어난다. 산(蒜)이 있다. 소산(小蒜), 대산(大蒜)이 있다. 소산은 달래, 대산은 오늘날의 마늘과 비슷한 것으로 여긴다. 여기에 ‘독두산(獨頭蒜)’이 있다. ‘독두산’은 머리가 하나인 ‘외톨마늘’이다. 달래보다 크기가 큰 ‘마늘 같은 것’으로 짐작한다. ‘외톨마늘’로 번역하지만 정확한 모양은 그리기 힘들다.홍만선의 ‘산림경제’에는 마늘을 심고 가꾸는 상세한 방법도 나와 있다.세 차례를 잘 갈고 호미로 고랑과 두둑을 치고서 두 치씩 띄워 한 구덩이를 둔다. 짚신 버린 것을 소변에 담갔다가, 종자를 속에다 넣고 건 흙을 곁들어 심고서 위에다 거름을 두텁게 하면, 크기가 주발[碗]만큼씩 하다. 한정록/ (중략)/9월 초순에 마늘쪽을 촘촘하게 심었다가, 2월 무렵에 이르면 땅을 두어 차례 갈고서 두둑마다 건 흙을 수십 짐씩 붓고, 다시 연장으로 뒤적거려서 골고루 긁고 두 치 가량에 구덩이 하나씩을 내고 마늘 묘종을 한 포기씩 심으며, 가물 때는 항시 물을 준다. - ‘거가필용’‘한정록’은 조선 중기 문인 허균(1569~1618)이 편찬한 책이다. 중국의 사료를 중심으로 엮었다. ‘거가필용’은 중국 자료다. ‘산림경제’는 홍만선이 엮었지만, 중국 자료가 많다. 위의 마늘 기르는 법도 마찬가지다. 상당수가 중국 측 자료를 참고한 것이다.의성군에 ‘마늘의 진화’를 기대한다. ‘의성 마늘’은 이미 부동의 1위다. 마늘 자료, ‘마늘 인문학’도 부동의 1위가 되기를. ‘의성마늘’이 한반도로 넘어서 전 세계로 뻗어 나가기를 기대한다. 음식, 식재료는, 상상력과 고증을 바탕으로, 인문학으로 진화한다. 의성군이 ‘마늘 인문학’에서도 최고, 최대, 최초가 되기를 기대한다. 마늘은 인류가 널리 사용하는 식재료 중 하나다. 의성은 마늘에 대해서는 으뜸이다.의성은 마늘이다. 대부분 음식에 마늘을 넣는다. “의성 마늘을 썼다”고 표기한다. ‘주영자마늘닭’과 ‘의성마늘치킨’도 마찬가지다. 이름에 ‘마늘’이 들어 있다. ‘마늘치킨’이다. 두 마늘치킨 집은 묘하게 다르다. ‘의성마늘치킨’은 의성읍내에 있다. 번화가는 아니지만 ‘읍내’의 장점이 있다.‘주영자마늘닭’은 단촌면에 있다. 읍내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시장 한 귀퉁이에 있다. 가게에 들어서면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가 있다. 주인이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전화해야 주인이 나타난다. 한적한 시골 음식점이다. 두 집 모두 음식 내공은 깊다.‘주영자마늘닭’은 방송인 ‘ㅂ’씨가 소개하면서 널리 유명해졌다. “방송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우리 집 단골이었다”고 말한다. ‘ㅂ’씨가 오래전부터 드나들다가 어느 날 방송을 했다. “내가 ‘ㅂ’씨보다 한수 위”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음식이 깔끔하고 맛있다. 더 바랄 게 없다. 겉이나 속이 모두 부드러운 편. 튀김옷의 단맛과 고기의 고소한 맛이 잘 어울린다.‘의성마늘치킨’은 주문한 후 20~3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 “무슨 치킨을 기다려야 먹을 수 있나?”라고 불평하지만, 치킨을 받아든 순간 “아! 이래서”라고 긍정한다. 겉이 파삭하고 속은 촉촉한 치킨이다. 이른바 ‘딥 프라이드(deep fried)’ 방식으로 튀겨낸 치킨이다. 튀김옷을 입힌 닭고기, 튀김 기름의 온도차이가 정확해야 한다. 숙련된 이가 제대로 만든 치킨이다. 식힌 후 뚜껑을 닫으면 제법 시간이 흘러도 튀김의 파삭함과 맛은 쉬 변하지 않는다.‘의성읍 한우회 영농조합 직영점_의성마늘한우프라자’라고 크게 써 붙였다. 영농조합에서 직영,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정육점 식당’ 식이다. 손님이 가게 입구에서 고기를 고른다. 불판이 마련되고 손님이 선택한 고기를 불판 위에 올린다.마늘은 불고기 양념의 주재료다. 궁합이 맞는다. 의성 산 마늘을 고기와 같이 굽거나 고기에 올려서 먹는다. 의성마늘은 대체로 작다. 매운맛과 단맛의 조화가 좋다. 마늘즙도 풍부하다, 일교차가 심한 곳에서 자란 한지형이다. 크기가 작으니 자르지 않는다. 통째로 먹어도 과하지 않다. 고기는 싱싱하다. 숙성의 맛보다는 싱싱함이다. 씹는 질감이 좋다.‘남선옥’은 전통 재래시장 옆에 있다. 의성에서도 노포다. 60년을 훌쩍 넘겼다. 지금 주인이 운영한 세월도 30년을 넘겼다. 메뉴는 딱 하나. ‘소고기 양념 불고기’다. 가격도 저렴한 편. 120g에 1만 원(2019년 8월 현재). 3인분씩 내놓는다. 양념이지만 마치 생고기 같다. 고기에 대한 주인의 자부심은 높다. 굽기 전 생고기를 먹어보라고 권한다. 석쇠 위의 고기를 돌돌 말면서 익히는 것이 요령. 마치 양념하지 않은 듯한 고기가 숯불 위에서 빠르게 익는다. 육즙도 빠지지 않고 그대로 배어 있다. 추천!이른 아침. 밥 먹을 곳이 없다. 의성은 깊은 내륙이다. 아침에 문을 여는 식당도 별로 없다. ‘의성진식당’을 추천한다. 이른 아침 문을 연다. 가게 입구에는 “씨름 선수들이 방문했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의성마늘을 비롯해 국산 농산물을 사용한다고 적혀 있다. 다슬기, 경북 북부에서는 ‘골부리’다. ‘골부리 국 명산지’인 안동 길안면과 맞붙어 있다. 의성읍 인근에도 크고 작은 개울이 있다. 다슬기국, 골부리국을 권한다.추어탕도 좋다. 미꾸라지를 삶아서 뼈 등을 추려낸다. 곱게 간 미꾸라지 살에 얼갈이배추나 청방배추 등을 넣고 끓인다. 미꾸라지 형체가 보이지 않으니 추어탕이라 여기지 않는다. 된장 등으로 비린내를 잡는다. 부족하면 산초가루를 넣는다. 농촌형 추어탕이다. 씨름 선수들이 찾는 이유가 있다. 인심이 넉넉하고 친절하다. 좋은 식재료를 골라 쓴다. 평범한 밥상이지만 깔끔하고 넉넉하다.의성읍내 재래 전통시장 입구. 연탄 화덕이 서너 개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석쇠 위, 양념한 닭발이 하나 가득이다. 연탄 위에서는 연신 연기가 피어오른다. 연탄불로 닭발을 굽는다.의성은 산골이다. 해가 일찍 진다. 저녁 시간이면 마땅히 갈 곳도 없다. ‘원조닭발’. 닭발, 닭 모이주머니(닭똥집)로 소주잔 기울이기 좋다. 특별한 맛을 기대하지는 말 것. 이제는 사라진, 연기 폴폴 날리는 연탄구이 닭발, 모이주머니를 먹을 수 있다. 분위기는 푸근하다.의성에서 생산되는 식재료를 사용한다. 들깻잎도 인근 밭에서 뜯어온 것이다. 새색시처럼 단아한 마늘도 마찬가지. 쫄깃한 닭발, 모이주머니에 싱싱한 들깻잎, 마늘, 된장이면 소주, 막걸리 안주로는 그만이지 않을까?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08-28

맛·건강 모두 잡을 알찬 추석선물 여기 다 있네!

◇상주곶감상주곶감은 지역 대표 특산품으로 시장규모 3천억 원을 자랑하고 있으며 전국 생산량의 60%를 차지하고 있다.빛과 바람과 시간이 빚어내는 상주곶감은 높은 당도와 풍부한 영양분을 가지고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대한민국 대표 전통 간식이다.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하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은 쫄깃하고 달콤한 식감뿐만 아니라 각종 영양소가 듬뿍 들어 있어 감기예방이나 숙취해소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위생적으로 처리된 상주곶감은 다양한 형태로 포장·판매되고 있으며 상주곶감유통센터나 온라인 등을 통해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미국 등 12개국으로 수출도 하고 있다.◇상주쌀상주쌀은 전국 9위, 도내 1위의 생산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비옥한 토양과 청정수를 기반으로 재배 생산되고 있다.농촌진흥청이 품질을 인정한 탑라이스는 엄격한 관리로 밥맛이 뛰어나며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특징이다.재배에서 가공 포장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기술력이 녹아 있는 상주쌀은 품질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포장 단위도 5㎏, 10㎏, 20㎏ 등으로 다양하게 준비돼 있어 추석 선물용으로는 안성맞춤이다. 지역농협과 온라인 등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상주배와 포도10~13 브릭스(brix)의 당도를 보이는 상주배는 지역 대표 농특산물로 과즙이 많고 육질이 연하며 향이 진한 것이 특징이다.특히, 상주지역에는 미국 농무성 직원이 상주하며 관리하는 대미배수출단지가 있을 정도로 품질과 위생 등 모든 면에서 세계적인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다.고랭지 포도 특구에서 생산되는 상주 포도는 품종에 따라 17~20brix의 높은 당도를 나타낸다. 신품종인 샤인머스켓은 망고향이 나는 청포도 품종으로 18brix 내외의 당도를 보여 최근 고부가가치 품종으로 인정 받고 있다.또한 저온에 보관할 경우 최대 3개월까지 저장이 가능해 수출에 적합한 품종이며, 씨가 없고 껍질째 먹을 수 있어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소비층이 두텁다.배는 미국과 네델란드 등 13개국으로, 포도는 베트남 등 15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곶감은 상주곶감유통센터, 쌀은 상주RPC, 포도는 모서농협, 배는 외서농협을 통해 구매할 수 있다.◇영지버섯이란영지버섯은 중국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위해 즐겨 먹은 진귀한 약재 가운데 하나다. 모양이 특이하고 효능이 영험(靈驗)한 버섯(芝)이라고 해서 ‘영지(靈芝)’라고 부른다. 콜레스테롤 억제·항암 작용·간 기능 개선·혈당 강하·혈액 정화·노화방지·생리활성화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약효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저칼로리에 식이섬유가 풍부해 최근엔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인기가 높다. 칠곡군에서 생산된 영지버섯은 고품질 유기농 상품으로 소비자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면서 한가위 명절 선물로 인기를 끌고 있다.◇영지버섯 상품화 성공칠곡군 강소농 농가 ‘엄지영지 버섯’(대표 오순기)에서 생산되는 특허제품인 큐브영지버섯, 큐브원물 선물세트, 영지버섯 진액, 누룽다욧 등이 있다. 이러한 상품들이 탄생하기까지에는 오순기(55) 엄지영지 버섯 대표의 노력이 있었다.오 대표는 2015년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칠곡군으로 귀농해 버섯 농사 및 연구에 몰입했다. 그 결과 오 대표는 큐브영지버섯·영지누룽지·천연영지수제비누 등 특허기술등록 3건을 비롯해 상표등록 2건, 포장디자인의장출원 2건의 지적재산권을 보유한 영지버섯 전문가가 됐다. 그는 영지버섯 자실체 배면에 칼집을 넣어 건조하는 기술과 기계를 개발해 상용화에 성공했고, 단순포장 슬라이스 상품에서 영지버섯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소비자가 손쉽게 큐브조각으로 떼어서 영지차를 우려내 음용하기 쉽게 했다. 또 다이어트 간식용 영지누룽지를 개발해 약용으로만 활용하던 영지버섯의 식품화에도 성공했다.◇강남주부 입맛 사로잡은 영지버섯‘엄지영지 버섯’의 다양한 상품화는 현재 서울 강남주부들의 입맛까지 사로 잡았다는 평가다.‘영지 누룽다욧’은 식감이 연하고 고소해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간식으로도 좋고, 아침을 대용하는 건강 간편식으로 인기가 높다. 입소문이 전해지자 엄지영지 버섯은 대한민국 농협을 대표하는 농협양재하나로클럽에 지난 3월 진출했다. 또 롯데호텔, 농협온라인 쇼핑몰, 위메프, 고속도로 휴게소 등으로 판매망이 확대되고 있으며, 롯데호텔은 추석을 맞아 명품선물전에 엄지영지 버섯을 포함시켜 호텔로비에서 전시하고 판매한다. 인터넷으로 구매하려면 스마트스토어(smartstore.naver.com), 쿠팡(coupang.com)에 ‘엄지영지’를 검색하면 된다. 자세한 문의는 010-7196-2258로 하면 된다.◇문경사과문경사과는 밤낮의 일교차가 매우 크고 비옥한 토질과 기후, 청정자연환경에서 재배돼 육질이 단단하고 향이 짙으며 당도가 높아 꿀사과라 불린다. 사과의 주류는 ‘부사’이다. ‘감홍’은 평균당도 15브릭스보다 높은 18브릭스로 전국 최고의 당도를 자랑한다. 매년 열리는 문경사과축제의 주력상품으로 등장하고 있다. 문경농·특산물직판장에서는 햇사과도 맛볼 수 있으며 문경사과로 만든 사과즙도 만날 수 있다.◇문경오미자문경오미자는 백두대간 자락 300m 이상의 일교차가 큰 청정환경에서 재배돼 선홍빛의 고운 빛깔을 띠고 있다. 오미(입안에 느끼는 다섯가지의 맛)가 조화롭고 품질이 우수하다.조선 초기 한의학 서적인 의방유치(醫方類聚)에서는 ‘오장의 기운을 크게 보하며, 갈증을 멈추고 설사와 이질에 효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강장작용이 탁월하며, 호흡중독에 효과가 좋고 심장활동을 도와 혈압을 조절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결과가 있다. 또한 간기능개선과 유방암에 대한 항암효과도 입증되고 있어 건강식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생오미자, 오미자당절임 등 다양한 상품을 만날 수 있다.◇문경약돌돼지고기약돌돼지는 거정석(약돌)을 가공해 사료첨가제로 급여하는 방법으로 키운 돼지이다.불포화지방산과 필수아미노산의 함유량이 높다. 셀레늄이 함유돼 면역기능 증진 및 중금속 배출효과도 높다.◇표고버섯표고버섯은 10대 항암음식 중 1위로 지정됐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소 고혈압, 동맥경화, 고지혈증 등의 예방 및 면역력 강화, 다이어트, 변비예방에도 좋다.문경특산품 구매는 문경농특산물 직판장(문경새재, 문경휴게소)와 온라인 새재장터(www.saejaemall.com) 등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추석맞이 농·특산품, 시음, 시식 및 특별 판매 행사도 문경새재에서 평일 및 주말에 있을 예정이다.◇샤인머스켓김천은 전국 최대 포도 주산지로 샤인머스켓, 거봉, 캠벨얼리 등 다양한 품종의 포도가 재배되고 있다. 지속적인 포도분야 시설현대화사업 및 스마트팜 보급으로 고품질 포도생산을 위한 기반이 잘 조성돼 있다. 또한 최고의 재배기술을 보유한 다수의 농가를 중심으로 재배기술 확산 및 품질고급화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포도는 김천포도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다.최근에는 소비 패턴이 당도가 높고 껍질째 쉽게 먹을 수 있는 포도가 선호를 받으면서 김천시는 이러한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2014년부터 샤인머스켓을 도입했다. 샤인메스켓은 씨가 없고 식감이 아삭한 것이 특징이며, 머스켓 향과 더불어 껍질째 먹을 수 있어 소비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보구성이 우수해 수출적합 포도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샤인머스캣 껍질에는 항암효과가 탁월한 레스베라트롤 성분이 들어 있어 암세포 증식을 막고 암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풍부한 칼슘은 골다공증 예방에 도움이 되고, 폴리페놀은 심장질환이나 혈관질환 예방에 효과가 있다.◇복숭아김천 복숭아는 추풍령 고개가 찬바람을 막아주어 평균 기온이 높고 토양 또한 배수가 양호한 사질양토에 자라 당도가 높고 품질이 좋다. 복숭아는 알칼리성 식품으로 면역력을 키워 주며 수분이 많고 비타민이 풍부해 ‘도화미인’이란 말과 같이 피부에 좋은 과일로 알려져 있다. 김천 자두 명성에 가려 타 지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김천노다지 장터(김천시 농산물 쇼핑)김천노다지장터는 김천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직접 운영 지원해 김천시 농업인의 우수 농축산물을 중개 홍보하는 사이트로, 김천지역의 우수한 농축산물을 한 곳에서 구매할 수 있다.김천 농민들과 소비자들이 직접 거래를 하는 방식으로 중간 유통단계가 없어 질 좋은 농축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김천노다지 장터(http://www.gcnodaji.com/index.php)에는 현재 106농가가 입점해 있다./곽인규·김재욱·강남진·김락현기자

2019-08-28

“청년이 살아야 안동이 산다”… 2030 중심 일자리 창출 박차

안동시의 20∼30대 청년 인구는 2015년 3만8천300여 명이던 것이 해마다 1천여 명씩 줄어 지난해 3만4천300여 명으로 나타났다. 이에 안동시는 지역의 청년 감소 폭을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다양한 청년 중심 일자리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안동시는 올해 청년 일자리 9개 사업에 국·도·시비 포함 총 37억원(시비 10억9천500만원)을 투입해 청년 중심의 정책을 선도적으로 발굴·육성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선제적 대응 전략을 펼치고 있다.우선 시는 행정안전부의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 공모사업’의 일환으로 △경북형 사회적 경제 청년일자리 창출 사업 △도시청년 시골파견제 △청년마을일자리 뉴딜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 사업은 경북도가 앞서 지난해 행정안전부가 주관한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 공모사업’에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국비 266억원을 확보함에 따라 추진됐다. 이 사업은 기존 국고보조사업 방식을 벗어나 지자체에서 자율적으로 지역 자원을 활용, 주도적으로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상향식(Bottom-up)이다.시는 또 지역 청년들의 창업을 돕는 △안동시 청년예비창업 지원 사업 △경북 북부권 청년창업지원센터 지원 사업 등도 펼치고 있다.이 밖에도 현장 중심으로 실질적인 청년들의 취업을 돕는 △중소기업 인턴사원제 △대학생 공공기관 직무체험 지원 사업 △1社-1청년 더 채용 릴레이 운동 △대학일자리센터 지원 사업 등이 안동시의 대표적 청년 일자리 창출 사업들이다.■ 경북형 사회적 경제 청년일자리사회 양극화, 높아지는 실업률, 복지·안전과 같은 사회안전망 확충 등은 우리 사회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다. 경제적 문제와 사회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최근 사회적 경제가 그 실마리가 되고 있다.이런 가운데 안동시는 청년을 대상으로 지역 정착을 유도해 직무능력 개발과 경력형성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적 경제 기업으로의 취·창업 장려를 통해 지역경제 및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경북도의 지역주도형 일자리 사업인 ‘경북형 사회적 경제 청년일자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시는 이 사업에 일자리 예산의 절반에 가까운 17억7천590만원(국비 8억2천600만원, 도비 4억7천495만원, 시비 4억7천495만원)을 투입하고 있다.안동시는 24개 기업 70명의 청년일자리가 선정됐다. 선정된 기업은 고용청년 1명당 인건비 연 2천400만원, 정착지원금 연 420만원 한도 내에서 최대 월 215만원을 보조금으로 지원받는다. 기업은 인건비의 10%를 부담한다.■ 도시청년 시골파견제‘도시청년시골파견제’는 경북도가 인구소멸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도시지역의 재능 있는 청년들을 지역으로 유입시키기 위한 대표적인 청년 유입 정책 사업이다. 이를 통해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고 청년 활동을 통해 마을 공동체를 복원한다는 복안이다. 특히 경북도가 2017년 전국 최초로 시행한 이 사업은 지난해부터 행정안전부의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 공모사업’에 선정돼 국비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안동시는 올해 3억2천500만원을 투입해 지난해 선발한 2팀(4명)을 비롯해 올해 신규 선발한 2팀(4명)의 사업 성공과 정착을 돕는다. 지난해 1기 모집에서 안동의 경우 3.8대 1의 경쟁률을 보인 가운데 현재 청년 4명과 가족 1명 등 총 5명의 인구 증가 효과를 보였다.■ 청년마을일자리 뉴딜사업‘청년마을일자리 뉴딜사업’은 지역 청년들이 마을 자원을 활용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사업화함으로써 청년의 지역 정착과 지역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마련됐다. 모집대상은 시·군별 사업공고일 기준으로 도내에 주소를 둔 만 18∼39세 이하의 청년으로 개인 또는 팀(4명 이내) 형태로 참여할 수 있다.안동시는 올해 이 사업에 1억5천750만원(국비 7천312만5천원, 도비 4천218만8천원, 시비 4천218만7천원)을 들여 3팀(9명)을 선발해 지원하고 있다. 시는 우선 이들에게 창업 성공을 위한 교육과 맞춤형 컨설팅을 하고 지역의 마을자원을 활용한 6차 산업화 아이템에 대한 창업 사업비를 1명당 연 1천500만원 팀당 최대 6천만원까지, 1년차 사업평가 결과에 따라 2년차까지 지원한다.■ 안동시 청년예비창업 지원 사업안동시는 지역 대학 창업지원센터와 연계해 만 18세 이상 39세 이하 예비 또는 청년 창업가에게 창업활동비를 지원하는 ‘청년예비창업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시는 올해 1억1천만원(도비 3천300만원, 시비 7천700만원)을 투입해 11명의 청년예비창업가를 지원한다. 이들에겐 팀당 700만원의 창업활동비, 창업교육 및 컨설팅, 창업공간과 기자재 등을 지원하며 관계기관과의 네트워킹 및 사업도 연계적으로 지원한다.■ 경북 북부권 청년창업지원센터 지원 사업경북 북부권 청년창업지원센터는 낙후된 경북 북부지역의 특화분야 청년 창업자를 발굴·육성해 청년 취·창업 활성화 및 우수 청년 창업자와 기업 배출을 목적으로 지난해 5월 안동시 옥정동에 위치한 안동도시재생센터 3층에 문을 열었다. 이 센터는 2021년까지 34억2천여만 원을 투입해 안동·영주·문경시와 예천·의성·봉화·영양·청송군 등 8개 시·군의 청년 예비창업가를 대상으로 도내 협력기관들과 유기적 협업을 통해 장기적인 창업 보육 모델을 구축한다.시는 올해 6억1천만원(도비 5억원, 시비 1억원, 안동대 1천만원)을 들여 경북 북부지역 초기 창업자 및 청년창업지원사업 수료자 가운데 20명을 선발해 청년 창업가로 육성할 계획이다.앞서 이 센터에선 2017년 20개 기업의 창업(34명 일자리 창출, 매출액 18억1천500만원)을 도왔고, 이어 지난해에는 19개 기업(39명 일자리 창출, 매출액 17억8천700만원)이 창업에 성공했다.■ 중소기업 인턴사원제‘중소기업 인턴사원제’는 미취업자에게는 인턴 근무 기회를 제공하고, 기업에는 임금 부담을 줄이면서 유능한 인재를 채용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이다.시는 올해 2천500만원(도비 1천만원, 시비 1천500만원)을 투입해 이 사업을 추진한다. 인턴사원은 미취업 청년, 결혼이민자, 새터민 등을 대상으로 5명을 선발하고 기업은 안동시에 소재한 ‘중소기업법’상 기업이면 된다. 선발된 기업에는 인턴 기간(2개월) 사원 1인당 월 100만 원의 고용지원금을, 인턴사원에겐 정규직 전환일로부터 10개월간 300만 원의 근속 장려금을 2회(3월, 10월) 분할 지급한다.시는 이 밖에도 만 29세 미만의 대학생에게 공공기관 직무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대학생 공공기관 직무체험 지원 사업(도비 4천302만원, 시비 5천248만4천원)을 비롯해 대학 등에 재학·휴학 중이거나 졸업한 미취업 청년들의 구직과 청년고용기업의 구인활동을 지원하는 △1사-1청년 더 채용 릴레이 운동(도비 3천만원, 시비 7천만원), 지역 대학과 함께 취업 및 진로 고민해결을 위한 상담 및 체계적인 고용서비스 제공하고 취업·진로·창업·해외프로그램 운영 지원하는 △대학일자리센터 지원 사업(6억원) 등을 추진하고 있다./손병현기자 why@kbmaeil.com

2019-08-27

“올 추석은 명품 예천 농·특산물로 맞이하세요”

인심 좋은 예천은 물 맑고 비옥한 토양으로 우수한 농·특산물이 생산되는 고장이다.김학동 예천군수는 지난해 7월 취임식 때 농·특산물 유통 활성화를 군정 역점 시책으로 추진하기 위해 군청사 중 접근성이 좋은 1층에 예천군 농·특산물 홍보관을 개관하고 판로 확대를 위해 직원들에게 발로 뛰는 감동 마케팅을 주문했다.이에 박근노 유통마케팅 팀장 등 팀원들은 국내외 경기 악화에 따른 농·특산물 판매 부진으로 애로를 겪는 지역 농가를 위해 올 설 명절 출향인들에게 서한문을 발송한 뒤 경북도청을 비롯해 유관기관 등을 대상으로 판매에 나서 1억의 매출실적으로 올렸다. 지난달 말까지 이미 지난해 실적과 비슷한 5억여 원을 판매했다. 인기리에 팔리고 있는 예천 농·특산물을 소개한다.△밥맛 좋은 예천쌀예천의 우수한 농·특산물 중 예천쌀은 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에 회룡포 물길 따라 자연 그대로를 지켜나가는 청정 비옥한 땅에서 재배돼 밥맛이 좋아 임금님 수라상에 올렸을 정도로 품질 좋은 쌀로 명성을 얻고 있다.최근 현대식 RPC에서 엄격한 품질관리로 위생적으로 가공돼 오뚜기와 CJ에 납품되고 있다.△당도 높은 예천사과예천사과는 해발 300∼600m에 위치한 소백산맥 중산간지의 일교차가 심한 곳에서 재배돼 과색이 밝고 모양이 수려하다.육질이 치밀해 저장력 뛰어나며, 당도가 높고 맛이 좋아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높다.△육질 우수한 예천참우예천참우는 소백산 기슭의 맑은 물과 깨끗한 자연, 풍부한 초자원이 잘 형성된 최적지에서 사육되고 있다.송아지 때 거세, 살코기 내에 마블링이 잘 형성돼 맛이 담백하고 육질이 우수하다.△맛·향 뛰어난 예천참기름예천 참기름은 낙동강 상류의 깨끗한 사양토에서 재배된 우수품종의 깨를 사용해 특유의 고소한 맛과 향이 뛰어나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해외 수출과 전국 유명 백화점에 납품될 만큼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향 강한 예천학삼예천학삼은 1530년 중종 때 나온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학가산 특산물로 기록돼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인삼이다.소백산맥의 유기물이 풍부한 토양에서 생산돼 조직이 충실하고 향이 강하며 유효사포닌 함량이 높아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는 효과가 탁월하다.△피로회복 최고 예천꿀예천꿀은 예로부터 정감록에 수록된 십승지 중의 제일 고장인 용문면 일원에서 생산되고 있다.특히 물 맑고 공기 좋은 아카시아 밀원에서 생산돼 최고 품질을 자랑한다.비타민·단백질·미네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피로회복, 빈혈 예방 및 치료 등에 효과가 있다.△빛깔 고운 예천고춧가루예천고춧가루는 일교차가 큰 준산간지에서 재배돼 과육이 두껍고 단맛과 매운맛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3단계 세척 및 자외선 살균소독 처리로 위생적이며, 빛깔이 곱고 향이 좋다.△영양 만점 예천양잠예천 양잠은 예로부터 물이 좋기로 유명한 지역에서 자란 누에를 5령 3일 적기에 채집해 제품을 만든다.5령 3일이란 누에의 생육과정 중 하루를 뜻하는 것으로, 건조누에의 중요한 품질 기준이 되기도 한다.일반 열풍건조 방식이 아닌 ‘냉동건조 방식’의 제품도 생산하고 있다.냉동건조는 영하 40℃에서 급속 동결해 진공 건조하기 때문에 영양의 손실이 거의 없다.△주류 대상 받은 예천주예천주는 예천의 맑은 물을 기본으로 배수가 잘 되는 계곡 산간 밭에서 생산된 오미자와 복분자를 원료로 한 증류주다.은은한 분홍빛을 띠며, 알코올 도수가 높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목 넘김과 향미가 좋아 3년 연속 대한민국 주류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우수한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면역력 높이는 예천 아로니아예천 아로니아는 과일과 채소 중에서 안토시안을 가장 많이 함유하고 있어 우리 몸에 활성산소가 쌓이는 것을 억제하고 면역력 강화에 도움을 준다.당뇨병 예방, 체중 감량, 간 손상 예방, 염증 완화, 눈의 피로 해소 등의 효과뿐 아니라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 심혈관계 질환과 뇌졸중 예방에도 도움을 주는 등 효능이 우수하다.△오곡명초 등 전통식초들그 외에서 전통식초 명인이 생산하는 오곡명초, 100% 사과로만 만든 사과식초, 새콤달콤한 오미자·복분자청, 친환경적으로 재배되는 백화고·흑화고, 전통방식으로 만드는 바삭한 덧재한과 등이 생산되고 있다.박근노 유통마케팅 팀장은 “예천군 농·특산물이 소비자의 신뢰를 얻고 명품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엄격한 품질관리와 저렴한 가격이 우선”이라며 “지속적인 농가교육을 통해 사랑받는 예천 농·특산물을 생산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 우수한 명품 예천의 농·특산물로 가족과 함께 웃음 꽃 넘치는 추석명절을 보내길 바란다”고 말했다.예천의 우수한 농·특산물은 인터넷 쇼핑몰 ‘예천장터 (www.ycyang.kr)’나 전화(054-650-6280)로 구매할 수 있다.예천/정안진기자 ajjung@kbmaeil.com

2019-08-27

장기로 온명신(名臣)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도와 준 세력들이 있었다. 세조는 이들의 공을 잊지 않았다. 계유정난 때 공을 세운 43명에게는 정난공신, 왕위를 잇는 데 일조를 한 44명에게는 좌익공신이란 훈호를 각각 줘서 우대했다. 한명회 등 이른바 훈구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국가로부터 공신전과 과전을 부여받아 대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정부 정승과 판서 등 요직을 독점하면서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한때 이들은 남이(南怡) 등 신진세력들로부터 정치적 도전을 받긴 했으나, 유자광의 고발로 남이가 제거된 이후에는 더욱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1469년 음력 11월 28일, 나이 열세 살의 성종이 즉위했다. 수렴청정에 나선 정희왕후도 훈구세력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한술 더 떠서 정희황후는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 등 73명을 좌리공신으로 책봉해 우대해줬다. 정국의 안정을 꾀하고 어린 임금을 더욱더 잘 보좌해 달라는 취지에서였다. 이제 조정은 훈구세력들이 좌지우지했다. 권력자들이 늘어나자 이에 비례해 권력다툼과 부정부패가 덩달아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훈구파가 있는 반면에 사림파가 있었다. 사림파는 여말(麗末) 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지방으로 내려간 선비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초야에 묻혀 살며 성리학을 사상의 기반으로 삼고 유교 경전을 중시했다. 또 의리와 명분, 절개를 강조했으므로 당연히 수양대군이 임금이 된 것에도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사림들이 중앙의 정치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제9대 성종 때였다. 성종은 세조 때부터 중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있던 훈구파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3사의 관리로 등용했다. 당시 사림파의 중심인물은 김종직이었는데, 그는 고려에 절개를 지켜 경상도에 낙향했던 길재의 학풍을 이은 인물이었다. 그의 제자들로는 정여창, 김굉필, 남효온, 김일손 등이 있었다.정치적 일선에 나선 사림파는 훈구 대신들의 비행을 규탄하였고,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까지 비판하면서 왕권의 전제화에도 맞섰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야생귀족(野生貴族)들인 사림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다. 태생부터가 서로 다른 두 집단 간의 반목은 성종을 거쳐 연산군에 이르자 얼굴만 마주쳐도 으르렁거릴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다.이런 대립 속에서 유자광과 김종직 간에도 묵은 감정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실록에 사관이 써둔 일화가 있다. 경남 함양에 학사루(學士樓)가 있다. 이 누각은 통일신라시대 함양태수로 왔던 최치원이 자주 올랐던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유자광도 함양을 유람하다가 학사루의 절경에 감탄하여 시를 짓고,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이곳에 걸었다. 그러나 유자광의 현판은 곧 사라졌다. 함양 군수로 부임하게 된 김종직이 이를 보고 ‘소인배의 글’이라며 당장 떼어내 불사르게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입소문을 타고 유자광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김종직의 유자광에 대한 모욕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김종직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할 때 제자들이 송별시회를 마련했는데, 이때 초청하지도 않은 유자광이 인사를 왔다. 유자광이 김종직에게 술잔을 권하자 옆에 있던 제자 홍유손(洪裕孫)이 그에게 ‘누가 현판을 해서 걸어줄지도 모르니 시 한 수를 지어보라’고 했다. 홍유손은 나이가 제일 어린 김종직의 제자였다. 그가 학사루 사건을 빗대어 유자광을 조롱한 것이었다. 어쩌면 유자광이 김종직과 그 일파들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다.유자광이 이들에게 복수할 기회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1498년(연산군 4), 연산군이 즉위하고 전대 왕 성종의 실록을 집필하던 과정이었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의 비행과 세조의 찬탈을 사초에 기록한 사실이 있었다. 당시 이극돈은 실록청 당상관으로서 사초를 편수(編修)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사초를 보다가 김일손이 자신에 대해 언급하며 ‘신하로서 바르지 않은 행동’이라고 기술해 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극돈은 김일손을 찾아가 그 내용을 빼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김일손은 이극돈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했다.이극돈은 자신의 허물을 들추는 이야기가 더 있는지 사초를 살피게 되었는데, 그러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칭찬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았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쓴 글로 중국 초나라의 항우라는 사람이 의제라는 왕을 죽여 강물에 던져 버린 일을 슬퍼하는 제문이었다. 여기에는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를 은근히 비꼬는 뜻이 담겨 있었다.이극돈은 유자광에게 달려가 이 일을 알렸다. 그는 당장 조정의 원로대신들인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등을 찾아갔다. 훈구파를 이끌고 있던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날 밤 바로 대궐에 들어가 연산군에게 고변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에 세조와 계유정난을 비판하는 등 반체제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일러바쳤다.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아버지와는 달리 왕의 권위를 대단히 중요시하는 성품의 소유자로, 왕권에 도전하는 사림들을 고깝게 여기고 있었다. 때를 맞춰 연산군의 손에 굴러들어온 조의제문은 그야말로 엄청난 정치적 무기였다.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였다. 이어서 김일손·권오복·이목·허반·권경유 등은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한 죄를 씌워 죽이고, 정여창·강겸·이수공·정승조·홍한·정희랑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이종준·이주·박한주·임희재·강백진·조위(曺偉)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보냈다. 앞서 유자광을 조롱하였던 홍유손도 당연히 체포되어 종의 신분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이로써 유자광은 공을 인정받아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협할 사림들을 탄압함으로서 수많은 목숨을 자신의 권력과 맞바꾼 셈이었다. 이 사건은 사초 때문에 일어난 사화라고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한다.이쯤에서 양희지((楊熙止)란 인물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는 1432년에 순창군수를 지낸 양맹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객지를 전전하다 울산에 살고 있던 양근군수(楊根郡守) 이종근의 딸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 울산에서 살게 되었다. 1474년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1476년 6월 채수·허침·권건·조위·유호인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는데, 김종직이 축하 시를 보내오기도 했다. 1478년 홍문관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으로 있을 때 임사홍(任士洪)을 탄핵하는 글을 올렸다. 1486년 모친의 3년 상을 마친 뒤 예조좌랑에 임명되어 벼슬할 뜻이 없었으나, 김종직과 김굉필이 편지를 보내 간곡히 권하므로 벼슬에 나가기도 했다. 양희지는 훗날 조선 성리학의 큰 별이자 도학정치의 길을 연 조광조를 김굉필의 문하에 들게 한다.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김굉필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을 때, 그해 겨울 조광조에게 희천까지 김굉필을 찾아가게 한다. 유배지에서 김굉필은 혼신의 힘으로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우리나라 유학사의 맥을 잇게 했다. 이런 행적으로 봐서 양희지는 사림파 계통의 학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1494년 연산군 즉위 후 양희지는 상의원(尙衣院) 책임자로 있으면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498년 대사간으로 있다가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을 때 무호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관직을 사직하였다. 문제가 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그로부터 2년 뒤인 1500년 2월, 양희지는 다시 복관되어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으로 있던 그해 5월, 그는 무오사화와 같은 원옥(寃獄)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무오사화 때 북쪽 변방으로 유배보냈던 사람들을 남쪽지방으로 이배(移配)시킬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과 김굉필이 평안도 희천(熙川)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조위가 함경도 의주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특히 조위는 김종직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1498년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의주에 유배되었던 것이다. 양희지의 상소로 순천으로 배소가 옮겨진 뒤, 조위는 우리나라 유배가사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만분가(萬憤歌)를 지었으며, 그곳에서 죽었다.이런 양희지의 일련의 행위들은 훈구파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양희지의 문집인 대봉집(大峰集)에 실린 ‘행장(行狀)’을 참고하면, 그는 1500년 5월에 위에 언급한 상소가 문제되어 노사신·유자광의 탄핵을 받았다. 양희지는 이들로부터 역적을 비호한다는 호역(護逆) 죄목에 몰려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까지 왔다. 하지만 그해 9월, 신수근의 변호로 목숨은 부지했으나 삭직(削職)되었다. 관직을 뺏긴 양희지는 경상도 장기현으로 방축(放逐)을 ‘자처(自處)’하였다. ‘방축’이란 유배이긴 하나, 통상적인 유배보다는 한 등급 감경하여 벼슬을 삭탈하고 고향으로 내 쫓는 방축향리(放逐鄕里)를 말한다. 그런데 양희지의 고향은 장기가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울산에서 살았고, 그의 나이 40세 전후 때 가족들이 대구로 옮겨가서 살았다. 위 행장에 ‘자처(自處)’해서 장기로 와서 은둔을 했다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자원안치(自願安置)의 성격이 짙다. 자원안치란 죄인을 적소(謫所)에서 풀어 자기가 원하는 곳에 안치(安置)하던 제도를 말한다. 어쨌거나 그는 1502년에 다시 동지중추부사로 서용되었으므로 장기에서 머문 기간은 약 2년 정도였다고 보아진다. 장기를 떠난 후 양희지는 1503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종2품)으로 재임하다가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283년이 지난 1786년(정조 10) 대구 오천서원(梧川書院)에 제향되었다.양희지는 훤칠한 풍모와 맑고 시원한 기상이 있었으며, 학문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성품 또한 청백하여 조선 500년 역사상 흔치않은 명신(名臣)으로 기록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해 사표로 삼아야 할 한 위인이 무오사화로 인해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됨됨이, 즉 ‘인품의 향기’를 장기 땅에 뿌려놓고 갔다./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8-27

경북 대표 농특산물로 추석선물 준비하세요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추석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 해마다 이맘때면 가족이나 친지들이 모이는 고향을 찾을 준비로 분주해진다. 부모님이 계시는 곳, 아니면 큰형님 댁으로 모두 모여드는 이유도 추석이기 때문이다. 즐거워야 할 추석이지만 선물을 마련해야 하는 고민거리도 생긴다. 이곳저곳 선물을 줄 대상도 많은 데다 비용 또한 만만찮다. 부담 없으면서도 저렴하고 의미 있는 추석선물을 마련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추석 선물용으로 큰 인기를 끌고 실속 있는 경북지역 대표적인 농특산물을 소개한다.동해를 끼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복합행정도시인 포항의 대표특산품은 농업, 축산, 수산, 2차가공식품 등 다양하다. 포항의 우수 특산품은 포항시가 인증하는 농수특산물 공동브랜드 ‘영일만친구’로 국내외에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햇살을 담는다’는 의미의 ‘영일만친구’는 지난 2013년부터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을 5회나 수상한 명품 브랜드이다. 2013년 상표권 등록 후 꾸준히 사용자 지정이 늘어 올해 6월 현재 52개 업체 135개 제품이 상표를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다양하다.포항시 농업기술센터 김극한 소장은 “영일만 친구 브랜드를 단 가공식품이 해외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도록 경쟁력 있는 상품 개발과 적극적인 브랜드 마케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특히 올해는 가공식품 수출이 활기를 띠고 있다. 특히 멸치액젓, 꽁치액젓 등 젓갈류 일본 수출 길을 여는 등 추석 명절 선물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포항시 우수 농특산품 제조가공업체인 ‘꽃젓갈’(대표 이성자). 이 대표는 친정어머니에 이어 2대째 젓갈제품을 제조·가공·판매하며 국내 최초 젓갈식품공장에 HACCP인증을 받아 전통식품제조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 업체는 지난 ‘2017 경북 농어업인대상’에서 농식품가공부문 대상을 받기도 했다.꽁치, 멸치, 게와 멸치를 주재료로 가공한 육젓 및 액젓제품 6종을 생산해 국내 친환경 매장을 위주로 납품하고 있다. 추석 선물용으로 꽃젓갈 2종 세트 1만5천원, 3종 세트 2만9천원이 주로 추천되고 있다.특히 이업체는 국내외 식품 박람회를 통해 제품 홍보 및 홈쇼핑판매를 위한 론칭에도 성공해 향후 발전가능성이 높은 업체이다. 100% 지역 및 국내산재료를 사용해 모든 제품을 규격화하는 등 전통식품개발에 힘쓰는 것은 물론 지역농어업의 선진화 및 지속가능한 전통식품산업 발전에 앞장서고 있다.꽃젓갈을 비롯한 포항시 우수농수산특산품 영일만친구는 온라인 포항마켓(www.pohangmart.com), 오프라인 포항특산품판매장(포항시 북구 죽도동 죽도시장4길 22. 오기리공영주차장 1층. 전화 054-256-4441)과 KTX역사 고향뜨락(054-262-2333)에서 구입할 수 있다.◇안동한우최근 맛집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과 유튜브, 블로그를 통해 안동한우의 맛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사육 농가의 정성과 체계적인 사육관리를 통해 생산되는 안동한우는 전국 최고의 육질을 자랑한다. 평균 30개월 700㎏ 이상 완숙된 소만 출하하기 때문에 고기 고유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방한 때 생일상에 오르는가 하면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방한 때는 청와대 만찬 메뉴에도 포함돼 국빈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안동한우는 수도권 이마트 등 13개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실속 있는 다양한 가격대의 선물세트가 준비돼 있다.◇안동사과여느 해보다 빠른 추석으로 과일 세트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최상의 컨디션을 갖춘 사과품질로 전국판매처에서 주문이 줄을 잇는 곳이 안동이다.안동은 전국 최대의 사과 주산지로 낙동강 상류 청정지역에 있다. 밤낮의 일교차가 커 당도가 높고 아삭한 식감을 자랑한다. 안동사과는 올해까지 7년 연속 한국소비자만족지수 1위를 차지했다.◇전통주 안동소주와 이육사 청포도 와인안동소주는 안동의 양반가에서 ‘봉제사 접빈객’을 위해 가양주로 전승됐다. 명절 전·후로 판매량이 치솟으며 명절선물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여기에 이육사 청포도 와인은 고품질 청포도 품종인 ‘청수’로 생산해 올해부터 12.5%와 13.5% 두 가지 도수의 화이트와인으로 출시됐다. 광복 74주년을 맞아 민족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육사 이원록의 고향에서 만나는 특별한 와인 선물도 의미가 있다.◇안동간고등어안동에서 나지는 않지만 안동사람의 손맛이 더해져 지역 명물로 탄생한 특산품이 있다. 안동간고등어다. 간잽이의 손을 거친 고등어는 더 이상 그냥 고등어가 아니다. 밥 한 그릇은 게 눈 감추듯 뚝딱 비워내는 안동간고등어가 된다. 추석 명절 양손 가득 들고 가면 대 가족 반찬 걱정은 뚝딱 해결된다. 부담없는 가격에 실속 가득한 추석 선물, 안동간고등어 만한 게 없다.◇표고버섯의 종류청도 운문에서 나는 ‘운문 참 표고버섯’은 100% 참나무 원목에서 키운 표고버섯으로 청도 운문의 특산물이며 유기농 인증을 받은 천연 무공해 식품이다.표고버섯의 종류는 백화고, 흑화고, 동고, 슬라이스 등 총 4가지로 분류해 판매된다. 백화고는 늦가을부터 초 봄에 자라는데, 유일하게 흰색의 꽃(白花)처럼 피는 표고이며 맛과 향이 뛰어나다. 흑화고는 대채적으로 갈색을 띠며 쫀득한 식감과 향이 우수해 좋은 등급의 버섯으로 구분된다. 이어 동고는 은은한 향이 있어 대중적으로 많이 이용되는 표고버섯이다. 가장 많이 알려진 표고버섯으로 전체가 반구형 형태로 말려있고, 끝은 두껍게 오므라진 모양을 뛴다. 슬라이스는 바로 요리가 가능하도록 건조한 제품으로 찌개나 국, 물을 끓일 때 많이 사용한다.◇표고버섯의 효능표고버섯의 경우 여러가지 효능이 있지만, 혈관 기능 개선과 면역력 증강에 도움을 준다. 특히 암에 대한 저항력이나 암의 증식을 억제에 도움을 줘 많은 고객들이 찾고 있다. 또 풍부한 식이섬유소를 갖추고 있어 배변의 양과 속도에 좋은 영향을 줘 변비 예방에도 탁월하다. 민간요법으로도 많이 쓰인다. 열감가기 있을 때나 몸에 통증이 있을 시 소금과 함께 표고를 달여 마시고 하루정도 지나면 효과가 나타난다.◇청도반시의 종류 및 효능청도반시는 청도군 특산품으로 유명한 반건시와 감말랭이로 분류돼 판매된다. 이와 더불어 곶감, 아이스 홍시, 감와인, 감식초, 감 초콜릿, 감 화장품, 감잎차 등 다양한 가공품으로도 재탄생해 지역 특산품의 역할을 독톡히 하고 있다. 청도 반건시의 경우 곶감으로 씨가 없고 당도가 높으며 인체에 유익한 성분이 많이 함유된 건강식품이다. 감말랭이는 청도반시를 2~4조각으로 잘라 청도의 맑은 공기와 햇빛에 건조 숙성해 감기 및 피부노화 예방에 효과가 있다. 청도 반시는 다른 과실에 비해 비타민 C가 월등히 많아 노화 방지, 피로 회복, 감기 예방 등에도 효능이 높아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다.◇경산대추전국대추생산량의 40%를 차지하는 경산대추는 풍부한 일조량으로 알이 굵고 무기질과 비타민, 사포닌, 알칼로이드 등의 성분이 풍부해 하늘이 내려준 건강식품으로 불린다. 이 때문에 대추를 활용한 각종 제품이 생산되고 있는데 제사용품인 말린 대추를 비롯해 씨를 제거한 대추슬라이스, 대추 발효 초, 대추 빵·과자, 한과, 대추도라지진액, 대추 생강청, 특허를 받은 대추찹살떡 등이 생산되고 있다. 홈쇼핑에서도 인기를 끌기 있으며, 경산대추를 알리기 위한 대축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경산포도MBA 포도는 당분과 산, 펙틴이 풍부해 피로회복과 피부미용 등 저항력을 향상시킨다. 맥반석 토양에서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되며 전국 최초의 MBA 주산지로 알려져 있다. 이를 이용한 와인제품이 ‘비노케슬’이란 상품명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한 때 거봉포도의 가격이 경산에서 결정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거봉의 주산지였다. 거봉은 2018년부터 홍콩으로 수출되고 있다.◇뚝배기식품전통된장은 재래메주와 알 메주, 재제염을 가공처리해 간수를 뺀 장 담그기 특수소금으로 6개월간 재래장독에서 숙성시키고 나서 간장을 빼지 않은 무방부제 제품으로 어머니의 정성과 넉넉함을 느낄 수 있다. 웰빙된장은 국산 콩으로 만든 재래된장에 청정해역과 자연에서 채취한 무공해 천연재료와 유근피, 홍화씨 등에서 추출한 여러 가지 인체에 유익한 영양소를 다량 함유하고 있는 고급 건강식이다. 간장은 100% 메주와 천일염을 가공해 만든 특수소금으로 30년 이상 된 재래장독에서 6개월 이상 전통 발효로 자연 숙성시켜 맑은 색과 풍부한 맛과 향을 낸다.◇경산한우한우는 축산물 위해요소 중점관리기준 영남권 1호로 지정될 정도로 관리에 철저를 기하고 있으며 맛과 풍미에서 앞서가고 있다. 2곳의 한우농가는 지난해 ‘한우공동브랜드’ 명인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경북 한우경진대회에서 암송아지부문 최우수상과 우수시군으로 선정되는 등 품질유지에 탁월함을 인정받고 있다./이시라·손병현·김재욱·심한식기자

2019-08-26

토함산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서 오래 묵은 근심들 씻어내고…

지난밤은 그야말로 황홀한 축제였다. 동궁과 월지의 야경이 꿈결까지 금빛으로 물들인 덕분에 단잠을 잤다. 꿈속에서 나는 신라 왕자가 되어 산해진미와 가무를 즐겼다. 잠에서 깨니 머리엔 까치집이 얹어져 있고, 늘어난 셔츠 사이로 선풍기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꿈에서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허기가 졌다. 아침 메뉴를 고민하며 고요한 황리단길을 걸었다. 밤늦도록 젊은 여행자들이 맥주잔을 부딪치던 한옥 카페들은 하얀 햇살을 이불로 덮은 채 늦잠에 빠져 있었다. 황오동에 이르렀을 때,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코를 잡아당겼다. 경주 특산품인 황남빵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냄새였다. 흰 우유와 함께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아침 메뉴가 결정됐다.황남빵은 81년 전인 1938년 최영화 장인이 만들었다. 얇디얇은 빵 속에 팥앙금이 가득 들어 있는데,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경주 사람들이 즐겨 먹는 간식에서 지금은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사가는 지역 특산품이 됐다. 주말이나 휴가철 성수기엔 황남빵을 직접 맛보거나 지인에게 선물하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선다. 주문이 많이 몰릴 때는 계산하고 나서 두세 시간 뒤에야 빵을 받을 수 있다. 갓 구워낸 황남빵을 먹는 것은 꽤나 특별한 행운인 셈이다. 이날은 6월말의 평일, 다행히 원조집인 ‘최영화빵’은 한산했다. 황남빵 10개들이 한 상자를 샀다. 방금 구워내 따뜻한 빵을 손에 쥐었다. 온기가 온몸으로 퍼지며 마음까지 데웠다. 황리단길 벤치에 앉아 황남빵 한 개를 한 입에 욱여넣고, 뜨거운 팥앙금에 입천장이 데이려는 순간 흰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달콤하고 뜨뜻한 것이 목구멍으로 꿀떡꿀떡 넘어가자 뱃속에서 구슬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듯 저절로 간지러운 웃음이 났다.황남빵으로 배를 채우고 석굴암을 향해 차를 몰았다.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하니 평일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주차장에서 석굴암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 토함산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 흙길을 걸으면 햇살과 나무 냄새와 새소리와 바람이 몸속으로 들어와 피가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초여름의 무성한 초록이 피리 소리가 되어 걸음마다 생각마다 경쾌한 춤이 되게 해줬다. 석굴암 가는 길이 더욱 즐거운 것은 다람쥐들의 재롱 덕분이다. 사람을 겁내지 않는 다람쥐들은 우듬지를 타고 내려와 깡충깡충 뛰어다니거나 바위 뒤에서 불쑥 튀어나와 솜뭉치 같은 꼬리를 쫑긋 세우며 사람들을 웃음 짓게 했다. 석굴암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석굴 내부 본존불의 천년 미소를 보기 전에 숲길에서 벌써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세상에 두 번 태어난 김대성은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짓고, 가난한 전생의 부모를 위해선 석불사, 즉 지금의 석굴암을 지었다. 석굴암 본존불 앞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서도 전생의 부모를 섬긴 김대성의 지극한 효심에 한 번 감동하고, 신라인들의 정교한 건축 기술에 두 번 감동했다. 석굴암은 지하수가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다. 지하수로 인해 석굴 바닥의 온도가 본존불을 모신 상부보다 낮아 이슬이 바닥에만 맺히는 구조로 천년 넘게 유지됐으나 조선 말기에 거의 방치되어 보존 상태가 불량해진 것을 일제가 시멘트를 사용해 주먹구구식으로 복원하면서 내부에 결로와 이끼가 생기고 화강암이 손상되는 등 원형을 많이 상실했다. 이후 몇 차례 복원 공사를 거쳐 지금은 커다란 통유리로 완전 밀폐된 채 습기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1년에 딱 하루, 석가탄신일에는 이 유리벽을 개방해 신도들이 석굴 내부로 들어가 본존불 주변을 돌며 기도할 수 있게 허용된다.해 뜨는 동녘을 바라보는 석굴암 본존불 석가여래좌상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허리를 숙여 절했다. 유리벽으로 막혀 있어 먼발치에서밖에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석굴암의 숭고미는 온몸을 압도하는 전율로 다가왔다. 신라 불교미술의 가장 찬란한 걸작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석굴암을 사진에 담고 싶을 텐데, 사람들은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관람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이 황홀하고 신비한 아름다움 안에 그저 머무르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듯이.석굴암을 내려와 다시 토함산 숲길을 걸었다. 꼭 부처를 만나지 않더라도, 현실의 공간이 깨달음의 장소로 변모하는 순간이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어떤 뜻밖의 정경과 마주하게 될 때, 그 마주함을 통해 오래 묵은 생각과 마음을 갈아엎게 될 때 우리는 해탈과 열반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무당이나 박수 등 영매(靈媒)에 의해 행해지는 내림굿이나 접신무 같은 무속제의 또는 ‘신 내림’이라고 하는 신비한 영적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경전이나 교리가 아니더라도 삼라만상 무엇에서든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바로 ‘무설설무법법(無說說無法法)’의 화두다. 나는 본존불 앞에 섰을 때보다 석굴암을 다녀가는 숲길에서, 숲길을 뛰어다니는 다람쥐들의 춤에서, 다람쥐를 보며 웃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오랫동안 애타게 찾아 헤맨 평화를 발견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래 묵은 걱정과 근심을 다 씻어냈다.석굴암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더니 불국사 구경은 그저 선물 같았다. 글감을 찾아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도, 무수히 소개된 불국사에서 어떤 새로운 풍경과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나 넓디넓은 경내를 천천히 걸었다. 대웅전도 다보탑도 삼층석탑도 다 내 마음의 여러 모양이었다. 법당 회랑엔 ‘불국사 글짓기 그리기 대회’에서 입상한 유치원생들의 크레파스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가슴을 뛰게 한다. 그림 속에선 부처도 사람도 새와 나무도 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관광객들에게 경주 맛집으로 각광 받는 ‘함양집’ 보문점을 찾았다. 보문관광단지와 가까운 동궁원 근처에 있다. 한우물회와 육회비빔밥이 유명한 집이다. 여름에는 특히 살얼음 육수에 한우 생고기와 함께 배, 오이, 무, 소면 등을 담아내는 한우물회가 ‘인기 폭발’이다. 요즘은 젊은 세대 취향과 ‘SNS 감성’을 충족하는 치즈 불고기도 많이 팔린다 한다. 불고기 위에 모짜렐라 치즈를 잔뜩 얹어 마치 피자처럼 접시에 얹어낸다. 평일임에도 점심시간에는 긴 줄이 섰다. 대기명부에 이름을 적고 20여분을 기다려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주문하자마자 한우물회가 상에 올랐다. 먼저 소면을 말아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육수와 함께 후루룩 흡입하고, 생고기를 한 숟가락 듬뿍 입안에 넣어 우물거리니 또 한 번 뱃속에서 구슬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육수에 밥을 말아 먹으니 허기와 더위가 한방에 해결됐다. 한우물회 한 그릇에 1만2천원, 대체로 비싼 편인 경주 물가를 감안하면 괜찮은 가성비다.함양집 바로 앞에 동궁원이 있다. 동궁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동식물원이었던 동궁과 월지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관광지다. 식물원과 버드파크, 음악분수 등의 시설을 갖춰 어린아이들의 체험학습 공간으로, 연인과 가족의 휴식과 산책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버드파크 입장권을 끊었다. 공작, 타조, 앵무새 등 새들은 물론 물고기와 강아지, 거북이, 기니피그 등 다양한 동물들도 볼 수 있다. 새들의 화려한 오색 날갯짓은 눈을 즐겁게 했고, 온갖 아름다운 소리로 울어대는 노래는 귀를 황홀하게 했다. 대개 동물원의 조류 전시관에선 새들의 배변 냄새가 지독한데, 이곳 버드파크에서는 악취가 전혀 나지 않아 관람하기에 몹시 쾌적했다. 입구에서 파는 새 모이를 사서 손에 올려두고 있으니 앵무새들이 날아와 손 위에 앉았다. 동물과 스킨십하는 색다른 체험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새를 무서워하는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어느 로맨틱한 청년은 손바닥에 내려앉은 새에게 연인을 향한 고백의 언어 ‘사랑해’를 따라 하게 했다. 그 장면에 괜히 외로워져 버드파크를 빠져나왔다.내 외로움을 달래준 것은 한국대중음악박물관이다. 동궁원과 마찬가지로 보문관광단지 근처에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을 비롯한 수많은 LP앨범과 뮤지션들의 애장품, 악기, 1920년대에 사용된 희귀 음향 시스템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시청각실에서는 원하는 음악을 직접 턴테이블에 재생해 감상할 수 있다. 방탄소년단 등 최신 케이팝과 평소 좋아하는 락 음악을 신나게 감상하다가 갑자기 석굴암과 불국사를 지은 김대성이 생각나 바비킴이 부른 ‘MaMa’를 찾아 들었다. “당신이 내게 했던 것처럼 이젠 내가 안아줄게요.” 김대성은 전생과 현생의 부모 모두를 지극히 섬겼는데, 나는 무얼 하고 있나? 박물관에서 나와 ‘최영화빵’ 가게를 찾았다. 엄마 갖다 줄 황남빵 30개들이 한 상자를 사서는 서울로 차를 몰았다. 노릇노릇 잘 익은 석양이 내 등을 따듯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시인 이병철

2019-08-25

사랑·변심·그리움·충성… 이야깃거리 많았던 김유신은 행복했을까?

기원전에 형성돼 10세기 중반까지 길고 긴 세월 동안 존재했던 고대 국가 신라. 시간은 숱한 ‘전설’과 ‘사연’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1천 년 가까이 부침(浮沈)을 거듭했던 나라이니 넘쳐나는 이야깃거리가 있음은 당연한 이치.예술가들이 그걸 가만히 놓아뒀을 까닭이 없다. 그래서다. 신라를 해석하는 주요 키워드인 ‘풍류도’와 ‘화랑’은 수많은 소설과 시의 소재가 됐고, 영상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는 영화와 TV 드라마를 통해 여러 차례 사람들과 만나게 됐다. 이는 ‘역사의 대중화’에도 일정 부분 기여하는 역할을 했다.영남대학교 조형연구소장을 지낸 민주식의 논문 ‘풍류(風流) 사상의 미학적 의의’는 풍류도가 예술과 불화 없이 결합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자유분방한 정신은 정치나 사회 속에서도 발휘되며, 또 문예나 취미에서도, 이성과의 교제나 호색의 면에서도,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요컨대 환경의 자유로움과 풍격의 고상함을 지닌 자유인의 생활이 풍류이다. 이를테면 은자(隱者)의 생활을 즐기는 일이나 청담(淸談·고상하며 맑은 이야기)에 뛰어난 것이 풍류다…(중략) 풍류는 일상성을 벗어나 개성으로써 새로운 내용을 추구할 때, 일상을 초탈적인 예술의 세계, 혹은 미적 경지로 드높이려 한다.”◆ ‘풍류’에만 머물 수 없었던 김유신과 천관의 일화문학, 영화, 드라마 속에서 ‘미적으로 형상화’된 서라벌의 인물들은 적지 않다.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던 화랑 관창과 반굴, 진위 논란이 뜨거웠던 필사본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신비한 매력의 소유자 미실(美室), 영민했던 승려 원효,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무열왕 등.이처럼 흥미로운 스토리를 가진 인물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주연 배우’는 김유신(金庾信·595~673)이 아니었을까?통일신라 건설의 일등 공신이었던 그는 ‘비극적인 고대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기생 천관(天官)과의 짧아서 더 뜨거웠던 연애. 그 전말은 아래와 같다.“젊고 풍채 또한 좋았던 신라 귀족 김유신은 예쁘고 노래 잘하는 기녀(妓女) 천관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신분과 계급의 차이는 청춘남녀의 사랑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 김유신의 모친은 ‘집안을 일으키고 세상에 나아가 큰일을 해야 할 사람이 매일 기생집이나 출입하고 있으니 내가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느냐’며 울먹였다. 어머니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던 김유신. 천관을 향하던 발걸음을 단호하게 끊는다.그러던 어느 날. 김유신은 동료 화랑들과의 만남에서 대취한다. 그가 탄 말(馬)이 사람의 바뀐 마음까지는 알 리가 없었을 터. 평소처럼 천관이 기거하는 유곽으로 향했던 말. 졸음에서 깨어난 김유신은 망설임 없이 말의 목을 잘라버린다. 천관 앞에서 자기의 뜻이 굳건함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김유신이 떠난 자리에서 한참을 목 놓아 울던 천관은 한 편의 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김유신이 천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천관사(天官寺)를 짓도록 명령한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난 후였다.”이 에피소드에선 좋아하는 이성과의 교제라는 ‘개인적 풍류’와 나라를 보위하고 성장시켜야 한다는 ‘대의명분’ 사이에서 갈등했던 청년 김유신의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김유신은 화랑이었다. 민주식의 논문에 따르면 화랑의 교육 이념으로 정착됐던 풍류도의 주된 내용은 “도의와 미풍을 배우고, 생활에 예술을 끌어들이며, 아름다움을 완상(玩賞·가까이서 즐겨 지켜봄)하는 것”.그러나, 천관은 ‘가까이서 지켜봐도 좋은 아름다움’이 될 수 없었다. 신라 당대의 사랑은 현격한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지 못했던 것이다.◆‘대의명분’을 지향함으로써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다김유신과 관련된 ‘슬픈 죽음’은 나중에 다시 한 번 더 역사에 등장한다. 이때의 갈등은 천관을 둘러싼 사랑과 욕망의 절제 사이에서가 아닌, 연민과 전투의 승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책 ‘신라의 삼국 통일’엔 두 명의 소년을 창칼과 화살이 뒤엉키는 사지(死地)로 등 떠밀 수밖에 없었던 김유신의 가슴 아픈 결단이 등장한다. 좋게 말하면 ‘대의명분을 위한 희생’이지만, 거칠게 표현하면 ‘어른들의 이익 다툼 속에서 아이들을 죽인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황산벌전투. 전날 벌어진 결전에서 백제군의 사기에 눌린 신라군은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네 번을 싸워 네 번을 모두 패배했다. 김유신은 신라군이 연패를 당하자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김흠순(김유신의 동생)의 아들인 반굴과 김품일의 아들인 열여섯 살의 앳된 화랑 관창을 백제군 진영으로 홀로 보내어 싸우게 했다. 반굴과 관창은 저돌적으로 나아가 싸우다 죽었다. 신라군은 반굴과 관창의 희생을 바탕으로 사기가 진작돼 죽을 각오로 싸웠다.결국 치열한 접전 끝에 백제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신라군은 계백과 5천 결사대 대부분의 목을 베고, 충상과 상영 등 20여 명의 장군을 포로로 잡았다.”이처럼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들 속엔 사랑, 변심, 애틋한 그리움, 회한, 충성, 국가를 위한 희생, 드라마틱한 반전 등 예술적 소재가 될 수 있는 키워드가 수도 없이 나타나고 있다.그렇기에 김유신은 문학과 영화, TV 역사극의 ‘최다 출연자’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만큼 다양한 ‘예술적 변용’이 가능한 흥미로운 인물이라는 이야기.물론 김유신의 사회·정치적 지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당시 신라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긍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때론 비판적으로 그려지기도 했다.◆예술의 소재가 된 신라 최고 ‘풍류 화랑’국문학자 홍성암의 논문 ‘풍류도의 이념과 문학에의 수용 양상’은 ‘풍류의 정신’이 어떤 경로를 통해 예술 작품에 삼투하는 것인지를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고 있다. 아래 인용한다.“풍류도가 우리 고유의 이념체계로서 신앙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라면, 풍류정신은 풍류도에서 파생된 것으로 문학정신의 한 양상에 가깝다. 따라서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은 대체로 풍류의 멋을 즐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그런 점에서 우리의 문학 작품에 스며있는 풍류정신은 다분히 자연발생적인 성격이 강하다. 산천의 아름다움을 즐긴다든지, 노래와 춤을 즐긴다든지, 무병장수와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 인생의 현세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들은 멋을 아는 한국인들의 공통적인 의식체계에 속한다고 하겠다.”위와 같은 학술 논문의 정의에 기대지 않더라도 ‘풍류 화랑’ 김유신의 삶과 죽음은 소설, 또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극적이고 굴곡이 많았다.‘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제22권 ‘신라를 빛낸 인물들’에 따르면 김유신의 생애는 ‘평탄’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느 누구도 쉽게 경험하지 못한 숱한 고난과 난관을 거치며 성장했고, 청년기와 중년기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터지는 살점과 흐르는 피를 보며 보내야 했다.김유신이 활동했던 7세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이 서로의 명운을 걸고 치열하게 항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어느 누구도 앞날을 내다보기 어려웠다.그런 상황에서 김유신은 태생적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눈부신 활약을 보임으로써 새로운 모습의 신라를 만들어간 인물이었던 것. 그랬기에 설원랑, 사다함 등과 함께 ‘미륵의 현신(現身)’으로 숭배 받았을 법도 하다. 다시 앞서 언급한 홍성암의 논문을 살펴보자. 이런 대목이다.“화랑인 김유신을 따르는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 했다. 여기서 용화란 미륵보살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득도하여 설법을 한다는 불교적 설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미륵보살 신앙은 미래의 밝은 세상을 기약하는 신앙이다. 화랑은 국가의 수호와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던 집단이다. 그리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악을 미워하고 선을 권장했다. 이는 곧 불교적 덕목이 풍류도 속에 용해된 양상이다.”◆그래서, 김유신은 행복했을까김유신은 신라를 포함한 한국의 역사 속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살아서는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미륵’으로 불렸고, 죽어서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追尊·죽은 사람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됐다. 어느 왕 부럽지 않은 대접이었다.일흔여덟까지 살았으니 장생의 복까지 누렸다. 병에 걸렸을 땐 문무왕이 직접 찾아와 위로했고, 사망 후에는 국가 차원에서 천문학적인 부의(賻儀)를 제공했다고 한다.죽은 뒤 수백 년이 흐른 고려시대에도 거리의 아이들까지 김유신이란 이름을 입에 올렸다니 요즘 표현으로 ‘불멸하는 스타’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지난 주말이었다. 경주시 충효동에 자리한 김유신의 묘를 둘러보고, 천관사 터가 있는 교동을 향했다.젊은 화랑 김유신과 예기(藝妓) 천관이 나눈 애처로운 로맨스의 흔적은 시간의 풍화작용으로 인해 사라지고 없었다.인간이 살고 죽는다는 것의 덧없음을 떠올리며 한참을 그곳에서 서성거렸다. 그때 마음속으로 떠오른 뜬금없는 궁금증 하나.“사랑하는 여성을 버리고, 어린 조카를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대의와 명분을 선택한 김유신은 정말로 행복했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22

하늘과 땅 사이 떠도는 바람에서 달콤한 향기가…

숨 쉬는 공기의 맛이 달랐다. 보다 시적(詩的)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늘과 땅 사이를 떠도는 바람에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경북 내륙 깊숙이 자리한 봉화군. 백두대간 청정한 계곡을 달리는 기차가 있고, 백두산 호랑이를 만날 수 있으며, 항일 독립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도시. 춘양목 내음 그윽한 봉화에서의 1박 2일은 재론의 여지없이 즐거웠다. 그 경험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산타마을 분천역서 출발 1시간 남짓태백 철암역 사이 계곡 달리는 코스기차는 ‘낭만’과 ‘향수’를 부르는 교통수단이다. 철길을 따라 눈부시게 나타났다가 아스라이 사라지는 풍광은 저마다 지나온 먼 과거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경북 봉화군 분천역과 강원도 태백시 철암역 사이를 오가는 ‘백두대간 협곡열차’도 마찬가지. 맑고 깨끗한 계곡을 따라 질주하는 이 기차의 별칭은 ‘V-train’. 영어 대문자 V는 계곡의 형상과 닮았다.무더운 여름에 추운 겨울을 상상하게 해주는 봉화군 산타마을. 분천역 앞에 자리한 그곳에서 세상 가장 유명한 사슴 ‘루돌프’와 사진을 찍은 아이들은 산타클로스의 안내에 따라 분천역 플랫폼에 모여들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백두대간 협곡열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누구랄 것 없이 입가엔 웃음이 가득 매달렸다. 산타클로스의 옷처럼 새빨간 열차는 아기자기한 장식을 더해 철암까지 달리는 1시간 남짓의 시간을 지겹지 않게 해준다. 중간중간 친절한 안내 방송은 물론이고,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땐 흥겨운 음악과 객차 천장에서 빛나는 야광 장식이 꼬마 손님들의 탄성을 부른다. 잠시 정차하는 승부역에선 고소하게 삶은 옥수수와 시원한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먹고.분천역이 아이들의 ‘행복 공간’이라면, 철암역은 나이 지긋한 관광객들의 추억을 소환하는 장소다. 역 지척에 위치한 철암탄광역사촌은 1970~80년대 탄광마을을 고스란히 재현해 ‘가난했지만 따스함을 잃지 않고 살았던’ 과거 모습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당시 사람들이 드나들던 건물을 그대로 활용해 갤러리와 박물관으로 꾸민 게 소박해서 더 눈길을 끌었다. 철암에서 분천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자투리 시간을 보내는 데 최적의 장소이기에 망설임 없이 추천한다. 지난 2013년 개통한 한국 최초의 개방형 관광열차인 ‘백두대간 협곡열차’ 인기는 겨울만이 아닌 여름에도 높았다. 활짝 연 차창으로 들어온 시원한 바람이 달아오른 얼굴을 매만져 주는 색다른 기차여행이었다.□ 백두대간 협곡열차 탑승 문의: 054-672-7711(분천역)아시아 수목원 중 가장 큰 5천여ha 규모230kg 진짜 호랑이 지척서 보는 행운이단 한 번의 포효로 하늘을 나는 까치와 까마귀까지 숨죽이게 만드는 거대한 짐승. 사방 1천 리 밀림을 통치하는 호랑이는 예부터 ‘신령스러운 동물’로 불렸다. 바로 이 호랑이를 봉화군 춘양면에 자리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만났다.백두대간이란 북쪽 백두산에서부터 남쪽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긴 산줄기를 지칭한다. ‘한국 생태계의 보물창고’로도 불리는 이 공간의 한가운데 조성된 것이 바로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총면적이 5천179ha로 아시아 수목원 중 가장 크다.돌과 고산식물을 조화롭게 배치한 ‘암석원’과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만병초원’, 백두대간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꼼꼼하게 관찰할 수 있어 학습 효과가 높은 ‘백두대간 자생식물원’과 함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갖춰 남녀노소 모두의 관심을 받고 있다. 지하 46m 터널 속엔 야생 식물종자 저장시설도 마련했다. 기후 변화와 자연 재해로부터 산림생물의 다양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다.약용식물원과 수변생태원, 야생화 언덕과 무지개정원 등도 많은 여행자들이 찾지만, 이 수목원에서 최고의 인기를 모으는 곳은 누가 뭐래도 ‘호랑이 숲’. 당당한 자태를 드러내는 백두산 호랑이 2마리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건 흔하게 다가오는 기회가 아니다. 수목원 입구를 출발해 5분쯤 트램(Tram)을 타고 돌틈정원에서 내려 숲길을 800여m 올라가면 형형한 눈빛에 검은 줄무늬가 인상적인 백두산 호랑이들이 방문자를 반긴다. 땡볕이 내리쬐는 오르막길을 20분이나 걸어갈 때는 힘들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좁은 동물원 우리 속이 아닌 널찍한 풀밭을 유유히 오가는 230kg의 ‘진짜 백두산 호랑이’를 지척에서 지켜보고 있자면 힘겨움과 더위는 어느새 잊게 된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모습조차 ‘품격 있는 황제’와 닮았다. 심지어 흔들리는 꼬리의 움직임까지 기품이 넘쳤다.지구 위에 존재하는 호랑이 중 몸집이 가장 큰 백두산 호랑이는 흥미롭게도 아이들보다 기자를 포함한 40~50대 어른들이 더 좋아했다. 아마도 할머니의 옛 이야기 속에 가장 자주 등장하던 친숙한 동물이어서가 아닐까?□ 국립백두대간수목원 홈페이지: www.bdna.or.kr□ 관련 문의: 054-679-1000독립탄원서 초안 작성된 ‘역사의 현장'해저리 마을도 독립유공자 17명 배출여름날 오후 늦게 찾아간 봉화읍 해저리(海底里). 고즈넉한 풍경 속에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석양이 만회고택(晩悔古宅) 뒤편으로 사라지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중요민속자료 제169호인 만회고택은 1690년 춘양목으로 지어진 기와집이다. 조선시대 높은 벼슬에 오른 이들이 많이 나온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한국 독립운동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이 집에서 일어났으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이 집의 주인은 심산 김창숙(1879~1962)과 의성 김씨 혈족이었다. 양심적인 교육자이자 독립운동에 열정을 바쳤던 심산은 만회고택 명월루(明月樓)에서 ‘파리장서(巴里藏書·1919년 김창숙을 포함한 유림들이 파리 평화회의에 보낸 독립탄원서)’의 초안을 작성했다고 한다.운 좋게도 바로 이 명월루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현재 고택을 지키고 있는 만회의 후손 김시원 씨는 “17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마을에서 생활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명월루를 포함한 집 곳곳에 여전히 살아있는 선조들의 우국충정을 잊지 않았다”는 말을 들려줬다.바람이 자유롭게 오가는 시원한 명월루. 잠을 청하려 누웠다. 휘영청 밝은 달이 산과 들, 동네의 크고 작은 고택들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심산이 ‘파리장서’를 쓰던 그날 밤도 분명 달은 환했으리라.□ 만회고택 홈페이지: https://manhoegotaek.modoo.at/□ 숙박 문의: 054-673-7939닭실마을 청암정·거촌리 포암정 등한 폭의 동양화 보듯 기품이 넘쳐‘소나무계 명품' 춘양목에게선수십년 지나도 특유의 향기 ‘솔솔'봉화군은 100개가 넘는 정자(亭子)를 가진 지역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경치가 수려하다는 이야기다. 곳곳에 자리 잡은 정자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무더위에 지친 마음을 편안하게 다독여준다.봉화읍 닭실마을의 청암정(靑巖亭)은 조선 중기의 학자 충재 권벌(1478~1548)이 1526년에 세웠다. 푸른 이끼가 낀 거북 모양의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선 미려한 정자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마당에서 정자로 건너가는 좁은 돌다리 또한 운치가 있다. 안내해준 사람의 설명에 따르면 정자를 둘러싼 연못엔 가끔 수달이 나타나기도 한다고.연꽃이 피는 시기면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다는 도암정(陶巖亭)은 봉화읍 거촌리에 위치해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양식으로 만들어졌고, 팔작지붕에 홑처마다. 단출하지만 전통적인 멋스러움이 은은하게 스며있다. 조선 효종 시기의 문신 황파 김종걸(1628~1708)이 선비들과 더불어 시를 읊고, 세상사를 논하던 도암정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54호이기도 하다.이외에도 봉화군엔 한수정, 뇌풍정, 사미정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정자가 있다.춘양목(春陽木) 또한 봉화의 자랑거리 중 하나. 춘양면과 소천면 일대 높은 산에서 자라는 소나무인 춘양목은 색깔이 곱고, 어떤 나무보다 단단해 고급 건축재와 가구 재료로 사용된다. “나이테가 보통의 소나무보다 훨씬 조밀하고, 성장 속도는 느리지만 뒤틀림이 없으며 내구성이 뛰어나다”는 것이 봉화목재 정진혁 대표의 설명. 특유의 향기 역시 가공된 상태에서 수십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고 하니, ‘소나무계의 명품’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21

산·강·바람이 맛을 보탠 봉화의 오미(五味)

가게 이름이 재미있다. ‘로컬푸드’다. local food. “지역 산물을 파는 건 알겠는데, 이름이 뭐죠?”라고, 라고 물었더니 대답은 마찬가지. ‘로컬푸드’다. 싱겁기 짝이 없다. ‘로컬푸드’는 ‘봉화 지역 농축산물 생산자들이 직영하는 마트’ 쯤, 으로 생각하면 정확하다. 생산자들이 직접 관리하니 믿을 수 있다.가게 안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소박하다. 농협 하나로마트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 넓은 공간도 아니고 물건 배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좀 더 수더분하고, 소박하다.꼼꼼히 둘러보면 아주 재미있다. 진열된 물건들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다, 싶다. 꿀도 여러 생산자의 것을 모두 모아 두었다. 양이 많진 않지만, 종류는 상당히 많다. 이른바 ‘다품종 소량 생산물’들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경상도 봉화 생산품들이다.봉화현의 토산: 잣, 석이버섯, 인삼(人蔘), 수달, 백화사(白花蛇), 석청(石淸蜜) 송이(松耳), 은어(銀魚)‘신증동국여지승람’은 1530년에 편찬한 역사, 인문, 지리지다. 500년 전의 기록이다. 그 이전에 만들었던 ‘동국여지승람’ 개정한 것이니 500년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봉화의 생산물이다. 잣, 석이버섯, 석청, 송이 등은 지금도 ‘로컬푸드’에서 구할 수 있다.시대가 달라지면서 버섯은 석이버섯 한 종류에서 표고, 노루궁뎅이버섯 등으로 늘어났고, 꿀(석청)은 여러 생산자가 내놓은 걸 가지런히 정리해두었다. 말린 산나물과 오미자 등 각종 열매류도 풍성하다. 착즙 음료부터 산양삼, 곱게 물들인 스카프까지 다양하다.생산자이자 운영자들이 꼼꼼히 챙긴다는 인상을 받았다. ‘생산자 직영체제’로 운영하니 제품의 질이나 가격 등을 별도로 챙기지 않아도 된다. 좋은 제품을 적당한 가격에 살 수 있다. 국산이냐, 수입산이냐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대부분 제품이 봉화군 지역 내 생산물 혹은 생산물을 가공한 것들이다.온라인 주문도 가능하다. 온라인 ‘봉화장터’는 http://bmall.go.kr/mall/shop/봉성면은 봉화에서도 외진 곳이다. ‘봉성돼지숯불단지’. 깊은 산속의 돼지고기 단지? 돼지를 특별히, 많이 기르는 곳도 아니다. 그런데 웬 돼지고기 단지? 키워드는 돼지고기가 아니라 소나무, 솔잎이다. 다른 곳 돼지고기구이와는 달리, 소나무 숯으로 고기를 익힌다. 초벌 돼지고기에 솔잎 향을 더한다.‘청봉숯불돼지고기’의 주방은 이중 구조다. 어느 식당에나 있는 주방이 있다. 가게 뒤편에는 별도의 ‘구이용 공간’이 있다. 손님이 돼지고기구이를 주문하면 우선 소나무 숯에 고기를 굽는다. 소나무 숯은 참나무 숯보다 화력이 약하다. 이 부분이 ‘포인트’다. 약한 불은 은은하게 고기를 익힌다. 소나무 숯으로 고기를 익힌 뒤, 솔잎을 깔고 다시 고기를 ‘훈연(熏煙)’한다. 솔잎의 향이 돼지고기에 배어든다. 솔잎을 그릇 바닥에 깔아서 손님상에 내놓는다.손님들은 돼지고기를 세 번 먹는다. 돼지고기와 솔잎을 보면서 눈으로 먹는다. 두 번째는 향이다. 돼지고기를 한 점 집어 들면 코에 솔향이 들이닥친다. 입보다 코가 먼저 맛을 본다. 마지막으로 돼지고기를 베어 문다. 기름기 없는 담백한 돼지고기.매년 봄에는 소나무 숯으로 돼지고기를 굽는 축제도 열린다. 인근의 ‘희망정’이 ‘봉성돼지숯불단지’의 원조다. 가장 오래된 집이다. 음식들은 모두 수준급이다.자연산 은어는 바다에서 태어나서 늦봄, 초여름 무렵 강으로 거슬러 올라온다. 6월 무렵이 은어 낚시 철이다. 어린 은어는 강과 개울에서 짧은 삶을 보내고 곧 바다로 되돌아 간다. 바다에서 산란을 하고 은어는 삶을 마감한다. 은어의 삶은 1년이다. 잠깐 내륙으로 왔을 때 우리는 은어를 낚는다.이제 자연산 은어는 귀하다. 봉화의 은어도 양식이다. 원래 은어는 ‘청류공자(淸流公子)’ ‘수중군자(水中君子)’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었다. 등 부분은 검거나 갈색 혹은 맑은 청색을 지니고 있고, 배 부분은 흰색이다. 맑은 물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점잖아서 붙인 이름이다. 혹자는 경북 북부의 사대부들이 은어를 좋아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설명한다.오래전에는 안동의 건진국시 국물을 은어로 우렸다. 육수를 낼 만한 생선은 민물 은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다는 멀고 웬만한 생선은 모두 비린내가 나지만 은어는 수박 향이 가득하다.‘도촌송어양식장’에서는 은어구이, 회, 은어 조림, 튀김 등 다양한 은어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은어 전문 양식장은 아니다. 송어와 철갑상어 등도 양식한다. 매년 봄, 일정량의 은어 치어를 지자체로부터 구한다. 8월이면 은어는 일정 크기로 자란다. 전량 다시 지자체에 납품하면 8월의 은어 축제가 시작된다. 일부 식당에서 사용할 양을 냉동 저장한다.봉화 송이는 태백산맥의 선물이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기후가 송이의 성장에 알맞다. 낮과 밤의 심한 일교차, 산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바람이 봉화 송이에 향기를 더한다. 같은 태백산맥 지역인 인근의 영양, 울진 등의 송이도 이 지역으로 모여든다. 봉화 생산 봉화 송이가 있고 봉화 장터에 모인 인근의 송이도 있다.‘용두식당’은 오랫동안 송이돌솥밥을 내놓고 있다. 무엇보다 돌 솔 위에 올린 송이의 양이 만만치 않다. 돌솥밥을 내올 때 은은한 송이 향이 밥상 위로 뒤덮는다. 귀한 향을 맡으면 손님들은 ‘와’ 하고 탄성을 지른다.일본식 가마메시(釜飯, 부반, 일본식 솥밥)과는 다르다. 일본 가마메시는 두어 점의 송이가 모두다. 송이가 들어갔다는 흉내만 낸 정도다. 봉화 ‘용두식당’은 돌솥 위에 송이가 가득하다. 두께도 제법 두텁다.넓은 주차장이 있다. 봉화 농축산물 직매장인 ‘로컬푸드’와 ‘봉화한약우프라자’는 맞붙어 있다. 정육식당이다. 손님이 먼저 고기를 선택한 후, 식당으로 입장, 자리를 잡는다. 일정한 사용료(3천 원)을 내면 식당 내부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불판과 각종 반찬, 채소 등을 차려낸다.‘한약우’은 봉화군의 쇠고기 브랜드다. 다른 작물과 마찬가지로 봉화 특유의 일교차가 심한 날씨가 한우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자체에서 일정량의 ‘약재’를 공급한다.한우를 기르는 농가들은 지자체가 공급하는 약재를 더하여 소를 기른다. 한우 마리 수에 맞추어 약재를 공급하고, 약재를 먹인 소를 일괄적으로 도축, ‘봉화한약우프라자’에 내놓는다. 정육식당이니 생고기를 사갈 수 있다.살코기 조직이 치밀한 편이다. 꼬들꼬들한 느낌이 좋고 맛이 깊다.가끔 싱거운 짓을 할 때가 있다. 외지고도 외진 봉화군 춘양면의 ‘용궁반점’을 찾은 것도 바로 이런 ‘싱거운 짓’이었다. 싱거운 짓을 한 이유는 있다. ‘칼과 황홀(2011년). 소설가 성석제의 산문집이다. 이 산문집에 문제의 ‘용궁반점’과 ‘펭귄반점’ 이야기가 실려 있다. “깊은 산골인 봉화 춘양면에 ‘용궁반점’이라니. 아주 괜찮은 ‘야끼우동(볶음우동)’이 있다고 해서 일부러 가봤다. 두 번째 갔을 때, ‘용궁반점’ 앞에 새로 중식당이 문을 열었다. 이름이 압권. ‘펭귄반점’이었다. 포복 졸도했다. ‘펭귄반점’ 주인은 ‘용궁’에 앞설 이름을 오랫동안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용궁과 펭귄. 세상 어디에도 없을 중식당 이름이 아닌가?”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전국 최고의 볶음 우동이라니. 가볼 수밖에 없었다. 가던 길에서 약 60km를 돌아 ‘용궁반점’에 갔다. 볶음우동. ‘우리나라 제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륙치고는 해물이 넉넉하게 들어간, 제법 잘 볶은 우동이었다. 알고 봤더니 수타 우동 면발을 오랜 기간 만진 주인의 업력도 만만치 않았다.가는 날이 장날이다. ‘용궁반점’에 가던 날, 가게 앞의 ‘펭귄반점’은 문을 닫았다. 그 후로 한 번 더 춘양면에 갔지만, 여전히 ‘펭귄반점’의 문은 닫혀 있었다. 하기야 소설가 성석제 역시 ‘펭귄반점’은 이름만 봤을 뿐, 가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최고의 짜장면이 있다”는 설레발이 있으면, ‘펭귄반점’도 한 번쯤은 가보고 싶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08-21

환술(幻術)을 쓰는 파계승(破戒僧)들

환술(幻術)은 재빠른 손놀림이나 여러 가지 장치 등을 이용하여 눈속임으로 불가사의한 광경을 보여주는 연희의 일종이다. 지금은 마술(魔術)이나 요술이란 말을 쓴다.우리나라는 환술에 관한 문헌기록이 매우 드물다. 삼국시대의 환술에 대한 기록은 입호무(入壺舞)가 유일하다.‘신서고악도’에 실린 입호무에 대한 그림을 보면, 재주꾼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작은 항아리에 몸을 구겨 넣어 반대편에 놓인 다른 항아리로 빠져 나오는 모습이다. 마치 오늘날의 마술사들을 연상케 한다. 고려시대에는 불을 토해내는 토화(吐火)와 칼을 삼키는 탄도(呑刀)가 있었다.조선시대 와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환술이 선을 보였다. 사용되는 여러 가지 기술들이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었던 것이다. 기묘한 재주를 부려 여러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던 환술이 대중들의 인기를 끌자, 이를 나쁜 용도에 사용하는 일당들이 생겨났다. 바로 1473년(성종4) 조선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중(僧) 설징(雪澄) 등 25명의 패거리였다. 이들은 천안(天安)에 살고 있는 승려들이었음에도 모두 관비(官婢)를 처(妻)로 삼고 있었다. 이른바 파계승들이었다. 이 파계승들은 계율을 깨뜨린 것도 모자라 백성들을 속여 재물을 탈취했다. 오늘날로 치면 장터를 돌아다니며 장꾼들을 속여 돈을 편취하는 야바위꾼들이던 것이다.이들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직인까지 찍힌 문서를 위조해 사기를 쳤다. 그 위조한 문서 내용도 그럴듯했다. ‘어떤 현(縣)의 아무개가 착한 일 하기를 좋아한다 하므로, 내가 기쁘게 들었다. 지금 가는 비구니 아무개의 말을 들으니, 금강산 아무개 절(寺)에서 승려가 입는 옷을 만든다 하니, 거기 소용되는 면포(綿布) 몇 필(匹)을 허락해 보낸다면, 너희들의 부역을 영구히 면제시키고 양민(良民)으로 놓아주겠다.’는 것이었다.이들은 자신들이 도사인 것처럼 요술도 부렸다. 사람의 젖으로 재(灰)를 개어 종이에 글자를 쓰거나 불상(佛像)을 그려서, 그 종이를 물에 담그면 흰색 무늬 불상이 되고, 불에 비치면 붉은색 무늬의 불상이 되었다. 또 사람의 오줌으로 팔뚝과 손등에 부처를 그리고 글씨를 쓴 후에, 소나무 숯가루를 뿌리고 털어내면 마치 문신을 새긴 것처럼 그곳에 검은색 글씨나 무늬가 생겨났다. 글자나 그림을 순식간에 나타나게 하거나 색상을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었으니, 백성들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홀려 재산을 홀딱 날린 사람들이 속속 늘어났다. 부역과 천민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왕실 실권자의 문서도 있거니와, 도술을 쓰는 믿을 만한 승려들이 그 문서를 제시하며 행사를 했으니 속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지방 수령들이 여기저기서 피해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다.당시 명의를 도용당한 대왕대비는 정희왕후(貞熹王后·1418~1483) 윤씨였다. 이 무렵은 예종이 재위 13개월 만에 갑자기 죽고, 열세 살 어린 나이의 성종이 왕위에 오른 시기였다. 그래서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가 섭정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됐다. 조선 7대왕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그녀는 조선이 개국한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을 하였다.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처음 왕자의 아내로 조선 왕실과 인연을 맺은 그녀는 이후 왕비가 되었고, 후대의 왕을 고를 수 있는 권리를 놓쳐버리지 않았으며, 마지막에는 수렴청정을 통해 7년간 국가정책 최고결정권자의 자리에 있기도 하였다. 정희왕후의 65년여 연간의 인생은 격동의 조선 전기 정치사 어느 한 부분에서도 빠진 적이 없었다. 스님이라고 하는 자들이 도술을 쓰며 왕실의 공문서를 위조해 백성들을 기망하고 다녔던 이때도 정희왕후는 그 정점에 있었다. 이 패거리들로 인해 전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조정에서는 의금부에 특명을 내려 이들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했다. 의금부에서는 한 달 동안 수사를 한 끝에 범인 일당 중 일부를 잡아들였다. 잡힌 사람들은 승려 설징과 일본에서 온 승려 신옥(信玉), 권문세가에서 부리는 노비 기금동(奇今同), 농민 출신 군인인 이계산(李繼山), 김맹산(金孟山) 등이었다. 일당 중 승려 설산(雪山)·월심(月心)·계엄(戒嚴)·성명(性明) 등 십 수 명은 이미 낌새를 채고 줄행랑을 쳐버려 잡지를 못했다.1474년 1월 4일, 임금은 검거된 사람들 중 주모자급을 모두 참형에 처했다. 일당 중 김맹산의 가담 정도는 경미하였다. 그는 바람잡이 격이었다. 그래서 이날 참형은 면하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역(役)에 처해진 그는 엄동설한에 동상으로 퉁퉁 부은 발로 860리를 걸어서 왔다. 하루 95리를 걸어야 9일반이 걸리는 머나먼 유배길이었다. 조선시대 역이란 죄수나 새로 노비·기생 따위의 천인(賤人)이 된 사람에게 노역(勞役)이나 신역(身役)을 배정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김맹산처럼 조선시대 유배형을 받아 역에 처해진 사람들의 집행과정은 어떠하였을까? 유형은 천민부터 양반까지 모두 받는 형이었는데, 신분에 따라 유배 가는 모습도 천차만별이었다. 천민이나 평민은 걸어서 갔다. 이들을 유배지로 호송하는 호송관은 역(驛)이 해당되는 지역의 포졸들이 했다. 역과 역을 릴레이식으로 연결해서 유배지 해당역까지 인계하는 것이다. 그래서 포졸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유배자를 다음 역까지 이동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 일이 귀찮은지라 빨리 유배자를 다른 역까지 보내고 일을 끝내려는 심보였다.반면 관직을 가진 관원의 경우는 당하관인 경우 나장(羅將)이 담당했고, 당상관의 경우는 서리(書吏)가 호송을 책임졌다. 고위급 관리의 경우에는 의금부 도사가 호송을 담당했다. 평민들과는 달리 이들의 호송은 말을 타고 여유롭게 갔으니, 양반사회의 신분차별이 여기에서도 나타났다. 유배자들은 이들 호송관의 노자까지 책임져야 했다. 규정상 하루 80∼90리는 가야 했고 보통 수일에서 수십일 걸리는 길이었으므로, 밥값과 숙박비만 해도 만만치가 않았다. 신분이 높아 호송하는 인원이 많아지면 그에 따른 비용도 어마어마했다. 가난한 선비와 평민들은 하인이나 말 한필 없이 홀로 가야만 했다. 곤장을 맞고 성치 않은 몸으로 유배에 나선 이들에게 유배길은 곧 생과 사가 교차되는 죽음의 길이기도 했다.형벌로 과해지는 역(定役)은 변방의 역리(驛吏)나 관노비, 충군(充軍) 따위였다. 특히 충군은 군역에 복무를 하도록 한 것인데, 정군(正軍)으로서의 군역이 아니고 고된 천역인 수군이나 국경수비대 등에 충당되었기 때문에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엄한 형벌의 하나였다.조선시대 장기현에는 복길·뇌성·발산 3개의 봉수대가 있었고, 읍지(1832년)에 의하면 이에 속한 봉군만 해도 300명 넘게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종4품의 만호(萬戶)가 수장으로 있는 포이포진(包伊浦鎭)이 있었다. 포이포진은 조선 세종 때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오늘날 포항 장기면 모포리에 설치하였는데, 진의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병선 8척 군사 5백89명이 있다’고 했다. 이런 사정으로 장기현에 배정된 유배인들 중에는 봉수대를 지키는 봉군 아니면 포이포진의 수군에 충군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김맹산도 위 둘 중 한곳에 충군되었을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이 사건을 계기로 성종은 명령을 내려 백성들이 환술에 속지 말 것을 전국에 지시하였다. 그 후로부터 환술은 조선 내내 속임수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범죄로 취급되었다.하지만, 이런 엄한 금령과 처벌에도 불구하고, 환술과 도술에 능했던 유명한 인물이 또 나타났다. 바로 ‘전우치(田禹治)’란 사람이다. 그는 중종 때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사퇴하고 송도에 은거하면서 도술가(道術家)로 널리 알려진 사람인데, 조선 중기 유명한 문신인 신광한(申光漢), 송인수(宋麟壽) 등과 친하게 지냈다고 전한다. 하루는 신광한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던 중에 입에 넣은 밥알을 내뿜자 그것이 각각 흰나비로 변하여 날아갔다고 한다.또 어느 때는 가느다란 새끼 수백 발을 하늘에 던지고 동자(童子)를 시켜 하늘에 올라가 천도(天桃:복숭아)를 따오게 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이 소문을 듣고 그를 잡아다가 백성을 현혹시켰다는 죄로 신천옥(信川獄)에 가두었는데, 옥에서 그만 죽고 말았다. 뒤에 친척들이 이장(移葬)하려고 무덤을 파보니 시체 없는 빈 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오산집(五山集)’에 의하면, 어느 날 전우치가 차식(車軾)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두공부시집(杜工部詩集)’ 1질(帙)을 빌려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때는 이미 전우치가 죽은 지 한참 후였다는 것이다. 전우치의 혼백이 와서 책을 빌려갔다는 이야기다. 이뿐 아니라 후세에 전하는 각종 문헌에는 그에 관한 신비한 행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이러한 실존인물 전우치의 행적을 소설화한 작품도 나왔다. 바로 ‘전우치전’이다. 그 줄거리는 탐관오리들을 골탕 먹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민생고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앞서 성종때 김맹산 패거리들이 환술을 악용했던 것과는 달리 전우치는 부패한 사회와 탐관오리들을 고발하고 응징하여, 새로운 세상을 이루고자 했던 개혁적인 사상을 소유하고 있었다.한편으로 보면, 환술이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기술이긴 하지만, 억눌린 민초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는 그만한 게 없었다. 그리고 많은 환술에는 과학이 숨어 있었다. 자연과학의 원리에 뛰어난 연기력을 더하면 일반 상식을 초월하는 멋진 환술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화학이나 물리학적 원리를 이용하면 더욱 그랬다.김맹산 등의 패거리가 백성들을 속이기 위해 사용한 것은 화학의 원리를 응용한 환술이었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 중국으로부터 서양문물이 조금씩 들어오게 되고, 일부 눈을 뜬 사람들이 화학변화의 원리를 깨닫게 되면서 환술의 기술에도 변화가 왔다. 종이에 글자나 도화를 나타나게 하거나 글자와 그림의 색상이 붉은색으로 바뀌는 것, 펄펄 끓는 솥에 손을 넣어도 화상을 입지 않는 것, 불을 입에서 토해내는 환술 등은 사물의 화학적 변화를 이용하는 수법이다.앞서 언급한 패거리들이 사용한 수법도 알고 보면 간단하다. 광물인 초석(硝石)을 물에 섞은 후 붓에 그 물을 묻혀 글자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글자와 그림이 마르면 아무런 흔적이 없지만, 향불에 쬐면 그것들이 다시 나타난다. 색깔이 붉은색으로 바뀌는 것도 종이와 물에 비밀이 있다. 종이는 보통 종이가 아닌 강황지(薑黃紙)를 사용하고, 물은 소다수를 사용한다. 강황이 소다를 만나면 붉은색으로 변하는 화학적 변화를 일당들이 알고 이용한 것이다.환술을 사기행각에 이용하다 장기현 역(役)에 처해진 김맹산은 1476년 1월 21일까지 약 2년간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갔다. 이후에도 환술 때문에 옥사한 전우치의 예에서도 보듯이,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환술을 쓰다가 참형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는 내용이 더러 있다. 그래서 환술은 공연으로 승화되지 못했고, 음지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졌다.조선시대 양반층들은 그래도 문화생활을 누리기에 충분했다. 시를 짓고 회화를 그리고, 때로는 기생들과 가무를 즐기며 회포를 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달랐다. 대중문화가 없던 시절, 환술조차도 마음대로 관람하지 못했던 시대를 살다간 민초들의 삶이 왠지 애처롭게 느껴진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8-20

어둠 내리면 금빛 주단 깔리고… ‘아! 신라의 밤이여’

새는 보이지 않는데 새 지저귀는 소리가 났다. 졸음에 겨운 눈을 부비고 하늘을 보니 투명한 햇살만 기왓장에 부딪치고 있었다. 짹짹거리는 저 소리는 새소리일까 햇살이 부서지는 소리일까. 경주의 아침은 경쾌한 노래로 왔다. 고택에서는 놋그릇 부딪치는 소리, 밥 짓는 냄새, 빗자루로 마당 쓰는 소리, 장독대 항아리가 튕겨내는 치자꽃과 댓잎의 향기마저 모두 음악이었다.아침식사를 무엇으로 할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경주 황남동 ‘황리단길’에는 아침식사가 가능한 식당이 많지 않으나 조금만 걸어가면 24시간 문을 여는 황오동 팔우정 해장국거리가 있다. 30년 넘은 노포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기대어 있는 골목, 한 티브이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의 파도를 막아내기엔 낡은 외벽과 간판이 많이 힘겨워 보인다. 조선시대에 시인 묵객들이 시를 지어 읊던 팔우정은 오래 전 무너지고 비석만 남았다. 그마저도 지금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1960년대에 비석을 가운데 두고 로터리가 들어서자 팔우정은 경주의 중심지가 되어 사람이 몰려들었다. 해장국거리도 그때 생겨났다.닭뼈 육수에 김치와 콩나물, 묵채, 모자반을 넣어 끓인 경주식 해장국은 꽤나 생소한 것이다. 묵의 식감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는 원조격인 팔우정 해장국 대신 옆집 ‘포항 해장국’에 들어가 앉아 소고기국밥과 계란프라이 3개를 주문했다. 엄마가 끓여주던 소고기무국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소박한 밑반찬과 소고기국밥이 상에 올랐다. 반숙으로 해달라고 말한다는 걸 깜박했더니 계란프라이는 노른자가 다 익어 나왔는데, 학창 시절 도시락 반찬 먹는 기분이 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담백하고 고소한 소고기 국물이 무의 아삭한 단맛과 더해져 한 숟갈 뜰 때마다 속이 든든해지면서도 또 시원하게 풀렸다. 김치와 콩나물, 고춧가루가 얼큰함을 더해 떠먹을수록 이마에 땀이 맺혔다.해장국 한 그릇을 비우고 가게를 나오자 그새 햇빛이 너르게 퍼져 있었다. 대릉원의 커다란 고분들 사이사이로 색감이 짙은 푸른 하늘이 빽빽하게 몸을 끼워 넣는 중이었다. 대릉원은 오전 아홉시부터 개방된다. 3만8천평의 평지에 스물 세 개의 능이 솟아 있는 이곳 고분군에는 천마총과 미추왕릉, 황남대총 등이 있다. 나는 한 손에는 아이스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든 채 옛 신라인들의 무덤 사이를 걸었다. 1973년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황금 장신구들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초여름의 태양이 대릉원을 걷는 사람들의 머리마다 금관 하나씩을 씌워주었다. 무덤 앞에서 반짝이는 금빛 미소들, 죽음을 겁내지 않을 때 인간은 존엄을 획득한다. 무덤은 인간의 삶이 멈추는 비극적 장소가 아니라 영원이라는 유구한 시간에 편입되는 축제의 마당이어야 한다.우리 사회는 죽음이라는 바윗돌을 너무 무겁게 짊어진 탓에 피로도가 높다.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들어가는 의료비와 인력은 물론이고 과도한 장례 비용과 절차, 묘역이나 납골당 등 시설에 소비되는 제반까지 다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또 무겁게 여기는 풍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와 엄숙함에서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다. 자꾸 외면하고 격리시킬 것이 아니라 삶 안으로 불러들여 친해져야 한다. 몇 해 전 오스트리아 비엔나 도심 중앙묘지의 가로수길을 걸으며 느꼈던 청량감과 편안한 휴식의 기쁨을 대릉원에서 다시 만끽했다. 신라 때도 묘지와 납골당은 사회 혐오시설이었을까? 지금을 사는 우리도 나중엔 다 옛사람이 된다. 죽음의 슬픔과 두려움에 함몰되지 않을 때, 현재의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하는 건강한 생명력도 생겨난다.드넓은 대릉원을 걸었더니 소고기국밥이 벌써 다 소화가 됐다. 목이 마르고 입이 심심해져 황리단길의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카페 ‘스컹크웍스’를 찾았다. 달걀 토스트와 말차라떼가 유명한 집이다. 음료와 곁들여 먹는 디저트 음식이 맛있기로 입소문 났지만, 이 카페의 유난한 매력은 고풍스런 한옥 마루에 앉아 교자상을 두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점, 그리고 SNS에 올릴 만한 ‘감성사진’을 찍기 좋다는 점이다. 황리단길의 대부분 가게들은 전통 한옥 형태의 공간에서 피자, 스테이크, 파스타, 수제 맥주, 아이스크림, 마카롱 등등 서구 먹거리를 판다. 전통차라든가 팥죽, 떡, 한과 같은 전통 먹거리를 파는 집들도 물론 있다. 혹자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우려하지만, 나는 우리 전통과 최신 유행의 아름다운 조화라고 생각한다. 황리단길이 조성되고 나서 경주 시내 어디서든 한복을 입고 사진 찍기에 여념 없는 젊은 남녀들을 볼 수 있게 됐다. 그들이 소위 ‘힙스터’ 유행만을 좇는 것은 아니다. 별 생각 없이 경주에 놀러왔다가도 여기저기 널린 신라의 찬란한 유산과 마주하는 순간, 황리단길을 거니는 즐거움만큼이나 우리 전통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 또한 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스컹크웍스 툇마루에 앉아 나무 바닥의 서늘함을 몸속으로 들이면서 달걀토스트와 얼음을 띄운 아메리카노를 맛있게 먹고 마시는 사이 오후가 됐다. 한옥에서 먹은 토스트와 커피는 뉴욕식 점심식사가 된 셈이다. 황리단길 이곳저곳을 걸었다. 장미 덤불을 늘어뜨린 붉은 담장의 커브를 지나, 추억의 옛 교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는 어린 연인들의 풍경을 지나, 안전모를 쓰고 유적 발굴 작업 중인 인부들을 지나, 볕 좋은 구멍가게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노인들 몇을 지나는 동안 신라의 오늘을 보았다. 이제 신라의 어제를 향해 걸음을 옮길 시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나는 옛 화랑처럼 뺨이 붉고 눈이 맑은 소년이 되었다.눈을 감으면 박물관은 보이지 않고 거대한 종 하나만 거기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에밀레, 에밀레….’ 내 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고, 마치 내 이름을 부르는 듯한 환청을 오래 경험했다. 경주를 떠올릴 때면 에밀레종으로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이 신비한 소리로 내 영혼을 휘감는다. 보존을 위해 이제는 타종하지 않지만, 종 앞에 서면 녹음된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국보 제29호인 이 거대한 동종은 국립경주박물관 입구 오른편에서 신라를 찾아온 오늘의 사람들을 가장 먼저 맞아준다. 바람과 새소리, 여름의 녹음, 땅의 지금과 하늘의 영원을 모두 품어 안으며 맑고 은은하게, 또 짙고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천이백년 전부터 땅과 하늘에 두루 닿는 것이었다. 성덕대왕신종의 소리가 뒤에서 등을 떠밀어, 한결 가벼워진 내 걸음은 천마총과 금령총, 다보탑과 석가탑, 가릉빈가와 원숭이를 차례로 거쳐 왕과 여왕의 시대, 마립간과 이사금의 옛날, 혁거세의 처음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권삼윤이 쓴 책 ‘나는 박물관에서 인류의 꿈을 보았다’를 인용하자면, 나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신라 사람들의 꿈과 낭만을 보았다. 그 천년의 낭만은 지금까지 전혀 녹슬지 않은 채 생생한 빛을 뿜는다. 동궁과 월지의 야경이 특히 그러하다.동궁과 월지의 야경을 보기 전엔, 그 황홀한 빛의 누각을 보며 ‘아! 신라의 밤이여!’ 저절로 탄성을 뱉기 전엔 경주에는 와도 신라에 온 것은 아니다. 천마총 내부처럼 사방이 캄캄해질 무렵, 경주는 마침내 서라벌의 금빛 주단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벌써 매표소 앞에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상인들은 야광봉과 팔찌, 불빛이 번쩍거리는 부메랑, 솜사탕 따위를 팔고, 거기 눈이 팔린 어린아이들부터 젊은 연인들, 학생들, 노인들, 또 유럽과 아프리카, 중국, 일본, 아메리카 사람들까지 모두 얼굴이 환했다. 나도 어제의 슬픔과 내일의 불행을 잠시 잊고 바로 지금 행복하기로 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둔 밤하늘 아래 금관처럼 빛나는 동궁과 그 화려한 불빛을 고요히 머금은 채 작은 파장에도 투명한 종소리를 수면 위로 띄워 보내는 월지를 보노라면 누구나 꿈속 신라에 닿게 된다. 현장 학습을 온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조를 나눠 경주의 문화재에 대해 발표를 준비한 모양인데, 친구들에게 동궁과 월지에 대해 또박또박 설명하는 앳된 목소리를 들으며 뜬금없이 눈물이 나 혼났다. 어른들이 걸음을 멈추고 학생의 설명에 귀 기울이며 미소 짓고 있었다.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보면 뭉클하다. 나이 들수록 마음이 여려져 큰일이다.“이것을 넣는 이와 꺼내 쓰는 사람 사이의 수백 수천 년은 이 침향 내음새 꼬옥 그대로 바짝 가까이 그리운 것일 뿐, 따분할 것도, 아득할 것도, 너절할 것도, 허전할 것도 없습니다”(서정주, ‘침향’)라고 시인은 노래했다. 내가 비누 같은 달빛 아래 동궁과 월지를 걸을 때, 신라의 어제와 오늘, 천년 전 달빛과 천년 후 미소가 만나던 밤의 향기야말로 침향이 아니었을까?장사를 시작한 지 40년도 넘은 서부동 ‘반도불갈비식당’에서 연탄불에 구운 한우갈비를 먹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한우 갈비살의 풍미 또한 침향 못지않은 것이었다. 저녁을 푸짐하게 먹고도 어딘지 헛헛한 신라의 밤, 혼자라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다시 황리단길 ‘경주피자’ 안뜰에 앉아 치즈피자와 함께 김유신페일에일, 선덕여왕에일, 첨성대다크에일까지 세 가지 종류의 맥주를 마시자 그제야 외로움이 가신다. 나는 어느새 신라 사람들과 마주앉아 지치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탈해와 이사부, 선덕여왕과 미실, 비형랑과 도화녀, 불귀신이 된 지귀, 김대성과 원효, 관창과 사다함이 내 곁에 둘러앉아 나와 함께 맥주잔을 부딪쳐주었다. 천년 전에도 이런 밤은 있었고, 천년 후에는 내가 다정한 유령이 되어 어느 외로운 사람 곁에 아까시 향기로 가만 앉아줄 것이다.       /시인 이병철

2019-08-18

해피 투게더 김천, 시민 참여로 활기차고 깨끗한 도시 ‘우뚝’

김천시가 시 승격 70주년을 맞아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시민의식 개혁 정신운동 ‘Happy Together 김천’이 다방면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이끌어 주목을 받고 있다. 처음에는 김천시가 주관이 돼 시작한 운동이지만, 1년여가 지난 현재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해 관이 아닌 민이 주도하는 사업으로 발전했다. 시민들의 의식을 변화시켜 과거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고, 활기차고 깨끗한 도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시작된 이 운동이 어떻게 빠른 시간 내 시민들의 공감을 얻어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 ‘Happy Together 김천’운동의 의미와 그동안의 노력과 성과를 살펴보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짚어본다.□ ‘Happy Together 김천’운동의 시작‘Happy Together 김천’운동은 민선 7기 김천시정 목표인 ‘시민 모두가 행복한 김천’과 일맥상통한다. ‘Happy Together 김천’운동의 목표가 시정 목표인 것이다. 시는 이를 위해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 고민끝에 내부에서부터, 나 자신부터 개혁을 해야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에 시는 과거의 잘못된 의식을 과감히 개선해 성숙한 시민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특히, 관 주도의 단발성 행사가 아니라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 전 시민의 자발적인 동참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그래야만 불친절하고, 드세며, 텃세가 심한 지역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친절하고 질서있는 청결한 도시로 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시민의식 변화운동 ‘Happy Together 김천’이다.□ 7대 실천목표 설정김천시는 ‘Happy Together 김천’운동이 일회성 행사가 아닌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밀착된 정신운동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수립해 7대 실천목표를 설정했다.7대 실천목표는 △친절한 김천시민 △질서를 지키는 김천시민 △청결한 김천시민 △참여하는 김천시민 △양심있는 김천시민 △예절바른 김천시민 △배려하는 김천시민 등이다. 이들 목표를 자세히 살펴보면 지역공동체, 시민사회에서 구성원들이 꼭 지켜야 할 기본이 되는 내용들이다.모든 시민들이 이 기본을 충실히 지킨다면 시민 모두가 행복해지고, 김천을 찾아오는 타지역 방문객들에게는 살갑고 사람다운 인정을 넉넉히 베푸는 도시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또 7대 목표는 구체적으로는 학연·지역 등 지역 연고주의와 배타적인 시민의식, 지역이기주의를 없애는 의식개혁과 더불어 각종 행사시 노약자를 먼저 배려하고 형식적인 의전보다는 행사 목적에 맞는 진행을 하는 등 시민 개개인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행동지침도 담고 있다.시는 ‘Happy together 김천’ 운동을 지역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하는 계기로 만들고 있다. 7개의 덕목, 하나 하나를 실천해 나가면서 김천시민 누구나가 김천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지역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것이 시민행복이고, 지역발전을 앞당기는 새로운 모티브가 되고 있다.□ 시민들의 공감대를 얻다김천시는 지난 2월 김천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전 공직자를 대상으로 ‘Happy Together 김천’ 운동 추진을 위한 실천 다짐대회와 특강시간을 가졌다. 다짐대회는 ‘Happy Together 김천’ 운동의 확산을 위해 공직자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자는 취지였다.또 지역의 각 단체들을 대상으로 실천 다짐대회와 특강을 실시해 시민운동에 대한 붐을 조성해 나갔다. 선진 시민의식 마인드 함양을 위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5명의 전담 강사도 위촉해 각종 단체를 대상으로 상시 교육을 지원했다. 이 교육 역시 자발적인 접수를 받아 진행했다. 처음에는 이렇다할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지속적으로 열리는 캠페인 등으로 자발적으로 교육을 받고 싶다는 단체는 점점 늘어나가 시작했다. 자발적인 교육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Happy Together 김천’ 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도 형성됐다. 공감대 조성으로 작은 행동과 실천으로 옮겨져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바람으로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민들도 그 변화의 바람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입을 모은다. 많은 시민들이 공감을 하고 동참하면서, ‘Happy Together 김천’운동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실제 많은 곳에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외부인을 직접 맞이하는 음식점 등 접객 업소를 중심으로 친절과 청결운동이 이어지고 있고, 위생업소를 중심으로는 서포터즈를 운영하고 친절서비스 교육과 준수사항 등을 숙지하자는 등의 ‘Happy together 김천’운동이 범시민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전통시장 상인들도 스스로 친절과 청결을 생활화하자는 각오를 다지고, 시민들도 요일별 쓰레기 배출방법을 지키는 등 변화를 이끌고 있다. 또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도로 내 불법 적치물도 하나 둘 사라지고, 불법 주정차 시비도 크게 줄어들면서 주차질서와 주차문화에도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시민의식 향상이 도시 경쟁력시 승격 70주년을 계기로 김천시가 범 시민적인 참여 속에 전개하고 있는 ‘Happy together 김천’이 정착되면서 도시 경쟁력도 높아졌다는 평가다.‘Happy together 김천’운동으로 시작된 변화의 바람으로 시민들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친절, 질서, 청결이 김천을 대표하는 수식어로 자리잡고 있다. 친절, 질서, 청결이라는 도시 이미지가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김천을 찾는 타지 사람들도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 이에 김천시는 의식개혁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미래를 향해 열린도시, 시민과 함께하는 도시로 거듭나려 한다. ‘Happy together 김천’운동이 지금과 같이 성공적으로 추진된다면 김천시는 인정과 배려가 넘치고, 미래를 앞서나가는 선진 시민의식이 있는 도시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해피 투게더 김천 운동으로 새로운 미래도시 100년 준비”“Happy together 김천은 시민참여형 의식개혁 운동입니다”김충섭 김천시장은 “전 시민이 참여하는 문화로 정착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만들어 김천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가장 행복한 도시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김 시장은 이어 “김천은 혁신도시와 KTX역, 그리고 잘 가꿔진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조경과 중소도시 최초로 전국체전을 치른 스포츠 시설, 사통팔달의 교통망, 기업하기 좋은도시·투자의 최적지 등 좋은 이미지를 많이 가지고 있다”면서 “이러한 긍정적 이미지는 더욱 부각시키고 부정적인 이미지는 새롭게 바꾸는 것이 ‘Happy together 김천’운동이다. 이 운동을 통해 김천시가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김 시장은 “‘Happy together 김천’이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어 건강한 도시가 조성될 수 있는 기반이 되길 희망한다”면서 “지역의 각 사회단체 회원들이 지역사회 리더로서 관심을 갖고, 친절하고 청결한 도시 만들기에 앞장서 주길 바란다”며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그는 혁신도시로 이전한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Happy together 김천’운동 전파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공공기관에서도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공공기관 임직원들의 캠페인 동참이 이어지고 있다.또 “‘Happy together 김천’ 운동과 함께 ‘김천 주소갖기’ 캠페인도 추진하고 있다. 도시발전의 중요한 지표인 인구증가 운동에도 다 같이 동참하면 15만, 20만의 살기좋은 김천을 다함께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말했다.그러면서 “이 모든 것은 관에서 주도해 나갈 수 있는게 아니다. 시민들이 주도해 나가야 하는 것이고, 관에서는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라면서 “시민들이 주도하는 ‘Happy together 김천’운동이 미래를 향해 열린도시, 시민과 함께하는 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밝혔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08-18

“화랑,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인재양성 목적으로 만들어져”

가야할 길이 어두울 때는 길을 밝힐 ‘등불’이 필요하다.인터뷰는 ‘길 잃은’ 기자들에게 가끔, 아니 자주 환한 등불의 역할을 해준다. 특히 역사나 철학, 문학과 미술 같은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그 도움이 절대적이다.‘풍류도’와 ‘화랑’에 대한 연재를 이어가면서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한국 고대사를 연구해온 ‘눈 밝은 사학자’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그리고자 하는 그림의 온전한 바탕을 만들고 싶어서였다.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고대사학회 고문이자 한국목간학회 명예회장인 주보돈(66)과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독자들을 대신해 물어볼 것이 많았다.‘금석문과 신라사’ ‘신라 지방 통치체체의 정비 과정과 촌락’ ‘김춘추와 그의 사람들’ ‘한국 고대사의 기본 사료’ ‘가야사 새로 읽기’ 등의 책을 쓴 주보돈은 지난해부터 경주에서 생활하며 연구와 강연,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엔 국립경주박물관 운영자문위원장도 맡았다.한바탕 쏟아진 소나기가 무지막지했던 폭염의 기세를 꺾어준 8월 초순. 경주 외곽 조용한 카페에서 주보돈을 만났다. 아래는 그날 화랑과 풍류도에 관해 주고받은 이야기들을 요약한 것이다.◆ 풍류란 유·불·선 삼교(三敎)의 융합을 의미-신라의 ‘화랑’과 ‘풍류도’에 관해선 여러 학술적 견해들이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풍류도는 무엇인가.△풍류란 글자 그대로 하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가는 것이다. 풍류가 원래 화랑의 이념은 아니다. 화랑은 고정불변의 지향성과 목적성을 가진 조직이 아니었다. 화랑이 제 기능을 했던 것은 삼국 통일 이전이다. 통일을 위한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이후엔 화랑의 본래적인 기능들이 상실되는 과정을 겪는다.처음 화랑이 만들어진 목적은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는데, 그게 후대로 가면서 현실적 한계에 부딪치니까 다른 문제도 파생된다.통일 이후에도 화랑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인재 양성이라는 주류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비주류화 된다. 이 과정에서 풍류를 강조하는 흐름이 생기는데, 처음부터 화랑이 풍류를 강조했던 건 아니다. 풍류 혹은, 풍류도가 화랑의 핵심은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풍류’라는 단어가 처음 언급되는 건 최치원의 ‘난랑비서(鸞90CE碑序)’다. 여기 등장하는 ‘현묘한 도’라는 건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까.△유·불·선 삼교의 융합을 지칭한다. 화랑이란 이름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유학이 필요했다. 불교의 이데올로기만을 가지고는 국가를 운영해나갈 수 없었으니까.신라는 6세기에 들어서면서 바뀐 시대를 맞이한다. 그때까지 지속되던 공동체가 깨지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지배 체제가 갖춰지게 된다. 그걸 위해 국가 조직을 구성하고, 관료를 뽑아야 했다. 새로운 시대로의 지향을 가진 인재의 양성이 절실했다.문자와 문장 교육도 해야 하고, 관료의 기본 덕목을 갖춘 인물도 있어야 했다.당시 최고의 지식인은 승려들이었다. 그들이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역할을 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화랑들에게 ‘우리는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 미륵의 화신’이라는 의식을 불어넣었다. 당시 신라는 삼국 통일을 향해 가는 단계였다. 미륵의 화신이란 ‘전쟁의 선봉장’ 역할을 할 화랑을 의미했다. 여기에 자연신앙과 노장사상(老莊思想)까지가 결합해 화랑의 이념이 된 것이다.-풍류도가 화랑의 지도 이념 혹은, 당대 신라의 핵심 이데올로기였다는 견해가 있다. 동의하는지.△‘길 道자’를 써서 화랑도(花郞道)라고 하는 건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의 학자가 무사도(武士道)처럼 만들어낸 조어(造語)다. 원래 화랑도의 도는 ‘무리 徒자’를 썼다. 사실 해방 전후에 독일 등에서 유학한 몇몇 학자들이 화랑도(花郞道)를 연구했다. 이들은 정부 수립 이후 고위직 관료가 됐고, 학도호국단을 만들기도 했다. 불안한 정국 속에서 국가적 필요에 의해 화랑도가 이용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런 세태는 1970년대까지 지속됐다.◆ 화랑, 전통적 공동체에서 중앙집권 국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탄생-신라의 발전과 통일 과정에서 화랑들의 역할은 어떠했나.△화랑은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인재를 양성할 것인지에 관한 시스템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 조직이 천거하는 형태로 시작됐다. 6세기 들어 신라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로 진화한다. 전통적 공동체에서 국가 중심 왕권국가로 넘어가는 과정에 과도기적으로 생겨난 게 화랑도 조직이다. 화랑은 ‘화랑’과 ‘낭도’로 구성됐다. 한 사람의 화랑 아래 여러 명의 낭도가 더해져 화랑도가 된 것이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1천 명까지 화랑 조직의 규모는 각기 달랐다.화랑도는 국가가 관리하고 지원했다. 교육을 위해 승려를 파견하기도 했다. 승려들은 화랑에게 국가가 요구하는 이념을 가르쳤다. 신라에 국학(國學)이 생기기 이전까지 화랑은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화랑도는 반관반민(半官半民·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운영)의 조직이다. 한 나라가 중앙집권화 되기 위해선 수직적 질서인 충효(忠孝)와 횡적 질서인 우애와 의리가 함께 필요하다. 화랑도는 바로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고 본다.-신라의 화랑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인물은 누구인지.△사다함이다. 562년 신라가 가야와 전쟁을 벌이는데 참전했다. 또한 친구와의 의리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공로에 대한 포상도 거부했고, 왕으로부터 받은 노비들을 방면하기도 했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재상을 보여준 것이며, 뒤에 만들어진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앞선 실천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사다함은 화랑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조직과 국가를 위해 목숨도 내놓는 헌신과 봉사. 이는 당대의 정치권력이 청년들에게 원했던 것이다. ‘세속오계’는 화랑만의 덕목이 아니라 그 시절 집권층이 모든 젊은이들에게 요구했던 것들을 집약한 것이다.-풍류도가 신라 당대만이 아니라 고려와 조선, 나아가 현대 사회에까지도 여러 형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견이 있는데.△화랑은 신라 말까지는 남는데,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와서는 변질된다. 화랑의 존재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6세기부터 10세기 초반까지다. 그들이 제 기능을 하는 단계는 삼국 통일 이전이다. 이때 화랑의 전형적 모습을 나타낸다. 전쟁이 끝나면서는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화랑들이 군관이 되고 주요 관료가 됐다. 여기서 끼리끼리 뭉치는 폐단도 생겼다.앞서 말한 것처럼 화랑도 조직은 여러 개였다. 화랑의 이름을 기록한 명부도 있다. 또한 화랑은 열아홉 살이 되면 요즘 말로 ‘졸업’을 했다. 한 번 화랑이 되면 영원히 화랑으로 남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노화랑(老花郞·나이 많은 화랑)이라는 단어는 틀린 말이다.-고구려와 백제에도 화랑과 유사한 청년 조직이 있었는지.△고구려엔 경당(6243堂·고구려 각 지방에 세워진 사학기관)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그러나 화랑처럼 주목받지는 못한다. 그것에는 이유가 있다. 고구려는 신라보다 150년 먼저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太學·고구려의 국립 교육기관)을 설립한다. 중앙집권과 유학 교육이 시작된 시기가 신라보다 빨랐다. 화랑도처럼 ‘반관반민’의 성격을 가진 조직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4세기에 이미 태학이 만들어졌으니까.고구려는 유학을 중심으로 한 인재 양성기관이 일찍 그 기능을 시작했다. 그랬기에 화랑도와 같은 역할을 한 조직을 찾아보기 어렵다. 존재했더라도 그 존재감은 미미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비전 보여야 할 ‘화랑정신’-‘풍월주’와 ‘화랑’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풍월주라고 하는 단어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 등장한다. 화랑이 변질되면서 삼국 통일 이후엔 풍월주라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통일 이후 화랑들은 조직간 경쟁이 심화돼 관료화된다. ‘당신은 어떤 화랑의 라인이냐’를 놓고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반목은 국가 조직 유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그래서 진덕여왕 시절엔 김춘추가 이러한 문제를 감안해 국학을 수용하고, 교육 내용도 유학 중심으로 진행하게 된다. 이런 기조는 통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지됐다. 사실 진덕여왕 때부터 화랑은 단계적으로 소멸해간다. 인재 양성의 중심기관이 화랑도에서 국학으로 옮겨간 것이다. 또한 관료도 천거(薦擧·소개나 추천)가 아닌 시험을 통해 선발하는 시스템이 자리를 잡아간다.-화랑이나 풍류도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이제 막연하게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가 있어야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 공적인 가치를 기꺼이 공유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교육을 통해 알려줘야 한다. 옛날 방식의 훈육으로는 안 된다. 화랑의 시대와는 다른 방식의 새로운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디지털시대로의 급격한 변화는 존재해온 많은 것들을 무작정 버리게 만들었다. 우리에겐 전통문화와 아날로그 문화도 필요하다. 이것들이 디지털 문화와 조화롭게 결합해야 한다. 실용주의와 현실주의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전통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해야 할 때가 됐다.-마지막으로 화랑이 가졌던 긍정적인 측면은 무어라 생각하는지.△신라가 전통적 공동체에서 중앙집권 왕권국가라는 새로운 사회 체제로 진화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15

천혜의 자연이 만든 맛깔난 영양고추, 전 국민 입맛 잡는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매운맛을 빼고 먹거리를 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까칠해진 입맛을 돋우기에 매콤한 음식만한 것이 없다. 이제 수확이 한창인 청양고추는 매운맛을 내는 주 재료로 피곤하거나 움추러진 우리의 몸에 다시 생기를 돌게 하는 묘약이기도 하다. 진녹색을 띠는 청양고추는 쌈장에 찍어 그대로 먹어도 맛있지만 각종 요리의 감초로도 더욱 많이 쓰인다. 매운탕·된장찌개 같은 국물요리에 얼큰한 맛을 더해주고 삼겹살과 함께 먹으면 느끼함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영양분 역시 풍부하다. 춘곤증 해소에 좋은 비타민 C 함량은 사과의 수 십 배에 달할 정도다.전국의 고추를 재배하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영양군이다. 값싼 수입산 고추가 밀려들어오고 있지만 아직은 국산 고추의 자존심을 지키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오는 27일부터 29일까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2019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을 열어 수도권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전국에서도 으뜸으로 인정되는 명품 영양고추의 모든 것을 알아보자.◇ 고추의 역사한국인은 언제부터 고추를 먹었을까?고추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을 통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일본 전래설의 근거는 광해군 6년(1614년) 이수광이 저술한 ‘지봉유설’에서 고추가 일본에서 전래됐다고 해서 이를 ‘왜개자(倭芥子)’라고 불렀다. 영양고추는 지역특성에 맞는 수비초, 칼초, 무덤실초 등 우수한 고추 품종으로 개량·발전 됐다. 70년대 비닐멀칭 재배, 80년대 소형터널 재배, 90년대 비가림 시설 재배, 친환경농업 재배 등의 기술발전을 거듭해 왔다. 이 과정에서 우수한 고추를 생산하는데 성공했다.전국 유일의 영양고추시험장에서는 1996년도부터 수비초 같이 지방 재래종 복원화 연구를 통해 2004년 ‘영고 4호’로 품종 등록한 뒤 전국 최고의 고추 명산지로 자리매김했다.◇ 영양고추의 지리적 특성영양지역은 산간고랭지로 해발이 높아 여름철 기후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서늘하며 일교차가 10℃이상으로 크고 무상기간이 비교적 길어 일조량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태백산간 준고랭지대로서 완만한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식양토로 구성된 비옥한 토양과 지형은 고추 재배지로 적합하다. 영양군의 지질은 대부분 화강편마암과 수성암계에 속하는 것으로 경기편마암 복합체로 구성돼 있다. 고추재배지의 경토는 식양토가 대부분으로 우량 품질의 고추를 생산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특히 일월산을 중심으로 반변천의 작은 계곡들도 지나가고 있어 고온의 갈수기에도 물이 고갈되는 일이 거의 없어 균일한 고품질 고추생산에 유리한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영양고추 맛의 비결천혜의 조건에 자란 영양고추는 당질 함량이 많고 비타민A·C와 식욕을 돋우면서 지방축적을 방지하는 캡사이신 함량이 많아 매운맛과 단맛이 잘 조화되어 과피가 두껍고 색도가 좋은 것이 특징이다. 영양지역 재래종 고추인 ‘수비초’와 ‘칠성초’는 맛과 품질이 뛰어나다. ‘수비초(영고 4호)’는 약간 매우면서 과실의 당도가 높고 과피의 질감이 우수하며, ‘칠성초(영고 5호)’는 과피가 두껍고 말린 후 색택이 우수하다.영양고추는 당도가 높아 덜 매운듯 매운맛이 특징이다. 영양고추의 매운맛 비결은 매콤함에 있다. 고추는 전국 각지에서 재배하고 있지만 영양고추로서 명성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매콤한 맛에 있기 때문이다.◇ 영양고추 재배현황국내 고추소비 부진과 중국산 고추수입 급증에 따른 고추가격 하락 등으로 인해 경북도 내 고추 재배면적이 매년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영양군도 매년 감소세가 이어지다가 지난해 재배면적이 약간 늘었지만 감소 추세는 향후에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고령화 추세가 뚜렷해지면서 농가 일손 부족이 심해져 고추 재배를 하는 농가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다만 고추의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작년에는 장기간의 폭염에 따른 전국적인 고추 생산량이 급감했다. 군은 최근 몇 년간 농가마다 점적관수시설 확충으로 폭염에 따른 피해를 크게 입지 않았다. 생산량은 전년과 비교해 볼 때 큰 변화가 없었다. 농가에서는 물건이 없어 판매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익을 올렸다.군에서는 고추유통공사를 통한 계약재배와 기존에 확보된 판로를 활용하고 있다. 오는 27∼29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개최되는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 등을 활용해 판로를 확보하면 농가소득 보전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추재배 및 수확 기술 개선최근 몇 년간 고추가격 하락에 따라 생산 농가들이 수지타산을 맞추지 못하고 농사를 포기하면서 해마다 재배 면적이 줄어드는 등 사양화되고 있는 국내 고추산업의 현실에서 고추농사가 농가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군에서는 ‘고추의 본고장 영양’을 목표로 차별화되고 다양한 고추농업 정책 추진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고추 수확을 마치면 고추 관련 제품들의 생산∼유통∼판매까지 일원화 된 시스템 구축을 위해 설립한 영양고추유통공사를 중심으로 고추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수매하고 있다. 영양고추 축제를 통해서는 도심의 소비자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차별화 된 전략으로 국내외에 불어 닥친 고추산업의 위기를 정면 돌파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유통공사의 고부가 가치 창출군은 2006년 9월 지방공기업인 영양고추유통공사를 설립해 고추육묘장을 통한 고추 육모를 공급하고 있다. 또 계약재배와 수매를 통한 생산농가의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하고 있다. 세계 최대시설 규모를 갖춘 영양고추유통공사는 미국FDA인증, GAP지정, HACCP, ISO2200인증 등 엄격한 위생관리와 안전한 고추가공품을 생산하고 있다. 영양고추를 대표하는 기업으로써 지역에서 생산된 고품격의 다양한 건고추와 고춧가루를 위생적으로 생산하고 있어 소비자가 믿고 살 수 있다.군은 영양고춧가루의 지리적표시제 등록으로 타 지역 농산물과의 차별화에도 나섰다. 지역특산물 지리적 표시제는 1999년부터 시행, 2017년 기준 전국 103개가 등록 돼 있다. 군은 2005년 3월 고춧가루로 지리적 표시제 제5호로 등록을 했고, 타 지역 고춧가루가 혼입이 되지 않는 순수한 영양고추 가공품으로 소비자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 영양고추의 판매와 홍보군에서는 그동안 다양한 업무협약 체결로 고추판매 판로를 확보하고 있다. 2016년 7월 대한주택관리사협회 서울시회와 2017년 6월 대한주택관리사협회 경기도회와 빛깔찬 고춧가루 직거래 MOU를 체결해 산하 지부에 직거래 망을 개설했다. 2017년 8월에는 6만 달러 규모의 빛깔찬 고춧가루를 미국에 첫 수출하는 쾌거를 이뤘다.지난해 8월에는 영양고추유통공사와 (사)한국외식업중앙회 제주도특별자치도지회 간의 직거래 판매 MOU를 체결했다.군에서는 (사)한국외식업중앙회 제주도특별자치도회를 통해 제주특별자치도 전역에 외식업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구축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등 수차례에 걸친 품질 테스트 및 시장 조사를 통해 우수한 고춧가루로 인정 받은 빛깔찬 고춧가루를 산지 직거래 방식으로 거래를 하게 됐다.지난해 8월에는 CJ제일제당(주)과 영양고추유통공사 간의 농산물 협력 공동사업 추진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영양군 농산물의 안정적인 생산과 공급, 농식품의 가공과 유통 등 포괄적인 부분에서 사업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군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에 대한 적극적인 유통 지원과 농산물 생산 및 가공에 대한 공동 연구를 통해 상생 협력하는 등 지역 발전의 정기를 마련하기도 했다.지난해 10월에는 군, 미서부한식세계화협회, 영양고추유통공사가 농·특산물 상호협력 추진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 영양고추아가씨 선발대회1984년 전국 최초 특산물 아가씨선발대회로 시작한 영양고추 아가씨선발대회는 1987년까지 매년 열리다가 1988∼1989년 고추가격 파동으로 잠시 중단됐다. 1990년부터 2018년(제19회)까지는 격년으로 개최되고 있다.영양고추 아가씨선발대회는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신청 참가인원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다양한 재원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 제14회(2008년) 대회부터 참가자를 전국 규모로 격상했다.이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참여하는 참가자의 신청으로 명실상부한 전국대회로 부상했다.영양고추아가씨 선발대회는 영양의 대표적 농특산품인 영양고추를 통한 지역 이미지를 한껏 높이고 있다. 교통이 불편한 영양의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심리적 거리의 축소로 영양군과 영양고추에 대한 친밀감을 높이며 전국 관광객들을 영양으로 불러 들이고 있다.오도창 군수는 “고추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지만 최근 몇 년간 영양군이 추진하고 있는 명품고추화 사업을 통해 새로운 방안이 모색되고 있는 만큼 보다 세밀하고 맞춤형 정책 추진으로 고소득을 보장할 수 있는 고추산업으로 변신을 추진하겠다”며 “고추만큼은 영양이 최고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장유수기자 jang7775@kbmaeil.com

2019-08-13

비극적 운명의 젊은 무장들

세조 시절, 계유정난과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신들이 있었다. 한명회와 신숙주를 중심으로 한 정난공신(구공신)들이다. 이들은 권력의 실세들로서 세조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았다. 그러다 결국 세조 말년에 북방에서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젊은 공신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병마도총사 구성군(龜城君) 이준, 병마부총사 조석문, 진북장군 강순, 좌대장 어유소, 우대장 남이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난이 끝난 후 모두 적개공신(신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이시애의 난으로 빛을 본 사람이 또 한 사람 있다. 바로 유자광이다.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고변과 음해로 정적을 숙청해 영달하다가, 결국은 자신도 유배지에서 삶을 마친 간신’ 정도로 요약 된다. 그는 서자 출신이었기에 벼슬길에 나가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시애의 난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해 세조가 어려움을 겪을 때, 대담하게 진압계책을 올렸다. 세조는 그를 불러 자질을 살펴본 뒤 전장에 투입했고, 그는 보란 듯이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유자광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벼슬도 얻게 되었다.신공신들의 등장으로 안정되어 있던 정국에는 작은 파란이 일었다. 한명회와 신숙주는 이시애의 난으로 잠시나마 옥살이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반면에 신공신들은  무골 기질의 세조에게 총애를 받음으로써, 신·구세력 간에는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게다가 1467년 9월, 요동의 여진족이 소요를 일으키자 명나라가 군대를 출동시키면서 조선에 지원 군대를 요청했다. 이때 강순(康純), 남이, 어유소 등이 출전해 여진의 소요를 진압함으로써 또 한 번 개가를 올렸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통해 강순이 영의정에 올랐다. 조석문은 좌의정이 되었고, 화려한 가문적 배경과 뛰어난 무인적 기질을 가진 남이가 나이 스물여섯에 병조판서에 등용되었다. 바야흐로 신공신들이 정국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영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이들을 그토록 아꼈던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예종이 즉위했기 때문이었다. 즉위 당시 열아홉이었던 예종은 세조의 둘째아들이자 한명회의 사위였다. 이제 구공신인 한명회와 신숙주가 정권을 좌지우지하게 될 무대가 꾸며졌다. 세조의 죽음으로 그 유일한 지지대마저 사라져 버린 신공신들은 속절없이 구공신들에게 당해야만 했다. 신공신의 중심이었던 구성군과 남이는 왕실의 종친이었다. 구공신들은 이런 왕실 인척들이 세력을 키우는 것을 견제하면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공신들은 경험이 많고 교활한 구공신들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신공신들은 대부분 이시애의 난 진압 이후 급성장한 무장들이었고, 구성군과 남이는 20대의 동갑내기였다. 특히 구성군은 정치적인 야심이 없던 인물로, 야심이 컸던 남이와는 어울리기 힘들었다. 그렇다 보니 뭉치기는커녕, 자신들끼리도 알력을 빚었다. 그중에서도 유자광은 모사에 능하고 계략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사랑을 더 받는 것을 늘 시기했었다. 설상가상으로 예종도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남이에 비하면, 자신은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으며, 아버지인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468년 9월 7일, 예종이 즉위하던 바로 그날 조회(朝會)때였다. 한명회가 임금에게 “남이는 병조판서로 있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예종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에서 남이를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발령을 내버렸다. 병조의 우두머리를 궁궐 경비대장인 겸사복장(종2품 무관직)으로 깔아뭉개 버린 것이다. 예종이 임금으로서 행했던 첫 업무가 남이의 좌천이었던 것을 보면, 그동안 구공신들과 예종이 얼마나 남이를 미워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남이는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는 기개와 인맥을 갖추고 있었다. 구공신과 예종이 그를 두려워한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남이의 세력들을 발본색원하여 축출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드디어 신공신들을 한꺼번에 제거할 기회가 포착되었다. 예종이 즉위한지 불과 한 달이 지난, 1468년 10월 24일 늦은 밤이었다. 병조참지(兵曹參知:정3품)로 있던 유자광이 예종을 찾아와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을 했다. 남이가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에 혜성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혜성이 나타난 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유자광의 고변내용은 구체적이지도 않았고 두루뭉술하여 의문투성이였으나, 예종은 이를 따져 보지 않았다. 남이가 곧 군사라도 몰고 쳐들어올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도성의 경비를 철통같이 하고는 바로 남이를 체포하게 했다. 그날 밤 주요 종친들과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종이 직접 남이를 심문을 했다. 그러나 남이는 역모사실을 부인했다. 예종은 남이에게 별다른 혐의를 찾을 수 없자. 유자광을 불러 대질을 했다. 그제야 유자광이 고변자란 사실을 알게 된 남이는 머리로 땅을 치면서 “유자광이 나를 모함한 것이다”라고 부르짖었다. 남이가 계속 부인하자 예종은 남이의 측근 무장들을 하나씩 불러들여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이 역모를 부인하는 가운데, 기껏 남이의 첩 탁문아(卓文兒)가 심한 고문에 못 이겨 ‘남이가 세조의 국상 중에 고기를 먹었다’고 자백한 것 정도가 전부였다.하지만 여진족 출신의 무장 문효량(文孝良)이 혹독한 매를 맞다가 견디지 못하고 남이에게 불리한 진술을 해버렸다.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었다. 분위기상 이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남이도 마지못해 역모혐의를 시인했다. 그러나 그는 그냥 죽으려 하지 않았다. 같은 신공신으로 영의정에 있던 강순을 물고 들어갔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온 강순은 남이에게 ‘왜 나를 끌어들였느냐’고 따졌다. 남이의 답변이 가관이었다. ‘영의정임에도 내가 무고를 당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한마디 구원도 해주지 않았으니, 당신도 나와 같이 원통하게 죽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결국 이들에게는 모반대역죄가 적용되었다. 예종은 1468년 10월 27일 군기감 앞 저자거리에서 남이·강순·조경치(曺敬治)·이중순(李仲淳)·변영수(卞永壽)·변자의(卞自義)·문효랑·고복로(高福老)·오치권(吳致權)·박자하(朴自河) 등을 능지처참했다. 이어 남이를 따르던 여러 무장들도 참형을 시켜 싹을 잘랐다. 남이의 심복인 조영달(趙穎達)·이지정(李之楨)·조숙(趙淑) 등 25인과, 장용대(狀勇隊)의 맹불생(孟佛生)·진소근지(陳小斤知)·이산(李山) 등이 그들이다. 이 사람들의 아버지와 자식들도 모두 죽였다. 반면에 이 일에 공을 세운 한명회, 신숙주 등 37명을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책봉했다. 한명회는 임금에게 남이·강순 등의 재산과 처첩들을 내려 달라고 주청했고, 임금은 그들의 재산과 처첩을 익대공신들에게 나누어 줬다. 옥사에 연루된 사람들의 처첩들이 마치 전리품처럼 취급되어 모두 정적(政敵)들의 하녀로 분배가 됐다.이게 남이의 옥사 전말이다. 심한 매질을 당하던 강순은 ‘공모자를 더 대라’는 예종의 심문에 “내가 만약 여기 있는 신하들도 다 공범이라고 말한다면 임금님은 믿겠습니까?”라고 항의를 했고, 남이의 종사관이었던 조숙은 “한 충신이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죽어 갔다. 이처럼 이 옥사는 처음부터 의문투성이였고, 수긍이 가지 않은 옥사였다.  화는 관련자들의 가족들에게도 미쳤다. 남이의 어머니에게는 ‘세조의 상(喪)중에 고기를 먹고, 아들인 남이와 간통을 했다’는 희한한 죄를 씌워 저자거리에서 수레에 묶어 찢어죽이고, 3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했다. 이 사건에 연좌되어 종이 되었던 처와 첩들이 70여 명이나 된다. 이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조선왕조실록’에 그 사례가 적혀있다. 거열형에 처해진 강순은 정실부인이 죽자 ‘중비(仲非)’와 혼인을 했다. 이 사건으로 처첩들이 분배될 때, 중비는 유자광의 여종이 되었다. 영의정의 아내로 정경부인이던 중비가 서얼출신 간신의 노비로 추락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남편 강순이 죽은 지 한 해가 넘지 않은 시점에 집안의 옛 종으로 있었던 막산(莫山)이란 남자에게 겁탈을 당하고 만다. 중비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막산과 살림을 차린다.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어디까지나 실록에 실려 있는 실화이다. 그런데 막산은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었다. 그 아내가 중비를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중비와 막산의 아내는 대판 싸움을 했다. 이때 막산은 중비의 편을 들었다. 결국 막산의 본처는 집에서 쫓겨났고, 그 자리를 중비가 차지하게 되었다.소문은 금세 전국에 퍼졌다. 명분에 사는 유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조선사회를 이끌었던 양반들은 “막산이 옛 주인인 중비와 간통하고 동거했다. 중비가 지금은 종의 신분이지만 옛날에는 막산을 종으로 데리고 있던 양반집 규수였다. 이는 일반적인 간통이 아니라 종이 주인의 처를 간통한 법률(奴奸家長妻律)로써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자종이 여주인과 간통을 하면 참형(斬刑)에 처하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다. 사건은 의금부로 넘어갔다. 의금부 관리들은 최종심에서 오히려 중비가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막산에게 처음에는 강간을 당했을 수도 있지만, 피해자가 적극적인 항거를 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또 정조를 잃은 뒤 막산의 아내가 되기로 작정하고, 막산의 처를 때려서 쫓아낸 것은 음탕함의 증거이므로 중비와 막산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1471년 3월 17일, 당시 임금 성종은 의금부 건의대로 막산과 중비를 참형에 처했다. 명분은 풍속(風俗)을 바로잡는다는 것이었다.조선시대 양반들의 이중적인 잣대는 여성들과 서얼들에게는 참으로 가혹했다. 동료  부인을 자신의 여종으로 삼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게 노비가 된 부인이 궁여지책으로 남자노비와 결혼하는 것은 또 용서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서얼은 아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해 놓았다. 이들은 가정에서도 천하게 취급되어 재산 상속권마저도 박탈되었다.그런데도 형벌을 받는 데는 이들을 자신들과 똑같이 연좌시켰다. 좋은 것은 자기들끼리 차지하고, 자기들이 나쁜 짓을 한 행위에는 이들까지 동참시켜 처벌받게 하는 양반사회의 이중성. 성리학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자리를 잡았던 그 모순투성이의 조선사회에서 살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중앙에서 이런 큰 옥사가 벌어지자 바닷가에 한적하기만 했던 경상도 장기 고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1469년 2월 3일부터 그해 12월 24일까지 이 난에 연좌되었다며 일곱 명이 장기로 유배를 왔다. 강순의 친동생인 강선(康繕)), 조경치의 계모(繼母) 종금(終今)과 서얼 형 조중생(曺仲生)·조계생(曺繼生)·조말생(曺末生), 이중순의 아우 이숙순(李叔淳), 이영산(李永山)등이 그들이다.이때 장기로 온 강선은 약 2년간 이곳에서 머물다가 1471년(성종2년) 2월에 보령(保寧) 근처로 옮겨갔다. 이중순, 그리고 조경치의 계모 종금은 장기로 왔다는 기록만 있고, 옮겨가거나 방면했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 중간에 이곳에서 사망한 듯하다. 이영산은 장기현의 관노로 5년간 있다가, 1474년 4월 7일에야 방면되어 돌아갔다.남이가 실제 역모를 획책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 사건에 대해 임진왜란 전까지는 남이를 난신(亂臣)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란 이후 일부 야사(野史)에서는 남이의 옥사가 유자광의 모함으로 인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그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남이의 억울함은 1818년(순조 18)이 되어서야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풀려,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후에 충무공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창녕의 구봉서원,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성동의 충민사에 배향되었다.이것 외에도 남이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당들이 꽤 많다. 전통 무당들은 각자 자신의 신을 모시는데, 역사 인물 중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영웅들이 곧잘 무당의 신으로 등장한다. 이는 한을 품고 죽은 영혼이 신령으로서의 영험이 크다는 믿음 때문이기도 하고, 백성들이 이들의 영혼을 달래준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일까. 춘천 남이섬에는 가짜 남이장군의 묘도 생겨났다. 경남 창녕에는 남이장군을 기리는 충무사가 있고, 경북 영양의 ‘남이포’처럼 남이와 관련된 지명들도 생겨났다.사내대장부의 기개를 웅장하게 뽐내다 혜성과 함께 사라진 남이에 대한 흔적들이  바로 우리주변, 장기에도 있었다는 게 새삼스럽다. /향토사학자

2019-08-13

경주에서 천년을 사랑하고 그리워할,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우현 고유섭의 수필 제목이다. 모든 것은 이 한 문장에서 시작됐다. 지난밤의 불면도, 이른 아침부터 종일 나를 달뜨게 한 황홀감도, 대뜸 두 눈에 차오르던 파도도 다 저 한 문장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양양, 강릉, 삼척, 울진이 다 보암 직한 곳일 것이로되, 이 사람이 사모하는 곳은 세상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무명(無名)인 듯한 장기(長9B10) 남쪽, 지금 행정구역으로 치자면 경주군 양북면 용당리에 속하는 땅에서 보이는 바다, 이곳이 잊히지 못하는 바다이다. (….) 이곳은 경주 석굴암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이 다른 세류(細流)와 합쳐서 대종천(大鐘川)이 바로 바다로 들어가는 그 어귀에 용당산 대본리란 곳이 있고, 그 포구 밖에는 오직 한 그루의 암산(岩山)인 대왕암(大王岩)이란 돌섬이 있을 뿐이다.”(고유섭,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중에서)고유섭은 인천 사람이다. 1905년에 태어나 경성제국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대학에서 조선미술사를 공부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경성제대 졸업 후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취임해 수많은 연구와 집필 활동으로 한국미술사학의 토대를 쌓아 올렸다. 한국미술의 근대적 학문 체계를 이룬 이 위대한 학자는 짧았지만 영원히 기억될 마흔 해의 불꽃같은 삶을 남겨두곤 1944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생전에 ‘잊히지 못하는 바다’로 호명한 곳이 바로 경주 용당리, 문무대왕릉이 있는 감포 바다다.경주를 떠올리면 언제나 대왕암이 나를 짓누른다. 문무왕이 동해의 용으로 잠들어 있는 수중릉, 어깨가 뻐근하고 정수리가 날카롭게 아프다. 미지는 때로 고통이다. 내게 경주는 문무대왕릉과 감은사, 그리고 ‘잊히지 못하는 바다’인 ‘동해구’로 늘 기억된다. 동해구는 감포의 옛 이름으로 추정된다. 대종천 하구, 감포가 보이는 언덕에 동해구 표지석이 서 있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동해의 문, 동해의 입이라는 뜻이다.지난밤, 바쁜 취재 일정으로 혓바늘이 돋을 만큼 피곤한 침대 위에서 문득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떠오른 바람에, 잠을 저만치 밀쳐둔 내 생각은 문무왕과 대왕암, 만파식적, 감은사와 송재학, 박목월, 서정주의 시, 진지왕과 도화녀, 비형랑, 미실, 선덕여왕과 지귀, 수로부인, 처용과 역신, 화랑세기 필사본 진위 논란 등을 이리저리 널뛰며 어지러웠다. 소설가 김별아가 연재한 ‘경주 월성을 걷는 시간’ 20꼭지를 내리 읽고는 1999년 KBS 역사스페셜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를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다 보니 새벽 다섯 시, 이상한 황홀감과 신비감을 이불로 덮고 잤다.하루 묵는 데 100만원 한다는 포항 구룡포 럭셔리 풀빌라를 취재하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경주에, 아니 신라에 가 있었다. “이처럼 막막한 지역에서/ 하룻밤을 가면/ 그 안존하고 잔잔한/ 영혼의 나라에 이르는 것을”(박목월, ‘사향가’) 나는 이미 알았을까. 구룡포를 벗어나 16년 만에 문무왕릉 앞에 섰을 땐 눈물인지 파도인지 두 눈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어 있었다. 무당 몇이 굿판을 벌이고, 젊은 연인이 허공에 새우깡을 던지는 풍경 너머로 나는 입 벌린 대왕암을 봤다.“경주에 가거든 문무왕(文武王)의 위적(偉蹟)을 찾으라. 구경거리로 경주를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아라. (….)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경주의 유적(遺跡)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이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 (….) 무엇보다도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大王岩)을 찾으라.”(고유섭, ‘경주기행의 일절’ 중에서)경주 용당리 사람들은 대왕암을 대왕바위의 줄임말인 ‘댕바’, ‘댕바위’로 불렀다. 1967년 한국일보 보도로 문무왕릉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이곳은 어린아이들이 헤엄쳐 가 놀고, 마을 사람들이 미역을 따는 갯바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옛날부터 문무대왕의 유해가 뿌려진 산골처(散骨處)로 알려져 있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신화의 한 대목일 뿐 고증된 바는 아니었다. 대왕암이 문무대왕릉이라는 전설을 역사적 진실로 밝혀낸 건 고유섭의 제자인 미술사학자 황수영 박사다. 황수영 박사를 축으로 한 신라오악조사단은 1967년 뗏목을 타고 대왕암에 상륙해 대왕암의 내부 모습이 고문헌에 기록된 ‘수중릉’의 구조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혀냈다.문무왕은 죽어서 용이 되어 왜구를 막고, 고유섭은 사멸되어가는 민족문화를 지키기 위해 미술사학을 연구, 학문으로 일제에 항거했다. ‘대왕암’이라는 시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수필을 남겼는데, 황수영과 신라오악조사단은 스승이 쓴 글을 등불 삼아 풍문과 설화의 안개로만 자욱하던 미지 세계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대왕(大王)의 우국성령(憂國聖靈)은/ 소신(燒身) 후 용왕(龍王) 되사/ 저 바위 저 길목에/ 숨어 들어 계셨다가/ 해천(海天)을 덮고 나는/ 적귀(賊鬼)를 조복(調伏)하시”(고유섭, ‘대왕암’)던 감포에는 이제 고유섭과 그의 제자들 넋이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다에서 솟구쳐 모습을 보였다던 이견대(利見臺)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기념비는 고유섭의 제자들이 세운 것이다. 2003년, 내가 스무 살이던 해 여름 이견대에 왔을 땐 그 글비석만 홀로 바다를 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제자인 진홍섭(2010년 작고)과 황수영(2011년 작고) 추모비가 양 옆에 서 있다.혼은 입으로 드나든다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었다. 저 수중여 입에서 빠져나온 왕의 혼이 파도가 되어 감은사를 적신다. 나는 문무대왕릉이 보이는 이견대를 내려와 대종천 물길 따라 옛 감은사터를 찾았다. 아직 뙤약볕이 되지 못한 온화한 햇살이 빈 절터를 구석구석 쓰다듬고 있었다. 절터 동쪽과 서쪽엔 감은사지삼층석탑이 멀리 대왕암을 바라보며 쌍탑으로 서 있고, 탑이 드리운 그늘 아래로 승려 하나가 천천히 걸어가며 내게 옛 감은사의 풍경을 복원시켰다. 그러나 “감은사는 없다.” “감은사 밖으로 나오면 먼 바다는 종소리 같은 저녁놀을 떠밀며 달아나 바람 소리 곁에 있다. 내 누추한 마음이 먼저 그것들을 짊어지기”(송재학, ‘감은사에 가다’) 전에 나는 서둘러 낭산으로 향했다.선덕여왕은 “푸른 령(嶺) 위의 욕계(欲界) 제2천(第二天)”에 잠들어 있다. ‘푸른 령’이란 경주 낭산을 가리킨다. 선덕여왕은 어느 날 신하들에게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 신하들이 ‘도리천’의 구체적 위치를 묻자 선덕여왕은 “낭산의 남쪽”이라고 대답했고, 사후 30년 뒤 그녀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졌다. 불교 경전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적혀 있으니 선덕여왕이 말한 대로 낭산의 남쪽이 도리천인 셈이다.도리천은 불교에서 욕계 제2천에 해당하는 세계로 신(神)들에게도 남녀의 구별이 있고, 이성에 대한 욕망이 작동하는 곳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두 명의 남자와 세 번에 걸쳐 결혼생활을 했으나 아이는 없었다”고 한다. 죽음 후에도 사랑을 꿈꿨을까. 선덕여왕은 무척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또 자애로웠다고 전해진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지나가는 그녀를 보고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미쳐버린 사내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천민 지귀(志鬼)다.어느 날 여왕이 영묘사로 기도하러 가는 행차에 지귀가 달려들었다. “아름다운 여왕이여! 사랑하는 나의 여왕이여!” 여왕은 호위병들에게 붙잡힌 지귀를 영묘사까지 따라오게 한다. 지귀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행차를 따랐다. 영묘사에 도착한 여왕이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는 동안 지귀는 그만 마당의 석탑 아래 잠이 들고 말았는데, 기도를 마친 여왕은 자신을 짝사랑하는 지귀가 안쓰러워 잠든 그에게 다가가 “살의 일로써 살의 일로써 미친 사내에게는 살 닿는 것 중 그중 빛나는 황금팔찌를 그의 가슴 위에”(서정주, ‘선덕여왕의 말씀’) 올려두었다.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품에 안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그 기쁨이 가슴속에서 불꽃으로 타더니 급기야 온몸을 활활 사르는 불덩어리가 되었다. 여왕의 향기로운 팔찌가 불씨 되어, 지귀는 미친 사랑의 불길에 영원히 타는 불귀신이 되어버린 것이다.여왕이 잠든 낭산을 내려오니 하늘에서 지귀가 사랑의 고통에 몸부림치느라 여기저기 불꽃이 뚝뚝, 저녁이 붉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뜨겁고 새빨간 석양은 이내 차분해져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 “영영 돌아오지 못한”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서정주, ‘해일’)던 여인처럼, 경주 하늘엔 바닷물 같은 구름과 볼그레한 노을이 살을 부드럽게 비볐다.그리고 곧, 비가 내렸다. 예보에 없던 비였다. 우산 없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소동으로 황리단길은 개구리 떼처럼 수런거렸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황남동을 걸었다. 비에 흠뻑 젖으니 살갗보다 가슴부터 촉촉이 서늘해졌다. 머나먼 나라에 있는 나의 선덕여왕, 그녀의 불 달군 팔찌가 지져댄 내 가슴 속 뜨거운 한 통증이 비로소 식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아, 나는 그동안 잘못 알았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도시, 신과 왕들의 도시가 아니라 영원을 넘나드는 사랑의 도시가 아닌가? 천년을 사랑하고 천년을 헤어져 그리워 할, 그 천년의 사람을 나는 만나고 싶다. 나의 잊히지 못하는 당신을.       /시인 이병철

2019-08-11

신라 발전·통일 기여한 ‘화랑 트로이카’를 만나다

보통의 사람들은 주요한 몇몇 인물들을 규정짓거나, 한 묶음으로 배열하는 걸 즐긴다. 이는 인간의 특성 중 하나다. ‘트로이카(Troika)’는 3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지칭하는 단어.삼두마차(三頭馬車)로도 번역되는 트로이카는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세 사람, 혹은 어떠한 일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3명’을 의미한다.1950년대 후반 쿠바에서의 전투가 세상을 뜨겁게 달궜을 때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턱밑에서 젊은 트로이카가 질주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1967), 피델 카스트로(1926~2016), 카밀로 시엔푸에고스(1932~1959)는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트로이카’였다.조금 가벼운 이야기로 가보자. 한국의 50~60대 중년들은 영화배우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를 한 세트로 엮어 기억한다. 이른바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였다.중앙일보 기자이자 ‘걸그룹 경제학’의 저자인 유성운(40)은 “2019년 현재 한국 걸그룹의 트로이카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트와이스(TWICE), 블랙핑크(BLACKPINK), 아이즈원(IZ*ONE)”을 지목했다.서론이 길었다. 이제 본론으로 진입하기 위한 질문을 던진다. “풍류도를 중심 이데올로기로 신라의 발전과 통일에 기여한 화랑 중 트로이카는 어떤 인물들일까?”개인의 취향과 선호는 각양각색이다. 앞서 언급한 혁명가와 연예인에 대한 평가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천양지차(天壤之差)이듯, 명멸했던 수많은 화랑에 관한 사람들의 호오(好惡)도 엇갈릴 수밖에 없다.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학자와 예술가 몇 명에게 자문을 얻어 1천500년 전 신라의 ‘화랑 트로이카’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봤다.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걸 증명한 문노(文努)풍월주(風月主)는 ‘화랑 중의 화랑’ ‘으뜸 화랑’을 일컫는다.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紀)’엔 1대 위화랑부터 32대 신공까지 32명의 풍월주가 기록돼 있다. 초등학생도 그 이름을 들어봤을 김유신도 등장하고, 삼국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김춘추도 이름을 올렸다. 이중에서 ‘트로이카’를 고르라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하지만, 역사 속 어떤 인물이 완벽하게 객관에만 근거해 평가를 받고 있나? 주관의 개입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런 차원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랑은 제8대 풍월주 문노(537∼606 추정)다.문노의 출생은 비극적으로 드라마틱하다. 아버지는 귀족이었으나 어머니가 가야에서 온 공녀였다. 순수한 신라 혈통이 아니라는 콤플렉스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내 피의 절반은 가야 사람의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가야 출신들을 규합해 화랑 내부에 또 다른 파벌을 만든 건 출생의 한계에서 오는 열등감 극복의 방편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이런저런 평가가 있지만 문노가 ‘전투 실력’에서만큼은 화랑 중 최고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드물다. 겨우 열일곱 살에 백제와의 싸움에 참전해 공을 세웠고, 열여덟엔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 고구려 장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왕의 명령이라면 모친의 고향인 가야로의 진군에도 거침이 없었다. 화랑의 군사적 편제 개편에도 적극적이었던 문노는 또 한 명의 ‘빼어난 화랑’이었던 사다함의 검술 스승이기도 했다.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일흔 살 가까이 장수한 문노는 ‘신라 역사상 최고의 맹장(猛將)’으로 추앙받는다.문노를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후배 화랑’이 있는데 바로 김흠운(金歆運)이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를 빛낸 인물들’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문노가 이끄는 화랑부대에 속했던 김흠운이 세속오계(世俗五戒) 중 ‘임전무퇴’를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서술한 것이다. 그렇다. 옛말처럼 용맹한 장수 밑에 비겁한 부하가 있을 수 없다.“김흠운은 유복한 생활이 보장된 태종무열왕의 사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순국자의 무용담에 매료돼 눈물을 흘리곤 했다. 백제의 조천성을 공략하는데 참전한 김흠운은 적군이 새벽에 신라 군영을 습격해 혼란이 일어나자, 퍼붓는 화살 속을 뚫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한다. 주위에선 ‘어둠 속에서 싸우다 죽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나서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대장부가 몸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다짐한 이상 어찌 이름 알리기만을 원할 것인가’라는 김흠운의 뜻을 꺾지 못했다. 결국 이 전투에서 김흠운은 전사한다.”◆ ‘살아있는 미륵’으로 숭배 받은 설원랑(薛原郎)소설가 김별아(50)에 의하면 설원랑(생몰연대 미상)은 “해사한 얼굴에 시와 그림에 능했던 예술적인 화랑”이었다. 또한 진흥왕 시절 신라 최초의 국선(國仙·화랑의 리더)이 된 사람이기도 하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진흥왕이 애초에 두 여성을 원화(原花)로 삼아 무리 300~400명을 이끌게 했는데, 둘 사이에 시기와 질투가 심해 문제가 생기자 원화 제도를 폐지하였다. 몇 해 뒤 다시 풍월도(風月道·풍류도와 같은 의미)를 일으키고자 좋은 가문 출신의 남성으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이름을 ‘화랑’이라고 불렀다. 설원랑은 바로 이때 처음으로 국선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앞서의 기록보다 좀 더 흥미로운 방식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백성의 존경을 받던 신라의 한 승려가 “미륵(彌勒·미래에 출현하게 될 부처)의 형상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화랑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내놓는다. 그 승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꿈에 나타난 미륵과 꼭 닮은 청년을 영묘사(靈妙寺) 앞에서 만난다.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국선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미륵과 빼닮은 청년’이 바로 설원랑이다.‘신라를 빛낸 인물들’에 따르면 화랑도가 창설되던 시기 신라사회에서 화랑은 ‘미륵불(彌勒佛)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장차 나라를 강성하게 하고,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할 유사 메시아(Messiah)로 본 것이다.설원랑은 ‘살아 움직이는 미륵’으로 서라벌 주민들의 숭배를 받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잘생긴 얼굴에 설득력 있는 목소리. 여기에 인간과 자연을 노래하는 시를 쓰고, 아름다운 풍경까지 화폭에 담아내는 탁월한 예술적 능력.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이돌’ 수준의 대접을 받지 않았을까?설원랑의 인기는 당시 왕의 인기와도 직결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의 신라사회는 “미륵은 전륜성왕(轉輪聖王·불법을 수호하는 이상적 군주)과 함께 나타나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린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흥왕=전륜성왕’ ‘설원랑=미륵’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졌을 것이다.종교사학자 유병덕의 논문 ‘풍류도(風流道)와 미륵사상(彌勒思想)’은 미륵과 화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병덕의 주장처럼 설원랑은 ‘화랑인 동시에 미륵’이었다.“한국 종교의 시원은 풍류도에 있다. 그것은 무(巫)적 전통이 아닌 선(仙)적 전통이 강한 가운데 출현했다. 한국에서 미륵신앙이 대두해 국력을 흥하게 만든 역사는 통일신라의 경우가 처음이다. 삼국통일의 기세를 잡은 화랑도는 전래의 풍류도를 주체로 하여 그 당시 불교와 잘 조화된 가운데 통일을 성취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륵신앙도 화랑의 실천적 이념 역할을 했다.이런 사조를 통해 완성된 인물을 불교 입장에서는 ‘미륵’이라 칭하고, 풍류도의 입장에선 ‘화랑’이라 칭하는 것이다.”◆ 전설로 남은 ‘요절 화랑’ 사다함(斯多含)요절(夭折)은 전설을 만든다. 록 뮤지션 짐 모리슨(28세 사망)이 그랬고, 영화배우 리버 피닉스(23세 사망)가 그랬으며, 소설가 김유정(29세 사망) 또한 그렇다. 이들의 삶은 짧지만 뜨거웠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그들은 일찍 죽어 영원히 살고 있다”고. 이 범주에 고민 없이 포함시킬 수 있는 화랑이 있으니 바로 사다함(생몰연대 미상)이다.세상을 떠도는 ‘영웅 전설’의 형태로 남은 사다함의 일대기는 간명해서 눈물겹다. “세상에 이런 10대 소년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부른다. ‘삼국사기’에 실린 사다함의 소설 같은 생애를 요약해 아래 옮겨본다.“신라의 진골이자 화랑인 사다함은 내밀왕의 7세손.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 풍채가 좋고 뜻과 기백이 높았다. 사람들의 청에 못 이겨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를 따르는 청년들이 족히 1천 명은 넘었다. 나이와 무관하게 그들 모두는 사다함을 흠모했다. 겨우 열다섯의 나이에 대가야와의 전쟁에 나가기를 왕에게 간청하니 왕은 ‘싸움터로 보내기엔 아직 어리다’며 말렸다. 하지만 사다함의 확고한 의지는 왕조차도 제지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하고 진실했다. 결국 참전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기에 왕이 노비로 쓸 수 있는 포로 300명과 적지 않은 땅을 주었는데, 노비는 자유롭게 풀어주고 땅은 극구 사양했다. 죽마고우 무관랑(武官郞)이 병사(病死)하자 ‘그와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세했으니, 나 혼자 살 수는 없다’며 일주일을 통곡하다 죽었다. 그때 사다함의 나이 불과 17세였다.”역사학자 최광식은 그의 논문 ‘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에서 이렇게 주장한다.“개방성과 포용성을 지닌 풍류도를 중심 이념으로 익히고 닦은 화랑과 국선들은 신라의 주도세력이 되어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통일전쟁 이후에는 향가(鄕歌)를 짓는 등 격조 높은 모습도 보였다.”사실 고문헌에 등장하는 화랑들의 무용담과 미담을 100퍼센트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그 에피소드들엔 ‘포상과 명성을 바라지 않고,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청년을 길러낼 시대적 필요성’이 개입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배층이 기록한 역사는 그렇게 서술·묘사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문노, 설원랑, 사다함 등 ‘화랑 트로이카’의 모습에선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여러 긍정적 가치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것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08

경주, 길을 잃고 사색에 잠기다

여행자는 알고 있다. 때로는 ‘길’을 잃는 것이 ‘또 다른 길’을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경주엔 조용히 홀로 앉아 들뜬 마음을 차분히 달랠 공간이 적지 않다. 경주 여행을 계획하는 독자들을 위해 ‘길을 벗어나’ 사색과 힐링을 즐길 수 있는 장소 몇 곳을 소개한다.너무나도 선명한 진녹색이 전해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에 ‘이곳이 과연 현실 속 공간이 맞나?’라는 의문마저 들었다.지척의 도로에선 차량이 질주하고 있음에도 그곳만은 매미와 풀벌레가 울어대는 피안(彼岸) 같았다.족히 수백 년은 자리를 지키며 살아왔을 커다란 나무가 만들어낸 시원스런 그늘. 그 아래 접이식 간이의자를 펴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선경(仙境)이 따로 없다. 자연스레 그악스러운 8월의 더위가 한풀 꺾이는 느낌이 들었다.경주시 보문동엔 신라 진평왕의 능이 자리해 있다. 널찍한 평야 한복판에 들어선 거대한 봉분. 그 풍경만으로도 돌올하지만 진평왕릉의 진가(眞價)는 주변 거대한 녹지에서 드러난다. 소나무를 비롯한 갖가지 수목과 ‘초원’이라 불러도 좋을 넓은 초록 풀밭, 여기에 고전적으로 디자인된 목조 벤치까지 그림처럼 준비돼 있었다.소음과 매연 가득한 도심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 이런 ‘사색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름이 알려진 여타 관광지와 달리 오가는 사람들이 적어 조용한 휴식이 가능해 보였다. 시원한 그늘에서 야외 독서를 원하는 이들에겐 안성맞춤.1969년 사적 제180호로 지정된 진평왕릉을 호위하고 선 것은 궁궐의 병사들이 아닌 키 큰 나무 몇 그루였다. 그럼에도 왕의 깊은 잠을 방해할 이들은 없었다. 그만큼 주위 풍광은 고요하고 평화스럽다. 1천 년 전 서라벌 사람들도 이곳에서 피크닉과 데이트를 즐겼을 법하다.기자가 능을 찾았던 날엔 대구에서 왔다는 중년 부부 한 쌍이 진평왕릉을 한 바퀴 돌아보곤 벤치에 앉아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겹고 보기 좋았다. 그들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았던 이유는 1천400년을 이어진 진평왕의 곤한 잠을 깨우기 싫어서였을까?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싶은 여행자에게 권하고픈 장소다.아르헨티나의 작가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천국은 도서관”이라고 했다.시와 소설, 평론에 두루 뛰어났던 사람이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역사와 유물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어떤 공간을 천국으로 느낄까? 아마도 박물관일 것이다.1월 1일과 설·추석을 제외하고는 1년 내내 방문객을 맞는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 역사와 불교미술, 고대 유물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과 지적 갈증을 풀어주는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은 곳.상설전시관인 신라역사관, 신라미술관, 월지관에선 신라 건국에서부터 멸망 과정, 화려했던 신라의 불교문화, 월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야외 전시장에도 적지 않은 국보와 보물이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눈을 크게 떠야 한다.운 좋게도 기자가 박물관을 찾았을 땐 특별관에서 ‘금령총 금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금령총은 경주시 노동동 고분군에 있는 신라시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1924년 진행된 조사·발굴 과정에서 기차 한 량을 가득 채울 만한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재발굴이 진행 중이다.금령총에서 출토된 금관은 천마총이나 금관총에서 나온 금관에 비해 크기가 작고(머리띠 지름 15cm), 옥(玉)으로 된 장식이 없다. 학계에선 나이 어린 왕자가 썼던 것으로 추정한다.당장 오늘이라도 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 간다면 ‘진품’ 금령총 금관과 화려한 금허리띠를 만날 수 있다. 저절로 눈길이 가는 선명한 노란색과 정교한 세공 기술이 감탄사를 부를 것이다. 신라가 ‘황금의 나라’로 불린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국립경주박물관을 찾는다는 건 ‘역사의 오솔길을 사색하며 걷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금령총 금관 전시는 31일까지 계속된다. 여기에 보너스 하나. 모든 전시장은 무료입장이다.“나라를 지키는 용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며 바다에 묻히기를 자처한 문무왕.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양북면 봉길리 대왕암을 만나고 경주 시내로 돌아가는 길.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용당리 감은사지(感恩寺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쓸쓸한 풍경 속에 우뚝 솟은 2기의 삼층석탑이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감은사는 문무왕이 일본군의 침입을 막고자 하는 뜻에서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신문왕이 ‘호국 사찰’로 완성시켰다. 여타 절과는 달리 독특하게도 지하에 용도를 추측하기 힘든 큰 공간을 만든 감은사. 신문왕은 용이 된 아버지 문무왕이 그곳에서 쉴 수 있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옛사람들의 효심은 왕족이나 평범한 백성이나 매한가지였다.사적 제31호인 감은사 터는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위치했다. 석탑과 금당(金堂) 터, 초석과 장대석 등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봄가을이면 신라 역사에 관심을 가진 중·고교생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여유롭게 절터와 삼층석탑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 하지만 푹푹 찌는 여름엔 그것도 마냥 쉬운 게 아니다. 그럴 때면 석탑 뒤편 촘촘한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는 대나무 숲으로 숨어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신라가 번창하던 시기에도 분명 감은사 대나무 숲이 있었을 터. 입이 없어 말하지는 못했겠지만, 그것들은 문무왕을 그리워하는 신문왕의 애끓는 심정을 눈앞에서 지켜봤을 것이다.푸르고 또 푸른 빛깔로 하늘을 향해 뻗은 감은사지 대나무 사이에서 바라보는 절터와 석탑은 실력 빼어난 동양화가가 그려놓은 수묵화의 형상으로 여행자에게 다가온다. 때로는 화려한 색채보다 담담한 흑백의 풍광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때가 있다. 감은사지는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짙은 대나무 그늘 아래선 서정인의 소설이나 로트레아몽(1846~1870)의 시를 읽는 게 어울린다.돗자리를 깔고 나란히 누운 젊은 연인은 기자가 다가가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서로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상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는 세심한 손길이 질투와 부러움을 불렀다. 펴놓은 돗자리가 싸구려면 어떠랴. 두 사람은 삼릉(三陵) 솔숲에서 인생의 가장 ‘값비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경주시 배동 울창한 소나무 숲속엔 신라 왕들의 유택(幽宅)으로 추정되는 3기의 능이 있다. 여기에 잠든 이들은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신덕왕과 경명왕은 신라가 기울어가던 시기의 통치자였다. 당연지사 외부의 침입이 잦았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도 극심했다. 국력이 쇠하니 영토 또한 터무니없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신라 전성기의 왕들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장식의 왕릉을 만들 여력이 없었을 터.삼릉 모두는 봉분이 낮고 능을 지키는 석상(石像)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름답다. 허물어진 역사의 폐허에 숨겨둔 보석처럼 반짝인다. 의외로 이런 비극의 현장에서 감동을 느끼는 여행자가 많다고 들었다. 아주 가끔은 번듯함보다 남루함이 빛나는 시간이 있다.삼릉을 삼릉답게 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오브제’는 주변을 둘러싼 기묘한 형상의 소나무 수백 그루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서늘한 음지는 폭염에 시달려온 여행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된다.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밀어(蜜語)를 속삭이고 싶은 아베크족들에게도 성지로 다가온다.삼릉은 경주국립공원 남산 지구의 시발점이다. 이곳을 출발해 금오봉-용장사지-용장골까지 가는 4.6km 등산 코스도 인기가 좋다. 산을 오르는 게 익숙한 사람의 경우 3시간이면 주파가 가능하다고 한다.“등산길에선 100개가 넘는 갖가지 형태의 불상과 석탑, 절터 등을 볼 수 있어 심심할 겨를이 없다”는 게 경주국립공원사무소의 설명. ‘사색’과 ‘레저’를 한 번에 맛보기 원하는 관광객들에겐 제격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8-07

따로 또 같이… 진심 담아 허투루가 없는 내공 맛집들

보리밥은 귀하다. 경주 ‘숙영식당’은 찰보리 밥을 내놓는다. 업력도 30년을 넘겼다. 서울 등 외지에서 업무차 경주에 오는 이들이 ‘밥집’으로 여기고 드나들었던 집이다. 가정집을 개조한 식당 안은 ‘ㄷ자’ 혹은 ‘ㅁ자’ 구조다. 밥상은 평범하다. 보리밥에 두부가 많이 들어간 된장찌개, 몇몇 나물 반찬들과 생선구이(가자미) 등이다. 정식 메뉴가 있고, ‘혼밥족’을 위한 메뉴도 별도로 있다. 수준급의 ‘장(醬)’을 사용한다. 식사는 1만1천 원대다. 한식은 장맛이다. 장맛이 좋다. 별다른 특미를 요구할 일은 아니다. 보리밥에 된장찌개 올리고, 몇몇 나물들을 얹어서 비벼 먹으면 넉넉하다. ‘털퍼덕 좌석’이라서 불편하지만, 가족 단위의 식사 공간으로는 오히려 낫다. 추천한다.인근의 ‘화림정’은 재미있는 집이다. ‘음식을 잘 퍼주는 집’이라는 표현이 맞다. ‘주인(주방)의 손이 크다’라고도 표현한다. 한 상 가득 반찬이 나오고 대부분 먹을 만하다. 전형적인 퍼주는 집, 손이 큰 집이다. 멸치젓갈을 강하게 사용한 김치, 무 김치를 한 접시 가득 내놓는다. 썰지 않고 통째로 내놓는 김치를 보면 누구나 “이렇게 퍼주고 남기는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직접 만든, 큼직한 모두부 한 모를 2인 상에 통째로 내놓는다. 국은 곰탕이다. 단일 메뉴로 내놓지만, 정식을 주문하면 먹을 만큼 넉넉하게 준다. 생선조림이나 몇몇 나물 반찬들은 남기고 나오기 십상이다.두부콩이나 반찬용 나물 등을 직접 혹은 계약 재배하여 사용한다. 인근 ‘대갓집’의 살림을 도맡았던 이가 운영하는 집이다. 음식은 계절마다 바뀌는데 경상도에서 널리 먹는 콩잎지 등도 맛볼 수 있다.이외에도 경주에는 ‘쑥부쟁이’ ‘요석궁’ 등이 한식당으로 널리 알려졌다.“설마 이런 곳에 식당이?” 싶은 생각이 든다.‘고두반’은 농가식당이다. 주변이 모두 농촌, 논밭이다. 내부는 많은 도자기로 아기자기하다. 남편은 도자기, 부인은 주방을 도맡고 있다. 일을 거드는 따님이 친절하다. 안과 밖의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음식은 ‘집밥’이다. 정성, 섬세함, 진정성이 어우러진 음식이다. 직접 담근 장을 사용하여 음식을 만든다. 콩조림, 콩잎지, 가지 등 여러 반찬이 어느 것 하나 허술하지 않다.인근에서 생산되는 채소를 사용한다. 두부 음식도 권할 만하다. 쇠고기와 두부, 콩나물 등을 넣고 끓인 두부전골이 맛이 강하지 않으면서 재료를 맛을 살렸다. 오디청 등 여러 종류의 청도 직접 만든 것이다.예약 없이 가면 재료가 소진될 경우, 밥을 못 먹고 돌아서는 수도 있다. 저녁 시간에는 일찍 문을 닫는다. 예약할 경우, 오후 7시 정도에도 식사할 수 있다.소박한 음식이지만 음식 내공은 깊다. 평범한 음식을 제대로 차려낸다. 후식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다.아쉬운 점도 있다. 전채로 나오는 샐러드가 달다. 전채의 단맛이 뒤에 나오는 음식들의 맛을 가린다. 전채를 후식인 양 먹는 것도 좋은 방법.‘달개비’는 보문단지에 있는 솥밥 전문점이다.홍합, 곤드레, 전복 등으로 솥밥을 내놓는다. 무던한 음식점이다.옛날식 쇠고기 전골이 재미있다. 파를 많이 넣은 쇠고기 전골이다. 평범, 무던하지만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장으로 맛을 다스린 음식이다. 곁들이 반찬으로 나오는 가자미구이는 제법 크기가 크다. 구색용이 아니라 정성을 기울인 음식이다.대부분 음식의 내공이 깊다. 내부 인테리어도 무던하다. 깔끔하면서도 무덤덤하다. 배가 고픈 날, 불쑥 들러 푸근하게 한 끼 먹을 수 있는 곳이다.팔우정 부근의 ‘팔우정해장국’. 5~6년 전에는 도드라진 장점이 있었다.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국물 맛은 말린 모자반으로 해결했다. 오래된 좁은 공간이다. 주인 할머니가 꼼꼼히 그릇을 씻고 잘 끓인 다음 묵해장국을 내놓았다. 대가리를 떼어낸 콩나물(두절 콩나물)과 메밀묵으로 정성스럽게 해장국을 내놓던 집이다. 연세가 드셨고, 어느 날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직접 음식을 만들지 못하고, 일을 거들던 이가 ‘메인 주방장’이 되었다.앞뒤 모르는 방송국에서 ‘먹방’을 했다. 급기야 따님이 벽에 손글씨로 “어머님 연세가 많으셔서 서비스를 제대로 못 하니 양해해달라”는 문구를 써 붙였다. 손님들은 줄을 서고, 음식은 달라졌다. ‘팔우정해장국 골목’의 원조 격인 집이다. 세월을 이기는 방법은 없다.‘삼릉고향칼국수’는 발로 디디는 족반죽과 곡물 육수(?)로 유명해진 가게다. 마치 우동 반죽을 하듯이 할머니들이 신문지, 비닐을 깔고 반죽을 디뎠다. 가난한 시절의 음식이다. 다른 가게와는 달리 국물이 뻑뻑하다. 가난한 시절, 영양과 맛을 생각해서 곡물가루를 넣은 국물을 선보였다. 더러는 들깨칼국수로 오해한다. 들깻가루 위주의 국물은 아니다. 보기 드문 곡물가루 육수다. 면발도 처음부터 툭툭 끊어지는 것이었다. 경주, 경상도 일대에서는 일상적으로 먹었던 면발이다. 외지 관광객, 젊은 세대는 이런 툭툭 끊어지는 면발이 익숙지 않다. 불평도 적잖게 나온다.경주 노동동의 ‘평양냉면집’은 3대, 65년 전통의 노포다.면발은 전분으로 뽑은 쫄깃한 것이다. 서울 등지에서 유행하는 ‘메밀 위주의 냉면’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다. 오랜 전통이 있다. 면발을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물도 마찬가지. ‘슴슴한 맛’이 평양냉면의 육수 맛이라고 평가한다. 경주 ‘평양냉면집’의 육수는 단맛, 신맛 등이 강하다. 역시 바꾸는 것은 무리수다. 손님들이 바꾸는 것을 원하는 지도 의문이다. 현지인들이 인정하고 단골손님으로 드나든다.제대로 된 커피 한 잔 만드는 일은 복잡하다. 좋은 원두, 보관, 유통, 로스팅과 그라인딩, 드립 과정까지, 전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어야 제대로 된 커피를 얻을 수 있다. 경주 성건동의 ‘카페 얀(YAN)’. 이 모든 과정을 찬찬히 제대로 해낸다. 베리에이션 커피도 좋지만 무거운 풍미의 남미 산, 과일 향이 좋은 아프리카 단일 품종 핸드 드립 커피를 권한다. 가게 안에 진열된 찻잔 등 커피 관련 용품들도 볼 만하다. 낮은 천장의 내부 분위기도 아주 좋다. 일반인, 창업자를 위한 커피 강습반도 운영 중이다. 직접 만드는 호두 파이도 많이 달지 않고 좋다.‘커피명가’는 경북, 대구 중심의 커피 전문 프랜차이즈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 가는 길에 있다. 높은 곳에 위치, 주변 조망이 좋고, 프랜차이즈점의 커피 수준을 넘어서는 커피를 내놓고 있다. 전문 핸드 드립 점과는 달리 커피 메뉴는 많지 않다. 고객 중에는 케이크, 차를 주문하는 이들도 많다. 굳이 핸드 드립 커피를 원하는 경우, 아프리카산 커피를 권한다.‘한식 브런치’는 흔하지 않다. ‘브런치’는 서구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겉모양은 서구식 브런치, 속이 한식이면 ‘한식 브런치’다.‘카페 아고’는 제대로 된 한식 브런치 전문점이다.‘장(醬)’을 솜씨 있게 사용한다. ‘쇠고기 구이+장’ 혹은 버섯볶음에도 장을 잘 섞었다.주먹밥, 두부 요리, 버섯, 밀전병 등이 단품 메뉴로 내놓아도 좋을 정도다.내부 분위기는 카페식이고 접시 위의 음식은 한식 변형이다. 경주 특산물 중의 하나인 연뿌리도 여러 가지로 솜씨 있게 조리해 낸다. 달지 않은 수수부꾸미도 강추 메뉴다. 2인이 가면 한식 브런치 메뉴 하나에 수수부꾸미를 주문하는 것도 좋다.아쉬운 점도 있다. 밥상에 국물이 없다. 한라봉과 차 등 국물은 있으나 밥상을 위한 국물이 아니라 음료수다. ‘밥과 더불어 먹는 국물음식’ 하나쯤을 곁들이면 좋겠다.공방을 동시에 운영, 내부 인테리어도 아주 좋다.‘웰빙횟집’은 ‘웃장’에 있다.경주역 바로 앞이다. 정식 명칭은 성동시장이다. 웃장에는 재미있는 초밥집(?)이 하나 있다. 미리 밝히지만, 가격이 싸다. 초밥 12점에 1만 원, 연어, 새우, 흰살생선으로 모두 12점이 1인분이다. 가격이 싸다고 음식이 허술한 것은 아니다.‘웃장’ 한쪽에 가게가 있다. 설마, 이런 곳에 초밥집이?, 싶다. 이름도 특이하다. ‘웰빙횟집’. 이름은 횟집인데 주 종목은 초밥이다.고급생선은 아니지만, 생선 손질을 잘 해낸다. 숙성도도 좋다. 1만 원 초밥에서 수준급의 밥 짓기와 ‘초대리(초배합)’를 느낄 수 있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