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국회의원 75% “대구·경북 행정 통합에 찬성”… 반대 8.3%

경북매일신문이 창간 30주년을 맞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21대 국회의원의 70% 이상은 대구시와 경상북도의 행정 통합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이번 설문조사에는 대구와 경북을 지역구로 하는 국회의원 25명 가운데 24명이 참여했다. 참여율은 96%로 지역 국회의원들이 경북매일의 설문조사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줬다. 현재 대구와 경북을 지역구로 하는 국회의원의 정당은 미래통합당이 24명, 무소속이 1명이다.설문에 참여한 지역 국회의원들은 ‘대구시와 경북도의 행정 통합’을 묻는 질문에 75%가 “찬성한다(18명)”고 응답했다. 이 중에서 “적극 찬성한다”는 의견은 20.8%(5명)이었고, “찬성한다”는 의견은 54.2%(13명)에 달했다. 반면, “반대한다”는 응답은 8.3%(2명)에 불과했다.기타 의견도 16.7%(4명)나 됐다. 기타 의견으로는 “통합이라는 거시적인 정책보다 도청 신도시의 행정 통합이 우선되어 경북 북부지역 발전과 경북 시·군간 행정통합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또 “행정 통합 전에 도민과 시민들의 여론 통합이 먼저”라는 응답과 “지역 발전을 위한 종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국회의원들은 대구와 경북의 미래를 위한 로드맵으로 ‘경제’를 꼽았다.설문에 참여한 지역 국회의원들은 ‘포스트 코로나19 이후 대구와 경북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무려 91.7%(22명)가 “기업 활성화를 통한 경제 문제 해결(중소기업 및 소상공인 지원 포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코로나19 이후에도 “감염병 전문병원 설립 등 보건의료체계 강화가 필요하다”는 응답은 8.3%(2명)에 불과했다.이는 4·15 총선 과정에서 유권자들의 “경제가 어렵다”는 외침에 대한 응답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지역 국회의원들은 “선거 과정에서 대다수의 지역민들이 ‘경제가 어렵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다”고 말했다.마찬가지로 지역 국회의원들은 ‘10년, 20년 후 대구와 경북의 미래를 위해 가장 필요한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기업 유치’를 선택했다. 무려 70.8%(17명)의 국회의원이 참여했다. 이어 대구·경북 행정 통합이 12.5%(3명), SOC 확충이 16.7%(4명)를 기록했다.□ 경북도의원, ‘대구·경북 행정 통합은 신중해야’… 경제문제는 심각23일 현재, 경상북도의회는 모두 60명의 광역의원으로 구성돼 있다. 미래통합당 소속 도의원이 48명으로 가장 많고, 더불어민주당 소속 도의원은 9명이다. 여기에 민생당 소속 도의원 1명과 무소속 2명이 도정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조사에는 60명의 경북도의원 가운데 모두 58명이 설문조사에 참여했다. 설문조사 참여율은 96.7%였다.경북도의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대구시와 경상북도의 행정 통합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찬성’과 ‘반대’가 비등하게 나왔다는 점이다. 설문에 참여한 경북도의원은 ‘대구·경북 행정 통합 찬반’을 묻는 질문에 56.9%(33명)가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이 가운데 “적극 찬성한다”는 응답이 19%(11명)였으며 ‘찬성한다’는 응답이 37.9%(22명)로 나타났다. 반면, ‘반대’ 의견도 36.2%(21명)로 조사됐다. “적극 반대한다”는 의견은 3.4%(2명)로 적었으나 “반대한다”는 응답은 32.8%(19명)로 “찬성한다”는 의견과 큰 차이가 없었다.이외에도 기타(6.9%, 4명) 의견으로는 “대구시민과 경북도민의 의견 청취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며,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경북도의원의 대다수인 67.2%(39명)는 ‘포스트 코로나19 이후 대구와 경북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기업 활성화를 통한 경제 문제 해결이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특히, 경북도의원들은 구미시발 기업 탈출과 포스코의 위축 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이어 경북도의원들은 “감염병 전문병원 설립 등 보건의료체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응답에 29.3%(17명)가 답했으며, “저소득층, 취약계층 등에 대한 현실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도 3.5%(2명)가 답했다.그렇다면 ‘2020년 현재 대구와 경북 발전의 저해가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한 경북도의원들의 생각은 어떠할까. 과반수가 넘는 62.1%(36명)의 경북도의원은 “유력 대기업 및 중소기업 등의 부재로 나타나는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최근 10년 동안 지속되어온 경제 위기를 반영한 의견으로 분석된다.또 경북도의원의 19%(11명)는 “보수 정당 중심의 1당 체제가 문제”라고 답했으며, 10%(6명)의 경북도의원은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등 구심점 없는 정치력이 문제”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8.6%(5명)의 경북도의원은 “대구와 경북도는 물론 기초자치단체의 행정력 부족으로 인한 공백이 심각하다”고 응답했다.그런가 하면, 경북도의원들은 ‘대구와 경북의 미래를 위한 무엇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기업 유치와 신성장동력 개발로 미래먹거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의견이 41.4%(24명)로 가장 많았다. 이어 “대구경북통합신공항 및 각종 SOC를 확보해야 한다”는 응답이 31%(18명), “대구와 경북의 행정 및 경제 통합으로 미래지향적 지방분권체제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이 27.6%(16명)로 조사됐다.□ 대구시의원,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이 우선”대구시의원들은 향후 지역의 가장 큰 문제를 ‘먹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이번 조사에는 30명의 대구시의원 중에서 28명이 참여했다. 현재 대구시의회는 미래통합당 소속 23명, 더불어민주당 소속 5명, 무소속 2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에서 93.3%의 대구시의원들이 경북매일신문의 30주년 기념 설문조사에 참여한 셈이다.우선 대구시의원의 68%(19명)는 ‘포스트 코로나19 이후 대구와 경북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 지원을 포함하는 기업활성화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이는 대구의 경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대구는 △소상공인 소득 부재 △일자리 부족 등으로 17개 시·도 가운데 지역내총생산(GRDP)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올해로 취임 6주년을 맞은 권영진 대구시장 역시 ‘일자리 창출과 기업유치’를 첫 번째 시정과제로 꼽고 있는 상황이다.이어 32%(9명)의 대구시의원은 “감염병 전문병원 설립 등 보건의료체계 강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와 관련해 대구시는 가장 많은 확진자와 사망자를 기록했다. 물론 신천지 교회의 집단감염이 지역 내 광범위한 확산으로 이어졌지만, “코로나19 이전, 대규모 감염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대구시의원들의 설명이다.특이한 것은 “저소득층, 취약계층 등에 대한 현실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성장 정책이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점과 대구시의회에 5명의 민주당 소속 시의원들이 있다는 점에서는 눈여겨볼 만한 수치다.그런가 하면, ‘10년, 20년 후 대구와 경북의 미래를 위해 가장 필요한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구시의원의 39%(10명)는 “기업 유치와 신성장동력 개발로 미래먹거리를 창출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이어 “대구와 경북의 행정 및 경제 통합으로 미래지향적 지방분권 체제 구축”이 36%(10명)였으며, “대구경북통합신공항 및 각종 SOC 확보로 지역거점체계 구축”이 25%(7명)으로 나타났다.결과적으로 대구시의원의 상당수는 기업유치와 미래먹거리 창출 등 대구시민들의 ‘주머니 사정’에 민감한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로 한 대구시의원은 “지역구에 가면 유권자들의 공통적인 질문은 먹고 살게 해달라”는 것이라면서 “결국, 선출직인 대구시의원의 가장 큰 관심은 경제 부분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그렇다면 대구시의원들은 ‘2020년 현재 대구와 경북 발전의 저해가 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역시 대구시의원의 72%(20명)는 “유력 대기업 및 중소기업 등의 부재로 나타나는 경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14%(4명)의 대구시의원은 “보수 정당 중심의 1당 체제가 문제”라고 응답했다. 또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등 구심점 없는 정치력”과 “대구시, 경북도는 물론 기초자치단체의 행정력 부족으로 인한 공백”이라는 이야기도 각각 7%(2명)씩으로 나타났다.마지막으로 ‘대구시와 경상북도의 행정 통합’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대구시의원 20명은 적극 찬성(21%), 찬성(50%)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반대와 적극 반대 의견도 각각 14%(4명), 11%(3명)로 나타나 국회의원 및 경북도의원과는 시각 차이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타 의견으로는 “경제통합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박순원·박형남기자 god02@kbmaeil.com

2020-06-22

사회를 비추는 등대 역할 기대

김종인 통합당 비대위원장경북지역 언론을 선도하는 경북매일신문 창간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그동안 경북매일신문은 ‘맑고 정직한 신문’이라는 모토를 꾸준히 실천하며, 지역 발전에 이바지해왔습니다. 경북매일신문이 경북 지역의 정론지로 자리매김하도록 헌신적으로 애써오신 경북매일 임직원 여러분께 감사와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언론은 우리 사회를 비추는 등대요,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입니다. 언론이 이러한 역할에 충실할 때 우리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특히 지역 언론은 지역에 대한 세심한 관심과 애정으로, 지역민들의 삶을 챙기고 깨끗한 지방정치가 구현될 수 있도록, 이끌어갈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최근 연일 강도를 높여가는 북한의 도발에 안보상황이 불안은 커지고 경제위기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은 심각한 시국입니다. 잘못된 국정과 권력의 일방적 독주를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언론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지역 언론인이 더 큰 자부심으로 힘내서 일하실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울러, 경북매일신문 더 큰 발전을 기원합니다.다시 한 번 뜻 깊은 창간 30주년을 축하드리며, 임직원 여러분 모두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06-22

지역언론 선도하는 신문 ‘우뚝’

박병석 국회의장대구·경북 시민의 곁에서 아름다운 지역사회를 만들어 온 경북매일신문의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경북매일신문은 1990년 창간 이후 언론 본연의 임무와 시대적 소명을 다하며 지역민과 함께해 왔습니다. 급변하는 언론 변화 속에서도 대구·경북 지역의 대표적 일간지로 성장했습니다. 지방 문화 정착에도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이런 성장의 결과는 ‘맑고 정직한 신문’이라는 경북매일신문의 사시와 부합합니다. 이를 실천해오고자 노력한 구성원들의 성과입니다.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 상황에서 시민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언론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지난 30년 동안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독자들의 눈과 귀가 되어 다양한 소식으로 살아 숨 쉬는 신문을 만들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더불어 우리 사회를 비추는 언론의 모범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지역 발전을 선도하는 언론으로서 우뚝 서십시오.저도 새롭게 문을 연 제21대 국회의장으로서 ‘일하는 국회’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창간 30주년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고 진실하고 공정한 소식들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경북매일신문을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6-22

공정한 보도 통한 지역대표 정론지

이철우 경북도지사‘경북매일신문’창간 30주년을 300만 도민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지난 30년간 경북매일신문은 도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건강한 지역사회를 만들어내며, 지역발전과 언론문화 창달을 선도해 왔습니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역민의 알권리 충족과 공정한 보도를 통해 지역 대표 정론지로 만들어 오신 최윤채 사장님을 비롯한 임직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와 성원의 박수를 보냅니다.지방신문은 지역 주민들의 삶이 녹아들어 있으며, 지역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재이고,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본적 토대입니다. 지방의 경쟁력이 국가의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지역 언론이 지닌 가치는 더욱 남다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경북매일신문에 거는 시대의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크다 할 수 있습니다.경상북도는 지금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재도약하기 위해 힘차게 도움닫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발판이 바로 통합신공항, 대구·경북 행정통합입니다. 지방소멸의 경고등이 깜빡이고 있는 지금, 변화와 혁신의 새바람을 일으키지 않으면 지역의 미래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통합과 상생의 정신으로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통합신공항은 대구·경북 역사상 가장 큰 사업입니다. 지역이 상생하는 방향으로 통합신공항이 차질 없이 추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나가겠습니다.또 하나의 큰 과제는 대구·경북 행정통합입니다. 지금 세계는 국가 간의 경쟁에서 도시 간 경쟁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습니다. 한 뿌리인 대구와 경북이 힘을 합쳐 하나의 나라처럼 운영되어야 세계와 경쟁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더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드는 데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아직 논의의 수준이고 갈 길이 멀지만, 이 길이 대구·경북의 미래라 믿고 시·도민의 동의를 구해갈 것입니다.저는 이러한 주요 시책과 사업의 성공적인 추진은 물론 지역의 여러 문제와 현안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여론을 형성하고 민의를 모으는 언론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사회 네트워크의 중심에서 경북매일신문이 선도적인 역할을 다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2020-06-22

새 가치 창조 올곧은 신문 자리매김

권영진 대구시장‘맑고 정직한 신문’의 기치를 내걸고, 진실하고 공정한 보도와 창의적이고 개척적인 논편으로 언론 본연의 임무와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 있는 경북매일신문의 창간 30주년을 250만 대구시민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경북매일신문은 1990년 창간 이래, 단순한 정보를 선별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신문, 혜안과 통찰력으로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올곧은 신문으로 자리매김해주셨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 주신 최윤채 사장님과 관계 임·직원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대구시는 지난 6년 간 시민과 함께 변화와 혁신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산업구조를 개편하고, 도시공간을 혁신하고, 세계로 열린 도시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스마트시티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등 대구의 근본 틀을 새롭게 짜고 착실하게 준비했습니다. 앞으로 민선 7기의 남은 기간은 그 바탕 위에 ‘행복한 시민, 자랑스러운 대구’를 만드는 데 매진하고자 합니다. 혁신의 성과 위에 시민들이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기회의 도시, 따뜻한 도시, 쾌적한 도시, 즐거운 도시, 참여의 도시’라는 시정목표 아래 생활밀착형 정책을 적극 펼쳐 나갈 계획입니다.최근 코로나19 팬데믹 선언(세계적 대유행) 등 전례 없는 위기상황에 놓여있습니다. 하지만, 정부와 지자체, 지자체 간, 시민사회에서의 연대와 협력의 힘으로 우리는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공동체를 지켜내겠다는 위대한 시민정신으로 엄청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2차 대유행이 오게 될 경우를 철저히 대비하는 한편, 코로나19 극복 이후 포스트 코로나 국면을 내다보며 다양한 정책을 준비하여 펼쳐나갈 계획입니다.다시 한 번 경북매일신문의 창간 30주년을 축하드리며, 지역민들께 사랑받고, 꿈과 자부심을 심어주는 언론사로 성장하시길 기원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행복공동체 대구 건설을 위한 노력에 경북매일신문이 든든한 후원자이자 지역의 리더가 되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2020-06-22

지역문화 창달·경제발전 노력 감사

장경식 경북도의회 의장맑고 정직한 신문을 목표로 독자들의 눈과 귀가 되는 진실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북매일신문’ 창간 30주년을 300만 도민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경북매일신문이 어려운 현실속에서도 30세의 청장년으로 우뚝선데 대해서도 재삼 축하 드립니다.또한, 정론직필의 소임을 다하여 지역문화 창달과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신 최윤채 대표님을 비롯한 경북매일신문 가족 여러분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대구·경북 지역 현장 곳곳을 발로 뛰며 신속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지역민들이 건전한 비판 정신과 혜안을 가지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올해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위기로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습니다.이런 때일수록 지역 언론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현재까지 역할해 주신 것처럼 지역민의 의견을 수렴해 지역을 대변하는 언론사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또한, 진정한 지방분권과 지방자치 실현을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주신 것처럼 앞으로도 공정한 보도와 건전한 비판에 기초해 지역사회 발전을 선도하여 주시길 당부드립니다.현재의 상황은 지역을 넘어 국가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형편입니다. 언론에서 도민을 격려하고,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는 좋은 기사를 많이 발굴해 지역민이 다함께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다시 한번 바랍니다.더불어, 지역의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비판할 것은 따끔히 충고하는 직필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해 사회에서 언론본연의 역할인 ‘빛과 소금’이 돼 주길 진심으로 바랍니다.아울러 300만 경북도민을 위한 경상북도의회 의정활동이 도민들의 관심과 성원 속에서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립니다.다시 한 번 경북매일신문의 창간 30주년을 축하드리며 독자들로 하여금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사회통합과 지역발전을 선도하는 언론매체로 더욱 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2020-06-22

올바른 여론·바른정보 전달에 솔선

배지숙 대구시의회 의장경북매일신문 창간 30주년을 우리 대구·경북 지역민들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그동안 경북매일신문은 지역민과 적극 소통하고 변화와 혁신을 위한 올바른 여론 형성과 바른 정보 전달에 솔선해 왔습니다. 지역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지역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다해 오신 최윤채 대표님과 임직원 여러분들의 헌신과 노력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코로나19가 극심하던 시기에는 대구시의회의 대정부 호소문 발표, 악의적인 지역명 사용 자제 촉구 등 의정 활동을 지지해 주셨고, 시민들의 안전의식을 환기시키는데 힘써 주셨습니다. 착한 소비자운동의 범시민 운동 추진, 역학조사관 확보 의무화와 처우개선 등 코로나19 확산과 예방에 필요한 보도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주심으로써 코로나19 확산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데 큰 기여를 해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지금 국내외는 물론 지역민들이 이전엔 경험치 못한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대구·경북이 이 위기에 절망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 삼아 더 큰 세상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슬기를 모아나가야 할 때입니다. 이런 시기에 지역민에게 희망을 불어 넣고, 신뢰와 사랑으로 지역민들과 함께 성장해 가는 경북매일신문의 역할이 그만큼 더 중요해졌다고 생각됩니다.제8대 대구광역시의회는 전반기 2년 동안 ‘시민 속으로 한 걸음, 소통하는 민생의회’라는 슬로건 아래 통합 신공항 건설, 맑은 물 공급 추진 등 지역의 중대한 현안 해결을 위한 대구시의회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왔습니다. 6월 정례회에는 2019년도 결산심의와 대구시 조직개편, 후반기 원구성 등 중요한 일정이 예정돼 있습니다. 지역민들이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임을 고려하여 7월 임시회에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추경안 편성 등 하루속히 지역경기가 되살아 날 수 있도록 의회가 가진 모든 역량을 결집하여 지원해 나가겠습니다.전국시·도의회의장협의회를 비롯한 지방 4대 협의체와 힘을 합쳐 전반기에 이루지 못한 진정한 지방자치 실현과 지방분권 강화에도 노력하겠습니다. 창간 30주년을 다시 한번 축하드리며, 지방자치와 지방분권화 노력에도 경북매일신문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2020-06-22

기와집 골목골목 걸으며… 옛 정취와 낭만을 머금다

‘길은 길 위에서 끝이 없다’는 말이 있다. ‘길’은 ‘집’과 더불어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가장 주요한 공간 중 하나다.길은 또한 변화의 장소다. 수백 년, 혹은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내는 길은 없거나 매우 드물다. 시대와 세상의 흐름에 따라 길은 형상을 달리하며 시시각각 변한다. 그게 길의 타고난 운명이다.한때는 호화찬란한 건축물이 가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 막막한 폐허가 되기도 하고, 인적 드문 곳에서 산새만이 조용히 지저귀던 오솔길이 거대한 도읍(都邑)의 광대한 길로 바뀌기도 했던 게 우리가 지나온 역사였다. 그래서 길을 살핀다는 건 축적된 인류의 문화를 탐구하는 것인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트렌드를 읽어내는 요긴한 수단이 되고 있다. 여기 명멸해온 ‘길의 역사’ 속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곳이 있으니 바로 경주의 ‘황리단길’이다. 경상북도의 청년들은 물론 인근 대구와 부산, 멀리는 서울과 경기도의 젊은이들까지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길’로 떠오르고 있는 서라벌의 핫 스폿(Hot spot).한바탕 시원스런 빗줄기가 지나간 후 다시 맑게 갠 하늘이 푸르던 6월의 둘째 주. 경주 관광의 핵심 포인트로 부상하고 있는 황리단길을 찾아갔다.◆ 2020년 오늘, 경주의 자랑으로 부상한 새로운 ‘길’지금으로부터 10~15세기 전.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고, 궁궐과 석탑, 불상과 금관 등 매혹적 조형물을 만들어냈던 신라. 그 문화재와 유적들은 고스란히 경주의 매력적인 관광 자산이 됐다.하지만 무엇이건 과거에 멈춰있거나, 지난날의 영화에만 의지해 현재와 미래를 설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역사의 손때 묻은 각종 국보와 보물이 신라의 옛 자랑이라면 황리단길은 2020년 현재 경주의 자랑이다.이를 감안한 듯 경주시가 운영하는 인터넷 문화관광 홈페이지엔 아래와 같은 말로 황리단길이 지닌 위상이 설명되고 있다.“황리단길은 경주에서 가장 젊은 길이다. 내남사거리에서 시작해 황남초등학교 사거리까지의 도로를 기준으로 양쪽의 황남동, 사정동 일대의 지역을 일컫는다. 몇 해 전부터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분위기 좋은 카페, 아기자기한 소품점, 기념품 가게, 개성 있는 식당들이 생겨났다. 초기에는 도로변을 중심으로 상점들이 들어섰는데 황리단길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골목마다 개성 있는 가게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이 길은 ‘핫’하다 못해 경주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코스가 됐다. 검색해뒀던 카페를 찾아 가거나, 거닐다 눈에 들어오는 식당 문을 두드려 보거나, 경주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 찾아가 경주를 기념하는 기념품을 찾거나…. 황리단길에서 먹고 마시며, 즐겨 보자.”실제로 찾아본 결과 경주시가 가진 황리단길에 대한 자긍은 과장이 아니었다. 기자가 황리단길을 방문한 건 평일 한낮. 한국의 어느 관광지에도 사람이 드문 시기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채 창졸간에 찾아온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폭풍은 5개월 가까이 한국을 공황 상태로 몰아갔다.지금도 대부분의 여행지와 관광지가 예전처럼 찾아주지 않는 방문객들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그럼에도 그날 황리단길엔 많진 않았지만 마스크를 쓴 채 손을 맞잡은 20~30대 연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구입하는 것들은 바로 현장에서 경주의 지역경제 재활성화에 그대로 직결될 터였다.황리단길은 타 지역에서 거길 찾는 이들이 편하게 접근하기 좋은 곳에 위치해 있기도 하다. 경주고속버스터미널이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한적한 거리를 걸어 겨우 15분이면 황리단길과 만날 수 있는 것.터미널 주변엔 자전거와 스쿠터, 전동 킥보드를 대여해주는 상점들도 있다. 몇천원에서 1~2만원 정도면 황리단길을 포함한 ‘서라벌의 보물’로 불리는 유적지를 연인과 함께 둘러볼 수 있다.◆ 황리단길의 연인들 “한적하고 세련된 카페가 좋아요”황리단길로 들어가는 내남사거리에서 대학원생과 대학생, 한 쌍의 연인이 타고 가던 분홍색 스쿠터를 세우고 물었다.“두 분은 경주가 처음인가요? 여기 어때요?”대구에서 왔다는 커플은 이미 경주를 여러 차례 찾았다고 했다. ‘조용하고 독특한 데이트 장소’로 대릉원과 교촌마을을 치켜세운 남학생은 “지난해부턴 세련된 카페와 특색 있는 맛집이 하나씩 늘어가는 황리단길에서 식사를 해결할 생각”이라며 빙긋 웃었다.그들의 말처럼 이탈리아 파스타에서 베트남식 스프링 롤, 푸짐한 한식에서 깔끔한 일본 요리까지 각자의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황리단길의 메뉴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이 추세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황리단길 곳곳엔 낡은 가옥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는 현장이 적지 않았다. 그곳들의 대부분은 분명 색다른 레스토랑이나 분위기 좋은 카페로 변신을 시도하지 않을까? 더워지기 시작한 날씨 탓인지 30분쯤 걸어 다니다 보니 갈증이 찾아왔다. 시원하고 쾌적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천년왕국 경주가 아니라면 쉽게 지을 수 없었을 ‘능(陵·임금이나 왕비의 무덤)’이라는 이름의 커피숍이 눈에 들어왔다. 신라 여왕의 유택처럼 서늘하고 조용한 카페에서 얼음 섞인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누리는 재충전의 시간이 더없이 좋았다. 곧이어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간 식당 역시 저렴한 가격에 갈비탕과 도가니탕, 해장국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기대 이상의 맛도 맛이지만,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영어, 일어, 중국어까지 쓰여 있는 친절한 메뉴판이 더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상당수의 황리단길 식당이 이런 메뉴판을 갖췄다고 한다. 이는 ‘글로벌 관광지 경주’를 위한 노력의 일환인 게 분명해 보였다.몇 해 전이다. 비엔나(Vienna), 오흐리드(Ohrid), 티라나(Tirana) 등 동유럽 도시를 여행한 적이 있다. 이곳들 역시 경주처럼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곳. 경험에 따르면 거기에도 고풍스런 성당과 원형 경기장 등 중세의 향기를 간직한 유적과 멀지 않은 곳에 젊은이들의 즐겨 찾는 ‘새로운 길’이 병존하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유사(類似) 황리단길’은 동유럽에도 존재하는 셈이다.독일 속담 가운데 “집에선 좋은 식구와 이웃이 필요하고, 길에서는 좋은 친구가 필요하다”는 게 있다. 지금 자전거나 스쿠터를 타고, 아니면 걸어서 황리단길을 돌아보는 청춘들은 앞으로 살아날 기나긴 날을 함께 동행할 ‘친구’를 만들고 있는 줄도 모른다. 아쉽게도 찰나처럼 짧았던 청춘의 시간을 통과해버린 중년과 노년들에겐 부러운 풍경이었다.◆ ‘젊은 길’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고분(古墳)들“경주 황리단길은 새롭고 젊은 공간”이라는 것에 이론(異論)을 재기할 사람들은 많지 않다. 새롭게 모습을 바꾼 고옥(古屋) 속에 채워지고 있는 21세기형 문화·관광 콘텐츠들.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맛집과 찻집, 신세대 감각에 적절하게 부응하는 사진관과 액세서리 가게, 여기에 옛 가옥을 예쁘게 단장한 독특한 숙소들까지. 경주를 찾은 관광객들의 요구를 다양한 측면에서 만족시키는 황리단길. 여기에 보너스 같은 아름다움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경주에서만 볼 수 있는 거대한 고분들.황리단길 끝자락에 서면 쌍상총, 서봉총, 금령총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지척엔 천마총과 황남대총도 있다. 고분 앞 벤치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1천 년 전 신라를 상상하는 즐거움도 빼놓으면 아쉽다.세상보다 한 걸음 앞서 걸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은 “나는 똑똑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남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투자해 문제 해결에 노력했을 뿐”이란 말을 남겼다.서라벌의 ‘오래된 보물’이라 할 수 있는 고대 유적과 ‘새로운 보물’로 떠오르고 있는 황리단길. 이 두 가지를 어떤 방식으로 조화롭고 균형 있게 보존·발전시킬 수 있을까? 이를 위해 경주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최고의 여행지 경주’를 만들기 위해 남겨진 문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6-18

달성군 어디까지 가봤니?

달성군이 대구시에 편입된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최근까지도 달성군이 대구에 속하는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난해 대구시청사 부지 선정 과정을 통해 달성군과 군민이 한마음으로 홍보했고 비록 최종 결정지로 선택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홍보활동 덕분에 이제는 달성군이 ‘대구의 반’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다. 대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달성군이 대구의 문화산업 융성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을 만큼 천혜의 자연과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사실도 입소문을 타면서 찾는 이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입소문을 탄 달성군의 문화자원은 마비정 벽화마을을 비롯한 비슬산, 사문진 역사공원, 송해공원 등으로 매년 찾는 이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본지는 창간 30주년을 맞아 풍성하게 보유하고 있는 달성군의 관광명소를 대구시민들에게 자세히 알리고 달성군 관광 미래에 대한 준비를 위해 대표적인 관광자원들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농촌 정취 가득한 마비정 벽화마을마비정 벽화마을은 옛 농촌의 모습을 고이 간직한 담장에 토속적인 각종 벽화들로 꾸며졌다. 농촌체험관 및 농산물판매장을 설치해 어른들에게는 농촌생활의 옛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전국적으로 소문난 관광지 중 한곳이다.이곳은 보릿고개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신기하고 새로운 농촌체험의 장을 제공하기 위해 2012년 마을조성된 후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온오프라인에서 인기관광광지에 선정될 정도로 호응을 이끌고 있다.매년 4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마을은 관광명소 외에도 주민소득 창출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직첩 생산한 농산물(채소, 콩, 참깨, 마늘, 감자 등)을 관광객들에게 판매하고 직접 생산한 농산물을 이용해 향토음식인 두부, 국수, 술빵, 파전 등을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이에 그치지 않고 농촌체험전시장 건립을 통해 두부 만들기, 떡 만들기, 향낭주머니, 솟대 만들기 등 10여 종의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해 관광객들에게 농촌 삶으로의 회귀를 이끈다.또 도심속 오지마을의 특징상 청정한 자연환경을 그대로 유지하고 돌담, 흙담으로 이뤄진 골목길에 추억 어린 벽화를 입혀 마을둘레길, 등산로, 농로, 외각소로 등을 한꺼번에 연결한 아름다운 누리길도 자랑거리다.◇ 한국 최초 피아노 유입지 사문진 역사공원달성군은 과거 영남 물류의 중심지이자 한국 최초의 피아노 유입지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 사문진나루터 일원에 역사공원을 조성했다.이를 통해 가족 단위 이용객 및 관광객에게 휴식공간으로 피아노 광장을 조성하고, 전통 주막촌 3동을 복원했다.또 한국 최초 피아노 유입을 기념하는 피아노기념비와 영화 촬영지 기념비 설치 등으로 사문진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다양한 즐길거리를 제공하고, 나루터가 지닌 역사성에 걸맞는 옷을 입혔다.2014년에는 낙동강 최초 유람선인 달성호를 취항해 달성보∼강정보에 이르는 약 22㎞구간의 아름다운 낙동강변의 정취에 젖어 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2015년에는 26인승 규모의 최고시속 70㎞ 쾌속정을 운항해 수상체험의 장을 열었다.도심근교의 휴양 관광지로 확고히 인식되면서 주말이면 입장객들의 줄이 장사진을 칠 정도다.대구시에서 2020년 준공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중인 3대문화권 개발사업(낙동가람 수변역사 누림길 조성사업)을 통해 가야문화체험관, 다목적공연장, 이벤트관 등을 건립했다. 이를 통해 문화예술중심도시로서 위상을 제고함은 물론이고 화원동산과 함께 도심근교의 대표적인 역사, 문화, 축제, 관광이 어우러진 명소를 가꾸어 나갈 계획이다.◇ 대표 관광지로 부상중인 송해공원봄이면 만개하는 벚꽃길로 유명한 옥연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송해공원은 달성군 명예군민인 방송인 송해 선생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이곳은 둘레길 데크, 백년수중다리, 바람개비 쉼터, 전망대, 금동구, 얼음빙벽 등 다양한 볼거리로 주말이면 버스주차장이 만원사례를 기록할 정도다. 또 삼림욕장조성, 전국노래자랑 무대 조성, 송해 조형물 설치 등이 마련된 달성군의 대표 관광지로 부상중이다.많은 관광객이 자주 찾는 곳은 공원과 함께 조성된 ‘옥연지 송해공원 둘레길’이다. 이곳은 옥연지 일대의 자연을 가까이 살펴볼 수 있는 생태탐방로 조성돼 힐링의 새로운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옥연지를 한 바퀴를 돌다보면 대형 물레방아, 전망 쉼터, 백세정과 백세교 등 많은 볼거리를 보며 운동과 혼자만의 시간도 가질 수 있다.옥연지 위를 태극 모양으로 가로지르는 백세교를 건너면 둘레길이 시작되고 백세교는 이름 그대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다리다. 다리 중앙에는 옥연지의 풍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백세청이 자리하고 있다.정자 2층으로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면 마치 배에 오른 듯한 느낌이 든다. 옥연지를 한 바퀴 돌아오는 둘레길은 총 3.5㎞ 거리로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달성군 관광의 완성은 ‘비슬산 케이블카’달성군은 미래 관광 먹거리의 완성이라는 대전제하에 ‘비슬산 케이블카’ 설치로 마무리하려 한다. 현재 비슬산에는 ‘비슬산 참꽃 문화제’와 ‘대견사 중창’등의 다양한 행사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달성군은 자연친화적 관광수요 증가에 맞춰 자연경관을 보다 수월하게 조망 및 체험할 수 있는 케이블카 설치를 서두르고 있다.새로운 수송수단 확충 및 관광인프라를 구축해 비슬산권 관광문화를 융·복합하기 위함으로 새로운 경관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이를 위해 지난달 비슬산 참꽃 케이블카 설치사업 추진위원회 발대식을 가졌다.내년 5월부터 1년간 총사업비 310억원을 들여 비슬산자연휴양림 주차장∼대견봉 구간(1천831m)에 이번 조성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케이블카가 완공되면 관광객에 의한 생태계 파괴와 자연훼손을 막고, 장애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어 또다른 비슬산을 경험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여기에 비슬산이 품고 있는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의 거석들로 구성돼 특이한 경관을 보여주는 암괴류와 참꽃군락지 등 다양한 관광자원을 눈으로 만끽할 수 있어 관광객들에게 눈의 호사를 제공한다.김문오 달성군수는 달성군이 전통과 현대를 바탕으로 미래를 여는 도시이라고 자부한다.달성군은 1천만 관광 시대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도동서원’을 비롯해 천년고찰 ‘대견사’ 등 우수한 관광문화자원들을 보존, 개발 중에 있다.김 군수는 “현재 달성군은 이런 전통문화 유산의 관광자원화 일환으로 도동서원 일원을 ‘낙동가람수변역사누림길(도동지구)’로 조성 중에 있다”며 “대견사가 있는 대구시 1호 관광지인 비슬산에도 비슬관광지 조성사업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이 사업은 호텔 아젤리아, 치유의 숲, 숲속캠핑장, 출렁다리 등 지역 내 관광지와 연계한 ‘체류형 관광사업’의 형태로 꾸며지고 있다.김 군수는 “이런 전통을 살린 문화유산과 더불어 송해공원 및 사문진 나루터, 화원 동산, 마비정 벽화마을 등 달성의 특색을 한껏 살린 현대적인 관광자원들이 조화를 이루며 달성 관광의 미래를 꽃피울 준비를 마친 상태”라며 “사문진주막촌, 생태탐방로 등으로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는 화원유원지 일대는 지난 2019년 5월 대구시 2호 관광지로 지정돼 관광지 조성사업이 1, 2차로 나눠 추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또 “2018년 ‘올해의 대한민국 명소’로 지정된 송해공원에는 옥연지 생태공원 조성사업, 금굴 조성, 야간 경관시설 조성, 조명분수 설치 등으로 군민이 편안히 쉬어갈 수 있는 힐링 관광을 제공함과 동시에 송해선생 기념관 조성으로 다양한 볼거리까지 제공할 계획”이라며 “이제 민선7기 반환점을 지나는 우리 달성은 지역의 관광브랜드 가치를 세계적 수준으로 높이는 데 성공했다”고 강조했다.김문오 군수는 “달성 관광의 세계화를 한 단계 더 올려줄 ‘비슬산 참꽃 케이블카’설치사업이 지난달 계획수립 4년 만에 닻을 올렸다”면서 “케이블카 설치사업이 2022년 6월 준공이 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대구시 지정 1호 관광지인 비슬산이 품은 멋진 자연을 다 함께 만끽할 수 있을 것이며, 달성을 1천만 관광객의 시대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말했다./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2020-06-18

“심력이 허락하는 날까지 글을 쓰고, 길이 주어지면 그 길을 따라갈 뿐입니다”

‘한문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하면 길게 기른 수염에 하얀색 모시 한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노인이 떠오른다. 더불어 ‘서당’과 ‘훈장’이란 단어가 눈앞으로 스쳐 지나간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어쩔 수 없는 선입견이다.그런데 ‘조금’ 다르다. 아니 ‘많이’ 다르다. 고려대 한문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재욱(49) 강사는 글에서 보이는 감각과 말에서 느껴지는 센스가 재기발랄한 20대 청년 같다. 에너지가 넘치고 자유분방하며, 심지어 모던하다. 그에겐 대중의 선입견을 전복시키는 힘이 있다.바로 그 자유로운 에너지와 모던한 힘으로 김재욱 씨는 현재까지 적지 않은 책을 썼고, 페이스북과 팟캐스트 등을 통해 인터넷 세상을 종횡무진 중이다. 물론 본업이라 할 강의에도 소홀하지 않는다.몇 해 전엔 중국 고전 ‘삼국지’ 속 등장인물과 21세기 한국의 정치인·언론인·작가 등을 매치해 분석한 글을 페이스북에 연재해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이는 ‘삼국지 인물전’ 출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거침없는 태도와 명쾌한 논리, 여기에 위트가 담긴 김재욱 씨의 글과 말은 적지 않은 독자와 네티즌을 매료시킨다.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겸양하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낮출 줄 안다. 인터뷰 내내 이것이 ‘통념을 깨는 한문학자’ 김재욱의 매력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아래는 그가 들려준 삶과 일, 기억과 꿈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고향과 현재 하는 일은.△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열두 살 때 서울로 이사했다. 부모님 고향은 봉화다.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강사고, 강의가 없을 땐 글을 쓰고, 인문학 강연을 다니고 있다.-어릴 때부터 한문에 관심이 있었던 건가.△네 살 때 할아버지께 ‘천자문’을 배운 기억이 있다. 아버지도 ‘명심보감’을 가르쳤다. 그러나 한문에 별 관심이 없었고, 한문학과 진학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대입 시험 점수를 맞추다보니 한문학과를 선택하게 됐다.(웃음)-유년과 청년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는지.△중고교 시절은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한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땐 성적이 바닥이었고,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다만 글을 잘 쓰고 싶어 문예부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대학에선 노래 동아리를 만들었다. 학생자치기구와 학생회에서 일하기도 했다. 성격이 내성적이라 좀 바꿔보고 싶었다. 그런데 성격은 잘 안 바뀌더라.-당신이 생각하는 한문과 고전의 매력은 뭔지.△본격적으로 한문 공부를 시작한 건 스물다섯 살 때다. 한문학과를 나왔으니 최소한 ‘논어’ ‘맹자’는 알아야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개설한 ‘논어’와 ‘맹자’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그게 재미가 있었다. 그때 불이 붙어 이쪽으로 진로를 잡게 됐다. ‘한문’을 고리타분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측면에선 현대의 글과 비교해도 센스 면에서 더 나은 글도 많다. 한문 고전 안에서 삶의 지혜나 교훈을 찾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재미있고 감동을 주는 글이 넘쳐난다.-‘삼국지’ 등장인물과 현대 정치인을 비교·분석하는 글로 SNS에서 주목받았는데.△2013년 말 논문 두 편의 마감 시한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이 스트레스를 풀려고 페이스북에 삼국지 인물과 현대 인물을 매칭해 짧은 인물평을 썼다. 그런데 다음날 깨보니 페이스북이 난리가 났다. 친구 신청이 쇄도하고, 계속 연재해 달라는 댓글이 올라오고…. 그런 이유로 논문을 서둘러 마무리 한 후 ‘삼국지인물전’의 초고를 연재하기 시작했다.-페이스북과 팟캐스트 등을 통해 대중 소통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인다.△사람들이 내 글이나 방송을 좋게 봐준 것이다. 페이스북, 팟캐스트의 공통점 중 하나는 ‘마음에 맞는 사람’을 골라서 만날 수 있다는 거라고 본다. 이는 이전 시대의 매체와 구별이 되는 것이고, 매력과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자기 맘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면서 한계가 아닐까? 내 경우는 일방적으로 내 할 말만 하지만, 모자란 소통은 오프라인을 통해 메우고 있다.-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다. 가장 애착이 가는 건 어떤 건가.△올해 출간 예정인 것까지 합하면 모두 10권이다. 학술서, 인문교양서, 소설 등인데, 2015년 나온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가 애착이 간다. 내 전공이 ‘한국 한시’다. 독자에게 한시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어 좋았고, 한시를 통해 인생, 사회, 역사, 철학과 같은 인문학 영역에 속하는 거의 모든 걸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책에선 사람의 삶과 세상의 일은 단순히 칼로 무 베듯 자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한자와 한문 공부 노하우를 알려준다면.△먼저 ‘한자’와 ‘한문’을 구별해야 할 것 같다. 한자는 말 그대로 ‘낱글자’고, 한국어의 단어에 들어가는 것이다. ‘한문’은 한자로 이루어진 문장을 뜻한다. 공부의 특별한 노하우는 없다. 한자는 많이 보고 쓰고 입으로 말하면서 외우는 게 가장 좋은 공부 방법이다. 조금씩 공부하더라도 꾸준히 하는 게 좋다. 마음먹고 잘 하고 싶다면 하루에 10분이라도 투자해서 읽고 쓰면 의외로 얻는 게 많을 것이다. ‘한문’도 비슷한데, 다만 익히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모든 공부가 그렇겠지만 속성으로 익히기는 어렵다.-유년을 보낸 경북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은.△영주남부초등학교 운동장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 파란 하늘, 밝은 햇볕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 속에 친구들과 걸어가는 내 뒷모습이 있다. 정말 밝기 그지없는데 마음 한 구석엔 슬픈 마음이 일어나고, 조금씩 눈물도 나고 그렇다. 어릴 때 서울로 이사를 왔고, 이후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조금은 어두운 유년시절을 보내서 그런 것 같다. 영주에서 봉화로 넘어가는 영동선 철길에 핀 코스모스도 떠오른다. 고향에 가도 늘 고향이 그립다.-학생들에겐 어떤 스승이 되고 싶은가.△‘스승’은 지식 뿐 아니라 지혜를 전달해 학생들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난 스승이 될 자질은 부족하다. 학생들에게 스승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저 내가 맡고 있는 과목을 학생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강사’가 되려고 한다. 강의 준비 잘 하고, 강의실에서 먼저 학생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는.(웃음)-학자로서, 인간으로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미래의 꿈은.△‘백세 시대’라고 하지만, 그만큼 살기는 어렵다고 본다면 적어도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냈다. 살아온 날이 더 많아졌다. 학자로서든 인간으로서든 개인적인 미래를 생각할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꿈이나 목표를 두고 살지는 않았다. 그때그때 길이 주어지면 그 길을 따라서 살아왔다. 물론 그 길을 갈지 말지 선택은 내가 했지만, 인생을 계획적으로 살진 못했다.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꿈은 없다. 꿈이 있다고 해서 그 삶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다만 심력이 허락하는 날까지 글을 쓰고 싶다. 쓸 말이나 쓰는 데 필요한 지식이 바닥나면 그만둘 각오도 돼 있다. 무언가를 억지로 이루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싶지 않은 게 꿈이라면 꿈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6-17

노르웨이의 깨끗한 공기… 긴 여행의 선명한 기억으로 한 컷

◇ 페리 예약에 실패하다함부르크에 도착하자마자 말뫼로 넘어가는 페리를 예약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페리 예약 사이트에서 카드 결제를 하려니 국내 휴대폰 인증을 받아야 한다. 로밍 신청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인증을 받을 수가 없다. 항구까지 가서 해결하는 수밖에.북유럽에서 다시 러시아로 들어가려면 두어 번 페리를 이용해야 하는데 예약할 수가 없으니 한참 기다리거나 아예 타지 못할 상황도 염두에 둬야한다.아주 작은 문제가 가끔 이렇게 다음 여정의 발목을 잡을 때가 있다. 함부르크에서 2박 3일, 이제 나머지 일정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만약 페리를 이용할 수 없다면 스톡홀름에서 오울루를 거쳐 헬싱키로 가야할 수도 있다.그렇게 육로로 돌아간다면 2000킬로미터, 최소 4일은 더 잡아야 한다. 함부르크 숙소는 겉은 너저분한데 안은 깔끔 그 자체다. 주차도 무료로 할 수 있고 부엌도 있고 큰 마트도 바로 옆 건물이라 편리하다. 거기다 4인실 방을 혼자 쓴다. 암스테르담과 비교하면 여긴 5성급 호텔이었다.오전에 빨래하고 계란 삶고(간식 겸 비상식량) 바느질하고… 오후 늦게 시내 구경이나 할까 나갔다가 휴대폰을 챙겨가지 않아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휴대폰을 숙소 부엌 식탁 위에 올려놓은 줄도 모르고 잃어버렸나 망연자실했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다시 나가려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 삶은 계란 까먹고 그냥 가만히 눈감고 있었다. 눈이 쉬이 시린 증상은 오래 되었는데 햇빛을 보고 달리니 더욱 심해졌다. 선글라스를 껴도 시린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쉴 때 눈을 감고 있는 게 최선이다. 독일의 생필품 물가가 싸다는 이야긴 들었지만 어제 오늘 숙소 옆 알디 마트에서 우유, 계란, 샴푸, 식빵 등을 샀는데 확실히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듯하다. 우유 1리터 0.73유로, 샴푸 0.65유로, 계란 6개 1.25유로, 식빵 0.95유로. 우리보다 훨씬 소득 수준이 높은데도 식료품이나 생필품 물가가 저렴한 이유가 뭘까. 정부가 생필품에 대해서 보조를 하거나 가격 상한선을 정해둔 걸까. 알디 마트가 가격 경쟁력으로 유명하다지만 이 정도면 놀랍다.잠시 동네를 둘러본 것이 다지만 밖은 꾸미지 않으나 안은 꽉 차 있는 느낌이랄까.지금 묵고 있는 숙소도 그렇고. 내실이 튼튼하기 때문에 유럽의 중심 국가가 될 수 있었겠지. 어쨌거나 장을 보면서 독일에선 적게 벌고 가난해도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생각했다.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다. 비가 내리다말다 하더니 날이 어두워지니 빗방울이 더 굵어진다. 출발하는 내일 아침에는 그쳐야 할 텐데.◇ 드디어 북유럽으로… 스웨덴 말뫼에 도착10시쯤 비가 그쳤지만 함부르크를 벗어나자 비구름과 함께 달렸다. 셀란 섬에 들어서서야 겨우 해가 나기 시작했다. 푸트가르덴에서 페리 타는 걸 포기하고 셀란 섬을 거쳐 말뫼로 왔다.페리를 탔으면 200킬로미터 남짓 거리도 단축시키고 비용도 아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예약하지 않고 가기엔 불안해 둘러가는 길을 선택했다. 셀란 섬을 거쳐 말뫼로 가려면 바다 위 다리를 세 곳이나 통과(톨게이트가 있는 다리는 두 곳이었다)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우리 돈으로 6만원(130+233 덴마크 크로네)이 넘는다. 덴마크를 지나가는 비용치고는 꽤나 비싼 셈. 함부르크에서 말뫼까진 약 510킬로미터.페리를 이용해도 오토바이 선적비가 49유로니 이러나 저러나 치를 수밖에 없는 비용이다. 말뫼에선 하루만 묵고 바로 오슬로로.뒷바퀴에서 뭔가 걸리는 듯한 소리가 나서 오슬로에 가서 점검해야 할 듯. 아무리 살펴봐도 걸릴만한 것이 없는데 툭툭거리는 소리가 난다. 체인 유격은 조절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휠베어링 문제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뒷바퀴 쪽에서 계속 소리가 나서 말뫼를 벗어나자마자 휴게소에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혹시 풀린 나사가 없나 일일이 조이고 체인 장력도 다시 조절했다. 매뉴얼에 나오는 값으로 정확하게 맞출 수는 없으니 눈대중 손대중으로 조절하는데 하다 보니 이것도 감이 잡힌다. 소음의 원인은 머플러 연결 나사였던 모양이다. 심하게 풀린 곳은 거기 밖에 없었고 작업을 하고난 이후에 소음은 사라졌다.혹시나 부품을 교체해야 하는 문제였다면 난감했을 텐데 다행. 소음이 나면 어떻게든 해결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달릴 수가 없다. 소음이 나면 문제가 있다는 신호이고 그대로 방치하면 작은 문제가 큰 문제가 될 가능성 높다.◇ 오슬로에서 P선생님을 만나다말뫼에서 오슬로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바다, 강, 호수, 들, 숲이 탁 트인 도로 양 옆으로 가는 내내 이어졌다.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니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캠핑카는 물론이고 트레일러나 지붕 위에 자전거, 카약, 캠핑 장비를 이고지고 가는 차들이 많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까지 갖추었으니 이곳 사람들이 솔직히 부럽다.그중 가장 부러운 것은 공기였다. 들숨에 폐가 깨끗한 공기로 부풀어 오를 때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상쾌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도 이 기분은 잊지 못할 듯하다.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은 날은 더더욱 그렇겠지. 깨끗한 공기와 물을 마시고 사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이니….오슬로에서 P선생님을 뵈었다. 말뫼에서 하루만 묵고 급하게 오슬로에 온 이유도 선생님을 뵙기 위해서다. 선생님은 나와 같은 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스쿠터를 타고 출발했다.함께 출발했던 6명중 세 분은 이미 한국으로 돌아갔다. 우리보다 한 주 앞서 출발했던 팀들도 모두 한국으로 복귀했다. 선생님의 스쿠터도 문제가 생겨 결국 이곳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려보낸 상태. 렌터카를 빌려 여행을 계속하실 생각이었으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선생님의 마지막 목적지는 아이슬란드. 처음 계획은 스쿠터를 가지고 배로 아이슬란드에 가는 것이었다.이렇게 다시 오긴 힘들 테니 렌터카를 빌려서라도 돌아보고 가시겠다고. 오슬로까지 온 이유는 선생님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오슬로에 있는 동안 렌트카 빌리는 걸 도와드리고 잠시 같은 숙소에서 지내기로 했다.긴 여행을 떠나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런저런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오토바이 여행은 여러 장점도 있지만 오토바이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수습하기 힘들고 몸도 마음도 허물어지기 쉬운 듯.생각지 못했던 비용이 드는 것도 문제. 집으로 돌아가신 분들이나 P선생님, 나까지도 모두 비슷한 문제를 겪었고 나는 운 좋게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선생님과 맥주잔을 기울이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서로 이야기했다. 두 달 넘게 달려왔는데 선명하게 기억 남는 건 몇 장면뿐이다.복지 정책이 잘 되어 있는 선진국이라 해도 그늘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현재 묵고 있는 앤커 아파트는 오슬로에서 숙박비가 가장 저렴한 곳이고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거대한 합숙소 같은 곳인데 나 같은 여행자보다 오슬로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더 많은 듯하다.어느 국가나 사회든 음지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고 그곳을 이주 노동자나 더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채운다. 내가 묵는 방엔 13개의 2층 침대가 있고 대부분 새벽이나 밤에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이 묵는다.한 층에 이런 방이 몇 개인지 모르겠다. 커다란 빌딩 전체가 이런 방들이다.(물론 비싼 방도 있다.)거의 기업형 숙박업소. 일자리라도 있다면 이런 곳에서 묵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잠잘 곳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곳에 묵고 있는 걸까.

2020-06-16

소상공인 살리고 공공근로 늘리고

코로나19 여파로 침체된 지역 경기 회복을 위해 김천시가 특별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김천시는 그동안 소상공인 특례보증사업, 소상공인 피해점포 지원사업, 카드수수료 및 전기요금 지원사업 등 소상공인 지원사업을 선제적으로 추진했으며, 지역고용대응 특별지원사업, 소상공인 일자리창출지원 사업 등 일자리 분야에도 과감한 지원금 지급으로 경기 회복과 내수 진작에 모든 행정력을 집중해 왔다.하지만, 지역 경기 회복을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김충섭 시장은 김천 지역 특성에 맞는 단계적 로드맵을 만들었다. 바로 ‘생!생!생!(상생, 소생, 회생) 프로젝트’라는 뉴플랜(New-plan)이다. 김천시가 특단의 조치로 내어놓은 뉴플랜이 어떤 성과를 낼지 알아봤다.□ 뉴플랜 ‘생!생!생! 프로젝트’‘생!생!생!(상생, 소생, 회생’) 프로젝트는 각종 재난지원금과 김천사랑상품권(카드) 등이 지역에서 고르게 사용될 수 있도록 유도해, 시민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소상공인의 심폐소생을 이끌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김천 경제의 회생을 추구하기 위해 마련됐다.시는 이를 위해 프로젝트를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계획을 마련해 추진한다.우선, ‘1기관·단체 ⇔ 1시장·상점가’자매결연을 추진한다. 주요 기관을 대상으로 추진됐던 시장·상점가 자매결연을 지역 사회단체와 기업체로 확대해 코로나19 여파로 침체된 전통시장과 상점가에 활력을 불어넣을 계획이다.또 기관 단체별로 자매결연 체결 이후 ‘전통시장 가는 날’을 지정·운영하고, 재난지원금 및 김천사랑카드 등을 활용한 물품 구매, 회식, 재능 기부(상인교육, 식자재 납품 협약) 등의 활동을 적극 추진할 예정이다.지난 6월 10일 기준으로 4개 시장·상가(평화시장, 황금시장, 중앙시장, 부곡맛고을상가)와 13개 기관이 자매결연을 맺었다. 시는 각 부서별 관리 기관, 사회단체, 기업체를 대상으로 협조 공문을 발송하는 등 자매결연을 적극 유도하고 합동 장보기 행사 등을 진행할 방침이다.민간 주도의 자발적 가격 할인 및 소비자 대상 인센티브 제공도 유도할 계획이다. 지역 소상공인(음식업, 숙박업, 이미용업, 서비스업 등)들이 코로나19라는 상징성에 맞춘 19% 가격할인 이벤트 등 자발적으로 가격을 할인하거나 과일 한 박스 구입 시 한 박스 무료 증정(1+1마케팅), 서비스시설(생활체육시설, 이미용업 등) 몇 회 이용 시 1회 무료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해 재난 지원금의 고른 소비를 유도할 계획이다.이를 위해 전통시장 및 상점가 상인회, 관내 외식업지부, 이미용사협회 등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고, 소상공인 단체별로 일괄 가격할인 및 인센티브 제공 시 현수막 게첨, 언론매체 홍보를 지원할 예정이다.마지막으로 착한 가격 소상공인 SNS 홍보 공모전을 실시한다. 공모전은 ‘이겨내자 코로나! 살려내자 김천경제!’라는 슬로건으로, 시민들의 구매 욕구를 촉진시키기 위해 마련됐다.공모주제는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고 김천경제 회생을 위해 자발적으로 가격을 할인하거나 소비자(시민)에게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한 소상공인 점포와 관련된 모든 체험 내용이다.SNS(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카카오스트리)를 통해 공모주제와 관련된 글을 대상으로 심사하며, 시상금은 응모자 개인에 대해 최대 100만원(대상)이 지급되며, 시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착한 가격 소상공인 점포에도 최대 100만원(대상)이 지급된다. 오는 8월 31일까지 김천 시민 누구나 신청 가능하다.□ 지역 소상공인 살리기 위한 긴급 수혈시는 실물 경기와 직접적으로 연관 있는 영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살리기를 긴급 경기 부양책의 제1의 과제로 정하고, 과감한 예산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지원시책을 추진한다.먼저 시는 소상공인 특례보증사업을 지난 4월 2일 대폭 확대 시행하고, 소상공인 1천600명에게 최종 500억원을 특례보증했다. 이는 전국 최고 수준이다. 시는 사업 기준을 변경해 관련 조례를 개정하고, 업체당 5천만원 한도 내, 5년 동안 3%의 이자차액을 보전할 수 있도록 했다.또 사업 신청이 일시적으로 폭증해 확대 시행한지 3일만에 접수가 마감되고, 각 기관 대출정책으로 보증심사가 지연되는 등 난관에 부딪히자 적극적인 행정지원으로 도내에서 가장 빠르게 특례보증사업을 종료하기도 했다.시는 직접적인 피해점포에 대한 재개장 지원을 위해 소상공인 330여개소에 대한 최종심사를 거쳐 6월 중 지원금을 지급할 계획이다.코로나 확진자가 다녀간 업소는 최대 300만원, 사회적 거리두기로 전 기간 참여한 권고 휴업점포는 최대 100만원까지 지원한다. 재개장 지원 대상과 관련 없는 소상공인에 대해서도 사업체당 50만원을 정액 지급할 예정이다.김천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소상공인에게 전기요금과 카드수수료도 지원한다.전기요금 사업은 자체 전액 시비로 편성해 시행하고, 작년 연매출 3억원 이하 소상공인에 대해 올해 2월부터 4월까지 납부한 전기요금 전액을 40만원 범위내 지원했다.카드수수료 사업은 작년 연매출 1억5천만원 이하 소상공인에 대해 작년 카드매출액의 0.8%에 해당하는 금액을 최대 50만원까지 지원한다.김천시는 지역 자금 역외유출 방지와 지역경기 활성화를 위해 지역 화폐인 김천사랑상품권(카드)의 연간 발행액을 500억원까지 대폭 확대했다.개인구매자는 최대 70만원까지 구입 가능하며 사용금액의 10%를 인센티브로 제공한다. 또 당초 7월 출시 예정이었던 김천사랑카드도 4월말 출시해 젊은층의 소비를 유도하고 있다.□ 근로자와 실업자에게 실질적인 도움 주는 일자리 사업코로나19로 위축된 지역 고용시장을 살리기 위해 공공분야 일자리를 긴급 확충하고, 이번 사태와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관련업종의 사업주와 근로자에게 지원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추진한다.시는 우선적으로 고용안정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업종 근로자를 위해 지역고용대응 특별지원사업을 2차에 걸쳐 시행했다.지역고용대응 특별지원사업은 100인 미만 사업장에서 5일 이상 무급으로 휴직한 근로자와 월소득이 25% 이상 감소한 특수형태근로자·프리랜서 등에게 1인당 월 최대 50만원까지 지원하는 사업으로, 지난 1차 신청자 1천328명에게 약 7억원을 지급했고, 2차 신청자는 심사를 거쳐 6월 중순 지급할 예정이다.전국 최초로 식품·공중위생업소에 대한 일자리창출 지원사업도 진행한다.이 사업은 김천시가 기획한 소상공인을 위한 일자리 창출 지원사업으로, 전액 시비를 확보해 소상공인에게는 인건비를 지원하고 구직자에게는 취업을 알선한다.시는 참여 업소에 구인·구직자 매칭이 이뤄지면 사업주에게 3개월간 4시간의 인건비와 4대 보험료 사업장 부담분을 지원한다.시는 코로나19 여파로 일자리를 잃은 일용직,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등 50여명을 대상으로 지난 4월부터 6월말까지 공공시설방역관리 및 복지행정지원 등 특별지원 단기일자리사업을 시행한다.만 18세 이상 근로능력자를 대상으로 코로나19 특별공공근로사업도 7월부터 시행할 계획이다.청년 구직자, 폐업 소상공인, 취약계층(가구소득·재산기준 부합)이 우선 선발대상이며, 11개 읍면동 사업장에서 공공서비스 보조 및 환경정화 업무로 50여명을 채용해 10월까지 4개월간 일자리를 제공한다.김충섭 시장은 “김천경제의 회생은 시민 모두의 상생을 기반으로 한 소상공인의 소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며 “각종 소상공인 지원 사업 및 일자리창출 지원 사업 등 이미 추진하고 있는 역점 시책사업과 더불어 이번 ‘생!생!생!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추진이 김천경제 회복에 마중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나채복기자 ncb7737@kbmaeil.com

2020-06-16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청계 김진 6父子가 한 곳에 모셔진 사빈서원

이 땅에 유학이 들어온 삼국시대부터 훌륭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꾸는 청정한 마음으로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학문을 닦을 때까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타락의 구렁으로 빠진다. 급기야 향촌과 관위에 군림하면서 온갖 피해를 주어 국가의 기틀까지 흔드는 지경에 이른다.#. 서원의 발생과 비약적인 발전삼국시대부터 도입된 유학은 시험(과거)으로 관리를 선발하기에는 공평하면서 효율적이었다. 고구려 말기에 도교가 수용되어 세력을 떨쳤지만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였다. 조선은 고려 말에 타락한 불교를 대신하여 유교가 국교가 된다. 고려의 충신들은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세종을 거쳐 성종 때부터 유학으로 다져진 신진사대부(사림세력)들이 관리로 등용되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다. 그러나 잠시 꽃을 피우다가 연산군 때 사화(사림의 화·무오, 갑자, 기묘, 을사)로 인한 피의 숙청을 당한 사림세력들은 낙향하여 향촌의 자녀들을 가르친다. 서원은 정치적인 의심도 받지 않고 꾸준히 학문을 연마해 나갔다. 또 관학(공립)인 향교가 공부는 하지 않고 술판 벌이는 타락의 수렁에 허우적거려 사립 학교격인 서원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향교가 도심에서 반경 5리(2km) 안에 두었다면 서원은 도심의 소음을 떠난 자연 속이 입지적인 조건이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도 숙수사 절터에다 지었듯이 이제 불교(절)에서 유학(서원)으로 공간의 이동이 되었다.서원은 중국의 당나라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고려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선비들이 학문을 강론하고 석학이나 충절로 죽은 사람을 제사지내는 즉 강학(유학)공간과 선현봉사 두 기능이 합쳐질 때 서원이라 하고 유학의 엘리트 전사를 키우는 곳이다.공자의 가르침(사상)이 유학이라면 성리학은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로 인간과 우주에 대한 철학이다. 공자의 유학에다 재해석한 것이 성리학이고 주자학도 성리학의 일부인데 송나라 주희가 사고체계를 세웠다 하여 주자학이라 한다. 성리학은 주희의 주자학, 정호, 정이의 정주학, 왕양명의 양명학, 육구연의 심학, 신유학, 도학, 이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 정주학만 주류를 이루어 진보적인 양명학이나 나머지는 이단으로 배척하여 다양성이 결핍되어 학문이 경직되었다.고려 말 순흥(영주) 출신 안향이 성리학(주자학)을 처음 도입한다. 1543년(중종38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백운동사원이 처음 세워진다. 그러나 이때는 선현봉사의 사묘(祀廟) 기능이었던 것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정착, 보급하는 일등공신이다. 충신이나 명현을 제사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세운 사설기관인 서원을 공인화 하고 존재를 알리기 위해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여 관철시킨다. 사액서원이 되면 권위는 물론이거니와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서적, 노비 등을 내렸다. 퇴계의 고향 예안의 역동서원을 설립주도하고 10여 곳 서원에 대해서는 건립에 참여하거나 서원기(書院記)를 지어 보내는 등 보급에 주력하였다. 전국 도처에 서원이 세워지면서 명종연간에 18개소를 시작으로 사림세력이 주도권을 쥐게 된 선조 때 본격적으로 발전하여 60여개가 생기고 22개가 사액서원이 된다.이처럼 붕당정치와 사림들의 서원보급운동으로 전국 도처에 세워지면서 숙종 때는 서원(167개 중 사액 105개)과 사우(174개 중 사액 200개)를 합친 사액서원이 305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상숭배가 극에 달해 별 내세울 학문적 업적, 행적이 없는 인물이라도 자손들과 제자들이 돈 있고 권력에 줄이 있으면 서원을 세웠다.급기야 전국에 천(909개)여개가 생긴다. 이중 경상도가 유독 많이 생기는데 전국서원 417개 중 173개 사우 492개 중 151개 이중 200개가 사액 받았으니 서원천국이었다.#. 공자가 살아 나와도 용서하지 않겠다세상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물도 고이면 썩는 것과 같이 서원의 남발은 국가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서원폐단의 첫 상소는 1644년(인조 22년) 영남 감사 임담이었는데 숙종 초까지는 서원옹호론이 우세하여 오히려 167개소가 더 생긴다. 서원통제가 적극성을 띤 것은 1703년(숙종 29년)에 전라감사 민진원이 조정에 알리지 않고 서원을 세우는 경우 지방관을 논죄하는 상소를 왕(숙종)이 받아들여 강제성을 띈다. 1713년에는 예조판서 민진후의 요청으로 1714년 이후부터는 첩설(疊設)을 엄금하고 사액을 내리지 않을 것을 결정했다. 1717년 숙종이 1703년(숙종 29년) 8도의 관찰사에게 1703년 금령 후 창건한 서원을 조사하게 하여 1719년(숙종45년) 왕이 직접 하나하나 존폐를 결정하였고, 특히 경상도 서원에 훼철을 단행하다가 숙종이 죽어 중단되었다.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 경종 때 대사성 이진유의 주장으로 1703년 이후의 첩설서원은 그 편액을 철거하였다. 그러나 새로 집권한 노론은 소론의 노론 서원에 대한 보복이었다 하여 영조즉위 후 편액을 다시 걸었다. 이후 영조는 서원이 분쟁을 유발하고 정국을 혼란시키는 요인으로 판단하고 탕평의 일환으로 1714년 이후에 설립된 사원, 사우, 영당 등의 모든 제향기구 192개(서원 19개, 사우 173개)를 훼철시킨다. 정부지원이 끊기자 서원들은 악랄한 방법으로 재원을 마련한다. 전국의 서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우암 송시열을 모신 청주의 화양서원과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을 모신 과천의 사충서원이었다. 서원에 제사 경비를 마음대로 정해놓고 세금 고시서보다 더 강력한 묵패를 관아나 부호들에게 보낸다. 묵패에 찍힌 대로 안내면 고을 원님은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고, 부호들에게는‘부모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았다.’ ‘자식을 잘 가르치지 않았다.’‘양반에게 대 들었다’식으로 잡아와서 서원에 무릎 꿇게 하여 사형(私刑을 가하고 관가(서원에 감옥이 없어)에 가두게 했다. 이 묵패는 전국 어디에나 통했다. 도깨비 방망이였고, 체포영장이었다.화양서원에는 평소에도 수 백 명씩 왕래하고 제삿날에는 수만 명의 유생들이 몰려와 숙식을 화양서원아래 복주촌(福酒村)에서 한다. 이 복주촌은 겉으로는 상민이 운영하는 것 같지만 서원 직영이라 여기에 종사하는 상민들은 서원의 원노(院奴)에게 주어지는 군역, 부역을 면제받았다. 마침내 고종을 등극시킨 첫해(1864년) 대원군(1820~1898)은 극에 달한 서원의 횡포를 “사람이 옛 현인을 높이고 사모하여 서원과 향사를 세운 것은 본래 그 학문을 익히고 그 정신을 밝히려는 것이었도다. 조정에서도 이에 따라 액호를 내리고 토지와 일꾼을 준 것은 그 뜻이 훌륭했고 그 은혜 두터웠도다. 그런데 어찌하여 말류(末流)의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는가? 글 읽는 소리가 쥐죽은 듯 들리지 않고, 술이나 마시고 다투면서 이기려는 일이나 벌이며,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반이 넘게 정한 원노에 끼어들게 하고, 평민을 학대하는 자들이 공공연히 사람들을 잡아들이게 하면서 이익만을 찾아 나선다. 서로 본받아 사사로이 서원을 이곳저곳에 세워 곳곳에 서원이 바라보일 정도이며, 공갈 협박을 일삼고 다투기를 그치지 않는다. 서원, 향사를 세운 본뜻이 어찌 이러했겠는가? 옛날 현인이 이를 알았다면 반드시 즐거이 제사를 흠향하지 않고 수치로 여길 것이다.”이런 분부를 내리는데 썩어빠진 유생들은 대원군의 서원정책에 반기를 들고 횡포를 일삼던 유생들이 반성은 커녕 기승을 부리자 전국에 횡포가 적은 47개만 남기고 화양서원, 사충서원 포함하여 모조리 헐어버렸다. 철원매주(撤院埋主) 즉 신주는 땅에 묻어버렸다.급기야 전국의 유생 수 만 명이 경복궁 앞에서 상투적인 문투로 상소문을 들고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버티자 대원군은 코웃음을 치면서 “공자가 살아 와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통쾌한 말을 남긴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전국 곳곳에 서원을 다시 세운다.#. 사빈서원과 임천서원안동 내앞(천전)마을에 들르고, 근처의 사빈서원으로 갔다. 기능 잃은 서원의 빈 건물만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의성김씨 중흥조 청계 김진과 그의 다섯 아들(약봉, 귀봉, 운암, 학봉, 남악)의 덕행을 추모하고 후학양성을 위하여 1710년(숙종36년) 후손들과 사림이 건립했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철거했다. 1882년(고종 19) 영남 사림의 공론에 따라 강당과 사우만 다시 세운다. 임하댐 수몰로 1987년 임하리로 옮겼다가 2011년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긴다. 혼자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임천서원으로 갔다.임청각을 지나고, 안동여고, 안동MBC를 지나 안동 시외터미널에서 동쪽 호암마을 산중턱의 임천서원은 방치되어 귀신이 나올 것 같았다. 임천서원은 학봉 김성일의 도와 학행을 기리기 위해 1607년(선조 40) 임하현에 세웠다가 1618년(광해군 10)에 사액 받았다. 1847년(헌종 13) 서후면 엄곡촌으로 옮겼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훼철되었다가 1908년(순종 2)과 180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이 서원도 학봉종택 근처로 또 옮긴단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6-16

구미시, 올 상반기 공모사업 5천855억 국비 확보 ‘성과’

전국의 모든 지자체가 국비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가운데 구미시가 국비 확보에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어 화제다.구미시는 올해 상반기에만 공모사업에서 역대 최대 규모인 5천855억원의 국도비를 확보했다. 코로나19로 전세계 경제가 불황의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이룬 쾌거로 지역 경기에는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다. 특히, 정부가 국비지원을 선택적으로 지역에 지원하던 방식에서 최근 각 지역이 공모사업을 통해 국비를 확보해야 하는 방식으로 변경하면서 각 지자체는 지역에 맞는 사업 발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구미시가 국비를 많이 확보했다는 것은 그동안 지역에 맞는 사업 발굴에 많은 노력을 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구미시가 민선 7기에 들어서면서 국비 확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으며,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 또 이 성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 알아봤다.□ 장세용 시장 취임 후 공모사업 1조848억원 확보장세용 구미시장은 취임 후 지역발전 동력 확보를 위해서는 시 재정 이외에 외부재원 확보가 매우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공모사업을 통한 국도비 확보 추진을 강도 높게 추진했다.장 시장은 정부 정책기조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조직개편을 통해 미래전략담당관실을 신설해, 매년 정부 예산서와 부처 업무계획을 중심으로 공모사업 현황을 분석하고 상시 모니터링을 실시하는 등 정부 공모 동향파악에 힘써왔다.또 공모사업 유치전략 업무 메뉴얼 제작, 관리카드 작성 등 매월 공모사업 추진상황을 점검하는 등 부서별 협업체계를 확립했다. 매년 초 공모사업 활성화 계획을 수립하고 각 부서 공모 담당자 지정, 발굴보고회 개최, 역량강화 직원 워크숍 실시, 우수부서 인센티브 지급 등 공모 활성화 시책을 다양하게 추진하는 등 시의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이로 인해 공모사업 총괄관리 체계 2년 만에 역대 최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구미시 민선7기 2년 간 공모사업 성과를 살펴보면, 총 123건 선정에 1조848억원의 국도비를 확보했다. 총 사업비의 국도비가 53%, 기타 재원 27.4%, 시비 19.6%이다.년도별 성과를 보면, 2020년 상반기 38건 5천855억9천700만원, 2019년 69건 4천608억6천500만원, 2018년 7월 이후 16건 383억5천200만원으로 매년 국도비 확보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뤘다.코로나19로 힘든 상황에서도 올해 5개월 만에 선정된 공모사업이 38건에 총 사업비 1조1천396억원이라는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다.□ 노후산단 개선 이어 미래형 첨단산업단지로 도약구미시가 민선 7기 동안 산업 경제분야에 선정된 공모사업을 살펴보면, 2018년에는 △도시재생 뉴딜사업 △구미시 지능형 교통체계(ITS) 구축사업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 지원 사업이, 2019년에는 △스마트선도 산업단지 선정 △도시재생혁신지구 국가시범지구지정 △5G시험망 테스트베드 구축사업이, 2020년에는 △경상북도 산단 대개조 사업 △고용안정 선제대응 패키지 지원 △5G기반 VR·AR 디바이스 개발지원센터 △2021년 스마트 특성화기반구축 △홀로그램 핵심기술개발 등 굵직한 사업이 선정됐다.산단 대개조 사업은 제조업 혁신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경제 활성화를 이끌 것으로 예상된다.산단 대개조 사업은 구미국가산단을 거점산단으로 김천·칠곡·성주 산단을 연계해 ‘전자산업의 부활 및 미래차 신산업 육성을 위한 경북 특화형 ICT 융합 소재부품 클러스터 구축’사업으로, 2021년부터 2023년까지 3년간 35개 사업에 9천900억원 규모의 중앙부처 예산이 집중 투자된다.구미시는 전자·전기, 기계업종 허브인 구미스마트산단을 거점으로 ‘김천’과는 초소형 전기차 공동생산·실증, ‘칠곡’과는 영남권 스마트 물류거점 구축과 자동차 전후방산업, ‘성주’와는 소재부품 뿌리산업 스마트화 등을 연계해 지역중심 신성장 동력 확보해 나갈 방침이다.이 사업을 통해 창출되는 사회·경제적 파급효과는 생산유발효과 1조9천833억원, 부가가치 유발효과 6천323억원, 고용 유발효과 5천962명으로 기대되고 있다.여기에 지난해 9월 산업통상자원부 주관의 스마트 선도 산업단지 선정은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신산업을 창출하는 것은 물론 거액의 사업비 투자로 침체된 구미경제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스마트선도 산단 선정으로 스마트 제조혁신단지 조성(2천801억원), 청년 친화형 행복산단 구현(1천42억원), 미래 신산업 선도산단 구축(618억원) 등 국비 2천185억원과 지방비 1천486억원, 민자 790억원 등 총 4천461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구미시와 경북도는 스마트산단 선도 프로젝트 계획에 따라 개방형 양방향 스마트 데이터 네트워크 구축(524억원)과 스마트공장 안정적 성장을 위한 지원 인프라 고도화(1천174억원), 산단 스마트화를 리딩할 미래 융합형 인재공급 체계 고도화(75억원), 산단 내 중소기업 역량 강화를 통한 글로벌 전문기업 육성(1천26억원) 등을 추진하게 된다.또 무재난·무재해·무범죄 안심 산단 조성(326억원), 공유경제 도입을 통한 교통 편리성·효율성 극대화(596억원), 청년 친화형 산단 구축(120억원) 사업도 함께 진행된다.□ 문화·환경·농업 등 공모사업으로 정주여건 개선구미시는 산업경제 뿐만 아니라 도시환경, 문화체육, 안전, 농촌·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모사업을 진행해 지역 주요 현안 해결과 정주여건을 크게 개선하고 있다.도시환경 분야에서는 △스마트시티 통합플랫폼 기반구축 △지능형 초연결망 선도 △자전거도시 브랜드화 지원 △미세먼지 차단숲 조성 △도로재 비산먼지 저감사업 △구미시 지능형 교통체계(ITS) 구축사업 등이 선정돼 깨끗하고 안전한 구미 여건을 만들고 있다.문화체육 분야에서는 △지역거점형 콘텐츠기업 육성센터 조성 △문화적 도시재생 △지역평생교육 활성화 지원 △도봉국민체육센터건립 △레저스포츠 페스티벌 개최 지원사업 등이 선정됐다.농촌·농업 분야는 △지역 푸드플랜 패키지지원 △도시농업공간조성 사업 △도시숲 조성사업을 통해 시민의 삶의 질 향상과 정주여건 개선으로 ‘행복한 구미 변화하는 구미’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경제 활성화 목적을 갖고 구미 재도약 꼭 이루겠다”장세용 구미시장“목적성 있는 국비 확보로 구미를 재도약 시키겠다.”취임 2년을 맞은 장세용 구미시장의 당찬 포부이다.취임 초기부터 국비확보를 총력을 기울여 온 장 시장은 “대내외적인 경기 불황으로 구미 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힘든 시기를 맞고 있고, 이러한 상황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판단했다”면서 “구미는 다른 지역과 달리 교부세가 거의 없는 지역이기에 경제가 어려워지면 구미시 재정도 함께 어려워지기 때문에 공모사업을 통한 국비확보로 구미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어여만 했다”고 말했다.구미시의 재정자립도는 장 시장 취임 초 43%에서 최근 34∼35%선까지 떨어졌다.장 시장은 “그동안 구미시가 추진해 온 뉴딜사업을 위해 공모사업으로 확보한 국비는 시의 부족한 재정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는 시도비와 매칭을 하지 않는 목적성 국비사업을 적극 발굴하고 유치하는데 총력을 다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그는 또 “임기 하반기에 들어서는 만큼 새로운 사업보다 지난 2년간 추진했던 사업들을 본격적으로 실행해 시민들에게 보여질 수 있도록 가시화시켜 나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이는 구미시가 추진하는 맞춤형 뉴딜사업을 가시화 시켜 경제는 물론 생태, 환경, 문화, 관광에 중점을 두겠다는 뜻이다.장 시장은 여기에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기 위한 정책을 펼쳐 나갈 방침이다.장 시장은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사회가 확장되면 디지털 사회가 더욱 심화될 것이고, 구미는 국내 최대 디지털 기기 생산단지를 보유하고 있다”면서 “구미는 변화에 대비해 스마트팩토리를 통한 생산의 변화를 이미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된 사회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이어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코오롱, 도레이, 레몬 등과 같은 기업들이 첨단 섬유소재로 마스크를 만들어 내는 저력을 보여줬다”면서 “구미는 첨단 IT산업 뿐만 아니라 그와 연관된 섬유, 화학 등의 업종이 다양하게 분포돼 있어 위기 극복 능력이 뛰어나다”고 설명했다.그러면서 “신성장 사업들을 중점적으로 추진하면서도 전통적인 고용과 임금제를 운영하는 토목과 건축사업도 일정하게 유지해 나가겠다”면서 “도시재생이나 재개발, 재건축을 통해 시민들의 주거에 대한 향상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0-06-15

산업화 이후 탐욕으로 오염된 농촌 ‘바보’ 황만근은 무얼 위해 살아가나

1994년 짧은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성석제는 근대소설의 서사적 틀을 갱신해 온 작가로 이름이 높다. 구술적 특성의 복원과 동양 서사 전통의 활용을 통해 그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해왔던 것이다. 또한 그는 ‘소설은 새로운 성격창조’라는 소설원론의 가장 충실한 실천자이기도 하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이전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되기 힘든 술꾼, 노름꾼, 깡패, 바보, 건달, 탐서가 등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광기와 자기 세계에만 집중하는 디오니소스적인 방외인(方外人)들로서, 소설적 재미와 감동의 근원이 되고는 하였다. 성석제가 거둔 이러한 문학적 성과는 ‘은척’으로 대표되는 경북 상주를 적극적으로 소설 속에 끌어들인 것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성석제는 1960년 7월 5일 경북 상주군 상주읍 개운리 대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5년 3월 26일 서울시 영등포구 가리봉동으로 이주할 때까지, 만 14년 8개월 20일 정도를 상주에서 살았다. 모든 이에게 유년 시절을 보낸 공간이 그러하듯이, 성석제에게도 상주는 매우 각별한 곳이다. 그는 “상주를 거치지 않고는 문학적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았다. 상주는 내 소설에 있어서 삼손의 머리카락이거나, 우렁각시가 살고 있는 항아리였다.”(영남일보, 2010.5.24)고 고백할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 중에서 절반 이상이 상주를 직접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성석제에게 상주가 얼마나 각별한 공간인지를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다.‘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0) 역시 상주와의 인연이 깊은 작품이다. 성석제는 1995년 여름에 첫 번째 장편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상주에 있는 오태저수지 못가 마을인 오대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시절에 있었던, 느꼈던, 보고 들었던 일들이 소설로 여러 편 태어났다”(영남일보, 2010.5.31)며, 구체적인 작품으로 ‘도망자 이치도’, ‘당부 말씀’과 더불어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들고 있다. 또한 성석제는 한때 상주 내지는 경북 북부의 방언을 애써 소설에 담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으며, 그러한 시도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작가의 고백에 따른다면,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는 직접적으로 경북 상주라는 지명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어떤 작품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은 상주의 지역성과 언어가 직접적으로 배어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인물의 일대기를 시간 순으로 기록하는 전통적 서사양식 전(傳)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황만근을 신대 1리의 사람들은 “바보”라 여긴다. 이 마을에서 황만근이 차지하는 위상은 노래를 부르는 마을 사람들의 대체 경험과 정서가 녹아 있는 황만근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노래에서 황만근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단어는 “백분(번), 찝원(십원), 여끈(열 근), 팔푼, 두 바리(마리)”인데, 여기에는 황만근의 바보같은 특징이 압축되어 있다. ‘백번’은 황만근이 땅바닥에 넘어진 횟수이자 황만근이 셀 수 있는 가장 큰 단위이고, ‘찝원’은 혀가 짧은 황만근이 십원을 발음한 소리이며, ‘여끈’은 동네 사람들이 아들의 몸무게를 물어볼 때 대답한 말이고, ‘팔푼’은 황만근이 여덟 달 만에 태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이며, ‘두 바리’는 황만근이 우체부에게 가족의 숫자를 말할 때 사용한 단어이다. 마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한 실수나 바보짓도 늘 황만근에게 가탁해서 그를 점점 더 바보”로 만들어갔다. 거기다 마을 사람들은 “반근아, 너는 우리 동네 아이고 어데 인정없는 대처 읍내 같은 데 갔으마 진작에 굶어죽어도 죽었다. 암만 바보라도 고마와할 줄 알아야 사람이다.”라는 공치사를 늘어놓고는 하였던 것이다.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업신여김과 달리, 신대 1리는 황만근의 덕으로 유지되는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만근이 마을에서 사라진 지 하루만에 마을 사람들은 애타게 그를 찾을 정도로, 황만근의 역할은 크다. 염습, 산역, 똥구덩이 파는 일, 벽돌을 찍는 일, 풀깎기, 도랑 청소, 공동우물 청소처럼 “동네의 일, 남의 일, 궂은 일”은 황만근이 도맡아서 처리해 왔던 것이다. 실제로 황만근은 마을 어른 역할까지 수행했다고 볼 수도 있다. 황만근의 처사는 “공평무사”하여, 마을 사람들이 시비를 물으러 가면 “언제나 공평무사한 자연의 이법에 대해 깨우치게 되고 분쟁은 종식”되었던 것이다.동네 사람들에 의해 “바보”로 불리는 황만근은 천하게 취급받는 인간 모멸의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것에 절망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가치를 추구하여 나름의 완성에 이른 것이다. 어쩌면 황만근은 기존의 질서 속에서 배제되고 외면 받았기에,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이러한 황만근의 모습은 ‘장자(莊子)’의 ‘덕충부(德充符)’에 나오는 지인(至人)들을 연상시킨다. 장자는 ‘덕충부’에서 왕태(王99D8), 신도가(申徒嘉), 숙산무지(叔山無趾), 애태타(哀99D85B83)처럼 장애가 있는 이들을 그린다. 이들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유사한데, 대표적으로 왕태를 살펴보면 그는 발이 잘렸지만 말로 하지 않는 교육을 행하며, 은연중에 사람들을 감화시킨다. 그렇기에 공자까지도 “천하를 모두 이끌어 그를 따를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완성된 경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외양의 모자람에 자포자기하지 않으며, 육체 이상의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한 결과 숭고한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을 끌어당기는 정신적 역량을 갖추게 된 것이다.(‘장자’, 德充符편, 이석호 역, 삼성출판사, 1976, 225-235면) 장자는 장애가 있지만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인물들을 통해 “덕이 훌륭하면 육체적 불구는 잊혀진다.”(德有所長而形有所忘)(위의 책, 233면)는 것을 보여주고 한 것이다. 황만근 역시 ‘덕충부’에 등장하는 지인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다.그러나 마을 대부분의 집이 6·25 직후에 지어진 신대 1리는 더 이상 황만근과 같은 지인(至人)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신대 1리는 이미 탐욕과 무례로 속속들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산업화 시대 이후의 농촌 배경 소설들이 보여주던 노스탤지어의 렌즈를 통해 낭만화 된 농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심지어 ‘고향의 고향’, 혹은 ‘장소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가족마저 따뜻한 삶의 공간이 아니다.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나 아들도 황만근을 “반쪽” 또는 “싸래기”로 취급하며, 황만근은 온갖 집안일을 정성스럽게 다하면서도 상도 없이 밥을 먹고 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노비처럼 살아간다.또한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전국농민 총궐기대회’에 나가기 전날, 황만근이 민씨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이 마을이 얼마나 이기심과 자본의 논리에 깊이 빠져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황만근은 “농사꾼은 빚을 지마 안된다 카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제 돈으로 농사를 짓지 않으면, 점점 더 많은 빚을 지게 되고 농사가 놀음이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또한 농민에게 빚을 주는 사람이나 기관은 모두 농사꾼을 나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자신은 “바보”라고 아무도 빚을 주지도 않고, 보증을 서라고 하지도 않았다고 울분을 토한다. 그러면서 황만근은 민씨에게 “나는 내 짓고 싶은 대로 농사지민서 안 망하고 백년을 살 끼라.”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그러나 황만근은 백 년은 커녕, 반백년의 삶도 살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는다. 황만근은 마을 이장의 말에 따라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전국농민 총궐기대회’에 참석했다가 객사하는 것이다. 이장은 투쟁 방침에 따라 경운기를 몰고 총궐기대회에 참석하라고 했는데, 이 투쟁방침을 황만근만 곧이곧대로 실천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아이러니는 신대 1리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빚이 없는 황만근만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궐기대회에 참석했다가 죽는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예의와 염치는 사라지고 고삐가 풀린 탐욕만이 가득한 이 마을에서 2000년 전 ‘덕충부’ 속 인물의 화신이자, 토끼와 밤새 대결을 벌이기도 하는 황만근이 자신의 천수를 누린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그러나 민씨는 황만근을 바보가 아닌 “황선생”이라 지칭하며, “보라, 남의 비웃음을 받으며 살면서도 비루하지 아니하고 홀로 할 바를 이루어 초지를 일관하니 이 어찌 하늘이 낸 사람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 어찌 하늘이 내고 땅이 일으켜 세운 사람이 아니랴.”라는 존엄한 문장으로 끝나는 묘비명(墓碑銘)을 바쳐 황만근의 넋을 위로한다. ‘성자가 된 바보’, 황만근의 “내 짓고 싶은 대로 농사지민서 안 망하고 백년을 살 끼라.”라는 호언이 실현되는 세상 역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고향의 또 다른 얼굴일 것이다.풍자와 해학, 그리고 웃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삶의 다양한 층위를 문학적으로 해석한 성석제는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법학과에서 공부했고, 문예지 ‘문학사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삶의 근원과 존재의 근본에 대한 탐구를 시종 지속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새가 되었네’ ‘궁전의 새’ ‘호랑이를 봤다’ 등을 출간했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6-15

1천300년 전 고귀한 숨결 품고 다시 태어나다

‘천년왕국’ 신라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있는 경주는 ‘거리 자체가 박물관’이란 수식어에 맞춤한 도시다. 산처럼 솟은 거대한 왕릉과 역사서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사찰들, 곳곳에 산재한 석탑과 불상, 여기에 화랑도와 풍류정신처럼 1천년을 이어져온 무형의 자산까지.고고학자들에게는 신화적 상상력을 제공해 역사 탐구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관광객들에겐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선물한 서라벌의 유적과 유물들. 이것들은 여러 말 할 없이 한민족(韓民族)의 소중한 보물들임이 분명하다.경주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보물 외에도 새롭게 주목받는 여행지와 복원된 문화 유적, 유명세를 얻은 젊은이들의 거리, 깔끔하게 잘 조성된 전통마을이 적지 않다. 이들 역시 ‘서라벌의 새로운 보물’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본지는 경주의 소중한 관광자원이자 세계인들 앞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유적, 유물, 새로운 관광지, 정신적 자산까지를 하나하나 직접 찾아가 그 가치를 알리고자 특집기획기사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을 연재한다.◆ 서둘러 온 여름, 월정교에서 땀을 식히다‘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여파가 아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 평일의 경주시외버스터미널은 한산했다. 터미널에서 월정교까지는 버스를 이용해도 좋고, 택시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자가용이 없어도 경주를 둘러보는 데는 큰 불편함이 없다. 택시에 오른다면 목적지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다.“올 봄엔 관광객들이 없어서 많이 힘들지 않았습니까”라는 질문에 60대 후반의 택시기사는 “이제 조금씩 좋아지고 있습니다. 주말이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경주를 찾고 있어요”라며 웃었다. “한국 어디를 가도 경주만한 관광지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경주에서 태어나 평생을 경주에서 살았다고 했다.왼편으로 월정교가 보이는 도로 한 편에 차를 세워준 택시기사가 미소로 여행자를 배웅했다. 6월 초순에 어울리지 않게 한낮의 햇살이 여름처럼 뜨거웠다. 기자가 월정교를 찾은 날엔 이른 ‘폭염주의보’가 내렸다.서둘러 찾아온 더위를 피해 월정교로 들어섰다. 푸른색과 붉은빛으로 칠해진 긴 다리는 위가 막혀 있어 그늘을 만들어냈고, 그 아래 서니 흘러내린 땀이 식었다.경주시 교동에 자리한 월정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다리다. 역사의 비바람 속에 조선시대에 유실돼 사라졌지만, 신라 왕경 8대 핵심유적 복원 정비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되찾게 됐다. 새롭게 복원된 월정교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 2018년 봄.‘삼국사기’엔 월정교가 경덕왕 19년(76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다리는 당시 서라벌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고 있었다.1984년과 1986년 2번에 걸쳐 진행된 자료 수집과 발굴 조사를 통해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가 현재 위치에 있었음이 확인된 바 있고, 이후 오랜 작업을 통해 길이 66.15m·폭 13m·높이 6m의 교량 복원이 이뤄졌다. 월정교는 국내에서 가장 큰 목조 교량이기도 하다.월정교에서 바라보는 주위 풍광은 아름답다. 일찍 시작된 초여름. 건너편 교촌마을의 한옥 기와가 햇볕 아래 빛났고, 고목을 스쳐 지나는 바람 소리가 한낮의 고요함을 깨고 있었다.연인이나 부부라면 낮에 보는 월정교보다 조명으로 화려하게 장식되는 밤의 월정교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고전적 건축물과 현대적 빛이 만들어내는 낭만적인 하모니 곁에서 오래 기억에 남을 사진 한 장을 남겨도 좋을 테고.◆ 1천300년 전 서라벌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다리많은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듯 경주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아주 먼 옛날을 더듬어 상상할 수 있다”는 게 아닐까?복원된 월정교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1천200~300년 전 신라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 고문헌에 의하면 그 옛날 경주를 가로질러 흐르던 남천과 서천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월정교와 춘양교를 비롯해 금교, 귀교, 유교, 굴심천교, 심원교, 효불효자교 등이 바로 그것. 그러나, 세월무상.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 지금까지 그 자취가 남아있는 교량은 극히 소수다.다만 근대 이후 학자들의 연구와 지속적인 추적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남천보다 서천과 북천에 더 많은 다리가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고고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서라벌은 왕경의 북쪽과 서쪽이 더 번성했고, 여기에 많은 수의 백성들이 거주했다”는 추정을 내놓고 있다.월정교는 앞서 언급한 북·서 방향이 아닌 남쪽에 만들어진 교량이다. 월정교 인근에 존재했던 다리로 보이는 건 춘양교와 교촌교, 그리고 조선시대에 축조된 오릉 근처의 교량 정도다. 어쨌든 아득한 과거에 신라는 빼어난 석·목조 기술로 만들어진 다리 수십 개가 도시의 북과 남, 동과 서를 이어주던 낭만적인 고도(古都)였음이 분명하다.이중 월정교와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춘양교는 통일신라시대의 미려한 건축 양식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고대의 보물’.월정교 발굴에 참여했던 역사학자들은 “월정교와 춘양교는 다리 교각의 모양과 크기, 그리고 교대 날개벽 석축과 퇴물림식 축조 방법은 물론 석재의 색깔과 재질도 유사했다”고 증언하고 있다.2020년 오늘을 사는 우리들로선 눈앞에 존재하는 (고증을 통해 복원된)월정교와 함께 춘양교의 옛 모습도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경주시에 의해 춘양교 석재 유물 정비 등이 진행되고 있다니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어쨌건 두 교량에 관한 현대인의 궁금증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렇게 간단하게나마 해소해준다.“경덕왕 19년 2월 궁의 남쪽 문천상에 월정, 춘양 두 다리를 놓았다.”여기에 학자들은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여 월정교가 가졌던 당대의 위상을 알리고 있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20권 ‘신라의 유적과 유물’ 중 일부 내용을 아래 인용한다.“월정교와 춘양교 두 다리는 우리나라 고대 교량의 축조 방법과 토목기술을 보여준다. 이뿐 아니라 월정교는 신라 왕경 서쪽 지역의 주된 교통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고, 춘양교는 경주 남산과 남쪽 외지를 연결했을 것으로 추정돼 과거 서라벌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는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낭만적 사랑의 설화가 전하기도 하는 월정교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전설이나 민담을 볼라치면 ‘다리’는 이승과 저승, 인간계와 선계(仙界), 피안(彼岸)과 차안(此岸) 사이에 존재하는 ‘신비한 그 어떤 것’이었다. 다리 한쪽 편에 고통과 번뇌가 가득하다면, 반대편엔 해탈과 영원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다수다. 그렇기에 ‘다리를 건너간다’는 문장엔 단순히 물질적 이동만이 아닌 정신적 변이의 의미까지 담겨있는 것이 아닐지.역사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리기는 하지만, 월정교엔 금기된 사랑의 장벽을 ‘건너가고자 했던’ 승려의 낭만적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많은 이들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원효와 요석공주의 러브스토리다.원효가 누구인가. 청년 시절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길. 어느 날 동굴에서 잠을 청했고, 갈증 탓에 깨어나 물 한 잔을 달게 마셨다. 이튿날 그 물이 사람의 머리뼈에 고인 썩은 물임을 알고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의 궁극적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이후 그는 머리칼도 깎지 않고 거리를 떠돌았다. 또한 “배우고자 한다면 스승이 누구인지를 가릴 필요가 없다”며 파계(破戒)도 불사했다. 하지만 대중은 그에게 열광한다. ‘삼국유사’는 원효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원효가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덕을 알게 되었다.”도그마와 경직된 율법이 지배하던 고대에 근대적 방식의 해탈을 꿈꾸었던 전위적 승려 원효. 그는 요석공주와의 사랑을 위해 다리(월정교라는 이야기와 문천교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또, 월정교와 문천교가 같은 다리라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학설이 공존한다) 위에서 강으로 몸을 던졌다.젖은 옷을 말린다는 이유를 들어 요석궁에서 공주와 몸을 섞었고, 그로 인해 태어난 인물이 바로 신라 유학계의 거두(巨頭) 설총이다.이 설화가 아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원효의 꿈에 기반한 것이건, 홀로 된 딸이 현자(顯者)와 어울리기를 원했던 왕의 욕망이 만들어낸 것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1천300년이 흐른 지금 전하는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그러니, 우리는 신라 건축 양식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재현한 월정교를 거닐며, 드라마틱하고 흥미로운 고대의 사랑 이야기에 매혹되면 될 일이다. 그게 ‘서라벌의 보물’을 만나는 보통 여행자의 즐거움 아닐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6-11

청년의 심장으로 평생을 살았던 과학자이자 장군

무기화된 화약의 연구·개발로 300년 이상 이어지던 왜구의 노략질과 횡포를 막아내 고려의 백성들로부터 칭송받았던 최무선(1325~1395).영천시가 내세워 알리고 싶은 ‘지역의 대표 인물’ 중 한 명인 그가 전투에 나섰을 때 나이는 50대 중후반. 지금과 달리 고려시대엔 회갑을 앞둔 사람이라면 노인 대접을 받았다.그럼에도 일생을 매달린 화약 개발에 대한 에너지와 열정을 왜구와의 싸움에서도 유감없이 보여줬다. 최무선은 청년의 심장으로 평생을 살았던 과학자이자 장군이었던 것이다.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무렵인 14세기 후반. 왜구의 잦은 침탈은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악재 중 악재였다. 그 당시의 상황을 군산대 유호석 강사는 이렇게 요약한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과 수군력의 강화’라는 논문을 통해서다.“고려 말기 왜구의 침입은 매우 빈번하게 그리고, 아주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미 고종대부터 경상도 남해안에 그 모습을 드러낸 왜구들은 이후 충정왕대를 거치면서부터는 거의 매년 빠트리지 않고 연안과 주현(州縣·지방 행정구역 단위) 지역은 물론 내륙 깊숙이까지 쳐들어왔다. 원나라의 오랜 간섭과 압력을 받은 데 이어 원·명 교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국내적으로도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던 고려에게 왜구의 거센 침입은 더 큰 어려움을 가져다주었으며, 결국은 새로운 왕조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되었다.…(중략) 사실 ‘고려사’에 기록된 대부분의 왜구 침탈에 관한 것들은 고려군의 패배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화약 무기와 강화된 수군(水軍)으로 이룬 승리이처럼 매번 열세였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기념비적인 승리를 거둔 1380년 진포해전(鎭浦海戰)은 전쟁사에 기록될 만한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최무선과 심덕부 등이 지휘관으로 참전한 이 싸움에서 고려의 수군은 겨우 100척의 배로 왜구의 전투선 500여 척을 궤멸시킨다.승리의 가장 큰 요인은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과 그것을 재료로 만든 각종 화포였다. 이는 해상을 무대로 하는 전투에서 함포(艦砲·배에서 쏘는 화포)가 발사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로 기록됐다. 육지로 도망치는 왜구를 뒤쫓아 섬멸한 것이 이성계(1335~1408·조선의 태조)라는 것도 흥미롭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이날 조선 수군이 화포 무기로 이룬 승리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 어귀에 들어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며, 드디어 언덕에 올라 각 주(州)·군(郡)으로 흩어져 들어가서 마음대로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니, 시체가 산과 들에 덮이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땅에 쏟아진 쌀이 한 자 부피나 되었다. 최무선·심덕부·나세 등이 진포에 이르러 최무선이 처음으로 만든 화포를 써서 그 배들을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쳐 적이 거의 다 타죽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 또한 많았다. 오직 330여 명만이 겨우 도망을 갔다.”이로부터 3년 뒤에도 최무선은 다시 전장에 선다. “지난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며 남해의 관음포 인근 바다로 쳐들어온 왜구를 거듭 무력화시키며 승리를 이루니 이를 관음포대첩(觀音浦大捷)이라 부른다.1383년 초여름 관음포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낸 왜구의 전함 120척은 지금의 창원 지역으로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맞선 고려 수군의 주요 무기는 재론할 것도 없이 화포. 화포 운영의 총책임자는 이번에도 최무선이었다.최무선과 함께 전투를 지휘한 장군들은 “왜구와의 싸움에서 이처럼 통쾌하고 크게 이긴 적이 있었던가”라며 승전의 기쁨을 나누었다고 한다.관음포대첩은 고려 수군에게 “우리도 이제 왜구가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으며, 이런 기세는 왜구의 근거지를 공격하는 대마도 정벌로까지 이어졌다.◆ 우리나라 수군의 신병기가 된 무기들최무선의 가장 큰 업적은 화약의 무기화를 이끌었고, 화통도감(火通都監)의 설립을 주도해 전투에서 사용될 화약을 제조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그는 각종 화포를 만들어 과학을 통한 국방력 강화에도 앞장섰다.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이 최무선의 아이디어와 기술력 아래서 탄생한 고려 수군의 무기들이다. 제작된 화포는 앞서 언급한 진포해전과 관음포대첩 등에서 왜구를 공포로 몰고 갔다. 현대전에서 사용되는 스마트 미사일과 스텔스 전투기의 역할을 이미 7세기 전에 해낸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걸쳐 예문관에서 문신으로 활동한 정이오는 ‘화약고기(火藥庫記)’라는 책에서 “우왕대의 진포해전과 남해의 전투에서 우리 군사가 왜구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화통과 화포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썼다.최무선이 개발에 기여한 무기 중 화전(火箭)은 조선시대 때까지 널리 사용됐던 불을 붙인 화살 형태의 무기다. 대나무로 만들었으며 새의 깃털로 장식했다.주화(走火)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사용됐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형 화기로 불린다. 당시로선 획기적으로 외부의 물리적 영향 없이 스스로 발사되는 무기였다. 또한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신기전(神機箭)의 전신이기도 하다.주화에 관한 기록은 ‘태조실록’에도 쓰여 있다.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화통도감이 세워진 1377년에서 1392년경으로 추정된다. 다만 화살이 곧게 나가지 못하고 사용되는 화약의 양이 지나치게 많이 든다는 것은 약점으로 지적됐다.조선시대 황자총통에서 사용되던 피령전(皮翎箭)은 벌목한 지 2년이 된 나무로 제작했다, 위와 아래가 모두 철로 장식됐고, 화살 끝에는 철촉을 끼운 것으로 알려졌다. 사거리가 1천100보에 이르는 당시로선 치명적인 무기였다.철탄자(鐵彈子) 역시 화포에 넣어 발사하던 무쇠로 만든 탄알이다. 고려 후기에 발명됐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지속적으로 연구가 이뤄진 무기다.최무선 집안은 대를 이어 화약 무기의 연구와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1380~1443)은 아버지가 왜구와의 전투에 최초로 나아가 승리를 거둔 해에 태어났다. 그는 1401년 화약무기 담담자로 관청 근무를 시작한다.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화약 관련 지식과 노하우는 그를 ‘주목받는 젊은 화약 연구개발자’로 성장시켰다.최해산은 화약 제조를 담당하며 주목할 만한 공을 세웠으니, 바로 무기용 화약의 성능을 진일보시킨 것이다. 더불어 전투에서 큰 역할을 담당할 화차도 발명했다. 1407년 겨울. 고성능 화약을 새로 만들어 선보인 최해산은 폭발 실험장에 참석한 일본의 사신들을 놀라게 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왕에게 상까지 받게 된다.화약 무기 개발에 나섰던 시점부터 오랫동안 화약 관련 기술을 독점했던 최해산은 각 지방에서도 염초를 제조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그 위상이 다소 낮아졌다는 평가다. 하지만,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나라의 국방력 강화에 작지 않은 몫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최무선의 애국심 이어갈 ‘최무선과학관’영천시 금호읍 널찍한 터에 조성된 최무선과학관은 최무선의 생애와 그가 과학 기술과 고려의 국방에 기여한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개발하고, 화포를 사용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으며, 후대의 화약 관련 기술 발전에 기여한 최무선 장군을 기념하고,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들에게 기초과학을 체험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 영천시의 설명.과학관과 더불어 영상체험관, 야외공연장 등을 갖춘 이 시설은 많은 학생들과 관광객이 찾아와 최무선의 행적을 살피고, 과학 기술을 통한 나라 사랑의 실천을 고민하는 공간이다. 영천을 찾는다면 꼭 한 번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6-10

이름난 관광지엔 많은 이들이… 색다른 만남이 머문 곳

◇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그렇게 펄펄 끓던 날씨가 갑자기 초가을 날씨처럼 바뀌었다. 벨기에를 넘어오며 쌀쌀한 바람이 불어 비옷을 껴입었다. 이탈리아부터 프랑스까진 고속도로 통행료를 냈는데 벨기에도 네덜란드도 톨게이트가 따로 없었다.파리에서 릴까지(약 230킬로미터) 통행료가 18.5유로. 파리에서 암스테르담까진 약 540킬로미터다. 팜플로나에서 여기까지 프랑스를 지나오는 동안 정확하진 않지만 통행료로 10만원 훨씬 넘게 쓴 듯하다. 유럽은 각 나라마다 톨게이트를 지날 때 통행료를 내거나 통행증인 비넷을 구입해야 하는 곳도 있고 아예 무료인 곳도 있다. 비넷을 구입해야하는 나라는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은 통행료를 내야 한다.체코 프라하에서 유심카드를 산 이후 더는 유심카드를 구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굉장히 불편했는데 미리 지도를 다운받아두고 고속도로 휴게소와 숙소에서 인터넷 사용이 가능하니 딱히 더는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다.아예 국내에서 사용하던 전화는 정지시켰고 사용하던 휴대폰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장나는 바람에 휴대폰 인증이나 인증서가 필요한 모든 정보에서 차단된 상태. 페이스북과 메신저 그리고 카카오톡으로 몇몇 사람들과 연락만 가능하다. 그래도 별 일 없이 두 달이 지났다.급하고 중요하다 싶은 일도 막상 멀찍이 떨어져 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고, 그리 급하지 않은 일도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당장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룻밤 묵어갈 곳과 내일도 집으로 향해 갈 수 있느냐 하는 것뿐이다. 달리면 달릴수록 단순해지고 있달까.(원래 단순한 성격이기도 하지만) 오토바이 여행의 좋은 점은 복잡한 생각의 잔가지를 모두 쳐낼 수 있다는 거다. 복잡하고 위험한 곳일수록 넘어지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렇다고 이 집중력이 오래 가는 것은 아니다. 로시에서 내리는 순간 끊기듯 풀린다. 파리에서 벗어나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자마자 긴장이 풀렸다.◇ 암스테르담의 세련된 예술서 전문서점 ‘멘도’덥지도 춥지도 않고 걸어다니기 딱 좋은 날씨. 암스테르담은 오밀조밀한 시가지를 구경하며 걷는 재미가 있었다.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많고 시 외곽까지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어 숙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탔으면 더 좋았을 걸 후회했다. 시내로 나가기 위해 지하철 타러 갔다 실수를 했다. 지하철 승차권을 사야했는데 기차 승차권을 사서 기차를 탈 뻔 했다. 왕복 승차권이 6유로가 넘어 네덜란드는 지하철비도 비싸구나 놀랐는데 플랫폼에서 기다리며 아무래도 이상해 곁에 선 반짝이는 초록색 눈을 가진 아가씨에게 “센터럴 스테이션 가는 거 맞나요?” 물었다.여긴 기차를 타는 곳이고 지하철은 입구가 반대쪽에 있고 거기서 승차권을 사야 한다고….관광하러 왔다면 1일 승차권(8유로)을 사는 것이 좋다고도 알려주었다. 그녀는 내가 헤맬 것을 염려해선지 지하철 승차권 사는 곳 출구까지 데려다 주었다.아쉽게도 안네 프랑크의 집도 반 고흐 미술관도 보지 못했다. 예약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 하면 될 거라 생각했었다. 평일인데 뭐 사람이 많을까 싶었다.이번 주는 물론이고 다음 주까지도 예약이 밀려있었다. 결국 안네 프랑크의 집 외관만 보고 왔다. 입구에 길게 줄을 서 있는 걸 보고 한숨만. 유럽도 방학과 휴가철이 겹쳐 어딜 가나 이름난 곳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곳에서도 중국 관광객이 많았다.안네의 집 근처에 있는 서점을 찾아다녔다. 내부가 온통 검은 색인 예술서를 파는 멘도 서점과 주변 서점들을 구경했다. 멘도는 외부 진열장부터 세련미가 넘쳤다.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책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테리어와 책을 전시하는 방식이 훌륭했다. 예술서만 취급하고 있는 것도 좋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서점 중에 가장 자신의 ‘색깔’이 확실한 곳으로 꼽아야겠다.책 욕심을 버리기도 힘들고 헌책방이니 책을 가릴 처지가 아니지만 만약 새 책으로 한 가지 분야만 집중한다면 멘도 같은 서점이면 좋겠다 싶다. 거리엔 사람들이 많았지만 멘도 서점엔 나를 포함해 손님이 딱 두 명이었다. 주변 다른 곳도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포르투의 ‘렐루 서점’나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처럼 역사를 가지고 영화에 나오거나 유명 작가와 관련이 있지 않으면 책 팔기는 어디든 힘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여유만 있다면 사고 싶은 사진집이 많았으나... 책 욕심은 이제 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오토바이로 여행하는 처지에 책 욕심이라니. 돌아가면 최대한 책을 줄이겠다고 마음먹은 터인데 멋진 책을 보면 그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한다.휴스 마르세유 사진 박물관에 들러 디나 로손과 엘스페스 디에드릭스의 사진전을 보고 왔다. 두 사람 모두 여성 사진가다. 디나 로손은 자신이 만난 흑인들을 담은, 엘스페스 디에드릭스는 바다 밑 생물을 촬영한 작품. 휴스 마르세유 박물관 건물은 17세기 지어졌고 4층까지 아주 많은 방이 있었다. 전혀 색깔이 다른 두 작가의 작품을 방마다 교차 전시해 좋았다. 여행 중에 사진 전시를 여럿 보았는데 단순히 사진만 전시하는 경우는 없었다. 영상과 오브제, 작품과 관련 있는 작은 수집품까지 함께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진 ‘전시’가 작품을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것도 중요하구나 깨달았달까. 이게 트렌드인지는 모르겠다. 결국 전시를 구성하는 기획자의 능력이 중요한 거겠지.◇ 예의바른 젊은 친구들과 같은 방에서 지내다어느 숙소에서도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새벽에 일어나 함께 방을 쓰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살금살금 샤워실에 가서 거울을 보니 덥수룩한 머리는 그 사이 흰머리가 더 는 듯하고 수염도 깎지 않은 지 오래라 딱 집에서 쫓겨난 중년 남자 행색이다.암스테르담 숙소는 한 방에 침대가 8개인데 단체여행 온 젊은이들로 북적북적. 2박 3일 동안 어디 전쟁터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다. 내가 없었다면 밤새 이야기하고 놀았을 텐데 나를 배려해선지 머리맡 전등을 끄면 다들 조용히 취침 준비를 했다. 가끔 이런 상황을 만나면 이제 도미토리에서 젊은이들과 같이 방을 쓸 나이는 아니구나 싶다. 형편에 따라 숙소를 정하지만 이렇게 젊은 친구들에게 민폐를 끼쳐서야….함부르크로 향하는 중에 휴게소에서 데이비드 아저씨 부부를 만났다. 파리에 사시는데 바르샤바로 여행 가는 중에 주차해둔 로시를 보고 이야기를 건네셨다. 부인 크리스틴 아주머니의 친척이 대한항공에서 파일럿으로 일하고 있어 서울에도 다녀왔단다. 아저씨는 혼다 골드윙을 타는 라이더라 한국에서 여기까지 오토바이로 왔다니 “허리는 괜찮나?” 걱정부터 하셨다. 허리보다는 계속 빛을 보고 달리니 눈이 항상 피로해서 문제다.헤어지고 다시 달리다 잠시 쉬기 위해 휴게소에 들어갔더니 마중 나온 것처럼 데이비드 아저씨가 주차장에서 내게 손을 흔들고 계셨다. 내가 가는 걸 우연히 다시 보고 따라 들어왔다고.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서울에 오거나 파리에 갈 일이 있으면 연락하기로. 이번 여행에서 단 한 명도 악한 이를 만나지 못했다. 복인가 보다.

2020-06-09

詩 ‘촉석루 삼 장사’ 메아리치는 퇴계 이황 제자 학봉 김성일 종택

학봉 김성일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임진왜란과 학봉은 피와 살 같이 붙어다니는 인연의 원죄로 고통스런 아픔이다.의성 김씨 문중의 입장에서는 퇴계학을 정통으로 받은 긍지이고 자랑스러운 선조이다. 퇴계와 서애, 학봉은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는 안동의 3대 스타이다. 이 학봉종택은 지금의 자리에 있다 오른쪽 멀지 않은 곳에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임진왜란과 학봉 김성일1592년 4월13일 20여 만 명의 왜군이(왜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700여 척의 배에 1만8천 명) 부산에 상륙한다. 부산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김해를 거처 서울로 진격하고, 최강성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울산, 경주를 거쳐 북상한다. 조선은 명장 신립장군을 믿었으나 충주 탄금대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으나 전멸했다. 불과 2주일 만인 5월 2일에 서울을 점령한다.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로가 명나라에 망명을 타진한다. 성난 백성들은 왜군이 오기 전에 제일 먼저 노비문서가 있는 장예원과 형조건물을 불태우면서 경복궁이 사라진다.1590년 일본은 100년의 혼란한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국가를 만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는 66주를 통치하는 실질적인 왕(관백)이었다. 평화기가 되면 싸움이 전공인 무사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다. 새로운 싸움터가 조선이었다. 공공연히 명나라와 조선을 치겠다고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알려온다.쓰시마(對馬島)도주가 1588년 10월과 1589년 6월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고, 1590년 3월6일(음) 조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할 뜻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허균의 형)과 200여 명의 조선 통신사는 대마도를 거처 일본으로 간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1월에야 도요토미를 만나고 근 1년만인 1591년 2월(음력)에 부산에 도착한다. 이들이 가져온 국서도 무례한 말투로 ‘정명가도(征明假道)’로 침략의 뜻이 분명히 들어있었다.선조 앞에서 황윤길은 미리 올린 보고서와 같이 바닷가에 배가 수백 척이나 있는 것을 보았고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사 김성일은 민심을 동요시키려 한다고 비판하면서 절대 침입하지 않는다고 했다. 같은 동인인 허성도 침략해온다 했다.선조는 워낙 상반된 견해라 도요토미의 생김새를 묻는다.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했고, 학봉은 “생김새는 쥐 같고 원숭이처럼 작고 못 생겨서 우리나라를 침략할 위인이 못된다”고 격하하였다. 결국 당시 실권을 쥔 동인의 의견대로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정여립(동인)과 관련되는 모든 사람 1천 여 명을 죽여 버린다. 이때 실각해있던 서인 정철이 총 취조관이 되어 조선인재 대부분(동인)이 죽음을 당해 임진왜란 때 고전을 면치 못하는 원인도 되었다. 술 좋아하며 관동별곡, 장진주사 등의 글로 국문학적으로는 한 획을 그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신과 서인들의 권력을 위한 악랄한 사람이다. 통신사가 떠날 때는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가 정철이 선조의 후궁의 아들 광해군을 후계자로 추천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아 동인이 집권여당 되어 있어 논란 끝에 동인 김성일의 주장이 채택되어 적극적인 방비가 없었다.전쟁이 나자 선조는 황윤길의 의견을 무시한 것을 후회하고 잘못 보고한 김성일을 파직하고 죽이려 하자 영의정 유성룡은 “지금 죽이나 나중에 죽이나 차이가 없다. 차라리 김성일에게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여 경상도 초유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관군을 지휘하여 1차 진주성을 지켜냈으나 2차전을 앞두고 관사에서 병사했다.#. 전쟁의 상처와 치욕의 승리. 학봉의 얼굴임진왜란 7년 동안 왜군이 분탕질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하여 우리가 승리했다고 한다. 형식적으로는 승리이고 내용은 처참한 패배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한 전쟁도 아니고 우리 땅에서 살육당하며 치른 전쟁에다 참혹한 고통과 치욕의 상처를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전쟁이 일어나면 모두가 고통이지만, 여자와 노약자와 어린 아이들이다. 특히 여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한다. 임진왜란 여러 기록 중에 왕을 호종한 근신들은 안전한데서 장계를 보고 대략을 짐작했다면, 형조좌랑으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수은 강항(1567~1618)의 ‘수은간양록’, 이순신이 모함 받아 옥중에서 죽게 되자 적극 말려 그를 구한 약포 정탁(1526~1605)의 ‘용사일기’, 김성일 휘하로 들어가 의병 모으는 큰 공을 세우고 학봉의 진주서 죽음과 안동의 이장까지 기록한 송암 이노의 ‘용사일기’, 경상도관찰사 김수와 김성일의 막하참모로 여러 가지 전술을 건의하여 의병군이 승리하는데 기여한 효사재 이탁영(1541~1610)의 7년(1592년 3월9~1599년 11월) 기록의 정만록(征蠻錄) 등 여러 자료가 많이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대스타 이순신과 서애 유성룡의 난중일기와 징비록이 있는데, 난중일기는 7년(1592년 1월1일~1598년 11월17일)간 총 2천539일간에 진중내외의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인데, 946일이 빠져있어(정만록은 10일 빠졌다) 한계가 있다. 징비록도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전쟁의 참상을 회고하고 반성하며 뒷날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녹화방송이라면, 앞의 기록들은 전쟁의 현장에서의 직접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이라 생방송 같아 더욱 실감난다.정만록 기록 중에 차마 눈뜨고 못 볼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상주에 살던 사부(師傅)인 하락(河洛)은 영남의 명사인데 왜적과 싸우다 대부인을 모시고 처와 자부와 함께 피난 중에 왜적에 잡히어 부자를 죽이고 자부를 보리밭으로 끌고 가서 10여 명의 적이 욕을 보이고는 놓아주었는데 목을 매어 죽었다.(1592년 7월 2일) “여자 하나를 붙잡으면 부자형제를 가리지 않고 30~40명이 서로 윤간하여 죽게 한다. 서책을 찢어서 더러운 것을 닦는다 하며, 장독에다 오줌 누어 사람에게 먹도록 한다니 그 소행을 어찌 말로 다하랴…. 몸이 늙음을 원망하며 통곡할 뿐이다.(1592년 7월 7일) “호남 미녀가 많이 포로로 잡혀왔는데 애걸하여도 불태워 죽였다. 하니, 참혹하여 들을 수가 없다.(1592년 8월 2일)수은간양록에는 “적선 수천 척의 배 안에는 우리나라 남녀가 태반이나 되고 바닷가에는 시체가 너저분하게 쌓였다.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도무지 살고 싶지 않았다…. 나를 버리고 달아난 노비는 모두 살았건만 주인을 못내 잊어 차마 가지 못한 자는 적에게 온통 살해되다니…. 나의 둘째형의 아들 가련이는 겨우 여덟 살인데 목이 심히 타서 짠물을 마시고 구토설사를 하다가 병이 생겨 누워있는데 왜놈이 별안간 달려들어 그를 바다에 내던졌다.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1598년 9월 24일)정유재란때 도요토미는 “사람마다 귀는 둘이 있어도 코는 하나이니 너희들은 조선인의 코를 베어 바침으로써 수급(머리)을 대신할지어다”이리하여 왜군 한 놈이 코 한 되씩을 소금으로 절여서 수길에게 보냈는데 보내온 코는 수길의 검열을 거친 다음 한데 모아서…. 묻었더니 하나의 구릉을 이루었다. 그렇게 한지 일 년도 안 되어 소금으로 제놈(수길)의 배때기를 절였다.일본승려 게이넨(慶念)의 기록에는 ”일본 병사들은 포악하고 잔인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베어죽이거나 포로로 잡아서 사슬로 목을 묶어 끌고 갔다. 부모는 자식을 찾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울부짖는 그 광경은 ‘지옥도’에서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비참한 것이었다…. 오늘도 한 병사는 손을 모아 애원하는 조선인 부모를 그 자리에서 칼로 베어 버리고 아이는 끌고 갔다.이처럼 전쟁은 참혹한 것이다. 그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은 대략 6만~10만명(일본 학자들은 2만~5만), 돌아온 자는 8천482명(한국학자 이상희) 정도다. 부모형제 죽음을 목격하고 불탄 고향산천을 두고 끌려와 농촌이나 무사집의 노비로 비참한 생활을 하며 원한 맺힌 한을 품고 죽어갔다.안동 봉정사 가는 서후면 길옆에 학봉종택이 있다. 학봉종택 높은 솟을대문을 지나자 고택에 서양식 별장같이 잔디와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는데 고즈넉하고 편안한 고택의 맛은 흐르지 않고 도식적인 관공서 건물 같다. 아마도 학봉이 중국에 사절로 갔다 와서 중국풍울 가미해서 그럴 것이다. 학봉이 살았던 이 종택은 원래 이 자리였으나 침수가 잦아 오른쪽 가까이 소계서당으로 학봉의 8세손 광찬이 1762년에 옮겼다가 1964년에 다시 옮겨온 것이다. 예전부터 많이 왔던 곳이라 잠시 둘러보고 학봉 유물을 모아놓은 운장각으로 갔다. 학봉의 초상화를 오랫동안 보면서 학봉을 생각했다. 여러 기록과 초상화에 나타난 학봉은 문무를 겸비한 원칙에 충실한 대쪽 같은 선비였다. 이 초상화를 그린 화가 김호석 친구에게 전화하여 학봉의 초상화가 없는데 어떤 기준으로 그렸나 물어보니 문중의 대표적인 20명의 얼굴사진을 조합하여 그렸는데 모두 자기와 닮았다고 하더라며 초상화 봉안할 때 초헌관으로 참석했단다.학봉이 당파적이든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하던 전쟁만큼 큰 일이 없는데 잘못된 허위보고로 7년 동안 온 나라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한 죄 값은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다. 공자도 하늘이 용서 못할 죄는 지어서는 안 된다(獲在於天 無所禱也)했는데….”/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6-09

파시스트적 가속도가 지배하는‘가짜 낙원’에서 눈 뜬 아담…

‘기형도 산문집’(살림, 1990)은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으로 전설의 반열에 오른 시인 기형도가 별세한 1년 후에 출간된 산문집이다. 이 산문집의 첫 번째 글은 ‘짧은 여행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1988년 8월 2일부터 8월 5일까지 3박 4일간 ‘서울-대구-전주-광주-순천-부산-서울’로 이어지는 여행을 기록한 것이다. 기형도는 대구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장정일에게 전화를 건다. 곧바로 대구백화점으로 달려 나온 장정일과 기형도는 차수를 바꿔 가며 맥주를 마시고, 문학과 영화 등을 포함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서울서 봤을 때는 말이 없었는데 대구라 그런지 말을 많이 하였고 발랄하였다.”는 기형도의 표현처럼, 장정일은 친한 선배를 만난 어린 후배처럼 활기찬 모습을 보여준다. 1962년 1월 6일 경북 달성에서 태어나 1977년 성서중학교를 졸업한 장정일은 대구에서 나고 자라, 그 곳에서 글을 쓴 작가였던 것이다.그러나 장정일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담이 눈 뜰 때’(1990)가 “봄과 가을이 짧고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긴 분지도시” 대구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가 감각적 쾌락을 위해 자주 찾는 곳은 향촌동이고, 올림픽이 개막되던 날 탬버린 치는 남자가 서있던 곳은 대구은행 본점 앞이며, 아담과 현재가 로이 부캐넌의 추모식을 여는 곳은 장정일이 ‘강정 간다’라는 시를 지었을 정도로 애착을 보여준 대구 인근의 유원지 강정이다.“자주 추문(醜聞)에 휩싸이는 불행한 사제(司祭)”(구모룡, 오만한 사제의 위장된 백일몽, 작가세계, 1997년 봄호, 42면)라는 말처럼, 장정일처럼 문단과 사회의 큰 화제를 몰고 다닌 문인도 드물다. 특이한 삶의 이력은 본인이 직접 ‘개인기록’(문학동네, 1995년 봄호)을 통해 밝힌 사실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아다. 또한 그는 ‘내게 거짓말을 해봐’(1996)를 통해 뜨거운(혹은 따가운) 관심을 받으며 약 4년간 법정 다툼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장정일이 결코 손쉬운 타협의 길이 아닌 불화와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고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시, 희곡, 소설을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작가이고, 여러 권의 ‘독서일기’를 출판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독서가이기도 하다.장정일은 많은 평자들에 의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포스트모더니즘과 1990년대 신세대 문학의 맨 앞자리에 놓이는 작가로 평가받았다. ‘아담이 눈뜰 때’는 파격적인 외양과는 달리, 그 내적 본질은 근대소설의 정석에 충실한 작품이다. 이것은 자기 보존의 평범한 욕망에 만족할 수 없는 문제적 개인이 진정한 가치를 찾아 떠난다는 근대소설의 내적 형식에 이 작품이 맞닿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담이 눈뜰 때’는 1988년에 19살이 된 아담이 성인의 세계로 입문하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을 통해 정신적 성장과 사회에 대한 각성을 보여주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이 때의 성장은 구체적으로 ‘작가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렇기에 이 작품 전체는 ‘작가의 탄생기’라고 볼 수도 있다. ‘아담이 눈뜰 때’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작품의 마지막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이 소설은 열아홉의 재수생인 아담이 우여곡절 끝에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턴테이블을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이 주요 서사이고, 이것을 얻은 후에 아담은 실제 타자기를 통해 이 소설을 창작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한 명의 작가가 탄생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 되는 것이다. 뭉크화집을 얻기 위해 아담은 키치(Kitsch)의 세계를 상징하는 40대 여성 화가에게 몸과 이미지를 바쳐야 했고, 턴테이블을 얻기 위해서는 비인간적 자본을 상징하는 오디오 가게 사장에게 항문을 바쳐야 했으며, 타자기를 얻기 위해서는 청소부 어머니의 오랜 꿈인 일류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담은 자신이 ‘가짜 낙원’에서 눈을 뜬 아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아담을 절망케 한 이 세계의 본질은 ‘파시스트적 가속도’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파시스트적 가속도는 “근대의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가 엄청난 자본과 연결되어 무서운 속도로 전진운동을 하는” 것으로, 이러한 생리가 지배할 때, 세계는 “전진하는 것만이 발전이며 성공”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파시스트적 가속도의 세계와 이에 저항하는 세계는 스피드족들과 오디오족들, 일렉트로닉 리스너(Electronic Listener)와 뮤직 러버(Music Lover)등으로 반복해서 나타난다. 전자가 앞으로 내달리는 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새로운 정복지를 갈구한다면, 후자는 반추행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창조적 고독 속에 묻히려는 자들이다.이러한 파시스트적 가속도의 세계에 맞서 아담과 동년배인 은선과 현재는 자기들만의 방을 구축하고자 한다. 이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록(Rock)이다. 신기하게도 아담은 말할 것도 없고 은선과 현재도 3J라 일컬어지는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지미 핸드릭스와 같은 록의 거장들을 좋아한다. 이들은 “저항과 인간애”로 가득한 록스피릿(Rock Spirit)의 인격적 구현에 해당한다. 이 작품에서 록은 88 서울올림픽에 버금가는 의미가 있다. 올림픽 준비로 전국이 떠들썩하던 8월 중순, 아담과 현재는 그 열기에 휩쓸리는 대신 자살한 로이 부캐넌의 추모식을 연다. 모래밭에 기타를 내려 놓고 석유를 끼얹으며, 그들은 부케넌의 ‘메시아는 다시 오시리’를 듣는 것이다. 지극히 소박한 이들의 추도식을 통해, 이들 세대에게 록음악은 88 서울올림픽을 능가하는 성스러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장정일파시스트적 가속도의 세계에 비한다면 아담과 현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세계는 너무나 미약하다. ‘아담이 눈뜰 때’에서는 ‘유리의 성’이라는 소설이 아담과 현재가 만들어 가고자 하는 방을 설명하기 위해 소환된다. ‘유리의 성’(현대문학, 1970.6)은 소설가 최상규의 작품으로 소년들이 집 안에 물을 가득 채운 후, 그것을 얼려 기존의 집을 부수고 유리의 성을 만든다는 내용의 환상소설이다. 이 작품은 소년들과 어른들, 유리의 성과 기존의 집이 대립항을 이루며, 일상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비상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물이 얼어 만들어진 ‘유리의 성’이 곧 녹아내릴 수밖에 없듯이, 아담과 현재가 섹스와 음악으로 만들어가는 ‘유리의 성’ 역시 지속되기는 어렵다. 결국 그 지속불가능성이 현재에게서는 자살로 나타나며, 아담에게서는 ‘가짜 낙원’에 대한 처절한 인식으로 드러난다. 아담은 현재의 자살 소식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가짜 낙원에서 잘못 눈을 뜬 아담처럼, 내 이브는 창녀였으며, 내 방은 항상 어둡고 습기가 차 있다. 어쩌다 책이 썩는 냄새를 없애려고 창문을 열면, 네온의 십자가 아래서 세상은 내방보다 더 큰 어둠과 부패로 썩어지고 있다.”는 절망적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아담이 눈뜰 때’에서 이러한 파시스트적 가속도의 세계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형이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모두 A만을 받은 형은, “여기선 아무것도 더 기대할 게 없다.”며 미국으로 간다. 지하상가의 화장실 바닥을 밀대로 미는 어머니의 모습을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던, 그러면서도 왠만한 혁명서적은 모두 독파했던 형은 “고향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뉴욕으로” 날아간 것이다. 어쩌면 형은 “우주인과 두뇌 싸움을 하려고 지구 밖으로 날아가려 들지도” 모르는 사람, 즉 파시스트적 가속도에 자신의 몸을 온전히 맡긴 존재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담의 몸과 이미지를 빼앗고, 아담이 원하던 ‘사춘기’라는 그림은 있지도 않은 뭉크 화집을 화대로 지불한 중년의 여성 화가는 언제나 파리나 뮌헨 혹은 뉴욕에 “언젠가는 돌아갈 거야.”라고 다짐하곤 했다. YMCA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멋들어진 강연을 한 평론가도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없다.아담은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던 일류대학에 합격함으로써, 잘난 형이나 평론가처럼 파시스트적 가속도에 동참할 길이 열린다. 그러나 아담은 서울의 빌딩숲을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기성질서의 논리를 충실히 수행하다가 결국 미쳐버린 ‘탬버린 치는 사내’를 발견할 뿐이다. 심지어 서울에서는 사정조차 불가능하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심한 두통만을 느끼는 아담의 모습은 젊은 시절 장정일의 모습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원재길의 회고에 따르면, ‘아담이 눈뜰 때’가 배경으로 삼은 1988년 여름에 대구에서 장정일을 만났을 때, 장정일이 서울에 대해 썩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곳 생활에서 맛본 두려움이 너무도 커서, 자기최면을 걸듯이 ‘죽어도 서울은 안 간다’고 거듭 못박았다.”(‘파리’ 1996년 겨울-내가 만난 장정일, 작가세계, 1997년 봄, 34면)는 기억을 전하고 있다.결국 아담은 형처럼 뉴욕으로 심지어는 우주로도 갈 수 있는 가속도의 세계에 몸 담기를 거부하고, “한없이 느리고 덜그럭거리는 보통열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가 작가가 된다. 이것은 “내 온몸으로 이 세계의 가속도에 브레이크는 거는 일”이며, “가짜 낙원을 단호히 내뿌리치고 잃었던 낙원, 실재, 진리를 되찾는” 일에 해당한다. 아담은 ‘가짜 낙원’의 작가가 됨으로써, 가속도의 세계에서 진정성을 찾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담의 결심은 이후 장정일의 행로를 통해, 1990년대 한국문학의 한 진경으로 솟아오르게 된다.최연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인 장정일은 1962년 경북 달성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고, 1987년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실내극’이 당선됐다. 세상을 바라보는 독창적 시각으로 주목받은 그는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소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아담이 눈 뜰 때’ ‘내게 거짓말을 해봐’ 등을 썼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6-08

화약 무기의 완벽한 승리… 바다 위 왜구를 불사르다

영천은 크지 않은 도시다. 하지만, 거기서 태어나 수천 년 이어져온 역사 속에 자신의 이름을 뚜렷하게 남긴 큰 인물은 적지 않다.고려 말 출생해 빼어난 학자이자 지조를 지킨 충신으로 이름을 남긴 포은 정몽주(1337~ 1392).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정성으로 살피고, 성리학의 기틀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읊었던 시조 ‘단심가’는 7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의 기억 속에 여전히 존재한다. 포은은 영천 사람이다.‘조선 가사문학의 거두(巨頭)’로 불리는 노계 박인로(1561~1642)도 영천을 빛낸 뛰어난 예술가였다. 문인으로서의 성과만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무신(武臣)으로도 이름 높은 그는 말년엔 고향으로 돌아가 백성들과 더불어 여생을 함께 했다. 이 두 사람과 더불어 또 한 명 역사에 기록된 영천 출신 인물이 있다.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만들어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과학자 최무선(1325~1395)이다.화약의 연구·개발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활용해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전투 현장에 섰던 용맹한 애국자 최무선. “그의 생애엔 어떤 스토리와 드라마가 있었을까”를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 아래 그 궁금증에 답한다.◆소년의 결심 “어떤 수를 써서라도 왜구의 횡포를 막겠다”최무선이 살았던 14세기 중반은 어지럽고 암울한 시기였다. 기울어가던 고려 왕조의 운명은 불어오는 바람 앞에 세운 작은 촛불의 형국이었다. 가난한 서민들의 삶은 지배층의 타락과 무관심에 갈수록 어려워졌다.조정은 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과 사리사욕에 눈먼 벼슬아치들로 가득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은 왜구(倭寇·13~16세기 우리나라 연안을 약탈하던 일본 해적)들은 경상도와 전라도 해변 마을로 몰려와 가뜩이나 힘든 백성들을 괴롭혔다. 어려운 시대가 그 시대를 극복할 사람을 태어나게 만드는 것일까?최무선은 왜구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1325년 영천시 금호읍 오계리 마단(옛이름 창수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관료들의 녹봉에 관한 업무를 맡아보던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이었다.10대 때부터 각종 과학 서적과 새로운 기술을 담은 책에 관심을 보였던 최무선은 주위 사람들에게 “어린 나이임에도 재주가 뛰어나고, 사리에 밝아 앞날이 기대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해진다.보통의 또래들과 달리 군사학과 병기학에도 관심이 컸던 그는 책으로 읽는 한문만이 아니라, 말로 하는 중국어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고려의 지식인들이 유학(儒學)과 불교의 종교적 교리 연구에 몰두하던 시절이었으니, 최무선은 재론의 여지없이 돌올한 소년이었다.부모를 공경하고 국가의 미래를 고민하며 성장한 최무선. 청년이 되고 나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왜구에 대한 증오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애국심으로 결심한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나와 이웃의 목숨과 재산을 빼앗는 왜구들을 막아내겠다.”◆전투에서 사용될 화약을 만들 방법은…최무선이 살던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태종실록’,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 따르면 당시의 왜구들은 일정한 기간을 정해놓지 않고, 불시에 바닷가로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일정 지역에 우리 군사들을 배치해놓는 것도 소용이 없었다.불특정한 시간에 불특정한 장소에 나타나 칼과 창을 들고 살인과 도둑질을 하니 언제, 어떤 장소로 군사를 보내야 할지 예측이 어려웠다는 것. 해결이 어려운 시대적 난제였다.그러나, 약탈의 대상이 되는 고려 사람으로서 이를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최무선의 고민은 오래 이어졌다.“대체 어떤 묘수를 세워 왜구의 침탈을 효과적으로 격퇴시킬 수 있을 것인가…” 긴 고심과 논의의 나날 끝에 최무선은 화약을 생각해냈다.그 시대의 화약은 염초, 유황, 목탄을 혼합해 폭발력을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이미 중국은 화약을 인마살상용 전쟁 무기로 사용하고 있기도 했다. 고려는 그렇지 못했다. 소량으로 들여온 화약을 겨우 유흥의 수단인 불꽃놀이 재료로나 쓰고 있었던 형편.◆최무선, 화약 연구에 매달린 기나긴 세월그런 상황에서 최무선은 화약의 무기화에 골몰했다.화약이 전투의 무기가 될 수 있다면 이를 배에 싣고 바다로 나가 왜구가 우리나라 해안에 닿기 전 그들의 배를 불태워버릴 수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이는 이전의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진일보한 전술이었다.그러나 쉽지 않았다. 중국이 화약 제조법을 쉽게 알려줄 리가 없었던 까닭이다. 최무선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화약의 특성을 연구하고, 제조 방법을 찾고자 동분서주했다.중국 상선이 드나드는 예성강 나루를 헤매며 화약의 재료인 진토(塵土)에서 염초를 구워내는 기술을 알아내기 위해 전문가를 찾아다니기도 했다.그 정성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드디어 1376년 염초 기술자 이원(李元)을 만난다. 첫 만남에서 그의 화약 관련 지식을 알아본 최무선은 이원을 집으로 초대해 수십 일 동안 극진히 대접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진심이 담긴 행위였다.이에 감동한 이원은 마침내 자신이 지니고 있던 염초 제조법을 모두 알려주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화약은 성능이 중국의 것과 비교해 손색이 없었다. 이로써 고려도 무기화된 화약의 제조국이 된 것이다.◆‘왜구를 몰아내겠다’는 어린 시절 꿈을 이루다왜구와의 싸움에서 사용될 화약을 만들 수 있게 된 최무선은 해당 관청에 “무기용 화약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갖췄다”는 사실을 알린다. 더불어 화약의 대량 제조 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는 관청을 설치하자고 청한다. 이른바 ‘화통도감’이다.하지만, 일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당시의 관료들 다수는 과학 기술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무지했다. 그랬으니 “대단치 않은 것을 만들어 나라와 백성을 속이고 있다”며 최무선을 모함하기도 했다.그런 상황에서도 최무선의 뜻은 꺾이지 않았다. 자신의 건의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몇 번이고 관료들을 설득하며 관청을 드나들었다. 그 결과가 1377년 화통도감의 설립으로 나타났다. 최무선의 정성이 왕과 고위 관료들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돌려세운 것이다. 화통도감의 책임자가 된 최무선은 ‘화통’, ‘화전’, ‘대장군’, ‘이장군’ 등으로 이름 붙인 각종 병기를 만들어낸다. 무기용 화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세력들도 최무선의 화약 병기를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쏟아냈다고 한다.이어 왜구 격퇴를 위한 다음 작업이 계속됐다. 전투에 나설 전함(戰艦)도 만들어진 것. 여기에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기술자들까지 동원됐다. 그리고, 드디어 화약과 전함이 힘을 발휘할 시간이 다가왔다.1380년 여름. 왜구를 태운 배 500여 척이 고려의 해변 마을을 노리고 금강 어귀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배를 밧줄로 묶어 바다 위에 요새(要塞)를 만들어낸 왜구의 전함들. 대적하기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최무선이 일생을 바쳐 염원했던 ‘왜구 격퇴’의 꿈은 화약을 실은 100여 척의 고려 전함이 출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일본 배에 접근한 최무선은 자신이 제조한 화약과 화포로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다. 밧줄에 묶인 일본 전함들을 휩싼 화염에 푸른 바다가 붉게 타올랐다고 한다.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승리이자, 최무선의 꿈이 이루어지던 순간이었다. 육지에 오른 왜구들 역시 돌아갈 배가 없으니 항복하는 것 외에는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시대를 앞서간 과학자 한 명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을 구해낸 것이다.이어질 다음 기사에서는 최무선이 개발해 사용한 신 병기와 영천시가 최무선의 호국정신을 이어가고자 금호읍에 조성한 최무선과학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예정이다./홍성식기자hss@kbmaeil.com

2020-06-04

“지진·코로나로 어려운 고향 함께 역경 헤쳐 나갈 겁니다”

포항 장기면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낸 소년에게 골프는 낯설고 생소한 스포츠였을 게 분명하다. 부모는 농사와 해녀 일로 자식들을 키웠다.넉넉하지 못한 형편 탓에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소년은 공장에서 작업 중 사고로 손가락을 크게 다쳤다. 한창 피가 뜨겁던 20대 초반. 당연지사 절망과 고민의 시간이 길었다.그러나 소년은 목전에 닥친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았고, 노력을 불쏘시개 삼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발견해 주목받는 삶을 살고 있다. 프로골퍼 최호성(47) 씨 이야기다.최 선수는 지난 5월 포항시 홍보대사에 위촉됐다. “최호성이 보여준 삶의 진정성과 역경을 극복해낸 과정이 지진과 바이러스로 시련을 겪고 있는 포항시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란 이유에서다.먹고 자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직장을 찾아 고향을 떠났던 스물셋 청년이 우연히 골프를 접했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프로 선수가 됐으며, 크고 작은 골프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한 사람이 돼 포항으로 돌아왔다. 흥미로운 귀향이 아닐 수 없다.세상 모든 스포츠는 인간의 삶과 닮았다. 기쁨과 환희의 순간, 고통과 눈물의 시간을 함께 겪는 게 보편의 인생사(人生事)다. 누구도 크게 다를 바 없다.“포항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는 최호성 씨를 만나 굴곡 많았을 인생사에 관해 물었다.-고향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는지.△너른 들판과 짙푸른 바다가 지척인 포항시 장기면에서 1973년 태어났다. 거기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고교도 포항 해양과학고등학교를 나왔다. 친구들과 뛰어놀던 유년은 언제나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부모님은 아직 포항에 있다고 하던데.△맞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장기면에 계신다. 부친은 연로하셔서 건강이 썩 좋지는 못하다. 어머니는 다행히 아직도 밭일을 하시고, 때로는 바다에 나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로 살고 계신다. 자식의 마음이란 다 비슷하겠지만, 두 분 모두 고향에서 오래 살아주시길 진심으로 바란다.-유년 시절에도 골프선수가 되고 싶었던 건가.△어릴 땐 골프가 뭔지도 모르는 평범한 시골 아이였다. 그저 또래들과 산과 바다를 헤매며 철부지로 살았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공장으로 실습을 나갔다. 그때 엄지손가락을 크게 다쳤다. 충격이 작지 않았고, 한 2년쯤 그로 인해 방황하던 시절을 보냈다. 골프 치는 사람을 처음 본 건 스물세 살 때다. 안양 베네스트 골프장에서였다. ‘숙식 제공’이란 아르바이트 광고를 보고 경기도로 갔다. 내가 골프라는 스포츠와 처음으로 대면했던 게 거기다.-골프장에서 일을 한다고, 직원 모두가 골프를 치는 건 아니잖나.△처음에 가서는 손님들 가방 나르고, 시설 관리하고, 청소하는 등 허드렛일을 했다. 그런데, 그곳 골프장 대표가 독특한 마인드를 가진 분이었다. ‘골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골프에 관해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골프장을 찾는 손님들에게 더욱 좋은 서비스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업무시간이 끝나면 직원 누구라도 골프를 칠 수 있게 해줬다. 덕분에 골프채를 잡아볼 수 있었다. 그게 스물다섯 살 때다. ‘이때가 아니면 내가 언제 골프란 걸 해볼 수 있겠나’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돌아보면 당시 골프장 대표가 눈에 보이지 않는 동기 부여를 한 셈이다.-골프 입문 후 짧은 시간에 프로가 됐는데.△스물다섯 살 1월에 시작해 이듬해 봄에 먼저 세미프로 테스트를 통과했다. 그때까진 내가 골프에 재능이 있다는 걸 스스로도 몰랐다. 그 해에 프로도 됐다. 지역 예선을 거쳐 선발된 사람들이 전국 대회를 위해 부산 가야 골프장에 모였다. 당시 여러 명이 같은 차를 타고 경기장으로 갔다. 바로 그곳 대회에서 프로골퍼가 된 것이다.그날 경기가 끝난 후 밤늦게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모든 게 현실이 아닌 꿈같았다. 차창 밖으로 지나온 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발 밑에 놓인 커다란 골프가방이 걸리적거리는 것도 몰랐을 정도였다.-공장 실습 때 다친 엄지손가락이 핸디캡이 되지는 않는지.△손톱 밑에 조그만 가시 하나가 들어가도 불편한 게 사람이다. 몸의 한 부분이 온전치 못하니 당연지사 힘들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훈련과 연습을 하며 지내왔다.-낚시 타법, 혹은 ‘낚시꾼 스윙’으로 유명하다고 들었다.△내 경우 다른 선수들보다 늦게 골프를 시작했다. 유연성이 젊은 골퍼들보다 부족한 게 사실이다. 골프는 몸이 회전하는 힘을 이용해 공을 멀리 보낸다. 탄력이 강한 고무줄은 쭉 당겨지지만, 고무줄이 오래 되면 탄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사람 또한 비슷하다. 회전력을 극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지를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스윙폼이 변해갔다. 그걸 본 일본의 한 사진기자가 ‘하체의 무게중심이 좌우로 오가는 게 낚시하는 모습과 닮았다’며 낚시꾼 스윙이란 이름을 붙였다. 해보니 근육에 무리도 덜 주고, 부상도 방지돼 좋았다.-주로 활동하는 무대는 어디인가.△현재는 일본이다. 물론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도 자주 참석하려고 한다. 팬들의 응원과 성원 덕분에 미국에서 초청을 받아 경기를 하기도 했다. 프로선수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 1999년이니 벌써 21년의 세월이 흘렀다. 경쟁하는 골퍼들의 나이가 대부분 20대, 혹은 30대 초반이다. 스스로 나이를 잊고, 체력을 관리해 매 경기마다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프로골퍼로 살아오며 잊을 수 없는 경기는.△지난해 일본 프로리그 헤이와 PGM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을 때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40대 중반에 이룬 성과인지라 더 그랬다. 생애 처음으로 우승의 영광을 안았던 2008년 하나투어 챔피언십도 잊지 못한다. 그때 가족들 모두가 경기장에 나와 응원해줬던 기억이 선명하다.-얼마 전 포항시 홍보대사가 됐는데.△기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과연 내가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봤다.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운 시기이기에 그간 삶의 역경을 헤쳐 온 내가 선택된 게 아닐까? 고향을 오래 떠나있어서 아직은 포항의 상황을 잘 모른다. 하지만, 이제부터 관심을 가지고 고향을 알릴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고민하려고 한다. 홍보대사라는 의미 있는 직책을 맡겨준 포항시와 시민들께 감사드린다. 포항은 철강과 해병대의 도시다. 강한 이미지를 지녔다. 나 역시 포기하지 않는 강한 신념과 성실한 태도로 모든 경기에 임하려 한다.-마지막 질문이다.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는 뭔가.△예측할 수 없는 게 인생이고 골프다.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서 50~60대가 돼서도 프로 무대에 서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이 필요하다.(웃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골프를 포함한 각종 스포츠 경기가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6-03

우뚝 솟은 에펠탑의 파리… 화려하고 큰 도시 갈림길의 연속

◇ 유럽의 중심 파리에 도착하다주말을 앞둔 금요일에 파리 같은 대도시로 들어가는 건 굳이 예상하지 않아도 고생길이 될 게 뻔하다. 차량 정체는 기본이고 길이 익숙지 않아 갈림길에서 착각해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라도 하면 난감하다. 그래서 미리 지도를 여러 번 확인하고, 특히 숙소 주변 지리를 머릿속에 넣어두어야 한다. 지금까지 오토바이로 가본 곳 가운데 가장 운전하기 어려웠던 곳은 부산이었고(하필 휴대폰이 없었다), 그 다음은 도쿄였다. 고가도로가 많은 도쿄에선 툭하면 GPS 신호를 잡지 못해 도심을 빠져나오는데 애를 먹었었다. 그 다음이 서울이다. 서울과 부산에서 운전을 어렵지 않게 하는 사람이면 유럽 도시쯤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닐까. 지도 어플인 구글맵과 맵스미의 기능이 출중해서 갈림길에서만 집중하면 목적지까지 운전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길이 막히거나 꼬불꼬불한 골목이 많은 구도심에서 길을 헤매는 건 어느 정도 각오해야만 한다.금요일에 파리로 들어간다는 게 꽤나 부담스러웠는데 오히려 파리에서 시외로 나가는 도로의 정체가 심했고 상경길은 거의 막히지 않아 수월하게 숙소가 있는 곳까지 왔다. 프랑스의 바캉스는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쯤부터 시작이라는데 폭염이 계속되다 보니 아예 일찌감치 파리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파리 도착 100킬로미터 전부터 하행선은 차들이 가다서다 반복 중이었다. 파리로 들어가는 상행선은 막힘없이 속도를 낼 수 있었다.내가 묵는 곳은 6층짜리 옛날 아파트를 개조한 호스텔, 엘리베이터가 없고 좁은 원형 계단을 걸어 올라야했다. 배낭이 계단 난간에 걸릴 정도로 비좁았다. 최대한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원형 계단 외엔 방법이 없을 듯. 가구들은 어떻게 방으로 옮겼을지 궁금하다. 숙소에서 에펠탑까진 약 4킬로미터 거리. 오토바이는 숙소에 주차장이 없이 길에 세워두었다. 주변에 주차해둔 오토바이가 많다. 숙소를 예약할 때 ‘구글 스트리트뷰’로 주변에 오토바이를 세울만한 곳이 있는지(다른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는지)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대도시 숙소는 주차장이 있는 곳은 비싸고 따로 주차비를 내야하는 곳이 많아 딱히 다른 방법이 없다. 골목길에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고 사람들의 통행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으면 눈치껏 다른 오토바이 곁에 세운다.◇ 콩코드 광장에서 개선문까지 걷다숙소에서 하룻밤 푹 자고 아침 일찍 파리 시내 관광에 나섰다. 콩코드 광장,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 에펠탑으로 한 바퀴 돌고 버스 타고 몽파르나스 빌딩까지 와서 걸어서 숙소에 왔다. 메트로 6호선 일부 구간이 공사 중이어서 이 구간 안에서 운행하는 버스를 무료로 탈 수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오르셰 미술관은 아예 갈 생각이 없었다. 관광객이 몰리는 주말에 그런 곳에 가면 제대로 관람하기도 힘들 뿐더러 피로만 더하기 십상이다. 아쉽지만 차라리 그 시간에 어디 공원이나 골목길을 걷는 편이 낫다.7월 14일 혁명기념일에 퍼레이드가 있는지 콩코드 광장에서 개선문으로 이어지는 샹젤리제 거리에는 한창 관람석과 무대를 만들고 있었다. 곳곳에 경찰이 경비를 서고 있고 일부 도로는 통제 중이었다. 샹젤리제 거리는 세계의 명품 브랜드를 모두 모아놓은 듯.특히 루이뷔통 매장 앞에는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쇼핑백을 들고 활짝 웃으며 나오는 손님 중 절반 이상은 아시아인인 듯했다. 그 앞에서 잠시 쉬며 숫자를 헤아려 봤다.도시의 규모, 특히 수도의 규모는 그 나라가 가진(혹은 가졌던) 권력의 크기와 비례한다.한때 유럽을 제패하고 광활한 식민지를 가졌던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한때 그 권력의 정점에 있던 곳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번영했던 시절 넘치는 부를 도시를 키우고 기념물을 세우는 데 썼다. 파리는 유럽의 도시 중 가장 선명하게 권력과 부의 크기를 보여주는 곳이라 생각한다.그 시절 축적해둔 것만으로도 파리는 여전히 영화를 누리는 중이다. 개선문에선 무명용사에 헌화하는 백발성성한 노병들의 행진이 있었다.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인 듯.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패전을 앙갚음하며 파리 개선문을 통과해 에펠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폴레옹이 1805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승리를 거둔 아우스터리츠 전투 후 짓기 시작했으나 생전 완공을 보진 못했다.에펠탑은 주변이 유리벽으로 막혀 있고 티켓을 구입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역시나 줄이 길었다. 한번 올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근처 공원 나무 그늘 밑에서 한참 쉬었다. 주변에 에펠탑 기념품을 파는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관광객은 많았지만 구입하는 사람들은 거의 보질 못했다. 저 사람들은 저리 팔아서 밥 먹고 살 수 있을까, ‘에펠탑 기념품도 책만큼 안 팔리는구나’ 하고 잠시 쓸 데 없는 걱정을 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파리의 마지막 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이곳저곳 다니는 게 제법 익숙해질만 하면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게 아쉽다. 여유가 있다면 파리에선 한 달쯤 지내며 꼼꼼하게 돌아보아도 좋겠다. 오고 가는 날을 제외하고 딱 이틀 동안 파리에 머무르며 다니는 것만으론 한참 부족하다.이렇게 화려하고 큰 도시를 단 3일만 있다 떠나야 한다니. 여행을 떠나기 전 가보려고 계획했던 곳의 아주 일부만 둘러보았을 뿐이다. 파리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 이동하는 데만 많은 시간과 체력을 쓰고 집중해야 하니 실제 무언가 보고 느낄 시간은 모자라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마음에 드는 곳이라도 마냥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다.오전엔 바케트와 우유를 사서 파리의 14구 골목길을 산책했고 오후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근처를 돌아다녔다. ‘셰익스피어’도 렐루서점과 마찬가지로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기대했던 것만큼 멋진 곳이었고 찬찬히 둘러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문 열자마자 첫 손님으로 입장하지 않는 이상 이 ‘유명 서점’에서 찬찬히 서가를 둘러보고 책 냄새를 맡고 고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근처 센 강변엔 헌책을 파는 노점들이 있지만 책을 고르는 손님들보다 기념품을 구경하는 손님들이 더 많았다. 책만 파는 가게보다 기념품을 함께 취급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화재 사고가 났던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고 페르 라셰즈 묘지로 가기 위해 강변을 걸으며 헌책 파는 노점을 여러 곳 유심히 보았지만 책을 사 가는 사람들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책이 아닌 공간을 ‘소비’하기 위해 서점을 찾는 것일 수도.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와 센 강변의 헌책노점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오후 6시 해가 아직 중천에 있었지만 페르 라셰즈는 묘지에 갔다가 쫓기듯 나오고 말았다. 이곳엔 알퐁스 도데, 에디트 피아프, 짐 모리슨… 세상을 떠나고도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묻힌 곳이다. 묘지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묘를 찾을 수 있는 지도가 있다. 이름을 기억할만한 이가 100명이 넘는다. 파리는 이곳에 묻힌 사람들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숙소에 돌아와서 미리 짐을 쌌다.내일은 아침 일찍 암스테르담으로. 이제 북유럽으로 간다.    /조경국

2020-06-02

예술인 장계향 그리고 소설가 이문열… 문향이 깃든 마을

현대 삶의 조건에서 주거지역은 산지보다 넓은 평지를 선호하지만, 농경사회에서는 산이 있고 냇물이 흐르는 산골이 살기가 더 좋았다. 영양은 높고 낮은 산이 감싸고 맑은 냇물이 흐르면서 바닷가에서도 적당히 떨어져있는 그야말로 현실 속에 무릉도원을 꿈꿀 수 있는 곳이다. 영양은 글자 그대로 영양가 높은 곳이다. 그래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자 1640년, 석계 이시명과 장계향은 영해에서 가솔 30여 명을 데리고 이 마을에 정착한다. 그때부터 재령이씨 집성촌이 된다. 이런 연유로 주곡고택과 유우당고택을 석보 주남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온다.#. 문화의 향기가 스며있는 두들마을 가는 길영덕, 청송 진보를 거쳐 영양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신록이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뽐내고 있는데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가 일상화되어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고 어쩌다 차들만 간혹 만날 뿐이다. 아마 조선시대의 풍경이 이랬을 것이다. 석보로 접어들자 길옆에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동상이 길손에게 조선 독립을 외치고 있었다. 남자현(1872~1933)은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고 남편 김영주가 의병으로 1896년 청송진보전투에서 전사하자 민족 계몽운동 하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유복자 김성삼을 데리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그의 생가 터에 동상과 순국비와 집을 지어놓았지만 관리가 허술하여 마당에는 징그러운 뱀이 가까이 갈 때까지도 떠날 줄을 모르고, 청마루에는 오래전에 죽은 새가 쓰러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독립운동한 집이나 유적지에는 엉망으로 관리할까.두들마을 전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외곽부터 찬찬히 둘러보았다. ‘두들’의 뜻대로 언덕을 끼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제일위의 산기슭에 음식디미방 문화체험원은 한옥으로 잘 지었지만, 어느 왕조의 궁궐 같았다. 휼륭한 사람 선양하고 알리는 것은 중요하지만 대한민국 곳곳에 관광객 유치란 역사적 사명을 띠고 대규모위락시설과 건물들을 짓는다. 인구는 줄고, 관이 동원하지 않으면 대규모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시대는 지났다. 이렇게 큰 건물 지어놓고 관리는 어떻게 할까. 걱정스럽다.지금은 개인의 브랜드화에다 혼밥, 혼술에 홀로여행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더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될 조짐이다. 문화체험원 아래는 옮겨온 주곡고택이 초라하게 웅크리고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다.#. 옮겨온 주곡고택과 유우정고택주곡고택은 석보 주남리에 유학자 이도(1636~1712)가 지은 집을 1830년에 이곳에 옮겨지은 집이다. 이 고택도 따뜻한 남부 지방의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되어있는 개방형이 아니라 추운 북부지방의 환경에 따라 사랑채 안채가 서로 스크램 짜듯이 부둥켜안고 있는 ‘ㅁ’자형(뜰집형)의 집이다. 사람이 살지 않으니 윤기 사라진 고택이 더욱 스산했으나 집 앞에 하얀 찔레꽃 향기가 일말의 생기를 넣어주고 있다.두들마을 중간에 석계고택과 장계향 유허비가 있고 연이어 여러 고택들이 있는데 음식디미방 전시관, 교육관, 예절관, 유물전시관, 체험관 등 온통 마을 곳곳에 너무 많이 해놓았다. 마을 왼쪽 끝에는 석보 주남리에 이상도(1773~1835)가 죽기 2년 전인 1833년에 지은 집을 후손 이돈호(1869~1942)가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처음 건립한 이병도의 장남 이기찬의 호가 유우당이라 그대로 당호로 하였다. 이 집을 옮긴 이돈호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한다. 이 유우당에서 태어난 조카 이병각(1910~1941)은 청년, 민중운동을 한 항일시인으로 시와 산문, 평론을 넘나드는 작품 활동을 하다가 일찍 요절하여 빛을 발하지 못했다. 병든 몸으로 직접 한지에다 붓으로 쓴 시집 첫 장에 ‘가장 괴로운 시대에 나를 나허주신 어머님께 드리노라’며 괴로운 식민지 시대를 대변한다.“동풍이 불면 호수는 외로워지고/ 나의 소녀는 나비처럼 지쳐진답니다./ ‘연모(戀慕)’ 한 구절과 /밤은 외로운 창에 기대여/ 차운 달과 함께 새움니다.” 회야곡(悔夜曲) 한 구절로 그의 시상을 떠올려본다.그 옆에 붙어있는 석간고택은 석계 이시명과 장계향의 넷째 아들 항재 이승일(1631~1698)의 7세손 좌해 이수영(1809~1892)의 집이다. 이수영의 5세손인 소설가 이문열이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이기도 하다. 석간고택 앞에는 석천서당이 단단하고 힘 있게 버티고 있었다. 석계 이시명이 입향하여 초가로 강학을 하던 곳인데 후손과 유림이 중건하여 재령이씨 집성촌인 이 두들 마을의 문필이 이어지게 하여 이문열 같은 우뚝한 소설가가 나온다. 안동의 전주유씨 무실파 유씨들도 기양서당의 교육이 문필이 끊어지지 않는 맥이 이어져 유안진 시인도 이런 자양분을 받고 자란 덕분이다.#. 광제원과 원리(두들)마을과 일그러진 영웅 이문열우리나라 의술이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오른 시발점은 1885년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광혜원이고, 국민의 질병치료목적으로 1900년에 설립한 국립병원이 광제원이다. 그래서 이 마을도 조선시대 광제원이 있었다고 원리마을이다. 석계는 교육으로, 장계향은 빈민들과 어려운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광제원이 생기기 260년(1640년 입향)전부터 그 역할을 수행했다. 신사임당은 율곡 같은 천재를 낳았지만, 자아가 뚜렷한 자유분방한 예술가였는데 국가에서 장려한 현모양처라면, 시댁과 시가 그리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들에게 베푼 진정한 현모양처이다. 공자도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 사랑의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일까. 상대방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출발해야 된다.검소한 건물의 석계고택 위에는 80~90년대 소설로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이문열의 집필실 겸 광산문학연구소를 둘러보았다. 너무 크고 웅장한 건물을 둘러보고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베스트셀러 덕분에 엄청난 인쇄가 들어와 고향 문중 땅을 사서 한국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도를 양성하기 위하여 문학연구소를 개인 사비로 한옥을 지었지만 지금은 인쇄수입이 거의 없는 상태라 유지하지 못하는 유령의 집이 되어버렸다. 뜻은 좋았으나 작가들 대부분은 공간이 작아도 자신만의 방에서 우주적인 무한한 상상력과 집필욕구가 생기는 것이지 이렇게 ‘ㅁ’자로 붙어있는 큰 건물은 세미나용이지 창작의 산실은 아니다. 큰 세미나용 1채 정도를 짓고 나머지는 방 하나 청마루 한 칸, 부엌과 화장실 공간의 원룸식 조그마한 한옥 한 채씩 지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흔히 가수가 자신의 노래 가사 대로 산다는 말이 있다. 차중광은 27살에 낙엽 따라 가버렸고, 권혜경은 ‘산장의 여인’노래대로 쓸쓸히 죽었고, 곡예사의 첫사랑같이 줄을 타며 잠시 행복하다가 50살에 가버린 박경애, 반면에 무명가수에서 ‘쨍하고 해뜰 날’로 쨍한 송대관도 있다. 인기 작가 이문열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책 제목같이 추락하는 일그러진 영웅이 되어버렸다. 2001년 지역감정, 이념, 색깔론을 편향된 극우적인 발언으로 ‘이문열돕기운동본부’에서 전국에서 모은 733권을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의 이문열의 작업실 ‘부악문원’ 앞에 가서 “반납 받지 않으면 고물상에 10원에 팔아 버리겠습니다.”의 고통스런 아픔을 겪어야 했다.현대의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고전으로 후세까지 남아있을 책들은 있을까.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은 70년대,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는 80년대에 감성에 어울리는 소설들이다. 대중의 인기란 물거품 같은 것이다. 예전에는 ‘권력의 프레임’으로 걸출한 영웅이나 카리스마적인 최고의 지도자가 그 시대를 끌어갔다면, 다원화된 지금은 ‘평등의 프레임’으로 각자 개인의 영웅시대가 되었다.한국최고의 인기작가 반열에 오른 대중작가였고, 한국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이었지만, 대중에게 잊혀져가는 것은 왜일까. 장편 30편, 중단편 60편이 넘고,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쏟아냈다. 이문열 작가의 말대로 “모친이 임신했을 때 좌익 활동을 하는 부친을 도와 전단지를 돌리다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갔다. 부친이 “배 속에서부터 치열하게 싸우는 투사라며 이열이라고 이름 지었다. 좌익투사이름을 타고난 내가 ‘보수우파골통’소리를 듣는 상황이다.”고 했다.두들마을은 차와 관광객 위주로 꾸미다보니 옛 삶의 애환이 묻어나는 골목길도 없다. 너무 많은 장계향 체험관을 지어 활용도가 떨어져 2002년 19억원 들여 지은 장계향 예절관과 유물관을 이문열의 광산문학연구소와 합쳐 경북도와 영양군이 25억원 들여 ‘이문열 문학관’을 짓는다.건축가 김수근은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것은 넓을수록 좋다.“고 했고 근대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Miss Van der Roeh)는 “덜 장식적이어야 더 아름답다.”라고 건축미학의 역설을 설파했다. 우리시대 “모든 건축은 쇼핑센터가 되었다.”고 네덜란드 건축가 렘 클하스의 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06-02

민중 중심 역사관을 바로세우다

김주영은 1939년 경북 청송군 진보면에서 태어났으며 진보초등학교와 진보중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에서 대구농림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공부한 후에는, 오랜 시간 안동에 있는 엽연초생산조합에서 일하였다. 1976년 상경할 때까지 안동 지역의 문인들과 어울리며 ‘안동문학’이라는 동인지를 창간하기도 하였다. 김주영이 창작한 방대한 문학세계는 도시 빈민들을 다룬 소설, 대하역사소설, 유년기 체험을 다룬 소설로 나눠볼 수 있으며, 이러한 문학세계는 “소외된 국외인들인 배고픈 유년, 도시빈민 악동, 과부, 유랑인을 묘사”(양진오)하거나 “의리 이데올로기를 내세움으로써 동양적 전통의 웅자(雄姿)한 남성문학의 전통”(하응백)에 이어진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김주영의 ‘객주’는 작가의 문학적 특징이 압축된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객주’는 1979년 6월 2일부터 1983년 2월 29일까지 총 1천465회에 걸쳐 연재된 대하 역사소설이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창작과비평사에서 3부(1부 외장(外場), 2부 경상(京商), 3부 상도(商盜)) 아홉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가 1992년 같은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나왔다. 2003년에는 문이당으로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이 나왔고, 2013년에 문학동네에서 10권이 출간됨으로써 삼십여 년 만에 완간에 이르렀다.‘객주’는 민중 중심의 역사관을 구체적 생활상 속에 생동하는 이념으로 육화시킨 대표적인 사실주의적 역사소설로 꼽힌다. 이전의 역사소설이 왕실이나 영웅 중심이었다면, ‘객주’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에서 맨 아래를 차지하는 상인 그 중에서도 최하층에 해당하는 보부상을 전면에 내세웠다. 보부상은 봇짐장수로 앉아서 파는 보상(褓商)과 등짐장수로 서서 파는 부상(負商)을 함께 아우르는 말로, 떠돌이 행상을 말한다. 보부상은 상인 중에서도 특히 궁핍하고 불우한 처지에 속했던 자들로서, 대체로 가족이 없는 홀아비나 고아 또는 가난하여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임경희, ‘경상동에서 조선의 보부상을 만나다’, 민속원, 2014, 20면) 김주영은 보부상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각 지역의 토속적인 산물과 풍속, 구전설화와 야담, 음담, 민요, 판소리, 타령, 탈춤, 무가 등을 전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민중의 삶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작품을 창조하는데 성공하였다.떠돌아다니는 것을 본업으로 하는 보부상이 주인공인 소설답게 작품의 무대로 여러 곳이 등장한다. 삼남(三南)지방을 배경으로 한 1부에서는 문경, 상주, 안동, 예천, 하동, 구례, 전주, 강경, 연산, 군산포 등이 나온다. 2부에서는 주요한 무대가 서울로 바뀌고, 사적인 갈등을 다루었던 1부와는 달리 세도가인 김보현이나 거상 신석주 등을 통해 구한말 조선의 본질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차원으로 확대된다. 2부에서는 무교, 애오개, 약고개, 압구정, 두뭇개, 수철리, 시구문 등의 서울 지리가 매우 상세하게 묘사된다. 3부에서는 서울이나 평강과 더불어 원산이 주요무대로 새롭게 등장한다. 이 때의 원산은 단순한 지방 도시가 아니라, 1876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1880년에 개항한 3대 항구(부산, 원산, 인천)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원산을 배경으로 한 3부에서는 자연스럽게 일본의 침략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게 된다.‘객주’를 지도 삼아서 답사를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작품의 배경이 된 공간들에 대한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다. 이것은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답사 등을 하며 기울인 노력이 만만치 않음을 증명한다. 또한 등장인물의 형상화도 매우 실감나는데, 이것은 작가의 유년기 체험과도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김주영이 나고 자란 진보라는 곳은 본래 장시(場市)가 성한 교통 요지였으며, 생계를 책임 진 어머니는 저잣거리 마을에서 품을 팔아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김주영은 ‘객주’를 쓰게 된 첫 번째 동기로, 어린 시절 집 밖의 유일한 큰 세계를 이루었던 저잣거리 사람들의 삶을 그려야 한다는 작가적 부채 의식을 꼽을 정도이다. 요컨대 김주영에게 장터와 그 곳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은 너무나 익숙한 삶의 원풍경이었던 것이다.‘객주’는 민중과 권력층의 대립이라는 기본 갈등에 바탕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병렬적으로 연결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민중과 권력층의 대결은 일방적으로 후자가 힘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민중들 역시 만만찮은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보부상들의 공동체 의식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그들의 지략과 완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객주’에는 음모와 협잡이 가득하여 배신은 물론이고, ‘배신의 배신’, 나아가 ‘배신의 배신의 배신’까지 일어난다. 여기에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보부상들의 공동체이다. 그들은 “동병상련으로 객고(客苦)를 달램에 유무상통하여 혈육지간보다 질긴 정분을 가지고 간담상조(肝膽相照)하고 환난상구(患難相求)하는” 윤리를 철저히 지켜나가며, 그것을 위반했을 시에는 엄격하게 응징한다. 본래 김주영은 고아, 넝마주이, 창녀, 고물장수, 백정 등의 주변 인물들을 주요한 문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왔으며, ‘객주’의 보부상들은 작가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민중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객주’는 후반부로 갈수록 임오군란과 같은 역사적 사건의 비중이 커지는 경향을 보이며 동시에 주요한 갈등이 민중과 지배층의 대결에서 조선과 일본의 대결로 변모한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은 1878년에서 1884년까지의 시기는 우리 민족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때이다. 작품의 전반부가 조선의 봉건적 체제에 대한 문제제기에 집중했다면, 후반부에서 비판의 대상은 당시 가장 위협적인 외세였던 일본으로 옮겨간다. 이 작품의 인물 대다수는 반일의식을 공유한다. 주인공인 천봉삼은 이러한 반일의식을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인물이다. ‘객주’의 모든 갈등은 결국 외세/민족이라는 이분법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왜선을 공격하여 감옥에 가게 된 천봉삼을 빼내는 일에 조선의 모든 역량이 총집결되는 모습을 통하여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용익, 매월이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명성황후와 고종까지 천봉삼의 탈옥에 동조하는 것이다.2013년에 새롭게 덧붙여진 10권은 탈옥 이후 천봉삼의 삶을 다루고 있다. 1884년 갑신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 10권에서 천봉삼은 울진 포구에서 현동 저자나 내성으로 가는 십이령길에 나타난다. 본래 울진과 봉화를 잇는 십이령길은 보부상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보부상들은 소금과 해산물이 풍부한 울진의 흥부장, 울진장, 죽변장에서 미역, 고등어, 건어물 등을 구매해 동서 방향 주 도로인 십이령길을 걸어 봉화로 향했으며, 봉화에선 비단, 담배, 곡식을 싣고 되돌아왔다고 한다. (송기역, ‘힐리로드-옛길에서 사람, 그리고 보부상을 만나다’, 이야기의숲, 2015, 231면)십이령길에 나타난 천봉삼은 조선을 대표하는 상인이자 일본에 맞서는 지도자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남행하였다가 산적 무리에게 잡혀 그들의 염탐꾼 노릇을 하는 범부이다. 10권에서는 일본이 아니라 천봉삼과 십이령길의 상단을 괴롭히는 산적 무리를 징치하고 장시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야말로 핵심적인 과제가 된다. 소금 상단의 도움으로 구출된 천봉삼은 결말에 이르러 드디어 안정된 가족을 이루고 생달 마을에 정착해 촌장이 된다.천봉삼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생달 마을에 이상적인 마을을 건설한다. 이곳에서는 대낮에도 노루가 뛰어들고 솥에는 꿩이 저절로 날아들며, 오랫동안 버려졌던 묵정밭이 불과 2년여 만에 “꿀이 흐르는 문전옥답”으로 변한다. 이 곳은 바로 천봉삼이 그토록 찾아 헤맨 “길지(吉地)”이며, 다음과 같이 이상적인 장소로 이야기된다.“징세나 부역이 없고, 토호들의 발호나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없고, 양반도 없고 상것도 없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열매가 열리는 그런 땅이겠지요. 마당에 노루가 뛰어들고, 솥에는 꿩이 저절로 날아드는 그런 땅이겠지요.”천봉삼이 정착한 생달마을은 지난 날 조선의 방방곡곡을 걷고 걷고 또 걷다가 사라진 이름 없는 보부상들이 꿈에도 그리던 이상향이자, 30여년 만에 작가 김주영이 천봉삼을 비롯한 보부상들에게 바치는 선물에 해당한다.외딴 마을에 사는 서민들의 물류를 책임치며 고단한 삶을 살다 간 보부상에 대한 선물은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옛길박물관’과 ‘객주문학관’은 보부상을 기리는 현실의 장소들이다. ‘객주’는 경기도 송파지역의 쇠살쭈인 조성준이 자신의 전처와 간부(姦夫) 송만치가 살고 있는 문경에 가서 복수극을 펼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 복수극의 무대가 된 문경에는 지금 옛길과 보부상에 관한 유물과 유품이 전시된 옛길박물관이 있다. 또한 김주영의 고향인 청송군 진보면에는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만든 객주문학관이 존재한다. 옛길박물관이나 객주문학관, 혹은 십이령길을 조용히 걷다보면 동료 보부상을 위해서 목숨도 흔쾌히 내놓던 천봉삼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문학평론가 이경재1970년 ‘월간문학’ 가작 입선, 이듬해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김주영은 경북 청송 출신이다. 토속적인 농촌 배경의 설정, 향토색 짙은 문장과 현장감이 살아있는 비어와 속어의 능수능란한 구사 등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여자를 찾습니다’ ‘아들의 겨울’ ‘천둥소리’ ‘홍어’ ‘빈집’ ‘객주’ 등의 작품을 썼고,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을 받았다.

2020-06-01

문경과 자연은 하나… 즐거움 넘치는 테마파크 변신

◇문경 찾는 새로운 즐거움, 문경에코랄라문경에코랄라는 개장 1년 만에 20여 만 명이 다녀가 문경의 대표 관광콘텐츠로 부상했다. 환경과 생태를 뜻하는 ‘에코’와 즐거움을 뜻하는‘룰루랄라’의 합성어인 ‘에코랄라’는 2018년 개관한 국내 최초 ‘문화·생태·영상 테마파크’이다.문경시 가은읍에 있으며 주요시설로는 기존 시설인 석탄박물관, 가은오픈세트장, 모노레일, 철로자전거 등과 더불어 ‘에코타운’과 야외체험시설인 ‘자이언트 포레스트’가 있다.문경에코랄라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에코타운에는 관람객이 직접 배우, 감독이 돼 영상 촬영, 기획, 편집까지 체험할 수 있는 에코스튜디오와 360도 써클 비전 및 입체효과로 백두대간을 감상할 수 있는 에코써클,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양한 VR 체험이 가능한 키즈 플레이 등 다양한 교육·문화체험의 기획전도 준비돼 있다.9개의 테마공간으로 구성돼 유아 및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야외체험시설인 ‘자이언트 포레스트’에서는 자연과 사람의 상생을 주제로 한 촬영 체험과 자연과학 체험이 가능하다. 거인을 테마로 한 거인광장, 거인숲, 거인언덕 등 창작동화 ‘거인의 숲’을 기반으로 해 이야기를 따라 숲의 주인인 거인을 깨우는 ‘AR(증강현실)’기반의 모험 공간이기도 하다.이와 더불어 기존 시설인 석탄박물관도 중요 포인트 중 하나다.6천730점의 석탄관련 소장 유물을 보유한 이곳에는 전시물뿐만 아니라 갱도체험을 할 수 있는 ‘거미열차’와 1995년 폐광한 은성갱을 보존한 ‘갱도 전시장’이 있어 국내 석탄 생산량 2위를 자랑하던 문경의 석탄산업의 면모를 볼 수 있다.지난해에는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에서 발표한 470여개 산업관광 시설 중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 SM타운 등과 함께 ‘추천! 가볼만한 산업관광지 20선’에 선정되는 쾌거를 거뒀다.‘문경에코랄라 新한류 뮤직콘텐츠 플랫폼 구축’과제로 문체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한 국비 공모사업에 선정돼 문경에코랄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대표 관광 캐릭터로 개발될 ‘랄라스타즈’와 함께 음악과 율동을 함께 즐기는 참여형 영상콘텐츠를 개발했다.올해는 민자유치사업으로 추진된 ‘포레스트 어드벤처 조성사업’ 1단계로 짚와이어가 오픈할 예정이다.이는 고도차 83m, 코스 길이 600m로 좌식형 2개 라인, 슈퍼맨형 2개 라인으로 최고속도 시속 100km의 익스트림을 경험할 수 있는 시설이다. 슈퍼맨형은 마치 슈퍼맨이 돼 하늘을 나는 쾌감을 경험할 수 있어서, 매우 인기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짚코스터, 마운틴루지 조성 및 은성 갱도 내 ICT 기술을 적용한 가상현실 실감콘텐츠 체험시설까지 구축 계획이 있어 자연과 하나 되고 실감나는 대단위 테마파크로 계속 변신 준비 중이다.◇굽이치는 계곡 따라 즐기는 신선놀음, 선유동 계곡(仙遊洞 溪谷)신선이 노닐만큼 아름다운 계곡이라는 뜻을 담은 선유동 계곡(仙遊洞 溪谷). 선유동천으로도 불리는 물길을 따라 약 1.7km의 나들길이 조성돼 있다. 이 계곡에는 시리도록 맑은 물과 고목이 어우러져 이름만큼이나 장관을 이룬다. 대야산 자락의 용추계곡에서 시작된 물길은 선유동 계곡으로 이어져 굽이굽이 기암괴석과 함께 절경을 이뤄 예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산림청이 실시한 ‘2018 숲길 이용자 만족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선유동천 나들길은 2개 구간 총연장 8.4km로 독립운동가 운강 이강년선생 기념관에서 시작해 월영대까지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로 숲길 이용객들은 선유구곡, 용추계곡 등 숲길 주변의 풍부한 역사·문화 자원을 체험할 수 있다.◇관광사격장문경시는 불정동 소재 관광사격장에 레이저 스크린 사격장을 설치, 개장했다. 스크린 사격장이 들어선 문경관광사격장은 전국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클레이 사격을 즐길 수 있다. 클레이사격뿐만 아니라 권총, 공기총 사격까지 경험해 볼 수 있는 종합사격장으로 일반 초보자들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1:1 맞춤 코칭을 제공한다.이번에 설치된 레이저 스크린 사격시스템은 레이저로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방식으로 클레이, 소총, 권총 등 자유롭게 총기 선택이 가능하고 타격, 속사, 실거리 사격 등 다양한 테마로 즐길 수 있다.이용요금은 1인 2천원, 2인 3천원으로 계절에 상관없이 즐길 수 있으며 실탄 소음이 두려운 어린이들도 이용 가능해 가족, 친구 혹은 연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 공간이 될 전망이다.고윤환 문경시장은 “문경은 백두대간의 축복을 받은 생태자원과 문경새재, 석탄박물관을 비롯한 역사 자원 외에도, 단산 모노레일과 짚라인, 패러글라이딩 등 이색 레포츠 시설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며 “이번에 개장한 스크린 사격장도 기존 관광사격장과 함께 문경의 명소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문경전통시장가은 아자게 장터시장은 마을기업형 문화체험시장으로 육성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상인들의 자생력 확보를 위해 상인회 협동조합을 구성 했으며, 조직 및 자생력 강화를 위해 상인회가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사업을 적극 홍보할 계획이다.가은 아자게 장터시장 상인회에서는 매주 주말 민속품 경매장을 열어 전통시장을 찾은 많은 관광객들이 지역의 특산품과 꼭 필요한 생활용품, 일반 시장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었던 물건도 경매를 통해 저렴하게 구매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중앙시장에는 59억원을 투자해 문화의 거리 상점가와 신흥시장을 연계해 ‘점촌 상권활성화 구역’으로 육성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청년몰 사업 및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육성할 계획이며, 청년상인 입점을 통해 지역특산물, 로컬푸드를 활용한 대표 명품 브랜드 상품을 개발해 전통시장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특성화 시장 조성을 통한 관광명소 계획도 함께 추진해 문경의 관광자원과 연계해 관광객 등 외부 고객 유입 확대로 전통시장 활성화와 지역경제 경기회복에도 크게 기여 하고 있다.신흥시장은 골목형시장 및 도시활력증진사업 등을 통한 거점형시장으로 육성 발전해 나가고 있다. 방앗간 특화 상품을 개발하고, 전시·판매 할 수 있는 판매장을 조성해 시장의 경쟁력을 키워 나갈 계획이다.주말 벼룩시장과 할매장터도 함께 운영해 주민 참여형 벼룩시장으로의 변화도 시도한다.이를 위해 시장을 이용하는 시민들과 관광객 등을 대상으로 모바일 홈폐이지를 제작하고 홍보와 이벤트 지원도 아끼지 않을 계획이다.문경시는 전통시장 시설현대화사업으로 추진한 문경전통시장 약돌한우·돼지 타운 조성 준공식을 지난 4월 27일 문경전통시장에서 개최했다.2016년 전통시장 시설현대화사업 공모사업에 선정돼 국비 18억원, 시비 15억원 등 총 33억 원의 사업비로 2017년 1월부터 2020년 2월까지 약 3년간의 공사를 거쳐 결실을 이루게 됐다.이번 준공으로 손님들이 고기를 직접 사서 구워 먹을 수 있는 상차림 식당 3곳과 정육점 1곳이 들어 선 약돌한우·돼지타운 1동과 컨테이너형 휴게음식점 및 특산물판매장 3곳, 고객쉼터 1곳이 들어섰다.특히 아케이드 막구조물 등 주변 환경을 개선해 기존 도로변 위험에 노출돼 있던 노점상들을 장옥 안으로 이전시켜 눈·비 걱정 없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장사를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앞으로 상설시장으로 나아가는 데 첫발을 내딛었다.변상진 일자리경제과장은 “먹거리 타운은 중부내륙고속철도의 개통을 앞두고 문경새재, 단산모노레일, 문경온천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문경전통시장으로 유입되도록 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강남진기자75kangnj@kbmaeil.com

2020-05-31

‘코로나19’ 슬기롭게 극복하고 미래 준비해 볼까요

2020년이 열린 직후 시작된 이른바 ‘코로나19 사태’는 한국은 룰론 전 세계를 공황상태에 빠뜨렸다. 병원마다 바이러스 감염자가 넘쳐났고, 도시와 도시, 나라와 나라를 잇는 길이 일시적으로 끊기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한국의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고, 감염자를 치료하는데 행정력을 쏟았다. 고령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 애쓴 고령군의 지난 몇 개월간 행적을 꼼꼼하게 돌아본다.◆적극적 대처로 코로나 바이러스 극복 노력고령군은 이미 지난 1월부터 코로나19에 대한 선제적 방역과 침체에 빠진 지역경제 활성화, 취약계층 복지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코로나19 발생 초기인 1월 8개 반 53명으로 구성된 방역대책반을 운영해 다중이용시설을 방역하는 동시에 방역물품을 지원했고, 인접 지역에서 감염이 발생하기 시작한 초기에 체육·관광시설 30곳과 경로당 204곳 등을 운영 중단했다.더불어 집단감염을 방지하고자 4월 예정된 대가야체험축제 등 크고 작은 지역 축제와 행사도 취소했으며, 복지시설 11곳 등 집단시설에 대한 신속한 코호트 격리 조치와 종사자 200명 전원의 선제 검사로 바이러스 확산 차단에 만전을 기했다.그러나,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한 지역경기 침체는 피해가기 힘들었다. 이에 고령은 ‘경제 살리기 비상대책 TF팀’을 구성해 주민 생계 안정을 위한 지원을 모색했다.코로나19에 대응해 예산 191억 원을 증액했고,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재난긴급생활비 지원, 한시적 긴급복지 지원, 저소득층 한시생활 지원, 코로나19 격리자 생활 지원, 코로나19 격리자 생필품패키지 지원 등의 신속한 경제지원과 복지정책을 실시했다.또 코로나19로 인해 타격을 입은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13억 원의 경제회복 지원, 4억 원의 소상공인 카드수수료 지원, 상하수도 요금 감면 지원, 소상공인 특별경영안정자금 지원, 소상공인 시장진흥공단 대출, 미소금융창업 운영자금 등의 사업도 병행했다.◆군민과 군수, 공무원이 뭉쳐 ‘지역 경제 살리기’지역경제 활성화 특별대책으로 고령사랑상품권 특별적립 행사와 군청 직원 급여 일부를 상품권으로 구매하는 등 총 50억 원 상당의 고령사랑상품권을 발행했고, 4월 한 달간 군청 구내식당 운영을 중단하고, 하루 평균 500여 명의 공직자가 외부 식당을 이용해 외식업 살리기에 앞장섰다. 관내 농산물 팔아주기 운동과 드라이브 스루 판매도 눈길을 끈 정책이다.대구·경북 최초로 제로페이 연계 모바일상품권 도입 등을 통해 침체된 지역경제의 정상화를 위해 행정력을 동원하기도 했다.지역고용대응 특별지원 사업도 펼쳤다. 무급휴직 근로자 지원과 특수형태 근로종사자·프리랜서 등 사각지대 지원을 통해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최대 월50만원을 지원한 것. 이러한 일련의 정책에 대해 곽용환 고령군수는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지원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실시했다”며 “군민들이 속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또한 고령군청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비해 행정 시스템을 개선하는 논의를 심화시키고 있다.◆철저한 방역으로 코로나19 확산 막아내이와 함께 고령군은 효과적인 방역 활동으로도 주목받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고령은 물론 전국으로 일파만파 확산되던 2월 말. 고령은 재난안전대책본부를 구성해 매일 2회 이상 대책회의를 열어 방역 방법을 의논했다.코로나19 현황을 고령군 홈페이지와 군 공식 페이스북, 문자알리미를 통해 실시간으로 주민들에게 전한 것은 물론, 고령군보건소는 자체 인력을 활용해 관공서, 재래시장, 유관기관, 종교시설의 일제 소독에 나섰다.바이러스 감염자 확산을 막기 위한 대책도 세웠다. 1월 말부터 고령군 보건소에 선별진료소를 설치·운영했고, 선제적 대응을 위한 역학조사반과 자가격리자 관리전담반도 편성했다.관리전담반은 유증상자를 상담하고 모니터링 했으며, 자가격리자들에겐 생필품을 전달해 그들의 불편을 줄였다. 강화된 선별진료소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근무 인력 10명이 투입됐다. 더불어 “코로나19 감염 의심 증상이 생기면 언제든 선별진료소를 방문해 줄 것”을 주민들에게 부탁했다.“확진자와 의심환자가 방문한 장소는 소독이 완벽하게 완료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폐쇄하고, 확진자와 접촉한 사람은 자가격리 하거나, 능동감시 조치를 취했다”는 게 고령군청의 설명이다.이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문화누리관, 대가야박물관, 관광지 등은 일시적으로 운영을 중단시키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고령시외버스터미널과 주민들의 발이 되는 버스와 택시는 매일 2회 이상 소독을 진행했다. 공공기관과 어린이 이용시설 출입구엔 열화상감지카메라가 설치됐다. 대가야시장상인회는 5일장을 임시 휴장해 외부로부터 전파될 수 있는 바이러스 감염원을 차단하는데 노력했고, 노점상의 영업도 일부 통제된 바 있다. 손 씻기, 기침을 할 경우 입과 코 가리기, 마스크 착용 등의 행동 수칙을 폭넓게 전파했음은 물론이다.◆고령군의사회의 헌신과 희생도 주목받아고령군의사회의 희생과 땀방울도 코로나19를 이겨내고 군민들이 일상을 찾아가는데 큰 도움이 됐다. 군의사회 8명의 회원들은 3월 초부터 주말 휴일을 마다하고, 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서 의료 지원에 나섰다.이들은 순서를 정해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선별진료소에서 근무했다. 코로나19와 관련된 각종 상담과 검체 채취 등으로 주말을 정신없이 보낸 것. 이는 재론의 여지없이 희생정신에서 나온 값진 행동이었다.이와 관련 고령군의사회 백두현 회장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선별진료소에서 근무하는 보건소 의사들이 전혀 쉬지 못하고 있어 주말이라도 휴식할 수 있도록 우리들이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령군의사회는 인력 지원 외에도 마스크와 안면보호기를 기부하기도 했다.고령군은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군내 공중보건의 6명을 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 배치해 1일 2명 교대 근무 형태로 24시간 진료를 이어갔다.전국적으로 확진자가 급격히 증가한 지난 2월 말엔 감염병 경보가 ‘위기 단계’에서 ‘심각 단계’로 격상됐고, 선별진료소를 찾는 환자도 대폭 늘어 인력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군의사회의 인력 지원에 김곤수 보건소장은 “모두가 지쳐있을 때 지역 의료인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됐다”며 “고령군의사회의 헌신에 감동했다”고 말했다.◆드론을 활용한 방역과 심리지원 서비스도 진행이번 코로나19 사태 와중에선 사람이 아닌 ‘드론’도 톡톡히 제 역할을 수행했다.코로나19 감염자가 인근 지역에서 발생했을 때 스마트드론항공(대표 한창수)은 재능기부 형식으로 고령군청년회의소 회원들과 함께 드론을 활용한 방역소독을 펼쳤다.3대의 드론을 이용해 16개 학교를 대상으로 진행된 방역소독은 사람이 소독제를 뿌리는 기존 방식에 비해 보다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소독할 수 있었다는 평가다. 소독제의 인체 노출 위험을 줄이고, 분사 속도 또한 빨랐다.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일상생활로의 복귀를 도운 ‘코로나19 심리지원 서비스’도 바이러스로 인해 고통 받았던 고령군민들을 위로했다.코로나19 심리지원 서비스를 통해 퇴원 확진자, 자가격리자, 정신건강복지센터 등록인 등은 심리안정 용품을 제공받고, 전화 상담과 안부문자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영남권 트라우마센터와 연계된 서비스였다.앞서 언급한 다양한 각도에서의 코로나19 확산 방지 정책 때문인지 고령군에선 지난 19일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치료를 받던 마지막 입원환자가 완치돼 퇴원했다.2월 26일 첫 확진자가 확인된 고령군은 현재까지 9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4월 2일 마지막 확진자 발생 이후엔 추가 확진자가 없는 상태. 안정화 시기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이를 감안한 듯 곽용환 군수는 “앞으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생활 속 거리두기 등 생활밀착형 방역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갈 것”이라는 약속을 내놓았다./전병휴기자

2020-05-28

“우리가 만든 집은 ‘작품’ 끝까지 책임집니다”

10대 때부터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소년이 있었다. 집을 만든다는 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인지 몰랐지만, 그 아이는 무작정 ‘집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꿈을 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며 키워간다면 꿈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귀 위에 연필을 꽂고 건물을 바삐 오르내리는 이들을 지켜보던 소년은 자라서 건축가가 됐다. 참샘건설 최광식(47) 대표 이야기다.건설 현장 청소 일부터 시작해 현재는 ‘작지만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 믿음직한 건설사’를 이끌고 있는 사람.만드는 건축물 모두에 ‘좋은 스토리’를 담고 싶다는 그는 다른 것에 눈 돌리지 않고 집 만들고, 관리하는 일에 30년 가까운 시간을 쏟아 부었다. 어려운 시기에도 뜻을 함께 해준 직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참샘건설 직원들은 “우리가 만든 건물은 끝까지 우리가 책임진다”는 자세로 일한다. 건축물에 ‘애프터서비스’ 개념을 과감하게 도입한 것이다.자신을 성장하게 만들어준 포항을 위해 봉사활동에도 열심인 최광식 대표는 최근 부모님을 위한 두 번째 집을 완성했다.“스물셋에 첫 번째 집을 만들 땐 모든 것이 내 중심이었지만, 이번에 지은 집은 아버지·어머니의 요구와 편의를 중심에 두고 작업을 진행했다”며 환하게 웃는 최 대표. 이는 그가 늘 강조하는 ‘고객 중심주의’의 실천이기도 했다.최 대표를 만나 살아온 과정과 건설회사 대표가 되기까지 겪은 일, 지향하는 건축의 방향과 참샘건설의 비전 등을 물었다. 아래 그의 답변을 요약한다.-포항에서 태어났다고 들었다.△1973년 보경사 인근 송라면에서 출생했다. 초·중·고교도 포항에서 나왔다. 대학에선 토목을 전공했다. 아내와 쌍둥이 아들, 늦둥이 딸과 살고 있다. 아들 둘은 모두 미대에서 디자인을 공부 중이다.-어릴 때부터 건축에 관심이 있었는지.△무엇이건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했다. 그림도 곧잘 그렸다. 하지만 시골이라 미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앞으로 건축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가졌다. 막연하게 집을 만드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다. 귀 위에 연필을 꽂은 채 안전모를 쓰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부러웠던 것 같다.-건축 일을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대학 다닐 때도 아파트 공사 현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별다른 기술이 없으니 막노동부터 시작했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앞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건축을 밑바닥부터 배우기 위해서였다. 스물여섯에 토목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많은 사람과 접촉하며 관계를 만들어가겠다는 내 꿈과는 멀어 보여 그만두고, 작더라도 내 업체를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참샘건설을 시작한 시기는.△토목회사를 퇴사했던 2000년대 초반 즈음이다. 그 이전에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부모님의 집을 지었다. 시골에서 억대의 건축비가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아들을 믿고 좋은 집을 만들어보라며 큰돈을 기꺼이 내주신 부모님이 내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집에서 20년 넘게 살다가 최근에 내가 새롭게 만든 집으로 이사했다.-참샘건설이 어떤 회사인지 소개한다면.△현재 정직원이 10여 명이다. 이루고자 하는 뜻을 함께 공유하는 가족 같은 사람들이다. 우리 회사가 꿈꾸는 건 설계부터 시작해 완공까지 하도급을 맡기지 않고 건축의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내는 것이다. 다행히 구성원 모두가 이런 미래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다른 건설회사에 비해 이직이 많지 않다는 것도 참샘건설의 자랑이라면 자랑이다.-지방에서 작은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영업과 수주가 어려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만의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긍정의 힘으로 회사를 키워가려 애쓰고 있다. 특히 건물이 만들어진 이후의 사후 관리와 애프터서비스에 노력한다.-건물을 애프터서비스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우리가 만든 집과 건축물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몇 해 전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땐 직원 모두가 2주 동안 우리가 만들었던 건물을 돌아다니며 안전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했다. 점검 비용도 모두 회사가 부담했다. 우리는 작업한 건물을 ‘작품’이라 부른다. 그 작품에 작은 하자라도 있으면 고객에게 실망을 주게 된다. 다행히 지진으로 인해 큰 문제가 발생한 건물은 없었다. 그때 ‘참샘건설이 만들면 튼튼하다’는 인식이 생긴 듯하다. 지진이라는 재앙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셈이다.-건설회사임에도 해마다 책을 발간하고 있는데.△2016년부터 우리가 만든 건축물에 담긴 이야기를 담아 책을 출간하고 있다. 여타의 건설회사 팸플릿처럼 단순히 기술적인 면, 자재 소개 등이 아닌 작업한 집과 건물의 스토리텔링에 집중해 책을 만든다. 건축주들에겐 선물이 될 수 있고, 회사가 커나가는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다. 유용한 영업 자료도 된다.-그간 만든 건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2007년쯤 건축에 대해 탁월한 철학과 감각을 가진 부부의 의뢰를 받아 포항 청하면에 만든 집이다. 분야별로 시공 팀이 3~4번이나 바뀔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고, 고생 또한 많았지만 ‘좋은 건축물이란 어떤 것인가’를 배우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건축주와 회사가 마음을 터놓고 소통한 결과 후세에 물려주고 싶은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준 건축주께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이다.-직원들과 함께 만들어갈 미래는 어떤 것인지.△회사와 직원이 함께 성장하기를 바란다. 믿고 일을 맡기는 고객의 만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참샘건설로 커가지 않겠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에게 월급도 더 많이 주고, 복지도 개선해나가고 싶다.-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집, 좋은 건축물은 뭔가.△30년 가까이 일을 해오며 느낀 것인데 모든 건축물엔 ‘스토리’가 담겨야 한다고 믿는다. 좋은 마음으로 집을 지으면서 이웃들과 다툼이 생긴다면 거기에 좋은 기운이 생길 수 없다. 우리 회사는 건축 과정에서 생기는 주변과의 불화와 각종 민원을 해결하는 것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결국 좋은 집은 ‘좋은 스토리’를 가진 집이 아니겠는가.-참샘건설이 어떤 회사로 기억됐으면 좋겠는지.△집 잘 짓고, 사후 관리(애프터서비스) 잘해주는 회사다. ‘참샘건설에 맡기면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현재까지는 직원 모두가 회사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는 나부터 주위를 살피면서 내실을 더해가고 싶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5-27

걷고 또 걷고… 순례자의 종착지엔 고행의 눈물이 흐르고

◇ 산티아고 순례자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알베르게(숙소)에 순례자가 아닌 일반 여행자는 나밖에 없는 듯. 다들 배낭을 침대 맡에 둔 순례자들이다.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광장에 갔더니 순례를 끝낸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쉬고 있었다. 야고보의 유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순교했고 그의 유해는 신화 속 이야기처럼 발견되어 이곳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곳으로 유해가 옮겨진 시기인 9세기 경 스페인(에스파냐)은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고 땅을 되찾고자 했던 에스파냐 지배자들은 유럽 다른 나라의 지원이 필요했다. 순교한 지 1천년이 지난 행방을 알 수 없는 성인의 무덤을 찾아 유해를 옮기고 대성당을 지은 이유는 다분히 정치적 군사적 이유가 컸다고 할 밖에. 중세시대 신심 가득한 순례자들은 갈 수 없는 예루살렘 대신 이곳을 찾았을 테고 이들은 자연스레 에스파냐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는 지원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모여야 돈이든 군대든 만들 수 있고, 무슨 일이든 벌일 수가 있으니. 어쨌거나 대성당 건축을 시작한 당시 에스파냐의 왕 알폰소 2세는 탁월한 수완가였을 듯하다.가장 많은 순례자가 찾는 프랑스 생 장 삐헤 드 뽀흐에서 이곳 산티아고까지 루트는 약 800킬로미터, 40일 남짓 걸어야 하는 길이다. 신심이 없는 도보여행자일지라도 순례의 마지막 대성당 앞에 서면 아마 이전과는 다른 나 앞에 서있는 기분이 들 것 같다. 광장엔 흐느껴 우는 순례자들이 많았다. 여행이라기보다 고행에 가까운 길을 걸었던 이유가 다들 있을 것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순례길의 마지막에 느끼는 저 폭풍과 같은 감정의 북받침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카미노를 걷는 것이겠지. 주변에도 이곳을 다녀온 분들이 꽤 있고 이야기도 많이 들어 걷지도 않았는데 이미 다녀온 기분이다. 언젠가 여유가 되면 순례자가 되어 보고픈 생각도 있지만 가능할지는. 산티아고에서 하룻밤만 자고 700킬로미터를 달려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달리며 많은 순례자들을 봤다. 모두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산티아고로 향하는 사람들.예부터 있던 순례길이 다시금 인기를 끌게 된 이유가 뭘까. 훌륭한 자연환경, 저렴한 숙박시설, 지역 주민의 친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길에 담긴 역사성, 이야기가 아닐까.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했고, 또 새로운 순례자들이 쌓아가는 이야기가 계속 사람들을 카미노로 불러 모으는 것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길만 내는 것으론 부족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그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써낼 수 있는 길이어야 사람들이 찾겠지.◇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팜플로나팜플로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찾았다. 첫 번째는 헤밍웨이가 이곳에 머물렀고,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후반부의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에슐리가 젊은 투우사 로메오와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 바로 팜플로나다. 두 번째는 주변 다른 도시보다 숙소가 저렴한 때문이었다. 카미노 여정에 있는 도시라 값싼 알베르게가 많다. 프랑스로 넘어가기 전 머물고 가기 좋은 듯하다. 헤밍웨이의 대표작은 ‘노인과 바다’라지만 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가장 사랑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도 스페인이 배경이었고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경험이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 스페인을 아낀 작가였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책보다 영화로 아주 어린 시절 먼저 만났다. 마리아 역을 맡았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키스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키스 장면의 그 명대사는 원작자가 아닌 극작가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키스할 때 코는 어디로 가죠? 그게 늘 궁금했어요.”내일 쉬엄쉬엄 헤밍웨이가 단골로 찾았다는 카페도 가보고 이곳저곳 돌아볼 생각이다. 이 먼 이국에서 함양 청년 셋과 한 방에 묵게 됐다. 세상은 넓고도 좁구나.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카미노를 걷는 걸까?팜플로나는 산 페르민 축제를 앞두고 구시가지는 벌써 분위기가 무르익는 중이다. 소몰이로 유명한(사람이 소를 모는 건지 소가 사람을 모는 건지 애매한) 산 페르민 축제는 매년 7월 6일부터 시작한다. 만약 축제 기간이었다면 팜플로나에는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다. 질주하는 소와 도망가는 사람이 뒤엉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위험한 놀이를 수 세기 동안(1591년부터 시작) 전통으로 이어온 이유가 뭘까. 단순한 오락으로 보기엔 무모하고 위험하고 잔인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거겠지만.헤밍웨이도 이 소몰이에 참여했고 그래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겠지.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다는 이루나 카페도 슬쩍 구경하고 소몰이 골목을 따라 걷다 팜플로나 시민회관에 들러 산페르민 축제를 찍은 사진전도 보고 19세기 파가니니와 함께 가장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사라사테를 기념하는 전시실도 보고 왔다. 찌고르바이젠을 작곡했고 다른 연주자가 범접할 수 없었던 기교로 청중을 사로잡았던 그의 고향이 팜플로나인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거리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갤러리는 조용해서 소파에 앉아 교양 있게(?) 음악을 감상했다. 시민회관 중앙홀엔 축제기간 동안 음악 공연이 있는 듯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 만든 무대는 훌륭했다. 낮은 단상과 플라스틱 의자가 놓였을 뿐이지만 건물 자체의 공간감이 워낙 훌륭해 어떤 공연을 하더라도 생동감을 불어넣을 것 같다.◇ 스페인을 지나 다시 프랑스로만화 페스티벌로 유명한 앙굴렘에서 하루 묵으려 했으나 최대한 파리 가까이 가서 쉬는 편이 나을 듯하여 그냥 지나기로. 인구 6만 명의 작은 도시가 만화 페스티벌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뭘까, 한번 그 도시에 가보고 싶었었다. 아쉽지만 포기. 러시아에 들어갈 때까진 최대한 경비를 아껴야 한다. 안개 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보르도의 포도밭을 지나 푸아티에의 밀밭을 가르고 부르주 외곽에 있는 주로 트럭 운전자들이 묵는 숙소에 들어왔다. 파리까진 약 250킬로미터 남았고 팜플로나에서 여기까지 800킬로미터쯤 달렸다. 거의 10시간 넘게 로시를 타고 왔는데 이쯤 달리면 내가 로시인지 로시가 나인지, 오토바이와 몸과 영혼까지 합친 듯한 기분이 든다. 묶어둔 2리터 생수병 안에 햇빛을 받아 따끈하게 데워진 물을 등에다 붓고 장갑을 적셔 더위를 쫓아보지만 마르는 건 순식간이다. 로시와 함께 열덩어리가 되어 유럽을 남에서 북으로 점프하듯 달리는 중이다.오늘처럼 달리는 날엔 숙소에 들어와서 땀에 절은 티셔츠와 속옷, 양말을 빨고 샤워하고 누우면 열을 세기도 전에 곯아떨어진다. 눈을 부비며 하루 일과를 기록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여행 중 유일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내일 계획(주로 지도 검색)을 세우는 시간이니 미룰 수가 없다.하루만 지나도 오늘 있었던 일이 가물거리니. 파리에선 4일 동안 머물 예정이다. 최대한 주말을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암스테르담, 함부르크, 쾨벤하운, 오슬로, 스톡홀름, 헬싱키를 거쳐 최대한 빨리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넘어갈 작정이다.    /조경국

2020-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