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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자선냄비에 온정을 쏙~” 아프고 슬픈 이웃과 ‘아듀 2019’

꼭 모든 것이 풍족해서 아무 것도 모자라지 않는 부자가 아니어도 좋다. 최소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 몸이 아파 일을 할 수 없는 노인과 장애인들, 정치·종교적 박해와 절대적 가난 탓에 자신의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난민들도 배를 곯지는 않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이건 비단 기자만의 희망사항은 아닐 것이다. 이성과 상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 믿고 싶다.그러나, 지구는 그처럼 아름답지도 공평하지도 못한 별이다. 이 명제 또한 상식과 이성을 갖춘 인간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삶에서 체득한 경험으로 이미 학습했을 터이니까. 그 이유가 자원의 부족이건, 첨단 기술력의 부재건, 부패한 정치인들 때문이건 ‘가난한 국가’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를 여러 차례 여행했다. 기자 역시 한국에선 부자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지만, 보기 딱한 ‘상대적 가난’ 앞에서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여행에서 본 ‘절대적 가난’의 풍경들인도의 뭄바이. 공항에 내려 숙소로 가는 동안 경악했다. 시간은 새벽 3시쯤. 택시와 화물트럭이 시속 100km 이상으로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 가장자리에 수백 명이 이불 쪼가리 하나 덮지 않고 자고 있었다.가난과 관련한 놀라움은 여행 기간 내내 계속됐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택시(인도에선 ‘오토 릭샤’라고 부른다)가 신호등 앞에 멈추거나, 정체된 도로에 서있을 때면 거의 예외 없이 손이나 발이 없는 아이들이 기자의 눈앞에서 서럽게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 숫자가 모두에게 일일이 몇 닢의 돈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시내도 뭄바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햄버거나 조각 피자, 탄산음료 따위를 파는 패스트푸드점 유리창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기자를 하염없이 쳐다보는 어린애들을 보자니 차마 목구멍으로 빵 조각이 넘어가지 않았다. 주문한 음식을 통째 들고 나와 가게 앞 맨발의 아이에게 줬던 게 여러 번이다.인도와 필리핀만이 아니다. ‘앙코르 와트’로 유명한 캄보디아의 시엠립과 프놈펜엔 크메르 루즈(Khmer Rouge) 집권 시절에 뿌려진 지뢰를 밟아 발목이 날아간 장애인 악사들이 곳곳에서 한 끼 밥을 위해 슬픈 현악 연주를 들려주고 있었다.이란의 사막도시 쉬라즈에선 아프가니스탄 출신 난민이 한국 돈 500원도 되지 않는 싸구려 초콜릿을 팔아 일곱 식구의 밥을 벌고 있었다. 바구니에 담긴 초콜릿 20개쯤을 몽땅 사줬지만, 불편한 마음은 여전했다. 그렇다고 귀국하지 않고 매일 그 난민의 물건을 팔아줄 수도 없는 노릇.▲한국에선 ‘가난과 학대의 풍경’이 사라졌을까사실 비행기를 타고 가 먼 곳을 헤맬 것도 없다. 우리들 바로 곁에도 인도나 필리핀, 아프가니스탄이나 캄보디아 빈민처럼 아프고 슬픈 인생을 겨우겨우 견디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국민소득 3만 달러,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 안에 든다는 한국임에도 제 때 밥을 챙겨 먹지 못하는 결식아동, 곰팡이 핀 쪽방에서 한 달에 20~30만원으로 생활하는 독거노인, 정서적·육체적 학대와 모멸감에 눈물 흘리는 이주 노동자와 난민이 엄연히 존재한다. 누가 감히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까?불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추위에 강물마저 얼어붙고, 산과 들판엔 따 먹을 과일 하나 없는 황량한 겨울이 오면 울컥울컥 떠오르는 시 한 편이 있다. 신경림(83)의 절창 ‘가난한 사랑 노래’다.▲구세군 자선냄비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연민을...인간만의 특징이라 할 연민과 동정이 사라진 자리엔 절제 없는 탐욕과 이기적 자기중심주의가 들어서기 십상이다.옆집에서 아이가 매일같이 학대당하고 있어도, 노숙자가 역 앞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죽은 듯 엎드려 있어도 제 일이 아니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드물어진 세태.신경림 시인은 ‘이기적인’ 우리들에게 가난이 주는 외로움, 두려움, 그리움을 다독일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일까를 아프게 묻고 있다.또한 더 이상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하는’ 세상이 아니기를 희구하고 있다. 시라는 문학적 수단을 통해.그래서다.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이란 시 속 구절은 동정과 연민이 사라져 더욱더 춥게 느껴지는 2019년 겨울 앞에 무방비로 선 독자들을 반성하게 한다.언제였던가? 가수이자 ‘음악을 통해 역사와 사회적 현상을 탁월하게 해석해낸’ 작가 이지상(54)이 웃음기 사라진 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들려줬다. “아픈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 자리를 함께 한 모두가 심각해졌다.즐거움과 웃음이 아닌, 슬픔과 눈물이 ‘세상의 중심’이라니. 그 말에 담긴 역설적 의미를 여러 차례 곱씹어 보고서야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지상은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내가 식구들과 따스한 국과 밥으로 저녁을 먹으며 웃고 있을 때도 부모와 형제 하나 없는 외로운 이웃을 잊어서는 안 되고, 축하의 술잔이 마구잡이로 돌아가는 송년회와 동창 모임에서도 기댈 선후배와 친구 없이 사는 또 다른 이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게 타자의 고통을 더불어 아파해줄 수 있는 인간이고, 그런 인간이 중심에 서는 곳이 진짜 세상이다.”며칠 전엔 “계속되는 경제적 불황과 경기 침체로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액이 지난해에 비해 3%포인트 이상 줄어들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나부터 먼저 오늘 저녁엔 구세군 자선냄비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아야겠다’는 소박한 결심을 해본다. 연민과 동정이 사라진 세상은 짐승들의 세계다. 다시 한 번 이지상을 인용한다.“아픈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12-26

‘맛있는 보물찾기’의 쏠쏠한 재미에 빠진 여정

네댓 달 동안의 ‘경북 맛집 투어’는 즐거웠다. 12월을 마지막으로 ‘경북 맛집 투어’를 마무리한다. 하루 4~5끼를 먹으며, 부푼 배를 부둥켜안고 다닌 적도 있지만, 역시 숨어 있는 맛집들을 만나는 재미는 쏠쏠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알아주는 이 없어도, 묵묵히 자신의 음식을 빚는 이들에게 찬사를 보낸다.‘성현의 고장’ 경산, 장터의 푸근한 맛장터국밥 전문점들이 좋다. ‘온천골가마솥국밥’과 ‘옛진못식육식당’이 노포다. ‘온천골가마솥국밥’은 대파를, ‘옛진못식육식당’은 무와 콩나물이 눈에 띈다. 두 곳 모두 육개장보다는 맑은 시원한 장터 국밥, 해장국이다.‘다정한정식’은 밥상 차림이 단출하면서 깔끔하다. 가격과 음식이 대중적인 기호에 맞으면서도 수준급의 음식을 내놓는다. 생선과 된장찌개를 중심으로 밥상 차림새가 아주 좋다. 잘 정리된, 푸근한 집밥 느낌.‘중남식당’은 한식 노포다. 경산 하양에 있다.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노포. 음식이 싱거운 편이다. 반찬 가짓수가 많지만 모두 먹을 만하다.‘천년의 고장’ 경주, 소문난 잔칫집 맛이름난 음식점은 많으나 막상 ‘밥 한끼 먹을 만한 집’은 드물다. ‘숙영식당’은 오랫동안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밥’을 먹는 곳이다. 보리밥 비빔밥이 아주 좋다. 반찬들도 정갈하고 가정집을 개조한 내부 분위기도 푸근하다. 화려하지 않지만, 은은한 멋도 지닌 음식이다. 노포의 내공이 엿보인다. 추천한다.‘청산숯불갈비’는 고기를 내놓는 접시마다 ‘이력 꼬리’를 붙였다. 가격은 싸지만 고기 질이나 숯불, 반찬 등이 수준급이다. 점심시간에는 6천 원짜리 한우 국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이 빼곡하다. 숙성육은 부정한다. 주인이 직접 고른 신선한 고기를 내놓는다. 가게 내에서 직접 육가공 공정을 진행한다. 2019년 12월, 현재 소금구이가 500g에 4만2천 원. 아주 좋다. 추천.‘맷돌순두부’는, ‘이름난 잔치에 먹을 것 있는’ 케이스. 맷돌순두부를 권한다. 콩의 좋은 비린내와 고소한 맛이 살아 있다. 밑반찬도 정성스럽다.‘화림정’은 푸짐한 밥상이다. 손 큰 주인이 음식을 듬뿍 내놓는다. 직접 만든 촌두부와 김치가 압권이다. 회식 장소로도 좋다.‘힐링의 고장’ 청도, 정갈하고 착한 맛‘여정식당’은 옻닭 전문점이다. 청도시장 안에 있다. 허름한 시장통 식당이지만 업력이 50년을 넘긴다. 창업주 할머니와 아들 내외가 운영한다. 여러 가지 한약재를 섞어서 옻닭을 내놓는다.‘오경통닭’은, 이름은 ‘통닭’이나, 닭볶음탕 전문점이다. 정확하게는 ‘닭조림’이다. 조림에 채소와 당면이 없는 것이 특징. 반찬도 단출하다. 가게 간판에 ‘옹치기’라고 써붙였다. ‘오경통닭’만의 닭볶음, 조림의 이름이다.‘소나무집’은 ‘착한식당’으로 널리 알려졌다. 자가 제조 두부가 특징. 조미료 없이 차린 밥상이 정갈하고 맛있다. 나이든 노부부가 운영한다. ‘음식+힐링’이 가능한 곳.청도 추어탕은 미꾸라지에 메기 등을 섞는다. 청도식 추어탕의 특징이다. 읍내의 ‘황토추어탕’이 노포, 각북면의 ‘대원식당’과 ‘덕산추어탕’이 권할 만하다. ‘대원식당’은 실내 분위기와 음식이 상당히 정갈하다. ‘덕산추어탕’은 바로 지져내는 부추전이 아주 좋다.‘사통오달의 고장’ 영천, 수수하지만 품위있는 맛‘밀방앗간옆빵집’은 재미있다. 주인이 직접 ‘밀’을 재배한다. ‘방앗간’에서 직접 제분, ‘빵집’에서 빵을 만든다.‘밀방앗간옆빵집’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다. 일주일에 두 번, 수, 토요일 빵집 문을 연다. 일찍 매진되는 일도 잦다. 전화, 예약하기를 권한다. 수수하지만 품위 있는 ‘시골’ 빵이다. 수준급.‘시골추어탕’은 시내 입구의 작은 추어탕 집. 조미료 사용을 절제하고 깔끔한 추어탕을 내놓는다. 우거지, 시래기 사용이 아주 좋다. 반드시 확인 전화 필요.‘심산이수의 고장’ 김천, 외지인이 반한 감칠맛김천은 두 곳의 오래된 중식당과 지례의 돼지 불고기가 유명했다. 중식당 ‘장성반점’은 문을 닫았다. ‘주인의 건강’ 때문이라는 소문만 확인 가능. ‘중국만두’는 여전하다. 테이블 서너 개의 작은 가게. 전국구 만두 맛집으로 이름을 얻었다.‘만두’라고 부르지만 정확하게는 ‘포자(包子, 빠오츠)’다. 좁은 주방에서 남편은 연신 만두피를 밀고, 아내는 속을 넣고, 찜통에 찐다. 지례의 돼지 불고기는 단맛으로 통일. 외부 관광객이 선호하는 맛이다. 황금시장의 ‘지례순대’는 놀라움이었다. 북한(함경도)식 속이 꽉 찬 대창, 막창 순대와 남도의 피순대까지, 제대로 된 순대를 선보이고 있다. 머리 고기 등 수육도 수준급이다.‘선비의 고장’ 영양, 골 깊은 청정의 맛영양에서는 3곳을 권한다. ‘장원가든’ ‘선바위가든’ ‘칠보식당’이다.‘장원가든’과 ‘선바위가든’은 산채 전문점이다. 직접 채취한 산나물을 내놓는다. 겨울에는 봄, 여름 비축한 냉동 산나물을 사용한다. 두 집 모두 추천한다.‘칠보식당’은 허름한 건물의 닭고기구이 전문점이다. 닭고기와 닭발, 모래주머니 등으로 구이를 내놓는다. 물엿 사용을 절제하고, 생닭을 준비해서 일일이 살을 발라 사용한다. 가게 뒤편에서 연탄불에 직접 굽는다. 불맛이 은은하다. 수준급의 닭고기구이 전문점.‘마늘의 고장’ 의성, 마늘 품은 알싸한 맛‘남선옥’은 의성에서 널리 알려진 불고깃집이다. 얇게 썬 양념 불고기를 불판에서 재빠르게 익혀 먹는다.의성에는 마늘을 많이 사용한 치킨집이 두 곳 있다. 읍내의 ‘의성마늘치킨’과 단촌면 장터 앞의 ‘주영자마늘닭(구 삼미치킨)’이다. 두 곳 모두 주문한 후, 20~3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의성진식당’은 평범한 ‘밥집’이다. 골부리국(다슬기국)과 찌개가 가능하다. 반찬도 좋다. 의성에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삼백의 고장’ 상주, 명불허전 전국구맛상주시장 앞의 ‘남천식당’. 전국구 시래기국밥 집이다. 2천500원짜리 시래기국밥을 두고 호들갑을 떤다? 명불허전. 가히 전국구 수준이다. 대를 이어서 시래깃국 한 종류를 내놓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2대가 더불어 운영한다. 테이블도 없이 긴 식탁, 의자가 있다. 시래기국밥, 곱빼기가 있다. 가격이 낮다고 음식을 낮추어볼 일이 아니다. 각종 장류가 아주 좋다. 인근 농산물을 손질하여 정성으로 끓여낸다.‘꽃들추어탕’도 재미있는 집이다. 동화 같은 분위기에 음식이 정갈하다. 역시 가족경영. 국산 여부는 따질 필요가 없다. 부부가 쉬는 날, 인근에서 직접 미꾸라지를 잡는다. 일정량을 냉동보관, 겨울철에 낸다. 조미료 등은 절제한다. 함창 버스터미널 앞 골목 안에 ‘할매손두부’가 있다. 나이든 부부가 운영한다. 두부는 당연히 자가 제조.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두부를 직접 빚는다. 산초두부구이를 추천한다. 반찬도 정갈하고 좋다.‘유네스코의 고장’ 청송, 업력 깊은 내공의 맛청송읍내 ‘고향식당’은 겉으로는 중식당 분위기가 아니다. ‘고향식당’의 음식 내공은 깊다. 주인 겸 주방장의 수타면 업력이 60년에 가깝다. 읍내 단골 위주로 영업한다. 외지 손님은 꺼린다. 매번 적절한 숫자로만 수타면을 내놓는다. 면이나 소스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짬뽕도 불맛이 은은하다. 탕수육도 좋지만, 점심시간에는 내놓지 않는다. 한가한 시간에는 가능.‘청솔식당’은 주왕산국립공원 입구에 있다. 유원지 식당의 범위를 넘어선다. 직접 채취한 산채 등으로 음식을 만든다. 가게 앞에서 번철로 지져내는 어수리 등 산나물 전이 좋다. ‘킴스마운틴커피’는 평범한 ‘시골 커피숍’이 아니다. 수준은 도회지 카페를 넘어선다. 주인의 커피에 대한 열정도 놀랍다.‘호국의 고장’ 칠곡, 서투르지 않은 곰삭은 맛특이하게도 장어 전문점이 두 곳 있다. 외곽지의 ‘삼거리장어식당’과 시내의 ‘청록’이다. ‘삼거리장어식당’에서는 장어탕을 반드시 맛봐야 한다. 맑은 국물이다. 장어 비린내가 전혀 없고, 마치 곡물을 끓인 듯한 맛이다. 특이하다. ‘청록’은 밑반찬이 어느 것 하나 서투르지 않다. 자가 제조 장류를 사용한다.‘한미식당’과 ‘아메리칸레스토랑’은 왜관 미군 부대 주변의 경양식 집이다. ‘한미식당’의 ‘코덴블루’와 ‘아메리칸레스토랑’의 함박스테이크를 추천한다.‘소미할매칼국수’의 안동국시 스타일의 국수, 칠곡시장 안 ‘진땡이국밥’의 순대, 국밥도 수준급이다. ‘지란방’은 화상이 운영하는 만두 노포다. ‘진교스’를 권한다. ‘찐 교자 스타일의 만두’다. 끝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12-25

보다 가까운 곳서 보고 느끼며 아로새긴 ‘추억의 기록’

인간과 사물에 가장 효과적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그것을 ‘보다 가까운 곳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곳곳에 감추어진 아름다운 경북의 여행지와 각각의 시·군에서 만난 특별한 이력의 사람들도 바로 이 방식을 통해 본질에 접근할 수 있었다. 2019년 여름에서부터 겨울까지, 경북의 아름다운 풍광과 그 풍광보다 더 아름다운 경북 사람들을 만났다. 그것들에 관한 축적된 ‘추억의 기록’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내년 봄에도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직지사 ‘보물찾기’가 즐거운 김천김천에 가서 직지사를 가보지 않는 여행자가 있을까? 당연지사 없다. 산 중턱에 자리한 절에서 내려다보는 주위 풍광이 너무나 매력적이다.직지사가 창건된 건 지금으로부터 1천600여 년 전인 신라 눌지왕 때. 여기에 유명세를 보태게 된 역사적 사실 하나가 더 있으니 고려의 태조인 왕건이 중건(重建·절을 새롭게 보수함)했다는 사실이다.대웅전과 미려한 건축물 비로전 앞에는 각기 다른 형태의 삼층석탑이 서있고, 석조약사여래좌상과 대웅전 삼존불 탱화 등은 모두 국가가 지정한 보물이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재미가 만만찮다.김천 관광의 또 다른 즐거움 하나는 평소 해보기 힘든 ‘말 타기 체험’. 김천승마장에선 저렴한 비용으로 말에 올라보는 흥미로운 경험을 해볼 수 있다. 승마 전문조교가 도와주니 안전에도 문제가 없다.◇ ‘쏟아지는 별’과 만나는 영양더 이상 하늘과 별을 올려다보지 않는 사람들. 삭막해진 세태와 눈코 뜰 사이 없는 바쁜 일상이 우리를 ‘낭만을 잊은 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 슬픈 일이다. 이 서러움을 위로해줄 공간이 영양에 있다. 바로 국제 밤하늘보호공원. 영양은 ‘세계에서 밤하늘 별빛이 가장 찬란한 지역 중 하나’로 인정받은 도시다. ‘별 생태 체험관’과 ‘반딧불이 천문대’에서 오랜만에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그리고 시인처럼 하늘의 별을 노래해보자.‘지조론’을 펼친 명문장가 시인 조지훈의 흔적을 찾아 지훈문학관을 방문하는 것도 추천한다. 선바위와 남이포, 영양이 문향(文鄕)임을 증명해주는 두들마을을 지나 수비면 죽파리에 조성된 자작나무숲까지 가보는 것이 영양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명불허전’ 주왕산의 청송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것들에겐 그에 어울리는 이유가 있다. 이른바 명불허전(名不虛傳). 청송의 주왕산을 한 번이라도 찾아본 등산객들은 안다. 왜 이 산을 “사계절 내내 절경을 이룬다”고 모두가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지. 청송이라는 지명에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신선이 사는 피안(彼岸)’이란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이런 낭만적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한 여행지가 청송이다. 뿐이랴. 제철에 찾아가면 달콤하고 향기로운 사과의 환영도 받을 수 있다.주왕산과 ‘사이좋은 한 쌍’을 이루는 주산지는 애초에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만들어진 저수지. 하지만 이젠 ‘최고의 인생사진을 건질 수 있는 관광지’로 각광받는다. 주산지가 생길 때 조선 왕이었던 경종(景宗)은 이런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터. 그렇다. 그게 역사고 인간의 삶이다.◇ 설명 필요 없는 옥빛바다 울릉도짙푸른 보석 사파이어 1천t을 싣고 가던 보물선이 바다에 빠진 후 1천 년의 세월이 흐르면 이런 빛깔을 낼 수 있을까? 어디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할 것도 없다. 울릉도를 둘러싼 전체 바다의 색채는 찬란한 청옥빛이다. 그 푸르름에 눈이 부시고, 때론 가슴이 뻐개질 듯하다. 삼선암, 관음도, 죽도, 도동항, 저동항, 코끼리바위, 통구미 마을, 행남 해안산책로, 대풍감 해안절벽…. 사는 동안 꼭 한 번은 찾아봐야 할 울릉의 명소를 일일이 열거하기엔 지면이 턱없이 모자란다.나리분지가 선물하는 ‘평화로운 고요’는 또 어떤 문장을 동원해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뱃멀미 걱정을 떨치고 찾아가면 그만큼의 보상이 기다리는 섬이 바로 울릉도. 최근엔 섬 일주도로가 개통되고, 대중교통 이용이 비교적 쉽기에 ‘버스 타고 울릉도 일주’도 가능하다.◇ 자전거 타고 신나게 달리는 상주자전거와 경천대는 상주를 대표하는 핵심 관광자원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지 않고, 도시 대부분이 평지인 상주는 ‘자전거 타기에 최적인 공간’으로 이름이 높다. 여기에 자전거박물관까지 들어서 한국 자전거의 역사와 세상에 존재하는 갖가지 희귀한 자전거를 확인하게 해준다. 높이가 5m쯤 되는 자전거, 바퀴의 폭이 1m 가까운 자전거 등을 본 아이들이 탄성을 지른다. 일제강점기 ‘조선 자전거의 제왕’으로 불렸던 엄복동(1892~1951)과 관련한 자료도 적지 않게 전시됐다.자전거박물관 지척엔 경천대가 있다. 옛날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은 경천대와 어우러진 낙동강 경치에 매료돼 수많은 시와 그림을 남겼다고 한다.8.5m 높이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인공폭포와 TV 드라마 ‘상도’의 세트 촬영장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물안개 끼는 무섬마을의 영주영주 무섬마을엔 우물과 사당이 없다. “언젠가는 마을이 가라앉는다”는 풍수학자들의 예언 탓에 우물을 만들지 않았다. 홍수가 나면 조상들의 위패가 떠내려 갈 것을 걱정해 사당도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건 기우(杞憂)였다.여행자들에게 무섬마을은 부드러운 물안개가 볼을 매만져주는 낭만적인 곳이다. 특히 새벽녘 풍경이 아름답다. 거기까지 가서 강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진 찍기에도 그저 그만이다.소수서원과 선비촌 역시 영주가 손꼽아 자랑하는 공간. 소수서원은 ‘왕이 현판을 직접 써서 선물한 최초의 서원’이다.언필칭 사액서원(賜額書院). 영주시민들은 말한다.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선비촌은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 공들여 조성한 관광지다.◇ 양떼가 포근하게 반기는 칠곡조용하고 얌전한 걸음걸이, 하얗고 부드러운 털, 아기처럼 착해 보이는 얼굴. 양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기 충분한 외양을 갖췄다. 그래서일까? 칠곡 양떼목장은 아이들은 물론 성인들에게도 만족감을 주고 있다. 작은 비용을 지불하면 양들에게 먹이를 줄 수 있고, 양젖을 짜는 체험도 가능하다. 트랙터를 개조한 관람차에 올라 목장을 둘러보는 것도 빼놓으면 섭섭한 유흥. 여기에 양떼목장에서 직접 만든 치즈와 양젖도 맛보는 게 가능하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 행복한 목장’을 지향한다는 슬로건도 눈여겨 볼만하다.한국전쟁과 관련된 현대사에 관심을 가진 여행자라면 호국평화기념관에 가보기를 권한다.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겐 구상문학관이 제격이고, 겨울 들판을 걸어보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선 관호산성 둘레길이 기다린다.◇ 겨울밤도 분명 아름다울 청도역설로 말한다. 청도는 어둠이 깔려야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도시다. 환하게 불 밝히고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프로방스 마을과 와인터널에선 추운 겨울에도 즐거움이 넘쳐난다. ‘청도 프로방스 빛축제장’이라 이름 붙인 공간은 날마다 축제가 벌어지는 장소다. 아이들은 아기자기한 인형들 사이에서 ‘꼬마 모델’이 돼 아버지 카메라 앞에 서고, 엄마는 그 뒤에서 세상 어떤 이들보다 밝게 웃는다. 최고의 가족 여행지 중 하나로 추천해도 모자람이 없다.와인터널에선 어른들, 특히 주당 여행자들이 즐겁다. 1898년 만들어져 현재 와인 저장고와 와인 바 등으로 이용되는 터널은 붉은 벽돌의 아치형 천정과 자연석으로 꾸민 벽면이 근사하다. 네온으로 장식된 커다란 와인 병도 이채롭다. 운문사와 공암풍벽 역시 빼놓으면 아쉬운 청도의 명소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끝

2019-12-25

팔빠질 듯한 고패질 끝에온 가족 포식할 큰 놈 왔다

동 틀 무렵 출항하는 낚싯배에 몸을 싣고 대구를 낚아 올리기 위해 울진 후포항을 찾았다. 대구 낚시는 겨울이 최적기다. 한류성 어종인 대구는 얼음장 같이 차가운 겨울 바다를 누비며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데, 살이 실팍해 먹을 게 많은 고급 생선이면서 낚시에도 곧장 걸려드는 착한 대상어다. 이런 대구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서해에서도 대구 낚시가 이뤄지긴 하지만, 배로 두세 시간쯤 걸리는 먼 바다로 나가야 하고, 오징어나 주꾸미 등 생미끼를 사용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대구 자원도 동해에 비해 풍족하지 못하다. 동해는 서해와 달리 근해를 조금만 벗어나도 수심이 100m 정도로 깊어진다. 먼 바다까지 나가지 않아도 낚시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는 것이다. 온통 캄캄한 이른 새벽부터 부산을 떨지 않아도 되며, 낚시하는 시간도 훨씬 많이 보장된다. 동해 선상낚시가 지닌 메리트다.수심 100m 깊은 바다 속에는 수중 암반과 암초 등이 잘 형성되어 있다. 대구는 바위 주변에 떼를 지어 머무는 습성을 지녔다. 동해의 대구 낚시는 ‘지깅’이 대세다. 지깅이란 루어의 일종인 메탈지그를 사용하는 낚시 장르로 보통 깊은 바닥까지 채비를 수직으로 내리기에 ‘버티컬 지깅’이라고도 부른다. 5~6피트 길이의 지깅 전용대 또는 선상 우럭대, 인터라인 낚싯대 등을 쓰며, 굵은 합사줄이 200m 이상 감겨 있는 전동릴을 사용한다. 거기에 300~400g의 메탈지그를 달아 바닥까지 채비를 내린 후 고패질을 하다 보면 초릿대를 슬쩍 잡아당기는 예비 입질 후에 ‘덜컥’하는 본 입질이 들어온다. 그때 챔질을 해 바늘이 대구 입에 확실히 박히도록 한 후 전동릴을 천천히 감으면 대구가 빙글빙글 돌면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대물일수록 당연히 더 오래 걸린다.속초, 고성 등 강원도에서 주로 이뤄지는데, 경북 동해안의 경우 울진 ‘왕돌초’를 중심으로 대구 지깅이 활발하다. 왕돌초는 후포 바다 속 해저 대륙붕으로 거대한 능선과 골짜기가 발달한 천혜의 어류 서식지다. 이는 곧 훌륭한 낚시터라는 뜻, 왕돌초 주변은 동해안 최대의 낚시 포인트로 각광받아 왔으나 최근 해양수산부의 탁상행정으로 낚시어선의 영업이 금지되면서 어민들은 생계를 위협 받고, 낚시인들은 여가 선용의 즐거움을 잃게 되었다. 지자체를 비롯해 어민과 낚시인들의 청원이 잇따르는 중인데, 하루 빨리 왕돌초가 어민과 낚시인의 품으로 돌아오길 바란다.아침 6시, 배에 올라 승선 명부를 작성한 후 본격적인 채비를 했다. 겨울철 대구 지깅 낚시는 낚시채비를 준비하는 것보다 방한 대책을 강구하는 게 더 중요하다. 평소에는 입지 않는 내복부터 옷을 여러 겹 껴입고는 거위털 파카 주머니에 핫팩도 넣었다. 이제 배가 포인트에 도착할 때까지 선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면 된다. 평소에는 30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바다로 나가는데, 이날은 1시간쯤 달려 영업금지구역에 해당되지 않는 왕돌초 인근에서 엔진을 껐다.‘삑’하는 부저음과 함께 채비를 내렸다. 선장이 수심 90m라고 말해줬는데, 과연 전동릴의 수심 표시도 90m를 가리켰다. 비교적 가벼운 280g 메탈지그를 내렸는데도 조류가 세지 않은 덕분에 바닥에 닿는 느낌이 그런대로 잘 전달됐다. 채비가 바닥에 닿는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줄을 풀면 낚싯줄이 늘어져 입질을 파악할 수 없고, 줄이 이리저리 엉키기 십상이다. 반면 채비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라인 방출을 멈출 경우 어군이 형성된 수심층에 접근하지 못해 입질을 전혀 못 받거나 중층을 회유하는 잡고기나 몇 마리 건져 올리는 게 고작이다. 선상 낚시, 특히 대구 지깅 낚시는 바닥을 찍는 능력이 가장 먼저 요구된다.바닥을 찍은 다음, 릴을 닫고는 낚싯대를 힘차게 머리 위로 치켜드는 ‘저킹’으로 먹잇고기 모양을 한 루어가 수중 암반지대를 폴짝 폴짝 뛰어다니는 액션을 연출했다. 대구 지깅 낚시는 중노동이다. 그 무거운 채비를 배꼽에서부터 머리 위까지 끊임없이 올렸다 내렸다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구는 보통 메탈지그가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갈 때 입질을 한다. 낚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질을 받았다. 입질이 들어왔다고 해서 서둘러 챔질을 해서는 안 된다.확실하게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질이 연속적으로 이어질 때 챔질을 하는 것이 요령이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걸 보니 제대로 걸렸다. 그런데 전동릴이 빠르게 감긴다. 대물은 아난 듯하다. 물 위로 올라온 대구는 역시나 40㎝가 조금 넘는 작은 녀석이다. 어쨌든 첫 수를 올렸다.첫 수를 올린 이후 낚시에 불리한 어떤 상황이 저 깊은 물속에 발생했는지 좀처럼 대구의 입질을 받을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배에 탄 다른 낚시꾼들도 마찬가지였다. 급작스런 수온 변화가 생긴 것인지, 조류와 바람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오직 묵묵히 채비를 내리고, 올렸다가 다시 내리고, 이리저리 흔드는 행위를 반복할 뿐이었다. 배 전체에서 뜨문뜨문 낱마리가 올라오는 상황, 추위와 허기를 달래고자 선실에서 컵라면 하나를 끓여먹은 후 다시 심기일전했다. 오후 들어 조류가 세지면서 280g 메탈지그로는 바닥을 찍는 감을 느끼기 쉽지 않았다. 340g짜리로 바꾸고는 부지런히 저킹, 저킹…. 마침내 입질을 받았다. 줄을 잡고 들어올리기에는 꽤 벅찬 70㎝급의 준수한 씨알이었다. 생대구탕은 확보가 됐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긴장을 잠시 내려놓은 순간, 예기치 못한 고난이 닥쳐왔다. 전동릴을 접지한 배의 전기시설에서 과전류가 발생해 전동릴이 망가지고 만 것이다. 릴에서 모터 타는 냄새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순간 내 가슴도 타들어갔다. ‘이래서 전용 배터리를 챙겨 다녀야 하는구나’ 절감했다. 릴이 망가져 금전적인 손해를 입은 것은 둘째 치고, 당장 낚시를 못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전동이 안 된다면 수동으로 해보자며 채비를 내렸다. 포인트를 옮길 때마다 채비를 감아올리느라 죽을 맛이었다. 팔에 쥐가 나는 듯했다. 저린 팔을 풀어가며 다시 채비를 내린 후 부지런히 고패질을 하는데, 덜컥, 하는 강력한 입질이 들어왔다. 나도 강하게 챔질,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때부터는 팔씨름이나 다름없었다. 수심 120m 아래에서부터 오직 힘으로 대구를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전동릴로는 3분이면 될 것을 10여분 동안 끙끙대며 끌어올린 녀석은 뱃속에 이리(정소)가 가득 찬 맛있는 수놈 대구, 1m에 가까운 대물이었다.겨울 동해가 주는 선물 중에서 가장 실속 있는 것은 대구다. 큰놈 한 마리만 잡아도 온가족이 넉넉하게 대구 요리 파티를 즐길 수 있다. 대구는 흔히 버릴 것이 없는 생선이라고 말한다. 입이 큰 만큼 대가리도 크지만, ‘뽈살’이 잔뜩 붙어 있어 먹을 게 많다. 어두육미는 대구 대가리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당일 낚시로 건져 올린 싱싱한 대구를 생대구탕으로, 뱃살회로, 초밥으로, 스테이크로, 내장수육으로, 알탕으로, 찜으로, 튀김으로 다양하게 요리해 먹는 식도락은 낚시꾼과 그의 가족, 친구가 아니고서는 체험할 수 없는 행복이다.혼자 사는 나도 대구를 잡아온 그날 저녁,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현관으로 들어서며 품에서 좋은 술 한 병씩을 꺼내는 친구들에게 50ℓ짜리 대장 쿨러(대형 아이스박스)를 열어 대물 대구를 번쩍 들어 보였더니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부엌에서 대구를 이렇게 저렇게 요리하고 있는데 친구들이 꿀꺽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탕부터 회, 수육 등 풍요로운 대구 요리 한상을 차려 친구들과 나눠 먹으며 술잔을 부딪친 겨울밤, 우정은 깊어지고 추억은 별빛처럼 환하기만 했다./이병철(시인)

2019-12-22

오르는 순간 놀라움의 연속… 초호화 여객선 4박5일 ‘성공적’

20세기 소비에트 연방이 건설했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른바 ‘부동항(不凍港·사계절 내내 얼지 않는 항구)’. 소련 공산당의 지휘 아래 있던 ‘붉은 군대’는 이곳을 미국에 대항하는 태평양 전략의 기점으로 삼았다. 그 도시가 이제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유럽풍의 여행지’로 변화했다. 소련 공산당의 군항(軍港)이 한국 사람들이 몰리는 인기 좋은 관광지로 바뀐 것이다.소비에트 연방은 무너졌고,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시민들도 미국을 상징하는 맥도날드 햄버거와 코카콜라를 세계 어떤 국가 사람들보다 좋아하게 됐다. 격세지감(隔世之感) 혹은, 상전벽해(桑田碧海)다.포항시는 지난 14일 밤 대형 크루즈를 띄워 블라디보스토크로 관광객 1천300여 명을 보냈다. 이들은 18일 오전 출발지였던 영일만항에 무사히 도착했다.이탈리아 선박 ‘네오 로만티카(Neo Romantica)’가 포항-블라디보스토크 크루즈 여행의 경제적·상업적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시범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기자는 4박5일간 이 일정에 동행했다. 거기서 맛본 감흥과 느낀 미비점을 아래 가감 없이 옮긴다.▲63빌딩을 눕혀 놓은 길이의 거대한 배에 올라…크루즈선 네오 로만티카에 오른 순간, 가장 놀라웠던 건 그 엄청난 크기였다. 배의 길이는 221m. 서울 여의도에 우뚝 선 249m의 장대한 건물 63빌딩에 육박하는 규모다. 처음 접하는 이들에겐 미로처럼 보일만한 크기. 각 층의 객실 끝에서 끝을 바라보면 아득했다.탑승할 수 있는 관광객은 1천800명, 여기에 더해 배의 운항과 선내 식당·공연장·카페에서 각종 서비스를 담당하는 직원 600명 이상이 승선할 수 있다니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작은 도시 하나’가 바다 위를 떠가는 것이다.배에 오른 승객들을 위해 이탈리아 클래식 연주자들이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선율로 우리들 귀에 익숙한 ‘예스터데이(Yesterday)’,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등을 들려줬다.승무원들의 안내로 네오 로만티카의 이곳저곳을 둘러본 탑승자들이 잠을 청한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겨서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만큼 배의 규모가 컸다.항해 이틀째인 15일엔 건강 강연과 여러 형태의 콘서트, 공예 강좌와 퀴즈 게임 등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에 진행되는 각종 공연과 댄스 수업 등이 최소 20개는 넘어보였다.탑승자들의 지루함을 달래줄 다양한 크루즈 프로그램은 항해가 끝나는 18일 아침까지 형태를 달리하며 매일 진행됐다. 이른 오전부터 늦은 밤까지 8~9층 메인 무대가 조용할 틈이 없었다.이번 시범 항해에선 크루즈의 특성상 노년·중년층 여행자가 많았다. 이들은 늘씬한 댄서들이 러시아 음악, 이탈리아 음악, 스페인 음악에 맞춰 화려한 춤을 선보일 때마다 박수와 환호성을 아끼지 않았다.여행에 참여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저녁이 되면 깔끔한 정장과 드레스를 갖춰 입고 ‘프로 춤꾼’처럼 무대에 올라 오페라나 뮤지컬의 주인공인양 사뿐사뿐 스텝을 밟기도 했다. 그처럼 즐거운 유흥으로 인해 편도 30시간이 넘는 항해가 마냥 지루하지만은 않았다.부모와 함께 배에 탄 어린아이들은 백설공주 의상을 차려 입은 ‘승무원 언니들’과 함께 풍선을 불고, 요술지팡이를 만들며 재밌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또한,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제공된 ‘남이 해주는 요리’는 반복되는 가사에 지친 주부 관광객들에게 작지 않은 행복감을 선사했을 터.▲크루즈 관광의 가능성을 전망하는 ‘선상 심포지엄’ 열려15일과 17일엔 이강덕 포항시장과 시청 관계자, 대경대학교 국제크루즈산업연구소 등이 참여한 선상 심포지엄이 진행됐다. 해양수산부와 한국크루즈포럼이 후원한 이 행사에선 최윤석 국제크루즈산업연구소 연구원, 남서울대학교 이정철 교수가 주제 발표를 했다. 그들은 각각 ‘환동해 순환크루즈와 포항’ ‘테마 크루즈를 통한 환동해 크루즈 활성화 방안’이란 발제문을 선보였다.이어진 토론에선 최훈 한국해양관광학회장, 경기대 강숙영 교수, 영남대 이희용 교수, 윤현중 남북경제협력포럼 위원, 정성모 포스텍 철강대학원 교수, 윤효진 코스타 크루즈 과장 등 다수의 전문가들이 열띤 논의를 주고받으며, 향후 ‘포항을 출발점으로 하는 크루즈 관광 활성화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했다.김종남 대경대 관광크루즈승무원과 교수는 개회사를 통해 “전 세계 크루즈 승객이 3천만 명에 이르고 있다”며 “환동해권 해양경제시대를 맞아 포항과 경북의 관광 경쟁력을 높일 보다 새로운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말로 이번 크루즈의 의미를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했다,최윤석 연구원 역시 환동해 크루즈 운항 현황과 관광객 추이를 전하며, 포항을 기점으로 러시아와 일본 등을 잇는 ‘순환 크루즈’가 개설될 경우 향후 어떤 점들이 주요하게 고려돼야 할지 참석자들에게 설명했다. ‘배 위’에서 개최된 이번 심포지엄이 도출한 크루즈 활성화 방안이 ‘배의 바깥’에서 어떻게 현실화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블라디보스토크 기항지 관광과 보완해야 할 사항들‘기항지 관광(배가 정박하는 도시에서 짧게 하는 여행)’은 크루즈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16일 오전 네오 로만티카에서 내린 관광객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하루 동안 블라디보스토크를 둘러봤다.그룹 관광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시티투어’를 신청한 승객들은 독수리전망대와 잠수함박물관 등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이상설 선생 유허비(遺墟碑)와 고려인문화센터를 방문하기도 했다.이외에도 ‘대자연 체험’ ‘미식 기행’ 등 다양한 그룹 관광 프로그램이 펼쳐져, 이날 블라디보스토크 명소엔 한국인들이 적지 않았다. 좀 더 자유로운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나만의 블라디보스토크 핫 스폿(Hot Spot)’을 찾아다녔다.식당에선 붉은색 등딱지가 식욕을 자극하는 킹크랩을 주문하는 여행자들이 많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선 한국의 절반 이하 가격으로 킹크랩을 맛볼 수 있다.낯선 도시의 매력에 빠진 몇몇 관광객들은 배로 돌아가야 하는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시내 카페와 식당에 머물며 아쉬움을 표했다. 기자 역시 밤 11시가 넘어서야 타고 온 배가 기다리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향했다.항구 건너편 광장엔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1870~1924)의 동상이 시베리아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쓸쓸하게 서 있었다. 몰락한 사회주의의 우울한 은유 같았다.전반적으로 만족도가 높았던 ‘포항-블라디보스토크 크루즈 시범 항해’였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다.20~30대 젊은 여행자를 위한 선내·외 프로그램의 다양화, 해상 안전에 대한 신뢰성 확보와 이에 대한 홍보, 입국과 출국 과정의 수속 효율성 강화 등은 포항시가 ‘크루즈 관광의 출발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크루즈 선사, 여행사와 함께 고민해야 할 대목으로 보인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12-19

한 해의 끝서 돌아보는 ‘경북의 내밀한 속살’

◇ 고택과 종가의 도시 안동의미와 흥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 한 기획이었다. 삶의 기반을 경상북도에 두고 있으면서도 정작 ‘경북의 내밀한 속살’은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올 하반기 6개월간의 취재 여행을 통해 경북 16개 시·군이 숨겨놓은 관광 명소와 특별한 삶을 이어온 지역민들, 수십 군데의 박물관과 전시관·미술관 등을 만날 수 있었다. 행복한 기억 속에서 그곳을 찾은 경험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안동은 지향해야 할 한국의 전통과 옛것의 아름다움을 지켜온 도시다. 고풍스런 안동엔 날아갈듯 한 기와가 멋스러운 오래된 전통가옥과 수백 년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특유의 가풍을 간직하고 있는 종가(宗家)가 여럿이다. 학봉종택과 농암종택에서의 숙박체험은 오래 간직할 귀한 추억이 됐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생가인 임청각과 내앞마을 의성 김씨 종택에서 떠올린 가슴 찡한 감흥도 오래 갈 것이 분명하다.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내려다본 저물 무렵의 낙동강 풍경은 흡사 잘 그린 동양화를 방불했다. 안동 여행에서 도산서원과 하회마을을 빼놓으면 분명 섭섭할 터. 그곳을 찾게 될 미래의 방문자들은 두 곳 모두 꼭 가보시길. 안동에선 한지 만들기, 전통 탈 만들기, 국궁 쏘기, 목판 찍기 등의 다양한 체험도 가능하다.◇ 호랑이와 만나는 청정산골 봉화바람에서 달콤한 향기를 맡고 싶은 사람이라면 봉화로의 여행을 추천한다. 경북 내륙 깊숙이 자리한 청정지역 봉화군은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이벤트 열차가 있고, 백두산 호랑이를 만날 수 있는 곳. 항일 독립운동의 흔적 또한 각처에 남아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분천역과 태백 철암역 사이를 오가는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아이와 부모 모두 웃음 짓게 만드는 매력적인 관광자원이다. 기자 역시 시원스레 달리는 열차에 올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오래지 않은 옛날엔 사방 1천 리를 장쾌하던 호령하던 신령스런 동물 백두산호랑이 2마리도 봉화의 자랑이다. 국립 백두대간수목원을 찾는다면 호랑이의 위엄 어린 얼굴을 직접 보길 권한다. 천 년을 간다는 소나무계의 명품 춘양목(春陽木)도 봉화의 특산물이다.◇ 걸을수록 깊게 정드는 경주한국의 대표적 역사 유적이라 할 불국사와 첨성대, 대릉원과 동궁·월지, 여기에 젊은이들의 감각을 매혹시킨 ‘황리단길’까지. 경주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행복한 화음을 선보이는 여행지다. 어디를 걷건 심심할 틈이 없는 경주는 말 그대로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독특한 공간.정겨움 가득한 낡은 간판을 단 문방구와 30~40년 전 고전적인 분위기까지 맛볼 수 있는 황리단길은 청년들만의 길이 아닌 ‘우리 모두의 길’로 자리매김했다. 2010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양동마을과 경주 최 부자 가문이 지향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정신을 오늘에 전하는 교촌마을은 ‘뚜벅이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인기다. 거리를 걸을수록 깊어지는 정을 느낄 수 있는 경주는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도시다.◇ 건강까지 좋아질 것 같은 영천영천은 60여 년 전부터 한약 재료가 모이는 지역이자, 한약 유통의 중심지로 알려졌다. 거래되는 약재만도 500종이 넘는다. 이런 사실을 여행자들에게 어필하고자 조성한 ‘동의참누리원 영천한의마을’은 그윽한 한약 향기로 가득하다. 들어서는 순간 건강이 좋아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약재로 만든 음식이 준비된 약선음식관, 한방차를 마련한 찻집, 한옥체험관, 전문의가 운영하는 한의원도 내부에 있으니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좋아할만한 모든 것을 갖춘 셈이다.‘영천전투 메모리얼파크’에선 6·25전쟁 당시 쓰러져 간 젊은 호국영령들을 추모할 수 있다. 영천전투는 한국전쟁의 전세를 드라마틱하게 뒤집은 기념비적인 전투로 기록돼 있다. 별빛 가득한 하늘이 그리웠다면 보현산천문대에서 그 그리움을 해소해보면 어떨까?◇ 젊은 도예 장인이 안내한 문경문경은 ‘도자기의 고장’이다. 조선시대 초부터 품질 좋은 백자와 분청사기가 만들어지는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거기서 만난 무형문화재 김선식 도예가는 겸양과 자존을 더불어 지닌 젊은 예술가였다. 1년 내내 관음요(觀音窯)에서 도자기 제작에 땀 흘리는 김선식은 자신의 돈을 털어 ‘한국 다완 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박물관에선 작품급 도자기 수백 점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독립운동가 박열의 고향인 문경엔 그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의 묘지도 있다.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인간과 조국을 누구보다 사랑한 둘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 ‘박열 의사 기념관’이다.옛날엔 입신양명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기 위해 선비들이 넘었다던 문경새재. 이제는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등이 생겨 이 지역 최고의 관광자원이 됐다.◇ 양궁과 곤충을 키워드로 본 예천1979년 예천여고 2학년생 김진호는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많은 국민들이 어린 소녀의 선전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고, 함께 기뻐했다. 예천은 김진호의 고향이다. 그녀의 이름을 앞세운 ‘진호국제양궁장’이 예천에 들어선 건 당연한 수순. 지금도 각종 양궁대회가 열리고 훈련장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곳은 해마다 1만여 명의 양궁선수와 선수 가족들이 찾는 한국 양궁의 성지다. 방문하게 된다면 국가대표급 코치의 지도 아래 활쏘기 체험을 해보시길.양궁과 함께 예천을 대표하는 또 다른 하나의 키워드는 곤충이다. 탁 트인 넓은 공간에 효율을 높여 설계된 ‘곤충생태원’은 살아있는 곤충을 직접 만나고, 곤충을 이용한 산업적 가능성까지 전망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이들이 특히 좋아한다.◇ 사라진 왕국을 떠올리는 의성역사서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에 흔적을 남긴 고대 왕국 조문국(召文國). 의성군 일대에선 삼한시대 초기 강력한 제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조문국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유적지에선 신라의 금관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미적 감각의 금동관이 여러 점 나왔다. 조문국박물관을 찾는다면 출토된 각종 유물을 볼 수 있고, 낯설었던 역사의 실체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 인근에 자리한 금성산 고분군도 빼놓을 수 없는 의성의 관광 명소.조용하고 호젓한 곳에서 내년 여름 휴가를 보내고 싶은 독자라면 의성 빙계계곡을 추천한다. 날씨가 추워지면 뜨거운 바람이 나온다는 빙혈(氷穴)과 풍혈(風穴)도 있으니 겨울 여행지로도 좋다. 유·불·선 모두에 능통한 최치원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고운사도 매력적인 사찰이다.◇ 사색의 시간을 선물한 경산해골에 담긴 썩은 물을 마시고 세상사 이치를 단숨에 깨달은 원효, 신라를 대표하는 3명의 문장가 중 1명인 설총, 비밀스런 고대의 역사를 흥미롭게 써내려간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경산 ‘삼성현 역사문화공원’에선 이 세 선현의 행적과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캄캄한 동굴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어두워진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을 여기서 가지면 좋지 않을까. 원효의 가르침처럼 “세상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니.유년시절 읽었던 동화의 배경처럼 아름다운 반곡지도 꼭 들러 봐야 할 경산의 명소다. 투명하게 자신을 비추는 거울 같은 수면을 보며 잊고 살았던 ‘나라는 존재’를 확인해보시길. 고요하고 평화로운 사찰을 찾는 여행자라면 환성사와 선본사를 권해주고 싶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12-18

발길 닿는 곳곳이 ‘식도락의 천국’

‘경북의 맛집’을 찾고, 소개하자는 기획이었다. 각 지자체마다 ‘으뜸 맛집’들을 찾고 싶었다. 가장 먼저 안동을 떠올린 이유가 있다. 경북 대부분 지역은 약 100년 전까지, 경상좌도(慶尙左道)였다. 경상좌도는 유교의 나라였다. 음식도 유교를 바탕으로 섰다. 더위가 시작되는 7월 초, 안동을 시작으로 연재가 시작되었다.안동에는 불멸의 선지 국밥집이 있다. 중앙신시장 내의 ‘옥야식당’. 셈을 치르면서, “멀리서 왔어요”라고 하면 주인 할머니가 주차비 1천 원을 빼주기도 한다. 따뜻하다. 메뉴는 단 하나. ‘선지국밥’. 대파를 많이 넣고, 후추를 뿌린 국밥이다. 밥은 따로 내놓는다. 국밥 전문점을 운영하는 이들이 숱하게 ‘벤치마킹’ 오는 집이다. 좋은 음식은 ‘보이지 않는 정성’으로 만든다. 따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묵묵히 일을 해내고 있다. 강추.‘골목안손국수’는 안동의 ‘건진국시’ ‘제물국시’ ‘묵밥’ 등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국시’의 고장답게 많은 국숫집이 있다. 대부분 가게가 ‘맛있는 국수’를 만든다, 육수도 국수도 모두 달다. 조미료의 감칠맛이 밀가루 맛과 향을 앞선다. ‘골목안손국수’는 재료의 맛을 그대로 살린다. 밀가루의 풋내와 배추 등 채소의 단맛이 그대로 드러난다. 강추.‘계림식당’은 냄비 밥 전문점이다. 간판에 ‘냄비 밥 전문’이라고 써 붙였다. 된장찌개를 비롯하여 반찬도 수준급이다. 나물 비빔밥도 가능하다. 양은냄비에 곱게 지은 밥의 질감, 향, 맛이 모두 좋다. 고슬고슬하고 고소하다.‘까치구멍집’은 헛제삿밥 전문점이다. 흔했던 헛제삿밥은 안동, 진주에만 남았다. 대중식당에서 여러 종류의 숙채(熟菜)를 내놓기는 힘들다. 헛제삿밥집이 사라지는 이유다. 수지가 맞지 않는다. 업력 40년에 가깝다. 주인 서정애 씨가 2대째. 3대 전승 중이다.안동에는 ‘갈비골목’이 있다. 예전 시외버스터미널 자리 건너편이다. 대부분 생갈비, 양념갈비를 내놓는다. 양념갈비가 특이하다. 간장 절임이 아니라 마늘 양념에 간장을 조금 넣는 식이다. 굵은 갈빗살이다. 늑간(肋間)살을 잘라낸 갈빗살이다. 갈비뼈를 된장찌개에 넣거나 찜을 해서 별도로 내놓는다.‘뉴서울갈비’ ‘구서울갈비’ ‘동부갈비’ ‘거창갈비’ 등을 소개했다. 길안면의 ‘백두한우’는 옥수수를 땔감(?)으로 사용한다. 갈빗살만 곱게 구워 먹는 방식이다. 고기 질, 양에 비해 가격도 높지 않다. 추천한다.안동에는 민물고기 매운탕 집이 몇 곳 있다. 내수면에서 민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이들이 지금도 민물고기를 잡는다. ‘왕고집매운탕’ ‘물고기식당’ ‘거랑애’ 등을 소개했다. ‘물고기식당’은 청국장찌개를 비롯하여 밑반찬들이 백반집보다 한 수 위다. ‘왕고집매운탕’은 주인이 직접 민물고기를 잡아서 음식을 만든다.메뉴도 비교적 다양하다. ‘거랑애’는 모자가 운영한다. 어머니가 주방, 아들이 홀을 담당한다. 아들의 안동 민물 생선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보기 좋다. 안동 간고등어 구이를 맛보려는 사람들에게는 ‘일직식당’을 추천한다. 안동 간고등어 명인 이동삼 씨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식당이다.안동에는 안동소주 명인이 두 사람 있다. 조옥화 씨와 박재서 씨다. 조옥화 씨는 소량 생산, 전통방식 고수다. 박재서 명인 안동소주는 좀 더 진화한 방식으로 대중화에 성공했다. ‘박재서 명인 안동소주’는 ‘화근내(불내)’가 덜하다. 두 곳 모두 현장에서 40도 이상의 안동소주를 무료로 시음할 수 있다..봉화는 송이가 유명하다. ‘봉화 송이버섯’은 고유명사다. 산지에서도 송이버섯은 비싸다. 다행히 ‘용두식당’은 송이 솥밥을 과하지 않은 가격에 내놓는다. 솥 위에 송이가 가득하다. 솥뚜껑을 여는 순간 송이 향이 방안에 꽉 찬다. 봉화에서는 ‘송이라면’을 먹는 호사도 누릴 수 있다.‘용궁반점’은 소설가 성석제의 산문으로 유명해졌다. 일반 중식당의 메뉴, 짜장면, 짬뽕 등도 좋지만 경북에서는 흔한 ‘야끼우동’을 권한다. 볶음면이다. 지나치게 맵지 않고, 은은한 불 향도 좋다.영주에는 이름난 묵집들이 몇몇 있다.대부분 묵, 두부 음식을 더불어 내놓는다. 가장 유명한 집은 ‘순흥전통묵집’. 영주 외곽 순흥에 있고, 묵과 더불어 직접 만드는 두부가 수준급이다. ‘두산묵집’은 묘한 집이다. 간판이 없다. 네비게이션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주소로 찾는 수밖에 없다. 신주소로 찾아야 한다. ‘영주시 테라피로 417’. 묵밥과 칼국수를 내놓는데 밀가루 냄새가 폴폴 나는 칼국수가 수준급이다.투박한 시골의 이름 없는 가게지만 점심시간에는 대기 줄이 길다. 풍기 외곽이다. ‘전통영주묵집’은 영주 시내에 있는 노포다. 가정집을 개조한 식당으로 안팎의 분위기가 고즈넉하고 좋다. 음식도 정갈하다. 유기그릇을 사용한다. 순두부, 태평초, 묵밥, 모두부 등을 내놓는다. 순두부가 아주 좋다.‘정도너츠’는 영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도너츠 전문 가게다. 생강도너츠로 이름을 얻었지만, 인삼 등을 넣은 도너츠도 있다. 여러 가지 도너츠를 섞어서 선물용으로 포장해도 된다.영주에는 경북 북부의 ‘특이한 갈비’를 내놓는 가게가 여럿 있다. 뼈 없이 갈비살만 내놓는다. ‘중앙식육식당’이 노포다. 부석사 가는 길의 ‘횡재먹거리한우’와 ‘서부냉면’을 추천한다. ‘횡재먹거리한우’는 고기, 밑반찬이 깔끔하다. ‘서부냉면’은 전국구 냉면 맛집 노포다. 한때 “한강 이남에는 ‘서부냉면’만이 평양냉면 맛집”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여전히 슴슴한 평양냉면을 내놓고 있다.문경에서 ‘전국 가장 유명한 맛집’을 가고 싶다면 ‘영흥반점’을 권한다. 점촌 시장 옆에 있다. 짬뽕과 탕수육으로 유명하다. 짜장면도 수준급이지만, 짬뽕과 탕수육 덕분에 늘 순위에서 밀린다. 흰색의 파삭한 탕수육이 일품이다. 이른바 ‘부먹’ ‘찍먹’ 논쟁이 있을 때도 늘 등장하는 탕수육이다.역시 전국적으로 유명한 맛집을 선택한다면 ‘진남매운탕’과 ‘영남매운탕’을 추천한다. 두 집 모두 인근에서 생산되는 민물고기들로 매운탕을 끓인다. 깊은 산속이나 물이 제법 깊다. ‘영남매운탕’은 직접 잡은 민물고기를 사용하고, 제철 민물고기를 냉동했다가 고기가 없는 겨울철에 사용한다. 과하게 맵지 않고 민물 생선의 맛을 제대로 살렸다.문경새재 입구 상가에는 돼지 불고기 맛집이 몇몇 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모싯골맛집’을 추천한다. 반찬들이 정갈하다. 집에서 담근 간장, 된장으로 음식을 내놓는다. 된장찌개, 애호박 무침, 열무김치 등이 좋다. 직화로 넓적한 모습으로 구워내는 돼지고기 역시 수준급의 맛.문경 동로면의 ‘문경주조’는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유명하다. ‘문희’ 브랜드로 청주, 탁주 등을 내놓는다. 오미자 막걸리도 있다. 최근에는 자가제조한 식초도 개발, 상품화했다. 찹쌀을 원료로, 감미료, 조미료 무첨가 전통술이다.아주 좋은 ‘식초 집’이 있다. ‘초산정’이다. 식초는 크게 ‘유산초’와 ‘초산초’로 나눈다. 유산초는 널리 만들고, 먹는 것들이다. 막걸리 식초가 대표적이다. 종초(種醋, 식초의 씨앗, 뿌리)를 사용하면 초산초가 된다. 마시기에는 유산초가 좋지만, 음식에 사용하는 데는 초 함량이 높은 초산초가 좋다. ‘초산정’은 제대로 된 초산초를 만든다. 외부 강의도 진행하고, 각종 학교, 지자체 등에도 자주 강의를 한다.‘명봉양푼매운탕’은 깊은 산속인 예천에서도 더 깊은 곳에 있다. 호남 출신 여주인이 해산물 요리와 닭, 오리 등의 백숙을 낸다. 능이버섯이 들어간 탕은 담백하면서도 진하다.전국구 맛집인 ‘단골식당’과 예천읍내의 ‘고향식당’도 가볼 만하다. ‘고향식당’은 2대 전승 돼지 불고기 집이다. 가게 앞에 연탄 화덕이 있다. 행인들은 돼지고기 굽는 연기를 맡을 수밖에. 최고의 마케팅이다.방송 출연도 극구 사양하는 ‘유정식당’. 보기 드문 ‘추어전골’ 전문점이다. 아내는 주방을, 남편은 미꾸라지를 잡는다. 인근 들판, 물길에서 잡는 미꾸라지다. 생산량이 한정적이니 “방송 보고 손님이 더 와도 큰일”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전국을달리는청포집’ ‘통명전통묵집’ ‘동성분식’에서는 묵 음식인 탕평채, 태평초를 만날 수 있다. ‘청포집’은 청포묵, 태평추를 내놓는다. ‘통명전통’, ‘동성분식’은 태평초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12-18

전기차 생산·스마트 관광 개발경주시 미래로 간다

경주시가 올해 새 희망의 돛을 올리고 지역경제를 견인할 지속 가능한 신 성장 동력 발굴을 위해 미래 먹거리 산업 유치 등 다양한 역점사업을 추진하며 어느 해보다 분주한 한 해를 보냈다. 다가오는 경자년 새해에도 지역경제와 신재생, 관광서비스 산업 유치 등 일자리가 늘고 사람 냄새가 나는 살맛나는 경제행복도시 구현에 행정력을 모은다.경주시는 올 5월 미래 자동차 산업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산자부의 ‘차량용 첨단소재 성형가공기술고도화’사업을 유치했다.국도비 160억원 등 총 300억 원으로 2022년까지 전기·수소, 자율주행차 등 미래 자동차 산업에 대비한 알루미늄, 탄소, 플라스틱 등 소재부품 경량화와 RD 연구개발, 첨단소재 생산기술 지원 등 첨단 성형가공기술산업 플랫폼 구축에 들어갔다.이 사업과 연계해 지난 6월 지역 자동차 관련기업 지원 및 자동차 부품 경쟁력 강화를 위한 중기부의 ‘차량 경량소재부품 점프업 기술지원사업’ 공모에 선정돼 2021년까지 3년간 국비 15억 원을 포함해 18억 원으로 시제품 제작, 품질·공정개선, 전문가 매칭 등 실질적인 기업지원을 하게 됐다.아울러 자동차, 철강 중소기업의 기술경쟁력 강화를 위해 올해부터 2021년까지 3년간 경북도와 함께 10억 원으로, 기술력은 있지만 재정과 인력이 부족한 기업에 RD 기획, 시제(작)품 개발, 애로기술 컨설팅 등을 지원한다. 올해 22개사 45건에서 내년엔 30개사 50건을 목표로 확대 추진한다.주낙영 경주시장의 역점 공약사항인 ‘전기차 완성차 공장 유치’에도 팔을 걷어 부쳤다.지난 3월 국내 A사와 중국의 궈시안그룹 자회사인 J사가 합작법인 설립 및 친환경자동차 생산을 위해 초기자본 600억 원으로 2023년까지 4년간 검단산단에 1t 화물, 택배차량 조립생산을 하기로 했다.이를 위해 경북도, 경주시와 MOU를 체결했다.그 후속으로 4월 E사의 법인설립과 배터리 분야 투자유치를 위한 포괄적 업무협약을 맺었고, 8월에는 실질적 투자를 위한 계약체결 했다.하지만 초기자금 선투자에 대한 투자기업 간 의견 불일치와 국내 경기침체에 따른 A사의 자금조달 차질, 미·중 무역 갈등으로 중국 정부의 외환·자본유출 통제에 따른 J사의 외투자본 유입이 막히면서 쌍방 간 투자에 차질이 생겼다.또 인증차량의 중국선적 관련 ‘배터리 안전성 시험통과 3개월 지연’과 엎친데 겹친 격으로 국토부(카트리)에 인증 대기자가 몰리면서 차량 인증이 늦어지는 등 여러 가지 사안으로 지연되고 있다.이에 경주시는 전기차 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국내·외 정세 및 동향 등 다방면으로 촉각을 세우고 있다.여러 경로를 통해 전기·배터리·전기모터 등 전기차 연관기업 집적화로 E-모빌리티 산단 클러스터 조성을 위해 중견기업 대상 투자 설명회, 관련 업종 기업방문과 지속적으로 국내외 잠재 투자기업들의 투자계획 정보를 수집하는 등 대응하고 있다.검단산단 시행사와도 유치 홍보 등 유기적인 협조체계를 구축해 시민들과의 약속이행 및 사업 성공을 위해 돌파구를 찾고 있다.시는 올해 여러 가지 성과를 바탕으로 내년에는 자동차, 제조를 기축으로 신재생 및 문화관광 사업 민자 유치에도 매진할 계획이다.먼저 경북도와 함께 IOT 스마트센서를 활용해 문화·관광자원의 실시간 무인 관리 시스템 구축사업 유치와 전기, 수소 등 차세대 미래자동차 배터리 관리시스템 구축, 양성자가속기 센터 부지 내 이온 빔을 활용한 차량 경량화 소재개발 및 RD 연구센터 구축 등 미래 자동차 산업 육성 기반조성을 위해 내년에 정부 공모 또는 과제사업 선정에 도전한다.또한 정부의 신재생에너지 정책 3020에 맞춰 강동산단 내 민자 7천억원 규모의 수소연료발전소 99MWh 건설을 위해 지난 10월 산자부로부터 전기사업 허가를 득하고 부지매입 등 내년 상반기 착공을 목표로 순항하고 있다. 이 사업이 완공되면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거 기본·특별지원금 165억 원의 인센티브로 강동지역 숙원사업 등 지역개발에 재투자 된다.신재생에너지 보급 목적으로 한전과 6개 발전공기업이 공동출자한 SPC인 한빛새싹발전소와 업무협약을 맺고 공영주차장, 공공건물 등 유휴 공간 임대를 통한 태양광 수익사업도 계획하고 있다.보문단지 일원에는 약 500억원의 민자로 2021년까지 가족, 연인, 단체 단위로 인기를 끌고 있는 사계절 관광사업인 루지산업과 SBS 정글의 법칙 프로그램을 응용한 정글비행, 정글비치 등 가상현실, 미디어파사드, AR, VR 등 전국 유일의 종합테마장이 들어설 예정이다.이로 인해 보문단지의 지역상권이 되살아나 보문단지가 명실공히 대한민국 관광 1번지의 옛 명성을 되찾을 것으로 기대된다.경주시의 이러한 선도적인 사업추진과 강소기업 유치 및 산업투자 확대 등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을 위한 공로로 정부와 도 단위의 기관표창을 받는 등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시는 지역산업 진흥과 경쟁력 향상으로 국가균형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산자부와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공동주관한 ‘2019 지역산업 진흥 유공부문’에 산자부 장관 기관표창을 받았다.지방투자촉진보조금 지원을 통한 기업의 투자유치 및 신증설 확대에 기여한 관계 공무원은 산자부 장관 표창을 수상했다.또 대규모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 상한선 폐지 및 ONE-STOP 맞춤 행정서비스 강화로 일지테크, TS경주 등 104개 우량기업 유치 및 1천500여명의 고용창출 등 과감한 투자유치 활동으로 일자리 창출 및 지역경제 활성 공로로 연말에 ‘2019 경상북도 투자유치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돼 경주시와 관계공무원이 경북도지사 표창을 받는다.앞으로도 시는 투자유치 기업 사후관리, 벤처기업 집적시설 지원, 해외 바이어 수출상담회 개최 등을 진행한다.지역산업 활성화 구심체 역할을 담당할 산학연간 협의체인 ‘(가칭)경주시 기업부설연구소협의회’를 내년 초에 발족해 중앙부처 주요 역점사업 정보교류, 중앙·도 정책사업 수행, 기업 현장 애로사항 지원 등 체계적, 조직적 산업육성 지원에 전력을 다 할 계획이다.주낙영 시장은 “올해는 국가 공모사업 선정쾌거와 우량기업 유치 등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경제회생에 역점을 두고 전 직원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시정을 펼쳐 다수의 기관표창과 사업성과를 거뒀다”며 “내년에도 E-모빌리티 산업 유치, 자동차 성형가공기술센터 조성, 미래 자동차 소재부품 관련 정부사업 도전, 기업 경쟁력 강화 지원, 신재생, 관광산업 유치 등 지역경제 활성에 최고의 포커스를 두고 가시적인 성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행정력을 총동원 하겠다”고 밝혔다./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2019-12-17

정쟁에 희생된 문사(文士)들

1770년(영조 46) 11월 26일, 한양에서 이경오(李敬吾)란 선비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유배객의 신분이었는데도 지역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앞 다투어 그를 맞이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바로 초림체(椒林體)의 대가인 우념재(雨念齋) 이봉환((李鳳煥)의 장남이었던 것이다.이봉환은 전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문사(文士)였기에 한적한 시골 현(縣)의 사족(士族)들이 그의 시편과 글을 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봉환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상소를 올린 최익남(崔益男)과 공범으로 간주되어 신문을 받다가 죽었고, 그의 큰 아들이 아버지 죄에 연좌되어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것이다.시계를 잠시 뒤로 돌려보자. 1762년(영조 38) 윤5월 17일이었다. 나경언의 고변사건에 이어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사도세자가 무더운 초여름 날 뒤주 속에 갇혀 8일 동안 울부짖다가 죽은 것이다. 이런 처참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는데도 조정 대신들 중 누구하나 나서서 말리는 이가 없었다. 정권의 핵심에 있던 노론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수방관했다. 소론에게 우호적인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보다는 부왕의 손에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그들에게는 훨씬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이 무렵 조정에는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洪鳳漢)이 실세로 있었지만, 그도 이 비참한 세자의 죽음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심지어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은 오히려 반(反) 사도세자 세력에 가담했다. 홍봉한 측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집안의 당파적 이해 때문에 세자를 희생시킨 것이 아니냐는 논의까지 대두되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풍산 홍씨 가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뒤 번창했다. 홍봉한은 영의정을, 홍인한은 우의정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뿐만 아니다. 홍봉한의 맏아들인 홍낙인은 대사헌, 둘째 아들 홍낙신과 홍낙임은 승지, 사촌인 홍송한은 형조판서, 조카인 홍낙성은 이조판서, 조카 홍낙명은 대사간과 대사헌의 자리를 각각 차고앉았다.시간이 지나 임오화변의 충격이 서서히 정리되어 가면서 노론은 두 파로 갈라졌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시파와 죽음이 당연했다는 벽파로 나눠진 것이다. 벽파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그녀의 친정오빠인 김귀주가 축이었다. 이들은 영조의 믿음을 독차지하고 있던 홍봉한을 공격하고 나섰다. 그래서 공홍파(攻洪派)란 이름을 붙였다. 반면 홍봉한을 지지하는 시파들을 부홍파(扶洪派)라 했다. 처음 홍봉한과 김귀주 두 외척 가문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데는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세자가 사라지자 이제는 노론의 주도권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이때쯤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로 돌아서 있었다. 김귀주는 그런 홍봉한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했다.공홍파의 공격은 1770년(영조 46) 3월 22일, 청주 유생 한유(韓愈)가 올린 상소문으로 구체화되었다. 한유는 자신의 팔뚝에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는 내용을 새겨 넣고 도끼를 메고 상경했다. 그는 궁궐 앞에 나아가 엎드린 채 ‘홍봉한의 부자·형제가 권세를 휘두르며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청컨대 이 도끼로 먼저 나를 죽이고 뒤에 홍봉한을 처단하라’고 했다. 영조는 이 상소가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홍봉한의 세력들을 공격하는 것이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 나머지 한유를 귀양보내버렸다. 실제로 한유가 이런 행동으로 나오기까지는 공홍파의 사주가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이 상소는 심의지(沈儀之)가 올리려고 했다. 공홍파들은 심의지가 한양의 사족(士族)이기 때문에 영조의 의심을 받을 수 있다며 청주에 살고 있던 한유에게 그 상소를 대신 올리도록 한 것이었다.그로부터 8개월 후인 1770년(영조 46) 11월, 이번에는 부홍파들이 반격에 나섰다. 이조 좌랑 최익남(崔益男)이 반박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새로 왕세손에 책봉된 동궁(東宮·정조)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와 사당에 성묘도 하지 않아 정과 예가 부족하고, 벽파의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그가 당파를 짓고 있으니 처단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상소는 영조의 아픈 곳을 찌른 것이었다. 영조는 민감한 사도세자와 세손의 문제를 언급하며 나오는 것에 대해 발끈했다. 격노한 영조는 왕실에 대한 모종의 음해세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최익남과 연루자들을 붙잡아와 국문했다. 잡힌 사람들은 모두가 홍봉한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었다. 공홍파들은 ‘최익남의 배후에 홍봉한이 있으니 진상을 밝혀야 한다’며 공세를 취했다.영조는 최익남을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으로 유배하라는 명을 내리고, 그 상소문은 즉각 불살라버리게 하였다. 최익남은 유배를 떠나기도 전에 매를 맞아 죽었다. 이어서 영조는 홍봉한의 배후라고 의심되는 최백남(崔百男·최익남의 동생)·정석오(鄭晳吾)·이봉환(李鳳煥)·문희민(文喜珉)·이성보(李成普)·남옥(南玉) 등을 체포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애석하게도 이봉환과 남옥은 투옥되어 신문을 받다가 장형(杖刑)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최익남의 상소를 미리 빌려다 보았다는 죄로 이재휘(李載徽)와 이만식(李萬軾), 그리고 이봉환의 이웃에 사는 유생 정석오(鄭晳吾)도 유배를 보냈다.이를 최익남의 옥사라 하기도 하고, 경인옥(庚寅獄)이라고도 한다.이때 화를 당한 이봉환의 가문은 삼대(三代)에 걸쳐 모두 문집을 남긴 서얼 명가였다. 이봉환은 18세기의 날카롭고도 새로운 시풍으로 서얼(庶孼)의 시체(詩體)라고 평가되는 ‘초림체’(椒林體)를 창안한 사람이었다. 그의 학맥은 아들 이명오(李明五)와 손자 이만용(李晩用)으로 이어졌다.이봉환은 어릴 적 장동김씨 가문의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형제로부터 사숙(私淑)하였기에 그 영향권에 있었다. 그는 1733년(영조 9)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후 양지현감(陽智縣監) 등을 역임하다가 1748년(영조 24) 홍계희(洪啓禧)와 같이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가 관료로 진출한 것은 홍봉한의 역할이 컸다. 1765년(영조 41) 홍봉한이 그를 남옥·성대중과 함께 서얼 출신 인재로 추천한 것이다. 당시 서얼 문사들은 한시에 섬세한 묘사와 사회에 대한 울분을 담았는데, 이를 초림체라 했다.이명계(李命啓), 남옥 등 이봉환의 벗들도 모두 이 시풍을 좇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문학세계의 전반적인 특징은, 김창흡(金昌翕)과 육유(陸游)의 시 세계를 추종하였고 서정성이 강한 시를 지었다. 이들의 시풍은 이후 백탑시파(원각사지 10층 석탑 인근에 살았던 북학파 시인)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박지원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문(文)에 있어서는 당송고문(唐宋古文)의 경향을 띠었다.이봉환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시를 배워 시사(詩史)에 능하였다. 그중에서도 차남인 이명오가 두각을 나타냈다. 이봉환의 손자이자 이명오의 아들인 이만용도 시문(詩文)을 잘 해서 조선 후기 사대가(四大家)로 뽑히며 명성이 자자했다.현재의 서울 삼청동 133-1과 2번지 일대에 옥호정(玉壺亭)이 있었다. 이 집은 순조의 장인이었던 김조순(金祖淳)의 별장이었다. 김조순은 이곳에서 선비들의 예원(藝苑)집단인 백련사(白蓮社)를 경영하며 이명오를 비롯한 김이교(金履喬), 이복현(李復鉉), 김려(金鑢), 김이양(金履陽), 신위(申緯) 등과 교유했다.이처럼 주목받던 이봉환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정쟁(政爭)의 중심으로 쓸려 들어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의 다섯 아들들도 연좌되어 다섯 군데로 뿔뿔이 흩어져 귀양을 갔다. 이때 장남 이경오가 장기(長䰇)로 오고, 차남 이명오는 전라도 강진현으로 갔다.그 후 이봉환의 자식들이 아버지의 죄를 신원하기 위해 벌인 노력은 눈물겹다. 아버지가 물고당한 것을 원통히 생각하여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다. 길거리에 거적을 깔고 옷을 바꾸어 입지 않고, 왕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수차 탄원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아들과 손자들은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경화세족(京華世族·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 들과 끊임없이 사귐을 맺었다. 한양 일대에서 활동한 양반들 가운데 이들 삼대의 시문집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사람은 명사(名士)가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이명오의 시문집인 박옹시초(泊翁詩抄) 첫머리에는 홍취영(洪就榮), 김좌근(金左根), 정원용(鄭元容), 조두순(趙斗淳), 윤정현(尹定鉉), 김병학(金炳學), 남병철(南秉哲) 등의 경화거족(京華巨族·화려한 서울의 재력가)들이 쓴 서문이 나란히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는 김정희, 신위, 정학연 등과 주고받은 시가 적잖이 수록되어 있어 이들과 교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 중 특별히 정학연(정약용의 아들)과 함께 지은 시가 많이 보여 두 사람의 친분을 짐작케 한다. 이봉환 가문이 비록 서얼 출신이지만 그 위세가 여느 사대부 문벌가 못지않게 대단했음을 짐작케 하는 증거들이다.이런 자손들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1804년에 들어서 정조는 이봉환을 신원(伸寃)·표창(表彰)하고 그 자손들을 서용하겠다고 약속하면서, 25결(結)이라는 토지까지 하사했다. 정조는 이명오의 문집을 들이라 명하고, 아울러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와 주자(朱子)의 글을 가려 뽑아 바치게 했다. 그만큼 이명오의 글이 높이 평가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1809년(순조 9) 김이도(金履度)·김조순 등의 도움으로 이봉환은 신원이 된다. 1910년(순종 3) 순종은 죽은 이봉환을 정2품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하였다가 다시 충정(忠正)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자 이명오는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종사관이 되어 일본에 내왕하였고, 벼슬이 종3품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죄로 연좌되어 장기로 왔던 이명오의 형 이경오는 1772년(영조 48) 유배가 풀렸다. 그가 장기에서 머문 기간은 약 2년간이었지만 한양에서 당시에 유행했던 초림체(椒林體)의 한시들을 장기 땅에 마음껏 펼쳐놓고 갔다. 그에게 장기는 말 못할 고통의 장소였을지도 모르지만, 장기사람들에게 그는 신문학의 전달자이자 더 높은 문화의 보급자였던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2-17

최고 브랜드 우뚝 선 ‘청송사과’… 다양한 노력 결실 맺어

전국 최고의 사과 고장으로 유명한 청송군이 민선7기 윤경희 군수 취임이후 경영마인드를 접목한 다양한 유통정책으로 사과부문 최고의 지위를 이어가고 있다.윤 군수는 “지역 농업소득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청송사과를 더욱 특화하고, 사과부문 최고 브랜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유통·마케팅 분야에서 총력을 기울일 계획”이라고 밝혔다.◇새콤달콤한 맛으로 미래 고객 잡는다전국 생산량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사과의 최대 주산지인 청송군은, 새로운 수요 창출과 신규 시장의 공략을 위해 황금사과로 불리는 시나노골드 품종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또 도래할 생산량 증대 시대를 대비해 ‘황금진’이라는 브랜드를 특허청에 상표 등록함으로써 황금사과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을 구축했다.황금사과는 상대적으로 사과 소비가 부진한 젊은 층에 인기가 높은 품종으로 청송사과의 미래 고객이 돼줄 젊은 세대와 백년대계를 꿈꾼다.올해부터 황금사과를 전문 취급하고 있는 청송현서농협(조합장 김해환)에 따르면 “같은 황금사과라도 타지역산에 비해 우리 상품의 품질이 우수하고 청송이라는 지역 이미지와 ‘황금진’ 브랜드의 고급스러움이 더해져 이미 대도시 대형 매장들에서는 물량을 미리 선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라고 밝혔다.군은 이런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홍보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해 전국방송 단위의 라디오 인기프로그램과 스폰서십을 체결해 청송(황금)사과를 경품으로 제공하는 이벤트를 연간 진행할 계획이다.더불어 대도시의 대형 매장이나 오픈마켓과의 제휴를 통해 다양한 홍보활동을 펼쳐나갈 예정이다.◇군수가 청송사과 홍보 직접 지휘지난 10월 22일에 치러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개막전에서는 ‘2019 한국시리즈 청송황금사과의 유혹’이라는 주제로 서울시민과 관람객들에게 황금사과를 비롯한 3만개의 청송사과를 무료로 나눠주는 기발한 아이디어의 지역특산품 홍보에 다양한 매체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 노력과 열정에 보답하듯 한국시리즈를 주관한 KBO에서는 경기장 내의 메인 전광판에 산소카페 청송군과 황금사과(황금진), 청송사과축제 홍보 이미지를 연신 부각시켜 지역 및 청송사과 홍보에 큰 성과를 이룬 바 있다.아울러 작년 11월부터 윤경희 청송군수는 단일 매장으로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서울 서초구의 농협유통 하나로클럽 양재점에서 사과 홍보 판촉행사에 직접 참여했다.또한 농협유통 이수현 대표와의 간담회에서 청송사과 상설 판매를 제안함으로써 올해 1월부터는 청송사과 전용 냉장판매대를 확보했다.양재점 과일부 관계자에 따르면 고정 판매대를 보유한 지역 농산물은 전국에서도 몇 종류가 안 된다고 한다. ‘전국 최대 매장에서의 최고 사과 상시 판매’라는 서로의 명성에 걸맞은 성과를 낸 셈이다.◇사과유통공사 정리·유통시스템 재정비청송군은 매년 행정안전부의 지방공기업 평가에서 최하위를 면치 못하던 부실 공기업인 청송사과유통공사를 정리함과 동시에 유통센터로 전환했다.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공청회를 통해 운영체계 변경의 필요성과 향후 계획을 주민들에게 직접 설명했고 해산을 결정하는 주주총회 투표에서 98.4%의 압도적 찬성을 받아 해산하게 됐다.이로써 청송군은 청송사과의 전국적 생산과잉 시대를 대비해 산지유통 시스템의 재정비를 위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유통센터로 전환 후 현동APC는 기존의 APC 기능을 유지하고 주왕산APC에는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공판장을 개설해 처리물량 확대, 농가 판로처 다변화, 물류비 절감 등 지역 농민들에게 실질적 혜택이 돌아가도록 운영체계를 정비했다.지난 8월 유통공사의 운영체계 변경 후 기존 2018년산 만생종 사과 3천65t(매취 922t, 공선 846t, 일반수탁 1천297t)을 수매해 군 전체 생산량의 5% 정도 처리하던 것을 12월 현재 2019년산 만생종 사과는 매취만 5천400t으로 일반 수탁과 상설 운영 중인 공판장 판매량을 포함하면 내년 8월까지 약 1만t(군 전체 생산량의 16%) 정도가 유통센터를 거쳐 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언론과 학계에서는 아무리 공기업이라도 재정이 건전하지 못하고 성과가 저조할 경우 주민의 손으로 직접 해산하고 전문 운영체제를 도입해 스스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모범사례를 남겼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농가 고부가가치 실현 위해 농산물 택배비 지원청송군이 2019년 시행한 각종 정책사업 중 또 하나 돋보이는 것이 있다면 농산물 택배비 지원 사업이다.사과를 APC나 공판장에 출하하는 것보다 소비자와 직거래 하면 최소 50% 이상의 추가 소득이 생긴다는 점에 착안해 올해 4월부터 청송군은 지역에서 생산된 모든 농산물에 대해 택배비를 지원하고 있다.사과를 비롯한 지역 농산물의 소비를 촉진하고 직거래를 활성화하기 위해 시작된 이 사업은 군민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농가(세대)당 최대 50만원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내년에는 올해보다 증액된 10억원으로 예산을 책정했고 현금 대신 지역화폐인 ‘청송사랑화폐’로 지급하게 됐다.택배비 지원 사업은 직거래 활성화를 통한 농가 소득의 보전 및 지역 상권도 살리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한 방편으로 인근 지자체들에서도 시행과정을 관심 있게 살펴보고 있다.윤경희 군수는 “남들이 해놓은 것을 그저 따라 하기보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경영논리를 접목한 정책만이 청송사과를 최고의 브랜드로 유지함과 동시에 농가소득을 안정시키는 비결”이라고 말했다.이어 “청송사과가 올해로 7년 연속 대한민국대표브랜드대상에 선정된 쾌거에 만족하지 않고 포화상태인 사과시장에서 유통시스템을 재정비하는 일은 단단한 내실을 다지는 길”이라고 했다./김종철기자 kjc2476@kbmaeil.com

2019-12-16

검푸른 물 밑서 은빛 섬광 번뜩이는 순간,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농어는 바다 루어낚시 최고의 대상어다. 오늘날 바다 루어낚시라는 장르를 대중화시킨 것도 바늘에 걸린 채 은빛 왕관을 번쩍거리며 물 위로 힘차게 점프하는 농어의 바늘털이다. 그 순간 낚시꾼은 황홀한 흥분에 휩싸여 몸이 달아오른다. 우리나라 루어낚시의 첫 걸음은 쏘가리 낚시이지만, 바다의 경우 농어가 원조다. 농어 루어낚시가 인기를 끈 이유는, 배 위에서 무거운 추가 달린 낚싯바늘을 수직으로 내리는 생미끼 낚시에 비해 스포츠적인 요소가 강하기 때문이다. 선장이 배를 대주는 곳에 채비를 내리기만 하면 되는 선상낚시와는 달리 농어 루어낚시는 갯바위 도보낚시든 선상낚시든 간에 농어가 있을 만한 포인트에 루어를 정확히 던지는 ‘캐스팅’ 능력이 요구된다. 낚시꾼이 트위칭, 저킹, 리트리브 등 액션으로 루어의 다양한 움직임을 연출해 농어를 유혹해낸다는 것 또한 묘미라 할 수 있다. 파도가 부서지는 흰 포말 속에서 갑자기 덜컥, 하는 입질과 함께 ‘찍, 찌이익-’ 릴 드랙이 풀리는 소리, 바늘에 걸린 농어가 물 아래로 꾹꾹 처박으려 할 때마다 초릿대는 활처럼 이리저리 휘어지고, 농어가 쏜살 같이 튀어 올라 공중 점프를 하는 순간, 낚시꾼의 온몸에 전율이 돋는다. 농어 루어낚시는 짜릿한 손맛과 황홀한 눈맛을 모두 충족하는 낚시다.7∼9피트 길이의 미디움라이트 또는 미디움 액션 낚싯대와 2500∼4000번 릴, 원줄은 합사 1∼1.5호, 쇼크리더는 나일론이나 플로로카본 15∼20파운드를 사용한다. 거기에 7∼15cm 크기의 미노우나 20∼30그람 내외의 바이브레이션, 스푼, 메탈지그, 또는 1온스 이하 지그헤드에 4∼5인치 웜을 달아 던진다. 농어는 멸치와 학공치 등 먹이고기들이 있는 곳을 찾아 회유한다. 대개 물이 와서 받치는 곳들, 이를테면 곶부리, 홈통, 수중암초, 간출여, 여밭, 몽돌밭, 해상등대 주변은 조류 소통이 원활하고 농어가 은신하기 좋은 환경이므로 특급 포인트가 된다. 파도가 깨지면서 하얗게 포말이 일어나는 곳, 물의 뼈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곳에서 농어는 온몸을 날카로운 섬광의 검으로 벼리고 있다.우리나라에는 세 종류의 농어가 있다. 점무늬의 유무에 따라 민농어와 점농어로 구분하고, 제주 남부 지방에서 주로 서식하는 넙치농어도 있다. 민농어와 점농어는 점무늬만 빼면 서로 똑같이 생겼지만 넙치농어는 체형이 좀 다르고, 그 힘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전문 낚시꾼들 사이에서도 잡기 힘든 ‘꿈의 대상어’로 꼽힌다. 맛도 굉장히 좋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넙치농어만큼이나 민농어, 점농어도 귀하다. 동해안에서 잡히는 농어는 대부분 민농어다.점농어는 서해에 주로 서식하고, 가끔 거제나 통영 등 동해 남부에서 잡히는 경우가 있다. 연안 찌낚시나 원투낚시에 종종 걸려드는 것은 40cm 이하의 ‘까지매기’(농어 새끼를 뜻하는 경상도 말. 전라도에서는 ‘깔따구’라고 부른다)가 대부분이지만, 루어낚시로는 대물 농어 ‘따오기’(80cm 이상의 농어를 뜻하는 낚시꾼 은어)를 만날 수도 있다. 70∼80cm급 농어 한 마리를 잡으면 성인 대여섯 명이 회와 구이, 탕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여름 농어 못지않게 겨울 농어 또한 최고의 미식 재료다.경북 동해안에서는 포항과 경주가 농어 루어낚시의 일번지로 꼽힌다. 농어 낚시 시즌이 이미 종료된 서해안과는 달리 동해안에서는 겨울에도 농어 입질이 활발하다. 갯바위 도보낚시 또는 방수복과 전용 부츠를 신고 연안 여밭이나 간출여로 진입해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하는 ‘락쇼어’ 낚시 중 어떤 방식으로 농어를 노려볼까 고민하다가, 좀 더 편하고 낚시 성공 확률이 높은 레저보트를 이용하기로 했다. FTV 한국낚시채널 ‘바다로 간 쏘가리’ 진행자인 이찬복 프로와 함께 135마력의 선외기를 장착한 6인승 소형 콤비보트를 타고 ‘호랑이 꼬리’에 숨은 농어와 한판 승부를 벌이기 위해 호미반도 강사2리 선착장에서 배를 띄웠다.세상 모든 낚시가 다 재밌지만, 나는 소형 보트를 타고 즐기는 농어 캐스팅 낚시에서 가장 짜릿한 매력을 느낀다. 우리는 호미곶, 대보, 삼정, 석병, 구룡포를 드나들며 홈통과 곶부리와 수능능선, 수중암초, 여밭 지역을 게릴라처럼 치고 빠지기로 했다. 7.6피트 미디움라이트 로드에 2500번 릴, 합사 1.2호 그리고 쇼크리더 3호로 만끽하는 동해안 겨울 농어와의 경쾌한 파이팅은 그야말로 ‘스포츠’의 정수일 것이다.겨울하늘처럼 바다도 한없이 푸르기만 했다. 바람도 파도도 없어 잔잔한 동해는 마치 청색 원피스 같고, 우리의 보트는 그 위를 스팀다리미처럼 미끄러져 나가며 바다의 주름을 부지런히 폈다. 달리는 보트 위에서 겨울의 정취를 만끽하는 내 옆구리에 파도가 스칠 때마다 은빛 비늘이 무성히 돋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파도 낱알 속에 그리운 이의 눈시울이 언뜻 언뜻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좀처럼 입질이 없었다. 낚시꾼들이 흔히 ‘청물’이라고 불리는 맑은 조류가 흘러들면서 바다 속이 바닥까지 훤하게 보이는 통에 농어들의 경계심이 높아져 낚시하기 까다로운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오후부터 바다가 수상했다.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김춘수, ‘처용단장’)던 시구가 떠올랐다. 바람이 터지면서 너울이 치기 시작했다. 바다는 자꾸 음흉하고, 흐린 하늘에 지워진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몽롱했다. 물이 날카로운 예각으로 빛나는 것을, 바람의 모서리에서 물방울들이 거품을 물고 죽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농어들의 경계심이 느슨해져 낚시하기에는 좋다. 호미곶, 호랑이 꼬리에 숨은 은빛 농어를 잡기 위해 수중여 포말 속으로 끊임없이 루어를 던지고 또 던졌다.강한 입질을 받았다. 제법 힘쓰는 것을 보니 농어인 듯하다. 그런데, 꽤 버티다가 금방 맥없이 끌려나오는 게 거무튀튀하다. 농어는 아니다. 물 위로 올라온 것은 쥐노래미, 동해안에서는 게르치라고 부르는 물고기다. 50cm에 가까운 대물이지만 1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산란철을 맞아 쥐노래미 금어기가 시행 중이기에 잡자마자 곧장 바다로 돌려보냈다. 다시 캐스팅, 또 캐스팅…. ‘톡’하는 입질과 함께 딸려오는 것은 제 몸만 한 루어를 탐한 볼락이었다. 초조해졌다. 겨울 동해안의 태양은 일찍 수평선을 넘어 간다. 금세 어둑해진 호미곶 바다, 이제 기대할 것은 ‘피딩타임’ 뿐이었다.‘상생의 손’ 조형물과 새천년기념관 위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끊임없는 캐스팅으로 몸에 열기가 돌아 두꺼운 겨울 패딩은 이미 벗은 지 오래, 바람을 뚫고 호미곶 먹등대 주변을 돌며 루어를 던졌다. 먹등대에서 십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의 수중여 근처, 병든 물고기의 움직임처럼 보이도록 액션을 주던 루어를 잠시 멈춘 순간 덜컥, 하는 입질과 함께 꾹꾹 처박는 농어 특유의 경쾌한 파이팅이 시작되었다. 바늘이 빠지지 않도록 낚싯대를 낮추며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시키고, 낚싯줄이 터지지 않게끔 릴 드랙 장력을 조절하며 농어의 힘을 뺐다. 줄다리기 끝에 마침내 검푸른 물 밑에서 은빛 섬광이 번뜩이는 순간, 온몸의 피가 나른해지며 무언가 내 몸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물 위로 끌어올린 녀석은 70cm급의 잘 생긴 동해안 농어. 겨울 바다가 준 멋진 선물이었다.농어는 회로 먹는 게 가장 좋지만, 소금구이나 스테이크, 매운탕, 맑은탕 등 어떤 방식으로 조리해도 다 맛있다. 우리가 시중에서 먹는 농어회는 90% 이상이 양식인데, 양식과 자연산은 회의 ‘때깔’부터 다르다. 양식은 대개 어두운 회색이나 갈색을 띠는데, 자연산은 밝은 갈색을 띠거나 불그스름하다. 특히 기름이 오른 겨울 농어회는 별미 중의 별미, 농어 스테이크의 경우에는 서양에서 고급 요리로 통한다. 그래서 이날 잡은 농어는 회와 스테이크로 동시에 즐겼다. 미식은 행복했지만 마음 한 편에는 아쉬움이 부글거렸다. 파도가 몸 부서져 죽는 저 포말 속, 바다의 뼈들이 물소리를 내는 수중여에 숨어 있을 ‘따오기’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녀석과 다시 한 번 진검승부를 펼치고 싶다. /이병철(시인)

2019-12-15

‘견딜 수 없는 사랑’이 세상에 있을까?

‘사막과 검은 황금(석유)의 나라’로 불리는 이란에서 왜 뜬금없이 짙푸른 바다를 떠올렸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그저 막연히 유추하자면 인간의 상상 바깥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과 바다가 주는 ‘막막함’, 아스라한 사막의 지평선과 바다의 수평선이 닮아서였을 것이라 추정할 뿐.스스로 ‘신성 이슬람 공화국’이라 칭하는 이란. 그 나라의 척추라 할 자그로스산맥 동쪽 자락엔 아름다운 천년고도(千年古都) 이스파한(Esfahan)이 있다. 한낮의 온도가 섭씨 40℃를 넘나들었던 어느 해 5월 중순. 수도 테헤란에서 7~8시간쯤 버스를 타고 그 도시에 도착했다.많은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이 “지구에서 가장 미학적 완성도가 높다”고 자랑하는 셰이크 로트폴라흐 모스크(Mosque of Sheik Lotfollah)와 ‘지상에서 가장 웅장한 발코니’로 이름 높은 알리 카푸 궁전(Mosque of Sheik Lotfollah)이 그 위용을 자랑하는 이스파한.매력적인 그 도시 중심에 자리한 ‘이맘 광장’(Imam Square)의 나무 그늘에 앉아 모스크와 궁전을 바라봤다.동서가 600여m, 남북으로는 500m가 넘는 거대한 이 광장은 중국의 천안문광장 정도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크다. 규모에선 조금 밀리지만 이슬람 양식의 절정을 보여주는 내부 건축물들의 아름다움은 천안문광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이란 꼬마숙녀의 눈에서 ‘푸른 바다’를 보다수백kg의 갖가지 보석을 박아놓은 듯 페르시아의 태양 아래서 호화롭게 빛나는 셰이크 로트폴라흐 모스크의 지붕은 이란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높다고 했다. 그걸 보러 각지에서 이스파한을 찾는 관광객이 적지 않았다.모스크 맞은편 알리 카푸 궁전 입구에서 석류주스를 마시며 익숙지 않은 뜨거운 날씨를 견디던 기자 앞에 동해 물빛처럼 파랗고 투명한 색깔의 원피스를 입고 엄마 곁에서 종종거리는 이란 꼬마숙녀가 나타났다.다섯 살쯤이나 됐을까? 너무나 귀여워서 볼이라도 한 번 당겨보고 싶었던 아기의 커다란 눈망울. 그 안에 푸른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 사막의 열기를 잠재우는.순진과 무구, 그리고 순수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고…. 그 순간 북한 평안도 산골에서 태어나 끝끝내 남쪽의 바다를 그리워했던 ‘20세기 최고의 가객’ 백석(1912~1996)이 스물두 살 귀때기 파랗던 시절에 쓴 한 편의 시를 떠올렸다. ‘통영 2’다.▲사막 같았을 시인의 심정, 그걸 위로해준 바다일제강점기에 청춘을 보낸 시인 백석은 가난했지만 누구보다 영민한 청년이었다. 겨우 18세에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라는 명찰을 달았고, 이후 일본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한국으로 돌아와선 신문사 기자로 잠시 일했는데, 그때 만난 경상남도 통영 출신의 여성 박경련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신여성 박경련 역시 댄디하고 잘생긴 사내 백석에게 호감을 가졌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젊은 남녀의 사랑은 희극보다는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은 법.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라 박경련은 백석이 아닌, 백석의 친구에게 시집을 가버린다.‘통영 2’는 애끓는 연정을 참지 못하고 홀로 서울을 출발해 당시로선 머나먼 곳이었을 남녘 끝 바닷가 마을 통영까지 찾아간 한 청년의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낸 작품이다. 실연한 20대 초반 사내는 물만이 아닌 바람까지 짠 여자의 고향에서 ‘밤새껏 바다에서 뿡뿡 배가 우는’ 소리에 눈물짓는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심사를 주체할 수가 없다. 죽음에의 유혹이었을 터다.시에 등장하는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골에 산다는 난(蘭)은 박경련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곁에 없다. ‘타관 시집’(결혼하여 타향으로 떠남)을 갔다.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그래서다. 아래와 같은 ‘바다 냄새 나는 문장’은 시가 쓰인 1934년으로부터 85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사랑을 잃은 젊은이들의 ‘사막 같은 쓸쓸한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이 저녁 울듯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녕(지붕의 평안북도 방언)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손방아(디딜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사랑에 빠진 청춘들은 수백·수천 년 전에도 있었으니해가 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이스파한 이맘 광장에도 차도르(Chador·이란 여성들이 얼굴과 몸을 가리는 검은색 의상) 같은 어둠의 베일이 드리워졌다. 눈이 커다란 귀여운 꼬마숙녀는 엄마의 손을 잡고 멀리로 사라졌다. 기억 속에서 또렷하게 떠올랐던 백석의 시도 모래 위에 그린 그림처럼 서서히 지워져갔다. 그리고 찾아온 고요한 사색의 시간.산책하듯 돌아본 이맘 광장의 건축물 내부엔 벽화가 적지 않았다. 이슬람 율법은 미혼 남녀가 드러내놓고 연애하는 걸 엄격하게 금한다.이란을 포함한 무슬림 국가 어디에서도 겉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연인들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법률과 금기의 제도만으로 청년들의 넘쳐나는 욕망을 온전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없다.지금도 잊히지 않는 이스파한의 벽화. 붉은 옷을 입은 심각한 표정의 페르시아 사내가 푸른 옷의 여인에게 무언가를 건네주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여인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웃고 있다. 벽화가 그려진 시대도 정확히 알 수 없고, 그림이 완성되던 전후 상황도 짐작할 수 없지만 기자는 무턱대고 믿고 있다. ‘저들은 분명 사랑에 빠진 청춘남녀’라고. 그 믿음을 버릴 생각이 앞으로도 없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12-12

학생 중심의 열린 대학 넘어새 경북시대 중심으로 뜬다

경북도립대학교는 작지만 강한 명품 대학이다. 대학에서 10분 거리에 도청 신도시가 들어서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됐던 청년 문화 공간 부족 문제가 해소돼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고 있다. 인구 10만의 도청 신도시가 2027년 완성되면 경북 북부권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가 될 전망이다. 경북도립대학교는 이러한 기회를 발판 삼아 경북을 넘어 전국 일류 공립대학으로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학자금 대출이 필요 없는 공립대학경북도립대 학생들은 등록금 걱정이 없다. 2020학년도 등록금은 학기당 약 122만 원(2019 대학정보공시기준)으로 전국대학 평균 등록금의 42%에 불과하다. 2018학년도부터 신입생의 입학금을 폐지해 교육비 부담을 더 낮췄다. 등록금 부담이 없다고 장학혜택이 적은 것은 아니다. 2018년 한 해 동안 재학생 1인당 장학금은 평균 206만 원(2018 대학정보공시기준)이다. 사회적 약자와 저소득층을 위한 다양한 장학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특히 아동보호시설에서 진학한 학생에게는 등록금을 전액 면제해 줄 뿐만 아니라 생활비를 지원해 공립대학으로서의 공공성 강화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든든한 경북도가 설립하고 지원하는 공립대학인 경북도립대학은 미래를 이끌어갈 대학생들이 교육비 걱정 없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2018년 유지취업률, 전국 전문대 TOP10에경북도립대의 2018년 취업률은 68.2%다. 단순 취업률은 전국평균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한 취업률이 아닌 취업의 질을 측정하는 유지취업률을 봐야 졸업생들이 얼마나 양질의 일자리에 취업했는지 알 수 있다.유지취업률은 대학 졸업생이 취업 후 취득한 건강보험직장가입 자격을 유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취업의 질을 측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손꼽힌다. 교육부는 대학별 유지취업률을 매년 4번 조사하는데 경북도립대학은 2018년 4번의 유지취업률 조사에서 전국 136개 전문대학 중 3월(94.9%, 7위), 6월(93.0%, 2위), 9월(86.7%, 3위), 11월(83.5%, 5위) 모두 전국 TOP10에 들어 경북도립대학교 졸업생들이 질 좋고 안정적인 일자리에 취업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공무원이 되고 싶다면 경북도립대를 선택하라경북도립대는 공무원 양성대학으로 유명하다. 지난 9월부터 공무원양성을 위한 기숙형의 공무원양성원을 개원해 공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기숙사비와 식비를 면제하고, 교재비 및 인터넷 강의비 지원, 성적 우수자 장학금 지원, 무료 특강, 개인 독서실 지원 등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2018년 대학정보 공시를 분석한 결과 경북도립대 졸업생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 취업한 비율은 19.7%로 전국 전문대학의 8.6%보다 3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현장 중심 교육으로 산업체가 원하는 인재 양성경북도립대의 12개 학과는 전공별로 취업 현장에서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100여 개 산업체 및 기관과의 업무협약을 바탕으로 현장실습을 강화해 직업교육의 명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직무능력을 갖춘 경북도립대학교의 인재는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국내 최고 자동차 판금 및 도장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는 자동차과는 호주 등 해외지역까지 전문 인력을 공급하는 등 현장 직무능력 중심 교육과정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이처럼 경북도립대학은 정규 교육과정을 마친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기업체가 요구라는 최적의 인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현장 직무능력 중심의 교육을 이어나 갈 계획이다.□ 농촌지역 대학에도 불편 없어농촌지역 소재 대학이라도 불편함은 없다. 경북도립대 인근에 위치한 도청 신도시에는 대학생이 즐겨찾는 각종 프랜차이즈 매장이 즐비하다. 사실 학생들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대학에서 강의, 특강 등 촘촘한 교육과정을 제공하고 있어 불편해할 시간조차 없다. 교육과정이 촘촘한 만큼 재학생 10명 중 6명 이상이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기숙사를 제공하고 있다. 2020년에는 기숙사를 신축해 학생들이 더욱 나은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이다.또한, 기숙사에 입사하지 못한 영주·안동·점촌·상주 등 학교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사는 학생들은 매일 운행하는 통학버스로 등·하교 할 수 있으며 대구와 구미, 청주, 서울에 사는 학생들은 매주 운행하는 통학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물론, 통학버스는 무료다.□ 받은 것보다 더 돌려주는 대학대학이 학생들에게 등록금이나 계절학기 수강료 등으로 받은 금액 대비 대학이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투자한 금액을 비율로 나타낸 교육비 환원률이라는 지표가 있다.경북도립대학교의 교육비 환원률은 519%이다. 쉽게 말해 대학이 매년 학생들에게 받은 것의 5.2배 정도를 투자하고 있다는 의미다. 대학의 취업률, 교육비 등 대학 선택의 기준은 여러 가지다. 경북도립대는 공립대학인 만큼 재학생들이 자신의 꿈과 미래를 차곡차곡 준비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다. 졸업 후 학자금 대출에 발목 잡히지 않고 성공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있다.경북도립대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교육부,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각종 국책사업에 선정되는 등 명실상부한 명문 공립대학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또한, 신도청시대 중심대학으로서 경북 도정 발전 전략의 싱크탱크, 지역공동체 HUB 기능 등 공익적 역할이 앞으로 더욱 더 기대되고 있다.정병윤 경북도립대학교 총장은 “우리 대학은 경북도가 설립하고 300만 도민이 후원하는 작지만 강한 실용 명문 대학으로 앞으로도 공립 고등 교육기관으로서 주어진 소임과 사명에 최선을 다할 것이며, 이와 관련한 교육 투자를 아낌없이 전폭적으로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이를 통해 새 경북 시대 중심대학으로 거듭 나겠다”고 말했다./정안진기자 ajjung@kbmaeil.com

2019-12-12

멋모르고 맵다가 뒤돌아서면 다시 생각나는 그 빨간 맛

고추 양념구이 맛집 3곳영양은 고추로 유명하다. 고추는 양념의 재료다. 돼지고기, 닭고기에 고추 양념을 제대로 한 집들이 제법 있다. 돼지고기, 닭고기 고추 양념이 아주 좋은 구이집 3곳을 소개한다.“저녁에 가볍게 술 한잔 생각나시면 가봐도 좋을 집”이라고 소개받았다. “대단한 집은 아니고, 허름한 집이니 큰 기대는 하지 마라”는 말도 덧붙였다. 메뉴도 평범하다. 닭불고기, 닭발불고기 등이다. 내륙 어디나 있는 평범한 메뉴다.허름한 안팎의 분위기와는 달리 음식, 반찬이 상당히 깔끔하다. 채소도 신선하다. 대부분 닭, 돼지 불고기 식당은 물엿을 많이 사용한다. 물엿을 쓰지 않으면 겉모양부터 표시가 난다. 먹음직스럽지도, 표면이 반짝거리지도 않는다. 문제는 맛이다. 물엿은 지나치게 단맛을 낸다. 이 가게 불고기는 달지 않다. 닭고기의 맛이나 닭발의 식감을 제대로 살렸다.음식을 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직접 닭을 해체하고 손질한다. 가게 뒤편에 연탄불이 있다. 일일이 석쇠로 굽는다. 불맛이 좋다.직접 손질한 고기에 달지 않은, 자가 제조 양념이다. 더하여 연탄불에 일일이 정성스럽게 굽는다. 시골이라서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 시골이라도 1만 원대의 음식에 곧이곧대로 정성을 기울이는 곳은 드물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깊은 정성을 기울이는 가게에 감사.재래시장 골목길의 자그마한 가게다. 문에 써 붙인 메뉴가 재미있다. 주물럭, 칼국수, 비빔밥, 정식 등이다. 메뉴는 의미가 없다. 정식을 시킨 후, 밥 위에 반찬들을 올린 후 비비면 비빔밥이다. 비빔밥을 주문해도 마찬가지. 별다른 비빔용 나물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쌀밥’ ‘보리밥’을 가르는 게 낫다. 비빔용 대접을 줄 때 쌀밥? 혹은 보리밥? 이라고 묻는다.가게 안팎이 허름한 ‘동네 식당’이다. 반찬은 상당히 정갈하다. ‘주물럭’은 양념한 돼지고기 주물럭 볶음이다. 주문하면 불판에 냄비를 올린다. 냄비 속에는 먹음직스러운 돼지고기 주물럭과 대파 등이 들어 있다. 한가할 때는 주인이 볶아주기도 하지만, 바쁜 식사시간에는 손님이 직접 볶는다. 양념이 수준급이다. 반찬들도 양념이 좋다. 시골 읍내의 시장통이다. 채소류는 늘 신선하다. 여기에 영양 특산 고춧가루를 더한다. 깔끔한 매운맛이 아주 좋다. 간판은 없다. LED 전광판에 ‘갈매기’가 흘러간다. 그래서 가게 이름이 ‘갈매기식당’임을 알 수 있다.노포다. 업력 50년. 관광객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이다. 메뉴는 한우와 돼지고기 그리고 돼지고기 주물럭이다. 메뉴에는 ‘돼지주물럭’이라고 표기했다. 돼지 주물럭은, 경북 내륙지방의 일반적인 것과 얼마간 다른 부분이 있다. 돼지 주물럭에 콩나물 데친 것과 묵은 지를 더하여 끓인다. 칼칼한 맛이 별다르다. 불판이 돌판인 것이 눈에 띈다. 돌판은, 열기를 은은하게, 오래 지킨다. 돼지고기와 곱창을 섞었다.대부분 손님은 고기, 곱창, 채소를 건져 먹은 다음, 돌판에 밥을 볶는다. 이 집의 특이한 점이다. 별도의 김 가루 등을 더한 다음 종업원이 볶아주기도 한다.한우와 돼지고기구이도 가능하다.산나물 전문 맛집 2곳영양은 깊은 산속이다. 오지이니 산나물이 아주 좋다. 봄에는 산나물축제도 연다. 산나물 전문점도 군데군데 있다. 그중 두 곳을 소개한다. 1년 내내 묵나물이 아니라 푸른 산나물, 들나물을 만날 수 있는 맛집들이다.영양군청 바로 곁에 있다.가벼운 식사나 손님맞이로도 모두 좋다. 여러 종류의 산나물, 들나물들을 세심하게 갈라서 내놓는다. 나물 대의 색깔이 붉은 것, 보라색 등은 자연산이다. 자연산 나물들 대여섯 가지를 잘 매만져서 내놓는다. 정식을 주문하면 여기에 보쌈과 고등어구이가 곁들여진다. 명이나물과 더불어 내놓는 보쌈도 잘 만진 것이다.여러 종류의 나물과 조화를 이루는 간장, 된장 등이 돋보인다. “음식은 장맛”이라는 평범한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다. 나물 고유의 맛과 향을 그대로 전한다.모든 음식이 다 맛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산나물은, 맛이 아니라 향으로 먹는다.된장찌개와 무가 들어간 국, 배추 부침 등을 눈여겨볼 것. 수준급의 음식이다. 도드라진 맛이 아니라 슴슴한 맛이다. 식재료 고유의 맛과 향을 제대로 살렸다. 재래 된장의 맛을 살린 된장찌개도 좋다. 추천.육류는 예약 판매다. 산채정식, 산채비빔밥 전문점이다. 손님들의 기호를 무시할 수는 없다. 식당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다. 고기를 찾는 이들도 있다. 내놓기는 하지만, 예약해야 한다. 산채 음식은 늘 가능하다. 산채정식에도 적절한 양의 불고기를 내놓는다.나물을 일일이 가르지 않고, 섞어서 내놓는다. 이유가 있다.봄철 산나물 채취 기간은 길지 않다. 시골도 인력난이다. 힘든 산나물 채취 일을 하려는 이가 드물다. 주인 가족, 식당 종업원들을 중심으로 직접 봄철에 산나물을 채취한다.짧은 기간에 해내는 일이다. 바쁜 시간에 일일이 산나물을 가리기 힘들다. 섞어서 채취하고, 저녁에는 바로 보관 준비를 해야 한다. 나물을 가르지 않은 이유다.정성을 기울인 밥상, 주인이 끊임없이 개선하고 있는 밥상이다. 시골의 밥상이지만 세련된 맛도 있다. 수수하면서 정갈한 밥상이 아주 좋다. 내부는 상당히 깔끔하다. 추천.“영양 가면, 이 곳은 꼭 가보시길!”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탁주양조장 ‘영양탁주합동’, 영양을 한식의 고장으로 만든 ‘음식디미방’ 체험관, 연꽃 연못 위의 카페3G. 이 3곳을 영양에 가면 가봐야 할 곳으로 추천한다.영양탁주합동1926년 문을 연 곳이다. 이름 ‘영양탁주합동’의 ‘합동’은 오늘날 협동조합 식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세운 탁주, 막걸리 양조장이다. 경북에서는 가장 오래된 막걸리 제조 공장이다. 영양이 오지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켜올 수 있었을 것이다. 막걸리는 유통 과정이 까다롭다. 가격 대비 무게가 무겁고, 운반 과정에서도 쉬 상한다. 술의 도수가 낮다. 효모균이 살아 있는 술이기 때문에 쉽게 상한다. 일제는 세금을 걷을 목적으로 전통주를 막고, 당시로선 근대적인 주류 제조 공장을 권했다. 몇 곳의 양조장을 합쳐서 만든 것이 바로 ‘합동 양조장’이다.‘영양탁주합동’은 얼마 전 주인이 바뀌었다. 최근까지 술을 빚었으나 이제는 문을 닫았다. 바뀐 주인이 새로 문을 열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두들마을 ‘음식디미방’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여성군자 장계향 음식디미방 체험관’이란 긴 이름도 있다.안동 서후면에 종택이 있는 경당 장흥효 선생의 외동딸이 장계향이다. 석계 이시명과 혼인, 영덕으로 시집갔다. 석계가 영덕에서 오늘날 영양 두들마을로 세거지를 옮기면서 영양에서 살았다. 1670년 무렵, ‘음식디미방’을 남겼다. 장계향의 음식은 안동, 영덕, 영양, 그리고 외가인 봉화의 음식을 모두 모았다. ‘음식디미방’ ‘맛질방문’의 ‘맛질’은 봉화다. 외가인 ‘봉화의 음식 만드는 방법’이라는 뜻이다.현재 ‘음식디미방 체험관’에서는 17세기 반가의 여러 음식을 만날 수 있다. 원형 잡채와 여러 종류의 ‘누르미’ 음식 등은 반드시 봐야 할 음식. 예약 필수.카페3G설마, 했던 곳에서 수준급의 카페를 만난다. 영양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있다. 대부분 카페가 높은 곳을 찾는다. ‘카페3G’는 나지막한 곳에 있다. 지방도에서 바라보면 나지막한 곳에, 대도시에 있을 법한 예쁜 카페 건물이 보인다. 바로 곁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멀리 산과 들, 학교 건물이 하나 있다. 늦봄부터 여름 한 철에는 연못에 연꽃이 잔뜩 핀다. 이 무렵이 ‘카페 제철’이다. 연꽃으로 둘러싸인, 마치 작은 배같이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려면, 여름철에 가는 것도 좋을 듯.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12-11

빛나는 별의 흔적이 꿈인 듯 지나가고…

‘지조론’을 펼친 선비 조지훈의 자취를 찾아서영양군은 부정할 수 없는 ‘문인의 도시’다. 시인 오일도(1901~1946)와 조지훈(1920~1968), 소설가 이문열(71) 등이 모두 영양에서 태어나거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들의 생가는 물론,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자 만든 문학관과 문학연구소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100년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가며 낭송될 작품 ‘승무’와 ‘낙화’를 쓴 조지훈은 빼어난 서정시인인 동시에 ‘영남의 선비’였다.그가 1962년 펴낸 ‘지조론’은 세태에 쉬이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자기중심을 굳건히 잡아가는 지식인의 태도를 담담한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특히 ‘선비의 도(道)’와 ‘민족(民族)의 길’ 같은 부분은 반세기가 흐른 지금 읽어도 그 감동이 여전하다.김소월, 유치환, 서정주 등과 동급으로 평가받는 조지훈의 문학은 “한국 전통의 운율과 고요함의 미학을 현대적 시학(詩學)과 효과적으로 결합해냈다”는 상찬을 받았다. 그는 민속학과 역사에도 조예가 깊었다.‘지훈 시 광장’, ‘조지훈 생가’, ‘지훈문학관’, ‘지훈 시 공원’, ‘시인의 숲’ 등이 조성된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은 바로 이 조지훈 시인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튀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예술적 향취가 배어 있는 지훈문학관을 찾은 날. 시인의 소년 시절을 담아낸 사진과 격동의 역사를 헤쳐 나온 작가의 흔적과 만날 수 있었다.오래 전 출간된 그의 저서 수백 여 권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여동생과 함께 낭송한 ‘낙화’도 녹음돼 있어 헤드폰을 낀 방문자들의 귀를 즐겁게 해줬다.오십 살을 채우지 못하고 짧은 시간 세상에 머물다 떠났지만, 그가 남긴 주례사 등의 자필 원고는 조지훈이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했던 시인이자 선비’라는 걸 짐작케 했다.문학관을 나와 조지훈이 태어난 ‘호은종택’으로 향하는 길. 차갑고 매운바람을 잠시잠깐 잊게 해주는 겨울 오후 햇살 한 점이 얼굴을 비췄다. 그건 시인 조지훈이 자신의 고향을 찾은 이에게 내민 손길이었을까?◇지훈문학관 홈페이지: http://www.yyg.go.kr/jihun/‘국제 밤하늘보호공원’서 알퐁스 도데와 윤동주를 떠올리다기자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이니 30년도 훨씬 지난 시절의 기억이다.교과서에 실린 알퐁스 도데(1840~1897)의 소설 ‘별’에서 ‘프랑스 아가씨’ 스테파네트가 목동에게 묻는다. “저게 뭐야?”그녀가 무인지경(無人之境)의 산 위에서 누추한 목동과 바라본 건 별똥별(流星)이었다. 소설은 그 이전의 순간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더없이 아름다운 문장이다.‘낮은 살아있는 생명의 시간이다. 반면 밤엔 죽은 것들이 세계를 횡행한다. 익숙지 않은 이에게 밤은 두려움이다. 그래서일까?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조그만 소리와 별것 아닌 낯선 빛에도 몸을 바들바들 떨며 내게로 바싹 다가앉았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 아래쪽 호수에서 슬프고 긴 소리가 파동을 일으키며 우리들 쪽으로 메아리쳤다. 그때 선명한 별똥별 하나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구슬픈 음악 아래 빛나는 별의 흔적이 아가씨와 내 앞을 꿈인 듯 지나가고 있었다’.며칠 전이다.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진 늦은 밤. 영양군 ‘국제 밤하늘보호공원’을 찾았다.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총총한 별들을 올려다보며 떠올린 유년의 기억이 한때 소년이었던 마흔아홉 살 중년 사내를 낭만적 감정으로 이끌었다.그랬다. 1980년대에 청춘을 살아낸 이들에겐 누구에게나 마음 속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존재했다. 그랬기에 ‘별’은 ‘꿈’의 메타포인 동시에 가닿을 수 없는 ‘이상향’의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였다.영양은 국제밤하늘협회(The Internatio nal Dark Sky Association)가 공인한 ‘별의 고장’이다. 이 협회는 2015년 영양군을 지목해 “밤하늘 별빛이 가장 아름다운 지역 중 하나”로 인정했다. 동시에 영양의 마스코트라고 할 ‘반딧불이’까지 주목을 받았다.영양군 수비면에 자리한 국제 밤하늘보호공원의 ‘별 생태 체험관’과 ‘반딧불이 천문대’는 별과 관련된 추억을 가진 어른은 물론, 천문학자와 생물학자를 꿈꾸는 아이들에게도 인기 높은 공간이다.‘생태전시실’에선 곤충의 삶부터 죽음까지를 관찰하며 생생한 관련 영상을 볼 수 있고, ‘별밤극장’은 별을 소재로 한 다양한 동영상을 상영한다. ‘은하수여행관’과 ‘빛 공해 체험실’에선 과도한 빛이 공해가 될 수도 있다는 의외의 사실을 흥미로운 자료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연중 열리는 천문캠프와 파브르 곤충캠프, 반딧불이 축제에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다”는 게 영양 밤하늘보호공원측의 설명이다.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엄마나 아버지라면 아들과 딸의 손을 잡고 이곳을 찾아 ‘20세기 식민지에서 21세기 예술가의 삶을 살아냈던’ 요절 시인 윤동주(1917~1945)의 ‘별 헤는 밤’ 첫대목을 조용하게 읊어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개인적인 부탁 하나를 덧붙이자면 이제는 더 이상 ‘별’을 쳐다보지 않고, ‘꿈’에서도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40~50대들에게 “꼭 한 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명소 남이포·두들마을영양군 입암면에 기이한 모양으로 우뚝 솟은 선바위. ‘입암’을 한자로 쓰면 立巖이니, 선바위는 입암의 한글 표현인 듯하다.절벽과 계곡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장엄하고 거대한 바위는 인근 남이포와 함께 영양이 자랑하는 천혜의 자연경관 중 하나다. 멀리서 바라보면 애틋한 이야기가 서렸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선바위를 둘러싼 설화도 흥미롭다. 직접 가서 확인해보시길.석보면 두들마을은 전통문화의 향기를 호흡할 수 있는 곳이다. ‘두들’은 언덕을 칭하는 경상도 방언. 여기는 17세기 조선의 유학자 석계 이시영이 병자호란 후 벼슬을 버리고 찾아와 제자들을 양성한 고을로도 유명하다.두들마을엔 석계가 글을 가르친 서당과 고택 등이 남아 있고, 최근엔 ‘음식디미방 체험관’ 등도 들어섰다. 고풍스런 북카페가 문을 열어 문학청년들도 적지 않게 찾는다. 소설가 이문열은 이 마을에서 유년을 보냈다.25년 전부터 나무를 심어 ‘치유와 휴양의 관광지’를 만들려했던 노력도 결실을 맺고 있다. 수비면 죽파리에 조성된 자작나무숲은 “차세대 영양 관광의 핵심 포인트”라는 게 영양군청의 부연이다.축구장 50개를 합친 것만큼 광활한 땅에서 조화로운 협연을 펼치는 새하얀 자작나무들이 장관을 이룬다. 코끝이 시린 겨울에도 “우리 사랑은 변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젊은 연인들에게 권할만한 여행지다./홍성식·장유수기자

2019-12-11

조선조 왕들의음주와의 전쟁

조선시대 왕들은 통치의 수단으로 금주령(禁酒令)을 곧잘 내렸다. 특히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기강을 바로잡으려고 할 때는 더욱 그랬다.태종은 집권 초기부터 빈번하게 금주령을 내렸는데,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스무 차례가 넘는다. 세종은 재난이나 이변이 없더라도 매번 농사철에는 술을 금하는 조치를 내렸다. 영조는 재위 기간 52년 중 50년 동안 금주령을 내려 조선시대 국왕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금주령을 시행한 임금으로 꼽히고 있다.1764년(영조 40) 음력 5월, 전라도 영광군수로 있던 윤면동(尹冕東)이란 사람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관내 사람들 중에서 금주령을 위반한 사람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윤면동이란 어떤 사람일까? 공교롭게도 그와 가장 악연인 사람의 기록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원교 이광사가 쓴 원교집선(圓嶠集選)에 의하면, 원교는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처음에는 함경도 부령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학문과 서예에 정진했다. 때로는 학동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며 비교적 안정적인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데, 1762년(영조 38년)에 들어와 갑자기 진도에 이배된 뒤 다시 신지도로 옮기게 된다. 그 이유가 바로 윤면동이 올린 장계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윤면동은 임금에게 ‘원교가 북쪽 변방에서 선비들을 다수 모아 글씨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민심을 선동할 우려가 있으니 작은 섬에 이배하라’고 요구를 했다. 이 상소에 의해 섬으로 옮겨진 원교는 신지도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그런 윤면동이 이번에는 자신이 서해극변에서 동쪽 끝 연변(沿邊) 장기현으로 유배를 오는 신세가 된 것이다.농경이 기본인 조선사회에서 술을 마구 빚어내는 일은 큰 문젯거리였다. 술을 빚으면 열 사람이 먹을 곡식을 한 사람이 마셔 없앤다. 1733년(영조 9) 1월 10일, 도성(都城)의 쌀값이 뛰면서 품귀현상이 일어났다. 비변사의 당상관 김동필(金東弼)이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시기가 바로 세초(歲初)라 집집마다 삼해주(三亥酒)를 빚고 있었다. 삼강(三江)에 정박하고 있으면서 미곡을 파는 미선(米船)들이 모두 술을 많이 빚는 가정으로 미곡을 매도하고 있었기에 시중에 나돌 쌀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임금에게 금주령을 엄격히 내리자고 건의를 했고, 영조는 이를 받아들여 전국에 금주령을 내려 백성과 관리들을 단속하기에 이른다.하지만 금주령은 지방에서는 비교적 엄격하게 준행되었으나, 한양의 사대부·관료사회에서 이 같은 명령은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굶어서 죽어나가고, 다른 한쪽에서는 술을 빚어 알곡을 탕진하는 일이 여전히 계속된 것이다. 환자가 약재를 넣은 청주를 마시는 것은 허용되었으므로 특권층들은 쌀로 청주를 빚어 약으로 쓰는 술, 곧 ‘약주’라고 속이고 먹었으므로 단속도 사실상 어려웠다.1755년(영조 31) 여름에는 장맛비가 한 달 동안 이어지더니 큰 홍수가 났다.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심한 흉년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관아의 벼슬아치와 양반 지주들은 음주가무에 태평세월을 보냈다.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사도세자는 지방에 국한해 금주령을 내렸지만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해 9월, 이를 보다 못한 영조가 직접 나서서 온 나라에 금주령을 내리고 스스로 궁궐 안에 두었던 술을 모두 없앴다. 제사와 나라의 잔치 때도 감주만 쓰도록 했다. 대사헌 구상(具庠)이 “제발 제사 때 탁주라도 쓰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오히려 금주령을 위반한 자는 중죄로 다스린다고 공표했다.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3개월의 유예기간 후 1756년(영조 32) 정월부터 전국에 금주령이 시행되었다. 이는 조선 전 시대를 걸쳐 가장 엄격한 것이었다.1758년(영조 34)에도 큰 흉작이 들었다. 영조는 홍화문(弘化門·창경궁 정문)에 나가 백성들에게 금주윤음(禁酒綸音·금주에 대해 왕이 특별히 내리는 문서)을 또 발표했다. 이번에는 만약 위반자가 있을 시는 효수(梟首)하겠다고 했다. 이때의 금주령은 이미 흉년의 곡식절약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귀중한 곡식을 술을 빚는 데 낭비하지 말 것은 물론이고, 술에 취한 관리들이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경계하자는 것이었다.이런 서슬 퍼런 분위기에도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었다. 1762년 9월, 남병사(함경도 북청의 병마절도사를 말함) 윤구연(尹九淵)이 매일같이 술을 마셔 취해있다는 대사헌 남태회의 상소가 올라왔다. 영조는 상소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사형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라는 비답을 내렸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선전관 조성(趙峸)이 술 냄새가 나는 항아리를 발견하고 영조에게 아뢰자, 영조는 당장 그를 잡아오도록 지시했다. 그해 9월 17일, 영조는 남대문으로 가서 잡혀온 윤구연을 친국을 했다. 그의 옆에는 술 냄새가 솔솔 나는 빈 항아리와 약간의 누룩이 증거물로 놓여 있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윤구언은 실수를 했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으나, 영조는 도성의 백성과 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를 참수형에 처했다. 이날 영의정 신만·좌의정 홍봉한·우의정 윤동도가 차자(箚子·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올려 윤구연의 죄에 대해 용서할 것을 드세게 주장하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고 말았다.비참하게 죽은 윤구연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려 남대문에 걸렸지만, 술 항아리가 금주령이 내려지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억울했다는 이야기가 한동안 회자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윤구연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후 전라도 우수군절도사 등 여러 무관직을 역임했다. 1751년(영조 27) 8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제주목사 재임 중에는 각 관청의 관리를 철저히 단속해 업무기강을 바로잡았다. 또한 백성의 어려운 형편을 고려해 요역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어 많은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제주 오등동 한천(漢川) 상류에 위치한 방선문(訪仙門) 계곡의 바위 절벽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마애명(磨崖銘)이 아직도 남아 있다. 또 1757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시절에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청주시 상당구에 그를 잊지 않으려는 불망비가 아직도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적어도 술이나 퍼마시고 정사를 돌보지 않는 나태한 관리는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영조가 1774년(영조 50)에 들어서 이미 죽고 없는 윤구연에게 다시 직첩(職牒)을 지급하라는 명을 내린 것만 봐도 그렇다.1763년 (영조 39) 6월 20일, 이번에는 포도대장 정여직(鄭汝稷)이 잡혀왔다. 야경을 준비하던 어영청 소속 순라군들이 금령을 어기고 술을 마시다가 암행어사에게 적발된 것이다. 영조는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장안의 백성들을 모아 놓고 책임자인 그를 남양(南陽·전라남도 고흥)으로 귀양 보냈다. 곧이어 병조 판서로 하여금 노량진에 가서 중군(中軍·부대장을 호위하며 실질적인 임무를 관장하던 관리)에게 곤장 열 대를 때린 뒤에 파면토록 하고, 패장(牌將· 군졸을 거느리던 사람) 또한 곤장으로 다스린 후 충군(充軍· 계급을 강등하여 수군이나 변방으로 보내던 군역)하도록 명했다.이날 영조는 연석해 있던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으로부터 해괴한 보고를 받는다. 전 장성 부사(長城府使) 최홍보(崔弘輔)의 기생첩이 금주령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가관인 것은 이를 안 최홍보의 부관(部官)이 그녀에게 태형(笞刑)을 가하자 그 기첩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홑이불을 덮어쓰고 도랑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화가 난 영조는 이 사실을 숨기고 아뢰지 않은 관련자들을 모두 처벌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사대부 중 기첩을 데리고 있는 사람은 자식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원래 기생의 적(籍)으로 되돌리고, 그 숫자를 왕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어제경민음(御製警民音). 조선 후기 영조가 백성들에게 내린 금주령(禁酒令)이 잘 시행되지 않는 것을 개탄하며 백성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내린 조칙을 간행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이런 일이 있고 나서도 금주령 위반자는 계속해서 나왔다. 영조는 삼남지방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금주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곳의 지방관을 색출하라고 명령하였다. 암행어사들은 충청의 강경 쪽에서 술이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포착하였다. 1764년(영조 40) 5월, 드디어 양천(陽川)에서 술을 빚은 사람이 강화도의 선상(船商)에게 팔다가 적발되었다. 일당들이 모두 포청(捕廳)으로 잡혀왔다. 그달 3일, 영조는 강화도관할 책임자인 강화유수 정실(鄭宲)을 파직시켰다. 술을 생산한 곳의 지방관 양천현감 박명양(朴鳴陽)도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귀양 보내고 이 두 고을을 감독했던 전 관찰사 남태제(南泰齊)를 양재역(良才驛)에 귀양을 보냈다. 음주를 위반한 백성 네 사람은 형조에 명하여 칼을 씌워 한 달 동안 옥살이를 하게 했다.이때 단속된 사람들 중에는 전라도 영광군 사람들이 끼어 있었다. 이들은 물건을 배에 싣고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경강(京江·뚝섬으로부터 양화도에 이르는 한강의 일대)에서 술을 취급하다가 순라군에게 적발되었던 것이다. 그 책임을 지고 해당 고을의 군수인 윤면동이 1764년(영조 40) 5월 4일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것이다.영조의 금주령은 과격하고도 잔인했다.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영조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다만 금주령을 범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싶었든지 마신 술의 다과(多寡)로 등급을 나누어 죄를 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단속되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뿐이라는 비판이 계속되었고, 심지어 영조가 남몰래 술을 마신다는 소문이 돌았다. 검토관 조명겸(趙明謙)이 영조에게 음주를 경계할 것을 권하자 영조는 “내가 마시는 것은 소주가 아닌 오미자차”라고 둘러대기도 했다. 왕실과 관료층이 금령을 지키지 않게 되자 실행 실무부서인 사헌부 관원 전원이 그 책임을 지고 사직을 청하는 사태도 있었다. 지배층 스스로가 금령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민간에만 강요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하지만 영조의 금주령은 정조 때에 와서야 비로소 해제되었다. 정조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해 신하들이 만취하지 않으면 집에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애주가 임금 덕분인지 정조 때에는 주막 문화가 발달했다. 밤이 새도록 술을 파는 날밤집, ‘목로’라는 나무탁자를 두고 서서 간단히 마시는 선술집, 안주인은 얼굴을 내보이지 않고 팔뚝만 내밀어 술과 안주를 내준다는 팔뚝집 등은 모두 정조 이후에 등장한 술집의 형태였다.요즘 들어 자동차의 음주운전이 큰 사회적 문제로 다가 온다. 조선조 금주령이 춘궁기의 곡식저축과 더불어 예도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음주단속은 음주 운전자에 대한 처벌과 계도가 주목적인 것이다. 음주단속의 목적과 명분은 달라졌지만, 나라와 술꾼간의 음주전쟁은 지금도 끝나지가 않았다./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2-10

천기를 읽는 물고기 볼락, 마음도 훔치다

‘왕사미’ 볼락을 노리기 위해 선택한 포인트는 구룡포 삼정 방파제. 동해안의 명(名) 방파제로 낚시꾼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방파제 규모가 꽤 큰데, 몇 군데의 포인트들이 있다.먼저, 지금은 ‘POINT’(카페 이름부터 이곳이 낚시 명당임을 말해준다)라는 멋진 카페가 들어선 관풍대 주변이다. 방파제 외항 초입의 테트라포드에서 관풍대 쪽으로 캐스팅을 해 공략한다. 이곳은 수중바위와 해조류 밭이 너르게 발달해 있어 볼락들의 좋은 은신처가 된다. 그러나 수심이 얕아 대물 볼락을 만날 확률이 그렇게 높지는 않다. 다음으로는 방파제가 꺾어지는 중간 지점이다.바로 앞 발 밑 수심이 3m 정도로 깊어 대물 볼락이 가끔 낚이곤 한다. 나는 그 자리를 보통 낮 낚시에 찾는다. 밤에는 테트라포드 위에서 이동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군데 좋은 포인트는 곶부리에 해당하는 방파제 끝부분이다. 이곳은 테트라포드가 끝나는 지점에서 씨알 굵은 볼락들이 종종 입질을 하곤 한다. 내항 석축과 큰 방파제 건너편 작은 석축방파제 역시 괜찮은 포인트들이다.하지만 나는 그 좋은 포인트들을 다 그냥 지나쳐갔다. 그러고는 외항과 내항이 경계를 이루는 방파제 끝으로 가 내항 쪽 석축에 서서 테트라포드에 몸을 숨기고, 보안등 불빛이 오히려 캄캄한 그늘을 만드는 자리, 외항으로 부딪쳐 들어오던 조류가 내항으로 잔잔하게 흘러드는 방파제 모서리를 노리기로 했다. 층층이 쌓인 테트라포드는 물속에서 복잡한 수중 요새를 만들어 볼락, 우럭, 노래미, 쏨뱅이 등 ‘록피쉬(Rockfish)’들의 은신처이자 산란장, 먹이활동 환경을 제공한다. 대물 볼락은 테트라포드가 가장 멀리, 깊이 잠겨 있는 테트라포드 주변에 있을 확률이 높다.보안등 불빛이 어느 정도 집어등 효과를 내기 때문에 따로 집어등을 켜지 않았다. 대물일수록 경계심이 많고 영리하다. 빛과 소음 등 외부 환경의 변화를 금방 눈치 챈다면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테트라포드는 밑걸림이 심하다. 밑걸림에 끊은 채비를 다시 묶느라 시간을 허비하거나 부산스럽게 움직이다 보면 볼락의 입질을 놓치기 일쑤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동작들을 없애고 마치 그림자처럼, 촛불처럼 간결하고 고요한 몸짓으로 채비를 던져야 한다.얼마나 지났을까. 두어 시간 동안 고작 세 마리의 볼락을 만난 게 전부다. 그것도 20cm가 채 되지 않는 녀석들이다. 조금 더 무거운 지그헤드로 보다 깊은 자리를 노려보기로 했다. 곧 만조 시간, 볼락은 만조를 전후한 때에 가장 활발한 입질을 보인다.새벽 네 시, 테트라포드 끝부분, 불빛과 어둠의 경계 지점에 캐스팅을 해 루어를 7초간 가라앉힌 후 천천히 릴을 감는데, 후두둑- 하는 진동과 함께 낭창한 낚싯대의 초릿대가 활처럼 휘어졌다. 앞서 잡았던 세 마리의 볼락과는 차원이 다른 당길심, 이리저리 달음질치며 테트라포드 구멍으로, 몰밭으로, 암초지대로 파고드는 강력한 저항에 나는 흠칫 놀라 당황하고 말았다. 빠르게 제압을 하지 못하는 사이 녀석은 테트라포드 틈으로 몸을 박아버렸다. 아무리 당겨도, 기다려도 녀석은 구멍 속에 박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채비를 끊고, 허탈한 마음에 점점 멀어지는 새벽달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곧 만조가 되고, 마침 동틀 무렵의 아침 피딩타임과 겹쳐 볼락들이 활발한 입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 고만고만한 사이즈들이다. 아까 놓친 녀석은 분명 30㎝ 전후의 대물이었을 것이다. 놓친 물고기는 영원히 자란다. 나는 산문집 ‘낚 ; 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에 이렇게 썼다. “빨리 잊고 낚시에 집중하면 또 잡을 수 있는데, 놓친 물고기만 생각하다 결국 낚시를 망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제 내 것이 될 뻔했던 행운을 계속 아쉬워하는 동안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기회마저 놓쳐버리고, 결국 빈손이 되어 쓸쓸한 내일을 맞는다”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낚시에 집중했다. 곧 구룡포의 아침 태양이 석류알을 흩뿌리며 수평선 위로 떠올랐다. 비록 ‘왕사미’ 볼락은 만나지 못했지만, 꽤 준수한 씨알의 볼락을 포함해서 스무 마리쯤 잡았으니 나름대로 선전한 셈이다.낚시꾼들 사이에서 볼락은 ‘천기를 읽는 물고기’라고 불린다. 그도 그럴 것이 물때와 날씨, 수온 등 환경이 조금만 달라져도 활발하던 입질이 뚝 끊기곤 한다. 어제 잘 나오던 자리에서 오늘 안 나오고, 어제까지 안 나오던 자리에서 갑자기 폭발적인 입질이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지진이나 태풍 전후로는 완전히 입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많다. 호황일 때는 누구나 쉽게 낚을 수 있는 고기이지만, 활성도가 떨어진 상황에서는 ‘꽝’을 면하기 어렵다. 볼락 낚시의 실력은 저활성기에 얼마나 볼락을 잘 유혹해내느냐에 달렸다. 고활성기에 잔챙이들의 성화를 뚫고 대물을 공략해내는 ‘사이즈 선별력’ 또한 고수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다. 볼락이 활동하는 수심층 탐색, 볼락이 반응을 잘 보이는 루어 선택, 입질 패턴에 따른 바늘 크기 조절, 릴 드랙 조절, 물 흐름과 구조물 등을 계산해 공략지점을 노리는 정확한 캐스팅, 집어등 활용법 등이 모두 볼락 루어낚시 기술의 영역에 해당한다.나는 아직도 초보를 벗어나지 못해서, 밤새 찬바람에 고생한 손이 거칠어졌다. 이제는 밤샘 낚시로 지친 몸을 쉬게 해야 할 때다. 구룡포읍 ‘신대천국밥’에서 돼지국밥 한 그릇 먹고, 구룡포 해수욕장이 보이는 ‘셀렉토 커피’에 가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커피를 마신다는 뜻의 신조어)를 마셨다. 그러고는 구룡포 초입의 ‘호미곶온천랜드’에 가 뜨거운 열탕에 몸을 녹이고, 수면실에서 한숨 푹 잤다. 낮잠에서 깨니 지난 새벽의 볼락 낚시가 벌써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기포기 두 대를 틀어놓은 살림통 안에서 볼락들은 여전히 활기차게 움직였다. 오후 낚시는 생략하고, 포항에 거주 중인 선배가 미리 빌려놓은 호미곶면 강사리의 ‘토방토방 황토펜션’에 가 볼락 요리를 준비했다. 포항에 살면서도 볼락회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는 선배를 위해, 평소에는 뼈째 썰어 ‘뼈회’를 치지만, 이날은 포를 떠서 썰기로 했다. 볼락회 본연의 식감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다. 회 뜨기에 적당한 크기로 여섯 마리를 골라 손질했다. 볼락 낚시 중 걸려 나온 돌팍망둑 한 마리도 함께 회 치기로 했다. 그러면 한 마리당 네 점씩 총 28점이 나온다. 이만하면 사내 둘이서 술안주 삼기에 충분하다. 회 한 점에 한 잔, 총 28잔이니 소주가 네 병이다. 평소 뼈회를 좋아한다는 선배의 취향을 뒤늦게 알고서는, 갈비뼈와 척추뼈 등을 발라낸 ‘서더리’를 칼로 탕탕 두드려 다진 다음, 참기름과 맛소금 넣고 버무려 뼈회다짐을 만들었다.회만 먹으면 섭섭하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칼집을 낸 볼락 여섯 마리를 구웠다. 고소한 냄새가 피어오르고, 입안에 침이 고였다. 구이까지 상에 올리자 마침내 볼락요리 한상이 완성되었다. 매운탕이 빠지긴 했지만, 사내 둘이 먹는 술상에 지나친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 처음 볼락회 맛을 보는 선배는 “식감이 쫄깃하면서도 질기지 않게 부드럽고, 맛은 달다”고 호평했다. 낚시꾼들이 먹는 방식이라며 선배에게 김밥에 초장 찍은 회를 얹은 ‘볼락회김밥’을 권했다. 볼락회김밥은 낚시꾼들에게만 허락된 별미, 선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회도 맛있지만 볼락 요리의 하이라이트는 구이다. 회가 별미라면 뼈회다짐은 특미, 구이는 진미다. ‘겉바속촉’(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구워낸 볼락을 손으로 들고 한 입 베어 물자 나도 선배도 황홀한 표정, 선배가 외쳤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생선이 있었다니!” 선배의 흡족해하는 얼굴을 보며 나는 낚시꾼들의 속담을 고쳤다. “볼락은 마음을 읽는 물고기”라고./이병철(시인)

2019-12-08

‘돈’보다 ‘가치’의 시대… 사회적 경제 기업이 일자리창출 앞장

안동시의 사회적 기업이 지역 사회에 미친 영향으로는 취약계층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지역 사회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안동을 비롯해 경북 도내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마을기업 등 사회적 경제 기업이 1천99개나 된다. 이는 서울과 경기도 다음으로 많다. 지난해 기준 연간 총 매출이 3천억 원을 넘어섰고, 만들어 낸 신규 일자리도 8천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40.6%가 만 39세 이하 청년 일자리로 분석됐다.안동시는 2007년 최초 사회적 기업으로 ‘참사랑보호작업장’을 탄생시키면서 1개의 기업으로 시작해 현재 35개의 (예비)사회적 기업을 보유하고 있다. 인증사회적기업도 18곳이나 된다. 이는 경북 도내에서 가장 많다.2012년에는 안동시사회적기업협의회가 조직돼 사회적 기업 간의 애로사항을 논의하고, 사회적 기업 제품홍보, 지역사회봉사활동 등 사회공헌활동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2014년엔 전국 최초로 지역 사회적 기업들이 모여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사)지역사회적경제허브센터가 출범했다.이처럼 안동을 비롯한 산업 기반이 약한 경북 북부권이지만 도내 사회적 경제 기업의 35%가 집중될 만큼 양적 성장을 이뤘다.하지만 안동을 비롯한 경북 북부권의 이러한 양적 성장에도 질적 성장을 지원해 줄 중간 지원조직인 사회적 경제 지원센터와 고용노동부 통합지원 기관은 전무했다. 이에 이들 사회적 경제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기업 간 네트워킹을 담당할 ‘경북 북부권 사회적 경제 지원센터’가 최근 안동시 안기동에 문을 열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본지는 최근 문을 연 이 센터가 추구하는 방향과 추진하는 사업 등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박명배 경북북부권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경북북부권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 하는 일은.△경북북부권사회적경제지원센터가 하는 일은 이미 2014년부터 경북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자생적 만들어진 (사)지역사회적경제허브센터가 꾸준히 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기획재정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은 허브센터가 북부권사회적경제지원센터를 위탁 운영하게 된 것이다.센터는 우선 경북 북부지역의 사회적 기업을 준비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아케데미를 운영해 사회적 경제 기업 지정을 돕는다. 아울러 마을기업 및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기업들의 컨설팅하고 있다. 또 지역의 사회적 기업이 만든 제품을 공동으로 마케팅하고 금융과 수출업무까지 지원하고 있다.-사회적 경제 기업이라고 하면 일반 기업과 어떤 차이가 있나.△일반 기업은 돈을 벌기 위해 경영하는 반면 사회적 경제 기업은 수익금을 어디에 쓸지 정한 뒤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할 때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은 일반기업이고 이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목적을 정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곧 사회적 경제 기업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한 삶과 내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의 차이다. 돈을 벌기 위해 기업을 하는 사람은 목표가 곧 돈이다.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분명한 목적을 정해놓고 기업을 하는 사람은 기업의 목표가 돈이 아닌 가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사회적 경제 기업은 이윤 추구보단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을 목적이라고 하는 데 그럼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현재까지도 산업사회였다면 사회적 기업 생존율이 현저히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산업 패러다임은 제조업 중심에서 벗어나 서비스업 3차 산업에 이어 4차 산업 지식정보사회로 넘어가면서 사회적 경제의 가치가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다. 예를 들면 식당을 운영할 경우 돈을 벌기 위해선 낮은 가격의 재료를 쓰거나 인건비를 줄이는 것이 최적화된 운영일 것이다. 하지만 지역 사회적 경제 기업이었던 ‘할매손나눔푸드’는 이익을 내기 위해 재료와 인건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주말에 무료급식을 운영하면서 판매량에 따른 무료급식 제공이 목적인 기업이다. 손님들에게 ‘당신이 먹은 한 그릇이 주말에 외로운 이웃에게 밥 한 끼를 대접할 수 있다’고 어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식당의 가치는 ‘밥은 파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을 두고 있다. 현재는 사회적 경제 기업 인정 기간인 5년이 지났지만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이처럼 실제로 ‘가치’가 시장에서 인정받고 경쟁력도 갖췄다. 사회적 경제 기업도 기존의 기업처럼 수익을 내지 못하면 망한다. 하지만 기존 기업하고는 수익을 내는 방식과 원리, 마케팅 방식이 다르다.-안동 지역에 사회적 경제 기업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 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전국에서 지자체 인구대비 사회적 경제 기업 수가 가장 많은 도시가 안동이다. 그 이유는 2008년 전국에서 제일 먼저 사회적 경제 기업을 발굴하고 도와주는 일을 시작한 곳이 안동이기 때문이다. 이어 2012년에는 경북 도내에선 최초로 지역 단위의 사회적 기업들이 모여 협의체가 만들어진 곳도 안동이다.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당사자끼리의 협의체와 사회적 기업을 돕는 중간지원 조직이 지역에서 활성화됐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사회적 경제 기업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국내에는 60여 곳의 사회적 기업 중간지원조직이 있다. 이들 대부분이 대학에서 사회적 경제를 전공하거나 전문교육을 통해 사회적 기업 설립을 돕거나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사)지역사회적경제허브센터의 경우 전국에서 유일하게 사회적 기업 당사자 조직이 운영하는 중간지원 조직이다.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도 이 사례에 관심을 갖고 있다.-앞서 경북 북부권이 양적 성장을 이뤘지만 질적인 성장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현재 지역의 사회적 경제를 평가한다면.△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 다음으로 도농복합 도시 가운데에선 전국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한다. 업종별 다양성과 매출액 수준, 사회적 경제 기업이 가진 ‘가치 마케팅’의 활동 방법 등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이 때문에 앞으로 한국사회적경제진흥원과 연계해 사회적 기업 선진지 견학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안동은 숙박부터 음식, 카페, 체험 등 다양한 직종의 사회적 경제 기업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최적지라고 생각된다. 구체적으로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사회적 경제 기업 체험’하기 등 2박 3일 코스의 여행상품도 개발 중이다.-사회적 경제와 관련돼 창출된 일자리 40% 이상이 만 39세 이하 청년들이다. 현재 일하고 있는 청년들과 앞으로 이와 관련한 창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한마디해 달라.△사회적 경제 기업에 취업하는 청년들에게 2년간 인건비 90%를 지원하는 행정안전부의 ‘지역 맞춤형 사회적 경제 청년 일자리 지원 사업’이 지역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를 통한 고용 승계도 70%나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아울러 도시청년시골파견제, 서울의 사회적 기업 ‘점프’를 통한 도시 청년들의 유입 등 총 110여 명의 청년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런 청년들이 우리 지역에 신선한 충격을 줘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지역에는 많은 예산이 투입됐지만 계속된 정체에 인구 소멸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도시에서 식당을 하나 창업하려면 약 6억 원이 든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에서는 4천만 원이면 가능하다. 저렴한 임대료와 여러 가지 지원이 있기 때문이다.창업에는 항상 실패가 걱정이다. 창업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이템’이다. 청년들은 이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뭐든지 시작하면 아이템은 시장에서 다듬어진다고 생각된다. 시장에서 다듬어지지 않고 머릿속의 아이템은 효용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시장에서 아이템이 다듬어지기까지의 시행착오가 분명히 따른다. 반드시 실패도 따른다. 하지만 실패로 끝내면 그냥 실패다. 그 실패를 통해 경험하고 극복하는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면 성공을 향한 길이 열릴 것이다. 또 단순히 시장에서 다듬어지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실패가 아니다. 이런 경험과 지역의 사회적 경제 기업 멘토의 도움을 받으면 그 시행착오 기간도 짧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안동시의 사회적 경제 활성화 방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부족하거나 개선해야 할 사항은.△안동시가 지금까지 사회적 경제 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사회적 경제 기업을 전략적으로 함께하면 더욱더 활성화될 수 있는 정책들이 있음에도 현재 그렇게 하고 있지 않아 아쉽다. 특히 관광 정책이다. 안동시는 1천만 관광객 유치를 목표로 관광 제일 도시의 도약에 힘을 쏟고 있다.그렇지만 지역의 사회적 경제 기업들이 갖고 있는 가치가 전국적으로 볼 때 매우 높은데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사회적 경제 활성화’를 전략 과제로 설정하지 않고 있다. 만약 안동시가 지역의 사회적 경제 기업 활성화를 전략 과제로 설정하고 함께 힘을 모아 관광 도시 안동으로 도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앞으로 문화관광 분야에서 다양한 성과를 도출해 스스로 가치를 증명하겠다.다른 한편으론 현재 국가가 지원하고 있는 지역의 일자리 사업은 사회적 경제 기업을 제외한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다. 청년들을 위한 창업에도 사회적 경제·제조업·농업·문화·소상공인·창업 분야 등 중소벤처기업부부터 고용노동부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하지만 안동시에는 이런 프로그램에 대한 전체적 데이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를 총괄할 컨트롤 타워가 없다. 예를 들면 퇴직을 앞둔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 사업인 ‘신중년 일자리 사업’, ‘인생 2모작 일자리 사업’ 과 경력 단절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 사업 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지만 현재 이를 총괄해서 운영할 T/F팀 또는 기구가 부족하다. 국가에서 막대한 예산을 일자리 창출에 투입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지역에선 이런 예산을 운용하는 데 충분한 효과를 누리고 있지 못한 이유다. 반드시 이를 위한 일자리 창출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일자리를 만들어 낸다면 지금보다 더욱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보고 있다.-끝으로 덧붙일 말과 함께 재임 기간에 꼭 하고 싶은 일은.△일부 사회적 경제 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오해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 경제 기업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앞으로 대한민국이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회적 경제 기업뿐이라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산업화 사회를 이끌었던 앞세대는 중공업 우선 정책에 대기업을 중심으로 국가산업을 육성했다면 현재 지식 정보화 사회에선 가치를 중요시하는 시대다. 이 시대를 이끌어 나가고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할 기업은 사회적 경제 기업뿐이다.또 지역에선 수많은 농업정책을 펼쳐 농민들을 지원하고 지원해 왔다. 하지만 농촌이 활성화되기엔 역부족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정책은 농민들의 철학을 바꾸는 일이다. 농사를 짓는 것이 돈벌이 수단이라면 농촌은 활성화될 수 없다. 농업은 새로운 가치를 갖고 있음에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농사를 짓는다면 우리나라의 농업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사회적 경제의 원리를 통해 농민이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고 철학이 바뀌는 농촌을 기대해본다./손병현기자why@kbmaeil.com▒ 박명배 센터장 프로필△안동 출신(45) △안동대 총학생회장 △사회적기업(사)경북미래문화재단 이사장 △사회적기업(주)돌봄사회서비스센터장 △안동시지역사회보장협의회 실무협의체 위원장 △(사)지역사회적경제허브센터장 △경북북부권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2019-12-08

신도시 산업 유치구도심엔 생기를

△ 혁신도시와 원도심의 균형을 바로잡다최근 전국의 모든 지자체가 산업구조의 변화와 인구감소, 신도시 확장으로 인해 원도심 쇠퇴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혁신도시를 유치한 김천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신도시인 혁신도시가 원도심의 인구를 유입하는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외부지역의 인구유입이 없이 원도심의 인구만 끌어당긴다면 혁신도시와 원도심의 균형이 깨지면서 지역민들의 불만이 크질 수 밖에 없다.이에 김천시는 혁신도시의 정주여선을 개선하면서도 구도심이 활성화 될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을 추진해 왔다.김천시는 혁신도시에 첨단교통 클러스터, 드론산업, 스마트 교통시티 등 미래 신성장 동력산업을 유치해 추진하고, 원도심에는 옛 명성의 회복을 위해 4개 지구에 575억원을 투자하는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특히, 원도심의 도시재생을 위해 2013년 9월 도시재생 전담조직을 구성해 전략계획을 수립하는 등 일찌감치 원도심 활성화를 준비해 왔다.김천시의 발빠른 대응으로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지산동, 평화동, 황금동 등 3개 지구가 국토교통부가 주관하는 도시재생 공모사업에 연이어 선정돼 2020년까지 312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도심재생에 참여한 혁신도시 공공기관김천시가 중심시가지형으로 추진하는 감호지구 도시재생사업에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참여하면서 지역 상생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감호지구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감호시장 장옥부지와 중앙시장 일대 19만800㎡ 부지에 2020년부터 2024년까지 263억원을 투자해 주요 거점 시설인 해피러닝 어울림 플랫폼, 은빛복지센터 조성과 뉴트로 문화공간을 조성해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기반시설을 마련하는 사업이다.한국교통안전공단과 협업해 교통정온화 기법을 적용한 교통안전 선도지구를 조성한다. 또 농기계체험 프로그램과 행복한 가게 프로젝트 등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으로 물리적 환경개선과 새로운 문화컨텐츠 적용으로 지역상권 회복과 옛 전국 5대 시장의 위상을 다시 재현할 계획이다.감호지구는 혁신도시와의 거리가 5㎞로 매우 가까워 도시재생으로 추진하는 원도심 활력사업, 삶의 질 향상 사업, 상생협력사업이 원도심 뿐만 아니라 혁신도시의 정주여건 개선에도 많은 도움이 될 전망이다.△ 혁신도시가 지역 경제를 이끌다김천시에 혁신도시가 조성되고 공공기관들이 이전하면서 지역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청년취업문제에도 공공기관이 도움이 되고 있다.‘혁신도시 조성 및 발전에 관한 특별법(혁신도시법)’개정안이 지난 10월 3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내년 5월부터 지역 대학생들의 공공기관 취업 기회가 대폭 늘어났다.그동안 공공기관들은 지역인재 채용을 18∼20% 수준에서 적용해 왔으나 혁신도시법이 개정되면서 30%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올해 초 한국도로공사가 지역인재를 26명 채용한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지역 대학생들의 취업이 점차적으로 늘어나 청년취업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김천시는 이번 지역인재 채용 확대가 지역을 떠나는 지역인재들의 유턴현상과 더불어 인구유입 효과까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또 공공기관의 급식에 지역 농산물을 우선적으로 공급하는 ‘로컬푸드’확대로 지역 농가들의 농산물 판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혁신도시 공공기관 구내식당을 운영하는 한국도로공사, 한국전력기술 등 9개 공공기관은 지난 10월 김천시와 농업기술센터에서 회의를 열고 공공급식에 지역농산물을 확대 보급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했다. 이 자리에서 급식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농산물인 쌀, 감자, 양파, 무, 양배추, 당근, 대파 등 7개 품목을 우선적으로 지역농산물로 구매하고, 시는 이들 농산물을 차질 없이 공급될 수 있도록 했다.△ 혁신도시와 김천 미래 100년을 준비하다김천시는 드림모아 프로젝트, 국가혁신클러스터조성, 혁신도시 융복합 드론플랫폼 구축사업, 자동차 튜닝기술지원 클러스터 조성, 혁신도시 중심 미래교통 스마트시티 조성 등으로 김천 미래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또 국립구제역백신연구소, 국립구제역백신 생산지원센터, 첨단자동차 검사기술연구소와 교육원, 한전기술 일자리 프로젝트, 영남권 자동차 튜닝 인증·승인센터 설립, 건설안전교육지원센터 등의 사업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김천시는 혁신도시의 문화시설 확충을 위해 복합혁신센터 건립을 2022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고, 생활체육시설 확충을 위해 한국도로공사 수영장 개방과 이전공공기관의 체육시설인 축구장, 테니스장 등을 주민들에게 개방토록 해 상생문화를 조성하고 있다.더불어 혁신도시를 자족도시로 완성하기 위해 최근 170병상 규모의 연합병원 착공을 시작으로 종합병원 유치에도 각별한 신경을 쏟고 있다.김천시는 정주여건 개선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부항댐권역을 놀거리, 볼거리, 즐길거리가 풍부한 대한민국 대표적인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다. 시는 이곳에 물소리 생태숲, 산내들 오토캠핑장, 물 문화관, 패밀리 어드벤처파크, 둘레길 등을 조성했다. 전국 최고(93m) 레인보우 짚와이어, 최초(85m) 완전 개방형 스카이워크, 최장(256m) 출렁다리는 김천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시의 이러한 노력은 지역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2021년 준공 예정인 김천1일반산업단지 3단계 조성사업이 현재 공정률 50%를 보이는 가운데 일찍부터 많은 기업들이 투자 의향을 밝히고 있다.김천은 KTX김천(구미)역, 경부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김천-거제 간 남부내륙고속철도, 김천-문경 간 중부내륙고속철도 건설 등으로 뛰어난 지리적 프리미엄과 더불어 평당 44만원대의 초저가 분양가, 보조금 10% 지원우대, 고용 인원 인센티브 최대 10% 등의 혜택을 제공하고 있어 기업들의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뤄질 전망이다.시 승격 70주년을 맞은 김천시가 혁신도시와 더불어 창출할 미래 100년의 청사진이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끝/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12-05

땅 위의 폐허보다 더 슬픈 건 마음속 절망… 그 속에서 희망을 찾다

유럽과 지척인 이스탄불을 출발한 기차가 쉼 없이 20시간을 넘게 달렸을 즈음이다. 2층 침대가 마련된 특실에서 꼬박 하루를 먹고, 쉬고, 마시고, 자고를 반복하던 기자의 눈앞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황량한 평원 위에 모습을 드러낸 기묘한 형상의 수많은 바위들. 지구의 풍경 같지 않았다.가보지 못했지만 화성이나 목성의 지표면이 저러할까? 그래.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은 SF영화의 촬영지로 유명하다”는 이야기. 외계인과 우주에서 온 괴물 에일리언(Alien)이 등장하는 몇몇 영화가 떠올랐다. 함께 하이데라파샤역(驛)에서 기차에 올라 꼬박 하룻밤을 함께 보낸 터키의 노부부는 놀라움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한국에서 온 사내를 보며 소리 내 웃었다.“조금 더 달리면 더 기막힌 풍경이 나타날 테니 그만 놀라고 기다려봐.”▲인간의 ‘의지’와 자연이 선사한 ‘물’로 건설된 고대도시터키의 수도는 앙카라.거기서 남동쪽으로 220km 가량을 달리면 아나톨리아 고원에 우뚝 선 카파도키아(Cappadocia)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엔 여러 차례의 화산 폭발이 있었다는 그곳은 ‘황무지와 폐허가 어떻게 아름다움으로 진화하는가’를 보여준다.화산의 재가 오랜 시간 빗물에 섞여 만들어진 독특한 카파도키아의 바위는 어떤 건 버섯 모양이고, 어떤 건 우주선 모양이며, 또 다른 건 고대 유럽신화에 등장하는 용(龍)의 형상을 하고 있다.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 식수를 구하기도 쉽지 않을 듯 보였다. 하지만, 거기서도 인간은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삶을 이어갔다. 자그마치 2천 년 전부터. 그 배후엔 종교 탄압이 있었다.그 옛날 카파도키아에 정착했던 이들은 고향에서 쫓겨난 기독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중장비 하나 없이 사람의 힘만으로 거대한 바위의 내부를 파내고 거기에 드넓은 지하도시를 만들었다. 곳곳에 암벽화를 그려 넣는 ‘예술적 행위’도 진행됐다. 인간은 인간이므로, 인간이 못할 일은 없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경이로운 시대였다.얼핏 보기와는 달리 그 지역엔 다행히 ‘물’이 있었다. 그 물로 농사를 짓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인간의 의지와 자연이 준 물. 이 2가지가 폐허 위에 도시를 건설할 수 있게 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폐허’ 혹은 ‘황무지’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마음 한편이 쓸쓸하고 서늘해졌다.사실 자신이 살아가는 곳을 모래바람 부는 황량한 땅이라고 느끼는 건 고대의 터키 사람들만이 아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이 자신이 발 딛고 선 나라를 황무지나 폐허처럼 느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정치적 후진성과 경제적 불평등, 문화적 빈곤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예술가들이 특히 그랬다.시인 최승자(67)의 ‘197×년의 우리들의 사랑’은 후진성·불평등·빈곤의 시대를 서럽고 아프게 형상화한 ‘디스토피아적 묵시록’. 이런 노래다.▲수난과 시련을 이겨내는 힘... 희망과 생존욕구까마득한 시절인 2세기 후반.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배척했다. 황제에게 머리 조아리는 걸 거부한 기독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카파도키아 지역으로 숨어들었다. 마치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만들어놓은 은둔지(隱遁地)를 찾아가듯.척박하지만 신비로운 풍경이 그들을 매료시켰다. 이런 타의에 의한 이주는 200년 넘게 계속됐다. 또 다른 수난도 있었다. 7세기 무렵 무슬림과 벌인 종교전쟁은 살벌하고 무서웠다. 창과 칼에서는 불꽃이 튀고, 피 냄새가 진동하던 시절이었다. 신들의 다툼 아래서 인간이 희생됐다.폐허에선 꽃을 피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카파도키아 정착민들은 희망과 꿈을 버리지 않았다. 다시 바위산을 깎고 동굴을 뚫어 또 다른 지하도시를 세우고, 배수구와 식량 저장창고 등을 만들어냈다. 어떤 형태의 수난과 시련도 인간의 생존욕구를 온전히 꺾지 못했다.최승자가 묘사하는 ‘197×년’은 실체라기보다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폐허의 시대다. 당시 한국 사회를 통치한 군사독재 정부는 젊은이들을 ‘잠들어 있거나 취해 있거나 아니면 시궁창에 빠진 헤진 신발짝처럼 더러운 물결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기’를 원했다. 그들이 세상과 삶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기를 바랐다.하지만, 부도덕한 위정자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시인의 말처럼 ‘노쇠한 혈관을 타고’서도 ‘그리움의 피는’ 흐르는 법. 그 시기의 한국 사람들은 처참한 현실을 거부하며 ‘꿈속에서도 행군해 나갔다’. 구원의 메타포인 ‘그리움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닐까.▲터키와 한국, 두 나라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카파도키아도, 우리나라도 황무지와 폐허의 시절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시대와 장소는 판이하지만 거기서 얻은 교훈은 동일하다.“땅 위의 폐허보다 더 슬픈 건 마음속 폐허다. 그걸 이겨내는 건 인간의 의지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를 여행한 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세상에는 여전히 폐허와 황무지가 많다는 게 눈에 보인다.전쟁의 위험성이 상존하는 아프리카와 아랍, 인종 차별과 이민자 혐오가 지속되는 미국과 유럽, 기아와 절대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남미와 아시아…. 더 서글픈 건 사람들 마음 안에 존재하는 열패감과 허망함이다.그래서다. 기자는 오늘도 폐허를 아름다움으로 바꾼 희망을 되새긴다. 그것만이 황무지로 느껴지는 세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므로.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류태규

2019-12-05

사랑스런 목가적 풍경도, 비극적 역사의 공간도 한달음 거리에

언덕배기 양떼목장서 양들과 친해지다하얗게 곱슬거리는 부드러운 털, 어떠한 세속적 욕망도 읽히지 않는 맑은 눈망울, 거기에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몸까지. 양을 본 사람들은 남녀와 노소를 불문하고 “착하고 귀엽게 느껴져 쉽게 다가설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가축 가운데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것도 양이 아닐까. 그래서다. 칠곡군 지천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칠곡 양떼목장엔 주말이면 ‘꼬마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목장에서 ‘양 먹이 주기 체험’을 진행하는 아주머니는 “처음엔 겁을 먹고 아빠나 엄마 뒤에 숨어있던 아이들도 건초를 날름날름 받아먹는 어린 양들을 가까이서 보면 금방 친해진다”며 웃었다. 하루에 한두 명쯤은 “양을 데려가 우리 집에서 키우겠다”며 부모에게 떼를 쓰는 애가 있다고 한다. 정겹고 재밌는 풍경일 듯했다. 이 목장에선 면양과 함께 젖을 짜는 양, 타조, 색깔이 고운 여러 마리의 닭도 함께 키운다. 트랙터가 끄는 관람차에 올라 목장을 한 바퀴 도는 체험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인기다. 책과 TV 화면에서나 보던 동물들을 직접 만날 수 있기 때문. 날씨 좋은 토요일이면 양젖을 짜는 체험장 역시 아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게 목장측의 설명이다. 살아있는 동물과의 교감은 아동들에게 풍부한 감성과 생명에 대한 애정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는 이미 오래 전 아동학자들이 검증한 사실. 칠곡 양떼목장은 성인들에게도 흥미로운 공간이다. 기자 역시 양에게 먹이를 주며 잠시잠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에게 무언가를 베푼다는 건 어른들에게도 뿌듯한 감정을 선물하는 법이니까.이곳을 찾아온 연인들은 목장에 마련된 조그만 상점에서 구워 먹는 치즈를 구입하기도 한다. 바로 옆 따뜻한 휴게실로 들어가 난로를 앞에 두고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매캐한 연기 가득한 도시의 술집에서 삼겹살과 함께 구워 먹는 치즈와는 또 다른 맛이리라.양떼목장 상점에선 직접 만든 치즈와 멸균된 양젖도 맛볼 수 있다. 직접 먹어보니 우유로 만든 치즈보다 담백한 맛이 혀끝을 감돌았다. 양젖 또한 평소엔 마셔보기 어려운 것이라 연거푸 두 병을 들이켰다.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관광·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한 이 목장은 “동물이 행복한 농장, 동물의 행동이 자유로운 농장, 사람과 동물이 함께 하는 농장”을 지향한다고 한다. 홈페이지를 통해 방문과 체험관광 예약이 가능하다.◇칠곡 양떼목장 홈페이지: http://79yangtte.kr/호국평화기념관서 ‘평화의 시대’를 생각하다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인간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 또한 1950년부터 3년간 같은 민족끼리 서로의 가슴에 총을 겨눈 비극의 역사를 경험했다. 칠곡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침입을 막던 ‘최후의 저지선’ 역할을 수행했다. 50일 넘게 이어지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선 헤아리기 힘든 많은 수의 군인들이 포탄 아래 쓰러졌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자유는 그들의 희생 덕분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석적읍에 세워진 호국평화기념관은 70여 년 전 나라와 대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던 영혼들을 위로하고자 만들어졌다. 이와 더불어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될 전쟁의 처참함과 비극성까지를 후세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기념관 내부에 마련된 ‘호국전시관’에선 한국전쟁의 시작에서부터 낙동강 전투, 인천상륙작전, 정전 협정까지의 과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 풍경을 실감나게 재현한 세트장도 눈길을 끈다.‘4D 영상관’으로 입장하면 어떤 명예나 대가도 바라지 않고 어머니와 조국을 위해 전쟁의 불길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진 ‘이름 없는 군인들’의 이야기와 만날 수 있다. 호국평화기념관 뒤편엔 55m 높이에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그 아래 서면 한국전쟁 때 희생된 젊은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내가 두려움을 떨치고 죽음 앞으로 뛰어든 이유가 궁금하다고? 전쟁이 사라진 평화의 시대를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위대한 시인의 흔적을 찾아 구상문학관으로다수의 문학평론가들은 말한다. “그는 신(神)의 품에 기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한 점잖은 작가”였다고.칠곡은 시인 구상(1919~2004)의 본적지다. 지척인 대구에선 영남일보 편집국장과 주필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니 칠곡군 왜관읍에 ‘구상길’이 있고, 거기에 구상문학관이 들어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작품 활동을 했고, 서울대와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등 여러 곳의 대학에서 제자들을 길러낸 구상 시인은 독재정권의 사상적 탄압에 의연히 맞선 지사(志士)이자, 넉넉한 품과 혜안을 지닌 교육자였다. 칠곡군이 내세워 자랑해도 좋을 문인이다.구상문학관은 작지만 알차게 꾸며졌다. 시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필기구와 안경, 모자가 단정하게 놓였고, 친필 원고와 함께 구상 시인을 추모하는 후배 작가들의 작품도 여럿 전시돼 있다. 문학관의 동선은 시인의 탄생에서부터 소멸까지를 연대순으로 돌아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한 시절 단아한 선비로 살아온 예술가의 85년 세월이 자연스레 느껴진다. 구상 시인이 기증한 3만 권에 가까운 책은 2층에 보관됐다.문학관 입구엔 ‘그리스도 폴의 강’을 새긴 시비(詩碑)가 방문자들을 기다리고, 지척엔 화가 이중섭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시인의 집필실 관수재(觀水齋)가 복원돼 있다.‘관호산성 둘레길’서 초겨울 산책을 즐기다해질 무렵 불어오는 찬바람이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느끼게 한다. 이런 시기엔 평소 하던 운동도 이유를 만들어 피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춥다고 매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걷기’는 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운동 중 하나다. 방한 점퍼와 머플러가 준비된 사람이라면 칠곡 ‘관호산성 둘레길’을 걸어보라고 권한다. 이곳에서의 산책은 건강이란 선물과 함께 초겨울 낭만까지 맛보게 해준다.낙동강을 따라 이어진 둘레길은 서로의 몸을 맞대고 서걱이는 마른 갈대의 노래들로 가득하다.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중 ‘겨울’ 도입부가 절로 떠오른다.칠곡군 역시 이 길을 “최고의 도보여행 코스”라고 말한다. 호국의 다리를 지나 칠곡보까지는 25분, 칠곡보 입구에서 관호산성과 무림배수장으로 가는 구간은 1시간 남짓이 소요된다.건강과 낭만을 얻기 위해 그 정도 시간쯤 할애 못할 이유가 없다./홍성식·김재욱기자

2019-12-04

풍미 진한 이국의 맛… 제대로 만든 토종의 맛

‘경양식 맛집’ 2곳왜관은 왜(倭)인들이 살던 지역이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왔던 사신들, 한반도 영주권자들, 왜인 상인들이 살거나 일시 묵었던 곳이다. 한국전쟁 후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미군 부대 담을 따라서, 마치 외국을 옮겨 놓은 듯한 간판들이 여러 곳 있다. 한때 유행했던 경양식(輕洋食)집들도 많다. 이제 경양식은 사라졌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미군 부대 주변의 경양식집들’. 그중 두 집에 갔다.‘40년을 지켜온 집밥 같은 전통 경양식’. 가게 벽에 크게 써 붙인 문구다. 그럴듯하지만, 뭔가 어색하다. ‘집밥’과 ‘경양식’? 뭔가 묘하다. 어느 가정에서도 경양식을 일상의 음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전통 40년? 이것도 묘하게 다가온다.왜관 미군기지는 캠프 캐럴(Camp Carroll)이다. 미군 병참기지로 1960년에 조성했다. ‘한미식당’은 1980년 문을 열었다.‘한미식당’의 음식 수준은, 오히려, ‘40년 전통’의 맛을 넘어선다.이 식당의 대표 메뉴 ‘코던블루’는 ‘꼬르동 블루’다. ‘코르동 블뢰(Cordon bleu)’는, 절대권력의 프랑스 기사단이 사용한 ‘푸른 리본’이다. 푸른 리본을 단 기사들의 만찬에서 ‘코르동 블뢰’가 시작되었다. 음식 이름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만찬’을 뜻한다. ‘코던블루’는 일본식 발음 ‘코돈부르’의 변형이다. 유럽의 코르동 블뢰가 일본식 코돈부르로, 한글 표기로 ‘코던블루’가 된 것이다. 음식도 유럽, 일본을 거쳐 한국식으로, 이름도 마찬가지 길을 밟았다.음식 이름으로 ‘코던 블루’는 고기튀김이다.얇게 편 고기에 햄과 치즈 등을 넣고 돌돌 말아서 기름에 튀겼다. 김밥처럼 동글동글하다. 유럽인들은, 커트렛의 원형인 오스트리아식 슈니첼 형태로 만든 것은 특별히 ‘슈니첼 코르동 블뢰(Schnitzel Cordon Bleu)’라고도 부른다. 슈니첼은 송아지 고기다. 유럽에서는 대부분 쇠고기로 코르동 블뢰를 만들지만, 돼지고기, 닭고기도 사용한다.‘한미식당’ 메뉴 ‘시내소’는 ‘슈니첼(Schnitzel)’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다.돼지고기 요리는 냉장 원육을 사용한다. 주인이 일일이 손으로 다지고, 펴서 튀김옷을 입히고, 튀긴다. 변형 유럽 음식이지만, 놀라울 정도의 정성을 기울인다. 접시에 음식을 펼친 모양새도 아주 좋다.메뉴가 상당히 단출하다.‘돈까스’, ‘함박스테이크’, ‘샌드위치’ 3종류다. 유럽 출발, 일본 경우, 한국에 정착한 경양식 메뉴의 ‘정수’만 모았다.돈가스는 오스트리아 슈니첼에서 출발, 일본에서 돼지고기 튀김으로 바뀐다. 슈니첼은 기름을 두르고 어린 송아지 고기를 지진 것이지만 일본식 돈가스는 기름통에 튀김옷을 입힌 돼지고기를 완전히 넣고, 튀긴다. 딥 프라이드(deep fried) 방식, 일본식 ‘뎀뿌라’다.햄버거는, 잘 알려져 있듯이, 함부르크 항구 노동자들이 처음 먹었다는 음식이다. 함박스테이크는 ‘햄버거+스테이크’다. 고기를 다져서 굽는다. 고기 패티는 다진 것이다. 일본은 경양식의 주요 메뉴로 ‘햄버거+스테이크’를 일본식으로 발전시켰다. ‘아메리칸레스토랑’의 함박스테이크는 유럽, 미국,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정착한 것이다. 미군 부대 옆에 ‘아메리칸레스토랑’이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단출한 메뉴지만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이다. 소스도 오래전 ‘경양식’의 풍미가 살아 있다.‘장어 맛집’ 2곳얼마쯤 생뚱맞다. 내륙인 경북 칠곡과 장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칠곡에는 빼놓을 수 없는 장어 맛집이 2곳 있다. 업력 30년을 넘긴 노포와 곁들이 반찬이 아주 좋은 가게다. 두 집 모두 바닷가의 장어전문점보다 오히려 낫다.칠곡에서도 지천면 창평리는 외진 곳이다. 인근에 ‘칠곡 양떼목장’이 있다. 30년 이상 된 노포다. 2대 전승 중. 아들 부부가 어머니에게 가게를 물려받는 중이다. 3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장어전문점으로 자리를 잡았다.장어 손질이 상당히 깔끔하다. 잡냄새는 없애면서 장어 맛은 살렸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각종 장류와 소스. 직접 담근 장으로 음식을 조리한다. 소스도 은은한 향이 아주 좋다. 조미료 없이, 장과 소스로 장어 맛을 살렸다. 장어 곤 국물은 대단하다. 잘 만진 곰탕 같다. 색깔도 곰탕 국물 같이 뿌옇다. 붉지 않다. 잘게 썬 대파를 넣고 마시면 장어의 비린내 대신 희미한 곡물 냄새가 난다. 장어를 곤 다음, 여러 번 곱게 거른 것이다. 한때 점심 메뉴로 내놓았지만, 지금은 장어요리를 주문하면 서비스 메뉴로 내놓는다. 곁들이지만 대단한 정성을 기울여 만든 국물이다. 다른 장어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메뉴다.칠곡에서는 가장 ‘핫(hot)한’ 식당이다. 칸막이가 있는 실내와 넓은 주차장이 좋다고 표현한다. 음식이 수준급이라는 표현이 맞다. 음식 만지는 내공이 깊다.콩나물, 무나물의 간이 아주 좋다. ‘슴슴한’ 맛과 감칠맛이 돋보인다. 장아찌도 특이하다. 당귀 장아찌는 흔하지만, 당귀 잎사귀로 만든 장아찌는 드물다. 장아찌이면서 짜지 않고, 물기도 적당히 살아 있다. 부추장아찌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음식. 질기고 거친 부추 대와 이파리를 그대로 살렸다, 당귀 잎사귀, 부추 모두 향도 좋다.‘제대로 만든 음식’은 특출나게 만든 음식이 아니다. 평범한 재료로, 누구나 아는 방식으로, 그러나 제대로 만든 것이다. 이 식당의 음식들이 그러하다.경북 지방에서는 배추전, 무전을 제사에 사용한다. 귀한 음식이라기보다 필수적인 음식이었다. 무전은 사라졌고, 배추전도 다른 지방에서는 귀하다.제대로 만든 무전은 ‘충분히 잘 익었지만, 질감이 살아 있는’ 형태다. ‘청록식당’의 무전이 꼭 그러하다. 잘 익었지만 사각사각한 식감이 제대로 드러난다.장맛 좋은 식당의 음식을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식사로 내놓는 어탕국수도 수준급이다. 된장찌개는 대단한 수준. 장어와 고기 등을 파는 집의 된장찌개 수준을 넘어섰다.칠곡의 맛집 3곳‘진땡이국밥’은 국밥집이라기보다는 순대 전문점이다. 대창순대와 막창순대가 좋다. 국밥을 주문하면 순대와 더불어 내장 등을 뜨거운 육수에 토렴한다. 잘 만진 순대, 부속물에 잘 곤 국물의 맛을 더한다. 칠곡전통시장 안의 허름한 집이다. 채소, 고기를 갈아 넣어서 직접 만든 순대는 ‘전국구 맛집 수준’이다.‘소미할매칼국수’는 엉뚱하다. 칠곡군 약목면에 있다. 제법 먼 곳인 안동의 ‘건진국시’ ‘제물국시’를 칠곡에서 살렸다. 메뉴가 모두 5개. 뜨거운 칼국수, 건진칼국수, 잔치국수, 겨울철 메밀묵, 여름철 콩국수 등이다. 메밀묵을 제외하고 가격은 모두 5천 원.‘건진칼국수’는 안동의 ‘건진국시’다. 칼로 곱게 썬 칼국수를 삶은 후, 물에 헹군다. 맑은장국에, 삶아 건진 국수를 넣어서 먹는다. 뜨거운 칼국수는, 제물국수다. 멸치 육수 등에 칼국수를 넣고 그대로 삶은 후, 양념해서 먹는다. 2대 전승.‘지란방’은 화상 노포다. 메뉴가 단출하지만 재미있다. 고기만두, 꾼만두, 진교스다.고기만두는 바오쯔[包子, 포자]다. 만두 윗부분을 보자기 틀듯이 묵었다. 중국인들은 ‘바오쯔’라고 부르지만, 한반도에서는 만두다.꾼만두와 진교스는 교자로 만든다. 꾼만두는 자오츠[餃子, 교자]를 구운 것이다. 진교스는, ‘찐 자오츠’다. 교자를 찐 것이다. 이 식당의 추천 메뉴는 ‘진교스’ 찐 교자다.바오쯔는 피로, 발효한 곡물을 사용한다. 껍질이 두텁고, 부드럽다. 자오츠는 생피다. 뜨거운 물에 반죽한(익반죽) 곡물 피를 사용한다. 쫄깃하고 비교적 얇다.화상들이 한반도에서 지속적으로 변형시킨, 그러나 원형을 지니고 있는 포자, 교자다./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12-04

달문(達文)이를 아시나요

1764년(영조 40) 4월 초순경이었다. ‘달문(達文)’이란 사람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의금부의 추국(推鞠·특명으로 중죄인을 신문함)을 받는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된 그 해 4월 17일, 이상묵(李尙默)이란 사람이 달문이를 사칭한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이를 두고 ‘이태정(李太丁) 역모사건’이라고 한다.달문이란 누구일까. 그는 1707년생으로 성은 이씨요. 이름이 달문이다. 이달문은 조선 팔도를 뒤흔든 최고의 스타 연예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18세기 ‘아이돌’이었던 것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산대나례(山臺儺禮)였다. 산대(山臺)는 큰 길가나 빈터에 마련한 임시 무대를 말하는 것이고, 나례는 본래 귀신을 쫓는 의식인데, 광대놀음으로 더 잘 알려진 연희였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나 중국 사신의 행차를 환영하기 위해서 광화문 앞 대로변에 임시무대를 세우고 나례를 거행하였다. 이때는 으레 탈을 쓴 광대 달문이가 주연으로 등장했다. 그가 나타나면 장안의 풍류와 무협을 숭상한 유협(遊俠·협객)의 부류들이 그를 상석(上席)에 앉히고, 마치 왕을 모시듯 떠받들었다고 한다.달문은 단지 몸놀림으로 줄타기나 땅재주를 부리는 광대가 아니었다. 재담이나 흉내 내기와 같은 연기에도 타고 났다. 땅재주를 부리는 중간에도 눈을 흘기며 비뚤어진 입에서 지껄이는 어릿광대의 연기와 입심은 가히 따라갈 자가 없었다. 언젠가는 길을 가다가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았다. 달문이 갑자기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흉내내자 싸우던 당사자들이 웃느라 싸움을 멈췄다는 이야기도 있다.우상에 가까운 명성에 비해 달문의 출신성분은 미미했다. 미천한 거지출신에다 얼굴마저 못생겼다고 한다. 입은 비뚤어졌는데, 그것도 너무 커서 얼굴의 반은 입인 것처럼 보였다. 몰골도 꾀죄죄해 째진 눈에 눈곱이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싯적에는 청계천의 거지 패거리와 어울리면서 당시 하층사회에서 크게 유행했던 각종 연희를 골고루 배울 수 있었다.그가 특기를 보인 연희는 만석중놀이와 철괴무, 팔풍무였다. 만석중놀이는 황진이의 미모에 빠져 파계했다는 지족(知足)선사를 조롱하는 내용의 탈춤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공연됐다. 철괴무(鐵拐舞)는 이철괴(李鐵拐)라는 기괴한 모습의 신선을 흉내내면서 동쪽으로 달리다 서쪽으로 내닫는 역동적인 춤으로, 산대놀이의 하나였다. 팔풍무(八風舞)는 남사당놀이의 땅재주넘기와 유사한 놀이였다.달문이는 전국 순회공연도 다녔다. 1747년 무렵, 그는 영남을 시작으로 호남, 호서를 거쳐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스타 광문이 고을에 나타나는 날이면 천민에서부터 사대부까지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달문의 고객 중에는 어사 박문수도 있었고, 좌의정 벼슬까지 했던 풍원군 조현명도 있었다. 그는 머리를 길게 땋은 채 장가도 들지 않은 추남이었지만, 그와 공연을 함께하는 기생들은 절세미인들이었다. 광문이 때때로 재상가집 연회나 왕손들의 잔치에 초청될 때면 이름난 기생들을 이끌고 가서 한껏 풍류를 과시하기도 했다.달문이 뭇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뛰어난 재주 못지않게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측은지심의 마음씨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이런 면모는 당대 및 후대 문인들의 관심을 끌었기에 여러 편의 문학작품으로도 형상화되었다. 어려서부터 달문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고 실제로 만난 적도 있다는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달문의 의로운 행실을 알리기 위해 광문자전(廣文者傳)이란 소설을 지었다. 실존인물 달문을 ‘광문’으로 이름을 바꾼 이 소설은 비천한 거지인 광문의 순진성과 거짓 없는 인격을 그려 양반·서민 가릴 것 없이 인간은 다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권모술수가 판을 치던 당시의 양반사회를 은근히 풍자했다.이것뿐만 아니다. 역관이자 시인인 홍신유는 달문가라는 서사시를 지어 예술가로서의 달문의 삶을 조망하였다. 그 밖에도 이규상, 이옥, 조수삼 등도 달문에 관한 이야기를 문학작품으로 남겼다. 이처럼 달문의 명성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일이 발생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역모 사건에 그가 말려든 것이다.때는 1764년(영조 40) 봄, 달문이 쉰여덟 살 되던 해였다. 경상도 영남지역에서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주동자는 1728년에 일어난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의 잔당으로 영남지역에 숨어살던 이태정이란 사람이었다. 이태정은 나주목사로 있다가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은 이하징(李夏徵)의 서자(庶子)였다. 따라서 이태정의 역모사건은 반영조의 기치를 내건 소론의 실세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이태정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방법을 강구하다가 당시 전국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달문의 명성을 생각해냈다. 사회적 분위기로 봐서 달문이의 인기를 이용하면 민초들의 세력을 쉽게 규합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이태정은 자신을 달문의 친동생 ‘달손(達孫)’이라고 속였다. 그의 공범인 작은만(者斤萬)은 한술 더 떠서 자신이 달문의 아들이라고 사칭했다. 이들은 같은 무리인 이상묵(李尙默)과 같이 노비, 점쟁이, 승려 등의 천민세력을 규합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세력이 규합되자 이들은 나라를 원망하는 망측스러운 말을 지어내고, 또 음흉하고 참혹한 시(詩)를 지어 퍼뜨리고 다녔다.그런데, 달문이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떠꺼머리총각이라는 사실은 온 조선 땅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에게 동생과 자식이 있다고 했으니 의심을 품은 홍유(洪洧)라는 사람이 관가에 이 사실을 고발함으로써 일당들이 모두 붙잡히게 된다.1764년 4월 17일, 영조가 직접 사복시(司僕寺)에 나아가 영남 죄인 작은만·홍유·이상묵·이달손(李達孫)·강취성(姜就成)과 승려 도행(道行)·문담(文淡) 및 달문 등을 친국(親鞫·중죄인을 임금이 직접 신문함)하였다. 이달손이 자신은 이태정임을 밝히고 대역부도죄를 시인하자, 영조는 숭례문에 직접 나아가서 그를 참수형에 처했다. 그의 처자도 연좌시켜 노비의 적에 올리고 재산은 몰수했다. 나머지 가담자들은 모두 정상을 참작하여 멀리 귀양 보내도록 했다. 이때 가담정도가 경미한 작은만은 진도(珍島)에 유배되었고, 이상묵은 경상도 장기(長鬐)로 유배가 결정되었던 것이다.그런데, 정작 조사를 해보니 달문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영조는 그를 죽이려했다. ‘머리가 반백인데도 총각의 모습을 꾸며 인심을 현혹시키고 풍속을 괴란하였다’는 이유였다. 영조가 이런 착상을 하게 된 근거는 중국의 예에 따른 것이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경공이 협곡(夾谷)에 나들이를 나갔는데, 이때 오랑캐가 풍악을 울리고 광대가 희롱을 하며 나오자 공자가 제후에게 ‘필부(匹夫)로 제후를 현혹한자는 죄가 마땅히 참수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여 처단한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주위에서 반발이 심했다. 만약 달문을 죽일 경우 민란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영조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를 죽이지는 않고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귀양을 보냈다. ‘달문은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데 인심을 미혹시켜 역적 이태정이 그 모습을 본뜨고 그 말투를 본뜨게 했다. 비록 본건에는 연루된 일이 없으나, 그 사람 자체가 난리의 근본이므로 변방에 유배 보낸다’는 이유를 달았다.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영조의 눈에는 달문의 행적이 곱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국을 누비며 민초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문은 언제든지 세력을 모아 자신에게 도전해 올지도 모르는 위험인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영조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이가 많은데도 머리를 땋아 내린 자는 적발되는 대로 무겁게 다스리라’고 전국에 공포할 정도로 민감하게 대처했다. 이게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조선 최초의 장발단속 규정이다.원래 작은만이란 사람은 경상도 개령(김천시 개령면)에 있는 수다사에서 밥을 빌어먹던 사람이었다. 그는 관상을 보고 점을 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절에 사는 스님들이 달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스님들은 모두가 달문이를 칭찬하고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작은만은 달문이의 이름을 팔면 구박받지 않고 절밥을 더 잘 얻어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가 바로 그 달문의 아들입니다’라고 했다. 스님들이 깜짝 놀라 그때부터 작은만을 지극정성으로 대접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역모를 꾀하던 이태정이었다. 그는 작은만이 스님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도 달문이를 이용하면 쉽게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작은만에게 자기를 작은아버지라고 불러주면 앞으로 함께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꾀었다. 그때부터 작은만은 이태정을 삼촌이라 불렀고, 이태정은 자신이 달문의 친동생처럼 행동하게 된 것이다.이런 일로 달문은 경성에 유배 갔다가 다음해 9월 5일에 방면됐다. 달문이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오자 남녀노소가 떼거리로 몰려나왔다. 구경꾼들로 인해 한양의 저잣거리가 한동안 텅 빌 정도였다고 한다. 달문의 인기는 그 사이에도 식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달문은 옛날의 그 달문이 아니었다. 열혈 팬들의 환대를 마다하고 어디론가 훌쩍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명성을 뒤로한 채 홀연히 사라진 그를 사람들은 추억하며 그리워했다.달문은 왜 이렇게 유명세를 탔을까. 비록 가문이 몰락하여 걸인의 생활을 하였지만, 신의와 의협심이 남달랐다. 남들이 업신여기는 기생과도 인간적인 교유를 맺었다. 외모가 못 생기고 어리석게 보였으나 생각이 깊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알았다. 심지어 자신의 인기와 명성을 이용하는 자들로 인해 억울한 유배생활을 하고 돌아왔지만 원망하지도 않았다.복잡다단한 인생 역정을 지닌 광대 달문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절정에 닿은 인기를 마다하고 바람처럼 사라져 오히려 더 유명해졌던 이달문. 그의 파란만장한 행적들이 가을걷이 끝난 빈 들판처럼 허허롭게 다가온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2-03

손맛·눈맛·입맛 사로잡는 볼락 “감성돔이랑도 안 바꿔”

겨울은 동해안 낚시의 최적기다. 낚시는 푸른 바다에서 힘차게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생명력과 만나는 행위. 주목받는 젊은 작가이자 프로급 낚시꾼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이병철 시인이 동해안 곳곳을 누비며 낚시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 연재는 12월 한 달간 진행될 예정이다.다시 겨울이 왔다. 계절에도 표정이 있다면, 겨울은 쓸쓸하고 삭막한 무표정의 얼굴이다. 봄의 생기와 여름의 정열, 가을의 너그러움을 모두 떠나보내고, 이제 어둡고 차가운 겨울을 오래토록 마주해야 한다. 잎을 버린 나무들은 빈 우듬지에 허공을 매달고, 강과 호수는 꽁꽁 얼어붙어 겨울 햇살이 아무리 쓰다듬어도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짐승도, 사람도 움츠러든다. 꽃이 사라진 거리의 빈곳을 크리스마스 전구 불빛들이 채우고 있지만, 찬바람이 파고드는 가슴까지 따뜻하게 하지는 못한다.낚시꾼들에게도 겨울은 궁핍한 계절이다. 나는 섬진강변에 산수유, 매화, 벚꽃이 차례로 피는 봄에 쏘가리 낚시를 시작한다. 봄철 동안 쏘가리랑 잘 놀다가 쏘가리 금어기가 되면 바다로 걸음을 돌린다. 태안, 보령, 홍성, 서천, 군산, 부안 등 서해안에 황금어장이 열리는 시즌이기 때문이다. 갯바위에서 우럭, 광어, 쥐노래미 등을 수확하고, 레저보트로 연안 홈통과 곶부리를 치고 빠지며 여름 농어의 손맛을 만끽한다.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낚시로 반찬거리를 장만하느라 분주하다. 백조기 낚시를 한번 다녀오면 한 일주일은 집에 조기 굽는 고소한 냄새가 끊이지 않는다. 주꾸미와 갑오징어는 또 얼마나 별미인가? 한번 낚시에 보름쯤은 넉넉히 먹을 만큼 잡곤 한다. 그런데 호시절은 다 끝났다. 서해안 낚시는 12월이면 사실상 종료된다. 차가운 북서계절풍과 한류의 영향으로 바다가 얼음장처럼 냉랭해지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서해안 낚시가 종료되는 순간 동해안 낚시가 개막되기 때문이다. 겨울 동해는 태백산맥이 찬 공기를 막아주는 데다 난류가 흐르고 또 수심도 깊어 따뜻하다. 12월이 되면 황금어장은 서해에서 동해로 옮겨 온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의 섭리인가? 낚시꾼은 축복 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어서 울진으로, 영덕으로, 포항으로, 경주로 달려가자. 볼락, 부시리, 방어, 농어, 감성돔, 성대, 우럭, 노래미, 호래기, 참돔, 벵에돔 등 온갖 물고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겨울 동해안 낚시 기행’의 첫 번째 주인공은 볼락이다. 많고 많은 물고기 중에서 왜 하필 조그마한 볼락을 첫손에 꼽았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작고 앙증맞은 볼락이 감성돔과 농어 같이 크고 늠름한 생선들을 제치고 기행문의 첫 손님으로 초대된 까닭은, 귀하기 때문이다. 볼락은 주로 동해와 남해에서만 만날 수 있다. 동해안이 볼락 낚시터라고는 하지만, 삼척 위로 올라가면 개체수가 급감해 좀처럼 보기가 쉽지 않다. 수심이 깊고, 난류가 흐르며, 수중 암초가 잘 발달된 경북 동해안이야말로 볼락 낚시의 메카인 셈이다. 특히 겨울은 볼락 낚시가 호황을 이루는 계절이다. 1월 전후로 산란을 위해 연안의 해조류와 몰밭으로 몰려드는데, 방파제 테트라포드와 석축, 갯바위, 내항 어디서든 탈탈거리는 볼락 특유의 손맛을 볼 수가 있다.낚시에는 흔히 세 가지 맛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손맛이고, 둘째는 눈맛, 그리고 셋째가 입맛이다. 볼락은 이 세 가지 맛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어종이다. 찌낚시와 선상 카드채비 낚시도 많이 하지만, 볼락은 최고의 루어낚시 대상어다. 7피트 전후 울트라라이트 액션의 낭창한 낚싯대에 1천∼2천번 소형 릴, 그리고 0.3∼0.6호의 가느다란 합사 낚싯줄을 사용한다. 1∼3g 정도로 가벼운 지그헤드에다가 1.5∼2인치 웜을 끼운 후 연안의 해조류 지대나 수중 암초 등 장애물 지형에 던져 느리게 릴링을 하면 ‘후두둑…’하는 입질과 함께 돌 틈으로 처박으려는 달음질에 짜릿한 손맛을 만끽할 수 있다. 물 밖으로 꺼내 올린 볼락은 참 귀엽고도 아름다운 자태를 지녀 심미안을 만족케 한다. 꼿꼿하게 펼쳐 세운 등지느러미는 마치 왕관 같고, 크고 동그란 눈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난다.그런데 이 손맛과 눈맛을 다 합쳐도 입맛에는 견줄 바가 못 된다. 나는 우리 바다에서 나는 생선 중 볼락이 가장 맛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회, 구이, 매운탕, 튀김…. 어떻게 요리를 해도 다 환상적이다. 얼마나 맛있으면 경북 동해안 지역 사람들은 ‘바다의 황태자’인 감성돔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잡히는 족족 산지에서 다 소비가 되어 서울에선 맛보기도 어렵다. 가끔 구이나 매운탕을 하는 식당들이 있지만, 볼락회를 내는 곳은 보지 못했다. 싱싱하게 펄떡이는 볼락을 회로 썰어먹는 기쁨은 오직 동해안에서, 낚시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이토록 장황한 ‘볼락 예찬’을 먼저 하지 않고서는 글을 써내려갈 수 없다. 사실 이 말들로도 부족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볼락 낚시가 너무나도 하고 싶어져서 견딜 수 없다. 얼른 원고를 갈무리하고 낚싯대를 챙겨 포항으로 달려가야겠다. 엊그제 다녀왔지만 또 가고 싶다. 가서 볼락을 만나고 싶다. 낚시꾼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물고기가 연인인 마냥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계속 보고 싶어 한다.지난 주말, 포항 남구 구룡포의 한 방파제를 찾았다. 이번 겨울 들어 처음 나선 볼락 낚시라 가슴이 몹시 설렜다. 낮에 도착해 낚시 준비를 하고, 방파제 주변 연안을 살펴보니 볼락의 은신처이자 산란장이 되는 몰밭이 꽤 형성돼 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몰밭 주변으로 야행성인 볼락들이 모여들어 활발하게 움직일 것이다. 볼락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아직 빛이 환하지만 집어등부터 켜두었다. 집어등 불빛을 보고 멸치나 꼴뚜기 등 작은 먹잇고기들이 몰려들면 그걸 잡아먹기 위해 볼락들도 모이게 된다. 그런데 캄캄한 밤에 갑자기 불빛을 밝히면 오히려 볼락의 경계심만 높아지므로, 미리 집어등을 켜두는 게 좋다. 밤낚시가 가장 효과적이지만, 해질녘과 동 틀 무렵 볼락들이 먹이활동을 부지런히 하는 이른바 ‘피딩타임’에만 집중해서 해도 스무 마리쯤은 너끈히 잡아낼 수 있다.이맘때 포항의 겨울은 포근하고 부드럽다. 분홍빛 석양이 지는 저녁 수평선을 바라보며 채비를 던지면, 한 번은 볼락이 물고 올라오고, 또 한 번은 낭만이 걸려 올라온다. 동해의 맑고 푸른 물살이 일으키는 해풍은 상쾌한 향기를 지녀서, 숨을 쉬면 들숨에 피가 맑아지고, 날숨에 고민과 걱정이 빠져나간다. 낚시는 단순히 물고기를 잡는 수렵 및 채집 행위가 아니라 신체와 정신을 모두 건강하게 만드는 스포츠이자 명상, 치유 행위인 것이다.채비를 던질 때마다 톡, 하고 입질을 하는 녀석들은 다 1년에서 2년까지밖에 아직 자라지 않은 ‘젖뽈’(작은 볼락을 칭하는 낚시꾼 은어)들이다. 열쇠고리만 한 어린 볼락들을 잡고 놔주고, 잡고 놔주고 하는 사이 드디어 ‘피딩타임’이 됐다. 물 속 암초와 테트라포드가 시작되는 물턱 자리에서 ‘후두둑’하는 시원한 입질이 연달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달음질치면서 내 손에 짜릿한 진동을 안겨주는 볼락들은 20cm 전후의 완전한 성체, 포획 금지 체장인 15cm를 훌쩍 넘기는 놈들로만 골라 넣었는데도 살림통이 금방 찼다. 어느 정도 마릿수는 채웠으니 이제는 큰 놈을 노려야 한다. 30cm가 넘는, 민물 붕어로 치자면 ‘월척’에 해당하는 ‘왕사미’(대물 볼락을 뜻하는 은어)를 잡기 위해 나는 채비를 바꾸고, 낚시 장소마저 옮기기로 했다. 새 포인트로 가는 길, ‘왕사미’를 향한 기대와 ‘꽝’에 대한 걱정이 번갈아가며 내 가슴을 두드려댔다. /이병철(시인)

2019-12-01

아쉽고 아쉽고 아쉽지만 잘 가.. 청춘

마주 앉은 상대방의 왼쪽 어깨 너머로 에펠탑 꼭대기가 보이는 프랑스 파리의 소박한 야외 카페. 가게 안 스피커에선 니콜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의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가 흘러나오고 있었다.클래식에 관해 아는 바 적지만 저건 분명 여성 바이올린 연주자다. 정돈되고 세밀한 현악기 소리가 해질 무렵 도시의 공기를 감미롭게 만들어줬다.천재성과 광기 사이에서 일생을 어지럽게 살아야했던 절름발이 화가 툴루즈 로트렉(Toulouse Lautrec·1864-1901)이 좋아했을 법한 포도주를 주문했다. 낯선 도시의 밤이 서서히 다가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지인에게 소개 받아 그날 처음 만난 청년의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프랑스로 이민 왔다고 했다. 고생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아들과 딸, 손자를 잘 키워냈다. 한국 대학에서 1년간 교환학생으로 있었다는 청년은 프랑스어는 물론 영어와 한국어까지 능숙했다. 세칭 ‘글로벌시대에 어울리는 20대’였다.▲석양이 질 때면 떠오르는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있다프랑스어도 영어도 서툰 기자에게 한국말을 곧잘 하는 청년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다. 무슬림이라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지만, 한국 유학의 경험 때문인지 주석(酒席)의 분위기를 맞출 줄 알았다.나이에 관계없이 사내 둘이 만났으니 ‘여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여자 이야기는 곧 ‘첫사랑’에 관한 기억으로 이어졌다. 스물다섯 살 어린 ‘파리 친구’는 노래를 잘 부른다는 연인 이야기를 길게 했다.그 아기자기한 스토리를 고개 끄덕여 들어주며 떠올린 시가 있었다. 청춘을 아프게 반추하는 안도현의 절창 ‘저물 무렵’이다.▲빛나는 ‘연애시대’는 중년들에게도 있었으니…지금이야 신세대들로부터 ‘고루한 아저씨’ 취급이나 받고 살지만, 1980~1990년대 청춘을 보낸 중년에게도 왜 찬란한 ‘연애’가 없었겠는가. 흰 머리카락이 날마다 늘어가는 기자와 친구들도 마찬가지.스마트폰도 멀티방도 없던 시절의 연애는 단순하고 유치했다.비가 내리는 날이면 언제 수업을 마칠 지도 모르는 ‘고등학교 3학년 오빠’를 교문 앞 골목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감청색 교복 치마의 열일곱 여고생이 적지 않았고, 여자 친구의 생일선물로 한 달 용돈을 모두 털어 주머니 위에 말(馬)이 그려진 청바지를 사는 소년도 흔했다.20세기 말 ‘연애시대’는 가난하고 순박했다. 그랬기에 애처롭지만 아름다울 수 있었다.시인 안도현은 19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 앞서 인용한 시에서 웃음보다는 눈물, 환희보다는 우울의 향기가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 아닐지.아무리 찾아봐도 데이트 할 장소가 없어 해가 지는 강둑에 나란히 앉아 불과 몇 십 km 떨어진 이웃 도시의 이야기나 들려주고, 듣는 것 외엔 별반 할 게 없었던 어린 연인들.짧디짧은 한 번의 입맞춤이 일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는 연애. 그렇다고 이걸 ‘21세기식 사랑’보다 아래의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지난 세기에 10대와 20대를 보낸 이들에게 저물 무렵의 어스름과 곧 다가올 농밀한 어둠은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는 어린 노을’임을 깨닫게 해줬다. 그 힘으로 그들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중년들에게 과거는 모두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로 기억될 수 있는 것.그나저나 안도현의 시를 중년이 돼 다시 읽으니 궁금해진다. 요즘 젊은 친구들도 첫 키스를 아래와 같이 수줍게 기억할까?“어느 날 그 애와 나는/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애의 여린 숨소리를/열 몇 살 열 몇 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 공식을/아아 모두 삼켜 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옛일을 떠올리며 새벽까지 파리의 밤거리를 걷다가이민자의 손자인 프랑스 청년으로 인해 유쾌했던 저녁 자리가 끝이 났다. 악수를 나누고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그러고 나니 다시 혼자가 됐다.해가 지자마자 일찍 숙소로 돌아가 씻고 잠드는 건 아이들에게나 어울릴 일이지 오십에 가까운 중년사내의 여행 스타일은 아니다.파리의 어둠과 서유럽의 밤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고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해변을 산책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기분으로.에펠탑 밑 벤치엔 한 세기 전 그랬듯 그날도 밀어(蜜語)를 속삭이는 연인들이 가득했고, 불 밝힌 골목의 고풍스런 극장에선 화려한 쇼가 펼쳐진다는 걸 홍보하고 있었다.더 한적하고, 더 어둡고, 더 낯선 장소로 가고 싶었다. ‘예술과 낭만의 절정’이라는 파리의 밤, 그 반대편의 맨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싶었다. 취기 탓만은 아니었다.이윽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센강의 지류. 오렌지빛 가로등이 드문드문 자리를 지켰으나 주위는 인적이 드물고 캄캄했다. 마침내 ‘거대 도시’ 파리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잠깐 사이에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그때였다. 강 건너편 젊은 남녀 한 쌍이 눈에 들어온 것은. 일부러 보려한 건 아니지만 둘의 입맞춤은 길고도 뜨거웠다.순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게는 저런 청춘시절이 다시 오지 않겠지’란 생각이 들었고,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슬퍼졌다.그러나 그 슬픔과는 별개로 센강의 물소리는 신지아의 바이올린 연주처럼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아이러니한 파리의 새벽녘이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11-28

자동차 튜닝·유통·판매·전시 원스톱 시스템 구축

△ 김천혁신도시, 지역발전의 거점이 되다올해 시승격 70주년을 맞은 김천시는 혁신도시를 신선장 동력으로 삼아 새로운 100년의 비전을 구상하고 있다. 이를 위해 김천시는 드림모아 프로젝트, 국가혁신클러스터 조성, 혁신도시 융복합 드론플랫폼 구축사업, 자동차 튜닝기술지원 클러스터 조성, 혁신도시 중심 미래교통 스마트시티 조성 등을 혁신도시 이전 공공기관과 함께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 중 드림모아 프로젝트는 12개 공공기관과 공동협력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상생협력 프로젝트로, 현재 △국가혁신 융복합단지 △스마트물류 4.0프로젝트 △드론산업 혁신거점단지 △한국전력기술 파워업 프로젝트 △한국도로공사 스마트교통 프로젝트 △국가재난안전클러스터(허브) △기업 혁신성장 타운 등이 추진되면서 김천의 미래 산업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자동차 튜닝산업의 메카로김천시는 한국교통안전공단의 혁신도시 이전을 계기로 자동차 튜닝산업을 지역전략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 왔다.전문가의 자문과 용역을 통해 사업 타당성 확보를 시작으로, 비즈니스 모델 발굴, 수요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자동차 튜닝산업을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준비했다.김천시의 이러한 노력으로 지난 7월 한국교통안전공단과 친환경자동차, 첨단자율주행자동차, 특수목적자동차 등 운행차의 안전성 확보를 위한 인증·승인·기술검토를 수행하는 ‘튜닝카 성능·안전 시험센터’ 건립 업무협약을 체결했다.‘튜닝카 성능·안전 시험센터’는 튜닝에 의한 운행자동차의 안전도 확보를 위한 튜닝기술검토를 실시하고, 신기술을 접목한 튜닝, 자율주행자동차 등 미래형자동차 튜닝에 대한 성능·안전시험, 튜닝항목 개발 및 확대를 위해 추진하는 사업으로, 김천시는 김천1일반산업단지 3단계 지원시설 용지 내 3만3천㎡에 414억원(국비 250억원, 도비 65억6천만원, 시비 98억4천만원)을 들여 2021년 착공할 방침이다.특히, 자동차 튜닝 범위에 전기차도 포함되는 만큼 전기차의 고전압배터리 작동 여부, 절연저항 여부, 수소이음매 누출 여부, 수소배관 손상여부 확인, 고전원전기장치 및 수소의 과열상태 확인 등 전기차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역할을 센터가 수행하도록 할 계획이다. 김천시는 센터가 건립되면 국내 자동차 튜닝산업의 지형이 완전히 재편되면서 김천시가 자동차 에프터산업의 메카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래 자동차산업을 선도하다한국은 연간 국내 자동차 400만대를 생산하는 세계 7대 자동차 강국이지만, 각종 규제로 자동차 에프터 마켓으로 불리는 튜닝산업은 성장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김천시와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추진하는 ‘튜닝카 성능·안전 시험센터’는 국내 튜닝시장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김천시는 자동차 튜닝산업에 걸릴돌로 작용하는 각종 규제를 풀기 위해 정부의 과감한 규제혁신을 요구하고 있다.김천을 지역구로 하고 있는 송언석 국회의원도 튜닝업체가 안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튜닝할 수 있도록 하는 자동차관리법 일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는 등 김천시가 추진하는 자동차 에프터산업에 힘을 보태고 있다.김천시의 지형적 특성도 자동차 튜닝산업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충남과 영남권에 소재하고 있는 자동차 관련 업체들의 입장에서 김천시에 ‘튜닝카 성능·안전 시험센터’가 들어설 경우 물류비 절감, 인증, 승인 절차에 따른 시간 절약, 제작차 및 부품 제조 기업에 대한 지원 등이 수월하기 때문이다.여기에 김천시가 제작차 기업과 부품제조 기업을 유치할 수 있는 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생산, 유통, 판매, 장착, 전시, A/S가 원스톱으로 지원되는 복합단지로 만들 계획이어서 벌써부터 관련 기업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김천시가 추진하는 미래 자동차 산업의 규모는 이미 여러 기관들의 연구 결과로도 나타났다.한국노동연구원은 지난 2015년 자동차 튜닝관련 규제완화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국내 자동차 튜닝시장은 2020년 이후 4조원대로 확대되고, 약 4만명의 고용찰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한국교통안전공단 역시 2016년 ‘튜닝산업 현황분석 및 전망’보고서에 튜닝시장은 2015년 3조4천억원에서 연평균 4.18%씩 성장해 2020년 4조1천억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김천시가 자동차 튜닝산업을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선정해 강력하게 추진하는 이유다.△ 융복합드론 플랫폼을 구축하다김천시는 미래 4차산업혁명을 이끌고 있는 드론산업에 주목하고 있다. 드론은 문화, 스포츠, 교통,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면서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김천시는 고난이도 페인팅 드론 개발 등 융복합 드론 플랫폼 구축을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드론산업 지역특화 방안 연구용역을 지난해 완료한 김천시는 융복합 드론 플랫폼 구축에 10억원 예산을 반영하고, 국토부에 드론 시범공역을 신청했다.이를 통해 고층 및 위험지역 등 구조안전 확보와 도색을 위한 특수드론을 개발하는 RD사업을 진행하고, 드론 개발과 시험을 위한 스마트드론혁신센터를 건립할 예정이다. 또 국토부 공모사업인 드론비행시험장을 유치할 계획이다. 김천시의 이러한 계획에 한전기술과 김천대, 경운대와 더불어 전국의 여러 기업들이 참여희망 의사를 보내고 있다.김천시는 융복합 드론 플랫폼이 구축되면 드론 관련 기업 유치 뿐 아니라 특수목적용 프리미엄드론 개발과 생산으로 김천을 대한민국 드론 특구로 육성할 방침이다.김천시는 드론과 관련한 다양한 사업도 전개하고 있다.지난 9월에는 국제드론축구대회를 개최해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올해 처음으로 열린 이 대회에는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일본 등 4개국과 국내 등 60개 팀이 참가해 경쟁을 펼쳤다.특히, 개막식에서 100대의 드론이 밤하늘을 수놓은 비행쇼와 미니드론레이싱 대회, 드론체험존, 드론산업 박람회 등이 함께 열려 김천시가 드론산업의 거점도시임을 증명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11-28

절대비경, 그 느린 시간 속을 버스 타고 한바퀴

짙푸른 바다가 주는 낭만을 사랑하는 관광객, 복잡한 도시에서의 일상을 벗어나고픈 여행자에게 울릉도는 지상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유토피아’에 가깝다. 어떤 필설로 도동항 파란 물빛과 나리분지의 적요한 평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울릉도에선 ‘아름다운 자연’이란 문장이 은유나 상징이 아닌 직설이 된다. 바로 이 울릉도를 최근 버스를 타고 일주했다. 그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포항을 출발한 배가 3시간째 항해를 계속했다. 파도가 높지 않아서인지 울릉도를 향하는 썬플라워호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지레 겁을 집어먹고 멀미약을 잔뜩 챙겨 온 게 후회될 정도였다. 19세기 유럽 표상주의의 거장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1854~1891)의 시(詩) ‘취한 배’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 선내 방송이 울릉 도착을 알렸다. 섬의 관문인 도동항이다.“이곳이 울릉도입니다”라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선착장 곳곳에서 해풍과 햇빛에 맛있게 말라가는 오징어가 울릉 특유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렇다. 울릉도에 무사히 온 것이다.점심시간이 훌쩍 넘었기에 도동항에서 오징어회로 허기를 달랬다. 먹물을 뿜으며 펄펄 살아 뛰는 오징어 3마리를 회치고, 각종 양념과 쌈채소, 거기에 소주 1병까지를 더해 단돈 2만원. 육지라면 상상하기 힘든 저렴한 가격이다. 사파이어빛 바다를 마주하고 마시는 술이 달콤했다. 일상 탈출이 주는 ‘행복 에너지’ 때문이었을 터.21세기. 여행의 방식과 여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세대간 차이일 수도 있고, 남녀의 차이일 수도 있으며, 관광객의 취향 차이일 수도 있다. 모두는 각기 다른 형태로 각자의 패턴에 따라 여행지를 둘러본다.어떤 사람은 ‘가능하면 많은 곳’을 돌아보길 원하고, 혹자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여행’을 지향한다. 스스로 차를 운전해 관광지를 향하는 이가 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관광객도 적지 않다. 기자가 울릉도 여행의 방식으로 선택한 건 ‘버스 타고 섬 일주’.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울릉도의 기막힌 풍광도동항을 출발한 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를 빠져나왔다. 마침내 펼쳐지는 원시의 바다 풍경. 눈이 시릴 정도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다.내수전 몽돌해변을 지나 얼마 달리지 않자 울릉도를 여행한 이들이 “최고의 비경”이라 입을 모으는 삼선암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3명의 선녀가 바위가 됐다는 전설. 게으름뱅이 막내 선녀가 변해 만들어졌다는 바위엔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재밌는 설화다.몇 년 전. 몬테네그로에서 크로아티아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 적이 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아드리아의 바다 빛깔이 너무 고와서 3시간 넘는 이동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울릉도 버스 여행의 시작도 그와 같았다.삼선암 뒤로 밀려가는 물결에 관음도와 죽도가 미려한 자태로 춤을 추고 있었다. 언젠가 본 단아한 매력의 승무(僧舞) 같았다.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관음도엔 2012년 보행연도교가 생겼다. 이젠 탄성 부르는 그 섬의 숲을 관광객 모두가 볼 수 있다.울릉도를 사랑한 시인 김선우(49)는 “섬에 핀 작은 꽃 한 송이, 조그만 풀잎 하나까지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했던가? 그래서 2박3일을 예정하고 떠났던 울릉 여행이 1개월이 돼버렸다던가? 울릉도의 풍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김 시인의 심정이 이해되고도 남았다.100만 달러짜리 풍경을 시시각각 보여주던 버스는 두루봉과 석포 일출전망대를 스치듯 지나 천부항에 닿았다. 40분 남짓 아름다운 자연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느낌이었다. 그 감흥을 안고 일단 차에서 내렸다.안개 낀 나리분지가 선물한 평화로운 고요해발 500m쯤에 자리한 나리분지는 겨울철 ‘무섭게 쏟아붓는 눈’으로 유명하다. “그 배경이라면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보다 더 근사한 영화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진담 같은 농담 혹은, 농담 같은 진담이 떠도는 곳.나리분지로 가기 위해선 천부항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출발까지는 시간이 30여 분 남았다. 6m 깊이의 바다를 바로 앞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해중전망대는 돌아 나올 때 가기로 했다. 대신 천부항 방파제 부근을 짧게 산책했다.인적이 드문 섬의 해변. 여행자를 반기는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소금기 묻은 바람이 애인의 손길처럼 머리칼을 매만져주는 나른한 오후.그 분위기에선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 한 자락이 참으로 잘 어울릴 듯해 스마트폰으로 ‘하늘 가는 길’을 플레이시켰다. 때론 혼자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이 삶의 깊은 상처를 치료해주기도 한다. 그건 여행의 힘이기도 하다.나리분지행 버스에 오르자 눈 깜짝할 사이에 차창 밖 배경이 푸른색에서 향기로운 초록색으로 변했다. 울울창창 울릉도의 나무들 속엔 신령함이 깃들어 신선들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도동항-천부항 구간과 마찬가지로 천부항-나리분지 구간도 최고의 버스 여행 코스였다. 오르막길을 달려온 버스가 내리막으로 접어들자 나리분지가 나타났다. ‘울릉도의 유일한 평지’로 불리는 나리분지는 동서와 남북이 약 2km 남짓. 작은 땅이다. 그러나 그 곳의 사람살이까지 작을 수는 없다.혹독한 자연조건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지혜롭게 극복한 울릉도 사람들의 ‘건축 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너와집과 투막집을 둘러봤다. 말 그대로 ‘투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가옥들.기자가 도착한 날은 옅은 안개가 나리분지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면 어디선가 밀려온 꽃향기가 몸 안으로 번져들었다. 주홍빛 열매를 매단 나무들이 예뻤다. 가끔씩 새가 울었고, 더 가끔 동네 사람들이 키우는 개가 울었다.고요하고 평화로웠고, 평화롭고 고요했다. 아스팔트와 네온사인이 점령군으로 행세하는 도시의 소음 속에서 살아온 기자는 나리분지의 고요와 평화가 진심이 담긴 울릉도의 선물로 느껴졌다.울릉도 서쪽을 굽이굽이 돌아 다시 도동항으로울릉도 버스 일주가 서장과 중장을 지나 종장으로 접어들었다.나리분지에서 천부항으로 돌아와 섬의 북쪽과 서쪽을 시원스레 내달리는 버스에 올랐다. 멀리 보이는 코끼리바위와 현포항을 지나 남서 일몰전망대까지의 풍경이 어떠했는가를 설명하려면 입 아프다. 당연지사 짐작했겠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다.통구미 몽돌해변에 잠시 내려 느린 걸음으로 주위를 배회했다. 목적이나 이유를 잠시 내려두고 근사한 자연을 벗 삼아 ‘어슬렁거린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우리는 너나없이 너무나 ‘목표 지향적’으로만 살아오지 않았던가. 답답하고 갑갑하게도. 통구미 마을엔 사람들을 보호해준다는 9마리의 거북이가 있다. 아니, 거북이 형상의 바위가 있다. 보는 위치에 따라 거북의 마리 수가 달라진다는 게 흥미롭다. 마을 절벽엔 향나무 수백 수천 그루가 좋은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다. 천연 향수였다.통구미 해변에서 도동항까지는 금방이다. 차로 10~20분. 울릉신항과 울릉예술·문화체험장을 뒤로 하고 사동항을 지난 버스가 여행의 출발지였던 도동항에 기자를 내려놓았다.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를 방불했던 ‘버스 타고 울릉도 일주’가 끝났다.천부항에서 점심으로 먹은 국수 값까지를 포함해 1만 원 가량의 작은 돈으로 ‘해보기 힘든 방식의 여행’을 마무리한 것이다. 기분이 어땠냐고? 부연할 것 없이 “좋았다”.울릉도 곳곳엔 숨겨진 매혹의 장소가 적지 않다. 행남 해안산책로, 독도박물관, 울릉자생식물원, 대풍감 해안절벽,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엔 ‘우리 섬’ 독도까지 있다. 1박2일의 짤막한 울릉 여행은 아쉽고 싱겁다. 시간과 돈을 투자해 일주일쯤 그 섬에 머물러보길 진심으로 권한다.랭보는 삶을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라고 규정했다. 시인의 세계 인식이라 그런지 지나치게 어둡고 비극적이다. 설마 인간의 생이 ‘지옥에서의 시간’만으로 구성됐겠는가. 폐일언. 울릉도 여행은 기자에게 ‘천국에서 보낸 3일’이었다. /홍성식·김두한기자

2019-11-27

산마늘 중 오직 울릉도산만 ‘명이’로 부른다

울릉도서 나고 자라 최고일 수밖에 없는 특산 5종가장 널리 알려진 울릉도 특산 나물. 다른 이름은 ‘산마늘’이다. 이파리가 마늘잎과 닮았지만, 마늘잎보다 넓고 크다. 마늘 향이 강하다. 생나물로 쌈을 싸거나 양념에 찍어 먹는다. 장아찌로 널리 먹는다.간장 절임 명이나물은, 울릉도 관광객을 통하여 외부로 전해졌다. 돼지 삼겹살이나 한우 기름진 부위와 궁합이 좋다. 기름기로 텁텁해진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한다.한때는 ‘명이 이파리 하나가 5백 원, 1천 원’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명이나물 리필은 없다’ ‘명이나물 리필은 추가 요금’이라는 흉흉한(?) 이야기도 있었다. 중국산이 흔해지면서, 울릉도 특산 명이나물 가격도 안정되고 있다. 중국산과는 맛, 향이 전혀 다르다.산마늘 중 울릉도 산만 ‘명이나물’이라 부른다. ‘오대산 산마늘’도 있다. 오대산 산마늘은 비슷하지만 덜 달고, 맵다. 중국산은 대가 짧고 이파리만 있는 경우가 많다.‘부지갱이나물’로도 부른다.‘부지깽이나물’이 표준어(문화어)다. 약명으로는 ‘당개(糖芥)’. 부지깽이나물은 두 종류다. 섬쑥부쟁이와 갯쑥부쟁이. 부지깽이나물은 섬쑥부쟁이다. 울릉도에 널리 자생하는, 특산이다. 갯쑥부쟁이도 해안가에서 자란다. ‘갯=갯가’다.울릉도에서는 사계절 자라니 늘 채취한다. 주로 이른 봄에 많이 채취한다. 생나물로 먹는 것보다 데쳐서 간장, 소금을 넣고 향을 살리는 편이 낫다. 국화과의 다년생 식물이다. 향이 억척스럽게 강하지 않고, 은은하다.약재로도 사용하지만, 울릉도에서는 오래전부터 식용했다. ‘부지깽이나물 솥밥’, 나물무침으로 조리한다. 튀김 혹은 각종 찌개의 부재료로도 좋다.‘눈개승마’ ‘능개승마’로 널리 알려졌다. 울릉도 특산. 묘목, 뿌리가 외부로 유출되면서 내륙 산지에서도 재배한다. ‘삼’나물은, 이파리가 마치 인삼 잎 같이 생겨서 붙인 이름이다.‘눈개승마’는 ‘누운 개승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개승마는 미나리아재빗과의 식물이다. 눈개승마는, 성장 과정에서 ‘누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누운 개승마’라는 표현은 어찌 어색하다.울릉도 삼나물, 눈개승마는 초본이다. 이른 봄, 울릉도 여기저기서 자생하는 것을 채취한다.지금은 울릉도와 내륙에서 재배한다. 시중에 나도는 것들은 대부분 재배한 것이다. 어린싹, 줄기를 나물로 먹는다. 갓 돋은 싹은 마치 두릅 같다.맛은 특이하다.“오래 씹으면 고기 냄새가 난다” “쌉싸래하면서 맛이 눅진하다”고 표현한다. 나물치고는 특이한 맛. 생나물이나 샐러드로 먹는다. 묵나물은 육개장 등에 넣는다.전호(前胡)나물은 애틋하다. 식물은, 대부분 이른 봄에 싹을 틔운다. 전호나물은 정반대다. 다른 식물들이 잎을 거두는 10월께 싹을 틔운다. 거꾸로다. 겨우내, 눈과 비, 바람을 겪으며 싹과 잎을 지킨다. 2월이면 몸체를 키운다. 다른 식물들이 싹도 제대로 틔우지 않았을 때다. 2월 초, 중순이면 먹을 정도 크기로 자란다. 2월 중순쯤이면 서울 등의 대도시 소비자들이 구할 수 있다. 미리 주문했다가 택배로 받는 이들도 있다. 겨우내 추운 울릉도의 눈, 바람을 겪으며 싹을 지켜낸 정성이 놀랍고 애틋하다. 전호나물은 ‘봄의 전령사’다. 미나릿과에 달린 여러해살이풀이다. 겉모양이 미나리 혹은 당근 잎사귀 같다. 미나리보다는 잎사귀가 작고 여리다.쌉싸래한 향이 독특하다. 날채소로 먹는 이들도 있지만, 슬쩍 데친 후 무쳐서 먹기도 한다. ‘전호나물 전’ ‘전호나물 생채 비빔밥’도 향이 아주 좋다.오징어가 ‘난리’다. 씨가 말랐다. 1만 t 수준으로 잡히던 오징어가 몇백 t으로 줄었다. 오징어잡이 배들이 아예 출항하지 못한다. 오징어는 귀하다. ‘20마리 한 축’이 다섯 마리, 세 마리 묶음으로 줄었다.우리는 오랫동안 오징어를 먹었다. 조선 시대 기록에는, ‘烏賊魚(오적어)’ 혹은 ‘烏魚(오어)’다. 오징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 바로 오적어다. ‘오(烏)’는 까마귀다. 오징어가 물 위에 마치 죽은 듯이 떠 있다가, 까마귀가 다가오면 잽싸게 낚아채서 물속으로 들어간다. 오적어라고 부르는 이유, 라고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진 않다. 오징어의 먹물이 마치 까마귀처럼 검어서 생긴 이름이라는 설명이 적절하다.오징어는 많이 잡히는 생선이었다. 대도시에서는 뜨거운 물에 튀긴, ‘오징어 숙회’를 먹었다. 최근까지도 싱싱한 오징어를 통째로 쪄서 먹는 ‘오징어통찜’이 유행했다. 오징어가 귀해지면서, 오징어통찜은 귀한 음식이 되었다.오징어가 사라진 것은 ‘중국 배의 약탈적인 조업’ 때문이다. 지역 정치인들까지 나서서 ‘정부의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 해역이다. ‘중국-북한’ 간 북한 해역 어업권 거래가 있었다. 중국 배들이 회류(回流) 하는 오징어를 ‘길목’에서 마구 잡고 있다. 미처 자라지도 않은 것들이다. 남획으로 씨가 말랐다.싱싱한 오징어는 회, 회무침, 통찜으로 먹는다. 반쯤 말린 ‘피데기’는 찌거나 구워서 먹는다. 마른오징어와 땅콩은, 한때, 맥주 안주의 대명사였다.중국도 오래전부터 오징어를 먹었다. 조선 사절단들은 마른오징어를 공물로 챙겼다. 중국은 자체 생산되지 않던 오징어를 조선을 통해서 구했다. 이제 중국은 ‘약탈’로 오징어를 구한다. 대신 울릉도에는 오징어가 사라졌다.제대로 맛보는 별미집 4곳따개비, 홍합, 오징어를 이용한 여러 가지 음식이 가능하다. 약초해장국은 특이한 메뉴.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여러 약초, 산나물 등을 넣고 끓였다.오징어내장탕이 아주 좋다. 무나 콩나물 등을 넣고 끓이면 국물이 상당히 시원하다. 내장은 맑고 고소한 맛을 낸다.저동항 부근에 있다. 업력이 길다. 민간에서 널리 먹었던 오징어내장탕을 식당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인, ‘원조’다. 한우 암소도 취급한다. 따개비솥밥이나 홍합솥밥 등은 주문받은 후 준비한다. 20~3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울릉도 앞바다에서 잡은 해산물을 맛보려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집. 울릉도에서는 외진 곳인 사동항 부근에 있다. 오징어, 꽁치 등 물회가 유명한 집이다. 주인이 전문적인, 프로 다이버다. 직접 잡은 해산물 위주로 음식을 만든다. ‘해계탕’은 특이한 음식이다.‘해’는 바다, ‘계’는 닭이다. 닭을 아래에 두고, 전복, 문어, 각종 새우, 홍합, 뿔소라 등 여러 종류의 조개류를 얹거나 깔았다. 네댓 명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음식 모양은 ‘쇼킹’하다. 해계탕은 반드시 예약이 필요하다.다녀온 사람마다 ‘정애식당’ ‘정애칼국수’ ‘정애분식’ 등으로 다르게 부른다. 가게 입구에 크게 ‘정애’라고만 써 붙였다. 헛갈릴 만하다.메뉴도 마찬가지. 따개비덮밥(?)부터 따개비칼국수, 꽁치물회, 홍합을 이용한 여러 음식, 오징어 내장탕 등이 두루 가능하다. 마치 ‘분식집 메뉴’ 같다.저동항에 있다. 배를 타고 뭍으로 나오기 직전에 찾는 관광객들이 많다. 명이나물을 비롯한 밑반찬들이 깔끔하고 좋다. 종류와 양이 모두 넉넉하다. 대부분이 울릉도 특산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다.나리분지에 있다. 울릉도 산나물, 들나물로 만든 비빔밥이 좋다. 비빔밥 나물도 좋지만 곁들여 나오는 반찬들도 울릉도 특산이다. 삼나물, 부지깽이나물, 더덕, 명이나물 등이다. 산채 전도 권할 만하다. 향이 좋다. 씨껍데기 동동주와 곁들이면 아주 좋다.울릉도에서는 보기 드문 평지다. 멀리서 보면 아늑한 분위기고, 가게 안에 들어서면 소박하고도 포근하다. 건물 안팎이 모두 나무다. 가까운 곳에서 울릉도 전통가옥인 억새를 올린 너와집도 볼 수 있다. 제대로 된 울릉도 나물을 맛보려면 꼭 들러야 하는 집이다.

2019-11-27

왕이 왕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다

임오화변(壬午禍變)은 1762년 (영조38) 윤5월, 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백성들은 감히 접근조차 어려운 구중궁궐 안에서 일어났던 일이었지만, 엽기적이고도 비극적인 이 사건은 한양에서 864리 떨어진 경상도 장기현 사람들에게도 마치 곁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해 윤5월 15일 장기로 온 홍지해(洪趾海)와 뒤이어 7월 11일에 온 목애(睦愛)가 바로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사도세자의 비극을 부른 이 사건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얽혀 있겠으나, 가장 대표적인 이유 하나를 꼽으라면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들 수 있다. 신임의리는 1721년(신축년)∼1722년(임인년)에 경종 대신 연잉군을 지지하다가 곤란을 겪었던 노론 측의 의리를 부르는 말이다.역사를 돌이키자면, 숙종이 사망할 무렵인 1700년대의 조선 조정은 세자(경종)를 지지하는 소론과 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으로 나뉘었다. 그때는 소론이 지지하던 세자가 경종 임금에 올랐으나, 경종은 병으로 몸이 약했다. 노론은 그런 경종에게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까지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소론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이 일로 노론의 대표주자인 영의정 김창집 등 수백여 명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이른바 ‘신임옥사’란 것이다.경종이 일찍 죽고 이제 연잉군이 영조임금으로 즉위했다. 영조는 즉위하자말자 그때 자신에게 기울였던 노론들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른바 ‘신임의리’를 지킨 것이다. 덕분에 한동안 노론의 세상이 됐다.하지만 세월이 흘러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혈기왕성한 세자는 노론의 특수한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사도세자는 노론들이 내세우는 신임의리를 나 몰라라 했던 것이다. 당연히 노론과 사도세자 간에는 첨예한 갈등이 생겼다. 이는 아버지 영조의 왕위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까지 왜곡되게 받아들여지면서 그 결말은 비참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것이다.영조에게는 모두 여섯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아들 복이 없었다. 첫째 아들 효장세자는 일찍 병으로 죽었다. 그로부터 7년 뒤, 나이 마흔 둘에야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그가 바로 사도세자이다. 얼마나 애지중지했든지 영조는 이듬해 그 아이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세자는 1744년에 혜경궁 홍씨(헌경왕후)와 혼례를 올리고, 열다섯 살 때부터 대리청정을 하며 정계에 관여했다.조선왕조실록 등에는 사도세자의 악행에 대해 구구절절 기록하고 있다. 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고도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의 손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환관을 죽이고 그 머리를 자신의 부인에게 가져다준 일, 영조의 침방나인이었던 박씨를 건드려 임신시킨 일, 후궁을 살해한 일, 가선이라는 여자를 겁탈하고 궁중에 몰래 들인 일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둘 때 반포한 폐세자반교문에 따르면, 세자에게 살해당한 사람이 백여 명이 넘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데, 정작 영조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이 있기 전까지는 세자가 이렇게까지 패륜아인지 몰랐던 모양이다.잠시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조정에는 영의정 홍봉한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그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로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다. 이 무렵, 조정에는 사도세자를 시기하는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바로 김한구(金漢耉)였다. 김한구는 이제 겨우 열다섯 된 딸을 영조의 계비(정순왕후)로 들여보내면서 실권을 잡으려 했다. 그때 영조의 나이는 예순 다섯이었고, 이미 궁중에는 정순왕후보다 열 살이나 많은 아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김한구는 사도세자 측과는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그는 아들 김귀주(金龜柱)와 함께 외척당인 남당을 만들어서 당시 실세인 북당의 홍봉한과 대립하였다. 이들은 홍봉한을 탄핵하는데 주력해 공홍파(攻洪派)라고 불렸다. 하지만 영조가 오히려 홍봉한 등 척신들을 끼고돌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김한구는 홍계희(洪啓禧),김상로(金尙魯),윤급(尹汲) 등과 힘을 합쳐 홍봉한 세력을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그때 끌어들인 사람이 나경언이다.나경언은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다고 한다. 김한구 등은 1762년 5월 22일 나경언을 시켜 형조를 찾아가 ‘환시(宦侍)들이 반란을 모의한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반란사건은 사안이 엄중하므로 임금을 직접 대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영조가 친국을 하자 나경언은 갑자기 옷소매에서 미리 준비해둔 고변서 한 장을 꺼내 바쳤다. 그 고변서에는 “세자가 일찍이 궁녀를 살해하고, 여승을 궁중에 들여 풍기를 문란시키고,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안도에 몰래 나갔으며, 북성에 멋대로 나가 돌아다녔다”라는 등 세자의 비행 10여 조가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 나경언은 ‘동궁을 무함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고 자백을 하였다.충격을 받은 영조는 탕제(湯劑)와 정무(政務)를 거부하며, 세자에 대한 실망과 신하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엉겁결에 영조 앞에 불려나온 세자는 창경궁 시민당(時敏堂)에서 20일 넘도록 대명(待命)하며 석고대죄해야 했다.억울함을 느낀 사도세자는 나경언과의 대질을 요구하였으나, 영조는 이마저도 거부했다. 이후 세자의 비행 문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을 내렸다. 세자가 자결하지 않고 버티자 결국 영조는 1762년 윤5월 13일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뒤주 속에 가뒀다. 속에 갇혔던 세자는 8일 만에 굶어죽었다. 이때 사도세자의 비행과 임오화변이 있었던 그날의 상황 등은 훗날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저술하는 배경이 되었다.그런데, 이 사건을 세밀히 따져보면 의심이 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나경언의 신분부터 보자. 남의 집 하인에 불과했는데, 일개 하인이 목숨을 걸고 일국의 세자를 고발해야할만한 동기가 있었을까? 심지어 나경언은 자신이 갖다 바친 고변서의 내용도 숙지하지 못했다. 그 배후가 의심되는 것이다. 실제로 사건 당일 판의금부사 한익모(韓翼謩)는 나경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이를 사주한 배후를 철저히 가려야한다고 주청했으나, 영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파직시켰다. 홍문관 관리들도 들고 나섰다. 바로 김종정(金鍾正)·박사해(朴師海)·남현로(南玄老)·홍지해(洪趾海)·이득배(李得培)가 그들이다. 이들은 윤5월 6일, 나경언을 빨리 역모죄로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영조는 크게 노하였다. 이 상소를 받아 준 승지 및 관리들의 파직을 명하고, 접수한 상소들을 모두 되돌려주게 하였다. 이튿날까지 영조는 분이 안 풀렸던지 상소를 올린 자들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영남 바닷가(沿海)로 정배하라는 명을 내렸다.이에 따라 응교(應敎) 김종정은 청하현, 교리(校理) 박사해는 장기현, 교리(校理) 홍지해는 동래부로 귀양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날 다시 남현노(南玄老)와 김종정, 홍지해와 박사해의 배소를 서로 바꾸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홍지해가 윤5월 14일 경상도 장기로 오고, 박사해는 동래부로 귀양을 가게 된다. 영조는 이어서 세자의 비행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알리지 않은 신하들을 문책하였다.영조의 이런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의 상소는 이어졌다. 홍낙순(洪樂純)과 남태제(南泰齊) 등이 나서서 ‘나경언은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 이라는 주장을 계속해서 올리자 영조의 마음도 이제는 돌아섰다. 그해 윤5월 22일, 영조는 ‘나경언의 행동이 가상하지만, 형조에 거짓으로 반란이 있다고 신고하여 임금을 놀라게 한 죄가 있다’는 이유로 결국 그를 참수하기에 이른다.이 사건으로 또 한사람이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는데, 여자였다. 바로 1762년 (영조38) 7월 11일 목중도(睦重道)의 나이어린 손녀 목애가 연좌되어 장기로 온 것이다.춘천에 살고 있던 조재호(趙載浩)는 사도세자를 구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왔다. 조재호는 효순왕후(영조의 장남으로 일찍 죽은 효장세자의 비) 조씨의 오빠였다. 조재호는 과거에 급제한지 불과 10년 만에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1759년 돈녕부영사로 있으면서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의 책립을 반대한 죄로 임천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 춘천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사도세자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구하기 위해 뜻을 같이한 목중도 등과 함께 한양으로 왔지만, 모두 역모죄로 몰렸다. 이들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졸지에 할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장기로 온 목애는 34년간 이곳에서 관노(官奴)로 있다가 1796년(정조 20) 1월 11일에야 유배가 풀려 자유의 몸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장기현 관아에서 썩힌 후였다.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곧바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줬다. 그리고 아버지의 불명예스런 죽음으로 세손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조치도 강구했다. 그 한 가지 방법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을 영조의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영조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천륜(天倫)보다도 세손이 왕(정조)이 되었을 때 겪어야 할 다음의 정치적 상황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하지만, 1777년 재위한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시호를 올렸다. 이후에도 사도세자를 추존해달라는 상소가 계속되었다. 이때 조선 최초로 ‘만인소’란 게 나왔다. 영남 유생 1만 57인이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위해 연명 상소를 한 것이다.노론은 둘로 갈라져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파와 그렇지 않은 벽파로 나뉘었다. 두 당파는 정조의 탕평책으로 붕당 간의 싸움이 약간은 완화되었지만,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1801)하자, 권력은 다시 노론 벽파에게 넘어갔다. 특히 노론 중에서도 왕실의 외척들 손에 조정이 좌지우지되면서 조선사회는 다시 앞이 보이지 않는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향토사학자 이상준

2019-11-26

경북 바닷길, 내 한 생애를 사로잡은 빛과 색 온도

빛은 차갑고 공기는 깨질 듯 투명하다. 우듬지 끝에서 쇠잔한 촛불처럼 마른 잎사귀가 흔들린다. 나는 지금 창문으로 서울의 쓸쓸한 겨울 오후를 바라보고 있다. 방 안에는 클라라 주미 강이 연주한 마스네의 오페라 ‘타이스의 명상곡’이 흐르고, 오른손에는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 원두를 갈아서 내린 커피가 들려 있다. 음악도, 커피도, 책상 위에서 빛과 향기로 타는 향초도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걸 다 잃어버린 기분에 잠겨 있다. 아라파호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불렀는데, 어째서 내겐 텅 빈 공허와 부재만 남은 걸까. 축제가 끝난 무대 위에 포스터와 팸플릿이 떨어져 나뒹구는 것처럼, 내 마음에는 지금 낙엽들이 스산하게 일어섰다가 넘어지는 중이다.환청처럼,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지난여름 포항 보경사로 가는 길, 내 귀에 푸른 잎사귀의 방울종을 잔뜩 매달아주던 내연산 매미울음이다. 추억의 주파수를 돌려 본다. 또 다른 환청일까. 아니다. 내 기억에서 들려오는 영덕 고래불의 파도 소리다. 울진 덕구계곡 용소폭포 소리도 들린다. 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의 에밀레 소리가 무수한 금빛 동심원을 그리며 내 마음에 나선형 통로를 열고 있다. 그 안에서 빛과 소리와 냄새가 한 데 섞여 흘러나온다. 수평선이 훔쳐간 천국의 푸른 빛, 박달대게 찌는 냄새, 세상 그 어떤 술보다 아찔하게 달큼한 아까시 향기, 동궁과 월지에 쏟아지던 여자아이들 웃음소리, 울릉 도동의 아침놀, 문무대왕 수중릉을 향해 흔들어대던 무당의 방울소리…… 봄부터 가을까지 내가 다녀간 경북 바닷길의 풍경이다.비로소 마음의 겨울에도 햇볕이 든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여행은 일종의 정신 치료제이다. 그것은 일상생활 속에 갇혀 자신이 얼마나 노예가 되어 있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고 있던 자에게 갑자기 그가 그 속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그래서 한편으로는 두렵고, 한편으로는 즐겁다. 자신의 달팽이집을 떠난다는 점에서는 두렵고,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는 점에서는 즐겁다”고 말했다. 경북 바닷길을 걸으며 나는 정말로 병들고 쇠약해진 내면이 건강하게 회복되는 걸 경험했다. 그래서일까. 긴 여행을 마친 후 허전함을 못 견뎌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다시 비좁은 달팽이집으로 돌아와 숨 막히는 일상에 멱살 잡히는 동안 경북 바닷길은 옛 일처럼 까마득히 멀어졌다. 그러나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낯선 감각들이 눈코입 그리고 귀에 아직 남아 있어, 눈을 감으면 나는 여전히 푸르디푸른 길 위에 서 있다.이제 나는 저 금빛 기억의 나선형 통로로 딱 한 번만 더 들어가 보려 한다. 지나온 걸음들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 글이 경북 바닷길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의 근사한 마지막 페이지가 되길 바랄 뿐이다.경북 바닷길은 발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귀로, 그리고 코와 입으로 여행해야 한다. 7번국도를 따라 울진에서 영덕으로 이어지는 ‘블루로드’, 포항 호미곶에서 구룡포까지 연결된 해파랑길 14코스, 포항 장기에서 감포로 가는 해안도로에서는 오직 두 눈을 바다에 띄워야 한다. 울릉도 행남바닷길과 태하해안산책로를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가장 순전한 푸른색이 경북 동해에 넘실거린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 쪽빛 파도를 훔친 두 눈이 푸른 수의(囚衣)를 입은 채 포승줄이 된 수평선에 꽁꽁 묶여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끔씩은 눈을 돌려 울진 불영계곡의 금강송을, 영덕 칠보산의 단풍을, 포항 보경사의 탱자나무를, 경주 황리단길의 야경을 보아야만 한다.고래불로 세차게 달려오는 파도 떼의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라. 밤에 월송정에 오르면 달빛에서도 반짝반짝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구룡포 삼정리 선창가 노을 아래를 걷다가 줄에 걸린 과메기들이 생나무 타는 소리로 몸 부딪칠 때 놀라지 말라. 울릉도 북서쪽 대풍감 절벽에서는 하늘도 바람도 머리를 풀어헤치고 운다. 경주의 아무 고택에서나 하룻밤을 자고 나면 천 년을 날아온 새떼들이 귓가에 금가루 은가루를 물어다 나르는 신비한 소리를 듣게 되리라.늦봄에 걸으면 황홀하게 엎질러진 아까시 향기에 정신을 못 차리고, 여름에 걸으면 햇살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연필심 냄새에 마음 여백마다 정념의 문장들이 쓰일 것이다. 가을에는 한 그루 소나무에서도 만 그루 금강송 군락의 서늘한 솔향이 나고, 겨울에는 대게 찌는 냄새가 마음속으로까지 짭조름하게 스며든다. 경주에 가서 황남빵이 노릇노릇 익어 가는 냄새를 맡아봐야 한다. 포항 죽도시장에서 돼지머리 삶는 냄새를 들이켜 봐야 한다. 울릉도 향나무들의 살 내음과 영덕 괴시마을 돌담에 내려앉은 조각구름 냄새를 들숨에 삼켜 봐야 한다.봄에는 도다리쑥국을 먹어야 한다. 바다의 못생긴 것과 땅의 못생긴 것이 몸을 합쳐 한 그릇의 아름다운 봄으로 오는 것을 떠먹으면 눈물이 난다. 여름에는 물회를 먹어야 한다. 경북 동해의 여름 더위는 물회 없이는 견뎌낼 수 없다. 사랑하는 이와 마주앉아 먹으면 달콤한 것은 여름의 낭만이고 새콤한 것은 사랑의 기쁨이 된다. 가을에는 문어를 삶아 먹어야 한다. 통통한 문어 다리가 옅은 단풍빛으로 물들면 제대로 삶아진 것이다. 쫄깃쫄깃한 문어숙회를 씹을 때 근심 걱정도 함께 씹으면 좋다. 겨울에는 박달대게와 홍게, 과메기 그리고 볼락을 먹어야 한다.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라면 한 상에다 대게부터 볼락까지 다 올려놓고 만찬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밤이면 달의 꼬리가 희미해질 때까지 술잔이 돌기 쉬우므로, 아침에는 반드시 물곰탕이나 복국으로 속을 풀어야 한다.경북 바닷길 여행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울진은 여전히 교통 여건이 불리하다. 교통 여건이 점차 개선될 때 지역 관광 자원에 대한 홍보도 더 적극적으로 이뤄졌으면 좋겠다. 영덕은 대게와 회 말고도 다른 먹거리들이 많이 개발되어야 한다. 관광객들에게 선택의 다양성을 제공해줘야 한다. 강구항을 비롯해 이곳저곳 너무 많이 설치되어 미관을 해치는 대게 조형물들은 정리를 좀 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울릉도는 딱 하나, 비싼 물가가 문제다. 육지와 멀리 떨어진 지리적 제한이 있다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여행지라는 오해만큼은 확실히 벗어야 한다. 포항은 여러 관광 인프라가 잘 마련되어 있지만, 1인 여행객들이 이용하기 편한 게스트하우스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트렌드에 맞는 숙박시설이 생겨나길 희망해본다. 경주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우려된다. ‘황리단길’이 있는 황남동에는 지금 이 시간에도 새로운 한옥 건물이 지어지고 있는데, 겉의 형식만 한옥이고 전통일 뿐 그 속은 획일적인 유행문화로 채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주라는 도시의 특별한 매력은 오래된 가치를 지켜나갈 때 함께 보존되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지적들은 다 너무 사랑하기에 생겨나는 집착의 산물이다. 괜한 노파심이 빚어낸 볼멘소리일 뿐이다. 봄부터 겨울까지 내가 걸었던 경북 바닷길 537km는 내 한 생애를 사로잡은 빛과 색 그리고 온도가 되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내가 모르는 곳에서 저 동해는 한없이 아름답다. 지금 이 순간에도.“나는 그때 눈물 어린 눈자위로 큰 불빛을 쳐다보며 소리쳤었던 것이다ㅡ‘안녕’이라고. 사실 이 엄청난 불빛의 대화 앞에서 내가 자신 있게 뱉어낼 수 있었던 유일한 단어는 해후를 알리는 ‘안녕’ 이외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 아닌가. 그래 나는 한없이 부르짖고 있었다ㅡ‘안녕 안녕’이라고.” 다시 김현의 글(‘불빛이 말하는 이유’)을 인용하는 것은 이제 나도 저 푸른 바닷길을 향해 안녕, 안녕이라고 인사해야 할 때가 됐기 때문이다. 삶은 우연들로 이뤄진 필연이다. 바닷길에서 스쳐간 수많은 햇빛과 바람과 파도와 사람들이 나에겐 영원의 풍경이 되었다. 경북 바닷길 위에서 세상은 한없이 아름다웠고, 나는 그 아름다움에 미쳐 몇 개의 계절을 환각처럼 고통 모르고 살았다. 다시 만날 그때까지 안녕, 안녕. /시인 이병철끝

2019-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