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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사방이 만산홍엽(滿山紅葉)… 이 좋은 계절을 어찌하나

몇 해 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여행했을 때다. 키가 기자의 허리에나 미칠 정도인 5~6세 꼬마가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안장도 얹지 않은 말에 용감하게 올라 바람처럼 내달리는 아이의 해맑고도 진지한 표정이 오랜 시간 동안 잊히지 않았다. 덩치가 2배나 큰 유럽 병사들이 원나라(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족의 왕국) 기병에게 쩔쩔맸다는 건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때부터였다. 말을 타보고 싶었다.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승마(乘馬)는 한국에선 ‘귀족 스포츠’로 인식돼 있다.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말에 올라 시원스레 달려볼 수 있을까?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기회가 왔다. 김천승마장에서 짧은 ‘승마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은 것.볕이 좋았던 지난주 화요일. 김천시 남면 봉천리에 자리한 김천승마장을 찾았다. 단단하고 균형 잡힌 체형을 가진 승마 체험 조교가 반겨줬다. 안전을 지켜줄 헬멧을 쓰는 등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말 앞에 섰다. 심장이 두근거렸다.말은 외형부터가 근사한 동물이다. 근육질의 다리와 늘씬한 등과 배, 거기에 사심(邪心) 한 점 없어 보이는 순정한 눈망울이 멋졌다.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출장 갔을 때 마차는 타본 적이 있다. 그걸 끄는 말은 흰색 털에 갈색 점이 드문드문 박힌 ‘잘 빠진’ 준마였다. 김천승마장에서 기자와 만난 말 역시 ‘잘 생긴’ 녀석이었다. 등과 배는 희고 얼굴은 초콜릿빛 적갈색.마차의 좌석이 아닌 말의 등에 오르는 순간, 오추마(烏9A05馬)를 타고 하루에 1천 리를 내달리던 ‘초한지’의 항우가 된 듯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두려움이 함께 엄습했다. 올라탄 말의 등이 예상 밖으로 꽤 높았던 것. 조교가 “지상에서부터 170cm 정도”라고 미리 설명했지만, 내려다본 체감 높이는 3m가 넘어 보였다. 하지만 곧 안정감이 찾아왔다. 기자를 태운 말은 점잖고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둥글게 디자인된 실내의 흙길을 여러 바퀴 돌았다. 90kg에 육박하는 작지 않은 남성을 태우고도 거친 숨소리 하나 없이. 말은 의연하고 강한 짐승이었다.김천승마장은 주로 아동들을 위한 ‘승마 교육’을 진행한다. 유치원이나 놀이방 등에서 단체로 승마장을 찾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기자처럼 ‘꼭 한 번 말을 타보고 싶은 성인’도 사전에 예약하면 간단한 승마 체험이 가능하다.말은 3세 아이 정도의 지능을 가졌다. 그렇기에 목덜미를 쓰다듬어 칭찬해주는 걸 좋아한다. 반대로 말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건 금물이다.“말에게 다가갈 때는 반드시 앞쪽에서 서서히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한 조교는 “사람이 지나치게 떨면 말 역시 두려워하니 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김천승마장 체험 예약: 054-433-8773벚꽃이 하늘과 땅을 환하게 밝히던 지난해 봄. 직지사를 다녀온 이모가 말했다.“칠십 평생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은 처음 봤다”고.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모, 가을날 직지사는 더 좋던데요.”만산홍엽(滿山紅葉)이 가을이 완연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에도 곧 단풍이 절정을 이룰 것이다.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봤을 ‘고색창연한 고찰(古刹)’. 직지사를 찾은 날은 평일이었음에도 방문객이 적지 않았다. 멀리서 본 절은 노랗고 붉은 나뭇잎을 배경으로 한 동양화 같았고, 가까이 다가서니 대웅전 처마 너머로 펼쳐진 푸른 하늘이 일상의 스트레스로 막힌 가슴을 뻥 뚫어 주었다.신라 19대 눌지왕 시절인 418년에 묵호자(墨胡子)가 도리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알려진 직지사는 고려 태조가 중건한 절로도 유명하다. 사찰 안에는 대웅전 앞 삼층석탑과 비로전 앞 삼층석탑, 석조약사여래좌상과 대웅전 삼존불 탱화 등 보물이 가득하다. 때론 아이들만이 아닌 성인들에게도 ‘보물찾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선물처럼 다가온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은 또 있다. 김천시 지례면 부항댐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물빛이 그저 그만이다. 댐 인근을 산책하다보면 ‘자연이 그려낸 그림’은 어떤 빼어난 화가도 흉내 낼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부항댐 주변엔 레인보우 스카이워크와 짚와이어도 설치돼 있어 보다 ‘역동적인 여행’을 원하는 이들의 요구도 충족시켜 준다는 것이 김천시의 설명이다. 주말이면 김천부항댐물문화관을 찾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도 많다고 한다.오묘한 하늘 색깔로 1천 년 변함이 없는 고려시대의 청자. 몇 세기 전부터 유럽의 왕가와 귀족 가문에서 사용해온 언필칭 ‘명품 식기’….고귀한 것의 생명은 세월을 뛰어넘는다. 우리는 그걸 일컬어 귀물(貴物)이라고 한다. 세상에 드물게 존재하기에 얻기 어려운 물건. 김천시 대항면 ‘세계도자기박물관’엔 귀물이 가득했다. 고려의 청자와 조선시대 진품 백자는 물론이고, 여기에 덴마크, 프랑스, 헝가리, 이탈리아, 영국의 도자기들이 미려한 자태를 뽐내며 박물관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박물관의 입장료는 단돈 1천 원. 동서양의 진품·명품 도자기를 한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는 가격치곤 매우 저렴하다. 이윤에 앞서 도시의 홍보를 중요시하는 김천시가 운영하기에 가능한 일이다.박물관 안 도자기들의 전체 가격을 궁금해 하는 기자에게 입구를 지키는 직원은 “모르긴 몰라도 당신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라며 웃었다. 전시된 도자기 중에는 최소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작품’도 있기에 요즘 젊은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가격 대비 만족감’이 높다고 할 수 있다.유럽 귀족 가문의 저녁 식탁을 재현해놓은 테이블이 흥미롭다. 거긴 온통 크리스털 식기로 반짝인다. 우리 도자기 30여 점과 유럽 도자기 500여 점, 크리스털과 유리로 만든 식기와 술잔 510여 점이 전시된 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 전통자기를 그윽한 눈길로 살피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부터 그릇과 찻잔에 새겨진 문양만 봐도 “이건 어느 나라 어느 회사가 만든 제품이야”라고 단박에 알아내는 식기애호가 주부들까지 흥미로워할 공간이다.◇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gimcheon.go.kr/mini/museum10살 안팎의 한국 아이들은 ‘기차’라고 하면 시속 300㎞에 가까운 속도로 번개처럼 달리는 KTX만을 떠올릴 게 분명하다. 자신들의 부모가 청년이던 시절엔 ‘비둘기호’ 혹은, ‘통일호’라 이름 붙인 시속 50㎞ 내외의 느린 기차를 타고 피크닉을 다녔다는 건 분명 모를 터.기차는 낭만을 부르는 교통수단이었다. 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운행을 멈춘 ‘옛날 기차’를 카페로 꾸민 공간이 김천의 ‘독특한 여행지’가 됐다. 지금은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은 대항면 직지사역에 들어선 열차카페 ‘옛길’. 이곳에선 커피와 주스 등 마실 거리와 돈가스 등의 간단한 경양식을 판매한다. 폐차된 새마을호 열차 내부를 아기자기하게 찻집으로 꾸민 손길이 돋보인다.실내는 아늑하고, 흘러나오는 음악도 1970~80년대 유행했던 통기타 곡들이다. 30~40대 부모들이 어린 자녀들과 함께 찾아와 “엄마와 아빠가 서로 좋아할 땐 말이지, 기차를 타고…”라고 시작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맞춤인 공간이다.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회갑을 훨씬 넘긴 할머니들. 주문 받는 것과 서빙이 조금 느리더라도 어머니를 떠올리며 너른 마음으로 웃으며 이해하는 게 좋다. /홍성식·나채복 기자

2019-10-30

직원을 사랑한 사우스웨스트, 탄탄한 조직력 비결 됐다

□ 직원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사우스웨스트설립 초기, 임원인 킹이나 라마 뮤즈 등은 사원용 선술집에 가서 직원들과 격의 없이 맥주를 마시는 일이 흔했다. 일례로 이런 모습을 본 경쟁사 브래니프 조종사들은 놀라서 맥주 잔을 떨어뜨리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특히 킹과 라마 뮤즈는 직원들의 만남을 통해 승객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승객들의 반응을 궁금하게 여겨 물었다고 한다. 킹은 현장에 나가 직원들과 자주 어울리는 것을 중요한 일과로 여겼다고 알려졌다. 한달에 25∼30시간 비행기를 타면서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고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공항 현장을 점검할 기회를 가졌다. 심지어 킹은 1971년에 현장에 나가 최전선에서 뛰는 직원들과 함께하는 날을 제정함으로써 이러한 행동을 하나의 기준으로도 확립했다.사우스웨스트의 창업자 허브 켈러허. 그는 올해 1월 3일(미국 현지시간) 87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했다. /사우스웨스트 제공□ 의사소통이 핵심이다사우스웨스트의 창업 첫해는 매우 어려웠다. 자원은 풍부하지 못했고 이용 승객수도 많지 않았다. 비행기 연료조차 두달씩이나 라마 뮤즈의 개인 신용카드로 구입해야 할 정도였다.지상 장비도 턱없이 부족했고 그나마 있는 것도 낡아서 잘 가동되지 않았다. 때때로 직원들은 아주 낡았거나 버린 장비를 구해다가 대체품으로 사용했다. 한창 브래니프와 사우스웨스트 사이에 치열한 법정공방이 오갈 때여서 갈등이 심했지만, 브래니프 정비공들은 부품이나 도구를 사우스웨스트에게 빌려주기도 했다.어쩌면 불쌍하게 생각했거나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았을 공산도 크다. 업계 기준으로 볼 때 지상 장비가 불충분하고 작업 환경이 열악했지만 사기는 어느 회사 못지 않았다고 한다.열성적이고 직업 윤리가 강한 직원들은 항상 중진들과 격의 없이 의사소통을 했고 ‘재미를 추구하는’기업문화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외인구단이었던 사우스웨스트 직원들사우스웨스트 초창기 직원들은 상당수가 다른 항공사에서 해고된 사람들이었다. 당시 망해버린 퍼듀 항공사 출신이 많았고 군대 출신들도 받아주는 데가 없어 사우스웨스트의 문으로 들어오게 됐다.이런 사람들은 실직이 얼마나 뼈아픈지 잘 알고 있었다.직원들은 남들보다, 다른 경쟁 항공사들보다도 더 잘해내야 한다고 알고 있었고, ‘10분 턴’ 등도 이러한 절박한 마음에서 궁여지책으로 나오게 된 정책이였다고 회상한다.조종사, 승무원, 정비공 등도 틈만 나면 기내로 들어가 좌석을 정리하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수화물을 정리하는 일들을 도왔다고 한다. 그들은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실제로도 정말 해냈다.직원들 사이에서는 그때 금기사항이 2가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못해’와 ‘그건 내 일 아니야’였다. 이러한 생존 전략은 창의적인 정신만 함양시킨 것이 아니라 모든 직원들의 유대 의식을 아주 단단하게 단련시켰다.인터뷰 ▶▶ 빌 콜(BILL COLE) 전 사우스웨스트 기장험난했던 법정 소송과 갖가지 방해 공작에도 사우스웨스트는 살아남았고 오히려 성공했다. 이러한 전설을 남긴 초창기 직원들은 아직도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심이 강하다. 22년 동안 사우스웨스트 항공기를 조종했던, 창립자 중 한 명인 허브 캘러허와 개인적으로도 교류가 있었던 빌 콜 전 기장을 만났다.-본인의 소개를 부탁한다.△이름은 빌콜, 올해로 77세다. 현재는 러브필드 공항 근처에 위치한 항공박물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이곳은 사우스웨스트는 물론이고 지역 투자자들이 합심해 만든 비행역사의 기록보관소 역할을 하고 있다.196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월남전 참전도 한 경력이 있다. 대한민국도 군 복무 당시 임무 수행차 들린 적이 있어 친근하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22년 동안 사우스웨스트에서 기장으로서 일을 했다. 마지막 2년 동안은 조종 훈련 시뮬레이터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성공한 항공사인 사우스웨스트에도 사고사례가 있었는지.△기체 결함 정도는 있어도 큰 사고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무 당시 단 한번 사망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고도 옆의 비행기 펜이 고장나 조각이 날라오면서 우리 비행기 창가 승객 1명이 맞아 사망한 사례가 있었다. 그때 기장과 부기장이 침착하게 대처해 비행기를 급강하시켜 산소마스크를 내려오게 했고 대형 인명피해를 막아냈다. 우리 사우스웨스트는 조종사 훈련이 굉장히 철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비상상황에 대응 방법도 이미 숙지해 항상 승객 안전에 최선을 다한다.-사우스웨스트에 도움을 준 기관, 정부 등이 있다면.△정부는 우리에게 도움을 거의 안줬다. 거의 개인투자자들 중심이었다.새로운 지역항공사도 지자체나 우리의 ‘캘러허’같은 의지가 강한 인물이 나서서 투자자를 모으는게 우선으로 보인다. 사우스웨스트 설립자도 종잣돈을 가지고 개인 투자자들을 모아 시작했다.-사우스웨스트 항공사를 자랑한다면.△최고의 직장이었다. 직원들이 가족 같은 분위기였고, 사우스웨스트를 직장으로 가진 건 축복이었다. 일하면서 은행에 예금도 잘 되있고, 직원들간 소통도 잘돼 서로 잘 뭉쳤다.특히 허브 캘러허는 나에게 있어 영웅이었다. 기존의 리더가 아닌 전혀 색다른 타입의 리더였다. 다른 항공사는 해고를 잘 하는데 사우스웨스트는 정말 큰 이유가 아니면 해고를 안한다.그래서 직원들이 안정감을 느끼고, 흔히 회사가 어려울때 하는 정리해고도 우리 회사는 하지 않는다. 직원들이 실수를 해도 기간을 주고 개선하도록 도와준다.-회사에서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면.△뭐니뭐니 해도 허브 캘러허가 제일 기억이 난다. 직원들을 가족처럼 아끼고 소속감을 느끼도록 항상 배려했다. 한번은 내가 조종사였을 때 공항에 내리면서 마주쳤는데 캘러허가 “조종사, 차가 어딨냐”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직원 주차장에 있다”하니, 캘러허가 “1번 게이트에 내 차가 있으니 같이 가자”라며 운전해줬다. 캘러허는 항상 직원들에게 친근했고 스킨십도 서스럼없이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직원들을 안고 키스하기도 했다.또한 내가 아들과 야구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는데 캘러허가 담배를 입에 물고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와 시구하는 등 그는 정말 자유분방하면서도 그릇이 크게 느껴진 사람이었다.요즘에는 컴퓨터로 하지만 옛날에는 조종사들이 모여 노트에 몇시에 비행기를 타는지 기록하는 ‘파일럿 라운지’가 있었는데 캘러허가 항상 매일 아침 나와 인사하고 ‘우리’라는 개념을 상기시켰다.콜린 법률사무장도 기억에 남는다. 사우스웨스트 조직 문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사우스웨스트 문화조직위원장을 맡기도 했다.어느날 직원들에게 줄 먹을 것을 챙겨온 적이 있는데 직원들과 얘기하다가 “우리 이날을 문화의 날로 만듭시다”라며 즉흥적으로 제안해 실제 기념일이 정해지기도 했다.-포항시를 기반으로 했던 저가항공사가 최근 운항을 중단했다. 항공사를 두고 싶어하는 포항시에 조언을 한다면.△논리적으로 봐도 이용자가 시민들이다. 시민 중 사업하는 사람도 있을텐데 커뮤니티 등 단체를 만들어 ‘우리는 지역항공사를 원한다’라는 슬로건으로 항공사 창립 또는 유치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세계적인 철강업체인 포스코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러한 대기업들의 지원을 받는 것도 좋을 듯하다./황영우기자 hyw@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2019-10-30

선택과 집중&전략적 벤치마킹

구미는 산업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역사와 문화가 넘치는 관광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구미가 가진 산업공단이라는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기 위해 산업관광이라는 전략으로 도시재생을 접목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 근대 산업 유산을 이용한 산업관광에 집중하는 구미시가 지속성을 가진 관광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일까. 관광전문가와 문화콘텐츠 전문가로부터 구미의 지속가능한 관광자원을 위한 방안을 들어봤다.석미란 구미대학교 호텔관광항공서비스학과 교수△석미란 구미대학교 호텔관광항공서비스학과 교수“구미관광,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석미란(51) 구미대 교수는 구미시에는 많은 관광자원들이 있음에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석 교수는 “관광이라는 것은 외지인들이 와서 그 지역에서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관광업계측에서는 ‘3·6·9법칙’이라고 하는데, 이 법칙이 적용이 되려면 관광자원에 임팩트가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3·6·9법칙’이란 관광객이 3시간을 머물면 음료수를 사먹게 되고, 6시간을 머물면 식사를 하고, 9시간을 머물면 잠을 자고 간다는 뜻이다.석 교수는 구미에 흩어져 있는 관광자원들을 이제 큰 테마로 묶어 서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고, 그 중에서 임팩트 있는 자원을 대표성을 가지도록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는 “예를 들어 국악과 관련된 공연과 행사가 구미에서 얼마나 많이 열리는지 구미시민들도 알지 못한다. 동편제가 구미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며 “국악과 관련된 공연과 행사를 특정 기간을 정해 개최 할 수 있다면 그 시너지 효과는 기대 이상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또 “구미시가 이미 만들어 놓은 관광자원들을 잘 활용해야 한다”며 “너무나 좋은 관광자원들이 활용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베이쿠미를 꼽았다. 베이쿠미는 베이커리와 구미의 합성어로, 구미지역 농산물을 알리기 위해 거북 알 모양으로 만든 수제 빵이다. 구미시는 베이쿠미를 구미의 대표 브랜드 식품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아직 홍보 부족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석 교수는 “베이쿠미가 진정으로 구미를 대표하는 빵이 되려면 다른 지자체의 상품처럼 그 지역의 대표 관광지에서 판매가 돼야 한다”며 “외지인들에게 손쉽게 베이쿠미를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만큼 좋은 홍보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관광자원들을 연계하는 네트워크 구축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신라불교초전지마을의 경우 그 마을 자체만으로는 임팩트가 약해 불교라는 큰 맥락에서 다른 관광지와 연계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불교 신도들 말로는 하루에 사찰 세 곳을 방문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를 활용해 초전지마을 인근에 있는 구미의 도리사와 김천 직지사를 연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도리사와 직지사, 신라불교초전지를 연계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제안한 것이다.석 교수는 마지막으로 구미시에 관광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그는 “구미의 지역성을 보여 줄 수 있는 새마을운동테마파크, 박정희 대통령 밥상 등은 아쉬운 점이 많다”면서 “구미는 새마을운동의 종주도시라는 타이틀이 있음에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새마을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에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또 “관광자원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관광산업은 그 지역이 지닌 역사성과 지역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성공할 수 있다”며 “구미시가 지역의 관광자원을 좀 더 유연한 시각으로 바라봤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석미란 교수 약력계명대학교 대학원 관광경영학과를 졸업(경영학박사)하고 현재 구미대학교에서 호텔관광항공서비스학과 학과장을 역임하고 있다. 구미시정책연구위원회 위원, 신라불교초전지 운영위원, 구미시 관광자문협의회 위원, 대한관광경영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 관장△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 관장“구미 관광의 전략과 전술, 벤치마킹에서 찾아야 합니다.”김정학(60) 대구교육박물관 관장은 어떤 일이든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면서 구미시가 추구하는 산업관광의 성공을 위해서는 구미와 비슷한 지역의 벤치마킹이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고향이 구미인 김 관장은 구미문화예술회관 관장을 역임했던 인물로, 구미지역 문화적 특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문화콘텐츠 전문가이다.김 관장은 구미관광의 문제를 박물관 마인드에서 찾길 바랬다.그는 “구미와 가장 비슷한 도시가 개인적으로 미국의 시애틀이라고 생각한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이긴 하지만 세계적인 글로벌 회사들이 그런 작은 도시에 몰려 있다는 것 만으로도 구미시가 시애틀을 벤치마킹 해야할 이유”라며 “구미에도 시애틀과 같은 역사산업박물관이 반드시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다.마이크로소프트, 코스트코, 보잉, UPS, 스타벅스 등 글로벌 기업들의 본사가 있는 시애틀은 미국에서도 가장 성장이 빠른 도시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시애틀의 차별화된 라이프 스타일이 기업의 경쟁력이라고 평가한다. 시애틀의 라이프 스타일과 기업들의 경쟁력을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있는 곳이 바로 시애틀 역사산업박물관(Museum of History Industry, MOHAI, 이하 모하이)이다. 이 곳에서는 19세기 초 작은 도시에서 세계적인 항구도시로 성장하기까지 시애틀의 역사 속 등장하는 세계 유명 회사들의 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김 관장은 “모하이는 단순한 산업유적을 전시한 박물관이 아니다. 시애틀이 어떤 도시인지를 알려주고, 혁신과 상상력의 전통으로 도시의 역사를 이어가고있다는 시애틀의 미래 각오까지 보여준다”면서 “이러한 박물관의 특성은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에 벤치마킹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벤치마킹을 단순히 베끼는 거나 인용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이는 큰 착각이다”며 “벤치마킹을 제대로 하려면 잘 된 곳은 얼마나 잘했는지, 또 잘못된 곳은 왜 망했는지를 세심하게 살피고 분석해야 한다”고 했다.4차산업과 가장 어울이는 관광산업은 융복합상태로 보여져야 하는 만큼 단순논리로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김 관장은 “관광산업에 대한 가장 큰 착각은 빙산의 일각만을 전부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관광산업과 도시재생은 가감승제와 같은 단순 셈법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며 “예외의 경우가 많은 관광산업과 도시재생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국내에선 아파트 공사를 하다 유적지가 나오면 공사를 중단하지만, 일본 오사카의 경우는 달랐다”며 “그 유적지를 그대로 보존하고 그 위에 강화유리를 덮고 양측 기둥을 세워 1, 2층은 비워두고 3층부터 사람들이 살도록 해 유적관광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이어 “이런 사례를 말로만 들어서는 접목할 수 없다”며 “직접 눈으로 보고 담당자를 만나 유적지 활용방법, 네트워크 활용방법 등을 배워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또 구미시 원평동 도시재생과 관련해 일본 오이타현 분고타카다를 벤치마킹 해 볼 것을 제안했다. 이 곳은 일본에서 ‘옛 정취가 그리울 때 꼭 한번 가봐야 할 마을’로 알려져 있다. 마을 전체를 박물관으로 만들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곳의 가장 큰 특징은 이 마을이 어떤 곳이었는지 알게 한 뒤 돌아 볼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국내에선 서울과 전북 진안군이 마을박물관을 시도하고 있다.김 관장은 “구미시도 관광을 위한 전략은 분명히 있겠지만, 그 전략을 펼칠 수 있는 전술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아라며 “벤치마킹을 통해 구미만의 전술을 찾아 구미가 산업관광도시로 성장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김정학 관장 약력TBC대구방송 등 방송PD로 20여 년간 근무했으며, 영남대학교 천마아트센터 총감독, 국악방송 한류정보센터장, 구미문화예술회관 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경북도 ‘새경북위원회’위원(기획총괄분과),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조직위 문화기획단 위원,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전문위원, 대구광역시 시정혁신 과제발굴 전문가 자문단 등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대구교육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다./김락현기자

2019-10-30

매흉(埋兇)으로 왕자를 죽이다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이 끝난 1728년 11월이었다. 영조의 외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홀연 세상을 떠났다. 그때 세자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그로부터 2년 뒤인 1730년(영조6) 3월, 궁궐 안에서 매흉((埋兇)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매흉이란 저주를 통해 왕과 세자 등 왕실의 가족들을 병들게 하거나 죽기를 바라는 뜻으로 흉한 물건을 일정한 곳에 묻는 것이고, 화흉(和兇)은 이 저주물들을 왕실 가족에게 먹이는 독살기도를 말한다.과연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추국(왕명으로 의금부에서 수행한 중죄인의 심문)결과 2년 전 무신난에서 피해를 본 소론과 남인 일파들의 짓임이 밝혀졌다. 이들은 궁녀들을 사주하여 궁궐 안 곳곳에 사람의 뼛가루와 흉물을 묻어놓았고, 그런 흉물을 음식물에 섞어 세자와 공주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한 궁녀는 임금이 쓰는 뒷간부근 흙을 식칼로 판 뒤 저주의 말을 읊으면서 인골을 묻었다며 자백도 했다.이 해괴망측한 사건의 내막을 파헤쳐 보면, 보통 사람의 상식과 도덕적 기준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효장세자의 이름은 행(緈), 아명은 만복(萬福), 자는 성경(聖敬)이다. 1719년(숙종45) 2월 15일 영조와 정빈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빈이씨는 동궁전 나인(內人)이었는데, 영조가 연잉군 시절 사가로 불러들여 첩으로 삼은 여인이다. 1721년(경종1) 8월 연잉군이 노론의 적극적인 지지로 왕세제가 되었을 때 정빈이씨도 내명부 종5품 소훈(昭訓)이 되었지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효장세자는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남의 품에서 자란 것이다.1724년(경종4) 영조가 즉위하면서 소훈 이씨는 내명부 정4품 소원(昭媛)에 추증되었고, 아들 이행은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인 1725년(영조1) 2월, 우윤 심정보, 예조판서 민진원이 경의군을 왕세자로 봉하자는 상소에 따라 영조는 경의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해 3월 20일 인정전에서 책봉례를 거행했다. 그때부터 효장세자는 일곱 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서연(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에 참여하여 왕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효장세자는 아버지 영조를 빼닮아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했다. 1727년(영조3) 9월, 영조는 풍양조씨 가문의 이조 참의 조문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그때 세자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고, 세자빈은 그 보다 세 살 위인 열두 살이었다. 세자빈 조씨는 성품이 온유하고 다정다감해서 시아버지 영조의 마음에 쏙 들었다. 똑똑한 왕세자와 착한 며느리를 바라보면서 영조는 당쟁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조정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길지가 않았다.잠시 필름을 과거로 돌려보자. 1728년(영조4) 3월, 이인좌 등 남인과 소론 강경파들이 밀풍군 이탄을 옹립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이 소론 온건파 계열(緩少系列)의 영의정 이광좌, 병조판서 오명항 등이 발 빠르게 대응하여 반란은 한 달여 만에 진압되었다. 영조는 당쟁이 국왕을 끌어내리려는 반란으로 비화하자 새삼 붕당의 폐해를 절감했다. 하지만 당쟁이란 것이 원래 정치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긍정적인 측면도 많았다. 그래서 국왕으로서 이를 무작정 배척하기보다는 양자를 공평하게 등용하여 조정에 참여시키는 탕평책까지 구상했다.한데 그해 11월, 효장세자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그달 16일 경복궁 자선당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효장세자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지가 굳고 효성이 지극했다. 졸지에 믿고 사랑했던 후계자를 잃은 영조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임금이 자식을 잃고 애절하게 통곡하자 입시하고 있던 신하들까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칠 정도였다고 한다.1729년(영조5) 1월 13일, 영조는 죽은 왕세자의 시호를 효장(孝章)으로 정했다. 지혜롭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하고, 경건하고 신중하며 고상하고 현명한 것을 장(章)이라 했다. 효장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가례(嘉禮)를 치른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세자빈 조씨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합방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청상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1730년(영조6) 봄바람에 아지랑이가 나부낄 3월이었다. 그러고 보니 효장세자가 죽은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영조가 궁궐 내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여러 전각 근처에서 흉물이 묻혀있는 흔적을 발견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영조는 바로 의금부에 조사를 명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소론 일당의 지시를 받은 궁녀 박순정, 김순혜, 무당 태자 등이 과부 이세정으로부터 건네받은 사람의 뼛가루를 창경궁의 양화당, 동궁, 빈궁의 침실 등에 묻었고, 예전부터 그것을 음식에 타서 왕세자와 강보에 싸인 네 명의 옹주에게 먹였다고 자백했다. 이를 먹은 화순옹주는 홍진과 함께 하혈 증세로 시달렸다. 영조는 비로소 효장세자의 죽음이 저들의 지속적인 매흉(埋兇)과 화흉(和凶) 탓임을 알게 되었다. 영조의 놀라움과 분개는 극에 달했다. 그달 9일자 영조실록의 기사에는 분개한 영조의 목소리가 가감 없이 실려 있다.궐내에서 매흉과 화흉을 직접 행동에 옮긴 박순정은 효장세자를 두 살 때부터 일곱 살 때까지 보살폈던 최측근 궁녀였으니, 영조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효장세자가 요양을 위해 거처를 옮겼을 때도 계속 따라다니며 독수(毒手)를 펼쳤다. 그녀가 세자에게 먹인 뼛가루의 재료는 대현산(서울 성동구 금호동)의 여러 무덤에서 채취했거나, 길가에 거적으로 말아놓은 개가 뜯어 먹다만 시체, 혹은 불에 탄 사람의 해골이었다. 끼니 때마다 그처럼 비위생적인 흉물을 섭취한 효장세자는 단기간에 위중한 상태에 빠져들었고, 병의 원인을 알 리 없는 의관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효장세자의 사인이 밝혀지면서 충격을 받은 영조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조정에 피바람이 불었다.사건 당일 영조는 대신들과 사헌부, 사간원, 의금부 당상, 좌·우포도대장을 불러들인 다음 새벽 3시에 국청을 열고 죄인들을 심문했다. 주모자 박순정과 이세정, 그들을 도와 궐내에 흉물을 묻거나 먹인 궁녀들과 여종들이 모조리 처형됐다.조사가 진행될수록 이 사건의 배후 인물은 궁궐 밖으로 확대됐다. 가장 먼저 조사 대상에 오른 사람은 가선대부 박도창(朴道昌)이었다. 그는 무신난 이전에 강성파 소론계인 전라감사 황이장, 권첨, 정사효의 군관을 차례로 지내며 명성을 얻었고, 진휼을 잘해서 종2품 당상관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또한 박도창은 순천 방답진(防踏鎭)에 노비 수백여 명을 거느리고 있던 재력가였고, 장흥 등 바닷가 인근 읍의 뱃사람들과도 모두 친했으므로 따르는 세력들도 상당했다. 그와 공모한 자들도 있었다. 정사효의 첫째 아들 정도륭, 정사효의 둘째아들이자 여흥군의 매부인 정도중, 그리고 정사효의 서얼 동생 정사공 등이 박도창과 함께 이 일을 꾸민 것으로 밝혀졌다. 정사효는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무신난에 가담한 혐의로 국문을 받다가 죽은 인물이고, 나머지 인물들도 모두가 지난 무신난에서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었다.이 사건에서 박도창은 궁궐안의 사람들과 결탁하고 내통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여종 하복랑을 궁궐로 들여보내 궁녀들에게 뼛가루 등 흉물을 넘겨주었고, 소요되는 비용은 정도륭이 지원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소론과 남인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론을 제거해야 하고, 노론을 제거하려면 그들이 받드는 영조를 제거해야 했다. 바로 그 시작이 임금의 피붙이인 세자와 옹주들의 제거였다. 반란에 성공을 하면 양원군(성종의 15남)의 아들인 여흥군 이해(李垓)나 여릉군 이기(李圻)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이었다.이 무렵 영조를 놀라게 한 또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엽기적인 매흉·화흉 사건의 수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4월 중순이었다. 19세의 어린 환관 최필웅 등 여러 명이 한밤중에 궁궐 담장을 넘어갔다가 체포된 것이다. 부쩍 의심을 품은 영조가 앞서 있었던 매흉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엄중한 심문을 명했다. 심한 낙형(烙刑·불에 달군 쇠붙이로 피부를 지져 고문을 가하는 신문)을 견디지 못한 최필웅은 자신이 정사효의 일가붙이인 남인 박재창의 지시에 따랐다고 자백했다. 박재창이 일단의 노비들을 궐내에 잠입시켜 미리 구입한 화약을 터뜨려 불을 지르고, 궁인들이 놀라 뛰쳐나가면 자객 이태건이 임금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연이어 일어난 이 두 가지 사건은 같은 무리의 사람들이 일으킨 역모사건이었던 것이다.경술년(1730) 이 해 이 두 모반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약 200명이 넘는다. 이들에 대한 조사는 1년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상궁, 환관 등 사건을 일으킨 직접 당사자들은 즉시 처형되었다. 그리고 무신난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던 정사효, 권첨, 목중형의 핵심 세력들과 그 이전에 김일경 상소에 동참했으나 영조의 배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이진유, 윤성시, 서종하 등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또한 무신년 당시 괘서사건에 관련되었다가 살아남은 나머지 인물들도 이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어 모두 처형되거나 신문을 받던 중 고문으로 죽었다.아이러니하게도, 경술년에 일어난 이 두 가지 사건으로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였던 반대세력들을 뿌리째 제거할 수 있었다. 남인과 강경파 소론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영조와 노론에게 완전히 진압당하면서 재기불능 상태로 추락하고 만다. 수십 년에 걸친 남인· 준소((峻少)와 영조의 대결은 결국 영조의 완판승리로 끝이 났고, 한계를 여실이 드러낸 탕평정책도 막을 내렸다. 이후 정국은 노론의 일방적 독주로 전개가 되었다.이 희대의 사건에 가담하였던 박도창은 심문도중에 독살을 당했다.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매질을 견디기 힘들었던 본인들의 뜻도 있었으나, 죄를 시인하게 되면 가족들은 연좌를 당하게 될 것이며, 가산도 지키기 힘들 것이라는 점을 염려한 집안사람들이 의금부 나장에게 뇌물을 주고 독약을 타 먹여 죽게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던 것이다.박도창은 그렇게 죽었지만, 연좌된 첩 덕순(順德)과 첩의 아들 아지(阿只), 첩의 딸 영애(永愛)가 이 엄청난 사건의 뒷이야기를 짊어지고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다. 그게 1730년 4월 29일이었다.당쟁은 선악의 측면이 공존한다. 그 나름의 이념과 제도를 갖추어 적절하게 운영하면 사회발전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을 잘못 사용하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독약과도 같은 것이 된다. 어린 세자와 옹주들에게 무덤에서 파온 부패한 인골을 갈아 먹였다는 이 사실이 부끄럽게도 영조실록에 정사(正史)로 기록되어 있다. 당리당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당쟁의 폐해를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뜻일 거다. 당쟁은 시대적으로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다만 그 평가는 역사가 할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0-29

순도 높은 파랑, 찬란한 금빛… 아름다운 것들은 늘 그대로다

다시 영덕으로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얼마 전 태풍 ‘미탁’으로 경북 동해안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고래불로 가는 길, 가을 하늘은 언제 그토록 흉포했냐는 듯 눈이 부시도록 맑았다. 햇살 속에서 소나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초록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는 아직 태풍의 날카로움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차게 밀려오는 파도는 방파제에 부딪쳐 낱낱이 부서지고, 여기저기 심하게 할퀴어진 해변은 말이 없었다. 곳곳에 모래와 자갈, 쓰레기 등이 한 데 쌓여 더미를 이루고, 찢어진 천막과 간판, 쓰러진 나무와 기둥들이 바람 불 때마다 바다를 대신하여 신음하는 것이었다.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한 사람이라도 더 찾아주는 게 바다에게도,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그나마 작은 위로와 기쁨이 될 것이다. 거센 태풍도 영덕 바다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못했다고, 아름다운 것들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고, 나는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고래불과 대진 해수욕장은 여전히 순도 높은 파랑을 빚어내고, 태풍이 지나간 하늘은 공중에다 하얀 뭉게구름을 국화꽃처럼 피워놓고 있었다.태풍이 휩쓸고 간 해변에는 ‘쓸쓸한 황홀함’이 있다. 이때 황홀함은 풍경이라는 외부적 자극에 의한 고취인 동시에 슬픔이라는 내적 작용이 몰고 온 일종의 환각적 상태다. 슬픔 속에 오래 침잠되어 있다 보면 세상이 비현실적 공간처럼 여겨진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이든 육체의 고통 또는 현실의 절망이든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영덕 바다는 거짓말처럼 아름다웠다. 대진해수욕장을 걸으면서 나는 정지용이 ‘유리창 1’에서 토로한 “외로운 황홀한 심사”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바닷바람이 목 소매로 들어가 등이 서늘했다.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파랑 때문인지, 또는 수평선이 튕겨내는 가을 햇살 때문인지 눈에 자꾸만 물기가 고였다. 무언가 활달하고 복작거리는 온기가 필요한 시간, 눈을 좀 말려야겠다. 장날은 아니지만 영해만세시장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상설시장이 운영되고 있으니 언제 찾아도 시장 구경하는 쏠쏠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티 없이 푸르른 하늘 아래 빨강 노랑 초록 파랑 파라솔들이 무지개를 띄워 놓은 영해읍내를 걸었다. 오래된 전통 시장은 이제 아케이드 안으로 자리를 옮겨 비와 바람, 추위로부터 안전해졌다. 바닷바람에 시렸던 내 몸도 아케이드 안에서 훗훗해졌다.말린 생선, 멸치, 김, 젓갈 등 해산물과 함께 눈길을 끄는 것은 돼지 머릿고기와 순대였다. 아니, 눈길을 끄는 게 아니라 콧길을 끌었다. 냄새가 나는 쪽으로 코를 벌름거리면 그곳엔 어김없이 어르신들 몇이 대낮부터 식당에 주저앉아 털 숭숭한 머릿고기와 따끈따끈한 돼지 간을 안주 삼아 탁주를 마시고 있었다. 입에 고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리면, 장사는 뒷전인 채 화투놀이를 즐기는 상인들이 보였다. 물건 하나 사지 않아도 마음의 장바구니가 가득 찼다. 아니, 어느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그러니 빈손으로 갈 수는 없어, 나는 집에서 국물 낼 때 쓸 멸치를 좀 사서는 시장을 나섰다.대탄리의 해맞이공원은 영덕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해맞이공원에서 바라보는 영덕 바다는 ‘영덕 블루로드’가 자랑하는 절경 중의 절경, 뒤를 돌아보면 그에 못지않은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풍력발전소의 거대한 풍력발전기들이 푸른 하늘을 가르는 장관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근교의 잔세스칸스(Zaanse Schan)는 ‘풍차마을’로 유명한데, 아기자기한 네덜란드 풍차마을에 비해 이곳 영덕 대탄리는 호방하고 장쾌한 멋이 있다. 풍력발전기라는 단어보다는 ‘풍차’가 예쁘고, 풍차라는 말보다는 ‘바람개비’가 곱다. 커다란 바람개비들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영덕신재생에너지전시관과 해맞이캠핑장 사이에 ‘산림생태문화공원’이 있다. 이곳에서는 거대한 바람개비를 가까이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다양한 체험 활동까지 즐길 수 있다. 지난 1997년, 대형 산불이 발생해 폐허가 되어버린 창포리 산지를 영덕군이 수년에 걸쳐 복원하고 가꾼 것이 오늘의 산림생태문화공원이다. 출렁다리, 음악당, 인공계곡, 목공예체험장, 조각공원, 식물원 등 다채로운 시설들이 지역민들과 관광객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은 ‘달려라 왕발통’이다. 왕발통은 ‘세그웨이(Segway)’라 불리는 1인용 전동휠바이크다. 이 세그웨이가 영덕산림생태문화공원에 와 왕발통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얻었다.9천원을 주고 왕발통을 빌렸다. 2시간 동안 실컷 탈 수 있다. 헬멧과 무릎보호대 등 안전보호장구를 착용하고 주행을 시작했다. 산림생태문화공원 이곳저곳 ‘전동휠 체험코스’가 잘 닦여 있어 어린이와 노인들도 어렵지 않게 왕발통으로 누빌 수 있다. 왕발통을 달리며, 단풍으로 물든 산 능선 사이로 새파란 바다가 보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가을을 탄다’는 말은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뀔 때 고독감이나 낭만 지향성이 민감해져 마음 싱숭생숭한 상태를 뜻하지만, 나는 단순히 ‘탈것에 몸을 얹다’는 사전적 의미에 충실하게 가을을 타기로 했다. 왕발통을 타고 만추의 고즈넉한 정취 속을 달리는 일은 곧 가을을 타고 낭만과 행복 속으로 내달리는 것이다. 울긋불긋한 단풍과 푸른 수평선이 내 마음의 팔레트에 오색 물감을 채워, 나는 지상의 그 어떤 풍경도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는 ‘색채의 마법사’가 되었다. 그 순간 ‘색채’란 예술적 감수성의 다른 이름이다.왕발통을 타고 하도 신나게 달렸더니 출출해졌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찾은 곳은 영덕읍 남석리의 옛날불고기 식당. 남석리에는 두 곳의 옛날불고기집이 영업 중인데, 외지인들에게 잘 알려진 곳은 ‘아성식당’이다. 인기가 많아선지 오후 2시인데도 벌써 점심 장사가 끝났다고 한다. 그래서 옆집인 ‘이가네 옛날불고기’로 향했다. 지역민들에게 오랫동안 사랑 받은 집이다. 메뉴, 요리법, 양, 가격은 두 식당이 거의 비슷하다. 질 좋은 한우 불고기 1인분 120g에 8천원. 하지만 2인 기준 3인분이 최소 주문 단위여서, 나는 혼자 3인분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향 좋은 숯이 가득 담긴 화로가 열기를 뿜으며 상에 오르고, 두꺼운 철근으로 제작된 삼각형 화구가 얹어졌다. 그리고 양념육수와 고기를 분리해서 익히는, 정말 옛날 방식의 불고기 불판이 등장했다. 치익 칙, 하는 고기 굽는 소리, 스멀스멀 오르는 맛있는 냄새, 동백꽃잎처럼 얇게 저며진 선홍빛 소고기가 점점 가을빛으로 익어가는 광경, 화로에서 오르는 열기는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고, 알맞게 익은 불고기를 계란노른자 소스에 푹 찍어 입에 넣는 순간 육즙과 양념과 한우의 담백한 맛과 식감이 입 안에서 팡팡 터졌다. 영덕의 옛날불고기는 미각뿐만 아니라 청각, 후각, 시각, 촉각까지 오감을 모두 충족시키는 음식인 셈이다.3인분을 게 눈 감추듯 뚝딱 해치우고는 아무데로나 아무렇게나 걷기로 했다. 영덕 우체국과 영덕 버스터미널과 영덕 소방서와 영덕군민공원을 지나자 황금빛 벼가 강물처럼 넘실거리는 덕곡리,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은 벼들이 대견하고 고마워서 대뜸 코끝이 시렸다. 어느 시인이 묘사한 것처럼, 어미소가 송아지 등을 핥아주듯 바람이 불 때마다 가을논의 벼들은 나란히 누웠다가 나란히 일어서면서, 한없이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나는 그곳의 낮아지는 저녁해에 마음을 내어 말린다”(장석남, ‘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던 시인처럼, 나도 덕곡리 황금물결에 축축한 마음의 옷들을 하나 둘 벗어 내어 말렸다. 투명한 알몸이 되어 버린 내 마음에다 따사로운 볕이, 고추잠자리의 비행이, 참새 떼의 지저귐이, 오십천 흐르는 물소리가 스웨터를 짜 입혔다. 나는 아마 가을 내내, 아니 겨울까지도 춥지 않을 것이다.            /시인 이병철

2019-10-27

힘 모아 태풍 이겨낸 영덕으로 가을 여행을

태풍 ‘미탁’의 영향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영덕군에도 가을이 성큼 와 닿았다. 주민과 군 관계자의 노력, 여기에 국민들의 크고 작은 지원에 힘입어 ‘동쪽 바닷가 아름다운 관광도시’로서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는 영덕.자연 재난으로 인해 아픔을 겪은 지역을 찾아가는 것은 거기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줄 수 있다. 영덕을 여행하며 그곳 숙박업소와 식당을 이용함으로써 지역 경제에 보탬을 주고, 태풍으로 인한 군민들의 상처를 다독여주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영덕의 가을 여행지’ 몇 곳을 소개한다.◇아름다움 뽐내는 산림생태문화체험공원과 해맞이공원영덕읍 창포리 산림생태문화체험공원은 1997년 큰 산불이 발생한 지역에 만들어졌다. 영덕군은 버려진 땅을 희망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2008년부터 7년간 104ha 규모의 근린공원을 조성했다.이를 통해 주민들과 관광객들은 ‘희망의 재생산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이 공원은 근사한 자연 경관과 맑은 공기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있다.산림생태문화체험공원은 조경시설, 휴양시설, 교양시설, 편의시설로 나눠 형성됐다. 출렁다리, 인공 계류지, 자연형 계류지, 모래연못, 데크 로드, 관찰식물원은 여행자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나이테 쉼터, 갈림길 쉼터, 통나무 쉼터 등은 편안한 휴식을 선물한다. 숲속음악당과 국립 청소년환경센터는 교양시설의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주변에선 전국적으로 유명한 영덕대게와 동해 청정해역에서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도 맛볼 수 있다. 예술의 향기 가득한 해맞이예술관과 목공예체험장도 인기다.영덕군 시설관리사업소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붉은 태양을 떠올리게 하는 꽃무릇과 핑크빛 추억을 안겨주는 핑크뮬리를 심어 낭만을 더했다.해맞이공원은 울창한 해송으로 둘러싸인 창포리 일대 해안선을 따라 조성됐다. 만들 당시 “자연 그대로의 공원을 지향한다”는 목표를 세웠다.산불로 인해 쓰러진 나무가 침목 계단이 됐고, 산책로의 주요 재료로 다시 태어났다. 사진 촬영과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데크가 마련됐고, 파고라도 생겼다.해맞이공원 전면엔 갖가지 야생화가 심어져 아름다움을 더한다. 1천500여 개의 나무 계단이 바다까지 엮여 내려간 산책로도 멋지다.영덕대게의 집게발을 형상화한 창포말등대의 높이는 24m. 그 아래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을 1년 내내 볼 수 있다. 이곳은 일출 풍경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이색적 경관조명이 장관을 이루는 해맞이공원 산책로도 멀리서 영덕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빛의 축제가 펼쳐지는 ‘루미나리에 길’은 해맞이공원의 밤을 휘황하게 수놓고 있다.◇드라마 촬영지의 낭만 느낄 수 있는 삼사해상공원영덕군이 “동해의 맑은 정기가 곳곳에 서린 곳”이라 설명하는 삼사해상공원. 청정한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동해와 근사한 하모니를 이루는 주위의 경관 또한 일품이라는 평가다.아이들의 손을 잡은 젊은 부부들은 주말만이 아닌 평일에도 이곳을 찾아 낭만을 즐기고 추억을 만든다. 영덕 군민들은 삼사해상공원을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공간”이라고 말한다.북한이 고향인 이들의 서러움을 달래주는 망향탑과 경북대종, 공연장과 폭포 등이 흥미로운 볼거리다. 1997년 1월 1일 처음 개최한 ‘해맞이축제’의 인기는 지금도 여전하다.공원 광장에는 500대의 자동차를 세울 수 있는 주차시설이 완비돼 있다. 인공폭포 역시 많은 이들이 찾는다는 게 영덕군청의 부연이다.이곳은 오래 전 큰 인기를 끈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 영덕은 대게의 명성과 아름다운 풍광을 보다 널리 알릴 수 있었다.인근 골프장과 산책로, 해안 드라이브 코스는 비단 여름철만이 아닌 지금도 사람들이 적지 않게 방문해 영덕이 주는 즐거움과 치유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정크트릭아트·신재생에너지·어촌민속전시관각종 전시관은 영덕군이 내세우는 또 다른 ‘행복한 여행 공간’이다. “상상 이상의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정크트릭아트 전시관은 일상생활 속 폐품을 소재로 만든 정크 작품과 평면 그림으로 착시효과를 주는 트릭아트 작품을 융합해 연출됐다.산림생태문화체험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난 2017년 개관했다. 1층엔 서바이벌 로봇레이싱, ‘내가 홈런왕’ 등 정크아트가 전시됐고, 2층엔 ‘손오공 VS 헬보이 빅매치’, ‘헐크와의 결투’, ‘아슬아슬 폭포’ 등의 트릭아트를 선보이고 있다. 3층으로 올라가면 팬더동산이 아동 관광객을 반긴다.“트릭아트를 제대로 즐기려면 포인트를 잘 잡고, 정면보다는 비스듬한 각도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 관계자의 조언이다. 주위엔 신재생에너지 전시관, 풍력발전단지, 바다숲 향기마을, 해맞이캠핑장도 자리했다.신재생에너지 전시관은 영덕의 대표적 관광자원인 천혜의 자연과 해맞이공원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신재생에너지에 관한 교육이 이루어진다.신재생에너지 클러스터의 중심지인 이곳 1층엔 휴게 카페와 편의시설, 2층엔 태양·바람·물·지열 등을 이용해 신재생에너지의 생성 원리를 체험할 수 있는 전시시설이 들어섰다. 빛을 이용한 프리즘 체험 코너와 동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고성능 망원경은 부모와 함께 전시관을 찾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신재생에너지 전시관은 태양광 자동차, 해바라기 에너지정원, 수소자동차, 바이오매스 원료, 파력발전 등 풍력, 태양열, 수소에너지와 같은 신재생에너지의 종류와 원리도 알기 쉽게 체득할 수 있는 곳이다. 또 전시 코너와 체험 코너를 갖추고 있어 저탄소 녹색성장의 실질적인 교육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전시관을 중심으로 바람개비공원, 항공기 전시장 등의 볼거리도 적지 않다.어촌민속 전시관은 사라져 가는 바닷가 마을 전통과 문화를 발굴하고 보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어업문화의 계승·발전은 물론 관광객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경북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가족단위 체험·놀이공간이기도 하다.전시시설, 체험시설, 3D 입체영상관, 옥외조형물 등을 갖춘 이 전시관은 지난 2005년 말 문을 열었다.영덕군은 “동해 강구항과 풍력발전단지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며 “동양의 나폴리라 칭해도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제1전시실에선 영덕의 삶과 의식주, 어촌의 놀이 및 문화, 동해안 별신굿, 어선의 제작 과정, 대게 잡이 당두리배, 영덕의 다양한 어구·어법 등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준다.제2전시실에서는 각종 유물과 영덕 바다의 비경을 볼 수 있고, 해녀들의 삶도 잠시나마 체험해 볼 수 있다.◇빼놓으면 아쉬운 산성계곡 생태공원지난 21일 개장한 ‘영덕 산성계곡 생태공원’은 아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환경이 보존된 ‘특별한 관광지’다.달산면 옥산리 숲에 그 모습을 드러낸 공원은 경관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고, 맞닿은 옥계계곡의 비경이 관광객을 불러 모을 것으로 전망된다.영덕군청은 “지역 주민들에게도 유익한 자연 쉼터가 돼줄 것”이라고 덧붙였다.산성계곡 생태공원에 설치된 체험시설인 ‘네트 어드벤처’는 요즘 트렌드를 반영해 만들었다. 영덕군은 오는 11월 30일까지 이를 운영한 후 관광객들의 반응을 살핀 뒤 체계적 운영 계획을 수립할 방침이다. ‘네트 어드벤처’는 통상의 숲 체험시설과 달리 맨몸으로 숲의 기운과 향기를 맛볼 수 있어 모험을 즐기는 여행자들에게 제격이라고 한다.영덕의 대표적인 산림 체험공간으로 자리 잡을 이 공원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숲과 버려진 농지를 자연친화적으로 복원한 것이며, 환경부가 조성 예산을 지원했다./홍성식·박윤식기자

2019-10-24

트램이 달리는 문화·예술공간 조성 ‘다시 젊음의 거리로’

△원도심이 살아야 관광도 산다도시가 형성되고 발달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도심지 역할을 한 지역을 원도심이라고 한다. 구미시는 원평동 일대가 대표적인 원도심으로 꼽힌다. 이곳은 구미역과 문화로(2번 도로), 새마을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가장 활기가 넘치는 젊은이들의 거리다. 구미가 산업도시로 성장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새로운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도시 외곽의 신도시 개발로 인해 점점 쇠퇴해 왔다. 주말이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었던 문화로의 모습은 옛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됐다. 이러한 원도심의 쇠퇴는 젊은이들의 문화·소비가 타지역으로 이탈하는 현상으로 이어지면서 지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이에 구미시가 원도심인 원평동 일대를 도시재생으로 다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결과 지난해 ‘구미를 당기다’를 주제로 신청한 공모사업이 국토교통부가 추진 중인 2018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최종 선정됐다.구미시는 이번 사업으로 청년·소상공인 상생플랫폼, 복합문화센터, 마을센터를 조성할 계획이다. 또 주민들을 위한 친환경 쉼터를 조성하고, 중앙시장 구간에 야간조명시설과 간이 쉼터를 제작해 상권 활성화를 유도할 계획이다. 문화로에는 구간 특화조명을 설치하고 청년문화프로그램 ‘원평 청춘가로 페스티벌’ 기획 및 홍보를 지원해 다시 젊은 거리로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특히, 자발적인 주민참여로 진행될 수 있도록 도시재생 마을학교, 주민제안사업, 도시재생 기록화 사업을 통해 주민들이 직접 전 과정에 참여해 평가와 성과 진단, 사업 추진 기록물을 제작할 예정이다.△구미의 대표 유흥 장소를 문화적 유흥 공간으로 바꾸다구미의 대표적인 유흥 장소였던 금오시장로(路)가 최근 누구나 즐겨 찾을 수 있는 문화적 유흥 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 구미시가 추진하는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으로 지역의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금오시장로에서 창의적인 문화활동을 전개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은 지역별 문화를 활용해 낙후된 원도심을 활성화하기 위한 전국 지자체 대상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으로, 구미시는 올해 초 사업대상자로 선정됐다. 시는 우선 금오시장로 일대를 문화적 공간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인적그물망을 구축하고, 구성된 인적자원으로 문화콘텐츠 구상과 공동실행, 지속가능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인적그물망 구축을 위한 워킹그룹은 현재 생생 금오통, 청년 아무거나 연구소, 구미 맘 놀이연구소, 금오시장로 아티스트, 금오시장로 홍보단, 금오시장로 환경정리단 등 6개 그룹으로 구성돼 매주 수요일 저역 워킹그룹 라운드 테이블을 통해 다양한 의제와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다.또 이들은 금오시장로 인근 주민들과 매주 수요일 반상회를 열어 지역의제를 공유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다. 콘텐츠를 실행할 시민모임 ‘쌀롱 드 금오’는 지난 7월 첫 모임을 시작했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시민 30여 명이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금오시장로에서 진행될 문화공연 등에 대해 자유로운 생각을 나누고 그 의견을 반영한다. ‘쌀롱 드 금오’는 그동안의 의견들을 정리해, 주민들과 함께 만드는 마을축제 ‘낮밤없는 문화포차’, ‘금오시장로 예술놀이터’, ‘반짝반짝 금오시장로’ 등의 프로그램을 내년 2월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구미의 대표적인 유흥 장소에서 시민 중심의 문화적 유흥 공간으로 탈바꿈을 시도한 금오시장로가 구미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구미 산업관광의 필수요소 ‘트램’구미시는 지난해 무가선 저상 트램 실증노선 선정 공모사업에 신청하려 했으나 일부 지역 시민단체의 억측과 왜곡으로 발생된 반대 여론에 부딪혀 곤혹을 치렀다. 다행히 구미시는 포기하지 않고 예산을 편성해 무가선 저상 트램 조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빠르면 올해 말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트램은 도로위에 깔린 레일 위를 주행하는 노면전차를 뜻하는 것으로, 무가선 트램은 전력을 공급하는 전선 없이 배터리로 운행된다. 국내에선 한국철도기술 연구원이 2010년 세계 최초로 무가선 저상 트램을 개발해 시범 운행 공모를 진행했다. 구미시가 추진했던 바로 그 트램 공모사업이다.구미시가 트램 사업 진행에 주춤하는 사이 광역단체 등 18개 지자체가 트램 도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트램 열풍이 부는 이유는 무엇일까. 건설 비용이 지하철의 1/6 수준이고, 운영비용 또한 지하철의 25%, 경전철의 60%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트램 1편의 수송인원이 버스보다 3배나 많은 것도 장점이다. 지상으로 이동하다 보니 지역 상권 활성화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는 지역 교통 특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예산낭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교통전문가들은 지하철, 택시, 승용차, 버스전용차로 등 다양한 교통수단과의 연계성을 고려해 트램의 편익을 종합적으로 분석할 것을 조언한다.구미지역의 교통 현실은 어떨까. 도심지가 분산돼 있는 특성으로 자가용 의존도가 50% 이상이며, 노선이 적고, 배차시간이 긴 시내버스보다 택시를 이용하는 경우가 더 많은 곳이다. 교통수단 중 버스가 차지하는 수송분담률은 고작 20.9%에 불과하다. 최근에는 대중교통만을 이용해 해당 지역을 여행한 체험수기를 자신의 SNS에 올리는 여행가들도 늘어가는 추세여서 대중교통이 관광산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노레일로 추진된 대구도시철도 3호선의 대구관광 영향은 차치하더라도 트램이 도시재생의 효과와 더불어 관광객 유치에도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미국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입증이 된 사실이다. 트램은 구미시가 추진하고 있는 도시재생과 산업관광 성공의 필수조건인 셈이다.△지속가능성은 기본 조건구미시는 도시재생을 기반으로 산업관광에도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다양한 프로젝트 추진하고 있다. 장세용 구미시장의 말대로 도시재생은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냐가 중요한 것으로, 그 공간에는 문화, 복지, 관광, 교육 등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 도시재생 전문가인 장 시장의 말대로 구미시는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낙후된 도심공간을 채우는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하고 있다.이러한 도시재생은 분명 관광에도 영향을 미쳐 구미시가 대한민국 대표 산업관광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관 주도의 사업에 익숙한 탓에 주민 스스로 사업을 주도한다면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구미시는 지난 5월 도시재생 지원센터를 개소해 주민 주도형 도시재생을 돕고 있다. 지난 7월에는 국토부의 도시재생뉴딜 교육비 지원 사업에 선정돼 1천만 원을 지원받아 주민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주민활동가를 양성해 도시재생에 주도적인 역할도 하도록 할 계획이다. 이 밖에도 센터는 서울시 도시재생지원센터와 업무협약을 맺고 도시재생에 대한 정책·정보 교류, 도시재생대학 등 학습 및 교육, 도시재생 관련 홍보 등 포괄적인 업무에 협력하기로 했다. 주민 주도형 도시재생이 지속가능성만 확보한다면 구미시의 산업관광 또한 지속가능한 성공을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10-24

바쁜 걸음 쉬어가게 하는, 과하지 않게 담박한 맛을 찾다

재미있는 닭집 2곳 여정식당 오경통닭10가지 한약재와 옻이 부드럽게 엉킨 ‘여정식당’ 옻닭옻닭을 내놓는 집들은 많다. 오래된 집들도 많다. ‘여정식당’ 특이하다. 단순히 옻을 넣은 닭이 아니다. 옻과 더불어 열 종류 이상의 한약재를 넣고 만든다.‘주인 할매’의 음식에 대한 정성이 아름답다. 간판에 ‘박정늠 아지매, SINCE 1970년’이라고 써 붙였다. 사진도 걸려 있다. 젊은 얼굴이다. 오래전의 간판, 사진이다. 실제 박정늠 할매는 여든의 노인이다. 지금도 꾸준히 가게에 나온다. 자신만의 ‘맛’ ‘음식’을 고집한다. 음식 만드는 일에 헌신한다. ‘나만의 옻닭’의 맛, 모양, 색깔을 가지고 있다. 닭이 상당히 큰 닭이다. 모른 척하고 슬쩍 물어본다. “토종닭입니까?” 대답이 재미있다. 조금 머뭇거리더니 “쪼매 노아 먹인 거래여”.토종닭은 드물다. 병아리 수준의 닭들이 많으니 웬만큼 크면 토종닭이라고 내놓는다. 그렇지는 않다. ‘박정늠 할매’가 말하는 ‘일정 조건 방사닭’이 맞다. 예전에는 산과 들에 놓아먹인 닭들이 있었다. 양계장이 생기면서, ‘A4 용지 반장 크기’의 시설 안에서 키우는 닭들이 대부분이다.닭고기 맛은 전혀 다르다. 왜 ‘쪼매 놓아먹인 닭’이라고 표현했을까? 큰 닭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자라도록 기른 닭이라는 뜻이다. 온전한 방사닭은 아니다. 육질은 비교적 질기지만 오랫동안 잘 삶았다. 살이 잘 부스러지면서도 쫄깃한 식감이 아주 좋다. 한약재와 옻의 맛도 적절하다. 한약재 고유의 맛과 옻의 맛이 서로 부드럽게 엉겼다. 고수가 ‘선’을 잘 정한 음식이다.시장통의 어수선한 작은 식당이다. ‘먹고 살려고’ 시작한 생계형 식당. 2대 전승은 아니다. 아들, 며느리가 일을 돕고 있지만, 아직은 1대 박정늠 할매가 정정하다.오직 닭고기만 소복이… ‘오경통닭’ 옹치기간판에 가게 이름보다 ‘옹치기’라는 표현이 더 크다. 오래전에는 닭 한 마리를 통째로 요리하는 경우가 잦았다. ‘오경통닭’도 마찬가지. 주인이 ‘닭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빗대어 ‘옹치기’라고 이름 붙였다. 많은 사람이 ‘옹치기’를 궁금하게 여긴다. 주인이 독창적으로 붙인 이름이다.눈여겨 볼만한 것은 이 집의 음식이다. 안동찜닭과 비슷하다. 닭볶음탕이 아니라 졸임이다. 안동찜닭이나 이 집 모두 흥건한 육수를 넣고 서서히 졸인다. 고기는 익고 양념은 닭고기 속으로 밴다.긴 시간 졸인 것이라 고기는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살코기에 양념 맛이 잘 배어 있다. 주문할 때 매운 정도를 조정할 수 있다.안동찜닭과 다르게 채소와 당면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쟁반에 매운 고추나 통깨 이외에 닭고기만 소복하다. 닭고기 ‘정면승부’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당면, 양파, 당근, 대파 등이 보이지 않는 특이한 닭고기 조림이다. 닭은 1.5Kg 내외로 비교적 큰 것이다. 닭고기 맛은 큰 닭이라야 온전하다.순한 장맛 잘 배어든 순수한 맛 ‘소나무집’더하는 음식이 아니라 빼는 음식이다. 대단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다. 오히려 맛이 없다. ‘무미(無味)’다. ‘단짠’을 뺀 음식이다. 재료의 소박한 맛이 살아난다. 순한 장맛이 잘 배어든 재료의 순수한 맛, ‘소나무집’의 맛이다.분위기와 음식이 모두 푸근하다. 소박하다. 잘 정리된 ‘시골 할매집’의 음식이다. 나이든 노부부가 운영한다. 정원도 깔끔하고 음식도 깔끔하다. 청국장은 청국장의 맛이고, 직접 빚는 두부도 두부, 콩 그 자체의 맛이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는다.직접 담근 장으로 맛을 더한다. 그뿐이다. 억지 맛을 위해 조미료, 감미료를 더하지 않는다. 풋고추 무침도 맛있다. 아주까리 장아찌는 특이한 반찬이다. 아주까리는 피마자다. 오래전에는 흔했는데 이젠 귀한 음식이 되었다. 현지 생산 콩으로 만든 두부도 아주 좋다.주인 할머니의 얼굴과 말투에 푸근함이 묻어 있다. 외진 곳을 찾는 외지 손님들을 위하여 음식에 정성을 더한다. ‘채널A 먹거리X파일’에서 ‘착한 청국장’으로 선정했다.추어탕 맛집 3곳, ‘황토추어탕’ ‘대원식당’ ‘덕산추어탕’청도의 추어탕은 추어탕이되, 추어탕이 아니다. 원형 청도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주원료로 한 추어탕이되 메기와 피라미 등을 넣은 ‘잡탕 추어탕’이었다. 이제는 ‘잡탕 추어탕’은 대부분 사라졌다. 대신 추어탕과 메기탕, 찜 등의 메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청도 읍내에서는 ‘황토추어탕’이 유명하다. 좁은 골목길 안의 허름한 노포다. 내부도 꼬불꼬불, 복잡하다. 메뉴에 추어탕과 미꾸라지 튀김, 미꾸라지를 넣은 만두도 있다.“경상도식 추어탕은 토란대, 풋배추, 부추 등과 양념으로 산초가루, 방아잎 등을 넣는다”고 써 붙였다. 반찬 중에 곱게 구운 두부가 좋다. 두부 요리도 있다. 노포.각북면은 청도와 대구를 잇는 교통의 요지다. 청도, 대구의 중간 지점이다. 30년을 넘긴 추어탕 집이 두어 곳 있다.‘대원식당’은 오래된 청도 식 추어탕 흔적을 지니고 있다. 추어탕에 작은 양의 메기를 넣는다. 추어탕과 더불어 메기매운탕이 있다. 우리 콩으로 만든 두부도 있고, 두부 부침개도 내놓는다. 가게 내부와 음식이 깔끔하다. 열무, 배추를 섞은 물김치와 가지나물, 고추찜이 아주 좋다.‘덕산추어탕’은 추어탕과 더불어 호박전, 미나리 전이 특이하다. 호박전은 겨울철 메뉴이나 미나리 전은 제철인 봄철과 가을에도 가능하다. 가을 미나리 전은 줄기가 없는 이파리로, 밀가루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부쳐내는 미나리 전이다.유일하게 뼈대 볼 수 있는 조선의 냉장고 석빙고(石氷庫)‘청도에 있는 돌로 만든 얼음 저장 창고’다.얼음의 의미는 가볍지 않다. 음식은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의 주요 도구다. 음식은 제사 모시고, 손님맞이의 필수 조건이다. 조선 시대 제사 중 가장 큰 것은 ‘나라의 제사’ 즉, 종묘 제사와 공자(孔子) 모시는 제사다. 손님맞이는 지방 관청을 찾는 중앙의 관리들이다. 군현의 경우, 관찰사 등 상위직 관리들과 지방을 찾는 관리들에게 늘 음식을 내놓아야 했다. 공식적인 ‘지응(支應)’이다. 각 지방 관청에서도 선왕을 모신 제사와 더불어 공자 제사를 중요히 여겼다. 지방 관청마다 향교가 있고, 향교에는 대성전이 있다. 청도도 마찬가지. 청도 읍성 안에 향교가 있고 지방 관청이 있었다. 향교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석빙고가 있다. 겨울철을 제외하면 음식은 쉬 상한다. 냉장, 냉동고가 없던 시절이다. 관청 옆에 향교가 있고, 향교 옆에 빙고가 있었다.대부분의 얼음 창고는 나무로 만들고 짚으로 지붕을 덮은 ‘목빙고’였다. 쉬 무너진다. 물이 묻은 나무는 빨리 삭는다. 늘 보수를 해야 한다. 지붕도 매년 새로 이어야 한다. 낭비가 심하니, “석빙고로 만들자”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예산이 문제다. 석빙고는, 한번 만들면 오래 가지만, 처음 만들 때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돌을 깎아야 하고, 많은 인력을 동원해서 힘들게 만들어야 한다. 목빙고에 비해서 재료, 인력이 몇 곱절 필요하다. 시간도 많이 걸린다. 목빙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석빙고 몇 개가 경주, 안동, 현풍, 창녕 영산 등에 남아 있다. ‘청송석빙고’를, 숙종 조에 만든 오래된 것, 경주 석빙고 다음으로 큰 것이라고 설명한다. 부족하다. “유일하게 빙고의 뼈대를 모두 볼 수 있고 따라서 석빙고의 구조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야 한다.석빙고의 내부 구조는 홍예(虹蜺)와 판석(板石), 바닥의 돌들, 물길, 공기 구멍으로 이루어진다. 홍예는 돌을 짜 맞추어 마치 무지개처럼 만든 것이다. 석빙고의 내부에서 천정을 보면 마치 갈빗대 같은 돌 구조물이 보인다. 홍예다. 홍예를 지탱하고 연결하는 것은 넓적한 돌, 판석이다. 청도석빙고에는 4개의 홍예가 남아 있다. 공기를 차단하더라도 빙고 내부의 얼음이 녹고, 물이 생긴다. 이 물들을 외부로 빼내는 물길이 있었고, 공기를 통하게 하는 공기 구멍이 있었다. 청송 석빙고는, 물길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공기 구멍은 볼 수 없다.청도석빙고. 재미있다.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서 대부분 무너졌다. 앙상한 뼈대 몇몇만 남아 있다. 봉분이 없으니, 오히려 석빙고의 안팎을 제대로 짐작하고, 그려 볼 수 있다. 청도석빙고의 ‘반전’이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10-23

정성스레 그린 동양화·수 만개 조명의 향연… ‘일거양득’ 만추 기행

추색 짙은 풍경, 천천히 걸어 즐긴다 ‘공암풍벽’·‘운문사’길이 끊긴 높고 거대한 절벽에 꽃빛 닮은 단풍이 흐드러졌다. 재론의 여지없는 절경이다. 인간의 능력 밖에서 자연이 만들어내는 가을 풍경이 놀라움을 불러왔다.‘공암풍벽(孔巖楓壁)’. 청도팔경 중 4번째로 손꼽히는 수려한 경관이 기자를 매혹했다. 오래 전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은 풍벽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강 속 바위는 쪼개진 채 몇 해를 살아왔나비탈길 오르고 좁은 길 통과하니 서늘한 기운산수 좋은 곳에 산다고 부질없이 말해왔건만나, 오늘에야 참된 별천지를 보았노라.’청도군 운문면 대천리에서 경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공암풍벽은 30m에 육박하는 기세 좋은 바위에 오색 단풍의 손길이 더해져 여행자를 불러 모은다.반원 형태의 절벽은 사철 내내 감탄사를 선물하지만, “가을에 보는 풍광이 최고”라는 게 청도군청 직원의 설명이다.운문댐이 만들어지면서는 풍벽 아래로 가는 길이 끊겼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신비감과 서정적 낭만을 더해준다. 원래 ‘진짜 아름다움’은 만질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을 때 그 진가를 드러내는 법이 아닌가.공암풍벽을 찾아가는 길. 조그만 시골마을 여러 개를 통과하게 된다. 빠알간 감이 익어가는 소읍의 풍경이 그저 그만이다. 잊고 살았던 1970년대 유년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소환됐다.막막한 생의 절벽 끝에 서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꿈꾸는 삶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한탄하는 사람, 절망감에 혼자서 오래 울어본 사람들에게 공암풍벽과 마주해보길 권한다. 희망은 먼 곳에 있지만 온전히 사라지진 않는다.신라 진흥왕 18년(557년)에 창건된 천년고찰 운문사도 빼놓으면 서운한 ‘최고의 가을 관광지’다. 공암풍벽에서 15분쯤 차를 달리면 널찍한 땅 위에 큰 규모로 들어선 운문사와 만나게 된다.이 절은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생긴 후부터 여성 스님들의 사찰로 유명했다. 올라가는 길 주위로 수백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다.운문사에는 국가가 지정한 보물이 9점이나 있다. 절 안을 돌아보며 금당 앞 석등, 동서 삼층석탑, 대웅보전, 비로자나삼신불회도, 달마대사 벽화, 석조여래좌상 등을 찾아보는 재미도 만만찮다.공암풍벽과 운문사는 천천히 걷는 것이 어울리는, 느림이 얼마든지 용인되는 청도의 가을 여행지다.기자가 20대 초반이던 시절.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가 주연한 영화 한 편이 개봉됐다.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는 제목이 참으로 시적(詩的)이라며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난다.밤이 낮보다 아름다운 곳은 또 있다. 화양읍에 자리한 ‘청도 프로방스 빛축제장’이 바로 그곳. 앞서의 영화 제목처럼 말하자면 “아이들의 밤은 어른들의 낮보다 아름답다” 정도가 될 듯하다.수천수만 개의 환한 조명이 청도의 밤을 밝히는 빛축제장은 해가 지고 나서야 그 진가를 드러내는 관광지.“폴 세잔, 마르크 샤갈, 앙리 마티스 등 이름난 화가들이 사랑한 프로방스(포도주로도 유명한 프랑스 남동부 도시)의 분위기를 청도로 옮기고자 했다”는 것이 관계자의 말이다.터지는 빛의 향연에 넋을 빼앗긴 꼬마들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거울로 만들어진 미로를 헤매다가 유령 차장의 안내에 따라 열차에 오른다. 반짝이는 야광 물고기와 신기한 것들로 가득한 프로방스 스튜디오도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빛이 없는 어두운 벤치에선 갓 연애를 시작한 젊은 남녀가 밀어를 속삭이기도 한다. 나이 지긋한 여행자들은 그 모습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밤이 내린 ‘청도 프로방스’는 아이들에겐 즐거움을, 어른들에겐 낭만을 선물하는 공간이다.청도 프로방스 빛축제장 지척엔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와인 터널’이 있다. 청도 특산이라는 ‘감 와인’이 애주가의 눈길을 끈다.대한제국 말기인 1898년 만들어진 이 터널은 붉은 벽돌의 아치형 천정과 자연석 벽면으로 조성돼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터널 중 하나’로 불린다. 지난 2006년부터 와인 숙성고와 와인 바로 사용됐다고 한다.“내부는 항상 섭씨 13~15도 정도로 유지된다. 여름에는 피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려는 관광객들이 찾아온다”는 게 와인 터널 입구에서 만난 동네 주민의 자랑 섞인 설명이다. 숫자를 헤아리기 힘든 와인과 동창과 가족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날짜를 써 붙여 만든 와인 저장통, 꽤 큰 규모의 와인 바가 이곳을 처음 찾은 방문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터널로 들어가기 전 조그만 상가에선 곶감과 감식초, 청도의 농산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손님을 부르는 아주머니들의 경상도 사투리가 정겨웠다.여기까지 와서 ‘감으로 만든 와인’ 한 잔쯤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진열·판매되는 와인도 부담스런 가격은 아니다. 포도가 아닌 다른 과일로 만들어진 와인을 맛보는 색다른 즐거움에 와인 바에 마주앉은 노부부의 얼굴이 미소로 환했다.□청도 프로방스 홈페이지: http://www.cheongdo-provence.co.kr“아는 만큼, 애정을 가진 만큼 보이는 것”이 유적이고 관광지다. 기왕지사 청도를 찾았으니 가능하면 많은 곳들을 둘러보고 싶었다. 여행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운문면에 시원스럽게 들어선 ‘청도 신화랑풍류마을’은 충절을 지키고 예술을 아꼈던 화랑의 정신을 계승하고, 미래를 살아갈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화랑의 정체성을 알리고 연관된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전시관, 연수교육과 수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화랑오계관, 국궁장,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인 화랑촌, 오토캠핑장 등을 갖췄다. 가상현실 체험이 가능한 화랑정신기념관도 흥미롭다.애초엔 소를 키우는 목동들이 재미로 시작한 것이 이제는 청도를 대표하는 관광 상품의 하나가 됐다. 바로 ‘소싸움’이다. 한국 농경사회의 전통이 사람들의 피 속에 존재하는 호전성을 일깨운다. 살아있는 동물들의 다툼이라 호오가 갈릴 수 있으나 흥미롭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주말에는 실전 소싸움을 관람할 수 있다. 경기가 없는 평일에 청도를 찾은 사람들은 ‘청도 소싸움테마파크’에서 아쉬움을 달랜다. 역사관, 문화관, 기획전시실이 청도 소싸움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싸움소와 힘을 겨루거나, 가상의 소와 달리기를 하는 독특한 경험도 할 수 있다. 소싸움장은 물론 테마파크도 입장이 무료다.차를 타고 청도 시내를 달리다가 발견한 특별한 풍경이 있다. ‘범곡리 지석묘군(凡谷里 支石墓群)’이다. 우리의 기억 아득한 곳에 존재하는 옛날 사람들이 삶을 다하고 묻힌 곳. 이 곳의 지석묘들은 상석을 지면에 밀착시켜 만든 남방 스타일이다. 그렇기에 얼핏 보기엔 커다란 바위들이 풀밭 위에 불규칙하게 들어서 있다는 느낌을 준다. 기자 또한 그냥 지나칠 뻔했다.50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동편에 22기, 서편에 12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 유적으로 볼 때 청도엔 작지 않은 규모의 집단거주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학계의 견해다. 범곡리 지석묘군은 경북기념물 제99호.차를 멈추고 잠시 여기를 걸어보았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의 삶은 얼마나 짧고도 덧없는 것일까? 불쑥 다가온 형이상학적 질문들 곁으로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홍성식·심한식기자

2019-10-23

고향 지킨 ‘뚝심’, 직원과 이익 나눈 ‘파격’ 통하다

□ 댈러스의 토종 공항, 러브필드댈러스 러브필드(DALLS LOVE FIELD) 공항은 지난 1917년에 군공항으로 개항해서 1927년부터 민항기를 취급하고 있다.러브필드의 ‘러브(LOVE)’는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닌 1911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조종사 모스 러브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하지만, 사우스웨스트는 ‘THE REASON PEOPLE HAVE ALWAYS LOVED LOVE FIELD(우리가 러브필드를 러브(사랑)해온 이유’라는 캐치프레이즈로 공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사우스웨스트의 본사 역시 이 공항에 있다.러브필드 공항은 단순한 공항으로 보기보단 댈러스 지역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역사를 함께해온 공항으로서도 의미가 크다. 그 유명한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암살 당하기 전, 1962년 11월 22일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을 타고 러브필드 공항에 첫발을 내딛은 바 있다.그때 미국 정계는 혼란한 상태였다. 케네디 대통령의 민권을 앞세운 정책이 각계에서, 특히 극우세력들의 거센 반발을 받는 상황이었다.케네디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텍사스 주 지역의 지지도가 떨어지자 이를 회복시키기 위한 의도로 댈러스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를 역사로 남기기 위해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다운타운 딜리 플라자에 ‘6층 박물관(6th floor museum)’이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에는 현재까지도 케네디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관련한 미국 갤럽의 조사결과, 미국인의 60% 이상은 여전히 케네디 암살에 배후가 있다고 믿었고 오스왈드 단독범행이라는 답변은 30%에 그쳤다.러브필드 공항에서 내린 케네디 대통령은 시가지에 오픈카 종류인 전용차를 타고 부인과 행진하다가 암살범 오스왈드에 의해 모두 3발의 총격을 맞고 사망했다.한발은 전용차를 빗나갔고, 한발은 케네디 대통령과 텍사스 주지사를, 나머지 한발은 케네디 대통령의 머리를 직격했다.오스왈드는 대통령 암살을 위해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가 다른 곳에 비해 덜 눈에 띄면서도 대통령의 동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이기에 딜리 플라자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박물관에는 당시 행진 이후의 스케쥴이었던 댈러스 지역 유지들과의 만남 장소에서 사람들이 대통령의 총격소식을 듣고 손을 모은 채 회복을 기도하는 사진 등 역사의 흐름이 여실히 소개되고 있다.박물관에서 만난 텍사스 주민 앤더슨 씨는 “러브필드 공항은 지역의 상징적인 장소로 케네디 대통령 방문 역사는 물론, 현재 댈러스 발전에 일등공신 역할을 하는 교통인프라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러브필드 공항을 고집한 사우스웨스트지금의 댈러스 제1공항 댈러스 포트워스 국제공항이 완공되어가는 당시, 사우스웨스트는 기존의 러브필드 공항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면서 공항 관리공단 측에 신공항으로 옮겨 가지 않겠다는 뜻을 미리 전했다.댈러스 도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러브필드 공항이 도시에 빨리 들어가 일을 보고 싶어하는 출장자들에게 안성맞춤 공항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객들을 상대로 도심에서 30분이나 떨어진 포트워스 공항으로 발착지를 옮겨 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게 사우스웨스트의 입장이었다.하지만, 1968년 채권 규정에 의하면, 신공항은 항공사들의 이착륙비와 시설 사용비 등 공항 이용료를 통해 공항 시설에 투자된 돈을 회수하기로 되어 있었고 만약 손실이 발생하면 공항 관리공단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결국 이전에 사우스웨스트가 휴스턴의 인터컨티넨털에서 하비로 옮겨 간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휴스턴과 포트워스 일대의 항공사들은 또다시 사우스웨스트의 공항 비이전 고집을 괘씸하게 생각해 1972년 6월 6일, 법원에 고소한다.또다시 법정 싸움에 돌입한 사우스웨스트는 32일간의 심리 끝에 ‘러브필드 공항에 머물러도 좋다’는 판결을 간신히 얻을 수 있었다. 연방 대법원에서도 상소를 ‘이유 없음’으로 기각했다.오히려 1975년 2월 14일 사우스웨스트를 공격한 브래니프와 택사스 인터내셔널이 미 정부에 의해 기소됐다. 혐의는 사우스웨스트의 정당한 영업 행위를 방해해 그들을 항공업계로부터 쫓아내려 했다는 것이었다.브래니프와 텍사스 인터내셔널은 ‘이의 없음’으로 혐의를 인정했고 10만 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1977년, 러브필드 공항을 사수하기 위한 5년간의 법정공방은 사우스웨스트의 승리로 끝났다.물론 33회에 걸친 사법부 및 행정부 처분을 거치면서 사우스웨스트는 전국의 법원이나 행정부 중 가보지 않은 곳이 손에 꼽을 정도로 경험(?)을 쌓았다.이후에도 1979년에 연방의회가 포트워스 공항을 살리기 위해 러브필드에서 장거리 영업을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정하자, 사우스웨스트는 해당 조항에서 취항이 허가된 인근 주에 미니 허브를 만들어서 환승환적을 해가면서까지 영업했다.해당조항은 지난 2006년에 폐기됐고 사우스웨스트는 사랑하는 러브필드를 지켜냈다. 더욱이 공항에서 나가는 도로 이름마저 사우스웨스트의 창업자의 이름을 따 ‘허브 캘러허 웨이’로 바꿔버렸다.□ 러브필드 사랑만큼 색다른 조직 운영러브필드 공항을 고집하는 사우스웨스트는 그 애향심만큼이나 조직운영에서도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러한 사우스웨스트의 정신을 키워온 캘러허는 1978년 회장에 취임했다. 취임 후 인사부에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을 채용하라’라는 특별 주문을 했다.사우스웨스트는 유머가 많은 사람일수록 변화에 잘 적응하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창조적이며 또 보다 효율적으로 일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놀 때 열심히 놀고 남들보다도 더 건강하다는 것.사우스웨스트는 직장 분위기가 밝지 않으면 생산성, 창조성, 적응성을 떨어뜨리며 직원 채용 기준에서 유머를 최우선 조건으로 설정함으로써 직장 안팎에서 즐거움, 자부심, 재미 등을 찾아가는 방법을 고민한다.특히 직원을 자원 이상의 존재로 여긴다. 직원 채용에 통일된 하나의 근본 원칙으로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을 뽑는다는 것이다.유머 감각은 물론이고, 남들에게 베풀 줄 아는 이타심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도 중요 기준이다. 즉, 태도를 본다는 것인데 실제로 항공업계에서는 파격적인 회사 제복인 버뮤다 반바지를 입을 용의가 있냐고 물어보고,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탈락시켰다.모험정신을 본다는 의미로, 필요한 일은 뭐든지 하려고 달려든다는 정신을 함양시키는 문화로써 사우스웨스트에 유난히 장기 근속자가 많은 이유 중 하나로도 들고 있다.‘10분 턴’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적 자세가 이미 입사에서부터 만들어짐을 볼 수 있다.사우스웨스트는 항공사의 이익도 직원들에게 나눠줄 만큼 파격적이다. 1973년 사우스웨스트는 항공사로는 처음으로 직원을 위한 이익 나누기 계획을 도입해다.오늘날에도 모든 사우스웨스트 직원은 채용된 다음해 1월 1일자로 이 계획에 참여하고 있다.사우스웨스트는 세전 소득의 15%를 이익 나누기 계획에 배정한다. 1970년대에 사우스웨스트는 사원들의 임금 양보를 요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 주식을 나눠 준 유일한 항공사였다.1973년 이래, 매년 이익을 내온 사우스웨스트는 이익을 직원들에게 나눔으로써 오히려 주가가 몇배로 뛰어오르는 진풍경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익 나누기는 중역들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직원들을 백만장자로 만들었다. /황영우기자 hyw@kbmaeil.com

2019-10-23

원평동 일원 도시재생뉴딜사업 ‘구미를 당기다’ 선정

도시재생에 관광을 접목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은 옛것을 새롭게 고쳐 쓰는 것에 한정돼 있지만 폐공장, 오래된 창고, 오래된 도심 등을 리모델링해 카페나 미술관, 문화거리로 조성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산업수도인 구미시도 근대 산업 유산을 이용해 산업관광도시의 외연을 넓히고 있는 지금, 구미의 정체성을 살린 지속가능한 산업관광 도시로의 발돋움이 가능할지, 그 가능성을 살펴봤다.△도시재생, 관광 트랜드가 되다최근 국내에서도 도시재생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많은 광역·기초 자치단체들이 지역 특성에 맞는 도시재생 모델을 찾는데 주력하고 있다. 낡은 구도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도시재생이 주변 지역에 경제적 파급효과와 더불어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시재생이란 무엇일까. 2013년 제정된 도시재생특별법 제2조는 도시재생을 인구의 감소, 산업구조의 변화,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 주거환경의 노후화 등으로 쇠퇴하는 도시를 지역역량의 강화, 새로운 기능의 도입·창출 및 지역자원의 활용을 통해 경제적, 사회적, 물리적, 환경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정의했다. 즉, 아파트 건설 위주의 개발사업에서 벗어나 낙후된 부도심을 살리고, 여기에 주민들의 삶의 질도 함께 향상시키는 것을 의미한다.사람이 사는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바로 도시재생의 본질이다. 도시재생을 통해 관광명소로 거듭난 곳들은 생각보다 많은데, 대표적인 예가 서울역 고가를 재생한 ‘서울로 7017’, 폐채석장을 활용한 ‘포천아트밸리’, 폐광 이후 방치됐던 광산동굴을 재생한 ‘광명동굴’, 한옥보존지구로 개발이 묶여있던 ‘익선동’ 등이다. 이곳은 최근 관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하는 관광지 100선에 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골칫덩어리로 여겨지던 폐공장, 오래된 창고 등이 카페나 미술관으로 바뀌면서 그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으로 뜨고 있다.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지속가능하고, 운영주체만 분명하다면 도시재생이야말로 가장 큰 관광자원임이 틀림없다.△버려진 섬에서 예술의 섬으로… 일본 ‘나오시마’일본의 나오시마는 한때 구리제련소로 유명한 지역이었으나 1960년대 이후 경기 침체로 인구마저 줄어들면서 버려진 섬으로 전락했다. 그러다 섬의 낡고 버려진 집들을 예술작품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실천하면서 예술의 섬으로 거듭났다. 섬의 동쪽 혼무라 지역을 중심으로 1998년에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작품들이 마을 곳곳에 위치하고 있어 도보로 마을 곳곳을 둘러볼 수 있도록 조성돼 있다. 빈집을 활용한 카페와 게스트 하우스도 인기를 얻고 있다. 도시재생으로 관광명소로 거듭난 나오시마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주민 참여다. 주민들이 직접 작가들과 협업해 폐가를 작품으로 만들었고, 관광객들에게 직접 작품 설명도 하며, 예술제 기간에는 물품보관소를 운영하는 등 주민들이 주체가 돼 섬을 이끌어가고 있다. 주민 스스로의 변화 분위기는 관광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해 1992년 방문객이 3만 6천1명이던 것이 2004년 10만 6천958명, 2013년 70만 5천72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현재는 매년 5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3년마다 열리는 예술제 기간에는 100만여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기업의 사회적 가치로 탄생한 ‘로컬라이즈 군산’국내 민간기업 중 최초로 도시재생에 나선 SK그룹의 에너지 기업 SK ES가 지원하는 프로젝트 ‘로컬라이즈 군산’이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로컬라이즈(Local:Rise)군산은 ‘지역화하다(Localize)’와 ‘떠오르다(Sunrise)’를 조합한 것으로, 군산시의 구도심인 영화동 일대를 문화·관광 중심지로 발전시켜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현재 23개 소셜 벤처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항구 도시로 번영을 누렸던 군산시가 최근 주력산업인 조선소, 자동차 산업의 침체와 공장폐쇄로 어려움에 직면하자 SK ES가 그룹의 사회적 가치 기조에 따라 지난해 10월 시작한 것으로, 스웨덴 말뫼 사례를 벤치마킹했다. 영화동 영화시장 골목길에 위치한 3층 건물을 개조해 로컬라이즈 타운으로 만들어 23개 소셜 벤처기업들이 사용하도록 했다. 이들 23개 소셜 벤처기업들은 ‘문화가 흐르는 관광도시’, ‘모두가 잘 사는 경제도시’, ‘골고루 누리는 행복도시’라는 3가지 테마로 군산 지역의 일자리 창출과 광광객 유입을 목표로 지역의 낡은 공간을 리모델링해 문화·상업 공간을 구축하거나, 지역 특색을 살린 여행상품, 지역 특산품 개발 등 개별 사업을 구체화하고 있다. 지난 12일에는 영화동 일대에서 열린 ‘로컬라이즈 군산 UP 페스티벌’에서 ‘군산을 즐기는 새로운 방법’이라는 주제로 프로젝트 진행 과정을 공유해 큰 관심을 모았다. 국내 최초로 기업의 사회적 가치로 탄생한 ‘로컬라이즈 군산’으로 구도심 영화동 일대가 젊은이들의 거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젊은 벤처기업가들의 아이디어가 지역 관광자원과 만나면서 침체된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로컬라이즈 군산’은 도시재생과 관광산업의 새로운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구미, 도시재생에 관광자원을 녹이다구미시는 지난해 장세용 시장이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도시재생 사업에 들어갔다. 장 시장은 자타가 인정하는 ‘도시재생 전문가’로 취임과 더불어 구미시의 도시재생 사업을 체계적으로 진두지휘하며 성과를 내고 있다. 구미시 특성에 부합되는 도시재생을 찾기 위해 취임 초기, 관련 공무원들과 독일과 네덜란드를 방문해 도시재생의 의미와 과정, 파급효과에 대해 직접 알아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시는 지난해 국토교통부가 추진하는 도시재생 뉴딜정책 공모에 원평동 일원 ‘구미(口味)를 당기다’를 주제로 신청한 사업이 최종 선정됐다. 총 사업비 420억 원을 들여 2023년까지 원평동 일원 22만 3천㎡에서 주거환경개선사업과 복합문화전시공연시설 조성 사업 등이 진행된다. 모든 사업이 주민 주도형으로 진행되며, 이 중 청년문화·예술콘텐츠 조성 사업이 구체화되면 산업관광과 연계할 계획이다. 선주원남동의 소규모 재생사업과 금오시장로의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은 지역 특색을 살린 문화행사를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진행하도록 함으로써 도시재생의 의미와 관광자원으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시는 앞으로 공단동에도 경제 기반형의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할 계획으로 도시재생사업으로 도시 공간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관광 등 도시 생태환경 변화에 주력할 방침이다. 시는 구도심의 문화·예술 활성화를 통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전략을 세우고 세부적인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김락현기자kimrh@kbmaeil.com

2019-10-23

‘불에는 불’로 맞선 영조의 한 수

영조가 왕이 된 지 4년째 되던 해인 1728년 3월, 당시 야당이었던 이인좌(李麟佐) 등이 정권 탈취를 기도하며 난(亂)을 일으켰다. 이 난의 특징은 사대부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란 점이다. 난이 평정되자 ‘유3천리’에 처해진 연좌인 10명이 각자의 사연을 짊어지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왔다.골수 남인인 이인좌(34세)는 세종대왕의 11세손이었다. 선대 때부터 청주목 송면(松面.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일원에서 살고 있었다. 청천면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제향한 화양서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이인좌는 노론의 성지(聖地)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그들의 위세를 보며 자랐다. 이인좌는 남인이 축출된 1680년(숙종6) 3월의 경신대출척 때 서인에게 사사된 윤휴(尹鑴)의 손녀사위였다. 이런 태생적 여건으로 그는 노론이 집권할 당시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입신(立身)이 어려운 처지였다. 더구나 1694년(숙종20) 갑술환국(폐비민씨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실권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 이후 그를 포함한 일족들은 과거시험 응시조차 할 수 없는 폐족(廢族)의 신분이었다. 그런 그가 노론에서 추대한 영조를 인정할 수 없다며 세력을 모아 난을 주도한 것이다.이인좌의 난은 전국적인 내란이었다. 그래서 그 명칭도 지방마다 다르다. 경상도에서는 거창의 정희량이 주도를 하였으므로 정희량의 난, 전라도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이 주도를 했으므로 박필현의 난, 충청도에서는 청주일대의 이인좌가 주도를 했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고 한다. 또 누렁 원숭이의 해인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그냥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불린다. 이 난의 내막부터 진압과정을 살펴보면 영조의 탕평정치에 대한 노련한 한 수가 돋보인다.왕이 되기 전 영조는 붕당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임금이 된 후에는 탕평책(蕩平策)을 본격적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를 왕좌에 앉히기까지 공을 들인 노론인사들이 가만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론들은 지난 1721년(경종 1)~1722년 사이 왕통문제와 관련하여 소론이 노론을 숙청한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부터 묻고 나왔다. 가장 먼저 말문을 튼 이는 이의연(李義淵)이었다. 지난날 처형된 노론 대신들을 신원(伸寃)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는 너무 성급한 청이었다. 당시는 노론과 소론의 연합정권이 성립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이의연은 오히려 소론의 반대에 부딪혀 귀양을 가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그러나 노론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목호룡(睦虎龍)을 매수해 신임옥사를 주도한 김일경을 처벌해야 된다는 상소가 각처에서 연달아 들어왔다. 결국 영조는 김일경과 임인년 고변으로 공신이 된 목호룡을 잡아와 국청(鞫廳)을 열었다. 이들은 심문을 받다가 죽었다. 자신들의 정치적 후원자인 경종도 이미 죽었고, 어디 기댈 곳이 없었던 소론들은 이제 모두 제 얼굴빛이 아니었다. 천만다행인 것이 그래도 영조가 탕평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조는 김일경과 목호룡을 죽이면서까지 소론에 대한 탄압을 하면서도 소론의 이광좌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되도록 붕당을 막아보려고 노력한 결과였다.하지만 영조의 이런 정책에 맞서는 노론의 공격은 집요했다. 결국 영조는 신임옥사 때 노론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데 앞장 선 이진유 등 여섯 명을 귀양 보냈다. 이어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 소론대신들도 조정에서 내쫓고, 민진원과 정호(鄭澔) 등 노론세력들을 영입했다. 득세는 했지만 노론들은 영조의 솜방망이 처분을 못마땅해 했다. 귀양을 보낼게 아니라 이광좌 등 여섯 명은 반드시 참형에 처해야 한다며 계속해서 들볶았다. 참다못한 영조가 발끈했다. 노론 대신들이 무고와 모함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들을 밝혔고, 원통한 것을 풀어줬으면 됐지 더 이상의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온다며 화를 내었다.노론들은 승복은커녕 마치 난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다. 화가 치민 영조는 영부사(領府事) 민진원, 우의정 정호 이하 여러 노론들을 파면하고, 2년 전에 파면했던 소론계의 이광좌·조태억 등을 다시 등용하여 정승으로 삼아버렸다. 정부요직도 소론들로 채워 넣었다. 졸지에 정국이 뒤바뀐 것이다. 노론은 복수에 너무 목메다가 오히려 자신들의 지위를 잃은 꼴이 되었다. 이 해가 정미년(1727)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 ‘정미환국(丁未換局)’이라 한다.영조의 이 정미환국이 바로 이듬해 일어날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신의 한 수’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 소론은 온건파인 온소(緩少)와 강경파인 준소(埈少)로 갈라져 있을 때였다. 영조와 공존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소론 온건파들이었다.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박필현 등 준소(埈少) 인사들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할 계획을 짜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반란 세력들의 의견이 분열되었고, 막상 반란이 일어나자 한양 세력들은 내응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다시 이야기를 되돌리자면, 무신란을 준비하는 세력들은 남인과 소론의 강경파들이었다. 이들은 난의 명분으로 경종이 영조에게 독살되었다는 의혹과, 영조는 숙종의 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웠다. 난이 일어나기 1개월 전, 이들은 이런 내용이 적힌 괘서를 전국 주요 길목에 내걸며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密豊君)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단숨에 전국 각지에서 20여 만 명이 동조세력으로 가담했다. 그중에는 향리, 관군, 노비까지 다양한 계층이 포함되어 있었다.기회를 엿보던 이들은 1728년(영조4) 3월 15일, 이인좌를 대원수로 삼아 합천 묘산에서 기병(起兵)을 하면서 반란이 시작되었다. 반군은 장례 행렬로 위장해 무기를 운반했다. 낮에 가까운 숲 속에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밤이 되면 숨겨둔 무기를 들고 내응 세력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청주성을 점령해버렸다. 병영을 급습해 충청병사 이봉상 등을 살해하고 청주목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했다. 관아를 점령한 후 백성들에게 곡식을 풀어 나누어주자, 전염병과 기근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이 살기 위해 반군에 가담했다. 경종을 위한 복수의 기(旗)를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군중(軍中)에 설치해 아침저녁으로 곡배를 하면서 군사들을 뭉쳐나갔다.영조는 이 반란에 큰 충격을 입었다. 소론에게 권력을 실어 주었는데도 소론의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더구나 왕위에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그 불안감은 더 컸다.반군은 파죽지세로 청주에서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으로 향하였다. 이들이 한양을 향해 북상할 때, 영조는 또 맞불작전에 들어갔다. 소론인 병조판서 오명항을 순무사(巡撫使)로 삼아 불로 불을 끄는 전략에 나섰던 것이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참여한다고 약조는 돼 있었던 소론계 인사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반군들에게 협조를 하지 않았다. 오명항은 오히려 이인좌의 첩자들을 역이용해서 유인전술을 펼쳤다. 반군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일제히 공격했고, 반군은 수적 열세에 밀려 무너지기 시작했다. 만약 한양의 반군세력들이 안성·죽산전투에 참여했더라면 상황은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배신으로 3월 24일 안성에 이어 죽산에서도 패한 이인좌는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안성·죽산에서 반군의 패보는 삼남 지방의 반군에도 큰 타격을 줬다.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청주를 거쳐 4월 초 추풍령을 넘어 남하했을 때에는 영남지방의 반군도 이미 지방관군에 의해 소탕된 후였다. 무신란이 17일여 만에 진압된 것이다.영조는 난을 수습하는데도 직접 나섰다. 수많은 관련자 중 핵심자만 처벌하고 그들을 따라간 백성들은 처벌하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영조실록에 무신란의 역적으로 기록된 사람은 총 642명이지만, 이중 62명만 극형에 처해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극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연좌된 일가친족들은 모두 유배를 보냈다. 이때 이들의 친족 일부가 장기로 유배를 온 것인데, 그 일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우선 1728년 (영조4) 6월 21일 안찬서(安賛瑞)의 처 끗열(唜烈), 딸 연이(連伊)와 사매(士每), 아들 일기(日記)등 일가족 4명이 연좌되어 장기로 왔다. 이 집안의 가장인 안찬서는 이인좌의 군대에서 장수로 활동하다 역적으로 몰려 참형에 처해진 후였다.이듬해인 1729년(영조5) 5월 20일에는 최용서(崔龍瑞)의 처 봉업(奉業)이 왔고, 6월에는 아들 최흥선(崔興先), 딸 최아기(崔岳伊)가 연좌되어 장기로 왔다. 가장인 최용서는 이인좌의 군대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였다. 가장은 참형에 처했고 일가족 3명이 장기로 온 것이다.8월 23일에는 울진현 주둔군(駐屯軍)에 노예로 공급되어 있던 조세추(曺世樞)의 동생 탈(梲)과, 유3천리 안치에 처해졌던 조카 조중휴(曺重烋)가 이배되어 장기로 왔다. 조세추는 문경에 기반을 둔 조하주(曺夏疇:1650∼1725)의 일족이었다. 조하주는 이인좌의 외할아버지인데, 처남이 성호 이익(李瀷)이다. 그는 남인으로 영남 제일의 부자였다. 남인의 핵심 축이었던 조하주 문중은 난에 가담하여 재정을 책임지는 등 큰 역할을 하였지만 이 난이 실패함으로서 역적가문으로 몰렸다.난이 평정되고 17년이 지난 후, 새삼스럽게 장기로 유배를 온 사람도 있었다. 당시 조사에서 빠졌던 김덕삼(金德三)의 조카 3명이 숨어살다가 공홍(公洪: 공주 홍주) 감사에게 적발되었던 것이다. 공홍감사는 이를 의금부에 보고를 하였고, 의금부에서는 이들을 유3천리 안치형에 처했다. 이때 김덕삼의 조카 김동엽(金東曄)이 장기로 위리안치되었다. 김덕삼은 이인좌의 난에 깊이 개입하였다가 대역부도죄로 이미 1745년(영조21) 12월 18일 능지처사되었다.이인좌의 난으로 영조는 즉위 초부터 주창한 탕평책의 명분을 더욱 굳힐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왕권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골육상쟁(骨肉相爭)의 비극이라고 할까. 무신란을 평정하는 데는 정미환국으로 등용된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난의 주모자 대부분도 소론이었다. 때문에 소론들의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이후에는 노론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소론은 재기 불능상태가 된다. 이 사건 이후 조정에서는 지방 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으며, 덩달아 영남지역 선비들의 중앙정계 진출은 앞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하게 되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0-22

‘무조건 성공’ 보장 없어… ‘지역관광 상생’ 전략 세워야

김영록 전라남도지사는 지난 10월 18일 ‘목포해상케이블카’ 탑승체험을 한 후 정인채 새천년종합건설 회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도지사가 직접 케이블카 사업을 맡은 건설사에 감사패를 전달한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데, 이는 그만큼 목포해상케이블카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전남도청에 따르면 새천년종합건설은 850억원을 투자해 목포 북항∼유달산∼고하도를 잇는 총 연장 3천234m(해상 820m·육상 2천414m)의 목포해상케이블카를 조성해 지난 9월 개통했다. 이 케이블카는 국내 최장 운행거리와 전 세계 최고 지주 높이 155m를 자랑하고 있다. 목포해상케이블카 개통 이후 18일까지 33일간 케이블카를 탑승한 이용객 수는 21만1천여명에 달한다. 하루 평균 6천400명이 이용한 셈이다. 주중 5천여명, 주말 1만여명이 이용하는 등 케이블카 개통으로 목포를 찾는 관광객 수가 급증하면서 서남해안을 대표하는 명품 관광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김 지사는 감사패를 전달하면서 “최근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새천년종합건설의 아낌없는 투자와 헌신에 감사드린다”며 “전남 서남해안의 아름다운 섬과 바다 등을 세계적 해양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자 하는 전남의 새천년 비전인 ‘블루투어(Blue Tour)’ 실현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지역 사회가 똘똘 뭉쳐 케이블카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경우도 있다.설악산오색케이블카 사업이 전형적인 예다. 설악산오색케이블카사업의 경우 이를 백지화시킨 환경부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며, 이와 관련해 친환경설악산오색케이블카추진위원회는 지난 10월 10일 양양군 양양읍 남대천 둔치에서 ‘환경부 규탄 범도민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앞서 환경부는 지난 9월 16일 설악산오색케이블카사업과 관련해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사업이 자연환경과 생물 다양성 등에 미칠 영향과 사업 승인 부대조건의 이행 방안을 검토한 결과, 환경 가치 훼손이 심각하고 보완 대책도 미흡해 사업이 재검토돼야 한다”며 부동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지난 2015년 8월에 국립공원위원회가 조건부 승인을 낸 이후 4년 만에 이러한 결정이 떨어지자, 친환경설악산오색케이블카추진위원회를 비롯한 지역사회는 “환경부는 적폐를 내세워 강원도와 양양군을 헌신짝처럼 버렸다”며 “사업을 불허하려면 일찍 할 것이지 수년 동안 끌어오다가 이제 와서 부동의 한 환경부를 그냥 둘 수 없다”고 즉각 반발했다. 김진하 양양군수 역시 “양양군민 모두가 단합된 힘으로 밀고 나가자”고 밝히는 등 민관이 하나 돼 케이블카 사업을 다시 재개하기 위한 바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이들 사례 외에도 통영케이블카의 성공으로 촉발된 케이블카 건설 사업은 ‘무조건 성공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수많은 지자체에서 추진하고 있다. 포항을 비롯해 강화, 춘천, 화성, 거제 등이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케이블카 사업에 뛰어드는 등 전국이 케이블카로 들썩이는 상황이다.□ 양날의 검, 케이블카그렇다면 케이블카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 사업일까.여수해상케이블카의 경우 출발은 좋았으나, 현재 시와 업체가 소송을 벌이며 시끄러운 상황이다. 사업 시작 당시 운영업체에서 매출액의 3%에 해당하는 기부금을 지역사회 환원 명목으로 내기로 했었지만, 이를 약 2년 전부터 거부하며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이어 업체 측은 지난 2016년 만들어 여수시에 기부한 오동도 주차타워도 다시 찾아오겠다는 의지를 최근 내비치고 있어 지역 사회와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이는 기본적으로 민자사업으로 추진됐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데, 사천시시설관리공단이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사천바다케이블카의 경우 “민자사업 이슈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다.관광 사업의 경우 서로 상생하는 ‘공적인 측면’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사천시시설관리공단 박태정 이사장은 “우리나라 케이블카 중 케이블카 수익만으로 제대로 돌리는 곳이 절반도 될까 말까다”며 “사천시와 같이 시설공단이나 공사가 하는 것이 버티는 면에서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는 케이블카의 미래에 대해 “어느 시점에 가면 분명히 인건비가 나오지 않을 경우가 있다”면서 “만약 시에서 운영한다면 적자분에 대한 보전이 되면서 재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겠지만, 개인 회사는 바로 문을 닫아야 한다. 이는 상당한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하며 실패에 대한 대비가 충분히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케이블카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그는 “돈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이와 관련해 “이 상태로 가면 5년 내나 10년 내 적자로 가지 않을까 싶다. 다른 것을 찾아서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주변에서 연계하고 소비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로서의 케이블카를 강조했다. 즉 주변과 시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런 부분은 민자 사업으로는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을 내비친 것이다.그는 “개인이 한다면 주변 땅을 다 사서 하지 않는 이상 서로 상생하는 점은 불가능하다. 케이블카를 실컷 지어놨더니 주변 식당이나 상가가 돈을 벌어가는 상황이 온다면 사업주는 어떤 판단을 내리겠나. 고철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10년을 해야 본전을 찾을 것이다. 그 이후를 돌아봐야 하고 대비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포항은 아직 시작단계, 지역 사회와 충분한 소통 필요민자 사업 이슈 외에 지역민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지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부산에서는 해운대와 이기대를 연결하는 해상케이블카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 이를 둘러싸고 지역사회는 찬반 논란이 가열되며 둘로 쪼개진 상황이다. 반대 측에서는 “공공재인 부산 앞바다가 기업에 사유화되고, 동백유원지와 이기대가 상업 개발로 환경이 훼손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찬성 측에서는 “해상케이블카가 설치되면 연간 312만명이 이용할 것으로 추정되는 등 침체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케이블카 도입은 필수다”라고 맞서고 있다.포항의 경우 아직 시가 업체와 MOU만 맺은 상황이어서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았지만, 타 지자체의 사례를 충분히 검토해 사업 실패 확률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업지 선정부터 사업 추진 방식까지 전부 백지화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지역민을 포함한 전문가들과의 충분한 검토와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소리다.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민자 사업으로 추진하더라도 지역 관광과의 상생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해법이다. 만에 하나 케이블카가 수익성 저조로 폐쇄돼 흉물로 전락한다면, 영일만관광특구 지정으로 상승기류를 타고 있는 포항 관광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입지에 대한 재논의도 필요하다. 포항의 현 사업지인 영일대해수욕장과 관련해 타 케이블카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풍광이 걱정스럽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즉 동해 자체가 지평선 외에 볼 것이 없는 상황에, 영일대 해수욕장의 나름 장점인 포스코 야경의 경우에도 “산업단지라는 정서가 관광적인 목적으로 크게 와 닿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상생의 손으로 대표되는 일출 명소이자 호미반도 해안둘레길로 이미 풍광의 우수성이 입증된 호미곶과 같은 최적의 장소는 제외하고, 굳이 주거지와 상가가 몰려 있는 영일대해수욕장을 고집하는 것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계획대로 영일대해수욕장이 사업지가 된다면, 해수욕장과 바로 인접해 있는 주민들과의 갈등 또한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이미 국제적인 행사로 거듭나고 있는 포항국제불빛축제만 하더라도 영일대해수욕장 인근 주민들이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으며, 여기에 추가로 케이블카가 들어서면서 생기는 소음과 인파는 분명히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여수시 관계자는 이와 관련, “여수는 섬지역이고 교통이 평지와 비교하면 제한돼 있어서 일시적으로 몰리면 여파가 시 전체로 퍼져 나간다”며 “포항의 경우에도 케이블카 사업지 인근에 주거지가 있다고 하는데, 복잡한 곳에 설치하게 되면 교통 문제가 가장 걱정이다”고 밝혔다.사업 타깃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케이블카는 인근 관광지와의 연계가 중요하며, 어떤 연령층을 주요 타깃으로 잡느냐에 따라 이 연계의 방향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사업 초기단계부터 고령층을 중심으로 정적이고 휴양적인 프로그램으로 짤 것인지,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활동적이고 체험적인 프로그램을 짤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잡아나가야 한다.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케이블카가 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전국에서 너도나도 해당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케이블카 자체가 ‘레드오션’이기 때문이다. 수요는 정해져 있는데 파이만 늘어나면 경쟁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포항시가 단순히 “MOU만 맺었으니 끝”이라는 자세에서 벗어나 좀 더 적극적으로 사업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끝※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2019-10-21

고요한 가을 숲에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내 숨소리만이

올해 여름 더위는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예년 같은 폭염이 찾아오지 않아 좋았다. 하지만 세상이 하도 소란스러운 탓에 장마보다 권태롭고 뙤약볕보다 고통스런 계절이었다. 연달아 북상하는 가을 태풍도 세상의 온갖 소음과 낯 뜨거운 풍경들을 다 쓸어버리진 못했다. 자꾸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이상, ‘날개’)에서부터 불어오는 열풍 때문이었다. 생활과 사람과 뉴스로부터 내가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 아직 여름의 잔열이 남아 있는 서울을 벗어나 더 깊은 가을로 들어가는 순간,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김지훈, ‘시월의 잠수함’)음을 나는 믿어보기로 했다.다시, 울진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경북 바닷길 537km 기행의 마지막 발걸음을 뗀 것이다. 두 개의 계절이 지났다. 어느덧 햇살은 땅 위에 금빛 앙금을 남겨둔 채 허공에서 점점 얼음의 투명함을 입고 있었다. 가을, 가을이었다. 서울을 떠나 영동고속도로를 통과하면서 강릉 옥계의 흐린 낯빛과 마주봤다. 먹장구름이 심상치 않았다. 차창 밖 중앙분리대 너머에서 동해는 회색빛으로 넘실거렸다. 희끄무레한 파도가 마치 늙은 아버지의 흰머리 같았다. 삼척에 들어서자 빗방울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비는 단풍을 더욱 붉게 물들이고, 갑각류의 속살을 단단하게 할 것이다. 서리를 흉내 내며 지상으로 흩어지는 가을비는 겨울의 마중물이다. 비가 그치고 나면 기온이 더 내려가고, 그때 빗방울은 눈송이로 몸을 바꿔 포구와 산 능선과 슬레이트 지붕과 녹슨 자전거 안장을 하얗게 덮을 것이다.지난 늦봄의 울진은 아까시 내음으로 온몸을 뒤채는 거대한 한 마리 짐승이었다. 그때 불영사로 가는 길, 나는 금강송 군락을 통과하면서 입술까지 초록빛으로 물들어버렸다. 끊임없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아까시 향기에 대책 없이 취해 정신을 못 차렸다. 망양정에서 바라보는 아득한 ‘세상의 끝’ 수평선을 향해 나를 던지고 싶었다. 죽변항 대원대게센타에서 박달대게 살을 파먹으며 감격했다. 그러나 가을 울진에서는 그 들뜬 황홀감을 아마 다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오월의 무성한 녹음, 웅장한 초록 그늘, 짙은 초록 페로몬, 축제의 환희, 나른한 게으름은 이미 옛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대신 또 다른 기쁨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어느새 내 발길은 울진 북면의 응봉산 덕구계곡을 향하고 있었다.숲에 들자 비가 그쳤다. 단풍잎 사이로 옥빛 계곡물이 흐르는 풍경에 절로 감탄을 터뜨렸다. 나뭇잎을 흔드는 계곡의 바람은 “별보다 반음 낮고 얼음보다 반음 높은 음조로”(김영래, ‘큰개자리 여인숙’) 내 귓가에서 음악이 되었다. 숨을 쉬면 서늘한 공기 끝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뒷맛이 묵직한 와인을 마시는 듯한 미감을 만끽하며 계곡의 더 깊은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숨이 달 수도 있구나! 들이마시는 숨이 맛있어서 벌컥벌컥, 돌계단 몇 개를 거침없이 뛰어 올랐다. 고요한 가을 숲에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내 거친 숨소리만이 들렸다. 떼쓰다 악에 받쳐 우는 애 울음 같던 매미 소리 잠잠한 수풀 속에서 풀벌레들이 이따금 장단을 맞췄다.서둘러 잎을 버린 우듬지마다 흐린 가을 하늘이 걸려 있었다. 맑은 날씨가 아니어도 대기가 머금은 물방울들 덕분에 계곡의 오후는 한없이 청명했다. 아니다. 청명함은 내 마음의 날씨에서 돋아나는 것, 가을엔 풍경의 여백만큼이나 마음도 넉넉해진다. 봄도 좋지만 봄은 변덕스럽고 까칠하다. 봄에 비해 가을은 안정적이고 성숙하다. 예측 가능한 계절이자 다 자라난 어른이다. 30여분 정도 가을 숲을 걸어 들어가 용소폭포의 아름다움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세상과 시간을 오래 견딘 지혜로운 이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착각을 했다. 그는 물소리로, 나는 내 마음의 문장으로… 이야기가 깊어지려는데, 후두둑, 빗방울이 다시 떨어졌다.덕구계곡에는 4㎞의 송수관이 설치돼 있다. 이 송수관은 땅에서 솟는 온천수를 실어나른다. 덕구온천리조트는 우리나라에서 단 한 곳뿐인 자연용출온천 관광 시설이다. 칼륨, 칼슘, 철, 중탄산, 불소, 나트륨, 마그네슘, 라듐, 황산염, 탄산, 규산 등이 함유되어 약알칼리성을 띠는 이곳의 온천수는 사철 자연용출온도 42.4℃를 유지한다. 그 물로 온천욕을 하면 신경통 완화 및 피부미용에 좋다고 한다. 행정안전부에서 지정한 ‘국민보양온천’ 시설인데, 까다로운 자격요건을 모두 충족했다. 인체유해성분 안전기준 25℃ 이상의 온천수를 하루 300t씩 양수할 수 있으면 ‘일반온천’으로 개발 및 이용이 가능하지만, ‘국민보양온천’의 기준은 훨씬 엄격하다. 온천수는 35℃ 이상이거나 25℃ 이상인 경우 유황과 탄산 등 인체에 유익한 성분을 1000㎎/ℓ 이상 함유하여야만 한다. 그밖에도 주변에 빼어난 자연 경관이 있어야 하며, 숙박 및 편의 시설 등을 갖추어야 보양온천으로 인증 받을 수 있다.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갈아입을 옷과 간단한 짐을 챙겨 ‘대온천장스파월드’로 향했다. 빗줄기가 거셌지만, 비를 맞으며 노천 온천을 즐길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스파월드’부터 이용하기로 했다. 스파는 실내와 야외 시설로 나뉘어져 있는데, 수영모와 수영복을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 야구모자와 반팔, 반바지도 허용된다. 다만 면 소재의 티셔츠는 지양하는 게 좋다. 인공 야자수와 분수, 선베드가 이국적 풍경을 연출하는 실내 스파에는 평일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 노천 레몬탕과 녹차탕, 히노끼탕에 번갈아 몸을 담갔다. 42.4℃의 온천수는 마음까지 훗훗하게 데우며 그동안 도시에서 쌓인 피로와 불안, 근심들을 한꺼번에 씻어주었다. 너무 편안해서 달콤한 졸음이 몰려왔지만, 차가운 빗방울이 이마에 떨어질 때마다 아늑함에 나른해지던 정신이 번쩍 깼다.이번엔 대온천장에서 목욕할 차례다. 열탕에 몸을 담갔다가 찬비 흩날리는 야외 데크에 나가 뜨거운 알몸을 서늘한 공기로 식히는 묘미가 각별했다. 살갗에 오소소 돋는 소름이 마치 낯별처럼 보였으니까. 사우나까지 알뜰하게 이용한 후 몸의 물기를 털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온천의 열기가 아직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채로 휴게공간에 딸린 카페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니 그야말로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황홀했다. 이런 순도 높은 휴식이 또 어디 있을까? 온천 관광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북해도 노보리베츠의 유황온천을 으뜸으로 치는데, 그곳의 대형 료칸인 ‘마호로바’나 ‘석수정’, ‘후루카와’ 등과 비교해도 덕구온천은 전혀 부족함이 없다. 지금 이 계절만큼 온천욕을 즐기기에 좋은 때도 없다. 물론 눈 내린 겨울, 노천탕에서 응봉산의 설경을 바라보는 일 또한 환상적이긴 할 것이다.온천욕으로 몸의 긴장을 풀었더니 호텔방에서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니 어느새 어두운 저녁, 호텔에 한식당과 푸드코트가 있지만 나는 종일 그치지 않는 가을비를 헤치고 죽변항으로 달렸다. 대숲의 기슭이라는 이름마저 낡아버린 죽변항, 사람들은 대부분 후포나 영덕으로 가고, 손님이라곤 가을비 타고 흘러든 나 같은 뜨내기뿐인 쇠락한 선창가. 나는 죽변의 그 쇠잔함을 좋아한다. 부두에 고인 빗물 위로 불빛들이 엎드린 채 등을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일찍 문 닫는 식당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나마 불 밝은 집에 들러 홍게와 가리비를 포장해왔다. 게 찌는 동안 아주머니가 나 먹으라고 내준 고구마와 귤이 벌써 맛있었다. 아아, 어느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보니 겨울이 가깝긴 가까운 모양이다.그렇게 나는 가을 울진의 품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호텔로 돌아오니 창밖으로는 얼음 같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창을 통과한 불빛들은 그저 따사롭기만 한 가을밤의 평화가 나를 오래토록, 넉넉히 안아주었다.              /시인 이병철

2019-10-20

성주군 ‘일자리 창출’로 최고 복지 실현 ‘성큼’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는 최상의 복지는 일자리”라는 말이 있다. 요즘처럼 실업률이 높은 상황에선 이 말이 가진 의미가 더욱 크게 가슴을 친다.2019년 오늘의 한국. 어느 지자체 할 것 없이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고민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성주군도 다르지 않다. ‘좋은 일자리가 삶의 조건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는 건 어린아이도 아는 명백한 사실.일자리 창출을 위해선 지역에서 활동하는 중소기업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고, 기업인들이 생산과 연구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자체와 기업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 구조를 만드는 것도 시급한 문제다. 성주군은 지역 발전과 중소기업 지원책 마련, 안정적인 일자리 확대를 위해 올 한해 멈춤 없이 꾸준히 노력해왔다. 그 노력들이 어떤 구체적 프로젝트를 통해 진행되었는지 살핌으로써 향후 성주가 열어갈 경제적 미래를 예측해보고자 한다.◇지역 일자리 창출과 기업 지원 방안 다양하게 모색성주군은 올 하반기 군청 소회의실에서 산업·농공단지, 개별공단, 기업인단체 대표 등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먹·자·쓰·놀 운동(성주에서 먹고 자고 쓰고 놀자는 뜻)’ 추진과 사업하기 좋은 성주를 위한 기업인 간담회를 가졌다.이는 지역 발전과 함께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고심과 고뇌에서 만들어진 자리였다.여기서 성주군은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추진 중인 중소기업 운전자금 지원, 일본 수출규제 합동대응반 운영, 일자리창출 지원사업 등 기업 지원시책에 대한 정보를 알리고 이를 기업 관계자들과 공유했다.이와 더불어 성주군 역점시책 사업인 ‘먹·자·쓰·놀 운동’의 기업인 동참을 위해 상호협약체결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당시 협약을 통해 ‘성주군 특산품과 공산품 이용을 적극 실천하자’, ‘각종 행사 및 모임 때 관내 음식점을 이용하자’, ‘기업 소유 차량은 관내 주유소 이용을 활성화하자’, ‘소속 직원들의 관내 주소 이전 등을 위해 모두가 노력하자’는 것에 상호 합의했다.또한, 군의 역점시책 분야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나눴고, 사회적 분위기로 자리 잡은 일본 수출규제 대응을 위한 피해 예방과 상호협력체계 구축 방안도 덧붙여 의논했다.성주군 관계자는 “협약 체결식에선 합동대응반 운영을 통한 정보의 적극적 교환 등이 집중적으로 이야기됐다”고 전했다.성주군은 일본 수출 규제조치에 따른 대응 전략으로 기업의 피해 사례를 접수받고 있다고 밝혔다. 관련된 상담을 원하는 기업은 성주군청 기업지원과를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054-930-6433)로 해당 사항을 문의하면 각종 지원책을 안내받을 수 있다는 게 성주군의 이어지는 설명이다.◇‘먹·자·쓰·놀 운동’으로 지역 경제 생태계 선순환을이와 함께 성주군청은 “먹·자·쓰·놀 운동의 동참해주신 기업체에 고마움을 전한다”며 “일본 수출규제 조치로 어려움을 겪는 성주군 기업체들을 돕고자 합동대응반을 꾸려 행정·재정적인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기업인 단체, 대표와 협력해 다양한 대안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약속하고 있다.이에 따라 무더위와 폭우가 한창이던 지난 8월 말에도 성주군 기업지원과는 선남면 도성공단협의회 월례회에 참석해 ‘성주에서 먹·자·쓰·놀 기업이 함께 합니다’라는 슬로건 아래 일자리 창출과 지역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는 개별 공단협의회와의 ‘릴레이 간담회’의 일환이었다.이 간담회는 앞서 진행된 산업·농공단지, 개별공단, 기업인단체 대표와의 간담회를 통한 상호 협약체결 이후, ‘먹·자·쓰·놀 운동’의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취지에서 열렸다는 게 성주군청 기업지원과 관계자의 부연이다.◇기업과의 ‘릴레이 간담회’ 통해 일자리 만들기 노력성주군이 14곳 개별공단협의회 기업인들과 릴레이 간담회를 개최하는 것은 생산과 소비의 효율적인 맞춤은 물론, 지역의 일자리 창출로도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이날 간담회의 주요 내용은 각종 기업 지원시책 안내, 일본 수출규제 합동대응반 운영, 기업 애로사항 및 건의사항 수렴, ‘성주에서 먹·자·쓰·놀 운동’의 기업 동참 유도 등이었다고 한다.참석한 기업 지원 관계자와 도성공단협의회 회원들은 “먹·자·쓰·놀 운동에 기업이 참여한 것이 지역에 대한 사랑과 지역 기업에 대한 애정을 키우는데 적지 않은 보탬이 됐다”며 “릴레이 간담회가 기업 지원 서비스와 개별공단과의 소통 강화로 연결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바람을 전했다.이번 달에도 성주군청 기업지원과의 릴레이 간담회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군은 적극적 의지를 가지고 이를 진행 중이다.간담회는 올 여름 산업·단지, 개별공단, 기업인단체 대표와 간담회를 통한 상호 협약체결 이후, ‘먹·자·쓰·놀 운동’ 분위기를 계속적으로 이어가고자 펼쳐지고 있다.성주군은 이미 지난 9월에도 선원공단협의회, 대산공단협의회와 상생·소통 간담회를 개최한 바 있다.자리를 함께 한 기업 지원 관계자와 도성공단협의회 회원들은 “먹·자·쓰·놀 운동의 참여와 성주군의 기업지원 서비스가 가까운 시일 안에 시너지 효과를 불러올 것 같다”며 “성주군과 개별 공단과의 상생·소통 강화는 지역 발전의 초석이 될 것이다. 이런 시책이 단순히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지속적으로 진행돼 범군민 운동으로 정착됐으면 한다”고 말했다.◇여성기업인협의회와 힘 모아 지역 현안 해결을지난 여름 성주군은 여성기업인협의회(회장 김점열)와 지역 한 식당에서 월례회를 열고, 성주 100년 미래 발전의 초석이 될 남부내륙철도 성주역 유치에 대한 결의를 다지는 시간도 마련했다. 군정에 대한 지역민의 협조를 부탁하고, 군정 방침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한 자리였다. 이날 월례회 후에는 당시 열리고 있던 성주군 축제 행사장을 방문한 수많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군내 기업인들의 염원인 남부내륙고속철도 성주역 유치의 필요성을 알리며, 시원한 생수를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이런 활동은 지방자치단체와 관내 기업이 힘을 합친 홍보 활동의 좋은 사례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성주군 여성기업인협의회는 “남부내륙철도의 성주 노선 통과와 역사 유치를 위해 앞으로도 힘을 쏟을 계획”이라고 지속적으로 말해왔다.이날 자리를 함께 한 이병환 군수는 “지역의 숙원사업을 위해 기업인들이 솔선수범해 준 것에 감사드린다”며 “침불안석(寢不安席), 식불감미(食不甘味)란 고사성어가 있다. 누워도 편치 않고,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게 현재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다. 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이 성주역에 내려 물 한잔 마실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모으자”고 당부했다.◇좋은 일자리 늘어나고 기업하기 좋은 성주로지역에서 고용 창출과 생산성 향상에 땀 흘리고 있는 중소기업을 격려·고무하고, 지원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는 것은 지방자치단체가 짊어진 주요한 책무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성주군은 최근 (주)거산알루미늄(대표 홍정호)과 ‘사업장 확장을 위한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거산알루미늄은 지난 2012년 그 출발을 알렸다. 이후 2018년엔 250억 원의 매출을 올린 건실한 중소기업으로 알루미늄 창호를 생산하는 업체다. 당시 투자양해각서 체결을 통해 성주군과 거산알루미늄은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산업단지 내 4천200평 부지에 80억을 투자해 생산라인을 증설할 계획을 세웠다.이와 관련해 임현성 성주부군수는 “성주군민은 어려운 경제 환경에서 과감한 투자 결정을 내린 거산알루미늄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며 “향후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민선7기가 시작을 알릴 때부터 “효율적 지원과 상생의 마음을 바탕으로 기업이 발전하고,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는 살기 좋은 지역’을 지향해온 성주군의 발걸음에 밝고 환한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를 기대 가득한 눈길로 살펴보는 군민과 중소기업 관계자들이 적지 않다./전병휴·홍성식 기자

2019-10-17

산림생태 체험하고 캠핑도 즐기고 ‘다 되네!’

구미시는 공단도시, 회색도시라는 이미지로 인해 천혜의 아름다움을 지닌 자연경관이 관광자원으로서의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했다. 잘 알려진 금오산과 천생산, 팔봉산을 비롯해 도심을 가로지르는 낙동강 등 구미지역의 자연경관은 예로부터 선인들의 극찬을 받아왔다. 구미시도 공단도시, 회색도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자연도시, 녹색도시 구미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이러한 노력들로 인해 현재 많은 관광자원들이 만들어져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구미가 지닌 관광자원을 대해 알아봤다.△사시사철 구미시민의 사랑을 받는 금오산 도립공원높이 976.5m의 금오산은 구미의 대표적인 산으로 1970년 6월 1일 대한민국 도립공원 1호에 지정된 명산이다. 금오산이라는 이름은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아도(阿道)가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名山)이라 한데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산 전체가 바위로 이뤄져 기암절벽에 급경사가 많고, 산 아래에서 대혜 폭포까지는 케이블카가 설치돼 있다. 산 정상에는 약사암과 마애보살입상, 중턱에는 해운사·도선굴·대혜폭포 등의 이름난 명소가 있으며, 산 아래에는 길재 선생의 뜻을 기리는 채미정이 있다.도립공원 지정과 더불어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관광명소가 됐다. 산의 북동쪽 자락에 위치한 금오산 저수지는 보트 놀이 등 수변 위락 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9년간의 조성공사를 통해 2016년 준공된 총 길이 2.43㎞의 올레길은 제당산책로, 부잔교, 아치교, 데크로드, 콘크리트구간, 흙길산책로 등 다양한 구간으로 구성돼 걷는 재미와 금오지와 금오산의 풍경을 즐길 수 있어 평일에도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로 북적인다.또 금오산도립공원 내 위치한 구미시탄소제로교육관은 대구·경북의 대표적인 기후변화 체험관으로 태양광·태양열·지열·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이용 설비 설치 등으로 경북도내 공공건물 최초 녹색건축 최우수(그린 1등급) 인증을 받았다.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2천389㎡의 규모로, 관람시설로는 기후변화관, 탄소제로관, 제로실천관 등이 있다.수려한 자연환경과 문화유산 등 풍부한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는 금오산 도립공원은 구미에서 가장 많은 문화·예술축제가 열리는 장소로 사시사철 구미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명소이다.△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구미 에코랜드구미시 산동면 일원에 위치한 구미 에코랜드는 구미시산림문화관, 산동참생태숲, 자생식물단지, 어린이테마교과숲, 문수산림욕장 등 주변시설을 통합해 2017년 5월 11일 개장했다.이곳은 산림생태 체험관광이란 색다른 테마로 산림문학관, 생태탐방 모노레일(1.8㎞), 산동참생태숲, 어린이테마교과숲 등 다양한 산림휴양·체험·교육단지가 조성돼 있다. 산림문화관 3층에 위치한 모노레일은 에코랜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다. 생태숲 일대 1.8㎞ 거리를 30분 간 모노레일을 타고 즐기는 생태탐방 모노레일은 8인승으로, 6대가 상시 운행된다. 산림문화관 뒤편 생태 숲은 도심에 비해 기온이 3∼5℃낮아 한여름에도 생태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를 만끽하며 자연을 감상할 수 있어 여름철 큰 인기를 얻고 있다.이러한 인기로 여름철에는 모노레일 이용 예약이 대부분 오전에 마감되고 있어 구미시는 모노레일 1대를 추가로 설치할 예정이다. 자연을 인간과 최대한 접목시킨 테마별 숲은 인근 도시 어린이집, 유치원의 자연견학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구미 에코랜드는 개장 후 첫해 36만 명, 월 최대 6만3천여 명이 방문할 정도로 구미를 대표하는 관광시설로 자리매김 했다. 구미시는 늘어나는 방문객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각종 편의시설 등을 증설할 계획이다.△불교문화에 디지털 콘텐츠 결합한 신라불교초전지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에 위치한 ‘신라불교초전지’는 2017년 10월 13일 개관했다.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아도화상의 발자취와 신라 불교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이곳은 도개리 일대 부지 3만6천919㎡, 건축연면적 2천537㎡ 규모에 국비 131억 원, 도비 17억 원, 시비 52억 원 등 총 200억 원을 들여, 자연친화적인 한옥과 초가 등을 조성해 교육과 체험이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특히, 신라불교초전기념관은 첨단 전자산업의 메카인 구미시답게 불교문화에 첨단 디지털 콘텐츠를 접목한 기념관으로 주목받고 있다.이곳에는 아도화상의 발자취와 부처님의 일상을 그린 팔상도, 한반도 불교 전래 과정 등 다양한 불교문화 콘텐츠를 첨단 디지털로 만나볼 수 있다. 총 1천467㎡ 면적에 4개의 기획관으로 구성된 기념관은 제1관 아도, 신라로 향하다, 제2관 신라, 불교의 향이 퍼지다, 제3관 신라, 불교의 꽃을 피우다, 기획관 100년 전 선산 불교문화유산과의 만남 등으로 구성돼 있다.야외에는 신라시대 의·식·주·법 생활상이 그대로 재현된 야외 전시가옥 7개 동도 갖춰져 있어 다양한 볼거리도 제공한다.이밖에도 전통한옥가옥체험관과 불교문화체험관을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총 4개의 체험관으로 구성된 전통한옥가옥체험관은 규모에 따라 성불관, 자비관, 해탈관, 견성관, 오도관, 득도관, 대각관으로 4∼10명 단위로 사용할 수 있다.△레저·수상스포츠의 대명사 구미낙동강체육공원구미시는 4대강 사업으로 한층 넓어진 낙동강 둔치를 활용하기 위해 2012년 5월 7일 구미낙동강체육공원을 조성했다. 구미낙동강체육공원은 낙동강 살리기 사업과는 별도로 국비 350억 원을 들여 도심과 가까운 낙동강하천둔치에 산책로, 초화원, 체육시설, 생태습지 등 친수와 복원을 병행해 조성한 수변휴식공간으로, 종합경기장 1면, 천연 잔디 축구장 10면, 야구장 2면, 인라인스케이트장 1면, 인조 잔디 풋살장 5면, 게이트볼장 4면, 농구장 5면, 배드민턴장 10면, 족구장 10면 등 총 9종 48면의 체육시설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산책로 15㎞, 자전거도로 11㎞, 이벤트 공간, 피크닉장 등의 다양한 시설을 갖추면서 개장 첫 해인 2012년 5만5천명에 불과하던 이용객이 2016년 50만 명을 넘었고 2018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했다.낙동강 수상레포츠 체험센터는 수상레포츠 저변을 확대해 구미를 수상레포츠 도시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지난달에는 국민체육진흥공단과 구미시가 공동으로 국내 최대 레저스포츠 축제인 ‘2019 레저스포츠 페스티벌 in 구미’를 개최해 5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스포츠클라이밍, 서바이벌, 카트와 스마트 모빌리티, 플라잉디스크, 드론, 조정, 카약·카누, 고무보트 등을 체험하고, 전국드론축구대회, 스케이트BMX 빅에어 대회, 서바이벌 대회, 플라잉디스크대회 및 인도어사이클 대회를 관람하기도 했다.또 2017년 9월 개장한 구미캠핑장은 구미시민 뿐만 아니라 타지역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7만1천300㎡ 부지에 카라반캠핑 10면, 오토캠핑 80면, 일반캠핑 80면 등 170면의 캠핑 시설을 갖추고 있다. 구미 도심을 관통하는 낙동강변의 특성상 접근성이 뛰어나 도심에서 캠핑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평일에는 직장인들이 회사동료나 친구들과 캠핑장에서 배달음식으로 모임을 개최하는 새로운 문화도 생겨나고 있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10-17

투명한 물빛·눈부신 단풍… 신비하고 찬란한 찰나에 발길 붙들려도 좋아라

과객이 되어 머무르고픈 ‘아흔아홉 칸 집’ 송소고택규모부터가 입을 벌어지게 만든다. 큰 건물을 이야기할 때면 등장하는 ‘아흔아홉 칸 집’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청송군 파천면 송소고택(松韶古宅)이다.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있어 집을 따스하게 안고 있는 형상이고, 앞으론 널찍한 들판이 펼쳐졌다. 풍수지리에 관한 지식이 없는 기자가 보기에도 명당(明堂)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2개의 사랑채와 안채, 별채, 넓은 정원 등으로 이뤄진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시절 거부(巨富) 심처대의 후손인 심호택이 1880년 경 조상이 살던 덕천마을로 돌아오면서 만든 집이다.솟을대문과 홍살, 팔작지붕에 빗살무늬 교창 등이 19세기 후반 한국 상류층 주택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여기에 송소고택에 살던 사람들은 경주 최부자와 함께 ‘양심적인 사회 공헌’으로도 이름이 높았다.해질 무렵 천천히 고택 안을 돌아봤는데, 어찌나 넓은지 과장을 좀 섞자면 ‘집 안에서 길을 잃을 지경’이었다.드나드는 손님들이 여성이 생활하는 안채를 함부로 쳐다볼 수 없도록 만든 ‘마당 속 또 다른 담’과 집 안에 만든 3개의 우물이 특히 이색적이었다. 안채에선 요즘 보기 드물게 전통 방식으로 곶감을 말리고 있었다.현재 송소고택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심재오 씨.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살다가 9년 전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왔다. 만만찮은 저택 관리에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서도, 조상들 이야기를 할 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장작불을 넣은 뜨끈한 아랫목에서 잠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기서의 숙박이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기자 역시 그랬으니까.□ 송소고택 홈페이지: https://songso.modoo.at/늙지 않는 신선이 사는 ‘별천지’절경 중의 절경 주산지·주왕산기암과 단애(斷崖)가 줄지어 늘어서 감탄을 자아내는 주왕산과 맑고 투명한 물빛이 유혹하는 주산지에 가본 사람들은 알게 된다. 왜 이곳의 관광 슬로건이 ‘산소카페 청송군’인지. 청정하고 달콤한 공기가 여행자의 몸은 물론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준다.주왕산면에 한적하게 자리 잡은 주산지는 299년 전 조선 경종(景宗) 때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저수지다. 물 아래로 뿌리를 내린 수백 년 된 아름드리 나무가 기가 막힌 풍경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사진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카메라를 메고 ‘인생 작품’을 남기기 위해 방문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km 가량 주산지로 걸어 오르는 산길은 우거진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향기로운 그늘과 도시에선 밟아보기 힘든 황토의 색채가 여행자들의 환한 웃음을 불러낸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지향한다”는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가족 혹은, 연인과 주산지를 찾은 이들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수 관우(關羽)의 팔뚝보다 훨씬 굵은 수백 마리의 잉어를 보며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봄과 여름에 만나는 주산지도 좋지만, 노랗고 빨간 단풍과 함께 어우러진 ‘가을날의 주산지’는 절경 중 절경이라는 게 세간의 평가다. 청송이란 지명은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신선이 사는 세계’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1시간쯤 주산지 주변을 산책하니 이 말이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았다.산에 오르는 걸 즐기는 여행자들에겐 ‘가을 주왕산’이 귀한 선물처럼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청송군 부동면 일대에 펼쳐진 백두대간 한복판의 경치가 그저 그만이다. 독특한 형상의 바위가 사람들의 눈앞으로 성큼 다가서고, 그것들을 등 뒤로 하고 갈라치면 눈부신 단풍이 오감을 아찔하게 흔들어댄다. 이만큼 드라마틱한 산행이 어디에 또 있을까? 1976년 한국의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주왕산은 그 품 안에 대전사, 백련암, 주왕암 등의 사찰과 주왕계곡, 절골계곡, 주방계곡, 학소대 등을 안고 있다. 등산 코스가 다양해 초보 등산객은 물론 등산 전문가들까지 만족감을 드러낸다고 한다. 관광객이 늘어나는 계절엔 인근 식당과 숙박업소도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청송군은 소상공인 보호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70억 원 규모의 ‘청송사랑화폐’ 발행 계획도 세우고 있다.작가 김주영의 예술혼이 살아 숨쉬는 ‘객주문학관’1939년 청송에서 태어난 김주영은 치밀하고 성실한 취재, 유장한 문장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소설가. 그는 ‘작가로서의 삶’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 바 있다.“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들은 모든 소유물을 몽땅 가지고 다닌다. 비단과 향수, 그리고 씨앗과 소금, 요강과 유골, 하물며 고통과 증오까지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격정적인 삶으로 그 모든 것이 탕진되는 날, 하나의 무덤이 거친 바람이 흩날리는 초원에 마련될 것이다.”‘객주’, ‘홍어’, ‘화척’ 등의 작품을 쓴 김주영은 대산문학상, 김동리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등을 받은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중 하나. 청송이 내세워 자랑할 만하다.진보면 진안리 폐교를 리모델링해 조성한 객주문학관은 바로 이 김주영의 생애와 작품 전반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공간. 그간 출판된 소설과 산문은 물론 작가의 취재수첩과 펜, 작품의 소재가 꼼꼼하게 메모된 공책 여러 권이 문학청년들을 기다리고 있다.사진 촬영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김주영은 1998년 선배 작가, 언론사 사람들과 함께 북한을 여행했다.객주문학관엔 그때 사용한 카메라와 현상한 사진 수십 점도 함께 전시돼 있다.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평양 등 현재는 여행하기 힘든 우리 땅 반쪽의 풍경을 보는 건 이곳에 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너스다.“운이 좋다면 1년에 절반쯤은 청송에 머무는 작가를 여기서 만날 수도 있다”는 게 객주문학관 해설사의 귀띔이다.돌에 핀 꽃을 찾아서 ‘꽃돌박물관’30년 넘게 수석(壽石)을 모아온 선배가 있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이 돌 안에 세상과 인간이 있어. 너는 안 보이지?” 당연지사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타깝거나 아쉬울 것도 없었다. 돌, 범위를 좁혀 수석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청송 수석꽃돌박물관’은 흥미로워할 것 같다. 왜냐? 그 돌들 속에는 환하게 핀 ‘꽃’이 보이기 때문이다. 매화, 장미, 국화 등 종류도 다양하다. 예술적 심미안을 가지지 못했더라도 얼마든지 ‘돌의 아름다움’을 완상할 수 있다. 박물관을 채운 ‘꽃돌’은 청송의 지역적 특수성이 만들어낸 것이다. 화산암 중 구과상유문암에 속하는 암석을 꽃돌이라 부른다. 수석 용어로는 화문석. 유문암은 유리처럼 반짝이는 결정을 가진 화산암인데, 청송군 진보면 괴정리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고 한다. 전문가들도 희귀한 돌로 인정하는 한국산 ‘꽃돌’의 80%가 청송에서 나왔다. 조그만 박물관엔 청송 꽃돌을 포함한 수백 점의 수석이 전시돼 있다. 청송 수석꽃돌박물관 지척엔 유교문화 체험관과 도예촌도 있으니, 한국의 전통문화에 빠져드는 시간도 가져보면 좋을 듯하다./홍성식·김종철기자

2019-10-16

‘어떻게 하면?’ 끊임없는 질문이 항공사 날게 했다

교통은 지역의 발전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까지 모두 큰 강의 유역이다. 하나같이 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다는 장점과 함께 교통이 편리하다는 특징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세계 무역의 중심이었던 실크로드 또한 세계 각국으로 통하는 사통팔달의 교통로이다. 중국 비단의 로마로의 무역, 당제국과 비단길 무역, 불교의 전래 유통로, 몽골 제국와 동남아시아 및 해상 비단길까지 아우르고 있다. 현재 실크로드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에 의해 철도, 항로 등 신 비단길이 형성되고 있다.동해를 끼고 있는 포항시도 최적의 교통망 개설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향후 북한과 러시아 연해주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으로 통하는 환동해 물류중심도시도약의 길이 열려 있다.하지만, 인구 50만의 도시에 비해 하늘길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포항시가 야심차게 기획했던 지역항공사 ‘에어포항’은 임금체불, 경영난 등으로 취항 10개월여만에 운항을 중단했다. 미국 댈러스 러브필드 공항을 허브공항으로 두고 있는 세계 3대 항공사인 ‘사우스웨스트’의 성공사례를 토대로 날개가 꺽인 포항의 저가항공사 재취항 가능성을 짚어봤다.□ 사우스웨스트의 성공은 정신에 있다위대한 업적을 기록한 회사들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신념, 의무, 사명감 등이 있다. 사우스웨스트도 예외는 아니다.이 회사 직원들은 단순한 수익을 내기 위한 고용된 직원이라기보다 스스로 항공사업에 동참한 ‘십자군 운동가’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토대가 바로 사우스웨스트의 최저운임 유지의 기반이 되고 있다.직원들은 평상시에도 ‘우리 비행기를 타는 손님들을 어떻게 하면 잘 보호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중소기업을 보호할 수 있을까, 저비용 때문에 우리 회사 비행기를 타는 노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해드릴 수 있을까’ 등을 수시로 확인하는 원칙을 고수한다.이러한 원칙들을 사우스웨스트가 포기했다면 미국 소비자들이 혜택받은 연간 수십억 달러의 요금 인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익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수익을 추구하는 이면에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는 바로 이러한 정신적 원칙에 기인하고 있고 이 점은 회사 창립에서부터 두드러지고 있다.사우스웨스트 항공사의 역사를 보면 용기와 인내로 점철돼 있다. 미국 항공 업계 역사상 사우스웨스트 항공사처럼 극적인 투쟁을 거쳐 항공업에 진출한 유래가 없다.사우스웨스트 항공사는 샌안토니오의 사업가이면서 자그마한 항공 서비스 회사를 소유한 콜린 킹과 그를 지원하는 은행가 존 파커의 합작품이었다.1966년 킹은 대형 비행기를 가지고 텍사스 주의 주요 3개 도시를 운항하는 새로운 항공 회사를 만들겠다는 기획서를 들고 현재까지도 사우스웨스트의 역사적 인물로 일컬어지는 ‘허브 캘러허’를 찾아간다.캘러허는 처음엔 이 아이디어가 황당하다고 생각했으나, 흥미도 가지고 있어 사업구상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다. 1967년 3월 15일, 캘러허는 에어 사우스웨스트 컴퍼니(현재 사우스웨스트)의 법인 설립 서류를 법원에 제출한다.킹은 캘러허의 도움을 받아 사업 구상을 대내외에 적극적으로 알리며 최초의 종자 자본을 모금했다. 2차 자본 모집에도 박차를 가했고, 정계의 정치적 도움도 요청했다. 결국 2차 자금 모집에서 킹, 캘러허, 내글리(캘러허의 처남), 피스(샌안토니오의 변호사·사업가·정치가) 등 4명의 사업가는 54만 3천 달러를 거두게 됐다.1967년 11월 27일 캘러허는 사우스웨스트의 신청서를 텍사스 항공 위원회에 제출했고 1968년 2월 20일, 항공위원회는 이 신청을 허가했다.하지만, 사우스웨스트는 하늘에 비행기를 띄워 보기도 전에 브래니프, 트랜스 텍사스, 컨티넨털 항공사 등 기존 항공사들로부터 법적인 공격에 직면하게 된다.□ 어려움 속에 싹튼 기업 정신기존 항공사들이 항공 위원회가 사우스웨스트에 항공업 면허증을 발급하지 못하도록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이다. 이들 항공사들은 사우스웨스트가 취항하려는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이며 신규 회사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양측의 소송은 너무나 치열해 ‘텍사스 리포트’지는 한때 독자들에게 연예 오락이 따로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캘러허와 기존 항공업체를 대변하는 변호사들 사이의 법정 싸움이 매일 벌어졌으며 1심 법원에서 사우스 웨스트가 이 시장에 신규 진입하는 것은 허가할 수 없다는 판결마저 내려졌다.종잣돈도 소송 비용으로 다 써버린 탓에 사우스웨스트 이사회 이사들은 피곤한 데다 좌절감마저 느꼈다.이사회 중 일부 이사들이 차라리 손절매하고 회사 설립 구상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마저 내놓았다.하지만 ‘파이터’캘러허는 당시 “여러분, 한 번만 더 싸워 봅시다. 내가 계속 회사의 법정 대리인으로 나서겠습니다. 나에게 주는 변호사 비용의 지불을 무기한 연기해도 좋습니다. 또 각종 법정 비용은 내 호주머니에서 대겠습니다”라며 설득했다.캘러허의 열변과 사자후가 통했는 덕분이였을까. 대법원은 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엎고 사우스웨스트의 손을 들어주게 됐고 결국 사우스웨스트는 항공업 면허를 받게 됐다.사우스웨스트가 중요한 싸움에서 이겼지만, 기존 항공사들은 ‘끈질긴 방해공작’을 그만두지 않았고 연방 대법원에 항소하며 향후 몇년 동안에도 여러번 법정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다행히 타 항공사에서 백전노장으로 알려진 라마 뮤즈를 신임 대표 이사로 영입하면서 희망의 불씨가 재차 살아났다. 뮤즈는 항공업계 친구들 및 관련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7백만달러의 자금을 추가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사우스웨스트의 초창기 법정싸움은 직원들을 오히려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직원들은 댈러스 모닝 뉴스나 댈러스 타임스 헤럴드 등 지역 신문지에서 본인들의 회사 전망이 암울하다는 기사를 보면서 회사와 함께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느꼈다.□ 경쟁 속에서 생존 전략을 찾아내다사우스웨스트는 저운임 정책을 혁신적으로 도입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 항공 업계는 민간 항공국에서 승인받은 균일한 운임을 책정했다.항공사들은 시장은 비행기 값을 낼 여력이 있는 세력과 그렇지 못한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고 바라봤다. 항공료 인하는 곧 수입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존 항공사들은 항공기 수송에 문제가 생기거나 비용이 상승하면 곧장 항공료를 올렸다.하지만, 사우스웨스트는 이와 정반대로 움직였다. 낮은 운임과 훌륭한 서비스를 연결시키면 얼마든지 새로운 승객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고 봤다.1973년이 되자 수익이 어느 정도 나기 시작한 상태에서 뮤즈는 리오그란데 밸리 일대에 눈독을 들이고 할링언 공항에 추가 취항을 신청한다.이 판단은 정확했고 당시 텍사스 인터내셔널이 심한 노사 분규에 휘말린 상태에서의 밸리 일대 공백을 정확히 노려 기존 승객수의 거의 3배 가까이 증가하는 성과를 거둔다.증가의 원인으로는 사우스웨스트의 낮은 운임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비행기를 탈 기회를 줬기 때문이고, 이를 통해 박리다매 가격 정책의 성공을 한번 더 확신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또한 지금도 회자되는 ‘10분 턴’전략을 실시해 마찬가지로 성과를 거두게 된다. 비행기를 빠른 시간 안에 회전시켜 정기 스케줄을 유지할 수 있었고, 또 항공업계 내에서 정시 발착을 가장 잘 지킨다는 전통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기장 등 조종사와 타 부서 직원들도 비행기 출항 준비에 부서 구분없이 협력한 것이 비결이었다./황영우기자 hyw@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2019-10-16

수타 경력 56년 장인이 뽑아낸 ‘256가락’ 면발의 비밀은…

미리 엄살을 떤다. ‘대략 난감’이다. 제대로 인터뷰를 하지 못했다. 인터뷰를 못 했으면, 칼럼을 쓰지 않으면 될 일이다. 사정이 그리 간단치 않다. 음식이 수준급을 넘어선다. 대단한 음식도 아니다. 평범한 짜장면이다. 청송읍내의 ‘고향식당’. 허름한 시골 동네의 백반집 이름이다. 이 가게 짜장면, 전국 유명 짜장면집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그 흔한 인터넷 포스팅도 네댓 개 정도다. 유명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시골 읍내의 얼마쯤은 스산한 식당이다. 입구가 ‘유리 가라쓰’ 문이다. 좌석은 ‘홀’이 30석 정도. 내부에 20~30명 정도 단체가 앉을 수 있는 방이 있다.현지 토박이가 동행했다. 점심시간을 피해 느지막한 시간에 가자고 했다. 바쁜 시간에 가면 말도 붙이지 못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엄포가 아니었다. 점심시간에는 홀과 방안이 꽉 찬다. 인터뷰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할 상황. ‘점심시간의 탕수육’도 금기사항이었다. 바쁜 점심시간에는 ‘짬뽕? 짜장면?’만 가능했다. 가게 입장에서는 손해가 나는 일이다. 탕수육이 아무래도 단가와 이문이 높다.나이든 노부부가 운영한다. 남편은 주방장, 올해 일흔다섯이다. 1963년부터 수타면을 치기 시작했다. 수타면 경력 56년이다. 더러 ‘수타면 경력 20년, 30년’은 볼 수 있다. 50년 경력은 드물다. 10대 후반부터 면을 만져도 50년 경력, 60대 후반이 되면 기력이 달린다. 대부분 어깨와 등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인다. 75세에 수타면, 경이롭다.아내는 홀서빙 겸 주방 보조다. 주방과 홀을 지켜보니, 왜 점심시간에 ‘짜장면, 짬뽕만 가능한지’ 알 수 있었다.대부분 가게가 기계면이나 공장면을 쓴다. 가락이 일정하다. 수타면을 두고 ‘쫄깃하다’고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 틀렸다. 기계로 뽑은 면, 공장면이 더 쫄깃하다. 수타면은 무르고 부드럽다. 현미경으로 보면 면의 겉면에 달의 분화구 같은 홈이 많다. ‘냉소다’ ‘얼음 소다’라고 부르는 소다를 조금 넣어도 면은 한결 쫄깃해진다. 배달하는 중식당의 면발은 좀체 붓지 않는다. 소다 면, 붓지 않으니, 배달이 가능하다. 소비자들도 ‘면발이 탱글탱글하다’고 좋아한다.슬쩍 물어본다. “128가락입니까?” 대뜸 “256가락”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면을 일곱 번 뽑으면 128, 여덟 번 뽑으면 256가락이다. 수타면인데 굵을 경우, 대부분 7번 뽑은 것이다. 한번을 더 더하는 것이지만 마지막 면을 뽑는 과정은 한결 더 힘들다. 면이 가늘고 곱다. 기계로 하지 않고 손으로 뽑아내는 256가락의 고운 면은 대단한 공력이 필요하다. 이른바 까다로운 ‘힘 조절’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매일 해내고 있다.오래되었다고, 무조건 반길 일은 아니다. 이 집, 면발이 희다. 소다를 극소량 쓰거나 아예 쓰지 않는다. 실제 수타 과정을 봤다. 소다 그릇이 보이질 않았다. 먹을 때도 마찬가지. 소다 냄새는 나지 않았다.면이 쫄깃하지는 않지만, 탄력이 충분했다. 비밀은 냉수처리다.“한 번에 5인분 이상을 삶지 않는다”고 했다. 대중적인 식당에서, 바쁜 점심시간에 이 평범한 원칙을 지키기는 힘들다. 최소한의 양을 삶아야 면은 탱글탱글해진다. 라면을 하나 끓일 때와 10개를 끓였을 때의 면발은 다르다. 그 이치다. 부드러우면서도 차진 식감이 입안에서 살캉거린다.고명에도 ‘원칙을 지키는 정성’이 담겨 있다. 우리는 국수 위에 올리는 고명의 종류와 양에만 신경을 쓴다. ‘무엇을’보다 ‘어떻게’가 중요하다.일행이, 짜장면 두 그릇, 짬뽕 한 그릇을 주문하고 나니 약 20분 정도 시간이 걸렸다. 짜장면의 고명, 갓 볶아낸 것이었다.‘자장미엔(炸醬麵, 작장면, zhájiàngmiàn)’의 ‘작(炸)’은 ‘터질 작’ 이다. 짜장(춘장 혹은 첨면장)에 채소, 고기 등을 넣고 팬(WOK·웍)으로 볶으면 기포가 생긴다. 열을 가하면 기포는 표면에서 터진다. 원형 첨면장, 춘장은 발효식품이다. 탄산가스가 뜨거운 불을 만나면 외부로 삐져나온다. 이게 작은 거품을 이루었다가 터진다. 그래서 ‘뽀글뽀글 터지는 장’ 작장면, 짜장면이다.‘고향식당’은 한 그릇, 한 그릇 고명을 일일이 따로 볶아서 얹는다. 대부분 짜장면 가게에서는 이른 아침에 짜장 소스를 끓여둔다. 손님이 주문하면 국수를 삶아서 헹군 다음, 끓여둔 짜장 소스를 얹어서 내놓는다. 우리는 이런 짜장면을 ‘옛날 짜장’이라고 부르면서, 원형 짜장으로 여긴다. 그렇지는 않다.원형 짜장면은 첨면장(甛麵醬, 춘장, 짜장)을 볶아서 얹는 것이다. 짬뽕도 마찬가지. 대부분 끓여둔 국물을 웍에서 한 번 더 가열 처리한 다음 얹는다, 국물이 흥건하니 볶은 것인지, 삶은 것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틀렸다. ‘고향식당’의 짬뽕은, 주문을 받은 다음, 채소, 해물, 고기 등을 웍에 넣고 매번 새롭게 볶는다. 유명 호텔의 중식당에서도 하지 않는 짓이다. 이 ‘미련한 일’을 매일 한다.‘고향식당’의 짜장면, 물컹거리는 채소가 아니라 사각사각한 고명이다.인근에서 6년간 가게를 운영하다가 현재 자리로 이사했다. 현재 자리에서 30년. 대부분 손님이 지역 주민, 단골들이다. 여주인은 연신 “멀리서 오는 손님들은 무섭다”고 말한다. 얼굴이 익은 손님들은 대하기가 편하다. 사정을 모르는 외지 사람들은 ‘바쁜 점심시간의 탕수육 같은 엉뚱한 주문’도 한다. 혼자서 홀서빙을 하니, 점심시간에는 정신이 없다. 10분 이상 기다려야 주문을 겨우 받는다. 일흔을 넘긴 사람들이니 기계 사용도 서툴다. 카드 결제가 어렵다. 현금만 받으니, 외지 사람의 경우 시비도 붙는다. 궁여지책으로 외부 사람들은 피하게 된다.“군수도 못 드나드는 짜장면집”이라는 표현은 얼마쯤 과장되었다. 전임 어느 군수 시절에 군수가 ‘고향식당’에 왔다. 문제는 군청 직원들. 같은 공간에서 ‘군수 모시고’ 짜장면 먹는 건 아무래도 불편하다. 안주인이 ‘용단’을 내렸다. 군수에게 “오시지 마라”고 통보(?)를 했다. 군수가 드나들면 군청 공무원 수십 명이 안 온다는 게 이유다.수타 경력 50년을 넘긴, 보기 드문, ‘장인’이 매일 수타면을 제대로 뽑는다. “100세 장수하시면서, 꾸준히 수타면을!”이라고 말하기도 미안하다. 수타면 뽑는 일, 힘들다.설마, 청송 주왕산 기슭에서 제대로 된 커피를 만날 줄은 몰랐다. 주왕산국립공원 올라가는 길 왼편에 넓은 주차장의 ‘킴스마운틴커피’가 자리한다. 실내는 웬만한 대도시 커피 전문점 못지않다.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장식했다. 30분 정도 구경해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 인테리어, 커피 맛은 대도시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종류의 커피잔과 티스푼 등이 가게 1, 2층에 가득하다.원두는 생물이다. 제대로 보관하기도 어렵고 일단 볶은 후에는 빠른 기간 내에 소비해야 한다. 커피 맛이 수준급이다. 외진 곳임에도 손님이 꾸준하다는 뜻이다.주인 김해욱 씨는 가끔 무대 위에서 고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손님들을 위한 주인의 배려다. ‘스모크커피’라는 특허 커피도 개발했다. 커피잔을 열면 훈연한 나무 향이 가득하다. 스모크커피는 특허출원까지 마쳤다. ‘커피 족욕’ 등도 가능하다.밥상을 받고 괜히 횡재했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왕산 ‘청솔식당’이 그랬다. “관광지 입구에 있는 그저 그런 식당”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하다. 전혀 ‘관광지 입구의 그저 그런 식당’이 아니었다. ‘청솔식당’. 장을 직접 담근다. 두부를 직접 만든다.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금생에 두부를 만든다”는 말도 있다. 두부 전문점도 아니면서 두부를 직접 만드는 건 힘들다.이 힘든 일을 꾸역꾸역해낸다. 청국장을 직접 띄우는 것은 물론이다. 음식 맛은 장맛이다. 장을 직접 담그는 집을 만나는 것은, 그야말로, ‘횡재’다. 그것도 ‘관광지 입구의 식당’에서. 조미료, 감미료가 거의 없는 식당이다.이른 봄철이면 주인은 산과 들로 나선다. 대부분 나물을 직접 채취한다. 나물은 1년 내내 나오는 것이 아니다. 4~6월 사이 대부분 나물이 생산된다. 냉동, 건조 등으로 보관한다.대중적인 음식점에서 10월에 개 두릅(엄나무 새순)을 볼 수 있었다. 놀랍다. 수수부꾸미 직전의 수수 전도 아주 좋았다. 오래간만에 ‘수수한 수수 전’을 맛봤다.‘산나물 전’은 어수리 전이었다. 대부분 산나물이 그러하듯이, 제대로 된 산나물은 단맛이 아니라 향과 쓴맛이다. 기름의 고소한 맛과 어우러진 쌉쌀한 어수리 전, 아주 잘 먹었다. 오랫동안 입안에 나물의 향이 남았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10-16

구미공단 역사성+예술 문화 콘텐츠 ‘체험형 관광상품’으로

산업의 역사가 오래될수록 폐산업시설로 인한 고충도 커질 수밖에 없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선진 산업국가들이 앞다퉈 폐산업시설을 문화시설로 탈바꿈시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올해 구미공단 50주년을 맞은 구미시도 늘어가는 폐산업시설을 활용하는 방안을 찾아 산업관광 자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폐산업시설을 활용한 사례와 성공 방안에 대해 알아봤다.△폐산업시설의 재생폐산업시설 재생의 본연의 목적은 건물이 갖고 있던 장소성과 역사성은 그대로 담아내면서 새로운 가치를 불어넣는 데 있다. 건물을 완전히 헐어버리는 대신 외관을 유지한 채, 내부 보수작업을 통해 옛 산업시설의 흔적을 남겨 하나의 건축물이 쌓아올렸던 장소성과 역사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는 건축물이 가지고 있는 장소성과 역사성이 본연의 효용가치성과도 큰 관계가 있기 때문으로, 이를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건 재생이 아니라 단순한 건물 재활용에 그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건축물이 가진 장소성과 역사성에 대한 고민을 녹여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장소성과 역사성을 무시해 실패한 경우는 허다하다. 장소성, 역사성에 대한 고민 없이 전시실을 확보하는데 급급했거나, 문화재생 목표 수립보다 건물 리모델링을 선행했거나, 사업을 주관하는 업체와 문화재생계획의 특성이 맞지 않은 경우다. 이러한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국내에서도 폐산업시설을 문화시설로 활용해 성공하는 사례가 점차적으로 늘어나고 있다.△지역과 함께하는 전주 ‘팔복예술공장’전주시 팔복동에 위치한 팔복예술공장은 25년 전 문을 닫은 카세트공장에 예술의 힘을 불어넣어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이다. 지난해 3월 23일 정식 개관해 1층에는 작가들이 입주한 창작스튜디오와 사무실, 지역주민들이 운영하는 카페로, 2층에는 다양한 형태의 전시장과 교육공간으로, 옥상에는 다양한 행사가 가능한 놀이터로 구성했다. 이곳에서는 예술가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지역주민에게는 문화활동과 예술교육을 제공한다. 또 예술가와 기업, 주민 간의 지역공동체 형성을 돕는다. 팔복예술공장의 가장 큰 특징은 장소성, 역사성을 그대로 살렸다는 점이다. 팔복동은 1970∼80년대 전주를 먹여 살렸다고 할 만큼 공장이 많아 1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일했지만, 산업이 쇠퇴하면서 기업과 노동자들도 떠나면서 전주 변방의 주목받지 못하는 동네가 됐다. 전주시는 팔복동이 가진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그것이 현재로 어떻게 변환이 되는지를 보여야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진정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판단에 예술공장을 설립을 추진했다. 또 설립 당시 전주 중심가에서 멀다는 이유로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일부의 지적을, 전주 IC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로 전주를 찾는 외지인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라는 팔복예술공장만의 장점으로 만들어 내세웠다. 전주시와 지역예술가, 지역주민들의 노력으로 팔복예술공장은 정식 개관 보름 만에 2천500여 명의 방문자를 기록하며 전주시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어업인들의 땀과 삶의 철학을 간직한 포항 ‘나루터 문화놀이 창고’포항 동빈내항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구 포항수협 냉동창고가 복합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됐다. 구 포항수협 냉동창고는 1969년 1월 11일 건립돼 수산물 저장과 얼음창고로 사용되다 1997년 12월 31일 포항수협이 대신지점 청사로 이전하면서 빈 공간으로 남아있던 것을 포항시가 지난 6월 매입했다. 포항시는 이 건물을 어업인들의 땀과 삶의 철학이 담긴 공간의 장소성, 역사성을 살리고 창의성을 융합해 복합 문화거점 공간인 ‘나루터 문화놀이 창고’로 만들었다. 특히, 지난 9월에는 나루터 문화놀이 창고 개방과 2019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을 연계해 설치미술 ‘동빈내항 샹들리에’, 예술강사의 아틀리에, 클래식 공연 ‘가을낭만’, 예술컨퍼런스 캬바레, 영상미영화제, 환대의 식탁, 월드 버스킹, 축제워크숍, 도시와 문화공간을 잇는 국제콜로키움 개최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복합 문화·예술 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또 오는 12월까지 문화적 장소 가치를 재생하기 위한 워크숍, 청년 및 예술가들의 ‘실험적 실험’ 등 임의적 활용을 통해 공간 조성의 타당성도 확보할 방침이다.△구미공단 50주년기념 아트페어에서 가능성을 찾다그동안 폐산업시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구미시가 공단 50주년 기념행사로 마련된 아트페어(ART FAIR)에서 그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다. 한국산업단지공단 대구경북지역본부와 한국미술협회 구미지부가 공동으로 준비한 아트페어는 지난달 18일부터 22일까지 구미 보세장치장에서 ‘구미의 미래를 그리다’를 주제로 산업과 예술을 접목한 전국 최초의 지역 예술인과 기업, 시민 중심의 예술축제다. 특히, 산업단지 내 유휴공간을 활용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행사가 열린 보세장치장은 산단공이 입주기업의 수출입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1980년 1월 준공한 특수창고로 연면적 2천92㎡ 규모다. 준공 후 산단공이 직접 운영을 하다 2000년 7월부터 2015년 6월까지 민간위탁으로 운영했으며, 이후 공단 사업 대상 후보지로 선정돼 현재까지 빈 공간으로 남아있었다. 80년대 초 수출에 주력했던 한국경제와 구미공단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그대로 간직한 보세장치장에서 아트페어를 개최함으로써 구미 시민들에게 옛 추억과 함께 현대 미술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아트페어에는 전국 각지에서 참여한 작가 226명(개인전 116명, 단체전 110명)이 회화, 조각, 도자기, 공예, 서예 등 총 1천462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 중 80여 점은 현장에서 판매되기도 했다. 또 도슨트(전시설명) 투어, 시민과 함께 하는 아트챌린지 등 다양한 부대행사로 하루 약 1천여 명의 관람객을 불러 모았다. 이에 산단공은 앞으로도 산업단지 내 유휴공간, 공장 등을 활용한 찾아가는 미술관, 근로자들을 위한 문화예술특강 등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구미시, 예술·문화콘텐츠를 체험형 관광상품으로구미시는 시민들에게 예술 창작활동 공간과 문화 콘텐츠 체험을 제공함과 동시에 이를 체험형 관광상품으로 연계하는 사업들을 추진할 계획이다. 시는 우선적으로 공모사업인 웹툰캠퍼스, 음악창작소를 내년도에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웹툰캠퍼스는 총 사업비 7억 9천만 원으로 금오시장 내 상가를 리모델링해 작가입주시설, 기업입주시설, 교육장, 전시실, 회의실, 탕비실 등과 창작 장비를 구축할 계획이다. 또 정규과정과 특강, 멘토링, 피칭데이, 국제교류 등을 통해 콘텐츠 산업 활성화와 더불어 체험형 관광상품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또 음악창작소는 20억 원을 들여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시설에 녹음스튜디오, 연습실, 야외 음악체험장을 만들어 전문음악인을 지원하고 일반시민이 함께하는 공간으로 조성해 음악체험 관광 프로그램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 밖에도 영상·라디오 스튜디오, 녹음실, 상영관, 체험관 등의 시설을 갖춘 영상미디어센터를 조성해 급변하는 미디어 생태계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시민들이 참여적이고 창조적인 미디어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구미시가 내년부터 추진하는 예술·문화콘텐츠 조성 사업들이 대부분 체험형 사업으로 구성돼 관광상품으로 연계될 경우 구미 관광산업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10-16

노론과 소론, 철새들의 도래지(渡來地)

신임옥사(辛壬獄事)는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도 한다. 옥사는 ‘감옥에 대거 갇히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고, 사화는 ‘의로운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는 말이다. 즉 조선 전기 훈구파와 사림파가 맞서 싸울 때 사림이 대거 화를 입었던 것을 사화라고 한다. 이와는 별도로 조선중기 이후 사림·훈구의 구별이 없어졌을 때, 붕당정치가 이어지면서 ‘일순간에 정권이 확 바뀌는 것’을 사화나 옥사라 하지 않고 그냥 ‘환국’이라고 했다.조선 경종 초기인 1721년(신축년)부터 1722년(임인년)까지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후에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는 문제를 놓고 충돌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노론 4대신과 그 일당 60여 명이 경종을 시해하고, 이이명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까지 연결되어, 노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신임옥사라 한다.신임옥사로 중앙에서 칼바람이 몰아칠 때, 그 여파로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바로 노론계의 신사철, 김광택, 김석증이 그들이다. 신사철은 김재로 등과 함께 소위 ‘삼수육창(三壽六昌)’의 한사람이자 노론 4대신의 중심인물인 김창집(김수항의 아들)의 당이라는 이유로 1723년 1월 19일 장기로 유배를 왔다.김광택은 노론계의 중심인물 60여 명 중 한사람으로 신임옥사 때 죽은 김용택의 동생이었다. 김용택은 숙종이 사류(士類)들을 대거 등용할 때, 이이명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랐지만 목호룡의 고변으로 하옥되어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김석증도 김용택의 가족으로 연좌되어 이곳으로 와 노비가 되었다.이들을 장기현까지 내몰고 온 신임옥사의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당파간의 중상과 모략의 연속이었다. 숙종이 죽은 후에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왕위에 올랐다. 숙종은 경종 외에 또 다른 왕자를 두었는데, 바로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이었다. 그러니까 경종과 연잉궁은 배다른 형제이다. 정치적 배경이 남인이었던 장희빈은 숙종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노론들에 의해 사약을 받고 이전에 죽었다.그런 장희빈의 아들이 경종이 되었으니 그도 당연히 남인 편이었다. 이제 노론들의 운명은 언제 꺼질지도 모르는 바람 앞에 등불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정에는 경종의 편이 될 남인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1694년(숙종 20) 폐비민씨(廢妃閔氏)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들이 화를 입어 실권하고 서인이 재집권하게 되었던 갑술환국때 남인은 거의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에는 이제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과 소론이 대립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소론들은 일부 남아있는 남인들과 힘을 합쳐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경종은 남인을 다시 등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연산군처럼 건강하지가 못했다. 즉위 당시 34세였던 경종은 자식을 낳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병석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배경이었던 남인을 구원하여 등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만약 경종이 건강만 따라줬더라면 당시 노론들의 운명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노론에게는 경종의 이런 건강 악화가 천만 중 다행이었을 것이다. 노론의 일부 대신들은 상소를 올려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동생인 연잉군을 세자로 삼으라고 압박했다. 몸이 허약하고 자식도 따로 없었던 경종에게는 신하들의 요청을 단번에 물리칠 힘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경종은 노론 대신들의 요구대로 연잉군을 세자로 세웠다. 자식이 아닌 동생을 세웠으니 왕세제라고 해야 맞다. 동생을 세자로 삼는 것을 허용한 경종에게 이번에는 노론이었던 조성복이 상소를 올려 ‘임금이 몸이 약해 정사를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하라’고 강요를 했다. 경종은 마지못해 이 요구도 받아들였다.이런 노론의 행위를 지켜보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소론들이었다. 이조참판으로서 소론의 영수인 조태구, 류봉휘(柳鳳輝) 등은 대리청정의 부당성을 상소하였고, 최석항은 한 밤중에 왕을 찾아가 울면서 명령을 환수하기를 청했다. 밤을 꼬박세운 최석항의 설득으로 결국 경종은 대리청정 명령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행위에 대해 노론이 또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론은 떼를 지어 왕에게 몰려가 침전 앞에서 본래대로 대리청정을 시행하라고 호소하였다. 이어서 노론 소론 할 것 없이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경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서 머리만 부여잡고 있었다. 이때에 역사의 획을 긋는 상소가 하나 올라왔다. 1721년(경종1) 12월 6일, 소론의 김일경이라는 사람이 올린 다음과 같은 상소였다.…임금에게 (감히) 대리청정할 것을 요구한 죄를 지은 자들에게 죽음을 내렸다는 임금의 명령과, 승정원과 삼사가 그들이 저지른 죄목을 들어 엄하게 꾸짖도록 임금에게 청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나이다. 법으로 이들을 엄단하시어 군신의 대상을 세우시고 흉적들로 하여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시옵소서.한눈에 봐도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을 척결하여 왕의 권위를 살리라는 탄핵상소였다. 경종은 이 상소를 보자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과 함께 도저히 노론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경종은 자신을 지지하는 소론을 등에 업었다. 이 탄핵상소를 근거로 노론을 쫒아내고 소론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왕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의 4대신이 잡혀왔다. 이이명·김창집·이건명·조태채 등이 그들인데, 경종이 이들 모두를 극변으로 유배를 보내 위리안치 시켜버렸다.서서히 권력을 잡기 시작한 소론은 내킨 김에 노론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국왕의 마음을 움직인 상소문을 작성한 김일경이 앞장섰다. 그는 이제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어 있었다. 우선 노론의 인물 중 목호룡이란 사람을 매수했다. 목호룡은 남인 천얼 출신으로 청능군(靑陵君)의 집안 노비였으나, 풍수를 배워 연잉군 사친(私親)의 장지를 잡아주고 노비에서 양인이 되었다. 이후에 궁궐의 토지와 곡식을 관리하면서 부호가 되었다. 평소 시를 잘 지어 노론계인 김용택·이희지 등과 친밀하게 지내며 연잉군을 보호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변심을 하고 1722년(경종2) 소론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는 김일경의 사주를 받고, 자신이 노론계의 정인중ㆍ김용택ㆍ이천기ㆍ백망ㆍ심상길ㆍ이희지ㆍ김성행 등 60여 명과 모의해 경종을 시해하고 이이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몄다고 왕에게 고발하였다. 이게 이른바 ‘목호룡의 고변사건’이다.목호룡으로부터 고변을 들은 경종은 크게 노했다. 목호룡이 거론하였던 노론의 인사들을 모두 잡아와 투옥하라고 했다. 잡혀온 사람들은 이미 유배를 가 있던 노론 4대신들과 그들의 가족 및 추종자들이었다. 백망((白望)은 이것은 세력을 잃은 소론과 남인이 왕세제를 모함하려고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시 심문을 담당하고 있던 남인들은 이를 묵살해버렸다.결국 역모자로 거론된 이천기ㆍ김용택 등과, 앞서 연잉군을 왕세제로 만들었던 노론 4대신인 이이명 등이 차례로 사형을 당했고, 노론 수백 명이 살해 또는 추방되었다. 반면 목호룡은 이 일로 부사공신(扶社功臣)에 올랐다가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의 벼슬을 받고 동성군(東城君)에 피봉되었다. 이런 노론 숙청 과정이 신축년과 임인년 두 해에 걸쳐 일어났기 때문에 앞의 두 글자를 따서 신임옥사라고 한다.이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정국 속에서 가장 겁을 먹은 사람은 연잉군이었다. 자신을 지지하던 노론 세력들이 대거 죽거나 귀양을 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으면서, 자신도 언제 누명을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조마조마한 세월들이 흘러가고 있었다.그런데, 병약한 몸을 이끌면서도 소론과 남인들을 다시 등용하려고 애썼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죽고 말았다. 경종의 죽음에도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 37세는 몸이 약했다고 하더라도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경종 죽음에 관한 추측 중에는 궁궐에서 일하던 나인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붕당정치가 극으로 치닫던 이 시기에는 궁중에서 일하던 내시와 궁녀들조차도 노론·소론으로 갈라져서 온통 당색이 가득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국왕의 독살설이 나올 법도 하였다.경종이 죽고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말자 노론이 재집권했다. 영조는 이조판서로 있던 김일경부터 유배를 보내버렸다. 그러다가 청주의 유생 송재후의 상소를 발단으로 신임옥사가 무고였다는 노론의 집중적인 탄핵이 시작되었다. 신임옥사의 주동자였던 김일경과 목호룡이 함께 투옥되어 친국을 받았다. 김일경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영조를 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영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끝내 공모자가 없다고 우겼다. 별수 없이 목호룡과 김일경 두 사람만 당고개(唐古介)에서 목이 잘렸다. 목호룡의 머리는 3일간 거리에 달아매어졌고, 그가 전에 경종에게 밀고한 고변문서는 불태워졌다.노론이 재집권하면서 장기로 유배를 왔던 신사철은 복권이 되었다. 돌아간 그는 대사헌, 호조판서, 예조판서를 계속 역임하며 탄탄대로를 걷는 듯 했다. 하지만 정미환국으로 다시 노론이 추방될 때 파직되었다가 1728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에 등용되는 등 부침(浮沈)이 계속되었다. 1740년까지 그는 공조 · 예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여러 번 지냈고, 1745년 판중추부사를 끝으로 관직을 내려놓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기로소는 정2품 이상 전 현직 문관이 나이 70세 이상이 되면 들어가는 일종의 예우기관이었다. 두 아들도 정승에 올라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신임옥사의 여파로 장기에서 1년 넘게 노비생활을 하던 김광택과 김석증도 1725년(영조1) 4월 2일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갔다.한편, 신임옥사가 있은 지 34년이 지난 1755년(영조 31)에는 그 반대세력인 소론계 인사가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바로 소론 4대신의 중심인물인 류봉휘의 조카 류경원(柳景垣)이 이곳으로 와서 안치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류봉휘는 강경 소론파로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경종에게 올려 대리청정을 철회하게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1725년 영조가 즉위하고 탕평책으로 노론·소론의 연립정권이 수립될 때 소론이었지만 우의정에 등용됐다. 이어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30여년 후 강경파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새삼스럽게 신임옥사를 일으킨 주동자로 그가 지목되어 탄핵을 받게 되었다. 결국 함경북도 경흥(慶興)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사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나 1755년 다시 반역죄로 추형(追刑)을 당했다. 추형을 당할 때 그의 가족들도 연좌되어 며느리와 손자는 물론 조카들까지 모두 유배를 보냈던 것이고, 조카 중 한사람인 류경원이 장기로 온 것이다.역사를 되짚어 보면, 18세기 장기현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이데올로기 싸움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런 장기현은 싸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마치 철새처럼 날아와 한동안 머물면서 겨울을 피해갔던, 도래지(渡來地)와도 같은 곳이었다. 아니, 아늑한 보금자리와도 같은 곳이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0-15

밤바다 수놓는 야경 한눈에… 낭만 찾는 관광객 발길 이끌어

‘전남 대표 도시’인 여수시는 거북선과 밤바다로 잘 알려진 남해안의 대표적 관광 물류 도시다. 인구가 28만여명으로 전남 지자체 중 순천시와 함께 선두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회·문화·경제 등 모든 지표에서 전남을 넘어 국내 최대 규모로 성장해가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얼핏 경북 제1의 도시 포항과 많이 겹치는 모습이지만 그 내실은 더욱 탄탄하다.우선 경제적인 면을 살펴보면 국가 경제의 토대인 여수산단과 율촌산단이 입지한 임해공업도시로 포스코를 보유한 포항시와 그 성격이 유사하며, 인근 광양시와 함께 해운 중심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여수·광양항의 경우 총 물동량이 지난해 3억300만t(수출·입 물동량 2억2700만t)을 달성하는 등 대한민국 1위 수출·입 관문항으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전남 경제의 토대 역할 외에도 여수시는 거북선과 이순신을 연계한 홍보에도 힘을 쏟고 있다. 여수가 전라좌수영의 본영(本營)으로 불리게 된 것은 1479(성종10년)에 순천(順天) 내례포의 수군만호영(萬戶塋)을 설치하면서 기존에 있던 해남의 수영을 전라우도수영, 순천(지금의 여수)의 신설수영을 전라좌수영이라 하면서부터다.1593년부터 1601년까지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본영이기도 했던 전라좌수영 여수는 조선시대 400년간 조선수군의 본거지로서 이순신 장군의 기백과 충정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 중 하나인 거북선도 여수와 관련이 있다. 여수 굴강에서 이순신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판옥선(총지휘선)을 건조해 이곳 앞바다에서 진수했다.천혜의 해양관광 자원을 보유한 관광휴양도시로서의 그 매력이 더욱 배가된다.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로도 잘 알려진 여수시는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발표한 ‘2017년 전국 주요 관광지점 입장객 통계’에서 1천508만명으로 전국 1위를 차지하는 등 전남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관광지다. 올해는 (사)한국브랜드경영협회가 수여하는 ‘2019 대한민국 소비자신뢰 대표브랜드 대상’ 시상식에서 부산과 제주를 제치고 해양관광도시 부문 대상을 받기도 했다.□ 여수해상케이블카여수 관광 산업 발전의 촉매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며 추진됐던 여수해상케이블카는 ‘전국 최초로 바다 위를 통과하는 케이블카’라는 수식을 앞세우고 건설됐다. 여수시 수정동 및 돌산읍 우두리 일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2만7천858㎡, 연장은 여수 돌산과 자산공원을 잇는 1.5㎞로 50개의 캐빈을 보유하고 있다.2012년 2월 사업계획을 승인받아 그해 9월 궤도사업 허가가 났으며 이듬해인 2013년 3월 착공식을 열었다. 이후 3년만인 2016년 5월 최종적으로 사업 준공을 승인받아 케이블카를 운영하고 있다.연중무휴로 운행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며, 속도는 2∼3m/s로 왕복에는 20분이 걸린다. 사천 케이블카 등 유명 케이블카와 마찬가지로 일반캐빈(35대)과 크리스탈캐빈(15대)을 운영하고 있으며, 여수시민에게는 4천원의 할인 혜택도 제공한다.총 사업비는 360억원으로 여수포마(주)가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케이블카 준공으로 인한 고용창출은 130명, 케이블카가 임시사용 운행에 들어갔던 2014년 12월 2일부터 지난 2018년 12월 31일까지 4년간 방문객은 827만8천여명에 달한다.하루 평균 5천670명이 다녀간 셈이다. 여수시가 추산하는 주변상가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금액도 연간 1천500억원 가량이나 된다.여수해상케이블카의 장점은 앞서 말했듯 바다 위를 지나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국내 최초의 해상케이블카라는 점이다. 아시아로 따지면 바다 위를 통과하는 해상케이블카로 홍콩, 싱가폴, 베트남에 이어 네번째인 셈이다. 일단 여수해상케이블카에 탑승하면 박람회장과 오동도 중심으로 다도해의 탁 트인 전망을 관람할 수 있다. 시간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 풍광 역시 여수해상케이블카만의 장점이다.여수시에 따르면 여수해상케이블카는 거북선 대교의 옆으로 지나고 지상에서 보는 여수 앞바다와는 다르게 흔히 항공 촬영된 사진으로만 보아오던 아름다운 풍광을 직접 볼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케이블카를 이용한 관광에는 3가지 포인트가 있는데 우선 한낮에는 햇빛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볼 수 있으며, 이 시간대에 크리스탈 캐빈을 타면 마치 바다 위를 걸어가는 듯한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이어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더욱 아름다운 빛으로 물드는 여수의 바다를, 마지막으로 해가 진 후에는 돌산대교와 거북선대교, 장군도와 해양공원의 아름다운 밤바다 조명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화려한 빅오쇼로 유명한 여수세계박람회장.□ 여수해상케이블카와 여수 밤바다여수해상케이블카와 함께 여수 10경에 해당하는 ‘여수밤바다/산단야경’은 여수 관광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케이블카를 통한 야경 감상도 좋지만, 케이블카에서 내려 사람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야경 또한 일품이다. 낭만과 황홀함이 넘치는 여수 도심 야경은 대중가요로 불릴 만큼 낭만과 황홀함을 더해준다.여수의 도시 곳곳에는 화려한 조명이 밤바다를 수놓고 있어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데, 우선 경관 조명 시설이 설치된 진남관이 지역주민과 관광객에게 아름다운 야경으로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 주는 여수의 상징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또 오동도에서는 동방파제의 야간 조명과 황홀한 음악분수가 조명들과 어울려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고, 여수해양공원에서는 돌산대교와 거북선대교, 장군도를 조망권 내에 두고 있어 산책을 하면서도 한눈에 아름다운 밤바다를 볼 수 있다.돌산공원에서 내려다보는 밤의 돌산대교와 장군도는 빛의 도시 여수를 가장 잘 표현하는 광경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돌산대교는 밤마다 50여 가지 색상으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여수의 밤바다를 보석으로 치장하고, 여기에 장군도의 아름다운 불빛이 더해져 여수항 앞바다는 이국적 정취로 관광객을 맞이한다. 오동도 동방파제 야간 조명 시설이 빛을 더하며 바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박람회장 전경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야경을 선물한다.케이블카 자산탑승장 바로 오른편에 오동도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방파제 길을 따라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오동도 안에는 오동도 앞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등대가 있으며, 음악분수대, 맨발산책로 등이 있다.근사한 리듬에 맞춰 화려한 불빛과 하얀 물줄기를 뿜어내는 오동도 음악분수는 고요함과 화려함이 어우러져 한밤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 한다. 형형색색의 야경이 아름다운 여수국가산업단지도 또다른 매력이다. 여수국가산업단지의 웅장한 기계설비에 설치된 수만 개의 조명으로 어우러진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야경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오동도.□ 케이블카 인근 여수 관광지여수시 거북선대교 하부공간(종화동 300-3)에 자리를 잡은 여수 낭만포차는 아름다운 밤바다와 바다 냄새에 흠뻑 취할 수 있는 곳이다. 지난 2016년 종화동 해양공원에서 시작한 낭만포차는 전국의 관광객이 몰리면서 대한민국 최고 관광지로 떠올랐다. 올해 10월 1일부터 현 부지에 새로 자리를 잡았으며, 옛 자리의 명성을 이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는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2012년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여수세계박람회도 해양레저관광지로 새롭게 개장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여수박람회장은 지구촌 단 하나뿐인 화려한 빅오쇼를 비롯해 스카이타워, 아쿠아플라넷 등 박람회 시설물과 역동적인 해양레포츠 프로그램, 바다와 맞닿은 수변공원을 거닐며 산책하는 이들로 항시 인기를 끌고 있다.조선수군 구국역사의 상징인 진남관은 화려한 여수 관광 속에서 야경을 제외하고서라도 또 다른 의미를 더한다. 국보 제304호인 진남관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해에 세운 단층목조 건물로 구국의 상징이자 역사의 현장이다. 진남관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2층 누각 망해루는 일제강점기에 철거됐으나 재복원된 바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삼았던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1599년 충무공 이순신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75칸의 대규모 객사를 세우고, 남쪽의 왜구를 진압해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진남관(鎭南館)이라고 이름 지었다. 건물 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다.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사찰이나 화랑, 궁전의 행랑, 종묘의 정전 같은 건물을 제외하고는 합천 해인사의 경판고와 진남관 단 두 곳뿐이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2019-10-14

너그러운 바다의 품에 안겨

어제 천국에 다녀온 덕분에 잠을 잘 잤다. 물론 저세상이 아니라 ‘울릉천국’ 이야기다. 고백하건대, 서울에서 나는 매일 밤 불면으로 괴롭다. 무슨 죄가 그리 많은지 잘못한 일들이 끊임없이 떠올라 도무지 잠들 수가 없다. 불면으로 죗값을 치른다 생각해도 억울하다.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도 잠은 잘 자지 않는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양을 세기 시작하면 잠은 저 멀리 달아난다. 그런데 지난밤에는 어떤 상념도, 후회도, 한스러움도, 그리움도, 미안함도 없이 스르르, 푸른 잠결에 스며들었다. 맑은 풍경이 마음을 깨끗하게 한 모양이다. 나는 어제 자연에게 용서 받았다. 자고 일어나니 몸과 마음이 다 가볍고 개운했다.저동항 ‘정애식당’ 미닫이문과 함께 울릉도 여행 마지막 날이 열렸다. 울릉도에 왔으면 홍합밥을 꼭 먹어봐야 한다. 누가 내게 그러라고 한 것은 아니고, 그냥 내 생각이다. 주문과 동시에 밥을 짓기 때문에 2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 싱싱한 홍합을 잘게 다진 야채와 함께 미리 불려놓은 쌀에 넣고 밥을 지으면 홍합밥이 된다. 홍합 육수가 밥알에 스며들어 노르스름한 빛깔을 띤다. 간장 양념장을 두세 숟갈 넣어 슥삭슥삭 비비면 고소하면서도 싱그럽고 짭조름한 냄새가 코로 훅 들어온다. 갓 지은 쌀밥의 꼬들꼬들함과 자연산 홍합의 탱글탱글한 식감이 어우러져 씹는 맛이 좋다. 울릉도 음식은 대단히 맛있기보다는 오래 기억되는 쪽을 스스로 택해 지금껏 향토성을 유지하고 있다. 촌스럽고 투박한 밥과 국, 탕, 국수에서는 너그러운 바다의 품이, 바다의 품이 키운 사람의 마음이 짠맛, 구수한 맛, 슴슴한 맛, 시원한 맛, 칼칼한 맛을 낸다.울릉도의 최서북단인 태하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 예로부터 향나무가 많아 ‘향목령’으로 불린 고개가 있다. 울릉도 향나무들은 벼랑에 뿌리를 박은 채 소금 햇살을 삼켜 잎맥을 키우고 젖은 해풍을 머금어 간신히 물관을 적신다. 바람을 기다리는 언덕이라는 뜻의 ‘대풍감(待風坎)’에는 순풍에 돛을 밀며 먼 바다로 나아가고픈 뱃사람들의 소망이 천연기념물 제49호 대풍감향나무와 함께 자라난다. 태하향목모노레일 승차장에서 앙증맞은 모노레일을 타고 대풍감 산책로에 내렸다. 15분 정도 숲길을 걸어 대풍감에 오르는 순간 온몸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몸속에 있는 모든 함성들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감탄들이, 웃음들이, 눈물들이 목구멍으로 달려 올라와 저 먼저 쏟아내 달라고 아우성을 하는 통에 눈과 코와 귀와 입을 한꺼번에 열 수밖에 없었다.대풍감에서 바라보는 울릉도 북면 해안은 월간지 ‘산’에서 꼽은 우리나라 10대 비경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색채의 마법사라는 마티스나 샤갈의 팔레트에도 없는 파랑색 바다는 현무암 바위들이 내민 검은 입술과 키스한다. 하늘은 한없이 높고 또 함부로 낮으며, 아득히 멀고 또 아무렇게나 가깝다. 이 비경을 공감각적 풍경으로 완성하는 것은 해풍이 실어 나르는 향나무 향기, 그러니까 대풍감은 자연의 ‘4D 아이맥스 영화관’인 셈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우리나라에, 아니 세상에 또 있을까? 대풍감에서 나는 이 세계를 더욱 사랑하게 됐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이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삶이 지루하고 단조롭게 느껴진다면, 세상이 온통 어둡고 좁게만 느껴진다면 반드시 대풍감에 가보라고.대풍감에는 1958년부터 불을 켠 울릉도등대가 있다. 이곳 사람들은 태하등대라고 부른다. 높이 7.6m의 하얀 등탑 안에 항로표지관리원이 근무하는 유인등대다. 해양수산부의 ‘유인등대 무인화 계획’에 따르면 오는 2022년까지 부산 오륙도, 포항 송대말, 제주 산지, 군산 말도, 여수 소라도, 강원 고성 대진, 그리고 울릉도의 등대 몇 곳이 무인등대로 전환된다고 한다. 이미 무인화가 된 곳도 있고, 아직 등대지기가 지키는 곳도 있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이곳 울릉도등대도 언젠가는 무인등대가 될 것이다. 나는 향로표지관리원이라는 엄숙한 직함보다 등대지기라는 다정한 이름을 좋아한다.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자고 한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지금도 노래 ‘등대지기’만 들으면 눈물이 난다. 이곳 등대에서 마지막 등대지기가 떠나는 날, 별들도 운행을 멈춘 채 눈물 같은 빛방울을 흘릴 것이다. 등대가 한 그루 듬직한 나무라면 몸속으로 나이테 수십 개쯤 우습게 그렸을 세월이 아닌가? 등대와 등대지기는 바다가 쓰는 책의 주인공, 긴 이야기의 끝이 이제 가깝다.‘바람을 기다리는 언덕’을 내려와 서면의 버섯바위를 구경했다. 버섯을 닮았다 하여 버섯바위인데, 층층이 쌓아올려진 ‘버섯갓’ 모양의 퇴적암이다. 화산 용암과 재가 굳어 쌓인 바위를 파도와 칼바람이 함께 깎아내 신비한 조각작품을 만들었다. 남양리 비파산 국수바위도 감상했다. 157만년 전 용암 분출로 만들어진 이 바위는 높이 30m, 길이 300m에 달한다. 벽면에 수많은 주상절리가 국수가락처럼 늘어져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바위 구경에 통구미의 거북바위를 빼놓을 수 없다. 통구미는 울릉도의 유일한 자연 포구, 거기 우뚝 선 거북바위는 그 모양이 기어가는 거북이를 닮았다. 가까이서 보면 바위 곳곳에 거북이 형상의 자연석들이 있다고 한다. 눈 밝은 사람들은 엄마 거북바위에서 아기 거북이를 12마리나 찾아낸다는데 나는 세 마리밖에 못 봤다. 나머지 아홉 마리는 다음에 와서 꼭 찾을 것이다.도동항에 와 케이블카를 타고 독도전망대에 올랐다. 하지만 독도는 볼 수 없었다. 맑은 날보다 오히려 구름 낀 날 잘 보인다고 한다. 독도전망대 아래에는 독도박물관이 있다. 1997년에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 유일의 ‘영토 박물관’이다.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고문헌과 고지도, 독도의 역사, 자연환경 및 생태계, 독도의용수비대의 기록 등을 전시 및 설명하고 있다. 박물관을 거닐며 뜨거워지는 가슴을 어찌하지 못해 여러 번 눈시울이 붉어졌다. 독도에 가보지 못하고 울릉도를 떠나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러나 아쉽게 헤어져야 재회도 가능한 법, 나는 짝사랑하는 소년처럼 독도를 마음에 품은 채 독도박물관을 나섰다.수많은 관광객들이 오후 3시 30분 썬플라워호를 타고 울릉도를 빠져나간다. 출항 한 시간 전, 북새통 도동항은 온갖 목청으로 요란했다. “이리 오이소” 소리, 상인과 손님이 에누리 다툼하는 소리,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뽕짝소리, 오징어 냄새, 젓갈 냄새, 호떡 굽는 냄새…. 소리와 냄새가 괭이갈매기보다 먼저 와 나를 배웅했다. 항구는 생명과 역동의 에너지로 충만하다. 그 에너지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면서 나는 오늘을 사는 울릉도 사람들을 만났다. 흥겨우면 흥에 취하고, 언짢으면 곧장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순수한 사람들. 알 수 없는 뭉클함을 애써 누르며 나는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 안고” 여객선 탑승구로 향했다.급변하는 시대의 한 구석에서 발버둥을 치며 제 살아있음을 증명하려는 오래된 것들, 촌스러운 것들의 처절한 몸짓을 본 까닭인지도 모른다. 등대지기도, 천막집도, 항구의 좌판을 이루는 작고 소소한 소리와 냄새도 조금씩 변해가거나 사라지는 중이다. 열심히 북을 두드리며 익살스러운 춤을 추는 울릉도 호박엿장수의 흥겨운 놀이판이 슬픈 피에로의 연극처럼 측은했다. 상념에 빠진 내 앞에서 “뭐 그리 복잡해. 신나게 한판 놀고 마음껏 사랑하다 가면 그만이지” 엿장수와 구경꾼들이 한데 어울려 춤판을 벌였다. 그러자 썬플라워호의 탑승구가 열렸다. 나는 2층 선실에 앉아 눈을 감았다. 등대지기, 엿장수, 이장희, 군청 주무관, 두꺼비식당 아줌마, 학포 이장님, 홍순칠, 안용복, 독도의용수비대….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는 사람들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시인 이병철

2019-10-13

중소기업과 함께 성장하는 성주군… 도농복합 행복성주 건설 추진

다수의 경제학자들은 현대사회에선 ‘작지만 강한 중소기업’이 많은 나라가 건강한 경제구조를 가졌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기술력과 미래로의 발전 가능성을 지닌 중소기업의 육성은 어느 국가에게나 중요한 문제다.지방자치단체에게도 마찬가지. 지역에 양질의 중소기업이 다수 존재한다면, 당연지사 지역 경제의 청사진도 환하게 밝을 것이다.성주군은 올 한 해 중소기업 지원에 아낌없는 노력을 투여했다.아래에서 성주군의 중소기업 지원 정책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다양한 지원책과 소통간담회로 ‘중소기업 살리기’ 나서먼저 성주군은 올 상반기에 지역 중소기업 경영에 도움을 주고자 ‘2019년 중소기업 지원시책’ 안내 책자를 만들어 성주의 중소기업 900여 개 업체에 배부했다.책자에는 성주군 중소기업 운전자금 지원 안내, 중소기업 해외마케팅 지원 사업, 지역 발전 우수기업 선정 지원 안내,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사업 추진 등의 내용을 담았다.또한 성주군이 힘을 쏟아 추진하고 있는 ‘먹·자·쓰·놀(성주에서 먹고 자고 쓰고 놀자는 의미) 운동’, 미래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남부내륙철도 성주역사 건립추진에 대한 협조도 중소기업 측에 부탁했다.“경상북도에서 지원하는 정책자금 지원, 기술·경영혁신 지원, 수출·판로 지원 등 도의 시책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했다”는 것이 이어지는 성주군청 기업지원과의 부연이다.성주군은 중소기업 지원시책 책자를 군 홈페이지 사이버 기업지원센터(http://www.sj.go.kr/giupsos)에 게시했다. 누구나 쉽게 관련 정보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책자는 기업 활동을 위한 안내서인 동시에 ‘기업하기 좋은 도농복합 행복 성주’를 알리는 데도 한몫했다는 평가다.이와 함께 성주군은 기업 투자의 활력을 높이고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기업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소통간담회’를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군이 기업의 애로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형식을 벗어난 내용 위주의 소통간담회가 필요하다”는 것이 성주군청의 판단이다.이런 맥락 속에서 선남면 공단 진입로 인근의 주민 불편과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명관로 공단 주변 가로등 설치 필요성 등을 찾아냈다.문제점을 발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경북도청을 방문해 성주 중소기업들의 애로사항을 전달했고, 관련 예산도 3천만 원 확보했다는 것이 군청 기업지원과의 설명이다.경북도와 함께 성주 산업단지 및 농공단지 기업체 2곳(영창케미칼, 금성산업)을 찾아 진행한 ‘현장밀착형 릴레이 소통간담회’도 중소기업인들의 눈길을 끌었다.기업 관계자들은 “현장에서 직접 생생한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어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소통간담회에선 연결로와 진입로 등 산업단지 활성화를 위한 기반시설 조성 등이 건의됐다. 성주군은 이런 의견을 적극 수용해 해결 방안을 찾겠다고 약속했다.이와 관련 배성호 성주군 기업지원과장은 “기업이 안고 있는 어려움과 문제점을 찾으려면 언제나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며 “앞으로도 우리 군 중소기업의 가려운 곳을 시원스레 긁어주는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역발전 우수기업’ 선정하고, 해외 마케팅 지원‘지역발전 우수기업’을 선정하는 것도 성주군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다. “성주군 발전에 기여한 우수한 중소기업을 선정해 기업인의 자긍심과 사기를 높이겠다”는 것이 사업의 취지다.일자리창출 증가 실적, 관내 거주비율 및 증가율, 지역발전 공헌도, 사회봉사활동 실적 등이 선정의 주요 기준이다. 기업 관련 단체와 기관 등이 추천하고 심사를 진행한다.‘지역발전 우수기업’으로 선정되면 △환경개선정비비(직원 복리후생 사업·위험시설 개보수) 1천만원 △중소기업운전자금 지원 우대(5억까지 융자 추천) △중소기업 인턴사원제 우선 지원 △지방세무조사 3년간 유예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이 사업을 추진하는 이병환 성주군수는 “우수 중소기업 육성책이 기업인의 긍지를 높여 실질적인 고용창출로 이어질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중소기업의 해외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것도 성주군이 세운 2019년 주요사업의 하나다. 이를 위해 성주군은 지역 중소기업체를 대상으로 수요조사를 실시했고, 기업에 맞는 맞춤형 마케팅 전략을 세운 뒤 5천만 원의 예산을 투입한다.해외 마케팅 지원사업은 외국으로의 진출 가능성이 높은 분야 위주로 성주군 소재 수출 중소기업 8~10업체를 선정하게 된다. 이후 현지 바이어 섭외와 수출상담회 개최, 차량 임차, 항공료와 통역원 지원, 현지 간담회 개최 등을 지원한다.“국내 경기 침체,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 등 어려운 국내외 여건 속에서도 시장 다변화와 수출 증대를 통해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도록 발걸음을 함께 하겠다”는 것이 성주군청의 의지다.◇ 현장 찾아 ‘중소기업’ 애로사항 듣고 해결책 고민지난 근로자의 날 이병환 군수는 선남면에 자리한 장갑 제조업체 송죽글러브(대표 정선희)를 찾았다. 이날 이 군수는 기업의 현황과 애로사항을 들은 후 생산 현장을 둘러보고 임직원들을 따뜻하게 격려했다. 이는 ‘민생 현장 챙기기’인 동시에 ‘중소기업 기 살리기’를 위한 행보였다.이를 성주군청 기업지원과 관계자는 “국제 경기와 국내 경기가 더불어 침체된 상황에서 지역 경제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이를 능동적으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송죽글러브는 PU코팅 장갑, 라텍스코팅 장갑, 특수 장갑 등을 제조하는 성주군의 중소기업으로 2017년 ‘지역발전 우수기업’으로 선정됐다. 현재는 약 50억 원 정도의 매출액을 보이고 있다.평소에도 “현장에 답이 있다”고 말하는 이병환 군수는 “어려운 경제 여건과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지역 발전에 노력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의 노고를 잘 알고 있다”며 “지속적으로 기업을 방문함으로써 어려움과 건의사항을 직접 듣고, 군정 목표인 ‘경제가 발전하는 희망 성주’를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성주일반산업단지에 위치한 자동차 부품제조업체 카펙발레오(대표 김상태 외 1인)도 성주군이 방문한 기업 중 한 곳이다. 군청은 중소기업을 찾는 것이 “기업과의 소통을 위한 즐거운 강행군”이라고 말한다.대구에 본사를 둔 카펙발레오는 자동차용 동력전달장치 등을 제조하는 기업이며 매축액은 7천억 원 정도다. 관련 업계에선 건실한 중견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지역의 중소기업이 살아야 성주군도 즐겁다. 경제 발전으로 희망이 커가는 성주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기업이 성장하고 있는 현장 속으로 달려갈 것”이라는 게 성주군청의 다짐이다.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에도 성주군의 중소기업 방문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민선7기 1주년을 맞이해 성주군 발전에 힘을 보탠 우수 중소기업 2곳을 방문한 것.이 자리에선 지역발전 우수기업 인증서를 수여했고, 중소기업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각종 정책을 알렸다. 물론 현장의 살아있는 목소리도 들었다.이날 우수기업으로 선정된 부건니트(대표 윤정환)와 가천산업사(대표 신용근)는 지역 일자리 창출, 생산 매출액 증가, 종업원의 관내 거주, 지역사회 공헌도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부건니트는 2004년 설립됐다. 니트 원단을 생산하는 업체로 지난해엔 연매출액 110억 원을 달성했다. 윤정환 대표는 성주군중소기업협의회장으로 재임 중이며, 지역 발전을 위해 땀 흘리고 있다.가천산업사는 2000년 12월 생산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콘크리트 플룸 및 벤치플룸을 생산하는 업체로 지난해 연매출액은 37억 원. 신용근 대표는 성주군자원봉사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소외계층을 위한 봉사로 성주 지역에 도움을 주고 있다.이병환 군수는 “인구 7만의 ‘도농복합 행복 성주 건설’을 위해선 무엇보다 우수기업의 관내 유치가 중요하다. 또한 지역 경제 활성화와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핵심”이라며 “이를 위해 성주군은 기업하기 좋은 도시, 기업 애로사항 제로(0)를 목표로 하고 있다. 향후 3차 산업단지 조성, 기업운전자금 지원, 우수기업 환경개선비 지원 등의 인센티브를 확대해 갈 예정”이라고 기업인들을 격려했다.‘중소기업과 함께 성장하는 성주군’이라는 슬로건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전병휴·홍성식 기자

2019-10-10

‘체험’ 있어야 관광산업이 산다

△ 산업관광에 체험 인프라는 필수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지난 8월 국내 여행 활성화를 위해 우리나라 경제와 기업 관련 산업 유산을 돌아볼 수 있는 ‘가볼 만한 산업관광지 20곳’을 선정해 발표했다. 선정된 20곳 산업관광지는 2016년부터 구축한 한국 ‘산업관광’ 자원 조사 결과 수집된 470여 개의 산업관광 시설 중에서 운영 프로그램의 매력도, 산업관광지 인지도, 주변 관광자원과의 연계성 등을 평가해 선정됐으며, 전통 향토 산업, 장수 기업, 근현대 산업유산, 세계적 강소기업, 첨단산업체 등이 포함됐다. 가볼 만한 산업관광지로 선정된 경기도 수원시의 ‘삼성 이노베이션 뮤지엄’, 고양시의 ‘현대 모터스튜디오 고양’, 충남 서천군의 ‘한산모시관’ 등은 사물인터넷교실, 어린이 반도체 연구소, 자동차 제조공정 체험, 테마별 차량 시승, 모시 염색 및 한지체험 등의 다양하고 차별화된 체험 프로그램으로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경북지역에서는 포항시의 ‘포스코 역사관’과 문경시의 ‘에코랄라’가 이름을 올렸으나 구미시의 산업관광지는 이 20곳 안에 들지 못했다. 한국의 산업 발전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구미시가 ‘추천 가볼 만한 산업관광지 20곳’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산업관광의 필수 요건인 체험 인프라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환경과 증강현실이 만나다… 문경에코랄라에코(환경·생태)와 룰루랄라(즐긴다는 뜻의 의성어)를 합성한 에코랄라는 문경시 가은읍 석탄박물관을 포함한 18만6천㎡ 부지에 873억 원(국비 611억원, 지방비 262억 원)을 들여 조성됐으며, 국내 최초로 증강현실(AR·Augmented Reality)을 활용해 게임을 즐기는 야외 체험시설과 나만의 영화를 제작하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개념의 실내전시 및 체험공간을 갖추고 있다. 특히, 에코타운은 방문객이 직접 배우, 감독이 돼 영상 촬영, 기획, 편집까지 체험할 수 있는 ‘에코스튜디오’와 친환경 정원 ‘에코팜’, 360도 써클비전과 입체효과로 백두대간을 감상할 수 있는 ‘에코써클’ 등 생태·영상 체험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창작동화 ‘거인의 숲’스토리를 활용한 증강현실(AR) 놀이터 ‘자이언트 포레스트’는 ‘거인의 언덕’, ‘신기한 수도꼭지’, ‘험난한 길’ 등 9개 테마 코스로 구성된 야외 체험시설로 어린이들에게 신나는 모험과 특별한 추억을 선사하는 공간으로 조성됐다.이 밖에도 석탄박물관은 폐광된 구 은성광업소를 활용해, 석탄산업의 역사 뿐 아니라 1963년 뚫은 은성갱을 통해 실제 갱도 체험도 가능하도록 했다. 또 폐석탄 더미 위에 조성된 가은오픈세트장은 옛 고구려 궁과 신라마을 안시성, 요동성 등으로 구성돼 연개소문, 무신, 광개토 대왕 등 유명 사극 촬영지로 사용됐으며, 제1촬영장까지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면 제2, 3촬영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한국 철의 역사 한눈에… 포스코 역사관포항시 괴동동에 건립된 포스코 역사관은 9천917㎡ 부지 위에 건축 연면적 3천636㎡, 전시면적 1천983㎡의 지상 3층 규모로 포스코가 창립한 1968년부터 세계적인 철강기업으로 거듭난 현재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역사관은 역사관은 테마존, 창의관, 청암관, 세계 속의 포스코, 야외 전시장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야외 전시장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용광로인 삼화고로의 실물을 볼 수 있다. 특히, 무에서 유를 창조한 신화를 이룬 포스코인들의 발자취를 체계적으로 정리함과 동시에 한국의 철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어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산 교육장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포스코 역사박물관은 2003년 개관 이후 2015년에 누적 관람객 100만 명을 돌파했으며, 일일 평균 내방객 400여 명이 찾는 포항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체험 인프라 구축을 위한 라면박물관 건립 추진산업 기반시설과 기업 박물관, 체험관 등의 복합시설을 중심으로 견학과 체험, 기업문화 탐방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산업관광. 구미시의 산업관광 자원에는 아직 체험 인프라가 구축돼 있지 못한 상황이다. 오운여상과 삼성전자의 스마트시티 홍보관은 해당 기업체의 여건으로 일반 관광객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접근성마저도 떨어진다. 구미시는 인프라 부족을 해결하고 산업관광 체험 프로그램 확대를 위해 라면박물관 건립을 추진한다. 이 사업은 2023년까지 100억 원을 들여 구미공단 폐공장이나 도시재생 지역에 라면 역사관과 체험관, 포토존, 어린이박물관 등을 갖춘 연면적 990㎡의 라면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으로, 시는 내년에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으로 신청해 사업비 50%를 지원받을 계획이다. 구미시는 국내 유일의 라면박물관 건립과 더불어 라면거리 조성, 라면축제 개발을 통해 체류형 관광객 유입 증대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구미시가 추진하는 라면박물관의 성공 가능성은 우리와 비슷한 라면 문화를 가진 일본의 신요코하마 라멘박물관에서 엿볼 수 있다. 1994년 3월 6일 개관한 이 박물관은 사람이 별로 없는 신요코하마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프로젝트로 만들어졌다. 주차장 건물을 개조해 지상 1층, 지하 2층으로 구성한 이곳에는 일본 각지에서 그 맛을 자랑하는 라면 전문가들이 모여 영업을 하고 있어, 각 지방마다 특색 있는 면과 수프를 맛볼 수 있다. 또 맛의 질을 높이기 위한 행사도 다양하게 개최하고 있어 박물관과 체험형 관광을 접목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대통령 생가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해야구미시는 올해 구미공단 5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기념행사와 산업시설을 기반으로 한 산업관광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정작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활용하지 않고 있다. 정치적인 이유로 박 전 대통령과 관련된 사업에 대한 비난 여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구미에서 외지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박 전 대통령 생가인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방문객 수가 지속적으로 줄어 지난해 생가 방문객은 20만 1천34명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한 2013년 78만 2천600명과 비교해 약 4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2014년 69만 77명, 2015년 51만 9천211명, 2016년 39만 2천566명, 2017년 26만3천102명으로 매년 10만명 정도씩 감소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2017년부터 급격하게 줄어들었다가 최근 다시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해도 연간 20만 명의 관람객이 과연 적은 숫자는 아닐 것이다. 구미시의 대표 관광시설인 구미에코랜드가 1년에 36만 명이 방문한 것만 봐도 대통령 생가는 관광 자원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내년 10월 생가 주변 공원화 사업부지에 박정희 대통령 역사자료관이 개관되면 박 전 대통령과 구미공단을 테마로 한 구미 근현대사를 재조명하고 역사 자료를 활용한 교육 학습의 장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또 새마을운동테마공원도 이미 개장해 운영되고 있는 만큼 빅 전 대통령 생가를 중심으로 한 산업관광 프로그램을 만들어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10-10

가성비도, 맛도 ‘곧 뒤돌아 생각날’ 한결같은 인심이어라

장터국밥… 온천골가마솥국밥 성암골가마솥국밥간판 이름이 묘하다. ‘가마솥국밥’이다.‘가마솥국밥’이라는 제목은 일상적이다. 국물을 가마솥에 넣고 끓였다는 뜻이다. ‘가마솥국밥’은 일상적이면서 ‘중립적’이다. 변화하는 음식 중에서 묵묵히 자기 이름을 고집하는, 마치 화석(化石)같은 이름이다. 육개장, 대구탕, 따로국밥, 파개장, 해장국, 선지해장국, 장터국밥 등등 여러 종류의 국물 음식이 있다. 비슷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다. ‘논쟁적’인 이름들이다. 대구시, 대구의 음식 관계자들은 오랜 기간, 육개장인가, 따로국밥인가, 장터국밥인가를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다.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다.‘가마솥국밥’은 한걸음쯤 떨어진 이름이다. 어느 편도 들지 않고, 그저 “가마솥에서 끓여낸 국물”이다. ‘가마솥에서 끓여낸 육개장’인지, ‘가마솥에서 끓여낸 장터국밥’인지, 따로국밥인지 가리지 않는다.경산은 대구의 배후지였다. 어느 순간 대구의 팽창과 더불어 서서히 면적, 인구 등이 줄어든다. 원래는 평야가 넓고, 곡식 생산이 많았다. 상업의 중심지였고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사람이 모이면 시장이 서고, 시장에는 반드시 음식점이 들어선다. 경산에 국밥집 등이 널리 유행한 이유다.‘온천골가마솥국밥’은 경산의 대표적인 국밥집이다. 굳이 따지자면 따로국밥이면서 장터국밥 스타일이다. 장터국밥은 대파, 무 등을 많이 사용한다. 육개장에 비해 고사리, 말린 토란대가 적다. ‘온천골가마솥국밥’의 국그릇에는 유독 대파가 눈에 띈다. 해장국은 ‘기능적’인 이름이다. 육개장, 장터국밥, 선지해장국, 따로국밥 모두 넓은 의미에서 해장국이다. 어떤 국물 음식이든 해장하기 좋으면 해장국이다. 해장국의 출발은 해장이 아니라 술국이다. 술을 마시고 이튿날 속을 풀어주는, 해장국의 역사는 짧다. 불과 50~60년 정도다.오늘날 해장국은 일제강점기 ‘술국’의 변형 버전이다. 서울 ‘청진옥’을 대표적인 해장국 전문점으로 여긴다. 손님의 대부분은 이른 아침 땔감을 지고 온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이들이 밤새 술을 마시고 이른 새벽 ‘청진옥’에서 해장을 했을 리는 없다. 손님 상당수는 멀리 남양주 등에서 땔감을 지고 온,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른 아침, ‘청진옥’에서 술 한 사발과 밥 한 그릇, 그리고 술국으로 곤한 몸을 다스렸다.‘온천골가마솥국밥’과 ‘성암골가마솥국밥’의 국밥은 큰 차이가 없다. 대파를 많이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엿보인다. 대파는, 국솥에 넣고 끓이면 단맛이 강하게 난다. 파의 푸른 부분은 향이 좋지만, 흰 부분은 단맛을 강하게 낸다.의외로 무의 사용은 제한적이다. 무는 계절 별로 맛이 달라진다. 여름 무는 지린 맛이 난다. ‘들척지근하다’라고 표현한다. 서리 맞은 가을 무는 단맛이 강하다. 두 집 모두, 무의 사용은 제한적이다.‘온천골가마솥국밥’의 열린 주방은 볼 만하다. 서너 명의 주방 인력이 가마솥을 중심으로 연신 국물을 퍼 나르고 있다. 가마솥 몇몇에는 당장 손님상에 퍼낼 국물을 끓이고 있고, 몇몇 가마솥에는 예비용 국물이 끓고 있다.‘육국수’는, 이 지역에서는 평범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 메뉴다. 국물에 국수를 말아서 먹는다. ‘성암골가마솥국밥’에도 육국수 메뉴가 있다.‘성암골가마솥국밥’은 떡갈비 등의 메뉴를 보충했다. ‘온천골가마솥국밥’에 비하면 개량되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음식 맛도 ‘온천골가마솥국밥’은 오래전의 맛이 강하다. ‘성암골가마솥국밥’은 변화, 진화한 맛이다. 메뉴 구성이나 실내 분위기도 마찬가지. ‘성암골가마솥국밥’은 개량된 맛이다.수준급 한우… 옛진못식육식당 남산식육식당‘옛진못식육식당’의 메뉴판은 재미있다. ‘한우막구이’는 갈비살, 갈비구이다. 갈비살은 늑간(肋間)살이다. 갈비뼈 사이의 살이다. 길게 썬 갈비살이 특이하다. 메뉴 중에 가마솥국밥도 있다. 대파는 보이지 않고 콩나물과 무가 눈에 띈다. 이 지역 ‘가마솥국밥’과는 다르다. 육개장과 장터국밥 등에 대파를 많이 넣는 것은 이 지역의 특징이다. 한때 ‘파+육개장=파개장’도 유행 아이템이었다. ‘옛진못식육식당’의 국밥에는 대파가 많지 않다. 오히려 특징적이다.‘남산식육식당’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노포다. 고기와 더불어 자투리 고기를 넣은 된장찌개가 좋다. ‘식육식당’이다. 경북 전체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고기도 팔고, 간단하게 식사도 할 수 있는’ 가게다. 고기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치 않다. 수준급이다. 지육이나 부분육으로 가져와서, 식당에서 직접 손질한다. 입구에서 연신 고기 다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역시 된장찌개가 강추.한 상 가득 정성이… 다정한정식 중남식당업력으로 따지자면 ‘중남식당’이 한참 선배다. ‘중남식당’은 오래된 노포다. 음식도 듬직하다. 변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불평도 있다. 음식 가짓수, 너무 많은 접시가 아니냐, 낭비하는 밥상이다, 음식이 싱겁다, 먹을 것은 별로 없는 데 반찬 가짓수가 너무 많다, 등등 평가가 요란하다.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경산에서도 외진 하양에 있지만, 꿋꿋이 자기 길을 걷는다. 묵묵히 “우리는 이런 밥상이다”라고 주장한다.음식에 대한 확고한 신념, 존재 이유가 있다. 옳다, 그르다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음식’이라는 자기 확신이다. 언젠가 인터뷰를 요청한 적이 있다. 거부. “손님이 더 많이 오면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였다. 할 수 있는 정도를 성의껏 해낸다. 그뿐이다. 아무리 낭비하는 밥상이라고 해도 꾸준히 20여 가지 반찬을 내놓는다. 바뀌지 않는다. 줄여도 탓할 사람은 없다. 여전히 ‘중남식당’의 밥상이라고 고집한다.‘중남식당’의 상차림에 대해서는 얼마쯤의 ‘설명’이 필요하다,그릇 수로 헤아리면 약 20접시의 반찬이 나온다. 실제로는 더 많다. 나물 네 종류를 넣은 접시가 하나, 전을 네댓 종류 넣은 그릇이 하나 있다. 20종을 훨씬 넘긴다. 나물도 재미있다. 고사리, 무, 콩나물, 푸른 잎 채소 등이다. 이 나물 반찬은 제사상에 오르는 반찬과 같다. 흰색, 푸른색, 고사리의 흑갈색, 노란색 등이 조화롭다. 전도 마찬가지. 먹든 않든 전을 이렇게 다양하게 내놓는 것은 한때 유행했던 한정식의 개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오이 냉채, 갈치 한 토막, 도라지무침, 달걀찜 등도 마찬가지. 한때 화려했던 한정식 밥상의 쓸쓸한 그림자다.‘다정한정식’은 전혀 다르다. 정반대다. 끊임없이 반성하고, 고치고, 바뀐다. 바뀌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음식의 내용부터 가격까지 바꾸고 또 바꾼다. 간략하지만, 먹을 만한 음식들로 채운다. 전통 방식은 아니다. 이런 음식이 좋겠다 싶으면 바꾼다. 손님들의 작은 목소리도 듣고 기억한다. 아내가 주방을, 남편이 홀을 맡아서 운영한다. 부부가 조용히 의논, 개발하고, 곧 음식, 접대 등에 반영한다.음식의 종류와 내용도 마찬가지다. 지역 사정에 맞춘 음식값이다. 1만 원 선. 음식 수준? 가격을 상회한다. 수준급의 음식이다. 1만 원대의 가격으로는 더 이상의 밥상을 원하는 것은 결례다 싶을 정도. 가성비,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밥상이다. ‘중남식당’보다 반찬 가짓수가 적지만 흉이 될 정도는 아니다. 이미 수준급의 음식으로 단골도 제법 있다.굳이 ‘설명’을 하자면, ‘다정한정식’도 ‘경북 반가의 음식’ 틀을 일정 부분 보여준다. 묵이 있고, 두어 종류의 나물 반찬을 한 그릇에 담았다. 콩나물, 푸른색 잎채소, 가지나물 등이다. 구절판 변형 반찬이 있고, 제법 그럴듯한 반건 생선조림이 있다.특이한 부분은, 별도로 내놓는 돌솥밥 형태의 솥밥이다. ‘돌’은 아니지만 1인당 솥 하나로 정갈하게 지은 밥이다. 9월에 만나는 자연산 방풍나물도 특이하다. 방풍은 흔히 초봄에 먹는 거로 여긴다. 그렇지는 않다. 가을 방풍나물도 나름의 맛이 있다. 게다가 붉은, 자줏빛 줄기의 자연산이라면 정성스럽게 준비한 반찬이라고 여겨도 좋다.오랜 전통을 지키는 ‘중남식당’의 밥상에 보이지 않는 잡채가 ‘다정한정식’에는 등장한다. 잡채는, 일그러진 음식이다. 나물도 아니고 쫄깃한 당면을 볶은 음식에 불과하다. 여러 가지 나물, 진짜 잡채를 내놓으면서 짝퉁 잡채를 또 내놓을 필요는 없다.한식 밥상은, 경산에서는, ‘중남식당’에서 ‘다정한정식’으로 진화 중이다.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는 아니다. 변화, 발전하는 모습이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10-09

한 템포 천천히… ‘예쁜 저수지의 도시’를 만나다

인간은 모두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일상을 살면서는 그 사실을 잊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늘은 높아지고 날씨는 선선해졌다. 경산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 속의 또 다른 자아(自我)’를 찾아보기에 좋은 여행지다. 삼성현 역사문화공원, 반곡지, 환성사, 선본사를 찬찬히 걷다보면 이 말이 과장이 아니란 걸 느끼게 될 것이다.충분히 영민했으나 보다 더 큰 깨달음을 얻고자 열망했던 신라의 한 승려가 멀고 먼 당나라로 공부를 하러 떠난다. 그 여정의 어느 하루. 동굴에서 잠들었던 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신다. 타는 듯한 갈증을 풀어준 시원하고 달콤한 물. 그러나 해가 뜨고 주위가 밝아졌을 때 그 바가지는 사람의 두개골이었고, 물 또한 새카맣게 썩어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거기서 크게 돈오(頓悟·갑작스런 깨달음)한 승려는 유학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경산시 남산면 ‘삼성현 역사문화공원’에 들어서면서 떠올린 원효의 에피소드다. 우리는 이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세상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를 설명할 때 곧잘 사용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추측 불가능한 방법으로 진리를 깨우친 원효는 이후 당대 백성들의 ‘정신적 스승’이 됐다.“마음의 근원을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원효의 가르침은 싸움을 멈추고 하나의 마음으로 화합해 더 높은 경지를 지향하려는 화쟁사상(和諍思想)과 함께 현재까지도 ‘동굴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등불이 돼주고 있다. 삼성현 역사문화공원은 경산과 관계를 맺고 있는 3명의 성현(聖賢·학식과 인품이 모두 뛰어난 인물)이 남긴 정신적 유산과 만날 수 있는 곳이다.경산시는 원효와 더불어 ‘신라의 3대 문장가’로 불리며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표기법 ‘이두(吏頭)’를 만든 설총,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까지를 함께 이곳에 모셨다. 원효, 설총, 일연의 삶과 사상적 궤적을 연대순으로 알기 쉽게 전시해놓은 삼성현 역사문화관은 조용히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기에 적합한 공간으로 보였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VR)을 통해 원효가 겪었던 ‘동굴에서의 밤’을 드라마틱하게 경험해 볼 수 있는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장’도 이채로웠다.경산시 관계자는 삼성현 역사문화공원을 “세 분 성현의 정신적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체험공간인 동시에 도시 생활에 지친 가족들에게 여유로운 힐링의 시간을 선물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성인 관람객들이 역사문화관을 돌아볼 때 아이들은 26만㎡의 널찍한 부지 위에 들어선 유아숲체험원, 야외공연장, 분수대, 이야기정원, 레일썰매장에서 그들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깊이 있는 인생’을 살았던 역사 속 인물을 만나보고 싶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직은 맑은 가을 햇살 아래서 뛰노는 게 더 좋은 아들과 딸 모두에게 어울리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삼성현 역사문화공원 홈페이지 https://samseonghyeon.gbgs.go.kr/밥과 고기가 사람의 육체를 살찌운다면, ‘사색의 시간’은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준다.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는 몸의 키가 아닌 ‘마음의 키’가 큰 사람을 더 매력적이라 느낀다.남산면 반곡리에 동화 속 풍경처럼 자리잡은 ‘반곡지’는 아름드리 왕버들이 풍성한 머리카락을 풀고 관광객을 기다리는 저수지다. 이곳을 느린 발걸음으로 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더없이 낭만적이다.경산에 가겠다는 기자의 말에 지난봄 반곡지를 다녀온 후배 하나가 이런 말을 들려줬다.“그늘에 앉아 물에 비친 내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이 세계가 현실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겉모습만이 아닌 자신의 마음 속 풍경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보려고 애쓴 사람이라면 이 말이 어렵지 않게 이해될 터. 기자 역시 떨어지는 나뭇잎이 둥근 파문을 일으키는 반곡지 수면을 오래오래 쳐다보았다. 평소엔 가져보기 힘든 귀한 사색의 시간이었다. 반곡지는 청송군 주산지와 더불어 아름다운 시골 풍광을 간직한 최고의 사진 촬영 장소로 이름이 높다.경산시민들은 “농촌마을의 한적한 모습과 연못, 여기에 왕버들과 짙푸른 하늘이 어우러져 봄부터 겨울까지 일년 내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곳”이라고 반곡지를 자랑한다.그럴 만도 했다. 이곳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이기도 하다. 또한 원체 풍경이 빼어나 영화나 TV드라마의 공간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물빛을 바라보며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영남대학교 부근 남매지와 대구대학교 앞 문천지도 반갑다. 경산은 ‘예쁜 저수지의 도시’라 불러도 좋은 곳이다.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더위에 힘겨워하는 계절이 가고, 산 속 나무가 붉고 노란 옷을 갈아입는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이런 시기에 조그만 사찰로 향하는 오솔길을 걸어본다는 건 인간인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중 하나가 분명하다.경산시 하양읍 팔공산에 자리 잡은 환성사는 신라 흥덕왕 때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한 절이다. 고려 말기에 소실된 것을 1635년 중건했다고 한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매력을 지닌 사찰로 보였다. 일주문을 지나면 확인할 수 있는 ‘3단 형태의 대지’가 특히 이색적이었다. 대웅전과 수월관, 심검당과 요사체가 ㅁ자 모습을 이루는 환성사는 수미단, 석탑, 석등, 부도 등의 유물이 적지 않아 경내를 산책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기자가 환성사를 찾아간 날은 보슬비가 내렸다. 그 비가 선물한 고요함과 평화로운 감정이 도시에서 받은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시원스럽게 날려줬다.팔공산 관봉 아래에 위치한 선본사 역시 역사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간직한 빼놓을 수 없는 경산의 볼거리다. 491년 창건된 이 절에는 ‘진정한 효(孝)’의 의미를 알려 주는 보물 제431호 ‘관봉석조여래좌상’이 우뚝 서 있다. 높이가 4m를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 어떤 것의 높이가 효심의 진성성보다 높을 수 있을까?이외에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5호 삼층석탑의 미려함도 관광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가족과 함께 팔공산을 찾아 등산과 사찰을 둘러보는 즐거움을 함께 맛보는 여행자들은 약수 한 잔에 오르막길을 걸어온 힘겨움을 어렵지 않게 떨쳐 내고 있었다. 오랜 시간 환성사와 선본사에서 자리를 지킨 유물 앞에서는 아이들에게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버지도 볼 수 있었다.만산홍엽(滿山紅葉),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인 10월. 유서 깊은 경산의 사찰들을 찾아 마음 속 묵은 때를 씻어내고자 하는 이들이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주말의 가을 산행을 고대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홍성식·심한식기자

2019-10-09

‘색깔있는 관광도시’로의 도약… 생각의 틀을 바꿔라

구미는 전자, 공업을 주축으로 한 산업도시로 분류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생긴 오류가 역사와 문화, 관광 자원이 약하다는 것이다. 구미가 가진 단점을 장점으로 특화해 활력 넘치는 관광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지금, 구미의 전략은 다름 아닌 산업관광도이다.올해 관광발전 원년으로 정한 시는 근대 산업 유산으로 지정된 오운여상, 수출산업의 탑, 구미를 대표하는 삼성전자의 스마트시티 홍보관, 5공단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구미 에코랜드 전망대 등을 활용해 구미만의 특화된 산업관광으로 개발·운영할 계획이다. 산업관광의 특성과 구미시만의 산업관광이 무엇이며 이를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알아봤다.△관광산업은 ‘굴뚝 없는 공장’관광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대상을 관광 자원이라 하며, 이러한 관광 자원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관광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관광산업이다. 관광산업은 ‘보이지 않는 무역’, ‘굴뚝 없는 공장’이라도 불릴 만큼 전략 산업으로 육성되고 있다. 관광산업은 이윤뿐만 아니라 고용 증대로 인한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각 지자체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에서도 많은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산업관광은 큰 맥락에서 관광산업의 한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산업관광은 1, 2, 3차 산업현장을 관광대상으로 하며, 산업과 참여 기업, 지역 경제 활성화 기여라는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산업관광은 견학과 직업체험, 제조 공정 체험, 기업 기술 체험, 진로탐색, 교육 활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결국 산업관광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으로 그 산업의 특성과 기업을 함께 홍보하면서 주변의 다른 관광자원과 연계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구미의 산업관광 자원 - 오운여상과 수출산업의 탑경북도는 2013년 전국 최초로 ‘경북도 향토뿌리기업 및 산업유산 지원조례’를 제정하고, 옛 모습을 간직해 산업 역사·문화적 보존 가치가 높은 건축물을 ‘산업유산’으로 지정해오고 있다. 구미시에는 오운여상(2013년 지정)과 수출산업의 탑(2018년 지정) 등 2곳이 산업유산으로 지정됐다. 1979년 3월 코오롱 구미공장 부지 안에 개교한 오운여상은 당시 어린 여자 직공들의 교육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설립됐다. 공장 내 교지 667평, 체육장 시설 690평, 난방시설을 갖춘 보통교실 4실, 특별교실 6실, 시청각실, 도서실, 음악실, 미술실, 상담실, 양호실 등을 갖췄다. 교장 1명, 교감 1명, 교사 8명으로 신입생 280명을 받았다. 입학생들은 재학 중 학비를 부담하지 않았고,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다. 개교 20년 만인 2000년 2월 마지막 졸업생 24명을 배출한 뒤 문을 닫았다. 20년간 총 3천11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학교는 당시 어린 여성 직공들이 3교대 작업을 하며 학업에 대한 열망과 꿈을 간직한 채 지금까지 그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구미국가산업단지의 관문인 광평동 로터리 가운데 위치한 ‘수출산업의 탑(높이 40m, 지름 18m)’은 1975년 구미공단 최초로 1억불 수출 돌파를 기념하기 위한 탑으로 1976년 9월 14일 준공됐다. 탑의 전면 중앙부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휘호가 새겨져 있다. 구미공단은 1973년 한국신영과 한국지월이 콘덴서 3천만 원 상당을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1974년 7천90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고, 이듬해인 1975년 공단 조성 이후 첫 1억 달러 수출 돌파에 성공했다. 당시 1975년은 전 세계가 오일쇼크로 불황을 겪고 있었던 때여서 구미공단의 수출 1억 달러 돌파는 근대산업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구미 산업관광의 현주소시는 산업 유산으로 지정된 오운여상, 수출산업의 탑, 구미를 대표하는 삼성전자의 스마트시티 홍보관 등을 구미만의 산업관광 자원으로 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 조성 중에 있는 구미5공단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에코랜드 전망대 등을 주변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오운여상의 경우 코오롱 구미공장 내 위치해 있어 일반 관광객들이 수시로 드나들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삼성전자 스마트시티 홍보관 역시 일반 관광객들의 출입이 제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시는 구미시티투어를 활용해 근대산업유산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수시투어로 진행되는 구미국가산업단지 및 근대산업유산 투어는 일요일과 법정공휴일을 제외한 날에 단체 25인 이상 신청하면 원하는 날짜에 투어가 진행된다. 신청은 전화접수(구미문화원 054-482-4452, 시청관광진흥과 054-480-2662)만 가능하다. 코스는 시청 또는 구미역에서 출발해 경북창조경제센터, 수출산업의 탑, 오운여상, 공단전경 투어, 삼성전자 스마트시티 홍보관, 전자정보기술원, 해마루공원 전망대, 구미에코랜드 전망대 등이다. 구미시가 추진하고 있는 산업관광이 시티투어를 통한 견학만 가능한 상황이기에 새로운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구미만의 관광자원… 생각의 틀을 바꿔야대한민국 최대의 내륙 산업단지를 보유한 구미시는 반도체를 기반으로 전자산업을 이끌어 온 최첨단 IT산업도시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구미에 산업관광 자원은 사실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이다. 그럼에도 구미의 산업관광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많은 이들은 구미시가 관광에 대한 생각의 틀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한다. “산업관광 자원을 선정함에 있어서도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구미의 산업과 공단을 이야기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럼에도 오운여상, 수출산업의 탑 등과 연계하는 산업관광을 하지 않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산업관광은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반드시 필요하다. 견학만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가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시는 그동안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중심으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추진해 왔다. 그중 하나가 박정희로에 조성된 ‘철도변 도시숲길’이다. 이 숲길은 박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 상모동에서 구미면까지 20리(약 8㎞) 거리를 기찻길을 따라 통학하던 거리에 조성됐다. 박 전 대통령의 어린 시절 추억을 담은 조형물 4개도 설치돼 있다.한때 ‘책을 좋아한 소년’의 조형물은 머리를 쓰다듬으면 공부를 잘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숲길에 스토리가 입혀지면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 탄신제에 맞춰 ‘박정희 대통령 등굣길 걷기체험’행사를 개최했다.이뿐만이 아니다. 시는 관광상품화를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 테마밥상을 당시 청와대 조리사의 고증을 거쳐 5종으로 개발했다. 보리밥 위주의 보릿고개 밥상과 쌀 다수확을 이룬 통일미 밥상,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혼분식밥상, 새마을운동을 독려한 새참상과 새마을도시락 등이다. 당시 대통령의 밥상치곤 의외로 소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이 모든 관광자원은 어디론가 모습을 감췄다.당시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자는 식의 여론이 득세하기도 했지만, 과연 시도 구미만의 산업관광 자원을 지킬 의지가 있었는지도 한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무조건적 비판 여론은 여전하다. 하지만 장세용 시장의 말처럼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업적과 과오는 구분돼야 하며, 한국 근대산업에 대한 업적은 부정해선 안된다. 시가 산업관광 성공을 위한다면 관광자원에 대한 생각의 틀부터 바꿔야 할 것이라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10-09

낮엔 한려수도의 눈부심이, 밤엔 다리 밝히는 황홀한 조명빛이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최초로 띄운 곳인 사천만에 자리를 잡은 사천시는 경남의 서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상으로는 여수시부터 거제시까지 이르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중심에 있다. 인구는 11만5천여명이며, 시 중에서 면적은 그리 크지 않은 약 399㎢로 전국 63개 시 중 58번째로 작은 도시다. 그러나 작은 규모가 단점은 아니다. 사천은 지형 요건이 매우 뛰어난 편인데, 시의 동과 남은 고성군과 남해군을 경계해 와룡산과 바다에 걸쳐 있고 서북은 진주시와 하동군이 경계하며 지리산이 뻗어내린 산악으로 형성돼 있어 해안평야가 남북으로 전개돼 있다. 또한 덕천·사천·죽천·백천·곤양천이 흘러 수리이용이 높고 토양은 비옥하며, 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고 있어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다. 사천시는 이 외에도 한려수도의 중심 기항지이며 서부 경남의 관문 항구로서 교통의 요지이자 수산물 집산지다.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여름은 서늘하고, 겨울은 온화해 농수산업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천혜의 자연환경은 전략산업인 항공우주산업과 더불어 사천시가 남해안 해양관광의 거점 도시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전국의 가장 아름다운 길에서 대상을 차지한 삼천포 대교와 연인들로부터 가장 가고 싶은 곳 1위를 차지한 삼천포 대교공원 등을 중심으로 한려수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와룡산, 각산을 비롯해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 체험거리가 넘쳐나는 해양 관광의 파라다이스다. 그리고 이러한 관광의 중심에는 사천바다 케이블카가 있다.□ 사천바다 케이블카사천 관광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사천바다 케이블카는 2018년 4월 개통된 이래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어 사천시가 해양관광 거점도시로 발돋움하는데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사천시의 바다케이블카는 통영과 여수케이블카를 합쳐놓은 국내 유일하게 바다와 산을 동시에 지나가는 명품 케이블카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일단 사업 현황을 살펴보면 사천바다 케이블카는 지난 2015년 12월 설치사업에 들어가 2018년 7월 4일 준공했으며 사천시 동서동(초양도∼각산) 일원에 위치해 있다.국비 50억, 도비 100억, 시비 448억 총 598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돼 2.43㎞의 길이에 정류장 3곳, 캐빈 45대가 운영 중이다. 왕복 시 운행시간은 20∼25분정도 소요된다. 사천시시설관리공단이 운영하고 있으며, 2019년 6월말까지 128만2천123명의 탑승객이 다녀가 186억여원의 이용료 수익을 냈다.사천시가 내세우는 사천바다 케이블카의 장점은 무엇보다 ‘산-바다-섬’을 잇는 국내 최초의 케이블카라는 점이다. 즉 우리나라 대부분의 케이블카는 산 아니면 바다를 잇는 단조로운 코스를 가지고 있는 반면, 사천바다케이블카는 섬(초양도)과 바다와 산(각산)을 잇는 3개 정류장(대방, 초양, 각산)의 승하차 시스템을 적용해 더욱 역동적이고 다양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다.안전성 역시 확보했다. 10개월에 걸쳐 풍동(風動)실험을 실시한 후 자동순환 2선식을 채택해 한겨울의 매서운 바닷바람에서도 흔들림을 최소화한 든든한 안전장치로 설계됐고, 순간 돌풍과 강풍 등 돌발상황을 대비해 모든 지주에 풍향, 풍속 계측기를 추가로 설치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을 대비한 구조시스템도 마련했다. 전력 공급이 끊기면 비상 엔진으로 구동용 케이블을 돌려 비상 운행하고, 자체 모터를 가진 특수 구조차가 캐빈에 직접 접근해 승객을 안전하게 구조하게 된다.모든 구간이 무진동으로 운행된다는 점도 사천바다 케이블카의 특징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대부분의 케이블카는 지지하고 있는 철탑부분을 통과할 때마다 덜컹거리는 진동으로 공포감을 느끼는데, 사천바다케이블카는 모든 구간이 무진동으로 운행돼 케이블카를 타는 내내 쾌적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사천바다케이블카는 직선코스(국내 대부분의 케이블카)가 아닌 대방역사에서 각산역사로 올라가는 구간이 초양역사와 대방역사 구간보다 약 26.6도가 꺾여 더욱 고도화된 기술이 필요한 부분이며 이 무진동의 묘미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그 밖에 사천바다 케이블카는 쾌적한 캐빈의 내부 환경을 고려해 10인승 중형 캐빈을 이용하고 있으며 최대 속도 6m/s로 시간당 최대 1천300명이 이용할 수 있다. 크리스탈 캐빈은 총 45대 중 15대로 바닥이 투명 유리로 돼 있어 816m 바다 구간을 최고 높이 74m(아파트 30층 높이)에서 관람할 수 있다.□ 사천바다 케이블카와 연계된 사천 관광사천바다 케이블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천혜의 자연환경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을 조망할 수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는 다른 케이블카가 가지지 못한 장점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은 1968년 우리나라에서 4번째이자 해상공원으로는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경남 거제시 지심도에서 전남 여수시 오동도까지 300리 뱃길을 따라 크고 작은 섬들과 천혜의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루는 해양생태계의 보고이자 가장 아름다운 바닷길로 이름난 한려수도는 71개의 무인도와 29개의 유인도가 있다. 사천바다 케이블카는 한려해상국립공원 중에서도 사천지구에 속해 있고, 이러한 한려해상국립공원을 둘러볼 수 있는 유람선 선착장 역시 케이블카 바로 인근에 위치해 있다.사천 8경 중 제1경인 창선·삼천포대교도 케이블카를 타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케이블카 선로 자체가 이 두 대교를 따라 건설됐기 때문이다. 창선·삼천포대교는 사천시의 대방과 남해군의 창선을 연결하는 연륙교로 우리나라 최초의 섬과 섬을 잇는 다리다. 낮이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눈부심이, 밤이면 대교를 밝히는 아름다운 빛의 조명이 황홀한 풍경을 만들어낸다.케이블카가 각산 정상에 도착하면 각산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약 해발 400m에서 사천시와 삼천포대교, 한려해상국립공원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횃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수단이 옛 모습대로 남아있는 곳인 각산 봉수대도 전망대 바로 뒤에 위치해 있다. 봉수대는 높은 산봉우리에 봉화를 올릴 수 있게 설비해 놓은 곳으로, 과거 횃불과 연기로 적의 침입을 중앙에 알리던 군사 통신 수단으로 삼국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산 봉수대는 각산의 정산인 해발 408m의 고지에 있으며 수많은 자연돌을 모아 둥그렇게 만든 형태이다. 고려시대에 설치된 것으로, 남해 금산에 있는 구정봉의 연락을 창선 태방산을 거쳐 받았다. 사량도의 공수산 봉수를 고성 좌이산 봉수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사천시 관광진흥과 박용국 관광시설팀장“충분한 관광수익 올리는친환경 시설로 인정받아 ”- 사천바다케이블카만의 장점은.△바다구간 길이가 820m다. 즉 한려해상국립공원 위를 횡단한다. 이후 각산정류장까지는 산을 올라가기 때문에 바다와 산을 모두 지나갈 수 있어 누가 봐도 인프라가 뛰어나다. 사업비를 많이 들인 만큼 케이블카도 자동순환 2선식으로 지어져 매우 안전하다. 또한 바다 구간에는 지주를 박지 않아 환경적인 면도 고려했다. 1년 반 정도 운행하는 기간 강풍으로 인한 예방적 차원에서 잠시 케이블카를 세웠던 것 등의 조치를 제외하면 사고도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사천 관광에 많은 도움이 되나△많은 도움이 된다. 케이블카가 건설되고 나서 재래시장 등 지역 상인들이 관광객들이 많아졌다고 몸소 느끼고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워낙 방문객이 많기 때문에 숙박을 하지 않고 식사한 한 끼 해결하고 가더라도 엄청난 규모다. 케이블카 주변 땅값도 많이 올랐다.- 사업 추진에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환경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이슈가 있었으나 큰 반대가 있지는 않았다. 기존에 개발이 많이 됐던 곳이라 오히려 케이블카를 설치하길 주민들이 원했다. 바다쪽에 지주를 박게 된다면 바로 어민들이 반대에 나섰겠지만, 지주를 박지 않는 쪽으로 건설을 해서 이 문제도 해결했다.- 사업을 시작하는 지자체에게 한마디△케이블카는 누가 봐도 공해 시설이라고는 볼 수 없고 기본 목적이 운송이다. 외국 사례를 보더라도 주택가를 지나는 곳이 많다. 주민들이 노파심에 많은 걱정을 하는 것으로 안다. 지역에 대한 발전 등을 생각하면 대의적인 측면에서 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자체에서도 이를 적극 어필해야 한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2019-10-07

“풍류는 한민족 태동 시점부터 있었던 사상적 기반”

지난 5일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선 풍류도(風流道)의 개념과 사상적 변화 과정, 화랑의 역할 등을 토론하는 학술발표회가 열렸다.이날 정형진 신라얼 문화연구원장은 ‘풍류의 개념과 풍류도의 역사성’, 풍류연구가 한지훈 씨는 ‘풍류도는 한국음악의 뿌리인가?’라는 주제로 발표를 가졌다. 이날 발표회는 강석근 국제언어문학회장이 좌장을 맡아 이형우, 김봉률, 서정매, 박남수씨가 토론자로 참여해 열띤 토론을 펼쳤다. 주제발표 및 토론회 내용을 요약했다.정형진·신라얼 문화연구원장정형진 ‘풍류의 개념과 풍류도의 역사성’풍류도가 삼교를 포함할 정도로 훌륭하다면그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풍류의 정확한 개념과 역사적 연원에 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최치원이 남긴 ‘난랑비서’에 의존한다. 하지만 최치원은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그것을 풍류라 한다’고 규정했을 뿐 ‘풍류’의 사상적 개념을 정확히 설명하지 않았다.상고의 역사 흐름 속에서 풍류도의 이념이 어떻게 작동되어 왔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또 풍류도가 어떤 맥락 하에서 신라로 들어왔고, 부활했는가를 설명하는 것 역시 놓칠 수 없는 문제.최치원은 ‘풍류도’를 ‘현묘지도’라 했다. 현묘한 도로 규정한 풍류도의 핵심 개념은 과연 무엇일까. 풍류의 개념에 대한 해명과 풍류도가 공동체의 이념으로 작동했던 역사를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조상들이 만들어 온 역사공동체가 어떤 이념과 가치를 추구했기에 풍류도와 같은 위대한 사상을 잉태하고 전달해 왔을까? 그들이 펼치던 공동체가 삼교(유·불·선)를 다 포함할 정도로 훌륭한 이념과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현재 우리 주변에 민족공동체의 역사 여정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지.‘풍류’는 한민족이 태동하는 시점부터 있었던 사상적 기반이었다. 우리 고유의 자랑스런 문화 전통이다.풍류도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이라면 그것의 고대 언어는 순순한 우리의 토착어였을 가능성이 높다. 풍류는 그 토착언어의 한자식 표현일 것이다.풍류라는 개념을 표현했던 원래의 토착어가 무엇이고 그 핵심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는 언어학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상적·철학적으로 접근해 분석하는 것이다.풍류도의 역사적 연원에 대한 의문은 한국학 연구에 있어 핵심적인 사안이다. 풍류도의 이해는 학계의 일반 통념과 전형적인 동아시아 문화사의 흐름을 설명하고 이해함에 있어서도 큰 파괴력을 지닌 사안이다.‘풍류’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한 성령(聖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그 흐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생명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는 것을 화랑의 삶으로 인식했다. ‘풍류도’는 근원적인 우주와 현상계 상호간의 작용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도였다. 풍류는 근원적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기(氣)인 동시에 마음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차용된 한자어라고 생각한다.한지훈·풍류연구가한지훈 ‘풍류도는 한국음악의 뿌리인가’우리는 독자적인 음악예술을 발전시켜 왔다그 음악철학과 미학의 바탕이 ‘풍류도’ 아닐까음악에 대한 본질 탐구는 동서양 할 것 없이 이미 고대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에는 19세기 후반 음악학(音樂學)이 정립되면서 근대적 의미의 학문으로 태동되었지만, 동양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중국의 경우 서양 못지않게 나름대로의 정치(精緻)한 철학적·미학적 음악이론을 발전시켜 왔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음악문화 영향을 삼국시대부터 받아왔고, 그들의 음악사상이 우리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독자적인 음악철학·미학을 바탕으로 음악예술을 발전시켜 온 것이 분명하다. 그 바탕이 바로 우리의 전통사상인 풍류도라고 생각한다.풍류도는 천년왕국 신라 고유의 종교, 예술, 철학, 문화의 근거이자 결정체다. 표면적으로 신라 왕실을 지배한 것은 유교·불교지만, 대다수 신라인들의 심성과 세계관, 가치관을 심층에서부터 널리 지배한 것은 풍류도다. 풍류도는 도교와 유교,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그런 요소를 품고 있었던 신선사상과 샤머니즘이 하나로 융합된 신라의 독특한 세계관이다.‘풍류’라는 말은 예술, 그 가운데서도 한국의 전통음악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풍류라는 용어는 삼국시대 이후 줄곧 사용돼 왔다. 이토록 오랜 동안 풍류 개념이 한국인의 심성에 이어져 왔다는 것은 한민족 특유의 어떤 심미관 형성 근거이기도 하다는 걸 의미한다. 동시에 한국 전통음악의 철학적·미학적 단서임을 뜻하지 않을까?‘풍류도’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면, 풍류라는 용어가 현재도 일상적으로 쓰이는 전통음악의 철학적·미학적 배경임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풍류도는 고대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했던 철학이자 신앙의 바탕이었다. 한국음악의 뿌리 역시 그것에서 오지 않았을까란 가설을 세워본다. 그리고 이를 풍류, 향가, 무교, 금도 등과의 연관관계를 통해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하고자 했다.풍류도는 철학사에서 사라졌지만 그와 별개로 ‘풍류’라는 용어가 한국 전통음악계에서는 지금도 상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한국 전통음악에서 상용되는 풍류라는 용어가 풍류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주장은 객관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한국음악의 뿌리는 풍류도라고 본다.다만 음악적 측면에서의 풍류와 달리 전통사상으로서의 ‘현묘한 풍류도’는 무교(토속신앙)적 요소를 통해 ‘접화군생’의 경지까지 도달하려 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고 하겠다.종합토론“고대에 한정되지 않고 풍류도의 흔적 찾아주길”△이형우(한양대 교수)풍류에 관한 논문 대부분이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풍류라는 용어풀이에 우위를 두고 어원적 정의에서 시작해 문화적 맥락을 파악하려 한다. 하지만 관련 자료와 근거가 턱없이 부족한 탓에 해석이 분분하다.풍류(風流)에서 바람은 우주의 기운이자 생명력을 말한다. 없는 듯하지만 있고, 끊긴 것 같지만 이어지며 약한 것 같아도 강하다. 바람을 가장 먼저 느끼는 대상은 나무와 새다. 신라 왕관도 나뭇가지와 나뭇잎의 조합으로 만들어져 흔들림, 곧 바람을 상징한다.‘풍류의 개념과 풍류도의 역사성’ 발제는 포괄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논지를 전개해 나가고 있지만 사실 이를 뒷받침할 사료는 충분치 않다. 주장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한다.이 논문에서는 풍류를 우리 민족의 자부심으로 평가했다. 함께 모여서 음주가무하며 평등사회를 구현해 간 우리 민족의 진면목이자, 오늘날 전 세계를 열광시키는 한류의 뿌리로 본다. 그러나 신화와 역사를 구별하지 않거나 사실과 의견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문헌상의 맥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위험하다는 뜻이다. 개념 혼동은 사고 체계의 무질서로 이어질 수 있다.△김봉률(동국대 교수)서양문학 전공자로서 풍류도에 대한 문헌적, 고증적, 민족고유성보다는 인류 보편적인 차원에서 접근해봤다.어원적으로 보면 풍류도란 인간의 육체와 구별되는 것으로 영혼에 대한 관념을 가지게 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추상적 개념이 생겨나 종교가 태동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바람이나 숨결에서 비롯된 정신은 감각적 인지능력과 이성적 사고로 이뤄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관적이고 영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전자는 육신에, 후자는 영혼에 뿌리를 두고 있다.살아간다는 것은 곧 영적인 성장을 말한다.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스스로 얼마나 성장해 나가는지가 중요하다.하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차츰 직관적이고 영적인 지혜보다 감각적 인지능력과 이성적 사고가 중심이 되면서 영성을 잃어버리고 영혼 없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풍류도는 현대사회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과도 같다. 연구자들이 고대에 한정되지 않고 동학, 대종교 등에서도 그 흔적을 적극적으로 찾아주길 바란다. 특히 가부장 이전의 사회에서 풍류도에 관한 중요한 하나의 축으로 여성의 영성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다.△서정매(동국대 외래교수)풍류도를 한국음악의 뿌리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풍류도에 대한 해석이 지금도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고 명백한 논증이 없는 것과 결부된다.음악은 관념이 아니라 실체다. 음악에는 멜로디가 있고 리듬이 있다. 귀로 선율을 듣고 심장으로 리듬과 장단을 감지하며 가슴으로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다.‘한국음악과 미학’이라는 발제에서는 한국음악에 담긴 정신적, 철학적, 사상적 측면을 밝히고자 했다. 그렇다면 유교와 불교, 도교, 무교에서 실질적으로 어떤 요소들을 풍류적이라고 볼 수 있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아울러 화랑도에서 수용한 유교와 불교, 도교, 무교에 어떤 공통적 요소가 있는지도 짚어봐야 한다. 풍류적인 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내재된 가치는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박남수(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풍류도와 한국음악의 연관성을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접근해 볼 수 있다.화랑도는 신라 사회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문화현상으로, 상열가악(相悅歌樂)에서 향가를 노래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근거로 한국음악의 기원을 풍류도에서 찾는 것은 어느 정도 유효하다고 본다. 하지만 풍류도를 삼교가 유입되기 이전의 고유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아울러 향가에는 주술적인 성격이 보이는데 이를 무교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화랑도에 무교적인 성격이 더해진 것은 조선 전기 유학자들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이 부분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과 해석이 요구된다.마지막으로 옥보고가 지은 30곡 가운데 국가 이데올로기로 여길 만한 곡명은 보이지 않는다. 옥보고가 금도(琴道)를 전승한 측면은 인정되지만, 오히려 진성왕 2년에 경문왕대 국선들이 왕의 미덕을 칭송한 노래를 짓고 대구화상(大矩和尙)이 곡조를 붙여 향가로 지은 ‘현금포곡’, ‘대도곡’, ‘문군곡’이 오히려 당대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적합하다고 본다./홍성식·김민정기자 mjkim@kbmaeil.com

2019-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