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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가난한 제자의 선물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단정하고도 조용하신 담임선생님은 피아노를 잘 치시는 음악선생님이셨다. 공부는 제법이지만 가난한 형편인 나를 무던히도 챙겨주려 애쓰셨다. 학급 간부임을 핑계로 학교 가까이 있는 선생님 댁으로 종종 부르시곤 하셨다. 학기 초에는 국어, 영어, 수학 선생님께 새로 나온 참고서를 얻어서 챙겨주셨다. 선생님 어머님께서 챙겨주신 귀한 귤과 크라운산도의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첫맛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예를 차린다고 소리 내지 않고 녹여 먹으니 깨물어 먹어야 더 맛있다며 웃으시던 선생님이셨다. 학기가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월사금을 내지 못한 나였다. 가난한 부모님께 말씀드려도 속수무책이니 아침 조회시간에 이름이 불리면 감출 수 없는 부끄러움에 고개만 떨굴 뿐이었다. 그해 사월에는 3학년이 모두 수학여행을 갔으나 난 가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비용을 대 주시겠다고 했지만 아프다고 핑계댔다. 3박4일 수학여행 떠난 휑한 교실에 평소와 같이 왔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죽어라 공부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신 선생님은 날 부르시더니 그 부드럽고 고운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자그마한 거울을 쥐어주셨다. 그달 모의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하여 수학여행 못 간 부끄러움과 슬픔을 보란 듯이 상쇄했고 선생님께 환한 웃음과 기쁨을 드릴 수 있었다. 개교 기념일 즈음이었을 것이다. 운동장 전교 조회 시간이었다. 내 이름이 크게 호명되자 얼떨결에 나갔고,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동창회장님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장학금을 받기 전과 후에도 선생님께서는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장학금을 내게 주려고 교장 선생님께 여러 번 곡진한 부탁을 하시더라는 2학년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훗날 들었을 뿐이었다. 고마우신 선생님 덕분에 나는 밀린 1분기 월사금을 바로 낼 수 있었고, 그러고도 남은 돈을 엄마에게 드리면서 엄마의 눈물 바람을 슬쩍 훔쳐보았던 것도 같다. 아 그러나 그때 난 참으로 어리석었다. 한 달 뒤 스승의 날이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고, 선생님께 드릴 카네이션 한 송이 살 돈을 챙기지 못한 거였다. 스승의 날 아침, 학급 전체 아이들에게서 모은 돈으로 산 선물을 들고 학교에 갔다. 개인적으로 선물을 마련하지 못한 자책으로 간밤에 잠을 설쳤기에 평소보다 일찍이었다. 교문을 들어서면 바로 등나무 덩굴에 뒤덮인 쉼터가 있었다. 너무 이른 등교라 잠시 앉아도 되었다. 나무 벤치에 털썩 앉아 위를 쳐다보는데, 연보라색 등꽃이 포도송이마냥 주렁주렁 흐드러져 있었다. 예뻤다. 선생님같이 곱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꽃이었다. 벤치 위에 올라 까치발을 하고 꽃을 한 아름 꺾었다. 아찔하고 향긋한 내음이 교복에 묻었다. 교실에서 예쁜 꽃만 다시 추렸다. 선생님 책상 위 둥근 꽃병 가득 등꽃을 꽂았다. 축축 늘어져 처졌지만 꽃병을 가리고 덮을 정도로 가득 꽂으니 뭐 그런대로 볼만했다. 무엇보다 선생님 책상 주위에서 교실 전체로 번진 진한 향기가 선생님께 대한 미안함에 짓눌렀던 내 마음을 감추어 주는 듯했다. 교실로 들어오시면서 무슨 향기지? 라며 환히 미소 띠시는 선생님께 나는 꽃향기보다 더 짙고 진한 감사 인사를 마음속으로 올렸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5-14

아버지의 기일

부처님오신날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일이기도 했다. 벚꽃이 눈부신 화창한 봄날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다급한 오빠의 연락을 받고 10개월 큰아들을 들어업고 버스를 탔다. 그 전해부터 간경변 진단을 받고 일 년을 못 버티실 것이며, 입원도 필요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우리 형제들은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 끈을 놓지 못한 엄마는 집에서 온갖 좋다는 것은 모두 만들어 아버지를 극진히 간호하시는 터였다. 어디서 굼벵이를 잡아오고, 기와솔을 뜯어 달여 잡수시게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기겁하며 말렸지만 엄마의 고집을 어쩔 수 없다는 오빠의 푸념을 전화로 듣곤 했다. 대학 다니던 동생이 벌써 와 앙상한 아버지 곁에서 손을 잡고 망연해하고 있었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내일이 사월 초파일이라 절에 기도 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그 또한 이해했다. 평소에도 초하루 보름이면 그 바쁜 와중에도 목욕재계하고 절에 다니던 엄마였다. 엄마 따라 절엘 가보곤 했던 나는 부처님 앞에서 무아지경 땀조차 흘리며 108배를 올리던 엄마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엄마 대신 우리 삼남매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와 밤을 새다시피했다. 엄마가 만들어 둔 조약도 드시게 하고, 정신은 말짱하신 아버지와 얘기도 나눴던 것 같다. 이튿날 아침 사월초파일이었다. 간밤 비교적 말짱한 정신의 아버지를 보자 우리들은 안심했다. 동생은 내일 등교를 위해 나갔고, 나는 잠시 옆방으로 가서 아이와 함께 잠이 들었다. 오빠도 아버지 곁에서 쪽잠에 들었다고 했다. 절에서 돌아온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혼몽했던 나는 다시 깊은 잠을 잤던 것 같다. 오빠와 엄마의 다급한 소리에 깨서 안방으로 달려갔더니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쉬고 계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56살의 젊은 나이에 부처님오신날 부처님 곁으로 가셨다. 43년 전이었다. 어제 오빠가 절에 아버지와 엄마의 등을 보내왔다. 몇 년 전부터 절에서 재를 지내고 등을 다는 것으로 매년 지내던 제사를 대신한 오빠였다. 40년 넘게 아버지의 제사를 지극히 모시던 오빠였다. 몇 번의 중한 수술로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삼 남매가 수의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조차도 오빠는 미안해했다. 사람이 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그 중 가장 힘든 고통은 병고(病苦)라는 생각이다. 병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본 날, 또 그 아버지를 지극한 효심으로 제사 받들던 오빠가 늙고 병든 몸으로 절에 가서 울음을 참는 심정으로 흰 등을 다는 날, 부처님오신날은 우리 삼 남매에겐 애달픈 날이기도 하다. 매년 정초, 온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공양을 올리는 거조암엘 간다. 초파일 전날, 거조암에 손주 넷을 데리고 가서 오백나한에게 백 원 공양을 올리게 했다. 한 바구니 묵직한 동전을 조금씩 나눠주면서 각자 소원을 빌라고 했다. 소원은 모르겠고, 각양각색의 나한상 앞 쟁반에 동전을 하나씩 떨구는 게 그저 신나는 모양새다. 그럼 어떠랴. 조용하고 정숙해야 할 법당이지만 아이들의 모습이 흐뭇한 보살님도 용서해 주신다. 바구니를 들고 따라다니면서 나는 아버지와 엄마의 극락왕생을 축수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병고에 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5-07

무창포 ‘신비의 바닷길’

밀물이나 썰물, 조수간만의 차라는 단어는 머릿속 지식수준이요, 지구와 달의 인력에 의해 생긴다는 상식으로만 알 뿐이다. 그러다 보니 바다가 갈라지고 육지와 섬 사이에 바닷길이 생긴다는 뉴스는 저세상 이야기인 듯 그저 신기해할 따름이었다.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은 유독 수심이 낮은 바다란다. 수심이 얕은 바닷속 지형이 썰물 때 해수면 위로 드러나면 육지와 섬 또는 섬과 섬 사이에 바닷길이 생겨 마치 바다를 양쪽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보이는 바다 갈라짐 현상이 많다고 했다. 이를 ‘신비의 바닷길’이니 ‘모세의 기적’이니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로 떼지어 들어가는 뉴스 속 영상은 정말 신이했다. 평소 사람 많은 축제장에 휩쓸리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내 평생 한 번쯤은 나도 저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는데 며칠 전 이뤘다. 언젠가 이화회 모임에서 그곳을 가고 싶다는 얘기를 비쳤다. 엘라 할머니께서 간 적이 있다고 하셨고 우리 언제 한 번 가요 입을 맞췄다. 바닷길이 열리는 날이 정해져 있다며 숙소까지 예약하셔서 4월의 말 이화회 세 명은 무창포 여행을 감행했다. 무창포는 충남 보령의 바닷가였다. 해변에서 눈앞에 보이는 석대도까지 1.5km 바다 갈라짐 현상이 나타나 신비의 바닷길로 유명하다고 했다. 대구에서 세 시간도 넘어 걸리는 다소 먼 길이었지만 설레며 나선 길이라 내내 신났고 들떴다. 바닷가 바로 앞 숙소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파도 넘실대고 있었다. 서해니까 얕은 바다겠지 짐작할 뿐 물색으로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었다. 잘디잔 모래와 작고 둥근 색색의 자갈이 뒤섞여 있는 해안은 길었고 꽤 아름다웠다. 해안에서 머잖은 곳에 작은 섬 몇 개가 떠 있었다. 그 중 한 섬으로 바닷길이 생기고 내일 아침이면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그 열린 바닷길을 걸어 저 섬으로 걸어갈 수 있다니 반신반의할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숙소 베란다에서 바다를 살폈더니 모래밭이 더 넓어지고 어젯밤엔 보이지 않던 암초 같은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간대별로 비교해 보고자 사진을 찍는데, 해안가에서 섬 쪽으로 기다란 띠 같은 길이 어슴푸레 보였고 흥분이 밀려들었다. 과연 물때가 되자 해안가로부터 길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엎드려 조개 잡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작은 바구니도 하나 들고 그들에 합류했다. 바닷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위엔 연초록의 해초가 미끌거렸고, 돌 위엔 작은 고둥 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사람들은 물 빠진 바다 위에서 돌을 헤집고 모래를 파며 제법 조개 따위를 찾아내느라 열심이었다. 올리브 할머니와 나는 지금 우리 바다 속에 있는 거 맞죠 연신 확인하며 흥분해했다. 조심히 딛는 발 아래 돌에 붙어있는 따개비 따위가 보였고, 떼어 바구니에 담기도 했지만 바닷길을 걷고 있다는 신기한 마음에 그저 섬으로 섬으로 걸어들어 갈 뿐이었다. 물결무늬가 선명한 모래 위를 디디면 단단해서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 동안의 경험은 기이했다. 해변 가득 품어 안았던 저 바닷물은 어디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걸까. 물결무늬 선명하게 남긴 채 빠졌다 어디서 다시 들어오나.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시 솟아오르나. 의문은 신비로 남을 뿐이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4-30

건망증인지 치매인지

지난주 TV에서 치매를 앓는 팔순 노모를 돌보는 갸륵한 딸과 사위의 이야기를 봤다. 예쁜 치매를 앓고 있다고는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한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할머니가 가엾고 가족들이 안타까웠다. 젊었을 땐 총명했다는데도 치매로 고생하는 그 할머니를 보면서 나의 일이십 년 후를 생각하니 심히 걱정스럽다. 심각한 건망증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하는 몇 건의 건망증을 떠올리면 실소를 금치 못한다. 연구실에서 퇴근 준비 중 전화를 받았다.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기면서도 내내 통화 중이었다. 3층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계단에서 누군가를 만나 목례를 하면서도 주차장에 와서도 계속 통화 중이었다. 차를 타려다가 문득 핸드폰을 챙기지 않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차에 가방을 던져 놓고 다시 연구실로 뛰다시피 올라갔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 “이 교수님 왜 그렇게 숨차하세요?” “아, 제가 퇴근하려 내려왔더니 핸드폰을 두고 온 것 같아서 다시 연구실로 올라가고 있어요.” “저랑 지금 통화 중이시잖아요...” 며칠 후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동료 교수에게 이 일화를 얘기했다. 치매가 아닌가 걱정이라고 했더니, “지금 젓가락을 들고 계시면서 젓가락을 찾는다면 건망증이요, 그걸로 글씨를 쓰려고 하신다면 치매”라며 안심하라는 동료의 말씀에 안도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치고 퇴식구에 식판을 들여놓은 후 컵을 들고 식수대가 아닌 벽걸이 냅킨박스에 갖다대고 있는 나를 보더니 “건망증이 아니라 치매일 것도 같은데요...” 별로 덤벙대는 성격도 아닌데 왜 그런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메모벽이 생겼다. 연구실 탁상달력에도, 문에도 달력을 걸어두고 이중삼중 메모를 해 두었고, 다이어리에도 메모해 두고 어떤 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은 달력이나 다이어리 대신 핸드폰의 메모장에 거의 모든 것을 항상 메모한다. 약속은 물론,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장단기 계획 등 모든 것을 메모한다. 달력에도 빠짐없이 기록한다. 빽빽한 달력이 일하는 사람 못지않을 정도다, 이 모든 것은 건망증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그 덕에 약속이나 계획을 놓치는 법은 잘 없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종종 건망증으로 곤욕을 치른다. 곰솥을 불 위에 올려두고 나가 솥도 태워 온 집안을 역한 사골 탄내로 채운 적도 있었다. 어쩌다 휴대폰을 냉동실에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며칠을 찾은 적도 있었으니 심각한 지경이다. 그래서 내 생활방식을 좀 바꾸기로 했다. 좀 있다가 해야지 생각하면 바로 잊을 것이니 뭐든 생각날 때 바로 실행하기다. 의식의 흐름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들기름 한 숟가락 먹기를 잊고 안 먹는다. 참기름을 음식에 넣다가 들기름이 생각나면 바로 냉장고로 가서 꺼내 먹는 식이다. 동선은 꼬이고 일의 맥락은 좀 없어도 덜 놓치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도 매일 꼭꼭 챙겨먹지는 못한다. 기름을 쓰지 않을 땐 잊으니까. 휴대폰을 어디에 둔지 몰라 이 방 저 방 헤매고 다니다가 결국 남편에게 전화해 달라고 했더니 식탁 위에 있더라며 가르쳐준다. 이 글을 쓰던 중이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4-23

99 ‘콘클라베’, 나만의 영화 감상법

해마다 봄, 아카데미상 소식이 들리면 괜한 기대로 설렌다. ‘기생충’, ‘미나리’ 이전부터도 그랬다. 매달, 매주, 이달의 영화, 혹은 오늘의 개봉영화를 찾곤 하지만 특히 아카데미상 즈음이 되면 영화 관련 뉴스를 더 자주 검색하게 된다. 올해는 이런저런 바쁜 일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놓쳤다가 며칠 지나 검색했다. 마침 올해 아카데미 수상작 중 상영하는 영화가 있었다. 바로 예매하고 극장엘 달려갔다. 관객이 많지 않은 극장에서 혼자서 두 시간이나 숨죽이며 ‘콘클라베’를 봤다. 최근 본 영화 중에 그렇게나 집중했던 영화가 있었던가 싶다. 콘클라베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제도이며, 교황이 선출되지 않으면 검은 연기, 선출이 확정되면 흰 연기로 알린다는 정도의 상식은 있었기에 다큐멘터리 비슷한 역사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미스터리, 스릴러물로 분류되어 의아했는데 과연 그랬다. 교황으로 선출되기 위해 온갖 정치적 음모가 판치고 그 와중에 드러나는 추기경들의 비리가 난무했다. 화려한 성당에서 아름답기까지 한 복장으로 가려진 다양한 추악한 캐릭터들의 면모를 들여다보는 건 몹시 불편했다. 거기도 세속과 다를 바 없다는 메시지, 그리고 변화해야 가톨릭의 미래를 암시하는 결말이었음에도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교황과 로마가톨릭의 추한 면모를 훔쳐본 듯해서 개운치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나만의 영화 감상법이 시작되었다. 마치 연관 검색하듯 내가 영화로 알게 되었거나 알고 싶은 정보를 찾고 확인하고 또 다른 영화를 보는 방식이다. 먼저, 영화 ‘두 교황’을 찾았다. 원래 보고 싶었으나 개봉관이 많지 않아 놓쳤고, 넷플릭스에 가입해야만 가능해서 아쉬우나 꾹 참고 있었다. 다른 OTT에서는 볼 수 없을까 이따금 검색만 하거나 유튜브에서 소개하는 짧은 영상을 보면서 보고싶은 마음을 달래곤 했다. 결국 이번에 넷플릭스에 가입하여 기어이 봤다. 훌륭한 두 배우가 주인공인 두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과 외모적으로 매우 흡사해서 화제를 모았던 영화였다. 또 있었다.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는 ‘콘클라베’와 같은 상황이나 내용은 정반대로 코미디 드라마로 분류된 영화였다. 이 역시 티빙에 가입하고 나서야 볼 수 있었지만 가입을 잘했다 싶을 정도로 ‘콘클라베’의 찜찜함을 달래주었다. 교황이 되기 위한 정쟁을 벌이는 영화 ‘콘클라베’의 추기경들과는 정반대로 이 영화에서는 모든 추기경들이 교황으로 선출되기를 거부한다. 그 중에서도 떠밀리듯 교황으로 선출된 주인공은 두려움을 못 이겨 교황청을 나와 인간들의 세상으로 도망쳤다. 다시 돌아와서 한 그의 첫 연설은 교황 사임이었다. 교황의 무게를 고뇌하는 추기경들의 모습이 뭉클했다. 이번에 본 영화가 모두 현 교황과 관련한 것이기에 내겐 더욱 특별하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여름 우리나라를 방문하셨고, 바로 그때 첫 손녀 윤이 태어났다. 손녀 출산 소식에 부랴부랴 도착한 서울엔 광복절의 태극기와 교황 방한 현수막이 함께 나부껴 찬란하고 눈부셨다. 우리 부부는 첫 손녀의 탄생을 축복하러 교황님까지 오신 거라며 맘대로 생각하며 감격해했다.

2025-04-16

연극을 보고 나서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취미란에는 어김없이 책이나 영화를 즐긴다고 적는다. 글눈을 뜨면서부터 책을 찾아 읽더라는 부모님의 말씀도 자주 들었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도 어딘가 구석진 곳에서 책을 보고 있던 아이로 나를 기억해 주니 나의 독서벽은 꽤나 오래된 것임에 틀림없다. 영화를 즐기는 것도 역사가 깊다. 아버지와 함께 간 극장에서 본 ‘콰이강의 다리’가 여전히 선명하다. 대입 공부를 치열하게 하던 고3 때에도 TV 주말의 명화극장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 연극을 처음으로 본 건 고2 때였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오빠가 안톤 체호프 작품인 연극에 배우로 등장한다면서 친구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객석을 채워 주라고 했다. 오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가까이 지내는 친구 몇을 데리고 극장을 찾았다. 어두컴컴한 무대 앞에 몇 되지 않은 의자가 깔려있었다. 무대에 조명이 밝아지자 전통 러시아식 흰옷에 붉은 허리띠를 매고, 목 긴 가죽장화를 신은 오빠가 구부정한 채로 등장했다. 흰머리에 흰 수염을 붙이고 과장적으로 노인 분장한 오빠의 모습이 매우 생경해서 난 괜히 친구들에게 부끄러웠다. 무대 위의 오빠 모습은 이렇게도 기억에 선명한데 그 연극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대학 다닐 때도 국문과의 밤이라는 축제를 하면 당연히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고, 학과의 선후배들과 친구들이 밤낮으로 연습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 가까이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행사 후 찍은 단체사진에 분장한 채로 웃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잠시 부러웠지만 그 정도였다. 연극은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나 보다. 이화회 회원들과 ‘친정엄마와 3박4일’을 본 적이 있었다. 워낙 티켓파워가 있는 배우들의 연극이라 볼 만하다고 관람한 거였다. 잘 아는 내용의 연극에, 배우의 연기는 훌륭했으나 무대가 너무나 큰 극장은 연극 감상을 심히 방해했다. 비교적 앞자리에 앉았음에도 도저히 몰입되지 않아 성에 차지 않았다. 연극의 묘미는 무대 가까이에서 배우의 숨소리와 땀방울을 느끼고 보는 것인데. 지난달 배달된 대구문화 소식지에서 대구연극제 뉴스를 접했다. 연극 일정을 꼼꼼히 살폈다. 안톤 체호프의 ‘고니의 노래’를 택해 맨 앞자리를 예매했다. 원래 희곡은 두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15분짜리 단막극이나 실제 공연은 60분이었다. 지방 작은 극장 68세의 노배우가 연극이 끝난 뒤 프롬프터와 함께 연극 인생을 회고하는 내용인데, 각색이 많이 된 듯했다. 확인하고 싶어 도서관에서 ‘체호프 희곡 전집’을 빌려 읽기도 했다. 힌트가 될 만한 무대 장치, 젊은 배우의 서툰 분장과 연기에서는 오히려 노배우의 노쇠함 대신 청년극단의 활기가 전해졌다. 그러나 앞자리에서 직관한 배우의 땀방울, 거친 숨소리와 먼지내 나는 무대는 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엔 충분했다. 극장을 나서며 오랜만에 오빠와 통화했다. 52년 전 오빠가 공연한 연극 제목이 뭐냐고 물었더니 안톤 체호프의 ‘곰’이라며 첫 대사를 또렷이 기억해 들려준다. “좋지 않습니다. 마님, 몸만 상하실 겁니다….” 전화 너머로 건너온 오빠 목소리에서 아주 잠깐 연극배우의 포스가 느껴졌다. 그 옛날 20대에 늙은 배우를 연기한 오빠는 지금 73살이다.

2025-04-09

내 인생의 ‘스위트 스팟(Sweet Spot)’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골프나 배드민턴, 야구 등의 스포츠에서 골프채, 라켓, 배트 등으로 공을 칠 때,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 원하는 방향으로 멀리 빠르게 날아가게 만드는 최적 지점을 스위트 스팟(Sweet Spot)이라고 한다고 했다. 최적의 타격면이라는 뜻이라는데, 원래 스포츠 분야에서 나온 용어인 걸 검색해서 알았다. 야구선수는 배트에 공이 이 스위트 스팟에 딱 맞는 순간 공이 제대로 멀리 날아갈 것을 안다고 했다. 스포츠 용어인 ‘스위트 스팟’은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로 좋은 시기나 부분, 한 마디로 최적화된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경제 분야에서의 스위트 스팟은 경제가 이례적으로 호황을 누리는 시기를 의미하고 마케팅에서는 소비자가 기업에 가장 매력을 느끼는 시점 혹은 그 느낌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이 단어를 샘 리처드 교수(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 사회학과)가 쓴, 최근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으로 접했다. 유튜브의 숏츠나 채널로 종종 리처드 교수를 만났기에 그가 쓴 책이 궁금해서 사 읽었다. 리처드 교수의 강의실은 특별했다. 간편한 티셔츠나 청바지 차림의 교수는 계단식 큰 강의실에서 주제를 말한 후 여러 학생들을 앞자리로 불러 앉힌다. 자발적으로, 혹은 불려 나온 학생들은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었다. 교수가 질문하고 학생들이 답하는 형식의 그 강의는 ‘SOC 119’라는 유튜브 채널로 전 세계에 방송되며 교육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2017년엔 ‘그런 말은 하면 안돼요’라는 제목으로 인종과 피부색에 대한 수업을 진행해 미국 에미상 교육·학교 프로그램 부문 최고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는 뉴스도 들은 적이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인종과 성별, 문화 등 다양한 주제로 토론하는 가운데 학생들이 편견과 고정관념을 벗어나 타인의 관점으로 사고하도록 지도하는 강의다. 교수가 질문하고 학생이 답하는 혁신적인 방식인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이 5만 명이 넘었다고 했다. 리처드 교수는 한국문화와 한류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강의를 자주 해서 한국인들에게 매우 친근한 대표적인 학자다. 리처드 교수는 인생에도 ‘스위트 스팟’과 같은 지점이 있다고 말한다.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선택의 시점에 맞닥트리게 되고 그 중 인생 최고의 순간이 바로 ‘스위트 스팟’이라는 것.‘스위트 스팟’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에 있으며, 어쩌다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스스로 찾아내고 느끼는 것이라 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스위트 스팟’이라는 생소하고 익숙하지 않은 이 단어를 ‘타이밍(timing)’ 혹은 ‘줄탁동시(5550啄同時)’ 정도로 치환했더니 훨씬 더 이해가 잘 되었다.‘타이밍(timing)’은 어떤 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나는 순간, 적절한 좋은 시기를 뜻하는 것이고, ‘줄탁동시(5550啄同時)’는 병아리가 안에서 쪼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는 순간 알에서 깨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 역시 최고의 순간이라는 뜻 아닌가. 내 인생 최고의 순간, ‘스위트 스팟’은 언제나 열려 있다. 매 순간일 수도 있다. 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2025-04-02

세계 시조의 날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미국인 학생들이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30여 명 정도 되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학생도 있었다. 복도에는 한국인 여럿이 김밥, 잡채 등의 한국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놓고 손님 대접에 분주했다. 2018년 2월 8일, 미국 유타주 프로보의 브링검영 대학교(BYU)에서 개최된 ‘제5회 유타주 시조 낭송대회’. 세미나실을 가득 채운 청중 중엔 한국인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 학교의 미국인 학생과 교수님들이었다. 대회의 주최자이신 마크 피터슨 교수님의 짧은 개회사와 심사위원 소개 후 학생들의 시조 낭송이 시작되었다. 준비된 PPT엔 한글로 쓴 시조가 뜨고 학생들은 화면을 보면서 낭송했다. 시조 아래엔 영문 시가 있었다. 아마도 한글을 모르는 청중을 배려한 듯했다. 두 시간 남짓 발표가 진행된 시조 대회에서 학생들은 시종 진지하고 긴장한 듯했지만 심사하는 나로서는 얼마나 재밌고 감동스러웠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한국인 청중들도 감격의 웃음이 동반된 큰 박수를 치며 즐기는 듯했다. 당시 BYU에 연구교수로 가 있었던 나는 피터슨 교수님의 초청으로 가서 연구실도 하나 얻었고, 이따금 한국문학 강의도 했다. 연구년이 끝나 귀국할 무렵 시조대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조낭송대회는 유타의 한국 교포들께서 십시일반 기금을 모아 운영한다고 했다. 매년 4월 학기 말에 개최한다길래 참석 못해 안타깝다고 했더니, 피터슨 교수는 한국고전시가 전공교수가 심사하는 것이 학생들에게도 좋은 가르침이 될 거라며 행사 일자를 나의 귀국일 전으로 앞당기겠다고 했고, 나는 귀국 하루 전에 이 행사의 심사위원장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유타 한글학교 교장선생님과 재미교포 소설가와 같이 심사하고, 심사평과 수상자 발표는 내가 하였다. 학생들의 시적 착상과 이미지는 발랄하고 참신하였고, 시조에 대한 지식도 꽤나 단단해 감동적이었으며, 한복을 갖춰 차려입는 성의도 고맙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시조의 율격을 제대로 이해하는 학생을 가려 뽑아 수상자로 정했다. 그때 피터슨 교수의 개회사가 뜻깊었다. 일본의 정형시 하이쿠(俳句)가 미국에 알려져 창작 유행이 있다면서, 한국의 시조도 전통과 역사가 하이쿠에 밑질 것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 시카고의 한인단체 세종문화회 중심으로 시조 창작이 매우 활발하며, 심지어 우주선에 시조를 실어 보냈다 했다. 피터슨 교수는 이 시조 대회를 시카고의 시조 유행과 접목시키고 싶다고도 했다. 그 말이 현실이 될 줄이야…. 지난달 피터슨 교수님의 유튜브 채널 ‘우물 밖의 개구리’로 2월 7일, ‘세계 시조의 날(World Sijo Poetry Day)’ 선포식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이 기념식을 유튜브로 전 세계에 중계했다. 왜 2월 7일일까 궁금했는데 고려말 시조 시인 역동 우탁 선생의 기일이라는 것이었다. 족보 연구의 대가이신 피터슨 교수님다운 발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2006년 8월 현대시조 100주년 기념식에서 ‘겨레 시 시조가 세계만방에 천둥처럼 울리게 하겠다.’는 선언이 무색한 날이었다.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날이기도 했다.

2025-03-27

시험 치는 날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주인공은 영화감독 데뷔를 위한 시나리오를 쓴다면서도 잠만 잔다. 낮 12시가 넘어 일어나서 밥을 차려 먹은 후에도 노트북에 다가가기가 힘들다. 평소 잘하지 않던 방청소를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히 청소하고 하릴없이 선풍기를 분해해서 깨끗이 닦는다. 더 이상 할 일이 눈에 띄지 않으면 그제서야 노트북 앞에 앉는다. 노트북을 켜고도 글자 폰트만 매만지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낮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밤이면 친구들과 술자리. 그러기를 며칠째 반복하고 나서야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극한직업’의 영화감독 이병헌이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 ‘힘내세요, 병헌씨’의 첫 부분이다. 어쩜 나랑 저리도 똑같을까 공감하면서 피식 웃었다. 논문 마감일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하는 습관이 있었다. 평소 어질러진 연구실을 대청소하는 일이다. 책장에 마구 꽂힌 책들을 장르별로 가지런히 챙긴다. 누워있는 책들도 일으켜 세운 후 물걸레로 책장의 먼지를 깨끗이 닦는다. 심지어 책상의 방향을 다시 바꿀 때도 있다. 넓지도 않은 연구실에서 그것은 거의 대공사에 가깝지만 강행한다. 창문 쪽으로 놓인 책상을 입구 쪽으로 틀어 돌려놓거나, 혹은 좌우를 완전히 바꾸기도 한다.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낑낑대며 책상을 옮기고 나면 컴퓨터며 프린터 등의 부속품들도 자리를 바꾸게 되고 전선을 뺐다 꽂는 등 꽤나 작업시간이 걸린다. 책장 가까이 한 켠으로 배치되었던 소파의 위치도 연구실 가운데로 옮겨 보는 등 지치지 않고 일을 키우고 벌인다. 바닥 청소까지 멀끔하게 하고 난 후 재정리된 연구실을 휙 둘러보면서 잠시 만족감을 느낀다. 아차 할 일이 있었지 그제야 깨닫고 책상 앞으로 다가가 컴퓨터를 켠다. 더 이상 피할 데가 없다. 이제부터 논문을 쓰자며 또 밤샘이다. 자주 이런 일을 벌이니 영리한 조교는 잘도 알아챈다. 교수님 논문 쓰셔야 되죠? 작년 11월부터 한국어교사 자격증을 위해 인터넷 수강을 한다. 매주 8과목씩 15주를 듣는다. 수강하기만도 벅찬데 쪽지시험과 과제 제출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두 번의 시험이 가장 큰 스트레스다. 욕심 내지 말고 설렁설렁해서 80% 정도 성적이면 된다며 마음먹었으나 그렇지 않았다. 비록 오픈북 형식이지만 시험은 시험이다. 시험일이 다가오자 긴장되고, 들었던 강의를 다시 들으며 시험공부라는 걸 하게 된다. 시험일이 닥치자 예전의 습관이 도졌다. 시험 친다고 컴퓨터를 켜 놓고는 책상 주변을 청소한다. 둘러보니 책장 정리가 필요하다. 이 방 저 방 흩어져 함부로 섞여있는 책들을 옮긴다. 내 책과 남편 책, 손주들의 책들이 제 자리를 찾아 앉는다. 주방으로 가 그릇장을 활짝 열어젖혀 잠시 멍하게 바라보다가 두 손 걷어붙이고 모두 꺼내 일을 벌인다. 화장실 바닥을 박박 문지른 후 대대적으로 물청소를 한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까지 하고 나서야 젖은 손을 털면서 컴퓨터로 돌아온다. 아침에 켜 둔 컴퓨터 모니터엔 ‘장시간 사용하지 않아서 로그아웃되었습니다.’라는 사인이 떠 있다. 깊은 밤이다. 밤을 꼬박 새워 시험을 치고 나니 새벽 창밖이 푸르다. 예전 연구실의 창밖 풍경과 어쩜 저리도 똑같을까.

2025-03-19

무방수날 장담그기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장담그기는 김장 문화와 함께 한국만의 독창적 문화로 2018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됐고, 작년 2024년 12월 3일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콩을 발효해 먹는 문화권 안에서도 한국만의 독특한 장 제조법이기에 중국과 일본보다 먼저 등재되었다. 장담그기는 콩을 주재료로 메주를 만든 뒤 이를 발효시켜 된장과 간장 등을 만드는 전통적인 과정을 이르는 것으로, 한국 음식의 기본양념인 장을 만들고 관리·이용하는 과정의 지식과 신념·기술을 모두 포함한다. ‘장’은 한국인의 일상음식에 큰 비중을 차지해 왔으며, 가족 구성원이 함께 만들고 나누어 먹는 문화가 세대 간에 전승돼 왔다는 게 등재 사유였다. 우리나라의 장 문화는 거의 1년이 소요되는 그야말로 슬로푸드의 끝판왕이다. 초여름에 콩을 심고, 늦가을 서리가 내리기 전에 거두어 말린 뒤 입동 무렵에 메주를 쑨다. 콩을 불려 충분히 무르게 삶아 으깬다. 메주틀로 네모 반듯한 메주를 만들어 볏짚으로 묶어 두면 곰팡이균이 만들어지는데 겨우내 처마 끝에 매달아 바싹 말린다. 이월 좋은날을 가려 장담그기를 한다. 먼저 항아리를 깨끗이 씻어 물기를 말린 뒤 속에서 볏짚을 태워 살균소독한다. 메주를 씻어 말리고 소금물을 계량해 준비한다. 메주를 항아리에 담고 물을 붓고, 말린 고추와, 말린 대추, 옻나무, 숯을 적당히 넣고 가늘게 자른 대나무를 항아리 안에 걸쳐 떠오르는 메주를 눌러둔다. 볕 좋은 장독대에서 두세 달이 지나면 간장과 된장을 분리하는 장 가르기를 한다. 이렇게 두 가지 장을 만들고, 지난해에 사용하고 남은 씨간장에 새로운 장을 더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내려와 오래 묵힐수록 좋다고 했다. 몇 백년 묵은 간장을 간직한 종가도 있다고 들었다. 작년 흰머리소녀 모임, 유복혜 선생님께서 ‘장은 무방수날에 담근다.’고 하셨다. 무방수날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는데, 알고 보니 이월의 ‘손없는 날’이었다. 귀신이 날마다 동서남북 4방위로 다니며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고 해코지를 하는데, 9와 0으로 끝나는 날짜에는 하늘로 가서 어디에도 없다고 믿었고 그날이 바로 ‘손없는 날’이다. 따라서 ‘손이 없는 날‘은 무슨 일을 하여도 탈이 없어 꺼리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고, 결혼, 이사, 개업 등 인간의 중요한 행사 날짜를 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 중 특히 이월의 초아흐레와 열흘을 무방수날이라고 하는 거였다. 세시풍속사전에 의하면 특히 무방수날에 담근 장은 맛이 좋다고 했다. 지난 주말이 무방수날이었고 내 생애 첫 장담근 날이었다. 청도의 유복혜 선생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소금으로 소금물을 만들어, 잘 소독하신 항아리에 메주를 넣고 붓는 참 짧은 공정만이었지만 첫 시도는 설레고 값졌다. 함께한 이솔희 선생님은 이 의미있는 행사를 유튜브에 올렸고, 같이 간 손녀는 일기에 적을 거라고 했다. 매일 햇볕을 가려 받는 유 선생님의 수고가 맛난 장을 만들어 낼 것이다. 석 달 뒤 장가르기를 위한 또 한 번의 청도나들이가 기대된다. 평생 여기저기서 된장을 얻어먹던 내가 어쩌면 올해부터는 된장을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25-03-12

나이 드는 것은 성장하는 것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영화 감상이 취미인 나는 영화를 짧게 편집하며 소개하는 유튜브를 여러 개 구독하고 본다. 더러는 이미 봤던 영화를 회상할 때도 하고, 보지 못했던 영화를 만날 때도 있다. 유튜브에서 그렇게 봤던 영화를 TV로 다시 볼 때도 많다. 20년도 더 전에 책으로 봤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Tuesdays with Morrie)을 그렇게 다시 만났다. 그 당시 워낙 베스트셀러였기에 사 봤던 책이었는데 거의 동시에 영화로 나온 줄은 몰랐다. 책의 저자인 미치 앨봄(Mitch Albom)처럼 나도 일에 미쳐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던가 보다. 미치 앨봄은 미국 브랜다이스대학교의 사회학과 교수인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 교수의 제자다. 둘의 관계는 제자는 교수를 코치라고 부르고, 교수는 제자의 애칭을 부를 정도로 매우 돈독했다. 미치는 대학 졸업 후 성공한 스포츠 칼럼니스트로 정신없이 산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나 프로포즈도 못할 정도로 바쁜 일상을 사니 자신에 대한 성찰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그때 우연히 본 유명 TV 프로그램인 ‘나이트라인’에 나온 모리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모리가 루게릭 을 앓고 있으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미치는 모리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했다는 죄책감 속에 모리를 찾아간다. 16년만에야 다시 만난 교수 모리는 미치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고 눈물로 환영한다. 그 후 화요일마다 인생에 대한 둘만의 수업이 시작된다. 미치는 직장으로부터 해고 위협을 받고, 애인의 결별 선언을 감수하면서도 이 수업을 위해 14주나 비행기를 탄다. 세상, 자기 연민, 후회, 죽음, 가족, 감정, 나이 드는 두려움, 돈, 사랑의 지속, 결혼, 문화, 용서, 완벽한 하루, 작별 인사를 주제로 매주 강연과 토론이 펼쳐진다. 제자 미치가 모리 교수와의 그 수업을 책으로 옮겼고, 모리 교수가 죽은 후 출간되었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책장에서 찾았다. 과연 읽은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내용이 까마득하다. 오래전 책이었기 때문일 테지만 40대에서 거의 30년 가까이 지난 70살의 내게 공감되는 내용은 확연히 다르다. 감동과 공감의 포인트가 나이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24시간만 건강해진다면?”이라고 묻는 미치에게 말하는 모리의 완벽한 하루는 이런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롤케이크와 홍차로 아침을 먹고, 수영하고, 친구들과 점심 먹고, 이야기하고 싶어. 그리고 산책하면서 자연을 느끼고 저녁엔 레스토랑에서 맛난 음식을 먹고 멋진 파트너와 춤을 출 거야. 그리고 집에 와서 깊고 달콤한 잠을 자는 거지.” 죽음에 대한 성찰도 곱씹게 된다. 누군가의 말처럼 죽음은 외투 속의 손수건처럼 아주 가까이 있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누군가를 용서하고, 배려하고 활발하게 감정을 나누며 인생 최후의 시간을 가장 아름다운 시간으로 만든 모리 교수를 배우고 싶다. 가장 가슴에 와서 콱 박히는 말은 이것이다. “나이가 드는 것은 쇠락이 아니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좀 늙었으면 하는 사람은 왜 없는 거지?”

2025-03-05

무해력(無害力)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손자가 얼굴에 잔뜩 불만과 울분을 담은 채로 내 방으로 왔다. 왜 그러냐고 깜짝 놀라 물었더니 우왕 울음보 먼저 터뜨렸다. 뒤따라 온 제 사촌누나가 사연을 얘기해 주었다. 가지고 온 토토로인형을 바다에 빠뜨렸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으며 더 크게 울기에 일단 말없이 등만 토닥이며 울음이 그치길 기다렸다. 지난 달 1월 나의 칠순 기념으로 베트남 하롱베이 크루즈 여행 때 있었던 대사건이었다. 저희 방 뱃전의 테라스에서 가지고 놀던 인형이 바다로 떨어진가 보았다. 울음이 잦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었다. 배를 돌려 그 자리에 가서 인형을 건져올려야 한다길래 그건 불가능하다며, 다시 사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울음은 잦아들었으나 여전히 흐느끼면서 꼭 같은 걸 사려면 일본에 가야한다고 했다. 아마 지난여름 일본 가족 여행 갔다가 사온 인형이었나 보았다. 잘됐다. 한 달 후에 할머니가 일본엘 가니 꼭 같은 걸 반드시 사다 주겠다고 약속하고서야 진정되었다. 그 후에도 베트남 얘기만 하면 잃어버린 토토로가 생각난다며 입을 삐죽거렸다. 8살 사내아이가 로봇이나 자동차를 가지고 놀아야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집에 와서 잘 때면 안고 자는 인형 몇 개를 꼭 갖고 왔다. 가져오지 않았을 때는 자지 않거나 저희 아빠가 밤중에라도 기어이 가져다 줘야 잠들곤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멀리까지 인형을 가지고 갈 줄은 몰랐다. 여동생에 사촌도 모두 여형제라 동화되었나 사내답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서울 손녀들도 대구에 올 땐 저희 가방에 몇 개의 애착인형을 반드시 가지고 오곤 했으며 대구 손녀는 보드라운 질감의 작은 인형이나 말랑말랑한 촉감의 작은 캐릭터 한둘은 항상 손에 들고 다닌다. 집집마다 동물인형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음에도 장난감가게에 가면 가장 먼저 발길을 멈추는 곳이 봉제인형 코너여서 빨리 커서 인형을 찾지 않을 날이 왔으면 바라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2025년 대한민국소비트렌드를 전망하는 ‘트렌드코리아2025’(김난도 외, 미래의 창)에서 손주들이 애착인형을 품에 안고 손에서 조물거리고 놓지 않으려는 심리를 알게 되었다. 무해력(無害力)이란다. 작고 귀엽고 순수해서 해롭지 않은 것이 가지는 힘. 사방에서 온통 공격해 올 것만 같은 이 험한 세상에서 작고 연약하고 귀여운 것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으니 그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힘이 된단다.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해악을 주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힘이 있단다. ‘앙증깜찍 무해력’은 작아서, ‘귀염뽀짝 무해력’은 귀여워서, ‘순수대충 무해력’은 서툴러서 무해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책가방에, 아니 어른들도 백팩에 작은 동물 키링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이 바로 무해력 때문이란다. 지난 주 일본여행에서 손자의 잃어버린 무해력을 되찾아 주려 동행한 어른들이 힘을 모았다. 몇 개의 쇼핑몰에서 인형을 찾으러 이리저리 뛰었고 어찌저찌 비슷한 토토로인형을 구해 주었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손자가 실망할까 마음 졸였더니 인형을 두 손으로 받으며 활짝 웃는다. 아이고 할머니가 색깔을 착각했구나. 작아서 더 이쁘네….

2025-02-25

여행 준비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여행 짐 싸기가 어려운 게 아니다. 미리미리 메모해 두고, 생각날 때마다 챙겨 바구니에 던져두면 된다. 갈아입을 옷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가 챙겨 넣어둔다. 떠나기 전날 종류별로 파우치에 넣어 큰 가방에 넣는 일쯤이야 뭐 그리 힘들 일도 없다. 여행 준비보다 나의 부재에 대비한 준비가 더 많다. 곰탕 끓이는 정도는 아니다. 여행 일수 만큼 남편의 아침식사로 야채샐러드, 두유, 찐계란을 밀프랩해서 냉장고에 가지런히 넣어 두면 된다. 원래 외식을 즐기기도 하고 혼자서도 잘 사 먹는 좋은 습관이 있는 남편이다. 평소에도 하루 한 끼의 아침 준비로 참 수월하긴 한 편이니, 구태여 신경 쓰는 것은 내 최소한의 정성을 표하는 셈이긴 하다. 집안 청소도 중요한 여행 준비 중의 하나다. 나의 빈자리에서 발견될 허술한 구석이 걱정되기도 해서 남편의 행동반경 외의 안방과 주방, 앞뒤 베란다 등에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꼼꼼히 쓸고 닦는다. 청소를 미리 당겨서 한다는 심정으로 정리하니 이게 여행 준비가 맞나 갸우뚱할 때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여행이든 최종정착지는 집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요, 가출일 거다. 내가 돌아왔을 때 말쑥한 집이면 더 좋지 않겠는가. 물론 그 사이 남편이 많이 어질러도 어쩌랴마는…. 여행 준비의 오랜 습관 중 하나는 손톱 정리다. 손톱에 이런저런 색으로 입히는 것을 매니큐어-잘못된 영어라고 했다-라고 했다. 요즘은 네일 케어라고 하던데, 뭐 둘 다 영어식 표현이라 좋은 우리말로 순화하면 좋겠다 싶긴 하다.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여름방학 때 손톱에 빨간 봉숭아꽃물을 들인 채로 개학해서 학교 갔다가 그 도발적인 빨간색에 지레 부끄러워 손가락을 오므려 못 폈던 기억이 있다. 예전엔 매니큐어를 미용실에서 했다. 미용실 바구니엔 오만가지 색의 매니큐어가 그득하니 넘쳤다. 장난 같이 발라보기도 하다가 서비스를 받고 싶으면 플라스틱 대야에 비눗물을 따끈하게 데워줬다. 그 물에 손가락을 담가 손톱을 불린 뒤에 큐티클을 제거하곤 했다. 빨간 손톱칠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가끔씩 일면 방학을 기다렸다. 수업이 없으니 어떠랴 싶었다. 한 해 여름, 빨갛고 뾰족한 긴 손톱으로 학교엘 갔다가 정교님을 만나 교수답지 않다며 힐책을 들은 적이 있어, 다시는 하지 않았다. 다만 퇴직하고 나면 내 맘대로 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마냥 하지는 않았다. 며느리가 어버이날 선물로 네일아트를 예약해 주어 으리번쩍한 손톱으로 호사를 한 기억 정도. 다만 여행 계획이 잡히면 왠지 손톱 정리를 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여행이 많은 해는 제법 오랫동안 손톱이 화려했다. 지난 달 베트남여행 때는 며느리가 권해 쨍하게 붉은 와인색으로 도발했다. 한 달 남짓 되었고, 와인색 손톱이 반 이상 남아있지만 또 다른 여행이니까 다시 손질해야지. 이번엔 점잖은 색으로 골랐다. 올리브색이라고 하는데, 손녀는 아보카도 같다고 한다. 여행이 일상의 일탈이듯 손톱을 꾸미는 게 내겐 가벼운 일탈인 듯하다. 손톱정리가 나의 여행 준비요 시작이다.

2025-02-19

정월보름날에 대한 기억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경주 남산 통일전 옆에 작고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데 바로 서출지다. 여름이면 연못을 둘러싼 오래된 나무 백일홍이 아름답고 연꽃 명소로도 이름이 높아 많은 사진애호가들이 찾는 곳이다. 이 못의 유래가 삼국유사에 실려있다. 신라 21대 소지왕이 정월 보름날 행차에 나섰다. 까마귀와 쥐가 와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므로 왕은 신하를 시켜 따라가게 했다. 동남산 양피촌 못 가에 이르러 신하는 그만 까마귀를 놓쳐 버렸다. 이때 갑자기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글 쓴 봉투를 들고 나타난 왕께 전하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봉투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적혀있어 한 사람이 죽는 게 더 낫다며 왕이 보지 않으려 했으나 일관이 두 사람은 평민이고 한 사람은 왕을 가리키니 열어보라고 조언했다. ‘사금갑(射琴匣)’ 즉 ‘거문고 갑을 쏘아라’라고 적혀 있었다. 대궐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쐈더니 사통하는 사람 둘이 숨어있었고, 왕을 해치려던 사람들이었다. 봉투에 적힌 대로 둘은 죽었고, 왕은 살았다. 노인이 건네준 봉투 덕분에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이후 왕은 매년 첫 쥐, 돼지의 날에는 모든 일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며 정월 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노인이 나타나 건네 준 글이 적힌 봉투로 왕이 살게 되었으므로 못의 이름을 서출지로 부르게 되었다. 내겐 설날보다 정월 보름날의 기억이 더 많다. 엄마는 유독 정월보름을 챙겼다. 초등학교 졸업 후 우리 삼남매는 모두 대처로 공부하러 가 있었고, 정월보름날은 휴일이 아니었다. 정월대보름날이면 엄마가 밤새 장만한 오곡밥과 온갖 나물을 챙겨 싸 주시고 아버지는 새벽기차를 타고 오셨다. 기차역에서 우리 자취집까지는 걸으면 족히 30분은 걸릴 거리였지만 그날만은 택시를 타셨다. 등교 전에 먹여야 한다면 엄마가 당부당부했다며 바리바리 싸오신 보따리를 내려놓고 아직 자고 있는 우리를 보고 큰 숨을 몰아쉬셨다. 세 개의 찬합이 있었다. 첫 번째 찬합엔 부럼용 생밤과 설날 먹고 남은 강정 등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부럼부터 먼저 깨라고 하셨다. 자다가 일어나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강정 하나를 입에 넣었던 까끌한 기억. 두 번째 찬합엔 굵은 콩, 노란 조와 붉은 수수 등이 섞인 질척한 밥이 가득했다. 찬합에서 온기를 느끼며 아침밥을 짓지 않고 도시락까지 챙겨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온갖 나물로 그득한 마지막 찬합을 열면 입이 절로 벌어졌다. 보름 음식 중에 엄 마가 가장 신경썼던 것이 나물이었다. 가짓수가 생각나진 않지만 ‘땅에서 나는 세 가지, 바다에서 나는 세 가지, 산에서 나는 세 가지’가 기본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다. 콩나물, 무나물, 시금치에 호박과 가지말랭이는 땅의 나물일까. 물미역 무침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름도 모르는 시커먼 묵나물이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당부를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하셨다. 첫 입은 피마자잎에 크게 싸 먹으래. 평소 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그날 하루 공식적으로 허락된 귀밝이술도 안 드시고 우리를 위한 새벽기차를 타셨다.

2025-02-12

호(號), 또 하나의 이름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경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같이 활동하시던 소당(素堂) 조철제 선생님께서 누군가에게 호를 지어주고 다같이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에게도 호를 지어주실 수 있는지 조심스레 여쭈었다.그때도, 한참 후까지도 답이 없어 ‘네가 무슨 호가 가당키나 한가’ 생각하시는가 보다며 내심 서운했다. 내 위인됨이 변변찮다고 생각하시는가도 여겨 나도 입을 다물었다. 몇 년 후였다. 아마도 향토문화연구소의 정기모임이었을 것이다.조 선생님께서 마치 오다가 주웠다는 듯이 무심하게 종이 하나를 건네주셨다. 펼쳐보니 ‘의당(宜堂)’ 두 글자가 반듯하게 한자로 적혀있었다. ‘의(宜)’는 마땅하다, 화목하다. 온화하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시경의 시 ‘도지요요(桃之夭夭)’에서 따왔다고 하셨다. 몇 년 동안 지켜봤는데, 언제 어디서나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 제 역할을 다하는 사람, 또 그곳을 화목하고 기쁘게 해주는 사람으로 보였다고도 하셨다.앞으로도 항상 이 교수가 있는 곳이 어디든, 마땅히 그 자리를 복되고 빛내도록 하라는 뜻으로 정한 호라며 분에 넘치는 말씀도 함께 주셨다. 호는 많이 알려서 자꾸 불려야 한다며 그 자리에서 바로 공표하고 축하연도 조촐하게 열어주셨다. 그 후부터 경주문화원엘 가면 나는 의당 선생이라 불렸으나 항상 좌불안석이었다. 50살도 안된 내가 감당하기 어렵고 버거운 이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드러내놓기엔 쑥스러워 SNS의 닉네임으로 숨겨 쓰곤 했다. 몇 년 후 2005년으로 기억한다. 지역신문의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연구실에서 기자와 장시간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그만 호를 말해버렸다. 며칠 후 신문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 : 경주에선 문화전문가, 포항에선 여성단체장, 안동에선 내방가사 전문가….” 참 기자님은 어찌 그렇게도 호를 적절하게 사용했나 놀라면서도 부끄러웠다. 대신 그렇게 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내 직분을 다하리라. 어디서든 필요하다 부르면 달려갔고, 소용 닿는다고 역할을 주면 마다않았다. ‘마땅한’ 소명이라 여기며 정말 치열하게도 살아냈다. 한글서예공부를 한 지 햇수로 1년이 훨씬 넘었다. 핑계가 많아 썩 열심히 하지 못했고 여러 모로 모자라 수연(秀硏) 최민경 선생님을 애태웠다. 같이 공부하는 다른 분들이 글씨를 완성해 호와 이름을 쓰고 낙관을 찍는 것이 못내 부러웠다. 최근에야 모자란 글씨인데도 격려해 주시려는지 한 장씩 연습한 글씨 아래 호와 이름자를 쓰기를 허락하셨다.이미 호가 있지만 새로운 호를 직접 지어주시면 고맙겠다고 간청 드렸더니 한참 후에야 답을 주셨다. 글을 연구하고 글씨를 연마한다는 뜻의 ‘서연(書硏)’. 더구나 선생님의 아호에서 한 자를 나눠주시니 황감하기 이를 데 없다. 좋은 글을 연구하고 글씨도 열심히 쓰니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과분한 말씀에 은근한 독려도 곁들이셨다. 이렇게 또 하나의 이름이 생겼다. 얼마나 여러 날 심사숙려해서 지어주신 귀한 이름인가. 내 나이 칠십, 남은 생 다하도록, 이름값하면서 사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다.

2025-02-05

양춘포덕(陽春布德)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는 바뀌고 새 날이 밝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하기가 못내 부끄러웠던 새해맞이였다. 서로 낯빛을 숨기며 인사하고 안부하기조차 주저했던 날선 나날도 하루 이틀 한 주 두 주 지나자 아픔도 슬픔도 차츰 무뎌졌다. 한숨이 배긴 했지만 그럭저럭 인사도 오가곤 했다. 그래 잊히기 마련이고 또 잊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나고, 또 하나의 새해맞이. 설날이 다가오자 먼 옛날의 제자에게서, 예전 직장 동료에게서도 새해 인사를 받는다. 보고 싶습니다. 부디 올해는 무탈하고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진정성이 느껴지는 안부에 콧날이 시큰해진다. 그 중 최민경 회장에게서 받은 아름다운 카드 하나가 뭉클하다. ‘봄볕 같은 덕을 펼치다.’ 금빛반짝이는 빳빳한 카드에 정갈한 글씨, 그 아래 둥글고 단호하게 새긴 양춘포덕(陽春布德). 이 매서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은 오고야 말 것이라는 시간의 순리를 새기며 느끼자 몸이 벌써 따뜻해진다. 그래 곧 봄이 올 거야…. 겨울 속의 봄이라 하면 판자벽에 검고 끈적끈적한 페인트를 칠한 교사(校舍)에 기대 친구들과 나란히 서서 해바라기하던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조개탄 몇 덩이 넣어 간신히 추위를 면하다 금방 식어버린 교실보다 겨울 볕이라도 쬘 수 있는 바깥이 차라리 더 나았다. 바람기만 없으면 교실 밖이 덜 추웠다. 쨍하게 시린 하늘을 쳐다보면 눈이 부셔서 보이지도 않는 해가 보낸 온기가 변변찮게 입은 겨울옷 속까지 스며들어 따뜻해진다. 주머니에 넣었던 손조차 꺼내 볕을 쬐며 햇살을 잡아본다. 말없이 해바라기를 하던 아이들의 얼굴에도 화기가 돌고, 곁의 친구와 서로 얘기를 나눈다. 활기 넘치는 남자 아이들은 더워진 몸을 주체 못해 기댔던 판자벽을 떠나 뛰며 장난치기를 시작한다. 추위에 지치고 떠는 아이들을 웃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이 햇살이 바로 덕(德)이 아닐까. 비록 봄볕 아니더라도. 덕(德)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구가 있다.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가까이하는 데 있으며, 지극히 좋은 것에 머무는 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이 문구는 주로 정치에 빗대어 풀이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큰 배움은 바로 정치라 할 수 있으니 정치인의 가장 큰 덕목은 밝은 덕을 베푸는 것이라는 조언이요, 주문이다. 국민만을 생각하는 정쟁보다는 상생이다. 어디 정치에서뿐이랴. 어떤 작은 조직에서도 덕은 리더의 덕목이다. 작은 이익보다 큰 포용이다. 이웃 간에도 덕은 서로 베풀며 살아야 할 규율이자 인정이고, 가정에서도 어른이 어른다우려면 모름지기 덕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도덕적·윤리적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능력으로서의 덕(德)은 품격이다. 나라의 국격이요, 인격이다. 다음 달 3일이 절기상으로는 입춘이다. 바야흐로 봄의 계절이 시작될 것이다. 모쪼록 올해는 나라가, 사회가, 이웃이 그리고 가정이 따뜻한 봄볕 같은 덕이 넘쳐나도록 펼쳐지면 좋겠다.

2025-01-30

이름의 무게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한 학급에 70명이 넘었다. 초록색 천으로 싸인 출석부가 좁고 길쭉했다. 펼치면 한자로 된 이름이 빼곡했다. 이따금 선생님께서 내게 출석을 부르는 일을 맡기셨다. 모르는 한자가 있어도 친구들의 이름을 다 알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또 모두 다 여학생이어선지 비슷비슷한 이름이 많았다. 끝자가 거의 자(子), 순(順), 숙(淑), 희(姬), 옥(玉)이었다. 정을 첫 자로 쓴 이름들도 많았는데, 내 이름과 한자를 달리 쓰는 애들의 이름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대부분 곧을 정(貞), 맑을 정(淨), 고요할 정(靜)의 한자였고 정(正)자는 없었다. 남들과 다른 뜻의 이름자를 가진 나는 까닭 없이 뿌듯했다. 어느 날 신문을 보고 계시는 아버지 옆에 바짝 다가앉았다. 신문엔 내가 모르는 한자가 더 많았지만 함께 읽는 척하다가 정(正)자를 찾아내고는 아버지께 내 이름자의 내력을 여쭸다. 집에선 내 이름을 옥(玉)이라고만 부른다. 니가 났을 때 워낙 동글동글하다며 할머니께서 그렇게 지으셨지라고 하셨다. 옥(玉)자 말고요, 정(正)자요…. 아 차라리 여쭙지 말 걸 싶은 대답을 들었다. 니가 정월에 났거든…. 난 이월이나 삼월에 나지 않았음을 큰 다행으로 여겼다. 이옥이 삼옥이보다는 정옥이 더 낫지 않은가. 이름대로 바르게 살아야지 무슨 결기 같은 것이 생긴 건, 그 몇 년 후였다. 무슨 연유에선지 어머니가 점쟁이에게 나를 데리고 가셨다. 세상 가장 공손한 자세로 앉은 어머니가 뭔가를 묻고 점쟁이는 잠시 뜸을 들인 후에 긴 대답을 한다. 어머닌 좋아하는 기색이기도 하다가 때론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좀 더 바짝 점쟁이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셨다. 옆에서 그저 심상하게 앉아있는 나에게 점쟁이가 대뜸 이름을 물었다. 바를 정(正) 구슬 옥(玉)이라고 대답했더니 이름자를 크게 쓰면서 대통령 이름자하고 같네. 이름 풀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만은 아주 똑똑하게 기억한다. 그 때 나는 내 이름의 정(正)자를 내 삶의 신조로 삼기로 결심했다. 불교 진각종단 위덕대에 다니게 되자 내게 또 하나의 이름, 불명(佛名)이 생겼다. 수계관정(受戒灌頂)으로 받은 불명은 ‘대자은(大慈恩)’이었다. 크게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라로 풀이하자 왠지 내겐 버겁다는 첫 생각이었다. 특히 대(大)가 그랬다. 정사님께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인연 따라 이름이 지어지는 것이라며 부처님의 뜻이라고 하셨다. 남에게 은혜를 베풀기엔 역량 부족이지만 두루 봉사하면서 살자. 최소한 폐 끼치면서 살지는 말자.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무수히 많은 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폐 끼치고 살았다는 생각에 두렵다. 언젠가 중국 시안의 대자은사라는 절엘 갔다. 내 불명과 같아 반가워 감격했다. 서유기로 유명한 현장이 수좌로 있으면서 역경사업을 했다는 절이다. 당 고종이 모후인 문덕황후를 위해 세워, 절 이름을 ‘자애로운 어머니의 큰 은혜’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했다. 역사깊은 내 불명에 사명감과 동시에 두려움이 들었다. 절에 가면 불명을 조심스럽게 쓴다.

2025-01-22

달력 미신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해마다 연말이 되면 한글박물관과 국학진흥원에서 보내온 달력을 받아본다. 집안 어딘가의 빈 벽에 붙여둔다. 달력으로서의 효용성보다 그림이나 사진에 눈길을 줄 때가 더 많아 달이 바뀌어도 미처 넘기지 못할 때가 많다. 작년 말 거의 비슷한 시기에 청계사의 절 달력과 대구가톨릭대학병원 달력을 얻었다. 유심히 들여다봤더니 발행처별로 달력에 기재돼 있는 날들이 다르기도 하려니와 흥미로워 나란히 걸어두고 비교해 봤다. 절의 달력에서 을사년, 서기 2025년인 올해가 불기로는 2569년, 단기 4358년임을 알 수 있었다. 매일의 날짜 아래 육십갑자가 띠 동물 그림 옆에 쓰여 있다. 제삿날에 제문 쓰기에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처님성도일’, ‘관음재일’, ‘지장재일’, ‘약사재일’과 같은 날을 연꽃그림으로 표시해 두었는데, 이들 재일은 매월 재를 올리는 날인가 보았다. 불교의 기념일은 가톨릭교의 기념일에 비하면 크게 많지 않은 편이다. 예를 들면 1월 한 달 중에서 6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념일이어서 솔직히 놀랐다. 1일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2일은 ‘성 대 비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3일부터 12일까지는 5일의 ‘주님 공현 대축일’ 전후에 치르는 의식의 날인 듯 보였다. 다른 달에도 기념일들이 빼곡했는데 가톨릭 역사의 그 수많은 성인들을 모두 섬기는 듯했다. 그 모든 날을 기억하려면 달력이 없으면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두 달력을 유심히 관찰하고 읽으면 보통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종종 오늘은 무슨 날이지? 들여다 보곤 한다. 며칠 전, 휴대폰에서 “달력 구하러 오픈런”이란 기사에 눈길이 가서 읽었다. 은행 달력을 얻으러 은행 앞에서 줄을 서서 번호표를 뽑고, 온라인 중고장터에서 은행 달력을 사겠다는 글이 올라온다는 기사였다. 스마트폰이 달력과 시계의 기능을 다하는 21세기에 웬 레트로 감성인가 했는데 그 내막을 알고 보니 헛웃음이 난다. 달력미신이란다. 은행 달력은 돈을 부르고, 병원이나 약국, 제약사의 달력은 건강하게 한다며, 소방서 달력은 화재를 예방하고 보험사 달력을 걸어 두면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믿거나 말거나’ 속설이 만들어지고 미신이 되어 이와 같은 달력 품귀라는 사회적 현상이 생겼단다. 대전의 유명한 빵집 성심당의 달력을 얻어 걸어두면 행운과 먹을 복이 들어온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고도 했다. 그래? 우리 집에 있는 저 달력은 어떤 복을 줄까? 절의 달력은 부처님의 보살핌이니 좋다. 가톨릭달력은 병원 달력이니 건강은 확보되었다 치고 한글박물관과 국학진흥원의 달력은 공부를 잘하게 한다고 소문내 볼까? 재물복까지 욕심이 났다. 서울에서 하나은행지점장으로 있는 이질녀에게 메시지를 넣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기사 얘기를 했더니 이모 달력 필요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지. 며칠 후 도착했다. 오픈런으로도 못 구한다던 바로 그 은행 달력이었다. 한 장에 3달이 펼쳐진 달력, 절이나 성당의 기념일이 없는 대신 24절기와 음력이 공손하게 새겨진 유난히 희고 깨끗한 달력에 나의 이벤트를 빼곡하게 채워 넣어 우리 집만의 달력을 만들어 볼까 한다. 이질녀 덕에 재물복까지 확보했으니 든든하다.

2025-01-15

일상의 고마움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아침 7시 30분.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인터넷 강의를 듣느라 새벽에야 눈을 붙였다. 몸이 찌뿌둥해 좀더 잘까 하다가 일단 일어난다. 두유라도 만들어놓고 눈을 더 붙여볼 수도 있다. 흰콩과 검은콩을 섞어 둔 통에서 계량컵 3개 분량을 담아 살짝 물에 씻어 두유기에 넣는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을 동안에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다. 전원을 켜 두유를 선택하여 누른다. 32분이 지나면 두유가 완성될 것이다. 그동안 다시 침대로 가 몸을 누일까. 생각해 보니 찐달걀이 없다. 냉장고에서 달걀 6개를 꺼내 물에 씻어 달걀찜기에 올려 전원을 켠다. 13분 뒤면 다 익을 것이다. 냉동실에서 통밀빵 한 조각을 꺼내 에어프라이어에 넣는다. 며칠전 만들어 둔 양배추 당근라페와 그릭요거트도 꺼내 식탁 위에 올린다. 그 사이 몸은 그런 대로 괜찮아진다. 30분 뒤 남편을 부른다. 강아지도 남편의 무릎 위에 앞다리를 얹는다. 오후 2시 30분. 범어초등학교. 돌봄교실 인터폰을 누르고 잠시 기다린다. 아이 둘을 데리고 나오신 선생님께 손을 가지런히 배꼽 위에 얹고 고개를 90도로 숙여 공수인사를 하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나도 선생님께 답례를 하고는 달려오는 아이들을 맞는다. 팔을 크게 벌리고 있으면 손자가 먼저 폭 안긴다. 땀냄새가 짙다. 농구했구나. 응 할머니 오늘은 우리 편이 이겼어. 나도 한 골 넣었어. 우와 잘했네. 그 사이 다가온 손녀의 손엔 과학시간에 만든 뭔가가 들려있다. 할머니 오늘은 냄새 없애는 거 만들었어. 발에 뿌리면 냄새가 없어져. 향기도 나. 아빠에게 주려고 해. 할머니도 뿌려 줄까? 손에도 닿아도 괜찮대. 글리세린을 넣었어. 근데 만들 때 좀 쏟았어. 나만 아니고 다른 애들도 다 조금씩 쏟아서 선생님이 닦아주셨어. 아이들 등의 가방을 빼 든다. 꽤나 무겁다. 이 깊은 겨울까지도 몇 개씩 달려있던 플라타너스나뭇잎이 떨어져 인도에 나뒹군다. 아이들은 제 발보다 더 큰 나뭇잎을 찾아 밟는다. 워석버석 소리를 내면서 바스러진다. 그것도 놀이다. 내가 밟은 나뭇잎이 더 커. 아니야, 내 나뭇잎이 더 크고 소리도 컸어.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의 크리스마스트리는 을씨년스럽다. 내 생각을 읽었나 손자가 한 마디 한다. 할머니 밤에 나오면 참 아름다워. 우리집에 있는 것보다 크고 더 많이 반짝거리거든. 밤 10시. 또 울리는 알람. 붓글씨 쓰는 시간. 한 장을 다 쓰면 등줄기에 땀이 느껴진다. 몸쓰는 일보다 더 힘든가 보다. 이 루틴을 올해는 지키려 애쓴다. 토요일 아침 10시. 스포츠센터 수영장. 손녀와 매주 같이 다닌 지 석 달째다. 내가 수영 다녀 보니 부자나 모녀가 같이 오는 게 좋아 보여 며느리에게 권유했다. 바쁜 며느리 대신 내가 손녀를 데리고 다닌다. 대충 씻겨 수영복으로 갈아입히면 제 먼저 들어간다. 노인들이 대부분인 레인에서 수영하면서 힐끔힐끔 손녀를 찾아본다. 발차기도 하고 머리를 물속에 넣었다 뺐다 하는 모습이 그렇게 즐거워 보일 수가 없다. 우리가 수영장에 있는 시간에 남편은 손자를 데리고 축구교실에 가 있다. 힘들지 않냐고 누군가 묻는데 천만의 말씀. 이 즐거움과 고마움을 누릴 수 있을 때 누려야 한다. 애들이 더 크기 전에.

2025-01-08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다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도쿄 변두리의 허름한 이층집. 이른 새벽 노인의 빗질 소리에 깬 주인공은 어슴프레 푸른 창문을 보고 벌떡 일어난다. 이부자리를 개고 양치와 면도를 한 뒤 보랏빛 조명의 테라스에서 키우는 분재에 정성스레 물을 준다. 의식처럼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현관 입구에 가지런히 둔 자동차 열쇠와 카메라를 챙기고, 동전을 몇 개 집어 문을 나서면서 바로 쳐다보는 하늘에 엷은 미소를 짓는다. 집 앞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하나 사서 자동차에 올라 카세트에 올드팝 테이프를 넣고 출근길에 오른다. 중년의 남자, 그는 도쿄 공중화장실 청소부다. 과묵한 성격의 주인공은 화장실 청소부란 직분에 더없이 충실하다. 수많은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정성껏 청소하고 점심땐 공원이나 신사의 벤치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로 점심을 때우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카메라로 촬영한다. 퇴근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목욕탕에서 하루의 피로를 빡빡 씻고, 단골 식당에서 술 한 잔을 곁들여 저녁을 먹고 돌아와 책을 읽다 잠든다. 일주일에 하루는 코인세탁소에서 청소복을 빨고, 헌책방에 들러 책을 사거나, 사진관에 가서 필름을 맡기고, 인화된 사진을 찾고, 또 하나의 필름을 사서 카메라에 넣는다. 철없는 동료청소부와 그의 애인, 화장실에서 만난 아이나 외국인 여성이나 취객, 단골식당 주인이나 또 다른 단골술집의 여사장, 단골 헌책방 여주인, 점심때 공원의 옆 벤치에 앉아 역시 샌드위치를 먹는 여성은 모두 그의 일상의 오브제이며, 그의 하루 루틴은 완벽하다 못해 단단하다. 영화는 그의 이런 일상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어느날 퇴근하니 외삼촌을 찾아온 조카가 계단에 앉아있다. 이제 무슨 사건이 나나보다. 드디어 그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변화가 생기나 보다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조카에게 침실을 내주고 좁은 창고방에서 자는 것 외엔 바뀌는 게 없다. 오히려 조카가 그의 일상에 스며든다. 함께 화장실 청소에 나선 조카는 그와 같이 공원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목욕탕에도 같이 가고, 삼촌의 책을 읽으며 잠든다. 여동생이 조카를 데려가자 끝. 사춘기 소녀 조카의 가출도 그의 일상을 흔들지 못했다. 단 하루 동료청소부가 일을 관두자 두 배 늘어난 일로 피곤한 하루,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우지만 신입이 오자 그의 루틴은 다시 탄성을 찾는다. 이정희 교수가 꼭 보라고 추천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그저 사건 하나 없이 반복되는 주인공의 일상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보다 더 심심한 스토리지만 오히려 울림이 크다. 무겁고 험하고 슬픈 사건들로 넘쳐나는 뉴스를 외면한 지 달포가 다 돼간다. TV에서 뉴스를 피하려니 자연 영화를 찾게 되었고, 지난여름부터 별렀던 영화를 하필 지금 봤다. 주인공의 심심하고 충실한 나날은 그가 정성껏 닦아놓은 화장실의 거울만큼 빛나고 변기만큼 정갈하다. 그의 흑백 사진 속 나뭇잎 같은 무채색의 일상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가를 깨닫게 된다. 비행기 추락 속보가 일요일 아침을 삼켜버린 후 TV에는 슬픔이 넘치니 새해 복 많이 받으란 인사가 송구하다. 소소하되 행복하고 충만하되 무탈한 일상은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202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