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늙은 아키

원래 영리하고 영악하기까지 한 베리는 절대권력 일인자였다. 밥이든 간식이든 산책이든 먼저였다. 그걸 잘 아는 아키는 항상 베리보다 한 발짝 뒤에 있었고, 베리가 먹고 난 후에야 먹는 게 당연한 듯 스스로 이인자를 자처했다. 아키는 그렇게 조용하고 조신하고 양순한 성품이었다. 2년 전 베리가 간 후 아키에게 눈에 띄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혼자 있기를 거부했다. 내가 집을 비운 새 아키가 심한 하울링을 한다는 이웃의 항의 전화에 깜짝 놀랐다. 분리불안 때문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는 꽤 오랫동안 아키와 동행 외출해야 했다. 하울링은 몇 달 뒤 그쳤지만 분리불안은 여전해서 2년이 지난 지금도 껌딱지다. 어디 갔다 들어오면 반드시 안으라며 달려드니 한 손으로 안은 채, 짐을 풀고, 물을 마시고, 냉장고 문을 열어야 한다. 한참 후 내려주면 그제야 몸을 길게 뻗치며 하품하고, 제가 평소 좋아하던 의자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눕는다. 시선은 항시 내게 고정이고 눈은 나를 따라 움직인다. 거실에서 벗어나 제 시야에서 사라지면 벌떡 일어나 따라오니 내 그림자에 진배없다. 예전엔 제 매트에서 혼자서 잘도 자던 아키는 이젠 절대 혼잠하지 않는다. 침대 위 내 발치께에서 잔다. 아무리 밀쳐도 요지부동이다. 때로 몸이 괴로워 안방에서 내쫓으면 방문 앞에서 시위하듯 서성이다가 남편 발에 머리를 묻고 자기도 하지만 흔한 풍경은 아니다. 아키도 많이 늙었다. 13살이 훌쩍 넘었으니 사람으로 치면 80 노인이라 입 주위와 귀 끝은 흰색으로 바뀌었고 등덜미엔 빠진 털이 다시 나지 않아 옷 입혀 가려줘야 할 정도다. 작년 겨울 꼬리에 자그마한 혹이 생겨 수술도 했다. 치석 제거하면서, 이를 4개나 뺀 후부터는 딱딱한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열심히 이를 닦아 주는 데도 며칠 전 또 두 개의 이가 흔들려, 곧 빠질 것 같다. 초롱초롱하던 눈망울은 뿌옇다. 노화로 인한 핵경화증이라 시력엔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언젠간 앞을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걱정만 는다. 노인성 투정도 늘었다. 지난주 남편과 둘이 중국엘 갔다가 5일 만에 왔다. 평소 같으면 반가워 격렬하게 달려들었을 아키가 멀찌감치 앉아서 꼼짝하지 않는다. 쳐다보지도 않고 외면까지 한다. 단단히 삐친 듯, 또는 크게 시위하듯 단식투쟁까지 한다. 돌봐준 며느리에게 얘기했더니 밥도 잘 먹고 잘 놀았다며 전혀 그런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며칠 지난 후에야 노여움이 가셨나 평소대로 돌아왔다. 대신 껌딱지 증세는 더 심해졌다.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면 확인 후 거실의 제 의자로 올라가곤 하는데, 중국행 이후부터는 내 발 아래 의자에 바싹 붙어 앉는다. 방바닥이 딱딱하고 차가워 노인에겐 버거울까 방석을 내줬더니 슬그머니 올라가 몸을 말고 눕는다. 지금도 내가 내려다보며 속삭이듯 이름을 부르니 천천히 고개 들어 동그랗고 뿌연 눈동자로 눈맞춤을 하곤 다시 머리를 가슴속에 말아 넣는다. 며칠 후 3일간 또 집을 비우고 아키는 며느리집으로 보내야 할텐데 어쩌나 심란하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11-12

‘선 넘지 말기’

몇 년째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이 제법 있다. 처음 유튜브에 눈 떴을 때는 지식과 역사 채널을 골라 봤다. 너무 현학적이거나 편파적이고 흥미 본위의 채널이 성향상 맞지 않아 두어 채널만 남기고 빠져나왔다. 대신 어쩌다 보게 되면서 하나둘 늘어난 것이 국제결혼 가족들의 일상 채널이었다. 미국 남성과 한국 여성이 결혼하여 미국 텍사스의 삶을 보여 주는 ‘올리버쌤’은 구독자가 226만이나 되는 참 건강한 채널이다. 미국과 한국의 문화나 제도, 교육방식 등을 비교하기도 한다. 두 딸을 키우면서 집에서는 한국어만 쓰는 부부는 종종 한국에 와서 처가식구들과 한달살이를 한다. 그들은 강아지도 진돗개를 키운다. ‘소피아패밀리’는 그리스 여성과 한국 남성이 결혼하여 한국에서 사람 사는 냄새 풍기며 알콩달콩 사는 일상을 유쾌하게 보여준다. 한국 남편은 커다란 웃음소리가 정겹고, 아름다운 아내는 제법 한국식 농담을 받아넘긴다. 딸 하나에 두 아들이 있는데, 최근 넷째 아이를 가져 구독자들에게서 애국자로 칭송받고 있다. ‘한국 사는 따냐’는 우크라이나 여성이 착한 남편, 너그럽고 이해심 많고 유복한 시댁 식구들의 지지로 아들 하나 낳아 키우며, 신나는 한국살이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처음 구독 시작했을 때는 채 5만이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40만 가까이 구독자가 늘었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쌍둥이 언니가 종종 실감나는 전쟁 상황을 보여 주기도 한다. 지금은 갓 돌 지난 아들 키우는 재미와 우크라이나에서 온 친정엄마와 대부의 먹방 영상이 많다. 몇 개월 전부터 구독 시작한 ‘태국박서방 TV’는 태국 부인과 결혼한 한국 남성의 태국살이 채널이다. 처음 접했을 땐 3만 정도였던 구독자가 그새 10만이 넘어 실버버튼을 받더니 지금은 15만이 훌쩍 넘었다. 태국의 시골에 살면서 허름했던 처갓집을 새로 짓고 가전제품을 하나씩 들여주는 영상이 몇 달 계속되는 사이에 폭발적으로 구독자가 많이 는 것 같았다. 최근에는 인근의 초등학교에 에어컨을 기증하고 설치하여 주는 영상을 보내주더니, 지난주에는 이웃과 함께 김장을 하고 수육을 삶아 나누어 먹으며 훈훈하고 따뜻한 한국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다. 일상 유튜브 채널이라도 민낯의 일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진 않는다. 컨셉을 정해 편집을 거쳐 정제되어 나온 콘텐츠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영상 이면의 삶이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이 들어 신뢰가 간다. 그러므로 부담없이, 미소지으며 보게 되는 것이다. 문득 ‘선 넘지 말기’라는 말이 떠올랐다. ‘선 넘지 말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넘지 말아야 할 물리적 심리적 경계를 지키는 것으로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상대가 불편해하는 행동은 자제하는 매우 이성적이되 이상적인 태도이자 특히 부부와 같은 친밀한 관계일수록 더욱 요구되는 태도가 되겠다. 국제 커플들은 문화와 언어 차이 덕분에 오히려 ‘선 넘지 말기’가 가능하게 되었고, 이들 부부와 그 주변의 가족들이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11-05

여성들의 학습력

은퇴해서도 여기저기서 강의 의뢰를 받는다. 학교에 있을 때도 종종 강연이나 특강도 한 터라 사회 강의가 낯설지 않다. 당시에는 주로 특정한 주제를 의뢰받고 많은 청중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면 지금은 달라졌다. 어떤 기관이나 지자체의 의뢰나 지원을 받아 아카데미나 공부방을 개설해 두고 회원을 모집하는 강의가 대부분이다. 불러 주는 것이 고마워 어디든, 강의료가 얼마든 상관하지 않고 수락하여 가는 편이다. 며칠 전,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 수당정에서 낙빈서원 유교아카데미 강의를 했다. 성균관 주관 유교문화활성화사업으로 공모해 선정된 교육이었다. 매주 1회 4시간씩, 총 10주간의 교육 일정이었다. 나야 2회 총 4시간 정도의 강의만 하면 되지만 수강생들에겐 공부에 대한 보통 열의가 아니면 만만찮을 것 같은 일정과 주제였다. 강의실에 들어가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작년에도 서원 강의를 두어 번 한 적 있는데, 기억엔 거의 모든 수강생들이 남성들이었기에 여기도 당연히 그러리라 지레짐작한 거였다. 두 시간 강의가 지루하다 여길 겨를이 없을 정도로 수업에 열정적이었다. 여성 수강생의 질문 덕에 모처럼 재미있는 강의를 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내가 다닌 강의에는 여성 수강생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났다. 은퇴 후부터 올해까지 5년째 강의하는 경북도민행복대학이 있다. 김천의 경북보건대에서 운영하는 경상북도 지원 사업의 강좌였는데, 매년 1회씩 강의했다. 약 60명의 학습자 중 절반 이상이 여성들이었다. 바쁜 농번기임에도 결석이 많지 않을 정도로 수업에 열성이라는 얘기를 듣고 감동한 적이 있다. 안동의 내방가사전승보존회가 운영하는 안동시 지원사업인 내방가사공부방에도 매 해 몇 차례 특강을 간다. 연령대가 다양한 여성들 20여 명이 넓지 않은 교실에 빼곡하게 앉아계시다가 내가 들어가면 그리도 반기실 수 없다. 90대 어르신부터 50대 비교적 젊은 여성들까지, 안동뿐만 아니라 예천, 청송, 영천, 영주 등 인근 도시에서 원거리 마다하지 않고 참석하는 수강생들이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에 집중하시는지 잠시도 쉬지 않고 한 시간 강의하고 나면 진이 빠질 정도지만 손뼉 치며 호응을 잘해 주셔서 매번 보람을 느끼게 된다. 내가 안동의 공부방에 강의하러 갈 때 함께 가는, 대구의 열혈수강생들이 몇 있었다. 그야말로 내방가사 찐팬들이었다. 이따금 참석하게 되다 보니 내방가사 강의에 늘 목말라하는 분들이었다. 한 달에 한두 번이라도 대구에서 공부하는 방법을 찾자고 상의했다. 6월 안동을 다녀온 다음 주 바로 실행에 옮겼다. 수업 장소를 카페로 정했다. 그 후 이 카페 저 카페 전전하면서 여러 차례 수업했다. 강의 자료 등 수업 준비를 철저히 하여 마치 특별반 학생을 가르치는 것 같은 마음 자세로 강의했다. 수업 전후 식사를 같이하면서 나눈 담소도 내방가사가 주제였다. 이 시대 여성들의 지적 호기심과 탐구가 만만찮으니 더없이 고맙고 반갑다. 노소 구별 없이 수업 내용의 수준에 상관없이 공부하는 이 시대 여성들을 지지한다.

2025-10-30

한국과 중국의 전통 교육 현장을 보면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손주들과 고택프로그램에 참가했다. 한국인성예절교육원에서 해마다 여름방학이 되면, 초중등학생을 포함한 가족들을 대상으로 모집하는 체험프로그램이었다. 작년에 서울의 사촌들과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올랐던지 올해도 참가하고 싶어했다. 한 달여 전쯤 낸 공고를 보고 미리 신청했다. 작년에는 하빈의 육신사 수당정에서, 올해는 달서구의 병암서원에서 이루어졌다. 프로그램명은 ‘선비의 하루’, 약 4시간 정도 소요된다. 첫 시간은 서원의 역사와 서원의 가능에 대한 설명과 함께 서원 탐방을 한다. 자유 복장에 자유로운 수업 분위기가 이후의 수업을 들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두 번 째 시간은 선비복 체험. 선비의 옷인 유복을 입고 선비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배운다. 어린 남자아이는 한복에 쾌자를 입고 복건을 쓰고, 여자아이는 치마저고리에 배씨댕기를 머리에 얹거나 족두리를 쓴다. 어른들은 남녀없이 유복을 입고 유관을 쓴다. 입고 벗기가 쉽지 않지만 한복을 입히면 일단 아이들의 처신이 달라짐을 단번에 알게 된다. 옷을 갖춰 입힌 후 공수를 가르치고 나면 앞선 시간에서와 달리 어느새 남자아이는 의젓하고 여자아이는 조신해진다. 절하는 법도 남녀가 다르다는 설명을 들으며 열심히 배우고 익힌다. 한 아이를 앞자리에 불러서 시범적으로 선비의 일생을 가르친다. 붓, 벼루, 먹, 종이, 문방사우를 곁에 두고, 책가도 병풍을 두른 방에서 열심히 공부한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금의환향할 때 입는 앵삼을 입혀 주기도 한다. 세 번째 시간에는 민화문자도 그리기를 한다. 충효의 의미에 대한 강의를 들은 후, 목판에 한자 ‘충(忠)’과 ‘효(孝)’자가 그려진 문자 그림에 색칠하는 시간이다. 같은 그림판이지만 색칠은 한 것은 제각각인 게 재밌다. 마지막 차 명상 시간에는 차를 마시며 심신을 정화하기도 한다. 네 시간이 순식간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참여자들이 모두 흥미로워한다. 수업 후 나올 때면 아이들은 하나같이 조용하고 음전해졌다. 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모은 자세로 경내를 둘러보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른의 웃는 얼굴을 보게 된다. 며칠 전 중국 복건성의 남평시에 가서 이와 대단히 유사한 광경을 봤다. 남평시는 주자학의 창시자인 주자가 나고 자라, 공부하며 거의 일생을 보낸 곳이다. 현재 그를 배향하는 서원들이 곳곳에 복원돼 있고, 그를 기리는 크고 작은 행사들이 이뤄지는 도시다. 주자의 사상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의미로 정한 시범유치원 행사에 초대받았다. 유치원 곳곳에 배치된 어린 유치원생들이 저마다의 몫을 앙증스러운 모습으로 소화해 내고 있었다. 뜰에서는 차를 재배하여 말리고 덖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무대에서는 각종 기예를 선보이기도 했으며, 마지막에는 차 마시는 모습을 연극처럼 보여주었고, 가장 마지막엔 주자가훈을 외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행사였다. 과장적 분장에 일사불란하게 잘 훈련되어 정돈된 프로그램을 소화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우리와는 좀 다른 체제와 문화의 향기를 느꼈다. 그러나 전통을 익혀 전승하려는 노력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10-22

신라의 베짜기 전통

삼국사기에는 신라시대 여성들이 길쌈 내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3대 유리왕 9년에, 6부를 정하고 나서 이를 두 편으로 나누고, 임금의 두 딸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려 편을 짜게 하였다. 이들 두 편은 7월 16일부터, 매일 새벽에 큰 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시작하여 밤 열 시경에 끝냈다. 한 달이 지나 8월 15일이 되면 길쌈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헤아려서, 이기고 진 편을 가리고,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이긴 편에 사례하였다. 이때 노래와 춤과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였는데, 이 행사를 가배(嘉俳)라고 하였다. 이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는 소리로 ‘회소, 회소!’라고 하였다. 그 소리가 슬프고도 우아하여, 뒷날 사람들이 이 곡에 노랫말을 붙이고, 회소곡(會蘇曲)이라고 하였다.” 가배는 추석의 우리 고유어인데, 이 기사에서 유래한다. 추석에 하는 중요한 행사가 바로 길쌈이었다는 기록이다. 신라시대에는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길쌈을 장려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기록물인 삼국유사에서 여성의 길쌈과 관련한 이야기를 더 찾아보았다. ‘선도산성모’조에는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와서 동국의 첫 번째 임금인 혁거세를 낳았을 것이라고 했고, 하늘나라의 여러 선녀들에게 비단을 짜게 하여 붉은색으로 물들여 관복을 지어 주었다고도 했다. ‘연오랑세오녀조’의 세오녀는 이름부터가 베짜는 여성이다. 동해안의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차례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본래 해와 달의 정령이었기에 기들이 신라를 떠나자 신라에서는 태양과 달이 사라져 빛을 잃고 말았다. 신라의 왕이 급히 일본에 사신을 보내 연오랑과 세오녀의 귀국을 종용했다. 하지만 연오랑은 하늘의 의지로 일본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신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며, 그 대신 세오녀가 짠 비단을 사신에게 주고, “이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태양과 달이 빛을 되찾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사신이 가지고 돌아온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자 태양과 달은 빛을 되찾았다. 신라의 왕은 이 불가사의한 비단을 나라의 보물로 정하고, 하늘에 제사를 드린 장소를 영일현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세오녀는 비단을 짜는 여성이었고, 잃어버린 빛을 찾아준 여성이었다. 이 두 개의 이야기만 봐서도 전통적으로 길쌈, 즉 베짜기는 여성의 신성한 역할이었다. 베 짜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한 여성은 왕녀이거나, 신모이거나, 빛의 정령이었다. 실제로 신라에는 직물 제조와 수공업을 관장하는 모(母)라는 관직이 있었고, 그 우두머리는 여성이었다. 또한 당시 신라는 직물을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는데, 그 유물이 일본에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인간 생활의 기본이 되는 요소인 의식주의 가장 앞선 요소를 담당한 이는 여성이었다. 경주의 동해안 가까이 있는 동네 두산리에는 아직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비단을 짜는 여성들이 있어 두산손명주짜기로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령화와 국가의 무관심 속에서도 전통으로 이어가는 그들을 추석 즈음에 기려본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10-15

득의작(得意作)

몇 달 동안 이런저런 일로 글씨를 쓰지 못했다. 방학 동안 손주들 돌봄교사 노릇하느라, 한국어교사 자격증 막바지여서 과제 제출이며, 기말시험 등으로 밤샘, 문학공간 첫 책 출간으로 또 몇 날 며칠 애썼더니 덜컥 병이 생겼다. 글씨 수업을 빠지기엔 더할 나위 없는 핑곗거리들이었다. 비록 초보이지만 글씨를 쓴다는 건 대단한 집중을 요하는 거였다. 집에서도 한적한 방에 책상을 두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에 자리해야 했다. 그런 나의 얘기를 들으시더니 선생님은 “그러니 서도(書道)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아직 연습단계니 그럴 필요 없다. 밥솥에 밥 안쳐놓고 한 자 쓰고, 국 끓이며 두 자 쓰고, 빨래 돌리며 서너 자 쓰면 된다”고 하셨지만 그 역시 수련이 필요한지 잘 안된다. 그러니 집에서 글씨를 쓰려면 온전히 밤중을 기대야 하고, 그 시간에 다른 일 해야 하니 도통 종이 펼쳐 먹에 붓을 적셔 글씨 쓸 엄두도 짬이 나지 않는다. 이래저래 글씨를 못 쓰고, 아픈 핑계까지 덜컥 생기니 결석한 지 두어 달을 훌쩍 넘겼다. 9월 들자 심기일전, 다시 글씨 쓰자. 이전까진 채본을 써 주셨다. 때론 내가 쓰기 편한 시조를 선하시기도 하고, 또는 남편의 시 일부를 택해 써 주시기도 했다. 이번엔 직접 채본용 글을 골라보라 하셨다. 서실 서가에 가지런한 책들 위에 누워있는 내 수필집 ‘고비에 말을 걸다’가 눈에 띄었다. 내가 쓴 글에서 고르면 애착이 생겨 열심히 연습할까? 거의 10년 전에 낸 책이었고, 그보다 훨씬 전부터 쓴 글이 대부분이어서 읽으니 새삼스럽다. 그러면서 40자 내외의 채본용 글을 골라 표시했다. 책 한 권을 훑다시피 읽고 표시해 둔 곳을 선생님께 내밀었더니, “아이고 자기 글을 고르랬더니 고른 것은 거의 남의 글인데요···.” 빨갛게 표시된 글은 거의 인용한 남의 시구였다. 김춘수 선생님의 ‘수련별곡’, 혹은 황인숙의 ‘바람 부는 날이면’에 동그라미를 쳤다. 실은 나도 놀랐다. 내가 쓴 글에서는 고를 만한 게 없다는 것에.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난 도통 내 글이 재미없었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논문이 그랬다. 박사학위 논문도 부끄러워 최소한으로 출간, 몇 년을 창고에 넣어 묵혔다. 10여 년 지나 수치심이 가신 후에야 꺼내 읽고 수정해서 책으로 엮었다. 수필집도 그랬다. 매 주 써서 신문에 게재하고 그걸 모아 책으로 내도 주위에 돌리기엔 부끄러워 꺼렸다. 앞서의 수필집이 세종나눔도서에, 책도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되자 겨우 쭈뼛거리며 돌릴 정도였다. 결론적으로 나는 내 글과 논문에 흡족한 적이 없었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내 글에서 좋은 글귀 하나 뽑지 못한 것이 증명한다. 득의작(得意作)이라는 말이 있다. 작가가 자신의 뜻이나 의도를 만족스럽게 표현한 작품으로 예술가 생애에서 가장 자신 있게 내놓는 대표작이나 역작을 가리킨다. 화가든 소설가든 자신이 뜻대로 이루어져 만족해하거나 뽐낼 정도로 스스로 만족하거나 자부심을 느끼는 작품이다. 득의작은 무슨, 자부심을 느끼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부끄럽지 않은 경지가 되어도 좋겠다 싶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10-01

파크시티와 로버트 레드포드

지연씨와 두현씨는 내가 미국 유타주 프로보에 있을 때 가장 친했던 부부였다. 자주 안부를 묻고,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 주는 다정하고 상냥한 부부였다. 어느날 지연씨가 한 시간만 가면 예쁜 도시가 있는데 놀러 가자고 했다. 무조건 좋다며 채비없이 나섰다. 프로보는 높은 워새치산맥이 도시의 북쪽에 버티는 도시였는데, 그 산맥을 가로질러 갔다. 가을날의 빛 좋은 산 풍경도 예뻤고, 가는 길 도로에서 마주치는 험한 산줄기, 깊은 계곡, 그 어디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떨어지는 폭포가 있는 참 재미있는 드라이브 코스였다. 내내 감탄하면서 도착한 파크시티는 예상 밖의 별천지였다. 알록달록, 아기자기한 상점과 집들이 중심도로를 따라 즐비해 있었다. 집 모양은 거의 비슷한데 색깔만 달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형형색색의 집들은 모두 리조트였다. 곧 겨울이 닥치면 이 도시는 스키어들로 북적댈 거라고 했다. 아직 겨울이 아닌 평일 도시의 오후는 한산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중심가를 천천히 오르내리면서 도시 구경을 했다. 대부분 기념품 상점이었고, 곳곳에 동상이 있었다. 벤치 옆에 곰이 있고, 조금 더 가면 기념품 가게 옆에 광부의 동상, 또 조금 더 오르면 인디언 추장의 동상이 무심하게 있었다. 박물관이라 적혀 있는 곳을 들어갔다. 원래 이곳이 원주민이 있던 곳이었고, 개척 시대에 은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스키 경기가 여기에서 열렸다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과연 가게에서 나와 눈을 위로 둘러보니 도시를 둘러싼 산에는 온통 스키슬로프가 마치 혈관 같이 드러나 있었고 도시 위로 스키리프트가 전선처럼 빼곡하였다. 지연씨가 더 예쁜 데가 있다며 안내한 곳은 한 리조트였다. 자연친화적인 외관은 전혀 리조트 같지 않았다. 실내를 구경하면서 복도에 걸린 사진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선댄스영화제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었다. 선댄스 영화제라면 그 유명한 미국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창립한 독립영화제인데? 그때부터 나는 지연씨에게 영화배우인 그에 대해 신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실로 지연씨 부부는 탈북해서 미국에 정착하게 된 케이스였기에 할리우드 영화에 대해선 잘 모를 것이었다. 내가 그 배우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의 영화 중에서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몇 번이나 봤는지, ‘업 클로즈 앤 퍼스널’은 매년 학생들에게 영화감상을 시켰다는 둥, 그가 감독으로도 유명해서, ‘흐르는 강물처럼’은 아카데미상도 받았다는 얘기를 쉴 새없이 지껄였다. 그 로버트 레드포드의 유서 깊은 장소에 이렇게 와 있다는 나의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지연씨는 깔깔 웃으면서 나를 숲속의 한 바위 앞으로 안내했다. “그래서 여기 선댄스(SUNDANCE)라고 적혀있군요.” 나는 그 돌 옆에서 감개무량한 포즈를 취했다. 며칠 전 로버트 레드포드가 유타주 선댄스 그의 집에서 영면했다는 뉴스를 들으니 8년 전 그날이 문득 생각났다. 그를 추모하고 싶어 넷플릭스로 ‘흐르는 강물처럼’과 ‘밤에 우리 영혼은’을 다시 보았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9-24

이명(耳鳴)

처음엔 늦여름의 매미가 요란스럽게 우는 줄 알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길래 밤중에 베란다로 나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귀 기울여 보았다. 우리 집 가까이에는 매미가 앉아 울 만한 큰 나무가 없으니 저 건넛산에서 우는 건가? 한밤중에 느닷없이 이상한 짓을 하는 날 보고 남편이 왜 그러냐고 묻는다. 매미소리가 크지 않냐고 되물으니 자기에겐 안 들린다고 했다. 자기에겐 당연히 안 들리겠지라며 웃었다. 귀가 어두운 남편이다. 그런데 그 소리가 언제 어디서나 들리는 걸 알아차리고, 아 이것이 이명이라는 거구나 생각해 낸 건, 그러고도 한참 후였다. 참으로 기이하다. 바깥 어디에서도 나지 않는 소리를, 그래서 남들은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나 혼자만 듣는다고? 이명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외부로부터의 청각적인 자극이 없는 상황에서 귀에서 들리는 소음에 대한 ‘주관적 느낌’이란다. 느낌이 아니고 진짜로 들리는데? 조용히 나 혼자 있으면 더 크게 들린다. 치르르르 수백 마리 매미떼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솨아아아 키 높은 대나무들이 꽉 차 있는 대숲에 큰바람이 지나면서 내는 댓잎소리 같기도 하다. 우렁우렁우렁 깊은 골짜기 좁고 높은 계곡에서 떨어지는 폭포소리 같기도 하고, 촤르르르 고운 모래 아닌, 오랜 파도에 풍화된 작고 동글돌글한 몽돌이 깔린 바닷가에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빠지며 나는 파도소리로도 들린다. 처럭처럭 고요한 밤 창밖에서 들리는 제법 굵고 먼 빗줄기 소리 같기도 하다. 이 모두 자연에서 나는 소리로 들리니 어쩌면 집중력에도 좋고 숙면에도 좋다는 백색소음일 수도 있나 생각해 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바다나 산이나 시골에 가서 찾아 듣는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깨어있는 동안엔 항상 귓속에 쟁쟁하니 소음도 이런 소음이 없다. 시끄러워 괴롭긴 해도 머리가 아프거나 하진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바깥에 나가 누구랑 만나 얘기하고 있거나, 운전 중 라디오 소리에 귀 기울이면 이명을 잊기도 한다. 집에선 최근 잘 켜지도 않았던 TV를 크게 틀어 놓게 된다. 올여름, 손주 둘 돌보며 마음은 즐거웠으되 몸은 지쳤던지 어지럼증이 도져서 병원을 찾았다. 누웠다 일어나면 눈앞이 팽하고 돌고 천장이 춤을 췄다. 20여 년 전 급성 이석증으로 큰 고생을 한 적이 있어, 당연히 그 때문인 줄 알았다. 평형검사, 뇌파검사 결과, 전정기관의 이상이 아니었다. 극도의 피로와 신체적 스트레스 때문에도 어지럼증이 생긴다니 약 먹고 좀 쉬면 나을 줄 알았는데 이명이 덮쳐올 줄이야···. 인터넷을 뒤져 얻은 정보들은 비관적이라 더 걱정스럽다. 이명은 치료한다는 개념보다는 관리한다는 개념이 더 맞는 질병이란다. 이겨내고 극복하려고 하기보다는 이명으로 인한 생활의 불편과 지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명에 덜 집중하고 이명을 무시하는 것이 궁극의 관리란다. 믿기지 않지만 나을 수 없다는 얘기 아닌가? 평생 껴안고 가야 한다면 백색소음이라며 달래며 익숙해지는 방법을 찾아야 하나. 그러나 현재는 괴롭고도 괴로운 소음이다. 참 기이한 병도 다 있다 싶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9-17

찐 옥수수를 먹으며

여름이 되면 먹거리들이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찐 옥수수다. 요즘이야 사철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간식거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쫀득쫀득하고 부드럽고 찰진 옥수수는 아무래도 여름에 나는 제철 옥수수다. 남편도 좋아해서 한 봉다리씩 사서 자주 먹곤 한다. 옥수수를 좋아한다는 내 말을 듣고 유 선생님께서는 풍각장에서 파는 찐 옥수수가 참 맛있던데 하시며 사다 줄 걸 하셨다. 그러고 한참이 지난 며칠 전 저녁 유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선생님 내일 풍각장날인데 찐 옥수수 사다 드릴게요.“ 아이고 언뜻 지나가는 말처럼 했던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새기셨던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장터까지 가서 사오신 뜨거운 찐 옥수수를 넘치게 가져다 주셨다. 선생님의 뜨거운 사랑같은 찐 옥수수를 먹으며 옥수수에 대한 몇 가지 기억을 소환해 낸다. 초등학교 땐 학교급식으로 옥수수죽, 옥수수빵을 나눠주었다. 요즘같이 모든 학생들이 먹는 급식이 아니라 가난해서 도시락을 못 싸오는 아이들에게만 주는 급식이었다. 나는 무슨 연유인진 모르겠는데, 4학년부터 6학년까지 줄곧 급식당번을 했다. 4학년 때는 옥수수죽이었다. 점심 시간이 되면 양호실로 달려가 큰 양동이에 받아온 옥수수죽을 빈 도시락을 들고 온 아이들에게 펴 담아 주었다. 가난했던 시절, 70명이 넘는 학생 중 유독 더 가난하여 도시락도 챙겨오지 못한 아이들이 꽤 되었다. 제법 커다란 양동이 가득 받아온 옥수수죽을 한 도시락씩 담아 주면 금세 바닥을 보이곤 했다. 옥수수죽을 배급하는 사이 도시락을 싸온 아이들은 이미 거의 도시락을 먹은 상태였고, 그동안 이 아이들은 쫄쫄 굶은 배를 움켜쥐고 밥 먹는 아이들을 지켜만 보고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싸온 도시락을 먹지 못한 채 급식 배급이라는 중요한 임무 수행 중이었다. 그 당시 내가 맡은 일이 하나는 더 있었다. 소소한 학급 일상을 적는 학습일지를 쓰는 것이었다. 매일의 학급일지에는 ‘착한 일 한 사람’, ‘나쁜 짓 한 사람’을 적는 난도 있었다. 이따금 나는 ‘착한 일 한 사람’ 난에 내 이름을 적고 싶어,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 친구에게 내 도시락을 주고, 대신 나는 옥수수죽을 떠먹기도 하는 앙큼한 짓을 하곤 했다. 가끔은 친한 친구에게 도시락과 옥수수죽을 바꿔 먹으면 이름을 올려주겠다며 꼬드기기도 했다. 옥수수 급식은 해마다 바뀌었다. 5학년 때는 옥수수로 만든 찐빵이었고, 6학년 때는 빵틀에 구운 옥수수빵이었다. 해마다 조금씩 나아진 것 같기도 하지만 가장 맛있었던 것은 옥수수죽이었고, 찐빵은 별로였다. 내가 3년을 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양호실 선생님과 꽤나 친해졌나 보았다. 가끔 양호 선생님께서는 수업 후에 양호실에 들르라고 말씀하셨고, 집에 가지고 가 식구들과 나눠 먹으라시며 남은 빵을 가득 싸 주시기도 했다. 따로 넣을 곳이 마땅찮으면 책가방의 책을 빼내 신발주머니에 넣거나 끈으로 묶어 주시고, 가방 가득 빵을 넣어주셨다. 이렇게 받아온 빵은 엄마에겐 좋은 요깃거리였다며 엄마는 회상하곤 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9-10

생색내기

서울 아들네가 방학이라 며칠 내려오겠다고 했다. 광복절 끼워 2박 3일 연휴가 가능해서라고 했다. 두 번의 명절, 두 번의 방학, 그리고 어린이날 연휴가 길면 오기도 해도, 많아야 1년에 다섯 번 정도밖에 못 만나는 그리운 손녀들이었다. 그날부터 몸도 마음도 분주해진다. 가장 먼저 할 일은 2박 3일의 스케줄을 잡는 것. 마침 8월 15일과 그 다음날이 큰손녀와 큰아들 생일이니 합동 생일파티를 하면 되겠다 싶었다. 대구 애들과 합하면 10식구이니 움직이는 일이 만만찮다. 집에서 간단히 파티 준비해야지. 마침 집에 와 있는 손주 둘과 같이 생파 이벤트를 의논했다. 며느리들에게 계획을 알렸더니 모두들 손사래를 친다. 더위에 절대 고생하지 마시라. 허무하게도 생일파티는 취소, 외식으로 결정이 났다. 집에서 가까운 뷔페를 예약하고, 또 볼링을 치기로 했다. 대신 케이크커팅은 집에서 하자. 둘쨋날 스케줄은 남편이 제안했다. 경주 미술관 투어를 하자. 경주예술의전당에서 ‘근현대 4인의 거장전’, 오아르미술관에서 무라카미 타카시의 ‘해피 플라워’를 보면 손녀들이 좋아할 거다. 경주문화관의 ‘고흐전’도 보자고 결정했다. 가장 힘들고 고된 일은 손님맞이 청소다. 가장 먼저 이불 빨래를 하고, 방 청소하기, 주방도 정리 좀 해 두어야 오랜만에 보는 며느리에게 책잡히지 않지. 화장실 청소는 맨 나중에 하자. 작년에 쓰고 그냥 넣어두었던 까슬한 여름용 차렵이불을 꺼내 빨았다. 빨다 보니 우리가 쓰던 이불과 베갯잇도 빨아야지 싶어 모두 내어 빨고, 건조하고, 햇볕에 바싹 말리고, 속통도 건조대에 걸쳐 말리고 소독했다. 네 개의 방 중 정작 남편과 내가 쓰는 방은 거실과 안방뿐이다. 그러나 10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모이면 안 쓰던 방도 침실로 사용해야 한다. 책방의 먼지부터 깨끗이 턴다. 큰아들 내외가 특히 그 방을 좋아하니 걸레질도 꼼꼼히 한다. 방학 중 손주들이 아지트로 꾸민 뒷방도 양해를 구해 잠시 철거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네 명의 손주들이 합심해서 또다시 아지트로 꾸밀지언정···. 엉망진창 어질러진 컴퓨터방도 손대야 했다. 창틀의 오래 묵은 먼지까지 훔치고 닦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아 난 왜 평소에 털고 닦고 걸레질하는 습관이 안돼 있을까 자책한다. 다시는 이렇게 먼지 쌓아두지 말고 평소 청소 습관을 길러야지 아주 잠시 결심하지만 난 날 믿지 못한다.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 뻔하다. 연닷새 집안일을 했더니 거의 탈진 지경이었다. 결국 화장실 청소를 제때 못하겠다 싶었다. 내가 이불 빨고 청소하고 주방 정리하며 부산을 떨어도 안마의자에 앉아 책 읽고 TV 보는 남편에게 화장실 청소를 부탁했다. 웬일로 남편은 벌떡 일어나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며 화장실로 갔다. 락스와 솔을 찾는 남편에게 과탄산소다를 가져다주며 뜨거운 물을 쓰라고 일러주고 안방으로 가 누웠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았다. 서울 애들이 곧 도착한다는 전화에 잠에서 깼다. 거의 동시에 대구 손주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 왔어요.” 남편은 막 안방 화장실 청소를 마친 모양이었다. “건아···. 화장실 구경해 봐···. 할아버지가 깨끗하게 청소했어.” 화장실 청소한 생색을 저리도 내고 싶은가 보다. 슬그머니 웃음.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9-03

조손공감(祖孫共感)

“아이 워즈 어 고스트 우아 워즈 얼론 어두워진 앞길 속에 아이 르브드 두 라이브즈, 트라이 투 플레이 보스 사이즈(I was a ghost, I was alone 어두워진 앞길 속에I lived two lives, tried to play both sides)”. ‘케이팝데몬헌터스(케데헌)’의 노래에 푹 빠진 손녀의 공책이다, 이렇게 노래 가사를 한글로 적어 보면서 노래한다. 무슨 뜻인제 아느냐고 물으니 모른다며 해맑게 대답하는 손녀. 제 딴에는 노래한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읽기에 급급한 듯하니 귀엽고도 우습다. 이 노래는 애니메이션 ‘케데헌’의 OST ‘골든(Golden)’으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전 세계적 인기를 얻었다는데 우리 손녀까지도 이렇게 열광(?)하니 과연 맞나보다. 이 외에도 여러 곡이 더 있다. 손녀가 “You‘re my soda pop, my little soda pop“이라고 ‘소다팝’을 흥얼거릴 때면 옆에 있던 나와 손자까지도 같이 따라 할 정도로 중독성 있는 멜로디니 참 인기가 있을 수 밖에 없겠다 싶다. 지난달이었다. 손자가 ‘케데헌’을 봤느냐고 물었고, 그게 뭐냐 되물었더니 자기는 세 번이나 봤다고 자랑하면서 TV로 넥플릭스를 켜서 같이 보자고 했다. 애니메이션이라 시큰둥했지만 장면 장면을 가리키며 워낙 아는 체하길래 대충 보는 척을 했다. 케이팝을 부르는 세 명의 걸그룹이 악귀를 잡는 능력으로 귀마인 사자보이스라는 남자 그룹을 물리친다는 내용이었다.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한국이라는 것이 내 흥미를 끌었다. 거리의 간판이 한글로 쓰였고, 서울의 잠실 올림픽경기장, 삼성역 전광판, 북촌 한옥마을, 낙산공원과 남산타워, 명동 등이 배경으로 등장해서 서울시장이 ‘케데헌’ 제작진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뉴스를 접한 바는 있었는데, 과연 그랬다. 목욕탕과 한의원 등도 등장하니 K-컬처를 제대로 홍보하고 있는 셈이다. 내용은 그렇다 치고 배경이 흥미로워 자세히 보게 되는 애니메이션이었다. OST에는 또 관심 없었다가 손녀 덕분에 흥얼거리게 되니 참 이렇게 조손이 공감하는 접점이 있기도 하나 보다. TV를 거의 보지 않는 나도 월요일 밤의 ‘가요무대’는 챙겨본다. 내가 이렇게 늙어가는구나 생각하면서 보는 프로그램이다. 어제 ‘가요무대’를 볼 때 손녀는 옆에서 공책을 보며 ‘케데헌’의 소다팝을 흥얼거리고, 손자는 과학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내가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니 애들은 하던 짓을 멈추고 나와 TV를 번갈아보며 이런 표정을 짓는다. 할머니가 노래를 하네? 손자가 책을 던지고 일어나 노래에 맞춰 설렁설렁 춤추는 시늉을 하자 손녀와 나도 일어나 서로 안고 빙빙 돌았다. 조손공감이 이렇게도 가능하구나. 아이들에게 노래방에 한 번 가자고 했더니 노래방이 뭐야? 되묻는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번 방학 버킷리스트 하나 더 추가한다. 노래방 가서 각자 좋아하는 노래 목청껏 불러보기. 점수에 따라 내기도 하면 재미있어 하겠지.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8-20

방학을 방학답게!

평소 손주들의 하교를 친외할머니가 번갈아 가면서 도왔다. 정한 시간에 학교 돌봄교실에 가서 애들을 마중하고, 약간의 간식을 먹이며 학원에 데려다주었다. 방학이 되면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누군가는 종일 집에서 돌봐주고 애들은 방학 내내 학원 뺑뺑이를 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 돌봄교실에 보낼 수밖에 없다. 3학년인 손자는 그렇게 2년, 4번의 방학을 보냈다. 방학이 되어도 학교엘 가야 하니 이게 무슨 방학이야 툴툴 볼멘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안쓰러워 영화관엘 데려가는 일탈을 감행하면 그렇게나 좋아했다. 7월, 여름방학이 다가오자 며느리는 아이들의 방학 중 스케줄을 짜느라 몇 날 며칠 골머리를 앓는 것 같았다. 도리없이 돌봄교실과 방과 후 수업을 선택할 것이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학원 순례. 손주들은 올 여름방학을 또 그렇게 보낼 게 뻔했다. 이번엔 내가 며칠을 고민한 후 통 큰 결단을 해 아들 내외에게 알렸다. 이번 방학엔 애들에게 방학을 방학답게 누리게 해주자. 돌봄교실도 방과 후 수업도 신청하지 말고 다니던 학원도 최소화해라. 예전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 시골 외갓집, 이모집에 가서 한여름을 보냈듯이, 아예 할머니집에서 방학을 지내도록 해보자. 꼭 다녀야 할 학원은 직접 데려다줄게. 의외로 선선히 내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평소 세 군데 학원을 한 곳으로 줄이는 용단도 내렸다. 난 나대로 애들과 함께 할 방학 버킷리스트를 열심히 짰다. ‘동굴 탐험’, ‘고양이 카페가기’, ‘선비체험’, ‘미술관 가기’, ‘마술 배우기’, ‘대구시티투어버스 타기’ 등등. 그런데 예상보다 빨리, 어느 날 밤 두 아이가 짐을 잔뜩 챙겨들고 예고없이 들이닥쳤다. 그렇게 아이들의 할머니집 방학살이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에게도 방학 중 버킷리스트를 메모해보라고 했다. 손자는 ‘시내 가서 놀기’, ‘음식 만들어 먹기’, ‘그냥 책읽기’, ‘매미잡기’, ‘할머니와 글씨연습’, ‘놀기 놀기 놀기’. 손녀는 ‘바다에 가서 해뜨는 모습 보며 높이뛰기’, ‘아지트 만들기’, ‘딱 하루 뒹굴거리기’. 방학 중 하루 일과표도 셋이 머리 맞대고 같이 짰다. 7시 반에 일어나고, 8시에 아침 먹고, 11시에 EBS 보기, 9시 반에 자기. 그리고 하루 한 시간 정도 공부 시간을 상의하고 정했다. 그 이외의 시간은 맘대로 하라고 했더니 ‘놀기 놀기 놀기’로 도배를 했다. 그래 그래 그러자. 방학이잖아... 크게 프린트해서 벽에 붙여두었다. 방학이 두 주나 지났다. 그 사이 스파게티와 또띠야피자를 만들어 먹었고, 뒷방은 아지트로 내줬다. 고양이카페에도 가봤다. 지난 토요일엔 벌레잡기를 대신해 예천곤충체험관엘 다녀왔다. 예전부터 알고 지낸 마술사와 약속을 잡아, 오늘 카페에서 두 시간 남짓 마술을 보고 배웠다. 집에 오자마자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마술쇼를 펼치고, 손녀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기부터 썼다. 이렇게 버킷리스트는 하나씩 체크되는데, 하루일과표는 절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아침엔 늦잠이 일쑤고, 놀기 시간이 아니어도 놀고 공부시간에도 논다. 뭐 어때 봐 준다. 방학이니까…. 손자는 할아버지와 한 침대에서, 손녀는 내 품에 안겨서 잠드는 행복은 덤이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8-13

심폐소생술 교육

70년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여학생도 교련 교육을 받았다. 남학생들은 얼룩무늬의 특별히 제작된 복장이 따로 있었으나 우리 여학생들은 체육복을 입고 교련을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식 제식훈련을 하고 열병식 같은 것도 했다. 대학교에서도 흰 바지에 보라색 티셔츠를 입고 적십자가 새겨진 흰 응급가방을 메고 열병식을 했다. 총검술을 배우는 남학생과 달리 여학생의 경우 응급처치·붕대법·간호법 등을 배웠다. 유사시에 여학생을 간호인력으로 지원한다는 가정이었을 것이나 학생으로서는 정말 말할 수 없는 곤욕이었다. 불평만큼이나 당시 정부에 대한 반감은 비례적으로 컸다. 응급처치법은 몇몇 학생들을 뽑아 시범적으로 가르쳤는데 그 학생들이 인공호흡법을 시범하면서 질색했던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난 겉옷을 벗어 두 개의 막대에 걸어 응급용 들것을 만든 시범을 한 기억이 있다. 그래도 그때 배운 붕대매듭법만은 지금도 요긴하게 쓰긴 한다. 교련은 일제강점기에도, 광복 후에도 실시하였다고 하며, 1950년대에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다가 60년대 말부터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엄연한 필수 교과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의 학생 대상 군사교육이었던 셈인데, 더러 개그 프로에서 그 시절을 풍자하거나 추억하는 소재로 소비되는 걸 보면 씁쓸하기 짝이 없다. 최근 들어 개인적으로나 공익적으로도 요긴한 응급처치법 중에 심폐소생술에 관심을 가졌다. 40여 년 전 교련 시간에도 배운 적이 없었다. 대학 재직 중에 이따금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특강이 몇 번 있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배울 기회를 놓쳤다. 일상적으로 위험에 노출돼 있는 요즘, 심폐소생술은 필수적으로 배워 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대구 팔공산 기슭에 안전테마파크가 있어 손주들과 가끔 놀기 삼아 가는데, 그곳에서 대구시응급의료지원단을 찾아보라고 들었다. 홈페이지 상단에 심폐소생술 교육 신청을 할 수 있는 사이트가 잘 보이게 있었다. 팝업창에는 대구 심정지 환자 수, 심정지 환자의 발생 장소를 가르쳐주는 그래프가 그려져 있어 경각심을 준다. 2023년 기준 심정지 환자 수가 1113명, 심정지 환자의 발생 장소 중 가장 많은 곳이 집(68.3%)이라고 하니,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배워 두어야 할 심폐소생술이었다. 첫 번째 신청 시에는 집 가까운 수성보건소 교육은 신청 마감이었다. 나와 같은 교육 희망자가 많은가 보았다. 매월 한 달 전에 신청자를 모집한다는 걸 알고, 미리 달력에 표시해 두었다가 6월 첫날 신청하고, 지난 7월 23일, 수성보건소에서 2시간의 기본 교육을 받았다. 20명 가까운 교육신청자 중엔 유치원 교사나 아파트 관리원 같은 필수 교육이수자도 있었다. 가슴압박소생술과 자동심장충격기 사용을 실습했다. 내친김에 7월 1일엔 8월의 심화1과정을 신청해 두었고, 8월 첫 주엔 9월의 심화2과정을 신청할 작정이다. 과정의 차이 유무는 모르겠으나 일단 배워두면 스스로 든든할 것 같아서이다. 손주에게 자랑했더니 수영 시간에 모두 배웠다면서 가슴압박소생술과 자동심장충격기 사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손주와 종종 복습하며 몸에 익힐 생각이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8-06

오대산 상원사 관대걸이

697년 신라 효소왕 때였다. 망덕사에서 낙성회가 열려 왕이 친히 가서 공양하였다. 그때 비파암에서 왔다는 초라한 모습의 스님이 재에 참석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왕은 내키지 않았지만 말석에 앉히라고 명했다. 재가 끝나갈 즈음, 왕은 스님에게 놀리듯이 말했다. “돌아가서는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공양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하지 말라.” 그 말을 들은 스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왕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진신 석가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스님은 몸을 솟구쳐 하늘로 날아 사라졌다. 왕은 놀랍고도 부끄럽고 두려워 스님이 간 쪽을 향해서 절했다. 그가 간 남산을 찾아보게 하니 바위 위에 지팡이와 바리때가 있었다. 스님이 원래 계셨다는 암자엔 석가사를 창건하고, 그의 자취가 없어진 곳엔 불무사를 지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쓴 일연은 이와 비슷한 예화를 인용했다. 삼장법사가 왕을 초대한 행사에 초라한 행색을 하고 갔을 때는 문지기가 막더니 좋은 옷을 빌려입고 가자 막지 않았다. 자리에 앉고 음식을 내어오자 법사는 음식을 옷에게 먹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내가 초라한 행색일 때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더니 이 옷을 입고 들어오자 이 자리를 허락하니 옷 덕분이 아니겠소. 그러니 옷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마땅하지 않겠소.” 삼국유사에는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 관음보살들이 몸을 바꾸어 인간에게 감응한 기적의 이야기가 매우 많다. ‘부처님을 몰라보는 어리석은 왕과 모습을 감춘 부처님 이야기’ 화소(話素)는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지난 일요일, 청계사 108기도성지순례로 오대산 상원사에 가서 이 이야기 화소를 다시 만났다. 신라왕이 아니라 조선의 왕 이야기였다. 조카인 단종을 죽인 세조는 꿈에 나타난 단종 모가 뱉은 침 자국마다 종기가 났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 전국의 온천과 맑은 계곡을 찾았는데 오대산 월정사를 찾았고 상원사 물 맑은 계곡에서도 몸을 씻었다고 했다. 왕은 종기 가득한 등을 보이기 싫어, 신하들도 물리치고 혼자 몸을 씻었다. 마침 계곡에서 놀고 있는 동자승에게 등을 씻어달라 부탁하였다. 다 씻고 나서 세조는 동자승에게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 주었다는 말은 하지 마라”고 말하자 동자승은 “어디 가서 문수보살이 직접 등을 씻어 주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말한 후,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세조의 종기는 씻은 듯이 나았다. 현신한 문수동자에 감복한 세조는 화공을 불러, 기억을 더듬어 문수동자상을 그리게 하였고, 문수동자상을 조각하게 하였다. 이것이 상원사 문수전에 모셔져 있는 국보 목조문수동자좌상이라고 한다. 상원사 입구에는 세조가 목욕을 위해 의관을 벗어 걸쳐두었다는 “관대걸이”가 돌로 만들어져 있는데 세월의 이끼가 내려앉아 있다. 이야기가 역사로 만들어진 현장이다.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5만 진신이 머무는 성산이기도 하니 오랜 세월이 흘러도 불심 깊은 자들에게는 숱한 기적이 재생산되는 산이기도 하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7-23

곤혹스러운 질문

우리 한글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과학적이고 쉬운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이 순식간에 글자의 원리를 깨닫고 읽어내는 것을 볼 때이다. 손주들이 글눈을 뜰 때는 주로 간판을 읽었다. 유치원을 오갈 때, 신호등 앞에서 정차해 있으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글자를 가리키며 읽게 하고, 잘못 읽으면 바로잡아 주는 식이었다. 좀더 크자 움직이는 차에서 손자와 손녀는 간판을 읽되 게임을 하곤 한다. 간판의 글자를 거꾸로 읽거나, 받침 없이 읽는 내기를 하고, 그렇게 읽어낸 소리가 우스운지 깔깔댄다. 무의미한 소리가 재미있는지 더 많은 간판이나 글자를 읽어내려 겨룬다. 몇 자 안되는 간판보다 움직이는 버스나 택시의 광고 문구를 먼저 찾아 읽는 게임을 하더니, 요즘엔 현수막의 긴 문장이나 광고 문구를 찾아 읽는 식의 게임으로 발전한 것을 본다. 그럴 때 애들 눈에 포착된 현수막은 대체로 정당 현수막이어서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대부분의 광고 현수막은 일정한 장소에 설치된 현수막 게첨대에 있어서 아이들 눈에는 포착이 안되는 것 같았다. 대신 정당 현수막은 대부분 교차로의 사방에 불법적으로 게시되어 있어 정차할 때마다 눈에 잘 띄는 게 문제였다. 지난 4월 선거 때에는 난무하던 그 많은 현수막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현수막의 수와 양뿐 아니라 엄청나게 선정적인 내용엔 기함할 정도였다. 작년 12월부터 상호 비방 현수막이 덕지덕지 붙었었고, 선거 기간엔 무법천지 현수막으로 도배되었다. 선거라서 참아주자 했더니 선거도 끝난 최근엔 또 다른 내용, 서로 다른 정당을 비방하는 현수막이 교차로마다 걸려있어 눈살을 찡그리게 한다. 문제는 그걸 읽는 눈이 저 어리고 해맑은 아이들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어제 본 현수막, 그 중에서도 많이 순화한 현수막 하나를 예로 들어본다. ‘부적격·무능력·부도덕 장관 임명 반대 국민 눈높이로 송곳 검증하겠습니다.’를 단숨에 읽던 손녀가 어김없이 묻는다. “할머니 부적격은 뭐야? 무능력은 뭐야? 부도덕은 뭐야?” 단어 설명을 예를 들어 대강 해 주니 이해가 되었던지 “그러면 왜 그런 사람을 장관에 임명한대?” 송곳 검증이 아니라 송곳 질문을 해댄다. 이런 해맑은 질문에 현명하고 깔끔하게 대답해 낼 할머니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고 싶다. 나는 대강 얼버무리면서 마침 바뀐 신호등에 고마워하며 자동차의 엑셀에 화난 발을 올린다. 정당 현수막은 읍면동에 2개씩만, 어린이보호구역과 소방시설 주면은 설치 금지, 보행자나 차량 운전자의 시야를 가릴 우려 있는 교차로, 횡단보도, 버스정류장엔 몇 미터 이상 높이 설치해야 한다지만 이 법조차도 눈가리고 야옹이다. 디지털 시대, 얼마나 좋은 모바일 매체가 많은가. 이런 시대에 저런 구닥다리 정치광고를 하다니 참으로 한심한 국회요 정당이다. 정치 혐오 일으키지 않는 현명한 국회나 정당은 애당초 글렀나 싶다. 흉물스러운 현수막 게시하는 정당이나 국회의원 낙선운동을 한다면 없어질까. 글눈 뜬 아이들에게서 곤혹스러운 질문을 받고 싶지 않은 이 할미의 심정을 누가 알아주려나. 슬픈 나라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7-16

‘드래곤 길들이기’, 그리고 OSMU

더워도 너무 덥다. 에어컨은 며칠째 24시간 풀가동 중이고 바깥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무더운 날 범보다 무서운 손님이 온단다. 모 방송국에서 남편을 인터뷰한다고 연락이 왔길래 집으로 오라고 했단다. 허걱 기가 막혔지만 대처해야 했다. 궁리 끝에 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난 집에서 나가 있기로 마음먹었으며 남편에게도 단단히 일렀다. 몇 시간을 촬영할 것인진 모르겠으나 그동안에는 소음 때문에 에어컨은 반드시 꺼야 할 것이고, 난 방안에 숨죽이고 있거나, 옷을 대강이라도 차려입고 그들을 접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신 청소를 그어느 때보다 꼼꼼히 해두고, 촬영할 방도 채비해 두었다. 몇 가지 과일을 정갈하게 썰어 래핑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음료도 두어 가지 준비해 두었다. 식탁에 컵과 포크를 몇 개 가지런히 내어두고는 집을 나섰다. 남편이 어디 갈 거냐고 묻길래 가까운 영화관에 가서 영화나 한 편 봐야겠다고 했다. 차에 시동을 건 채 현재 개봉영화 검색을 했다. 내 취향의 영화는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나마 지금 가서 바로 볼 수 있는 영화가 딱 하나 있어 다행이었다. ‘드래곤 길들이기’, 장르는 판타지, 액션, 모험. 평소 같았으면 절대 보지 않을 것이었으나 선택지가 없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끊고, 팝콘과 제로콜라 사들고 영화관에 들어갔다. 그래 난 지금 시원한 곳에서 다만 시간 죽이러 온 것일 뿐이야. 재미없으면 자면 되지. 나 빼고 두 명의 관객이 더 있었으니 영화관은 적막했다. 그러나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고대의 전사들과 기괴한 드래곤들과 싸우느라 시끄러웠다. 고대의 시간과 장소, 험준한 버크섬에는 바이킹들이 산다. 그들은 그저 북유럽인만이 아니다. 전세계 여러 곳에서 온 종족들이 같이 산다고 했다. 심지어 아프리카와 극동에서 온 사람도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이들 바이킹은 그들을 괴롭히는 드래곤들과 철천지원수였다. 수시로 출몰하는 드래곤들과 싸워 죽고 죽이거나, 드래곤의 둥지를 퇴치하려 배 타고 원정을 가기도 한다. 싸워 이기는 자만이 살 수 있고, 이겨서 영웅이 되는 것만이 존중받는, 전쟁이 곧 삶이자 생활이었고 아이들도 그렇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원수인 드래곤을 길들이고 친구로 삼는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 아닌 함께 사는 방법을 찾게 된다는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울림은 컸다. 맞다. 싸움보다는 당연히 평화지. 멋지고 훌륭한 CG 화면도 몰입도를 높였다. 어라 괜찮은데 하는 생각에 깬 채로 두 시간 동안 영화를 즐겼다. 이 영화 뭐지 하는 생각에 검색해 보았다. 과연 ‘드래곤 길들이기’는 유명한 OSMU 콘텐츠였다. 영국의 여성 소설가인 크레시다 코웰의 판타지 아동문학 소설 ‘드래곤 길들이기’가 원작이다. ‘해리포터’의 조앤 롤링도 영국인인데···. 2003년부터 2015년까지 총 12권의 소설로 나왔고 2010년부터는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3편까지 제작돼 전 세계적으로 흥행했으며 TV 시리즈, 그래픽 노블, 테마파크 어트랙션 등 다양한 미디어로도 확장되었다고 했다.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의 실사판인 셈이다. 한 작가의 상상력이 수십 년에 걸쳐 수천만의 세계인에게 감동을 준 것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우리는 이런 콘텐츠를 만들 수 없으려나 생각이 깊어진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7-09

영묘사를 찾다

영묘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처음 신라에 불법을 전하겠다는 아도에게 그의 어머니 고도령이 일러 준 칠처가람 중의 하나일 정도로 중요한 절이었다. “신라에는 부처 이전에 이미 일곱 군데의 절터가 있다.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사천왕사, 담엄사이며, 불법의 물결이 길이 흐를 곳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하고 선양하면 석존의 제사가 동방으로 향해올 것이다.” 영묘사는 선덕여왕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선덕여왕이 창건했을 뿐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첫째는 ‘선덕왕지기삼사’ 에피소드다. 어느 겨울날 영묘사 옥문지에 개구리가 많이 모여 삼사일을 울었다. 겨울에 개구리가 우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듣자마자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각간 알천과 필탄은 정병 2천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으로 가라. 그곳에 적병이 숨어있을 것이다.” 여왕의 지시로 여근곡에 숨어있던 백제 군사 5백 명을 모두 없앨 수 있었다.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의 하나로 거론되는 일화다. 또 하나는 ‘지귀설화’다. 선덕여왕은 영묘사(靈廟寺)에 자주 행차하였다.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윗대 조령과 당시 삼국전쟁의 영령들을 모신 절이기 때문이었다. 혜공이라는 신이한 능력을 가진 스님이 영묘사의 화재를 미리 알고 새끼줄을 가져와 금당과 좌우 경루, 남문의 회랑에 둘러 묶고 3일 후에 풀라고 당부한다. 3일 뒤 선덕여왕이 행차하시고, 지귀의 가슴에서 불이 나서 그 탑을 태웠으나 오직 줄을 묶은 곳만은 면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이 이야기는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어 전승되었고, 고려시대 ‘수이전’, 조선의 ‘대동운부군옥’에 심화요탑이라는 제목의 설화로 전하고 있다. 지귀는 선덕여왕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를 짝사랑을 하였고 상사병으로 몸이 점점 여위어 갔다. 그러한 지귀의 소문은 널리 퍼졌고 소문을 듣고 지귀를 불렀다. 어리석은 지귀는 탑 밑에서 여왕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여왕이 자신의 팔찌를 빼어 지귀의 가슴에 놓고 돌아가셨다. 잠에서 깬 지귀는 그 팔찌를 보고는 여왕이 다녀갔음을 알았다. 이에 사모의 정과 자신의 어리석음에 불귀신으로 변해 버렸다. 영묘사는 신라의 위대한 조각가인 양지가 장육존상을 만들었으며, 이때 성안의 남녀가 다투어 진흙을 날라 도왔다고 했으며 사람들은 신라 향가 ‘풍요’를 불렀다고 했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슬픔 많은 우리 무리여 공덕 닦으러 오다.” 그러나 현재 영묘사는 경주의 지도에 없다. 칠처가람 중 절이나 절터로라도 남아있는 다른 절과는 달리 영묘사는 흥륜사에 가야만 그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몇 년전 흥륜사 주변에서 영묘사(靈廟寺)라고 적힌 기와 조각도 나왔고, 여기서 발굴된 ‘신라인의 미소’라 불리는 기와에도 명문이 있다. 현재 흥륜사는 사적 ‘경주 흥륜사지’로 지정돼 있으나 학계와 지역에서는 흥륜사지가 사실은 ‘영묘사지’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며칠전 선덕여왕경모회에서 찾은 흥륜사 경내엔 마침 절터 발굴 중이었다. 영묘사가 제 자리에서 제 이름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7-02

수를 놓으며

엄마가 손수 수놓았다는 베갯모를 여러 개 뜯었다. 낡고 헤져 흰 솜이 삐져나오기도 해서 더 두면 아예 자수조차 삭아 없어질 것 같았다. 간직하여야겠다. 싶었다. 새로 나온 신식 베개를 사 주겠다고 했더니 버려도 좋다고 했다. 조심히 뜯으며 가져간다고 했더니 엄마는 무슨 쓸모 있냐며 의아해했다. 표구사에 맡겨 자그마한 액자를 만들었다. 엄마는 우리집 복도 벽에 나란히 걸려 있는 액자가 좋아 보였던지 올케들 주겠다며 두 개씩을 도로 가져갔다. 엄마의 손때 묻고, 그리운 우리 가족 땀내도 배어 있는 베개이니 삼 남매가 사이좋게 나누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흔쾌히 드렸다. 그러나 오빠네나 동생네 집에 그 액자가 걸려 있는 걸 본 기억은 없다. 30년도 더 전이었다. 네모난 구봉침은 제법 큰 베개다. 붉은 비단 바탕에 오색 아(亞)자 테두리가 새겨져 있었다. 아홉 마리 봉황이 있어 구봉침이라는데, 자세히 보면 머리를 맞댄 두 마리 봉황 발 아래 일곱 마리 병아리가 놀고 있다. 자식 많이 두라는 의미의 신혼부부용 베개라고 했다. 작고 딱딱한 목침에는 수·복·강·녕(壽福康寧)이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 여자용 둥근 베개에는 모란꽃이 피어 있거나. 꽃 가운데에 부귀(富貴), 다남(多男) 한자가 새겨진 것이었다. 베갯모 말고도 방안 한쪽 벽엔 홈스위트홈 십자수 횃대보도 있었다. 엄마 말에 의하면 예전 혼기 다 찬 집안 처녀들은 저녁마다 한 집에 모여 호롱불 아래에서 늘 수를 놓았다. 김서령의 유고집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에는 동네 여성들이 함께 모여 수놓고 바느질하는 풍경을 정답고 감칠맛 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게 놓은 수예품을 혼수로 가져와 시집에선 솜씨 평판을 받기도 했겠지. 중학교 가정 시간에 자수를 배웠고, 그걸 엄마에게 보이면 엄마는 힐끗 보며 말하곤 했다. “골물시럽게 그런 건 와 배우노.” 최민경 회장님 댁에 있는 이런저런 자수 소품들이 정겨워 보였다. 달력, 컵받침, 그릇받침, 의자 덮개에 새겨진 한 송이 꽃에 정감이 갔다. 자수가 하고 싶어졌고 곧바로 실행했다. 가까운 문화센터에 생활자수 강좌 등록, 수강한 지 넉 달째다. 몇 년이나 수강한 선배들이 있는 강좌에 초짜 티를 팍팍 내면서도 결강 하지 않고 열심히 다니는 것은 재미나기 때문이다. 수놓으면서 듣는 수강생들의 두런두런 세상 얘기가 재밌다. 꽃 자수 하나하나를 가리켜 ‘얘’라고 의인화해 말하는 선생님의 세상 막힘없고 수월한 자수 지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긴 그 수많은 자수 기법은 동서를 막론하고 수 백 년 여성들의 지혜의 집합이요, 솜씨의 농축 아니겠는가. 자수 도안은 대부분 꽃이다. 컵 받침에는 소담스레 꽃 핀 화병이 앉고, 노란 바늘꽂이에는 탐스럽고 수북한 꽃바구니가 얹혔다. 파란 주머니엔 한 다발 라벤더꽃이 피었다. 카네이션 브로치를 어설프게 만들어 고마운 분에게 선물도 했다. 어린이날 연휴에 온 손주들에게 자수 장미꽃을 보여주었다. 넷이 모두 가르쳐달라며 달려들길래 천을 잘라 나누어 스파이더웹로즈 스티치로 장미 한 송이씩을 새겨가게 했다. 큰 손녀 윤이는 지레짐작으로 아는 체를 한다. 할머니 치매 예방하려고 배우시는 거죠? 글쎄, 수놓기에 그런 이점도 있으려나···. 미니멀 인테리어를 꿈꾸던 내가 마음을 바꿔 머잖아 온 집안 곳곳을 시들지 않는 꽃장식으로 뒤덮을 것 같은 예상은 한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6-25

아이가 자란다는 것은

아이가 자라면 한 그릇 밥을 먹는다. 어른 몫의 공기밥 하나를 거뜬히 다 먹는다. 숙주나물, 호박나물, 콩나물에 가지 반찬까지 갖은 채소 반찬을 즐겨 먹는 손자는 학교 급식 시간에 선생님의 칭찬을 도맡아 듣는다고 했다. 매운 김치도 곧잘 먹어 친구들의 부러움을 산다고 자랑하곤 했다. 한식당엘 가면 된장찌개와 배추나물을 제 앞에다 끌어다 놓고 먹는 어른 식성의 아이는 된장에 밥을 말다시피 먹고는 빈 그릇을 보이며 한 공기를 더 시켜 달라기도 한다. 어릴 때 고기를 즐겨 먹지 않아 애태우던 식성도 변해, 이제는 성인 한 사람 몫의 고기도 너끈히 먹어 치운다. 오늘 저녁 차려준 만둣국을 맛나게 다 먹고는 국물에 밥 말아 먹어도 돼요?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운다. 아침을 차려 주면 마다하지 않고 다 먹고 학교 간다며 제 엄마도 흐뭇해 자랑하곤 한다. 많이 잘 먹으니 또래보다 좀 작은 몸이 이제 쑥쑥 커지려나 기대가 잔뜩 된다. 아이가 자라는 만큼 아이의 사회도 확장되는 것도 알겠다. 최근 매일 하굣길을 도와주면서 아이의 일상을 더 가까이 관찰하게 되었다. 교실에서 나온 손자는 운동장을 거쳐 정문까지 오면서 만난 거의 모든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몸 부딪쳐 장난치고 얘기를 하는 걸 멀찍이서 본다. 2학년인 손녀는 내 손 꼭 잡고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대는데, 큰 아이는 다르다. 손자는 이제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오기도 한다. 휴대폰으로 만날 시간을 약속해 정하고, 심지어는 우리집에까지 와서 하루종일 놀기도 한다. 게임기만 가지고 놀길래 체스와 퍼즐을 줘도 저희끼리 잘 논다. 스스럼없이 할머니집에 친구를 데리고 오는 게 흐뭇해 같이 놀러도 가고 밥까지 차려준다. 제 아빠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손자다. 일 년에 서너 번 만나는 사촌누이 정도의 가족이 아이의 사회 영역의 전부인 줄 알았다. 이제 친구를 디딤돌 삼아 점점 더 넓은 세상으로 단단히 발 디뎌 걸어가겠지 싶다. 아이가 자라면 부끄러움도 자라는가 보다. 학교에 가지고 가는 물병이나 우산 취향이 싹 바뀌었다. 손녀는 분홍의 인형 그림 있는 물병, 손자는 파란색 로봇 그림의 물병이었다. 우산도 장화도 남녀 구분이 확실했었다. 어느 비오는 날 하굣길에 무늬 있는 우산을 가져다줬더니 유치하고 부끄럽다며 쓰지 않으려 해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원래 네 것이었잖았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이젠 검정우산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다며 제 엄마도 웃는다. 하루는 내 옷매무새에 깜짝 놀라며 얘기하는 말에 내가 되려 놀랐다. 민소매 위에 재킷을 입었던 내가 차 안에서 잠시 재킷을 벗고 있었다. 재킷을 들고 차에서 내리는데 민소매 차림의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지르듯 말한다. 할머니 옷이 왜 그래? 빨리 옷 입어···. 그리고 하는 말이 더 가관이다. 부끄럽단 말이야···. 얼른 재킷을 둘러 걸치며 헛웃음을 삼켰다. 아이가 크면서 부끄러움도 알아 커지는 것 같다. 어딘가서 배운 짧고 야트막한 상식 자랑에 맞장구를 쳐주었더니 이런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랑 지적 수준이 맞아서 좋아···. 자라는 손자의 지적 수준에 맞춰 주려면 할머니의 공부도 끝이 없으려나 싶기도 하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6-18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면서

우리나라 연극계 두 노장의 마지막 무대라고 하길래, 또 까마득한 옛날 봤던 연극을 다시 보는 것 역시 의미있다 싶어 예매했다. 이정희 교수도 마침 보고 싶었던 참이라며 함께 했다. 막이 오르면 그다지 크지도 높지도 않은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무대 뒤에 서 있고, 앞쪽엔 넓지 않으나 두 사람 정도가 앉을 만한 낮고 평평한 돌 하나가 있다. 그 돌에 앉아 불편한 신발을 벗으려 애쓰는 주인공. 그렇게 시작하는 연극은 거의 50년 전 대학생 시절에 봤던 ‘고도를 기다리며’와 똑같았다. 똑같은 건 그것뿐이었다. 그 옛날 탐구심과 지적 욕구도 왕성했던 대학생 때, 연극을 본 후 뭔가 아는 척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연극이었던 기억밖에 없다. 하긴 은사이신 김춘수 선생님께 무의미시를 배우면서도 그 의미를 몰랐던 때였으니 부조리 연극이라고 한 이 작품을 이해하긴 어려운 젊음이었으리라. 하니 이 연극을 볼 거라는 나에게 남편도 ‘재미없는 걸 왜 보는데’ 했고 나는 ‘그러니 지금은 어떨지’ 대꾸했다. 두 주인공의 대사는 말 그대로 동문서답이 대부분이다. 대화를 하지만 그들은 각자가 지껄이고 싶은 걸 말한다. 서로 뭔가에 대해 묻지만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고, 대답하지만 듣지도 않는 맥락없는 대화다. 잠시 뒤에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하는 대사가 또 오간다. 무엇인지 누구인지도 모를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나날이 무한 반복되는 듯한 2막의 연극을 숨죽여 웃으며 봤다. 그러면서 그들의 대사가 내겐 참으로 현실감 있었고 전혀 부조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어제의 경험이 자꾸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손주 둘과 근처 공원에 갔다. 집에만 무료히 있느니 더워도 바깥에 나가 땀 흘리며 노는 게 나을 듯해서 제안했더니 둘 다 퀵보드를 타고 신나게 앞장섰다. 난 혼자 심심할 듯하여 강아지에 목줄 채워 데리고 나갔다. 따갑고 무더운 볕도 아랑곳 않고 퀵보드를 타는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는 그늘은 많지 않았다. 볕은 뜨겁고 오후의 그늘은 아직 길지 않았다. 나무 아래엔 이미 안늙은이 서넛이 앉아 있었지만 더위를 피할 곳은 그들 가까운 벤치밖에 없었다. 옆의 벤치에 앉고 강아지도 앉혔다.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듣게 되었다. 잠시 후 한 분의 노인이 오시자 모두들 반가워하시길래 아는 분인가 보다 여겨 내 옆자리를 양보해 그들과 가까이 앉게 했다. 강아지에 시선을 주시며 고맙다고 하셨다. 한 분이 며칠 후의 자신 생일날 옆에 있는 분들을 초대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내 옆에 앉는 분에게도 그 얘기를 다시 시작했다. 또 한 분은 텀블러에 담아 온 커피를 옆자리의 노인에게 권했고 노인은 집에서 두 잔이나 마셨다며 사양했다. 그럼에도 서너 번을 더 커피를 권했고, 또 서너 번을 사양했다. 생일 초대의 노인은 작년의 생일을 장황하고 자랑스레 얘기하고 올해의 생일날 계획에 대해 또 말하기 시작했지만 그 말에 귀기울여 듣는 사람은 딱히 없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또 한 분의 노인이 휠체어를 능숙하게 몰며 벤치와 벤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고 커피를 권하던 노인은 또 커피를 권하고, 생일 초대의 노인은 또 생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본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이 아니라 리얼리티 연극이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