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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영묘사를 찾다

영묘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처음 신라에 불법을 전하겠다는 아도에게 그의 어머니 고도령이 일러 준 칠처가람 중의 하나일 정도로 중요한 절이었다. “신라에는 부처 이전에 이미 일곱 군데의 절터가 있다.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사천왕사, 담엄사이며, 불법의 물결이 길이 흐를 곳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하고 선양하면 석존의 제사가 동방으로 향해올 것이다.” 영묘사는 선덕여왕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선덕여왕이 창건했을 뿐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첫째는 ‘선덕왕지기삼사’ 에피소드다. 어느 겨울날 영묘사 옥문지에 개구리가 많이 모여 삼사일을 울었다. 겨울에 개구리가 우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듣자마자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각간 알천과 필탄은 정병 2천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으로 가라. 그곳에 적병이 숨어있을 것이다.” 여왕의 지시로 여근곡에 숨어있던 백제 군사 5백 명을 모두 없앨 수 있었다.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의 하나로 거론되는 일화다. 또 하나는 ‘지귀설화’다. 선덕여왕은 영묘사(靈廟寺)에 자주 행차하였다.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윗대 조령과 당시 삼국전쟁의 영령들을 모신 절이기 때문이었다. 혜공이라는 신이한 능력을 가진 스님이 영묘사의 화재를 미리 알고 새끼줄을 가져와 금당과 좌우 경루, 남문의 회랑에 둘러 묶고 3일 후에 풀라고 당부한다. 3일 뒤 선덕여왕이 행차하시고, 지귀의 가슴에서 불이 나서 그 탑을 태웠으나 오직 줄을 묶은 곳만은 면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이 이야기는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어 전승되었고, 고려시대 ‘수이전’, 조선의 ‘대동운부군옥’에 심화요탑이라는 제목의 설화로 전하고 있다. 지귀는 선덕여왕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를 짝사랑을 하였고 상사병으로 몸이 점점 여위어 갔다. 그러한 지귀의 소문은 널리 퍼졌고 소문을 듣고 지귀를 불렀다. 어리석은 지귀는 탑 밑에서 여왕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여왕이 자신의 팔찌를 빼어 지귀의 가슴에 놓고 돌아가셨다. 잠에서 깬 지귀는 그 팔찌를 보고는 여왕이 다녀갔음을 알았다. 이에 사모의 정과 자신의 어리석음에 불귀신으로 변해 버렸다. 영묘사는 신라의 위대한 조각가인 양지가 장육존상을 만들었으며, 이때 성안의 남녀가 다투어 진흙을 날라 도왔다고 했으며 사람들은 신라 향가 ‘풍요’를 불렀다고 했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슬픔 많은 우리 무리여 공덕 닦으러 오다.” 그러나 현재 영묘사는 경주의 지도에 없다. 칠처가람 중 절이나 절터로라도 남아있는 다른 절과는 달리 영묘사는 흥륜사에 가야만 그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몇 년전 흥륜사 주변에서 영묘사(靈廟寺)라고 적힌 기와 조각도 나왔고, 여기서 발굴된 ‘신라인의 미소’라 불리는 기와에도 명문이 있다. 현재 흥륜사는 사적 ‘경주 흥륜사지’로 지정돼 있으나 학계와 지역에서는 흥륜사지가 사실은 ‘영묘사지’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며칠전 선덕여왕경모회에서 찾은 흥륜사 경내엔 마침 절터 발굴 중이었다. 영묘사가 제 자리에서 제 이름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7-02

수를 놓으며

엄마가 손수 수놓았다는 베갯모를 여러 개 뜯었다. 낡고 헤져 흰 솜이 삐져나오기도 해서 더 두면 아예 자수조차 삭아 없어질 것 같았다. 간직하여야겠다. 싶었다. 새로 나온 신식 베개를 사 주겠다고 했더니 버려도 좋다고 했다. 조심히 뜯으며 가져간다고 했더니 엄마는 무슨 쓸모 있냐며 의아해했다. 표구사에 맡겨 자그마한 액자를 만들었다. 엄마는 우리집 복도 벽에 나란히 걸려 있는 액자가 좋아 보였던지 올케들 주겠다며 두 개씩을 도로 가져갔다. 엄마의 손때 묻고, 그리운 우리 가족 땀내도 배어 있는 베개이니 삼 남매가 사이좋게 나누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흔쾌히 드렸다. 그러나 오빠네나 동생네 집에 그 액자가 걸려 있는 걸 본 기억은 없다. 30년도 더 전이었다. 네모난 구봉침은 제법 큰 베개다. 붉은 비단 바탕에 오색 아(亞)자 테두리가 새겨져 있었다. 아홉 마리 봉황이 있어 구봉침이라는데, 자세히 보면 머리를 맞댄 두 마리 봉황 발 아래 일곱 마리 병아리가 놀고 있다. 자식 많이 두라는 의미의 신혼부부용 베개라고 했다. 작고 딱딱한 목침에는 수·복·강·녕(壽福康寧)이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 여자용 둥근 베개에는 모란꽃이 피어 있거나. 꽃 가운데에 부귀(富貴), 다남(多男) 한자가 새겨진 것이었다. 베갯모 말고도 방안 한쪽 벽엔 홈스위트홈 십자수 횃대보도 있었다. 엄마 말에 의하면 예전 혼기 다 찬 집안 처녀들은 저녁마다 한 집에 모여 호롱불 아래에서 늘 수를 놓았다. 김서령의 유고집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에는 동네 여성들이 함께 모여 수놓고 바느질하는 풍경을 정답고 감칠맛 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게 놓은 수예품을 혼수로 가져와 시집에선 솜씨 평판을 받기도 했겠지. 중학교 가정 시간에 자수를 배웠고, 그걸 엄마에게 보이면 엄마는 힐끗 보며 말하곤 했다. “골물시럽게 그런 건 와 배우노.” 최민경 회장님 댁에 있는 이런저런 자수 소품들이 정겨워 보였다. 달력, 컵받침, 그릇받침, 의자 덮개에 새겨진 한 송이 꽃에 정감이 갔다. 자수가 하고 싶어졌고 곧바로 실행했다. 가까운 문화센터에 생활자수 강좌 등록, 수강한 지 넉 달째다. 몇 년이나 수강한 선배들이 있는 강좌에 초짜 티를 팍팍 내면서도 결강 하지 않고 열심히 다니는 것은 재미나기 때문이다. 수놓으면서 듣는 수강생들의 두런두런 세상 얘기가 재밌다. 꽃 자수 하나하나를 가리켜 ‘얘’라고 의인화해 말하는 선생님의 세상 막힘없고 수월한 자수 지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긴 그 수많은 자수 기법은 동서를 막론하고 수 백 년 여성들의 지혜의 집합이요, 솜씨의 농축 아니겠는가. 자수 도안은 대부분 꽃이다. 컵 받침에는 소담스레 꽃 핀 화병이 앉고, 노란 바늘꽂이에는 탐스럽고 수북한 꽃바구니가 얹혔다. 파란 주머니엔 한 다발 라벤더꽃이 피었다. 카네이션 브로치를 어설프게 만들어 고마운 분에게 선물도 했다. 어린이날 연휴에 온 손주들에게 자수 장미꽃을 보여주었다. 넷이 모두 가르쳐달라며 달려들길래 천을 잘라 나누어 스파이더웹로즈 스티치로 장미 한 송이씩을 새겨가게 했다. 큰 손녀 윤이는 지레짐작으로 아는 체를 한다. 할머니 치매 예방하려고 배우시는 거죠? 글쎄, 수놓기에 그런 이점도 있으려나···. 미니멀 인테리어를 꿈꾸던 내가 마음을 바꿔 머잖아 온 집안 곳곳을 시들지 않는 꽃장식으로 뒤덮을 것 같은 예상은 한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6-25

아이가 자란다는 것은

아이가 자라면 한 그릇 밥을 먹는다. 어른 몫의 공기밥 하나를 거뜬히 다 먹는다. 숙주나물, 호박나물, 콩나물에 가지 반찬까지 갖은 채소 반찬을 즐겨 먹는 손자는 학교 급식 시간에 선생님의 칭찬을 도맡아 듣는다고 했다. 매운 김치도 곧잘 먹어 친구들의 부러움을 산다고 자랑하곤 했다. 한식당엘 가면 된장찌개와 배추나물을 제 앞에다 끌어다 놓고 먹는 어른 식성의 아이는 된장에 밥을 말다시피 먹고는 빈 그릇을 보이며 한 공기를 더 시켜 달라기도 한다. 어릴 때 고기를 즐겨 먹지 않아 애태우던 식성도 변해, 이제는 성인 한 사람 몫의 고기도 너끈히 먹어 치운다. 오늘 저녁 차려준 만둣국을 맛나게 다 먹고는 국물에 밥 말아 먹어도 돼요?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운다. 아침을 차려 주면 마다하지 않고 다 먹고 학교 간다며 제 엄마도 흐뭇해 자랑하곤 한다. 많이 잘 먹으니 또래보다 좀 작은 몸이 이제 쑥쑥 커지려나 기대가 잔뜩 된다. 아이가 자라는 만큼 아이의 사회도 확장되는 것도 알겠다. 최근 매일 하굣길을 도와주면서 아이의 일상을 더 가까이 관찰하게 되었다. 교실에서 나온 손자는 운동장을 거쳐 정문까지 오면서 만난 거의 모든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몸 부딪쳐 장난치고 얘기를 하는 걸 멀찍이서 본다. 2학년인 손녀는 내 손 꼭 잡고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대는데, 큰 아이는 다르다. 손자는 이제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오기도 한다. 휴대폰으로 만날 시간을 약속해 정하고, 심지어는 우리집에까지 와서 하루종일 놀기도 한다. 게임기만 가지고 놀길래 체스와 퍼즐을 줘도 저희끼리 잘 논다. 스스럼없이 할머니집에 친구를 데리고 오는 게 흐뭇해 같이 놀러도 가고 밥까지 차려준다. 제 아빠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손자다. 일 년에 서너 번 만나는 사촌누이 정도의 가족이 아이의 사회 영역의 전부인 줄 알았다. 이제 친구를 디딤돌 삼아 점점 더 넓은 세상으로 단단히 발 디뎌 걸어가겠지 싶다. 아이가 자라면 부끄러움도 자라는가 보다. 학교에 가지고 가는 물병이나 우산 취향이 싹 바뀌었다. 손녀는 분홍의 인형 그림 있는 물병, 손자는 파란색 로봇 그림의 물병이었다. 우산도 장화도 남녀 구분이 확실했었다. 어느 비오는 날 하굣길에 무늬 있는 우산을 가져다줬더니 유치하고 부끄럽다며 쓰지 않으려 해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원래 네 것이었잖았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이젠 검정우산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다며 제 엄마도 웃는다. 하루는 내 옷매무새에 깜짝 놀라며 얘기하는 말에 내가 되려 놀랐다. 민소매 위에 재킷을 입었던 내가 차 안에서 잠시 재킷을 벗고 있었다. 재킷을 들고 차에서 내리는데 민소매 차림의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지르듯 말한다. 할머니 옷이 왜 그래? 빨리 옷 입어···. 그리고 하는 말이 더 가관이다. 부끄럽단 말이야···. 얼른 재킷을 둘러 걸치며 헛웃음을 삼켰다. 아이가 크면서 부끄러움도 알아 커지는 것 같다. 어딘가서 배운 짧고 야트막한 상식 자랑에 맞장구를 쳐주었더니 이런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랑 지적 수준이 맞아서 좋아···. 자라는 손자의 지적 수준에 맞춰 주려면 할머니의 공부도 끝이 없으려나 싶기도 하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6-18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면서

우리나라 연극계 두 노장의 마지막 무대라고 하길래, 또 까마득한 옛날 봤던 연극을 다시 보는 것 역시 의미있다 싶어 예매했다. 이정희 교수도 마침 보고 싶었던 참이라며 함께 했다. 막이 오르면 그다지 크지도 높지도 않은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무대 뒤에 서 있고, 앞쪽엔 넓지 않으나 두 사람 정도가 앉을 만한 낮고 평평한 돌 하나가 있다. 그 돌에 앉아 불편한 신발을 벗으려 애쓰는 주인공. 그렇게 시작하는 연극은 거의 50년 전 대학생 시절에 봤던 ‘고도를 기다리며’와 똑같았다. 똑같은 건 그것뿐이었다. 그 옛날 탐구심과 지적 욕구도 왕성했던 대학생 때, 연극을 본 후 뭔가 아는 척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연극이었던 기억밖에 없다. 하긴 은사이신 김춘수 선생님께 무의미시를 배우면서도 그 의미를 몰랐던 때였으니 부조리 연극이라고 한 이 작품을 이해하긴 어려운 젊음이었으리라. 하니 이 연극을 볼 거라는 나에게 남편도 ‘재미없는 걸 왜 보는데’ 했고 나는 ‘그러니 지금은 어떨지’ 대꾸했다. 두 주인공의 대사는 말 그대로 동문서답이 대부분이다. 대화를 하지만 그들은 각자가 지껄이고 싶은 걸 말한다. 서로 뭔가에 대해 묻지만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고, 대답하지만 듣지도 않는 맥락없는 대화다. 잠시 뒤에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하는 대사가 또 오간다. 무엇인지 누구인지도 모를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나날이 무한 반복되는 듯한 2막의 연극을 숨죽여 웃으며 봤다. 그러면서 그들의 대사가 내겐 참으로 현실감 있었고 전혀 부조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어제의 경험이 자꾸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손주 둘과 근처 공원에 갔다. 집에만 무료히 있느니 더워도 바깥에 나가 땀 흘리며 노는 게 나을 듯해서 제안했더니 둘 다 퀵보드를 타고 신나게 앞장섰다. 난 혼자 심심할 듯하여 강아지에 목줄 채워 데리고 나갔다. 따갑고 무더운 볕도 아랑곳 않고 퀵보드를 타는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는 그늘은 많지 않았다. 볕은 뜨겁고 오후의 그늘은 아직 길지 않았다. 나무 아래엔 이미 안늙은이 서넛이 앉아 있었지만 더위를 피할 곳은 그들 가까운 벤치밖에 없었다. 옆의 벤치에 앉고 강아지도 앉혔다.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듣게 되었다. 잠시 후 한 분의 노인이 오시자 모두들 반가워하시길래 아는 분인가 보다 여겨 내 옆자리를 양보해 그들과 가까이 앉게 했다. 강아지에 시선을 주시며 고맙다고 하셨다. 한 분이 며칠 후의 자신 생일날 옆에 있는 분들을 초대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내 옆에 앉는 분에게도 그 얘기를 다시 시작했다. 또 한 분은 텀블러에 담아 온 커피를 옆자리의 노인에게 권했고 노인은 집에서 두 잔이나 마셨다며 사양했다. 그럼에도 서너 번을 더 커피를 권했고, 또 서너 번을 사양했다. 생일 초대의 노인은 작년의 생일을 장황하고 자랑스레 얘기하고 올해의 생일날 계획에 대해 또 말하기 시작했지만 그 말에 귀기울여 듣는 사람은 딱히 없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또 한 분의 노인이 휠체어를 능숙하게 몰며 벤치와 벤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고 커피를 권하던 노인은 또 커피를 권하고, 생일 초대의 노인은 또 생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본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이 아니라 리얼리티 연극이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6-11

스페어(Spare)

스페어는 영어이지만 우리 일상에서도 종종 사용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있는 단어다. 급한 경우에 바꾸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예비로 준비하여 두는 같은 종류의 물품을 이른다. 볼링에서는 남은 핀을 그 다음에 모두 쓰러뜨리면 스페어 처리라고 한다. 스페어 타이어(spare tire)는 자동차의 펑크에 대비한 예비 타이어다. 어떤 단어이든 간에 여분이나 예비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외래어로 그대로 쓰고 있어 익숙한 말이다. 그런데 이 스페어라는 단어를 다소 생경한 의미로 사용한 책을 최근에 읽었다.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즐겨 본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지만, 특히 서양 왕실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일부러 찾아보고, 본 걸 또 볼 정도로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영국 왕실 배경 영화는 시대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즐긴다. 좋아하는 영화를 역사로 확인하려고 종종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기도 한다. 그러던 중에 포착된 책이 바로 영국의 둘째 왕자 해리가 쓴 ‘스페어(Spare)’였다. ‘예비용 왕자에서 내 삶의 주체가 되기까지’라는 부제가 붙어있었고 책 소개글에 이렇게 적혀있다. “형은 나보다 두 살 위인 데다 왕위 계승자였고, 반면에 나는 ‘예비용(spare)’이었으니까.” 스페어라는 말은 그가 태어난 날, 그의 아버지이자 현 영국의 국왕인 찰스가 한 말이기도 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그 자체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고 고결한 것이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심지어 미물이라 할지라도. 따라서 어느 누군가의 탄생도 여분일 수 없고, 예비용일 수는 없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예비용이라니, 그것도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정말 말이 되는 말인가. 아들의 탄생을 기뻐하고 아내의 수고로움에 대한 고마움을 표해야 할 그 순간 뱉은 말이라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충격이었다. 평소 찰스가 왕자였을 때도, 그의 결혼 전 갖가지 추문과 행실에도, 다이애나와의 결혼과 이혼, 다이애나비의 충격적 죽음 이후 지금의 왕비와의 연애사와 결혼에 이르는 온갖 뉴스를 접할 때도 밉상이었던 그였는데, 속물적 근성의 그를 철저히 경멸하기로 작정한 것은 바로 이 책 때문이었다. 책을 소개하면서 저자가 처음으로 전하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여실하고 주저없이 솔직한 태도로 삶의 여정을 기록한 기념비적인 책이며, 통찰과 고백, 자기성찰, 그리고 힘겨운 삶 속에서도 슬픔을 넘어서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으로 가득한 향연이라고 야단을 떨었지만 아직 40살도 채 되지 않은 남자의 삶이 뭐 그리 성찰적이겠는가. 단지 그가 특별한 신분의 왕자의 삶을 살아 세간의 관심이 힘들었고, 누구나 다 겪는 방황의 시기를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 특별히 겪었을 것이라는 정도의 내용은 뭐 그다지 감동을 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는 그가 태어나면서 규정된 ‘예비용(spare)’의 삶을 어찌 살아내었는지에만 관심이 쏠렸고, 그것이 안쓰러웠을 뿐이었다. 이 세상 그 누구의 삶도 예비용은 없다. 온전히 그만의 삶이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6-04

모리 교수의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

두 달 전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책장에서 꺼내 다시 읽은 적이 있다. 그때 또 한 권의 책을 샀다. 모리 교수의 제자인 미치 앨봄이 쓴 책이 아니라 모리 교수가 생전에 썼던 미출간 유고를 그의 아들인 롭 슈워츠가 사후 편집해 출간한 책이었다. 영어 원제는 모리의 지혜(The Wisdom of Morrie)인데, 우리나라에서 출간하면서 제목을 이렇게 멋들어지게 바꿔 놓았다. 처음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과 같이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 최근엔 가방에 넣어다니며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읽는다. 원래 소설 읽기를 즐기던 심히 편협된 독서 취미가 있던 나는 책 한 권을 잡으면 며칠을 밤새다시피 읽어 끝장을 보곤 했다. 그러나 서사가 없는 책은 내리읽을 필요도 없고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되니 쉽다. 침대 가까이 두고 집히는 대로 잡아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곤 했다. 지난주 일요일 108 사찰순례 때는 가방에 넣어 가서 버스에서 읽기도 했고, 오늘은 손주들 하교 도우러 나설 때 가방에 넣었다가 차 안에서 한 페이지를 읽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건 아니고, 읽은 데를 또 읽기도 하고, 가까이에 쓸 것이 있으면 밑줄을 그어두거나 별표를 크게 하기도 하고, 그마저도 없으면 그 페이지 귀퉁이를 접어 두기도 했다. 모리 교수가 “책장을 가벼이 넘기지 않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시간을 두고 찬찬히 생각하고 다각도로 궁리하기”를 바랬으며 “이 책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라”고 주문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노년의 즐거움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제시하고 있어 현재의 노년의 내 생활에 가장 긴요한 주문들이 그득그득하기 때문이다. 67살 즈음 자신이 고령자임에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노년의 삶을 긍정하기 시작한 작가, 모리의 성찰과 지혜에서 우러나온 거의 모든 언사에 백배 공감한다. 책상 위에 있는 책을 들고 책의 접힌 부분을 슬쩍 펼쳐보니 34페이지다. “오늘 내가 살고 만들어가고 경험하는 ‘지금’이 인생의 화양연화임을 이제는 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무릎을 탁 쳤고, 혼자서 씩 웃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신황금기라 여기는 나와 똑같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259페이지에서는 소중한 관계의 가치를 얘기하고 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들 모두와 인연을 이어가자”를 읽으면서 소소하되 귀한 모임의 소중한 동반자를 떠올리고, “손주들의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울 방법을 알아내자. 이때 자녀와 손주의 관계를 방해하면 안 되겠지만 오히려 자녀들이 반길 수도 있다”를 읽으면서 나의 현재 최대 관심사를 어찌 알았을까. 또 줄을 굵게 쳤다. 8장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에서는 잘 늙기를 제안한다. 세상은 아름답다. 마음을 열어 하늘을 보고 타인을 존중하고 삶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며 매일 즐겁고 황홀하게 웃음거리를 찾자.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고 은퇴 후의 자유를 활용하라는 조언.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더욱 충만하고 자유롭고 활기차게 살 수 있다는 모리 교수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책은 요 근래 내 지근 거리에 있으면서 내 시선과 손길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5-28

손녀가 쓴 나의 이야기

몇 달 전 서울의 맏손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부모님의 삶을 인터뷰해서 글을 써야 하는 숙제가 있다고 했다. 5학년인 손녀는 매우 조신했다. 특유의 조곤조곤한 말투는 나지막하되 다정했으나 더러는 집요하기도 했다. 할아버지께 양해를 구해 달라는 당부를 먼저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귀가 좀 어두우시니까 제 말을 잘못 알아들으실 것 같아서 할머니 인터뷰할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서운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네 작은 전화 목소리를 어떻게 들으시겠니? 걱정말라는 나의 말을 듣고선 정해진 인터뷰 목록인지를 먼저 읽어주었다.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사회생활, 현재와 미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씀 등등이었다. 갑작스러운 전화였기에 준비할 겨를은 없었다. 약 20여 분 동안 손녀의 물음에 즉흥적이긴 했지만 성실히 답했다. 인터뷰를 다 마친 후 글로 적을 것이라면서 고맙습니다. 인사도 잊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니 더 나은 대답을 할 걸 생각했지만 다시 전화하진 않았다. 그러곤 잊었다. 며칠 전 아들이 바로 그 책(?)을 우편으로 보냈다. 분홍색 종이 두 장을 반 접어 표지까지 총 8쪽. 빨간색 실로 묶은 선장본(?)이었다. 표지엔 제목인 듯 “이정옥 교수님의 삶”이라 크게 쓰고 손녀 이 윤 지음. 목차도 적었다. 오른쪽 하단에 내 얼굴임이 확실시되는 파마머리에 안경 낀, 팔자 주름 선명한 노인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라고 떨리기까지 할까. 나를 어떻게 표현하여 썼을까 호기심, 설렘, 두려움 등등의 감정으로 책장을 넘겼다. 인터뷰한 내용을 거의 가감 없이 차례대로 적었다. 페이지마다 짧디짧은 글 아래 글의 내용에 꼭 맞는 삽화가 자그마하게 그려져 있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과수원에서 아침마다 토마토를 따 드셨다. 토마토즙 때문에 입술이 따끔거렸던 기억도 있다고 하셨다.”는 글 아래 토마토를 베어 물며 얼굴을 찡그린 어린 여자아이를 그려 둔 식이다. 학창 시절 가야금을 배운 에피소드 아래엔 가야금 타는 긴 머리의 여자아이와 음표. 현재와 미래 페이지에는 글 쓰는 할머니, 한국어를 가르치는 할머니 모습을 적고 그렸다. 표지의 목차에는 없는 내용도 있었다. 글쓴이인 나(손녀)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라는 제목엔 내가 꾼 손녀의 태몽 이야기를 적었다. “손녀인 나에게 나의 태몽-고래떼가 바다에서 춤추는 꿈-처럼 넓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라는 말씀을 하셨다.” ‘넓은 세상’은 ‘바다’요, ‘자유롭게’는 춤추는 고래라며 화살표로 표식해 둔 것이 놀라웠다. 내 말을 찰지게 이해해서 비유 풀이까지 한 것 아니겠는가. 그 페이지엔 바다에서 춤추는 고래와 지구 위에서 웃으며 춤추는 여자아이의 삽화가 있다. 마지막 페이지는 무려 “작가의 말”이었다. 흐뭇하고 대견하고 기특하고 감동적이어서 그대로 옮겨본다. “그렇다. 생각했듯이 나는 할머니의 손녀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의 작가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이정옥 할머니는 은퇴한 지금도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계신다. 여러분도 이정옥 할머니처럼 열심히 공부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작가인 손녀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만든 첫 책(?)의 주인공이 된 이 맘을 어찌 표현할 말이 없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5-21

가난한 제자의 선물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단정하고도 조용하신 담임선생님은 피아노를 잘 치시는 음악선생님이셨다. 공부는 제법이지만 가난한 형편인 나를 무던히도 챙겨주려 애쓰셨다. 학급 간부임을 핑계로 학교 가까이 있는 선생님 댁으로 종종 부르시곤 하셨다. 학기 초에는 국어, 영어, 수학 선생님께 새로 나온 참고서를 얻어서 챙겨주셨다. 선생님 어머님께서 챙겨주신 귀한 귤과 크라운산도의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첫맛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예를 차린다고 소리 내지 않고 녹여 먹으니 깨물어 먹어야 더 맛있다며 웃으시던 선생님이셨다. 학기가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월사금을 내지 못한 나였다. 가난한 부모님께 말씀드려도 속수무책이니 아침 조회시간에 이름이 불리면 감출 수 없는 부끄러움에 고개만 떨굴 뿐이었다. 그해 사월에는 3학년이 모두 수학여행을 갔으나 난 가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비용을 대 주시겠다고 했지만 아프다고 핑계댔다. 3박4일 수학여행 떠난 휑한 교실에 평소와 같이 왔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죽어라 공부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신 선생님은 날 부르시더니 그 부드럽고 고운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자그마한 거울을 쥐어주셨다. 그달 모의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하여 수학여행 못 간 부끄러움과 슬픔을 보란 듯이 상쇄했고 선생님께 환한 웃음과 기쁨을 드릴 수 있었다. 개교 기념일 즈음이었을 것이다. 운동장 전교 조회 시간이었다. 내 이름이 크게 호명되자 얼떨결에 나갔고,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동창회장님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장학금을 받기 전과 후에도 선생님께서는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장학금을 내게 주려고 교장 선생님께 여러 번 곡진한 부탁을 하시더라는 2학년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훗날 들었을 뿐이었다. 고마우신 선생님 덕분에 나는 밀린 1분기 월사금을 바로 낼 수 있었고, 그러고도 남은 돈을 엄마에게 드리면서 엄마의 눈물 바람을 슬쩍 훔쳐보았던 것도 같다. 아 그러나 그때 난 참으로 어리석었다. 한 달 뒤 스승의 날이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고, 선생님께 드릴 카네이션 한 송이 살 돈을 챙기지 못한 거였다. 스승의 날 아침, 학급 전체 아이들에게서 모은 돈으로 산 선물을 들고 학교에 갔다. 개인적으로 선물을 마련하지 못한 자책으로 간밤에 잠을 설쳤기에 평소보다 일찍이었다. 교문을 들어서면 바로 등나무 덩굴에 뒤덮인 쉼터가 있었다. 너무 이른 등교라 잠시 앉아도 되었다. 나무 벤치에 털썩 앉아 위를 쳐다보는데, 연보라색 등꽃이 포도송이마냥 주렁주렁 흐드러져 있었다. 예뻤다. 선생님같이 곱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꽃이었다. 벤치 위에 올라 까치발을 하고 꽃을 한 아름 꺾었다. 아찔하고 향긋한 내음이 교복에 묻었다. 교실에서 예쁜 꽃만 다시 추렸다. 선생님 책상 위 둥근 꽃병 가득 등꽃을 꽂았다. 축축 늘어져 처졌지만 꽃병을 가리고 덮을 정도로 가득 꽂으니 뭐 그런대로 볼만했다. 무엇보다 선생님 책상 주위에서 교실 전체로 번진 진한 향기가 선생님께 대한 미안함에 짓눌렀던 내 마음을 감추어 주는 듯했다. 교실로 들어오시면서 무슨 향기지? 라며 환히 미소 띠시는 선생님께 나는 꽃향기보다 더 짙고 진한 감사 인사를 마음속으로 올렸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5-14

아버지의 기일

부처님오신날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일이기도 했다. 벚꽃이 눈부신 화창한 봄날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다급한 오빠의 연락을 받고 10개월 큰아들을 들어업고 버스를 탔다. 그 전해부터 간경변 진단을 받고 일 년을 못 버티실 것이며, 입원도 필요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우리 형제들은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 끈을 놓지 못한 엄마는 집에서 온갖 좋다는 것은 모두 만들어 아버지를 극진히 간호하시는 터였다. 어디서 굼벵이를 잡아오고, 기와솔을 뜯어 달여 잡수시게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기겁하며 말렸지만 엄마의 고집을 어쩔 수 없다는 오빠의 푸념을 전화로 듣곤 했다. 대학 다니던 동생이 벌써 와 앙상한 아버지 곁에서 손을 잡고 망연해하고 있었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내일이 사월 초파일이라 절에 기도 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그 또한 이해했다. 평소에도 초하루 보름이면 그 바쁜 와중에도 목욕재계하고 절에 다니던 엄마였다. 엄마 따라 절엘 가보곤 했던 나는 부처님 앞에서 무아지경 땀조차 흘리며 108배를 올리던 엄마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엄마 대신 우리 삼남매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와 밤을 새다시피했다. 엄마가 만들어 둔 조약도 드시게 하고, 정신은 말짱하신 아버지와 얘기도 나눴던 것 같다. 이튿날 아침 사월초파일이었다. 간밤 비교적 말짱한 정신의 아버지를 보자 우리들은 안심했다. 동생은 내일 등교를 위해 나갔고, 나는 잠시 옆방으로 가서 아이와 함께 잠이 들었다. 오빠도 아버지 곁에서 쪽잠에 들었다고 했다. 절에서 돌아온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혼몽했던 나는 다시 깊은 잠을 잤던 것 같다. 오빠와 엄마의 다급한 소리에 깨서 안방으로 달려갔더니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쉬고 계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56살의 젊은 나이에 부처님오신날 부처님 곁으로 가셨다. 43년 전이었다. 어제 오빠가 절에 아버지와 엄마의 등을 보내왔다. 몇 년 전부터 절에서 재를 지내고 등을 다는 것으로 매년 지내던 제사를 대신한 오빠였다. 40년 넘게 아버지의 제사를 지극히 모시던 오빠였다. 몇 번의 중한 수술로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삼 남매가 수의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조차도 오빠는 미안해했다. 사람이 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그 중 가장 힘든 고통은 병고(病苦)라는 생각이다. 병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본 날, 또 그 아버지를 지극한 효심으로 제사 받들던 오빠가 늙고 병든 몸으로 절에 가서 울음을 참는 심정으로 흰 등을 다는 날, 부처님오신날은 우리 삼 남매에겐 애달픈 날이기도 하다. 매년 정초, 온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공양을 올리는 거조암엘 간다. 초파일 전날, 거조암에 손주 넷을 데리고 가서 오백나한에게 백 원 공양을 올리게 했다. 한 바구니 묵직한 동전을 조금씩 나눠주면서 각자 소원을 빌라고 했다. 소원은 모르겠고, 각양각색의 나한상 앞 쟁반에 동전을 하나씩 떨구는 게 그저 신나는 모양새다. 그럼 어떠랴. 조용하고 정숙해야 할 법당이지만 아이들의 모습이 흐뭇한 보살님도 용서해 주신다. 바구니를 들고 따라다니면서 나는 아버지와 엄마의 극락왕생을 축수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병고에 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5-07

무창포 ‘신비의 바닷길’

밀물이나 썰물, 조수간만의 차라는 단어는 머릿속 지식수준이요, 지구와 달의 인력에 의해 생긴다는 상식으로만 알 뿐이다. 그러다 보니 바다가 갈라지고 육지와 섬 사이에 바닷길이 생긴다는 뉴스는 저세상 이야기인 듯 그저 신기해할 따름이었다.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은 유독 수심이 낮은 바다란다. 수심이 얕은 바닷속 지형이 썰물 때 해수면 위로 드러나면 육지와 섬 또는 섬과 섬 사이에 바닷길이 생겨 마치 바다를 양쪽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보이는 바다 갈라짐 현상이 많다고 했다. 이를 ‘신비의 바닷길’이니 ‘모세의 기적’이니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로 떼지어 들어가는 뉴스 속 영상은 정말 신이했다. 평소 사람 많은 축제장에 휩쓸리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내 평생 한 번쯤은 나도 저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는데 며칠 전 이뤘다. 언젠가 이화회 모임에서 그곳을 가고 싶다는 얘기를 비쳤다. 엘라 할머니께서 간 적이 있다고 하셨고 우리 언제 한 번 가요 입을 맞췄다. 바닷길이 열리는 날이 정해져 있다며 숙소까지 예약하셔서 4월의 말 이화회 세 명은 무창포 여행을 감행했다. 무창포는 충남 보령의 바닷가였다. 해변에서 눈앞에 보이는 석대도까지 1.5km 바다 갈라짐 현상이 나타나 신비의 바닷길로 유명하다고 했다. 대구에서 세 시간도 넘어 걸리는 다소 먼 길이었지만 설레며 나선 길이라 내내 신났고 들떴다. 바닷가 바로 앞 숙소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파도 넘실대고 있었다. 서해니까 얕은 바다겠지 짐작할 뿐 물색으로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었다. 잘디잔 모래와 작고 둥근 색색의 자갈이 뒤섞여 있는 해안은 길었고 꽤 아름다웠다. 해안에서 머잖은 곳에 작은 섬 몇 개가 떠 있었다. 그 중 한 섬으로 바닷길이 생기고 내일 아침이면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그 열린 바닷길을 걸어 저 섬으로 걸어갈 수 있다니 반신반의할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숙소 베란다에서 바다를 살폈더니 모래밭이 더 넓어지고 어젯밤엔 보이지 않던 암초 같은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간대별로 비교해 보고자 사진을 찍는데, 해안가에서 섬 쪽으로 기다란 띠 같은 길이 어슴푸레 보였고 흥분이 밀려들었다. 과연 물때가 되자 해안가로부터 길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엎드려 조개 잡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작은 바구니도 하나 들고 그들에 합류했다. 바닷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위엔 연초록의 해초가 미끌거렸고, 돌 위엔 작은 고둥 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사람들은 물 빠진 바다 위에서 돌을 헤집고 모래를 파며 제법 조개 따위를 찾아내느라 열심이었다. 올리브 할머니와 나는 지금 우리 바다 속에 있는 거 맞죠 연신 확인하며 흥분해했다. 조심히 딛는 발 아래 돌에 붙어있는 따개비 따위가 보였고, 떼어 바구니에 담기도 했지만 바닷길을 걷고 있다는 신기한 마음에 그저 섬으로 섬으로 걸어들어 갈 뿐이었다. 물결무늬가 선명한 모래 위를 디디면 단단해서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 동안의 경험은 기이했다. 해변 가득 품어 안았던 저 바닷물은 어디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걸까. 물결무늬 선명하게 남긴 채 빠졌다 어디서 다시 들어오나.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시 솟아오르나. 의문은 신비로 남을 뿐이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4-30

건망증인지 치매인지

지난주 TV에서 치매를 앓는 팔순 노모를 돌보는 갸륵한 딸과 사위의 이야기를 봤다. 예쁜 치매를 앓고 있다고는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한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할머니가 가엾고 가족들이 안타까웠다. 젊었을 땐 총명했다는데도 치매로 고생하는 그 할머니를 보면서 나의 일이십 년 후를 생각하니 심히 걱정스럽다. 심각한 건망증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하는 몇 건의 건망증을 떠올리면 실소를 금치 못한다. 연구실에서 퇴근 준비 중 전화를 받았다.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기면서도 내내 통화 중이었다. 3층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계단에서 누군가를 만나 목례를 하면서도 주차장에 와서도 계속 통화 중이었다. 차를 타려다가 문득 핸드폰을 챙기지 않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차에 가방을 던져 놓고 다시 연구실로 뛰다시피 올라갔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 “이 교수님 왜 그렇게 숨차하세요?” “아, 제가 퇴근하려 내려왔더니 핸드폰을 두고 온 것 같아서 다시 연구실로 올라가고 있어요.” “저랑 지금 통화 중이시잖아요...” 며칠 후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동료 교수에게 이 일화를 얘기했다. 치매가 아닌가 걱정이라고 했더니, “지금 젓가락을 들고 계시면서 젓가락을 찾는다면 건망증이요, 그걸로 글씨를 쓰려고 하신다면 치매”라며 안심하라는 동료의 말씀에 안도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치고 퇴식구에 식판을 들여놓은 후 컵을 들고 식수대가 아닌 벽걸이 냅킨박스에 갖다대고 있는 나를 보더니 “건망증이 아니라 치매일 것도 같은데요...” 별로 덤벙대는 성격도 아닌데 왜 그런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메모벽이 생겼다. 연구실 탁상달력에도, 문에도 달력을 걸어두고 이중삼중 메모를 해 두었고, 다이어리에도 메모해 두고 어떤 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은 달력이나 다이어리 대신 핸드폰의 메모장에 거의 모든 것을 항상 메모한다. 약속은 물론,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장단기 계획 등 모든 것을 메모한다. 달력에도 빠짐없이 기록한다. 빽빽한 달력이 일하는 사람 못지않을 정도다, 이 모든 것은 건망증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그 덕에 약속이나 계획을 놓치는 법은 잘 없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종종 건망증으로 곤욕을 치른다. 곰솥을 불 위에 올려두고 나가 솥도 태워 온 집안을 역한 사골 탄내로 채운 적도 있었다. 어쩌다 휴대폰을 냉동실에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며칠을 찾은 적도 있었으니 심각한 지경이다. 그래서 내 생활방식을 좀 바꾸기로 했다. 좀 있다가 해야지 생각하면 바로 잊을 것이니 뭐든 생각날 때 바로 실행하기다. 의식의 흐름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들기름 한 숟가락 먹기를 잊고 안 먹는다. 참기름을 음식에 넣다가 들기름이 생각나면 바로 냉장고로 가서 꺼내 먹는 식이다. 동선은 꼬이고 일의 맥락은 좀 없어도 덜 놓치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도 매일 꼭꼭 챙겨먹지는 못한다. 기름을 쓰지 않을 땐 잊으니까. 휴대폰을 어디에 둔지 몰라 이 방 저 방 헤매고 다니다가 결국 남편에게 전화해 달라고 했더니 식탁 위에 있더라며 가르쳐준다. 이 글을 쓰던 중이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4-23

99 ‘콘클라베’, 나만의 영화 감상법

해마다 봄, 아카데미상 소식이 들리면 괜한 기대로 설렌다. ‘기생충’, ‘미나리’ 이전부터도 그랬다. 매달, 매주, 이달의 영화, 혹은 오늘의 개봉영화를 찾곤 하지만 특히 아카데미상 즈음이 되면 영화 관련 뉴스를 더 자주 검색하게 된다. 올해는 이런저런 바쁜 일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놓쳤다가 며칠 지나 검색했다. 마침 올해 아카데미 수상작 중 상영하는 영화가 있었다. 바로 예매하고 극장엘 달려갔다. 관객이 많지 않은 극장에서 혼자서 두 시간이나 숨죽이며 ‘콘클라베’를 봤다. 최근 본 영화 중에 그렇게나 집중했던 영화가 있었던가 싶다. 콘클라베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제도이며, 교황이 선출되지 않으면 검은 연기, 선출이 확정되면 흰 연기로 알린다는 정도의 상식은 있었기에 다큐멘터리 비슷한 역사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미스터리, 스릴러물로 분류되어 의아했는데 과연 그랬다. 교황으로 선출되기 위해 온갖 정치적 음모가 판치고 그 와중에 드러나는 추기경들의 비리가 난무했다. 화려한 성당에서 아름답기까지 한 복장으로 가려진 다양한 추악한 캐릭터들의 면모를 들여다보는 건 몹시 불편했다. 거기도 세속과 다를 바 없다는 메시지, 그리고 변화해야 가톨릭의 미래를 암시하는 결말이었음에도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교황과 로마가톨릭의 추한 면모를 훔쳐본 듯해서 개운치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나만의 영화 감상법이 시작되었다. 마치 연관 검색하듯 내가 영화로 알게 되었거나 알고 싶은 정보를 찾고 확인하고 또 다른 영화를 보는 방식이다. 먼저, 영화 ‘두 교황’을 찾았다. 원래 보고 싶었으나 개봉관이 많지 않아 놓쳤고, 넷플릭스에 가입해야만 가능해서 아쉬우나 꾹 참고 있었다. 다른 OTT에서는 볼 수 없을까 이따금 검색만 하거나 유튜브에서 소개하는 짧은 영상을 보면서 보고싶은 마음을 달래곤 했다. 결국 이번에 넷플릭스에 가입하여 기어이 봤다. 훌륭한 두 배우가 주인공인 두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과 외모적으로 매우 흡사해서 화제를 모았던 영화였다. 또 있었다.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는 ‘콘클라베’와 같은 상황이나 내용은 정반대로 코미디 드라마로 분류된 영화였다. 이 역시 티빙에 가입하고 나서야 볼 수 있었지만 가입을 잘했다 싶을 정도로 ‘콘클라베’의 찜찜함을 달래주었다. 교황이 되기 위한 정쟁을 벌이는 영화 ‘콘클라베’의 추기경들과는 정반대로 이 영화에서는 모든 추기경들이 교황으로 선출되기를 거부한다. 그 중에서도 떠밀리듯 교황으로 선출된 주인공은 두려움을 못 이겨 교황청을 나와 인간들의 세상으로 도망쳤다. 다시 돌아와서 한 그의 첫 연설은 교황 사임이었다. 교황의 무게를 고뇌하는 추기경들의 모습이 뭉클했다. 이번에 본 영화가 모두 현 교황과 관련한 것이기에 내겐 더욱 특별하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여름 우리나라를 방문하셨고, 바로 그때 첫 손녀 윤이 태어났다. 손녀 출산 소식에 부랴부랴 도착한 서울엔 광복절의 태극기와 교황 방한 현수막이 함께 나부껴 찬란하고 눈부셨다. 우리 부부는 첫 손녀의 탄생을 축복하러 교황님까지 오신 거라며 맘대로 생각하며 감격해했다.

2025-04-16

연극을 보고 나서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취미란에는 어김없이 책이나 영화를 즐긴다고 적는다. 글눈을 뜨면서부터 책을 찾아 읽더라는 부모님의 말씀도 자주 들었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도 어딘가 구석진 곳에서 책을 보고 있던 아이로 나를 기억해 주니 나의 독서벽은 꽤나 오래된 것임에 틀림없다. 영화를 즐기는 것도 역사가 깊다. 아버지와 함께 간 극장에서 본 ‘콰이강의 다리’가 여전히 선명하다. 대입 공부를 치열하게 하던 고3 때에도 TV 주말의 명화극장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 연극을 처음으로 본 건 고2 때였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오빠가 안톤 체호프 작품인 연극에 배우로 등장한다면서 친구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객석을 채워 주라고 했다. 오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가까이 지내는 친구 몇을 데리고 극장을 찾았다. 어두컴컴한 무대 앞에 몇 되지 않은 의자가 깔려있었다. 무대에 조명이 밝아지자 전통 러시아식 흰옷에 붉은 허리띠를 매고, 목 긴 가죽장화를 신은 오빠가 구부정한 채로 등장했다. 흰머리에 흰 수염을 붙이고 과장적으로 노인 분장한 오빠의 모습이 매우 생경해서 난 괜히 친구들에게 부끄러웠다. 무대 위의 오빠 모습은 이렇게도 기억에 선명한데 그 연극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대학 다닐 때도 국문과의 밤이라는 축제를 하면 당연히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고, 학과의 선후배들과 친구들이 밤낮으로 연습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 가까이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행사 후 찍은 단체사진에 분장한 채로 웃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잠시 부러웠지만 그 정도였다. 연극은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나 보다. 이화회 회원들과 ‘친정엄마와 3박4일’을 본 적이 있었다. 워낙 티켓파워가 있는 배우들의 연극이라 볼 만하다고 관람한 거였다. 잘 아는 내용의 연극에, 배우의 연기는 훌륭했으나 무대가 너무나 큰 극장은 연극 감상을 심히 방해했다. 비교적 앞자리에 앉았음에도 도저히 몰입되지 않아 성에 차지 않았다. 연극의 묘미는 무대 가까이에서 배우의 숨소리와 땀방울을 느끼고 보는 것인데. 지난달 배달된 대구문화 소식지에서 대구연극제 뉴스를 접했다. 연극 일정을 꼼꼼히 살폈다. 안톤 체호프의 ‘고니의 노래’를 택해 맨 앞자리를 예매했다. 원래 희곡은 두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15분짜리 단막극이나 실제 공연은 60분이었다. 지방 작은 극장 68세의 노배우가 연극이 끝난 뒤 프롬프터와 함께 연극 인생을 회고하는 내용인데, 각색이 많이 된 듯했다. 확인하고 싶어 도서관에서 ‘체호프 희곡 전집’을 빌려 읽기도 했다. 힌트가 될 만한 무대 장치, 젊은 배우의 서툰 분장과 연기에서는 오히려 노배우의 노쇠함 대신 청년극단의 활기가 전해졌다. 그러나 앞자리에서 직관한 배우의 땀방울, 거친 숨소리와 먼지내 나는 무대는 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엔 충분했다. 극장을 나서며 오랜만에 오빠와 통화했다. 52년 전 오빠가 공연한 연극 제목이 뭐냐고 물었더니 안톤 체호프의 ‘곰’이라며 첫 대사를 또렷이 기억해 들려준다. “좋지 않습니다. 마님, 몸만 상하실 겁니다….” 전화 너머로 건너온 오빠 목소리에서 아주 잠깐 연극배우의 포스가 느껴졌다. 그 옛날 20대에 늙은 배우를 연기한 오빠는 지금 73살이다.

2025-04-09

내 인생의 ‘스위트 스팟(Sweet Spot)’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골프나 배드민턴, 야구 등의 스포츠에서 골프채, 라켓, 배트 등으로 공을 칠 때,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 원하는 방향으로 멀리 빠르게 날아가게 만드는 최적 지점을 스위트 스팟(Sweet Spot)이라고 한다고 했다. 최적의 타격면이라는 뜻이라는데, 원래 스포츠 분야에서 나온 용어인 걸 검색해서 알았다. 야구선수는 배트에 공이 이 스위트 스팟에 딱 맞는 순간 공이 제대로 멀리 날아갈 것을 안다고 했다. 스포츠 용어인 ‘스위트 스팟’은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로 좋은 시기나 부분, 한 마디로 최적화된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경제 분야에서의 스위트 스팟은 경제가 이례적으로 호황을 누리는 시기를 의미하고 마케팅에서는 소비자가 기업에 가장 매력을 느끼는 시점 혹은 그 느낌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이 단어를 샘 리처드 교수(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 사회학과)가 쓴, 최근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으로 접했다. 유튜브의 숏츠나 채널로 종종 리처드 교수를 만났기에 그가 쓴 책이 궁금해서 사 읽었다. 리처드 교수의 강의실은 특별했다. 간편한 티셔츠나 청바지 차림의 교수는 계단식 큰 강의실에서 주제를 말한 후 여러 학생들을 앞자리로 불러 앉힌다. 자발적으로, 혹은 불려 나온 학생들은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었다. 교수가 질문하고 학생들이 답하는 형식의 그 강의는 ‘SOC 119’라는 유튜브 채널로 전 세계에 방송되며 교육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2017년엔 ‘그런 말은 하면 안돼요’라는 제목으로 인종과 피부색에 대한 수업을 진행해 미국 에미상 교육·학교 프로그램 부문 최고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는 뉴스도 들은 적이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인종과 성별, 문화 등 다양한 주제로 토론하는 가운데 학생들이 편견과 고정관념을 벗어나 타인의 관점으로 사고하도록 지도하는 강의다. 교수가 질문하고 학생이 답하는 혁신적인 방식인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이 5만 명이 넘었다고 했다. 리처드 교수는 한국문화와 한류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강의를 자주 해서 한국인들에게 매우 친근한 대표적인 학자다. 리처드 교수는 인생에도 ‘스위트 스팟’과 같은 지점이 있다고 말한다.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선택의 시점에 맞닥트리게 되고 그 중 인생 최고의 순간이 바로 ‘스위트 스팟’이라는 것.‘스위트 스팟’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에 있으며, 어쩌다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스스로 찾아내고 느끼는 것이라 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스위트 스팟’이라는 생소하고 익숙하지 않은 이 단어를 ‘타이밍(timing)’ 혹은 ‘줄탁동시(5550啄同時)’ 정도로 치환했더니 훨씬 더 이해가 잘 되었다.‘타이밍(timing)’은 어떤 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나는 순간, 적절한 좋은 시기를 뜻하는 것이고, ‘줄탁동시(5550啄同時)’는 병아리가 안에서 쪼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는 순간 알에서 깨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 역시 최고의 순간이라는 뜻 아닌가. 내 인생 최고의 순간, ‘스위트 스팟’은 언제나 열려 있다. 매 순간일 수도 있다. 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2025-04-02

세계 시조의 날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미국인 학생들이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30여 명 정도 되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학생도 있었다. 복도에는 한국인 여럿이 김밥, 잡채 등의 한국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놓고 손님 대접에 분주했다. 2018년 2월 8일, 미국 유타주 프로보의 브링검영 대학교(BYU)에서 개최된 ‘제5회 유타주 시조 낭송대회’. 세미나실을 가득 채운 청중 중엔 한국인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 학교의 미국인 학생과 교수님들이었다. 대회의 주최자이신 마크 피터슨 교수님의 짧은 개회사와 심사위원 소개 후 학생들의 시조 낭송이 시작되었다. 준비된 PPT엔 한글로 쓴 시조가 뜨고 학생들은 화면을 보면서 낭송했다. 시조 아래엔 영문 시가 있었다. 아마도 한글을 모르는 청중을 배려한 듯했다. 두 시간 남짓 발표가 진행된 시조 대회에서 학생들은 시종 진지하고 긴장한 듯했지만 심사하는 나로서는 얼마나 재밌고 감동스러웠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한국인 청중들도 감격의 웃음이 동반된 큰 박수를 치며 즐기는 듯했다. 당시 BYU에 연구교수로 가 있었던 나는 피터슨 교수님의 초청으로 가서 연구실도 하나 얻었고, 이따금 한국문학 강의도 했다. 연구년이 끝나 귀국할 무렵 시조대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조낭송대회는 유타의 한국 교포들께서 십시일반 기금을 모아 운영한다고 했다. 매년 4월 학기 말에 개최한다길래 참석 못해 안타깝다고 했더니, 피터슨 교수는 한국고전시가 전공교수가 심사하는 것이 학생들에게도 좋은 가르침이 될 거라며 행사 일자를 나의 귀국일 전으로 앞당기겠다고 했고, 나는 귀국 하루 전에 이 행사의 심사위원장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유타 한글학교 교장선생님과 재미교포 소설가와 같이 심사하고, 심사평과 수상자 발표는 내가 하였다. 학생들의 시적 착상과 이미지는 발랄하고 참신하였고, 시조에 대한 지식도 꽤나 단단해 감동적이었으며, 한복을 갖춰 차려입는 성의도 고맙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시조의 율격을 제대로 이해하는 학생을 가려 뽑아 수상자로 정했다. 그때 피터슨 교수의 개회사가 뜻깊었다. 일본의 정형시 하이쿠(俳句)가 미국에 알려져 창작 유행이 있다면서, 한국의 시조도 전통과 역사가 하이쿠에 밑질 것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 시카고의 한인단체 세종문화회 중심으로 시조 창작이 매우 활발하며, 심지어 우주선에 시조를 실어 보냈다 했다. 피터슨 교수는 이 시조 대회를 시카고의 시조 유행과 접목시키고 싶다고도 했다. 그 말이 현실이 될 줄이야…. 지난달 피터슨 교수님의 유튜브 채널 ‘우물 밖의 개구리’로 2월 7일, ‘세계 시조의 날(World Sijo Poetry Day)’ 선포식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이 기념식을 유튜브로 전 세계에 중계했다. 왜 2월 7일일까 궁금했는데 고려말 시조 시인 역동 우탁 선생의 기일이라는 것이었다. 족보 연구의 대가이신 피터슨 교수님다운 발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2006년 8월 현대시조 100주년 기념식에서 ‘겨레 시 시조가 세계만방에 천둥처럼 울리게 하겠다.’는 선언이 무색한 날이었다.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날이기도 했다.

2025-03-27

시험 치는 날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주인공은 영화감독 데뷔를 위한 시나리오를 쓴다면서도 잠만 잔다. 낮 12시가 넘어 일어나서 밥을 차려 먹은 후에도 노트북에 다가가기가 힘들다. 평소 잘하지 않던 방청소를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히 청소하고 하릴없이 선풍기를 분해해서 깨끗이 닦는다. 더 이상 할 일이 눈에 띄지 않으면 그제서야 노트북 앞에 앉는다. 노트북을 켜고도 글자 폰트만 매만지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낮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밤이면 친구들과 술자리. 그러기를 며칠째 반복하고 나서야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극한직업’의 영화감독 이병헌이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 ‘힘내세요, 병헌씨’의 첫 부분이다. 어쩜 나랑 저리도 똑같을까 공감하면서 피식 웃었다. 논문 마감일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하는 습관이 있었다. 평소 어질러진 연구실을 대청소하는 일이다. 책장에 마구 꽂힌 책들을 장르별로 가지런히 챙긴다. 누워있는 책들도 일으켜 세운 후 물걸레로 책장의 먼지를 깨끗이 닦는다. 심지어 책상의 방향을 다시 바꿀 때도 있다. 넓지도 않은 연구실에서 그것은 거의 대공사에 가깝지만 강행한다. 창문 쪽으로 놓인 책상을 입구 쪽으로 틀어 돌려놓거나, 혹은 좌우를 완전히 바꾸기도 한다.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낑낑대며 책상을 옮기고 나면 컴퓨터며 프린터 등의 부속품들도 자리를 바꾸게 되고 전선을 뺐다 꽂는 등 꽤나 작업시간이 걸린다. 책장 가까이 한 켠으로 배치되었던 소파의 위치도 연구실 가운데로 옮겨 보는 등 지치지 않고 일을 키우고 벌인다. 바닥 청소까지 멀끔하게 하고 난 후 재정리된 연구실을 휙 둘러보면서 잠시 만족감을 느낀다. 아차 할 일이 있었지 그제야 깨닫고 책상 앞으로 다가가 컴퓨터를 켠다. 더 이상 피할 데가 없다. 이제부터 논문을 쓰자며 또 밤샘이다. 자주 이런 일을 벌이니 영리한 조교는 잘도 알아챈다. 교수님 논문 쓰셔야 되죠? 작년 11월부터 한국어교사 자격증을 위해 인터넷 수강을 한다. 매주 8과목씩 15주를 듣는다. 수강하기만도 벅찬데 쪽지시험과 과제 제출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두 번의 시험이 가장 큰 스트레스다. 욕심 내지 말고 설렁설렁해서 80% 정도 성적이면 된다며 마음먹었으나 그렇지 않았다. 비록 오픈북 형식이지만 시험은 시험이다. 시험일이 다가오자 긴장되고, 들었던 강의를 다시 들으며 시험공부라는 걸 하게 된다. 시험일이 닥치자 예전의 습관이 도졌다. 시험 친다고 컴퓨터를 켜 놓고는 책상 주변을 청소한다. 둘러보니 책장 정리가 필요하다. 이 방 저 방 흩어져 함부로 섞여있는 책들을 옮긴다. 내 책과 남편 책, 손주들의 책들이 제 자리를 찾아 앉는다. 주방으로 가 그릇장을 활짝 열어젖혀 잠시 멍하게 바라보다가 두 손 걷어붙이고 모두 꺼내 일을 벌인다. 화장실 바닥을 박박 문지른 후 대대적으로 물청소를 한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까지 하고 나서야 젖은 손을 털면서 컴퓨터로 돌아온다. 아침에 켜 둔 컴퓨터 모니터엔 ‘장시간 사용하지 않아서 로그아웃되었습니다.’라는 사인이 떠 있다. 깊은 밤이다. 밤을 꼬박 새워 시험을 치고 나니 새벽 창밖이 푸르다. 예전 연구실의 창밖 풍경과 어쩜 저리도 똑같을까.

2025-03-19

무방수날 장담그기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장담그기는 김장 문화와 함께 한국만의 독창적 문화로 2018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됐고, 작년 2024년 12월 3일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콩을 발효해 먹는 문화권 안에서도 한국만의 독특한 장 제조법이기에 중국과 일본보다 먼저 등재되었다. 장담그기는 콩을 주재료로 메주를 만든 뒤 이를 발효시켜 된장과 간장 등을 만드는 전통적인 과정을 이르는 것으로, 한국 음식의 기본양념인 장을 만들고 관리·이용하는 과정의 지식과 신념·기술을 모두 포함한다. ‘장’은 한국인의 일상음식에 큰 비중을 차지해 왔으며, 가족 구성원이 함께 만들고 나누어 먹는 문화가 세대 간에 전승돼 왔다는 게 등재 사유였다. 우리나라의 장 문화는 거의 1년이 소요되는 그야말로 슬로푸드의 끝판왕이다. 초여름에 콩을 심고, 늦가을 서리가 내리기 전에 거두어 말린 뒤 입동 무렵에 메주를 쑨다. 콩을 불려 충분히 무르게 삶아 으깬다. 메주틀로 네모 반듯한 메주를 만들어 볏짚으로 묶어 두면 곰팡이균이 만들어지는데 겨우내 처마 끝에 매달아 바싹 말린다. 이월 좋은날을 가려 장담그기를 한다. 먼저 항아리를 깨끗이 씻어 물기를 말린 뒤 속에서 볏짚을 태워 살균소독한다. 메주를 씻어 말리고 소금물을 계량해 준비한다. 메주를 항아리에 담고 물을 붓고, 말린 고추와, 말린 대추, 옻나무, 숯을 적당히 넣고 가늘게 자른 대나무를 항아리 안에 걸쳐 떠오르는 메주를 눌러둔다. 볕 좋은 장독대에서 두세 달이 지나면 간장과 된장을 분리하는 장 가르기를 한다. 이렇게 두 가지 장을 만들고, 지난해에 사용하고 남은 씨간장에 새로운 장을 더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내려와 오래 묵힐수록 좋다고 했다. 몇 백년 묵은 간장을 간직한 종가도 있다고 들었다. 작년 흰머리소녀 모임, 유복혜 선생님께서 ‘장은 무방수날에 담근다.’고 하셨다. 무방수날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는데, 알고 보니 이월의 ‘손없는 날’이었다. 귀신이 날마다 동서남북 4방위로 다니며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고 해코지를 하는데, 9와 0으로 끝나는 날짜에는 하늘로 가서 어디에도 없다고 믿었고 그날이 바로 ‘손없는 날’이다. 따라서 ‘손이 없는 날‘은 무슨 일을 하여도 탈이 없어 꺼리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고, 결혼, 이사, 개업 등 인간의 중요한 행사 날짜를 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 중 특히 이월의 초아흐레와 열흘을 무방수날이라고 하는 거였다. 세시풍속사전에 의하면 특히 무방수날에 담근 장은 맛이 좋다고 했다. 지난 주말이 무방수날이었고 내 생애 첫 장담근 날이었다. 청도의 유복혜 선생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소금으로 소금물을 만들어, 잘 소독하신 항아리에 메주를 넣고 붓는 참 짧은 공정만이었지만 첫 시도는 설레고 값졌다. 함께한 이솔희 선생님은 이 의미있는 행사를 유튜브에 올렸고, 같이 간 손녀는 일기에 적을 거라고 했다. 매일 햇볕을 가려 받는 유 선생님의 수고가 맛난 장을 만들어 낼 것이다. 석 달 뒤 장가르기를 위한 또 한 번의 청도나들이가 기대된다. 평생 여기저기서 된장을 얻어먹던 내가 어쩌면 올해부터는 된장을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25-03-12

나이 드는 것은 성장하는 것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영화 감상이 취미인 나는 영화를 짧게 편집하며 소개하는 유튜브를 여러 개 구독하고 본다. 더러는 이미 봤던 영화를 회상할 때도 하고, 보지 못했던 영화를 만날 때도 있다. 유튜브에서 그렇게 봤던 영화를 TV로 다시 볼 때도 많다. 20년도 더 전에 책으로 봤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Tuesdays with Morrie)을 그렇게 다시 만났다. 그 당시 워낙 베스트셀러였기에 사 봤던 책이었는데 거의 동시에 영화로 나온 줄은 몰랐다. 책의 저자인 미치 앨봄(Mitch Albom)처럼 나도 일에 미쳐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던가 보다. 미치 앨봄은 미국 브랜다이스대학교의 사회학과 교수인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 교수의 제자다. 둘의 관계는 제자는 교수를 코치라고 부르고, 교수는 제자의 애칭을 부를 정도로 매우 돈독했다. 미치는 대학 졸업 후 성공한 스포츠 칼럼니스트로 정신없이 산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나 프로포즈도 못할 정도로 바쁜 일상을 사니 자신에 대한 성찰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그때 우연히 본 유명 TV 프로그램인 ‘나이트라인’에 나온 모리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모리가 루게릭 을 앓고 있으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미치는 모리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했다는 죄책감 속에 모리를 찾아간다. 16년만에야 다시 만난 교수 모리는 미치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고 눈물로 환영한다. 그 후 화요일마다 인생에 대한 둘만의 수업이 시작된다. 미치는 직장으로부터 해고 위협을 받고, 애인의 결별 선언을 감수하면서도 이 수업을 위해 14주나 비행기를 탄다. 세상, 자기 연민, 후회, 죽음, 가족, 감정, 나이 드는 두려움, 돈, 사랑의 지속, 결혼, 문화, 용서, 완벽한 하루, 작별 인사를 주제로 매주 강연과 토론이 펼쳐진다. 제자 미치가 모리 교수와의 그 수업을 책으로 옮겼고, 모리 교수가 죽은 후 출간되었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책장에서 찾았다. 과연 읽은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내용이 까마득하다. 오래전 책이었기 때문일 테지만 40대에서 거의 30년 가까이 지난 70살의 내게 공감되는 내용은 확연히 다르다. 감동과 공감의 포인트가 나이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24시간만 건강해진다면?”이라고 묻는 미치에게 말하는 모리의 완벽한 하루는 이런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롤케이크와 홍차로 아침을 먹고, 수영하고, 친구들과 점심 먹고, 이야기하고 싶어. 그리고 산책하면서 자연을 느끼고 저녁엔 레스토랑에서 맛난 음식을 먹고 멋진 파트너와 춤을 출 거야. 그리고 집에 와서 깊고 달콤한 잠을 자는 거지.” 죽음에 대한 성찰도 곱씹게 된다. 누군가의 말처럼 죽음은 외투 속의 손수건처럼 아주 가까이 있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누군가를 용서하고, 배려하고 활발하게 감정을 나누며 인생 최후의 시간을 가장 아름다운 시간으로 만든 모리 교수를 배우고 싶다. 가장 가슴에 와서 콱 박히는 말은 이것이다. “나이가 드는 것은 쇠락이 아니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좀 늙었으면 하는 사람은 왜 없는 거지?”

2025-03-05

무해력(無害力)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손자가 얼굴에 잔뜩 불만과 울분을 담은 채로 내 방으로 왔다. 왜 그러냐고 깜짝 놀라 물었더니 우왕 울음보 먼저 터뜨렸다. 뒤따라 온 제 사촌누나가 사연을 얘기해 주었다. 가지고 온 토토로인형을 바다에 빠뜨렸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으며 더 크게 울기에 일단 말없이 등만 토닥이며 울음이 그치길 기다렸다. 지난 달 1월 나의 칠순 기념으로 베트남 하롱베이 크루즈 여행 때 있었던 대사건이었다. 저희 방 뱃전의 테라스에서 가지고 놀던 인형이 바다로 떨어진가 보았다. 울음이 잦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었다. 배를 돌려 그 자리에 가서 인형을 건져올려야 한다길래 그건 불가능하다며, 다시 사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울음은 잦아들었으나 여전히 흐느끼면서 꼭 같은 걸 사려면 일본에 가야한다고 했다. 아마 지난여름 일본 가족 여행 갔다가 사온 인형이었나 보았다. 잘됐다. 한 달 후에 할머니가 일본엘 가니 꼭 같은 걸 반드시 사다 주겠다고 약속하고서야 진정되었다. 그 후에도 베트남 얘기만 하면 잃어버린 토토로가 생각난다며 입을 삐죽거렸다. 8살 사내아이가 로봇이나 자동차를 가지고 놀아야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집에 와서 잘 때면 안고 자는 인형 몇 개를 꼭 갖고 왔다. 가져오지 않았을 때는 자지 않거나 저희 아빠가 밤중에라도 기어이 가져다 줘야 잠들곤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멀리까지 인형을 가지고 갈 줄은 몰랐다. 여동생에 사촌도 모두 여형제라 동화되었나 사내답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서울 손녀들도 대구에 올 땐 저희 가방에 몇 개의 애착인형을 반드시 가지고 오곤 했으며 대구 손녀는 보드라운 질감의 작은 인형이나 말랑말랑한 촉감의 작은 캐릭터 한둘은 항상 손에 들고 다닌다. 집집마다 동물인형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음에도 장난감가게에 가면 가장 먼저 발길을 멈추는 곳이 봉제인형 코너여서 빨리 커서 인형을 찾지 않을 날이 왔으면 바라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2025년 대한민국소비트렌드를 전망하는 ‘트렌드코리아2025’(김난도 외, 미래의 창)에서 손주들이 애착인형을 품에 안고 손에서 조물거리고 놓지 않으려는 심리를 알게 되었다. 무해력(無害力)이란다. 작고 귀엽고 순수해서 해롭지 않은 것이 가지는 힘. 사방에서 온통 공격해 올 것만 같은 이 험한 세상에서 작고 연약하고 귀여운 것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으니 그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힘이 된단다.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해악을 주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힘이 있단다. ‘앙증깜찍 무해력’은 작아서, ‘귀염뽀짝 무해력’은 귀여워서, ‘순수대충 무해력’은 서툴러서 무해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책가방에, 아니 어른들도 백팩에 작은 동물 키링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이 바로 무해력 때문이란다. 지난 주 일본여행에서 손자의 잃어버린 무해력을 되찾아 주려 동행한 어른들이 힘을 모았다. 몇 개의 쇼핑몰에서 인형을 찾으러 이리저리 뛰었고 어찌저찌 비슷한 토토로인형을 구해 주었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손자가 실망할까 마음 졸였더니 인형을 두 손으로 받으며 활짝 웃는다. 아이고 할머니가 색깔을 착각했구나. 작아서 더 이쁘네….

2025-02-25

여행 준비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여행 짐 싸기가 어려운 게 아니다. 미리미리 메모해 두고, 생각날 때마다 챙겨 바구니에 던져두면 된다. 갈아입을 옷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가 챙겨 넣어둔다. 떠나기 전날 종류별로 파우치에 넣어 큰 가방에 넣는 일쯤이야 뭐 그리 힘들 일도 없다. 여행 준비보다 나의 부재에 대비한 준비가 더 많다. 곰탕 끓이는 정도는 아니다. 여행 일수 만큼 남편의 아침식사로 야채샐러드, 두유, 찐계란을 밀프랩해서 냉장고에 가지런히 넣어 두면 된다. 원래 외식을 즐기기도 하고 혼자서도 잘 사 먹는 좋은 습관이 있는 남편이다. 평소에도 하루 한 끼의 아침 준비로 참 수월하긴 한 편이니, 구태여 신경 쓰는 것은 내 최소한의 정성을 표하는 셈이긴 하다. 집안 청소도 중요한 여행 준비 중의 하나다. 나의 빈자리에서 발견될 허술한 구석이 걱정되기도 해서 남편의 행동반경 외의 안방과 주방, 앞뒤 베란다 등에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꼼꼼히 쓸고 닦는다. 청소를 미리 당겨서 한다는 심정으로 정리하니 이게 여행 준비가 맞나 갸우뚱할 때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여행이든 최종정착지는 집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요, 가출일 거다. 내가 돌아왔을 때 말쑥한 집이면 더 좋지 않겠는가. 물론 그 사이 남편이 많이 어질러도 어쩌랴마는…. 여행 준비의 오랜 습관 중 하나는 손톱 정리다. 손톱에 이런저런 색으로 입히는 것을 매니큐어-잘못된 영어라고 했다-라고 했다. 요즘은 네일 케어라고 하던데, 뭐 둘 다 영어식 표현이라 좋은 우리말로 순화하면 좋겠다 싶긴 하다.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여름방학 때 손톱에 빨간 봉숭아꽃물을 들인 채로 개학해서 학교 갔다가 그 도발적인 빨간색에 지레 부끄러워 손가락을 오므려 못 폈던 기억이 있다. 예전엔 매니큐어를 미용실에서 했다. 미용실 바구니엔 오만가지 색의 매니큐어가 그득하니 넘쳤다. 장난 같이 발라보기도 하다가 서비스를 받고 싶으면 플라스틱 대야에 비눗물을 따끈하게 데워줬다. 그 물에 손가락을 담가 손톱을 불린 뒤에 큐티클을 제거하곤 했다. 빨간 손톱칠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가끔씩 일면 방학을 기다렸다. 수업이 없으니 어떠랴 싶었다. 한 해 여름, 빨갛고 뾰족한 긴 손톱으로 학교엘 갔다가 정교님을 만나 교수답지 않다며 힐책을 들은 적이 있어, 다시는 하지 않았다. 다만 퇴직하고 나면 내 맘대로 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마냥 하지는 않았다. 며느리가 어버이날 선물로 네일아트를 예약해 주어 으리번쩍한 손톱으로 호사를 한 기억 정도. 다만 여행 계획이 잡히면 왠지 손톱 정리를 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여행이 많은 해는 제법 오랫동안 손톱이 화려했다. 지난 달 베트남여행 때는 며느리가 권해 쨍하게 붉은 와인색으로 도발했다. 한 달 남짓 되었고, 와인색 손톱이 반 이상 남아있지만 또 다른 여행이니까 다시 손질해야지. 이번엔 점잖은 색으로 골랐다. 올리브색이라고 하는데, 손녀는 아보카도 같다고 한다. 여행이 일상의 일탈이듯 손톱을 꾸미는 게 내겐 가벼운 일탈인 듯하다. 손톱정리가 나의 여행 준비요 시작이다.

2025-02-19